소설리스트

#... 6 (26/34)

제 5 장 : 그의 사랑은 광기(狂氣)를 품고 있다 

#... 6 

혜연이 강유의 앞에서 눈물을 보이던 날에서 며칠이 지났다 

오전의 바쁜 시간이 지나고 나갔던 여주인이 오늘은 금새 돌아왔다 

두 테이블이 있던 손님중 한 테이블이 빠져 나간다 

찻잔을 들고 돌아와 컵을 씻어내고 있는 혜연의 옆에서 

여주인이 따듯한 녹차를 두잔 만들어내 한잔을 혜연에게 준다 

“그 사람 말에요...” 

카운터 안쪽의 높은 바텐 의자에 앉아있는 여주인이 조용히 하는 말이다 

혜연이 누구를 지칭하는지 몰라 쳐다보자 

통창 밖을 내다보고 있는 여주인이 담담히 말한다 

“혜연씨 남자친구..” 

“예..” 

강유는 요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카페로 데리러 오고 있다 

일주일중 2~3일은 그녀의 원룸에서 자고 

아침 일찍 수영을 갔다가 오피스텔로 돌아간다 

며칠전 그녀를 기다리던 강유와 남자 손님의 작은 다툼이 있은 후 

혜연의 부탁으로 요즘은 끝나는 시간에 맞춰 와서 

통창 밖의 나무에 기대어 그녀가 나오기를 기다리곤 한다 

“그 사람.. 작년에 찾아오던 그 남자 맞죠?” 

“기억 하세요?” 

“거의 매일 와서 혜연씨만 쳐다봤으니까.. 

그때부터 사귀고 있는가 봐요?” 

“예..” 

“그 사람... 소유욕을 담은 집착이 강한거죠?” 

“..........” 

“혜연씨 사생활을 알려는게 아니라.. 

그냥 혜연씨가... 내 옛날 모습과 조금 겹쳐져서 그래요” 

“사장님이요?” 

혜연과 눈이 마주친 여주인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쳐다본다 

어딘지 모르게 깊은 상처와 씁쓸함이 베어있는 미소이다 

늘 그렇듯 조용조용 혼잣말을 하는듯한 여주인의 말이 이어진다 

“내 몸에는... 문신이 있어요 

배꼽에서 반뼘쯤 아래라면 어딘지 알겠죠?” 

“..........” 

“이름 세 글자” 

“이름..이요?” 

“23살에 만나서 2년 가까이 사귀던 남자가 있었어요.. 

점점 지독해지는 집착 때문에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이사까지 했는데도 찾아내더군요” 

“..........” 

“부모님은 내가 대학교 2학년때 상당한 액수의 보험금만 남기고 

차사고로 한꺼번에 돌아가셨어요.. 

상실감 만큼이나 외로움이 컸기 때문이었는지 

처음엔 그 사람의 소유욕을 날 향한 사랑으로만 생각했었죠” 

여주인의 말소리는 마치 타인의 이야기를 하듯 담담하다 

조금씩 식어가는 녹차를 한입 마시고는 혜연의 얼굴을 잠깐 마주한 후에 

다시 통창 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세 번째로 도망친걸 찾아냈을때 내게 수면제를 먹이고 

자신의 이름을 직접 새겨 넣었어요 

내 몸에 문신을 넣기 위해 한참을 배웠다더군요” 

“.........” 

“그 사람에게서 벗어나려 이사만 7번을 했어요 

그렇다고 내게 폭력을 쓰거나 한건 아니에요 

내 주변의 남자들에게는 가차없이 폭력을 썼지만 말에요” 

“.......” 

“신경쇠약이 될 정도로 숨막히는 시간 이었어요” 

“.........” 

“옛날 얘기에요.. 지금은 거의 털어냈으니까” 

“그 분은 어떻게..” 

“....죽였어요..” 

“예?” 

“내가 죽을순 없잖아요” 

“........” 

“육체가 아니라 정신적으로 죽였어요 

자세히 말하긴 힘들지만 그 사람 피를 말리며 몰아 붙여서 

내가 서른다섯이 되던 해에 그는 결국 담장 높은 병원에 갇혔어요” 

“.........” 

“사랑이 소유욕을 품고 있는 정도가 좋아요 

소유욕이 사랑을 먹어버리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걷잡을 수 없는 관계가 되어버려요” 

여주인은 조용조용한 말을 마치고는 티백이 담겨 있는 머그컵에 

뜨거운 물을 받아 두 번째로 우려내는 녹차를 들고 

통창 앞의 가장 안쪽자리로 가서 앉았다 

혜연은 왠지 착잡한 마음에 기분이 가라앉아 버린다 

그녀가 끝날 시간쯤에 전화를 한 강유는 친구인 재진에게 잡혀 

술을 마셔야 할 것 같다는 말을 불만스레 하며 전화를 끊었다 

일이 끝나고 우체국에 들러 원룸으로 돌아온 혜연은 

윤정이 전해달라는 책을 보냈다는 전화를 민혁에게 해주었다 

며칠동안 민혁은 시골집에 내려가 있으면서 가끔 전화를 했었다 

어디서 들은건지 잠깐 동안 우스운 이야기를 해주던 민혁은 

조심스레 그녀에게 별다른 일이 없는지를 묻고는 통화를 마쳤다 

내일 부친과의 점심약속을 확인하는 전화를 걸어온 

비서실 강실장과 통화를 하고 있을때 오피스텔로 재진이 불쑥 찾아왔다 

도무지 친구들과 접촉이 없는 강유에게 온갖 투덜거림을 

쏟아내는 말에 모처럼 친구들과 술 약속을 하게 되었다 

학교 근처의 주점에서 뭉친 친구들과 소주를 마시는 자리에 

사내놈들의 왁자지껄한 말소리가 소란스럽다 

“야. 시운이 저 자식 저거 븅신 아니냐? 

사귄지 몇 달짼데 아직 제대로 된 키스도 못했대냐?” 

“시운아” 

“넵! 경영학과의 귀염둥이 김시운!” 

“기냥 질러버려~” 

“나도 그러구 싶어어!” 

“여자들 No는 절반은 Yes 야 임마” 

“전에 키스 조금 했다가 죽도록 꼬집혔단 말야” 

“꼬집고 싶을 만큼 테크닉이 꽝이었나부지” 

“크큭.. 진철이 빙고~!” 

“강유한테 테크닉 전수 좀 해달라 그래 

서문강유 키스 테크닉이 또 죽음이잖냐” 

“구재진. 너 강유랑 그런 사이였냐? 

니가 강유 키스 테크닉을 어찌 알고?” 

“강유가 고딩때 사귀던 기집애들이 강유놈 

마지막으로 만날때 하는 말이 뭐였는지 아냐?” 

“뭔데?” 

“흑. 마지막으로 키스 한번만 해줄래? 

흑.흑. 너의 키스는 정말 죽음이었어. 어흑!” 

근거도 없이 떠드는 개그스런 말과 몸동작을 보던 강유가 

옆자리에 앉은 재진의 뒷머리 통을 장난스레 한대 날린다 

소주잔을 입에 대고 있던 재진의 턱으로 소주가 줄줄 흘러내린다 

눈을 부릅뜬 재진이 앙탈을 부리듯 웅얼대고 있을때 강유의 핸드폰이 울렸다 

강유는 테이블에서 집어든 핸드폰의 액정을 보고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대로 내려놓는다 

재진이 궁금한 듯 강유의 핸드폰을 가져와 액정을 보고 있다 

“이슬이잖아?” 

“귀찮아..” 

받지 않아도 걸핏하면 전화를 하고 있는 한이슬은 

이틀 전 늦은 밤에도 강유의 오피스텔로 찾아왔었다 

짜증스레 돌아가라는 말을 인터폰으로 했더니 금새 번호키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한이슬 때문에 오피스텔 비번의 생일 앞뒤를 바꾸어놓아 에러가 나자 

할말이 있는 듯 몇번 초인종을 누르다가는 돌아갔었다 

강유의 핸드폰이 집요하게 계속 울려대고 있다 

“내가 받을까?” 

“놔둬” 

“뭐가 무서워 피해” 

재진이 핸드폰을 받아 잠시 통화를 하더니 강유에게 불쑥 내민다 

강유가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맥주를 한입 마신다 

“꼭 할말 있대. 안받으면 계속 하겠다는데?” 

재진에게서 핸드폰을 받아드는 강유의 얼굴에 짜증이 가득 담겨있다 

어딘가 클럽의 화장실에서 전화라도 하는건지 받아든 핸드폰 너머에서 

쿵쿵대는 빠른 템포의 음악이 작게 눌려 들리고 있다 

“왜” 

<오빠 진짜 그러기에요? 

할말 있다는데 왜 자꾸 전화 피해요?> 

“1분 안에 끝내” 

<그 언니는 뭐래요?> 

“누구” 

<정혜연씨> 

“누나가 뭐” 

<아무 말도 없었어요? 나 만났단 얘기 안해요?> 

“뭐?” 

<며칠전에 우리 만났는데> 

“며칠전 언제” 

<지난주 화요일 인가? 카페로 갔더니 

일찍 끝났대서 역 근처에서 만났어요 

정말 아무 말도 안했나보네? 웃긴다 진짜.. 

내가 하는 말이 그렇게 우습게 들렸나?> 

  

이슬이 말하는 날은 혜연이 강유 앞에서 눈물을 보이던 날이다 

핸드폰을 쥐고 있는 강유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강유의 표정과 말투가 잔뜩 굳어지자 옆자리에 앉은 재진이 

그의 얼굴을 살피며 조용히 듣고 있다 

“무슨 말 했어” 

<그냥.. 이 얘기 저 얘기> 

“똑바로 말해. 무슨 말 했어!” 

<뒷 짓거리 하는거 싫어서 당당하게 말했어요 

내가 강유오빠 좋아하니까 오빠 뺏어올 거라구> 

“말 했어?” 

<상대도 안된다는 듯 혼자 고고한척해서 

얼마나 자존심 상했는지 알아요?> 

“내가 너한테 키스한거 말 했냐 말야!!” 

<얘기 했어요. 그 언니는..> 

이슬은 뭐라 더 중얼거렸지만 강유에게는 들려오지 않는다 

그가 이슬에게 그렇게 진한 키스를 하고 안을뻔 했다는걸 

혜연이 알아버렸다는 사실만 그의 머릿속에서 거세게 울려대고 있다 

혜연을 향한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기도 버거워 

이슬의 감정 따위는 자신과 상관없다 생각했던게 실수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날 자신을 완강하게 거부하던게 한이슬을 만난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다른 여자에게 키스를 한 그의 입술을 더럽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녀는 또다시 그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망상이 점점 치달으면서 강유는 이슬을 향한 

격렬한 분노 때문에 주먹을 움켜쥐었다 

“어디야” 

<뭐가요?> 

“너 지금 어디야” 

통화내용으로 무언가 심각한 상황을 인식한 재진이 긴장된 얼굴로 강유를 보고 있다 

기다리라는 말로 전화를 끊어버린 강유가 거칠게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나가버리자 재진이 급히 따라나간다 

“왜 그래 임마” 

“그냥 안둬” 

“서문강유.” 

“그 기집애 죽여버릴거야” 

강유의 눈은 이미 이성을 던져버렸다 

재진은 그의 눈을 보며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 깨달았다 

강유가 저런 눈이 되었을 때는 누구든 반병신이 되거나 

심하면 더 큰 사고를 낼지도 모른다 

성큼 거리고 큰길 쪽으로 걷고 있는 강유에게서 한걸음 늘어뜨리며 

재진은 이슬의 단축번호를 급하게 찾아 눌렀다 

컬러링만 들려주고 전화를 받지 않는 이슬은 포기하고 재진은 선애에게 전화를 했다 

선애 역시 한참이나 컬러링을 들려주고서야 전화를 받는다 

“너 지금 이슬이랑 같이 있지?!” 

<어. 오빠도 올래? 우리 지금 ‘맥스’에 있어 

클럽 ‘맥스’ 알지? 강유오빠도 온다는거 같던데> 

“이슬이 데리고 빨리 거기서 나가.” 

<어!? 내가 좋아하는 음악 나온다!  

‘맥스’로 와서 2층으로 올라와 오빠~> 

시끄러운 음악소리 사이로 들리던 선애의 전화는 뚝 끊겼다 

두어 걸음 앞서가던 강유는 큰길 앞에 서있는 택시에 이미 올라타고 있다 

그리고 재진이 쫓아가기도 전에 출발해 버린다 

시골집에 전화를 한 혜연이 단순한 벨소리를 한참이나 듣다가 

전화를 끊으려할 때 모친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벨소리에 뛰어오기라도 한건지 모친의 숨소리가 크게 울린다 

“왜 뛰어.. 다시 할텐데” 

<와? 무신일 있노?> 

“일은.. 그냥 했다” 

<밥은 문나?> 

“어디 갔다오는데?” 

<오늘 승식아배 생일 아이가 

이적찌 거서 묵고 놀다 왔다> 

“술 마셨제” 

<쪼매 묵었다. 아픈데 없제?> 

“엄마는?” 

농한기라 먹고 놀기만 해서 몸이 둔하다며 혜연의 건강을 걱정하는 

모친과 한참 통화를 하다가 전화를 끊은 그녀는 

며칠 후부터 시작될 새학기 수강신청을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카페 일을 그만두게 되면 과외를 하나 더 구해야 할 것이다 

냉장고에서 귤 두개를 꺼내 껍질을 벗기고 있을때 재진의 전화가 왔다 

<누나 지금 어디에요?!> 

“집이에요” 

<지금 빨리 택시타고 xx역 앞으로 오세요!> 

“재진씨..” 

<빨리요! 강유가 이슬이 죽일지도 몰라요!!> 

“예?” 

<강유 눈빛이 장난 아니었어요!! 

강유놈 돌아버리면 나 가지고는 감당 못한단 말에요!> 

“대체 무슨..” 

<설명할 시간 없어요!! 4번 출구 앞에서 기다릴께요!> 

짐작되는 바가 있는 혜연은 급하게 옷을 갈아입고 나와 택시를 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지하철 출구 앞에는 재진이 없다 

들었던 출구가 맞나 확인하고 있을때 택시에서 내리는 재진이 보였다 

“일단 가면서 얘기해요” 

“이슬씨가 나 찾아온거 강유가 안거에요?” 

“맞아요. 무슨 일인지 나도 잘 모르겠지만 

강유가 이슬이 잡아 죽인다고 클럽으로 쫓아갔어요” 

빠른 걸음으로 앞장서 걷는 재진을 따라 걸으며 

혜연은 또다시 심장이 뛰어대기 시작한다 

네온사인 가득한 거리 안쪽으로 들어간 재진은 혜연의 옷자락을 잡고 

음악소리가 울려나오는 지하로 무작정 뛰어 들어간다 

갑자기 들어선 클럽은 음악소리 만으로도 정신이 없는데 

조명이 번쩍여 어디가 어딘지 하나도 모르겠다 

밖에서 대충 본 것 보다 제법 큰 규모의 클럽은 크롬으로 된 

낮은 난간이 둘러진 2층도 있었다 

“강유는 어디 있어요?” 

“모르겠어요! 찾아야죠!” 

목소리를 높여 말을 주고받으며 혜연과 재진이 클럽 내부를 

정신없이 둘러보고 있을때 2층에서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렸다 

혜연이 고개를 들어 맞은편 끝에 있는 2층으로 눈을 돌렸을때 보인건 

강유가 이슬의 목을 한손에 움켜쥐고 끌고와 어떻게 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난간 아래로 던져 버리는 모습이었다 

사람들 비명소리와 함께 이슬이 아래층 빈 테이블 하나를 부수며 떨어진다 

혜연의 옆에 있던 재진이 급하게 뛰어간다 

숨이 막힐 듯 뛰어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쓰는 혜연이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이 어딘지 찾고 있을때 

이슬이 떨어진 자리로 성큼 거리고 걸어가는 강유를 발견했다 

걸음을 떼야 하는데 그녀의 발이 못 박힌 듯 움직여지지 않는다 

테이블을 부수며 떨어진 이슬에게 다가가는 강유의 복부를 재진이 발로 차버린다 

뒤로 한걸음 밀렸던 강유는 재진의 가슴팍을 거칠게 걷어차 버리고 

재진은 한참이나 뒤로 밀려 나뒹굴고 있다 

그들의 주변으로 사람들의 소란스러운 움직임과 입 모양을 보면서도 

마치 음소거라도 시킨 듯 혜연의 귀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있다 

누군가에게 뒷통수라도 한대 얻어맞은 듯 번쩍 정신을 차린 혜연이 

급하게 그들에게 뛰어가는 사이에 강유는 눈도 제대로 못뜨고 있는 이슬의 

민소매 니트 옷자락을 움켜쥐고 일으키며 주먹을 불끈 쥐고 있다 

“강유야!!!!” 

이슬의 옷자락을 움켜쥔 채로 강유가 혜연을 돌아본다 

축 늘어진채 옷이 들어올려져 있는 이슬의 복부가 훤히 드러나 있다 

혜연에게서 고개를 돌리는 강유의 주먹이 뒤로 빠진다 

“안돼!! 강유야!!!”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