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장 : 그의 사랑은 광기(狂氣)를 품고 있다
#... 5
강유의 바이크는 혜연과 이슬이 나오고 있는
카페 앞 도로를 스치듯 지나쳐 금새 ‘아테나’에 도착했다
빠르게 온다고 왔는데도 4시가 넘어서고 있다
내부로 들어가며 카페를 둘러보아도 혜연이 보이지 않자
그녀를 놓쳐버렸나 싶은 강유의 얼굴이 찌푸러진다
보통은 끝나는 시간에서 10분 정도 지나야 퇴근을 하는 그녀이다
카운터 안쪽에서 무언가 차를 만들고 있던 여주인이 그를 쳐다본다
“혜연씨 찾아요?”
“예”
“오늘 좀 일찍 퇴근했는데..”
“몇시에요?”
“볼일이 있다고 1시 조금 넘어서 나갔어요”
혜연은 오늘 카페를 일찍 끝낸다는 말을 하지 않았었다
카페 밖으로 나오는 그의 얼굴이 잔뜩 굳어지며 혜연의 단축번호를 누르고 있다
“응.. 강유야”
<어디야?>
“원룸으로 가고 있어”
<누나 오늘 일찍 끝냈어?>
“카페로 찾아갔구나?”
<왜 일찍 끝냈어?>
“지금 어디야?”
<카페 앞>
“원룸에 가있어. 가서 얘기하자”
<어디서 원룸으로 가고 있다는 거야? 누구 만났어?>
“지하철역 근처야.. 금방 갈테니까 가서 얘기하자”
혜연은 강유가 무언가 더 묻기 전에 전화를 끊었다
무엇 때문에 일찍 카페를 나왔다고 해야 할지 막막해진다
거짓말을 하려면 강유가 그대로 믿게 제대로 해야 한다
어설픈 거짓말은 그가 금새 눈치채버리고 말거다
혜연이 몇가지 핑계거리들을 떠올리며 걷는 중에 민혁에게 전화가 왔다
차가 부서지던 다음날 전화를 했던 혜연에게
보험처리를 했다는 간단한 말로 그녀의 말을 봉해버렸던 민혁이다
<일 끝난 시간 맞지?>
“예.. 차는 어떻게 됐어요?”
<내일 찾아서 시골집에 갔다 와야해
근데 무슨일 있어요?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네?>
“어제 과외 갔더니 윤정이가 책하나 주던데”
<책?>
“민혁씨가 빌려줬다는 피츠제럴드 책이요”
<아.. 위대한 개츠비? 급한것도 아닌데...
그 녀석 뚜쟁이노릇 계속하고 싶은가보네>
“우편으로 보낼께요”
<혜연씨만 귀찮게 됐군>
“괜찮아요”
<내가 재밌는 얘기하나 해줄까?>
“무슨..”
<문학시간에 내가 희생정신에 관한 명강의를 하고 있는데
박윤정 고 녀석이 자꾸 딴지를 거는 거야
‘선생님 생각에 동의할수 없어요.’ 그러면서..
수업 나가다 말고 둘이 토론을 하고나니까..
아..! 지겹다고 엎어져 자는 애들도 많았어>
천천히 카페 쪽으로 걸음을 걷고 있는 그녀에게
민혁의 목소리가 밝게 핸드폰을 타고 넘어 오고 있다
<고 녀석 골탕 좀 먹이자 싶어져서 내가 그랬지
다음번 문학시간에 네 남친의 희생정신을 보여라>
“윤정이 남자친구요?”
<그놈아 학교는 조퇴를 하건 알아서 하고
홀홀단신 여고로 잠입해 6교시 문학시간에 오게 해라
안그러면 쪼만한 꼬맹이 네 녀석은 오늘
진도 못나가게 한 벌로 교내봉사 1주일이다>
“민혁씨도 꽤 짓궂네요.. 그래서요?”
<왔어. 담타고 들어와 용케 안 걸리고 교실로 왔지>
“남학생 혼자 여고를요?”
<그래. 7반 학생들 책상 두드리고 떠들기에 일단 조용히 시켰지
윗분들한테 걸리면 그놈아도 그놈아지만
여고로 남학생 불러들인 나는 제대로 징계감이잖아>
“진짜...”
<그나마 복도창이 불투명 창이라 밖에선 안보이니까
조용조용한 노래나 한곡 뽑고 가봐라 했더니...
그놈아가 노래는 못하겠대. 대신 마술을 하겠다더군>
“마술이요?”
<노래시킬걸 짐작 했는지 마술 준비를 해왔더라구
두세가지 간단한 마술을 하더니 마지막에
아무것도 없던 빈 상자에서 백합 한송이를 짠~>
“재밌네요”
<그걸 박윤정 책상에다 올려주더니
인사를 꾸벅하고 뒷문으로 가더군>
“그래서요?”
<그래서는 뭐.. ‘이봐 친구! 금남(禁男)의 집에서
무사히 탈출하기 바란다’하고 보내줬지>
민혁의 엉뚱함이 그대로 묻어나는 이야기에 혜연은 작게 웃음이 났다
음악이라도 듣고 있는지 핸드폰 너머에서는 부드러운
바이올린 연주 소리가 배경음악처럼 잔잔하게 들리고 있다
<나중에 꼬맹이가 그러는데 진짜로 찾아올 줄은 몰랐다면서
윤정이 별자리가 게자리라고 하더군
게자리 행운의 꽃이 백합이란 얘기를 한적이 있는데
그래서 그 꽃을 줬나보다고 볼이 빨개져서 말하더라구>
붙임성 좋고 자기표현도 제대로 하는 편인 윤정의 모습이 그려져
그녀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있다
어제 과외를 마치고 나오기전 민혁에게 전해달라는 책을 건네는
윤정은 귀여운 웃음을 담뿍 담은채 그녀를 보았었다
“귀여워요..”
<그치? 쪼그만 녀석들 하고 있는 사랑이 꽤 예뻐서
나중에 교감샘한테 추궁 당했어도 기분 좋았어>
“들켰어요?”
<순식간에 소문 쫙 나서 며칠 후에 취조 받았지>
“민혁씨도 상당히 괴짜에요”
<칭찬으로 접수.>
“직인(職印) 없는 접수증은 무효인거 알죠?”
<이제야 목소리가 좀 밝아졌네>
“........”
<별다른 일 없는 거지?>
“예.. 그만 끊을께요”
강유는 바이크를 돌려 역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혜연이 카페가 있는 길로 걸어올지 다른 길로 올지는 모르겠지만
중간에 마주치기를 바라며 역방향으로 가고 있을때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는 혜연을 발견했다
바이크를 세우고 혜연을 부르려던 강유는 그대로 입이 굳어졌다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는 혜연은 너무도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다
그 미소를 본게 언제인지..
그런 미소를 그 앞에서 보인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혜연의 부드러운 미소는 곧 거두어지며 전화를 끊었지만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그녀의 입가에 다시금 작은 미소가 살풋이 내려앉는다
별다른 모습이 아님에도 강유의 심장이 알 수 없는 감정으로 죄어온다
눈 앞에 그녀가 있는데도 그 미소를 안은채 어딘가로
사라져버릴 것 같은 불안함이 그를 초조하게 만들고 있다
그는 바이크를 움직여 턴을 한후 그녀의 옆쪽으로 갔다
“정혜연”
그가 낮게 부르는 소리에 혜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강유를 본다
갑자기 나타난 그에게 놀란 건지 누나라는 평소의 호칭이 아니라
그녀의 이름을 부른 거에 놀란 건지 혜연의 눈이 커져있다
“어긋나면 어쩌려고... 원룸으로 가있으라니까”
“타”
“오토바이 싫어하잖아”
“천천히 갈게 타”
“카페 식구들 주려고 붕어빵 샀어
이것만 주고 갈테니까...”
“내가 들어서 올려놔?!”
험상궂어 지는 강유의 표정을 보던 혜연이 도로 끝에 바짝 대고 있는
바이크 뒤에 올라타 그의 허리를 잡는다
붕어빵을 줘야한다며 카페에 들리자고 하는 혜연의 말을 무시하고
강유는 그대로 원룸까지 곧바로 가고 있다
혜연은 미처 끝내지 못한 핑계거리를 생각하느라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원룸 옆의 작은 주차공간에 바이크를 세운 강유는
단숨에 키를 뽑아내고는 혜연의 손목을 잡고 계단을 오른다
“붕어빵 많이 샀는데.. 손목 아파..
올라갈 테니까 손 좀 놔봐 강유야”
강유는 말없이 그가 가지고 있는 키로 문을 열고 들어선다
그의 커다란 손은 여전히 그녀의 마른 손목을 아플 만큼 꽉 움켜쥐고 있다
손목을 잡힌채 신발을 벗은 혜연이 강유의 손에서 손목을 비틀어 빼낸다
입고 있던 라이더용 패딩쟈켓을 벗어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던진 강유는 속에 입은 검정색 목티까지 벗어버렸다
강유의 움직임을 지켜보던 그녀가 걸음을 떼려하자
그가 혜연의 팔을 잡아당겨 코트를 벗겨내고 있다
“뭐하는 거야”
“안을거야”
“나 지금 많이 피곤해”
“안을거야. 지금.”
“강유야.”
그녀의 미간이 좁혀지며 굳어진 얼굴로 강유를 보자
그는 자신의 바지벨트를 풀던 손을 뻗어 혜연의 니트를
억지로 잡아 벗기려 하고 있다
혜연의 손이 단호하게 그의 손목을 잡는다
“이런 식으로 안는거 싫어하잖아.
나중에 강유야”
다시금 한 발짝 걸음을 떼는 그녀의 팔을 움켜쥔 강유가
내동냉이 치듯 혜연을 침대에 밀어버리고 그녀의 몸 위에 올라앉는다
그의 단단한 가슴팍을 거칠게 밀어내는 혜연의 손목을 잡은 강유는
그녀의 두손을 모아 한손으로 꼼짝도 못하게 움켜쥐고 있다
“싫다고 했잖아.”
강압적인 자세를 풀지 않고 있는 강유의 다른 손이
그녀의 의사를 무시하고 바지 버클을 풀러 끌어내리려 하고 있다
그의 손에 잡혀있던 두 손을 비틀어 한쪽 손을 빼낸 혜연이
있는 대로 힘을 실어 그의 가슴팍을 밀어냈지만 강유는 꿈쩍도 않는다
잠깐의 몸싸움으로 숨소리가 흐트러지는 그녀의 입술에
강유의 입술이 거칠게 부딪혀온다
부드러움이 전혀 없는 강압적이고 거칠기만한 키스였다
고개를 돌려 버리는 혜연의 목덜미로 내려온 그의 입술이
그녀의 목에 이빨을 박아 깨물고 빨아들이는 힘으로 인해 금새 아파온다
그의 손이 다시 혜연의 바지를 억지로 벗겨내려 하자 그녀는
한손에 잡히지도 않는 강유의 손목을 잡아 떼어내려는 움직임이 필사적이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안는걸 무엇보다 싫어하는 그녀라는걸 강유는 알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힘을 풀지 않고 돌처럼 단단한 팔로 그녀를 꼼짝 못하게 누르고 있다
혜연의 허리를 한팔로 감싸 들어 기어코 바지를 벗겨버린 강유가
이미 벨트가 풀러져 있는 자신의 바지를 내리려다가 움직임을 뚝 멈춘다
눈물 한방울이 그녀의 눈가를 타고 흘러내리고 있다
흐느낌도 없는 조용한 눈물이 혜연의 눈에 고여 있다가
눈을 감으며 고개를 돌려버리는 그녀의 콧등을 타고 흘러내려 시트 위로 떨어진다
“왜..울어”
“........”
“울지마”
강유는 그녀의 눈물을 본적이 없다
근육통을 동반한 열감기로 끙끙 앓을 때도 눈물 한방울 안흘리던 그녀다
가끔씩 모친 이야기를 할때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듯
목소리가 떨려나오고 있을 때도 끝내 울지는 않았던 그녀다
심지어 극장 안에 여자들의 훌쩍임이 가득찬 새드 영화를 볼때조차 울지 않던 그녀다
그녀의 눈물은 그대로 강유의 심장에 파고들어 상처를 내고 있다
“미안해.. 잘못했어”
“.........”
“제발 울지마!”
그저 안고 확인하고 싶었던거 뿐이었다
혜연에게 깊이 들어가 그녀가 어딘가로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불안한 마음을 채우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녀의 강한 거부가 강유의 마음에 불안을 더해 그를 거칠게 만들어 버렸다
몸을 옆으로 돌아누운 혜연은 여전히 흐느낌 없는 눈물을 한방울 더 떨어뜨린다
그는 이불을 당겨 덮어주고 혜연의 몸을 바로 눕혔다
그녀의 가는 손목이 얼굴로 올라가 눈을 덮어 가리고 있다
강유는 혜연의 손목을 떼어내고 얼굴을 감싸
엄지손가락으로 조심스레 그녀의 눈물을 닦아냈다
“누나..”
“혼자 있고 싶어”
“혼자 두고 싶지 않아”
“혼자 있게 해줘”
“나한테 화내도 돼
잘못한거 아니까 화내”
“너한테 화난거 아냐
오늘은 혼자 있게 해줘”
“........”
“부탁이야”
그리 쉽게 눈물이 터져버린건 그녀가 오늘 지쳐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겁탈이라도 하듯 강압적으로 그녀를 안으려는 강유에 대해
화가 났다기 보다는 막무가내로 자신의 감정만 밀어붙이는 모습에
원망스러움이 더 컸던 눈물이었을 것이다
혜연은 곧바로 눈물을 그쳤지만 강유는 그녀의 뺨을 조금 더 쓸어내린다
고집을 부릴지도 모른다 생각했던 거와는 달리 그는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섰다
“오피스텔 가서 전화할게”
강유는 옷을 입더니 여러 감정을 담은 눈으로 그녀를 보다가 나갔다
그녀의 원룸 안은 마치 아무도 없는 듯 한참동안 무거운 침묵만이 내려앉아있다
혜연은 따듯한 물로 샤워를 하고 붕어빵 두어개를 더 먹었다
혼자서라도 저녁을 차려 먹어야 할텐데 모든게 귀찮기만 하다
국화차를 만들어 침대 옆에 기대앉은 그녀가 손에 쥐고 있는
차가 식는 것도 모르고 멍하니 앉아 있을때 강유에게서 전화가 왔다
<뭐하고 있어?>
“국화차 마셔”
<나 때문이야..>
“뭐가”
<나 때문에 우울해서 국화차 마시잖아>
“안 그래..”
<누나한테 해주고 싶은 얘기가 있어>
“말해봐”
혜연이 귀를 기울이고 있음에도 강유는 잠시 말이 없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선뜻 말을 못 꺼내는 건지 궁금해진다
<우리엄마..>
“.......”
<사고 아냐>
그녀의 입으로 향하던 머그컵이 무릎위로 다시 내려진다
강유의 표정이 보이지 않으니 무슨 뜻인지 더욱 짐작이 가지 않는다
잠깐 동안 조용하던 핸드폰 너머로 그의 희미한 한숨소리가 새어나온다
<가족들도.. 그 누구도 모르고 있는 얘기야
누나한테도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았던 얘기>
“.........”
<엄마는 사고가 아냐.. 일부러 떨어졌어>
“무슨 말이야..”
<산에 가던날.. 학교에 가는 나를 한참이나 꼭 끌어안더니
학교 갔다 오면 책상 정리를 꼭 좀 하래..>
“........”
<사고가 나고 엄마가 식물인간으로 누워있던 어느날
책상서랍 안쪽에서 엄마의 쪽지를 발견했어>
“........”
<뭐가 써있었는지 알아?>
“........”
<매발톱꽃 부탁하는 말>
“매발톱꽃?”
<엄마가 굉장히 아끼며 화분에 키우던 식물이야
‘이틀에 한번씩 저녁시간에 물을 줘야해.
매발톱꽃 잘 부탁해 강유야. 미안하다’..>
“.........”
<할말이 그렇게 없었을까? 죽겠다 마음먹고 산에 가면서
미련이 남는게 겨우 매발톱꽃 하나였을까?>
“.........”
<이미 시들해지고 있는걸 정원관리인 아저씨가 간신히 살려냈지
그리고 엄마가 식물인간으로 있는 동안에는 죽어라 돌봤어
왠지 그게 죽으면 엄마도 죽을거 같아서... 그런데...
7월 말쯤 핀 귀한 꽃이 지기도 전에 엄마가 죽어버리더라>
“........”
<말 한마디 못하고 누워만 있는 엄마라도
난 엄마가 그 매발톱꽃처럼 일어날 거라 확신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맥없이 죽어버리더라구>
“.........”
<그 뒤로 내가 그 매발톱꽃을 어떻게 했는지 알아?
햇빛도 안들어오는 서랍에 넣어놓고 매일 지켜봤어..
물을 못 먹어 말라비틀어지는 모습을...>
“...........”
<누나는 모를거야. 사랑하는 사람이 어느 날부터 없어지는거..>
강유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조용하고 차분하지만
그의 상실감이 그녀에게 그대로 와 닿아 가슴 한켠에 싸한 아픔을 남기고 있다
<누나가 날 버렸을때... 의미는 다르지만
누나도 그렇게 내 앞에서 사라져 버릴까봐 두려웠었어>
“...........”
<지금도 가끔씩 그날 꿈을 꿔..
비가 오던 그 놀이터에서 누나한테 버림받고..>
“..........”
<또 버림받고.. 같은 장면만 꿈을 꿔>
“마음아파 강유야.. 그만해”
<가끔씩 나는... 누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강유야..”
<그게 꼭 사랑한다는 말을 못들어서가 아니라
그냥 가끔씩 그런 생각이 들어>
“.........”
<그래도 상관없어. 내가 사랑하니까.
내가 억만배쯤 누나를 더 사랑한대도
억울하거나 하지는 않아>
강유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생각한 후로도 그녀는
그에게 사랑한다는 말은 한적이 없다
그 말이 왜 그리도 트이지 않는지 스스로도 잘 모르겠지만
가끔 이렇게 타이밍이 어긋나 버리기도 한다
지금 같은 상황에 하는 ‘사랑해’라는 말은 그를 초라하게만 만들 것이다
<나 싫증난거 아니지?>
“왜 그런 말을 해..”
<오늘 너무 강하게 거부하니까..>
“그런 식으로 안기는거 원래 싫어하잖아”
<오늘은 뭔가 달랐던거 같아서 그래
그래서 불안한 마음에 거칠어져 버렸어>
“........”
<낮에는 어디 갔다 온거야?>
갑작스런 질문에 혜연은 당황스러워 졌다
아직 완벽한 거짓말을 만들어 놓지 못한 것이다
조심스레 숨을 한번 들이쉬는 동안 강유는 조용히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유정이한테 갔다 왔어”
<왜?>
“꼭 줄게 있어서”
<그게 뭔데 나한테는 말도 없이 퇴근을 해>
“유정이 한테 번역을 급히 부탁하는 사람이 있어서..”
<누구?>
“카페 사장님”
<거기 주인이 무슨 번역?>
“그건 나도 모르지”
<뭔가 앞뒤가 어설퍼>
의심스런 눈빛을 하고 있는 강유가 보이는 듯 하다
지금의 대화가 서로 마주 보는게 아니라
이렇게 전화로 하게 되었다는 거에 혜연은 그나마 안심하고 있다
“저녁은 먹었어?”
갑작스레 말을 돌리는 그녀를 더 이상스레 생각할지 모르겠다
강유는 혜연의 질문에 대답이 없이 있다가 뜬금없는 질문을 하고있다
<아까 걸어오면서 통화한건 누구야?>
“언제?”
<내가 누나 옆에 바이크 세우기 전에 통화하던 사람>
“아..”
<누구야?>
“왜 그러는데”
<누나 친구야?>
“....아니..”
<혹시 그 자식이야?>
“..........”
<그런가 보네?>
“차 때문에 잠깐 통화한거야”
혜연의 대답에 강유는 한동안이나 말이 없다
그의 침묵이 혜연을 무겁게 누르고 있다
그녀가 강유의 이름을 부르려는 순간 그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음 아파>
“..........”
<화가 나야 하는데..>
“강유야..”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픈 건지 모르겠다>
“무슨 말이야”
<끊을께>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강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강유의 마지막 말보다 그의 모친에 대한 이야기가 그녀의 마음에 남아
그에 대한 안쓰러움을 더하고 있다
차라리 남기지 않았으면 좋을 쪽지를 남긴 그의 모친이 너무도 잔인하게 생각되어진다
중2라는 예민한 나이에 겪었을 그의 상처가 안타까워
본적도 없는 그의 모친에 대한 원망스러움을
그녀는 차게 식어버린 국화차와 함께 삼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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