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장 : 그의 사랑은 광기(狂氣)를 품고 있다
#... 4
카페의 여주인에게 미안함을 담아 일찍 퇴근할 것을 말한 그녀는
지하철에서 내려 도착한 진영그룹 건물을 들어서
안내데스크에서 받은 방문증을 걸고 비서실 앞에 도착했다
“2시에 약속한 정혜연입니다”
“안에 손님이 계셔서 기다리셔야 할 것 같은데요”
“예..”
데스크 옆쪽의 쇼파에 앉아 20분쯤 기다렸을 때
노신사 한분이 수행비서로 보이는 젊은 남자와 함께 나왔다
회장실로 들어간 여비서가 쟁반에 찻잔을 가지고 나오며
혜연에게 들어가라는 듯 문을 열어준다
쇼파 테이블 앞에 일어나 있던
그의 부친이 뒷목을 가볍게 두드리며 상석으로 옮겨 앉는다
“앉아요”
그의 부친은 쇼파에 깊숙이 들어앉으며 피곤해 보이는
눈을 잠시 동안 감았다가 뜨고는 무덤덤한 얼굴로 혜연을 보고 있다
“할말이 있다고?”
“예”
“해봐요”
“강유와 다시 만나고 있습니다”
“그래요?”
“그렇게 됐습니다”
“그렇게 됐다...”
“예”
“둘다 정신 못 차리고 있군..”
“.........”
“그래서. 결혼이라도 하겠다고 찾아온건 아니겠지요”
“결혼하지 않겠습니다”
“음?”
“강유와 결혼하겠다는 생각 하지 않겠습니다
만나는거 허락해 주십시오”
“그게 무슨 뜻이요”
“강유가 언제든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해도
방해가 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아가씨 말뜻은...
강유가 결혼하기 전까지만 만나겠다는 뜻이요?”
“예”
“그걸 내가 어떻게 믿지?”
“........”
“불과 며칠 전에 만났을때 아가씨는
내 아들을 다시 받아줄 맘이 없다했어요”
“예”
“내 아들놈 꼼짝없이 잡아놓고
지금처럼 나중에 딴소리 할지 모르잖소”
“그럴 일 없습니다”
“뒤로 딴 생각 하는 거라면 실수하는거요
아가씨와 결혼을 시키느니 우리 회사
안내데스크 여직원이 더 나을게요
적어도 이혼녀에 불임은 아니니까 말야”
그의 부친은 적당한 비아냥거림과 경멸을 담은 음성으로
일부러 혜연의 감정을 건드리려는 듯 말하고 있다
대화를 하면서 틀림없이 나오게 될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혜연은 담담한 얼굴로 그의 부친을 쳐다보았다
“다른 생각 같은거 없습니다”
혜연의 시선을 받아 응시하는 그의 부친은
그녀의 눈에 들어있을지 모를 거짓을 찾아내야겠다는 듯
빈틈없고 날카로워 보이는 눈매로
잠깐을 말없이 쳐다보다가는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연다
“아가씨의 둘도 없는 친구는 회사에서
제법 인정을 받기 시작하는거 같더군”
“.........”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전남편의 부친이 하는 공장이
알고 보니 우리 하청업체 이기도 하고 말이야”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혹시라도 내 아들을 꾀어 멋대로
혼인신고라도 할 생각이라면 미리 접어요
우리 집안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건 물론이고
난 아가씨의 나이 많은 모친 역시 용서가 않될게요
허황된 욕심을 내는 자식으로 키운게 죄일테니까”
“결혼 허락을 받으러 온게 아니라 했습니다
어른신 말씀이 지나치신 것 같네요”
“난 세치 혀가 내뱉는 말을 별로 신용하지 않아요”
예상했던 대로 그의 부친은 혜연의 말을
있는 그대로 들으려고도 믿으려고도 하지 않고 있다
여비서가 조용히 들어와 쟈스민 차를 내려놓고 나간다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찻잔에서 쟈스민 향이 부드럽게 올라오고 있다
혜연은 그의 부친을 망설임 없는 시선으로 바로 보았다
“믿어 달라는 말밖에는 드릴말씀이 없습니다”
“믿어 달라..”
“강유를 만난다는 이유로 제가 소중히 하는 것들을
망가뜨리는걸 원치 않습니다
어르신이 그걸 건드리지 않는다면
저도 강유의 앞을 막는 행동은 하지 않겠습니다”
“허락이 아니라 합의를 보자고 온게로군”
“허락을 구하러 왔습니다”
“진영그룹 차남 옆자리를 탐내는게 아니라면
그렇게 내 아들 옆에 있으려는 이유가 뭐요?”
“.........”
“말해봐요”
“........”
“목적이 있을게 아니요”
“다른 목적 같은건 없습니다”
“알수가 없군..”
“말씀드린 대로 입니다. 욕심 부리는일 없을테니
강유와 만난다는 이유로 다른 생각 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음.. 헛된 욕심은 내지 않겠다?”
“...........”
“그나마 임신할 걱정은 없으니 다행인가?”
혜연의 심장박동이 조금 빨라진다
무릎위에 가지런히 모아져있던 그녀의 손이 무릎 끝을 움켜쥔다
조심스레 심호흡을 했음에도 그녀의 목소리에 떨림이 묻어나온다
“어르신께서 걱정하실 일 만들지 않겠습니다”
“강유는 올 후반기에 유학 준비를 할 생각이요”
“.........”
“그 안에 어떻게든 내 아들이 아가씨한테 싫증내게 만들어봐요
아직은 이르지만 마음에 두고 있는 집안 여식이 있어요
강유와 동갑내기인데 자존심 강해 보이는 녀석이라
나중에라도 결혼 앞두고 지저분한 소리 오가는거 싫소이다”
“........”
“유학가기 전에 어떤 방법으로건 깨끗이 정리를 하겠다면
지금 만나는건 적당히 눈감아 주리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강유가 정 관계를 끊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결혼 후에 은밀히 다시 만나는건 관여 안하리다”
“........”
“지켜보고 있다는거 명심하도록 해요
나도 아가씨가 소중히 하는 것들을 건들고 싶지는 않으니까”
1층 데스크에 방문증을 반납하고 회전문을 나서는 혜연은
애써 그들이 나누었던 대화를 잊으려 노력하고 있다
비참하기 짝이 없는 대화였지만 그건 그녀가 자신과 모친을 지키는
최선의 방법 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녀는 가진자들의 비열함과 무분별하고 무자비함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혜연은 분명 ‘진영그룹 차남의 옆자리’를 욕심내고 있는게 아니다
그로 인해 그녀 자신과 그녀 주변이 다치게 되는걸 원치 않는다
그의 부친이 담담한 말투로 했던 말이 떠오른다
“강유가 정 관계를 끊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결혼 후에 은밀히 다시 만나는건 관여 안하리다”
강유를 그의 부친이 의미하는 관계로서 만나면서 다른 여자와
공유한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지금으로서는 그가 결혼을 하기 전에 그녀로 인해 굴절된 부분을 치유하고
병적인 소유욕과 집착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그가 결혼을 하고도 그녀를 놓지 못하게 되는걸 원치 않는다
강유가 유학을 간다는건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다
올 후반기라는 시간은 금새 그들 앞에 다가올 것이다
그의 부친은 인정하지도 인정할 수도 없겠지만
강유는 그렇게 빨리 혜연을 놓고 유학길에 오를 사람이 아닐 것이다
그때가 되면 그의 부친과 강유는 크게 부딪힐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건 그녀의 삶에도 어느 방향으로건 영향을 미칠것이다
그녀의 마음이 한없이 가라앉고 또 가라앉는다
혜연이 서문회장을 만나고 있는 시간에 강유는 모처럼 자신의 애마인
혼다 CB900을 타고 스피드를 내기에 좋아 익숙해진 외곽도로로 빠졌다
며칠전 내린 눈은 곧 날씨가 풀리면서 녹아 마른땅이 되었다
가끔씩 코너링을 하는 강유의 바이크는 땅에 닿을 듯 기울어진채
빠른 속도로 노면을 달리고 있다
경량의 민첩한 CB900은 노면의 느낌을 라이더에게 바로 전달해주는 편이다
DOHC 4기통 엔진을 최고출력 가까이 올려 질주하는 소리가
아스팔트를 치고 올라오고 있다
직선 코스가 길고 다니는 차량이 많지 않아 자주 애용하고 있는 도로는
한갓진 시간대라 그런지 있는대로 속도를 낼수있었다
차가운 칼바람이 무릎 속까지 스며드는 것 같아도 빠른 속도감으로 인한
긴장감과 흥분이 그의 교감신경을 자극하고 있다
얼마후 외곽도로를 빠져나와 주유소로 들어갔을때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의 부친이 또 무슨 일로 전화를 한건지 모르겠다
<집에 좀 안올게냐?>
“나중에요”
<집에도 좀 가끔 들리고
조만간 점심이나 같이 먹자>
“무슨 일 있으세요?”
<꼭 무슨일 있어야 아들 얼굴을 보는게냐?>
“아버지 바쁘잖아요”
<내 스케줄 비는대로 점심이나 한끼 먹자
나중에 강실장 더러 전화 하라고 하마>
“예”
전화를 끊는 강유의 얼굴이 조금 굳어진다
뚜렷한 목적 없이 점심을 먹자고 할 부친이 아니다
그와 혜연이 다시 만나는걸 알게 된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강유는 부친을 만나면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하다
두툼한 점퍼를 입은 나이어린 주유원이 그가 내민 지폐를 받아
거스름돈을 챙겨오며 그의 바이크를 부러운 듯 쳐다보고 있다
“이거 진짜 디자인도 죽음이다..
새거 산거에요?”
“그래”
“얼마쯤 해요?”
“천 조금 못돼”
강유의 시큰둥한 말에 고등학생 쯤으로 보이는 알바생의 눈이 동그래지며
그의 바이크를 보고는 한숨을 내쉰다
시계를 보니 혜연이 끝나는 시간이 되어가고 있다
강유는 튕겨내는 듯한 엔진소리를 내며 주유소를 나와 카페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혜연에게 낯선 핸드폰 번호의 전화가 왔다
그녀의 핸드폰 소리에 옆에서 잠을 자던 아주머니가 번쩍 눈을 뜨고는
못마땅하다는 듯 그녀를 쳐다보더니 다시 눈을 감는다
“예..”
<언니, 저에요>
“누구?”
<내 목소리 기억 못하네? 한이슬 이에요>
“아..”
<지금 어디에요? 카페로 갔더니 일찍 퇴근 했다네요?>
“지금 지하철로 돌아가는 중인데..
나 만나러 거기 간거에요?”
<어디쯤 인데요?>
“두정거장 남았어요”
한이슬은 혜연이 나오는 출구 앞에 서있었다
역 주변을 둘러보던 이슬은 굽이 높은 구두를 또각거리며 앞장서더니
1층 코너에 있는 넓은 카페로 들어가 앉는다
생머리였던 이슬의 머리는 적당한 웨이브를 넣고 부드러운 염색을 해주어서
지난번 호프에서 보았을 때보다 성숙해 보인다
“여기 녹차라떼 먹을만하네..
언니도 이거 시킬걸 그랬다”
“내가 오늘 좀 피곤해요
미안한데 용건만 들으면 안될까?”
작게 어깨를 으쓱하던 이슬은 잠깐 동안 혜연을 보며 말이 없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원룸으로 돌아가 쉬고 싶었다
혜연이 다시 입을 열려 할때 이슬은 별일 아니라는 듯 한마디 한다
“내가 강유오빠 좋아해요”
“.........”
혜연의 침묵에 이슬은 조금 더 새초롬한 표정이 된다
그녀의 이렇다할 반응이 없음에 기분이 상한 듯도 보인다
“둘이 다시 만난다면서요?”
“그래요”
“강유오빠가 언니 많이 좋아하는거 알아요
소유욕이나 독점욕이 강하다는 것도 알구요”
“.........”
“그 대상이 바뀌게 하고 싶다는 얘기 하려구요
난 소유욕 강한 남자가 좋아요
강유오빠가 고등학교때 죽인 고양이 얘기 알아요?”
“...알아요..”
“언니는 그 얘기 들었을때 어땠어요?
난 심장이 막 뛰더라구요
그렇게 지독한 독점욕 너무 멋지지 않아요?”
“.........”
“언니는 모르겠지만 난 그런 사랑으로 구속당하고 싶어요”
“나한테 이런 얘기 해봤자..”
“정식으로 얘기하고 시작하고 싶었어요”
“시작이요?”
“강유오빠 뺏어오기”
이슬은 마치 새로이 발견한 재미난 게임 이름을 이야기하듯
무언가 기대감과 흥분을 담은 얼굴로 싱긋 웃고 있다
혜연은 이 철없는 어린 친구를 상대하고 있다는 거에 갑자기 피곤이 몰려왔다
이슬이 더 보태지 않아도 오늘은 강유의 부친을 상대하며 지쳐버린 신경이
그녀에게 어서 집으로 돌아가 쉬어줄 것을 부탁하고 있다
“알았어요”
혜연의 알았다는 심플한 대답이 자신을 무시하고
상대도 않으려 한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이슬의 얼굴이 찌푸러진다
이 어린 친구는 강유를 모른다
몇 번의 만남과 주변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로만 강유를 만들어 그에게 덧씌웠다는 생각이 든다
“더 할말 없으면..”
“강유오빠 키스 정말 잘하던데요?”
“..........”
“언니랑 헤어졌을때 나랑 강유오빠...
거의 직전까지 갔었어요”
“..........”
“그렇게 뜨겁고 자극적인 키스는 처음이에요
키스 때문에 더 반해버렸으니까..”
혜연은 며칠전 한이슬 이라는 이름에 예민한 반응을 하던 강유가 생각났다
그녀가 알고 있는 강유는
맨 정신으로 다른 여자에게 키스를 할 남자가 아니다
굳어진 얼굴로 입을 다물어 버린 혜연을 보는 이슬의 한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있다
“언니가 좀 놀랐나보네”
“취했어요. 맞죠?”
“뭐요?”
“강유 말에요. 취했던 거죠?”
큰 비밀을 말해주듯 강유와의 키스 이야기를 하던 이슬은
그가 취했을거라 단정적으로 말하는 혜연을 쏘듯이 쳐다보고 있다가
자신이 계산을 한다는 말을 하며 계산서를 들고 일어났다
혜연은 카페 밖으로 먼저 나와 이슬을 기다렸다
계산을 하고 나오는 이슬이 그녀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훑어 내리고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피식 웃어버린다
그냥 지나쳐 버리기엔 상당히 불쾌한 비웃음이었다
“안 예뻐요”
“뭐가요?”
“눈, 코, 입, 빠지는데 없이 다 예쁜 이슬씨가
그렇게 웃으면 얼굴이 흉해 보여요”
“하..”
“강유 얘기에 성의 없이 상대했다 생각하지 말아요
나와 강유의 관계는 너무 복잡한 얘기라 설명하기 힘들어요”
“됐어요. 난 내 할말은 다 했으니까”
“그만 갈께요”
“지금 강유오빠가 좋아하는게 언니라고
너무 자만하고 있지 말아요
사람의 마음은 움직이는 거니까”
이슬은 다시금 구두를 또각거리며 도로 앞쪽으로 가더니
금새 택시를 잡아타고 가버렸다
원룸 방향으로 걸음을 떼는 혜연의 발걸음이 무척이나 무겁다
그리 상대하고 싶지 않은 사람을 하루에
두명이나 상대하며 지친 심신이 그녀의 걸음을 늘어뜨리고 있다
붕어빵 가판대 앞을 지날때 고소한 냄새가 코로 들어오자
그녀는 갑자기 통증이 느껴질 만큼의 허기를 느꼈다
혜연의 허기가 제대로 먹지 못한 점심 때문인지
무언가 텅 비어버린 것 같은 마음 때문인지 모르겠다
혜연은 지나던 걸음을 돌려 붕어빵을 파는 가판대 앞에 섰다
“아저씨”
“예~ 얼마나 드릴까요?”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어요. 그쵸?”
“물론이죠오~”
“지금 내 마음에도 내가 없나 봐요
붕어빵이 붕어는 빼고 팥만 품은 것처럼
나도 나는 없고 다른거만 잔뜩 들었나 봐요”
“예?”
“그냥 배고프다는 얘기에요..
붕어빵 3천원 어치만 주세요”
혜연은 원룸으로 돌아가는 길에 카페에 들러 요즘 미안한 일 투성인 여주인과
저녁타임 알바생들에게 주려고 붕어빵을 여유 있게 샀다
봉투 가득 담긴 붕어빵에서 고소한 냄새가 올라온다
붕어빵 한개를 꺼내든 혜연이 찬바람이 들어가지 않도록 종이봉투를 잘 접은후
바삭해 보이는 꼬리를 한입 베물었을때 강유에게서 전화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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