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 세상에 미련두는건 그녀밖에 없기 때문에...
#... 3
재진이 혜연의 카페에 들어가 있는 그 시간...
강유는 회장실의 쇼파에 앉아 손도 대지 않았던 허브티를 한 모금 마셨다
부친은 강유를 불러놓고는 임원회의가 끝나지 않아 마냥 기다리게 하고 있다
강유는 며칠째 수영도 안가고 혜연이 일하는 카페 맞은편의
건물 안쪽에 숨어 그녀가 일하는 카페를 지켜보고 있다
어차피 손바닥의 상처 때문에 수영장은 며칠 쉬어야 했다
늘 하던 수영을 하지 않아 그런지 그의 마음 때문인지 몸이 무겁다
그녀가 오늘은 10분도 넘게 카페 앞에서 여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는 매일이다시피 오는 남자 하나와 혜연이 잠깐 동안 웃으며
대화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해야했고
3일 전에는 민혁이 와서 잠깐 앉아있다 가는 모습 또한 그대로 지켜보기만 햇다
민혁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는 아직 마음의 정리를 못했지만
매일 카페를 오는 남자가 또 혜연에게 집적거리면
그녀에게 ‘강유’라는 남자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시켜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수염이 그게 뭐냐”
성큼 거리고 들어온 부친이 쇼파 상석에 앉으며 강유에게 한마디 한다
옷만 갈아입고 면도를 하지 못한걸 의식 못한채 와버렸다
항상 깔끔하고 단정한 모습을 보이길 원하는 부친이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
금새 수염이 자라는 편인 강유가 이틀이나 면도를 안했다
“왜 부르신 건데요”
강유의 시큰둥한 말투에 그의 부친이 날카로운 눈으로
잠깐 동안 말도 없이 쳐다보기만 하고 있다
“그 계집애 때문이냐”
“뭐가요”
“네가 요즘 망가지는거”
“누가 망가진다 그래요”
“채인게냐?”
“하실 말씀이 그 얘기에요?”
“그깟 계집애 하나 털어내지 못하고 무슨 꼴인게야
황변호사가 네놈 사람이냐?!”
“.......”
“네놈이 입다물라 그랬다고 내 귀에 안 들어 올 것 같아?”
“빌어먹을 놈..”
“영국에나 다녀와라”
“내가 왜요”
“너도 어차피 그쪽으로 유학 보낼 거니까
가서 형 만나고 며칠 푹 쉬다가 들어 오거라”
그의 형은 지금 영국에서 경영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아버지를 닮아 뭐든 완벽한걸 좋아하는 형은 그의 부친과 가장 잘 맞는 사람일 것이다
그럼에도 부친은 강유에게 더 큰 기대를 하는듯한 말을 자주하곤 한다
“싫습니다”
“가라면 가”
“싫다고 했습니다”
“데리고 노는 계집애였다며”
“그만 하시죠”
“털어내는데 얼마나 걸리겠냐”
“더 하실 말씀 없으면 일어날게요”
“네놈이 푹 빠져있던 계집애 라는거 알아
주제를 알고 적당한때 물러났으니 다행이지
누구든 다른 여자 하나 만들어라
언제 그랬냐는 듯 금새 잊혀질테니”
“그래서 죽었어요”
“뭐?”
“엄마가 그래서 죽은거라구요”
“무슨 말이냐”
“아버지 그 냉정함에 질려서 산으로 도망다닌거란 말입니다
풀어낼데가 없으니 산에다 하소연하다가!
도저히 더는 못들어 주겠으니까 산이 잡아먹어 버렸단 말입니다!!”
“버르장머리 없는 놈. 어디서 고함을 치는게야!”
“가보겠습니다”
강유는 벌떡 일어나서 그대로 회장실을 나와버렸다
부글거리고 끓고 있던 속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담담하게 대응하지 못했던 자신에 대해 자책하는 마음이 든다
부친 앞에서 감정을 내보이는건 위험하다
조금 더 참고 자신을 억눌렀어야 했다는 후회가 든다
부친이 모르게 하라고 그렇게 당부를 했건만 황변호사가 모두 보고했나보다
아버지의 사람이지 그의 사람이 아니니까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황변호사까지 부르게 만들었던 남자를 사정없이 때렸던 이유는 하나였다
그 남자가 혜연의 이름을 불렀던 것이다
강유는 택시를 잡아 혜연이 일하고 있는 카페 근처에서 내렸다
그녀를 지켜보는 시간동안은 그래도 견딜만하다
혜연이 카페 일을 마치고 원룸으로 돌아가 버리면 그는 또다시
그녀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에 피를 흘리는 심장을 움켜쥐고 오피스텔로 돌아온다
그러다가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하면 견딜수없이 답답하게 죄어오는
마음을 어떻게든 터트리기 위해 무작정 밖으로 뛰쳐나간다
그럼에도 그녀 앞에 나서지 못하는건 두렵기 때문이다
‘잘 들어. 정말 사라져 버릴거야
학교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원룸 정리해서 사라져 버릴거야
그냥 하는 말 아니니까 명심하는게 좋을거야’
혜연은 정말 그렇게 할수도 있을 것이다
휴학이건 뭐건 학교를 던저버리고 정말로 그가 찾을수 없는 곳으로
달아나 버릴지도 모른다는건 강유를 제일 두렵게 하는 일이다
어설프게 고향으로나 내려가 그가 찾아오게 만들 그녀도 아니다
제대로 맘먹고 숨어버린다면... 그래서 아예 얼굴조차 볼수없다면...
그는 정말로 미쳐버릴지도 모른다
재진은 끊고자 마음먹고 참아 눌렀던 담배를 꺼내 기어이 피고야 말았다
혜연이 조용히 일어나 카운터에서 자그마한 재떨이를 가져와 테이블에 놓는다
“그 사람을 때린 이유가 뭔지 알아요?
강유네 변호사까지 부르게 만든 사람 말에요”
“........”
“바에 앉아서 저 혼자 양주만 퍼대는 강유놈하고 있는데
옆에 앉아있던 남자가 핸드폰으로 통화를 하더라구요”
“........”
“혜연아. 그거 한마디 때문에 돌아버렸어요”
“혜연아?”
“혜연아! 남자가 핸드폰에 대고 그 이름을 불렀거든요
갑자기 돌아버려서 핸드폰을 뺏어 집어 던지더니
살벌하게 주먹질을 하는데.... 내가 아주 돌겠다니까요
세상에 혜연이란 이름이 누나 하나뿐이에요?”
재진의 작은 짜증과 걱정을 담아 길게 내쉬는 한숨소리는
그래도 혜연을 조금은 안심하게 했다
이렇게 강유를 걱정하고 챙겨주는 친구가 있다는게 고마워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유는 빈집 같다
주변에 사람이 없는게 아닌데도 그는 속이 텅 비어있는 빈집을 연상시킨다
“이게 뭔지 알아요?”
재진의 손에는 키 고리에 매달린 키가 한개 들려있다
앙증맞은 인형이 달려있는 키 고리는 강유가 그녀를 바이크에 태울때 본것같다
“강유놈 혼다 키에요”
“예..”
“내가 요즘 이거 지키느라 죽어요 죽어..
지금 같은 때에 오토바이 타게 하면 무슨 일 날지 모르잖아요
그래도 강유가 나는 어쩌지 못하겠으니까
성질만 내다가 밤만 되면 밖으로 뛰쳐나가는 거에요”
“당분간 주지 말아요”
“미치겠어요 아주.. 내가 오죽 답답하면 누나한테 왔겠어요”
“알아요”
“강유놈 집착하는거 알고 적당히 끝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나에요
누나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놈 집에서 알면 틀림없이 반대할거고
강유가 어떤 식으로 나올지 도무지 짐작조차 안가니까요”
“.......”
“누나한테 강유가 매일 여기 온다는 얘기한거 알면
나를 잡아먹으려 들거에요. 사라지겠다고 했다며요?”
“...예..”
“하도 답답해서 ‘내가 얘기 좀 해볼까?’ 했더니
미친 듯 화를 내더라구요”
이제야 강유가 그녀에게 찾아오거나 하지 않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역시 그녀를 놓은게 아니었다
혜연이 사라져 버리겠다고 내뱉은 말 때문에 겁을 먹은 것이다
그녀는 다시금 통창으로 된 창밖으로 건너편 건물을 쳐다보았다
맞은편 바로 옆쪽은 버스정류장 이다
성냥갑 같은 가판대가 하나있고 사람이 두어명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카페의 통창은 ‘아테나’라는 작은 영문이 쓰여진 투명창이라
아마도 카페 내부가 훤히 보일 것이다
하필이면 차를 만들어내는 기다란 카운터조차 통창 정면에 있다
강유는 건너편 건물에 몸을 숨긴채 그녀가 책을 읽거나 손님에게
차를 내는 모습을 멀리서나마 매일 지켜본 것이다
“나 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에요
이렇게 들어도 아무 도움이 못된다구요”
“당당히 싸워보지 그래요?”
“누구하구요?”
“쉽지는 않겠지만 강유네 부친 설득해서..”
“미워질 거에요”
“뭐가요?”
“그쪽 집에서 나를 상처내고 다그치는게 심해질수록
내 자신을 비참한 모양으로 들여다보게 만드는 강유가 미워질거에요”
“누나는... 강유를 사랑한게 아니었나 보네요..”
그녀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진의 말은 그녀를 작게 흔들었다
만약 재진의 말처럼 당당하게 부딪혀 모든걸 감수하며 강유와 결혼이라도 한다면
그때는 그가 병적인 집착과 소유욕에서 벗어나 편해질수 있을까?
“강유는... 빈집 같아요”
“빈집이요?”
“친구도 많고 재진씨도 있지만...
꼭... 빈집 같잖아요”
“빈집이라..”
“그게 안됐어서 내가 채워주고 싶었는데
나로선 역부족 이었던거 같아요”
“안 그래요.. 누나 하나면 되는 놈인거 알잖아요”
“나를 옆에 두고도 집착하잖아요
내가 강유를 더 빈집으로 만드는거 같아요
나 때문에 강유가 스스로의 소유욕에 파묻혀
병들고 있었던거 같아요”
담담한 표정과 차분하면서도 투명한 음성으로 말하는 혜연을 보며
재진은 강유가 그녀에게 집착하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녀의 외모는 평범에서 조금 더 예쁜 정도이다
그녀 정도의 외모는 대학가 주변 어디서든 쉽게 발견할 수 있을것이다
하지만... 혜연은 ‘무언가’ 있다
뭐라고 딱히 명명하기 힘들지만 그녀에게는 ‘특별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품어내는 향기를 품고 있다
아마도 그것이 강유를 소유욕에 미치게 만들고 있을 것이다
강유는 빠르게 몸을 움직여 건물 입구 안쪽으로 몸을 숨겼다
손님이 나간 테이블을 훔쳐내던 혜연이 정확히 이쪽을 보는거 같았다
평소에는 별다른 의미 없이 창밖을 보던 그녀가
조금전 그와 눈이라도 마주친 것처럼 똑바로 이쪽을 보았던거 같다
그의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다
이제 곧 그녀의 퇴근시간이 된다
언제까지 이렇게 지켜보는 걸로 만족할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의 한숨소리가 바닥에 앉아있는 자신의 신발 끝에 닿아 튕겨져 올라온다
“뭐 하는 짓이야”
건물 입구 안쪽에 아무렇게나 털푸덕 앉아있던 강유가 흠칫 놀라 고개를 들고 있다
그의 모습을 보는 혜연은 또다시 심장 한켠에 작은 통증이 온다
“누나..”
빠르게 벌떡 일어서는 강유는 며칠사이에 너무도 망가진 모습이다
하루만 방치해도 덥수룩해지는 수염이 지저분하게 자라있다
그 좋던 피부는 까칠하게 변해서 입술까지 잔뜩 트고 갈라져있고
며칠동안 얼만큼의 몸무게가 빠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화가 날 만큼 초췌해 보인다
“뭐 하고 있느냐고 묻잖아”
“난 그냥..”
“내가 뭐랬는지 잊었어?
계속 내 앞에 나타나면 사라지겠다고 했지”
“그게 아니라..”
“이런 짓 하지마 이제”
“누나..”
“이런다고 달라지는거 없어”
“보기만 할게”
“뭐?”
“지켜보기만 할께.. 그냥 보기만 할게”
눈썹을 찌푸리며 그를 쳐다보는 혜연을
강유는 눈을 깜빡이는 시간도 아깝다는 듯 쳐다보고 있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눈에서 조금씩 아래로 내려가더니
꾹 다물고 있던 입을 열고 말하는 혜연의 입술에 머물러있다
“안되는거 알잖아”
“.......”
“이러면 서로가 힘들어”
“.......”
“어떻게든..”
“키스하고 싶어..”
“뭐?”
“지금... 누나한테 키스하고 싶어서 미칠거 같아”
그의 시선은 여전히 그녀의 입술에 못 박혀 움직임이 없고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는 가는 떨림이 베어있다
강유가 손을 들어 냉기가 그대로 전해지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얼굴을 스치듯 감싸려 할때 혜연은 그의 손목을 잡았다
“하지마”
“키스.. 안해.. 닿지 않게 만져보기만 할게”
자신의 말이 어법상 맞지 않는다는 것조차 생각지 못하는가보다
강유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얼굴에서 살짝 떨어져 닿지 않으려 애쓰며
엄지손가락만을 움직여 혜연의 입술을 스치듯 훔쳐낸다
유난히 키스하는걸 좋아하던 강유였다
새가 부리를 부딪히듯 시도 때도 없이 버드키스로 입맞춤을 하다가
한번 제대로 시작하면 만족할줄 모르고 그녀를 놓지 않으려 했던 강유이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그녀의 아랫입술을 살짝 누른다
강유의 눈빛은 너무도 간절한 빛으로 그녀의 입술을 갈구하고 있다
혜연은 그의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줘 아래로 끌어내리며 손바닥을 보았다
손바닥에는 아직도 붉은 기가 남아있는 꿰맨 자국이 선명히 보인다
깨진 유리조각을 들고있는 것도 모르고
얼마나 주먹을 움켜쥐고 있었으면 저렇게 된건지 가슴이 답답해진다
“누나..”
“이제 오지마”
“보기만 할께.. 가까이 안가고 지켜보기만 할게”
또 다시 같은 대화가 이어지려한다
혜연은 강유를 어떻게 대해야 그가 그녀를 놓을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의 눈이 너무도 애절한 빛을 띄고 혜연을 응시하고 있다
“안그러면 나... 미쳐..”
“강유야..”
“미쳐버리고 말거야”
“언제까지 이럴거야... 대체 언제까지 감정정리 못하고
이렇게 미련한 짓을 할거냐 말야”
“지켜보기만 할께.. 가까이 다가가지도 않고
만지지도 않고.. 키스도 안하고.. 안지도 않고..”
그의 목소리는 점점 사그라지는 불씨처럼 작아지며 흐릿해지고 있다
언제 또 그를 허락할지 혹은 이제 더 이상은 그에게
허락되어지지 않을지 모를 것들에 대한 자각이 밀려오는 듯
그의 목소리가 차츰 희미해져간다
“내가 다른 남자를 만나도?”
“뭐!?”
“내가 다른 남자와 키스를 해도?”
“절대 안돼.”
“내가.. 다른 남자에게 안겨도?
그래도 그냥 지켜보기만 할수있어?”
“죽여버릴거야.”
그의 음성은 혜연이 말한게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라도 되는 듯
말 한마디 한마디에 힘을 줘 이를 악물 듯이 내뱉고 있다
“그건 그냥 지켜보기만 하는게 아니잖아”
“그 자식이 그래? 키스하고 싶대?!
그자식이 누나 안고 싶대?!”
갑자기 강유의 눈빛이 광기(狂氣)를 품은 듯 흉폭한 빛을 띄고 있다
그녀가 딱히 누군가를 지칭한게 아님에도 민혁에 대한 적개심으로 눈빛이 달라진다
어제 재진이 돌아가고 잠시후 여주인이 왔다
오후에 가끔씩 들어오는 손님에게 차를 내며 조심스레 쳐다본 길 건너편에서
과연 몸을 숨기고 카페쪽을 보고 있는 강유를 확인했지만 모른척했다
계속 모른척 내버려 둘수는 없다고 생각한 그녀가
단호하게 더 이상 이곳에 오지 못하게 하려 했던건데 대화는 요점을 벗어나고 있다
“계속 이렇게 찾아오면 카페도 그만둘거야”
“누나”
“이제 나 놓아버려”
“그러지마..”
“정혜연이라는 여자 정리해..
잊으려고 노력이라도 해보란 말야”
냉정한 목소리로 따라오지 말라는 말을 한후 그녀는 가버렸다
강유는 또 다시 그 자리에 털푸덕 주저앉았다
그녀를 잊으라고 한다
자신의 심장에 그녀밖에 담을수없게 만들어 놓고는 이제 잊으라고 한다
세워진 무릎에 두 팔을 걸친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강유의 얼굴 아래쪽 바닥에 비가 온다
한 방울 두 방울 그곳에만 비가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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