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 그녀는 그의 성경이고 그의 전존재이다
#... 6
지금 ‘희망의집’ 에서는 각자 마음에 드는 옷을 골라 입는 할머니들이
남사시럽다고 하면서도 재밌다는 듯 웃고 있다
연세가 아주 많거나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 외에는 모두들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활기차고 밝다
양로원에 있다고 우중충한 노인네들로 생각하면 실수하는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의상대여 회사를 한다는 민혁의 선배는 입기 쉽고 품이 큰 것들로 옷을
주고 갔지만 몸집이 좋은 몇몇 할머니는 맞는 옷을 찾느라 소란스럽다
모처럼 어색한 정장을 입은 할아버지들은 조금 머쓱한 얼굴들이다
마지막 연습을 하기 얼마 전 민혁이 남자들을 데리고 나타났을때
댄스교습소 회원들이라는 그의 말에 혜연의 얼굴이 더없이 환해졌었다
며칠전 그렇게 추웠던게 믿기지 않을 만큼 날씨가 풀리면서
밖에는 하루 종일 차가운 겨울비가 부슬거리고 내리고 있지만
공연장은 치마를 입을 할머니들을 위해 난방을 올려놔서 훈훈하다
잠시후면 그들만을 위한 행사가 시작될 예정이다
연말에만 잔뜩 선물을 싸들고 몰려와 사진이나 찍어대는 행사와는 다르다
사람에 굶주린 노인 분들은 그런 사람들조차 반가워 하지만
이건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것도 생색을 내는 사람들을 위한 것도 아닌
노인분들 자신을 위한 행사이기에 모두들 어린애처럼 들뜬 모습이다
공연장 한쪽 가장자리에는 기다랗게 상이 놓여져 있어서
춤을 추다 힘든 노인 분들은 앉아서 간단한 먹거리를 드실수있게 해놓았다
깔끔한 정장을 멋지게 차려입은 민혁이
청바지에 스웨터 차림인 혜연에게 혀를 끌끌 차고 있다
할머니들은 곱게 드레스풍 치마를 입혀놓고 막상 본인은 캐주얼이다
그래도 오늘은 행사라고 화장을 해준게 그녀의 성의 인가보다
“내가 이럴줄 알았다니까”
“또 뭐가요”
“그 친구는 오늘 안와?”
“강유요? 멀리 있어서 못 와요”
“그래? 안 그럴래도 내 입이 웃네?”
“웃지 말아요”
“이거 갈아입어”
“이게 뭔데요?”
“변신 드레스 입니다. 선배네 회사에서
내가 직접 골랐으니 꼭 맞을거야”
“됐어요.. 난 구경만 할 거에요”
“이런 이런... 할배들은 정 선생님과 왈츠 한번씩 출거라고
잔뜩 기대하고 있는데 배신 때리는 말을 하네?”
“공주 할머님들 계시잖아요”
“안되지.. 지금껏 제일 수고한 춤선생이
스타트로 시범한번 보이고 시작할 예정입니다”
민혁의 옆에 서있는 인자한 얼굴의 원장까지도
혜연의 옷차림은 지금의 행사에 어울리지 않는다며 거들고 있다
“오늘 정 선생은 누구보다 즐길 자격이 있어요
그동안 애쓰는거 보면서 미안하고 고마웠다우
내 특별히 원장실까지 비워줄테니 들어가서 옷 갈아입어요”
혜연이 정 선생이라는 호칭을 듣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일 것이다
쇼핑백을 쥐어주며 원장실로 보내는 민혁에게 떠밀려 들어온 혜연이 옷을 꺼내든다
크림색의 원피스는 종아리까지 넓게 퍼지며 내려오는 길이로
팔꿈치 위까지 소매가 있는 심플한 디자인이다
보관을 잘했는지 상당히 깨끗하다
드레스와 함께 같은색의 천위에 부드러운 레이스가 덧 씌워진 머리핀도 들어있다
공연장은 마룻바닥이니 구두 걱정은 안해도된다
난방은 들어오는 바닥이지만 노인 분들은 발이 시려울지 모르니
모양새가 조금 안 좋아도 흰 양말을 신게 했지만
혜연은 양말을 벗고 맨발로 원장실을 나왔다
원장은 어딘가로 가고 민혁이 기다리고 있다가 혜연을 보며 싱긋 웃는다
“겁나 이쁘네?”
“도무지 선생님 말투가 아니라니까”
“아까 그 촌시러운 끈보다 지금 그 머리핀이 오천배는 이쁘다”
“벌써 음악소리 들리네요”
“올라 갑시다”
공연장에는 벌써 부드러운 왈츠 음악이 커다란 스피커를 통해 흐르고 있다
한쪽 구석에 크리스마스를 보낸 트리가 여전히 반짝이는 전구를 달고 서있고
누가 준비했는지 모를 풍선들까지 달려있어 공연장의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다
몇 명씩 모여 앉거나 서서 이야기를 하고 있던 할머니들이
민혁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들어오는 혜연을 보고 박수까지 치자
혜연은 수줍어하는 건지 곤란해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민혁을 본다
강유는 도쿄 하네다 국제공항에서 대기예약을 하고
캔슬이 나게 될 좌석을 기다리고 있다
연말이라 그런지 비행기표는 남아 있는게 없다
부친의 역정에도 불구하고 강유는 중요한 볼일이 있다며 아침 일찍 혼자
공항으로 나온후 두 시간도 넘게 기다려서야 겨우 비즈니스 클래스의 좌석에 앉을수 있었다
인천 국제공항에 도착해 입국 절차를 마친 강유는
택시를 타고 곧바로 혜연이 있을 ‘희망의집’으로 향했다
틀림없이 행사 당일인 오늘 ‘희망의집’에 올 민혁을 생각하며
조바심이 나는 강유가 택시 기사를 재촉 한다
연말인데다 비까지 내리고 있어 차가 꽤 막히고 있다
시간은 때로 심술을 부린다
그가 10분 일찍... 또는 10분만 늦게 왔더라면 좋았을 상황이
될거라는건 모른채 겨우 ‘희망의집’에 도착한 강유는
아래층까지 부드러운 왈츠음악이 들리는 복도를 지나 성큼거리고 2층으로 올라갔다
연세가 70임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체력을 자랑하는 이상록 할아버지는
몸이 제법 날렵해서 왈츠스텝도 가장 잘 소화해냈다
결국 이상록 할아버지가 혜연과 첫 왈츠로 시범을 보이라는 의견이 모아진다
정중하게 서로 목례를 하고 혜연의 등과 손을 잡아 포즈를 갖추고는
음악에 맞춰 빙글빙글 돌아가며 왈추를 추는 모습에 주위 사람들이 모두 미소 짓고 있다
“완벽하세요”
“껄껄... 내가 왕년에 춤바람 좀 났었다니까”
“오늘 너무 너무 멋지세요
할머니들께 인기 많다고 무리해서 추시면 안되요”
“박여사가 나 찜해놨다우”
이상록 할아버지와의 왈츠가 끝난 후에는
어찌어찌 정해진 파트너들과 다함게 스텝을 밟았다
음악보다 한참 느린 스텝에 어설픈 턴이긴 해도 노인 분들은 생각보다 잘해주고 있다
왈츠 한곡이 끝난 후에는 무릎이 아프다며 엄살을 부리면서도 활짝 웃고있다
한쪽 벽에 서서 흐뭇한 얼굴로 노인 분들을 보는 혜연에게
교습소에서 온 젊은 남자 하나가 다가온다
“저기... 괜찮으시면 저랑 한곡..”
“저는 그냥..”
“안되지 최정훈씨. 두 번째는 나하고 추기로 혜연씨가 약속했다고”
언제 그들의 옆으로 온건지 민혁이 혜연에게 찡긋 눈짓을 해보인다
교습소의 젊은 남자가 실망한 얼굴로 돌아간다
혜연은 역시 제멋대로야 라는 표정으로 민혁을 보고 있다
“정 선생. 한곡 추실까요?”
“난 그냥 구경이나 할래요”
“야박하게 굴지 말고 한곡 상대해줘요”
“왈츠 스텝은 알아요? 대충 빙글거리고
돌기만 한다고 생각하면 안되요”
“그러니까 시험해 보라구요”
민혁이 혜연의 손목을 잡아쥐고 공연장 중앙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그녀가 곤란한 얼굴로 민혁을 보기만 하고 있자 그가 귀에 익은 노래를 한다
“아버지는 말하셨지 인생을 즐겨라~♬”
“그거... 학교친구 하나는 뭐라고 부르는지 알아요?”
“뭐라는데?”
“아버지는 망하셨지 인생을 즐기다~♬
어머니도 망하셨지 같이 즐기다!♪..”
“재밌네.. 우리는 망하지 않을 정도로만 즐겨보자구”
익살스런 노래가 재밌는지 큭큭 거리고 웃는 민혁이 혜연의
겨드랑이 아래 등에 가볍게 손을 얹고 왼쪽손을 바르게 펴 그녀의 손을 기다린다
왈츠는 여자의 허리가 아닌 겨드랑이 바로 아래쪽에 손을 넣어 등을 받친다
그 자세가 자연스러운걸 보니 아무것도 모르는건 아닌가 보다
등을 받친 그의 팔위에 혜연의 팔이 겹쳐 올려진다
혜연의 심장이 두근거림으로 조금 빨라지는 듯 하다
맞닿을 듯 가까이 서있는 민혁을 아무렇지도 않게 쳐다봐 지지가 않는다
민혁의 스텝은 상당히 정확하고 기교가 있는 편이었다
조금전 이상록 할아버지와 추던 때와는 달리
혜연도 제대로 스텝을 맞추어 본격적인 왈츠에 빠져들어 가기 시작한다
“제법이네요”
“혜연씨도”
“언제 배웠어요?”
“어지러워. 말시키지 말아요”
민혁의 말보다 표정이 재밌어서 혜연이 작은 소리로 웃으며 그를 보는데
그의 등 뒤에서 굳어진 얼굴로 성큼 거리고 걸어오는 강유가 보인다
깜짝 놀라 멈춰선 그녀가 강유의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빠르게 걸어온 그가 민혁의 어깨를 잡아 돌려 주먹질을 해버렸다
순식간에 공연장의 노인 분들이 얼어붙으며 소란스러워진다
몇 걸음 비틀대다가 간신히 중심을 잡은 민혁의 얼굴로 강유의 거친 주먹이 다시 꽂히자
민혁은 가장자리에 길게 놓여진 상위로 주저앉으며 쿠당탕 소리와 함께 넘어졌다
마음약한 할머니 한분이 그대로 기절하듯 쓰러져버린다
할머니의 주변으로 노인 분들과 교습소 남자들이 몰려들어 당황해 어쩔줄을 모르고 있다
혜연은 지금의 이 상황이 너무 현실감 없게 느껴져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고 있다
등을 보이고 있는 강유가 민혁의 멱살을 잡아 일으키며
무언가를 손에 집어 들었을 때에야
그녀의 목이 트여 비명에 가까운 외침으로 강유를 부를수 있었다
“강유야 그만해!!!”
움직임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는 강유의 눈이
화가난건지 겁을 먹은 건지 알 수 없는 혜연의 눈과 마주친다
성큼 거리고 혜연에게 다가온 강유가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고 난장판이 되버린 공연장을 큰 걸음으로 빠져나와버린다
건물 밖까지 쉴틈 없이 끌고 가는 강유에게 끌려 맨발 그대로 나와보니
밖에는 여전히 부슬거리는 차가운 겨울비가 내리고 있다
흐린 날씨 탓에 마치 저녁에 가까운 시간처럼 어스름이 내려앉아 있다
그녀가 맨발인걸 느끼지도 못하는지
강유는 무작정 혜연을 끌고 희망의집 문을 나서고 있다
“서문강유!! 미쳤어?!
지금 대체 뭐하는 거야!!”
혜연이 강유의 손을 거칠게 털어내며 소리치는 순간.
그녀를 끌고 ‘희망의집’ 담벼락을 지나던 강유가 갑자기 손을 쭉 뻗어
혜연의 목을 한손으로 움켜쥐며 벽에다 퍽 밀어버렸다
쭉 뻗어오는 강유의 손에서 그가 쥐고 있던 무언가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는 마치 목을 조르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진짜로 목을 조이고 있다
그가 지금 어디를 보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분명 그녀를 보고 있지만 그녀가 투명인간 이라도 되는 듯
시선이 통과해 버리고 있는 그의 눈은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는 것 같다
혜연은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있는 손 때문에 조금씩 숨이 막혀와
얼굴을 바짝 들고 질끈 감고 있던 눈을 떠 그를 보았다
여전히 다른 곳을 보는 것 같은 강유의 얼굴을 보자
그녀는 갑자기 정말로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아..파... 하지..마..”
쥐어짜내는 듯한 그녀의 음성이 강유에게 전달이 됐는지 그제야 목이 자유로워졌다
콜록거리며 정신없이 기침을 하는 그녀 앞에서
강유는 쭉 뻗쳐 있던 팔 그대로 벽을 집고는 고개를 숙인채 반복해서 심호흡을 하고 있다
그녀의 목에 무언가 끈적거리는게 붙어있는 것 같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역겨움이 느껴진다
자신의 드레스를 내려다보는 혜연의 눈에
부슬거리고 내리는 빗물에 무언가 얼룩지고 있는 모양이 들어온다
혜연은 여전히 잔기침을 하며 손을 올려 목을 만진 후
손바닥을 코 가까이에 닿을 듯 가져갔다
갑자기 비린 내음이 코에 훅 들어오며 그게 정말로 피 라는걸 안 순간
그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실신이라는 걸 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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