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 (11/34)

제 3 장 : 그녀는 그의 성경이고 그의 전존재이다 

#... 4 

크리스마스가 이틀 후로 다가왔다 

왈츠 연습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고 노인들의 스텝도 점점 자연스러워 지고 있다 

동네 입구에서 생활정보지를 뽑아온 혜연이 식탁에 앉아 

단기간 할수있는 알바를 찾아보려 구인광고를 훑어보고 있는데 민혁에게 전화가 온다 

눈은 구인광고에 그대로 둔 혜연은 핸드폰 슬립을 올려 전화를 받았다 

“네..” 

<큰일 났어!> 

“네?” 

<혜연씨 우편함에 불붙었어!> 

“진짜에요?” 

<빨리 내려와 봐요!!> 

핸드폰 슬립을 내리고 허둥대며 1층까지 뛰어내려온 혜연은 

506호 라는 숫자가 붙은 은색의 우편함 통을 보며 맥이 빠져버렸다 

그녀의 우편함에는 허리를 털실 끈으로 묶여 우편함 통에 매달려있는 

노트 크기 정도의 실키 테디베어가 대롱거리고 달려있다 

테디베어의 가슴에는 타오르는 불모양의 빨강색 색종이가 붙어있다 

일단은 매달려 있는 불쌍한 곰돌이를 털실에서 풀어내 해방시켜주고 

인형을 손에 쥔채 건물 앞으로 나왔다 

창문이 내려진 차에 들어앉아 있는 민혁이 그녀를 보고 있다가 활짝 웃는다 

“미리 크리스마스~” 

“이런 장난 재미없어요” 

“우씨... 1시간이나 고른건데 장난이라니” 

“불났다는걸 믿은 내가 바보라지..” 

“그 녀석 가슴에서 불나고 있잖아. 

그 색종이야 떼어내면 그만이지만 

내 가슴에 불난건 대체 누가 꺼주나~” 

“119 불러요” 

“위에 그 친구 있어?” 

“알아야 하는 이유 있어요?” 

“혜연씨가 타준 커피 맛있었거든 

그때 다 못 마시고 나온게 못내 아쉽다는 말이지요” 

민혁의 표정이 장난스럽다 

그는 밝게 자란 모습이 많이 나오는 사람이다 

그의 웃음에는 구김살도 어두움도 없다 

민혁이 활짝 웃으면 인상 전체가 바뀌어 보이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막내 티를 내듯 제멋대로에 막무가내로 행동하기도 하는 사람이지만 

이렇게 엉뚱한 행동을 해도 별로 미워지지 않는 사람이기도하다 

점퍼도 안 걸치고 내려온 혜연이 추위 때문에 몸을 부르르 떤다 

민혁이 창밖으로 팔을 쭉 뻗어 카드를 내민다 

“팔 아프다오. 속히 받아들어 주시오” 

“이렇게 불쑥불쑥 찾아오지 말아요 

강유한테... 아니.. 어쨌든 이런 선물 너무 부담스러워요” 

“내가 청혼반지라도 줬나? 겨우 곰인형 하나 가지고 뭘 그래 

학교 여선생들 모두한테 돌리고 

남은 거 가져온 거니까 부담 갖지 말고 받아” 

“아까는 1시간이나 골랐다더니?” 

“아차차.. 멍청이. 멍청이.” 

자기 머리통을 콩콩 때리며 학대하는 민혁의 모습에 혜연이 그냥 웃음을 터트리고 만다 

그녀의 웃는 모습을 빙그레 미소 지은채 쳐다보던 그가 

뒤쪽에서 오던 차량이 상향라이트를 깜빡여대자 혜연에게 던지듯 카드를 건네주고는 

다시 한번 ‘미리 크리스마스~’ 라고 외치며 차를 출발 시킨다 

천천히 멀어져 가는 차의 창밖으로 여전히 그의 팔이 나와서 힘차게 흔들어대고 있다 

지켜보던 혜연이 다시 한번 작게 웃어버리며 어깨를 움츠리고 계단을 올라간다 

인형을 식탁에 내려놓은 뒤 붉은색 봉투에 담긴 카드를 꺼내들자 

앙증맞게 표현된 산타가 한손을 높이 들고 사슴들이 끄는 썰매에 올라타 있다 

카드에는 영어격언과 함께 간단한 내용이 적혀있다 

    Whatever is worth doing at all is worth doing well 

     그래서 잘 해보려 하는 거랍니다 

     그러니까 너무 밀어내려고만 말고 좀 봐줘요 

    merry christmas~ 

                                                         - 멋진 권민혁 -

“Whatever is worth doing at all is worth doing well 

적어도 할 가치가 있는 일은 잘할 가치가 있다... 

글쎄요 멋진 권민혁씨... 나한테 과연 그럴 가치가 있을까..” 

스스로를 비하 하는게 아니다 

정혜연 이라는 인간 자체로서의 가치는 그녀 스스로도 보잘 것 없다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결혼 대상으로의 가치는 너무도 부족함이 많다고 생각 한다 

결혼은 단순히 남녀 둘만의 생활이 아니다 

누군가와 결혼을 한다는 건 그의 가족까지도 모두 포용해야 하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혜연이 불임이라는 걸 알고 이혼을 밀어부칠때 그녀의 시어머니인 최여사가 했던 말이 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몸뚱이’ .... 

마치 여자로서의 가치는 자식을 낳고 키우는 거 외에는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모친을 닮아 신랄한 입을 가지고 있는 종일의 3살 터울 누나는 

혜연이 모든걸 다 알면서 사기결혼을 한거 아니냐며 시어머니 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할거 없는 말들을 그녀에게 퍼붓곤 했었다  

인간의 혀끝에서 나오는 말이 사람을 마르게 할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자비라곤 없는 독설들은 누군가를 숨 막혀 죽게 할수도 있다는 걸 배웠다 

그것들은 그녀를 위축되게 만들었고 결혼에 대한 자격지심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크리스마스 당일보다 이브를 즐기는 까닭에 

어제보다 적은 수의 사람들이 거리를 다니는 듯 하다 

캐롤은 여전히 인내심 있게 카페에서도 옷가게에서도 하다못해 정류장 옆의 

구둣방 아저씨가 틀어놓은 라디오에서도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미니스커트에 여러 모양의 부츠를 신은 여자들이 

그젯밤 내린 눈이 꽁꽁 얼어 미끄러운 길을 조심스레 걷는다 

구두가 아닌 운동화를 신은 혜연 조차 벌써 몇 번이나 발이 미끄러지며 

강유의 팔에 매달리는데 뾰족한 구두를 신고 잘도 걸어 다니는 여자들이 기인처럼 보인다 

그들은 지금 저녁으로 강유가 좋아하는 스시를 먹으러 가고 있다 

“엄마야~!!” 

“조심해..” 

“어휴... 이 운동화 왜 이렇게 미끄럽지? 

이러다 진짜 넘어지겠다” 

“너무 힘주고 걸으니까 더한거야. 

넘어지면 넘어지는거지 뭘 그렇게 긴장하고 걸어?” 

“함박눈 쏟아질때 쳐다보는건 좋은데 말야 

이렇게 길 전체가 빙판으로 얼어버.. ㄲ아악~~” 

기어코 혜연의 발이 제대로 미끄러지며 본능적으로 강유의 팔을 잡았는데 

강유까지 덩달아 미끄러지며 함께 쿠당 넘어지고 말았다 

그 짧은 순간에도 강유의 팔이 그녀의 머리를 감싸느라 

엉덩방아로 끝날수도 있었을 혜연을 밀어 땅바닥에 거의 눕듯이 뻗어버렸다 

혜연은 엉치뼈가 아파 죽겠는데 뭐가 좋은지 강유는 클클 웃고 있다 

“뭐해.. 일어나봐” 

“싫어” 

벌떡 일어나 앉은 혜연이 똑바로 일어서려 해도 

옆에 붙어 앉아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강유의 팔이 놓아주지를 않는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땅바닥에 나란히 앉아있는 그들을 한번씩 쳐다보며 지나간다 

혜연의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해 주던 강유가 

일어서려는 그녀를 잡아 참으로 순식간에 키스를 해버리고 있다 

강유야 장소 따위 상관없을지 몰라도 

잔뜩 당황한 혜연이 그의 가슴을 밀어내려 했지만 

손까지 강유에게 붙잡혀버려 꼼짝없이 키스를 당하고 있다 

그의 키스가 그 어느때보다 부드럽다 

세상의 모든 빙판을 녹일 듯 부드럽고 다정하지만 

지금 녹고 있는건 그들의 엉덩이 밑에 깔린 얼음뿐이다 

지나가던 누군가의 ‘왠일이니..’ 하는 목소리에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다리에 바짝 힘을 주며 무작정 벌떡 일어선다 

강유는 여전히 주저앉아 빙그레 웃으며 그녀를 보고 있다 

길바닥에서 키스를 한것에 대해 화를 낼줄 알았는데 

별다른 말이 없는 혜연이 이상한지 강유가 빤히 올려다 보고 있다 

“엉덩이 젖어. 얼른 일어나” 

“손” 

“내 손?” 

“일으켜줘” 

“미친다 진짜..” 

“괜찮아. 미친 누나까지 사랑할 자신 있으니까” 

혜연의 손을 잡고 일어선 강유가 엉덩이를 털어내며 

다시 팔짱을 끼라는 듯 허리에 손을 올려 공간을 만들어준다 

혜연이 픽 웃으며 그의 팔에 손을 둘러 조심스럽게 다시 길을 걷는다 

TV에 방영됐던 사진을 군데군데 걸어놓은 스시 전문점에서 

혜연은 김초밥을 조금 먹고 강유는 스시와 날치알 데마끼를 맛있게 먹었다 

내일아침 일찍 출국하기 위해 본가로 가야한다는 강유를 보내려 했지만 

그는 끝내 혜연의 원룸으로 들어와 씻고는 그녀의 옆에 누웠다 

팔 베게를 해주고 있던 강유가 혜연을 등 돌리게 눕히더니 

그녀의 뒤에 꼭 붙어 끌어안는다 

이렇게 뒤에서 꼭 끌어안고 눕는건 강유가 좋아하는 자세다 

“어떻게 알았을까?” 

“뭐를?” 

“저 위엣분 말야... 우리가 만날걸 어떻게 알고 

이렇게 내 몸에 꼭 맞게 누나를 태어나게 한걸까?” 

“새벽에 일어나야 한다며.. 얼른 잠이나 자” 

“이렇게 뒤에서 누나를 끌어안고 누워있으면 

우리가 원래는 한 몸이 아니었나 싶게 꼭 들어맞는 느낌이야” 

“잘거야.. 스텐드 꺼줘” 

“안되지.. 5일이나 못볼텐데 누나 안을거야” 

그의 손이 스물거리고 혜연의 가슴으로 올라오고 있다 

혜연이 강유의 손을 잡아 내린다 

강유가 더욱 세게 그녀를 꼭 끌어안는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샤워하지마” 

“뭐?” 

“오늘 누나한테 내 냄새 잔뜩 베이게 하고 갈테니까 

나 올때까지 씻지 말고 그대로 있어” 

“말도 안돼..” 

“제대로 각인 시켜주고 가야지” 

“강유야..” 

“어” 

“혹시 너.. 내가 처음이었니?”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강유의 성관계를 묻고 있는 그녀이지만 

문득문득 궁금했어도 묻지 않고 있던걸 어렵게 물은 것이다 

“여자 안은거 말야? 그게 궁금해?” 

“내가 처음이라면.... 그래서 내게 집착하는가 싶어서... 

거위가 처음 태어날 때 본 물체를 맹목적으로 따라다니잖아 

거위 실험했던 로렌츠 박사가 태어날 때부터 키우던 갈가마귀는 

교미시기에 로렌츠 박사한테 ‘구혼의 먹이’를 가지고 구혼을 했대 

정성껏 잡은 벌레를 자랑스레 선물로 준거지..” 

“그래서 나도 맹목적으로 똥오줌 구분 못하고 있는 거냐고?” 

“.........” 

“처음 아니야. 고등학교때 사겼던 애들 중에서는 두명하고 잤고 

대학 들어와서 사겼던 여자애 하나도 만난지 한달만에 잤었어” 

그녀에게 결혼과 이혼의 경력이 있다는 것 때문에 

혜연은 스킨쉽에 관한한 예민하게 행동했었다 

쉽게 스킨쉽을 할수 있는 여자로 보여지는게 싫어서 

유난히 야박하게 행동했지만 강유는 항상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며 

‘키스하고 싶다’ ‘안고 싶다’ 당당하게도 외쳐댔었다 

혜연이 강유에게 자신을 허락한건 교제하기 시작한 후 6개월쯤 되던 여름이었다 

이른 저녁 그녀의 원룸으로 놀러와 TV를 보고 있던 강유가 

욕실에서 운동화를 빨고 있는 혜연을 안아다 침대에 눕히고는 막무가내로 달려들었다 

신발을 빨던 손잡이가 달린 솔을 그대로 들고 나왔던 혜연이 

민소매 티를 입고 있던 강유의 팔뚝을 마구 때리며 밀어내다가 

너무도 뜨겁고 간절하게 그녀를 원하는 그의 눈빛에 넘어가 버린 것이다 

“대학 들어와 사겼다는 애는 우리 학교 애야?” 

“아니” 

“쓸데없는 쪽으로 조숙했었네... 

고등학교때 얼마나 많은 애들을 사겼길래” 

“일년에 두세명 정도? 내 영혼의 짝이 아니다 싶으면 

백일 안에 깨버렸으니까. 그리고 이왕이면 

집착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말해줘” 

“이제 그만 자자” 

“누나는 그 자식이 처음이었지? 

나도 동정은 아니었고 아무리 과거라지만 

2년이나 그자식이 누나를 안았을거 생각하면... 

단순히 열 받는다는 말로는 부족해” 

강유가 혜연을 안고 있는 팔에 다시 힘을 주며 꼭 끌어안더니 그녀를 돌려 바르게 눕힌다 

혜연의 옆에서 엎드린채 들여다보는 그의 턱밑을 계집애처럼 두 손이 받히고 있다 

그는 잠시동안 그 상태로 가만히 그녀를 쳐다보기만 했다 

침대 옆 협탁 위에 놓인 터치 스텐드의 가장 약한 조명에 

눈을 감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부드러운 윤곽을 그리고 있다 

강유가 혜연의 감고 있는 눈꺼풀 위에 입맞춤 한다 

“내꺼..” 

그리고 살금거리듯 작게 숨을 내쉬고 있는 그녀의 코끝에 입맞춤 한다 

“이것도 내꺼..” 

마침내 강유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위에 도장이라도 찍듯이 꾸욱 누르고 떼어낸다 

“그리고 이것도 내꺼..” 

혜연이 눈을 떠 그를 응시 한다 

코앞에서 맞물린 그녀의 시선을 잡고 있던 강유가 

빈틈없이 다물고 있는 혜연의 입술위에 다시 입맞춤을 하면서 

혀끝으로 그녀의 입술을 열고는 깊은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조금씩 그를 잘라내려면 육체관계부터 끝내야 한다고 마음먹은 혜연 이지만 

이렇게 열에 들뜬 듯한 눈빛으로 부딪혀오는 강유를 냉정하게 뿌리치기가 쉽지 않다 

그의 키스가 점점 더 집요해지며 뜨거워진다 

혜연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어 깊이 숨을 들이쉬던 강유가 

또 다시 그녀에게 입맞춤한 입술을 살짝만 떼어낸채 속삭인다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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