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 그녀는 그의 성경이고 그의 전존재이다
#... 3
혜연이 춤을 가르치기 시작한지 일주일이 되어간다
민혁은 정말로 한번도 ‘희망의집’에 오지 않고 혜연에게 전화만 두 번 했다
노인 분들께 완벽한 왈츠스텝을 기대하는건 무리다
선곡도 최대한 늘어지는 곡으로 선택해야한다
기본스텝 연습과 물결운동 연습은 노인 분들이 제법 잘 따라해 주었다
혜연은 지금 2층의 공연장에서 여자쪽 스텝을 설명하고 있다
오늘 두 번째로 그녀의 연습을 보러 온 강유는
한쪽 구석에 앉아 다시 봐도 역시 신통하다는 듯 보고 있다
“1.2.3. 오른발 뒤로 체인지 스텝.!
1.2.3. 왼발 뒤로 딛고 ?4 내추럴 턴.,!
홍 여사님! 내추럴 턴이라니까요~
리버스 턴으로 들어가면 어떡해요”
“아.. 내추랄 통인가 하고 니뻐스 통을 해야 하는가?”
“다들 힘드시죠? 그래도 기운내세요
젤로 잘하는 분께 가장 이쁜 드레스 드릴거에요~”
할머니들이 수줍게 웃는다
많지 않은 할아버지들이 헛기침을 하며 혼자 스텝을 밟아본다
문제는 남녀 비율이다
3:7 정도로 할머니들이 많으니 남자 파트너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그 문제에 대해 민혁은 책임지고 남자 파트너들을 공수하겠다고 하지만
스텝도 익히지 않은 파트너라면 곤란할 텐데도 무슨 생각인지 큰소리만 치고 있다
오늘분의 연습이 끝나고 나자 몇몇 노인 분들은 무릎이 아프다며
공연장 마룻바닥에 편하게 앉아버리고 몇 명은 혜연을 둘러싼다
강유는 여전히 벽에 기대앉아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듯 그녀만 보고 있다
“자아.. 정 선생 이거 먹어
내가 정 선생 주려고 아껴둔거여”
귤 두개를 혜연의 손에 쥐어주며 할머니 한분이 환하게 웃는다
그녀가 그 자리에서 귤 껍데기를 벗겨내
한쪽 한쪽씩 노인네들 입에 넣어주고 자신도 한쪽 먹는다
“근디 저 총각은 또 왔네이?”
“키도 참말로 큰게 사내답게 생겼어”
“남자친구라고 했지? 난 권 선생이 애인인줄 알았더마는..”
“나도 권 선생 샥시될 아가씬줄 알았지”
곤란해진 혜연이 강유를 쳐다보니 짜증이 묻어나는 얼굴로
누군가와 통화를 하느라 이쪽은 신경을 못 쓰고 있다
강유가 처음오던 날은 혼자 찾아 왔었다
그녀에게 위치 설명을 들어 놓았던 강유가 연습 중간에 조용히 들어오더니
오늘처럼 재밌다는 얼굴로 보고 있다가 밖에서 기다린다는 말을
혜연의 귀에 소곤대고는 먼저 마당으로 나갔었다
노인 분들은 연습을 모두 끝낸 혜연에게 몰려들어 ‘그’가 누구인지 궁금해 했고
남자친구라는 그녀의 말에 오늘과 비슷한 말들을 쏟아냈었다
혜연은 할머니들이 무언가 더 곤란해질 말을 하기 전에
얼른 돌아가야겠다 생각하고 서둘렀다
“이제 전 가볼 테니까 틈나는 대로
오늘까지 배운 거 연습 하시기에요”
노인들의 열렬한 배웅을 받으며 나온 혜연의 어깨를 강유가 부드럽게 감싸 안고 걷는다
‘권 선생’ 이 무언지 묻지 않는걸 보니 통화를 하느라 못 들었나보다
될 수 있으면 민혁이 관계된 건 모르고 지나가기를 바라고 있다
“우리 누나 맛있는 거 사줘야겠다”
“왜?”
“예뻐 죽겠으니까”
“할머니들이 더 예쁘지 않니?
꼭 소녀 같아... 재밌다니까”
“뭐 먹고 싶어?”
“넌?”
“누나 정식”
“뭐?”
“풀코스로 누나 먹고 싶다”
“못살아..”
“26일에 나 일본에 가”
“일본을 왜?”
“아버지 출장 가는데 나도 동행하자고 고집이네..
25일에 간다는 거 누나랑 크리스마스 같이 보내려고
고집 부려서 난 하루 미뤄놓은 거야”
“얼마나 있다가 오는데?”
“5일정도. 누나 행사하는 거는 못 볼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늦어도 31일에는 돌아와서 누나랑 같이 새해아침 맞을거야
근사한 선물 사올 테니까 누난 목에 리본매고 기다리고 있어”
“리본?”
“나한테는 누나가 선물이니까”
“윽.. 너무 버러틱하다”
“오늘은 원룸으로 갈거다?”
“.......”
“왜 대답이 없어. 또 엄마 핑계대려고?”
“그냥 오피스텔로 가”
“싫어. 열흘도 넘게 누나 못 안았어
이제 한계야. 나 자폭하는 꼴 보고 싶어?”
엄마가 언제 오실지 모른다... 마법에 걸려있다...
공부하느라 피곤하다며 한동안 강유를 원룸에서 재우지 않았다
다소 불만스러워하고 조금 불안해하는 듯 보여도 잘 따라주더니 정말 한계인가보다
“누나가 싫다면 그냥 꼭 끌어안고 자기만 할게”
“차라리 하이에나가 vegetarian(채식주의자) 이라면 믿을께”
“정말이야.. 누나 냄새가 그리워 죽겠어서 그래
누나 냄새 맡으면 마음이 안정되는게 금새 잠이 오거든”
“개띠도 아니면서..”
“누나는.... 무향인거 알아?”
“무향?”
“누나는 향수도 안 쓰고 비누도 거의 냄새 없는 걸로 쓰잖아”
“그래서?”
“누나는 무향이라 쉽게 타인의 냄새가 베어...
내가 꼭 끌어안고 있으면 금새 내 냄새로 물들어버리지..
그게 너무 좋아... 누나가 나와 같은 냄새로 물드는게”
“..........”
“아마 누나가 다른 놈 품에 잠시라도 안긴다면
난 바로 알아챌 수 있을 거야”
“.........”
“누나가 평생 내 냄새에만 물든채 살았으면 좋겠어
그러면 나는... 시청 앞 광장에 몇백명의 여자를 갖다놓고
눈을 가린채 누나를 찾으래도 정확히 찾아낼거야”
‘희망의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댄스교습소에서 민혁이 나오고 있다
차를 주차해 놓은 곳까지 왈츠 스텝으로 걸어보며 혼자 웃는다
아무리 전문 춤꾼처럼 추는건 아니라 해도 노인 분들이 익히려면
연습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아 걱정이다
사실 혜연에게 왈츠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행사를 계획할 때부터 협의에 들어갔던 교습소가 있었다
흔쾌히 양로원 노인 분들께 무료강습을 허락했던 소장은
춤을 이용해 여자를 만날 명분을 만든 민혁의 얘기에 껄껄 웃었다
요즘 민혁은 행사 당일 부족한 할아버지들을 보충해주기로 얘기를 끝낸
남자 회원들과 함께 틈나는 대로 왈츠를 배우고 있다
운전석 문을 열은 그가 시트를 감싸고 있는 혜연의 티셔츠를
두어번 톡톡 두드려준 후 차에 오른다
양로원에 들러 혜연의 춤 강의가 잘 되고 있는지 살펴봐야겠다
혜연의 당부가 아니었어도 그동안은 꽤 바빴다
시계를 보니 서두르지 않으면 얼굴이라도 보려는 그녀를 놓치게 생겼다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그녀에게 왜 이렇게 끌리는지 모르겠다
더구나 라이벌로 삼기엔 너무 강해보이는 남자까지 있는 그녀에게.....
‘희망의집’ 으로 가는 골목으로 접어들어 얼마 지나지 않아 민혁은 혜연을 발견했다
혜연의 옆에 그녀석이 어깨를 감싸 안고 같이 걸어오고 있다
민혁은 창문을 내리며 차를 세우고 그녀를 불렀다
혜연이 깜짝 놀란 눈으로 민혁을 보더니 고개를 들어 그녀석의 눈치를 살핀다
혜연의 어깨를 감싸 안아 골목을 걷고 있는 그들 옆으로 청년 하나가 지나간다
그녀에게 부딪힐 듯 걸어오는 청년이 혹시라도 혜연과 부딪힐까봐
강유가 어깨를 감싸 안은 팔에 힘을 줘 그의 옆으로 바짝 당긴다
그리고는 그를 올려다보는 혜연의 이마에 입맞춤을 하고 웃는다
“크리스마스에 바닷가라도 다녀올까?”
“어디든 기차표도 버스표도 동났을걸?”
“대천 정도라면 내 혼다 가지고 가도 될텐데..”
“나를 기절시켜서 네 등판에 묶어가야 할거야”
“아..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행사 끝나면 시골집에 며칠 갔다올거야”
“제기럴..”
“금방 와야 해. 과외도 줄었으니 방학동안 알바라도 해야할텐데..
작년에 그 카페... 손님도 많지 않고
단기알바라도 괜찮다 그래서 좋았는데 사람 안구하려나?”
“알바.. 꼭 해야 돼? 방학 내내 나랑 놀자 그러면 화낼꺼지?”
“당연히 화..”
“혜연씨!!”
차가 진입해 들어와 한쪽으로 비켜 걸으려던 혜연은 깜짝 놀라
창문을 내리고 그녀를 부르는 민혁을 쳐다보았다
강유를 올려다보니 벌써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져있다
그녀의 얼굴까지 덩달아 굳어지려는데 환하게 웃으며 차를 세운 민혁은
고개까지 내밀어 말을 건네는 수고를 하고 있다
“오늘 연습 끝났나보네?”
“예..”
“어때? 우리 노인네들 코피 터지거나 하진 않아?”
“별루요... 그만 가볼께요”
혜연의 어깨를 감싸 안은 강유의 손에 꾸욱 힘이 들어가고 있다
강유가 어떻게 행동할지 못내 근심스런 혜연이
무작정 걸음을 떼어내며 그의 팔을 당겨 걸어간다
그녀의 등 뒤로 무쏘스포츠의 거친 엔진소리가 조금씩 멀어진다
“저 자식 뭐야”
“희망의집 행사를 민혁씨가 내게 부탁한거 뿐이야”
“다시 말해봐”
“양로원 행사를...”
“민혁씨? 성도 빼버리고 민혁씨?
저 자식은 친근하게도 반말에다 누나는 민혁씨?!”
“말꼬투리 잡지 마. 권민혁씨 부탁으로 하게 됐어도 한번도 만난적 없어
학교일 바빠서 행사 때까지 희망의집엔 못 온다더니 오늘은 볼일이 있나보네”
“하지마.”
“뭐?”
“당장 때려치워. 이제 거기 가지마.”
“말도 안돼..”
“내가 전문 춤 선생 사서 대체시킬테니까 하지마”
“억지부리지마”
“억지?!”
“왜 그렇게 그 사람을 경계해? 아무도 아냐
권민혁씨 나한테 아무도 아니라구”
“그 자식은 안 그래! 누나 훔치려고 맘먹은 놈이란 말야!!”
“그렇게 나를 못믿어?! 적어도 다른 남자 생겨서
너랑 끝내지는 않을 테니 걱정 마!”
혜연의 목소리에 노여움이 묻어나기 시작하는데
지금 강유의 귀에 제대로 들어온 건 적어도와 끝낸다는 말뿐이다
걸음을 멈춘채 화를 내던 혜연이 먼저 빠르게 걷기 시작 한다
잠깐 동안 굳어진채 서있던 강유가 성큼 거리고 걸어와 그녀의 팔을 잡아돌린다
“무슨 뜻이야. 나랑 끝낼 생각 따위 하고 있는거야?
남자 때문이 아니면 나랑 끝내는 거 괜찮다는 거야?!”
“.........”
“대답해!!”
“네 마음이 너무 무거워...
가끔씩은.. 숨이 막힐거 같아”
“.........”
“가자. 오늘 과외 가는 날이라 서둘러야해”
“미안해..”
강유가 낮은 목소리로 갑자기 미안하다 말한다
바로 잠시전에 살벌하게 화내던 그가 지금은 잔뜩 겁먹은 모습이다
“억지 부려서 미안해.... 누나한테 화내서 미안해...
그러니까 하지마.. 끝낼수도 있다는 식의 말... 제발 하지마”
강유의 말이 혜연을 작게 한숨쉬게 만들고 있다
요즘 들어 이렇게 작게 한숨을 내쉬는 일이 많아지고 있는 것 같다
혜연의 말 한마디에 그의 감정은 극과 극을 오간다
그것은 결코 그녀가 원하는 모습도 아니고 바람직한 감정도 아니다
말없이 걸음을 떼는 그녀의 옆에 붙어선 강유가 혜연의 눈치를 보며
다시 어깨에 손을 두른다
민혁이 관계된 행사라는 사실은 여전히 불만스럽고 못마땅하지만 더는 말도 못하겠다
가끔씩 그녀는 자신에게 깊이 빠지는 강유를 언젠간 버리겠다는 듯 말하곤 했지만
오늘 하는 말은 무언가 느낌이 달랐다
요즘 들어 잡다한 핑계들을 갖다 붙이며 그를 원룸에서 재우지 않는것과 마찬가지로
조금 전 혜연이 한말은 그를 너무도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누나가... 내 아이를 가질수 있다면 좋았을걸..
그러면 나는 아이를 볼모로
누나를 평생 붙잡아두고 안심하며 살수 있을텐데”
“바보 같은 소리.. 내가 불임이 아니었다면
너랑 만나게 될 일도 없었어”
“아니. 우린 반드시 만났을 거고 난 틀림없이 사랑에 빠져서
남의 아내를 탐내는 파렴치한 놈이 되버렸을거야”
불임에 관한 거는 혜연이 달가워하지 않는 대화인걸 알면서도
강유는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그대로 이야기했다
몇 번이나 그런 생각을 하는지 모른다
혜연이 자신의 아이를 갖게 되면 집에서 허락을 받는 것도
그녀를 평생 소유하게 되는것도 조금은 더 수월해질 것이다
“과외 끝나고 누나가 내 오피스텔로 올래?”
“........”
“새로나온 DVD 몇 개 사놨는데 같이 보자”
“뭐 샀는데?”
“이것저것.. 아! 누나가 보고 싶다던 킬빌도 사다놨어”
“봤어?”
“꽤 재밌어. 누나 친구가 꼭 보라고 했다며”
전에 유정과 통화를 할때 꼭 보라며 혜연에게 권유를 하던 영화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킬빌의 제작 준비를 마쳤을 쯤
주연으로 협의가 끝난 우마서먼이 임신을 했다고 한다
타란티노 감독은 여배우 교체를 희망하는 미라맥스 측을 설득해서
그녀가 임신과 출산을 마칠 때까지 기다려 영화를 위한 훈련에 들어갔다는데...
‘펄프픽션’ 때부터 우마서먼을 주인공으로 시나리오를 쓰고 그녀 한사람 때문에
총 9년을 기다려 만들어낸 영화라는 설명을 붙여가며 꼭 보라고 했던 영화이다
혜연도 보고 싶은 영화이기는 하나 지금은 그럴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다
“나중에 볼게”
“세상에서 가장 애매한 말이 ‘나중에’ 인거 알아?
초등학교 때부터 ‘나중에’ 한번 가족모두 가자던 여행도 결국 못갔고
재진이 놈은 ‘나중에’ 한번 거하게 쏜다는 말을 5년째 하고 있어”
강유의 말에 공감한다는 듯 혜연이 작게 웃는 모습에
그가 겨우 안심한 듯 표정이 밝아진다
그녀가 제대로 화를 내거나 하면
강유는 심장에서 이상신호를 보내오는 듯 가슴이 요동을 친다
도무지 본인 스스로도 감당이 안될 만큼 그녀를 사랑한다
그녀도 단지 하나의 여자일 뿐인데 그 어떤 표현으로도 부족할 만큼 그녀는 특별하다
그녀를 삼켜버리고 싶다
그녀를 온전히 삼킬수만 있다면
그대로 피를 토하고 죽는다 해도 티끌만큼의 미련도 없이 죽어줄 수 있을 것 같다
“난... 다시 태어나면 누나의 심장으로 태어나고 싶어”
“말도 안돼..”
“누나가 벌레로 태어나건 짐승으로 태어나건 사람이건 간에”
“벌레는 싫어”
“누나의 온몸에 피를 내보내고 받아들이고..
내가 죽으면 결국 누나도 죽는 심장으로 태어나는 거야”
“.........”
“걱정 마. 열심히 피 순환 시켜서 오래오래 살게 해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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