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 내것이 안될바엔'''
#... 7
모처럼 오랜 친구인 유정이와 통화를 하는 혜연의 입가에 계속 미소가 걸려있다
고등학교 때까지 마을에서 함께 자라온 서유정은 혜연처럼 서울의 대학으로 진학했다
혜연과는 극에서 극의 거리에 있는 대학에 들어가 잘 만나지 못했지만
아무리 몇 달 만에 만나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은 친구이다
175의 키에 여전히 머리까지 짧은데다 털털한 성격도 여전한 그녀는
졸업을 하고 극심한 취업난에도 단번에 모 기업에 합격해서 혜연보다 먼저 사회인이 되었다
<너 방학하면 한번 만나자>
“그래. 주말 같은때 나한테 놀러오고 그래”
<핑계가 아니라 매일 매일 진짜 바뻐
방에 들어가면 그냥 뻗어버린 다니까>
“그래도 목소린 늘 쌩쌩하던데?”
<나야 체력하나는 끝내주잖냐. 넌 어때? 아픈데 없고?>
“나도 건강체질 이잖아”
<그 머스마는 지금도 만나냐?>
“어..”
유정을 만날 때 강유와 함께 나간 적이 한번 있었다
강유가 화장실 간 사이에 유정이 그를 표현한 말은 ‘만만치 않아..’ 였고
유정과 헤어져 돌아올때 강유가 했던 말은 ‘남자 같아서 질투나’ 였다
혜연에게 몇 번 이야기를 들어 유정이 그녀에게 특별한 친구라는걸 알고 있는데
마치 남자 같은 유정과 혜연이 너무 친밀해 보이는 모습에 질투가 난다했었다
<힘든일 있으면 언제든 전화해>
“그래..”
<대답만 ‘그래’ 하지 말고>
“그래”
동갑내기 이면서도 언니 같은 유정이다
천성적으로 누군가를 챙기는걸 좋아하는 유정은
혜연이 생각하는것 만으로도 든든해지는 혈육 같은 존재다
유정과의 긴 통화는 모처럼 그녀의 마음을 배부르게 해주었다
며칠후....
규모가 크고 감각적인 인테리어로 늘 손님이 많은 학교 근처의 호프집 단체석에
강유와 혜연을 비롯해 그의 친구들과 여자친구들이 모두 모였다
8명의 남녀가 짝을 지어 앉아 있는데 깍두기처럼 여자 하나가 남는다
강유의 왼쪽에 앉아 있는 한 이슬 이라는 후배는
아까부터 그녀가 아니라 혜연을 깍두기처럼 느껴지게 만들고 있다
“한 이슬. 넌 커플들 틈에서 혼자 참 잘도 어울린다?”
“재진오빠. 자꾸 그렇게 눈치 주기야?”
여대의 불문과 1학년 이라는 한이슬은 재진의 여자친구와 가장 친한 친구다
지난번 강유의 오피스텔에 모두 모였을 때도 끼어있던 그녀는
몇 번 다같이 만나는 동안 혼자 속으로 강유를 짝사랑하게 되버렸다
어디를 봐도 자신보다 나을게 없어 보이는 혜연에게 강유가 푹 빠져 있는게 이해가 안간다
“언니는 진짜 말이 없네요?”
“말하는거 듣기만 하고 있어도 재밌는걸”
“강유오빠랑 어떻게 만난거에요?”
“작년 겨울에 학교 도서관에서 만났어
복학하려고 이것저것 공부 좀 하던 때였거든”
“그때가 기말시험 때였는데
내가 누나 때문에 시험 다 망쳤잖냐”
“오빠가 왜요?”
“누나 바로 앞자리에 앉았는데 첫눈에 가버렸거든”
“언니 어디에?”
“눈매..”
“눈매?”
“내가 계속 쳐다보니까 날 잡아먹을 듯 째리는데
그 모습이 미치게 예뻐 죽겠는 거야
빈자리가 없으니 옮기지도 못하고 신경이 쓰였는지
잔뜩 화난 얼굴로 보따리 챙겨 나가버리더니
스토커처럼 뒤 밟는 남자가 있는 것도 모르고 집까지 바로 가더라고..
그때부터 사겨준다고 할때까지 따라다녔지”
“맞아. 강유놈이 방학 내내 징하게도 쫓아 다녔대”
그 방학기간동안 그녀는 원룸에서 멀지 않은 곳의 카페에서 알바를 하던때다
거의 매일같이 카페로 찾아와 틈만나면 그녀에게 지분거리는 강유에게 질려서
개강(복학)을 하기 얼마전 될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교제를 허락했었다
“둘이 나이차이가 너무 나는거 아니에요?”
순진한 얼굴로 대놓고 제일 듣기 싫은 소리를 하는 한이슬을
강유가 눈썹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려 쳐다본다
이슬이 혓바닥을 낼름 내밀며 강유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다들 제법 취하기 시작한다
아까부터 강유에게 바짝 붙어 앉아 혜연을 무시한채 이야기를 하던 이슬이
과일 샐러드의 마요네즈가 입가에 묻어있는 강유를 보더니 클클 웃는다
“뭐어~”
“마요네즈..”
이슬이 강유의 입가를 손가락 하나로 훔쳐내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손가락 끝을 입으로 가져가 쪽 빨아 먹는다
친구들이 놀란 눈으로 강유와 이슬을 보고 있다
혜연이 혼자 픽 웃어버리고 만다
“한 이슬.”
“응? 왜요?”
“함부로 나 만지지마”
“에쿠.. 습관 되서 그래버렸네”
“정혜연 말고는 어떤 여자도 나 만지는거 싫어”
“실수라니까 오빠~
언니. 기분 나빠 하지마요
별뜻없이 한 행동이에요”
강유가 그에게 자꾸 붙어오는 이슬에게 인상을 찌푸리며
떨어져 앉고는 혜연에게로 얼굴을 바짝 갖다댄다
“나 소독해줘”
“뭐?”
“저 녀석이 만진데 뽀뽀해줘
지금 내 입가가 찝찝하단 말야”
“됐어”
“안돼. 소독은 빠르고 신속하게 해야 덧나지 않는거야”
그녀의 얼굴로 다가오는 강유의 가슴팍을 혜연이 가만히 밀어낸다
가뜩이나 편할 것도 없는 자리가 더 불편해지고 있다
한이슬 이라는 새초롬한 아이는 강유를 좋아하는게 틀림없다
오늘 처음 봤을 때부터 은근히 그녀를 무시하며 강유의 시선을 끌려 애를 쓴다
강유가 조르는데 넘어가 참석한 자리지만 혜연은 조금 후회가 되고 있다
“하지 말라니까”
“왜 화를 내..”
“어린애처럼 굴지마”
혜연의 단호한 말투도 기분 나쁜데 어린애 취급하는 거에 화가 나는 강유다
그때부터 공연히 술만 들이붓더니 금새 취하기 시작한다
“찬바람 좀 쐬고 올게”
뿌루퉁한 얼굴로 대답도 없는 그를 두고 건물 1층으로 내려온 혜연은 계단 끝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잠시후 재진이 내려와 조용히 그녀 옆에 앉는다
강유의 가장 친한 친구라는 구재진은 누구에게나 호감을 줄 얼굴이다
그의 주변 인물들 중에서 혜연이 가장 대하기 편한 사람이기도하다
“왜 내려와요?”
“나도 바람 좀 쐬려고요”
“강유 술 그만 마셔야 할 것 같던데..”
“알아서 마시겠죠 뭐”
혜연의 옆에서 담배 하나를 다 피우며 생각에 잠겨
말이 없던 재진이 망설이듯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한다
“강유가... 누나한테 많이 집착하죠?”
“아마도..”
“강유랑 끝까지 갈 자신 있어요?”
“끝이 어딘데요? 결혼이라도 말하는 거면 ‘NO'에요”
“그럼... 그만 정리해야 할거에요”
“........”
“더 늦기 전에... 어쩌면 벌써 늦었는지도 모르겠지만”
“가르쳐 줄래요? 어떻게 정리하면 좋을지”
담배 갑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려던 재진이
다시 담배를 집어넣더니 주머니에 쑤셔 넣고는 앞을 본채 말한다
그는 옆모습도 상당히 부드러워 보인다
강인하고 고집스러워 보이는 강유와는 많이 다른 얼굴을 가진 친구다
“고등학교때.... 학교 옥상에서
키우던 고양이가 있었어요...”
혜연을 흘끗 쳐다본 재진이
다시 앞을 보고는 독백처럼 조용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관 계 자 외 출 입 금 지’
옥상 철문에 붙어있는 붉은색 경고 글이 무색하게도
옥상열쇠를 훔쳐내 복사한 강유와 그의 친구들은
점심시간엔 늘 옥상의 중앙에 있는 옥탑 건물에 기대앉아 모여 있다
요즘 강유의 팔에는 고양이가 할퀴어댄 손톱자국이 끊이질 않는다
그런데도 전혀 개의치 않고 안고 있다
한참 장난치고 놀고 싶은 아직은 어린 고양이라 돌아다니며 까불어대고 싶은 모양인데
강유가 품에서 놔주질 않으니 신경질이 나나보다
강유의 표정이 오늘따라 많이 어둡다 싶더니
별로 말도 없이 고양이를 안고 있다 내려놓고 담배를 하나 꺼내 핀다
고양이가 역시나 내게 오더니 앞발로 손가락을 툭툭 건드리며 놀자고 한다
강유가 담배 한개를 다 피우고 발로 밟아 끄며 말없이 일어나더니
내게 와서 장난치고 있는 고양이 모가지를 한손에 움켜쥐고 든다
뭘 하려고 목을 잡고 들어버리는 걸까?
저렇게 잡으면 숨 막히겠다 생각하는데 고양이를 똑바로 쳐다본채 힘을 주는 것 같다
설마.....
가만히 보고 있으니 장난 치는게 아니다
아주 천천히 힘을 주고 있다. 고양이가 바둥거리기 시작한다
조그만 고양이 목을 한손으로 움켜쥔 강유는 틀림없이 목을 조르고 있다
그것도 강유의 눈높이에 맞춰 들어 올려서 가만히 쳐다봐 가면서 힘을 주고 있다
아주 천천히...
“뭐 하는 거야 임마!”
재진이 한마디 했는데 들리는지 안들리는지 전혀 표정에 변화가 없다
이제 제법 숨이 막히는지 고양이가 앞 뒷발 모두 올려 강유의 팔에 거꾸로 매달린다
그리고 사정없이 발톱을 다 세워 할퀴어댄다
강유의 팔에 금새 칼로 그은 듯한 핏자국이 생겨버린다
어찌나 인정사정 안 봐주고 정신없이 할퀴어 대는지
온통 찢기듯 피가 나면서 팔뚝에 고여 한 방울씩 천천히 떨어진다
강유의 눈을 보고 있으니 소름이 끼친다
표정도 감정도 없는 눈이다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아는지 모르겠다
“그만해 강유야!!”
친구들까지 모두 한마디씩 하는데 소용이 없다
모두들 그에게 다가설 생각조차 못하고 숨도 제대로 못쉰채 보기만 하고 있다
어느새 고양이 움직임이 둔해지더니 추욱 늘어져 버린다
죽었다...
강유가 목 졸라 죽여버린거다
그런데도 여전히 힘을 빼지 않고 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대로 멈추지 않고 힘을 준다
고양이 혀가 길게 늘어져 이빨 사이로 삐져나와있다
그리고... 툭...!!
믿을수없게도 고양이 한쪽 눈알이 튀어 나온다
친구놈 하나가 입을 틀어막고 급식 먹은걸 토해버리고 만다
친구들 대부분이 고개를 돌려 더 이상 보지못하고 외면해 버리고 있다
제발.. 그만해라 강유야.
재진 역시 입에서 맴돌기만 할뿐 속으로만 안타깝게 중얼댄다
고개를 돌리지 않고 보고 있는건 재진 하나뿐인 것 같다
한쪽 눈알은 붉은 핏줄에 매달려 고양이 코 있는데 까지 내려와 있고
나머지 한쪽 눈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불거져있다
그 상태 그대로 움켜쥔 고양이를 들고 옥상 난간 끝으로 간 강유는
쭉 뻗어있던 팔 그대로 난간 바깥쪽으로 내밀더니 손을 펴 고양이를 놓아버렸다
아래쪽이 어디지? 화단이다...!!
고양이는 화단에 그대로 떨어졌을 거다
뒤로 돌아서는 강유의 얼굴은 처음에 목을 조르기 시작할 때와
조금도 달라진게 없이 아무런 감정도 없는 것 같은 메마른 눈이다
그리고 아무 말도 없이 그대로 옥상을 나가버린다
“몇 시간도 안되서 강유가 죽인 고양이 얘기가
학교에 쫙 퍼져서 화단으로 구경 가는 애들이
그렇게 많았어도 아무도 치우지 못했어요. 아무도..”
“.........”
“하늘을 향해 비스듬히 죽어있는
고양이 모습이 너무 끔찍했거든요
빠져버린 눈알보다 금새 튀어나올 듯
불거진 쪽 눈알이 더 무서웠어요”
“.........”
“강유놈 새어머니가 고양이라면 질색해서 집에도 안 데려가고
옥상에 그놈 집까지 만들어주며 키우던 건데
강유가 얼마나 아끼던 고양인지 몰라요...
친구들 아무도 밥도 못주게 하고 만지지도 못하게 하면서”
“..........”
“강유를 낳은 어머니는 강유가 중학교때
산악회 정기산행을 갔다가 실족해서 뇌사상태가 됐었대요”
재진이 강유의 친엄마에 대해 조금 더 말한다
강유에게 들어서 알고 있던 내용이지만 혜연은 묵묵히 듣기만 하고 있다
강유가 가족 중 유일하게 사랑했던 어머니는 산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가 중2가 되던 초봄 정기산행에 갔던 그의 어머니는 채 녹지 않은 바위를 잘못디디며
벼랑 아래로 떨어져 뇌사상태로 6개월가량을 버티다 돌아가셨다고 한다
가족들 아무도 그녀가 사후장기기증서약을 한 것은 몰랐다는데
심장을 비롯해 폐, 간등 9명의 생명을 살리고 가셨단다
그리고 그녀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대로 화장을 해서
그녀의 고향인 남원의 산에 뿌렸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강유의 친어머니 얘기를 하던 재진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내뱉는다
“강유 입에서 뭐든 ‘내꺼다’ 소리가 나오면
아무도 반박하는 놈이 없었어요”
“...........”
“드럽게 힘만 쎄서 한번 뚜껑 열리면 정말 감당이 안되거든요”
“..........”
“강유 몰래 먹이 줬던 친구놈 하나는 이가 부러지게 한대 때려주고
자꾸 와서 장난치는거 좋다고 받아줬던 친구는 손가락을 부러뜨려 버렸어요
친구니까 그 정도로 끝난거라면 말 다했죠...
고2때 강유를 싫어하는 선배 하나가 강유가 아끼는 가와사끼 오토바이를
발로 찼을 때는 말 그대로 반병신을 만들어서 입원시켜 버렸어요
강유네 변호사까지 나서서 합의 보느라 아주 애 먹었죠
이상한건.. 그런데도 주변에 늘 여자도 친구도 많았어요
뭐랄까... 강유가 묘하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거든요”
혜연은 비집고 나오려는 한숨을 삼켜버렸다
강유에게 폭력적인 성향이 조금 있다는건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아주 가끔씩 혜연에게 접근해오는 남자들을 상대할 때가 아니면
그녀 앞에서의 강유는 상당히 부드러운 편이었다
“고양이 얘기... 너무 끔찍하죠?”
“그래요..”
“고등학교 때부터 여자애들은 많이 사귀었던 강유지만
오래간 애들은 별로 없어요... 대부분 100일도 안되서
깨버리곤 했으니까.. 근데 누나한테는 달라요”
“알거 같아요”
“모를거에요... 많이 달라요. 많이..
굉장히 집착하고 있는거 같아요”
“........”
“너무 위험해요. 누나한테도... 강유한테도...”
재진이 먼저 조용히 계단을 올라가고 잠시후 혜연도 계단에서 일어나 호프로 올라왔다
재진의 여자친구가 핸드폰도 안가지고 어디를 갔다 오냐며 재진에게 화를 내고 있다
얼마나 마신건지 등받이에 꼿꼿하게 기대어 잠이든 강유를 깨워 호프를 나왔다
“후우~ 너무 많이 마셨다. 잠까지 들어버렸나봐..”
“오피스텔에 데려다줄게”
“누나 원룸으로 갈래”
“엄마 언제 올지 모른댔잖아”
“내일 일찍 수영장 갈때 나오면 되지
오늘은 벌써 늦었으니 안올거아냐”
그날 밤. 그는 끝내 그녀의 원룸으로 왔다
국화차를 한잔 만들어 천천히 마시는 그녀가
술 때문에 곯아 떨어져 자고 있는 강유를 복잡한 눈빛으로 보고 있다
강유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재진의 말이 아니라도 그가 최근엔 부쩍 심하게 집착하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게 느껴진다
강유의 감정의 무게가 하나씩 하나씩 추를 더해 올려지고 있는 듯 무거워진다
조금씩 멀리해야하는데 도무지 어떤 식으로 거리를 두어야할지 난감하다
혜연이 조용히 그의 옆으로 가서 눕자 그가 돌아누우며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는다
그녀가 가만히 눈을 감으며 속삭이듯 혼잣말을 한다
“너를.... 어떡하면 좋으니..”
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