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 내것이 안될바엔'''
#... 4
조금 식어버린 커피를 한모금 마시는 혜연을 보며
강유는 그대로 돌부처처럼 서있는채 꼼짝도 안하고 있다
“설명해줘?”
차분하고 담담한 그녀의 음성이 그를 더 화나게 하고 있다
무슨 이유로 그녀의 티셔츠를 입고 식탁에 앉아 커피를 마시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게 아니라는 것쯤은 안다
그러나.... 그녀의 옷을 입고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녀 공간의 일부처럼
앉아있던 그 남자를 생각하자 다시 머리끝으로 피가 역류하는 것 같다
주먹을 움켜쥔 그가 그대로 식탁을 내리 찍는다
식탁 유리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주먹만큼의 공간을 부서뜨리고 기다란 금이 가버렸다
혜연이 움찔 놀라긴 했어도 말없이 그를 보고 있다
“열 받아”
“.........”
“빌어먹을 놈.. 어디서 그딴 모습으로 앉아있어..”
“.........”
“몇대 더 팼어야 하는건데..”
“.........”
“침착하게 있지마!!
그런 누나도 열 받아 죽겠으니까!”
“이리와봐..”
혜연은 강유의 팔을 끌어당겨 욕실로 들어갔다
주먹 끝에 피가 베인 강유의 손을 씻어낸 그녀는
화장대 윗서랍에 있는 연고를 손끝에 짜내 조심스럽게 발라주었다
고개를 숙이고 연고를 바르고 있는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강유가
혜연의 팔을 잡아 몇걸음 떨어진 침대에 내동댕이치듯 던져버리고
자신의 쟈켓과 긴팔 티를 벗어 던진다
잔뜩 찌푸린 얼굴의 혜연이 벌떡 일어나 앉으려 했지만
강유에게 가슴팍을 떠밀려 도로 눕혀지고 말았다
“비켜. 갑자기 왜 이래”
“시끄러”
혜연의 위에 무릎꿇듯 걸터앉은 강유가 물기가 있는 혜연의 티셔츠를 벗기려고 했지만
그녀는 어느때보다도 강하게 밀어내며 거부의사를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혜연의 눈매는 차가워 보이는 편이다. 어떤이는 이지적인 눈매라고 하기도 하고
어떤이는 차갑고 냉정해 보인다고 하기도 한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강유만큼은 그 차가워 보이는 눈매에 담긴
그녀의 연약함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지금 단호한 눈동자 만큼이나 분명한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하고 있다
“싫다 그랬잖아”
“왜.”
“그럴 생각 없어”
“그러니까. 왜!”
“화풀이하듯 안는거 싫어”
“화풀이 아냐! 불안해서 그래!”
“뭐?”
“누나가 내꺼라는거 확인하고 싶어”
“이런식이 아니면 확인 못해?”
“모르겠어... 잘 모르겠는데!
내가 누나 안에 들어가 있는 순간만큼은 느껴.
그때만큼은 확실하게 정혜연이 내 여자라는 생각이 들어”
잔뜩 찌푸린 얼굴의 혜연이 다시 일어나 앉으며 힘껏 강유를 밀어낸다
이번엔 맥없이 침대 안쪽으로 밀려 그대로 누워버리는 그를 보며
혜연은 서랍장에서 티셔츠를 꺼내 등을 돌린채 갈아입었다
잠시 그렇게 말없이 누워있던 강유가 조용히 입을 뗀다
“고등학교때...”
천정을 초점 없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강유는
차분한 목소리로 돌아와 마치 독백이라도 하듯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학교 옥상에서 키우던 고양이가 있었어
어떻게 들어왔는지 어느날 보니까 있더라고...
친구놈들하고 다같이 먹이도 주고 귀여워해주는데
그놈이 점점 너무 귀엽고 좋아지는 거야”
집에서 편하게 입는 치마까지 갈아입은 혜연의 눈에
민혁의 셔츠가 담긴 비닐봉투가 보인다
꽤나 경황이 없었을테니 놓고 간 것이 당연하다
그녀는 민혁의 셔츠와 자신의 젖은 옷을 함께 세탁기에 넣은후
⅓ 가량 남은 커피를 들고 식탁의자를 쭉 빼내 앉았다
“내 성격이 원래 좀 드러워서 일단 마음에 들어온 거는
누구하고든 공유 하는걸 끔찍이 싫어해...
‘이제부터 이놈 내꺼다. 아무도 밥도 주지말고 만지지도 마’
그랬더니 친구 놈들이 툴툴대긴 했어도 그냥 말아버리더라
내가 성질나서 돌아버리면 당해낼 놈이 없었으니까...”
혜연의 앞에 조금 남아있는 커피는 이미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금이 간채 깨져있는 식탁유리가 눈에 들어와
그녀는 작은 한숨을 삼키며 강유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놈이 자꾸 내 친구한테 가는거야
가져다 품에 안아도 틈만나면 친구 놈한테 가서 장난치고 다리사이에서 잠들고...”
“........”
“내가 꼼짝도 못하게 안고 있는게 꽤나 싫었는지
날이 갈수록 내 옆에는 오지도 않으려고 하더라구”
“........”
“그래도 억지로 끌어안고 있자니
내 팔뚝에 그 녀석 발톱자국이 끊이질 않았지...”
지나치게 소유욕과 독점욕이 강한 그와 고양이의 모습이 그려지며
너무도 강유다운 행동이라는 생각에 그녀의 마음이 조금 무거워진다
“틈만나면 내게서 벗어나려는 고양이를 내가 어떻게 했게?”
“........”
“그대로 두면 친구 놈한테...
그것도 제일 친한 친구 놈한테
뺏길거 같아서 내가 어떻게 했는지 알아?”
“.......”
“.........”
“말해봐”
“.......”
“어떻게 했는데?”
“됐어... 정혜연 겁먹고 도망가 버릴까봐 말 못하겠다”
어떻게 했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입을 꾹 다물어 버린채
눈을 감는 강유를 재촉까지 해서 알고 싶지는 않다
강유의 꾹 다문 입술이 고집스러워 보인다
그녀가 의자에서 일어나 벽에 걸려있는 두툼한 가디건을 걸치자
그가 눈을 뜨고 궁금한 얼굴로 혜연을 쳐다본다
“씽크대 수도꼭지 고장났어
수리하는데 알아보고 올테니까 누워있어”
“빨리와. 저녁에 모처럼 영화나 보러 가자”
표가 남아있는 영화는 너무 심하게 재미없었다
그래도 끝까지 영화를 본 후에 강유의 겨울옷 몇 가지와
혜연의 스웨터 하나를 사며 쇼핑을 마치고 각자 헤어졌다
그녀의 원룸으로 오려는 강유를 조만간 올라온다는 모친이
언제 올지 모른다는 핑계로 떠밀다시피 보내느라 애를 먹었다
다음날...
핸드폰 벨 소리에 혜연이 눈을 감은채 베게 밑을 더듬어 전화를 받는다
“음... 왜..”
<아직도 자?>
“몇신데?”
<9시 반>
“왜 벌써 깨워..”
<혜연씨. 정신 좀 차려주시죠?>
잠에 취해 강유의 음성인줄 알았던 혜연이 눈을 가늘게 뜨고 핸드폰을 들여다본다
강유의 레터링 표시가 아닌 낯선 핸드폰 번호지만 짐작이 간다
“권민혁씨?”
<잠 깼어요?>
“내 번호는 어떻게...”
<아주머니한테 받아서 알고 있었는데?>
“근데 아침 일찍 왜요?”
<혜연씨는 9시 반이 아침 일찍이야?>
“오늘 일요일 이잖아요
책 읽다가 새벽에야 잤단 말에요”
<잘 들어요. 1시간 후에 도착할 테니까
물건은 만나서 교환 합시다>
“뭐요?”
<허튼짓하면 당신의 핑크티를
소사(燒死-화재에 의한 사망)시켜 버릴테니
따듯한 옷 입고 기다리고 있어요>
뚝..!
끊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혜연이 어리둥절해한다
뭐라는 건지 횡설수설 알수가 없다
물건의 교환 이라는게 그의 셔츠를 말하는거 같아 그녀는
어제 빨아 널은 셔츠를 걷어 다림질까지 해놓고 욕실에 들어가 씻었다
그에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게 내키지 않았던 혜연은
청바지에 간단한 니트티로 갈아입고 식빵 두쪽을 토스트기에 튀겨냈다
딸기잼을 바른 식빵을 두개째 우유와 함께 먹고 있을때 그가 도착했다
진한 베이지색 면바지에 흰색 폴로셔츠..
바지와 같은 색의 쟈켓을 입은 민혁이 현관 앞에서 싱그럽게 웃고 있다
“물건은?”
“누가 보면 마약상 인줄 알겠네”
셔츠가 들어있는 쇼핑백을 건네받는 그는 아무것도 들고있지 않다
혜연의 눈이 그의 양손에서 얼굴로 옮겨 간다
“내꺼는요?”
“저거 입고 따라 나와요”
민혁의 곧게 뻗은 손가락 끝이 벽에 붙은
옷걸이에 걸려있는 그녀의 골덴 마이를 가리키고 있다
혜연이 의아한 얼굴로 민혁을 본다
“왜요?”
“시키는 대로 안하면 혜연씨 핑크티가 위험해”
“그러니까. 소사당할 위기에 처한 내 핑크티는 어딨냐구요”
“내 차에.”
그녀가 가슴 앞에서 팔을 꼬고 의심스런 눈초리를 보내며 움직일 생각을 안하자
신발을 벗고 혜연을 비껴 들어간 그가
멋대로 골덴 마이를 집어들고 나와 계단을 내려가고 있다
“건물 앞에 아무렇게나 차 세워놨으니까 빨리 내려와요”
하여튼 이상한 사람이다
도무지 어떤 사람인지 알수가 없게 여러 모습을 가지고 있는 남자다
혜연이 운동화를 신고 천천히 내려가 보니 건물 앞에 차를 세워 놓은채
담배를 피고 있던 민혁이 그녀를 조수석으로 밀어 넣는다
“뭐 하는 거에요?!”
운전석에 앉은 그가 차를 출발시켜 금새 골목 끝을 빠져나간다
큰길로 들어서는 차안에서 혜연이 어이없는 얼굴로 민혁의 옆모습을 노려보고있다
“어디 가는 거에요!”
“스무고개로 할까?”
“문도 안 잠그고 왔단 말에요”
“보니까 혜연씨 말고는 훔쳐갈 것도 없더만..
도둑은 잠긴 문을 열고 들어가지 열려있는 집엔 안들어가
주인이 근처에 있는거 같아서 언제 들어올지 모르니까”
“대체 어디 가는 거냐구요”
“자아... 스무고개 시작합시다
우리는 지금 어디 갈까~요?”
“하..”
“굉장히 규모가 큰 야외입니다”
“멀어요?”
민혁의 장난에 맞춰 스무고개를 하려던게 아니라
지금 가고 있는 곳이 어딘지 몰라도 거리가 궁금했던거 뿐이다
“차로 1시간 채 안걸립니다. 다음 질문?”
“막무가내로 이게 뭐에요”
“어린이들이 특히 좋아하는 곳 입니다”
“돌아가요”
“연인들이 데이트 할때 한두번은 꼭 가는 곳입니다”
“뭐야 정말..”
“소리 지르는 인간들이 많은 곳입니다”
“집으로 차 돌려요”
잠그지도 않고 나온 문이 마음에 걸려있는 혜연과 달리
그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미소가 떠나지 않은채 운전을 하고 있다
이런식으로 막무가내로 대해도 좋을 만큼 그녀가 우스워 보이는 건지 궁금해진다
“권민혁씨. 놀아줄..”
“딩동댕~ 놀아주는곳. 놀이공원! 정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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