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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장 : 송아지를 삼켜버린 아나콘다 처럼... #... 3 (3/34)

제 1 장 : 송아지를 삼켜버린 아나콘다 처럼... 

#... 3 

가을 하늘 이라지만 오늘은 유난히 하늘이 청명하다 

건식이네 초상을 치르고 오자마자 시작된 중간시험도 엊그제 끝난 혜연은 

모처럼 가뿐한 마음으로 자연과학부 건물을 나서고 있다 

수학과에 같이 입학했던 친구들은 

그녀처럼 사정이 있어 휴학했던 몇 명을 빼고는 모두 진즉에 졸업을했다 

군대를 다녀온 것도 아니고 여자나이 25세에 2학년 이라니... 

죽어라 과외알바를 하며 2년이나 더 버텨야 졸업을 한다 

그나마 수학과에는 뒤늦게 대학에 들어온 여학생이 있어서 

왕언니라는 호칭만은 안들어도 된다 

“혜연언니~ 우리 오늘 클럽 갈건데 같이 안갈래요?” 

“가서 언니야 몫까지 재밌게 놀구와” 

“언니~ 글지말구 같이 가요” 

“과외 하러 가야해” 

강유와 같은 나이인 이수정과 민들레가 몇 번 더 조르면서 애교를 부린다 

과외 알바 하느라 동아리 활동도 안하는 그녀다 

주말마다 한가롭고 여유있게 클럽이나 다닐수 있는 처지는 아닌 것이다 

과외를 받는 학생들이야 일주일에 한번 두 시간씩 이라지만 

그런 과외를 세명이나 맡고 있는 그녀이다 

그들이 건축학부 건물 앞을 지날때 혜연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혜연아!” 

“종일오빠..” 

“다 끝났어?” 

“어” 

“시험 잘 봤니?” 

“그냥 저냥.. 기하학 개론은 망쳤구” 

“언니. 우리들 먼저 갈게” 

“그래” 

두 여학생이 혜연에게 살랑거리고 손을 흔들며 팔짱을 끼고 걸어간다 

남자가 혜연의 얼굴을 보며 근심어린 표정이 된다 

“밥 잘 안먹고 다니니? 얼굴이 반쪽이네..” 

“밥을 왜 안먹어” 

“어머님은 잘 계시고?” 

“누가 오빠 어머니야?” 

“왜 그래..” 

“아냐. 그냥 심통 한번 부린거야” 

“그 친구는... 아직도 만나?” 

“오빠가 신경쓸일 아니잖아..” 

“내가 아는체 하는거 싫으니?” 

“싫을거까지 뭐 있어” 

“걱정되서 그래. 진심으로 너... 걱정 되서.. 

끝까지 책임지지 못하고 놔버려서...” 

“봤다.” 

“뭐?” 

“강유가 우리 봤다구” 

“그 친구? 어디?” 

고개를 돌리는 남자의 눈에 강유가 들어온다 

친구들과 걸어오고 있는 강유는 무척이나 큰 키 때문에 더욱 눈에 띈다 

친구들보다 한걸음 앞서며 혜연과 남자가 나란히 있는 쪽으로 

성큼 거리고 걸어오는 강유의 눈빛이 살벌하다 

“누나” 

“강유도 오늘수업 다 끝났어? 

금요일엔 더 일찍 끝나지 않나?” 

“저 자식 뭐야” 

“뭐가~” 

“저 놈하고 말하는거 싫댔잖아” 

“지나다가 마주친거야” 

전에도 한번 강유와 험한 말다툼을 한적이 있는 남자가 

‘저 자식.. 저놈’ 이라는 호칭에 다소 불쾌한 빛이긴 해도 별다른 말없이 

혜연의 어깨를 두어번 토닥이며 말한다 

“먼저 갈게 혜연아. 밥좀 잘 먹고 다녀라 

더 이상 마르면 볼품없어” 

한걸음 발짝을 떼는 남자의 어깨를 강유가 꽉 눌러 잡는다 

남자가 고개를 돌려 강유를 본다 

“뭐야..” 

“만지지마” 

“뭐?” 

“정혜연. 만지지도 걱정하지도 마. 

댁이 무슨 자격으로 정혜연 걱정을 해!? 

비참하게 버린 전남편 자격으로?” 

“서문강유! 누가 비참하게 버려졌다 그래!?” 

“누난 가만있어! 똑똑히 들어 윤종일. 

또 한번 정혜연 붙들고 씨부렁대는거 눈에 띄면 

어디든 하나 부러뜨려 버릴줄 알아” 

이를 악물 듯 말에 힘을 실어 내뱉는 강유의 음성에 

윤종일이 작게 한숨소리를 흘리고는 혼자 걸어가자 

종일의 뒷모습을 보던 혜연의 시선이 강유에게로 돌려지며 인상을 찌푸린다 

강유 또한 그런 혜연을 보며 얼굴이 굳어져있다 

강유의 친구들이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자기들끼리 장난을 치고 있다 

“왜.” 

“........” 

“왜 화났냐고” 

“뭐가” 

“누나 지금 나한테 열받었잖아” 

“알면” 

“뭐가 열받는건데? 그 자식한테 험하게 말해서? 

생각하기도 싫은데 전남편 운운해서?” 

“.........” 

“말해보란 말야. 뭐가 그렇게 열받어?” 

“그런거 아냐” 

“뭐?” 

“정혜연. 비참하게 버려진거 아니라구” 

“그 말 때문에 그래?” 

“내가 버렸어. 끝까지 놓지 안으려는 사람. 

그 지독하고 극성맞은 모친에게 별소리 다 들어가며 

나 놓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을 내가 버렸다구” 

혜연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강유가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내용이다 

스스로도 이기적이라 생각하면서도 남자가 그녀를 가혹하게 버렸길 바랐다 

그래서 눈꼽만치라도 남자에게 미련이 남아있지 않기를... 

“내가 너무 힘드니까. 나 편하자고 그 사람 버렸단말야” 

“씨발..” 

“쌍소리 하지마” 

“.........” 

“친구들하고 가” 

“누나랑 같이 갈거야” 

“과외 가야 하는거 알잖아” 

“7시부터잖아” 

“오늘 가르칠거 준비해야지. 

요즘 애들 영악해서 준비 안해가면 금새 눈치채고 맞먹어” 

“세명 다 여자인거는 확실하지?” 

“뭐?” 

“사내새끼들 아닌거 틀림없냐고” 

“넌 고딩한테도 질투하니?” 

“고딩은 사내놈 아냐?” 

혜연이 어이없는 실소를 터트린다 

덩치 큰 곰이랄지 사나운 짐승무리의 우두머리 같은 강유지만 

이럴때는 나이어린 연하 라는게 실감이 나는 그녀이다 

입이 댓발은 나와 툴툴대는 강유를 친구들에게 보내고 

혜연은 혼자 집으로 돌아와 오늘 가르칠 부분의 예습을 했다 

샤프펜슬을 끄적이던 혜연이 움직임을 멈추고 멍하니 생각에 잠긴다 

5년전... 갓 태어난 병아리처럼 풋풋하던 새내기 정혜연이 

1살 많은 윤종일을 만난건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였다 

당신 한입 살아가기도 빠듯한 집안사정에 대학 등록금까지야 어찌어찌 해결했지만 

다행히 기숙사 생활을 한다고는 해도 만만찮게 나가는 교재비며 

필요한 돈을 모친에게 바랄수 없던 혜연은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저녁타임 알바를 했었다 

모든게 어설프기만한 혜연이 실수로 물컵을 떨어뜨리며 종일의 바지를 흠뻑 적셨고 

대화를 하다보니 같은 학교의 건축학부 2학년 선배라는걸 알고 반가워했다 

그리고 둘은 정말로 빠른 속도로 사랑에 빠져버렸다 

그녀에게 그는 첫남자이고 첫사랑 이었다 

6개월쯤 지난 그해 늦가을에 윤종일 모친의 격렬한 반대를 묵살하다시피하고 치른 

결혼으로 혜연은 아기자기한 미래를 꿈꾸며 마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지난 과거 따위 회상하며 뭐하는 거람...”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혜연은 아까부터 자꾸 늘어지는 몸을 추스려 

과외 준비를 마무리 짓고 원룸을 나섰다 

그리고 그 시간.... 

학교 앞의 주점에 모여 술을 마시고 있는 강유와 친구들.... 

모두 경영학부 친구들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강유와 붙어다니는 구재진이 소주를 한입에 털어넣고 말한다 

“강유야. 우리학교에 서문씨가 한개 더 있는거 아냐?” 

“그래?” 

“기집애야 기집애. 이름이 뭐라더라.. 

그래 서문진. 진이야 진이. 음대 성악과” 

서문 이라는 성씨가 워낙에 귀성이다 보니 강유도 반가운 마음이 든다 

경영학과의 귀염둥이로 통하는 김시운이 눈웃음을 흘리며 묻는다 

“이쁘냐?” 

“한번 봤는데... 존나 덩치야 덩치” 

“클클.. 서문씨 내력 아냐 그거?” 

“진짜 서문씨 혈통이 그런가봐?” 

“븅신들.. 성악하는 애들은 등빨 좋은애 많아 임마” 

강유를 포함해 4명의 사내놈이 주거니 받거니 술을 마시다 보니 

다들 제법 취해서 떠들어대는 소리가 시끄럽다 

술도 별로 안마시고 아까부터 말수가 적어지며 

혼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심각한 얼굴인 강유를 재진이 툭 건드린다 

“뭔 생각을 그렇게 해” 

“아냐” 

“그 누나 생각하냐?” 

“지금 몇시냐?” 

“10시 넘었어. 10시 20분” 

“우리 혜연이 과외 끝나고 집에 갔겠다” 

“그 누나가 그렇게 좋으냐?” 

“어” 

“뭐가 그렇게 좋아? 어디가?” 

“그냥 다” 

“나이도 우리보다 4살이나 많고... 

솔직히 얼굴은 꽤 이쁘지만 그 나이에 이혼경력도 있는데 

둘이 암만 좋아해도 니네집에서 알면 뒤집어지지 않겠냐?” 

“시끄러 임마” 

“보통 집안이라야 말이지~” 

“입 다물어 짜식아” 

“진영그룹 차남이 4살 연상 이혼녀랑 죽고 못산다? 

이거 니네 영감이 알면 거품 물고 쓰러질껄?” 

강유의 얼굴이 잔뜩 굳어진다 

그렇게 거나하게 큰 대기업은 아니지만 

꾸준히 성장해 나가고 있는 진영그룹은 재계에서 제법 입지를 굳힌 그룹이다 

강유에게는 형과 남동생이 하나 누나와 여동생이 하나 있다 

5남매중 셋째인 그는 강유의 부친이 장남보다도 더 아끼는 듯한 아들이다 

차로 1시간이면 넉넉하게 갈수 있는 거리의 학교지만 

고집을 부려 혼자 독립해 나와서 학교 근처의 오피스텔에 살고 있다 

“나 먼저 간다” 

“왜 임마. 듣기 싫은 소리해서 삐졌냐? 삐졌어?” 

“니 말 따위는 신경도 안쓴다 짜식..” 

“그 누나한테 가냐?” 

“신경 끊어라~” 

“서문강유..!” 

“왜?” 

“케케.. 계산하고 가아~ 알라븅” 

“미친놈” 

“난 강유의 지갑을 알라븅해요~” 

“난 너의 주접이 테러블하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선 강유가 

지금까지 들이부은 술과 안주값을 치르고 주점을 나온다 

큰길 쪽으로 걸으며 핸드폰을 들어 0번을 꾸욱 누르자 귀에 익은 컬러링이 흐른다 

혜연의 컬러링은 강유가 바꿔주지 않으면 몇 달이고 같은 음악이다 

강유가 아는 다른 여자들은 취미생활처럼 컬러링을 바꿔주는데 

도무지 그런거에는 관심도 없는 혜연이다 

<어.. 강유야> 

“집이야?” 

<지금 막 들어왔어> 

“오늘 신림동 아니었어?” 

<예예. 금요일엔 신림동. 맞습니다> 

“왜 이제야 들어가?” 

<마트 들렀다 오는거야> 

“나 맛있는거 해주게?” 

<너 이리로 오려구?> 

“어” 

혜연이 장봐온걸 푸는지 핸드폰 너머로 부시럭거리고 

냉장고를 여닫는 소리가 들린다 

<그냥 오피스텔로 가> 

“왜?” 

<나 오늘 피곤해> 

“누가 뭐 한대?” 

<술 한잔 걸치셨나본데 댁으로 가서 주무세요> 

“맛있는거 해줘” 

<밤늦게 무슨 먹을거 타령이야> 

“맛있는거 안해놨으면 누나 먹을거야” 

<누나는 안사왔는데?> 

“쿡.. 난 한번 먹기 시작하면 끝짱보는거 알지?” 

<누나라는 먹거리가 오늘 신통치 않아> 

“왜? 어디아파?” 

<조금... 상하려나봐> 

“기다려. 당장가서 맛 갔나 먹어봐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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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장 : 송아지를 삼켜버린 아나콘다 처럼... 

#4.. 

혜연의 원룸은 학교에서 차로 20분쯤 가는 거리다 

원룸에 들어서는 강유가 혜연의 안색부터 살피더니 손을 올려 이마를 짚어본다 

“진짜.. 열도 조금 있네?” 

“괜찮어” 

“해열제 있어?” 

“그딴거 안키우잖아” 

“어디 어디가 안 좋아? 목은 안 아퍼?” 

“조금.. 편도가 부은거 같아” 

“근육통도 있어? 기침이나 콧물은 없지?” 

“약학과로 전과했니? 조제라도 해주게?” 

“약국 갔다올게” 

“지금 시간이 몇신데. 근처 약국 다 닫았어” 

“갔다올테니까 아무것도 하지 말고 누워있어” 

쟈켓을 다시 걸치고 무작정 나가는 강유를 보며 혜연은 자신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평소보다 뜨끈한게 열이 오르긴 하는 것 같다 

건강 체질이라 여간해서는 아프지 않은 혜연이다 

보통은 감기한번 치르지 않고 겨울을 나는 편인 그녀이지만 

한번 아프면 정말 제대로 된통 앓아버리는 그녀이기에 조금은 걱정이 된다 

얼마후에 돌아온 강유의 손에 작은 쇼핑백과 약 봉투가 들려있다 

“어디까지 갔다 온거야?” 

“택시타고 몇 바퀴 돌았어” 

“그냥 푹 쉬면 될걸 뭐 하러” 

“저녁은 먹은거야?” 

“대충” 

“안먹었지?” 

“대충 먹었어” 

“대충 뭐 먹었는데” 

사실 학교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뒤로 

과외를 마치고 마트에 들러 나올때 먹은 200m 우유 한팩이 그녀의 저녁이었다 

강유가 그럴줄 알았다는 듯 손에 들고있던 쇼핑백에서 죽을 꺼내 그릇에 덜어낸다 

“걸렀지? 그럴줄 알았어” 

“죽까지 사온거야?” 

“씻고 나올테니까 남기지 말고 이거 다 먹어” 

“자고 가게?” 

“내 여자가 골골한데 그럼 그냥 두고 가?” 

“골골은 무슨..” 

“걱정마. 아픈 여자 안을 정도로 짐승은 아니니까” 

조그만 2인용 식탁위에 올려놓은 죽을 성의없이 떠먹고 있으니 

바지만 입은채 젖은 머리를 털어내며 목욕탕에서 나오는 강유가 인상을 찌푸린다 

매일하는 수영으로 단련된 강유의 넓고 단단한 가슴팍과 팔 다리는 마치 날렵한 표범 같다 

키가 무척 크고 덩치가 좋은 편인데도 둔해 보이지 않는다 

“아직도 먹고있어?” 

“그만 먹을래” 

“안돼. 다 먹어” 

“됐어. 대충 씻고 일찍 잠이나 잘래” 

목욕탕으로 들어가는 혜연을 근심어린 얼굴로 보고 있던 강유가 

반도 못 먹은 죽그릇을 보며 또다시 인상을 찌푸린다 

“하여튼 말도 존나 안들어요..” 

죽 그릇을 비워내고 몇 개 안되는 설거지를 정리한 강유가 

목욕탕에서 나와 침대에 그대로 쓰러지듯 눕는 혜연의 옆으로 간다 

“아.. 해봐” 

“왜?” 

“체온 좀 재보게” 

약과 함께 사온건지 강유의 손에 기다란 수은 체온계가 들려있다 

혜연이 눈을 감은채 입을 벌리고 체온계가 들어오길 기다려도 기척이 없자 눈을 뜬다 

그녀의 입술에 머물러 있는 강유의 시선을 보며 그녀가 피식 웃는다 

“뭐.. 뭐가 웃겨” 

“키스하고 싶어 죽겠지?” 

“체..” 

“키스까지 만이야” 

침대에 걸터앉은 강유가 혜연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다가 

상체를 숙여 가볍게 키스를 한다 

맹세코 가볍게 끝내리라 생각했던 강유지만 어느새 키스가 깊어지고 있다 

그에겐 늘 이게 문제다. 밀폐된 공간 안에 그녀와 있는것 만으로도 그의 남성은 늘 꿈틀댄다 

이대로 계속 했다간 끝까지 가고야 말 것 같은 자신을 추슬러 

혜연에게서 입술을 떼어내는 강유의 눈빛은 이미 뜨거운 욕망으로 잔뜩 달아올라있다 

“어떻하니.. 계속 하고 싶어?” 

“내가 짐승인줄 알아?!” 

“아니었나?” 

“아~ 입이나 벌려” 

혜연의 입에 체온계를 물려놓고 

공연히 얼마 안되는 부엌살림을 정리하며 마음을 가라앉히는 그가 

수은체온계를 빼내더니 이리보고 저리보며 곤란한 얼굴이다 

“이거 어떻게 보는 거야?” 

“바보.. 이리 줘봐” 

체온계를 들여다본 혜연이 다시 건네주는걸 받아든 강유는 

아무리 들여다봐도 어떻게 눈금을 읽는 건지 모르겠다 

“몇도야?” 

“38도 4” 

“꽤 높네.. 앉아봐 약 먹게” 

“해열제?” 

“38도 넘으면 먹으랬어. 

쌍화탕이랑 목감기약도 사왔으니까 같이 먹자” 

얌전하게 약을 받아먹은 혜연이 다시 침대에 눕자 

강유가 바지를 벗어 옷걸이에 걸고는 불을끄고 침대 안쪽으로 들어가 눕는다 

아무리 얇은 천이라도 옷을 걸치고는 못자는 강유인지라 

속옷만 입은채 그녀의 옆에 누워 자연스레 팔 베게를 해준다 

“좋으네..” 

“뭐가?” 

“다른 때는 모르겠는데... 

몸이 안좋을때 혼자있는건 진짜 비참하거든” 

“아플때 말고는 나 필요 없다고?” 

볼멘소리를 하는 강유를 보고 작게 웃는 혜연이 

몸을 돌려 강유쪽으로 돌아 누으려 하자 그가 움찔거린다 

“붙지마” 

“응?” 

“똑바로 누우라고” 

“푸후..” 

“웃지마. 난 진짜 장난 아니란 말야” 

“발정난 곰 같다니까” 

“오늘 도서관에서 인터넷 신문을 보는데... 

송아지 한 마리를 통째로 삼킨 아나콘다 기사가 있더라” 

“징그러...” 

“내가 무슨 생각을 했게?” 

“과연 맛있었을까 하는 생각?” 

“아나콘다가 그 소를 죽도록 사랑한건 아닐까.. 

지독하게 사랑해서 통째로 삼켜버린건 아닐까..” 

“진짜 깬다” 

“내가 그렇거든” 

“뭐가?” 

“나도 누나를 통째로 삼켜버리고 싶을때가 있어 

머리카락 한올.. 손톱쪼가리 하나 안남기고 

정혜연이라는 여자를 몽땅 삼켜서 내 안에서 소화시키는 거야” 

“무서워라..” 

“그렇게 하면... 정혜연이 온전히 내 소유가 되는걸까? 

내 안에서 완전하게 녹아 내 피가 되고 살이되서 하나가되면 

혹시라도 버려지게 될까 두려워하지 않고 죽을때까지 함께잖아” 

“똥으로 빠지는건 빼고” 

“누난 늘 얘기가 심각해지면 농담으로 얼버무려” 

“그 아나콘다는 어떻게 됐어?” 

“얹혀서 죽을거 같으니까 결국 다시 토해냈대” 

“거봐.. 욕심 부리면 벌 받어” 

“누나는 늘...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있는 사람 같아서 불안해 

어느날 갑자기 나 같은건 필요 없다고 

가차없이 버리고 도망가 버릴까봐 무서워” 

혜연이 한숨을 삼키며 강유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강유가 그런 생각까지 하고있는줄 몰랐던 그녀이다 

점점 더 혜연에게 집착하고 빈틈없이 소유하고 싶어하는 강유가 조금은 부담스럽다 

그의 부모님이 아들의 감정을 알게 되면 

당장이라도 정혜연이라는 여자를 떼어내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가난한 과부의 딸. 

스무살 가을에 결혼을 해서 23살 가을이 되기 전에 이혼을 했다 

24살 한해를 멍하니 아무것도 하지 않은채 시간을 잡아먹고 살았다 

다시는 결혼 따위 하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있는 혜연이다 

난관폐쇄로도 모자라 심각한 자궁기형. 

그녀의 애기방은 여자만이 할수있는 자랑스런 본분을 할 수 없는 몸이다 

애 딸린 홀아비의 가족이 아니라면 어느 집안에서고 고개를 저을 악조건인 것이다 

“죽어도 놔주지 않을거야” 

“........” 

“플로리다에서 악어를 삼켜 배가 터져 죽은 뱀처럼 

누나를 삼키다 심장이 터져 죽는 한이 있어도 

절대로 놔주거나 도망가게 두지 않을거야” 

“어디서 그런 기사만 읽어” 

“사랑해 누나..” 

“........” 

“그래도 지금은 붙지마” 

“훗..” 

“안고 싶어 미칠거 같아” 

“안아..” 

“농담해? 아프다며” 

“열도 내린거 같구 암치도 않아” 

“살살할 자신 없어” 

“괜찮아” 

“진짜 덮쳐버린다?” 

“강유야..” 

“왜” 

“마음껏 사랑해... 찌꺼기가 남지 않을 만큼 마음껏.. 

될수있으면 뜨겁게 타올랐다가 차갑게 식어줘 

그리고 가능한... 내가 널 버리기 전에 네가 나를 버려줘 

...........부탁이야....” 

강유의 눈빛이 매서워진다 

날렵하게 몸을 움직여 혜연의 위로 올라간 강유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내려다본다 

혜연의 말이 얼마나 강유를 화나게 했는지 그의 눈이 말하고 있다 

“내가 말했지. 나랑 끝내고 싶으면 죽이라고 

나를 못죽이겠으면 자살해. 뒤따라간다고 약속할 테니까” 

혜연의 작은 한숨을 강유의 입술이 막아버렸다 

보통때보다 거칠고 강하게 키스를 하던 그가 혜연의 잠옷을 순식간에 벗겨버린다 

그녀의 목덜미에 이빨을 박아 깨물며 빨아들여 여러군데 키스마크를 만든다 

강유의 너무 강한 흡입에 그의 얼굴을 밀어내려는 그녀의 손목을 꽉 잡아 

큼지막한 손으로 두손을 모두 움켜쥐고 머리위로 꼼짝 못하게 눌러버린다 

그녀의 다리 한쪽을 잡아올린 강유는 혜연의 가슴을 

거칠게 빨아들이며 양쪽 가슴에도 사정없이 키스마크를 만들고는 

단단해진 자신의 일부를 그녀에게 깊숙이 밀어넣는다 

“아... 하아..” 

혜연의 말 때문에 자신이 얼마나 화가났는지 보여주려는 것처럼 

그녀의 몸이 안좋다는걸 알면서도 그의 움직임이 다른날보다 오히려 

무자비하고 가차 없이 부딪혀온다 

그녀의 허리를 잡아 들어올리고는 온몸을 밀어넣으려는 듯 

깊숙이 들어가있는 그의 페니스 끝이 더 이상 갈곳없는 끝에 닿아있는 듯 하다 

혜연이 몇 번의 오르가즘을 느끼고 지친 나머지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할 때쯤에야 

그가 그대로 사정을 하며 그녀의 마른 몸 위에 무너져 내린다 

“정혜연...” 

뜨겁고 마른숨을 헐떡이며 말없이 숨을 고르고 있는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지독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강유가 말한다 

“사랑해.. 사랑해..” 

그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다른 말을 하고 싶지만 모르겠다 

사랑한다는 말은 너무도 진부하고 식상한 표현 같아 마음에 들지 않지만 

달리 어떤 말을 해야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수 있는지 알 수 없는 강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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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장 : 송아지를 삼켜버린 아나콘다 처럼... 

#... 5 

월요일 오전수강을 마치고 이수정, 민들레와 같이 

학교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혜연은 혼자 떨어져 나와 벤치로 갔다 

그녀는 되도록이면 학교에서는 강유와 함께 움직이지 않는다 

자신 혼자만에 관한거라면 뭐라고 떠들어대건 신경쓰지 않는 그녀지만 

그녀 때문에 강유가 남에 얘기 좋아하는 가십꾼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건 싫다 

결국 이틀동안 지독하게 앓았던 그녀는 오늘은 거의 정상 컨디션을 되찾았다 

그날 밤.... 

‘네가 나를 버려줘... 부탁이야..’ 라는 말을 들은 강유가 

오히려 평소보다 거칠게 그녀를 안았던걸 생각하며 혜연이 작게 한숨을 내쉰다 

당분간은 터들넥을 입고 다니지 않으면 안될정도로 목 여기저기에 키스마크가 찍혀있다 

다음날. 열은 더 높아지고 목이 부어 죽도 제대로 못 삼키는 혜연을 보며 

강유는 어린애처럼 징징거리고 스스로를 책망하는 말을 중얼거리면서 

그녀 옆에서 잠시도 떨어지지 않고 찬수건으로 혜연의 몸을 식혀주었다 

‘제길.. 짐승이야 난..’ 

‘뒈져버리는게 낫지.. 아픈 누나를 그렇게..’ 

‘이제부터 서문짐승이라고 불러 누나’ 

‘목말라? 물줄까?’ 

‘일어날 힘없으면 누워있어. 입으로 먹여줄게’ 

‘역시 난 짐승이야.. 이 상황에서도 그딴 말을..’ 

‘근데 누나... 열 올라서 아픈 모습이 묘하게 섹시해.. 어흑’ 

어제 오후쯤에야 겨우 열도 떨어지고 몸이 조금 가벼워지자 

발걸음이 못내 안떨어진다는 강유를 억지로 오피스텔로 돌려보내고 

그나마 주말이라 과외에 지장이 없다는 거에 감사해하며 

하루 종일 징글맞을 정도로 자고 또 자며 푹 쉬었다 

짧게 한숨을 내쉬는 혜연은 강유가 했던말을 머릿속에서 끄집어내 들여다보았다 

혜연의 머리에 한자 한자 새겨 넣어 주려는 듯이 했던 말이라 

거의 토시하나 안 틀리고 기억하고 있다 

“플로리다에서 악어를 삼켜 배가 터져 죽은 뱀처럼 

누나를 삼키다 심장이 터져 죽는 한이 있어도 

절대로 놔주거나 도망가게 두지 않을거야” 

조금씩 거리를 두기 시작해야할 것 같다 

너무 늦어버리기 전에... 

그의 심장이 정혜연을 삼키다 얹혀 죽어버리기 전에... 

“혜연아” 

“어? 종일오빠” 

친구들과 함께 걸어가던 윤종일이 그녀를 보고 환하게 웃으며 다가오더니 

친구를 먼저 보낸후 혜연의 앞쪽에 있는 벤치에 마주보고 앉는다 

“혼자 멍하니 뭐하는 거야..” 

“그냥..” 

“뭐 안좋은일 있니?” 

“안 좋을일이 뭐가 있겠어” 

“표정이 별로 안좋아 보였거든” 

품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 피워 무는 종일을 보니 금새 일어설 것 같지가 않다 

그의 입에서 흩날리는 담배 연기를 보던 혜연이 그의 입에서 담배를 가져온다 

“뭐하는 거야” 

“나도 한번 피워보게” 

“뭐?” 

“이거 피면 머리가 핑~ 돈다며... 

여기가 근질거릴때 피면 좋을거 같아서 

사고회로가 콱 막혀버리는거 같을거 아냐” 

혜연이 말한 ‘여기’는 심장부위다 

어설프게 한모금 빨아들인 담배연기를 그대로 입밖으로 뱉어내는 

그녀를 보며 종일이 작게 웃고는 담배를 뺏어온다 

“누가 보면 어쩌려 그래” 

“보면 보는거지 뭐.. 내가 만약 담배를 배운다면 

난 어디에서든 내가 피고 싶을때 피울거야” 

“그래. 넌 주늑들수록 더 당당하게 행동하지 

속으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주제에 말야” 

“가능하면 뒷담화로 해줘. 

속 좁은 인간이라 표정관리가 안된단 말야” 

“어디 아팠니? 얼굴이 까칠하네?” 

“하지마” 

그녀의 얼굴로 손을 뻗는 종일의 팔을 향해 

손바닥을 뻗어 제지하는 제스추어를 보여주는 혜연의 눈치를 보던 

종일은 하기 어려운 말을 힘겹게 꺼내듯 묻는다 

“기분 나쁘게 듣지 말고... 돈... 필요하면 말해 

최여사 모르게 내가 가지고 있는 돈도 꽤 되니까.. 

과외알바 힘들어서 그렇게 마르는거 같다” 

“받을 만큼 받았잖아” 

윤종일과 결혼한 뒤에 1학년을 마치고 휴학을 했다 

막무가내로 결혼해버리는 아들과 혜연에게 그의 어머니 최여사가 

그녀에게 내건 조건이 2년 동안은 본가로 들어와 살면서 윤씨집안 가풍을 익혀라. 

그 안에 아기를 낳아서 어느정도 키워놓은 후에 복학을 해라 였다 

아마도 아기를 낳고 키우다 보면 본가에서 나가는 것도 

복학을 하는 것도 어려울 거라 계산된 조건이었을 거다 

1년이 다 되도록 아기가 생기지 않아 종일과 혜연 모두 검사를 받았다 

그리고 검사결과 혜연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걸 알자마자 

최여사는 기다렸다는 듯 이혼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끝내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은뒤 남겨진건 너덜너덜해진 심장과 

통장에 들어와 있는 위자료라는 명목의 돈이었다 

아들이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 

한푼도 안주고 쫓아내려던 최여사가 적선하듯 준 돈으로 지금의 원룸을 샀다 

학교도 별로 멀지 않고 신축이라 깔끔해서 맘에 들었는데 

월세만 되지 전세는 놓지 않는다는 주인의 말에 

충동적으로 그 건물에 나와 있는 5층의 원룸을 사버린 것이다 

그녀의 자궁에 이상이 있다는걸 알게된후 학교까지 휴학하고 

유명 산부인과를 끌고 다니며 어떻게든 임신가능성을 붙잡아 보려던 종일은 

이혼 후에 은신처라도 되는양 군대를 갔다가 제대해서 2학기때 복학을 했다 

그리고 그녀는 1년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은채 통장의 돈만 빼먹으며 살았었다 

통장에는 졸업때까지 등록금 정도의 빠듯한 돈이 남아있다 

크게 돈쓰는 데가 없는 혜연이기에 

과외로 들어오는 돈은 생활비를 제외하고는 모두 저금을 하고있다 

“오빠 얼른 가라. 지나가다 강유가 보면 또 시비걸라” 

“그 친구가 진영그룹 아들인거 알고 있니?” 

“TV에 아파트 광고 때리는 그 진영?” 

“그래. 건축으로 큰 기업이지.. 

지금은 계열사도 꽤 되던데” 

“오빠네 아버님 공장이 진영 하청공장 아니었나?” 

“맞아” 

제법 유복한 집안의 차남이라고만 알고 있던 혜연이다 

진영그룹 이라면 그냥 유복한 정도가 아니다 

학생 주제에 월세가 백이 넘는다는 고급 오피스텔에 살고 있어도 

그렇게까지 큰 기업의 아들이라는건 생각도 못했다 

“몰랐나보네?” 

“어..” 

“연아..” 

“그렇게 부르지마” 

“미안.. 여전히 습관처럼 튀어나오네..” 

“.......” 

“오해 말고 들어.. 난 진심으로 널 걱정해.. 

내 밸이 꼬일 정도로 보란 듯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나하고는 잘 안됐지만 정말 근사한 놈 만나서 

배 아플 만큼 잘 사는 모습 보고 싶다” 

“.......” 

“근데.. 그 친구는 조건이 너무..” 

“무슨 말인지 알겠어” 

“미안하다” 

“1000번째야” 

“뭐가?” 

“오빠가 나한테 미안하다는 말” 

“에이 설마~” 

“습관이 되버린 거야? 아님 내 이마에 

‘미안’ 이라고 써있어서 볼때마다 읽어주는 거야?” 

“그만 갈께.. 내 친구 기다리겠다” 

벤치에서 일어서는 종일에게 혜연이 쓴웃음을 지으며 가볍게 손만 들어보인다 

혜연도 잘 알고 있다 

윤종일이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는걸. 

진심으로 종일은 혜연을 걱정하고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그냥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도 남자로서의 사심을 가지고 하는 말도 아닌걸 안다 

그 시간 강유는 구재진과 학교 앞에서 부대찌게를 먹고 있었다 

강유가 학과에서 친하게 지내는 친구는 모두 세명이 있지만 

고등학교 때부터 제일 친했고 어렵게 강유와 같은 대학까지 들어온 재진은 

서로 속내까지 편하게 말할 수 있는 유일하고 귀한 친구다 

“시운이까지 여자친구 생겨서 솔로인 놈이 없네?” 

“다같이 한번 보자고 하더라?” 

“그래?” 

“넌 니네 누나 같이 어울리는거 별로지?” 

“누나가 별로 안 좋아해” 

“더 심각해지기 전에 정리해야 하는거 아니냐?” 

“이자식이 근데... 너 자꾸 헛소리 할래?” 

“걱정되서 그런다 임마. 걱.정.” 

“밥이나 처먹어 짜식아” 

“고딩때 그 옥상 고양이처럼 될까봐 솔직히 걱정된다” 

강유가 매서운 눈으로 재진을 본다 

그가 무척이나 싫어하는 대화주제라 재진이 여간해서는 입밖에 꺼내지 않는 얘기다 

그냥 어색하게 웃어버리고 마는 재진이지만 그는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선명하다 

고등학교 2학년때 강유가 옥상에서 키우던 고양이를 어떻게 했는지... 

난간에서 돌아서던 무표정한 얼굴과 도저히 감정을 읽을수 없던 눈동자를... 

저녁시간... 

혜연이 과외학생의 집에서 숙제로 내주었던 문제들을 채점하고 있다 

여고 1학년인 박윤정이 채점을 하는 그녀에게 아까부터 같은 말을 하고 있다 

“내일 와요 샘. 응?” 

“헷갈리니까 자꾸 말시키지마” 

“나도 시낭송 하나 한단말야” 

“에구.. 시낭송 씩이나?” 

“낼은 과외도 없는 날이라며요~” 

“시간되면 간다니까” 

“우리학교 문화제는 진짜 볼만해요 

와요 샘~ 응? 내 시낭송 듣고 감상평 해줘요” 

“난 수학선생이지 문학선생이 아냐” 

“후후.. 우리 문학샘 소개해줄께. 얼마나 잘생겼는데~ 

학교에서 인기 짱이야. 31살인데 총각이거든요” 

“관심 없답니다” 

“그러지 말구 와요~ 응?” 

“정확히 니가 시낭송 하는 시간이 몇신데?” 

“와~! 오는거죠? 내가 낼 일찍 문자 보내줄께요” 

귀엽게 좋아라 웃는 여학생을 보며 혜연도 픽 웃어버리고 만다 

혜연이 가르치고 있는 나머지 아이들과는 달리 붙임성도 좋고 순수한 매력이 있는 아이다 

별로 멀지 않으니까 잠깐 가서 눈도장만 찍어주고 와야겠다 생각하며 

강유를 데리고 갈까 생각했던 혜연이 머리를 털어내며 생각을 고친다 

조금씩 거리를 두기 시작하자고 맘 먹은게 몇 시간도 안지났으면서 

습관처럼 강유를 생각해버렸다 

“문화제 때문에 공부 제대로 안해놨지? 

뭐가 이렇게 많이 틀린거야? 똑바로 앉아봐” 

“피.. 우리 선생님. 얼굴은 이쁜데 쫌 쌀쌀맞다니까..” 

제자의 틀린 문제들을 바로 잡아주고 

과외를 마친후 집으로 돌아온 혜연이 계단을 오르는데 

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강유가 보인다 

“언제부터 기다린거야?” 

“쫌 아까 왔어” 

“그러고 있는거 싫어하는거 알면서” 

“그럼 키를 주던가” 

“저녁은 먹은거야?” 

“아니. 누나랑 같이 먹으려고 안먹었어 

오늘 학교에서 한번도 못봤잖아” 

“꼭 그렇게 매일 얼굴도장을 찍어야해?” 

“얼굴도장은 몰라도 입술 도장은 매일 찍어줘야지” 

키를 돌려 들어간 혜연이 가방을 내려놓고 곧바로 주방으로 가자 

쫄래쫄래 따라온 강유가 그녀를 뒤에서 꼭 끌어안는다 

“놔봐.. 얼른 저녁 준비해야지” 

“밥보다 누나 입술부터 먹고 싶어” 

“나도 배고프단 말야. 내 입술은 나중에 먹어” 

“싫어” 

혜연을 돌려세운 강유가 고개를 숙여 혜연에게 키스를 한다 

그녀의 등을 감싸안은 팔에 힘이 들어가면서 키스도 점점 농도가 짙어진다 

혜연이 일찌감치 강유를 밀어내자 그가 눈썹을 찌푸린다 

“왜 그래?” 

“뭐가” 

“성의없이 받아들이잖아” 

“배고프다니까” 

“무슨일 있어?” 

“무슨일이 있어” 

“피곤할텐데 나가서 사먹자” 

“그냥 대충 찌게만 하나 끓여서 먹지 뭐” 

돼지고기를 넣은 김치찌개를 준비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침대에 걸터앉은 강유가 눈으로 쫓고 있다 

조금전의 성의없는 키스와 금새 밀어내 버리던 혜연을 생각하며 그는 공연히 불안해진다 

그녀는 언제라도 날아오를 준비가 되있는 새 같다 

눈꼽만치의 미련도 없이 훌쩍 날아가버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 처럼... 

오늘 오후에 강유는 부친에게 갔었다 

뜬금없이 회사로 찾아오라는 전화가 왔던 것이다 

회장실의 큼직하고 푹신한 쇼파에 앉아서 여비서가 놓고 나간 허브티를 마시고 있는데 

안락의자에 그대로 앉은채 강유를 보던 서문회장이 별일 아니라는 듯 말을했다 

“즐기는건 좋은데 내년쯤엔 정리해라” 

“뭐를요?” 

“그 애만 만나지 말고 다른 여자애들도 만나고” 

“정혜연 말씀하시는 거에요?” 

“니가 결혼한 후에 은밀히 만나는건 상관안하마” 

“........” 

“설마 그 가당찮은 계집애랑 

결혼까지 생각하는건 아니겠지?” 

“........” 

“왜 대답이 없어” 

“아버지 말이 재밌잖아요. 

4살이나 많은 이혼녀랑 결혼이라니... 

내가 그렇게 덜떨어진 놈으로 보이세요?” 

“그래.. 너라면 그런 어리석은 생각 안할줄 알았다” 

“말 잘듣고 착해서 적당히 데리고 노는거에요 

싫증나면 갈아탈거니까 걱정 마세요” 

만족한 얼굴로 미소를 짓는 부친을 뒤로하고 나오면서 

역시 몰라서 그냥 두고 있던게 아니었구나 싶어 쓴웃음이 났다 

그의 부친은 냉정하고 빈틈없는 성격이다 

그냥 방치해두고 있는것처럼 보여도 아들의 사생활까지 모두 꿰고있는거다 

강유가 그 자리에서 반박하거나 

정혜연이란 여자에게 심각할 정도로 집착하고 있다는걸 알면 

그 뒷감당은 그가 아니라 고스란히 그녀의 몫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는 어리석지 않다. 쓸데없이 벌써부터 부친을 자극해 

그녀와의 관계를 위태롭게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혜연에 비해 그는 아직 어린 나이다 

얼만큼의 시간을 벌어 놓은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안에 어떻게든 부친의 마음을 잡을 방법을 찾아내야 할것이다 

찌게를 약한 불에 올려놓은채 금새 다되었다고 신호를 보내는 밥통을 열어 

주걱으로 밥을 뒤집고 있는 혜연의 뒷모습까지도 사랑스럽다 

그녀가 안듣는다고 그런 말을 했던게 지금까지도 마음에 걸려있는 강유가 

고백이 아닌 다짐하듯 말한다 

“사랑해 누나” 

“응..” 

“누나는... 한번도 말해준적 없는거 알아?” 

“뭐가 또~” 

“내가 사랑한다고 할때마다 응 아니면 알아.. 

‘나도’ 라는 말조차 못하겠는 거야?” 

“다됐어. 이리와 밥이나 드셔” 

“말로 해버리면 감당이 안될거 같아? 

누나 혼자 적당히 긋고 있는 선이 끊어져 버릴거 같아서?” 

“너 오늘 왜 그래?” 

“나중에 비상구로 써먹으려 그래? 

내가 언제 너 사랑한다고 한적 있느냐. 

혼자 멋대로 착각한건 니가 아니냐 하면서 

그 비상구로 잽싸게 빠져나가려고?” 

“괜한 시비 걸거면 돌아가” 

“사랑해 누나” 

“........” 

“사랑해” 

“그만해..” 

“사랑한다고!!” 

“그만 하란 말야!” 

“사랑해! 사랑해! 사랑한다고!!” 

들고 있던 밥공기를 거칠게 식탁에 내려놓은 혜연이 

강유에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팔을 잡아끌어 일으키더니 

현관 쪽으로 등을 밀어낸다 

“돌아가” 

침대에서 두 세발짝.. 혜연에게 등을 떠밀리던 강유가 그 자리에 버티고 선다 

혜연이 뒤에 서면 보이지도 않을 만큼 넓은 등판을 그녀에게 내맡긴채 

꿈쩍도 않고 버티고 있는 강유를 애써 밀어내려 하고 있다 

그가 갑자기 뒤돌아서 혜연을 끌어안는다 

손가락 하나 만큼의 공간도 허용치 않으려는 듯 있는대로 힘을 줘 꽉 끌어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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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늪... 

                                     제 2 장 :  내것이 안될바엔'''

#... 1 

귀여운 제자 박윤정에게 문자가 왔다 

[6시30분쯤 하게될듯] 

[접수] 

[ㅋㅋ 6시까지 정문에서 만나요 쌤] 

[O.K] 

[띠용~ 눈 튀나오게 이쁘게 하고오삼] 

깜찍한 제자의 문자에 혜연이 혼자 픽 웃는다 

점심을 먹은뒤 캔커피를 뽑아들고 함께 수다를 떨고있던 이수정이 

혼자 피식거리고 웃고 있는 혜연을 보며 이유도 모른채 따라 웃는다 

“뭐가 글케 재밌어 언니?” 

“내 깜찍냥 제자의 문자가 재밌어서” 

“과외 하는애?” 

“응” 

“요즘 애들 싸가지 별로라 가르치기 힘들지 않아?” 

“하이고~ 졸업한지 얼마나 됐다구 요즘 애들?” 

“치.. 어쨌든 난 20대야. 

10대랑 묶어서 취급하지 말아줘” 

혜연이 보기엔 거기서 거기다 

오후에는 미분방정식 수업만 받으면 끝난다 

일찌감치 원룸으로 돌아온 혜연이 샤워를 마치고 나왔더니 

부재중 전화가 왔음을 알리는 멘트가 나오고 있다 

강유이리라 생각하며 본 핸드폰에는 시골집 전화가 떠있다 

곧바로 시골집으로 전화를 해도 받지 않는다 

모친도 혜연도 서로 전화통화를 자주하는 편은 아니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서 몇 번을 해도 

시골집 전화는 단순한 벨소리만을 들려주며 응답이 없다 

“전화해놓고 어디 간거람... 

승식이네 마실 이라도 갔나?” 

혜연이 드라이를 전원에 꽂고 있을때 핸드폰 벨이 울렸다 

재빨리 핸드폰을 들어 액정확인도 안하고 받는 혜연이 툴툴대듯 입을뗀다 

“전화 해놓고 어디 갔다 온거야?” 

<누가?> 

“강유니?” 

<전화 기다리는거 있어?> 

“샤워하는새 엄마가 전화했나 보더라구” 

<우리 장모님이 무슨일일까?> 

“실없기는..” 

<누나 내 오피스텔로 와라> 

“왜?” 

<친구놈들 몰려왔는데 짜식들이 다 여자친구 끼고 왔단말야> 

“오늘 안되는데..” 

<왜? 과외도 없는 날이잖아> 

“과외하는애 학교에 가봐야 해” 

<학교를 왜?> 

“문화제 하는데 시낭송을 맡았다나? 

꼭 와서 보라고 졸라대잖아” 

<같이 갈까?> 

“친구들 몰려왔다며. 재미나게 놀아줘” 

<보내면 되지> 

“됐그든요” 

강유의 주변으로 시끄러운 친구들 소리가 고스란히 혜연의 귀에 들린다 

친구들 잔뜩 불러놓고는 그녀를 따라가려는 강유를 달래서 

전화를 끊은뒤 여유 있게 외출준비를 했다 

이쁘게 하고 오라는 제자의 당부가 무색하게 

평소와 같은 차림에 화장기 없는 얼굴의 혜연이다 

강유와 달리 아침잠이 많은 그녀는 늘 빠듯한 시간에 일어나 

보통은 화장도 안하고 학교에 간다 

매일아침 이른 시간에 수영을 다니는 강유에게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는 그녀이다 

여고앞 정문. 

혜연을 발견한 박윤정이 손을 흔들며 혜연을 부른다 

“선생니임!!!” 

“이야~ 오늘 윤정이 이쁘네?” 

“후후.. 이따가 남친 만날거거든요 

옷에 신경 좀 썼지이~” 

“어디서 하는 거야?” 

“근데 선생님 이게 뭐야아~” 

“뭐가?” 

“이쁘게 하고 오라니까 맨얼굴에. 청바지에.” 

“난 바탕이 이뻐서 안꾸며도 이뻐” 

“웩.. 울 쌤 알고보니 자뻑공쥬 였어” 

“강당이 어디야? 강당에서 한다며” 

“잠깐. 그전에 일루 와봐요 쌤” 

키가 자그마한 윤정이 혜연의 손을 잡더니 막무가내로 어딘가 

끌고 가는 동안 혜연은 제법 시설이 좋아 보이는 학교를 둘러보았다 

“어디 가는 거야?” 

“아 글쎄 잠자코 따라오기나하삼” 

강당으로 짐작되는 건물을 지나 중앙현관으로 들어간 윤정이 

중앙현관 입구의 커다랗고 긴 시계 앞에 서있는 남자에게 성큼거리고 간다 

“쌤~ 훔쳐왔어요~” 

남자가 고개를 돌려 윤정을 본후 

한걸음 뒤에 손목을 잡힌채 끌려오는 여자를 보더니 눈이 조금 커진다 

남자의 앞에선 혜연이 순간 얼굴이 굳어져버린다 

“봐요. 거짓말 아니죠? 내가 울 과외쌤 훔쳐다 준댔잖아요 

샘이 꽉 붙잡아서 색시삼아요. 근데 샘 표정이 왜 그래요?” 

박윤정이 재잘재잘 떠들어대며 어설픈 뚜쟁이 노릇을 하다가 

남자와 혜연의 표정이 이상했는지 

테크노를 추듯 고개를 휙휙 돌려가며 두사람의 얼굴을 본다 

“오올~ 둘이 서로 첫눈에 뿅~ 간거에요?” 

그들 둘 표정이 어디를 봐서 서로 뿅~갔다고 하는건지 어이없는 혜연이다 

그녀가 더 어이없는건 지금 앞에 있는 남자가 건식이네 초상때 보았던 

병원집 막내아들이자 자신에게 기습키스를 했던 그 남자라는 사실이다 

“권.민.혁. 우리 문학샘 이에요 

내말이 맞죠? 키크고 잘생기고.. 진짜루 학교서 인기짱이란 말야 

내가 중매한거 알면 친구들이 나 잡아먹을지도 몰라” 

“가자. 너 시낭송 한다며 준비 안해?” 

혜연의 무덤덤한 말투에 윤정이 입술을 삐죽 내민다 

남자가 혜연에게 싱긋 웃으며 마치 처음보는 사람처럼 인삿말을 한다 

“들었죠? 내 애제자가 목숨걸고 중매쟁이로 나선거니까 인사나 합시다. 

권민혁. 문성여고 문학 선생입니다” 

“정혜연 입니다. 죄송하지만 그만..” 

“그런데 박윤정. 니가 시낭송을 한다고?” 

“헤헤.. 울 과외샘한테 살짝 고짓말 좀 했어요 

안그럼 여기까지 절대 안왔을껄요? 

차가워 보여도 울 과외샘 디게 착해요 

그니까 이제부턴 둘이 알아서하삼~” 

저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꽹가리까지 쳐대더니 

요란하게 손을 흔들고 가버리는 제자를 둘다 황당하게 보기만한다 

윤정이 가버리고 나자 혜연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잡힌다 

불쾌하고 어이없으니 건드리지 말아달라는 얼굴이다 

“철없는 제자의 깜찍한 발상이긴 한데 

맞춰서 놀아줄 생각은 없으니 그만 갈게요” 

“저녁 먹자” 

반말인것도 어이없는데 뜬금없이 저녁타령이다 

혜연이 비웃듯 한쪽 입꼬리만 올린채 픽 웃는데도 남자가 활짝 웃는다 

그 웃음이 너무 환하고 악의 없어 보이는 순수한 웃음이다 

깔끔한 정장을 입고 학교 안에 서있는 이 남자가 

얼마전 마을회관에서 그녀에게 무례한 기습키스를 했던 사람과 

동일인물 이라는게 믿기지 않는 혜연이다 

“철없는 제자의 깜찍한 발상에 보답은 해야지” 

“그쪽이랑 같이 밥 먹을 생각..” 

“혜연씨 어머니한테 전화 안받았나보네?” 

“전화요?” 

“안그래도 토요일쯤 가려고 했는데” 

“나한테요?” 

“혜연씨꺼 쌀 가지고 올라왔거든” 

“쌀이요?” 

“저녁 먹으면서 얘기하자” 

“그쪽이랑..” 

“그쪽이 아니고 권민혁. 민혁씨라고 불러 

아니면 민혁 오빠도 괜찮고. 음식은 뭐 좋아해?” 

혜연의 등을 현관 밖으로 밀어내는 그의 손이 혜연의 등 아래에 가볍게 얹혀져 있다 

몇몇 여학생들이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며 지나간다 

몇걸음 안가서 또 삼삼오오 몰려다니는 다른 여학생들이 지나가며 

놀리듯 그에게 소리치기도 한다 

“선생님 애인이에요?” 

“으아~ 안돼요 쌤~” 

“선생님 결혼하면 전학가 버릴꼬에요~” 

자기들끼리 얘기하고 자기들끼리 낄낄대며 떠드는 여학생들에게 

권민혁은 사람좋아 보이는 얼굴로 미소를 띈채 가볍게 손을 들어준다 

학교 안을 걷는 동안 비슷한 일이 수차례 반복됐다 

여고에서 총각선생님의 인기야 짐작할수 있지만 특히나 심해 보인다 

민혁의 이끌림에 어정쩡하게 끌려가던 혜연은 그가 멈춘곳이 교직원 주차장인걸 알았다 

검정색 무쏘스포츠를 리모콘으로 열고 조수석에 혜연을 태운 민혁은 

운전석에 앉아 빠르게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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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장 : 내것이 안될바엔''' 

#... 2 

조수석에 혜연을 태운 민혁이 운전석에 앉아 차를 출발시킨 후에 

혜연은 불퉁한 얼굴로 그를 보며 말했다 

“큰길에서 내려줘요” 

“한 고향 사람끼리 밥 한끼 먹는다고 생각해” 

“왜 자꾸 반말이에요? 너무 무례한거 아니에요?” 

“대학1년 여름방학에 시골집 갔을때는 정혜연이 중학생이었지? 

그땐 반말해도 아무소리 못하더니 많이 쎄졌습니다?” 

“나랑 얘기 했었다구요?” 

“섭하네... 난 그때 혼자 미친놈이다 생각했는데 

혜연씨는 기억도 못한단 말야?” 

“무슨 소리래요?” 

“뭐 좋아해? 한식? 일식? 양식은 내가 별로 안좋아하는데..” 

“사당동 까지만 태워줘요” 

“사당동 XX번지 무학빌딩 5층 506호” 

남자의 입에서 나온 주소는 혜연의 원룸 주소다 

그녀가 어이없는 얼굴로 민혁을 보자 입가에 미소를 띄운채 앞만 보고있다 

“일식으로 하자. 회 좋아해?” 

“밥 생각 없어요” 

무작정 방배동의 일식집 주차장으로 들어서는 차에서 내리고 있는 

혜연의 얼굴은 여전히 불퉁한 얼굴이다 

회 정식 2인분을 주문한 민혁이 

꼿꼿한 자세로 꿈쩍도 안하고 앉아있는 혜연에게 물수건을 건네준다 

“혜연씨가 박윤정 과외선생인건 정말 놀랐다 

재밌는 인연이라고 생각지 않아?” 

“진짜 선생님 맞아요?” 

“그럴걸 아마?” 

“거기 학생들도 자기네 문학선생이 

변태처럼 기습키스나 하는 사람인건 알아요?” 

“학생한테는 한적 없으니 모르겠지?” 

“선생님으로서 할 행동이 아니지 않나?” 

“선생이 아니라 남자로서 한 행동이니까” 

생각없이 그때 얘기를 하던 혜연이 새삼 그 상황이 생각나 버리자 

어색하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해서 아무말도 못하고 얼굴만 조금 붉어진다 

“그때 생각하나보네?” 

“누가요!” 

“난 많이 생각했는데” 

“됐어요..” 

“네 키스... 너무 좋았거든” 

기모노 차림의 여종업원이 조용히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와 

입가에 습관적인 미소를 띄운채 접시들을 내려놓고 목례를 하고 나간다 

자연스레 중단됐던 대화를 민혁이 계속한다 

“지난 일요일 시골에 내려갔을때 혜연씨 집에 들렀더니 

아주머니께서 쌀 심부름을 시키더라고” 

“우리집을 왜 들렀는데요?” 

“혜연씨한테 줄게 있으니 주소 좀 가르쳐 달랬더니 

가는 김에 쌀좀 가져다주라고 부탁하시더군” 

“나한테 줄꺼가 뭔데요?” 

“그런게 어딨어” 

“예?” 

“만나고 싶으니까 핑계댄거지” 

“나를 왜요?” 

“한방 먹이고 도망가 버리는 뒷모습이 너무 예뻐서” 

민혁의 눈이 재밌다는 듯 웃고 있다 

이렇게 마주앉아서 보니 꽤나 단정하고 샤프하게 생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 민혁의 모습 그 어디에도 그날 밤처럼 무례하고 변태삘 풍기는 모습은 없다 

그녀의 핸드폰이 옷걸이에 걸어놓은 쟈켓 주머니에서 울린다 

옷걸이에 가까이 앉은 민혁이 혜연보다 먼저 일어나서 쟈켓을 챙겨준다 

받아든 전화의 액정에는 그녀의 짐작대로 강유의 이름이 뜨고 있다 

“어.. 강유야” 

<어디야?> 

“일식집. 저녁 먹어” 

<시낭송인가는 끝났어?> 

“어..” 

<근데 왠 일식집? 누구랑 있는데?> 

“고향사람 만났거든. 알고 보니 거기 선생님 이더라구” 

<남자? 여자?> 

“남자” 

<둘이만 있는거야?> 

“응” 

<..........> 

“방배동 이니까 금방갈거야. 들어가서 전화할게” 

<방배동 어디?> 

“왜” 

<데리러 갈께> 

“됐어.. 친구들은 돌아갔어?” 

<쫌 전에> 

“끊을께” 

<어디냐고> 

“됐다니까.. 금방 갈거야” 

<..........> 

“끊는다” 

그녀의 통화를 다 듣고도 민혁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정식에 나온 회만 맛있게 먹고 있지만 혜연은 회를 별로 안좋아한다 

작년까지만 해도 전혀 못먹던 회를 일식을 좋아하는 강유와 

함께 다니다 보니 조금이나마 먹을수는 있게 됐지만 

그녀의 젓가락은 자꾸 회가 아닌 스께다시로만 향하고 있다 

“먹는게 시원찮네.. 회 안좋아해?” 

“날생선은 별로에요” 

“꼭 뒷북치는 녀석들이 있다니까” 

“이거 꼭.... 남에 살 씹어먹는거 같지 않아요?” 

“뭐? 하하하! 잔인한 표현이네 

회를 그렇게 표현하는 사람은 처음 본다” 

민혁의 웃음은 전체적인 인상을 확 바꾼다 

웃는거 만큼은 제법 매력적이라는걸 그녀 혼자속으로 인정하고 있다 

“이거 먹어봐. 시메사바가 제철이라 맛있을 거야” 

“시메사바?” 

“고등어 요리 말야. 사바사바 라는말 들어봤지?” 

“잘 모르겠는데요” 

“거왜..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싸바싸바 한다고 하잖아” 

“아... 그게 뭐요?” 

“일본어로 고등어가 사바거든. 옛날에 어떤 일본놈 하나가 

관청에 뭔가 부탁을 하러가는데 그때는 귀하던 고등어를 가져갔대. 

그게 해방후에 와전되면서 

잘 보이려고 아부 떠는걸 사바사바로 썼다지?” 

“그래요? 재밌네..” 

“다른 풀이도 몇 가지 있는데 그게 제일 기억에 남더라고.. 

뭐든지 어원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재밌는게 참 많아” 

처음엔 불편하기만 하던 자리가 민혁의 자연스러운 대화 내용과 

부드러운 미소에 조금은 편해진 혜연이다 

후식으로 나온 오렌지를 한조각 먹고 그녀가 먼저 쟈켓을 챙겼다 

“어쨋든 잘 먹었어요” 

“데려다 줄게” 

“됐어요. 택시 잡을래요” 

“어차피 길 익혀놔야 해. 쌀 가져 왔다니까” 

“엄마는 뭐 하러..” 

“하나뿐인 딸래미 굶고 있을까봐 걱정하시는 거지” 

“작년에 받은것도 아직 남았단 말에요” 

민혁이 그녀를 조수석 차문까지 열어주며 태운다 

어쩔수 없다는 생각에 자신의 원룸까지 길 안내를 해주며 가는 동안 

민혁이 몇 가지 우스갯소리를 하는게 꽤 재밌어서 혜연이 작게 웃고 있다 

“여기서 우회전.. 저기 왼쪽에 회색건물 보이죠?” 

“가로등 맞은편 건물?” 

“예.. 그 앞에 세워줘요” 

그녀는 민혁의 차가 건물 앞에 서기도 전에 

건물 앞 계단 턱에 걸터앉아 있는 강유를 발견했다 

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에 눈을 찌푸리고 있다가 일어서는 

강유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있는게 보인다 

“쌀은 일단 차에 가지고 다녀 주실래요? 

내가 아무때나 학교로 찾아가서 받을테니까 

여기로 오지 말아요” 

“40kg 짜리를 혼자 옮기겠다고?” 

“아휴 정말...” 

강유가 얼굴이 잔뜩 굳어진채 둘을 보고 있기 때문에 

혜연은 더 이상 길게 말을 못하고 차에서 내렸다 

민혁이 조수석 쪽 창을 내리자 그녀가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다 

“조심해서 가세요” 

“그래” 

“강유야” 

그녀가 차 앞을 가로질러가서 강유 앞에 섰는데도 

그는 차속의 남자만 뚫어지게 보고있다 

일부러 운전석쪽 창을 내린후 차를 출발시키는 민혁이 

강유를 스치듯 지날 때 두남자의 시선이 정확히 마주쳤다 

민혁이 창문을 올리고 CD를 켠다 

파헬벨의 케논 첼로 연주곡이 부드럽게 차안에 울려퍼진다 

쌀은 지금 하드탑으로 개조한 그의 차 트렁크에 실려 있다 

조금 전에 마주친 그녀의 남자 표정은 마치 자기영역을 침범하려는 

적을 대하듯 경계심과 적대감으로 가득차있었다 

“생각보다 강한 상대 같지? 

기죽지 마라. 권민혁 파이팅~” 

혼잣말을 힘차게 중얼거린 그가 첼로 선율을 휘파람으로 따라 부르며 

자신이 살고있는 아파트를 향해 엑셀을 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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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장 : 내것이 안될바엔''' 

#... 3 

민혁의 차에서 내리는 걸 본 강유는 이틀이나 불퉁하게 화가 나있었다 

그는 속이 부글거리고 끓는걸 누르느라 힘든데 

담담하게 별일 아니라는 듯 대응하는 혜연에게 혼자 화가 나있다가 

금요일 과외를 마친 혜연이 정말 오랜만에 강유의 오피스텔로 찾아가자 

금새 좋아서 입이 함지박만해진 강유였다 

강유의 오피스텔은 혼자 살기엔 지나치게 넓고 호화스럽다 

그녀의 원룸에 있다가 그곳에 가면 공연히 위축되는 느낌도 싫고 

혜연과는 달리 형제가 많은 강유의 가족 누군가가 올까봐 불안해서 

가급적이면 그쪽으로는 가지 않는 그녀다 

그의 오피스텔에서 잠을 자고 이른 아침 수영장을 가는 강유와 함께 나왔다 

“아침잠도 많으면서 더 잘것이지.. 

나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잤으면서” 

“가서 더 잘거야” 

“오피스텔이 그렇게 불편해?” 

“어” 

“옮길까?” 

“뭘?” 

“나도 누나 근처에 원룸으로 옮길까?” 

“참아줘” 

그녀가 참아달라고 하지 않아도 그의 부친 때문에 못 옮길 것이다 

혜연과의 관계를 예의 주시하고 있는데 보란 듯 자극할 필요는 없다 

그녀를 먼저 택시 태워 보내는 강유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고 

원룸으로 돌아온 혜연은 12시가 가까워 올때까지 시체처럼 잤다 

겨우 일어나 대강 밥을 차려먹고 샤워를 한 혜연이 설거지를 하는데 

수도꼭지에서 피시시 물이 새어 나온다 

스프링클러처럼 이음새 부분에서 가느다란 분수를 뿜어내고 있다 

“아후...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기 짝이 없다 

일단은 수도꼭지를 잠그고 대책없이 멍하니 서있는데 초인종이 울린다 

강유이려니 생각하고 문을 연 혜연은 

쌀 가마니를 발밑에 내려놓고 숨을 내쉬고 있는 민혁 때문에 깜짝 놀랐다 

“이거 생각보다 진짜 무겁네 

왜 5층씩이나 살아서 고생을 시키냐” 

“내가 가지러 간다니까요” 

“혜연씨는 이거 들지도 못해” 

“왜 저렇게 많이 보내나 몰라..” 

“내가 쌀집 배달원도 아니고 

문 앞에서 빠빠이 해야 하는거야?” 

“일단... 들어와요” 

쌀가마니를 품에 안 듯 들고 들어온 민혁이 

별로 볼 것도 없는 혜연의 원룸을 훑어보며 묻는다 

“어디다 놔?” 

“그냥 식탁 옆에 놔줘요” 

쌀을 내려놓은 민혁에게 냉장고에서 오렌지 쥬스를 꺼내 한컵 가득 따라주자 

단숨에 벌컥거리고 마신 그가 환하게 웃으며 혜연에게 컵을 건네준다 

받아든 컵을 물에 헹구어 엎으려고 생각 없이 씽크대 수도를 열던 혜연이 

분수처럼 가늘게 새는 물을 보며 황급히 잠근다 

“새는 거야?” 

“이음새 부분에 문제가 있나봐요 

어제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내가 좀 볼까?” 

정장 마이를 벗고 셔츠 소매까지 걷어 올린 민혁이 씽크대 수전을 이리저리 만져본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혜연이 더 긴장한 표정이다 

“공구함 같은건 있고?” 

“그런거 없는데..” 

“조금 조여 주기만 하면 될 것 같은데..” 

“할수 있겠어요?” 

어찌됐건 반가운 마음에 목소리가 밝게 나온다 

난감하던 차에 믿음직스런 원군을 만난 듯 하다 

“어디 보자...” 

민혁이 씽크대 수전을 잡아 힘을 줘 돌리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형사고가 터졌다 

툭 떨어지는 수도꼭지 머리. 

새로 발굴된 석유라도 터진 듯 쿨럭거리고 뿜어져나오는 물 때문에 깜짝놀란 민혁이 

되는대로 손바닥으로 막아버리자 진짜 스프링클러처럼 사방으로 물이 튄다 

“엄마야!! 어떻해!” 

혜연까지 물벼락을 맞아 금새 여기저기 젖어버린다 

민혁은 아예 샤워라도 한 사람처럼 머리카락 까지 흠뻑 젖었다 

“어떻게 좀 해봐요!!” 

“수도 잠궈!” 

“수도꼭지가 없는데 뭘로 잠궈요!” 

“그거 말고! 씽크대 아랫장 열면 잠금장치 있을거야” 

민혁은 머리통이 떨어진 수도를 손바닥으로 막고 있느라 정신이 없다 

혜연이 재빠르게 쪼그리고 앉으며 아랫장을 열려해도 그의 다리가 걸린다 

“뒤로 좀 가봐요!! 

씽크대를 열수가 없잖아!” 

그가 구부정하고 불안정한 자세로 하체만 한 발짝 뒤로 빼고 있다 

혜연이 씽크대를 열고 배수호스 근처를 둘러본다 

“저거요?! 저기 럭비공 모양으로 생긴거 돌리면 돼요?” 

“럭비공이건 야구공이건 무조건 돌려봐!” 

씽크대 뒤편 뚫린 공간에 붙어있는걸 돌리려면 

민혁이 버티고 있는 다리 앞으로 가서 팔을 쭉 뻗어야한다 

둘의 자세가 민망해질 상황이지만 그런걸 따질 때가 아니다 

“쫌만 더 뒤로 가봐요!” 

“내가 가제트 팔인줄 알아?” 

그 상황에도 쿡.. 웃는 혜연이 빨을 뻗어 되는대로 돌려본다 

그러자 위쪽 상황이 어떤지는 민혁의 당황하는 목소리로 알수있었다 

“으악..!! 더 많이 나오잖아!!! 

반대편으로 돌려! 

잠그는게 어느 방향인지도 몰라?!” 

“잠그는 방향으로 돌렸단 말에요!!” 

손놀림을 빨리해 다시 돌리자 혜연의 머리위에서 

‘오케이~ 오케이~’하는 그의 목소리가 울린다 

힘을 줘 더욱 꽉 조이고 상황을 살피기 위해 위를 올려다보는 혜연을 

머리카락과 턱 끝으로 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민혁이 내려다보고 있다 

시선을 떨구는 그녀의 바로 눈 앞에 그의 허벅지가 있다 

빠르게 벌떡 일어서던 혜연이 씽크대 끝에 머리를 쿵 박는다 

“아야!!!” 

눈물이 찔끔 빠지게 아파서 손으로 마구 문질러대는걸 보며 

그가 하하하 큰소리로 웃어 젖히고 있다 

“아씨.. 아파죽겠는데 뭐가 좋다고 웃어요!” 

여전히 큭큭대며 혜연을 보고 웃는 민혁의 모습이 더 가관이 아니다 

머리카락과 얼굴에선 물이 뚝뚝 흐르고 있고 

셔츠는 흠뻑 젖어서 몸에 들러붙어 피부색이 드러나고 있다 

런닝도 안 입은 민혁의 가슴팍이 그대로 비친다 

목욕탕 수건장에서 마른 수건을 꺼내와 민혁에게 건네고 그녀도 물기를 닦아냈다 

“뭐야 진짜... 수리공 흉내 내더니 아예 망가뜨려놓고..” 

“그게...” 

“뭐 알긴 했던거에요?” 

“아니. 솔직히 저런 쪽으론 나도 젬병이라” 

“못 살어..” 

“열라 쪽팔리네..” 

“선생님 말투가 왜 그래요?” 

“애들한테 배웠어” 

“선생이 가르쳐야지 배우고 있어요?” 

“근데 정혜연양. 나 이거 어쩌지요?” 

자신의 흠뻑 젖어버린 셔츠를 내려다보며 그가 싱겁게 웃는다 

원룸에 딸려있는 씽크대 옆의 드럼세탁기는 건조기능이 있는 거지만 

그의 옷을 벗겨 마를때까지 여기에 있게 하고 싶지가 않은 혜연이 어깨를 으쓱한다 

“대충 마이 걸쳐입고 집에 가서 갈아입어요” 

“와~ 진.짜. 못됐다” 

“뭐에요?” 

“그 무거운 쌀 배달 해주고. 

혜연씨 도와주려다 물벼락까지 맞은 사람을 그냥 보내게?” 

“그냥 보내지 않음 어쩌라구요” 

“죠~기 넣고 건조시키면 되지요” 

민혁이 턱짓으로 드럼세탁기를 가리키고 있다 

혜연이 곤란한 얼굴로 대답도 못하고 있으니 그가 맨 윗단추 하나를 풀고 있다 

“잠깐만요. 어디서 옷을 벗으려 그래요? 

미안하지만 젖은 셔츠는 담아줄테니까 집에가서 해결하구요 

내꺼 박스티 하나 줄께 욕실가서 갈아입고 가세요” 

“네.네. 잘 알겠습니다” 

혜연이 서랍장에서 그녀의 티셔츠 중에 품이 큰걸로 골라 그에게 건넨다 

욕실로 들어간 민혁이 셔츠를 벗고 

수건으로 물기를 더 닦아내며 자그마한 욕실을 훑어보고 있다 

욕실 선반위에도 그녀의 남자 물건이 있다 

면도크림과 수동면도기, 나란히 꽂혀있는 두개의 칫솔. 

아까 현관에는 큼지막한 남자 슬리퍼가... 

그리고 화장대 위에는 남성용 스킨 로션이 있었다 

더구나....  내색은 안했지만 지금 라운드 티를 입고 있는 그녀의 목에는 

지워져가는 키스마크 몇 개가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배 아프다..” 

혼자 중얼거리며 혜연의 반팔 티셔츠를 입은 자신을 거울로 들여다본다 

큭... 웃음이 터져버린다 

그녀의 옷중 가장 큼직한 것으로 준다고 건네줬을 티셔츠는 

매우 연한 핑크빛에 앙증맞은 캐릭터가 그려져 있는게 

그가 입으니 별로 여유도 없이 몸에 맞는다 

“귀여워..” 

티셔츠가 귀여워 작은 미소를 입에 띄운채 욕실에서 나오자 

씽크대 주변을 마른수건으로 닦아내고 있던 그녀가 그를 보고는 풉.. 웃어버린다 

“잘 어울리네” 

“고마워” 

“셔츠 줘요. 담아줄께요” 

와이셔츠를 건네준 민혁이 식탁의자 하나를 빼내 앉는다 

혜연이 준비하고 있던 비닐봉투에 셔츠를 잘 접어서 넣은 뒤 건네자 

봉투를 건네받고도 일어날 생각이 없는지 민혁이 그대로 앉아있다 

“안가요?” 

“이집 주인 진짜 야박하네..” 

“얼른 가줘요. 나도 잔뜩 젖어서 옷 갈아입어야 해요” 

“어머니랑 통화는 했고?” 

그녀의 모친과는 여고에 다녀온 다음날 통화를 했다 

혜연의 전화를 받자마자 모친이 한말이 ‘밥 문나?’ 였는데 

그때 시간이 오후4시 였다 

점심을 말하는 건지 저녁을 말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노인네들은 하루세끼 밥 챙겨먹는 거에 목숨이라도 걸고있는거 같다 

“감사하다고 전해달래요.. 

택배 부르는거 어려워하는 엄마니까” 

그가 입가에 빙그레 미소를 띄운채 혜연을 보고 있다 

시선을 마주하기가 어색해진 혜연은 

행주로 씽크대 상판을 닦아내며 등을 돌린채 말했다 

“어쨋든 고맙구요. 그만 가줘요 

옷 젖어서 찝찝하단 말에요” 

“추워요” 

“뭐라구요?” 

“오실오실 추운게 따뜻한 커피한잔 마시고 싶대요” 

“하..” 

“다방커피로 부탁해요~ 

나이 드니까 커피도 걸쭉한 

다방 커피가 더 맛있거든요” 

“다방 가서 시켜 드세요” 

“한잔만 주세요오~” 

마을회관 에서의 불쾌했던 대면을 했던 사람인게 믿어지지 않을만큼 장난기 많다 

혜연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커피 물을 올려놓는다 

입씨름 하느니 얼른 한잔 줘서 보내는게 낫겠다 싶어진거다 

머그컵에 타준 커피를 그가 홀짝이며 맛있게도 먹는걸 보자 

별 생각이 없던 혜연도 컵을 하나 더 꺼내어 

커피를 만든후 마시려고 할때 초인종이 울렸다 

순간적으로 몸이 굳어질만큼 깜짝 놀란 그녀의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다 

강유가 틀림없다. 

오후에 그녀에게 올거라는 생각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민혁이 빤히 그녀를 보고 있다 

낭패감으로 그녀의 얼굴이 찌푸러진다 

“안 열어?” 

“그만 마시고 일어나요” 

“왜?” 

“강유가 보면 험한 소리할거야” 

“혜연씨 남자친구?” 

“그만 일어나 가라구요” 

벨소리가 한번 더 들리더니 

문을 두드리며 역시나 강유의 목소리가 들린다 

“누나!!” 

“얼른요” 

“일단 문부터 열어줘. 죄진 사람처럼 왜 그래?” 

“정혜연!!” 

“알았어 강유야!” 

문을 열어주는 그녀를 강유가 빤히 쳐다본다 

강유가 현관에 놓여있는 남자 구두를 쳐다보고 있다 

“누구 있어?” 

“어? 어..” 

완전히 집안으로 들어선 강유가 식탁의자에 앉아있는 민혁을 본다 

민혁이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일어서고 있다 

“혜연씨 남자친구? 난 권민..” 

성큼 거리고 다가온 강유가 다짜고짜 주먹을 날렸기 때문에 

민혁은 끝까지 말할 수가 없었다 

파워가 어찌나 쎈지 민혁이 뒤로 밀려 냉장고에 부딪혔다가 주저앉는다 

“강유야!!!” 

그녀의 고함소리가 들리지도 않는지 티셔츠 가슴팍을 움켜쥐고 

들어올린 강유가 다시 주먹을 꾹 쥐고 팔을 빼는걸 

혜연이 매달리듯 그의 팔을 잡아당긴다 

“놔.”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놔!” 

“다짜고짜 사람을 때리면 어떻해?! 

고향집 사람이란 말야! 쌀 갖다 주려고 온거..” 

“근데 왜 누나 옷을 입고 있어!!” 

젖은 머리로 혜연의 옷을 입고 식탁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으니 

강유가 충분히 오해할만한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민혁이 강유의 움켜쥔 손을 떼어내고 

이빨에 찢겼는지 피맛이 나는 입술 안쪽을 손등으로 찍어낸다 

그를 보는 강유의 눈빛이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이 분노로 끓고 있다 

“성질 급한 친구네..” 

“입 닥쳐.” 

“그만해! 서문강유!!” 

여전히 살벌한 눈으로 노려보는 강유를 비껴 

정장마이를 집어든 민혁이 마이를 걸치고 현관으로 걸어간다 

강유의 시선이 그대로 그를 따라가고 있다 

“오늘 여러 가지로 진짜 미안해요” 

“괜찮아” 

“조심해서 가세요” 

“저 친구만 조심하면 될 것 같은데?” 

“오해한거에요. 어쨌든 미안해요” 

혜연에게 어설픈 미소를 지은채 원룸을 나온 민혁이 

자신의 차 안에 앉아 룸미러로 터진 입술 안쪽을 들여다본다 

주먹이 어찌나 쎈지 아직도 얼굴이 얼얼하다 

홀더박스에서 티슈를 한 장 꺼내 살짝 베어있는 피를 찍어내고 

시동을 켠 후에도 그는 잠시 그렇게 운전석에 앉아있었다 

“누나? 연하인가보네.. 

좀 어려 보인다 했더니...” 

짐승의 눈빛 같았다 

자신에 영역에 도전장을 내민 적을 상대해 싸우는 야수와 같은 눈빛이었다 

키 없이 문을 두드려 댄걸 보니 동거를 하는건 아닌듯하다 

혜연의 공간 여러 군데에 그녀의 남자 흔적이 있었어도 

이유는 알수 없지만 동거를 하는건 아닐거라는 확신에 가까운 생각이 들긴했었다 

“정혜연.. 눈에 담긴 내가 먼저 담았는데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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