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크리스마스 우리 모두에게 안식이 있기를
암살자들도 전염병은 피해가지 못했다.
스스로의 손으로 자유를 쟁취한 사파이어는 물론이고 최후의 승자라고 할 수 있는 알료샤까지 1년을 통째로 빼앗긴 셈이다. 포로 신세인 벤체슬라스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시간은 꾸준히 흐르고 봄, 여름, 가을이 지나 겨울이 되었다.
크리스마스 이브. 눈은 내리지 않고 크리스마스 캐롤도 들려오지 않고 왕래하는 사람도 없이 거리가 텅 빈 밤이었다.
사파이어는 지하실에 방치해 둔 짐짝을 식당까지 질질질 끌어왔다. 천으로 감싸 끈으로 조여맨 물건이었는데 무게나 질감을 보면 뼈가 포함된 큰 고깃덩어리 같았다. 대형동물의 사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죽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사파이어가 끌고 오는 내내 미동도 하지 않았다.
사파이어는 짐짝을 식당 한 구석에 밀어놓은 뒤 잠시 숨을 골랐다. 그런 다음 서랍을 뒤져 칼을 찾아내 짐짝을 묶은 끈을 잘라내기 시작했다. 꽤 두꺼운 밧줄들이 툭툭 끊어지자 짐을 감싼 천 밖으로 제대로 고정되지 않은 물건이 툭 튀어나왔다. 지나칠 정도로 하얀 손이었다. 남자의 손이었고, 섬세하지만 단단한 뼈대를 갖추고 있었으며 손톱까지 깨끗하게 정리된 손이었다.
사파이어는 혹시나 싶어서 짐을 발로 차봤지만 역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연기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연기라고 해도 별로 상관은 없다. 여기는 그의 성채가 아니니까. 알료샤는 완전히 바보는 아니었고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자기 부하들을 여기저기에 배치해놓은 다음 외출했다. 문제가 생기면 그들이 달려올 것이다. 총을 들고.
사파이어는 식탁 의자를 하나 빼오더니 짐짝을 들어 올려서 의자에 앉히려고 했다. 아직 기절한 상태가 맞는 건지 자꾸만 짐이 축축 늘어져서 결국 천을 벗겨내야만 했다.
눈을 붕대로 칭칭 감은 벤체슬라스가 그 안에서 나왔다. 호흡과 맥박을 보면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게 맞기는 하다. 사파이어는 그의 겨드랑이 밑에 팔뚝을 끼워 넣고 부축해서 의자에 앉혔다. 팔걸이가 있는 의자였기 때문에 구속하기는 쉬웠다. 사파이어는 서랍에서 수갑을 꺼내와 벤체슬라스의 두 다리와 한쪽 손을 의자에 묶었다. 이제 나머지 한손 말고는 움직일 수 없다. 호스트의 허락이 없으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다.
이정도 해놨으면 정신을 차리고 난동을 부려도 크게 위험하지는 않다. 한숨 돌린 사파이어는 벤체슬라스를 묶었던 끈과 천을 대충 식당 구석에다 밀어 넣고 벤체슬라스의 의자를 식탁 가까이로 밀었다. 그런 다음 자신은 그 맞은편에 앉았다.
벤체슬라스는 고개를 푹 숙인 채였다. 혹시 죽은 건 아니겠지? 알료샤가 약물을 다뤘으니까 어쩌면 진짜로 죽였을지도 모른다. 사파이어에게는 “실수였어! 미안!”이라고 실실 웃으면서 넘어가려고 들지도 모르니까.
“넌 안 죽었어. 이렇게 끝나선 안 돼.”
사파이어가 나직하게 속삭이자 그 목소리에 반응한 듯이 벤체슬라스가 움찔 떨었다. 좋아. 아직 살아있군. 사파이어는 옛 주인의 기절한 모습을 잠시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료샤가 이미 나머지 준비는 해두었기 때문에 다른 테이블에 음식들과 디저트, 술병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뭐랄까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딱히 뭘 생각해서 준비한 것 같지는 않고 선물로 받았던 것들을 죄다 꺼내거나, 부하들을 시켜서 근처 가게들을 탈탈 털어오게 만들거나, 혹은 친분이 있는 식당 주인들을 데려와 갖가지 음식들을 만들게 한 것들이었다. 종류는 상관없었다. 그러니까, 진짜로 종류는 상관없었다. 크리스마스와 상관없는 세계 각국의 음식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크리스마스를 기념한다기보다 크리스마스를 빌미로 마시고 죽자는 놀자판을 벌일 모양이었다.
알료샤답다면 알료샤답다고 할까, 술에 대해서도 관대했다. 마치 술이 떨어지면 자신의 체면에 상처라도 나는 것 같이 많은 양의 술이 준비되어 있었다. 손님이 몇 명이나 올지는 모르겠지만 손님 한 사람당 몇 병씩 술을 마셔도 몇 박스가 남을 것 같은 양이었다. 보드카에 맥주, 와인, 데킬라, 위스키, 스피넬이 아시안 마트를 털어온 게 분명한 고량주……. 소주……. 소주?
아, 소주. 오랜만이다. 어디서 구해왔을까. 재주도 좋다. 한국 소주의 익숙한 초록색 병을 보자 옛 기억의 파편이 사파이어의 머릿속에서 스파크처럼 튀어 올랐다. 상세한 기억을 떠올리기엔 아직 무리고 어쨌든 대단히 그립고 반가운 느낌만 강렬했다. 정작 좋아했던 것 같지는 않은데, 타향살이를 오래 하다보면 이런 사소한 것에도 감동을 받게 되지 않는가.
알료샤는 처음 접하는 술일 텐데 하여튼 이것들도 관대할 정도로 넉넉한 양이 준비되어 있었다. 어쩌면 사파이어를 만취 상태로 보내버리려는 흉계를 꾸미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늘 밤을 예의주시해야겠군…….
사파이어는 증류주들을 내버려두고 와인병을 집어 들어 라벨들을 찬찬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화이트 와인이나 로제 와인은 전부 제꼈다. 와인에 대해 조예가 없다고 할지라도 벤체슬라스의 취향이 이런 게 아니었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레드와인을 즐겨 마셨고, 사파이어가 맛보는 건 허락되지 않았지만 단맛이 아니었다는 것도 안다. 키스를 하며 몸을 섞다보면 그런 커다란 맥락쯤은 금방 알게 된다.
달지 않은 레드와인. 대충 찾았다. 와인잔까지 찾아내 뒤돌아 선 사파이어는 어느 샌가 정신을 차린 벤체슬라스가 고개를 들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사파이어가 식탁으로 돌아가 와인병과 잔을 내려놓자 벤체슬라스가 소리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파이어는 벤체슬라스의 등 뒤로 돌아가서 눈을 완전히 가리고 있던 붕대를 풀었다.
벤체슬라스는 갑자기 눈에 가해지는 식당 불빛 때문에 멀쩡한 눈도 뜨지 못하고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가 서서히 빛에 적응하는지 조심스럽게 눈을 뜨며 고개를 들었다. 사파이어는 다시 맞은편 자리로 돌아가 와인병을 따려고 들여다보고 있었다.
벤체슬라스는 그런 사파이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와인병에 열중하고 있는 그의 눈, 코, 입, 턱선, 목, 튼튼한 어깨, 팔뚝, 남성미가 물씬 풍기는 전완근, 와인 병을 쥐고 있는 투박하고 두꺼운 손가락, 여전히 슬림한 느낌이 드는 몸의 곡선, 허리선, 그 아래까지.
벤체슬라스는 자신의 옛 소유물을 집착적으로 훑어 내리다가 답답함을 느꼈는지 입을 열었다.
“먼저 캡슐을 벗겨야지.”
그 말에 사파이어가 벤체슬라스를 확 돌아보았다. 어느 한 쪽이 먼저 눈 돌리는 일이 없는 강렬한 시선이 서로 섞였다. 하지만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의 눈빛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저건 자기의 권위에 기어오르려는 존재를 찍어 누르려는 눈빛이 아니라 몰라서 설명을 바라며 빤히 쳐다보는 눈빛이다. 한 때 내 것이었으니 잘 알고 있다. 벤체슬라스는 자유로운 한 손을 들어 와인의 끄트머리 부분을 가리켰다.
“그 부분을 잘라야……. 아니, 손으론 안 되지. 멍청하기는.”
원숭이에게 시켜도 저것보단 잘하겠다. 사파이어는 맨손으로 와인병을 감싼 금속재질의 캡슐을 뜯어내려다가 안 되겠는지 식칼을 가져왔다. 그리고 벤체슬라스가 뭐라 만류하기도 전에 캡슐을 아예 통째로 잘라내 버렸다. 굳이 저렇게 다 제거할 필요는……. 벤체슬라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파이어는 코르크 부분을 보더니 이번에는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보기 시작했다.
“누르지 마, 이 야만인아. 와인 오프너 없나?”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야. 닥치고 있어.”
하고 싶은 대로 할 거라면서 사파이어는 순순히 와인 오프너를 찾아가지고 왔다. 그러더니 또 설명을 요구하는 눈으로 벤체슬라스를 빤히 쳐다보았다. 답답함이 극에 달한 벤체슬라스가 손을 내밀었다.
“내가 따줄 테니 내놔.”
“싫어.”
“그 스크류 부분을 코르크에 맞추고, 아니, 그렇게 하면,”
벤체슬라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완전히 다물어버렸다. 사파이어는 벤체슬라스의 말을 절반만 듣고는 와인 오프너의 스크류 부분으로 코르크를 반 이상 작살내버렸다. 벤체슬라스는 이름 모를 와인이 동양인의 손에 난도질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깊은 유감을 느꼈다. 사파이어는 한참 만에 와인을 개봉했고 처참했던 전투의 흔적으로 와인병 안에 작은 코르크 알갱이들이 몇 조각 둥둥 떠다녔다.
하지만 결과물이 어떻든 자기 손으로 이뤄낸 업적이기에 사파이어는 만족한 것처럼 보였다.
“좋아.”
“끔찍하군.”
사파이어는 벤체슬라스의 탄식을 무시하고 준비해둔 와인잔에 와인을 따르기 시작했다. 평소에 벤체슬라스가 마시는 것을 봐둬서 기억하고 있었는지 한 잔 가득 따르지 않고 잔의 절반 이하만 채웠다. 그러더니 한 잔은 자신의 앞에, 코르크 알갱이가 둥둥 떠다니는 또 다른 한 잔은 벤체슬라스의 앞에 놓았다.
체념한 벤체슬라스가 그것도 술이라고 일단 와인잔을 들어서 가볍게 흔들어 공기접촉을 한 다음 향을 음미하려는데, 사파이어는 이미 와인을 벌컥벌컥 마시고 있었다. 품위라고는 조금도 없는 그 모습에 벤체슬라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한 잔을 완전히 비워버린 사파이어는 단맛은 전혀 없이 떫은 탄닌만 가득한 맛에 솔직하게 인상을 찌푸리며 짧은 감상평을 내뱉었다.
“맛없어.”
그렇게 돼지처럼 집어삼키면 그랑 크뤼를 줘도 포도 썩은 물로만 느껴질 거다. 벤체슬라스는 그걸 대놓고 말하진 않았다. 그런 건 적어도 팔다리가 자유롭게 풀려 있고 내 손에 무기가 들려 있을 때 할 수 있는 말이다. 사파이어는 표정으로 온갖 욕을 하는 벤체슬라스의 섬세한 의사표현 방식을 알아듣지 못했다. 벤체슬라스는 포기하고 사파이어가 맛없다고 일축해버린 와인을 천천히 음미했다.
사파이어가 가져온 것은 꽤 괜찮은 와인이었다. 정석적인 카베르네 소비뇽. 단단한 질감과 무게감이 마음에 들었고 단정하고 차분한 맛이다. 적어도 맛없다고 한 마디로 일축할만한 물건은 아니었다. 드라이 와인이 벤체슬라스의 취향이기는 해도, 향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평범하게 좋아할만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술기운이 들어가자 날카롭게 곤두서있던 신경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것은 벤체슬라스의 안면 신경에도 작용해 아까보다는 인상이 조금 더 편해졌다.
사파이어는 벌써 두 잔째를 따르고 있었다. 알콜이 필요한 건 벤체슬라스 뿐만이 아니니까.
“오늘이 크리스마스 이브라고 해.”
사파이어가 내뱉었다. 벌써 그렇게 됐나. 날짜를 가늠해보던 벤체슬라스는 아득해지는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아직 패배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다.
“나는 네가 앗아간 시간들을 되찾을 거야. 하나하나. 내 손으로.”
그러니까, 와인병을 난도질 한 것도, 마실 줄 모르는 술을 벌컥벌컥 들이켠 것도 과거를 되찾겠다는 보상심리에서 그랬다는 말인가? 되도 않는 크리스마스 이브라는 것을 즐겨보겠다고? 일반인의 감정은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벤체슬라스는 마음껏 비웃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파이어를 후벼 파고 상처 입히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다. 그를 도발해서 그의 손에 살해당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결말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그 결과로 사파이어는 평생 동안 벤체슬라스를 잊지 못할 테니까. 벤체슬라스는 그의 악몽이 될 것이다. 그렇게 그의 삶 한구석에 들러붙어 영원히 물고 늘어지겠지.
하지만 벤체슬라스는 자살을 택하지 않았다. 몸에 번져나가기 시작한 술기운이 “크리스마스잖아.”하고 속삭이며 평화를 강요하고 있었다.
“사실 예수가 죽은 날은 내 문화의 기념일이 아니라서 어떤 느낌인지 잘 몰라.”
“태어난 날이다. 죽은 날이 아니라.”
“그래. 네가 내 인생을 망가뜨리지만 않았어도 그런 일반 상식은 충분히 기억하고도 남을 텐데.”
“넌 처음부터 정상적이지 않았어, 괴물아.”
“미르체아. 미르체아 콘스탄티네스쿠. 라피스 라줄리.”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를 도발하려다가 도리어 얻어맞았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되로 주고 말로 받았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과거를 회피하려고 하는 거지? 무슨 일이 있었길래?”
“닥쳐.”
“나는 찾고 싶어 하는 걸 너는 필사적으로 없애려고 하는군.”
“닥치라고 했다.”
“크리스마스에 대한 기억도 많겠지.”
전혀 없다. 있다고 해도 떠올리고 싶지도 않다. 과거라는 건 울적하고 우중충한 회색빛깔의 폐기물일 뿐이다. 그걸 사파이어가 알 필요는 없다. 벤체슬라스는 일부러 고개를 높게 들고 항상 그렇듯이 사파이어를 오만하게 내려다보았다.
“갑자기 감성적인 인간이 되기로 했나, 사파이어?”
“내 이름은 강산이야.”
“네 이름은 사파이어고 넌 내 보석이야.”
“넌 나한테 열등감을 느끼는 것 같아.”
사파이어는 툭 던졌을 뿐이지만 벤체슬라스는 손끝이 차갑게 식는 느낌을 받았다.
“가끔 그게 아주 또렷이 느껴져.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을 느낀다고? 너 같은 괴물이? 그게 가능할거라고 생각하나?”
“글쎄. 너한테 옮은 걸지도 모르지.”
사파이어가 명확하게 대답했다. 벤체슬라스는 그의 눈동자가 흐리멍텅하지 않고 또렷한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점점 나아질 거야. 다시는 네 밑으로 들어가지 않아.”
“지금 그 자유를 누리는 게 좋을 거다. 내가 풀려나면…….”
“뭘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사파이어가 식탁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식칼을 집어 들더니 쾅 내려찍었다.
“넌 내 장난감이고 내가 살려두고 싶어서 살아있는 거야. 내가 죽이고 싶으면 죽일 거야. 천천히 죽이고 싶으면 천천히 죽일 거고 고문하고 싶으면 고문할거야. 네가 나에게 했던 짓? 고스란히 돌려줄 거야.”
오랫동안 함께 했기 때문에 이런 면도 닮은 것일까. 사파이어에게선 집착과 통제의 냄새가 났다. 보는 대로 배운다고 하지 않는가. 이런 점은 확실히 벤체슬라스에게서 옮은 걸지도 모른다. 아니면 사파이어 본인도 기억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의 본성일지도. 둘의 위치가 바뀌었다면 사파이어도 벤체슬라스 못지않게 통제적인 주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오늘은 살려두고 싶은 건지 사파이어는 식탁에 찍었던 식칼을 다시 뽑아서 내려놓았다.
“크리스마스는 용서하는 날이라고 들었어.”
“누가 그러던가?”
“너 빼고 모든 사람이.”
“그래? 날 용서하겠다는 말인가?”
“절대로 용서 못해. 넌 이 지옥에서 영원히 살아야 돼.”
그래. 그럼 그렇지. 벤체슬라스는 피식 웃었다. 하지만 그 다음에 날아온 사파이어의 발언이 벤체슬라스의 뒤통수를 때렸다.
“그렇지만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은 널 용서할거야.”
“뭐?”
“자기야아ㅏ아아ㅏ아ㅏㅏ아ㅏ아ㅏ-★”
식당 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저 망할 놈의 상큼한 목소리도. 벤체슬라스는 벌써부터 두통을 느꼈다. 사파이어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말했잖아. 크리스마스 이브라고.”
“자기야아아ㅏ아 어디있어요오오 나 왔어어어-☆”
알료샤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하며 사파이어를 찾았다. 그건 좋은데, 소리가 왔다 갔다 하는 속도가 심상치 않았다. 전력질주를 하는 모양이다. 전력질주로 방들을 뒤지면서도 목소리는 전혀 흐트러짐 없는 것이 소름 돋는다. 광기마저 느껴진다.
그 사이에 알료샤가 끌고 온 다른 손님들은 이미 식당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상태였다. 마리야 이바노브나가 사파이어를 보더니 “어머 오랜만.”하고 인사했고 바로 그 뒤로 피전블러드가 따라 들어왔다. 이젠 아주 짐꾼처럼 부려 먹히는 스피넬은 또 뭘 한가득 안고 낑낑거리며 들어왔다. 프랑스에 있어야 할 인물들도 들어왔다. 장 바티스트 고디에, 에메랄드, 페리도트까지.
아직도 사파이어를 찾아다니는 시끄러운 소리가 끊이지 않자 마리야가 식당 밖에 대고 소리쳤다.
“알료샤! 식당으로 와!”
“식당이라고!?”
우다다다하고 발 구르는 소리와 함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알료샤가 식당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흥분이 극에 달한 대형견이 뛰어다니다가 지쳐서 헐떡거리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알료샤는 사파이어의 모습을 발견하고 양 팔을 활짝 벌리며 달려왔다. 사파이어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뒤로 뺐다. 생존본능이 그렇게 하라고 시켰다.
“꺄아ㅓ아아아아ㅏ 자기야아아아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어요!”
“진정해.”
“우리 한 시간이나 못 봤잖아ㅏ아ㅏㅏ아아!! 어떻게 해! 어떻게 해! 너무 좋아! 너무 좋아! 어떡하지? 어떡하냐고!”
“아니 알았으니까, 진정해.”
알료샤는 사파이어를 와락 끌어안고 그의 품에 머리를 부비부비 비벼대며 이상한 콧소리를 냈다. 그 꼴을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는 벤체슬라스는 실시간으로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알료샤의 애정행각을 말로만 전해 들었지 눈앞에서 처음 보는 손님들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사파이어는 알료샤의 덩치에 눌려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그, 그만해. 그만 좀 해.”
“자기 냄새 너무 좋아! 자기 냄……. 술 마셨어?”
“조금.”
알료샤는 사파이어의 입에 대고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더니 그의 손에 들린 와인잔을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은 고스란히 식탁 맞은편에 구속되어 있는 벤체슬라스에게로 향했다. 벤체슬라스와 눈이 마주치자 알료샤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무슨 짐승도 아니고.
물론 벤체슬라스도 마주 으르렁거려 주었다. 이런 기 싸움에선 밀리지 않는다.
둘의 화목한 모습을 보고 있던 손님들이 “사이 좋아 보이네.”하고 짧은 감상평을 남겼다.
“왜 저런 거한테 술을 낭비했어, 자기야!”
“맨정신이면 참석하지 않으려고 할 것 같아서.”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의자에 묶어놓고 공개 처형할 건데!”
“나는 저 남자가 자의로 발가벗겨졌으면 좋겠어. 취해서.”
사파이어의 발언에 벤체슬라스가 바로 자기 몫의 와인잔을 밀어놓았다. 그런 잔머리까지 썼을 줄이야? 모든 걸 계획하고 있었나? 사파이어의 얼굴을 보면 딱히 생각하고 한 말 같지는 않다. 첩보원으로 활동하던 때라면 몰라도 지금은 돌보다 더 멍청한 상태일 텐데 정말 계략을 꾸몄을까?
사파이어는 곁눈질로 슬쩍 벤체슬라스를 확인하더니 자기 몫의 와인잔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벤체슬라스는 그 짧은 시선 교환에서 무언가를 읽었다. 아니 읽었다고 착각했다. 자신이 느낀 것이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에 착각이라고 치부해버렸다.
사파이어는 벤체슬라스를 배려해서 그의 취향인 드라이 레드 와인을 준 것이라고. 자기 입맛에도 맞지 않는 술을 일부러 골라와서는, 그것조차 별로 강권하지도 않은 것이다.
이건 배려라고 할 수 밖에.
그럼 알료샤에게 왜 거짓말을 하는 걸까?
혹시……?
“자기가 벗길 수 있는 건 나뿐인걸! 난 자의로 얼마든지 벗어줄 거야!”
“사람들 앞에서 섹스하자고? 그걸 원해?”
“자기가 원한다면!”
눈치가 이상한 사람과 눈치가 없는 사람의 대화가 위험한 방향으로 흘러가자 손님들이 “아니 싫어! 싫어! 절대 안 볼 거야! 하지 마!”하고 강하게 만류했다.
마리야가 총대를 메고 힐난했다.
“파티에 초대해놓고 못하는 말이 없어! 그런 건 우리들이 돌아가고 나서 둘이서만 하란 말이야!”
“뭐? 돌아갈 생각을 했어?”
“뭐? 안 돌려보내 줄 거야?”
“내일까진 못 돌아가! 마시고 죽자!”
“아니, 아니 잠깐만. 술 먹이려고 하지 마. 알료샤. 알료샤!”
사파이어를 와락 끌어안고 있던 알료샤가 금방 관심사가 알콜로 옮겨가서는 술병들을 잔뜩 가지고 와 식탁에 늘어놓기 시작했다. 마리야가 그의 등짝을 때리며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어색하게 서 있던 피전블러드는 사파이어에게 살짝 미소 지어보이며 “킬러끼리 크리스마스 이브는 또 처음이네.”하고 인사를 걸었다.
알료샤가 데리고 왔던 손님들은 선발대였던 건지 곧 또 다른 손님들이 들이닥쳤다. 알료샤와 친분 관계가 있는 세공사들, 알료샤의 기묘한 사회주의 철학에 감화된 프리랜서들, 정보상부터 시체처리업자까지. 살벌하고 활기 넘치는 분위기였다. 전 세계적인 전염병이 돌고 있는데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분명히 정부에서는 이런 대규모 모임을 금지할 텐데, 하긴 킬러라는 족속들이 충실히 법을 지키는 것도 웃기는 일이긴 하다.
“살아있었네, 가짜 벨기에인.”
사람들의 관심사가 드문드문 흩어진 틈을 타 장 바티스트 고디에가 벤체슬라스 쪽으로 다가왔다. 벤체슬라스는 유일한 아군을 만난 것처럼 속삭였다.
“이것 좀 풀어줘. 열쇠는 서랍 안에 있을 거야.”
“어어, 미안. 안 돼. 미안해.”
“무슨 소리야? 도와줘.”
“알렉산드라이트가 우리까지 끌고 온 걸 보면 답이 나오지 않나?”
벤체슬라스는 하나밖에 남지 않은 눈을 망연자실하게 깜박거렸다.
“자네도 킬러 공산당원이 된 건가?”
“아니야!”
“저 이상한 러시아인의 부하가 됐다는 소리 같은데.”
“우크라이나다, 이 무식한 새끼야!”
저 멀리 있던 알료샤가 귀신같이 이쪽의 대화를 알아듣고 소리쳐왔다. 장 바티스트는 자기 목소리도 들렸을까 싶어서 초조하게 그 쪽을 쳐다보았다가 벤체슬라스에게 미안한 듯이 미소 지었다.
“어쨌든 살아있다니 다행이고. 저번엔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했고. 그래, 앞으로 잘 지내도록 해.”
“장 바티스트! 이 배신자!”
“나도 살아남기는 해야지.”
“가지 마! 잠깐! 손만이라도 풀어줘! 한쪽 손으로는!”
장 바티스트는 짧은 안부인사로 자신의 죄책감을 털고는 미련 없이 손님들 쪽으로 떠났다. 벤체슬라스는 묶인 팔다리를 흔들어대며 난동을 부리려고 했지만 자기 손발만 아플 뿐이었다.
사파이어는 벤체슬라스보다는 원만한 인간관계라고 할까, 호스트인 알료샤의 배우자 취급을 받으면서 이리저리 끌려 다니고 있었다. 대부분 아는 사람이라고 해도 원래부터 사교성이 없는 남자에게 이런 건 고문행위일 뿐이었다.
표정을 보면 딱히 즐기는 것 같지도 않다. 그냥 많이 참아주는 것뿐. 그런 점은 벤체슬라스의 보석으로 있을 때와 크게 달라지지도 않았다. 신기한 일이다. 사람을 관찰하는 건 좋아하는 주제에 사람과 대화하라고 하면 도망가려고 한다. 마치 높은 곳에서 창밖을 내다보기는 좋아하지만 직접 나가서 자연을 느끼라고 하면 어두운 구석으로 숨어버리는 고양이 같달까.
마침 알료샤가 보드카로 술 게임을 시작했기 때문에 사파이어는 슬쩍 빠져나올 수 있었다. 빠져나오는 게 늦어서 이미 자기 주량에 거의 근접한 술을 마신 터라 비틀비틀 거리고 있었지만.
파티장에서는 빠져나갈 수 없고 그나마 안전지대를 찾자니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벤체슬라스에게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벤체슬라스는 딱 만취 직전 상태인 사파이어를 보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잘 가꿔놨더니 저 잡종이 다 망치고 있군.”
“잡종은 씨발 너지! 이 흰머리 돌연변이 새끼야!”
보드카를 잔에 주르륵 따라놓고 연거푸 원샷하던 알료샤가 벤체슬라스 쪽에 대고 소리쳤다. 도대체 이 시끄러운 틈바구니에서 어떻게 벤체슬라스의 말만 귀신같이 알아들을까? 무슨 도청기라도 달았나?
사파이어는 벤체슬라스의 의자 뒤편에 비틀비틀 몸을 기대어 앉더니 그대로 푹 고꾸라졌다. 벤체슬라스는 어깨 뒤편으로 사파이어를 내려다보고는 구속되지 않은 한 손으로 사파이어의 머리를 잡으려고 했다. 딱히 머리채를 잡는다고 해서 주도권을 다시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수적으로 열세인 상태에서는 바로 벤체슬라스가 반격을 당할 테지만,
무방비한 그를 다시 손에 넣는다는 상상만으로도 즐거웠다.
그러나 사파이어는 완전히 풀어진 상태가 아니었다. 벤체슬라스는 손목을 턱 붙잡히고 말았다. 사파이어는 손자국이 거의 멍이 될 정도로 벤체슬라스의 손목을 쥐고 힘을 주었다. 저승사자 같은 악력마저도 옛 주인을 닮아버린 건가. 안 그래도 하얀 손이 핏기가 완전히 가셔서 시체 손같이 변했다. 사파이어는 그 손가락 중에 하나를 입에 넣고,
그냥 깨물었다.
“아악! 젠장!”
손을 절단하려는 셈인가. 그렇지 않으면 살점이라도 뜯으려는 셈인가. 벤체슬라스가 흉악한 눈으로 사파이어를 노려보며 손을 비틀어 빼려고 했다. 어림도 없었다. 벤체슬라스의 이 악문 고함소리가 들리자 그것에 맞춰서 알료샤가 요란하게 웃었다. 사파이어는 포로 주제에 감히 반역을 꾀한 옛 주인의 손을 잇자국이 오래 남을 정도로 깨물어버리고는 자기가 낸 자국을 혀로 한번 핥고 입에서 뺐다.
“뭐야. 피 맛은 나랑 똑같군.”
피 맛을 보려고 했던 건가. 사파이어에게 깨물린 손가락이 따끔따끔 아파왔다. 큰 상처는 아니지만 어딘가 찢어진 것 같다. 서있을 때만 해도 간신히 제정신을 붙잡고 있던 사파이어는 앉으니까 취기가 더 도는지 한층 더 말이 없어졌다. 그저 자기가 방금 느낀 것들을 천천히 곱씹고 있을 뿐이었다.
사파이어는 확실하게 해두려는 건지 다시 한 번 벤체슬라스의 손가락을 길고 진하게 핥아 올렸다. 벤체슬라스가 손가락을 굽혀 그 혀를 쥐려는 순간 다시 한 번 이빨질이 가해졌다. 이번에는 정말 뼈까지 부술 기세였다.
벤체슬라스가 의자 팔걸이를 뒤흔들어대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방금 알료샤가 보드카 잔에 불을 붙여서 불 쇼를 시작했기 때문에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벤체슬라스가 저항을 그만두자 사파이어도 더 이상 손가락을 물어뜯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흥미도 떨어졌는지 벤체슬라스의 손목을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이 풀어졌다. 잠잠해졌나 싶어서 돌아봤더니 사파이어는 의자 다리에 머리를 기댄 채 잠들어버렸다. 멍청한 얼굴이었다.
벤체슬라스는 물어뜯긴 손가락을 확인해보았다. 악독하게도 물어 놨다. 살점이 조금 패인 곳도 있다. 큰 상처는 아니지만 내일쯤 되면 분명히 부어오를 것이다. 사파이어가……. 식인 기호도 있었나? 설마.
자신이 먼저 사파이어의 머리채를 잡으려고 했던 게 잘못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벤체슬라스는 심란한 얼굴로 점점 난장판이 되어가는 파티를 지켜보았다. 온갖 크리스마스를 겪어봤지만 이토록 혼란스러운 크리스마스는 처음이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이렇게 뜨거운 크리스마스도 처음이고. 뜨겁다. 따뜻한 수준이 아니고.
뜨거운 게 당연하지. 불 쇼를 벌이던 알료샤가 방금 기어코 불을 내고 말았다.
“불이다!”
“물 좀 뿌려봐!”
“아니 물을 뿌리면 안 되지! 술인데!”
“소화기 없어?!”
전 세계를 덮친 전염병이고 나발이고 지금은 눈앞에 퍼져가는 불길이 시급하다. 위기를 또 다른 위기로 덮는 셈이었지만 그 한 순간, 그 짧은 한 순간 사람들은 1년을 병에게 통째로 빼앗긴 우울감을 잊을 수 있었다. 안 좋은 쪽으로 아드레날린이 돌고 있었으니까.
메리 크리스마스. 우리 모두에게 안식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