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찻물
알료샤와 같이 살게 된 후로 크게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제는 지나친 자극에 머리가 돌아버릴 것 같다는 거다.
사파이어는 눈앞에 놓인 개완과 온갖 섬세한 다구들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아기자기한 물건인 건 알겠다.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어떻게 쓰는 건지는 도통 짐작이 안 간다.
알료샤가 기억이 떠오를 거라며 이것저것 잡다한 것들을 가져다주고 있지만 솔직히 말해서 오리엔탈리즘적인 무지의 산물이다. 마치 동양은 커다랗게 하나로 묶어서 동양일 뿐이고 그 안의 어느 나라 출신이건 동양 문화라는 카테고리 안에 묶여서 모든 걸 다 알고 있을 거라는 그런 일방적인 강요랄까.
언젠가 알료샤에게 이 문제에 대해 확실하게 말을 해두어야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지만 그의 의도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사파이어는 인종차별로도 보일 수 있는 알료샤의 무지를 그냥 눈감아주었다. 어차피 동양인 상대로 이정도면 많이 애쓴 거다. 적어도 사파이어가 여태까지 봐온 환멸 나는 인간들보다는 훨씬 낫다.
일단 주전자. 물을 끓이는 도구인건 알겠다. 옆에 있는 작은 찻잔. 이건 차를 따라 마시는 거고. 나머지는 도저히 모르겠다. 물건들을 매섭게 노려보던 사파이어가 눈동자를 들어 올려 맞은편에 앉아있는 스피넬을 빤히 바라보았다. 사파이어와 눈이 마주친 스피넬은 “나도 모른다고.”하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사파이어는 말없이 눈빛으로 무언가를 강요했고 스피넬은 그 시선을 얼추 짐작하면서도 애써 모른 척 했다. 결국 사파이어가 입을 열었다.
“쓰는 방법 알려줘.”
“나도 모른다고.”
“당신은 중국인이잖아.”
그 말에 스피넬이 뒷목을 잡았다.
“미국인이야!”
“중국계잖아.”
“미국인이야! 차는 나도 몰라! 콜라 마시면서 자랐다고! 중국계라고 다 알거라고 생각하지 마! 인종차별이야!”
차 마시듯이 콜라를 마시면서 자랐다라……. 사파이어는 스피넬의 발언에 감명을 받은 듯 했지만 다시 정리했다.
“그래도, 중국계잖아. 부모님이 가르쳐줬을 거 아냐. 당신은 부모님이 없나?”
스피넬의 입이 멍하니 벌어지자 사파이어는 자기가 뭔가를 잘못했다는 걸 어렴풋이 깨달았다. 정확히 뭘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파이어는 사태를 정리하려고 했지만 도리어 상황을 악화시키고 말았다.
“부모님이 없어서 못 배웠으면 모를 수도 있지. 그건 나쁜 게 아냐.”
“결투를 신청한다. 사파이어.”
“나는 당신을 모욕하려고 한 게 아니야. 부모님이 없다는 사실은 나쁜 게 아니야.”
“한 마디만 더 하면 당신 때려눕힐 거야.”
물론 스피넬이 달려들어 봐야 어깨넓이는 사파이어가 더 넓다. 열심히 벌크업을 한 결과 몸통 두께도 스피넬보다는 더 두껍다. 말하자면 체급 차이에서부터 사파이어가 이긴다. 하지만 사파이어는 알료샤의 부하를 부상 입힐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고 다시 사파이어가 입을 열었다.
“내가 실수한 게 있다면 미안하군.”
“당신이 방금 한건 욕이야.”
“나도 아버지가 죽어서 욕인 줄 몰랐어. 고등학생 때 교통사고로 죽었거든. 그래서 어머니만 남았어. 부모님이 제대로 있다는 게 뭔지는 나도 잘 몰라. 당신도 그런 줄 알았지.”
사파이어는 별 생각 없이 자신이 왜 그런 발언을 하게 됐는지 설명하려고 툭 내뱉었는데 스피넬이 또 멍하니 입을 벌렸다. 사파이어가 또 뭔가를 실수한 걸까? 사과를 해야 하나? 하지만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겠는데? 그런데 의외의 반응이 나왔다. 스피넬이 먼저 사과한 것이다.
“미, 미안.”
“왜?”
“당신이 그냥 날 욕하려고 하는 줄만 알았지 그런 개인사가 있는 줄은 몰랐어…….”
“왜 사과하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건 그, 언급하기가 상당히 예민한 문제고, 당신의 상처이기도 하고…….”
“왜? 내가 죽은 게 아닌데?”
“아냐. 됐어. 음. 넘어가자고. 미안해.”
방금 전까지는 사파이어가 스피넬에게 뭔가를 굉장히 잘못한 것처럼 느껴졌는데 이제는 상황이 완전히 역전됐다. 인간관계란 참 이해할 수 없고 어려운 것이다. 사파이어는 모순을 해결하기보다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스피넬은 사파이어의 개인사를 듣자 뭔가를 빚진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굴었다. 하긴 자기 사생활을 대놓고 말하는 킬러가 얼마나 될까.
사파이어가 깜박이도 켜지 않고 훅 들어온 바람에 스피넬도 일정부분 자신의 개인사를 털어놔야한다는 묘한 부채감을 느꼈다. 스피넬은 눈앞에 놓인 다구를 하나씩 만져보며 아주 먼 옛날의 기억을 더듬었다.
“할머니가 이런 걸 쓰는 건 몇 번 봤는데 내가 어릴 때 돌아가셔서 나도 잘 몰라……. 나도 차는 잘 안 마셔. 뭘 바라는 거야. 미국인은 커피라고. 우린 홍차도 싫다고 상자 째로 바다에 버린 적도 있어.”
“중국계잖아.”
“나는 나를 미국인이라고 생각한다는 거야. 그리고 정확히 말하자면 대만계라고.”
“대만이라. 그렇군. 양안관계 문제 때문에 가 본 적은 있어.”
“뭐?”
“어…….”
이번에는 사파이어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사파이어는 잠시 망가진 기계처럼 가만히 있다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대단히 어색한 모습이었고, 잘못을 저지른 강아지가 보일법한 뻔한 연기였다.
“자세히는 기억이 안 나.”
“연기 진짜 못하는군. 사실 순식간에 다 기억났지? 표정에 다 드러나는데.”
“어차피 옛날이야기야.”
“당신이 전직 첩보원이든 뭐든 상관없어. 어쨌든 내 뿌리가 대만계인거랑은 별개로 난 미국인이라고 생각하니까. 나한테 돌아갈 고향이 있다면 미국이겠지. 내가 기억하는 고향의 맛도 치즈버거의 맛이라고……. 이야기가 옆으로 새는데 어쨌든 이거, 주전자 말고는 모르겠어. 하지만 이건 뭔지 알아.”
스피넬은 다구들을 과감히 내려놓고 개완을 집었다.
“일단 이건 뚜껑이랑 찻잔이야.”
“보면 알아.”
“뚜껑을 열고 찻잎을 넣어.”
“응.”
“그리고 뜨거운 물을 부어.”
“응.”
“그리고 기다렸다가 마시는 거야.”
“그렇군.”
두 남자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사파이어가 나직이 물었다.
“그게 다인가?”
“뭘 바라는 거야 대체.”
“더 복잡할 줄 알았어. 중국식으로.”
“대체 왜 동양인이 동양인한테 오리엔탈리즘을 가지는 거야!”
“내 나라가 아니니까?”
지당하신 말씀이다. 스피넬은 다시 한 번 뒷목을 잡았다. 멀리서 소문으로만 들을 때는 사파이어란 녀석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한 괴물이라는 이미지가 있었는데 가까이서 얼굴을 마주하고 얘기하니 다른 의미로 사람을 돌게 한다. 참 여러 가지로.
“그럼 한국에서는 어떻게 하는데? 나한테 설명 좀 해보시지?”
“음. 그렇군.”
사파이어는 잠시 고민하다가 교과서적으로 설명했다.
“티백이라는 물건이 있는데 그걸 컵에 넣고 뜨거운 물을 넣으면 돼.”
“티백은 전 세계 어디에나 있잖아!”
“아.”
사파이어는 완전히 잊고 있었던 것을 기억해낸 듯이 순수하게 감탄했다. 스피넬은 슬슬 이 남자가 무표정한 얼굴을 가장하고 자기를 놀리고 있는 건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사실 한국에서도 차는 잘 안 마셔. 커피를 많이 마시지. 가루로 된 커피가 있는데 컵에 넣고 물만 부으면,”
“인스턴트 커피도 전 세계 어디에나 있잖아.”
“아.”
“당신 나 놀리는 거지?”
“미안하군. 몇 년간이나 끊고 살다보니까 가물가물해서. 물 외에 다른 걸 마시면 죽도록 맞았거든. 기절할 때까지 맞은 적도 있고.”
다시 분위기가 엄청나게 숙연해졌다. 스피넬은 식은땀이 날 것 같아서 사파이어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시선을 다른 데로 이리저리 빙글빙글 돌렸다. 둘 사이의 은밀한 관계였다지만 벤체슬라스가 사파이어를 학대하는 건 제 3자의 눈에도 보일 정도로 그 흔적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고 있었다. 비유를 하자면 뭐라고 할까……. 사람이 안 보이는 곳에서 개를 두들겨 패는데 그 개가 처절하게 울부짖는 소리는 밖으로 터져 나와서 다른 사람 귀에 들리는 것 같달까.
그런 학대의 피해자가 이토록 담담하게 말하는 것을 듣고 있노라면 맞은편에 있는 사람이 뭔가 대단히 잘못한 것 같다는 죄책감을 느끼게 되는 거다. 아무 짓도 하지 않았음에도.
뭔가를 더 대꾸했다간 또 엄청난 게 터져 나올 것 같아서 스피넬은 입을 다물고 묵묵히 차를 우려냈다. 이게 무슨 차인지도 모르겠지만, 대충 알료샤가 가져다 준 것을 대충 개완에 담고, 대충 물을 끓여서 대충 부었다. 찻잎이 몇 그램이고, 차를 한 번 씻어내고, 차를 우려내는 물의 온도는 몇 도고 이런 세세한 부분까지는 몰랐다. 뭔가를 뜨거운 물에 우려내서 물의 색깔이 변하고 냄새도 변하고 맛도 달라진다는 것. 두 남자에게 이 정도의 변화면 충분했다.
그렇게 첫 잔째의 차를 마셔본 소감은,
“못 먹겠다.”
스피넬은 곧장 찻잔을 내려놓았고 사파이어는 방금 자기 입으로 들어간 게 뭔지 진지하게 분석하다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곰팡이 맛이 나는군. 독성이 있어.”
너무 솔직한 평가 때문에 스피넬은 살짝 상처를 받았다. 뭐가 문제였을까? 너무 오래 우렸나? 찻잎을 너무 많이 넣었나? 젠장, 커피는 이런 문제가 없단 말이다. 버튼 하나만 누르면 될 일이고 그것도 아니면 인스턴트를 물에다가 풀기만 하면 되는데.
사파이어는 개완 뚜껑을 열고 안에 든 찻물을 가만히 보다가 뚜껑을 다시 닫았다. 그리곤 빈 컵에다가 찻물을 버렸다. 그러더니 손이 잠시 멈칫했다가, 다시 개완 뚜껑을 열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스피넬이 그걸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사파이어는 뚜껑을 잡고 요령 좋게 찻잎들을 걸러내 가며 찻물을 휘저었다.
“뭐야? 쓸 줄 모른다며?”
“몰랐는데,”
달그락거리며 뚜껑을 돌리던 사파이어가 다시 뚜껑을 제대로 덮어놓았다.
“희미하게 기억이 나는 것 같기도.”
“써본 적 있어?”
“베이징에서 살아봤으니까.”
“뭐야, 그럼 당신이 나보다 잘 알거 아냐.”
“그럴지도.”
스피넬은 사파이어가 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그대로 따라했다. 그러고 보니 어렸을 적 기억 속의 할머니가 대충 이 비슷하게 차를 우렸던 것 같기도 하다.
두 번째 잔은 첫 번째 잔과 다르게 훨씬 마실만했다. 아니, 오히려 꽤 괜찮았다. 설탕 좀 잔뜩 들이부었으면 좋겠지만. 커피 맛도 좀 났으면 좋겠고. 거기에 우유도 좀 탔으면 좋겠지만. 나쁘지 않았다. 스피넬은 그런대로 이 정체모를 차를 받아들였다.
사파이어는 무엇을 떠올리는 건지 차를 한 모금 음미하고는 붉은 수색을 가만히 응시했다. 과거를 떠올리는 게 온전히 좋다고만은 할 수 없다. 굳이 잊고 있었던 지옥을 다시 꺼내는 일이 될 수도 있으니까. 그가 무슨 일을 해왔고 어떤 인생을 거쳐 왔는지는 그 자신만이 알고 있겠지.
감상에 잠겨 있던 사파이어가 짧게 툭 내뱉었다.
“맛없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