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희에게 선사하는 지옥 (19/24)

너희에게 선사하는 지옥

“잘 어울리네.”

여자는 청년의 모습을 위 아래로 감상하며 품평했다. 이탈리아의 패션 브랜드로 수트를 맞춰주었는데 청년은 마치 그 브랜드의 홍보모델인 것처럼 옷이 잘 어울렸다.

“표정이 별로네. 마음에 안 들어?”

“아뇨, 부인. 감사드립니다.”

“부인이라니, 나이 들어 보이잖아. 이름으로 불러봐.”

“베로니카.”

“다시 한 번.”

“베로니카.”

“이제 키스해.”

여자의 명령에 청년은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의자에 앉아있는 여자에게 키스했다. 나이로 치면 청년의 어머니뻘 되는 여자는 청년을 강탈하듯이 덮쳐서 그의 혀와 입술을 맛보곤 고개를 떼어냈다. 여자가 다리를 쩍 벌리며 손으로 자신의 음부를 가리켰다.

“꿇어.”

청년은 체념한 듯이 표정 변화 없이 여자의 다리 사이에 다소곳하게 무릎 꿇고 앉았다. 기껏 새로 맞춘 수트가 구겨지든 더러워지든 간에. 그까짓 옷은 이 여자의 비위를 맞춰주면 몇 벌이라도 얻을 수 있다.

여자는 청년의 백금발을 손가락 사이로 흘리며 질 좋은 비단이라도 되는 것처럼 만지작거렸다.

“질투 나네. 여자애들보다 머릿결이 더 좋은 것 같단 말이야.”

“다 보살펴주신 덕입니다.”

“염색한 것도 아닌데 태어날 때부터 이런 색이란 말이지? 얼굴도 반반하고. 부러워. 인생 편하게 살았을 거야. 그렇지? 잘생긴 남자는 인생 편하게 살잖아.”

청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조심스러운 손길로 여자의 하의를 벗기고 속옷 위로 여자를 애무하기 시작했다. 그 조용함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여자가 청년의 머리칼을 쥐고 고개를 들어올렸다.

“내가 우는 얼굴 싫어하는 거 알지?”

여자의 말에 청년은 호수 같은 파란 눈을 가늘게 휘며 처연하게 웃었다.

“나 나쁜 사람으로 만들지 마.”

“그럼요. 제가 좋아서 하는 겁니다.”

“내 말만 잘 들으면 뭐든 줄 거야.”

여자가 강하게 움켜쥐었던 머리칼을 놓고 다시 애완견을 만지듯이 청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 해.”

청년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여자는 누구나가 탐낼만한 예쁜 남자를 발밑에 굴종시킨다는 정복감 때문에 평소보다 더 흥분했다. 여자의 남편도 이런 식으로 다른 여자들과 놀아나니까, 딱히 여자라고 금욕적인 삶을 살 필요는 없지 않은가. 이것은 일종의 복수였다. 남편에게, 그리고 가부장적인 세상에게.

그래도 여자는 다른 사람에 비하면 꽤나 자비로운 편이었다. 여자의 남편에게 들짐승처럼 얻어맞고 길가로 내쫓긴 청년은 온전한 수트 두 벌은 남겼다면서 자조했다. 장사하려면 그런 것들이 필요하다. 최소한의 설득력이라도 있어야하니까. 누더기를 걸친 거지보다는 유난히 비싼 옷을 입은 사기꾼이 더 인상이 좋은 법이다.

지금 입고 있는 옷은 그 남자가 두들겨 패는 와중에 이리저리 찢어놔서 말 그대로 볼품없는 거지꼴이었다. 질 좋은 원단이었는데 아깝다. 내다 팔지도 못하게 됐다.

그러나 쫓겨나는 와중에도 여자가 그 동안 봉사한 비용을 정산해줘서 청년의 품 안에는 제법 두툼한 지폐다발이 들어 있었다. 이정도면 정말 괜찮은 편이다. 여자는 돈을 떼먹지도 않았고 청년이 신체적인 손상을 입을 정도로 변태적인 요구를 하지도 않았다. 여자를 만족시키기 위해선 커닐링구스와 몇 가지 섬세한 애무, 입에 발린 달콤한 말과 잘 가꾼 외모 정도면 족했다.

특히 외모에 대한 기준이 높았기 때문에 청년은 자기 몸을 도자기 인형이라도 되는 것처럼 매일매일 가꿔야했다. 수염은 물론이고 체모도 나면 안 되고, 당연히 체취도 관리해야하고, 눈썹이나 다른 잔털등도 말끔히 정리해야한다. 머리칼을 비단결처럼 유지하는 건 물론이고 체형 역시 약간의 군살이라도 없이 탄탄하게 관리해야했다.

비인간적인 기준이지만 여자가 요구하는 대로 습관을 들여놔서 나쁠 건 없다. 다른 고객에게 몸을 팔 때도 이득이 되니까. 몸은 어차피 아무것도 아니다. 중요한 건 돈이다. 돈은 몸을 보호해줄 수 있지만 몸은 그러지 못한다. 돈이 없으면 모든 게 끝난다.

남자 고객은 여자에 비하면 대체로 함정이 많아서 조심해야했다. 그들은 호기심이 동할 만큼 예쁘장하게 생겼지만 결국 아랫도리에 자기 것과 똑같은 자지를 단 남자에게 큰돈을 주려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화대를 깎으려 들었다.

순순히 돈을 지불할 것 같은 사람들은 유난히 위험하거나 변태적인 요구를 했다. 성교 중에 청년의 목을 조를 수 있게 하자던가, 똥오줌 같은 배설물을 먹이려고 든다던가.

앞으로의 생활을 전적으로 보장해줄 테니 이빨을 다 들어내고 틀니를 끼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펠라치오 중에 이빨이 닿는 건 싫단다. 평생 동안 누군가의 자위도구가 되자고 이 길을 택한 게 아니기 때문에 청년은 그런 조건들을 듣자마자 그 자리에서 거절했다.

이런 것들을 미리 말하는 사람들은 그나마 신사적이다. 중간에 강간범이나 살인마로 돌변하는 계약파기자들도 종종 있었는데 그들이 먼저 합의사항을 어겼기 때문에 청년도 그들에게 똑같이 되돌려주었다. 계약 내용대로 얌전히 성욕만 풀었더라면 아무 문제없이 그 날도, 그 다음날도, 앞으로의 나날도 살아갔을 사람들인데 너무 욕심을 부린 나머지 스스로 명을 재촉하고 말았다.

그들이 강탈하려던 것은 걸음마를 뗄 때부터 무기로 키워진 암살자다. 그것을 몰랐던 게 딱히 그들 잘못은 아니다. 청년이 자기 얘기를 해주지 않았으니까.

이따금씩 아주 드물게 변태도 아니고 값을 깎으려들지도 않는 남자들이 나타났는데 사실은 그런 부류가 최악이었다. 그들은 사기꾼이었다. 청년을 인신매매단에 팔아넘기려고 하던가, 도리어 청년의 재산을 훔쳐가려고 작업을 거는 인간들이었다.

남자들은 여자들보다 더 많이 청년을 사주었지만 남자들과의 거래는 조심해야했다.

그에 반해 여자들과의 거래는 보통 여자들 쪽에서 경계하고 조심스러워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나은 편이었다. 남자 고객에 비해 건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위험도는 덜했다. 임신 위험 때문에 삽입하기를 싫어하는 고객층도 꽤 있어서 혀와 손으로 만족시켜줄 때도 많았다. 신경질적으로 구는 고객이 많았지만 남자들처럼 신체 어딘가를 절단하거나 부러뜨리려고 들진 않았기 때문에 정신적으로만 피곤할 뿐이었다.

어쨌든 이제 됐다. 다시 한 번 일어설 자금이 모였다. 일단은 묵을 곳부터 구하고 무기를 구하러 가야겠다. 뭐든 좋으니 일감 하나라도 문다면 거기서 차근차근 돈을 모아나갈 수 있을 거다.

양아버지를 죽일 때 더 이상 이런 생활은 하지 않겠다고, 내 인생은 내 것이라고 다짐했지만 평생 배운 게 이런 것 밖에 없는 인생이었다. 돌아올 곳도 결국 이 세계다. 그래도 청년은 악착같이 살아나갔다. 남을 죽여가면서까지 살아남으려고 했다.

청년은 또 사기를 당했다. 잔뼈 굵은 세공사도 종종 사기를 당하는 게 이 바닥인데 아무것도 모른 채 맨 몸으로 던져진 청년은 사기꾼들에게 정말 쉬운 먹잇감으로 보일 것이다. 이번에는 치명적일 정도로 큰 피해는 입지 않았지만, 청년은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다시 몸을 팔아야했다.

“구멍이 완전히 풀어져있는데? 도대체 몇 명한테 팔아온 거야? 병이나 옮지 않을까 모르겠군.”

등 뒤에서 상스러운 음담패설이 쏟아졌다. 청년은 두 눈을 질끈 감고 벽을 짚은 손을 주먹 쥐었다.

“소리 내. 얼굴만큼 예쁘게 울어보라고.”

남자의 채근에도 청년이 신음소리를 내지 않자 청년의 허리를 뒤흔드는 추삽질이 더욱 거세졌다.

“고고한 척 하지 말고 소리 내, 이 좆물 변기야! 좋아서! 남자한테! 똥구멍 파는 주제에!”

청년을 한껏 모욕한 그 걸걸한 목소리가 킬킬 웃기 시작했다.

“좆 달린, 사내새끼가, 편하게 살려고, 다른 남자한테 후장 대주면서, 응? 너도 자지 박히는 거 좋아하니까 푼돈 받으면서 가랑이 파는 거 아냐? 이거 봐, 지금도 좋다고 질질 싸면서.”

남자는 말로 청년을 능욕하면서도 손을 앞으로 내밀어 청년의 성기를 쥐어보진 않았다. 수컷의 엉덩이에 박아 넣긴 해도 다른 수컷의 자지를 만지고 싶진 않기 때문에. 게다가 청년의 성기는 이런 일을 하기엔 아까울정도로 컸다.

분명히 엉덩이만 팔고 있는 게 아닐 것이다. 저 커다란 것으로 남자든 여자든 뚫고 있겠지. 돈을 받아가면서. 그건 시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역겨움이었다. 누구는 돈을 내고 좆질을 해야 하는데 이 새끼는 예쁘게 생겼다고 돈을 받아가면서 좆질을 하다니.

남자가 뭐라고 지껄이든 청년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남자의 음담패설을 받아준다는 건 합의했지만 청년이 굳이 더 서비스를 해줄 필요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남자는 너무 못했다. 통증밖에 느껴지지 않는 섹스였다. 청년의 한껏 밀어 올려진 엉덩이와 등골 위로 후드득 떨어지는 남자의 땀방울도 불쾌했다.

아플 정도로 전립선을 짓찧어대는 폭력에는 신음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다. 내장이 후벼지고 있으니까. 절대 기분 좋아서 나는 소리는 아니고 몸이 연결된 사람도 그것을 느끼기 때문에 어지간히 가학적인 성격이 아니고서야 그런 통성에 발정할리 없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소리를 전혀 내려고 들지 않는 청년의 고고함이 도리어 그런 가학심을 부추겼다.

돼지냄새가 나는 남자에게 몸을 꿰뚫리고 뒤흔들리면서 청년은 스스로의 멍청함을 비웃었다. 그까짓 것 울어주면 그만 아니냐. 가짜 신음을 흘리고 좋아 죽는 척 해줬으면 빨리 끝났을 것 아니냐. 돈을 준다면 남자 자지도 거리낌 없이 빨지 않았느냐. 지금이라고 다를 게 뭔가. 더 편하게 살 것이지. 애원하면서, 아양 부리고, 웃음도 눈물도 몽땅 팔아버리면 훨씬 쉽게 살았을 텐데.

정말이지 쉬운 인생이었을 텐데.

자존심이 빵이 되어주더냐. 돈이 없다는 건 죄다. 청년은 돈이 없어서 지금 이렇게 벌을 받고 있다. 돈이 있었으면 안 해도 됐을 일들이다. 지붕이 있는 실내에서 자기 위해, 병원에 가는 대신 진통제라도 먹기 위해, 한 끼 식사라도 하기 위해, 이런 식으로라도 돈을 벌어야하는 형벌을 받고 있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 인형의 집을 불태워버렸더니 이제는 익사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버둥치는 백조가 되었다. 사람들은 백조의 고고한 아름다움을 그저 즐거워할지 몰라도, 청년은 예쁜 얼굴 뒤에 지독한 독기를 품고 하루하루를 악착같이 버텼다.

그나마 얼굴이라도 예뻐서 다행이다. 이름도 모를 진짜 부모님이 남겨준 유일한 업적이 이것뿐이다. 청년이 백치였더라도 얼굴은 팔아서 먹고 살 수 있었을 것이다. 며칠 굶어서 절박해지면 인간의 존엄성은 아무것도 아니다…….

입이 걸었던 것 치곤 남자는 오래 가지 않아 허리를 떨며 길게 배설했다. 콘돔을 끼고 있었다곤 해도 남의 좆이 내 몸 안에다 무언가를 잔뜩 싸지르는 감각은 썩 유쾌하지 않다.

남자가 바지를 추스르며 떠난 뒤, 청년은 남자가 지불한 화대를 다 구겨지도록 쥐고 잠시간 몸을 웅크린 채 가만히 있었다. 그대로 멈춰있던 청년은 좀 진정이 되자 발목까지 내려가 있던 팬티와 바지를 끌어올렸다. 과하다싶을 정도로 쓴 윤활제가 아직 닫히지 않은 구멍으로 흘러나와 허벅지를 찐득하게 타고 내려갔다.

일단은……. 샤워를 해야겠다. 오늘밤은 실내에서 자야한다. 내일 먼 길을 떠나야하니까. 오늘은 아끼지 말자. 유통기한이 지난 보존식이 아니라 평범한 비스트로라도 좋으니까 식당에 가자. 따뜻한 음식을 먹어둬야 한다. 통조림 말고 제대로 조리된 음식을. 이동비를 제하고서라도 그 정도 금액은 남을 것이다. 다행히 오늘은 다치지 않았으니까 약값은 필요 없다. 그런 다음엔, 그런 다음엔…….

예상치 못한 것이 가슴으로 울컥 치고 올라왔다. 윽 윽하며 억누르던 청년이 그대로 오열했다. 아무도 듣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항상 골목길을 어슬렁거리던 고양이도, 하늘 위를 날아가는 새도, 이따금 보이는 쥐새끼도 없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세상이 청년을 외면하는 동안 청년은 통제되지 않는 울음을 한참동안 흘려냈다.

우는 건 좋지 않다. 쓸데없이 체력을 소모하고, 수분을 빼앗아가고, 사람을 진흙탕에 처박으니까. 이미 진흙탕에 처박힌 인생이라면 한결 새로운 감각으로 자신이 빠진 오물통을 다시 한 번 생생하게 느끼도록 해준다. 눈물이 감각을 씻어내 봐야 이 세상은 쓰레기장이다.

울음은 비합리적인 행동이다. 인간은 성가신 생물이다. 청년에겐 울 여유도 없단 말이다. 감정은 사치다. 그런 게 있다면 돈벌이로 활용할 궁리를 해야지. 동정심 많은 바보를 낚아서 눈물로 구걸하면 돈 몇 푼을 더 쥘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아깝게 낭비할 게 아니라.

오갈 데 없는 청년은 점점 더 초라하게 울었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울음이었고 아까운 감정낭비였다.

“루마니아어를 할 줄 아나? 이거 의외인데.”

황금 같은 야경이 내려앉은 프라하의 밤. 호텔 스위트룸의 커다란 창문 앞에 선 남자가 서늘하게 식힌 발포성 포도주를 잔에 따랐다가 백금발의 청년을 돌아보곤 청년 몫까지 따라냈다. 이탈리아산 모스카토 다스티로 상큼한 꽃향기가 훅 풍겨 나왔다가 조금 끈적할 정도의 단맛으로 끝나는 고급품이었다. 남자가 와인 잔을 건네자 청년이 잔을 받아들며 대답했다.

“아주 어렸을 적에 그 곳에서 입양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잘 하지는 못하지만 희미하게나마 기억이 납니다.”

“그럼 자네는 루마니아인이군. 어색하긴 하지만 이정도면 굉장히 잘하는 편이야. 나랑 대화할 정도는 되지 않나. 말은 잘 못해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다 알아듣겠지. 안 그래?”

청년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덧붙였다.

“양아버지의 교육 덕분입니다.”

“자네는 어디서 자랐나?”

“오스트리아입니다.”

“좋은 나라로 입양 갔군. 잘 된 일이야.”

남자가 별 생각 없이 던진 말에 일순 청년이 싸늘하게 웃었다. 남자는 그 웃음을 알아채지 못했다. 달콤한 백포도주를 한 모금 입에 머금고 굴리던 남자가 청년에게 물었다.

“이름이 뭔가?”

청년은 일순간 주저했지만 곧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르체아입니다.”

“미르체아. 좋은 이름이군. 무슨 뜻이 깃든 이름인지 아나?”

“모릅니다.”

“평화라는 뜻이야.”

남자는 와인을 마시면서 청년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물건의 품질을 재는 태도였다.

“성씨는?”

“모릅니다. 미르체아란 이름도 고아원에 있을 때의 이름이니까.”

“그렇겠지. 어쩌면 진짜 부모님이 마지막 선물이랍시고 붙여준 이름일수도 있고. 종종 그런 사람들이 있으니까. 애를 버리기 전에 뭔가 흔적은 남겨놓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고. 별 생각 없이 한 말이니까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는 말게.”

남자가 손을 뻗어 청년의 머리칼을 만졌다. 손가락 사이에 감긴 머리칼이 비단같이 스르륵 흘러내리자 남자의 얼굴에 야릇한 미소가 걸렸다.

“예쁜 색깔이야. 염색하고 나면 머릿결 관리하기도 힘들 텐데?”

“태어날 때부터 이 색깔입니다.”

“그래?”

남자는 거의 백색으로 보일 정도인 청년의 머리칼을 손끝으로 비비며 청년의 눈동자를 깊숙이 들여다보았다. 머리칼 못지않게 예쁜 색의 눈동자였다. 잔잔한 호수의 표면 같기도 하고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날의 하늘같기도 했다.

이렇게 깨끗하고 고상한 눈동자를 어디서 봤을까. 성화에 그려진 천사들이 이런 눈동자를 하고 있을 것 같은데. 아니면 성모의 푸른 옷자락이라던가. 이콘에 그려지는 선명하고 진한 빛깔의 푸른색이 아니다. 뭐라고 할까……. 보티첼리가 그리는 하늘의 색깔 같다고 할까.

이목구비는 귀족적이고 섬세하다. 이런 일을 하기엔 아까울정도로. 이런 미남을 건드린다니, 즐거운 상상이었다.

귀족 혈통을 하룻밤 상대로 더럽힌다라. 남자의 아버지는 농부였고 할아버지도 농부였다. 그 이전까지 올라가봐야 루마니아의 빈농이었을 뿐,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다.

눈앞의 이 예쁘장한 청년은 어떨까? 아직 왕정시대고 귀족이란 게 남아있었다면 청년은 감히 이렇게 대등하게 서서 말을 나누지도 못할 존재였을 것이다. 어쩌면 어느 작은 나라 왕가의 혈통이었을지도 모르지. 생김새만 놓고 본다면 그런 상상을 자극할 만큼 기품 있게 생겼으니까.

“자네는 피가 많이 섞인 모양이야. 아니면 부모님이 외국인이었던가. 이 머리색, 이건 참 드물지. 이렇게 깨끗한 벽안도 흔한 건 아니고. 이건 루마니아인이라기보다는, 흠……. 북유럽 쪽인가? 노르웨이 친구 중에 이런 머리색인 친구가 있었는데. 아니, 스웨덴이었던가? 트란실바니아의 독일계일수도 있겠어.”

남자의 분석은 조금 집요할 정도로 파고 들어갔고 청년은 몹시 따분해졌다. 일반적인 매춘부라면 본인의 존재를 하나하나 알아내려는 듯이 물어뜯는 그의 태도가 맹금 같다고 느낄지도 모르지만, 청년은 그 맹금을 사냥하러 온 상위 포식동물이다. 암살자다.

사실 그 따분해하는 태도가 남자의 호기심을 더 자극하기도 했다. 전직 비밀경찰인 세쿠리타테 앞에서 이렇게까지 냉정한 사람은 드무니까. 비록 청년은 남자가 어떤 존재였는지 모를 테고, 그래서 주제 모르고 이렇게 비싼 척을 하는 거겠지만.

청년을 평가하면서 남자는 은근한 시기심이 들었다. 그는 여태까지 자신의 다갈색 머리칼과 별 특징 없는 황갈색 눈동자에 이렇다 할 감상이 없었지만 예술작품 같은 남자를 마주하게 되니 갑자기 비교되는 느낌이 들었다. 눈앞에 있는 게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면 마냥 즐겁기만 했을 텐데, 복잡한 감정이었다.

어쨌든 오늘 밤 주인의 자리는 남자의 것이다. 남자는 청년을 맘대로 할 권리가 있다. 그러려고 돈 주고 산거니까. 제아무리 잘난 수컷이라고 해도 내 발 밑에 엎드려야하는 처지다. 그것을 떠올리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사실 이 정도까진 기대하지 않았어. 평소에는 내가 돈을 더 지불했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오늘은 덜 냈다는 생각이 드는군. 고급 서비스라고 해도 도저히 고급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거든. 자네는 외모로는 더할 나위 없어. 말이 통하는 것도 마음에 들고. 생긴 것만큼 섹스도 잘하는지 봐야겠어.”

“제 실력은 최고입니다.”

청년이 오만하게 웃었다. 그 밑바닥엔 서리 같은 차가움이 깔려 있었다. 분명하게 다른 뜻이 깃들어 있었지만 이미 그 예쁜 얼굴에 홀린 터라 남자는 알아채지 못했다. 하긴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고 눈치채봐야 남자가 뭘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남자는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을 완전히 비운 후 청년에게 명령했다.

“옷 벗어.”

청년이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와인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셔츠 단추를 하나씩 천천히 풀면서 남자를 도발적으로 노려보았다. 잡아먹을 듯한 눈이었다. 마음에 들었다.

남자는 가학적인 사람이었고 도전할 가치가 있는 사냥감을 좋아했다. 고분고분한 인형보다는 조금 반항적이고 길들이는 맛이 있는 야생마가 낫다. 그 야생마가 아름답기까지 하다면 더할 나위 없다.

남자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갑자기 흥분이 치밀어서 목이 말랐다. 막상 일이 시작되면 청년을 묶어놓고 채찍질을 할 것이다. 그러려고 도구도 준비해놨다. 미리 합의된 사항은 아니지만 나중에 충분히 웃돈을 얹어주면 되겠지. 합의하지 않은 사항이라서 그를 더 흥분하게 만들었다. 죄 많고 사디스틱한 욕구였다. 당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당하게 된 청년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어떻게 망가질까. 무엇보다 저 하얀 피부는 매 자국을 낼 가치가 충분하다.

남자는 뒤돌아서서 와인을 한잔 더 따르며 선심 쓰듯 말했다.

“자네 하기에 따라서 앞으로의 생활을 내가 책임져줄 수도 있어. 나랑 정기적으로 만나는 관계 말이야. 자네도 여기저기 다른 사람들한테 팔려 다니는 것보다는 편하게 살고 싶잖아? 원한다면 루마니아에서 살게 해주지. 다른 나라보다는 태어난 나라로 돌아오는 편이 낫잖아? 집을 한 채 내주지. 어떤가?”

“그거 고맙군.”

조금 전까지 고분고분하던 말투가 일변했다. 동시에 남자의 뒤에서 청년의 손이 확 덮쳐들었다. 순식간에 남자의 목을 휘어감은 교살용 쇠줄이 살갗을 파고 들어가면서 목의 혈관이 불뚝 솟았다. 남자는 몸싸움을 벌이려고 했지만 갑작스런 습격에 당황했고, 숨을 쉬지 못하는 상태기 때문에 금방 제압됐다.

청년은 남자를 쓰러뜨리며 그 위에 올라탔다. 쇠줄을 감은 손에 힘은 풀지 않았지만 남자를 단번에 죽일 생각은 없어보였다.

“사람 인생을 마음대로 하니 재밌던가?”

청년의 새하얀 얼굴에 음산한 미소가 걸렸다. 천사같이 아름답던 얼굴이 본색을 드러낸 악마처럼 표변했다.

그 변화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에 그려진 예수와 유다의 변화 같기도 했다. 두 인물의 모델은 동일인물이지만 인생의 잔인한 흐름이 그를 예수에서 유다의 얼굴로 바꿔놓았다. 가장 성스러운 얼굴도 가장 추악한 죄인의 얼굴도 한 사람의 안에 고스란히 들어있는 것이다.

청년은 더 이상 앳되고 고분고분하게 순종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피 맛을 아는 맹수의 얼굴이었다. 남자 역시 악한 인생을 살아오면서 숱하게 포식자의 위치를 점해봤지만, 자신이 이렇게 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천년만년 자신의 안위만큼은 굳건할 거라고 믿었다.

“인정하지. 사실 아주……. 즐거워. 너 같은 인간을 기다리고 있었어. 의뢰라곤 해도 사적인 감정이 아예 없을 순 없으니까.”

청년의 얇고 교활한 입술 사이로 고른 치열이 드러났다. 희생자를 물어뜯기 직전의 흡혈귀 같은 모습이었다.

“내가 세쿠리타테를 모를 거라 생각했나? 몸 팔러 온 남창이 우연히 루마니아 고아일 확률이 얼마나 되나? 체코에서? 배에 낀 기름기로도 모자라서 뇌까지 썩어버렸나? 이만큼 눈치를 줬으면 알아들었어야지. 영원히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겠지. 그만큼 원한을 사고서도 날 노리러 오는 암살자는 없을 거라고 말이야.”

이래서는 안됐다. 일이 이렇게 흘러가서는 안되는 거였다. 가학적인 왕의 자리는 남자의 것이어야 했는데.

“너희들이 싸질러놓은 죄악이 되돌아오니까 기분이 어떤가? 고아 수출로는 전 세계에서 손가락 안에 들잖아. 인신매매로 얼마나 벌었나? 얼마나 많은 인생들을 빨아마셨냐고? 이 흡혈귀들아.”

청년은 남자를 단번에 질식시키진 않았지만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게 몸으로 찍어 누르면서 쇠줄을 감은 손에 힘을 빼지 않았다.

남자는 간신히 숨만 붙어있는 채로 생사가 달린 절박함을 담고 청년을 올려다보았다. 지옥에 떨어진 죄인이 자신을 용서해줄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눈 앞에 닥친 고통을 피해보려고 악마에게 매달리는 꼴이었다. 청년은 다른 때와 달리 유독 가해자의 입장을 만끽하는 것 같았다.

청년은 아직도 단념하지 못하고 이따금씩 거칠게 꿈틀거리는 남자를 힘으로 짓누르며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던 와인 잔을 집었다. 불빛에 백포도주의 빛깔과 이따금씩 피어오르는 기포를 비추어보던 청년은 그것을 그대로 남자의 얼굴에 줄줄 붓기 시작했다.

“난 단맛을 싫어해. 너희가 이렇게 달디 단 인생을 사는 동안……. 내 인생은……. 쓰레기통에서 썩어가고 있었어. 내 술은 쓰라리고 독한 맛이야. 이딴 건 너나 익사할 때까지 마셔.”

이것과 비슷한 짓을 남자도 예전에 많이 해봤다. 그 때는 술이 아니라 물이었고, 얼굴에 끼얹는다기보다 희생자의 머리를 잡고 물이 가득한 욕조에 강제로 집어넣는 방식이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었음에도 남자는 반성하지 않았다. 오히려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국가가, 사회가 시키는 대로 충실히 규칙을 따르며 살아왔을 뿐이다. 그 시대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누구라도 나 같은 위치에 있었다면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누군가는 개소리라고 할 테고 누군가는 힘겹게 인정할 테지만 청년에겐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남자가 희열을 느끼며 고의로 고문을 했건, 누군가에게 떠밀려 죽지 않기 위해 했건 간에 남자는 청년에게 영원히 가해자다.

네가 저지른 죗값을 끌어안고 익사해라.

물론 청년은 거의 20년 가까이 걸려 돌아온 복수의 기회를 싱겁게 끝낼 생각이 없었다. 잔 안에 든 술은 남자를 익사시키기에 충분치 못했고 입 대신에 눈과 코로 발포성 포도주를 마신 남자가 격렬하게 기침하며 몸을 뒤흔들어댔다.

달콤하고 끈적한 포도주가 탄산 기포와 함께 눈과 코의 점막을 자극하자 남자가 생리적으로 몸을 뒤틀며 자극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남자의 위에 올라타서 강제로 찍어 누르고 있던 청년도 일순간 몸이 휘청거릴 정도였다.

침대 근처에서 그 난동을 부리고 있었기 때문에 청년의 등이 순간적으로 침대 다리에 세게 부딪쳤고 그 바람에 침대 옆에 기대어놓았던 남자의 가방이 쿵 넘어지면서 열렸다. 단순한 서류가방인줄 알았는데 그 안에는 청년에게 쓰려고 준비해놨던 온갖 SM도구들이 들어 있었다.

에그 로터 같은 건 귀여운 수준이고 말의 생식기나 사람의 팔뚝 같은 것을 형상화한 어마어마한 크기의 딜도나 쇠사슬로 된 구속도구, 톱니바퀴가 유난히 더 뾰족해 보이는 박차, 몸 안에 들어갔을 때 깨지면 큰일이 날 것 같은 유리구슬, 말채찍과 회초리 등등 갖가지 물건들이었다.

그 물건들의 존재 자체가 남자가 이미 매춘 내용에 대한 계약 파기를 계획했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그대로 계약 파기에 대한 형벌 도구가 되었다.

청년은 무릎으로 남자의 성기와 고환을 강하게 짓눌러 그를 무력화시키고 머리채를 휘어잡아 침대로 질질 끌고 갔다. 그리고 자신을 묶으려 했던 구속구로 남자의 팔다리를 묶어 침대에 대자로 고정시켜놓았다.

“너희들은 항상 다른 생각을 품는단 말이야.”

청년은 자기 몸에 들어갔을 것들을 하나하나 꺼내 살펴보았다. 부츠 뒷굽에나 달 금속 박차를 손에 쥔 청년이 손가락으로 날카로운 톱니바퀴 끝을 빙글빙글 돌려보았다.

“물론 쉽게 죽일 생각은 안했지만 자진해서 고문도구를 가져오는 놈은 또 처음이야. 오늘 밤 상대가 내가 아니었다면 다른 누군가가 이걸로 고문을 당했겠지. 안 그런가? 너한텐 다른 사람의 목숨이란 건 한순간의 유희일 뿐이니까. 이젠 네 목숨이 내 장난감이야. 네가 날 즐겁게 해줘야겠어.”

루마니아의 과거, 왈라키아 공국을 다스렸던 가시공 블라드 3세는 죄인에게 일절 용서가 없는 잔혹한 통치로 인해 많은 이의 두려움을 샀고, 악마라고 불렸다.

그의 진노의 대상이 된 자들은 끝을 뾰족하게 깎은 긴 나무 장대에 항문과 성기부터 꽂혀 세워져서 자기 몸무게만큼의 압력으로 천천히 몸을 관통당해 죽는 꼬챙이 형벌을 받았다. 그리하여 블라드 3세는 꿰뚫는 자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 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처형했다. 범죄자를, 부정한 상인을, 그리고 왕을 배신하는 귀족들을 죽였다. 그 당시 왈라키아의 귀족 계층인 보야르들은 자랑스럽게도 자신의 주군을 몇 번씩이나 갈아치우는 자들이었고 블라드 3세는 그들을 절대 용서하지 않았다. 나를 빼앗기고, 나의 아버지와 형제를 빼앗기고, 내 나라와 내 백성을 빼앗기고, 자긍심마저 빼앗기는 수모를 당했기 때문에.

어쩌면 그는 더 이상 뺏길 수 없다고 다짐한 걸지도 모른다. 더 이상 내 인생을 저당 잡히지 않을 거라고. 남의 손에 의해 내 운명이 굴러가도록 두지 않을 거라고.

그의 치세는 공정하고 무서운 시대였다. 두려움이 사방에 깔려 있었고 왕이 자비를 베풀지 않았기 때문에 악인들은 몸을 사려야 하는 시대였다. 예측할 수 없는 성격 파탄자 왕이 펼치는 공포정치의 시대였지만 단 한가지의 원칙만은 있었다. 그는 철저하게 정의를 관철했다. 그것이 자기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었고, 나라를 팔아먹는 이리떼가 들끓는 약소국이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며, 백성을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피비린내 나는 악마라고 해도 상관없다. 흡혈귀라는 전설이 퍼져도 알 바 아니다. 드라큘라라고 부르든, 국가 영웅이라고 부르든 맘대로 해라. 잔혹한 통치에 대해서도 변명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공정했다. 그 뿐이다.

블라드 3세가 살아서 이 세상을 보았더라면 청년 같은 고아들은 생겨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예 국가 정책으로 인해 공장에서 찍어내듯이 태어난 아이들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을 팔아넘긴 보야르 놈들처럼 제 나라 국민을 팔아먹는 놈들을 제일 먼저 꼬챙이에 꿰어죽일지도 모르지. 그가 살아있다면 광기와도 같은 그의 정의는 지금 이 청년의 편일 것이다.

비록 청년이 끔찍한 학대를 당할 때 그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기 때문에 정의로운 가시공 전설 따윈 믿지 않는다고 해도, 블라드 3세는 즐거워하며 청년의 복수를 도와주었을 것이다. 적어도 전직 비밀경찰이었던 희생자는 청년의 얼굴에서 옛 왕의 진노를 보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저질렀던 죄의 대가를 끌어안고 4시간 28분 동안 끔찍하게 고통스러워하다가 죽었다. 그가 청년에게 쓰려고 준비해둔 물건들은 모두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청년은 희생자의 사인이 자기색정사로 보이도록 위장한 후에 희생자에게서 튄 약간의 혈액과 많은 체액, 다른 오물들을 씻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다.

포만감이 오래가지는 않는 복수였다. 가해자 집단의 벌레 한 마리를 죽였다고 첫 단추부터 잘못 꿴 청년의 인생이 멀쩡해지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맛이 좋긴 했다. 청년의 쓰디쓴 인생에 있어서 보기 드문 단맛이라고 할까. 익숙지 않은 달콤함이 지나쳤던 탓인지 욕실에서 잠깐 무너질 뻔 했지만 청년은 가까스로 자신을 추스르며 자신 내면의 어린아이에게 속삭였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다 괜찮아.”

스스로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 어릴 때부터 자기 자신에게 들려준 자장가였다. 아무도 불러주지 않았기 때문에 청년 혼자서만 계속 그것을 속삭였다.

처음으로 암살에 실패했을 때, 변태적인 살인마가 꾸민 미로에서 도망쳐야 했을 때, 처음으로 몸을 상납해야 했을 때, 종종 임무 실패나 명령 불복종으로 양아버지에게 피멍이 들도록 두들겨 맞고 내버려졌을 때, 결국 그 양아버지를 쫓아가서 살해하고, 토막 내고, 악마의 소굴 같던 대저택을 자신의 손으로 불 질렀을 때, 그 모든 순간에 청년은 스스로를 달래고 위로하고 보듬어 안아주고 있었다.

인생에 다른 누구도 없었다. 오직 자기 자신 뿐이었다.

나는 나를 지킨다. 나는 나를 지킨다. 나는 나를 지킨다. 항상 외는 주문을 진정될 때까지 되뇐 청년은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와 자신이 이 자리에 있었다는 증거들을 지우기 시작했다. 아직 일이 끝난 건 아니다. 목표물을 죽이는 것까진 쉬운 일이지만 방 밖으로 나서면서부터가 진짜 어려운 일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위험수당까지 합해서 꽤 큰돈을 받았으니까.

남자는 공산주의가 끝나고 나서도 계속 기득권을 차지하고 있던 인물이었고 당연히 그가 속해 있는 계층도 권력자들의 모임일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저지르면서 권력을 유지하는지 잘 알기 때문에 자기에게 닥칠 위험에 대해 편집증을 가지고 있다. 아마 경호원이 있을 것이다. 혹시 몰라서 자기색정사로 위장했지만 경찰에게 발견되는 거라면 몰라도 경호원이면 얘기가 달라진다.

전투를 대비해야한다. 소음기를 장착한 권총이 한 자루 있고 예비탄창이 두 개, 단검이 한 자루, 남자를 제압할 때 쓴 쇠줄. 소리가 나지 않는 물건들이다. 교전 없이 빠져나갈 수 있는 게 제일 좋고, 교전이 있더라도 일을 크게 벌이지 않는 게 좋다. 괜찮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여태 숱하게 해왔고, 해내왔으니까.

청년은 권총의 서늘한 총신을 이마에 대며 잠시 그 냉기가 자신에게 스며들도록 했다. 고도로 흥분되는 상황이 오면 속은 반대로 싸늘하게 식어 차분해졌다. 총이 자신의 수호천사라도 되는 것 마냥 기도하듯이 그대로 있던 청년이 입꼬리를 끌어 올려 씨익 웃었다. 나는 살아남았다. 앞으로도 살아남을 것이고, 죽는 것은 너희가 될 것이다. 나는 나를 지키기로 맹세했다. 나를 보호하고, 계속 살아나가기로.

이것은 너희 모두에 대한 복수다.

세상에 대한 복수다.

너희에게 선사하는 지옥이다.

내 목적을 위해선 수단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살고, 너희는 죽는다. 그러기 위해선 몸을 파는 것쯤이야 아무렇지도 않다. 여자 것을 빨고 남자에게 박히는 걸레 같은 삶도 감당할 수 있다.

돌고 돌아서 결국 암살자의 진흙탕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인생이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필요하다면 타인을 착취할 것이다. 남에게 인생을 착취당하던 내가 이제는 당하는 입장이 아니라 저지르는 입장이 될 것이다. 나는 무수히 많은 악행을 저지를 것이다.

상관없다. 내가. 살 수. 있다면.

이것이 내 신앙이다. 내 목숨. 내 운명. 내가 선택하는 나의 인생. 나의 자유. 아무도 지켜주지 않았던 아이를 나는, 내 스스로, 나 혼자서 지킨다. 더 이상 울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내가 지켜준다. 이것이 나의 정의다. 내가 신이고 이것이 곧 신의 정의다. 변명도 합리화도 하지 않는다. 용서받을 생각도 없다. 나도 세상을 용서하지 않으니까.

청년은 이마에서 총신을 떼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희미한 화약내를 느끼며 호텔 방문을 열었다. 또 다른 지옥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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