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베토벤 제7번 교향곡 2악장 알레그레토 (18/24)

베토벤 제7번 교향곡 2악장 알레그레토

많이 컸군요. 라피스 라줄리.

당신은 먼 길을 달려왔습니다.

누구도 인정하지 않겠지만 나는 당신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 나에게 안식을 본편 中

“언제까지 이렇게 살 겁니까.”

빗줄기가 투둑 투둑 떨어지기 시작한 오후였다. 멍든 눈가를 문지르며 골목 벽에 기대어 서 있던 백금발의 청년이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골목 어귀에는 검은 장우산을 쓴 남자가 우두커니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신 같은 남자였다. 검은 수트에, 검은 머리칼에, 구릿빛 피부, 망자를 심판하는 것 같은 눈빛까지. 굽어진 매부리코는 그의 인상을 더 강하게 만들었다. 청년은 아직 멀쩡한 한쪽 눈을 깜박거리며 지친 듯이 그의 얼굴을 확인하곤 한숨을 내쉬었다.

“바유미 씨…….”

청년은 제대로 얻어터졌는지 입가도 부어오르고 있었다. 빨갛게 달아오른 입술이 새하얀 피부와 대조되어 묘하게 퇴폐적인 느낌을 주어서 어딘가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인상을 만들어냈다.

얼굴만 그 꼴이 난 건 아닌지 청년은 한 손으로 갈비뼈도 감싸 쥐고 있었다. 뼈가 부러진 것 같지는 않지만 하는 행동을 보니 피떡이 되도록 얻어맞은 것 같다. 장우산을 쓴 남자는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청년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라피스 라줄리.”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마세요.”

“보석으로 살기 싫으면 보석 같은 짓을 하지 마십시오.”

“보석 같은 짓이 뭔데요.”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청년도 딱히 질문을 한 것이 아니었다.

“오늘은 재수가 없었을 뿐이에요.”

“화대도 뜯긴데다가 그 꼴이 되도록 두들겨 맞았으면서 말입니까?”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채찍이라도 되는 것처럼 청년이 몸을 움찔움찔 떨었다. 남자는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품 안을 뒤지더니 무언가를 꺼냈다. 그리고 청년에게 다가가서 건넸다. 돈이었다.

“적선은 필요 없어요.”

“당신 돈입니다. 필요할 텐데요.”

남자는 한사코 받지 않으려는 청년에게 강제로 돈을 쥐어주었다.

“오늘밤은 폭우라고 합니다. 비를 맞으면서 길에서 잘 수는 없으니까.”

“나는 거지가…….”

“아까 그 남자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당신이 다친 곳은 눈에 보이는 곳만은 아닐 테니까. 더 망가지기 전에 치료하십시오. 결장은 혼자서 못 고칩니다. 이건 당신 돈입니다. 식사도 제대로 하고, 의사에게 치료도 받고, 지붕이 있는 곳에서 주무십시오.”

“죽였습니까?”

“내가 처리했으니까 뒤처리 비용은 신경 쓰지 마십시오.”

“고맙습니다…….”

청년은 손에 쥔 돈을 꾸깃하고 움켜쥐더니 중얼거렸다.

“바유미 씨가 저한테 화대를 다 주시네요.”

“기어오르지 마십시오.”

“이 빚은 꼭 갚겠습니다.”

“사람 꼴부터 되세요.”

청년은 돈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어떤 돈이든 간에 결국 자기 몸을 갈아서 번 돈인 것은 틀림없다. 피 같은 돈이다. 사람을 죽여서 벌든, 사람에게 몸을 팔아서 벌든.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겁니까?”

“저번 의뢰에서 사기를 당했거든요. 무기값도, 처리반 비용도 모두 제가 지불해야했고 그걸 처리하고 나니까 남는 게 아무것도 없더라구요.”

“단 한 푼도 말입니까?”

“네. 입에 들어갈 빵값까지도요.”

킬러를 속이려드는 간 큰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년은 사기를 당했고 한 끼 식사비도 남기지 못해서 몸을 팔았다. 오늘 하루를 살아남기 위해.

그마저도 재수가 나빠서 몸은 몸대로 고생하고, 폭행당하고, 돈까지 뜯겼다. 물론 청년을 윤간한 놈들은 지금은 살아있지 않지만.

이 아이는 너무 착한 게 탈이다. 청년의 주인이었던 세공사가 그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 착한 아이가 자기 목을 따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했겠지.

“울타리를 부순 걸 후회합니까?”

“울타리요?”

“당신을 지켜주던 벽 말입니다. 족쇄지만, 지금 같은 꼴은 당하지 않았겠죠.”

“아뇨. 난 사람이 된 걸 결코 후회하지 않습니다. 또 그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또 죽일 거예요. 이번에는 더 잔인하게 죽일 겁니다. 내 인생이니까. 내 인생은 누군가의 장난감이 아니니까. 난 사람같이 살 거예요.”

“미안합니다, 라피스 라줄리.”

남자는 굳이 청년의 상태를 지적하지 않고 간략히 사과했지만 그 때문에 청년은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비가 내리는 게 다행이었다.

청년이 다 젖은 소매로 눈가를 꾸욱 짓누르는 동안 남자는 슬쩍 돌아서주었다. 비참한 상태의 자신을 못 본 척 해주는 배려를 깨달았는지 청년이 말했다.

“Mulțumesc.(고맙습니다.)“

“난 루마니아어를 모릅니다.”

“루마니아어인건 아시네요.”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습니까?”

“고향?”

“적어도 말이 통하는 곳 말입니다.”

“저는 최소 5개 국어 이상을 할 수 있도록 교육받으면서 자랐습니다. 지금은 그것보다 더 할 줄 알아요. 말이 통하는 곳이요?”

“말을 할 줄 안다고 해서 그 곳이 고향은 아니니까.”

“그 말씀대로입니다. 루마니아어를 할 줄 알지만 그 곳은 내 고향이 아니에요. 어떤 추억도 없습니다.”

“그럼 왜 굳이 그 말을 쓰는 겁니까?”

청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물었다.

“바유미 씨는 이집트로 돌아가신 적 있나요? 말이 통하는 곳이요. 추억도 있으시겠죠. 저와는 달리.”

“우문이었군요. 사과하겠습니다.”

둘은 화해했다. 서로의 미련함과 오만함에 답답함을 느끼던 차였다.

“바유미 씨.”

청년이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절 각별히 신경써주시는 거 압니다. 어쩌면 다른 사람보다 특별히 더…….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뭘 단단히 착각하고 있군요. 딱한 아이가 당신 하나 뿐인 줄 압니까.”

남자는 청년의 추측을 즉각적으로 부정했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당신은 영민한 아이입니다, 라피스 라줄리. 숨기십시오. 허점을 보이지 말고. 세공사와 보석 관계를 끊어낸 당신이라면 지금 같은 상황은 충분히 이겨낼 수 있을 겁니다. 이보다 더한 것도 해봤을 테니까.”

“바유미 씨.”

청년은 남자의 말을 끊었다.

“저는 더 이상 피해자가 되지 않을 겁니다. 저는 가해자가 될 거예요. 더 이상 당하고 살지 않습니다. 당할 바에야 저지를 거예요.”

“세상에 대한 복수입니까? 당신의 복수는 일리에가,“

“그 이름은 말하지 마세요.”

“……엘리아스 룬드보리가 죽었을 때 당신의 복수는 이미 끝난 겁니다. 더 나가지 마십시오. 그게 당신을 집어삼킬 테니까.”

“나는 나를 지킬 겁니다. 나는 나를 지킵니다. 내 자신을 지켜요. 그 뿐입니다.”

한순간이지만 남자의 눈에는 청년이 10살쯤 먹은 어린아이로 보였다. 자신 역시 그만큼 젊어진 상태로. 그러니까, 둘이 처음 만났을 때처럼.

물론 착각일 뿐이었다.

“당신은 거리를 좀 더 헤맬 것 같으니까 이걸 드리죠.”

남자가 우산을 건넸다. 청년은 이미 비에 푹 젖은 상태라 우산을 써봐야 소용이 없을 것 같았지만 남자는 한사코 우산을 넘겨주었다. 그리고 자신은 비를 맞으며 그 골목을 떠났다. 혼자 남겨진 청년은 남자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가 어깨를 들썩이며 우산으로 얼굴을 가리고 뒤돌아섰다.

이따금씩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났지만 그마저도 빗소리에 묻혔고, 가늘게 떨리는 그의 어깨 너머로는 지독스러울 정도로 우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검은 정장의 남자, 바유미는 얼마 후에 청년을 다시 찾아보았다. 비 내리는 골목에서 멍든 눈을 문지르며 우두커니 서 있던 백금발의 잘생긴 청년은 지금은 어떤 돈 많은 여자의 예쁜 장난감이 되어 있었다.

멍 자국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지만 많이 희미해진 상태였고, 못 먹어서 절박해보이던 얼굴은 말쑥한 미남의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후줄근한 단벌복도 청년의 날씬한 몸매에 딱 맞는 고급 정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공 들여 꾸민 인형 같았다.

청년을 산 여자는 나이깨나 있는 여자로, 인상으로 보았을 땐 성격이 그리 좋아보이진 않았다. 항상 치켜 올라가있는 눈썹과 습관으로 생긴 주름으로 봤을 때 신경질적인 성격일 것이고 어쩌면 가학적인 취미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마 청년은 여자의 밤 시중을 들고 있을 것이다. 그 어떤 굴욕도 감내하면서 여자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봉사하겠지. 여자의 변덕에 따라 얼마든지 갈아치울 수 있는 옷가지나 장신구처럼, 청년도 그렇게 소모되고 있을 것이다.

정말 선택의 여지가 없었나, 라피스 라줄리? 이것뿐이었나?

트로피처럼 여자 옆을 따라다니던 청년이 바유미와 눈이 마주치고는 가볍게 목례했다. 바유미는 그저 청년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등을 돌려 사라졌다.

그게 당신 삶의 방식이라면, 내가 이래라 저래라 할 권한은 없지.

그가 청년에게 한차례 말했던 대로, 세상에 불쌍한 아이가 이 아이 하나 뿐만은 아니다. 바유미는 맨 몸으로 세상에 던져진 이 청년에 대해 어떤 감정도 없다. 섣불리 동정하지도, 비난하지도 않는다. 그저 가만히 지켜볼 뿐.

그것이 어떤 길이든, 어떤 지옥길이고 가시밭길이든 당신이 스스로 선택했다는 것에 대해 바유미는 경의를 표한다. 그뿐이다.

얼마 못가서 청년은 여자의 남편에게 뼈가 부러지지 않을 만큼 두들겨 맞고 쫓겨났다. 여자의 남편 역시 자기 아내 못지않게 돈을 주고 다른 여자들과 놀아나며 제한 없이 쾌락을 누리는 사람이었고, 자기 아내가 심심풀이로 젊은 놈들과 논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번엔 도가 지나쳤다.

사실 다른 놈들과 비교해서 청년에게 그만큼 크게 물질적 지원을 해준 것도 아니다. 그러나 심각하게 거슬리는 사항이 있었다. 남편 눈으로 보기에도 질투가 날 정도로 대단한 미남이라는 것과 자기 아내가 진지하게 다른 생각을 품기 시작했다는 것이.

아무래도 그것만큼은 용서할 수 없었다. 아내가 어떤 놈이랑 불장난을 해도 알 바 아니지만 재산만큼은 떼어줄 수 없었다. 이혼으로 인한 위자료도 줄 수 없었고. 그러니까 서로 바람은 얼마든지 피되 갈라서는 것만큼은 꿈도 꿔선 안 되는 일이었다.

여자는 간만에 얻은 예쁘장한 인형을 남편이 도둑고양이 내쫓듯이 내다버리자 포악스럽게 싸웠지만 남편의 의지를 거스르면서까지 청년을 다시 데려와 곁에 두지는 않았다. 여자에게도 미남자의 금방 시들어버릴 젊음보다는 오래도록 빛나는 황금이 더 값진 것이었기에.

그렇게 청년은 또 거리를 떠도는 처지가 되었다. 다행히 그간의 봉사에 대한 비용을 정산해준 것인지 여자가 얼마간의 지폐를 쥐어주었기 때문에 그걸로 다시 무기를 구하고, 임시 아지트를 마련하고, 시체처리업자를 고용할 수 있었다.

어차피 킬러에게 매춘은 부업일 뿐. 중간에 일이 한번 꼬였다가 원상복구 된 것뿐이다. 총과 장의사가 마련되어 있으면 나머진 걱정할 것이 없다. 원래부터 청년의 실력은 최고였다. 청년과 동갑내기인 그 누구를 데려다놔도 청년보다 이 바닥에서 경력이 쌓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청년은 걸음마를 할 때부터 암살자로 키워졌으니까.

이곳이 그가 있어야 할 자리다. 누군가의 품은 그의 안식처가 될 수 없다. 그런 것은 그에게 허용되지 않았다. 세상이, 그의 인생이, 그의 운명이 부여해준 것은 혼자서 지독하게 걸어가야 하는 길이었다.

그를 이 세계에 끌어들인 양아버지가 그에게 남겨준 유산 중에 먹고 살 기술로 가르쳐 준 것이 이것이다. 무언가를 부수고, 상처 입히고, 죽이는 것. 그 기술로 결국엔 자기 자신이 죽게 되었지만, 루마니아 고아원에서 연고 없는 예쁘장한 아이를 사올 때만 하더라도 그는 이런 결말을 예상하지 못했겠지.

다른 사람의 장난감으로 살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고 자신을 억압하던 울타리를 부순 청년이었지만 그 뒤에 기다리고 있을 것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16살짜리에게 그건 너무 큰일이었다. 자신을 가두던 벽은 반대로 바깥에서 몰려오는 모든 것들을 막아주는 방패막이기도 했다.

정상적인 사회를 배울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자란 16살 소년은 후원자도, 집도 잃어버렸기 때문에 모든 것을 스스로 책임져야만 했다. 자기 자신의 건강, 입에 들어갈 빵조각,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지붕, 안전까지. 정서적인 지원은 그에게 사치였다. 타고나기를 남들보다 더 섬세한 성정으로 태어난 아이에게 세상의 민낯은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었을 것이다.

양아버지라는 착취자를 죽였더니 이제는 세상 그 자체가 강탈자가 되었다. 뺏거나 뺏기거나. 소년이 청년이 되어가면서 배운 것은 그런 것들 뿐이었다.

양아버지는 청년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 그가 살아있었다면 언젠가 그의 재산이 고스란히 청년의 재산이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그 가능성은 청년 스스로의 손으로 없애버렸다.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미래가 되었다. 그러나 물질적인 재산은 잿더미가 되었을지라도 정신적인 재산은 아직 그대로 남아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들이 청년의 밥벌이가 되어주었다.

정상적인 학교를 다니며 공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청년은 귀공자로 자랐다. 어렸을 때부터 여러 나라의 언어를 말할 수 있도록 교육받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다국어 구사자가 되었고 원어민과 별로 차이도 없게 되었다. 그와 더불어 다른 사람의 기분이나 속내를 빨리 눈치채는 섬세한 성격도 다른 언어를 습득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청년은 그 방면에 있어서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언어에 대해서 청년은 학습한다기보다 흡수하는 편에 가까웠다. 예를 들어서 청년이 스페인어를 할 줄 모른다고 쳐보자. 스페인어에 대한 어떤 지식이 없어도 스페인어 원어민을 만나게 하면 청년은 일단 그를 깊이 관찰할 것이다.

처음에는 바디랭귀지로 의사소통하겠지만 이윽고 둘 사이에 어떤 합의점이나 공감대를 찾게 될 것이고, 그것을 기점으로 소통이 가능한 공감대를 더 늘려나갈 것이다. 그 과정에서 단어 한두 개를 습득할 것이고 서서히 말소리로 소통하게 될 것이다.

그는 문법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기도 전에 간단한 대화를 시작할 것이고, 상대방의 억양을 따라하며, 상대의 표현을 따라하고, 이윽고 상대의 사고방식을 따라하게 된다. 상대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 즉, 상대의 눈을 가지게 된다. 마치 아이가 엄마를 따라하며 말이 트이듯이.

그런 식으로 그는 원어민의 자연스러움을 획득한다. 그러나 듣기와 말하기는 그렇게 체득할 수 있어도 읽기와 쓰기는 학문의 영역이다. 문자와 표기법을 모르면 그는 단지 여러 말을 할 줄 아는 까막눈에 지나지 않는다.

다행히 그 점에 있어서는 양아버지가 도움을 주었다. 양아버지의 서고에는 온갖 언어로 된 책이 가득했고, 청년에게 큰돈을 들여서 가정교사도 아낌없이 붙여주었다.

양아버지 본인도 대단히 유식한 사람이었다. 청년의 어렸을 때 기억 중 하나는 양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해부학 같은 의학서나 철학서, 고전문학 따위를 원어로 읽는 것이었다. 그것이 양아버지가 그에게 동화를 들려주는 방식이었다. 다른 여느 집과는 형태가 좀 달라도.

청년이 로망스어권과 게르만어권를 오가며 자란 것도 큰 이점이 됐다. 한 언어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면 그 뿌리를 타고 사촌간인 언어들을 쉽게 흡수할 수 있다. 비록 3살 즈음에 입양되어서 별 기억이 없다지만 태어날 때부터 들어온 루마니아어는 그의 근본적인 사고관을 형성하는 토대가 되었고 로망스어는 그의 어머니가 되었다.

청년의 양아버지 엘리아스 룬드보리, 그러니까 청년을 키울 때 일리에 콘스탄티네스쿠라고 이름을 바꿨던 그 세공사는 본래 스웨덴인이었기 때문에 게르만어가 그의 근본이었다. 그가 청년에게 이 선물을 주었기 때문에 청년은 게르만어군에 속하는 언어를 접할 때도 큰 이질감 없이 쉽게 흡수하며 받아들였다.

별도의 노력이 필요한 것은 슬라브어 계통이었다. 양아버지는 러시아권의 부유층도 고객으로 모시기 위해 원어민 교사를 붙여서 청년에게 러시아어를 가르쳤다. 나무줄기가 단단해지기 전에 여린 새싹일 때부터 받침목을 덧대어주는 것처럼, 어릴 때부터 러시아어를 접한 청년은 그것을 기점으로 다른 슬라브 계통의 언어를 파고들 때도 자신의 유전자, 혹은 그에 준하는 친밀감을 느꼈다.

언어만이 그가 가진 재산의 전부는 아니었다. 상류층의 사고방식, 청년이 성장기동안 누려왔던 부유한 생활과 에티켓, 고상한 취향까지 청년의 비싼 포장지가 되어주었다.

사실 청년에겐 본인의 취향이라고 할만한 게 없었다. 입는 옷부터 음식, 와인까지 어떤 특정한 양식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그게 본래 자기의 것이라곤 할 수 없었다. 청년이 보고 자란 것은 거의 대부분 양아버지의 것이었고,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취향은 곧 양아버지의 유산이었다.

자기 손으로 죽인 사람의 모습을 고스란히 닮아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그런 혐오감을 제한다면 양아버지의 껍데기는 자신과 비슷한 계층, 그러니까 상류층에게 팔아먹을 수 있을 정도로 고급스러운 것이어서 하루하루 벌어먹고 살아야하는 지금엔 청년의 요긴한 밥벌이가 되어주고 있었다.

여러 나라의 말을 할 줄 알고 부자와 권력자의 비위를 맞출 줄 아는데다가 얼굴까지 곱상한 젊은 암살자는 어디에서든 수요가 높다. 암살기술을 팔아먹지 못한다면 침대기술을 파는 방법도 있으니까.

어쨌든 청년은 본궤도로 돌아왔다. 그렇게나 벗어나고 싶어 했던 굴레 속에 스스로를 밀어 넣으며 또 다시 누군가를 죽임으로써 자신의 생존을 하루하루 쌓아간다.

바유미는 항상 그렇듯이 청년의 필사적인 몸부림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가 몸을 팔고, 그 돈으로 다시 암살자의 길을 걷고, 또 다시 사기를 당해 밑천을 잃고, 자신을 배신한 의뢰인을 본보기로 잔인하게 죽여서 다른 사기꾼들에게 경고하고, 그 길고 지독하고 외로운 길을 엎어질듯 쓰러질듯 걸어가는 것을.

바유미가 말했듯이, 사정이 딱한 아이는 그 청년뿐만이 아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 동정심을 표한다면 죽을 때까지 애도만 하다가 가야한다. 이 세상이 그렇고, 바유미 자신의 인생조차 그렇다.

그저 경의를 가지고 지켜볼 뿐이다. 굳은 의지를 가지고 자신의 운명을 깨부순 인간이 고고히 나아가는 가시밭길을.

“엄청난 사고를 쳤구나.”

불탄 집터 앞에 망연자실하게 서 있는 소년에게 한 남자가 다가와 섰다. 얼굴에 잔뜩 검댕이 묻었어도 새하얀 피부를 잃지 않은 소년이 고개를 돌려 옆에 선 남자를 바라보았다. 윤기 나는 구릿빛 피부에 매부리코인 남자는 소년에겐 눈길도 주지 않으며 전방을 날카로운 눈으로 직시하고 있었다. 그는 몹시 피곤해보였다.

“죽일 수밖에 없었어요.”

“조용히.”

“난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었어요. 나는…….”

“협회의 암살자 아니면 경찰이 널 찾아올 거다. 빨리 선택해야 돼.”

빨리 선택해야한다는 남자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3초 안에 대답이 나오지 않자 남자가 소년을 돌아보며 다그쳤다.

“어떻게 할 거냐?”

소년의 푸른 눈동자가 파르르 흔들렸다. 이제 제법 청년기로 들어서는 태가 났지만 아직도 어린아이다. 그런 어린아이에게 평생을 결정할 선택을 당장 하라고 하는 건 잔인한 일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오히려 자비로운 편이었다. 대부분의 경우엔, 인생의 중요한 선택이란 건 미리 질문조차 하지 않고 시간제한을 걸며 다가온다.

이제 한창 사춘기인 소년이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남자는 소년 대신 소년의 앞길을 골라주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소년에겐 여태 인생의 모든 것을 대신 결정해주는 절대적인 존재, 아버지가 있었는데 이젠 세상에 없었다. 이제부터 모든 것은 소년 스스로 결정해야한다.

무엇을 택할 것인가, 무엇을 먹을 것인가, 무슨 길을 갈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

남자는 소년의 선택에 어떤 방향으로든 강요하지 않았지만 소년이 선택하기를 포기하고 울음을 터뜨리려하자 무서운 손아귀 힘으로 그 어깨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강제로 현실에 붙들어 맸다.

“라피스 라줄리.”

남자는 망자를 심판하는 아누비스 신 그 자체였다. 저승의 신. 모든 영혼이 그의 앞에서 반드시 심판 받는 절대적인 권위와 위엄.

“양아버지 살해범으로 경찰에 자수할 것인가 암살자로 살아갈 것인가 결정해야 한다. 협회에 협력하기로 한다면 협회는 딱히 널 처벌하지 않을 거다. 첫 번째 실수는 누구나 저지를 수 있으니까.”

“몰라요.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네가 결정해야한다.”

소년은 남자의 목소리 밑바닥에 깔린 절박함을 읽었다. 옛날부터 다른 사람의 속내는 잘 읽는 섬세한 아이였다. 이 남자는 왜 절박해하는 걸까? 무엇을 안타까워하는 걸까? 소년의 결정을? 소년의 인생이 이렇게 되어버려서? 그건 이 남자만의 위로하는 방식 같기도 했다.

소년은 반항심이 치밀었다.

“왜 내가 이렇게 돼야해!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닌데! 멋대로 낳아놓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나라고 살인자가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닌데! 이렇게 만들어놓고! 시작하기도 전에 인생이 끝나버렸는데! 내 인생은 누가 책임져! 늬들 좋으라고 싸질러놓고 알아서 살아가라니 이게 순수한 악이 아니고 뭐야! 나한테는 선택권이 없었어! 강제로 낳아져서! 인신매매로 팔려가고! 암살자가 안 되면 죽어! 내가 어떻게 해야 했냐고!”

“애도를 표한다.”

남자는 오열하면서 소리치는 소년에게 나직이 말했다. 묘한 위안을 주는 목소리였다. 소년은 누군가에게 사과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세상에게 사과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넌 아직 살아있고 선택을 해야 돼. 살기를 포기하고 이 자리에서 죽길 원한다면 그건 내가 도와줄 수 있다. 그러나 사는 건 오로지 너 자신이 선택해야 돼. 삶의 방식도 네가 선택해야한다. 제한된 선택지지만 누구도 모든 선택지를 가질 순 없어. 너도, 나도, 인간이라면 모두 그렇다.”

소년은 눈물이 고여 잔뜩 흐려진 눈으로 눈앞의 이국적인 남자를 깜박깜박 쳐다보았다. 이 남자가 처음으로 자신을 드러내며 진솔하게 말하고 있었기 때문에, 둘 사이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소년의 눈에는 남자가 자기 또래의 이집트인 소년으로 보였다.

그 아이도 자기와 똑같은 길에서 똑같은 고민을 하며 너무 어린 나이에 너무 중요한 선택을 해야만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남자의 눈은 그런 것들을 담고 있었고 소년은 그것들을 읽을 수 있었다.

소년이 여태까지 봐온 어른들은 잔인하기만 했는데 이 남자는 누구의 삶에도 끼어들지 않는 절대적인 중립을 지켰다. 모든 사람의 악의를 봐온 소년에게 있어서 그것은 유일한 호의였다. 무관심한 호의.

소년은 남자에게 기댈 수 없다는 걸 알았지만 적어도 그는 소년의 인생을 인위적으로 조종하려 들지는 않았다.

“나는,“

남자는 인내심 있게 소년의 대답을 기다려주었다. 걸어 다니는 죽음이라고 해도 그 정도의 자비는 있다.

“나는 살 거예요. 더 이상 피해자가 되지 않을 거예요. 내 인생은 내거니까. 다른 사람의 장난감이 아니라…….”

“경찰에 자수하지 않을 거냐?”

“자수하지 않을 거예요.”

어쩌면 소년은 정상참작을 받을 수도 있다. 어찌됐든 소년은 인신매매의 희생자니까. 소년이 여태까지 저질러 온 범행들도 누군가의 강압에 의해서 억지로 했던 것들이니까. 감옥에 가는 건 피할 수 없을지라도 사회는 그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줄지도 모른다. 몇 년 후거나, 몇십 년 후에 풀려나서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해야겠지만 어쨌든 정상인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일지도 모른다.

소년은 그것을 거절했다. 누구의 강요도 없이 스스로 자기 인생을 선택했다.

“그게 네가 선택한 길이라면.”

남자는 소년의 선택을 존중한다는 듯이 대답했다. 감상적인 부분은 딱 거기까지였다. 남자가 다른 사람에게 들릴까봐 소년의 귀에다가 대고 빠르게 속삭였다.

“내가 이 사건을 조사하게 될 거다. 너와 나는 만난 적이 없다. 일리에 콘스탄티네스쿠는 사고로 죽은 거다. 너는 실수를 저지른 것뿐이야. 너는 절대 고의로 네 주인을 죽인 게 아니다. 사고였다.”

“하지만,“

“사고였다.”

남자가 강하게 속삭이자 소년이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조사가 끝나면 협회에서 널 소환할거다. 요원이 스위스까지 널 데려가려고 마중 나올 거야. 절대 도망가지 마라. 절대로, 도망가지, 마라.”

남자가 힘주어 강조했다. 소년은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르는 것도 모르고 남자의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남자가 하고 있는 말은 소년의 목숨을 살려줄 생명의 조언이다.

“인간으로서 살아갈 이름을 하나 준비해둬라.”

“인간으로서, 살아갈 이름?”

“라피스 라줄리로만 살 수는 없으니까.”

“알았어요.”

“행운을 빈다.”

남자는 소년에게서 고개를 떼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등을 돌렸다. 곧바로 그 자리를 떠나려는 남자를 소년이 불러 세웠다.

“바유미 씨.”

남자가 고개를 돌려 소년을 쳐다보았다.

“고맙습니다. 바유미 씨처럼 저한테……. 호의를 베풀어 준 사람이 없어요.”

“착각하지 마라. 딱한 아이는 너뿐만이 아니니까.”

남자는 중립성을 지키기 위해 냉담하게 대답하곤 바로 그 자리를 떴다. 소년은 남자가 속 안에 든 것을 다 꺼내놓을 수 없는 위치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 냉담함에 상처 받지 않았다. 재투성이 소년은 남자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로부터 정말 많은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저는……. 제 자신을 지켜야합니다. 저는 제 자신을 지키기로 하고 여태까지 살아남았습니다. 당신도 아시다시피.”

“그럼 그렇게 흘러가게 두십시오.”

“찾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건강히 지내십시오.”

“안녕히. 라피스 라줄리.”

세공사 벤체슬라스와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누고 온 바유미는 과거에 대한 감상을 묻어두고 본연의 업무로 돌아왔다. 나이를 먹어가니 이제는 새로 알게 되는 사람보다 주변에서 사라져가는 사람들이 더 많다. 10년, 20년씩 알고 지내던 사이도 하나둘씩 세상을 뜬다. 그런 나이가 되었다. 언젠가는 바유미도 죽음을 맞이하게 되겠지.

그렇다곤 해도 한창 때의 젊은이가 죽는 것은 아직도 적응하지 못했다. 이건 나이를 먹을수록 심해진다. 특히 죽은 사람을 유년기 시절의 모습부터 알고 있었다면.

이런 진흙탕에 발을 담그고 있으면 언젠가 개죽음 당할 거란 건 정해진 수순이긴 하지만……. 가끔은 몹시 지친다.

늦은 시각, 세공사 협회 데스크에 앉아 서류 업무를 하던 바유미가 그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그의 상념을 깨는 존재가 나타났다.

“여기가 세공사 협회인가?”

“당신은?”

“사파이어.”

“아, 당신이.”

말로만 듣던 사파이어. 세공사 벤체슬라스의 보석이다. 그 아이가 여태 키워 온 다른 보석보다 애지중지한다는 소리는 들었다. 실제로 실적을 많이 올리기도 했고. 황금알을 낳는 거위 같은 존재였겠지. 지금은 주인의 목을 따는 불량품이 되어버렸지만.

“나는 그 남자의 목숨에 대한 권한이 있어. 죽여도 내가 죽여.”

그러니까……. 라피스 라줄리는 아직 살아있다는 소리군. 자기 인생을 강탈한 남자를 죽이지 않았다는 건 뭘 의미할까. 깊은 증오와 비뚤어진 애정이 죽음을 쉽게 허락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남자는 자신의 착취자에게 집착하고 있다. 그게 어떤 의미이든 간에.

하지만 바유미는 옛날부터 절대적인 중립을 유지했다. 누구에게 더 마음을 주는 일 없이. 그는 협회를 우선시해야 했다. 바유미는 사파이어가 내민 거래 조건을 수락했다. 그들이 협회를 공격하지 않을 테니, 협회도 그들에게서 손을 뗄 것.

바유미가 상부에 보고하는 것을 본 사파이어는 그대로 등을 돌려 협회 건물을 나섰다. 사파이어가 탄 헬기가 사라지는 것을 보며 바유미는 다시 전화기를 들었다.

“터키석입니다. 이 시간부로 세공사 벤체슬라스, 보석 사파이어, 보석 알렉산드라이트를 블랙리스트에 올립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들과 충돌하지 마십시오. 이 안건을 회의에 올립니다.”

전화를 끊고 나니 다시 싸늘한 침묵이 찾아왔다. 바유미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살아남았군요, 라피스 라줄리.

당신이 그를 아낀 것처럼 그도 당신을 아끼는 것 같군요.

누군가는 당신을 막아줘야 했습니다. 파멸로 달려가는, 자살이나 다름없는 행위를.

세상을 적으로 돌리던 당신에게 인생을 함께해 줄 동반자가 생겨서 다행입니다.

바라건대 우리 모두에게 안식이 있기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