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Follia
비틀비틀 걸어간 발자국 말고는 아무런 결점도 없는 새하얀 설원 위에 붉은 피가 점점이 흩뿌려져 있었다.
위태로운 발자국의 끝에는 눈밭과 크게 차이가 없는 새하얀 머리칼의 소년이 쓰러져 있었다. 눈밭이 마치 포근한 침대라도 되는 양 엎어져 있는 소년은 아직 희미하게 감각이 살아있는 손끝으로 눈덩이를 가만히 쥐었다가 폈다. 눈은 뽀득뽀득 소리를 내며 소년의 손가락 안에서 뭉쳐졌다가 그대로 알갱이가 되었다.
소년은 몽롱한 기분으로 이 모든 감각을 느끼고 있었다. 추위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디선가 부엉이 우는 소리가 들려오고, 이따금씩 겨울 숲의 바람이 죽어가는 소년을 사정없이 때렸지만 그것 말고는 딱히 방해하는 게 없었다. 고개를 돌릴 기력도 없는 소년이 눈동자만 굴려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바라보니 키 큰 전나무 가지에 부엉이 한 마리가 앉아 소년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소년이 죽기를 기다리는 걸까. 결국에는 새의 밥이 될 운명이었나. 그것도 나쁘지 않은가. 그것도 나쁘지 않은가…….
피를 어느 정도로 흘렸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한 방울 한 방울의 생명이 몸에서 빠져나간다는 감각은 확실하다. 주마등이 소년의 가물가물한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런 날이었는데. 양아버지의 손을 잡고 저택에 들어서던 날도 이런 날이었는데.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와 압도적인 조명들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 때 개를 선물 받았지. 엥겔. 내 개였는데. 다람쥐 꽁무니나 쫓아다니던 멍청한 개였는데……. 난 개가 싫어. 자기가 죽을 줄도 모르고 도망도 안 가니까. 주제도 모르고 주인을 지키겠다고 대들어선 안 되는 존재에게까지 대드니까. 결국은 죽는 거다. 난 개가 싫어.
아무도 사랑할 수 없고, 아무도 믿을 수 없어.
죽기 전에 느끼는 감상이 최악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별로 유쾌한 기억이 없었다. 양아버지의 인형으로 살아왔을 때는 고민이랄 게 별로 없었는데 세뇌가 풀리고 나니 그것들 하나하나의 더러운 면이 명확하게 보였다. 결국 소년도 하나의 소모품이었고, 언제든지 교체될 수 있는 부속품이었다.
감정을 억누르고 살아가는 삶은 얼마나 무지하고 행복한가. 나에게 가해지는 학대를 인지하지 못하고 왜곡시키면 그게 살인자의 집안이라도 천국이 된다. 그 끝에 뭐가 기다리고 있었는지는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아니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결말을 알고 있으면서도 무시했던 걸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나에게 죽으라고 했다.
나의 신이, 나의 절대자가 나보고 죽으라고 이 사선으로 밀어 넣었다. 당하고 나서야 알게 됐다. 왜 그랬을까. 그 분이 나한테 왜 이런 짓을 했을까? 다른 원석을 찾아낸 걸까? 갈고 닦으면 나보다 더 빛나게 될 보석의 자질이 있는 아이를?
난 교체된 걸까? 창조주에게서 버림받다니. 나를 낳은 부모도 날 버리고 날 이렇게 키운 사람도 날 버렸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는 뭘까. 내가 원해서 태어난 게 아닌데 항상 타인의 의지로 버려지고, 학대받고, 사람이 아닌 무언가로 개조되었다.
인간으로서 사랑받고 싶다는 게 그렇게 큰 욕심이고 잘못이었단 말인가. 양아버지의 탐욕은 절대로 만족시킬 수 없는 영원한 구덩이였지만 소년에게 있어선 삶의 전부였다. 양아버지의 기대를 만족시키는 것 말고 다른 세계는 알지 못했다. 행위의 끝에는 상이나 벌이 기다리고 있었고, 양아버지의 말만 잘 따르면 얻어맞거나 욕을 들을 일도 없었다.
소년은 착한 아이였다. 착한 아이로 살라고 강요받았고, 그렇게 했다. 그 끝이 이것인가. 나의 절대자에게서 버림받는다고? 사냥이 끝나 필요 없어진 개를 죽이는 것처럼?
소년에게 어떤 선택지가 있었단 말인가. 아무것도 없었다. 소년에겐 선택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암살자가 된 것도, 양아버지에게 입양된 것도, 세상에 태어날 때조차도. 소년을 둘러싼 모든 환경이 대신 선택을 해놓고선 그 결과에 대한 계산서를 소년에게 강요했다.
소년이 고를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 해봐야 죽음뿐이다. 죽음이라니, 내 의지로 태어난 것도 아닌데 이제 와서 내게 죗값을 뒤집어씌우고 자살하라는 건가? 인생이 시작하기도 전에 이렇게 망가져버렸는데, 단지 자살하라고? 그게 정의인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얻어맞는다. 학대받는다. 끌려가서 고문당한다. 양아버지는 소년을 후계자라고 부르지만 소년은 교체가 가능한 부속품이다. 자질이 충분하지 않으면 언제든 깨버리고 새로운 보석을 키울 수도 있다. 죽지 않으려면 양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소년이 살기 위해선 남을 죽여야 한다. 이것이 거대한 악이라면, 소년이 죽어야 완성되는 정의라면,
정의 같은 건 개나 줘라. 더 이상 당하고 살지 않겠다.
선하게 살려고 노력했지만 불가능했다. 포기하겠다. 남의 목숨만큼 내 목숨도 소중하다. 남을 살리기 위해 소년이 죽으라는 건 또 다른 생명을 또 다른 번제물로 바치는 것과 같다. 웃기지 마라. 뭐가 정의냐. 선택할 기회도 주지 않은 주제에 이제 와서 대의를 위해 죽으라고? 위선자들은 손쉽게 남을 죽음의 희생양으로 바쳐놓고는 도덕적 만족감을 느끼겠지.
오늘도 세상을 정의롭게 만들었다고!
그 만족감은 포만감이 오래 가지 않는다. 또 다른 누군가를 찾아내 화형대에 세우겠지. 이렇게 극단적인 상황에 처해보지도 않았으면서 남의 목숨에 대해 쉽게 사형선고를 내리는 거다. 그리고는 말하겠지. 우리는 그들보다 깨끗하다고. 웃기지 마라. 소년이 이렇게 될 때까지 어느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단 말이다. 누가 있었는가? 아무도 없었다.
눈에 맞닿은 채 점점 얼어가서 감각이 없는 소년의 뺨 위로 미지근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사람이 되기를 이미 예전에 포기했지만 그것을 재차 선택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더 이상 인형으로 살 수 없다. 세상에 유일한 정의라는 게 있다면 바로 내가 사는 것이다. 나머지는 모두 소년을 착취하고 강탈하기 위한 거짓말일 뿐이다. 도덕? 선? 어린아이 하나 지켜주지 못해서 살인자로 키운 주제에. 세상은 소년에게 계산서를 내밀 권리가 없다. 감히 그럴 권한이 없다.
악하게 살 것이다. 그게 나를 지키는 길이라면. 악독하게 살아남을 것이다. 더 이상 과거로 돌아가지 않는다. 내 인생은 내꺼다. 난 인형이 아니고 내 인생은 누군가의 장난감이 아니다.
난 인간이다.
전나무 가지에 앉아 소년이 죽기를 기다리던 부엉이는 애가 타는지 다시 한 번 울며 날개를 퍼득였다. 그 바람에 나무에 쌓여 있던 눈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소년은 부엉이를 위해 여기다 시체를 남겨주고 갈 생각이었다. 인형으로 살아왔던 아이는 오늘 여기서 죽는다. 그리고 이 눈밭을 살아서나가는 건 스스로의 삶을 살아가기로 결심한 악인이다. 불쌍했던 껍데기는 여기 잠들어라. 편히 쉬길.
인간성을 내다버리는 순간에는 소년도 흐느껴 울 수밖에 없었다. 체온이 너무 떨어져서 눈물조차도 차갑게 느껴졌다. 거짓된 낙원에서의 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소년은 눈밭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신에게서 내쳐진 타락천사도 이런 홀가분함과 불안감을 느꼈을까.
“나는 나를 지킬 거야.”
그 한마디가 소년을 움직이는 원동력이었다. 이 설원에서 빠져나가 생환하도록, 자신을 죽이려고 한 아버지와 대적하도록 만드는 힘이었다. 이것이 신의 말씀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의 운명이라면, 소년은 지옥까지도 끌어안을 셈이었다. 내 인생은 내 것이다. 나를 지키는 게 정의다.
나를 지키는 게 정의다.
이것이 나의 신념이다.
평소보다 불안한 석양이 내려앉은 저녁이더니 밤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빗줄기는 약했으나 바람은 폭풍우처럼 거세게 불어 대저택의 창문들이 덜컹덜컹 요란한 소리를 내며 뒤흔들리고 있었다.
세공사 일리에 콘스탄티네스쿠는 나이를 먹을수록 성격이 괴팍해져서 지금은 집사나 하인 등의 고용인도 두지 않고 혼자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를 제외하고 이 저택에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해봐야 그의 아들인 미르체아였는데 그 아이가 집에 돌아오지 않은지도 벌써 일주일이 되어갔다.
일리에는 퇴행성 치매가 점점 심해져 자신이 그 아이를 사지로 내몰았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 그저 아름답게 세공된 크리스털 잔에 호박빛 벌꿀 술을 한잔 더 따르며 자신이 십수 년 전에 돈 주고 사왔던 고아를 중얼중얼 욕하고 있었다.
배은망덕한 놈 같으니. 먹여주고 입혀주고 키워줬더니 이제는 나를 거역해? 몇날며칠이나 얼굴을 보이지 않다니, 정말 단단히 혼을 내줘야겠다. 이제는 내가 두렵지도 않단 말인가? 오랜만에 가죽벨트로 채찍 맛을 보여줘야겠군. 어렸을 때처럼 내 무릎에 배를 깔고 볼기짝을 맞고 있으면 정신이 들 테지. 키워준 은혜도 모르는 잡종 같으니, 제 애미애비도 모르는 게…….
거기까지 욕하던 일리에는 흐릿한 기억 속에서 무언가가 또렷이 떠올랐는지 일순 두 눈동자에 한 줄기 지성의 빛을 반짝였다. 그래, 내가 그 아이를 사왔지. 정말 예쁜 아이였어. 나보다 더 하얀 머리에 깨끗한 푸른 눈동자였지. 내 진짜 부모님도 내가 아리아인다운 금발벽안이라고 좋아하셨댔어. 스웨덴의 양부모님도 말이야! 그러고 보니 진짜 부모님은 어디 있을까. 친아버지는 기억에 없다. 그는 어떤 사람일까…….
그 고아는 정말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예쁜 아이였어. 천사 그 자체였지! 그 눈부신 머리칼하며 구슬같이 반짝이는 푸른 눈, 발그레한 볼, 곧은 뼈대까지! 많이 야위고 때가 탄 상태였지만 그런 것쯤은 잘 먹이고 씻기면 아무 문제도 아냐! 천진하게 웃는 모습이 예쁜 아이였지. 그 아이를 내가 사왔어. 내가 그 애 아빠란 말이다.
두서없는 기억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가 일리에는 문득 서글퍼졌다.
이제는 내가 필요 없다는 건가? 늙고 병들었으니 나를 버리겠다는 건가? 나는 그 애에게 다 줬는데……. 내 재산, 내 삶, 내 비밀, 내가 걸어온 길과 위업까지. 짝사랑하던 대상에게 잔인한 배신을 당한 것처럼 일리에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이 뭘 그렇게 잘못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인간이란 믿을 수 없는 존재고 아무리 잘 대해줘 봐야 돌아오는 결과가 이런 것뿐이라고 씁쓸하게 곱씹을 뿐이었다.
그에게 있어서는 정말 잘못된 게 없었다. 인신매매로 사온 아이에게 걸음마를 뗄 떼부터 살인기술을 가르치고, 동물을 해부하게 시키고, 사람을 해치도록 만들며, 그 어린 아이를 짐승 같은 인간들에게 성적인 제물로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일리에는 그것이 옳았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로서는 자기가 살아온 길을 고스란히 가르쳐주었을 뿐 아니라 자신이 겪어야했던 고난은 최대한 배제한 채 아이에게 더 나은 방향을 제시한 것뿐이다. 이 모든 게 사랑이 없으면 불가능했단 말이다.
침울하게 과거를 곱씹던 일리에는 옆자리에 가져다놓은 축음기를 틀었다. 기억이 퇴행하면서부터 점점 더 옛날 것만 고집하게 되었다. 치매 때문에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어떻게 쓰는 건지도 잊어버린 기괴한 미래 물건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일리에의 어린 시절과 함께 했던 물건들은 그를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단단히 보호해주고 포근히 안아주는 것들이었다.
축음기에서는 노르웨이어로 된 솔베이의 노래가 구슬프게 흘러나왔다. 그 애절한 말소리에 귀 기울이던 일리에는 어색한 발음으로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가고 여름이 사라져도, 해가 바뀌고 또 바뀌어도 나는 네가 돌아올 것을 알아. 돌아올 것을 알아……. 어린 시절 이후로 노르웨이어를 쓰지 않았지만 이 노래 가사만큼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영혼에 새길 정도로 따라 불렀기 때문에.
언젠가는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와 그를 버린 어머니가 그를 다시 찾아올 것 같았다. 그에게로 돌아와서 그를 꼭 껴안아주며 혼자 내버려둬서 미안했다고 사과할 것 같았다. 노인이 된 지금까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어린 시절에 채워지지 못한 욕구가 지금까지도 그의 영혼을 갉아먹고 있었다.
돌아오지 않는 부모를 향한 연가가 이제는 돌아오지 않는 자식을 향한 연가로 바뀌었다. 한평생을 돌이켜 생각해보니 세상은 왜 그렇게 일리에에게 잔인했던 걸까. 젊었을 땐 삶을 꽉 채우는 다른 문제들 때문에 쉽게 잊을 수 있었는데 나이를 먹을수록 연약해져서 점점 더 과거에 남은 상흔이 쓰려온다.
일리에가 끝없는 자기 연민 속으로 빠질 때쯤 저택 어딘가에서 온 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 같은 무시무시한 외침이 들려왔다.
“아버지!”
그런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모든 것을 빼앗기고 속임 당한 자의 처절한 분노였다. 얌전한 목소리로 조근조근 교양 있게 말하도록 가르쳐놓은 목소리가 이제는 방마다 문을 걷어차고 돌아다니며 자신의 양아버지를 찾는 피 맺힌 절규로 바뀌어있었다.
방문이 부서질 듯이 쾅쾅 소리를 내며 벽을 울릴 때마다 일리에의 노쇠한 어깨가 흠칫흠칫 떨렸다. 살기 어린 고함으로 제 아비를 찾는 목소리에 어느 순간부터 다른 고함과 총소리가 섞이기 시작했다.
일리에는 그제야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내가 사람들을 고용했지. 이 집 안에 두었다. 용병들이다. 내 아들을……. 죽이려고…….
왜 그랬을까? 그는 아이가 돌아올 것을 알고 있었다. 아이가 더 이상 참지 않을 거라는 것도, 일이 이렇게 될 거라는 것도 미리 알고 있었다. 그래서 텅 비어있던 이 집안을 요새로 바꾸어놓았다. 아이가 죽지 않고 돌아온다면 자기 손으로 직접 죽이려고…….
왜냐하면, 미친 보석은 죽여야 한다.
한번 속박이 깨진 맹수는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다. 그게 내 인생을 바쳐 만들어낸 역작이라 할지라도. 일리에는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이 이렇게 될 운명이었다. 어디서부터 틀어졌는지는 자기 자신도 알 수 없지만. 어쩌면 한참 전부터, 아이를 고아원에서 사올 때부터 자기도 모르게 이런 결말을 예상하고 있지 않았을까.
일리에는 사병들로 집안을 채워놨으면서도 아이가 점점 다가오는 소리, 점점 커지는 그 소리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내 아들은 이미 사지를 몇 개나 헤치고 오느라고 기운이 다 빠져 있을 것이다. 제 아무리 뛰어난 킬러라도 물량으로 밀어붙이는 데에는 장사가 없다. 그러니까 제발 죽어라. 죽어다오. 실수라도 저질러서 죽어주렴. 너를 다시 보는 게 너무나 두렵단다. 너를 이토록 기다리고 있었음에도 너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 몹시도 두렵구나.
사람이 임종하는 순간에는 그가 지어왔던 죗값에 따라 천사나 악마가 마중을 나온다고 하는데 일리에 같은 악인도 자신이 어디에 가게 될지 알고 있기 때문에 죽는 그 순간을 두려워했다. 그따위 것을 연약한 자들의 망상이라고 비웃었던 것은 싹 잊고 벌벌 떨며 무서워했다.
종교와 도덕이란 것은 노예에게 목줄을 채우기 위해 권력자들이 인위로 만든 규칙이라고 비웃으며 살아온 그였다. 신 따위는 애초에 믿지도 않았고 없는 것이 확실하다며 잘 먹고 잘 누려온 그였지만,
마지막 순간에서야 이렇게 뿌린 것을 거두게 된다.
그가 아낌없이 돈과 애정과 자신의 삶을 들여 최고의 암살자로 만들어 낸 아이가 이제 지척까지 닿았다. 타고난 착한 심성을 암살자로서의 재능으로 바꿔주는데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던가. 이 길을 걷지 않았더라면 교육자나, 아이들을 돌보는 보육자나, 어쩌면 헌신적인 간호사가 되었을지도 모를 아이다.
동정적인데다가 성가실 정도로 남에게 공감을 잘하는 성격이니 성직자가 되었을 수도 있지. 성직자라니. 이런 보물을 그런데다 낭비하다니 그런 아까운 짓이 있나!
세상은 죽든가, 죽이든가다. 뺏든가, 빼앗기는 입장뿐이다. 일리에는 승자로서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줬다. 어마어마한 재산이란 말이다! 때가 되면 넘겨주려고 했다. 이 위치도, 명성도, 돈도!
여태 키워온 다른 보석들은 전부 깨졌다. 이제 일리에도 늙었고 살아갈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후계자가 없으면 그가 이뤄온 모든 것들은 해변에 쌓은 모래성처럼 파도에 쓸려나갈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되어버려서 유감을 금할 수가 없다. 인생 마지막으로 키워낸 보석이 날 배신하다니. 배신하다니…….
“아버지!”
살갗을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위기감이 점점 가까워지면서 일리에는 점차 정신이 맑아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너무 평온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치매라는 벌을 받았던 것일까.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 처하자 그는 다시 예전의 자아를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 평생 해온 일이 누군가를 죽일 계획을 세우고 실행한 것뿐이니까. 자아를 형성할 정도로 습관이 되어버린 그 사고방식은 그를 다시 가엾은 노인에서 생각할 줄 아는 파충류로 되돌려놓았다.
일리에는 30분 전에 미리 발치에다 갖다 놓은 샷건을 꺼내 약실을 확인했다. 한창 젊을 때처럼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는 몸은 아니지만 아직 근력은 충분히 남아있다. 샷건 정도야 충분히 조준해서 쏘고도 남는다.
“아버지!”
다시 한 번 무시무시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아까보다 훨씬 가까워진 상태였다. 일리에의 눈빛만큼은 완전히 젊은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그는 먹이를 노려보는 뱀처럼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며 소리의 거리를 재고 있었다. 두 번째 방 앞까지다. 이제 곧이다. 일리에는 샷건의 총구를 문에다 겨냥하고 양아들을 기다렸다.
문고리가 달각 돌아가는 순간 일리에는 방아쇠를 당겼다. 원목으로 만든 무거운 문이 산탄총의 일격에 난도질 됐다. 일리에는 확실히 하기 위해 한 발 더 쏘았다. 문 뒤에 있는 아들이 어설프게 살아있지 않고 완전히 죽도록.
두 번째 산탄에 문고리까지 날아가서 육중한 문이 힘없이 끼익하고 열렸다.
문 뒤에 아들의 시체는 없었다. 그 대신 열린 문 옆에서 총을 쥔 하얀 손만이 불쑥 안쪽으로 들어오자 일리에는 반사적으로 몸을 숙여 엄폐물 뒤에 숨었다. 안쪽으로 대고 몇 발의 무차별 사격이 가해진 후, 아직 앳된 얼굴의 미소년이 방 안을 살폈다.
항상 곱게 관리하던 꽤 긴 머리칼은 난폭할 정도로 짧게 잘려 있었다. 미용사의 손길을 거치지 않은 게 분명하다. 혼자서 칼 같은 걸로 자른 모양새, 그것도 급하게 해야 했는지 쥐어뜯긴 것 같은 모양새였다. 긴 머리는 그 사지를 헤치고 나오는 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긴 머리는 사치고, 현장에서 구르는 보석에겐 어울리지 않으니까.
소년은 누구에게서 빼앗은 건지 무전기가 달린 방탄복을 입고 있었다. 옷 역시 이 집을 떠날 때의 모습이 아니고 군복 같은 옷이다. 다른 누군가의 옷을 빼앗아 입어서 위장할 일이 있었다는 걸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키와 체격은 벌써 훤칠하게 컸지만 그래도 아직 어중간하게 아이였다. 집을 떠나기 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제는 아버지에게 고분고분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전에는 겁에 질려서라도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했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설사 자기 목숨이 위험해지는 것이라고 해도 반쯤 세뇌된 것 같이 얌전하게 따랐다. 명령 불복종에는 항상 무서운 처벌이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더 이상은 통하지 않는다…….
아들의 눈을 본 순간 일리에는 직감했다. 저것은 영영 사슬을 벗어던진 짐승이라고. 다시는 내 품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부모는 언젠가 자식을 놔주어야 하는 때가 온다고 하지만 일리에 자신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이런 식이어서는 안됐다.
일리에가 다시 엄폐물 밖으로 고개를 들고 샷건의 총구를 들이대 쏘려는 순간, 그보다 더 빠르게 반격이 날아와 샷건을 튕겨냈다. 그게 일부러 빗 맞춘 탄환이라는 점이 일리에의 가슴을 몹시 아프게 했다. 자신이 아무리 경험이 쌓였다고 해도 이제는 젊은이의 반사 신경을 따라갈 수 없다는 것도.
일리에는 샷건을 놓친 걸로도 모자라 한쪽 어깨를 내주었다. 총에 피격되는 것도 참 오랜만이다. 탄환은 거인의 주먹처럼 단번에 일리에를 쓰러뜨렸다. 노인이건 젊은이건 간에 탄환은 공정하다. 얼마나 단련된 육신이든 총알의 위력 앞에서는 한낱 연약한 인간이라는 걸 일깨워준다.
일리에의 아들은, 미르체아는 그를 단번에 죽이지 않았다. 물론 절대자나 다름없던 아버지를 쐈다는 사실에는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내가 나의 신에게 반역하다니. 그 신은 악신이고 항상 징벌을 내렸지만, 그래도 나의 신이었다.
양아버지를 총으로 쏜 16세의 소년은 선악과를 베어 문 아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대가로 낙원을 영원히 떠나야한다는 것도 알지만, 이미 열매를 씹어 삼켰다……. 돌이킬 수 없다.
말 잘 듣는 짐승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살아가겠다고 짊어진 원죄의 무게가 진흙처럼 무겁게 치덕치덕 들러붙고 있었다. 미르체아가 방아쇠를 한 번 더 당기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는 것은 그런 망설임이 있는 까닭이다.
부모를 죽인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 간단할 줄 알았는데.
“다음에는 망설이지 마라.”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상태인건지, 진짜로 충고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일리에는 또렷하게 속삭였다. 십 수년간의 위력이 담긴 한 마디였다. 암살자로 키워진 아이는 그 한 마디에 손가락을 방아쇠에 걸고서도 당길 수 없었다.
저 목소리가 아이를 격려하고, 가르치고, 다독이고, 훈계하며, 징벌을 내렸다. 나날이 치매증세가 심해져가는 이 노인은 아이를 키워준 아버지였고, 스승이었으며, 학대자였다.
한 때는 아이가 무한한 존경과 애정을 바치던 분이었다…….
“나한테 왜 그랬어요. 왜 죽이려고 했어요.”
감정을 억누르는 목소리가 착 가라앉아 나왔다. 일리에는 자신에게 겨누어진 총구 끝을 송곳 같은 시선으로 노려보다가 뜬금없는 대답을 했다.
“먼저 죽이고 나서 행동해라. 안 그러면 네가 죽어. 나는 이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나한테 왜 그랬냐구요.”
“넌 항상 착한 게 탈이었어. 이 일을 하기엔 너무 착해. 그건 결점이야.”
“나한테 왜 그랬어!”
동문서답이 사람을 미치게 한다. 아버지는 그런 인간이었다. 인간으로서 중요한 무언가가 결핍된 남자. 다른 사람과 제대로 의사소통도 못하고, 이해도 못하고, 타인에게 공감하지도 못하는 특이한 종류의 인간. 싸이코패스 같은 인간.
이런 인간에게 인생을 저당 잡혀 살아왔다.
점점 이성을 잃고 험악해지는 미르체아의 목소리에 일리에의 어깨가 흠칫흠칫 떨리더니 곧 연약한 노인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나한테 왜 이러는 거냐? 내가 뭘 했다고? 난 너한테 다 줬는데. 그 대가가 이거냐? 이 배은망덕한 녀석아.”
자신의 인생을 반성하지 못하는 그 말이 미르체아를 격노하게 했다.
“당신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어! 내 인생을 망가뜨렸어! 삶을 시작하지도 못했는데 끝나버렸다고! 당신이야! 당신이 날 살인자로 만들었어! 이 괴물아!”
일리에는 비열하게도 다시 치매 노인으로 돌아가 꼴사납게 울면서 몸을 웅크렸다. 작고 보잘 것 없는 모습이었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영역으로 퇴행하는 것은 정말 비겁한 짓이었다. 의지할 데 없는 고아를 막다른 길에 몰아넣고 암살자의 길을 걷도록 종용한 커다란 악마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미르체아의 인생에 절대적으로 군림하던 공포는 이제 발로 걷어차기만 해도 자지러지게 비명을 지르는 노약자로 변해 있었다.
이렇게 쉬운 일이었던가. 이렇게 간단히 끝날 일이었단 말인가. 인생을 저당 잡힌 내 지난 시간들은? 내 빼앗긴 성장기는? 아이가 되기도 전에 어른이 되어버렸고, 인생을 살아보기도 전에 죽어가는 삶으로 처박힌 나는?
총을 쥔 미르체아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미르체아는 흘러내리기 시작한 눈물을 닦지 않았다. 서럽게 흐느끼고 있는 이 노인이 언제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와 자길 덮칠지도 모르니까 긴장을 풀 수 없었다.
“날 사랑하긴 했어요?”
“아프다. 너무 아파. 너무 아파.”
“날 사랑하긴 했냐구요?”
일리에는 총에 맞은 부분을 쥐고 울다가 손바닥을 흠뻑 적시는 피를 보고 어린아이처럼 엄마를 불렀다. 물론 그를 위해 달려와 줄 엄마는 없었다. 일리에는 버려진 아이처럼 계속 처량하게 엄마를 부르다가 이제는 머리를 감싸 쥐고 울었다.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나치 안 할게요. 다시는 나치 안할게요. 잘못했어요, 선생님. 버리지 말아요. 엄마. 엄마…….”
일리에가 노르웨이어로 빌었기 때문에 미르체아는 그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일리에의 혀 짧은 목소리로 보아 그가 까마득한 과거 어딘가를 헤매고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어린아이로 돌아가 버린 노인과 울고 있는 소년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가엾고 역겨운 모습이었다. 10살도 안 된 어린아이에게 60대의 노인이 되도록 살아오면서 저질러온 죗값을 물을 순 없다. 그래봤자 의미도 없다.
하지만 정신이 어떻든 간에 그의 육신은 여전히 60대 노인이었고, 그는 미르체아에게 있어서는 영원히 가해자였다.
일리에도 다른 누군가의 피해자였을 수 있다. 나치의 자식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폭행을 당했을 수도 있고 상상하기 힘든 다른 학대를 받았을 수도 있다. 다른 사람은 그에게 연민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미르체아는 그럴 수 없었다. 미르체아만큼은 그를 용서하지 않을 권리가 있었다.
“살면서, 단 한번이라도 날, 내가, 당신은 나한테, 나는,“
미르체아가 절망적으로 물었다.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아서 더듬거렸다.
“내가 당신 자식이긴 했어요?”
미르체아의 일그러진 얼굴을 멍하니 올려다보던 일리에가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얼굴 표정이 변했다. 미약하게나마 지성이 돌아온 모습이었다. 미르체아는 아주 잠깐 희망을 품을 뻔 했다. 그러나 여태까지의 인생이 그래왔듯이 미르체아가 바라는 것은 일어나지 않았다.
“넌 우수한 아리아인이야. 머리카락도 눈도 완벽해. 아리아인은 좋은 거랬어. 룬드보리 아저씨도 그렇게 말했단 말이야. 그래서 너한테 다 준거야…….”
“나한테 사과해요.”
“나도 아빠가 된 게 처음이라서 몰랐어. 나도 남들처럼 살아볼 수 있는 거잖아. 나도 자식을 키워볼 수 있는 거라고. 나 같은 사람도 새끼를 키울 권리가 있어.”
“내 인생 이렇게 만들어서 미안하다고 사과해요.”
“부모는 자식한테 사과 안 해.”
그 말이 미르체아의 한 가닥 남은 이성을 끊어버렸다. 미르체아가 소리를 지르며 총을 난사하자 일리에가 바닥을 기어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이미 손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화가 난 상태였기 때문에 미르체아는 일리에를 한 발도 맞히지 못했다.
일리에는 목숨이 경각에 달린 위험에 처하자 생존본능 때문에 일시적으로 제정신이 돌아온 건지 비틀거리며 방을 빠져나가 절뚝절뚝 달리기 시작했다.
미르체아는 벽에 걸린 장식용 방패와 두 자루의 옛날 도끼 중 한 자루를 집어 들고 늙은 아버지의 뒤를 미친 듯이 쫓아갔다.
바람이 창문들을 난폭하게 뒤흔들고 있었다. 창문 중 몇 개의 낡은 걸쇠가 부러지면서 창문들이 활짝 열렸다. 바람이 저택의 길고 공허한 복도로 쏟아져 들어오며 섬뜩한 소리를 냈다. 일리에는 불 꺼진 복도를 절뚝절뚝 달려가며 자꾸만 뒤를 확인했다. 미르체아에게 따라잡히는 건 시간문제다. 지는 태양은 뜨는 태양의 체력을 감당하지 못하니까.
일리에는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비록 자기가 꼭두각시 인형처럼 양아들을 대한 점이 있었다고 해도 일리에가 여태껏 바쳐 온 헌신에 비하면 아주 사소한 일 아닌가. 그러나 그것들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좀 더 근본적인 부분이 억울했다. 평생 신이라는 존재는 믿지 않았지만 있다면 따지고 싶었다.
일리에 같은 인간도 자식을 가질 수 있는 거 아닌가.
일리에 같은 인간도 가족이란 걸 만들어 볼 수 있는 거 아닌가. 이런 인간이라도 후계자를 가질 권리가 있단 말이다. 남들은 다 되는데 왜 나는 안 된단 말인가?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왜 나를 태어나게 했는가? 나에게 고통을 주려고? 절대로 남들처럼 살 수 없다는 고통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 그게 내 삶의 목적인가?
신이여, 있다면 변명해보라. 당신이 있다면 당신은 나를 미워하는 것이 분명하다. 사기꾼들은 당신이 자비롭다고 하지만 나는 당신의 본색을 알고 있다. 당신은 가학적이고 폭력을 좋아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 같은 인간을 만들어 낼 리 없다.
고로 당신은 없다. 세상에 신 같은 것은 없다. 있다고 쳐도 인간에게 전혀 관심이 없을 것이다. 당신이 주지 않은 삶이기에 내가 얻어냈다. 그게 잘못인가? 인간은 자기가 이 세상에 있었다는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한다. 어느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나 같은 악당에게도 있는 욕구란 말이다.
난 정말 최선을 다했는데. 내가 뭘 잘못한 건지 모르겠다. 나는 잘못한 게 없다. 내가 저 아이를 키우느라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는지 아는가? 저건 최고로 비싼 보석이다. 다 잘 되라고 그런 거다!
나는 그런 애정을 받아보지 못했단 말이다. 내가 했던 실패를 저 아이는 반복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가르쳤다. 저 아이는 편한 길로만 다녔단 말이다. 저 아이는 내가 저 나이였을 때보다 훨씬 많은 것을 이뤄냈다. 저 아이는 최고의 킬러다. 남들보다 훨씬 앞서서 인생을 살아가고 있단 말이다.
그 대가가 이거란 말인가? 불공평하지 않은가. 대체 뭐가 부족해서. 뭐가 못마땅해서 나한테 이런단 말인가.
마지막 순간까지 양아버지의 사과를 듣지 못한 미르체아가 드디어 일리에를 따라잡았다. 도끼날이 번쩍이며 이마에 박히기 직전, 일리에가 평생의 억울함을 담아 외쳤다.
“나도 아빠를 처음 해봐서 몰랐어! 그게 좋은 건 줄 알았어! 내가 너한테 얼마를 들여서 키웠는데!”
미르체아의 얼굴에 일리에의 침이 튀었다. 그 다음 순간 선혈이 튀었다. 16세의 소년은 악귀 같은 얼굴로 완전히 이성을 잃고 양아버지를 내려쳤다. 끝없이 계속 내려쳤다. 나중엔 본인이 지쳐 나가떨어질 정도로 내려쳤다.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쏟아져 내린 것은 분명 몸을 너무 혹사시켰기 때문에 나타난 이상 현상일 것이다. 그것이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과, 얼굴에 튄 피와 섞여 뭐라 구분할 수 없는 액체가 되어 바닥에 뚝 뚝 떨어졌다.
미르체아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양아버지의 토막들을 내버려두고 저택 안을 돌아다니며 기름을 뿌리기 시작했다.
이 집의 벽돌 하나하나에 유년기의 악몽이 배어 있었다. 동물을 해부하던 곳, 사격술과 검술을 배우던 곳, 동화책이라곤 한 권도 없이 외국어 장서만 가득하던 서재, 체벌을 받던 방, 자신의 비밀 장소,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친구들이 준 선물이었던 쿠키 상자, 차마 먹지 못해서 아끼다가 결국 썩어버린 쿠키는 내다버리고 쿠키 상자만이라도 소중하게 간직해두었던 서랍장, 양아버지가 자신을 팔아넘기기 위해 여장을 시켰던 옷방, 둔하고 멍청한 골든 리트리버가 항상 둥글게 몸을 말고 자던 곳…….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르체아는 현관의 거대한 홀로 내려왔다. 십수 년 전에 양아버지의 손을 잡고 이 집에 처음 들어왔다. 그 날은 크리스마스 날이었고 이곳에는 미르체아가 평생 본 것 중에 가장 크고 근사한 트리가 서 있었다. 그 때는 고아원에서 자신을 빼내준 중년 신사가 세상에서 가장 멋있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미르체아는 트리가 서 있던 자리, 어린 고아가 낯선 신사의 손을 붙잡고 서 있던 자리에까지 남김없이 기름을 쏟아 부었다. 바닥이 흥건해질 정도였다.
“내 인생은 내꺼야. 이제는 내가 원하는 대로 살 거야. 내 인생은 다른 사람의 장난감이 아냐. 다 괜찮을 거야. 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미르체아는 집에 불을 붙이고 나왔다. 강풍이 방화를 도와주었다. 미르체아는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길을 올려다보면서 입술을 질끈 물었다.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다. 낙원으로부터의 영구 추방. 선악과를 베어 문 인간으로서의 삶. 여태까지의 삶을 줄에 메인 꼭두각시로 살다가 이제는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해야하는 삶으로 내던져졌다. 맨 몸으로 망망대해에 던져진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후회가 그를 잠식하기 전에, 미르체아는 자신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어준 주문을 읊었다.
“나는 나를 지킨다. 나는 나를 지킨다. 나는 나를 지킬 거야…….”
그것이 자기 자신에 대한 고결한 맹세였다. 이 세상 그 어떤 기사도보다도 더 숭고한 선서. 가장 절박하고 힘들 때 세상 어느 누구도 자기편이 되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미르체아는 스스로 자기 자신을 지키기로 결심했다. 자기 자신밖에 없었다. 영원히 혼자였다.
이것이 정의다. 이게 정의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왜 어린아이가 손에 피를 묻혀야했는가? 왜 짐승 같은 인간들에게 잔인한 일들을 당해야했는가? 왜 이 아이는 보호받지 못했는가? 누가 이 아이를 위해 함께 있어주었는가? 아무도 없었다.
이 영원한 피해자를 지켜주는 것이 바로 정의다. 나, 내가 그것을 수행한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세상 모든 것을 적으로 돌려도 상관없다. 나만큼은 온전히 내 편이다. 나는 나를 보호해줄 것이다.
나는 영원히 혼자다. 나에게는 나밖에 없다.
미르체아는 이제야 눈물을 닦으며 허탈하게 웃었다. 한결 후련해진 웃음이었다. 억지웃음이 분명했기에 웃음은 곧 흐느낌으로 바뀌었다. 아무도 듣지 못해서 다행이었다.
강풍은 저택을 완전히 전소시킬 때까지 불을 더 크게 키워나갔고, 화재신고를 받고 출동한 소방관들도 이 대저택이 다 타서 무너져 내리는 것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근처에 다른 건물이 없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악마 같은 밤이 지나가고 불이 완전히 꺼진 후에 경찰들이 사고 현장을 조사했다. 한 소년과 검은 정장 차림의 남자가 현장 근처에 있었다는 목격 제보가 들어왔지만 경찰은 화재 사고와 관련이 없다고 판단하고 제보를 무시했다.
기자들은 이 사고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경찰은 많은 것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사상자는 있는지, 있다면 몇 명인지, 어떻게 불이 시작된 건지, 약한 비였지만 분명히 비가 내렸는데 어떻게 이렇게 큰 불이 된 건지.
그에 대한 경찰의 대답은 흔하고 두루뭉술 할 뿐이었다. 얼마 안 가서 사람들의 관심을 완전히 돌려버릴 커다란 사건이 터졌기에 대저택 전소 사건은 그대로 유야무야 묻혔다.
이 집에서 있었던 일들은 영영 흙더미 속에 묻혀버렸다. 아무도 모르는 참극을 끌어안고 시간은 도도한 강물처럼 흘러나갔다.
미르체아의 세상이 아직 오해와 거짓된 행복으로 가득 차있던 때의 이야기다.
벽난로에서 타닥타닥 피어오르는 모닥불 소리가 잠든 미르체아를 슬며시 깨웠다.
미르체아는 몽롱한 정신으로 자신이 누군가의 품에 안겨 있다는 것을 알았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확인하니 근사한 연미복 차림의 양아버지가 단단한 팔로 자신을 끌어안고 있었다.
미르체아는 눈을 뜨지 못할 만큼 졸린 와중에도 일리에가 근사하다고 생각했다. 입는 옷도 근사했고, 무슨 향인지는 모르겠지만 항상 향수를 뿌리고 다니는 것도 근사했고, 다른 어른들과 확실히 구분되는 정중한 태도도 근사했고, 부유한 자의 넉넉한 여유가 느껴지는 취향들도 근사했다.
일리에는 항상 미르체아의 우상이었다. 금발머리와 푸른 눈을 지닌 일리에는 고전적인 미남이었고 상류사회의 교양 그 자체였다. 가끔 엉뚱한 짓을 저지르며 장난을 치기도 했지만 그건 미르체아와 비밀을 공유할 때뿐이었다. 미르체아는 일리에의 자기중심적인 장난기까지 사랑했다.
“아저씨…….”
미르체아가 잠결에 중얼거리며 일리에의 품으로 파고들자 그가 “아빠라고 불러야지.”하고 고쳐주었다. 다정한 목소리였다.
일리에는 미르체아를 침대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미르체아는 잠과 현실을 오가는 상태로 응석을 부리며 매달려왔다. 일리에는 그런 미르체아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내면서도 혹시 한기가 들까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러면서 미르체아의 이마에 입맞춤을 해주었다.
“내 가장 귀한 보석.”
일리에가 속삭였다. 그것을 들은 미르체아는 잠결임에도 미소 지었다. 때 묻지 않고 순결한 미소였다. 어린아이만이 지을 수 있는 미소로, 단 한 번도 배신당하지 않아서 온전한 헌신을 바치는 미소였다. 아버지가 나를 사랑한다. 그것을 느꼈기에 행복이 미소의 형태로 흘러나왔다.
일리에는 홀린 듯이 그것을 보며 미르체아와 마찬가지로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어린 아들이 자신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값진 보상이었다. 일리에 같은 인간도 평범한 사람처럼 가정을 꾸리고 관계를 맺고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그런 믿음을. 허상에 불과했지만, 이 어린아이가 자신을 의지하고 따르는 것은 순수한 진실이었다.
천사같이 예쁜 아이다. 특히 웃는 모습이 예쁘다. 외모 자체로도 장래가 기대되지만 이 웃음, 이건 재능이다. 많은 사람을 속여 넘길 수 있을 것이다. 다정하고 유약한 성격이 흠이긴 하지만 그건 일리에가 교정해 줄 수 있다. 비싼 돈을 주고 사와서 지금도 적지 않은 돈을 들여가며 키우고 있지만 금액이 아깝지 않다. 정말 최고의 선물이다. 일리에 자신에게, 그리고 그가 평생 지녀온 자부심에 대해.
이 아이는 자신에게 위안을 주는 존재이자 자신의 업적을 증명해주는 트로피였다. 내가 이만큼 해냈다, 이만큼 일궈왔다 하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존재.
이 아이는 다른 아이와 다르다. 자질이 충분하다면 후계자로 삼아서 내 모든 것을 물려줄 생각이었다. 일리에 같은 사람도 이 세상에 있었다는 흔적을 남기고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을 권리는 있지 않은가.
인정받고 싶은 욕구. 충분히 많은 돈을 벌고 충분히 사치스럽게 살다보니 이제는 그런 욕구들이 생긴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기억되고 싶은 욕구. 나도 사회의 구성원이자 한 부분이었으면 하는 그런 욕구가.
어린아이를 데려다가 킬러로 키우면서도 뭐가 잘못됐는지 모를 정도로 대단히 비뚤어진 기준을 가지고 있는 일리에도 어렴풋이 자기에게 그럴 자격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욕망을 품었다. 누군가의 부모가 된다는 것, 누군가의 아빠가 된다는 것, 누군가의 신이 된다는 것은 딱히 비교할만한 대체제가 없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일리에는 침대에 걸터앉아 잠든 아이의 작고 섬세한 손가락을 자신의 투박한 손으로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부드럽고 여린 살결이다. 이 손으로 벌써부터 해부 도구를 들고 고깃덩어리를 분해할 줄 알았지만 이렇다 할 고생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 포동포동하고 예쁜 손.
일리에는 이 자리에 오기까지 고생을 꽤 했기 때문에 늙어버린 손에도 고단함의 흔적이 엿보였다. 고생이라고 해봐야 공장 노동자나 인부의 손같이 거칠고 뭉툭하게 변해버린 것이 아니라 칼이나 총 같은 무기들을 다루다가 생긴 상처나 흉터 자국들이었지만.
인간백정 노릇도 노동이라면 노동일 수 있으니.
자신이 고생하면서 살아봤기 때문에 한 번쯤은 흠결 없는 작품을 만들어내 보고 싶었다. 이 아이 이전에도 보석들은 몇몇 키워봤지만 이 아이만큼은 특별하다. 이렇게까지 공을 들인 보석은 없었다. 반쯤은 아빠놀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진짜 아빠처럼 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것도 나쁘지 않다. 지금까지는, 전혀 나쁘지 않다.
“넌 나한테 있어서 최고의 선물이란다.”
일리에는 다시 잠든 미르체아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올려주며 이마에 가볍게 키스했다.
거짓된 낙원의 밤이 저물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