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베이의 노래
불안한 석양이 내려앉는 저녁이었다.
미르체아는 자기 방의 방문을 걸어 잠그고 구석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무릎을 끌어안은 채 불안한 눈으로 주위를 살피고 있었지만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직.
“어디 있어! 이 좆만한 애새끼가!”
미르체아가 불안한 심경으로 기다리던 호통소리가 내리꽂혔다. 미르체아는 두 눈을 질끈 감고 누구에게 하는 건지 모를 기도를 중얼거리면서 몸을 더더욱 웅크렸다. 현관문이 부서질 듯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와 함께 이 집의 주인이 고함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집사가 달려 나와 흥분한 주인을 진정시키려는 소리도 들렸다.
발소리와 고함소리는 한동안 아래층을 헤매다가 계단을 따라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것을 집사가 바짝 따라붙으며 “진정하십시오, 주인님. 제발 진정하세요.”하고 간청하는 목소리도 들려왔다.
“키워준 은혜도 모르는 고아새끼가! 얼굴에 먹칠을 해도 유분수지! 나와, 이 애새끼야! 안 기어 나와!”
미르체아는 부들부들 떨면서 필사적으로 주위를 살폈다. 무기가 될만한 게 있을까? 날카롭거나 뾰족한 물건은? 아무것도 없다. 여장할 때 쓰는 공단 리본 같은 것은 있다. 하지만 그걸로 사람 목을 조를 수 있을까? 끊어지진 않을까? 졸라서 질식시키기 전에 제압당하진 않을까?
살아있는 것을 죽이기 싫다고 반항해오던 미르체아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필사적으로 양아버지인 일리에를 죽일 방법을 찾고 있었다.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을 것 같았다. 일리에는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다. 미르체아를 귀여워하는 것은 언제나 한순간뿐이었고 그 다음엔 짐작하기 힘든 변덕이 닥쳐와 폭력적으로 변하거나 잔인한 장난을 하곤 했다. 장난도 일리에 기준의 장난이지 다른 사람에겐 그냥 학대나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미르체아는 일리에에게 대항할 수 없다는 걸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다. 덩치와 힘이 너무 차이가 난다. 일리에는 어른이고 미르체아는 사춘기에도 접어들지 못한 어린아이다. 자신의 연약함을 뼈저리게 깨달은 뒤로 미르체아는 어지간해선 일리에에게 반항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나마 지금까지 한 번씩 반항하게 되는 것은 아직 완전히 죽지 못한 인간성의 한 부분 한 부분들이 발현되기 때문이었다.
악마 같은 발걸음 소리가 문 앞까지 다가왔다. 집사의 간청은 더욱 절박해졌다.
“주인님, 제발…….”
“꺼져! 안 꺼지면 퇴직금도 없이 쫓아낼 줄 알아! 여기서 당장 나가고 싶어? 돈 보내야 할 사람 있잖아! 이 대머리야! 가족 약값 대고 싶으면 당장 아래로 내려가!”
집사가 자기를 도와줄지도 모른다는 미르체아의 실낱같은 희망이 허무하게 끊어져버렸다. 주인의 협박에 집사는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하고 자리를 피했다. 미르체아의 눈동자가 체념으로 어두워졌다. 그럼 그렇지. 항상 똑같다.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어른은 없다. 미르체아를 도와주려면 너무 많은 것을 포기해야하니까.
미르체아가 도와달라고 매달렸던 어른 중에 몇 명은 의문사 당했고, 몇 명은 행방불명 당했고, 몇 명은 오히려 미르체아를 일리에에게 다시 팔아넘겼다. 미르체아에게 아예 관심이 없거나 도리어 납치해서 인신매매하려고 하는 어른도 있었다. 어디로 도망가든 지옥이다. 죽어야만 끝나는 이야기인가.
죽어야만 끝나는 이야기인가…….
미르체아가 익숙한 정신적 통증 속으로 빠져들려는 순간 방문이 부서질 듯이 울렸다. 육중하고 단단한 나무문이었지만 일리에의 발길질에 경첩이 나가떨어질 것처럼 보였다. 그 소음이, 거친 울림이 그대로 무형의 주먹이 되어 미르체아의 어린 가슴을 강타했다. 미르체아는 문이 쾅 쾅 울릴 때마다 흠칫흠칫 떨었다.
“열어.”
악마도 떨게 만드는 낮은 목소리가 문 뒤편에서 들려왔다. 미르체아는 저 목소리에 저항할 수 없었다. 저 목소리는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미르체아가 여태까지 받아온 체벌과 학대와 세뇌들을. 절대적인 목소리였다. 저것에 반항하면 무서운 꼴을 당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몸이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바로 그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너무 겁에 질려버려서 근육이, 세포 하나하나가 움직이질 않았다.
미르체아의 어린 생존본능이 방문을 열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물론 문 밖의 일리에는 그런 것을 헤아려 줄 사람이 아니었다. 미르체아가 금방 자기 말을 듣지 않자 갑자기 방 문고리가 미친 듯이 달각달각달각달각 돌아가더니 발소리가 저벅저벅 멀어졌다. 그러더니 금방 다시 돌아와서는 상상도 못한 무서운 소리를 냈다. 무언가 둔탁한 물건으로 문고리를 박살내는 소리였다.
아마 복도에 장식해둔 조각상을 들고 와서 문고리를 내려치고 있는 것일 테다. 미르체아는 파멸의 순간을 기다리며 문고리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눈을 돌릴 수도 감을 수도 없었다. 이윽고 문고리가 완전히 박살나면서 문 반대편의 문고리파편이 바닥으로 툭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방 안쪽의 문고리도 툭 떨어져 내렸다. 그리곤 조용히 방문이 열렸다.
빛을 등지고 선 일리에가 안광을 빛내며 미르체아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 쥐새끼가…….”
그때, 굳어만 있던 미르체아의 운동신경이 움직이라고 외쳤다. 미르체아는 몸을 날렸다. 어디로? 어디든 좋았다. 차라리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는 것도 좋은 선택이었다. 그러다가 차라리 확 죽어버리는 것도, 어쩌면 나쁘지 않았다. 그래. 죽으면 모든 게 끝나는 이야기니까. 하지만 인생은 항상 그렇듯이 쉽게 흘러가지 않았다.
좁은 방 안에서 일리에의 품 사이로 파고들어 활로를 개척하긴 무리였다. 창문을 미리 열어두지 않았기 때문에 창가로 도망가는 것도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걸쇠가 걸려있었기 때문이다. 여는데 시간이 걸릴 것이고 그럼 곧장 저 손아귀에 잡힐 것이다. 공포가 온 신경을 잠식했고 미르체아는 전기충격을 받는 짐승처럼 새된 소리를 지르며 발작적으로 도망쳤다.
일리에는 살인이라도 저지를 것처럼 두 팔을 허우적거리며 어린 아들을 잡으려고 발악했다. 50대 중반에 들어섰지만 그는 아직도 건장한 체격과 젊은이 못지않은 근육을 유지하고 있었다. 사람 잡는 백정 일이 직업이니만큼 사냥감에게 밀리지 않는 완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미르체아는 얼마 안 가서 일리에의 손에 머리채를 잡혔다. 우악스런 힘으로 고개가 돌아간 순간 눈앞에 불벼락이 쳤다. 일리에의 커다란 손이 미르체아의 따귀를 몇 번이고 후려쳤다. 작고 하얀 뺨 한가득 새빨간 피 기운이 올라왔다. 미르체아는 두 눈을 질끈 감았지만 이미 한쪽 눈의 실핏줄이 터진 것 같았다.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미르체아는 두 손을 모아 빌었지만 일리에는 그 손을 뿌리치곤 머리채를 더 단단히 쥐고 또 따귀를 때렸다. 평소의 목소리를 찾아볼 수 없이 완전히 갈라진 목소리로 미르체아가 울부짖었다.
주인의 명령에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가 있던 집사는 계단 난간을 쥐고 불안하게 위쪽을 올려다보고 있다가 그 소리가 들려오자 괴로운 듯이 눈을 감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참을 수 없는지 귀를 틀어막고 아예 뒤돌아섰다.
그는 이 일을 반드시 해야만 하는 강한 동기가 있었다. 주인이 말한 대로 그는 돈이 필요하다. 여기만큼 돈을 주는 곳은 없으니까. 그러니까 필사적으로 어린 도련님의 고난에서 눈을 돌려야했다. 그에게는 도련님의 희생이 필요했다. 도와줄 수 없었다. 집사 역시 인간이기는 예전에 포기했다.
일리에가 얼굴을 후려갈길 때마다 미르체아의 눈물방울이 튕겼다. 어린아이답게 목 놓아 울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도 없었다. 일리에는 미르체아가 더 이상 저항하지 못하고 온 몸을 후들후들 떨고 있기만 하자 뺨을 때리던 손을 멈췄다. 갑자기 이성이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없던 자비심이 생긴 것도 아니고.
여기서 아이의 고운 얼굴을 망가뜨리면 재산상의 큰 손해를 보기 때문이다. 한순간의 감정 때문에 잃어버리기엔 아까운 손실이었다.
일리에는 아이의 멱살을 쥔 채 방을 슥 둘러보곤 구석에 있던 의자를 하나 질질 끌고 와 앉았다. 그리고 자신의 무릎에 아이를 엎어놓고는 억센 손으로 아이의 바지를 끌어내렸다. 바지와 속옷이 함께 내려가고 아이의 엉덩이가 드러났다. 얼굴과는 다르게 별로 성한 곳이 없는 엉덩이였다. 막 멍 자국이 희미해지기 시작한 여린 피부에 커다란 손자국이 빨갛게 찍히기 시작했다.
미르체아는 이제 목이 쉬어버려 금속음이 날 정도로 울기 시작했다. 일리에의 바짓단을 손에 핏기가 없어지도록 꽉 쥐고 애원했다.
“아저씨! 잘못했어요! 아저씨! 다신 안 그럴게요!”
애원이 통한 걸까. 매질을 가하던 손이 잠깐 멈췄다. 그러나 곧 더한 폭력이 가해졌다.
“아저씨? 아저씨라고? 아저씨라고? 아저씨라고?”
“죄송해요! 죄송해요! 살려주세요! 잘못했어요! 살려주세요!”
“이 배은망덕한 쥐새끼가, 고아 주제에, 고마운 줄도 모르고!”
일리에의 손찌검에는 점점 더 감정이, 더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이 실렸다.
“내가 너한테 바친 헌신의 대가가 이거냐? 먹여주고 입혀주고 키워줬더니 애비를 애비 취급도 안 해? 아저씨라고? 다시 말해봐! 아저씨라고?”
“아빠! 아빠! 아빠!”
“넌 내꺼야. 내 새끼야. 내가 살라고 하면 사는 거고 죽으라고 하면 죽는 거야. 내가 시키는 대로 하란 말이야! 나한테서 벗어날 생각 하지 말고!”
“용서해주세요. 용서해주세요…….”
그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화가 난 것일까. 짐작 가는 게 많았다. 너무 많았다. 요새 외국어 공부가 뜸하기는 했다. 아니면 테이블 매너 교육 때 포크를 떨어뜨려서 그런가? 비싼 정장을 입었는데 무릎에 진흙이 묻어서? 더 이상 동물을 죽이기 싫다고 해서? 손톱 밑에 끼어있던 살점과 찌꺼기들은 완전히 제거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피 냄새는 환각으로 남아 아직도 미르체아의 코끝에 머물렀다. 사체가 썩는 냄새도. 덩치가 큰 동물일수록 그 냄새는 더 오래갔다.
대체 일리에는 왜 이렇게 미친 듯이 화를 내는 것일까?
“내가 교회 가지 말라고 했지.”
아아, 그것이었다. 바로 그거였다.
“종교는 노예의 도덕이라고 몇 번을 얘기해. 내가 그따위 사기꾼들한테 넘겨주려고 너 같은 걸 똥통에서 주워온 줄 알아? 지배자로 사는 법을 가르쳐주겠다는데 왜 자꾸 날 거역해! 다스리는 입장으로 살게 만들어주겠다는데 왜 스스로 밑바닥으로 들어가! 그놈들이 시키는 대로 살아봐야 넌 먹잇감이란 말이다. 먹잇감! 내가 고기 맛을 알려주겠다는데 왜 날 무시해!”
“무시한 거 아니에요. 진짜 아니에요. 진짜로요. 제발요…….”
“가서 어떤 놈한테 무슨 얘기를 했지?”
“아무 말도 안했어요. 아무도 안 찾아갔어요. 진짜예요. 진짜로요.”
“내가 너의 신이다. 다른 누구도 아니야. 신한테 거짓말을 하면 어떻게 되지?”
“거짓말이 아니에요. 정말 아무도 안 만났고 아무 말도 안 했어요…….”
미르체아의 목소리는 이제 완전히 잠겨 있었다. 부어오른 엉덩이에는 피멍이 들어 파란 반점이 올라오고 있었고 온 몸은 일리에의 다리에 매달려 그저 떨고만 있었다.
“왜 간 거야? 이 집이 싫어? 집 한 채 더 지을까? 썩어나는 게 돈이야. 너만의 성도 만들어 줄 수 있어. 뭐가 맘에 안 드는 거지?”
“거기가 교회인줄 몰랐어요. 진짜예요. 말하려고 했어요. 제발…….”
미르체아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아이는 착한 아이다. 거짓말을 하면 금방 티가 난다. 일리에는 미르체아를 일으켜 어깨를 붙잡고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진위를 확인할 셈이었다.
미르체아의 얼굴은 따귀를 너무 때려서 볼이 완전히 부어올라 있었고 한쪽 눈은 실핏줄이 터진 건지 빨갛게 충혈 되어 평소의 예쁜 눈동자가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엉덩이를 맞으며 울고불고 비느라고 흘려댄 눈물 콧물로 얼굴도 엉망인 상태였다. 이 상태에선 제대로 눈을 들여다보며 거짓을 가려내기도 쉽지 않다. 무엇보다 미르체아는 압도적인 폭력에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
고문을 한다면 자백을 받아낼 수도 있지만……. 아직 어린아이다. 그 고통까진 버틸 수 없을 것이다. 홧김에 죽여 버리자고 십년 가까이 이 아이를 애지중지 키운 것이 아니다. 그럴 거라면 애초에 이렇게 소란을 피우지도 않았다.
일리에 같은 인간에게도 일반인은 짐작하기 힘들 정도로 비틀린 애정이 있었다. 그는 정말로 자신의 아들이 바른 길로 나아가길 원했기 때문에 이런 짓을 벌였다. 그것이 어떤 형태로 나타났든 간에, 그 자체만으로는 일리에에게 있어서 확고한 믿음이었고 신념이었다.
무엇보다 일리에는 인간의 한계를 잘 안다. 인간에게 어디까지 고통을 가해야 고통으로만 끝나는지, 아니면 장애를 얻게 되는지, 아니면 죽게 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오늘은 미르체아를 충분히 때렸다. 더 이상 손을 대면 예쁜 외모에 흠집이 생긴다. 그건 안 될 말이다.
“미르체아.”
일리에가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자 미르체아가 눈을 깜박깜박거리며 일리에를 바라보았다. 어깨는 아직도 일리에의 손아귀 안에서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러 간 거지? 이번에는 죽이지 않을 테니까 솔직하게 말해라. 솔직하게만 말하면 죽이지 않겠다. 약속하마.”
“정말로, 흑, 아무도, 아무도, 윽, 안 만났어요.”
이 아이는 너무 착한 게 탈이란 말이야. 저번에 붙잡혔을 때는 어처구니없게도 다른 사람을 죽이지 말아달라며 빌었다. 자기가 무서운 꼴을 당하게 될 걸 알면서도 말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내 고통보다 남의 목숨을 우선시한다는 게?
이 일을 하기엔 일리에가 너무 축복을 받은 감이 있기는 하다. 그는 완전히 무정해질 수 있고 스위치를 누르듯이 감정을 끌 수 있다. 미르체아는 그것과 정반대의 축복을 받았지만, 글쎄, 킬러로서 썩 좋은 자질이라곤 볼 수 없다. 아니 오히려 저주다.
미르체아는 희생자의 아픔을 자기 자신의 아픔처럼 느낄 수 있는 재능이 있다. 일반적인 사람보다 더. 일반적인 사람보다도 감정에 둔감한 일리에로서는 미르체아가 그야말로 외계인처럼 보인다. 거의 장애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걸 뭐라고 부르더라. 과잉공감이었던가?
예민하기는 예민하지만 미르체아는 그것보다 더 나가는 것 같았다. 가끔씩은 독심술을 부리는 건가 싶을 정도로 남의 속을 잘 읽었다. 눈치를 많이 본다는 건데 그것 자체로는 나쁜 게 아니다. 킬러라는 것도 결국엔 인간과 대면하는 서비스업이니까. 단지 미르체아의 경우에는 업무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남과 동화되어서 그렇지.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미르체아가 접촉한 게 누구건 간에, 일리에가 또 죽일까봐 그 존재를 은폐하려는 거겠지. 이렇게 엉망이 될 정도로 얻어맞으면서도.
상관없다. 미르체아가 입을 열지 않는다면 관련자 전원을 제거하면 그만이다. 그것보다도 일리에는 어린 아들이 감히 자신에게 숨기는 것이 있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리고 아저씨라고 부른 것도. 오, 그건 절대로 참을 수 없다.
“넌 내꺼야.”
일리에가 미르체아의 어깨를 강하게 쥐고 속삭였다. 거의 뼈가 으스러질 정도였다.
“네 부모는 널 싸질러놓고 키우기 싫다고 내다버린 인간들이야. 아무도 널 원하지 않아. 넌 거지소굴의 흔한 쓰레기 인생이었다고. 운 좋게 어른이 될 때까지 살아남으면 사회의 밑바닥을 채우는 하층민 인생으로 전전긍긍하다가 너랑 똑같은걸 싸지르거나 비참하게 죽었겠지. 그런 너를 내가 선택했단 말이다. 나는 네가 좋아서 선택한 거야. 너를 키우고 싶었다고. 너를 내 자식으로 만들려고! 나는 너한테 다 주잖아. 좋은 옷, 좋은 음식, 좋은 교육. 뭐가 부족해? 뭐가 더 부족하냐고? 내가 나 좋자고 이래? 너 잘되라고 그러는 거 아니야!”
“아파요, 흑, 아파요, 아파, 아파!”
“너만 아픈 줄 알아? 넌 나에게 상처를 줬어. 네가 날 아프게 했다고!”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놔줘요! 아파요! 아빠! 아빠!”
어깨를 붙잡고 있던 손을 놔주자마자 미르체아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확실히 일리에는 자기 손에 얼마만큼의 힘이 들어가는지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손 안에서 뼈가 부러진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근육이 좀 손상됐을지도 모르겠다. 옷을 벗기면 커다란 손자국 모양으로 피멍이 배어 올라오고 있겠지. 아이의 피부가 유독 흰 편이니까 더 두드러지게 보일 것이다. 당분간은 반팔 옷을 입혀선 안 되겠다.
일리에는 바닥을 기며 울고 있는 어린 아들에게 차갑게 내뱉었다.
“내가 기분이 풀릴 때까지 넌 외출금지야. 정원에도 나가지 마. 오늘 저녁식사도 없어. 굶어. 날 아프게 한 대가야.”
일리에는 미르체아를 버려두고 방을 나갔다. 문고리가 부서진 방문도 닫고 나갔지만 방문은 완전히 닫히지 못하고 끼익끼익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미르체아는 아픈 몸을 웅크린 채 한참을 울고 있다가 바닥을 기어서 침대까지 다가가 침대 다리에 몸을 기댔다. 막 넘어가기 직전의 가녀린 저녁노을이 미르체아의 방을 새빨갛게 물들였다가 서서히 그림자를 드리우며 빠져나가고 있었다.
미르체아는 저녁이 내려앉는 이 시간이 항상 싫었다. 무섭고 불안하고 두려운 기억밖에 없는 시간이었다.
강하고 즉각적이던 통증은 시간이 지나갈수록 느릿느릿하고 오래 지속되는 아픔으로 변했다. 맞은 곳도 부어올라서 거기서부터 열이 나기 시작했다. 맞고 내버려진 것도 서럽지만 허기가 올라오자 그것도 참을 수 없는 비참함으로 느껴졌다. 무시하려고 할수록 배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더 노골적으로 흘러나왔다.
맞다가 입안이 터졌는지 어금니 안 쪽에서 피 맛이 배어나왔다. 느낄 수 있는 맛이라곤 이것밖에 없었기 때문에 미르체아는 입을 오물오물거리며 방안을 둘러보았다. 초콜렛 같은 간식을 몰래 숨겨놓음직도 한데 아무것도 없었다.
미르체아는 원할 때 원하는 것을 모두 가질 수 있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일리에가 허락하지 않은 것은 절대로 가질 수 없었다. 이를테면 방구석에 몰래 과자를 숨겨놓는다던가, 탈출 자금을 숨겨놓는다던가……. 그러고 보니 돈을 소유해본 적이 없다. 어떻게 쓰는 건지도 모르고. 요리사, 집사, 운전기사는 있었지만 미르체아 스스로 상점에 가거나 한 적은 없었다. 그런 것은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니까 일리에가 굶어야한다고 했을 때 미르체아가 피해갈 수 있는 편법은 없었다. 고스란히 굶어야했다. 그건 이 나이 때부터 벌써 유사 군사훈련을 받고 엄격한 테이블 매너를 교육받아야 해서 식사량이 제한되는 어린아이에겐 가혹한 처사였다.
미르체아의 눈가에 굵은 눈물방울이 맺혔다가 또르륵 흘러내렸다. 큰 소리를 내면 또 다시 일리에가 문을 걷어차고 들어올 것 같았기 때문에 미르체아는 입을 틀어막고 흐느껴 울었다.
육체적인 문제도 문제지만 정서적인 허기를 참기가 힘들었다. 미르체아는 침대 밑 구석에 숨겨둔 작은 쿠키상자를 꺼냈다. 아직 일리에에게 들키지 않아서 빼앗기지 않고 가지고 있는 물건이었다. 어쩌면 일리에가 알면서도 눈감아주고 있는 걸지도. 종잡을 수 없이 변덕스러운 사람이니까. 도망갈 구멍을 만들어주고 학대하는 게 더 잔인하기는 하다. 더 오래 버티게 하면서 더 오랜 시간 고통을 가하는 거니까. 물론 그에겐 그런 자각도 없는 것 같지만.
쿠키상자는 미르체아가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 생애 처음으로 사귄 친구가 주었던 선물이다. 일리에에게서 온갖 비싼 명품을 선물받긴 했지만 그것은 인형놀이를 할 때 쓰는 옷이나 소품 같은 느낌이 강했고, 미르체아가 인간으로서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인간적인 선물을 받은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원래 상자 안에는 친구의 어머니가 손수 구워준 쿠키가 들어 있었는데 친구라는 존재에게서 난생 처음 받은 값진 선물이었기 때문에 단 한개도 먹지 못하고 아끼다가 결국 썩어서 버리고 말았다. 결국 그 쿠키는 무슨 맛이었는지 영영 알지 못하게 됐다. 쿠키는 버린 지 오래 되었어도 쿠키의 향기는 아직 상자 한 구석에 남아 있었다. 미르체아는 쿠키 상자를 열고 그 안의 냄새를 맡았다. 희미한 바닐라 냄새, 달콤한 냄새, 어딘가 아늑해지는 냄새…….
지금 이 순간은 희미하게 남은 쿠키 냄새의 흔적만이 미르체아를 위로해주는 유일한 것이었다. 엄마라는 존재를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것. 아기 예수도 엄마가 있다는데 왜 난 엄마가 없을까.
아빠라는 존재에 대해선 잘 안다. 아빠라는 생물은 용서가 없고, 엄격하고, 잔인하다. 아빠는 근사해보이지만 자기 기분이 내키지 않으면 언제든 아이들을 때린다. 내버리고 방치한다. 다른 아이들의 아빠도 이런 걸까? 나만 이런 걸까?
엄마라는 건 정말 많이 용서해주는 존재일까? 아이들뿐만이 아니라 어른들도 엄마를 찾는 걸 봤다. 특히 죽음을 목전에 뒀을 땐 많은 사람들이 엄마를 찾았다. 미르체아도 따뜻하고 아늑한 품에 안긴다는 감각은 알고 있었지만 엄마의 품이 정확히 어떤 건지는 알지 못했다. 무척 좋은 냄새가 난다던데.
미르체아는 나쁜 아이라서 엄마가 없는 게 당연하다. 아기 예수도 미르체아를 싫어한다. 그러니까 도와주지 않는다. 기도하고 빌면 누구라도 구원해준다고 하지만 미르체아에겐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다. 그건 아마도 다른 사람에 한해서만 진리일 것이다. 여태까지 단 한 번도 도와주지 않았으니까. 신도 암살자는 미워한다. 자의로 됐든, 타의로 됐든 간에.
하지만 나쁜 아이라도 남들과 똑같이 빨간 피가 흐르는 인간이고, 따뜻함과 애정을 기억하고 있고, 사랑받고 보호받고 싶어 한다. 그런 욕구가 있는데도 영원히 그것을 채울 수 없는 이 불만족감, 이것 자체로 형벌이었다. 미르체아는 벌을 받고 있었다. 태어나던 그 순간부터.
개가 있던 시절이라면 지금쯤 미르체아의 곁에 딱 붙어서 그 커다란 혀로 미르체아의 얼굴이 침 범벅이 될 때까지 눈물을 핥아주었을 텐데, 아, 그렇지……. 개도 죽였지. 미르체아의 손으로.
미르체아는 석양의 시간이 지나가고 밤이 완전히 내려앉을 때까지 쿠키상자에 고개를 묻고 있었다. 저녁노을 같은 건 세상에서 사라져버리면 좋겠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 저녁이었다.
일리에는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보였다. 모처럼 근사하게 차린 식탁 위에는 일리에가 마신 벌꿀술병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는 재단사에게 일일이 치수를 재고 옷과 구두를 맞춰 입는 신사라서 고급 와인에 대해서도 해박하지만 집에서 편하게 있을 땐 벌꿀 술을 더 많이 마셨다. 아마도 그게 그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일종의 안식처 같은 역할을 하는 셈이겠지.
미르체아는 불안한 눈동자로 일리에의 안색을 살피며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저번에 심하게 맞았던 얼굴은 붓기도 멍도 다 빠져서 멀쩡해졌지만 소매로 가린 손목엔 새로운 멍 자국이 나 있었다. 일리에가 때린 게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임무 중에 실수를 했을지도. 그러나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어린 영혼에 그 흠집만큼의 상처가 남았다는 건 확실하다. 다닥다닥, 아물지도 않은 마음의 딱지 위에 또 다른 상처가 그어지고, 또 그어지고.
다행인건 일리에가 취해있을 땐 행동도 굼떠지고 그만큼 정신적인 감각도 무뎌진다는 거다. 일리에가 만취한 상태일 땐 미르체아가 가벼운 욕을 해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적어도 붙잡혀서 얻어맞을 일은 없었다. 그러니까, 오늘 밤은 평화였다.
식당 한편에는 로코코풍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하얀 벽난로가 있었는데 평소엔 불을 지피지 않았지만 오늘은 장작을 한가득 쌓아놓고 불을 피우고 있었다. 스크린에 띄운 가짜가 아니라 진짜 불이었다.
“불은 진짜여야 해. 술도 진짜여야하고.”
미르체아의 시선이 타오르는 불길에 머무르는 것을 보았는지 일리에가 툭 내뱉었다. 꽤 떨어져 앉은 상태였지만 미르체아에게까지 술 냄새가 느껴질 정도로 지독한 구취였다.
“얼간이들이나 그림을 가져다놓고 좋다고 자기만족을 하며 최면을 거는 거야. 그런 놈들은 자기 손으로 뭘 죽여본적도 없지. 자기가 먹을 고기도 도축해본 적이 없을걸. 피를 묻히는 걸 두려워한다고. 피 다음엔 그을음, 그 다음엔 연기 냄새, 그렇게 차근차근 두려워하는 게 많아지면서 스스로를 새장 안에 가두는 셈이지. 완전히 바보 같은 생각이지. 세상은 정복하고 꺾고 누리라고 있는 거거든. 내가 주인이란 말이다. 주인은 가구에게 굽신거리지 않아. 가구를 모시고 살면 안 된다고.”
일리에가 킬킬 웃으며 무언가 귀중한 것을 가르쳐주듯이 속삭였다. 미르체아는 그것을 귀담아듣는 척 했지만 사실 일리에가 뭘 말하는 건지 반쯤은 알아듣지 못했다. 너무 취해서 발음이 몹시 뭉개졌기 때문이다. 지금으로서는 폭력이 닥칠 일 없는 평화로운 한때와, 요리사가 차려준 맛있는 음식들과 벽난로의 타닥타닥 불길 피어오르는 소리, 온기만이 명확한 현실이었다. 나쁘지 않았다. 미르체아는 이 나쁘지 않은 저녁을 깨고 싶지 않았다.
일리에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미르체아를 깜박깜박 쳐다보다가 피식 웃었다.
“넌 정말 운이 좋아. 요 작은 보석 알갱이야.”
그는 미르체아를 칭찬할 때면 늘 보석이라고 불렀다. 예전엔 그게 단순히 보석같이 소중하기만 한 존재인줄 알았다. 그 중의적 표현을 못 알아듣던 때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인데.
“난 너만큼 운이 좋지 못했거든.”
일리에는 유려하게 세공된 크리스탈 잔에 벌꿀 술을 또 한잔 따르며 중얼거렸다. 미르체아에게 하는 건지, 자신에게 다짐해두는 건지, 아니면 누가 듣든 상관하지 않는 건지 종잡을 수 없는 말들이었다.
“난 진짜, 나 같은 사람은, 고생에 대한 대가를 받아야 돼. 훈장을 줘야한다고……. 내가 너만 한때는, 큭큭, 정말 나 같은 사람도 없을 거다. 정말 힘들게 살았어. 힘들게……. 알게 뭐야. 지금은 이렇게 잘 먹고 잘 사는데. 너도 내가 키워줘서 감사하지? 그렇지?”
갑자기 예상치 못한 질문이 날아왔다.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있던 미르체아는 뒤늦게 자기가 질문을 받았다는 걸 깨닫고 일리에 쪽을 확 돌아보았다. 다행히 일리에는 취해서 반응이 느리기 때문에 그냥 미르체아를 깜박깜박 쳐다보고만 있었다. 불벼락은 날아오지 않았다. 미르체아는 더듬더듬 대답했다.
“네, 네. 감사해요…….”
“너는 나 배신하지 않을 거지?”
“네. 안 할게요.”
“너는 나 사랑해줄 거지?”
오늘은 평소의 주정과 달랐다. 이럴 때는 무조건 “네, 네.”하고 대답하고 지나가는 게 상책인줄 알면서도 미르체아는 일리에에게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러나 궁금해졌다. 사랑이라니, 가당치 않은 말이다. 받은 적이 없는데 어떻게 남한테 줄 수 있단 말인가? 미르체아에게서 사랑받기를 원했으면 먼저 줬어야지. 미르체아가 “네.”라고 대답해봤자 거짓말이 된다. 어떻게 남한테 애정을 줄 수 있는지 모르니까. 하지만 일리에는 어린애처럼 떼를 썼다.
“너는 나 사랑해줄 거지? 응?”
“네, 네.”
“나 버리지 마?”
“안 버릴 게요…….”
“내가 나중에 늙고 병들었다고 버리면 안 돼. 알았지? 내가 널 키워줬잖아…….”
“알았어요. 안 버릴게요.”
“근데 말이야…….”
일리에가 비밀을 털어놓으려는 듯이 몸을 앞으로 빼 미르체아에게 고개를 가까이 들이댔다. 식당엔 두 사람밖에 없는데도 누군가 엿듣고 있지는 않은지 주위를 살피기까지 했다. 일리에가 미르체아에게 신중하게 속삭였다.
“난 사실 네 말을 안 믿어……. 모든 사람은 거짓말을 하거든. 너도 날 버리겠지. 내가 볼품없어지면 그럴 거야. 인간은 다 그러니까.”
미르체아는 자신을 불신한다는 말을 솔직하게 내뱉는 일리에에게 상처받기보다, 약간 겁먹은 상태였다. 일리에가 어느 순간 변덕을 부려 미르체아의 따귀를 때릴지 몰랐기 때문에. 하지만 그런 긴장감은 금방 지나갔다. 일리에는 다시 자기 자리에 앉아서 따라놓은 벌꿀 술을 마저 비웠다.
어째서인지 일리에는 울적해진 상태였다. 자신이 남한테 상처를 줘놓곤 도리어 자기가 더 상처받은 듯이 굴었다. 그의 눈에 이미 미르체아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혼자서 과거 어딘가를 헤매고 있었다.
“난 나치가 죽도록 싫어. 나치 새끼들은 전부 지옥 불에서 불타야 돼. 그런 게 있다면 말이지. 분명히 있을 거야. 그런 게 없으면 말이 안 되지. 없으면 안되는 거라고. 내 자리도 예약해뒀지. 네 자리도 있을 거야, 요 작은 알갱이 녀석아.”
갑자기 일리에가 선명하게 중얼거렸다. 혀가 꼬일 정도로 만취한 사람이 갑자기 술이 깰 리는 없어서 미르체아는 섬뜩한 느낌마저 들었다. 일리에가 갑자기 미쳐버렸거나 아니면 무슨 귀신이 들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둘 다 아니었다. 일리에는 과도하게 흥분했던 것과 반대로 과도하게 차분해졌을 뿐이다. 마법이란 게 있다면 그저 술이 부린 마법일 뿐이었다.
일리에가 미르체아를 빤히 쳐다보았다. 마치 그런 아이를 처음 봤다는 듯이 머리부터 이마, 눈동자, 코 끝, 여린 입술, 작은 턱, 가는 목선까지 쓰윽 훑어 내렸다. 그 시선은 작은 어깨와 팔뚝, 팔꿈치까지 내려가더니 포크와 나이프를 쥐고 있는 희고 섬세한 손에 고정됐다.
“아름다워. 넌 정말 예술작품이야.”
일리에는 순수하게 감탄했지만 미르체아는 이미 너무 많이들은 소리라 큰 감흥이 없었다.
“그들이 널 보면 아리아인의 아름다움을 집대성한 거라고 좋아할 거야. 네가 진짜 게르만족인지 아닌지는 상관없을걸. 그렇게 보이기만 하면 되니까.”
“아리아인……이 뭐예요?”
“아, 근친교배를 반복해서 열등 유전자만 모아놓은 약골 견종이란다.”
일리에가 이해하기 힘든 비유를 했다. 그는 종종 이렇게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한다. 어린 미르체아에게는 아직 너무 이른 비유들이다. 하기는, 미르체아의 친구들을 두고서도 “부모가 콘돔관리를 못해서 낳은 김에 그냥 키우는 짐 덩어리들.”이라고 말한 적도 있으니. 그는 여우같이 교활한 인간이지만 때와 장소를 구분할 줄 모른다. 어떤 말이 부적절한지도 모르는 것 같고 애초에 신경 쓰지도 않는 것 같다.
일리에는 크리스탈 잔에 또다시 벌꿀 술을 한잔 가득 따르더니 잔을 들어 벽난로 불빛에 비춰보았다. 호박 빛이 크리스탈 잔의 기하학적인 표면을 따라 아름답게 반짝였다. 일리에는 주의를 환기시키려는 것인지 화제를 돌렸다.
“세공사 협회의 아랍인이 널 주시하는 것 같더구나.”
“아랍인이요?”
“그 왜……. 뭐더라, 터키석이라는 놈이 있지 않았니.”
아랍인이라는 말에 막연하게 사막 풍경을 상상하고 있던 미르체아가 터키석이라는 이름을 듣고는 예전에 저택을 방문했던 외국인 청년을 생각해냈다. 지금 생각해도 한 번에 기억날 만큼 이국적인 외모였다. 특히 매부리코가 두드러지는 특징이었다.
“그분은 이집트 사람이라고 하셨잖아요.”
“아랍이나 이집트나 사막 것들이 그게 그거지.”
미르체아는 아직 일리에의 헛소리를 완전히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지식이 충분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일리에가 내뱉은 인종차별마저도 “똑같은 건가?”하고 곱씹어보았다. 일리에는 미르체아의 오해를 잡아주는 대신 음흉하게 킬킬 웃었다.
“널 빼앗아가려고 하는 거겠지. 넘겨줄 줄 아느냐. 넌 내거야. 내 새끼라고. 누구도 손대지 못해. 넌 내거야……. 나만 봐야 돼. 다른데 가지 마. 제발…….”
미르체아는 평소에 느껴보지 못한 애틋함을 날카롭게 느꼈다. 하지만 일리에가 집착하는 대상은 미르체아의 애정이 아니었다. 단지 자신을 버리지 말아달라는 어린아이의 떼쓰기처럼 느껴졌다. 명확한 근거를 댈 수는 없지만, 미르체아가 느끼는 다른 사람의 감정은 좀처럼 틀리는 법이 없었다. 술에 취해서도 날 찾지는 않는구나. 미르체아는 지친 듯 미소 지었다. 어린아이가 짓기에는 아직 너무 이른 미소였다.
일리에는 취기를 이기지 못하고 급기야 테이블 위로 엎어졌다. 그러더니 그 상태로 노래 가락을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취했다고는 해도 미르체아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발음이었다. 아마도 아직 배우지 못한 언어인 것 같았다. 노래 자체는 페르귄트 모음곡 안에 들어가 있는 솔베이의 노래로, 이전에도 일리에가 몇 번 흥얼거린 적이 있기 때문에 미르체아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일리에가 지금 중얼거리고 있는 말은 아마도 그 노래의 원어, 노르웨이어겠지.
일리에의 본명은 엘리아스 룬드보리다. 일리에가 미르체아에게 둘만의 비밀을 털어놓을 때 알려주었던 것이다. “이름은 가면과도 같은 거라서 쉽게 쓰고 벗을 수 있단다.”라고 비밀 얘기를 시작한 그는 자신이 원래는 노르웨이 출생이라는 것, 어릴 때 입양을 가서 스웨덴에서 자랐다는 것,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국적을 가져봤다는 것들을 말해주었다.
그는 그것을 놀이라고 했다. 미르체아나 일리에 같이 특별한 사람만 할 수 있는 놀이. 어떤 식으로든 변장할 수 있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이 되는 게 가능한 놀이. 하지만 그의 근본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있었다. 그는 가끔씩 자신이 바이킹의 후예라고 했다. 으스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머리색과 눈 색에 대해 정석적인 금발벽안이라면서 자부심을 가지기도 했다. 그러면서 꼭 언급하는 것이 미르체아의 흰색에 가까운 백금발의 머리칼과 잔잔한 호수의 표면 같은 푸른 눈이었다. 일리에는 미르체아가 예뻐서 골랐다고 했다. 물론 어릴 때 골랐기 때문에 커가면서 머리색과 눈 색이 변할 것을 감안했지만 그럼에도 타고난 골격에서 미래 모습을 봤다고 했다. 장래가 기대될 정도로 대단한 미남이 될 거라고.
외모가 대단히 뛰어나거나, 머리가 대단히 좋거나, 신체능력이 대단히 좋거나, 어쨌든 특출난 능력을 갖춘 자식을 키우는 것은 특별한 행복이었다. 일리에는 그런 특별한 사람의 부모가 되는 것이고, 그 특별한 사람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으려고 했다. 그런 식으로 자신이 이 세상에 있었다는 흔적을 최대한 남기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건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본능이다. 딱히 욕먹을 게 아니다. 다만 일리에가 하는 짓은 남을 철저히 대상화시키기만 할뿐이었다. 자신을 비추는 거울로만 사용할 뿐 미르체아의 어린 가슴에 어떤 흔적이 남을지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일리에 같은 이기적인 인간에게는 자기 자신밖에 없으니까.
음정도 안 맞는 노래를 끊길 듯 말듯 불안하게 중얼거리던 일리에가 갑자기 툭 내뱉었다.
“난 내 아빠가 누군지 몰라. 엄마 얼굴도 가물가물해. 대신 키워준 사람들은 있지만 그건 그냥……. 그냥……. 그 얘기는 됐다. 넌 행운아야. 내가 네 아빠잖아. 킥킥……. 끄윽. 누가 그런 똥통에서 애새끼를 주워다가 이렇게 잘 입히고 잘 먹이고 귀공자로 키워? 불가능한 소리지. 다 내가 너한테 준거야. 널 생각해서…….”
그러더니 딱히 미르체아에게 말한다기보다 스스로에게 다짐하듯이 말했다.
“나도 아빠가 될 자격이 있어. 새끼를 키울 권리가 있다고……. 남들처럼…….”
미르체아는 불안한 눈으로 일리에의 움직임을 살폈다. 저러다가 언제 광기가 폭발해서 미르체아에게 달려들어 손찌검을 할지 몰랐다. 그러나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일리에의 말소리가 점점 잦아들더니 완전히 멈췄고 곧 코고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일리에가 곯아떨어진 모습을 보면서도 미르체아는 자리에서 일어나도 될지 고민하다가 용기를 내서 의자를 조용히 뒤로 뺐다. 미르체아가 막 한 발을 딛고 선 순간 테이블에 엎어져 있던 일리에가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렸다.
“어딜 도망가려고 하는 거냐, 이 쥐새끼야.”
또렷한 목소리였다. 미르체아는 등골에 돋은 소름이 순식간에 뺨까지 번져오는 것을 느꼈다. 미르체아는 최대한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주, 주무시는 줄 알았어요. 제 방으로 돌아가려고……. 방해하지 않을게요.”
“음, 음. 그래? 알았다. 가서 자라…….”
“아, 안녕히 주무세요.”
“미르체아.”
일리에는 자기 몸이 피곤해지면 만사를 귀찮아하는 경향이 있다. 그럴 때는 미르체아도 괴롭히지 않는다. 일리에가 자신을 순순히 놔줄 것 같아지자 안도한 미르체아가 다시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또다시 일리에가 붙잡았다. 미르체아는 초조감까지 느끼며 일리에를 돌아보았다. 일리에는 조금 전까지의 불안감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연약한, 가냘프기까지 한 목소리로 물었다.
“넌 날 배신하지 않을 거지……?”
“네?”
“넌 날 혼자 내버려두지 않을 거지……?”
어떤 근거도 추론도 없이 미르체아는 그의 말 속에서 자기보다 어린 아이의 목소리를 들었다. 미르체아는 두려운 양아버지가 갑자기 불쌍하게 느껴졌다. 그에게서 슬픔을 읽었기 때문이다. 그 슬픔의 원인이 뭔지는 모른다. 그저 온 몸으로 느껴졌다. 이게 미르체아의 저주받은 재능이었다.
미르체아는 한 순간 그를 용서했다. 여태까지 자기를 때리고 학대하고 사지로 몰아넣은 악마 같은 인간임에도 그가 불쌍해서, 그의 어린애 같은 슬픔을 느꼈기 때문에 그를 용서했다. 언제쯤이면 다른 사람들을 그만 용서할 수 있을까. 덜 살았기 때문에, 고통을 덜 겪었기 때문에 아직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걸까. 이런 짐승 같은 인간을 이토록 쉽게 용서할 수 있는 것은 어린아이만의 특권이었다. 미르체아는 일리에의 내면에 있는 어린아이를 용서했다. 나중에 후회하게 될 결정이었다.
“네, 아빠.”
일리에는 자신이 방금 어떤 선물을 받았는지도 깨닫지 못하고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이제 가서 자라. 나도 피곤하다. 잘 거야.”
미르체아는 살금살금 발소리도 내지 않고 식당을 빠져나갔고 일리에는 여전히 테이블 위에 엎어진 채 솔베이의 노래를 중얼거리다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벽난로의 불길도 서서히 꺼져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