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서울, 어느 여름밤
강영찬에겐 힘든 날이었다.
1990년대 끝자락의 서울. 여름은 짜증스럽고 괴롭다. 많이 벌지도 못하는 직장에다가 고객의 막무가내, 상사의 폭언은 영찬을 정신적으로 갉아먹었다. 매일 매일을 시험대 위에 서는 느낌이었다. 그에겐 가장이라는 책임감이 있었지만, 다른 가장들의 무게가 그의 무게와 똑같을까?
영찬은 퇴근하는 길에 길거리 트럭에서 전기구이 통닭 한 마리를 샀다. 아내를 위해서는 자두 한 봉지를 사고. 자신을 위해서는 소주 한 병. 그걸로 족했다. 집에 들어가기 전에 그는 심호흡을 한 번 했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아들이 무슨 사고를 쳤을까. 또 어떤 사건이 그를 놀라게 할 것인가. 나른하게 저녁 하늘을 올려다보던 영찬은 양손의 무거운 짐을 털고 싶어서 현관문을 열었다.
현관문 바로 앞에는 그의 어린 아들이 서서 그를 멀뚱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무런 말도 없었다.
영찬 역시 잠시간 기다려주었지만 그래도 아이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영찬이 미약한 기대감을 풀어버리고 말했다.
“아빠 왔다.”
“응.”
“인사해야지.”
“안녕.”
“다녀오셨어요 라고 해야지.”
“소리가 나서 여기 서 있었어.”
아들은 완전히 엉뚱한 대답을 했다. 영찬에게 조금만 더 정신적인 여유가 있었더라면 아이의 엇나간 대답에서 희망의 싹을 발견했을지도 모를 텐데, 그러기엔 현재 그를 짓누르는 게 너무 많았기 때문에 그는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하고 넘어갔다.
아이는 평소에 부모가 집에 오든 말든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영찬이 몇 번 타이르자 사람이 외출했다가 돌아올 땐 인사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고. 그 적절한 인사 방법이라는 게 뭔지 아직 몰랐을 뿐이지만 아이는 지금 “네가 돌아왔다는 것을 인지했다.”는 표시 정도는 한 것이다.
영찬이 피곤한 한숨을 내쉬며 아이에게 전기통닭이 담긴 봉지를 내밀었다. 계속 무표정이던 아이는 봉지 사이로 풍겨 나오는 통닭 냄새를 맡고 천진하게 웃었다. 본능적으로 터져 나오는 동물적인 웃음이었기 때문에 잔뜩 구겨져있던 영찬의 마음도 조금 풀어졌다. 어린 아들이 신나서 전기통닭을 들고 부엌으로 달려가자 그와 엇갈려서 아내가 고무장갑 낀 손으로 나왔다.
“왔어요?”
“이것 좀 받아.”
“이게 뭐예요?”
“자두야.”
설거지를 하다 나왔는지 고무장갑 끝에선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아내는 영찬이 내미는 과일 봉지를 받아들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내가 싱싱하다며 감탄하는 사이 영찬은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 웃옷을 벗어던졌다.
“저녁은 뭐야?”
“김치찌개 끓이고 있어요.”
“통닭 사왔어. 먹고 싶은 거 먹어.”
“밥 차려요?”
“씻고 술 한 잔 하려고. 산이랑 먼저 먹어.”
곧장 욕실로 들어가려던 영찬이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물었다.
“산이 오늘 별 일 없었지?”
“없었어요.”
“또 누구 때리지는 않았고?”
“오늘은 집에만 있었어요.”
“알았어.”
아무 일도 없었단다. 이보다 좋은 소식은 없다. 영찬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
다시 욕실 밖으로 나왔을 땐 상이 다 차려진 상태였다. 막 끓고 있는 김치찌개와 반쯤 식었지만 여전히 맛있는 냄새를 풍기고 있는 전기구이 통닭, 그리고 아내 것이 분명한 한 가득 쌓아올린 자두들. 밥과 반찬도 차려져 있었지만 오늘은 밥에 열중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영찬은 술병과 술잔이 놓인 자리에 앉아 리모콘을 집으며 TV화면을 보았다.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미 닭다리 한 쪽을 뜯은 아이는 말없이 먹는데 열중했다. 상추와 풋고추를 내오던 아내가 그것을 보고 아이에게 물었다.
“잘 먹겠습니다 했어?”
“아니.”
“잘 먹겠습니다 해야지. 그리고 아빠보다 먼저 먹으면 안 되지.”
“왜?”
“버르장머리 없는 거야.”
“버르장머리가 뭔데? 없어도 되잖아.”
“어디 가서 그러면 어른들한테 혼나.”
“그럼 안 할게.”
그러더니 아이는 영찬을 빤히 쳐다보며 강요했다.
“빨리 먹어. 나 배고파.”
영찬은 어린 아들의 버릇없는 어투에 완전히 적응했지만 아이를 길에 내놨을 때 낯선 사람에게도 이런 말을 쓰게 놔둘 순 없었다. 영찬 역시 아이의 시선과 똑바로 마주하며 낮고 단호하게 말했다.
“잡수세요 해야지.”
아이는 아버지가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데도 겁먹은 기색이 없었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가끔은 속이 텅 빈 인형 같은 느낌이 들어서 아버지인 영찬조차도 뒷머리가 오싹할 때가 있었다.
“잡수세요 라고 해.”
“잡수세요.”
“옳지.”
영찬이 재차 말하자 아이가 기계같이 대답했다. 일단은 이걸로 됐다. 영찬은 소주병을 따고 잔에다가 소주를 따르기 시작했고, 조마조마하게 상황을 지켜보던 아내는 아이의 옆에 앉아서 “다음부턴 이렇게 해야 돼.”라며 조근조근 알려주었다.
남편의 멋진 목소리에 반해서 결혼했지만 남편이 화를 낼 때는 정말 무서웠다. 그는 단 한 번도 아내를 때린 적이 없음에도, 목소리 자체만으로 위협적이었다. 반대로 그 목소리로 사랑을 고해올 땐 언제나 가슴이 두근거렸다.
삶이 지금같이 되어버렸음에도.
이렇게까지 꼬일 인생은 아니었을 것이다. IMF 외환위기는 피해가지 못할 확정된 운명이었을지 몰라도 아이를 낳는다, 낳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분명히 있었다. 이 남자와 결혼을 할지 말지 하는 선택지도. 하늘이 주신 목숨을 자기가 고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오만이다. 어떤 아이가 태어날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어떻게 생겼을지는 아이를 낳은 부모조차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낳을까 말까는 선택할 수 있었다…….
이 아이를 낳은 걸 후회하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죄를 지은 것 같아 영찬의 아내는 강박적으로 다른 생각을 했다. 영찬도 영찬의 아내도 아이를 사랑한다. 내 새끼인데 당연히 사랑한다.
하지만 나날이 힘들어진다. 어떨 때는 더 이상 버틸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한계에 내몰리기도 한다. 아이를 원망하는 마음도 들지만 그때마다 바로 그 생각, 조금이라도 원망했다는 것 때문에 두 사람은 스스로에게 못질을 했다. 자신들의 죄의 결과가 이 아이라고 생각했다. 그 죄가 뭔지는 몰라도, 지고 가야 할 짐이었다.
이미 낳은 아이를 죽으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는 부모고 아이의 앞날에 대해 책임을 져야한다.
영찬 역시 아내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 병원에서 그런 말을 했다. 문제가 좀 있는 아이라고……. 살면서 이상한 점이 보일 것이고, 이상행동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남들과는 다르다고……. 영찬은 원래 낙천적인 성격이었지만 그때만큼 불같이 화를 내본 적이 없다.
그게 무슨 소리냐. 똑바로 설명해라. 우리 아이가 다른 아이와 뭐가 다르단 말인가. 뇌가 다른 사람과 좀 다른 것 같다니, 확실하게 다른 건가? 당신도 제대로 설명을 못하고 있지 않느냐. 우리 애의 증상이 책에 써져 있느냐? 아니라고? 처음 보는 거라고? 사실 잘 모르겠다고? 잘 모르지만 아직 연구되지 않은 병들이 있는 거라고?
병이라고? 우리 애가 병을 가지고 태어났단 말인가? 그럼 무슨 병이란 말인가? 병이면 고칠 수 있지 않느냐? 모르는 병이니까 못 고친다고. 하지만 이상행동을 보이게 될 거라고. 웃기지 마라. 당신도 확신하지 못하면서 남의 인생을 재단하지 말란 말이다! 갓 태어난 핏덩어리한테!
당신네들이 잘못 판단했다는 걸 증명해줄 테다. 우리 애는 이상하지 않다. 남들과 똑같다! 봐라! 손가락 발가락도 다 달려있고 어디 하나 기형인 곳이 없다! 건강하고, 다른 아기보다 덩치도 작지 않고! 정신병이라니, 정신병이라니! 지금 우리 애가 정신병자가 될 거라고 말한 건가?
이 양반아 똑바로 말해봐! 우리 애가 정신병자라고?
영찬은 그날 의사의 멱살을 잡고 주먹을 날렸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뜯어말려서 의사는 봉변을 면했다. 영찬은 의사의 단정적인 발언에 반감을 가지고 굳은 다짐을 했다. 너희들이 틀렸다는 걸 증명해보이겠다고. 우리 애는 정상이라고. 정상인으로 키울 거라고.
아이가 정상적으로 자라나면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잘나셨다는 현대의학이 틀렸음을 매순간 증명하게 될 것이다. 어디 남의 집 귀한 자식에게 태어날 때부터 재수 없는 소리를……. 영찬은 병원을 나올 때 그 병원 문가에 대고 침을 뱉었다.
그로부터 10년 가까이 지났다. 영찬과 그의 아내는 나날이 메말라가고 있었다.
아이의 이름은 뫼 산자를 써서 산이라고 지었다. 잘 울지 않고 이상하리만치 반응이 없는 아이의 모습을 애써 덕목이라고 생각했다. 산처럼 과묵하니 산같이 어진 이가 될 것이라고. 한 구석에선 현실도피라는 생각도 슬쩍 들었지만 그마저도 무시했다. 그때 무시했던 속삭임들이 지금 잔인한 현실로 돌아와 그를 조소하고 있었다.
의사의 저주가 맞아떨어지기 시작했다. 아이는 이상한 행동들을 하기 시작했다. 아이의 동물적인 폭력성에 대해서는 이따금씩 아버지인 영찬도 등골이 오싹해졌다. 얼마 전에는 아이의 담임선생이 연락을 해오기도 했다. 마침 아내가 없었기 때문에 영찬이 대신 전화를 받았는데, 그래선 안됐다…….
개를 죽이려고 했단다. 개한테 산채로 불을 붙이려고 했단다. 담임선생이 그것을 타일렀더니 하는 말이 “개가 아픈 게 나랑 무슨 상관인가. 내가 아픈 게 아니다.”라고……. 이 대목을 전하는 담임선생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학부모에게 차마 나쁜 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분명히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괴물이라고. 이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괴물이라고.
영찬은 굳은 목소리로 사과하며 반드시 아이를 제대로 가르쳐놓겠다고 약속했다. 그 날 영찬은 처음으로 어린 아들을 심하게 때렸다.
모순적이게도 영찬은 아들이 우는 것을 보며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너도 울 줄은 아는구나. 너도 사람이구나. 너도 때리면 아픈 걸 알아. 너도 다른 사람과 같아. 넌 정상이야. 내 새끼라고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항상 인형을 끌어안고 사는 것 같았던 공허함이 있었는데, 이렇게 시리도록 아픈 방법으로만 인간이라는 걸 증명할 수 있다니.
아내가 아이를 감싸 쥐고 대신 영찬의 주먹을 받아내려 하자 그제야 영찬이 정신을 차렸다. 아내는 울고 있었고 아이 역시 아내 품에 안겨 서럽게 울었다. 다른 아이들이 아버지에게 맞았을 때 그러는 것처럼. 정상인처럼 반응하고 있었다.
영찬은 통증을 느꼈다. 아이를 때린 주먹이 쑤시도록 아팠다. 자기 자신을 때린 것 같았다. 아이에게 멍이 든 것이 눈에 들어오자 가슴 한 구석을 칼로 도려내는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영찬은 비틀거리며 집을 나갔다. 도저히 두 발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영찬은 정신 나간 사람처럼 구멍가게까지 가서 소주를 한 병 사다가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빈속에 소주를 들이켰다.
내가 내 새끼를 때리다니.
그 순간 모든 것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세상이 그에게 거대한 해일처럼 덮쳐오는 것 같았다. 이상한 아이를 낳았다는 죄로 아이를 감시하고, 노심초사하고, 무슨 일이 일어나면 가서 빌고, 고쳐지지 않는 아이의 행동을 어떻게든 바로 잡으려 했다. 그에겐 감당하기 힘든 큰일이었다.
이 아이 하나 키우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둘째, 셋째는 꿈도 꾸지 못했다. 아이가 저지르는 잘못들 때문에 부부가 이리저리 불려 다니면서 빌고, 울고, 때로는 싸웠다. 사는 게 전쟁이었다.
다른 사람은 좀 더 대처를 잘 했을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은 그보다 더 똑똑해서 더 좋은 방법을 찾았을지도 모른다. 그보다 돈이 더 많은 사람이라면 병원이나, 의사라던가, 무슨 약이라도…….
약은 없다고 했다. 이건 모르는 병이고 평생 지고 가야할 짐이라고.
그래도 혹시 모른다. 돈이 넉넉했다면 상황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돈은 많은 것을 해결해준다. 돈은 그러니까……. 속에서부터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오르더니 걷잡을 수 없이 몰려왔다. 영찬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소주병을 쥔 채 울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영찬은 그날 밤 늦게 아이가 좋아하는 과자를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는 많이 울었는지 퉁퉁 부은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아내도 부은 얼굴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둘은 아무런 말도 주고받지 않았다. 미안하다는 말도. 잠든 아이는 물론이고.
그들은 아무 말 없이 그날 밤을 넘겼고 그것으로 화해했다. 셋 모두가 상처를 추스를 시간이 필요했다. 다음날이 되서야 감정을 추스른 영찬은 아이에게 자신의 행동을 설명할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아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알려줄 수 있었다. 아이는 항상 그렇듯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받아들이지는 못하는 모양이었지만 머리로는 열심히 기억해두는 것 같았다. 아빠의 손찌검은 난생 처음 겪는 아프고 무서운 경험이었으니까.
영찬 역시 아버지에게 맞고 자랐지만 자기 아이에겐 그러고 싶지 않았다. 물론 사내아이를 키우려면 어느 정도 매로 훈육해야한다는 본인만의 기준이 있었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아이에게 사회의 규칙을 가르쳐놔야 한다는 의무가 있었다. 그래서 남들과 함께 살아가도록,
생존하도록.
그의 노력이 보상을 받을 수 있을지 어떨지는 모르겠다. 다행인건 아이는 아빠의 잘못을 금방 잊었다는 것이다. 아빠가 자기를 진짜로 미워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기에 용서한 것일 수도 있다. 영찬에게 조금만 더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있었더라면 그것을 아이가 가진 인간성의 징조라고 알아챌 수도 있었을 텐데, 상황이 받쳐주질 않았다. 그는 한계에 몰려 있었다.
남들보다 많이 느리고, 많이 둔하고,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하지만 가능성이 아주 없는 건 아니라고. 다른 사람처럼, 정상인처럼 될 가능성이. 영찬은 인지하지 못했지만 그런 가능성들이 줄곧 그의 옆에서 속삭이고 있었다.
어쨌거나 살아간다는 건 딱 하루이틀간의 사건으로 완전히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에 그 이후로도 평범한 일상이 흘러갔다. 오늘같이 힘든 날도 그런 평범한 일상 중 하나였다.
영찬은 아무런 말도 하고 싶지 않았기에 묵묵히 술잔을 비우고 있었다. 아내는 TV를 보며 자두를 먹고 있었고, 아이는 아무도 손대지 않는 통닭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영찬의 앞 접시 위에 닭다리 한 쪽이 툭 놓였다. 술기운이 오르기 시작한 영찬이 자신 앞에 닭다리를 내민 작은 손을 보았다. 아이 역시 아빠를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었다.
“먹어.”
뭔가를 양보하던 아이가 아닌데. 아이가 진짜로 권했다곤 생각하지 않는다. 눈에서 물욕이 뚝뚝 떨어지고 있으니까. 하지만 권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영찬에겐 고된 하루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되었다.
“너 먹어라.”
아빠의 거절에 아이는 두 번 권유하지 않고 다시 닭다리를 가져갔다. 오늘밤은 평화다. 누군가에게 화내거나 윽박지르거나 언성을 높이지 않고.
오늘 밤은 평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