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과 나 사이에 있던 일들 (13/24)

당신과 나 사이에 있던 일들

“당신과 나 사이엔 무엇이 있었습니까?”

“7년 전에 당신을 처음 만났고, 당신은 얼마간 이 집에서 묵었어요. 동양인들은 원래 나이보다 훨씬 어려보이니까……. 그땐 정말 소년 같았죠. 지금도 별로 변한 게 없네요. 당신은 여기서 하숙생처럼 지냈어요. 그 후에 당신이 시베리아에서 내 딸과 손자를 구해주었어요.”

- 나에게 안식을 본편 中

인생이란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아네타 바린카는 이런 일을 하면서 살게 될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몽상에 젖어 살던 10대 소녀였을 때도, 모든 것이 생동감 넘치던 20대였을 때도, 그리고 남편이 아직 살아있던 30대였을 때도.

그 때는 남편이 죽을 거라는 것도 상상하지 못했다. 딸이 러시아인과 결혼해서 체코를 떠나게 되리라는 것도. 무엇보다도, 자신이 정보를 팔면서 생계를 꾸려가게 될 줄은 몰랐다.

아네타는 한국 정보기관에서 올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꽤나 쌀쌀한 날씨였기 때문에 긴팔 옷에다가 가디건을 입고서도 그 위에 숄을 하나 더 걸쳐야 했다.

한국인들과는 이전에도 몇 번 거래했다. 말없고 조용한 사람들이었지만 항상 분주해서 뭔가를 계속 하고 있었다. 남한이라는 나라가 대외적으로는 별 특색이 없어 보이는 나라일지 몰라도 정보기관만큼은 생각보다 영향력이 널리 퍼져 있는 것 아닐까. 아네타가 보기엔 그랬다.

이번에는 조금 특수한 거래다. 그들의 요원 중 하나가 아네타의 집에서 묵게 된 것이다. 하숙이라고 할까. 그들은 무슨 사정이 있는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글쎄, 아지트 구축이 안됐다던가, 아니면 이미 있는 아지트를 쓸 수 없게 됐다던가, 단순히 숙소를 구하지 못했다던가 뭐 그런 이유들이 있겠지.

한국인들에게 정보를 팔아봐야 그걸 가지고 체코 안에서 문제를 일으키진 않았기에 아네타는 이번 거래에도 응했다. 어차피 남편도 없고 딸 부부도 없어서 아네타 혼자 살기엔 큰 집이었다. 식객 하나쯤 있어도 문제될 건 없다.

아네타가 현관 앞까지 나와 기다리고 있으려니 검은 차 한 대가 와서는 차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내려섰다. 중년의 남자와 아직 앳된 젊은 남자. 중년 남자는 트렁크를 열고 짐을 내리며 젊은 남자에게 뭐라고 말을 했다.

그들이 한국어로 대화하고 있다는 건 짐작할 수 있었지만 내용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아네타가 한국인들과 거래하면서 익힌 한국어는 극히 제한된 몇 가지 단어뿐이었으니까.

중년 남자는 짐을 다 내려주고는 왔을 때만큼이나 기별 없이 사라졌다. 혼자 남은 젊은 남자는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는 곧장 아네타에게 다가왔다.

“조영우입니다.”

인사도 없이 대뜸 이름부터 말한다. 아네타 역시 원래 그렇게 사교적인 성격은 아니었기 때문에 필요한 것만 간략하게 말하는 남자의 태도가 거슬리진 않았다.

“아네타 바린카예요.”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고 아네타는 그가 짐을 가지고 집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현관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그게 그들의 첫 시작이었다.

아네타는 이 일을 하면서 정보공작원부터 수상쩍은 청부업자까지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사람들의 성격은 제각각이었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수다스러운 사람부터 매사 편집증에 시달리는 사람, 한 마디도 섞기 싫을 정도로 불쾌한 사람, 인격적인 매력이 넘쳐흐르지만 어딘가 불안하고 수상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 그리고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까지.

조영우라는 남자는 말수가 없는 편에 속했다. 체코어를 할 줄 모르기도 하지만 영어로 대화를 하려고 해도 그는 필요한 말만 하고 더 입을 열지 않았다. 무언가를 숨긴다기보다는 원래부터 말수가 적고 공허한 느낌이 드는 남자였다. 한국어로 대화해도 결과는 똑같지 않을까.

하긴, 첩보원이 수다스러워서 좋을 게 있을까.

아네타도 원래부터 개인사를 꼬치꼬치 캐묻거나 자기 얘기를 늘어놓는 성격은 아니었기 때문에 남자의 무관심이 마음에 들었다. 사실은 혼자 산지 꽤 되었기 때문에 남과 같이 산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가고 있었다.

“바린카 여사님?”

“아네타라고 불러요.”

“아네타 씨, 전 오늘 나가봐야합니다. 내일까지 들어오지 않을 예정입니다.”

“마음대로 해요. 그런 계약이니까.”

“알겠습니다.”

“현관문은 잠가도 되겠죠?”

“예.”

그와 나누는 대화가 대부분 이런 식이었다. 그는 무슨 일을 하는지는 일절 알려주지 않은 채 불쑥 나갔다가 불쑥 들어오고, 어떤 날은 방에 틀어박혀서 하루 종일 잠만 자고, 또 어떤 날은 아네타의 귀에 들리지 않는 곳으로 가서 한국어로 누군가와 전화를 했다.

그는 체코어를 할 줄 모르고 아네타는 한국어를 할 줄 몰랐기 때문에 둘은 영어로 대화했다. 그가 아네타보다 영어를 잘했다. 개인사에 대해선 극히 말을 아끼는 그였지만 뉴욕에서 얼마간 머물렀다는 얘기를 해줬으니까. 딱히 아네타가 캐낸 정보는 아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것 뿐.

그런 남자도 이따금씩 인간 같은 행동을 할 때가 있었다. 평소에는 다른 사람의 행동을 잘 모방해서 연기하듯이 살아가는 남자였지만 가끔은 정말 모르거나 이 나라의 상식에 익숙하지 않아서 실수를 저지르곤 했다.

그때마다 보여주는 망가진 기계 같은 반응이 아네타를 웃게 만들었다. 남자는 실수할 때만큼은 연기를 하지 않았고, 역설적이게도 그 어느 때보다 인간적으로 보였다.

아네타는 그를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아네타도 감정 표현에 미숙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 남자와의 차이점이라면 아네타는 본인의 미숙함과 실수까지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일까.

이 남자도 가끔씩 꾸미지 않고 웃을 때가 있었다. 아네타가 기계적으로 웃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 뒤부터는 그런 웃음이 더 잦아졌다.

그럴 때의 남자는 뭐라고 할까, 아기같이 순진무구한데가 있었다.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새하얀 도화지처럼.

“영우, 나 외출해야 해요.”

“어디 가십니까?”

“장 봐올게요. 필요한 것 있나요?”

“없습니다.”

“그럼 집 좀 봐주세요. 오늘은 어디 나갈 일 없죠?”

“괜찮으시다면 같이 가겠습니다. 혼자서 짐 들고 오시려면 무거울 테니까.”

남자에게서 뜻밖의 제안이 흘러나왔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네타는 잠시 생각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네타 혼자 살 때는 필요한 게 그리 많지 않았다. 식료품도 훨씬 적게 소비했고. 하지만 한창 때의 젊은 남자와 같이 살게 되자 장을 봐야하는 횟수가 늘어났다. 남편이 죽은 지 거의 30년이 다 되어가기 때문에 아네타는 젊은 남자가 얼마만큼 먹는지 잊고 있었다.

조영우라는 남자와 함께 사는 것은 로맨틱한 설렘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네타에겐 이제 그런 게 지나간 지 오래다. 자식이라곤 딸 밖에 없었기 때문에 자식을 키우는 느낌도 아니다. 아들이 있었다면 이런 느낌이었을까 싶지만, 주변에 있는 아들 딸린 사람들을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조영우는 조용한 동거인이었고 독립적이었으며 그저 한 집에 살기 때문에 가끔씩만 사교적인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었다. 그건 뭐라고 할까……. 개나 고양이를 키우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개보다는 덜 의존적이니까 고양이에 더 가깝다고 할까.

“영우, 전부터 묻고 싶었는데.”

“뭡니까?”

“너무 사적인 이야기라 묻기가 망설여졌어요. 그냥 확인하고 싶어서 물어보는 거니까 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요. 당신 혹시 미성년자인가요?”

“미성년자?”

“정보기관에서 일할 정도면 당연히 성인일 테지만 가끔가다가 좀 헷갈려서요……. 너무 어려 보여서……. 아니, 미안해요. 말해줄 필요 없어요. 너무 개인적인 부분이었네요. 굳이 알 필요는 없는데.”

“성인입니다. 군대도 다녀왔습니다.”

조영우는 선뜻 질문에 답해주며 굳이 알 필요가 없는 정보까지 알려줬다. 뜬금없이 군대 얘기가? 아네타의 반응을 보고 그가 도리어 고개를 갸웃했다.

“체코는 징병제가 아닙니까?”

“나 젊었을 땐 징병제였지만 모병제로 바뀌었어요.”

“한국은 의무입니다. 성인 남성이라면 가야합니다.”

“그렇군요.”

“저는 장교로 복무했습니다.”

한 번 더, 알 필요가 없는 정보가 흘러나왔다. 조영우로서는 “군대에 다녀왔다.”는 정보에 대한 추가 설명을 덧붙인 것일 테지만 사실 거기까지는 알려주지 않아도 되는 사항이었다. 아네타의 반응을 보고 조영우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쓸데없는 얘기를 해서 죄송합니다.”

“아니, 아니에요. 나는 괜찮은데……. 당신한테는 개인적인 정보니까.”

필요한 말만 하고 입을 다물어버리는 이 남자가 개인사를 이야기 하는 경우는 좀처럼 없기 때문에 아네타는 그가 말해준 정보와 교환이라도 하듯이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나한테는 남편이 있었어요. 내가 젊었을 때 죽어버렸지만. 그 때는 징병제였으니까 남편도 군대에 갔죠.”

“그렇군요.”

“당신이 개인 정보를 말해줬으니까 이걸로 교환한 셈이에요.”

“감사합니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정보 교환이었지만 덕분에 분위기는 훨씬 온화해졌다.

마트에 가서 물건을 카트에 담는 동안 둘은 별 대화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거운 카트는 자연히 조영우가 밀었고 아네타는 가벼운 손으로 돌아다니며 과일이나 채소가 신선한지, 고기의 품질이 좋은지, 공산품이 할인을 하고 있는지 등을 확인했다.

평소처럼 아네타 혼자 왔으면 그렇게 많이 사진 못했을 텐데 오늘은 든든한 짐꾼이 있었기 때문에 생각보다 더 많이 사게 됐다. 계산대를 지나고 나자 조영우의 양손에는 꽉 채운 장바구니가 두 개나 들려 있었다.

“하나 줘요.”

“무겁습니다.”

“무거울 테니까 하나 넘겨달라는 거예요.”

“괜찮습니다.”

그가 한사코 거절하자 아네타도 더 이상 강권하지 않고 그의 호의를 순수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런 날이 하루쯤 있어도 나쁘지 않으니까. 젊은 첩보원이 자신의 집에 동거하면서 무거운 짐을 대신 들어줄 일이 살면서 몇 번이나 있을까.

그들이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몇 번째인가 모퉁이를 돌아서자 후드를 깊게 눌러 쓴 어떤 남자가 골목 옆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불쑥 튀어나오더니 아네타를 확 밀쳤다.

불의의 기습에 당한 아네타가 뒤로 나동그라질 듯이 크게 휘청거리는 순간 남자의 손이 아네타의 품속으로 재빨리 파고 들어갔다. 다음 순간 그의 손에 걸려 나오는 것은 아네타의 지갑이었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일어났다. 넘어질 뻔한 아네타가 벽을 짚고 간신히 선 것도, 지갑을 낚아챈 남자가 달아나기 시작한 것도, 양손에 짐을 들고 있던 조영우가 재빨리 짐을 내려놓고 몇 발자국 안 가 남자를 채어 잡은 것도.

동체시력도 동체시력이거니와 영우의 판단은 번개같이 빨랐다. 조영우는 아네타를 급습한 소매치기의 멱살을 잡더니 팔을 붙잡아 뒤로 꺾어서 지갑을 떨어뜨리게 했다. 그리고 그의 오금을 걷어 차 바닥에 무릎을 꿇게 만들었다. 그 다음엔 항상 해오던 훈련의 관성을 이기지 못하고 소매치기의 목에 주먹을 날렸다.

“영우!”

놀란 아네타가 소리쳤다. 조영우는 사람을 기절시키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그의 손끝에서 기절한 남자가 덜렁거리고 있었다. 영우는 정신을 잃은 소매치기를 내려놓고 아네타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십니까?”

“나, 나는 괜찮아요.”

아네타가 바닥에 떨어진 지갑을 주우며 대답했다.

“저 사람……. 저 사람 죽은 거 아니죠?”

“아닐 겁니다.”

그들의 대화에 대답이라도 하듯이 바닥에 엎어진 남자가 미약한 신음소리를 흘렸다. 그 소리를 듣고 나서야 아네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영우의 주먹질은 그 정도로 자비가 없었다. 정말 길에서 사람을 맨 손으로 죽여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고 할까.

영우는 바닥에 내려놓았던 짐을 다시 주워들었다.

“돌아가시죠.”

“그, 그래요…….”

“아는 남자입니까?”

“뭐라구요?”

“혹시라도 불안 요소라면 이 자리에서 제거해버려도…….”

“아니요. 아니에요. 오늘 처음 본 사람이에요. 그냥 소매치기일거예요. 모르는 사람이에요.”

“알겠습니다.”

이 자리에서 사람을 죽이겠다는 암시를 이토록 담담히 말한다. 아네타는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영우는 그런 아네타를 보고 뭔가 잠시 생각하더니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다치지 않으셔서 다행입니다.”

“영우.”

“네.”

“굳이 웃지 않아도 되요.”

“알겠습니다.”

조영우의 추측은 영 허황된 것은 아니었다. 정보상으로 일하면서 이런 저런 시비에 휘말린다든가 협박을 받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네타는 그럴 때마다 정보를 판매하는 사람답게 정보를 캐낸다든가 약점을 잡는 식으로 일을 해결했다. 직접 누군가를 해쳐본 적은 없었다.

이게 조영우라는 남자의 진짜 모습일 테지. 인간에겐 마냥 순한 얼굴을 보여주는 개나 고양이가 다른 동물에겐 야생의 모습으로 되돌아가서 맹수 같은 이빨과 발톱을 드러내는 것처럼.

그 때의 개와 고양이는 한 마리의 짐승이다. 인간과 어울리면서 익힌 문명 따위는 모조리 벗어버린 날 것의 냄새를 풀풀 풍기는.

하지만 조영우에게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가 없었으면 아네타는 그대로 지갑을 빼앗겼을지 모른다. 지갑만 뺏기고 끝나면 차라리 양반이다. 재수가 없었으면 칼 같은 것에 찔렸을지도 모르지. 그렇게 생각하니 뒷골이 서늘해졌다.

“영우.”

“네.”

“그래도 도와줘서 고마워요.”

“별말씀을.”

영우는 이렇게 대답하고 나서 잠시 고민하더니 물었다.

“제 표현이 이상했습니까?”

“아니에요.”

아네타는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매번 그렇게 너무 자연스러워지려고 하지 말아요. 더 어색하니까.”

아네타의 지적에 영우가 자신의 속마음을 들킨 듯이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실수할 때 보이는 망가진 기계 같은 얼굴이었다. 그 얼굴이 아네타를 더 크게 웃게 만들었다.

포근하고 따사로운 날씨가 계속 됐다. 조영우를 집에 묵게 해주는 것과는 별개로 아네타는 정보원으로서의 본업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흘러 들어오는 정보를 분석하고, 분류하고, 필요한 사람에게 팔았다. 특정 정보에 대한 요청이 들어오면 직접 알아봐주고 정리해서 팔기도 했다.

식탁이나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을 수밖에 없는 작업이었고,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으면 아네타는 긴 글을 읽을 때 쓰는 돋보기안경과 함께 따뜻한 허브차를 머그컵 한 가득 준비했다.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 마시기 시작한 차인데 이제는 습관이 되어버렸다.

조영우는 아네타가 일을 하고 있을 땐 근처에 얼씬거리지도 않았다. 아네타가 다루는 정보는 상품이니까 얼핏 보기라도 하면 그에 대한 값을 지불해야한다는 부담감이 어딘가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네타가 좀 들여다봐도 상관없다고 했음에도 영우는 굳이 아네타의 개인 공간을 침범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눈앞에서만 얼쩡거리지 않는다 뿐이지 조영우 같은 성인 남자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거실이나 부엌 한 구석에 가만히 있는 게 상당히 신경 쓰였기 때문에 아네타는 영우에게도 자신의 허브차를 주기 시작했다.

영우는 처음에는 그 독특하고 이질적인 향에 적응하지 못했고, 그 다음에는 마시진 않아도 향을 음미했으며, 그 다음에는 한 모금씩 마셔보기 시작했다. 후각은 기억에 깊게 남기 때문에 이 허브차의 향기와 집의 냄새는 영우의 무의식 깊은 곳에 자연스럽게 각인되었다.

물론 가만히 앉아서 차만 마시기엔 상당히 시간 낭비인 것처럼 느껴졌기에 뭔가 효율적인 것을 할 만한 게 없을까 궁리하다가 이윽고 아네타를 돕기 시작했다. 어차피 영우가 체코어를 몰랐기 때문에 체코어로 작성된 문서는 봐도 내용을 알 수 없었다. 영어로 써진 것에는 굳이 시선을 주지 않았고.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따사로운 햇살이 집 안을 부드럽게 비추는 시간 동안. 그 시간 동안이 조영우와 아네타가 함께하는 시간이었다.

이런 날도 있었다. 아네타에게는 종종 사업상의 이유로 악연을 맺은 깡패들이 협박을 해오는 경우가 있었는데, 조영우가 오기 전에는 그런 시비들을 대부분 정보상답게 처리했다. 아네타의 약점을 물고 늘어지려던 패거리들은 도리어 약점을 잡혀 줄행랑을 쳤다. 가끔 그게 안 통하는 놈들이 있었지만.

법보다는 눈앞에 있는 주먹이 가까운 법이다. 정보상을 건드리면 절대 뒤끝이 좋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당장 화는 나고 눈앞에 있는 늙은 여자가 충분히 작고 약해보이면 손을 대볼까 하는 생각도 드는 거다. 그럴 땐 아네타도 답이 없었다. 아네타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권총을 한 자루 가지고 있었지만 그걸 쓸 일이 없기를 바랐다.

그러나 영우가 아네타의 집에서 지내고 난 후에는 상황이 이렇게 변했다.

“문 열어, 이 년아!”

현관문을 부숴버릴 것처럼 거칠게 두드리는 두 남자가 있었다. 덩치 좋은 떡대에다가 얼굴은 망치로 한 대 맞은 듯이 험상궂게 찌그러진 깡패들이었다. 마침 외출했다가 돌아온 조영우는 그 광경을 보고 잠시 상황을 판단하느라고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얘기만 할 거야! 얘기 좀 하자니까!”

“이 할망구가 겁 대가리도 없이 우릴 건드려?”

“우린 진짜 이야기만 할 거야. 신사답게 말이지!”

“헤헤헤, 신사란다! 신사!”

“아주 정중히 대해드릴테니까 문이나 열어 이 할망구야!”

아네타의 집까지 고객이 찾아오는 경우는 없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집은 가장 안전해야 할 장소니까.

영우는 두 남자와 아네타의 관계를 가늠해보았다. 영우는 체코어를 모르니까 두 남자가 떠들어대고 있는 것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거친 목소리와 위협적인 태도로 둘이 우호적인 의도를 가지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아네타는 반응이 없었다. 집 안에 있는 건 확실할 텐데. 어떤 관계일까? 내가 끼어들어도 되나? 그게 적절한 반응일까?

윗선에서 짜인 임무를 일선에서 수행하기만 하는 말단직이라고 해도 조영우 역시 첩보원이다. 신원이 드러나서 좋을 게 없다. 시비가 걸려도 웬만해서는 정체를 숨기고 넘어가는 편이다.

다른 때 같았으면 남자들이 제 풀에 지쳐 사라질 때까지 어딘가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가 조용히 집 안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조영우가 개입을 해야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생겼다.

두 남자 중 하나가 발로 있는 힘껏 현관문을 걷어찬 것이다. 안에서 아네타의 비명소리가 새어나왔다. 벽이 흔들릴 정도의 충격이었다. 정말 문이 부서지는 줄 알았겠지.

아네타의 목소리를 들은 남자들이 안에 목표물이 있다는 걸 확신하고 더 행패를 부렸다. 그러면서 아네타가 놀라서 지른 비명소리까지 조롱했다.

남자들이 집 안으로 들어가서 난리를 치면 곤란하다. 영우의 물건들도 안에 있고, 알려지면 안 되는 정보들도 있기 때문에.

조영우는 남자들에게 성큼성큼 다가가더니 현관문 앞을 막아섰다.

“이건 또 뭐야?”

“접니다, 아네타 씨.”

안에선 대답이 없었다.

“제압해도 되겠습니까? 대답 없으시면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그 말에도 대답은 없었다. 갑자기 작은 동양인 하나가 나타나서 현관문 안에다 대고 영어로 말하는 꼴을 보던 체코 깡패들이 대뜸 주먹을 날렸다. 조영우가 동물적인 감각으로 고개를 틀어 피하자 주먹은 그대로 현관문을 강타했다.

“이 중국인 새끼가!”

동료가 주먹을 감싸 쥐며 소리 지르는 것을 본 다른 남자가 영우에게 달려들었다. 영우는 또 한 번 공격을 흘려내더니 남자의 급소를 걷어찼다. 가랑이 사이로 정강이가 쑤욱 치고 올라오자 남자가 엉겁결에 두 손을 아래로 내려 낭심을 보호했지만 바로 다음 순간 영우의 주먹이 남자의 목에 박혔다.

하나하나가 인체의 급소였다. 잘못 때리면 정말 사람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에 싸울 때도 피해서 때리라고 가르치는 곳인데 영우는 도리어 급소만 골라서 공격했다.

남자들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영우에겐 주먹질을 주고받는 육탄전보다 치명적인 급소를 노려서 단번에 결판을 내야 유리하긴 하지만.

남자들은 주먹깨나 써 본 깡패지만 사람을 죽여본 적은 없었고, 영우는 임무수행 중에 불필요한 방해요소가 생기면 가차 없이 죽여 온 특수요원이다. 그 경험의 차이에서 판가름이 났다.

하나를 완전히 두들겨 패서 바닥에 쓰러뜨린 영우가 다른 남자에게 돌아섰다. 손을 감싸 쥐고 고통스러워하던 남자가 주머니에서 손칼을 꺼내들었다.

“이 새끼, 배를 따주마!”

남자는 그렇게 지껄이면서도 섣불리 달려들지는 못했다. 영우의 실력도 실력이고 사람을 진짜로 찌를 용기가 없었다. 영우는 칼날을 마주하고는 칼끝과 남자의 눈동자를 번갈아 확인했다.

“공격할거면 나도 똑같이 대응하겠다. 경고한다.”

영우는 체코 깡패가 알아듣도록 천천히, 쉬운 단어를 써가며 영어로 경고했다. 하지만 칼을 손에 쥔 흥분과 우월감 때문에 남자는 눈앞의 동양인이 지나치게 침착하다는 위험신호를 감지하지 못했다.

남자가 칼을 쑤욱 찔렀다. 그 순간 영우가 번개같이 남자의 손목과 팔꿈치를 꺾어서 쳐내고 칼을 떨어뜨리게 한 후 관절기를 걸었다. 근육과 인대가 한계까지 비틀린 남자가 고통스러운 소리를 지르며 영우에게 안긴 채 넘어졌다. 남자를 완전히 쓰러뜨린 영우가 재빨리 그 위에 올라타고 남자가 떨어뜨린 칼을 쥐었다. 이 모든 과정이 몇 초 걸리지 않았다.

영우는 남자와 다르게 사람에게 칼을 찔러 넣는데도 망설임이 없었다.

“안 돼, 영우!”

아네타의 외침이 머리 뒤에서 터져 나왔다. 남자의 눈알을 찍어 내리려던 칼날이 간발의 차로 얼굴 옆으로 비껴 내려갔다. 귀 옆에 칼날이 찍힌 남자가 경악과 공포로 커진 눈으로 소리도 못 지르고 꺽꺽 숨을 몰아쉬었다.

영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칼을 잡아 빼더니 남자의 목 살갗에 칼날을 바짝 붙이며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 샌가 현관문을 열고 나온 아네타가 양손으로 권총을 쥐고 겨냥한 채 영우와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겁에 질린 눈이었다.

“죽여도 되겠습니까?”

“안돼요, 살인만은!”

“하지만 여지를 남기지 않는 편이 좋을 텐데요.”

“내가 말로 할게요. 죽이지 말아요.”

“알겠습니다.”

아네타가 총을 겨누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칼로 위협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영우가 남자의 목에서 칼을 떼며 몸을 일으키자 남자가 바닥을 기어 도망쳤다.

“이 살인자, 살인자 새끼! 진짜 죽이려고 했어!”

“이 미친 노친네야! 이대로 가만히 있을 줄 알아?”

“내가 목숨 살려준 거니까 당장 꺼져! 다시는 오지 마! 이다음에는 진짜 죽어! 내 손으로 죽일 거야! 알았어?!”

사람을 죽이는 데에 어떤 거리낌도 없어 보이는 남자와 아네타의 손에 들린 권총은 대단한 설득력이 있었다. 깡패들은 비틀비틀 일어서더니 도망쳤다.

깡패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영우의 손이 조용히 아네타의 손등을 덮었다. 권총을 쥔 채 부들부들 떨고 있던 아네타가 정신을 차렸다. 아네타는 실수로 방아쇠를 당기기 전에 영우에게 총을 건네주었다.

“들어가시죠.”

“지, 진짜로 죽이려고 했어요? 사람을?”

“상대가 먼저 칼을 들고 저를 죽이려고 했으니까요. 저는 경고했습니다.”

어떤 망설임도 없는 대답이었다. 그렇게 수학공식 말하듯이 말할 것이 아님에도.

“다치지 않으셔서 다행입니다.”

“영우, 난 괜찮아요.”

“예.”

“그러니까 모든 상황에 정해진 답이 있는 것처럼 반응하지 말아요. 위로하지 않아도 되니까.”

“죄송합니다.”

“그래도 방금 당신 반응은 적절했어요.”

“들어가시죠.”

그 일이 있고 난 후에 몇 번 더 비슷한 일이 일어났지만 날이 갈수록 영우의 손속이 잔인해졌기 때문에 더 이상 물리적으로 위해를 가하려는 놈들은 사라졌다. 소문이 난 모양이다. 영우가 사람을 잔인하게 구타하면서 쾌락을 느끼는 건 아니었다. 경고와 위협으로 일부러 무서운 꼴을 보여주려는 셈이었다. 그것이 잘 통했는지 아네타의 집은 꽤 견고한 평화로움을 유지하게 됐다.

어느 날이었다. 일어날 시간이 한참 지났어도 조영우가 방에서 나오지 않기에 아네타는 문가에 서서 영우를 불렀다. 대답이 없었다. 아네타가 양해를 구하고 방문을 열자 어두운 방 안에서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잠든 숨소리는 아니었다.

“영우?”

영우는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아네타가 다가가서 부르는데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그의 기척이 이상함을 느낀 아네타가 이마에 손을 짚어보니 열이 심하게 나고 있었다.

“저런 저런.”

아네타가 혀를 차는 소리에 영우가 잠에서 깼는지 몽롱한 눈으로 아네타를 올려다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어려보이는 얼굴이 표정까지 멍하게 풀어지자 정말 어린애처럼 보였다. 보호본능을 자극한다고 할까.

“엄마…….”

그가 작은 소리로 뭐라고 중얼거렸다. 한국어인 것 같은데 열에 들뜬 상태라 발음이고 목소리고 뭉개져서 아네타는 그것을 알아듣지 못했다. 눈을 보면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지.

아네타는 수건에 찬 물을 적셔 와서 달아올라 홍조를 띈 영우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그리곤 해열제를 먹여주고 영우의 침대에 걸터앉아 그의 상태를 계속 살펴봤다.

영우의 열이 어느 정도 내려가고 숨소리가 안정적으로 변하자 아네타는 영우가 계속 자도록 내버려두고 부엌으로 들어가 굴라쉬를 만들 준비를 했다.

낯선 나라에 와서 무리를 한 터라 몸살이 났을 것이다. 조영우 같은 나이대의 남자들은 푹 자게하고 잘 먹이면 웬만한 건 나아버린다.

평소처럼 소고기를 큼직하게 썰려던 아네타는 영우의 몸 상태를 떠올리고 평소의 반 정도 크기로 썰기 시작했다. 양파와 다른 채소들도 마찬가지. 국물은 평소에 먹는 진하고 걸쭉한 것보다 더 묽게, 수프처럼 만들었다.

혹시나 영우가 건더기를 씹을 여력도 없을지 모르니까. 그렇다면 국물만이라도 먹게 할 심산이었다.

굴라쉬 냄비를 불에 올려놓은 아네타는 이따금씩 영우의 상태를 살펴가면서 불 앞을 지키고 섰다. 모든 재료가 흐물흐물해질 때까지 뭉근하게 몇 시간이고 굴라쉬를 끓였다. 그 근사한 냄새가 집 안을 가득 메울 때쯤, 조영우가 정신을 차렸다.

다행히 영우는 침대를 벗어날 기력은 있었는지 비척거리며 부엌 안으로 들어왔다. 자신의 이마에 걸쳐 있던, 지금은 미지근해진 물수건을 들고서.

“아네타 씨…….”

영우가 다 갈라진 목소리로 가물거리는 눈을 깜박깜박 뜨며 말했다.

“저, 통화를 좀 해야겠습니다…….”

“당신 상사에게 보고해야하나요?”

“예…….”

“잠깐. 일단 뭘 좀 먹어요. 앉아요. 먹을 수 있겠어요?”

영우가 가만히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네타가 몇 시간이고 푹 고아낸 굴라쉬를 그릇에 뜨기 시작했다. 영우가 비틀거리며 식탁 의자에 앉자 곧 그의 앞으로 소고기와 야채 건더기를 푹 삶은 새빨간 국물의 굴라쉬 한 그릇이 나왔다.

“조금 얼큰하게 만들었어요. 너무 맵지 않을지 모르겠네요.”

“매운 건 괜찮습니다…….”

스푼을 든 영우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국물을 한 번 떠먹고 난 뒤에는 많이 진정되었고, 건더기까지 합해서 몇 입을 먹고 나자 더 이상 떨리지 않게 되었다. 아네타는 그의 앞에 앉아서 아픈 남자가 먼 나라의 가정요리를 먹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따뜻하고, 조용하고, 이따금씩 식기가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나는 시간이었다.

딸에게서 연락이 왔다. 오랜만에 온 연락이라 반가워하던 것도 잠시, 아네타는 딸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알았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딸의 목소리를 한참 듣고 있던 아네타는 망연자실하게 “그래. 그래.”하고 대꾸만 하고 있었다. 아네타의 초조함을 영우가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전화를 끊고서도 한참이나 우두커니 서 있는 아네타의 뒷모습을 보던 조영우가 물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니,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네타는 말끝을 흐리며 애써 영우의 관심을 무시했다. 그에게 말하기엔 지나치게 사적인 이야기니까. 언제 떠날지 모르는 식객에게 자신의 사정을 털어놓고 싶지도 않았고, 그의 입장에서도 그것을 싫어할 것 같았다.

딸은 아네타의 감정을 완전히 뒤흔들어 놓을 정도로 불안한 상태는 아니었다. 다만 상황이 좋지 않다고만 전했을 뿐이다. 어쩌면 전화라서, 누군가 듣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말을 아낀 걸지도 모르지. 아네타는 표면적인 말의 뜻보다 더 많은 것을 읽었다. 딸은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었고 그 이유를 아네타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아네타는 남을 위해 정보를 캐고 조합하던 실력을 이번에는 자신을 위해 썼다. 아네타가 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알았을 때 즈음엔 딸을 도와주기에는 자신이 너무나도 무력하다는 것을 알아버린 뒤였다. 그때쯤엔 영우도 체코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동안 감사했습니다.”

“그래요. 그 동안 낯선 나라에서 고생 많았어요.”

“저는 러시아로 갑니다.”

영우가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그리고는 추가설명 없이 아네타의 눈을 깊숙이 들여다보았다. 아네타는 한 순간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갓 10대를 벗어난 것처럼 보이는 이 앳된 남자의 검은 동공이 무언가를 많이 담고 있다는 것 정도만 파악했다. 그것은 평소의 공허함과는 달랐다.

“영우.”

“네.”

“더 설명을 해줘요. 나는 당신의 속마음을 못 읽으니까.”

“죄송합니다. 저는 러시아로 가게 됩니다. 혹시라도 도와드릴 일이 있습니까?”

“왜 그런 질문을 하게 된 거죠?”

“걱정이 있으신 것 같아서.”

“영우.”

“네.”

“사람 같아졌네요.”

그 말에 조영우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 희미한 웃음은 곧 씻은 듯이 사라졌다. 아네타가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얼굴이 일그러졌기 때문에. 영우가 살아온 경험에 비추어보자면 누군가가 울고 있을 땐 웃는 것은 부적절한 짓이다. 부적절한 행동은 언제나 그의 인생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딸이……. 러시아에 살고 있어요.”

다행히 아네타는 그의 부적절한 행동을 책망하지 않았다.

“목숨이……. 위험해질 것 같아요. 나한테는 말해주지 않았지만. 내 손자도 거기 있어요. 사샤라고. 몇 년 전에 본 게 다예요. 나는, 아니 미안해요.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인데. 당신이 알 필요는 없는데.”

“듣고 싶습니다.”

영우의 한 마디가 간신히 유지하던 아네타의 이성을 끊어버렸는지 아네타가 갑자기 눈물을 뚝 뚝 떨어뜨리며 울기 시작했다.

“나 어떡해요. 나 좀 도와줘요. 도와줘요. 도와줘요…….”

“울지 마세요.”

“생각 같아서는 당장 러시아로 가고 싶어요. 그 아이들을 데려오고 싶어요. 그런데 내가 가서 뭘 어떻게 해요…….”

아네타가 울음을 그치지 않아서 영우는 난처해졌다. 아네타가 보이는 감정이 걱정이라는 것은 안다. 영우의 어머니가 이렇게 울곤 했으니까.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그는 누군가를 달래는데 미숙하다. 공감이 가능해야 할 수 있는 행동인데 그에겐 그만큼 어려운 것도 없으니까.

차라리 명령을 내려라. 목표를 정하고, 구체적인 행동 방안을 제시해라. 그것을 그대로 따르는 게 더 쉬운 일이다. 그래서 영우는 아네타에게 다시 물었다.

“시키실 일이 있으십니까?”

아네타는 더 이상 “이건 개인사니까.”라던가 “당신의 사생활을 침범하고 싶지 않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게 자신에게 주어진 실낱같은 희망이란 걸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으니까.

“내 딸, 내 딸을 구해주세요. 내 손자도…….”

“노력해보겠습니다.”

영우는 확답을 주지 않았지만 아네타는 그것이 무엇보다 확답에 가깝다는 걸 알았다. 첩보원들은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조영우는 그날 오후에 짐을 챙겨서 아네타의 집을 떠났다.

“그동안 잘 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아네타는 아직도 빨갛게 달아올라 붓기가 가라앉지 않은 눈으로 영우가 인사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국식으로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하는 것이 퍽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처음 이 집에 왔을 땐 인사는커녕 대뜸 자기 이름부터 말하면서 그걸로 통성명을 끝내버린 남자였는데.

“다음에도 또 와요.”

절박했지만, 딸과 손자를 함께 데리고 오라는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영우도 굳이 그것을 언급하진 않았다.

“노력하겠습니다.”

영우는 아네타를 쓱 돌아보곤 그대로 짐을 들고 떠났다. 이곳에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홀연히.

딸이 살아 돌아왔다. 손자도 함께.

딸의 남편인 러시아인은 이미 3~4년 전쯤에 죽었기 때문에 아네타에게 남은 거라곤 이제 이 두 사람 밖에 없었다. 몰골이 말이 아니긴 했지만 신체의 어디 하나 잃어버린 곳 없이 멀쩡히 돌아온 둘을 보고 아네타는 지고의 환희를 느꼈다.

조영우는 다시 체코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 대신 딸이 돌아오던 날 저녁 즈음에 아네타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는 바쁘다고 했다. 또 다른 임무가 있다고 했고.

잠시 짬이 나서 전화하는 것이라고 했다. 두 사람이 잘 도착했는지 확인하는 것일 테지. 감정이라곤 없어보이던 이 미숙한 남자가 이제는 정말 사람 같은 행동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영우.”

“네.”

“당신은 괜찮아질 거예요. 내가 알아요. 당신은 속으론 착한 사람이라는 거. 표현하고 느끼는 게 미숙할 뿐이지. 내가 알아요……. 살면서 익숙해질 거예요. 사람과의 관계도 덜 어색해질 거고. 그렇게 적응하게 될 거예요. 나도 그랬으니까.”

전화 너머의 조영우는 아무런 대답 없이 아네타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나한테도 아들이 있었다면 당신 같았겠죠. 당신은 내 아들이에요. 고마워요. 내 자식을 살려줘서. 언제든 돌아와요. 내 집 문은 열려있으니까.”

“감사합니다.”

“잘 지내요.”

“건강히 지내시길.”

아네타는 이번엔 울지 않았고 건조한 전화통화는 그렇게 끊어졌다.

짧은 시간 동안 함께 지낸 동양인 하숙생이 사라지고 아네타의 인생은 여태 흘러왔던 것처럼 별다른 변화 없이 꾸준히 흘러나갔다. 딸과 손자는 다른 도시에 정착했고 아네타는 프라하에 남았다.

그렇게 살아가던 어느 날, 조영우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아네타는 그에 대한 기억도 언젠가 자신이 묻히게 될 무덤 한편에 미리 묻어두었다.

인생이란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아네타는 어느 날 걸려온 전화를 받고 그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믿을 수 없었다. 그 남자의 특징적인 목소리는 7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어도 아네타의 기억을 되살렸다.

하지만 목소리만으론 상대를 판단할 수 없다. 아네타는 좀 더 명확한 증거가 필요했다. 목소리만 닮은 다른 사람인지, 정말 그가 맞는지……. 몇 번의 확인 작업 끝에 아네타는 그와 만날 약속을 잡았다.

벤체슬라스 광장에서 기마상을 올려다보는 그의 뒷모습을 보았을 땐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영우?”

그가 뒤돌아보는 순간, 아네타는 많은 것이 바뀌었다는 걸 깨달았다.

조영우였던 남자는 지금은 사파이어라는 보석이 되었다고 했다. 바뀐 건 그의 이름뿐만이 아니었다. 목 아래와 소매 안쪽으로 보이는 크고 작은 흉터들이 그 동안 그가 헤쳐 나왔을 아수라장을 짐작케 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기억을 잃은 상태였다.

단 한 가지, 고집스러울 정도로 정직한 성격은 잃어버리지 않은 채.

자신의 세공사를 죽이려는 남자의 복수 준비를 도우며 아네타는 무엇이든, 아주 작은 거라도 그가 기억해내주길 바랐다.

“손자 이름이 사샤입니까?”

“맞아요.”

“의심해서 죄송했습니다.”

조영우였던 남자는 고개 숙여 사과했다. 마치 그가 조영우로서 이 집을 떠날 때 했던 인사 같아서 아네타는 격해지는 감정을 추스르려고 잠시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아네타는 눈가를 살짝 누르며 눈물을 억누르곤 다시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집에 돌아온 걸 환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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