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식사 모임
장 바티스트와 페리도트가 에메랄드의 집 문을 두드린 것은 오후 7시 경이었다. 문을 열어준 것은 에메랄드의 첫째 아이인 로뱅이었다.
“장 바티스트!”
“아저씨라고 해야지 이 녀석아.”
“올리비에 아저씨!”
“난 아직 형이야!”
아이는 둘의 핀잔을 환한 웃음으로 넘기며 집 안으로 쪼르르 달려가 버렸다.
“누굴 닮아서 저 모양인지 원.”
장 바티스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복도 끝 거실에는 한 아이가 문 뒤에 서서 둘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장 바티스트가 “클로에!”하고 인사하자마자 제 오빠와 마찬가지로 쪼르르 어디론가 달려가 버렸다.
많이 컸다. 물론 장 바티스트는 세네갈에서 갓 넘어온 외국인 노동자가 어떻게 기반을 닦고, 여자를 만나 결혼하고, 애까지 낳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모두 봤기에 크게 놀랍지는 않았지만.
로뱅이 태어났을 땐 장 바티스트나 에메랄드나 둘 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그 변화를 눈여겨보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그 때는 페리도트도 없었지. 클로에는 로뱅 때와 달리 좀 더 여유롭게 그 탄생과 성장과정을 지켜보았다. 장 바티스트는 남의 인생에 끼어드는 취미가 없지만 에메랄드의 두 자식에 대해선 반쯤 제 자식 같은 유대감이 있었다. 그 아이들이 장 바티스트를 삼촌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처음엔 이렇지 않았다. 장 바티스트는 에메랄드라는 짐승을 묶어놓을 목줄이 필요했을 뿐이다. 하지만 모든 게 계획대로만 흘러가지는 않는 법이니까. 그게 인생이지.
장 바티스트는 익숙하게 부엌으로 들어섰다. 부엌에는 에메랄드의 아내인 코니가 한창 요리를 하고 있었다. 메인 요리인 뵈프 부르기뇽은 이미 완성된 상태고 나머지를 손보고 있었다.
코니는 이미 발소리로 손님이 부엌까지 들어온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뒤돌아섰다.
“어서 와요, 장 바티스트.”
“잘 지냈어요, 코니?”
둘은 반갑게 인사하며 양쪽 볼을 번갈아 갖다 대고 쪽 하는 소리를 냈다.
그들이 처음부터 이름으로 서로를 불렀던 것은 아니다. 장 바티스트는 코니를 부인이라고 불렀고, 코니는 그를 꼬박꼬박 고디에 씨라고 불렀다. 처음에 둘 사이는 미심쩍고 떨떠름한 관계였다. 장 바티스트보다는 코니에게 더 그랬다. 남편 직업이 대충 위험한 일을 하는 것이라는 건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정확히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더군다나 그의 수상쩍은 직장 동료에 대해서는 전혀 확신이 없었으니까.
코니는 대충 남편이 첩보원 같은 것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다. 여러 정황으로 짐작해 보건데 그것 말곤 딱히 맞아 떨어지는 답이 없었다. 에메랄드가 눈에 띄는 부상을 입고 돌아오는 경우는 별로 없었지만, 아무리 작은 상처라도 그의 아내에게조차 숨길 수는 없었다. 그들은 한 침대를 쓰니까.
그래서 처음에 부인과 고디에 씨라는 어색한 호칭으로 시작했던 둘의 관계는, 에메랄드가 다치고 오는 것 때문에 몇 번의 작은 다툼이 있었고 그 뒤에 작은 화해들이 있은 후에 장 바티스트와 코니라는 호칭으로 정리되었다. 수상하고 미심쩍은 관계라고 해도 자꾸 보다보면 악우 비슷한 게 되어간다. 그것이 아이들의 출생과 연계되면 슬슬 가족친구 비슷한 게 되어가고.
장 바티스트와 볼 키스를 한 코니는 옆에 서 있는 페리도트와도 똑같은 인사를 하고선 그제야 장 바티스트가 내미는 와인을 받아들었다.
“세상에! 웬 선물?”
장 바티스트가 와인이나 꽃 같은 것을 들고 오는 것은 하루 이틀이 아니지만 보통은 크게 부담되지 않는 가격선에서였는데 오늘은 값이 제법 나가는 빈티지 와인이었다. 술에 대해 잘 모르는 코니도 평소와는 뭔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다미앙은 좀 괜찮아요?”
장 바티스트가 그렇게 묻는 순간 등 뒤에서 요란하게 반가워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쪽 다리를 아예 붕대로 감아버린 에메랄드가 목발을 짚고 서 있다가 두 팔을 크게 벌려 장 바티스트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리곤 볼 키스를 하고 올리비에에게도 똑같은 인사를 했다.
“아주 빠졌구만, 응?”
“아, 최고야. 한 1년쯤 병가 냈으면 좋겠어.”
“농담할 정도면 다 살아났는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장 바티스트는 기뻐했다. 사파이어와의 일전 때 정말 에메랄드가 죽어버리는 줄 알고 가슴이 철렁했다. 페리도트는 어느 한구석에 기절해있다가 나중에 스스로 정신을 차리고 찾아오긴 했지만.
“부엌도 좋은데 계속 서 있으면 마누라가 화내니까 거실로 가자고.”
“당신만 잘하면 돼, 당신만. 어디서 몸에 구멍이나 내와서 사람을 걱정하게 만들고 말이야.”
“네에. 잘못했습니다, 마님.”
코니가 사랑과 짜증이 반반씩 섞인 목소리로 슬슬 잔소리 시동을 걸자 에메랄드는 두 남자를 데리고 급히 거실로 대피했다. 페리도트는 장 바티스트와 마찬가지로 손에 들고 있던 선물상자를 코니에게 건네며 “디저트예요.”하고 말하곤 잽싸게 내뺐다.
거실까지는 몇 발자국 안됐지만 다리가 불편한 에메랄드에겐 그 몇 발자국 움직이는 것도 버거웠다. 장 바티스트는 에메랄드가 소파에 앉을 수 있도록 도와주며 물었다.
“다리 상태는 많이 안 좋은 거야?”
“저격 총으로 허벅지를 박살 내버린 거니까. 그래도 움직일 수는 있잖아.”
페리도트 역시 남 일이 아닌 것처럼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에메랄드를 살펴보았다. 언제든 자신도 저 꼴이 될 수 있었다.
“하긴 죽지 않은 게 어디야.”
에메랄드가 실없이 웃었다.
“주마등이 딱 스쳐지나가더라. 마누라랑 애들 모습을 한 사신이 서있었는데 진짜 똑같이 생겼더라고. 끌어안을 뻔 했어.”
“소름끼치니까 말하지 마.”
“사파이어랑은 다시는 적으로 만나고 싶지 않아. 차라리 저격으로 끝난 게 나은 것 같아.”
“나도.”
“사실 나도 그래.”
세 남자는 사파이어의 무표정한 얼굴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벤체슬라스는 안 죽었다는 것 같은데.”
“이제 고생길 시작이겠지.”
“여태까지 해온 짓이 있으니까. 고스란히 돌려받겠지.”
세 남자는 사파이어가 여태까지 당한 꼴을 떠올려봤다가 그걸 고스란히 백금발의 세공사에게 대입시켜보곤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인권착취가 기본인 이 바닥이라지만 둘은 동업자들이 보기에도 심했다……. 이제 그 폭력의 방향이 바뀌는 건가? 한 때 노예였던 자에게서 한 때 주인이었던 자에게로?
“내가 너희들한테 얼마나 자비로운지 이제 알겠냐?”
장 바티스트가 가슴을 딱 폈다.
“돈도 꼬박꼬박 주지 결혼도 시켜주지. 나 같은 사람이 어디 있어?”
“코니를 꼬신 건 순전히 내 능력인데?”
“아니 그러니까……. 결혼식장도 구해주고 축하도 해주고 서류도 처리해주고……. 어쨌든 나도 지분이 있다 이 말이야.”
장 바티스트가 비굴하게 변명 몇 마디를 덧붙였다. 물론 장 바티스트는 에메랄드와 그의 가족에게 충분히 많은 것을 해주었다. 에메랄드가 계속 세네갈에서 살았다면 이런 인생을 꿈도 꿀 수 없었겠지. 세네갈 여자가 아닌 콩고 여자를 만나고, 아이들도 낳고, 파리에서 터전을 잡고 살아가고…….
물론 하는 일이 사람 죽이는 일이긴 하지만.
남자들의 실없는 소리가 계속되는 와중에 저녁식사 준비가 다 되었다는 코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담화는 식당으로 자리를 이어 계속됐다.
세 남자, 그리고 코니까지 합해서 어른 넷이 식전주를 마시는 동안 아이들은 일찌감치 자기 방으로 올라간 상태였다. 아빠의 직장동료들이 저녁을 함께하러 오는 특별한 날에는 아이들에게도 별식이 주어졌기 때문에, 특히 밤늦게까지 자지 않고 오랫동안 놀 수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은 군말 없이 어른들이 사교모임을 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어차피 어른들 사이에 낀다고 해봐야 아빠가 귀찮을 정도로 머리를 쓰다듬어서 헝클어뜨린다거나, 장 바티스트 삼촌이 숨이 막힐 정도로 안아준다거나, 올리비에 형의 끝없는 수다를 들어야 할 뿐이니 어른들은 어른들끼리 어울리도록 내버려두는 게 최고였다. 어른들은 지루할 뿐이다.
식전주와 함께 나온 전채 요리는 간단한 수프나 스낵 같은 것이 아니라 아프리카풍의 이국적인 느낌이 나는 가벼운 음식이었다. 코니는 식사에 종종 콩고 요리를 접목시키곤 했다. 에메랄드를 위해 익숙하지 않은 세네갈 요리도 몇 번 시도해봤지만 결국엔 에메랄드가 코니의 손맛에 길들여지는 것으로 해결됐다.
에메랄드의 집에서 한 번씩 하는 저녁식사는 그렇게 격식을 차리는 자리가 아니었다. 장 바티스트는 미술상이라는 표면적인 직업 때문에 제대로 에티켓을 갖춰야하는 정찬 자리에도 참석할 기회가 많았지만 에메랄드의 집은 그런 곳이 아니었다. 이 정기 저녁식사 모임은 눈살 찌푸려지지 않을만한 예의만 갖추고 편하게 즐기는 자리였다. 집주인들부터가 딱딱한 격식에 질색하는 사람들이었으니까.
요리에 대해서도 그렇게 까탈스럽지 않았다. 모여서 친목을 도모한다는 점이 중요했기에, 깍둑썰기한 채소를 듬뿍 넣은 투박한 시골풍 라따뚜이에 바게트만 곁들여도 훌륭한 식사였다. 여유가 되면 거기에 치즈나 괜찮은 와인을 곁들여도 좋고.
메인 요리는 이미 완성되어 있는 뵈프 부르기뇽이었다. 데워서 나온 것뿐이지만 냄새만 맡아도 많은 정성이 들어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코니는 요리를 대충 만들지 않는다. 특히 손님이 올 때는. 아마 어젯밤부터 고기를 와인에 재워놨을 것이다. 에메랄드는 물론이고 장 바티스트나 페리도트같은 인간들에겐 과분한 요리다.
와인과 육수로 뭉근하게 졸여서 부드럽게 찢어지는 쇠고기는 함께 졸여진 채소의 맛과 어우러져 진한 감칠맛이 났다. 장 바티스트도 가끔씩은 집에서 요리를 하는 편이지만 코니의 요리는 한 번씩 레시피를 배워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하긴, 외식을 주로 하는 독신남이 어쩌다가 한 번씩 자기가 먹으려고 만드는 요리와 하루의 끼니 거의 대부분을 가족을 먹이기 위해 만드는 사람의 요리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장 바티스트는 재료는 아낌없이 썼어도 요령이 없었고 코니는 재료의 품질이 조금 떨어지더라도 그것을 감싸는 실력이 있었다. 에메랄드가 보수를 올려달라며 귀찮게 구는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코니의 요리 때문이었다. “가끔씩은 최고의 재료를 써서 최고의 요리를 먹어야 하지 않겠느냐, 너도 사람이라면 그런 욕구가 있지 않느냐.”하는 것을 물고 늘어지는 것이다. 에메랄드가 주로 하는 헛소리일 뿐이지만 코니의 요리는 그만큼의 설득력이 있었다.
고기의 감칠맛이 듬뿍 담긴 소스는 빵조각으로 그릇 밑바닥까지 싹싹 긁게 만들었다. 뭐든 군말 없이 잘 먹는 에메랄드와 달리 장 바티스트는 뭔가를 배부르게 먹는 성격이 아니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고 해도 배가 불러서 몸이 굼떠지는 건 사양이다. 그런데 이 집에 올 땐 예외였다. 코니의 음식은 두 그릇째를 흔쾌히 부르게 만드는 맛이었고, 어떨 때는 세 그릇을 먹게 만들었다.
아마도 맛보다는 온기 때문이겠지. 장 바티스트 같은 인간들에겐 환상과도 같은, 다른 세계의 온기가.
조금 더 돈을 써주는 손님들을 위해 고급 청부업자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지만 세공사라는 놈들도 결국 누군가를 해쳐야만 살아갈 수 있는 인간쓰레기 집단이다. 이 바닥에서 아무리 명성을 쌓아봐야 죽으면 끝나버리는 허무한 이름값일 뿐이고, 하루아침에 어이없게 죽어버리는 것도 드물지 않다. 살아있는 매 순간순간이 보상일 뿐인 그들은 제대로 된 인간관계도 맺지 못하고 미래에 대한 기대란 것도 없다.
결혼을 한다거나 특히 아이를 가진다는 건 바랄 수 없는 허상이다. 그 허상을 이용해서 에메랄드라는 짐승에게 목줄을 걸어놓긴 했지만 사실은 에메랄드에게도 평범한 사람의 행복이란 바랄 수 없는…….
“왜 그래?”
“아, 아니. 아무것도 아냐.”
장 바티스트가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것을 보고 에메랄드가 물었다. 장 바티스트는 황급히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지.
지금도 에메랄드를 완전히 믿지는 않는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어느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에메랄드 역시 마찬가지겠지. 장 바티스트는 이 모든 것을 주었던 것처럼 또한 앗아갈 수 있으니까. 코니와 아이들은 에메랄드의 목숨이고 약점이다. 장 바티스트는 그 약점을 쥐고 있다.
만에 하나 일이 틀어져서……. 꼭 그래야만 한다면 장 바티스트는 이들에게 손을 댈 것이다. 그 만에 하나라는 것이 뭔지, 언제 일어날지는 모르지만.
그런 애매하고 어정쩡한 상태를 유지한 채 거의 1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처음에는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팽팽한 긴장감이 있었는데 지금은 뭐라고 할까,
“한 그릇 더 줘!”
인생이란 건 긴장 풀고 느긋하게 흘러가는 거니까.
집밥이라는 건 페리도트에게도 과분했다. 겉으로 밝게 웃는다고 해도 속까지 그런 건 아니니까. 요즘은 크든 작든 누구나 다 애정결핍을 안고 살아가는 시대다. 멀쩡한 환경에서 자라날 기회가 있던 정상인도, 세공사나 보석 같은 인간들도.
에메랄드와 달리 고정 비용으로 나가는 돈이 훨씬 적으니까 장 바티스트가 보수를 줘도 페리도트에겐 남는 돈이 많았다. 그 돈으로 집도 구하고 얼마 전엔 차도 샀다. 에메랄드보다 지명도는 낮지만 생활에 부족함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도 장 바티스트와 비슷한 유형의 인간으로, 누군가와 사랑을 한다든가하는 특정한 인간관계를 맺는 건 불가능했다.
어떻게 보면 그게 그들이 얻는 부의 대가다. 에메랄드가 항상 돈이 쪼들린다고 앓는 소리를 하는걸 보면 그건 또 안정적인 생활에 대한 대가겠지.
어쨌든 독신인데다 정상적인 인간관계도 맺을 수 없는 페리도트에게 에메랄드의 집에서 열리는 정기적인 저녁식사 모임은 자신은 소속될 수 없는 다른 세계에 잠깐 소풍을 다녀오는 것과 비슷했다. 선배라곤 하지만 경쟁자이기도 한 에메랄드에게 페리도트가 가지는 감정은 복잡 미묘했다.
장 바티스트가 그를 더 아끼는 거 안다. 이해한다. 에메랄드는 페리도트보다 더 오랫동안 함께 일했으니까. 질투하는 건 아니다. 그런 유치한 감정은 아니다. 뭐라고 비유하면 좋을까……. 사장이 자기보다 동료직원을 더 칭찬하고 신뢰하는 걸 지켜보는 느낌이랄까. 물론 그 동료직원이 자신보다 빨리 입사했고 아부 따위가 아니라 실력으로 인정받아서 그런다는 걸 알지만. 납득할 수밖에 없으나 뭔가 표현하기 애매한 감정이 든다.
처음엔 경쟁자에 대한 위기감도 분명히 있었다. 이 일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됐을 땐 그랬다. 하지만 시간이 약이라고 하지 않나. 좋든 싫든 에메랄드의 사생활에 반쯤 발을 걸치게 되니 그를 덮어놓고 좋아한다든가 싫어한다든가 할 수 없게 되었다. 더 이상 모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멋대로 오해할 특권도 잃어버린 셈이다.
에메랄드는 인간적으로도 꽤 괜찮은 녀석이었다. 표적과 암살자라는 관계로 만나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사적으로 만날 땐 친구로 삼기 나쁘지 않았다. 가끔씩은 큰형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정신적인 버팀목이랄 것이 전혀 없는 페리도트에겐 얼마 안 되는 소중한 인간관계였다.
에메랄드도 처음에 페리도트를 집으로 들이는 것에는 생각이 많았다. 장 바티스트는 자신의 약점을 쥐고 있으니까 거절할 수 없다고 해도 페리도트는 직장 동료라는 관계가 아닌가. 그에게까지 약점을 드러내 보이고 싶진 않았다. 코니라는 존재를 알려주고 싶지도 않았고, 특히 아이들에게는 절대로 가까이 가게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도 몇 년이 지나다보니까 어느 샌가 경계심이 허물어져버렸다. 게다가 전기톱으로 사람을 써는 이 암살자가 유사시엔 자기 아이들을 돌봐줄 수 있는 괜찮은 보모라는 것도 입증됐다. 다른 건 몰라도 유괴범이나 강도 같은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건 보증할 수 있다.
코니는 에메랄드보다 두 사람을 받아들이는 속도가 빨랐다. 코니는 남편보다 더 깊게 사물을 볼 수 있었다. 그들 집에 두 사람을 들여놓는 건 사실상 에메랄드가 아니고 코니가 허락한 셈이다. 아이들에게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준 셈이니까.
남편이 어디서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지 정확히는 몰라도 그이의 내적 불안은 확실히 느끼고 있다. 남편이 두 사람을 처음 집에 들일 때 느꼈던 긴장감은 코니도 느꼈다. 그게 정확히 뭔지, 무슨 의미인지는 몰랐지만. 그래서 코니는 남편을 대신해 둘을 판단했고, 꼼꼼한 검증을 거친 다음 그들이 친구가 되도록 허락해주었다.
밖에서 돈을 벌어오는 게 에메랄드일지는 몰라도 직접적으로 집안을 꾸려나가고 유지하는 것은 코니다. 엄마가 행복하면 모두가 행복해진다. 코니는 현명한 여자고 자기 것을 지키려 할 땐 무섭도록 사나워진다. 남편의 대리인이나 종노릇을 하는 게 아니라 이 가족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주인님이 직접 두 사람을 받아들이셨기 때문에 에메랄드는 그 판단을 믿고 경계를 풀었다. 마님은 대체로 옳으시고 이런 문제에 대해선 항상 옳으시다. 옳지 않다고 하더라도 에메랄드가 별 수 있겠는가? 주인님이 말씀하시는데 따라야지.
적어도 에메랄드 혼자 모든 것을 생각하고 책임져야한다는 부담감은 덜하다.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의무는 평생 지고 가지만 그 대신 심리적인 안식처를 얻은 셈이랄까.
안다. 암살자에게는 과분한 행복이고 이런 인간쓰레기들은 언젠가 처참한 꼴로 길바닥에서 죽게 되리라는 것도. 하지만, 젠장, 언제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을 미리 걱정해봐야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운이 좋으면 언젠가 이 바닥에서 발을 뺄 수 있을 것이다. 더 운이 좋으면 몸의 어느 한 곳 잃어버리지 않고 은퇴할 수도 있고. 아이들이 자라는 걸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또 모르지, 다 큰 아이들이 결혼한다고 누군가를 데리고 와서 에메랄드를 어색하고 당혹스러운 상견례 자리에 앉힐지도.
어쩌면 손주를 볼 수도 있다. 그건 좀 신나는 상상이다. 지나치게 막연하지만 안 될 건 또 뭔가? 에메랄드의 죗값이 유전자의 죗값은 아니지 않은가. 내 아이도 귀엽지만 손주들은 봄날의 작은 강아지 같을 것이다. 손주들이 태어날 때 즈음엔 다 늙어서 현장직을 하긴 쓸모없어진 에메랄드 할아버지가 자식들이 직장에 간 동안 아기들을 봐줄 수도 있을 것이다.
살면서 일이 어떻게 꼬일 진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만.
식사와 담소는 길고 여유로웠다. 메인요리 후 까망베르 치즈를 먹고 디저트 순서가 되었다. 디저트는 페리도트가 사온 것으로, 결이 잘 살아있는 밀푀유와 초콜렛이 발린 에클레어, 싱싱한 딸기가 한가득 올라간 작은 타르트와 밤 크림을 잔뜩 올린 몽블랑이었다.
포장에서부터 짐작은 갔지만 하나하나 모양새가 예쁘고 섬세한 걸 보니 어딘가 고급 과자점에서 사온 것 같았다. 이따금씩 손님들이 빈 손으로 오기 허전해서 가볍게 마실 수 있는 와인이나 부담되지 않는 과자 같은 것을 들고 오긴 했지만 오늘은 느낌이 조금 달랐다. 코니가 그것을 예리하게 눈치 챘다.
“나 몰래 무슨 축하연 같은 거 하고 있어요?”
“아뇨, 아뇨! 절대 그런 거 아니에요!”
“수상한데.”
코니의 추궁에 페리도트가 진땀을 흘렸고 그것을 보면서 에메랄드가 큰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코니의 모습이 에메랄드의 모습과 너무 닮아보여서 장 바티스트 역시 웃음을 터뜨렸다. 부부는 닮는다더니.
넷은 각자 디저트를 골랐고 다행히 한 사람도 취향이 겹치지 않았다. 코니는 몰랐지만 에메랄드가 코니에게 양보했고, 장 바티스트가 눈치껏 골랐으며, 애초에 페리도트가 그들 모두의 취향을 반영해서 사왔기 때문에 티끌만한 실랑이라도 벌어질 일이 없었다.
달콤한 향미와 웃음소리, 조금 과감한 농담들이 오갔다. 식사가 슬슬 끝나가고 있었다. 코니는 두 손님이 불편해하지 않도록 최대한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주려고 했지만 장 바티스트와 페리도트는 에메랄드의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을 감안해서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에메랄드 역시 이런 모임은 오랜만이었기 때문에 친구들이 좀 더 오래 있어주기를 바랐다.
친구라니. 벌써 그런 단계까지 왔단 말인가. 하나는 이따금씩 인종차별적인 언행을 내뱉는 고용주고 다른 하나는 야심만만한 직장 후배인데?
지금은 화목하게 지낼지 몰라도 수틀리면 언제든 자기 목을 딸 수 있는 존재들이다. 자기 자신은 물론, 가족들의 목까지. 그런 생각이 얼핏 스쳐 지나가자 에메랄드가 일순 굳었지만 금방 다시 풀어졌다.
뭐……. 그런 쓸데없는 걱정을 가지고 거의 10년 가까이 살아오고 있다. 마치 언젠가 지구에 운석이 떨어질 거라는 건 알지만 그게 언제인지도 알 수 없고, 내일이 될지 10년 후가 될지, 몇 억년 후가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쯤 되면 진짜 운석이 떨어지긴 하나 하는 의심까지 들게 된다.
어쩌면 운이 좋아서 운석이 피해갈수도 있지. 닥치기 전엔 모르는 거다. 그때까지는 이 느슨한 경계 감시상태를 와인 몇 잔과 함께 유지하면 된다. 이따금씩 저녁식사도 같이 하고.
“즐거웠어.”
“몸조리 잘해. 다시 일터로 나오려면 말이야.”
“그래……. 복귀해야지.”
장 바티스트와 에메랄드는 인사를 주고받았다. 은퇴는 아직 머나먼 이야기인 것 같다. 장 바티스트와 페리도트는 독신남끼리 어디선가 2차를 즐길 얘기를 나누며 밤거리 저편으로 사라졌다. 문가에 서서 손님들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코니가 에메랄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곤 이제 때가 되었다는 듯이 물었다.
“그래서 언제 얘기해줄 거야?”
“뭘?”
“당신 직업.”
“코니…….”
에메랄드는 갑자기 잠에서 확 깨는 것 같았다. 올 것이 왔다. 언제까지고 숨길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갑작스러울 줄은 몰랐다. 이전에도 에메랄드가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지 집요한 물음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허울 좋은 핑계를 대고 빠져나갔는데 이제는 그럴 수도 없다. 허벅지가 박살나서 가족들이 한밤중에 응급실로 달려가게 만든 건 절대 어물쩍 넘어갈 수 없는 이야기다.
해명을 해야 했다. 진실을 밝히던가, 거짓말을 하던가.
“내가 당신 믿는 거 알지?”
“내가 당신 사랑하는 거 알잖아. 당신이랑 애들은 내 전부야. 내 목숨이라고.”
“내 말은, 내가 당신을 믿는다는 거야. 다미앙. 이 덩치만 커다란 겁쟁이야.”
코니는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꽤 오래전부터 그러지 않았을까. 하긴 침대를 같이 쓰는 사이인데다가 애도 둘이나 낳았는데 아내가 모르기를 바란 게 욕심이지 않았을까. 에메랄드가 감을 잡지 못하고 바보같이 가만히 있자 코니가 덧붙였다.
“내가 당신을 지지한다는 거야.”
“코니…….”
“나 걱정하게 하지 마. 애들한텐 당신이 필요해. 아빠가 필요하다고. 나한테도 당신이 필요해. 이번에는 많이 무서웠어. 진짜 많이 무서웠다고.”
“미안해.”
“나는 당신이 무슨 특수한 종류의 경찰이나 군인 같은 거라고 생각해. 어느 날 갑자기 당신이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 아침에 집을 나갔다가 그대로 영영 돌아오지 않는 거야. 집을 나서는 모습이 마지막일거라고 생각하면 도저히…….”
에메랄드는 심한 죄책감을 느꼈다. 이것이 그가 누리는 행복에 대한 대가, 아니 그것에 딸린 사소한 이자였다. 아내는 남편이 언젠가 시신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불안함을 안고 살아온 것이다. 코니는 그럴 필요가 없는데. 가족은 이 짐을 감당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무서웠다. 진실을 밝히면 이 모든 것이 모래성처럼 무너져내릴까봐. 에메랄드는 거짓말로 쌓아올린 이 행복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아내도, 아이들도, 가정의 온기도.
“지금은 말할 수 없어.”
“언젠가는 말해 줄 거지?”
에메랄드는 확답할 수 없었다. 거짓말을 해버리면 되는 일 아닌가. 그렇게 간단한 일 아닌가. 하지만 말을 하지 않았으면 않았지 아내에게는 미래를 담보 삼아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지금이야 어떻게든 넘긴다고 해도 진실을 고해야 하는 순간의 부담감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냥 지금 이대로 살면 안 될까. 코니가 조금만 양보해주면 안될까.
“당신은 좋은 사람이야, 다미앙. 그렇지 않으면 선택하지도 않았어. 난 나쁜 사람들을 많이 봐서 알아. 내가 만났던 사람들 중에는 당신이 제일 나아.”
코니가 걱정의 수렁 속으로 빠져드는 에메랄드를 현실에 붙잡아 매두었다. 아내는 난민 출신이다. 아내의 말에는 과장된 부분이 없을 것이다.
“난 당신을 믿고 있고 우린 당신이 필요해.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걱정시키지 말라는 거야.”
“코니, 만약에 내가…….”
“준비됐을 때 말해.”
그리고선 코니가 먼저 키스를 해왔다. 뜻하지 않게 유예기간을 얻은 에메랄드는 갑자기 강한 애정을 느껴서 아내의 어깨를 커다란 손으로 감싸 쥐었다. 인간 백정 짓으로 가족들을 먹여 살리는 쓰레기에겐 과분한 행복이었다. 이렇게 현명한 여자가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땐 어떤 반응을 보일까. 장 바티스트에겐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아니, 그에게 말을 해야 하나? 에메랄드는 이 일을 그만 둬야하나?
그만 둘 수 있긴 한가?
에메랄드의 숨결이 목덜미를 간지럽혔는지 품 안에서 코니가 키득키득 웃었다. 에메랄드는 다리를 다친 사람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강한 힘으로 아내를 끌어안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아내의 믿음에 부응할 수 있을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밤은 그가 아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줄 작정이었다.
잠시 후, 현관 불이 꺼지고 에메랄드의 바보 같은 웃음소리와 코니의 낄낄 웃는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