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권-Pas De Deux (11/24)

Pas De Deux

“조영우입니다.”

평일 한강 공원은 사람이 많지 않았다. 멀리 63빌딩의 금빛 표면이 보였고 유난히 화창한 푸른 하늘과 솜털 같은 흰 구름이 보였다. 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아직 쌀쌀해서 다리 밑 그늘 벤치에 앉아 있는 남자는 손에 쥔 캔 커피의 온기를 조금이라도 더 느끼려고 꾸욱 쥐었다.

강물은 결코 깨끗하다고 할 수 없지만 바다같이 넓게 펼쳐진 강물이 철썩이며 꾸준히 흘러가는 모습은 지나친 자극에 지친 정신에 휴식을 주었다.

남자가 업무적으로 겪는 스트레스란 건 목숨이 경각에 달린 극도의 긴장상태라던가, 사람을 죽여야 하는 고뇌라던가, 침대 밑이나 문 뒤에 숨어 있는데 언제 적에게 발각될지 모르는 초조함과 두려움 같은 것이었다.

휴가 때만큼은 사람과 부딪치지 않고 그저 혼자서만 있고 싶었다. 서울 시내에서 온전히 혼자만의 공간을 누리려면 들여야 하는 비용이 많았기 때문에 남자는 조금이라도 돈을 아끼려고 사람이 없는 시각에 사람이 없는 공원으로 나오곤 했다.

여의도 한강공원은 낮에도 사람이 많다. 직장인, 인근 주민들, 소문난 명소라서 멀리서 찾아오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외딴 곳의 벤치까지는 오지 않기 때문에 남자는 이따금씩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 말고는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고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도로에서 들려오는 자동차 소음은 걷어낼 수 없는 흠이라고 생각한다. 하긴 서울은 언제나 그랬으니까.

여기서 자전거를 타고 달리면 한강철교, 한강대교를 지나 동작대교까지 갈 수 있다. 길은 그 뒤로도 이어져 있어 마음만 먹으면 반포한강공원까지 갈 수 있지만 남자는 휴가 때만이라도 몸을 쉬게 하고 싶었기 때문에 상상으로만 자전거 여행을 즐겼다.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홀로 달리는 자전거 도로는 얼마나 홀가분할까. 군대에 있었을 땐 몇 살이라도 더 젊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지금보다 체력단련을 혹독하게 했기 때문인지 크게 고민 없이 자전거를 빌려서 페달을 밟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것도 다 지나간 시절의 이야기일 뿐이다. 남자는 전화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손 안의 캔 커피가 차츰차츰 식어 가는데도 마실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번에는 유럽 출장입니까?”

남자는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외국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또 다시 외국행이다. 그럴 바엔 아예 지역을 하나 정해주고 오랫동안 머물게 해줬으면 좋겠는데,

상부 지시에 대체로 고분고분 따르는 남자라도 이런 답답하고 소모적인 일처리 방식에는 진저리가 났다. 처음에는 돈이 필요해서 깊게 고민하지 않고 덥썩 문 일인데 이제는 언제 손을 뗄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다. 아마도 순직하기 전까지는 불가능하겠지.

남자는 사회초년생이 입을법한 단정한 남색 양복차림이라 모르는 사람이 우연히 그의 통화 내용을 듣게 되었다고 해도 회사에서 업무지시를 내리는 것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오가는 내용은 국가기밀에 준하는 것들이었다.

남자는 실제로 회사원이 맞았다. 그가 다니는 곳도 회사고. 명칭이 무슨 회사나 무슨 상사, 이런 식이니까 회사와 회사원이라는 관계가 맞기는 했다. 회사가 하는 일이 다른 기업들에 비해 조금 특수할 뿐이다.

그의 회사가 정부부처의 비밀 국가사업을 수행하기도 하고.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남자가 대답할 말은 “네.”였다. 그것 말곤 방법이 없다. 싫다고 하겠는가? 그는 화이트 요원이 아니다. 그가 죽어야만 안심할 사람들이 있다는 점에서, 그는 죽기 전엔 퇴직도 못한다.

쓸 만한 장기말이지만 그가 아는 것을 발설하는 순간 커다란 스캔들이 몇 개는 터질 수 있기 때문에 그는 일종의 시한폭탄 같은 존재였다. 다행히 그에게는 지켜야 할 가족이 있었기 때문에 회사는 그것을 목줄 삼아 그를 제어하고 있었다.

나쁘지 않은 관계였다. 그가 목숨을 내놓고 일하는 만큼 회사는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줬으니까. 그도 딱히 회사를 배반할 생각은 없었다. 어쨌든 간에 회사는 돈을 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돈이 필요하다.

그의 가족은 그가 무엇과 맞바꾸어 돈을 벌어오는지는 몰랐지만 가족이 진실을 몰라도 그는 별로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일은 적성에 맞고 꽤 할만하다. 자신처럼 보통 사람과 비교해 정신적으로 어딘가가 다른 사람이 하기엔 이만한 일도 없다.

죄책감이나, 양심이라던가, 그런 귀찮은 감각들이 그의 발목을 잡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인위적으로 인간성을 억압해야 하는 다른 요원들과는 다른 부분이었다. 재능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런 남자라도 한정된 인원으로 자꾸 무리한 업무량을 소화시키려고 하는 태도는 참아주기가 힘들다. 인원을 더 뽑던가. 그러라고 있는 세금이 아닌가. 그게 불가능하다면 적어도 일의 분배만이라도 균등하게 해줬으면 좋겠다.

일을 잘하는 사람이 있으면 여태 처리한 업무량을 생각해서 조금 쉬게 해줘야하는데 어째 일을 더 시킨다. 무능한 사람에겐 일을 못한다고 아예 처음부터 적게 준다.

이것을 깨달았을 즈음엔 남자는 이미 너무 멀리 왔다. 지금 와서는 일머리 없는 척 해봐야 괘씸하다는 소리만 들을 것이다. 진작 눈치가 있어야했다. 모든 일에 대체로 유능한 남자지만 눈치란 것은 그의 인생 숙원이라고 할 정도로 획득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가 남들보다 몇 배는 어려웠기 때문에 차라리 남들의 행동을 그대로 모방하면서 사회에 적응해왔다. 지금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언제나 스스로가 사회의 이방인 같다고 느끼고 있다.

전화 너머의 목소리가 남자의 불만을 감지했는지 권위적으로 추궁해왔다. 이럴 땐 어떻게 하더라. 그렇지. 웃어야 한다. 남자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지만 목소리만큼은 경쾌하게 웃으면서 상황을 무마시켰다.

“그럴 리가요. 처리하겠습니다.”

전화 너머의 목소리는 더 이상 추궁하지 않고 넘어갔다. 남자는 자신의 대응이 옳았다고 생각하며 작은 희열을 느꼈다. 방금 행동은 남들처럼 자연스러웠다.

이렇게 익숙해지는 것이겠지. 적어도 학창시절보다는 훨씬 여유가 생겼다. 그런 스스로에게 뿌듯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사람들은 그를 괴물 보듯이 봤고, 그의 부모도 그의 괴물 같은 모습을 걱정했으며, 그 자신도 남들과 다른 괴물이라고 생각했다. 딱히 유감은 없었다.

본성이 괴물인 걸 어쩌란 말인가. 그렇지만 그 본성 때문에 살아가면서 보통 사람보다 불이익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차츰 남들과 같아지려고 노력했다. 이해는 하지 못하더라도 모습만이라도 비슷하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를 졸업하고 군대에 갔다가 여기까지 오면서 참 많은 사람들을 지나쳐왔다. 그의 괴물같이 무감정한 본성 위에는 이미 수십 겹의 가면이 씌워져 있어 남자를 예전부터 알지 못했던 사람이라면 그를 꽤 매력적인 인물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남들이 예전만큼 자신을 끔찍하게 바라보지 않자 남자는 조금씩 사회에 자신이 있을 공간을 만들어가며 편안함을 느꼈다.

몇 년 만 더 지내보자. 진급하면 지부장 자리까지는 올라갈지 모른다. 그럼 여기저기 떠돌아다니지 않고 조금 더 편하게 지낼 수 있겠지.

어머니는 더 이상 돈을 보내지 말고 저축하라고 했지만 어차피 외줄타기 같은 인생이다. 죽으면 공중에 뜨는 돈이니까 살아있을 때 누군가에게 넘겨주기라도 해야 한다. 본가에 보내는 돈을 가족이 흥청망청 쓰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다. 아까워서 쓰지 못한다는데 미련한 짓이라고 생각한다.

쓰지 않으면 고스란히 썩힐 텐가? 남자가 돈을 보내지 않으면 생활고 때문에 어머니가 식당일이라도 나가야 할 판인데, 어머니가 일하는 것은 남자가 벌어오는 것만큼 많이 벌수도 없을 뿐더러 고생에 비해 오히려 터무니없이 적은 돈을 받게 될 것이다. 남자의 생각으로는 아무래도 비합리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그는 가족에게 계속 돈을 부쳤다.

사실 남자 본인을 위해 남겨놓는 돈이 별로 없기도 했다. 돈을 많이 받긴 했지만 어디다 써야할지 몰랐기 때문에 우두커니 들고 있다가 가족에게 주는 식이었다. 남자에겐 많은 것이 필요 없었다. 충분한 휴식, 고요함, 마음의 안정 정도.

남자는 술도 담배도 안 한다. 여자에게도 별로 흥미가 없다. 그렇다고 게이인 것은 아니다. 성욕이야 있지만 말 그대로 욕구 중 하나일 뿐, 큰 의미가 없다. 식욕이나 수면욕처럼 채워주면 그만인 욕구일 뿐이다.

내면에 광활한 사막을 지고 사는 남자라서 그 황량함 때문에 여태 친구 하나 없었다. 그가 큰돈을 들일 일이라고 해봐야 집이나 차를 구하는 것 정도일 텐데 집과 차는 회사에서 제공해준다. 그러니까 그에겐 돈이라는 게 모아두는 것 말고는 별 쓸데가 없는 것이다.

그나마 요새 들어서는 작은 꿈이 하나 생겼다. 은퇴를 할 수 있다면 그는 언젠가 시골에다가 집을 짓고 자연에서 살고 싶다. 강원도 쪽, 가능하다면 아무도 없이 숲과 산으로 둘러싸인 곳으로.

엽사가 되어 사냥을 하러 다니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멧돼지나 고라니를 사냥하고, 사냥개를 키우고, 동네에는 이따금씩만 내려갈 것이다. 낚시에 취미를 들이는 것도 괜찮겠지. 꿈은 꿈일 뿐이지만.

남자는 다 식은 캔 커피를 그대로 내버리기 곤란해 한 번에 들이키곤 빈 캔을 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랫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 보니 몸이 많이 차가워졌다. 임무 수행 전에 감기라도 걸리면 골치 아파진다.

남자는 혼자만의 시간을 끝내고 다시 저 지긋지긋한 인파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의 등 뒤에서 철썩이며 이따금씩 물비린내를 풍겨오는 한강은 다음에 다시 보자며 그를 조용히 배웅했다.


터키, 이스탄불.

사파이어는 아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기 시작하자 정신을 차렸다. 공원 벤치에 앉아 깜박 잠이 든 모양이다.

넉살 좋게도 그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몸을 둥글게 말고 잠들었던 고양이가 사파이어의 기척을 느꼈는지 보석 같은 초록빛 눈을 빤히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도망가지도 않는다. 인간을 무서워하는 기색이 없다.

고양이는 원한다면 쓰다듬어도 좋다는 눈빛을 지긋이 보냈으나 사파이어는 그것을 알아듣지 못하고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양이가 조금 섭섭한 듯, 약간은 무안한 듯이 배를 까뒤집고 그 자리에서 몇 번 뒹굴 거리다 일어났다.

내가 딱히 너의 손길을 바란 건 아니다. 나는 나른한 몸을 풀고 기지개를 켜려고 했을 뿐이다. 이런 태도였다.

사파이어는 서두르는 기색 없이 어슬렁어슬렁 떠나는 고양이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저 멀리 보이는 모스크의 지붕으로 시선을 돌렸다. 예배시간을 알리는 기도소리가 확성기를 타고 크게 울려 퍼진다. 이슬람권은 항상 이게 적응하기 힘들었다.

어차피 이 시간엔 누구를 방문해도 만나기가 힘들다. 사파이어는 천천히 기억을 떠올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최후의 빗장까지 벗겨진 기억은 사파이어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 술술 풀려나왔지만 순서가 뒤죽박죽이었고 더러 왜곡된 것도 있었으며 아직까지도 공란으로 남아있는 것들이 꽤 있었다. 기억이 주는 단서를 찾아서 직소퍼즐처럼 하나하나 그림을 맞춰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흐르는 물을 이유 없이 좋아했다는 것에서 강을 보면 그의 고향을 떠올리게 돼 안정감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했고, 거기서 한강을 떠올렸다. 한강을 기억했으면 서울에서 살았던 것을 기억하는 건 일도 아니다.

여기서 오랫동안 그를 고민하게 한 국적문제도 해결됐다. 그는 한국인이었다.

중국인이나 일본인, 태국이나 베트남이라던가, 대만, 홍콩, 마카오까지 이어지는 기억들과 신분들 역시 사실이었다. 물론 꾸민 신분이었지만 적어도 왜곡된 기억은 아니다. 그는 첩보원이었기 때문에.

참 많은 인생을 살아왔다. 1회용 배우자들과 함께 암살과 납치, 경호, 정보 교란 등을 벌이며.

이름이 조영우였다는 것도 기억난다. 물론 완전히 믿지는 않았다. 자신의 정체가 첩보원이었다는 걸 안 시점부터 모든 것을 한 번 더 의심했다. 정보공작원은 자기 자신에게도 거짓말을 한다. 벤체슬라스가 수십 개의 이름을 가면처럼 쓰고 다니듯이 사파이어 역시 그랬을 것이다.

설령 진짜 이름이었다고 해도 지금으로썬 진위를 가려낼 방법이 없다. 그러니까 지금 떠오른 것들은 진짜와 가짜를 구별해 낼 최초의 단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영우라는 이름과 연관된 것들은 명확히 기억났기 때문에 그것을 디딤돌 삼아 과거를 더듬어나가고 있었다.

첫 시작은 터키. 분명히 여기에 정보원이 있었다.

엠레 이을마즈라는 남자였다. 차량정비소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사파이어의 기억이 맞는다면 바이람파샤 구와 제이틴부르누 구 사이에 있었다. 그는 조영우라는 인물에 대해 사파이어 자신보다도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사파이어는 지금 당장 도움이 필요했다.

알료샤에게서 떠난다는 선택을 했어도 막상 섬 밖으로 나오는 것도 큰일이었다. 피난민에 섞여서 어떻게 잘 배에 올라탔지만 가까이 있는 다른 섬까지 가선 도저히 나올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계산은 항상 알료샤가 했고, 그마저도 알료샤의 인맥으로 무상 제공되는 것이 많았기 때문에 사파이어에겐 더더욱 돈이 필요 없었다. 그는 한 푼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첩보원 시절에 기초적인 소매치기 기술을 배워놔서 다행이었다. 사파이어는 타인의 지갑을 털어가면서 그리스 본토까지 도착했고, 아테네에 도착해서 테살로니키로 이동하고 거기서 버스를 타고 국경을 넘어 터키 땅을 밟았다.

푼돈을 훔치는 것으론 아무래도 한계가 있다. 거기다가 그리스에는 알료샤가 깔아둔 부하들이 아직 사파이어를 찾고 있을지도 몰랐다. 사파이어는 몇 몇 나라에 협력자가 있었다는 걸 기억해냈고 현재 상황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터키였다.

가까스로 이스탄불까지 도착했지만 사실 사파이어는 한계에 달한 상태였다.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누군가가 시비를 걸어서 싸움이 난다고 해도 이길 자신이 없었다. 제대로 도망이라도 갈 수 있으면 다행일까.

그러나 이스탄불 사람들은 그를 관광객이라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시퍼렇게 날이 선 눈빛 때문인지 굳이 시비를 걸진 않았다.

다행히 차량정비소는 사파이어가 희미하게 기억하던 바로 그 자리에 아직도 남아있었다. 기도시간이 끝난 모양인지 안에서 정비소 사장인 것 같은 남자가 나왔다.

남자는 처음에 사파이어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대로 지나치려고 했다. 그러다가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그 자리에 멈춰서 사파이어를 한 번 돌아보곤, 자신이 뭔가 잘못 본 건가 싶어서 스스로를 의심했다가 다시 사파이어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졌다. 동시에 입도 벌어졌다.

사파이어는 기억을 더듬으며 힙겹게 터키어로 인사했다.

“Merhaba.(안녕하세요.)”

남자는 할 말을 찾지 못해서 턱관절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다 가까스로 외쳤다.

“미스터 조!”

사파이어가 틀리지 않은 모양이다.


사파이어는 정비소 뒤편의 방으로 가서 기절하듯이 잤다. 여기는 안전지대라고 판단이 들자 긴장이 탁 풀린 것이다.

정비소 주인 엠레는 사파이어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아보였지만 딱 보기에도 사파이어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기에 자도록 내버려두었다. 그 사이 엠레는 밖에 나가서 케밥 두 개와 홍차를 사가지고 돌아왔다.

소파를 간이침대 삼아 곯아 떨어졌던 사파이어는 엠레의 발소리만 듣고도 짐승처럼 예민하게 정신을 차렸다. 엠레는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모습과 사람이 너무 바뀐 것 같다고 생각하며 사온 것을 사파이어에게 건네주었다.

사파이어는 크기가 제법 되는 케밥 두 개를 그 자리에서 먹어치우고 그 사이 적당히 식은 홍차도 입에 털어 넣었다. 강한 카페인이 직격하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조금 자고, 뭔가를 먹기도 하자 드디어 사람 꼴로 돌아온 사파이어에게 엠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신 죽었다고 들었는데……. 죽은 거 아니었어요?”

엠레는 한국어로 말하고 있었다. 수준급이었다. 억양은 터키 억양이 강하게 묻어나지만 유창성만큼은 나무랄 데가 없다.

오히려 언어까지 잊은 채 살아왔던 사파이어가 그보다도 못했다. 모국어임에도 불구하고. 무슨 뜻인지 알아듣기는 하겠으나 대답하는 데는 시간이 한참 걸렸다. 그나마도 한국어를 쓰지 않은지 오래되어 발음은 어눌했고 문법도 이상했다.

언어란 게 쉽게 잊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물며 모국어인데. 원래 수준을 회복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겠지. 안 나오는 한국어를 억지로 짜내려던 사파이어는 포기하고 그냥 여태 하던 대로 영어로 말했다.

“내가 얼마동안 사라져있었습니까?”

“한 5년 정도?”

“5년?”

5년. 내가 그 남자에게 인생을 저당 잡힌 시간 5년. 이름을 잊고, 기억을 잊고, 말도 잊은 채 살인도구로 살아온 시간 5년.

“무슨 일이 있었어요?”

사파이어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5년이라면 많은 것이 변했을 것이다. 일반인에게는 운 좋게 아무 일 없이 흘러갔을 수도 있지.

하지만 정보기관의 세계에서는? 운 좋게 이 남자가 호의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 속내는? 변절하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벤체슬라스가 터키까지 연줄이 닿아있을지 어떨지도 모른다. 신상 얘기는 피하는 게 좋다. 사파이어는 간결하게 용건을 말했다.

“차, 돈, 무기가 필요합니다. 자세한 것은 말할 수 없습니다.”

엠레는 사파이어가 영어로 밖에 말하지 않고, 한국어도 상당히 어눌해졌다는 사실에서 어렴풋이 뒷사정을 짐작해보았다.

“도와줄 수 있습니까?”

“도와줄 수 있냐구요?”

그제야 엠레는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것도 기억 못하네요?”

엠레가 던진 말에 사파이어가 긴장해서 움츠러들었다. 적인가, 아군인가? 이 남자를 기억해내고 이 곳 밖에 올 곳이 없었지만, 이 남자는 과연 내 편이 확실한가?

그런 사파이어의 눈초리를 보고 엠레의 얼굴이 뭐라 말할 수 없이 씁쓸해졌다. 그는 터키어로 뭐라 기도를 드리듯이 천장을 보며 중얼중얼하더니 눈물 고인 눈으로 사파이어를 다시 바라보았다.

“당신 덕분에 내 애가 살았어요. 내 아내도 살았어요. 지금 둘째가 있어요. 도와줄 수 있냐구요? 우리는 형제예요. 당신은 기억 안 나도 나는 죽을 때까지 못 잊어요. 당신이 죽은 줄 알았는데 돌아왔으니까 이제 은혜 갚을 수 있어요.”

이 남자는 사파이어가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를 파편으로만 거론하며 그에게 신뢰를 보여주고 있었다. 도와주겠단다. 아무런 대가 없이.

사파이어는 처음으로, 감정을 자각하고 난 뒤 정말 처음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내면에서 고동치는 감각을 따라 솔직하게 대답했다.

“고맙습니다.”

엠레가 눈가를 쓱쓱 닦았다. 눈물인가? 왜지? 사파이어가 대답을 잘못한 건가? 엠레는 사파이어가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를 꾹 억누르면서 일단 집으로 안내하겠다고 했다.

사파이어는 단 한 번도 이 남자에게 고맙다고 말한 적이 없다는 걸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 한 마디가 이 남자에게 얼마나 큰 의미인지도.


사파이어는 조영우가 했던 일들에 대해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감사인사를 받았다.

엠레의 집에는 어깨에 큰 흉터가 나 있는 남자아이와 그 남자아이의 손을 꼭 쥐고 커다란 눈망울을 깜박이며 신기하게 이방인을 쳐다보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엠레의 아내는 엠레가 아무런 기별 없이 손님을 데려왔다는 사실에 약간 화가 난 것 같았지만 사파이어의 얼굴을 알아본 순간 쏟아지려던 잔소리가 고스란히 쏙 들어가고 말았다.

엠레가 말리지 않았으면 아내는 같은 동네에 사는 친척들과 친구들을 몽땅 불러들였을 것이다.

엠레의 아내 역시 남편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기 때문에 더 자세히 캐묻지는 않았다. 그리고 조영우라는 이름으로 기억했던 남자가 지금은 완전히 사람이 바뀌어버려서 자신도 못 알아보고 과거에 대해 떠올리지도 못하자 그를 그냥 편하게 쉬도록 내버려두었다.

그 대신 아내는 묵묵히 음식을 준비했다. 조영우에게 목숨을 빚져서 이 날 이때까지 살아온 인생이 고스란히 녹아든 집 밥이었다. 이것이 엠레의 아내가 표현할 수 있는 진솔한 감사 인사였다.

남자아이는 영어도 한국어도 할 줄 몰랐기에 터키어로 사파이어에게 계속 말을 걸다가 그가 반응이 없자 자꾸만 자신의 어깨에 난 흉터를 보여주었다. 여자아이는 말 없는 이방인이 무서운 모양인지 오빠의 등 뒤에 숨어서 고개만 빠끔히 내밀었다.

사파이어는 그날 밤을 거기서 묵었다. 잘 먹고, 잘 쉬고, 다음 날 새벽에 골목을 울리는 시끄러운 아잔 소리와 함께 깨어났다.

사파이어가 죽은 듯이 자는 동안 엠레는 백방으로 돌아다니며 사파이어가 요구한 것들을 마련했다.

차는 자신의 정비소에 있는 것을 손보았다. 손님이 죽은 건지 감옥에 들어간 건지 오랫동안 안 찾아서 자신이 차를 여기다 맡겨뒀다는 것조차 잊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인 차였다. 나중에 손님이 돌아와서 소유권을 주장하면 돈으로 보상해 줄 생각이었다.

사파이어의 여비를 마련해주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문제는 무기였다. 조영우가 사라지고 난 후로 사실상 정보원 일도 그만두었기 때문에 옛 친구들과 다시 연락하는 게 쉽지는 않았다. 그래도 결국엔 구해냈다. 콜트 거버먼트 두 자루. 45구경 탄환 두 박스. 칼집이 달린 군용 나이프 한 자루.

그리고 사파이어가 부탁하지는 않았지만 위조 신분증도 구해줬다. 하루 만에 만들 수 있는 게 아닌데 여기서는 엠레가 무리를 좀 했다. 하지만 조영우와 몇 번이고 같이 일을 했으니 이다음에 뭐가 필요하겠다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었다.

엠레는 사파이어에게 자신이 구한 것들을 건네주었다. 며칠만 더 묵으면 안 되겠냐는 말에 사파이어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엠레는 더 묻지 않았다.

남자들이 이른 아침부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에 깬 엠레의 아내는 두 사람을 보고 사파이어가 곧 떠나겠다 짐작했다. 엠레의 아내는 정보원도, 그 비슷한 일도 하지 않지만 자신의 방식대로 사파이어의 여정을 위해 넉넉한 도시락을 준비해주었다.

엠레의 아내는 사파이어가 남편과 함께 골목 저 편으로 사라질 때까지 문간에 서서 그 등 뒤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든 다시 오시라고. 다음에 오시면 제대로 대접하겠다고.

죽지 말라는 인사였다.

엠레는 수리가 끝난 자동차를 사파이어에게 내주면서 국경을 어떻게 통과해야할지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갈 거예요?”

“불가리아. 그리고 또 세르비아로…….”

“이 다음에 또 올 거예요?”

엠레는 죽음이라는 단어는 입에 담지 않고 완곡하게 돌려 물었다. 사파이어도 그 정도 비유는 알아들었는지 가만히 생각해보다가 대답했다.

“또 만날 겁니다.”

그것으로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엠레는 고개를 끄덕이며 사파이어를 보내주었다. 사파이어는 시동을 걸고 친구의 정비소를 떠났다. 엠레는 자동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 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었다.

형제여. 어딜 가서 무엇을 하든 신의 가호가 함께하길!


벤체슬라스는 런던을 떠나지 않았다.

영국을 떠나 다른 곳에 기반을 세울만한 자원이 없었고 딱히 갈 곳도 없었다. 그는 사파이어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는 거리에서 꾸역꾸역 버티며 사업을 재건해나갔다.

그는 라피스 라줄리라는 이름을 다시 사용하진 않았다. 그저 벤체슬라스라는 이름으로 온갖 허드렛일까지 따내며 혼자서 일했다. 다른 세공사들이 슬슬 그를 밀어내며 무시하기 시작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보석은 언젠가 다시 구할 생각이었다. 지금 당장은 마음에 드는 원석이 없기 때문에 급하게 고르지 않고 내버려두는 것뿐이다. 어떤 후보를 봐도 사파이어와 비교가 됐다. 살면서 그런 값진 보석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세공사라는 타이틀이 없는 시정잡배 프리랜서로 굴러 떨어지기 싫었지만 어차피 진흙탕에서 출발한 인생이다.

청부업 시장에서 몸값을 올려가던 사파이어를 상실한 일로 벤체슬라스가 낙담하는 꼴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그는 얄미울 정도로 멀쩡했다. 사파이어의 사망을 확인한 다음 날부터 벤체슬라스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계속 일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한번쯤 업계 탑의 자리에 있던 사람이니 과연 사고방식이 다르긴 다르구나 하는 소리가 오갔다.

놀랍게도 다시 기반이 잡혀가고 있었다. 처음 얼마간 들려오던 사파이어의 환청도 이제는 들리지 않게 되어 벤체슬라스는 슬슬 그에 대한 감정을 정리해나갔다.

벤체슬라스는 현역일 때도 훌륭한 보석이었기 때문에 그의 일처리 솜씨에 대해서는 이렇다 저렇다 평가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의 배타적이고 한없이 이기적인 성격 때문에 적이 많을 뿐이었다.

그거야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는 동업자들 사이에서의 얘기고 벤체슬라스와 사업적으로 관계를 맺는 정보상이나 시체처리업자, 기타 서비스업은 그를 나쁘지 않은 거래상대로 봤다.

그는 깐깐하게 요구하는 만큼 자신이 내야 할 금액에 대해서도 군말 없이 깔끔하게 지불했다. 더러운 일을 하다보면 자격 미만의 어중이떠중이가 푼돈을 깎으려고 들거나 돈을 내지 않으려고 수를 쓰는 등 자잘하게 싸울 일이 생기는데 벤체슬라스는 그런 게 없었다. 인격적으로 어떻든 간에 손 안에 들어오는 돈이 확실하니까 이만큼 신용 있는 거래상대도 없다.

처음엔 그를 대륙 것이라고 놀려대던 런던의 정보상도 이제는 꽤나 친해져서 그에게 자잘한 정보를 서비스로 주고는 했다. 물론 벤체슬라스도 이 바닥이 돌아가는 생리를 알기 때문에 무작정 받아먹기만 하지는 않았고 자신이 제공할 수 있는 서비스를 무상으로 주기도 했다. 그런 거래관계가 맺어져 있었다.

“자네, 얘기 들었나?”

임무완수 후 보상금을 받고 돌아가려는 벤체슬라스에게 정보상이 운을 띄웠다.

“그리스에서 소동이 있었던 것 같은데. 워낙 큰일이라 영국까지 소식이 들려오더군.”

“그렇습니까?”

“알렉산드라이트 얘기야.”

알료샤에 대한 언급이 나오자 벤체슬라스가 인상부터 찌푸렸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관심 없습니다.”

“그런가? 자네가 궁금해 할 줄 알았는데.”

“그의 부고라면 듣고 싶군요.”

“자네한테는 유감이지만 안 죽었네. 그의 세력 안에서 다툼이 있었던 모양이야. 쿠데타 같은 모양새였다더군.”

“쿠데타라니, 어울리지 않는 비유군요. 그는 왕도 황제도 아닙니다.”

“그래. 하지만 자신의 세력권 안에선 대장이지.”

“그래봐야 협회에서 제재 받고 지금은 힘이 크게 꺾였을 텐데요.”

“자네보다는 덜하지.”

벤체슬라스가 발끈하자 정보상이 바로 화제를 돌렸다.

“내가 말하려는 건 이게 아냐. 알렉산드라이트는 뭐랄까……. 특이하지 않은가. 스스로 세공사를 자처하면서 보석이라고도 주장하는. 그래서 다른 세공사처럼 그에게 예속된 보석이 없잖은가. 부하들은 많아도 말이야.”

“예, 정말, 궤변이죠.”

“그에게 보석이 생긴 것 같네. 아니, 있었던 것 같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리스에서 웬 동양인이랑 같이 다녔다더군. 하도 붙어 다녀서 못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던데.”

벤체슬라스는 갑자기 초조해졌다. 정보상의 다음 말은 벤체슬라스를 잠깐 얼어붙게 만들었다.

“알렉산드라이트가 그 남자를 사파이어라고 불렀다던데. 자네가 데리고 있던 중국인도 보석명이 사파이어 아니었던가?”

“그는 죽었습니다.”

“그렇겠지. 알고 있네.”

“알렉세이, 알렉산드라이트는 그래서 그 뒤에 그 남자를 어떻게 했는지?”

“나도 건너들은 이야기라서 말이야. 그 남자는 알료샤를 떠난 것 같네. 신파극이 따로 없었다지.”

“그렇군요.”

“더 자세한 정보에 대해 관심 있나?”

그렇지. 이게 목적이었군. 벤체슬라스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능숙하시군요.”

“자네도 알다시피.”

“방금 말씀하신 그 남자에 대해 궁금하기는 합니다. 얼굴이라도 알 수 있으면 좋겠군요. 알렉세이를 떠났다면 어디로 갔는지, 그것도 궁금합니다.”

“얼마를 내겠는가?”

“얼마를 원하십니까?”

정보상은 가볍지 않은 가격을 불렀고 벤체슬라스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벤체슬라스의 지금 재정 상태로는 쉽게 쓸 수 있는 돈이 아니었지만 그는 여지를 두고 싶지 않았다.

과거의 것은 과거에 남겨둬야 한다. 단단한 기반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광기에 잠식되는 건 한순간이다. 그는 사파이어의 망령을 지워낸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정보상은 선불을 요구했고 벤체슬라스는 거북해하는 기색도 없이 그 큰돈을 덥썩 넘겼다. 정보상은 여태까지 벤체슬라스의 신의를 저버린 적이 없으니까. 아니, 정보를 다루는 입장인 만큼 그에게 있어서도 신용이라는 가치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돈을 받은 이상 그는 제대로 된 정보를 알려줄 것이다.

집으로 돌아온 벤체슬라스는 지친 듯이 의자에 앉아 몸을 늘어뜨렸다.

그가 살아있다…….

살아있을지도 모른다.


사파이어는 불가리아와 세르비아를 거쳐 헝가리로 넘어갔다.

부다페스트. 여기에도 정보원이 있었다. 정보원에게서 벤체슬라스에 대한 정보를 사야했다. 벤체슬라스가 아직까지 사파이어의 물건을 가지고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어디 쓰레기장에 내버렸다고 해도 찾을 방도가 없고 지금으로썬 벤체슬라스와의 연결고리를 찾는 게 최선이었다.

그 물건이 그렇게 소중한가 하고 묻는다면, 논리적인 근거를 댈 수는 없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정말 중요한 물건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꼭 되찾아야하는 물건. 아마도 그 물건이 기억의 공백을 채워주겠지.

벤체슬라스에게 들키지 않고 물건만 훔쳐올 수 있다면 좋겠지만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다. 어떻게든 그와 다시 마주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에 대한 충분한 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무기가 부족한 것 보다는 남아도는 게 낫고, 어쨌든 총알이라도 한 발 남아있으면 그를 죽이는데 실패하더라도 적어도 자살은 할 수 있으니까.

그의 지배하로는 다시는 돌아가지 않는다. 절대로 다시는 그 속박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럴 바엔 차라리 죽음을 택할 뿐. 그도 그것을 잘 알고 있을 터.

그와 다시 얼굴을 마주한 순간,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어찌됐든 무기상을 찾아봐야한다. 엠레가 준 총 두 자루는 임시방편은 될지 몰라도 주력 무기로는 쓰기 힘들다. 지금 가지고 있는 돈으로 얼마나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헝가리 정보원의 이름은 코바치 졸탄으로, 유럽 다른 나라와 달리 동양식으로 성씨가 앞에 오고 이름이 뒤에 오는 특이성 때문에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졸탄은 담배를 피웠기 때문에 그를 만날 때마다 퀘퀘하게 풍겨오던 잔향으로 그를 기억하고 있다.

사파이어는 졸탄이 살던 아파트로 향했다. 터키 정보원이 말한 대로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으면 이미 다른 곳에 살고 있을지도 모르고, 아예 죽었을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미지수였다. 가지고 있는 단서가 기억이라는 불확실한 정보밖에 없으니 여기서부터 수색하는 수밖에.

졸탄은 아직 거기에 살고 있었다. 아파트 현관에서 사파이어와 마주친 졸탄은 사파이어가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 담배를 입에 물며 막 불을 붙이려던 참이었다. 그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동양인이 짜증스러운지 흘끗 노려봤다가 놀라서 입에 문 담배를 떨어뜨렸다.

“날 기억하나?”

사파이어가 묻자 갑자기 졸탄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사파이어는 동물적인 반응속도로 그의 뒤를 쫓았다. 누구인지 알아보자마자 도망가다니, 분명히 뭔가를 숨기고 있다.

졸탄은 훈련받은 요원이 아니고 정보를 물어다주는 거래상에 불과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몇 백 미터 가지 못해서 사파이어의 손아귀에 잡혔다. 어차피 담배를 달고 살았기 때문에 그 폐활량으로는 도망친다고 해봐야 별 소용없었을 것이다.

“영우, 오랜만이야. 살아있었네.”

사파이어의 못박인 손에 멱살이 잡힌 졸탄이 실실 웃으며 초조하게 인사했다. 그는 터키 정보원보다 훨씬 더 한국어를 잘했다. 아마 그만큼 한국인들과 거래를 많이 했겠지.

사파이어가 아무런 대꾸 없이 졸탄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자 졸탄이 그 시선과 마주하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왜 그렇게 불안해하지?”

“불안하다니, 아니야 아니야.”

“왜 나를 보자마자 도망갔나?”

“아니야 아니야. 급하게 할 일이 생각나서 그랬어. 이것 좀 놔줘.”

“거짓말 하지 마.”

사파이어는 절박한 상대의 궁핍한 거짓말을 알아챌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가 벤체슬라스의 꼭두각시로 킬러 생활을 하기 이전부터 직업적으로 가지고 있던 능력이다.

“코바치 졸탄. 당신과는 거래를 많이 했지. 나를 보고 피할 일이 없을 텐데? 5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

“그건 내가 묻고 싶은데. 당신 죽은 거 아니었어? 5년 동안 어디서 뭘 했던 거야?”

“내가 질문했다.”

사파이어의 목소리가 더 낮아지자 그만큼 졸탄의 목덜미도 움츠러들었다.

“당신도 알거 아냐. 난 아직도 당신네 요원들이랑 거래하고 있다고……. 왜 이렇게 사람을 몰아세우는 거야? 이것 좀 놓으라니까!”

“거짓말을 하고 있군.”

뭘 숨기는 거지? 이 남자가 뭔가를 숨기는 건 분명하지만 결론을 이끌어낼 근거가 부족하다. 그래서 사파이어는 조금 강압적인 방법을 쓰기로 했다. 사파이어가 칼집에서 군용 나이프를 꺼내 들이대자 졸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잘못했어! 잘못했어! 용서해줘! 미안해!”

“뭘 잘못했다는 거지?”

“그래! 내가 팔았어! 당신을 배신하려고 한 게 아냐! 나도 협박당한거야! 안 그랬으면 내가 죽었을 거야! 미안해!”

사파이어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뭘 팔았다는 거야?”

졸탄은 그제야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남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이제 와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잡아뗄 수도 없는 일. 졸탄은 이실직고 했다.

“안드레이 플로레스쿠가 당신 정보를 사러 왔어. 안 넘겨줬으면 내가 죽었을 거라고. 당신이 임무를 실패했던 건 내 잘못이 아냐! 당신네들 파벌 싸움을 나한테까지 책임전가 시키지는 말라고!”

“한 번에 하나씩만 말해. 안드레이 플로레스쿠는 누구지? 임무는 뭐였고? 파벌싸움이란 건 무슨 말이지?”

졸탄이 입을 다물려고 들자 사파이어가 그의 뺨에 살짝 흠집을 내주었다. 날카로운 통증과 함께 뺨을 타고 피가 흘러내리자 졸탄이 허겁지겁 늘어놓았다.

“파벌 싸움 얘기는 진짜 아무것도 몰라! 그것도 벌써 5년 전 이야기라고! 임무는, 임무는 그러니까……. 당신 지금은 첩보원 아냐? 어디서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질문은 내가한다. 이다음엔 이빨이 날아간다.”

“아, 아, 알았어. 말할게. 말할게! 당신이 마지막 임무에서 실패했다는 소릴 들었어…….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건 정말로 내 잘못이 아냐. 당신 동료라던가, 상사라든지,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잖아. 누군가가 당신을 제거하려고 했던 거라고. 당신네 조직 사정까지는 몰라. 당신 윗선에서 일어난 싸움이 당신한테까지 내려온 걸 수도 있지. 흔히 있는 일이잖아. 작전이 틀어져서 모든 게 물거품이 되면 제일 말단에 있는 사람이 독약을 먹고 꼬리자르기가 되는 거지.”

졸탄이 늘어놓는 말들을 종합해 추리해보자면, 사파이어는 스파이로서 어떤 미션을 수행 중이었던 것 같다.

졸탄이 계속 마지막 임무라고 언급하는 걸 보면 그 이후에 조영우가 죽었다는 소리겠고. 조영우의 임무 실패는 의도된 것이었다는 거다. 아마도 조영우의 상사나 그 윗선의 파벌 싸움, 이중첩자나 삼중첩자라던지, 뭐 그런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겠지.

첩보기관 내부에도 밥그릇을 놓고 치열한 싸움이 일어난다. 같은 기관 내에서의 싸움이니까 지켜야할 선이라는 게 있지만 그것도 표면적인 이야기다.

요컨대 무엇을 하든 들키지 않으면 그만이다. 라이벌의 세력을 꺾어놓겠다고 같은 기관 직원인 말단 요원에게 덤터기를 씌워 죽게 만든다던가…….

진실은 알 수 없는 일이다. 추측만이 있을 뿐.

“안드레이 플로레스쿠는 누구지?”

“그가 당신의 현지 서포터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냐?”

“당신은 기억력이 참 나쁘군.”

사파이어가 얼굴을 살짝 그어주자 졸탄이 비명을 질렀다.

“내가 질문한다. 당신은 대답한다.”

“아, 알았어! 알았어!”

“다시 묻는다. 안드레이 플로레스쿠가 누구였나?”

“가이드! 당신 가이드였을 거야! 나도 다 아는 건 아니라고! 젠장, 그걸 알고 있으면 내가 지금까지 이 바닥에서 구르고 있겠어? 정보기관 얘기를 어떻게 다 알아! 당신이 마지막 임무에 들어가기 전에 안드레이가 날 찾아왔었어. 당신에 대한 정보를 사려고. 나라고 다 알려준 건 아냐. 그가 돈을 제시했지. 이것만큼은 봐달라고. 나도 먹고 살아야할 거 아냐.”

“그래서 나에 대한 정보를 팔았다.”

“기본적인 거. 아주 기본적인 것만!”

“그것뿐이 아닐 텐데.”

“그렇지! 그리고 또 있어! 당신이 사라진 후에, 그러니까……. 죽었다는 소식이 들린 뒤에 또 한 번 찾아왔어. 당신에 대해 더 자세한 정보를 내놓으라더군. 내가 어떻게 알겠냐고? 이번엔 총을 겨누더라고. 목숨이 달린 일이잖아. 어쩔 수 없었다고. 내가 아는 걸 털어놓는 수밖에 없었지.”

졸탄은 아까부터 계속 “당신도 알고 있는 이야기겠지만.”하는 식으로 전제를 깔아놓으며 대화를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파이어는 사실 그가 말하는 것의 절반은 이해하지 못했다.

요약하자면 사파이어는 누군가의 모함에 의해 죽음을 택하게 됐고, 그 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살아남게 됐고, 그리고 안드레이 플로레스쿠라는 남자가 자신에 대한 정보를 캐묻고 있었다는 거다.

별로 도움 되지 않는 이야기들이다. 자신을 죽인 모함에 대해서는 언젠가는 캐내야 할 비밀이고 수수께끼긴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의 직접적인 과거를 찾는 게 더 중요하다.

“그래서 당신은 날 배반했고 내 얼굴을 보자마자 도망간 건가?”

“당신이 날 죽이려고 하는 줄 알았어…….”

“난 정보를 사러 왔어.”

졸탄의 얼빠진 얼굴이 시시각각 변했다. 지레 짐작하고 도망가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술술 불지 않아도 됐을 일이다.

게다가 조영우라는 남자는 지난 5년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몰라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눈치다. 눈매는 예전보다 더 무서워졌고 뭐라고 할까, 사람이라기보다 잘 벼린 칼날 같은 느낌이 든다. 보통사람이랑 정신구조가 어딘가 다른 것 같은 위화감은 예전에도 있었지만 지금은 섬뜩한 느낌마저 든다.

“그럼……. 죽이지 않을 거지? 죽이지 마. 살려줘. 솔직하게 다 말했잖아…….”

“묻는 말에 대답하면.”

“그, 그래. 다 말할게. 뭐가 궁금한데?”

“세공사 벤체슬라스에 대한 정보를 알고 싶어.”

졸탄이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사파이어가 고개를 갸웃하자 그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방금 말했잖아.”

“뭐가?”

“그 사람은 이름을 계속 바꾸니까 당신이 헷갈리는 것도 이해는 가지만……. 보석세공인 벤체슬라스라면 토마스 크로포드 아냐? 그 사람이라고. 안드레이 플로레스쿠.”


런던의 정보상은 벤체슬라스가 지불한 만큼의 정보를 알려주었다. 벤체슬라스가 알료샤에 대한 정보까지는 관심이 없다고 말해두었지만 그와 함께 다니던 동양인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알료샤 본인에 대한 것이 빠질 수는 없었기 때문에 굳이 알려주었다.

알료샤는 그 동양인 남자와 함께 캅카스 산맥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 있었던 것 같다.

유럽에 있던 그의 부하들은 대장이 몇 달 동안 자리를 비우자 그 사이에 배반하거나 갈라지기 시작했고, 그 중에 알료샤에게 가장 반감을 보인 것이 올렉이라는 인물이다. 이 자는 세공사도 보석도 아니고, 청부살인업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사람이다. 갱단 소속이다.

알료샤가 동양인 남자와 함께 그리스로 거처를 옮겼을 때 올렉은 암살자를 고용했다. 처음에는 세공사들에게 연락을 취했지만, 돈이 걸린 일이라면 동료 세공사의 목을 따는 동업자들도 알료샤의 이름을 듣자마자 바로 거절했다. 그만큼의 위험성을 지기 싫다는 이유였다.

올렉은 바르셀로나 귀금속 장인회와 연락해 그의 의뢰를 맡겠다는 초보 세공사와 계약하여 값싼 보석 두 개를 구입했고, 시칠리아의 마피아에게서 소개를 받아 프리랜서 히트맨을 고용했다. 그렇게 알료샤 토벌단을 꾸렸으나 습격은 실패로 끝나고.

암살자들이 표적이 맞는지 확인하려고 둘의 사진을 찍어 올렉에게 보낸 것이 있다. 정보상은 그 사진도 입수해 벤체슬라스에게 넘겨주었다.

섬 전체를 태운 방화사건을 기점으로 동양인 남자는 알료샤와 작별하게 되었고 그 이후의 행보는 아테네에서 테살로니키, 거기서 터키 땅으로, 이스탄불에 갔다가……. 이스탄불에서 차를 구했고 그걸로 불가리아로 넘어갔다가 곧바로 세르비아로, 그리고 얼마 전에 헝가리 국경을 넘었다. 지금은 부다페스트 근처라고 한다.

지도를 놓고 그의 이동방향을 보자면 명백하게……. 이쪽으로 오고 있다.

벤체슬라스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정보상이 건네준 사진에는 세상 누구보다도 행복해 보이는 알료샤의 얼굴이 찍혀 있었고 그의 옆에는 벤체슬라스가 한참이나 환청을 들었던 남자의 그리운 얼굴이 있었다. 표정 변화가 없는 무뚝뚝함도 그대로 간직한 채.

그다. 그가 살아있다.

그리고 이제는 나를 죽이러 오겠지. 그는 어디까지 기억해낸 것일까. 씨를 뿌렸으면 언젠가 결실을 맺고 그것을 수확할 날이 온다. 내가 심혈을 기울여 키워낸 최고의 살인기계가 나에게 복수하러 오고 있다.

그에게 들인 노력과 시간과 집착이……. 결말을 맺는다. 나의 죽음이라는 이름으로.

벤체슬라스는 사진을 내려놓고 조용히 서랍을 열었다. 낡아빠진 공단으로 싼 작은 케이스가 들어있었다. 벤체슬라스는 그 케이스를 열고 안에 있는 것을 잠시간 들여다보았다.

만에 하나,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 그가 돌아오겠다고 한다면 그를 다시 받아줄 생각은 있다.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건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만.

사파이어는 분명히 이것을 노리고 올 것이다. 상식적으로 자신의 목숨을 쥐고 억압하던 학대자에게 다시 돌아오려 하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 무언가 강한 목적이 있기 때문에 그 두려움과 위험성을 감수하고서라도 오는 것 뿐.

이 물건이 그에게 무엇보다도 소중한 물건이라는 건 알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죽음의 순간에 행여나 놓칠까 그렇게 꽉 쥐고 있진 않았을 테니까.

그래. 결국 이것 때문에라도 넌 나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는 거군.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를 죽여야 했다. 깨지기 직전까지의 정신은 다뤄봤지만 한 번 깨진 정신을 다시 이어붙이는 건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사파이어는 노예의 자리로 다시 돌아가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만든 최고의 작품을 결국엔 내 손으로 깨부숴야 하는 날이 왔다. 어떻게 보자면 이것이 옳은 결말이었다. 템즈 강에서의 어이없는 가짜 죽음과 비교하자면.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의 유품을 가만히 쥐었다가 다시 케이스에 넣고는 서랍에 집어넣지 않고 품속에 집어넣었다. 이것이 있으면 그는 반드시 벤체슬라스에게로 올 것이다. 그런 부적 같은 물건이었다.

벤체슬라스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 번 하곤, 전화기를 들어 여기저기 연락을 하기 시작했다.


세공사 벤체슬라스가 전 재산을 털어 수배령을 내렸다.

암살목표가 하나뿐인 임무로는 이례적인 금액이었기 때문에 런던은 물론이고 유럽의 도시들도 술렁거렸다. 한탕 벌어야 하는 세공사들에게는 큰 기회가 생긴 셈이고, 어느 정도 자리를 차지한 기성인들은 또 다시 파란이 몰려올 것을 직감했는지 몸을 사렸다.

평생 돈 밖에 모르고 돈만 모으며 살아온 수전노가 전 재산을 털었다는 건 세공사 협회에서도 관심을 가질만한 내용이었다.

그들은 벤체슬라스의 잔고를 모두 털어갔음에도 그가 아직까지 저만큼이나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에 놀랐다. 물론 그들은 그의 부동산은 건드리지 않았지만, 벤체슬라스가 내건 돈은 부동산만 처분해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금액이었다.

그가 몰래 가지고 있던 금괴나 기타 현물 자산을 몽땅 판 것이겠지. 게다가 영국으로 넘어가서 재산 수준을 슬슬 다시 회복할 조짐도 보이고 있었다. 영국에서 얻은 것들도 모두 내걸었다.

사람들이 무엇보다도 놀란 건 그가 돈을 포기했다는 점이다. 돈이야말로 그의 최우선 가치고 최고의 선이었는데 저것을 전부 내건다는 것은 자신의 인생과 목숨을 내건다는 것과 똑같은 말이었다.

안될 거 없지. 이 바닥의 규칙은 힘과 돈이다. 왕이 돈을 주고 군대를 모으기로 했으니 각지에서 용병들이 몰려들었다. 벤체슬라스는 돈으로 엮인 충성 속에서도 홀로 고독함을 느끼며 지시를 내렸다.

사파이어를 죽여라.


사파이어가 아직 조영우였을 때부터 벤체슬라스는 그의 인생에 관여하고 있었다. 안드레이 플로레스쿠라는 이름으로. 그는 조영우의 실패와 얼마나 관계가 있는 것일까. 혹시 그일까? 조영우가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게 만든 범인이?

가능할까? 일개 세공사에 불과한 남자가 한 국가의 첩보원을 상대로 그런 짓을 벌인다는 게?

사파이어에게는 많은 사람들이 엮여 있었을 것이다.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기거나 계획이 틀어지면 당장 상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보려고 조사할 텐데, 벤체슬라스가 한국의 정보기관을 상대로 그런 짓을 벌였을 거라고? 글쎄.

게다가 중요한 것은 동기다. 대체 왜? 벤체슬라스가 정말로 조영우를 낭떠러지로 밀어 넣으려고 했다면 대체 이유가 뭐란 말인가? 사파이어가 기억하지 못하는 원한이라도 있단 말인가? 아니면 또 다른 이해관계 때문에?

“여, 영우. 이제 그만 좀 놔주지 그래…….”

마네킹처럼 움직임이 굳어버린 사파이어가 무서웠는지 졸탄이 살살 웃으며 자신의 멱살을 쥔 사파이어의 손가락을 떼어내려고 했다. 사파이어는 그런 졸탄의 멱살을 더욱 단단히 쥐면서 속삭였다.

“더 내놔. 정보.”

“모, 몰라. 그 남자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게 없어.”

“거짓말하지 마.”

“거짓말 아냐! 진짜라고! 내가 지금 거짓말 하게 생겼어? 그래, 체코에 가봐. 나는 몰라도 다른 사람은 알고 있을 거야. 이름이랑 주소 알려줄게!”

졸탄은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것을 거짓이라고 검증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당장은 그를 믿고, 그가 거짓말을 한 게 확인이 되면 다시 돌아와서 대가를 치르게 하면 그만이다.

졸탄은 사파이어가 계산을 끝내는 것을 불안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그럼……. 난 이제 가도 되는 거지?”

“더 있어.”

“또?”

“돈 내놔. 무기도.”

“이거 완전히 강도짓이잖아!”

“죽이고 가져가는 수도 있지. 어차피 한 번은 날 배신했으니까.”

사파이어가 담담하게 말하자 졸탄이 저항을 그만뒀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배신자가 이러쿵저러쿵 불만을 늘어놓을 처지는 아닌 것 같다. 특히 눈앞에 칼이 있는 상태에서는.

졸탄은 사파이어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돈을 넘겨주었다. 지갑 째 넘겨주는 것만으로는 사파이어가 납득하지 않았기 때문에 은행까지 끌려가서 잔고를 탈탈 털어야했다. 졸탄이 울먹이면서 “다 가져가면 난 당장 뭐 먹고 살라고?”하고 항변했지만 사파이어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내 목숨 값으로 이정도면 싼 거야. 당신 목숨으로 계산하고 싶지 않으면 입 다물어.”

물론 목숨보다 값비싼 것은 없기 때문에 졸탄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사파이어가 요구한 것 중에 무기만큼은 졸탄을 협박해도 뜯어낼 수 없었기 때문에, 사파이어는 돈을 들고 무기상을 찾아갔다. 무기상은 처음 보는 동양인과 거래할 마음이 없었지만 그 동양인이 데리고 온 코바치 졸탄이 초조한 얼굴로 거래를 해달라고 부탁하자 들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사파이어는 무기상에게서 쿠크리 한 자루와 스위스제 SIG MCX 카빈 소총 한 자루, 마찬가지로 스위스제 유탄발사기인 브뤼거 앤 토멧 GL06 한 자루, 그리고 시가전을 벌여도 될 만큼의 탄환을 샀다. 물건들을 넘겨주면서도 안 좋은 예감이 들었는지 무기상이 물었다.

“전쟁이라도 벌이려는 건가?”

“그런 소리 많이 들어.”

사파이어는 소총을 어깨에 견착하고 가늠쇠를 들여다보며 전방을 조준해보았다. 그리고 총기를 점검하고 탄창을 확인하며 무심하게 대꾸했다.

“가능하면 헝가리 밖에서 사용해주지.”

“그래달라고.”

“가능하면.”

무기상이 이런 남자는 대체 어디서 데려온 거냐는 듯 힐난하는 눈으로 졸탄을 노려보았지만 졸탄은 애써 그 시선을 외면했다.

무기상의 아지트에서 나온 졸탄은 이제야 해방이구나 싶었다. 사파이어는 더 이상 자신에게 볼 일이 없을 것이다. 예전부터 기계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딱딱 끊어지는 남자였지만 한 번 약속한건 어기는 법이 없었으니까.

졸탄 역시 조영우의 사망에 대해 약간의 부채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 일로 모든 것을 청산하고 싶었다. 체코에 있다는, 벤체슬라스의 신상 정보를 알고 있는 정보원의 위치에 대해 알려준 것도 그것 때문이다.

졸탄은 작별인사도 하지 않고 사파이어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며 걸음을 옮겼다. 사파이어도 딱히 그를 붙잡진 않았다. 앞으로 또 어떻게 국경을 넘어야하나 고민하는 것 같았다. 벤체슬라스나 알료샤에겐 고민할 필요도 없이 쉬운 문제였지만, 돈도 인맥도 없는 사파이어에게는 국경을 넘는 매 순간이 모험이었다.

그때, 졸탄이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고개를 퍼뜩 든 사파이어가 피 흘리며 쓰러지는 졸탄을 보았다. 그 앞에는 실수했다는 얼굴로 피 묻은 칼을 닦아내는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와 사파이어의 시선이 마주치자, 남자가 대뜸 사파이어에게 달려들었다. 사파이어는 황급히 허리 뒤춤에 차고 있던 쿠크리를 꺼내들었다. 캉 하는 소리와 함께 칼과 칼이 부딪쳤다.

남자의 칼은 날 길이 30cm쯤 되는 단도였다. 찌르고 베기가 목적인 날렵한 칼로, 묵직하게 휘두르는 것이 주력인 쿠크리와는 성향이 달랐다.

남자를 막아선 사파이어는 재빨리 졸탄 쪽을 흘끗 살폈다. 바닥에 쓰러진 졸탄은 피를 쿨쿨 흘리며 신음하고 있었다. 아직 죽지 않은 모양이다.

“지압해. 과다출혈은 빨리 죽어.”

사파이어의 말을 듣고 바닥을 구르고 있던 졸탄이 필사적으로 환부를 틀어막았다. 사파이어가 다시 남자를 돌아보았다. 날끼리 맞붙어서 힘겨루기 하고 있는 쿠크리와 단도 사이로 끽끽하고 듣기 싫은 쇳소리가 울렸다.

“넌 누구야? 목적이 뭐지?”

“네가 사파이어인가?”

“내가 질문했다.”

“뭐 본인이 아니라도 상관없지. 찾아서 죽이면 그만이니까.”

어느 한 쪽이 박살나기 전까지는 제대로 된 대화가 성립되지 않을 모양이다. 남자가 힘겨루기를 풀고 재빨리 뒤로 피하자 사파이어가 기다렸다는 듯이 쿠크리를 크게 휘둘렀다. 사파이어의 공격범위 바깥까지 몸을 뺐던 남자가 공격 실패로 인해 허점이 보인 사파이어에게 기회를 잡았다는 듯이 다시 칼을 찌르고 들어왔다.

큰 동작이 빗나간지라 방어하지 못하고 자세가 아래로 숙여진 사파이어가 그 상태로 고개를 삐딱하게 들었다. 사파이어를 찌르려던 남자는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지만 이미 늦었다. 사파이어가 발목에 숨겨놓았던 군용 나이프를 꺼내 재빨리 남자의 단도를 막아서 공격의 방향을 흘리고 다시 쿠크리를 휘둘렀다.

남자의 손이 날아갈 뻔 했다.

사파이어는 나이프를 역수로 쥐고 쿠크리를 한 번 빙글 돌리며 태세를 다시 가다듬었다. 남자는 손목뼈가 날아가지 않은 것에 안도했지만 칼날에 스쳤기 때문에 손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슬쩍 움직여보니 다행히 근육과 힘줄은 다치지 않은 모양이다.

이제 사파이어는 칼이 두 자루다. 쿠크리는 공격용, 나이프는 방어용. 남자는 손에 쥔 단도 하나가 고작이다. 품 안에 총이 있는 것 같지만 사파이어는 그걸 빼들 시간을 주지 않을 것 같다.

남자는 눈앞의 암살 목표에 대한 세부사항을 다시 한 번 떠올려보았다. 이 남자가 사파이어가 맞는다면 날붙이를 사용한 근접전이 주특기일 것이다. 사격 솜씨도 나쁘지 않지만 그것보다는 칼을 더 잘 쓴다는 평가가 있다. 의뢰주에게서 들은 바로는 톱이나 도끼 같이 일반적이지 않은 무기도 잘 다룬다고 한다.

역시 처음에 총으로 처리할 걸 그랬나? 도심에서 총을 함부로 쏴댔다가는 도망치기 전에 경찰에게 잡힐 것 같아서 칼로 조용히 처리하려고 했는데 판단을 잘못한 모양이다. 어떻게 하지? 도망갈까? 일단 도망갔다가 다시 습격할까?

사파이어는 남자를 도망가게 내버려두지 않을 것 같았다. 한 번 벌인 싸움이니 끝을 보는 수밖에.

“빨리 하지 않으면 바닥에 있는 저 돼지가 죽을 텐데.”

“초조한가보군.”

사파이어가 남자의 의중을 정확히 읽자 남자가 더 이상 수작 걸지 않고 다시 덤벼들었다. 남자에게도 생각은 있었다. 칼로 찌르는 척 하면서 한 손은 품 안으로 파고 들어가 권총의 손잡이를 쥐었다.

그 때, 사파이어의 나이프가 날아와 남자의 손목뼈에 박혔다. 남자가 당황하는 사이 곧바로 쿠크리의 도끼 같은 묵직한 날이 내리박히며 남자의 손을 완전히 끝장냈다. 권총을 쥔 상태의 손목이 바닥에 툭 떨어지며 피가 분수처럼 튀었다.

“아아악!”

사파이어는 권총 쥔 손목을 저 멀리 차내며 곧바로 공격을 이어나갔다. 손목을 잃은 남자는 급하게 단도를 들어 막았지만 쿠크리의 무거운 날을 막기에 단도는 너무 얇았다.

갑작스러운 부상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는지 남자가 단 한 번의 공격에 쥐고 있던 단도를 놓쳐버렸다. 남자는 반사적이지만 또한 어리석게도 쿠크리의 날을 맨손으로 잡으려고 했다. 그것 때문에 남자는 양 손을 모두 잃게 됐다.

사파이어는 남자의 공격수단을 모두 빼앗은 다음 뒤돌려 차기로 남자의 배를 걷어차 쓰러뜨렸다. 남자는 영화에서처럼 통증을 억누르며 숨을 씩씩 몰아쉬지 않고,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사파이어는 쿠크리를 절도 있게 휘둘러 날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 다시 뒤춤에 찼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나이프와, 남자의 잘린 손이 쥐고 있는 권총을 회수했다. 권총의 약실을 확인한 사파이어가 총을 장전하며 남자에게 겨누었다.

“다시 묻는다. 넌 누구지?”

“개새끼야! 아아악!”

“나를 죽이는 게 목표였겠지. 졸탄을 찌른 건 실수였고. 내 보석명도 알고 있는 걸 보니 난 암살 의뢰 대상이군. 내 이름을 알고 있다는 건…….”

사파이어가 어렵지 않게 추리를 해나가다가 어떤 결론에 도달했는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단서 몇 개와 논리적 알고리즘을 넣어주면 진실이라는 결론을 도출해내는 추리 기계를 보는 것처럼 남자가 질렸다는 듯이 사파이어를 올려다보았다. 사파이어는 정답을 알고 있음에도 입 밖으로 그것을 꺼내기까지 약간의 틈이 있었다.

“벤체슬라스가 나를 죽이려고 하는 거군. 그 말고 다른 사람은 암살자를 고용해서 날 죽이려고 할 정도로 강한 동기가 있지는 않으니까. 그는 내가 자기에게 가는 것을 알고 있을 거야. 그걸 막으려고 암살자를 보냈겠지. 앞으로도 더 있겠군.”

사파이어가 해답지를 보고 술술 말하듯이 진실을 추론해나가자 남자가 손목의 통증도 잠시 잊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남자가 입을 열던 열지 않던 어차피 그는 별로 가치가 없었다는 얘기다. 남자의 존재만으로도 사파이어는 몇 가지나 되는 결론을 이끌어냈으니까.

추리를 마친 사파이어가 더 이상 볼일이 없다는 듯 방아쇠를 당겼다. 거리에 총성이 울렸다. 누군가는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르고 누군가는 벌써 경찰에게 신고전화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남자를 죽인 사파이어는 바닥에 뒹굴고 있는 졸탄에게 다가갔다. 짧은 싸움이었지만 졸탄은 그 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몸이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남자가 장기를 찔렀던 모양이다. 사파이어는 채 눈을 감지 못한 졸탄의 눈꺼풀을 가만히 닫아주었다. 이제 이 나라를 떠날 때가 됐다. 체코로 가야한다. 사파이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렇게 성대하게 환영해 주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내가 당신에게로 간다, 주인이여.

노예가 왕을 권좌에서 끌어내리리라.


남자는 강한 두통과 함께 정신을 차렸다. 의식을 놓기 전에 그는 조영우였지만 깨고 나서는 아무것도 기억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조금 전까지 뭘 하고 있었는지.

남자의 몸을 거칠게 흔드는 손이 있었다. 대리석 조각상 같이 희고 고운 손가락이었지만 인간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억센 악력이어서 남자는 그 손가락이 원하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리는 수밖에 없었다. 소리가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제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의 혼곤한 의식을 비집고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멈추지 말고 숨 쉬어.”

불길한 예감이 드는 목소리. 남자가 얼떨결에 모국어로 대답하니 남자를 정신 차리게 하려는 것인지 하얀 손이 남자의 뺨을 몇 번이고 때렸다.

깊은 물속에 잠긴 것 같은 의식이 점차 수면 위로 떠오르며 유리조각같이 날카로운 감각들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몸이 아프다. 뼈가 욱신거리고 속이 쓰리다. 안이 타들어가는 것 같다. 깨질 것 같은 두통까지 겹쳐서.

목소리가 영어로 말을 걸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남자도 영어로 대답하게 되었다. 아직까지는 모국어를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지만 조만간 쓰지 않아 퇴화될 예정이었다. 언어는 사고방식을 바꾸어놓고 자신에 대한 개념도 바꾸어놓는다. 오래 쓰면 기억까지도.

남자는 자신이 왜 이런 꼴이 됐는지, 이 통증은 어디서 기인하는 것인지 떠올릴 시간도 갖지 못한 채, 범해졌다.

하얀 손이 남자의 옷을 잡아 뜯는다. 투둑 투둑하고 거칠고 폭력적인 소리가 나며 단추가 사방으로 튄다. 벗겨지다 만 재킷이 그대로 남자의 팔을 억압하는 족쇄가 되었다. 재킷의 원단은 맨 손으로 찢기엔 너무 두꺼우니까.

하얀 와이셔츠는 몇 번의 손짓에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남자는 이제부터 나쁜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깨닫는다. 손상된 몸으로 허우적거리며 저항해보지만 약탈의 손길을 뿌리치기엔 역부족이다.

오히려 약간의 저항이 하얀 손을 더 자극했는지 주먹이 날아와 배에 박혔다. 단단하게 근육이 잡힌 복근이지만 예상치 못한 공격이었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온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손은 저항하지 못하는 남자의 몸을 꽉 움켜쥐고 탄탄한 가슴을 손자국이 남을 정도로 주물러 으깨고, 멍이 들 정도로 허리를 쥐어 기어코 남자가 근육이 끊어질 듯한 고통으로 몸부림치게 만들고, 골반 뼈까지 내려갔다.

증오가 담긴 보복의 손이었다. 이런 식의 침범은 낯설었다. 성관계를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강제로 누군가의 손에 자신의 몸을 침범당한 적은 없었다. 하물며 그 때 상대는 여자였다. 남자와 자 본 적은 없다.

남자가 받은 교육으로는 다른 남자와의 접촉은 역겨운 것이어야 했다.

어차피 모든 인간이 남자에게 있어서 자신의 평온한 삶을 깨는 침입자이니만큼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결코 좋아할 일은 없었지만, 동성 간의 접촉은 그것보다 더 역겨워야 한다고 교육받으며 자랐기 때문에 사회화의 결과로 인해 남자는 끔찍하게 저항했다.

부상자의 저항이라고 해봤자 별 볼 일 없는 것이었고 도리어 하얀 손의 분노만 부추길 뿐이었다. 앞으로 숱하게 몸으로 겪게 될 징벌과 복종훈련의 시작이었다.

애무는 없었다. 이것은 겁탈이었다. 강간이었다. 거칠게 바지가 벗겨 내려지고, 속옷이 잡아 뜯기고, 팔을 구속하던 재킷도 마저 벗겨서 나신이 된 남자를 하얀 손은 잔인하게 구타하며 자신의 흔적을 새겨나갔다. 남자는 헐떡이면서 애원했다.

“Please, just let me die…….(그냥 죽게 해주세요…….)”

“No.(안 돼.)”

목소리가 그를 조롱했다.

“You don’t want to die. You just want to live not like this.(넌 죽고 싶어 하는 게 아냐. 이렇게 살기 싫은 거지.)”

남자는 돌려 눕혀졌다. 바닥을 기어 도망쳐보려고 했지만 팔다리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몸을 움직이려고 할 때마다 손발이 저릿거렸다.

남자의 몸 안으로 무언가가 침범해 들어왔다. 손가락이었다. 충분히 젤을 바르지도 않은 손가락은 뻑뻑한 항문을 강제로 밀고 들어오려다가 도저히 안 되겠는지 바닥을 굴러다니는 술병을 들어 그 안에 든 액체를 부어가며 다시 침범을 시도했다.

병 안에 들어있던 강한 알콜은 윤활유로 썩 좋지는 않았지만 아무것도 없는 것보단 나았다. 도수 높은 알콜이 항문 점막에 닿으며 차갑게 증발하자 남자의 어깨가 움찔움찔 떨렸다. 제대로 가눌 수도 없는 몸인데 점막으로 알콜을 흡수하게 되면 정신이 날아가 버릴지도 모른다.

아니, 차라리 이 상황에선 그게 더 나은 건지도 모른다.

손가락이 두 개로 늘어났다. 남자는 자신이 관통될 것이라는 걸 알았는지 절박하게 외치기 시작했다. 목이 망가진 건지 목소리가 잠겨서 제대로 나오지도 않았지만 그는 갈라지고 쉬어 터진 목소리로 누군가에게 닿기를 바라며 필사적으로 부르짖었다.

“Help! Somebody help me!(도와줘요! 도와주세요!)”

“Yeah, do whatever you want. Nobody can hear you.(그래, 맘대로 해봐. 아무도 못 들을 거야.)”

“No, no, please stop, I’m begging you…….(안 돼, 싫어, 제발 그만, 제발…….)”

쓰라지게 벌려진 항문 끝으로 낯선 무언가가 와 닿았다. 귀두였다. 남자의 뒤통수로부터 오싹하고 소름이 끼쳤다. 남자가 다급히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는 순간 억센 손이 그의 머리통을 잡고 바닥에 찍어 눌렀다. 그리곤 무자비하게 그의 구멍 안을 파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남자가 억눌린 비명을 지르며 손톱이 부러질 정도로 바닥을 긁었다. 태어나서 처음 겪는 통증 때문에 엉덩이에 힘이 잔뜩 들어가 성기가 삽입되지 않자 강탈자의 손이 남자의 볼기를 사정없이 때렸다. 하얀 엉덩이에 새빨간 손자국이 그어지기 시작했다.

필사적으로 바닥을 밀어내는 남자의 다릿짓도 부질없었다. 남자의 저항이 끝날 때까지 스팽킹은 멈추지 않았고 남자의 엉덩이가 폭행으로 부어오를 때쯤 남자 역시 기운이 빠져서 바닥에 늘어져 헐떡이고 있었다.

꽉 맞물린 조개처럼 입을 다물고 있던 남자의 항문이 풀어지자 귀두를 시작으로 거대한 성기가 다시 그의 몸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귀두까지가 힘든 부분이었다. 툭 튀어나온 요철이 한 번 안으로 들어가자 그 다음에 나머지 기둥을 밀어 넣는 건 크게 저항도 없었다.

남자의 항문이 한계치까지 벌어진다 싶더니 부욱하고 몸 안 어딘가에서 찢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남자는 피가 배어나올 것 같은 쇳소리를 지르며 발악했다.

첫 항문 섹스인데도 기어코 뿌리 끝까지 자신을 밀어 넣은 침입자가 남자의 등 위에 몸을 바싹 붙이며 물어뜯을 듯이 자신의 성기를 꽉 조여드는 남자의 내벽을 음미했다. 남자의 등 위에 늘어진 백금발 머리칼들이 한 가닥 한 가닥의 충격으로 남아 남자의 뇌리에 박혔다.

본격적으로 허리를 움직이기 전에, 남자의 귓가에 침입자의 얇고 교활한 입술이 와 닿았다.

“So, how does it feels like?(그래서, 기분이 어떤가?)”

목소리는 단어 하나하나에 불쾌한 정복감과 이해할 수 없는 증오를 담아 속삭였다.

“That your life is stolen by a stranger.(모르는 남자에게 인생을 빼앗기는 것이.)”

고통과 공포로 숨을 헐떡이던 남자가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는 한 마디 한 마디에 분노를 담아 되돌려주었다.

“I swear, I’m gonna kill you. I’m gonna tear you down…….(맹세하는데, 당신을 죽여버릴 거야. 당신을 박살내버릴 거야…….)”

남자의 대답을 듣고는 목소리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에게는 피 맺힌 원한도 웃음거리로 넘길 수 있는 모양이었다. 척추까지 쿵쿵 박아 넣는 난폭한 허릿짓이 시작됐다.

“You’ll be my property. You’ll serve and obey me entirely. This is your position. I’ll cut you, carve you as my work. Guys like you, never know what they did to others. So this is my answer. You’ll be a jewel of mine.(넌 내 재산이 될 거야. 넌 전적으로 날 섬기고 숭배하게 될 거다. 이것이 너의 위치다. 난 널 자르고, 깎아서 작품으로 만들 거야. 너 같은 놈들은 다른 사람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절대 이해하지 못하지. 그러니 이것이 내 대답이다. 넌 보석이 될 거야.)”

그렇게 사파이어로서의 기억이 시작되었다.

사파이어는 머리를 감싸 쥐며 악몽에서 깨어났다. 알료샤가 경고했던 것들이 사파이어에게도 고스란히 일어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근원을 봐버렸다. 어떻게 보석이 되었는지, 무슨 일들을 겪어왔는지도.

그 비참한 인고의 시간들. 인격이 사라지고 사물로써 재조립 되던 과정들. 남자에게 강제로 몸을 빼앗기며 결국에는 자신을 이 모양 이 꼴로 만든 남자의 손길이 없으면 살아갈 수도 없게 되어버린, 괴물 같은 자신의 모습을!

사파이어가 외딴 곳에 차를 대놓고 잠들었기 때문에 누구도 그의 고함이나 발길질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가 잃어버렸던 것들이 가장 악독한 모습으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이것이 그가 선택한 자유의 대가였다. 트라우마가 지뢰처럼 깔린 가시밭길.

자신을 이렇게 만든 남자가 이제는 자신을 죽이려고 암살자까지 보낸다. 사파이어 역시 벤체슬라스와 대적한다는 막연한 계획은 있었지만 여태까지는 그것이 논리적인 계산 중 하나일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무언가가 그의 안에서 바뀌었다. 혈관을 타고 싸늘한 것이 흐른다. 의식이 툭 툭 끊겨간다. 주위 환경이 자신을 사슬처럼 옭아매고 있다. 그 모든 억압을 벗어던지고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리는 감각은 뭐라 말할 수 없이 자유로운 해방감이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허용된 것 같은 비현실적인 자유. 어떤 규칙도 금기도 없다. 사파이어가 제때 정신을 차리지 않았으면 맨 손으로 차를 박살내 조각조각 뜯어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가지고 있는 무기들로 총기난사를 시작했을지도.

사파이어는 거친 호흡을 몰아쉬며 분노에서 간신히 빠져나왔다.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새벽이지만 여길 떠나야했다. 사람의 얼굴을 봐야 이 기묘한 고양감에서 빠져나올 것 같았다. 머리끝이 따끔거리는 이상한 감각이었다. 벤체슬라스를 생각할수록 그 감각을 억누르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그에 대한 기억은 억지로 꾹꾹 눌러 접어두었다.

체코의 국경을 넘은 사파이어는 프라하로 향했다. 그에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분노 조절 장애가 생겼다는 건 사파이어 자신조차 모르고 있었다.


체코, 프라하, 벤체슬라스 광장.

선한 왕이라고도 불리는 벤체슬라스, 즉 바츨라프 1세의 기마상이 길게 뻗은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백금발의 살인청부업자에게 이름을 강탈당한 왕은 자신의 이름으로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알지 못한 채 바쁘게 돌아가는 도심을 지켜보았다. 사파이어는 한 무리의 관광객 틈바구니에 섞여 그 기마상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동상이 말을 할 수 있었다면 사파이어가 겪어 온 고난에 대해 깊은 동정을 표했을 것이다.

알료샤라는 진통제의 효력은 지난밤의 악몽을 기점으로 완전히 끝나버렸다. 세상은 다시 익숙한 불친절함과 무례함, 끔찍하게 선명한 자극들로 다가왔다. 이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사파이어는 더 이상 참지 않는다는 것일까.

인종차별은 항상 있어왔던 것이지만 이제는 아주 다르게 느껴졌다. 여기에 오기 전에 누군가가 겁 대가리 없이 사파이어에게 니하오 하고 인사를 걸었는데 사파이어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그의 멱살을 잡고 골목길로 끌고 들어가서 미친 듯이 두들겨 팼다.

어차피 화풀이 할 상대가 필요하기도 했다.

악의가 없었을 수도 있다. 그를 정말 중국인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단순히 외국인에게 인사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니하오라는 인사에 대한 의도는 영원히 알 수 없다.

사파이어는 그저 참지 않았을 뿐이다. 분노를 꾸역꾸역 눌러 담지 않고 터뜨려버린다는 건 이전에 느껴본 적 없이 후련했고, 끝장나게 개운한 감각이었다. 나쁘지 않았다.

활화산이 폭발하는 것처럼 자제 없이 터져 나온 분노 조절 장애에 첫 번째로 희생된 인종차별자는 바닥을 기며 헐떡거리다 기절했고, 사파이어는 그를 두들겨 패기 전보다 약간 더 차분해진 상태로 골목을 빠져나왔다.

저 인간쓰레기가 경찰에 신고해도, 누군가가 그들을 보고 있었어도 상관없다. 목격자? 증언? 얼마든지 하라지. 다음엔 목숨을 끊어놓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지금 끊어놓았으면 더 좋을 것을 그랬다.

무언가를, 누군가를 죽이는 것에 대해선 전혀 거리낌이 없다. 여태까지 밥 먹듯이 해온 짓이니까. 이다음에 또 시비가 걸리면? 안 될 거 없지. 또 두들겨 팰 거다.

졸탄이 체코 정보원의 전화번호를 알려줬기 때문에 사파이어는 그와 연락을 했고, 몇 번의 확인과정 끝에 벤체슬라스 광장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팔짱을 낀 채 다른 사람들을 관찰하고 있으려니 누군가가 뒤에서 접근해왔다. 사파이어는 기척만 듣고도 고개를 돌려 누가 다가오는지 확인했다. 나이 지긋한 백발의 여성이었다. 50대 후반? 60대인가?

허리는 굽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나이대의 평균치보다 훨씬 건강해 보인다. 주기적으로 운동을 하는 것일까. 살은 좀 투실투실하게 붙었지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쇠약하다는 느낌이 없었다.

“영우?”

여자가 확인하듯이 물었다. 사파이어가 고개를 끄덕일 것도 없었다. 여자는 그 이름을 부르면서 이미 사파이어의 얼굴을 알아봤다. 여자는 다른 정보원들과 달리 한국어를 할 줄 모르는 건지 체코 억양이 강하게 벤 영어로 말을 걸어왔다.

“졸탄한테서 소개를 받았다고 했을 때 설마 했는데……. 당신이었군요. 살아있었네요.”

“날 압니까?”

“알다마다요. 날 기억 못하나요?”

사파이어가 고개를 젓자 여자가 약간 충격 받은 표정을 지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사파이어와는 전화통화로 몇 마디 주고받은 게 전부고 아직 통성명을 하지도 않았는데 대뜸 사파이어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에서 이미 그의 정체를 알고 있었던 거다.

여자는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는 대신에 뭔가를 생각해보고 스스로 납득하는 것 같았다.

“당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많이 놀랐어요. 살아있어서 다행이네요. 헝가리에서 오는 길이죠? 졸탄은 잘 지내고 있나요?”

“그는 죽었습니다.”

“아니 왜……. 어쩌다가?”

“살해당했습니다. 나를 죽이려던 암살자에게.”

사파이어는 끼고 있던 팔짱을 풀고 여자에게 한 발자국 더 다가갔다.

“당신한테 정보를 사고 싶습니다.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런 다음엔 사라지겠습니다. 당신도 위험해질 테니까.”

“정보를 산다구요? 나한테? 당신이?”

“값은 제대로 치르겠습니다.”

여자는 또 한 번 충격 받은 얼굴이 됐다. 이번에는 약간 상처도 입은 것 같았다.

“정보를 사다니, 나에게…….”

여자는 제발 뭐라도 기억해달라는 얼굴로 사파이어를 쳐다봤지만 그래봐야 손상된 기억이 기적처럼 되돌아올 리가 없었기 때문에 사파이어의 얼굴은 돌로 깎아 만든 것처럼 표정변화가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모든 걸 다 잊었군요. 우린 꽤 친했어요. 당신은 나한테 아들 같은 존재였고, 당신도 몇 번 내 개인사를 처리해줬죠. 당신이 지금도 영우라면, 내 집 문은 기꺼이 당신한테 열려 있어요.”

“미안합니다.”

“그래요. 뭔가가 있었군요……. 그래도 당신에게 돈은 받지 않겠어요. 죽은 아들이 살아 돌아온 셈이니까 뭐든 도와주겠습니다. 필요한 걸 말해 봐요.”

“세공사 벤체슬라스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세공사라니……. 살인청부업자 얘기인가요? 보석이라고 불리는 킬러들을 수족처럼 부린다는?”

“예.”

“혹시 당신 보석이 된 건가요?”

“지금은 사파이어입니다.”

여자가 입을 떡 벌렸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여자의 나이를 가늠해봤을 때 혈관 문제가 생길수도 있을 것 같아서 사파이어는 여자가 쓰러질 때를 대비해 주의 깊게 지켜보았다.

그 짧은 시간 안에, 여자는 자신이 조영우라고 알고 있던 남자에게 지난 5년간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알아버렸다. 이 남자가 왜 자신을 찾아온 건지,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당신……. 복수하려고 하나요?”

사파이어는 대답하지 않았다.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살아 돌아와서는, 다시 죽으러 가게 나에게 정보를 달라고 하는 건가요 지금?”

“나는 그에 대한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가 내 유품을 가져갔습니다. 그걸 되찾아야 합니다.”

조영우는 자신이 누구였는지, 눈앞의 여자와는 어떤 관계였는지, 그 모든 것을 잊은 상태였지만 필요한 것만 간결하게 말하는 성격은 바뀌지 않았다. 단순해서 거짓이 없는 정직함만큼은 고스란히 남아있다는 것에 여자는 안도했다.

이름까지 바뀐 상태지만 조영우라는 인간의 일부는 아직 그의 내면에 남아 있었다. 하긴, 예전부터 고집이 센 사람이었다. 한 번 정한 사항은 끝까지 밀고 가버린달까. 이 남자가 자신의 자식이었다면 정말이지, 말을 듣지 않는 자식이었다.

“세공사 벤체슬라스라고 했죠. 이름을 계속 바꾸는 그 남자 말이군요. 좋아요. 필요하다면 다 알려주겠습니다. 당신한테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으니까.”


길에서 서서 말하기엔 너무 방대한 내용이었기 때문에 둘은 자리를 옮겼다.

여자가 조영우에 한해서는 집 문을 열어두겠다고 한 것은 빈말이 아니었다. 여자의 집에 초대된 사파이어는 선반에 장식된 접시며 화병을 둘러보면서 자신이 이곳에 온 적이 있던가 떠올려보려고 했다.

여자가 계속 언급하는 걸 봐서 분명히 이 장소에도 온 적이 있긴 한데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여자가 따뜻한 허브티를 건네자 그것을 받아들었던 사파이어는 여자의 집에서만 마실 수 있는 독특한 조합의 허브티 향기 때문에 간신히 과거의 일부분을 떠올렸다.

“아직도 이걸 드시는군요.”

“이제 기억나요?”

“이 차에 대해서만.”

여자가 쓸쓸하게 웃었다. 여자의 미소는 사파이어를 어딘가 불편하게 만들었다. 알료샤를 떠날 때 느꼈던 불편함과 비슷한 종류의 감정이었다. 이 여자도 알료샤만큼 자신에게 잘 해줬던 것 같다. 알료샤와는 방향이 다른 호의긴 하지만 어쨌든 적개심은 느껴지지 않았다.

“세공사 벤체슬라스에 대해 물었죠.”

본론이 나오자 사파이어가 차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여자 역시 감상적인 부분을 접어놓고 정보원으로서의 본 모습으로 돌아왔다.

현재는 벤체슬라스라는 이름을 쓰고 있는 그 백금발의 세공사는 과거에 안드레이 플로레스쿠라는 이름으로 한국 정보기관에 고용된 적이 있다. 조영우와는 그 때 만났을 것이다.

그는 이름을 너무 많이 바꾸기 때문에 이름만으로 그의 신상을 파악하기는 힘들다. 그는 세공사가 되기 이전에 라피스 라줄리라는 이름을 가지고 보석으로서 활동했다.

보석명 말고 그의 진짜 이름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는 이름은 콘스탄티네스쿠. 그를 소유하고 있던 세공사가 그 이름으로 그를 불렀다고 한다.

라피스 라줄리는 2000년대 초반부터 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과거의 정보는 누락된 게 너무 많아서 오류가 있을 수 있다. 이 정보가 사실이라면 벤체슬라스는 청부살인업에 적어도 20년 가까이, 혹은 그 이상 몸을 담고 있었다는 소리가 된다.

그의 자세한 나이는 모르지만 절대 40대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고, 아니 오히려 30대 중반으로 봐도 높게 잡은 것 같은데 30대 남자가 20년 가까이 되는 경력을 가지고 있다면 거의 10살 안팎의 나이부터 사람 죽이는 일을 하고 있었다는 소리가 된다. 말이 안 된다.

이후에 그는 주인으로부터 독립해 세공사 협회와 연을 맺고 세공사로서 활동하기 시작한다.

그는 라리마, 블루 토파즈, 카이나이트, 플로라이트 같은 보석들을 시장에 내놓으면서 차츰차츰 명성을 쌓아가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판매하던 보석이 아쿠아마린인데 이 보석이 깨지고 난 후엔 얼마간의 공백이 있었다.

이 때 그는 개인에게서 의뢰를 받기보다 단체나 기관, 정부 등 커다란 고객을 상대로 일을 했다. 안드레이 플로레스쿠로 활동한 시기는 아마 이 시기.

그런 다음 또 공백 기간을 가졌고, 그 뒤에 사파이어라는 보석을 시장에 내놓으면서 다시 나타났다.

여자는 여기서 잠깐 말을 멈췄다. 조영우가 이렇게 가까이 있었는데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사파이어라는 이름을 몇 번 듣기는 했어도 눈앞의 남자가 그 사파이어가 되어있을 줄은 몰랐다. 죽었다고만 생각했고, 그렇게 마음 속 한 구석에 묻어놓았을 뿐.

여자에게는 언제나 방대한 정보가 흘러들어왔다가 다시 빠져나갔고, 소식 위에 새로운 소식이 쌓였기 때문에 벤체슬라스라는 남자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 여유가 없기도 했다. 그럴 이유도 없었다.

사파이어는 여자의 말을 들으며 여자가 탁자 위에 늘어놓은 자료를 하나하나 뒤져보고 있었다. 비록 그가 현장직이긴 했어도 서류와 자료를 뒤적이며 숨겨진 진실을 찾아내는 건 그의 기본적인 업무 중 하나였다.

콘스탄티네스쿠라면 특이한 이름이긴 하다. 이름의 형태를 보면 출신국가가 대충 짐작이 된다. 루마니아가 저런 식으로 끝나는 이름을 쓴다. 하지만 플로레스쿠나 콘스탄티네스쿠, 둘 다 성씨다. 조영우를 예로 들자면 조라는 성씨로만 부르는 셈이다.

이름이 있을 것이다. 셀 수 없이 가면을 바꿔 쓰는 그림자의 멱살을 단번에 잡아챌만한 본명이.

서류를 뒤적이던 사파이어가 무언가에 시선을 고정했다. 벤체슬라스.M.이라는 서명이 되어있는 문서의 사본이었다. 그 옆에는 안드레이.M.이라는 서명이. 둘 다 필체는 같았다. 그가 쓴 서명이라는 소린데 앞 이름은 달라도 뒤의 M이라는 약자는 겹친다. 무엇에 대한 약자인가?

그는 이름을 매번 바꾼다. 매번 바뀌는 신원 속에서 그 자신이라는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해선 어떤 중심이 필요하다. 바뀌지 않는 단단한 근본이. 이것이다. 그의 이름이.

사파이어는 M으로 시작하는 이름을 찾으며 벤체슬라스와 관련된 모든 서류들을 뒤졌다. 많은 후보군이 있었지만 그 중에 슬라브권에서 쓰이는 이름을 제외하고 나머지를 걸러내자 대여섯 개가 남았다.

루마니아 역시 동유럽에 속해있지만 주변의 슬라브 국가들과 달리 라틴계 국가니까. 콘스탄티네스쿠라는 독특한 형태의 이름이라면 분명히 루마니아 출신일 테고. 루마니아라고 슬라브식 이름을 쓰지 않는 건 아니지만 루마니아식 이름을 쓰는 게 더 보편적일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벤체슬라스는 가면을 바꿔 쓰는 것처럼 이름을 바꾸고 다니는 남자니까.

사파이어가 보석으로서 벤체슬라스의 곁에 있었을 때, 그가 사용한 많은 가명 중에 루마니아 이름은 없었다. 그는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이다. 사파이어 앞에선 드러내고 싶지 않았을지도. 왜일까? 약점일 가능성이 높다.

아마도 진짜 정체라는 소리겠지.

첩보원으로 살았던 시절은 암살자로 살아온 시간보다 짧지만 그 당시 익혀두었던 국제역학관계적인 지식은 사파이어의 기억이 돌아오기 시작하면서 그 기억의 파편들과 함께 스멀스멀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다. 전문가급으로 알지는 못하고 대략적인 개요만 알 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누군가의 신상을 털어내기엔 충분했다.

후보군 중 남은 이름들을 종이에 써내려가던 사파이어는 본능적으로 이름 하나를 짚었다. 루마니아에서 쓰는 이름이었기 때문에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미르체아.

미르체아 콘스탄티네스쿠. 이게 그의 본명인가? 그는 집요할 정도로 자신의 정체를 숨긴다. 명성은 원하면서도 누구에게도 그의 본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 세계에선 자신의 신상을 숨기는 게 상식이긴 하지만 그는 지나칠 정도다. 과거라는 게 없는 것처럼, 과거를 지우고 싶어 하는 것처럼 군다. 사파이어도 그의 격노를 몇 번이나 봤다. 그는 사파이어를 사물처럼 취급했으니까, 사파이어의 앞에선 경계심 없이 자신의 고독함과 이유를 짐작할 수 없는 분노를 고스란히 내보인다.

그는 세상에 대한 증오를 가지고 있었다. 자기 파멸적인 증오를.

이것이 그를 찌르는 비수가 될 것이다. 진짜든 아니든 간에 그의 진실에 근접했다는 이유만으로도 그를 뒤흔들어 놓기엔 충분하겠지. 어쩌면 결정적인 순간에 사파이어의 목숨을 구해 줄 도구가 될지도 모른다. 사파이어는 자신이 조합한 이름을 잘 기억해두었다.

“벤체슬라스는 영국에 있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직도 거기 있습니까?”

“다른 곳에서 활동한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으니까 아마도 아직 거기 있을 거예요.”

“런던…….”

행선지가 정해졌다. 런던. 막연하게 아직 그가 거기 있을 거라는 예감은 있었지만 정보원의 입으로 확인받으니 계획의 방향이 확실해졌다. 남은 것은 그리로 향하는 것. 그리고 그와 대적하는 것.

이야기가 정리되자 여자도 작별의 시간이 다가온 것을 알았는지 사파이어를 잠시 붙잡았다.

“쉬었다가 가지 그래요. 오늘 밤은 여기에서 자고.”

“안 됩니다.”

“급하게 가야 할 이유라도 있어요?”

“당신이 위험해질 겁니다.”

“그것뿐만이 아닐 테죠. 날 못 믿으니까.”

여자가 정곡을 찌르자 사파이어가 “그래서 그 대답은?”하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성격은 변한 게 없네요. 당신은 기억 못할 테지만.”

여자는 추억을 회상하듯이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사파이어의 의문을 풀어주듯이 대답했다.

“난 변절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싸우려는 게 벤체슬라스라면 더더욱. 그와 나는 접점이 없어요. 난 그냥 정보나 물어다주는 사람인데요. 사실 그와는 직접 만난 적도 없어요. 당신에게는 단순히 호의를 베풀고 싶어요. 내가 당신보고 아들 같은 존재라고 했죠. 아들한테 따뜻한 한 끼라도 먹이고 안전한 곳에서 하룻밤이라도 재우고 싶은 게 내 동기입니다. 납득이 되나요?”

“당신과 나 사이엔 무엇이 있었습니까?”

“7년 전에 당신을 처음 만났고, 당신은 얼마간 이 집에서 묵었어요. 동양인들은 원래 나이보다 훨씬 어려보이니까……. 그땐 정말 소년 같았죠. 지금도 별로 변한 게 없네요. 당신은 여기서 하숙생처럼 지냈어요. 그 후에 당신이 시베리아에서 내 딸과 손자를 구해주었어요.”

처음 마주쳤을 때부터 그랬지만 여자는 대단히 건조한 성격인 것 같다. 과거사를 꺼내는데도 감정 기복 없이 차분하게 말을 이어가지만, 내용은 차분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어차피 사파이어에겐 호들갑을 떨며 이것저것 늘어놓는 것이 별로 도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숫자 같이 확실한 정보의 나열이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여자의 말은 즉각적으로 과거를 불러 일으켜 사파이어의 뇌리에서 영상으로 재구성 됐다. 이전에 몇 번이고 파편으로나마 봤던 장면들이다.

시베리아. 귀까지 덮는 털모자를 뒤집어쓰고 웃는 아이가 있다. 마을 사람들이 자신을 환영해준다. 짧은 여름의 극성맞은 모기떼는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는 것들이었고, 사파이어는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짐승인가, 사람인가? 저격 임무였고, 명중했다.

자신을 향해 미소를 보내는 사람들에게 사파이어는 등에 매고 있던 총을 내려…….

그들의 뒤에 있는 놈들을 쐈다.

사람들이 그를 보고 웃었던 것은 드디어 구원자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웃기만 한 것이 아니다. 눈물이 고여 있었다. 반가워하는 얼굴이었다. 도와달라고 손을 내미는 사람들이었다. 사파이어는 그 사람들을 죽이지 않았다. 약탈자들을 죽였다.

아이가 쓰고 있던 우샨카는 아이의 것이 아니다. 사파이어의 것이다. 그들은 사파이어를 러시아 군인으로 알고 있었다. 인종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고려인 출신으로 처리했으니까.

소년이 사파이어의 주요 목표였기 때문에 사파이어는 소년이 자신의 물건을 가지고 놀아도 딱히 제지하지 않았다. 결국엔 그 아이와 그 아이의 엄마를 이곳에서 데리고 나가야했기 때문에.

그 아이의 이름은 사샤였다.

사파이어가 왜 그들을 구해야 했을까? 본래 임무는 다른 것이었다. 인질 구출은 추가 임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추가 임무는 사파이어가 체코에 체류하고 있을 때 정보원에게서 받은 개인적인 부탁이다. 그 정보원은…….

“손자 이름이 사샤입니까?”

“맞아요.”

“의심해서 죄송했습니다.”

사파이어는 체코 어머니에게 고개 숙여 사과했다. 여자는 대답 없이 잠시 다른 곳을 보고 있다가 눈가를 살짝 눌렀다.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나더니 여자가 다시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집에 돌아온 걸 환영해요.”


그래도 사파이어는 그 집에 묵을 수 없었다. 여자가 자신의 편이라는 것을 알자 더더욱 그랬다.

사파이어를 노리는 암살자들은 그의 동선까지 파악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어쩌면 그가 여자의 집으로 왔다는 것도 이미 알려졌을지 모른다. 즉시 떠나야 했다. 사파이어와 접촉했다는 이유만으로 여자도 협박을 받을지 모르니까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켜야 할 필요성도 있었다.

여자의 딸과 손자는 다른 도시에 살고 있었다. 여자가 불쑥 찾아가도 며칠은 묵게 해줄 것이다. 사파이어가 체코를 떠나면 여자도 안전해진다. 사파이어는 기차역까지 여자를 태워다주기로 했다.

이 집에서 하숙하는 동안 사파이어는 여자를 단 한 번도 어머니라고 불러본 적이 없다. 낯선 땅에서 어머니와 다를 바 없이 자신을 보살펴 준 사람이긴 해도 생물학적인 어머니가 아닌 사람에게 어머니라고 불러야 하는 이유를 몰랐다. 예나 지금이나 그에겐 사회적 관습이나 비유라는 게 영 어려우니까.

다행히 여자도 사파이어만큼 깔끔하고 건조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둘 사이에 별로 대화가 오가지 않아도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경우는 없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둘은 서로에게 적응했고, 둘 모두 누군가에게 간섭하지 않는 성격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좋은 사이를 유지했다. 서로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지 않고 침범하지 않기 때문에 편한 관계였다.

말로 표현하진 않아도 그 편함은 조용히 깊은 유대로 바뀌어갔다. 조영우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여자가 느꼈을 상실감은 누구도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깊은 것이었다. 그런 남자가 다시 살아 돌아온 순간에 여자가 느꼈을 환희도 역시 남에게 말 못할 것들이다. 그것을 좀처럼 표현하지 않아서 그렇지.

기차역까지 가는 동안 둘은 별 대화를 주고받지 않았다. 예전과 똑같았다. 프라하 중앙역에 거의 도착하자 가만히 있던 여자가 입을 열었다.

“다음에도 살아 돌아와요.”

두 가지 뜻을 담고 있었다. 죽지 말라는 것과, 또 오라는 것. 자신만큼 무감각한 여자가 얼마만큼 깊게 생각해서 말한 것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기 때문에 사파이어는 자신의 방식대로 대답해주었다.

“노력하겠습니다.”

사파이어는 역 바로 앞이 아니라 한 블럭 건너에서 여자를 내려주었다. 그를 감시하고 있는 시선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역 바로 앞에서 내려주면 여자에게도 따라다니며 감시하는 암살자가 붙을지도 모른다.

사파이어는 차에서 내려 짐을 꺼내주고 여자가 가는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또 만나요.”라는 사파이어의 인사에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들다운 작별인사였다.

사파이어는 여자에게 살가운 말 한 마디 할 줄 몰랐지만, 그렇다고 졸탄처럼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지 않은가. 여자가 무사히 기차역에 도착하는 것을 보고 사파이어는 등을 돌렸다. 그의 눈에는 이미 골목골목에서 그를 언제 덮칠지 기다리고 있는 암살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사파이어가 이 자리에서 줄행랑을 쳐버리면 그를 뒤쫓는 것보다 늙고 힘없는 여자를 붙잡고 강압적으로 사파이어에 대한 정보를 뜯어내는 게 더 효율적일 것임을 알기에, 사파이어는 조용히 차에서 무기를 꺼냈다.

그는 여자를 단 한 번도 어머니라고 불러본 적이 없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느끼지 않은 적은 없었다. 여자가 사파이어에 대한 신의를 지켰으니 사파이어도 그 신의에 대한 도리를 다한다.

와라, 승냥이들아. 너희가 내 두 번째 어머니를 물어뜯게 놔둘 수는 없지.


여자가 기차표를 예매하고, 차량에 올라타고, 기차가 출발하고 나서야 총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기차는 역 바깥에서 일어난 총격전을 알지 못했기에 중간에 멈추지 않았고 여자는 아무것도 모른 채 떠났다.

도심 한복판에서 총 쏘기를 꺼려하는 암살자들과 달리 사파이어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경찰이 눈에 띄면 경찰도 쏠 기세였다. 사파이어가 먼저 쏘기 시작하자 암살자들이 맞대응을 하는 기묘한 구도가 펼쳐졌다.

여느 때와 똑같은 혼란이었다. 탄피가 흩날리고, 포화가 터지고, 시민들이 도망가는.

사파이어는 경찰 특공대가 나타나는 것도 신경 쓰지 않았고 누군가에게 사진이 찍히는 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시체들을 어떻게 숨기고 처리할 것인지도 더 이상 그에게 제약을 거는 족쇄가 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지나간 모든 자리를 잿더미로 만들어버릴 것처럼 포화를 퍼부으며 지나갔기 때문에 오히려 공격자측이 꼬리를 말고 도망갈 지경이었다. 사파이어가 조심성이 많고 신중한 성격이라는 건 잘못된 정보인 것 같다. 의뢰인이 알려준 것과는 성격이 많이 다르다. 중간부터 성격이 바뀐 걸지도.

일처리 방식이 대담하다는 평가는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시체처리반이 뒤에 대기하고 있을 때의 이야기지 이런 식은 아니었다. 지금의 사파이어는 뭐랄까……. 무모했다. 인생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처럼.

당연하게도 사파이어의 목에 걸린 돈을 보고 그를 죽이려고 들던 암살자들은 살아남아서 해야 할 것들과 하고 싶은 것들이 사파이어보다 훨씬 많았기 때문에 중간부터는 제 목숨을 지키려고 달아났다.

사파이어는 운 좋게도 체코 방송국이 카메라 장비를 들고 달려오기 전에 그 아수라장에서 벗어났고, 체코 공영방송은 신원 미상의 동양인 남자가 시가전을 벌인 것에 대해 대서특필하며 국외로 소식을 알렸다.

CNN, BBC, AFN 통신, 로이터 통신, AP 통신 등등의 외신이 발 빠르게 이 사건을 퍼뜨렸다. 덕분에 사파이어의 위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던 유럽 곳곳의 청부살인업자, 용병, 정보상까지도 그가 어디에 있는지 확실히 알아버렸다.

사파이어 사냥에 참가하는 측에게는 지도에 표식을 꽂아준 셈이고, 벤체슬라스가 개최한 보석 사냥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겐 언제 내기돈을 걸어야 할지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셈이었다.

사파이어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는 국경을 건너 독일로 넘어갔다.


벤체슬라스는 샤토브리앙 스테이크를 썰며 뉴스를 듣고 있었다.

고기는 블루 레어 상태로 소금과 후추 말고는 별다른 간이 되어있질 않았다. 고기에 향을 입힐 허브도 없고 사이드 디쉬도 없다. 심지어 코스요리조차 아니다. 전채 요리도 없고 후식도 없이 오로지 이 한 덩이의 생고기뿐. 곁들이는 음료로는 로마네콩티를 썼다.

여러모로 이단적인 식사였다. 샤토브리앙은 소의 부위 중에서 최고의 부위고 로마네콩티는 와인 중에 최고의 가격을 자랑한다. 최고는 최고로써의 품격이 있다. 자신으로써의 정체성이 강하기 때문에 보조를 맞추어줘야 할 평범함이 필요하다.

아니 평범함이라기 보단, 최고보다는 질이 떨어지는 열등함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격에 맞지 않게 질이 떨어져서는 안 된다. 최고보다는 낮되 그 자신도 최고에 가까운 품질을 지녀야 최고의 우수함이 더 돋보인다.

요컨대 최고에게는 2등이, 조력자가 필요하다. 꽃에 꽃받침이 필요하듯이.

최고끼리 만나서는 서로를 집어삼키려고 드는 경우가 종종 있다. 고기의 진한 향과 맛은 와인의 섬세하고 복잡한 향미를 가리고,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세계를 담고 있는 와인의 다채로운 향은 고기의 풍미를 덮어버린다.

고기를 메인으로 두고 싶으면 와인이 한 발 뒤로 빼주던가, 와인을 살리고 싶으면 고기가 보조의 역할에 서야 하는데 둘 모두 한 치의 물러섬이 없다.

와인과 음식의 조화를 마리아주라고 하는데 제아무리 평가가 드높은 최고급품끼리 모아놓는다고 해도 마리아주가 맞지 않으면 입 안에서 따로 노는 즐겁지 않은 경험이 된다.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를 샤토브리앙으로 키워낸 대가를 치르는 셈이다. 사파이어는 2등급이고 조연이어야 했다. 벤체슬라스를 돋보이게 해 줄 보석으로써.

날고기에 가까운 최고급 스테이크를 별다른 간 없이 핏덩이 째로 큼직하게 씹으며 병당 수천 유로를 호가하는 와인을 이렇다 할 감상 없이 물마시듯이 부주의하게 들이키는 시점부터 벤체슬라스는 약간 미쳐있는 건지도 모른다.

어쩌면 전 재산을 털어 사파이어 사냥을 의뢰했던 시점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일지도.

그래. 그가 이제는 체코에 있군. 뉴스가 흘러나온 시점에서 그는 이미 체코에 없을 것이다. 어디로 갔을까. 벤체슬라스가 아직 영국에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아두었겠지. 국경을 건너면 독일이다. 독일일까. 지금 거기에 있을까.

시가전을 벌였다는 건 그러니까……. 무기를 구했다는 소리다. 무기를 구했으면 정보원과도 접촉했을 것이고, 벤체슬라스에 대한 정보를 샀을지도 모른다. 최대한 과거에 대한 자료를 없애고 은폐한 벤체슬라스지만 그가 살아온 인생만큼 정보가 남아있을 것이기에 미처 없애지 못한 이야기들이 사파이어에게 흘러들어갔을지 모른다.

그는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뭐라 말할 수 없이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사파이어가 사물일 때는 그 앞에서 나신이 되어도 부끄러울 것이 없었다. 가구 앞에서 맨 몸이 된다고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있는가?

그러나 어느 날부터 가구가 자아를 가지고 말을 하기 시작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 순간부터 가구는 혐오스럽고 부담스러운 존재가 된다. 자아가 있는 존재 앞에서 벌거숭이가 되는 것처럼 치욕스러운 일이 있을까.

비록 그를 죽이려고 암살자들을 보내긴 했지만 그가 죽기는커녕 털끝만큼도 다치지 않아서 벤체슬라스는 이상한 안도감을 느꼈다.

그에 대해서는 내 손으로 이야기의 끝을 매듭지어두고 싶은 부채감이 있다. 그런다고 그가 순순히 벤체슬라스 앞으로 오도록 내버려둘 리도 없지만, 거꾸로 생각해보면 벤체슬라스가 사파이어를 너무 튼튼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흠집조차 나지 않는 것 아닌가.

나를 죽이러 오는 흉기지만 내가 벼려냈던 칼날이고, 그의 견고함은 그를 만들어낸 세공사로서의 실력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다.

그를 죽이게 되는 것에 대해서는 정말……. 아무런 유감이 없다……. 그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게 될 것이다. 당연히 내 목숨이 더 중요하지 않은가. 어차피 한 번은 사파이어의 죽음을 겪어봤다. 그 후폭풍도 이겨냈다. 두 번째는 더 쉬울 것이다.

벤체슬라스가 고용한 용병들은 고용주의 기행을 지켜보며 질렸다는 듯이 혀를 내둘렀다. 그의 한 끼 식사에 낭비되는 금액도 금액이고, 그의 테이블 주변 바닥에 널린 무기들도 그랬다. 벤체슬라스는 식사를 하며 사파이어를 죽일 무기들을 눈으로 고르고 있었다.

그들은 직접적으로 사파이어를 암살하러 가지는 않고 벤체슬라스의 보디가드 같은 역할을 맡고 있었다. 고용주가 살아있어야 자신들에게 돈을 주니 그들에겐 무엇보다도 벤체슬라스의 생존이 중요했다.

그들은 벤체슬라스가 다른 곳으로 피신하기를 원했다. 어차피 사파이어는 얼마 안 가 암살자들의 머릿수에 밀려 개죽음 당할 것이 뻔하지만 만약에 일이 틀어져서 그가 진짜로 영국까지 오기라도 한다면 어쩔 것인가? 벤체슬라스의 위치는 너무 드러나 있다.

벤체슬라스는 그들의 조언을 귓등으로 흘렸다. 그가 나를 두려워해야지 내가 그를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그가 살아서 내 발치까지 온다면 그것만으로도 칭찬할만한 업적이다.

신사는 비가와도 뛰지 않는 법이며 왕은 등을 보이고 도망치지 않는 법이다.

벤체슬라스는 그를 피하지 않는다. 올 테면 와라.

다만 벤체슬라스는 본래부터 만용을 부리는 성격은 아니었기에, 절충안으로써 자신이 고용한 모든 인력을 중부 유럽으로 집결시켰다. 소규모의 인원을 찔끔찔끔 보내지는 않는다. 보석을 깨부수려면 압도적인 화력으로 한 번에.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사파이어가 그 수라장을 헤쳐 나온다면 그것만으로도 그는 전설 같은 가치를 입증할 것이다. 그를 키워낸 벤체슬라스 역시.


사파이어는 세면대에서 물이 한 방울씩 똑 똑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욕조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손에 쥔 콜트 거버먼트가 서늘하다. 총신을 이마에 대며 강철의 서늘함에 위안을 얻던 사파이어는 바깥 기척에 귀를 기울이며 양 손의 권총을 가슴 위에서 X자로 포갰다.

욕실 문 밖,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거실, 거실 저편에 있는 현관문에서는 남자들의 고함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각국의 언어가 뒤섞인 사냥꾼들의 고함. 무언가를 분주하게 준비하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쿵 하고 벽이 울리는 굉음이 들려왔다.

샷건으로 경첩을 쏴서 문을 부수고 안으로 돌입하는 것까지는 생각했지만 배터링 램(battering ram)까지 가져올 줄은 몰랐다. 복도가 좁으니까 아마도 한 사람이 장비를 들고 문을 두들기고 있을 것이다.

다수의 인원이 도어 브리칭을 하고 내부로 습격할 것을 대비해서 사파이어가 이미 문에다가 단단히 대비를 해놨지만 저렇게 본격적으로 나오면 얼마 못 가 문이 뚫릴 것이다.

각오하고 있었다. 오히려 문이 부서져야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바깥의 남자들은 1인용 공성추 같은 장비로 문을 일정하게 두드리고 있었다. 앞으로 몇 번이나 남았을까. 3, 2, 1…….

사파이어는 심호흡을 하며 방독면 마스크를 뒤집어썼다. 욕조 안에는 물 대신에 총과 칼, 탄환이 잔뜩 들어 있었다.

쿵, 쿵하며 벽까지 울리던 소리가 어느 순간 펑하면서 철제 현관문의 잠금장치가 박살나고 문짝이 떨어져나갈 듯이 열리는 소리로 바뀌었다. 그 순간, 아무도 듣지 못했지만 딸그락하고 무언가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문을 막 열어젖힌 남자들은 몰라도 사파이어는 그것이 바닥으로 떨어질 시간까지 계산하고 있었다. 배터링 램을 들고 문을 때려 부순 남자가 옆으로 비켜서자마자 총을 든 인원들이 재빨리 안으로 돌입했다.

그 순간 폭발이 일어났다.

폭압이 남자들을 갈기갈기 찢었다. 터져 나온 공기가 방 안의 모든 유리창을 깨부쉈고 벽을 터뜨리며 금가게 만들었으며 욕실 문 뒤에 숨은 사파이어까지 뒤흔들어 놨다.

욕조 안에 몸을 밀착하고 있던 사파이어가 폭발의 충격이 지나가자마자 몸을 일으켰다. 재수 없으면 문틀이 뒤틀려서 꼼짝없이 여기에 갇히는 건데 다행히 문 자체가 박살이 나버렸기 때문에 밖으로 나가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방 안에는 터진 인간 파편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문 바로 바깥에 서 있던 인원 역시 터져 나온 폭발에 떠밀려 복도 난간 뒤로 떨어져 내렸다. 못해도 5층 이상은 되는 높이였기 때문에 난간 아래로 추락한 놈들은 차례로 바닥에 머리가 깨지며 사망했다.

운 좋게 목숨을 건진 것은 현관문에서 좀 떨어진 벽에 딱 붙어서 안으로 돌입할 준비를 하고 있던 인원들이었다.

목숨을 건졌다곤 해도 폭발시의 충격 때문에 고막이 터진 건지 귀에서 삐이이하는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귀를 틀어막으며 바닥에 주저앉는 남자들의 다리 사이로 무언가가 데굴데굴 굴러 나왔다. 연막탄이었다.

연막탄에서 뿜어져 나온 연기는 순식간에 방 안과 복도 전체, 그리고 아파트의 폐쇄된 내부공간을 뿌옇게 메웠다. 시야가 차단된 남자들이 총구를 어디다 겨눠야할지 모르고 우왕좌왕 하는 사이 방 안에서 발자국 소리 하나가 저벅저벅 걸어 나왔다.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한 발 한 발 총성이 터지며 남자들이 죽어나갔다. 신속하지만, 서두르지 않으며 정확한 솜씨였다. 겁이라는 게 아예 없는 것처럼 배짱도 대단했다.

겁에 질린 남자들이 무차별적으로 총을 난사하기 시작하자 눈 먼 총알에 자기편끼리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방독면을 쓴 사파이어는 자세를 낮추고 남자들끼리 서로 죽이도록 내버려두며 무기 가방을 어깨에 맨 채 그 곳을 빠져나왔다.

계단 아래로 한 층 내려온 사파이어는 아래층에서 다급하게 위로 올라오는 기척이 들려오자 계단 옆 모퉁이에 몸을 숨겼다.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던 인원이 더 있던 모양이다. 폭발과 총성을 듣고 지원 병력이 올라오는 모양이지. 이쪽으로는 내려갈 수 없다.

사파이어는 길게 늘어선 복도에 있는 문 중 열린 문을 찾아서 안으로 들어간 뒤 바깥 동향을 살피면서 무기 가방을 뒤졌다. 연막탄을 한 번 더 쓸까. 한 번 수작을 부렸으니 두 번째는 통하지 않을 것 같다. 방독면을 가지고 있는 녀석도 있을 것 같고.

무엇보다도 수적으로 불리하다. 사파이어는 불사신이 아니다. 한 발이라도 맞으면 끝난다.

수류탄을 던지는 건 위험한 발상이다. 이번엔 건물이 무너질지도 모른다. 어떻게 아래로 내려간다……. 교전 없이는 불가능한 건가? 건물 외벽에 화재를 대비해 비상계단이 있지 않을까? 어느 쪽에 있을까? 없으면 건물 외벽의 튀어나온 모서리를 밟고 탈출하는 수밖에 없나.

가능하다면 자동차는 다시 회수하고 싶었다. 차 없이는 멀리 도망가지 못하니까.

그 때,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울리며 건물 밖에서 확성기 소리가 들려왔다. 숨어있던 사파이어는 방에 난 창문으로 바깥을 슥 내다보았다. 독일 경찰특공대가 몰려와 안으로 돌입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옥상에는 벌써 저격수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건물 자체가 포위된 모양이다. 기회가 생겼다.

복면을 뒤집어 쓴 경찰특공대 대원들이 대열을 이루며 건물 안으로 돌입했다. 곧 총격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사파이어를 사냥하려는 암살자측은 당연히 투항할 생각이 없다. 그들은 킬러다. 그들 중 가장 신참이라고 해도 이미 최소 한 건 이상의 살인을 저질렀다. 그들이 여태까지 저질러 온 것을 하나하나 차근차근 계산하자면 징역이 몇 백 년은 나올 것이다. 그걸 순순히 받아들일 리가 없다. 차라리 싸우다 죽지.

사파이어를 잡으려고 시작했던 싸움이 어느 순간 경찰과 무장괴한의 싸움으로 변질되었다. 싸움이 일어나고 있는 4층 이상부터는 다행히 민간인이 없었지만 3층 아래부터는 미처 대피하지 못한 시민들이 몇 명 남아있었다.

특수부대원들은 복도에서 어쩔 줄 모르고 있는 사람들은 바깥으로 끄집어냈고, 집 안에서 미처 나오지 못한 사람들에겐 문을 잠그고 안에서 대기하며 또한 현관문에서 떨어지라고 외쳤다.

교전 중에 부상자가 생겼다. 경찰들이 아래에서 위로 밀고 올라가고 있었기 때문에 싸움의 현장은 점점 더 위층으로 옮겨졌고 중간에 생긴 부상자들은 아래로 끌어내려졌다. 비교적 후방에 있던 대원들은 다친 동료가 지나가는 길을 막지 않았다.

그러다가 심각한 부상자 하나가 들것에 실려 내려왔다. 육안으로 봐도 목숨이 경각에 달린 듯이 보여 계단을 막고 있던 대원들은 부상자가 구급차로 갈 수 있게 재빨리 비켜주었다.

들것을 진 대원 중 하나가 어깨에 커다란 가방을 메고 있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특수부대원 하나를 잡아서 때려눕히고 옷을 바꿔 입은 사파이어는 생각보다 더 간단하게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림자처럼 사라지는 데는 항상 자신이 있었다. 부상자와 함께 건물을 나온 사파이어는 사람들의 시선이 팔린 틈을 타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슬쩍 빠졌다.

독일에 도착하자마자 정말 성대한 환영식을 치르고 있다. 함께 지내온 시간만큼 벤체슬라스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파이어이기에 그가 어떤 식으로 나올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완벽주의자다. 목표를 위해서라면 수단방법 가리지 않는다. 한 번 맡은 일은 좀처럼 포기하지도 않는다. 일처리 방식을 고를 수 있다면 조용하고 깔끔하게 처리하는 것을 더 선호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도시를 전쟁터로 만들더라도 어쨌든 목표만큼은 반드시 완수하고 만다. 그의 손발이 되어 그것을 실질적으로 수행하던 것이 사파이어다.

사파이어가 그를 훤히 꿰뚫고 있는 것처럼 벤체슬라스 역시 사파이어가 어떻게 움직일지 알기 때문에 아마 여기서 사파이어를 저지하려고 할 것이다. 봐주는 법 없이 한꺼번에 모든 것을 쏟아 붓겠지. 그런 남자니까.

자신의 손으로 직접 전투기술까지 가르쳐가며 키워낸 사파이어니까, 어설프게 건드렸다간 점점 더 난장판만 커질 거라는 걸 잘 알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국가권력까지 무시해가며 공격해올 줄은 몰랐다. 이미 방송사가, 언론이 이 태풍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다. 나라간의 합동수사본부가 차려질 것이다. 대테러부대가 나타날 것이고, 어쩌면 군대까지 나설지 모른다.

일개 세공사 따위가 돈으로 덮을 수 있는 사안이 아니게 되어버렸다. 사파이어는 잃을 것이 없다고 쳐도 벤체슬라스는? 그는 사파이어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일까? 항상 자신의 작품이다,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다 하고 자부심에 차 있던 남자다.

벤체슬라스가 사파이어를 필사적으로 죽이려고 하는 것은 그만큼 사파이어가 위협적인 존재라는 소리다.

터키 정보원에게서 받았던 차는 일부러 아파트에서 좀 떨어진 곳에 주차해 놨다. 낡고 허름한 차라서 누가 훔쳐갈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해 특정한 방법으로 시동을 걸지 않으면 폭발하도록 만들어두었다.

갈아입었던 특수부대원 복면을 벗으며 모퉁이를 돈 사파이어는 막 폭발한 자동차의 압력에 의해 뒤로 떠밀려 넘어졌다. 벌써 여기까지 추적자의 손이 닿은 모양이다…….

무기는 사파이어가 전부 가지고 있었지만 차 안에는 어느 정도의 현금과 터키 정보원이 만들어준 위조 신분증이 들어 있었다. 국경을 몇 번이고 넘을 때마다 유용하게 쓴 물건이다. 차와 함께 신분증을 잃었으니 꼼짝없이 독일에 발목이 잡히게 됐다.

일단은 살아남았다는 것에 더 중점을 두기로 할까. 사파이어는 재빨리 몸을 일으켜 주변을 살폈다. 사파이어의 차를 털려고 했던 놈들은 말 그대로 빨간 반죽이 되어 바닥에 흩뿌려져 있었다.

주변에 다른 차량 역시 요란하게 경보음을 울리고 있었고 지나가던 시민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고 있었다. 운 나쁘게 폭발에 휘말린 부상자가 피를 흘리며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고, 근처 건물에선 하나같이 창문이 열린 채 사람들이 바깥 상황을 내다보고 있었다.

차는 새까만 연기를 뿜으며 불타오르고 있었다. 폭발로 인해 불이 붙었으니 이다음엔 엔진일까, 연료통일까. 두 번째 폭발이 일어날 것이다. 사파이어는 차를 버리고 등을 돌렸다. 일단은 몸을 피할 곳을 찾자.

그 때, 누군가가 “저기 있다!”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는 얼굴까지 알려진 건가. 하긴, 체코에서 그 난리를 치고서도 얼굴이 알려지지 않기를 바랐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겠지. 그렇지 않아도 동양인이라는 것만으로도 눈에 띌 테고.

싸움은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수적으로 밀리는 상태에서 넓은 공간에서 싸우자면 사파이어가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폐쇄된 공간이 필요하다. 사파이어는 자신을 쫓는 암살자가 몇 명인지는 몰라도 일단 그 자리를 피해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체코에서 독일로 넘어왔던 사파이어는 자잘한 교전들을 벌이며 도르트문트까지 왔다. 이대로 네덜란드로 넘어가서 배를 타던가, 아니면 프랑스까지 건너가서 도버해협을 관통하는 채널 터널을 건널까 고민했다.

예전에 800만 유로짜리 사건을 맡았을 때 사샤와 다른 아이들을 프랑스 칼레까지 데려다줬다. 채널 터널은 그 칼레에서부터 영국까지 이어지는 터널이다.

네덜란드도 나쁘지 않은 선택인 것 같지만 배를 타면 한정된 공간에 오랫동안 자신을 위험에 노출시키는 셈이고, 터널로 넘어가자면 프랑스를 건너가기까지의 과정이 고난이다. 딱히 이렇다 할 결정을 하지 못한 채 사파이어는 도르트문트까지 왔다. 그리고 습격을 받았다.

벤체슬라스에게 점점 가까워질수록 공격이 거세진다. 편히 쉬지 못한지 꽤 됐다. 잘 때도 항상 총을 머리맡에 두고 잤고 한 번에 4시간 이상은 자보지 못했다. 계속 이동해야했다.

충분히 휴식하지 못했을 때 몸이 어떻게 고갈되는지는 잘 알고 있다. 점점 한계에 치닫는다. 자유를 얻은 대가로 안식을 반납한 셈이다.

그래도 내가 한 선택이다.

시가지에서 좀 벗어난 끝에 사파이어는 버려진 폐공장 부지로 들어섰다. 도주가 길어지면 암살자들도 어느 정도 포기할거라고 생각했는데 거리를 지날수록 오히려 숫자가 늘어났다. 사파이어의 목에 걸린 액수가 생각보다 큰 모양이다.

벤체슬라스는 얼마만큼 걸었을까. 그 돈 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가. 자신이 키워낸 보석을 깨부수기 위해 과연 얼마나 들인 것일까. 사파이어는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을까.

도르트문트는 예전부터 공업도시였다. 창고와 공장들이 있고, 잘 깔린 교통망이 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업종을 바꿔가며 생존한 업체들도 있지만 더러는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도태되어 그대로 내버려지기도 했다. 어차피 싸워야한다면 무고한 희생자가 나오는 도심보다는 차라리 이런 곳이 낫다.

사파이어는 빛도 잘 들지 않는 을씨년스러운 철골 구조물 아래로 들어가 몸을 숨기고 가방을 열었다.

유탄발사기를 꺼내 탄환을 채워 넣고 등에 맸다. 장탄수 한 발 밖에 들어가지 않고 재장전 하는데 시간이 걸리긴 해도, 위력만큼은 확실하다. 폭탄을 던지는 셈이니까.

소총은 30발들이 탄창을 쓰는데 기관총처럼 공중에 총알을 흩뿌리는 게 아니더라도 30발은 금방 쓴다. 탄창이야 넉넉하게 가지고 있지만 무게가 문제다.

적은 얼핏 보기에 수십 명, 그 이상 될 거 같은데 사파이어가 피전 블러드 같은 괴물이 아니고서야 탄환 한 발에 한 사람씩 꼬박꼬박 죽이는 짓은 못한다. 그도 실수를 하니까.

보조무기로 쿠크리와 나이프도 찰 생각이다. 콜트 거버먼트 두 자루도 양 쪽 허벅지에 하나씩. 탄환을 빼고 무기 자체만으로도 10kg은 가볍게 넘어가는 셈이다. 몸이 굼떠진다.

이것은 전면전이다. 그가 어둠 속에서 튀어나오는 암살자일 때는 필요한 무기만 소지한 채 민첩하게 치고 빠지는 것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대군을 상대해야하는 원맨아미다. 몇이나 상대할 수 있을까, 얼마나 처리할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확률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전부. 무조건 전부다. 전부 죽이고 나는 살아남는다는 것이 제일 기본적인 가정이다.

전투 준비를 끝마친 사파이어는 곧 들이닥칠 총격을 기다리며 그늘 속에 몸을 숨기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 소음과, 폭력과, 혼잡한 자극에서 벗어나 안식을 되찾으려면 아직도 가야할 길이 멀다.

이 고난 역시 내가 선택한 것이다. 후회는 없다. 세상은 언제나 그에게 비우호적이었으니까 지금 와서 현실을 직시한다고 해도 딱히 달라지는 것은 없다.

난 살아남을 것이다. 내 의지로 내 삶의 방향을 정할 것이다.


공격자들은 자신들이 수적으로 우세하다는 점에서 안도감이라도 느끼는 건지 모습을 숨기지 않은 채 공장부지 안으로 들어왔다.

숨기려고 해도 딱히 숨을 곳이 없기도 했다. 사파이어가 있는 곳에서는 바깥이 훤히 보이지만 정작 바깥 공터에는 몸을 가릴만한 것들이 없다. 어차피 그럴 필요도 없었다. 상식적으로 사파이어는 숨죽인 채 어딘가에 처박혀 있거나 꽁지 빠지게 달아나고 있어야 정상이니까.

몇 몇은 측면의 담을 넘어 조용히 부지 안으로 기어들어오고 있었다. 그들 모두 동업자고 일시적인 동맹이지만 결국엔 현상금을 걸고 싸우는 경쟁자들이었다. 사파이어를 죽이고 증거품을 가져가야 하는 순간이 오면 그들은 모두 적이 될 것이다.

사파이어는 그들이 사주경계하며 어느 정도 다가오기까지 기다렸다. 녹슨 철골이 을씨년스럽게 서 있는 부지 안쪽은 시야가 가로막힐뿐더러 여차하면 흉기가 될 만한 것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일 대 다수를 상대해야하는 사파이어가 지형지물을 이용해 방어할 것이라는 건 상대편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단지 그들은 사파이어가 유탄 발사기와 몇 개의 수류탄과 연막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모를 뿐이다.

총 끝으로 구석의 그림자와 기둥 뒤를 샅샅이 뒤지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던 복면의 남자가 무언가 퉁 하고 무언가가 튕겨 나오는 둔탁한 소리를 들었다. 소리 자체는 대단한 것이 아니었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것을 깨닫자 남자는 모골이 송연해졌다.

유탄발사기에서 튕겨져 나온 폭탄이 천장에 쌓여 있는 자재들과 녹슨 철근 가닥에 명중했다. 폭발이 일어나며 쇳조각들이 터졌다. 파편들은 그대로 흉기가 되어 아래로 빗발쳤다. 돌과 철 조각들이 머리 위로 쏟아지면서 미처 피하지 못한 암살자들이 고스란히 몸으로 받아냈다. 비명이 울리면서 총성이 시작됐다.

엄폐물 뒤에 몸을 숙이고 있던 사파이어는 재빨리 유탄발사기에 탄환을 하나 더 채워 넣었다.


쪽팔린 줄 알아야지. 고작 동양인 한 놈한테.

선두가 유탄발사기에 허무하게 희생되는 것을 보고 후방에 있던 암살자들이 혀를 찼다. 사파이어가 유탄발사기를 가지고 있는 건 알겠다. 탄환은 얼마나 가지고 있을까? 그게 떨어지면? 혼자서 다수를 상대해야하기에 지형지물을 활용하는 영리함까지.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총알은 언젠가 떨어지기 마련이고, 제 아무리 준비를 해놨어도 수십이나 되는 머릿수를 혼자 상대한다는 건 결국 죽는다는 소리밖에 안 된다. 시간문제일 뿐이다.

유탄발사기가 몇 번 더 발사되고 폭발이 일어났지만 이미 한 번 기습공격을 당한 암살자측은 이번엔 순순히 맞고 있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산업폐기물에 불이 붙어서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곧 있으면 사파이어도 위험해질 처지다. 스스로 엄폐물을 없앤 셈이다. 기다리고 있으면 나오겠지. 느긋하게 쏴주면 된다. 그렇지 않으면 불타는 폐허 안에 숨어 있다가 그대로 타 죽던가.

안에서 연막탄 몇 개가 튀어나왔다. 비교적 개활지에 있던 암살자들은 그것을 발로 차 제거했다. 연막을 치고 도망갈 속셈이었는가본데 열린 공간에서는 그다지 효과적이지 못한 방법이다.

이제 슬슬 대응방법이 떨어졌나보지. 꽤나 고생하게 한 놈이니 죽이기 전에 잠깐 가지고 노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사파이어를 고문해서 죽이는 영상을 찍어다주면 벤체슬라스는 보너스로 추가 금액을 더 주지 않을까?

아니 차라리 살려서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고용주가 직접 처리하고 싶어 할지도 모르니까. 사로잡는 게 가능하다면 말이지.

그러나 기다려도 사파이어는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폐건물 뒤쪽에서 드드득하는 총성이 울렸다.

연막탄은 정말 미끼였던 것이다. 앞에다가 연막을 던져놓고 시선이 팔린 틈을 타 더욱 거세게 불타오르는 내부로 들어간다. 그리고 뭐가 있을지 모르는 폐허를 관통해 반대편으로 빠져나간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인데 보통 사람은 차라리 눈앞에 확실하게 있는 출구로 나오지 불확실한 위험을 감수하진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만 방심하고 말았다. 내부를 통과하다가 철골조가 붕괴되어 거기에 깔릴 수도 있을 것이고, 기껏 통과해도 퇴로가 완전히 막혀있을지도 모르는데 사파이어는 그 불안성까지 모두 떠안고 모험을 강행한 것이다.

뇌구조가 일반인과는 어딘가 다르다. 겁 대가리가 없다고 할까. 다행히 뒤쪽에도 대기하던 인원이 있었기에 사파이어를 그대로 놓쳐버리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불타는 건물 앞에 서 있던 암살자들이 재빨리 건물을 빙 둘러가 공격에 합류했다.

사파이어는 소총을 견착한 채 기계같이 신속하고 정확하게 움직이며 눈에 보이는 표적을 모조리 쏴 맞추고 있었다.

30발들이 탄창은 금방 비었고 그때마다 초 단위로 손이 움직여 재빨리 탄창을 갈아 끼웠다. 예비탄창으로 4개정도를 허리춤에 끼워 넣고 있었는데 그게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었다.

사파이어가 피전 블러드 같았다면 하나를 쓰러뜨리는데 절대 두 발 이상의 총알은 낭비하지 않았겠지만, 정확히는 머리 하나에 총알 한 발만 소비하면서 헤쳐 나갔겠지만 안타깝게도 그에겐 그런 능력이 없다.

그가 남들보다 더 가지고 있는 것은 무모할 정도의 대담함, 그리고 태어날 때부터 감정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인 무자비함이다.

모든 사람이 목숨을 단 한 개만 가지고 태어나지만 그는 몇 개라도 되는 것처럼 주저 없이 위험 속에 뛰어들었다. 그를 죽이려는 암살자들도 당연히 목숨을 한 개 밖에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사파이어가 불쑥 다가오면 자연히 몸을 사렸고, 그게 그들의 생사를 갈랐다.

사파이어는 사신 같이 불타는 전장을 휩쓸었다. 지금까지 14명을 죽였다.

공격자측이 본격적으로 포화를 쏟아 붓기 시작하자 사파이어는 재빨리 거대한 파이프 기둥 뒤에 몸을 숨겼다. 녹슨 파이프에 맞고 튕겨나가는 탄환의 소리가 귓가에서 섬뜩한 소리를 냈다. 탄창은 벌써 마지막이었다.

이 30발을 쏘고 나면 소총은 무용지물이 된다. 그럼 남는 것은 두 자루의 콜트와 허리 뒤춤에 찬 쿠크리. 그리고 군용 나이프.

시체를 뒤져 무기를 노획하는 방법도 있는데 그걸 지금 실행하기엔 총탄이 폭우처럼 쏟아지고 있다. 여기서 움직일 수가 없다. 좋든 싫든 간에 사파이어는 다시 불타는 저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유독가스를 품은 검은 연기가 화염과 함께 피어오르고 있었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

적은 얼마나 남았나. 자세한 숫자는 모르겠지만 얼핏 보기에 2~30명 정도는 아직 남은 것 같다. 눈에 보이는 것만 저 정도고 숨어있는 건 얼마나 될까.

이왕 불이 붙은 것 좀 더 커져야 했다. 소방차가 나타나고 경찰까지 들이닥치면 사파이어에게만 쏠려있던 관심이 흐트러지겠지. 그 때가 도망갈 기회다. 그 때까지는 버텨야한다. 사파이어는 메마른 입술을 훑으며 불꽃이 이글거리는 지옥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불타는 폐건물 안에서도 교전이 일어났다. 사파이어 못지않게 뇌구조가 이상한 놈들이 화염을 뚫고 그를 잡으러 온 것이다. 벤체슬라스가 안다면 기꺼이 칭찬할만한 충성심이다. 그게 비록 돈만 보고 생긴 충성이라고 할지라도.

아껴가며 쏜다고 했는데 마지막 탄환이 발사되고 방아쇠는 달각달각 소리만 났다. 소총은 이제 끝났다.

사파이어는 무거운 짐 밖에 되지 않는 소총을 바닥에 내버리며 허리춤의 쿠크리를 꺼내들었다. 다른 손에는 콜트 한 자루를 쥐었다. 쌍권총으로 난사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탄환을 아끼고 싶었다. 한 자루는 비상용으로 남겨두고 싶기도 했고.

건물 안은 불 때문에 훤했다. 이글거리는 열기가 위협적으로 피부를 훑었고 머리칼에서는 탄내가 났다. 다행히 더 이상 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내부 인원은 이렇게 끝난 건가? 모두 죽었나? 나머지는 바깥에 있는 놈들뿐인가?

시체에게서 무기를 노획하려던 사파이어는 무언가가 가만히 서서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기다란 일본도를 든 동양인 남자가 사파이어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암살자들에겐 정해진 규칙이란 게 없다. 자기에게 가장 익숙한 무기를 쓰게 마련이다.

당장 사파이어만 해도 제대로 된 도검부터 공구까지 가리지 않고 사용한다. 남들이 보기엔 특이해보일 수 있다. 그러나 총 없이 칼만 들고 다닌다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 남자의 손에는 총이 들려있지 않았다.

칼로 싸우자는 소리 같은데 사파이어에겐 무기에 대한 철학적인 고찰 같은 게 없다. 손에 잡히는 가장 효율적인 도구를 들고 상대를 죽이면 그만이다. 그게 장인의 손으로 만든 도검이든, 적에게서 노획한 총이든, 한 손에 잡힐만한 단단한 돌이든.

사파이어가 총구를 내밀자마자 남자가 숨기고 있던 총을 번개같이 빼들어 사파이어를 쐈다. 본능에 가까운 반응속도였다. 사파이어를 죽일 수도 있었지만 총알은 사파이어가 들고 있는 총만 맞추었다. 총이 튕겨져 나갔다. 잘못하면 손이 날아갈 뻔했다.

사파이어에게서 총을 제거한 남자가 보란 듯이 자신의 권총을 옆으로 내던졌다. 그제야 사파이어는 쿠크리를 제대로 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콜트가 한 자루 더 남아있지만 남자는 두 번째는 봐주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미 칼로 싸우자고 의지를 표명했고 자신의 총을 내던짐으로써 그것을 한 번 더 확인시켰다. 남자는 사파이어가 칼집에서 군용 나이프를 꺼내 쥐는 것까지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총기가 아니면 무기는 몇 개를 쓰더라도 상관이 없다는 건가.

남자가 인사하듯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지만 사파이어는 그 신호를 알아듣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사파이어의 반응에 남자가 비릿하게 웃었다. 정말 이상한 녀석이군. 뭘 말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사파이어가 먼저 덤비라는 듯이 칼끝을 까딱하자 남자가 주저 없이 달려들었다.

캉 하면서 첫 합이 맞붙었다. 남자는 힘겨루기를 하지 않고 곧바로 떨어져 자세를 다잡았다. 칼 길이로만 보면 남자 쪽이 훨씬 우세하다. 공격범위가 넓으니까 거리가 벌어져봐야 사파이어에겐 좋을 것이 없다.

사파이어가 바짝 따라붙을수록 남자는 한 발 한 발 뒤로 빠졌다. 밀리는 것은 아니다. 유인하는 느낌이다.

쿠크리는 일본도보다 더 앞쪽에 밸런스가 실려 있다. 칼끝이 무겁기 때문에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묵직하게 공격이 나가지만 그만큼 틈새도 생기기 쉽다.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나이프를 방어용으로 쥐고 있는 것이지만 그것도 가까이 붙어서 접전이 일어났을 때의 얘기지 지금처럼 어중간하게 벌어져 있으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사파이어와 거리가 두 발자국 이상 멀어졌을 때 남자가 칼을 대각선으로 크게 휘둘렀다. 재빨리 쿠크리로 공격을 막아냈지만 순간 어깨가 날아갈 뻔했다. 칼의 크기 차이 때문에라도 실리는 힘이 달라서 사파이어가 순간 휘청였다.

쿠크리의 곡선 안쪽에 걸린 칼날을 옆으로 밀어내고 반격을 하기도 전에 일본도가 잽싸게 빠져나가더니 이번엔 횡으로 베어 들어왔다. 사파이어는 반사적으로 쿠크리를 역수로 쥐고 몸통을 보호하며 남자의 공격범위 안으로 불쑥 파고 들어갔다.

조금만 늦었으면 허리가 통째로 베일 뻔했다.

사파이어가 다른 손에 쥔 나이프로 남자를 찌르려고 들자 남자가 사파이어의 배를 확 걷어찼다. 뒤로 떠밀린 사파이어에게 또 다시 검날이 번쩍이며 위협적으로 베어 들어왔다. 사파이어는 양 손의 칼을 교차해 칼을 막아내더니 힘으로 칼을 확 떠밀었다.

인종적인 차이 때문에 사파이어가 평소에는 주변의 다른 사람보다 작아 보이는 것뿐이지 같은 동양인과 비교하면 체격이 작은 것도 아니었다. 덩치는 확실히 큰 편이다. 오히려 남자가 사파이어보다 뼈대가 가늘다고 할까, 약간 더 왜소했다. 체급 차이에는 장사가 없다.

사파이어의 기습에 남자가 순간적으로 한 발자국 뒤로 떠밀렸다. 공격의 주도권이 사파이어에게로 넘어왔다.

캉캉캉하면서 순간적으로 몇 번이나 칼날이 부딪쳤다. 이전엔 완전히 바짝 붙어서 나이프로 공격을 하고 있었다. 묵직한 쿠크리는 방어용으로 바뀌어있었다.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붙어버리면 일본도같이 긴 칼은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변한다. 사파이어는 남자가 다시 거리를 벌리기 전에 결판을 내야했다. 남자로서는 필사적으로 사파이어를 밀어내며 간격을 되찾아야했고.

남자 역시 악귀 같은 얼굴로 이를 악 물고 칼날을 부딪쳐가며 저항했다. 어느 순간, 일본도가 가한 일격에 쿠크리의 칼날이 쩡 하는 소리와 함께 깨지더니 산산조각 나버렸다.

무기상에게서 칼을 산 뒤로 제대로 보강하거나 관리도 해주지 못하며 몇 번씩이나 전투를 치렀기에 금속 피로가 쌓여 있을 거라곤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어이없게 깨질 줄은 몰랐다.

반면에 일본도는 날조차 멀쩡해보였다. 좋은 칼이다. 공장에서 값싼 철로 턱턱 찍어내는 기성품은 아닐 테지.

칼날이 깨지며 남자에게도 파편이 튀자 남자가 반사적으로 얼굴에 날 조각이 날아오는 걸 피하려고 고개를 틀었다. 그 순간 사파이어가 깨진 쿠크리를 남자에게 집어던지며 일본도를 쥐고 있는 남자의 손목을 와락 붙잡고 끌어당겼다. 맞붙었다!

남자가 황급히 사파이어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려는 순간 번개 같은 속도로 나이프가 남자의 목에 몇 번이고 박혔다.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남자가 자랑하던 검술도 더 이상 휘두를 수 없게 되었다. 사파이어가 피로 흠뻑 젖은 얼굴을 쓱 닦아내자 남자가 바닥에 쿵 쓰러졌다.

남자의 손목을 붙잡고 있던 사파이어는 그의 시신이 손아귀에서 스르륵 빠져나가게 내버려둠과 동시에 남자가 쥐고 있던 칼을 빼앗아 단단히 쥐어보았다.

날렵하고, 강도도 좋은 칼이다. 전통 제작방식으로 만들어진 건 아닐 테지만 오히려 실전에선 이게 훨씬 낫다. 쿠크리는 이제 못 쓰게 됐으니 대신 이걸 가져간다. 사파이어는 저 멀리 튕겨져 나갔던 콜트 거버먼트를 다시 회수하고 남자가 던져두었던 권총까지 주웠다.

불길은 이제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 더 이상 추격자들이 보이지 않는다. 바깥은 모두 정리된 걸까? 아니면 사파이어가 밖으로 나오길 기다리고 있나? 시간은 꽤 흐른 상태다. 사파이어가 예상한대로 경찰이 몰려와 대치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기회를 봐서 도망칠 수 있을 것이다.

사파이어는 피로가 가득한 발걸음을 떼며 흘러내리는 땀과 피를 닦았다.


사파이어가 빗발치는 총알을 피해 불타는 건물 안으로 다시 들어갔을 때였다.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던 포화가 멈추고 암살자들이 사라진 사파이어를 다시 찾기 시작했을 때, 이 불타는 전쟁터에 걸맞지 않게 어디선가 카랑카랑한 현악기의 서정적인 음색이 들려왔다.

멜로디 자체는 어디선가 한번쯤은 들어봤을 것 같은 낯익은 것이었다. 노래 이름을 몰라도 동유럽 어딘가의 민요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숨어버린 사파이어를 찾느라 사방을 경계하며 둘러보던 암살자가 거슬릴 듯 말듯 계속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피식 웃으며 “어떤 미친놈이 여기 와서 칼린카를 치고 있는 거냐?”하고 중얼거렸다.

이런 곳에 음향장비를 가져와서 틀어놔도 어이가 없는 상황인데 이 소리는 누군가가 악기를 가져와서 직접 치고 있는 소리였다. 그의 중얼거림에 갑자기 음악이 멈추더니 누군가가 귓가에 대고 “정답.”하고 속삭였다.

“어?”

암살자가 채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거대한 나무판이 그의 얼굴에 명중했다.

끼이잉하고 나무 뒤틀리는 소리가 나며 철사 같은 현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늘어졌다. 기타보다 훨씬 넓적한 나무판으로 얼굴을 가격당한 암살자가 부러진 이빨을 내뱉으며 쓰러졌다. 순간적으로 뇌가 흔들렸기 때문에 몸도 가누지 못하고 그대로 기절했다.

암살자를 공격한 것은 삼각형의 몸통이 달린 현악기, 발랄라이카였다. 발랄라이카를 야구배트처럼 휘두른 괴한은 그것을 어깨에 턱 짊어진 채 낮게 흥얼거렸다.

“칼린카, 칼린카, 나의 칼린카.”

다른 암살자들은 갑자기 일어난 어이없는 상황에 넋을 놓았다. 발랄라이카 괴한은 말을 잃게 만드는 옷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빨간색과 녹색으로 염색한 머리에는 보기만 해도 미칠 듯한 핫핑크로 장식된 작은 티아라를 쓰고 있었다. 티아라에 달린 뽀송뽀송한 깃털조차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핑크색이었다. 유치원에서라면 단연코 슈퍼스타가 될 수 있는 티아라지만 성인 남자가 쓰기에는…….

옷은 공주님 드레스라고밖에 표현이 안 되는 화사하고 풍성한 분홍 드레스였다. 90년대 디즈니 스타일이라고 할까, 말 그대로 동화에서 막 빠져나온 것 같은 모양새였다. 프릴과 레이스가 늘어져 요정날개 같이 나풀거리는 치맛단은 반경 1미터 내로 사람을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풍선같이 동그랗고 두툼하게 부풀어 오른 슬리브 밑으로는 전장을 몇 개나 헤쳐 나온 역전용사 같은 건장한 팔뚝이 우람한 근육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나마 풍성한 치맛자락이 다리를 가리고 있어서 망정이지 팔뚝의 크기로 짐작해 보건데 어쩌면 다리 사이에는 차르 봄바 같은 게 당당히 달려있지 않을까. 이쯤 되니 다리가 가려지는 게 다행이었다.

그 와중에 불빛 때문에 눈은 부신지 얼굴에는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코스프레는 딱 종아리까지만 한간지 신발은 또 뭉툭하고 두꺼운 전투화였다. 워낙 미친놈들이 많은 바닥이라지만 그 안에서도 독보적으로 미친 모습이어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러다가 암살자 중 하나가 머리 염색을 보고 그를 알아봤다.

“저거 혹시 알렉산드라이트 아니야?”

자신의 이름이 흘러나오자 근육질의 공주님이 씨익하고 이빨을 드러내며 흉악하게 웃었다.

“이런 미친……. 뭐하는 짓이야!”

“같은 편을 공격하면 안 되지, 미친놈아!”

그들은 알렉산드라이트 역시 벤체슬라스의 전 재산을 받아낼 목적으로 사파이어 사냥에 참가한 건 줄 알았다. 그러나 그가 빽 소리쳤다.

“나 너희랑 같은 편 아닌데!”

“뭐?”

“집 나간 마누라 찾으러 왔다, 이 새끼들아!”

그의 외침이 신호탄이 되었고 어느 샌가 공장부지 안에 들어와 포진해있던 그의 부하들이 사격하기 시작했다.

알료샤는 제일 가까이 있는 놈의 머리를 발랄라이카로 또 한 번 날려버렸다. 악기로 만들어진 발랄라이카는 둔기로써의 책무를 다하지 못하고 목이 부러져버렸다. 알료샤는 망가진 발랄라이카를 옆으로 던지고 치맛단을 걷어 올려 그 안에 숨겨두었던 AK 47소총을 꺼내들어 안정된 자세로 어깨에 붙이고 그대로 쏘기 시작했다.

세상 어느 나라의 공주님이 우라돌격을 감행하는 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알료샤는 훌륭한 지휘관이었다. 발랄라이카를 치며 시선을 끈 것도 다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그 사이에 자기 부하들이 공격을 시작하기에 좋은 위치로 가서 자리를 잡았으니까.

핑크색 드레스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도 설명할 수 없는 것이지만.

사파이어가 무모하게 적진에 뛰어든다면 알료샤의 용기는 다분히 계산된 면이 있었다. 알료샤가 탄창을 다 비우기도 전에 대부분의 적이 소탕되었다.

알료샤는 부하들의 엄호사격 덕분에 털 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그의 부하들은 평소와는 어딘가 달라보였다. 길에서 대충 이런 저런 어중이떠중이를 모아놓은 오합지졸이 평소의 알료샤 패거리라면 오늘은 뭔가 좀 더……. 훈련된 느낌을 주었다.

길거리 양아치 집단과 전투 훈련을 받은 용병단의 차이라고 할까.

다행이게도 부하들의 옷차림은 알료샤와 달리 상식적이었다. 전투복 위에 방탄복을 입고 군홧발 차림이어서 일반 시민과는 확실히 구분되는 모습이지만 적어도 미칠 듯한 핑크 드레스보다는 훨씬 정상적이다.

알료샤가 그들의 편이 아니라는 걸 안 순간부터 암살자 중 몇몇은 싸우기를 포기하고 도망쳤다. 사파이어를 잡겠다는 생각도 버렸다.

같은 편일 땐 한 없이 든든한 게 알료샤일지 몰라도 적으로는 절대로 돌리고 싶지 않은, 아니 돌려서는 안 되는 남자다. 세공사 협회에게 크게 얻어맞기는 했어도 그는 아직까지 건재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다. 알료샤 자신이 하나의 세력이고 조직인 셈이다.

그리고 좀 더 직접적인 이유가 있다. 숨어서 급습하는 암살이라면 몰라도 이런 식의 전면전에서는 확실하게 알료샤에게 밀린다. 그 자신의 전투 스타일도 그렇고 부하들도 마찬가지지만, 그들은 대놓고 싸움판을 벌이는데 더 강하다. 전술적이라고 할까. 소규모 전투보다 전쟁 그 자체에 더 능숙한 것 같다.

소문일 뿐이지만 알료샤는 한때 블랙워터 사에서 용병으로 일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그게 사실이라면 그의 싸움방식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등 뒤에서 일어나는 커다란 폭발을 배경으로 알료샤가 드레스 자락을 휘날리며 저벅 저벅 걸어왔다. 배경음으로 신나는 노래라도 나오는 것 같은 경쾌한 발걸음이었다. 알료샤는 단검을 쥐고 자신에게 달려드는 암살자를 붙잡아 그대로 목을 꺾어버리면서, 또 다른 한 손으로는 다른 놈을 쓰러뜨리고 방금 뺏은 단검을 던져 꽂아 넣으면서 불타는 건물 앞까지 다가왔다.

마침 사파이어가 노획한 일본도를 한 손에 챙겨들고 밖으로 나온 참이었다. 또 한 번 화염 속에서 재회했지만 이번에는 둘 사이에 장애물이 없었다.

알료샤와 마주한 사파이어는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알료샤는 춤추듯이 가볍게 다가가 자연스럽게 사파이어의 고개를 쥐고 깊게 키스했다. 그들의 등 뒤로 불꽃놀이 같은 폭발이 일어났다.

알료샤는 지켜보는 사람이 어색해질 정도로 길고 진한 키스를 하더니 고개를 떼어냈다. 사파이어는 기습키스에도 도통 놀라지 않았다. 알료샤가 여기 있다는 사실에도 크게 놀라운 점이 없는 것 같았다. 그가 언젠가 자신을 찾아내리라고는 예상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집 나간 왕자님 찾으러 왔어요.”

“알료샤. 오랜만이군.”

사파이어의 인사에 알료샤는 감격에 차 눈을 빛내며 수줍게 얼굴을 감싸 쥐었다.

“오랜만이에요, 왕자님!”

“찾으러 온 게 아니라 잡으러 온 것 같은데.”

사파이어는 알료샤를 훑어보고 나서야 그동안 자신이 알료샤에게 느꼈던 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이제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건 일종의 책임감이었다. 어쩌면 내가 그를 저렇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죄책감이었다……. 사파이어가 난생 처음 측은한 표정을 지었다.

“드디어 진짜 미친 건가.”

“왕자님한테 잘 보이려고 예쁘게 꾸민 건데!”

“미안해…….”

알료샤는 사파이어가 이전보다 더 구체적으로 감정표현을 하자 살짝 감동을 받았지만 곧 그가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아니 아니 아니 아니, 나 안 미쳤어요! 안 미쳤어!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내 잘못이야.”

“아냐! 아니라니까! 이거 장난이야! 나 안 미쳤어!”

“내가 그런 식으로 당신을 떠나버려서 충격을 크게 받았을 거야.”

“아니 아니, 내 눈 좀 봐! 멀쩡하다니까!”

알료샤가 선글라스를 벗고 필사적으로 자신의 정신상태가 멀쩡하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지만 사파이어는 뭐라 말할 수 없이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료샤가 자기 좀 도와달라는 듯이 부하들을 돌아보았지만 암살자 잔당을 처리하고 있던 부하들은 알료샤 쪽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가 사파이어와 진한 스킨십을 하는 것도, 그의 옷차림새도 안구 건강에 과히 좋지 못한 장면이었으니까. 굳이 쳐다봐서 악몽의 레퍼토리를 늘리고 싶지 않았다.

알료샤는 설득하기를 포기했다.

“나 반성 많이 했어요, 사파이어. 내가 이기적이었다는 것도 알게 됐고. 난 진정으로 당신을 생각하지 않았던 거 같아요. 나한텐 숭배자가 필요했으니까. 당신의 신이 되고 싶었고……. 당신이 자기 의지로 선택을 내렸는데 내 욕심으로 그걸 막은 셈이니까. 그 벌을 받았다고 생각해요. 당신도 알겠지만 난 나 밖에 모르는 나르시스트니까.”

“나도 나 밖에 몰라.”

“아니, 당신은 절대로 나처럼 될 수 없어요. 당신이 원한다면 내 손으로 죽이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으니까. 당신이 죽음으로써 안식을 얻는다면, 그 역할을 내가 해주고 싶었어요. 당신의 신이 되고 싶었으니까. 그 정도로 당신의 절대자가 되고 싶었으니까.”

“대기표 받아와. 나 죽이려면 줄 서야 돼.”

반쯤은 사실인 소리였는데 그게 무슨 기폭제라도 된 건지 알료샤가 걷잡을 수 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방금 어떻게 한 건진 모르겠지만 내가 이 남자를 웃겼다는 건 알겠다. 정상적인 사람처럼, 남과 상호작용을 했다. 농담을 했단 말이다.

예전의 자신은 이런 일반인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을 했던 것 같다. 난 괴물이 아냐. 나도 다른 사람처럼 정상적으로 굴 수 있어. 예전에는 그런 행동 하나 하나에 뿌듯함을 느꼈다.

지금도 마찬가지고.

“지금은 살고 싶어졌어. 살아남을 거야.”

“물론이죠.”

알료샤는 죽음이라는 단어는 꺼내지도 말라는 듯이 눈을 치켜떴다.

“이제는 당신 붙잡지 않을 거예요. 하고 싶은 대로 다 해요. 그 대신에, 내가 당신을 돕게 해줘요. 그리고 언젠가는 나한테 다시 돌아와 줘요.”

“또 만나지.”

“아니. 이번엔 내가 당신을 만나러 갈 거야. 그러니까 지금은 가도록 해요. 다녀와요.”

알료샤가 사파이어에게 짧게 입맞춤했다. 사파이어는 잠시 생각하다가 간결하게 인사했다.

“또 만나.”

알료샤는 떠나는 사파이어에게 차 키를 던져주었다. 그리고 이제야 나타나기 시작한 경찰특공대와 맞붙기 시작했다. 알료샤는 사파이어가 도망갈 때까지 충분히 시간을 벌어주다가 사파이어가 보이지 않게 되자 부하들을 데리고 잽싸게 튀었다.

알료샤의 도움으로 무사히 그 곳을 빠져나온 사파이어는 프랑스로 향했다.


국가 간의 공조수사가 시작되었다.

체코 경찰로부터 정보를 넘겨받은 독일 경찰은 도르트문트의 총격전과 폐 공장 방화 사건에 대한 정보를 합쳐 프랑스 경찰에게 넘겨주었다. 네덜란드와 벨기에, 룩셈부르크에도 수사협조 공문이 날아갔다. 사파이어의 얼굴이 제대로 포착된 건 아니지만 몽타주는 만들어져서 배포됐고, 각 언론사에는 당분간 이 사건에 대한 보도를 금지하는 엠바고가 내려졌다.

이제부터 국가 권력이 사파이어를 잡으려고 할 것이다.

자유와 자기 자신에 대한 기억을 찾기 위해 사파이어는 주저 없이 세상을 적으로 돌렸다. 그가 요구하는 것은 극히 간단하다. 내 인생을 내 의지대로 살겠다는 것. 한 때 내 것이었던 걸 되찾겠다는 것.

알료샤는 즉흥적으로 차를 넘겨준 게 아닌 것이 분명하다. 차 안에는 무기와 탄약, 돈이 들어 있었고 구급상자와 전투식량까지 들어 있었다. 작정하고 사파이어에게 건네주려고 준비한 게 틀림없다.

하트모양 초콜릿으로 가득한 상자도 하나 들어있었지만 사파이어가 단 것에 대해 별 감흥이 없다는 걸 알료샤가 깜박한 모양이다. 하트 모양 초콜릿이 가지는 사회적인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

벨기에까지 넘어갔던 사파이어는 그대로 달려서 프랑스 땅에 도착했다. 벨기에를 거쳤기 때문에 오히려 바로 칼레까지 향할 수 있었다.

릴을 지나 됭케르크까지 간 사파이어는 방향을 틀어서 칼레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기나긴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사파이어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았다. 독일에서 그 난리를 쳤으면 벌써 경찰이나 또 다른 암살자가 따라 붙어도 이상하지 않은 일인데 의심이 들 정도로 고요했다.

알료샤가 도와주겠다고 한 건 어떤 의미였을까. 경찰을 매수라도 한 건가? 하지만 암살자들에 대해서는 방법이 없을 텐데?

액셀을 밟으며 라디오를 틀었던 사파이어는 도르트문트 방화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된 동양인이 마르세유에서 검거됐다는 소식을 듣고 상황을 파악했다.

가짜란 게 금방 탄로 날 것이다. 그럼 또 다른 도시에서 또 다른 남자가 나타나겠지. 사파이어는 그림자처럼 숨어 다닐 수 있을 것이다. 운이 좋으면 프랑스를 통과할 때까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겠지.

드디어 칼레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 채널 터널을 건너 영국으로 넘어가는 게 문제다. 차량 째로 열차에 탈 수 있지만 입국심사가 문제다.

돈으로 대부분의 문제를 해결했고 원어민과 차이가 없을 정도로 그 나라의 언어를 구사하며 유럽 어느 나라에도 녹아들 수 있는 외모로 손쉽게 국경을 넘어 다니던 벤체슬라스도 유럽 대륙에서 영국으로 넘어갈 때는 성가신 과정을 거쳤다. 그의 소유물에 불과하던 사파이어에게도 훤히 보이던 것이었다.

유럽인인데다가 백인 남성인 그도 빡빡한 입국심사를 피해가지 못했는데 신원도 불분명한 동양인이 과연 통과할 수 있을까?

칼레 시내에 들어섰을 때는 거의 자정에 가까운 시각이었다. 알료샤가 차 안에 넣어둔 돈이 있지만 호텔에서는 묵을 수 없었다. 항구 근처에다가 차를 대고 잠깐 눈을 붙인 다음 터널을 지날 수 있는 방법을 찾거나 아니면 여객선에 몰래 숨어드는 방법이라도 생각해둬야 한다.

사파이어가 도심 중앙을 지나치려고 할 때 즈음 그의 차 옆으로 은색 시트로앵 한 대가 바짝 따라붙었다. 사파이어를 추월하지도 않고 그의 뒤꼬리에 따라붙지도 않는다. 바로 옆에 달라붙어서 속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사파이어가 옆을 흘끗 돌아보자 운전석 창문이 내려가고 구릿빛 피부에 금발머리인 남자가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어째 조용히 넘어간다 싶었더니…….

사파이어는 생 피에르 공원 근처까지 가서 차를 멈추었다. 시트로앵도 그의 옆에 차를 대놓곤, 안에서 남자가 내렸다. 사파이어가 내려서자 남자가 쾌활하게 인사했다.

“오랜만이야! 사파이어였던가?”

상대는 사파이어를 알아보는 것 같지만 안타깝게도 사파이어는 눈앞의 남자가 기억나지 않는다. 적인가, 아군인가? 사파이어는 일단 차 안에서 무기를 꺼냈다.

“성격도 급하지.”

남자 역시 차에서 무기를 꺼냈다. 좋아, 확실하게 아군은 아니군.

“일단 프랑스 안에서는 난동부리지 않아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 당신이 난리쳐서 경찰이 일을 제대로 하기 시작하면 세공사들도 몸을 사릴 수밖에 없거든. 그럼 내 수익도 줄어드는 거고.”

“미안한데.”

사파이어가 중간에 말을 끊었다.

“누구였더라?”

“어떻게 기억을 못할 수가 있어!”

남자가 핀잔을 주더니 말했다.

“장 바티스트 고디에가 내 세공사야. 난 그의 부하……. 보석이고.”

“페리도트.”

“그래, 페리도트. 이제 기억하네.”

워낙 존재감이 없어서 잊고 있었다는 말은 하지 못하겠다.

“적으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 이 일을 계속하다보면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지만. 그나저나 체격이 더 두꺼워진 것 같은데? 근육량 늘렸어?”

“이 동네는 세공사나 보석이나 말이 많군.”

사파이어가 다짜고짜 총구를 내밀었다. 수다가 한 없이 이어질 것 같던 페리도트도 번개 같은 속도로 사파이어와 마주 총구를 겨눴다.

겉보기에는 빈틈이 많아 보이는데 그 역시 숙련된 암살자다. 하지만 둘 모두 먼저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고, 누가 먼저 공격할 것이냐에 대해 서로 눈치를 주다가 결국 총은 쓰지 않게 됐다. 페리도트는 칼레의 평온한 밤을 깨기 싫어했고 사파이어는 숨어야 할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페리도트는 전기톱을 쓰는 덴 주저하지 않았다. 똑같은 소음이라도 총성보다는 전기톱 쪽이 경찰에 신고가 들어가는 데 시간이 더 걸릴 테니까.

사파이어가 가지고 있는 근접전 무기라고 해봐야 지금은 일본도 밖에 없어서 일단 꺼내들기는 했지만 눈앞에서 요란하게 돌아가는 톱날에 갖다 대자니 바로 두 동강 날 것 같았다. 그래서 사파이어는 등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페리도트는 전기톱을 번쩍 들고 슬래셔 영화의 미친 살인마마냥 사파이어를 쫓아왔다.

공원은 오후 5시가 되면 문을 닫는다. 탁 트인 공원이고 숨을 곳은 없다. 사람이 없기 때문에 맘 놓고 난장판을 벌일 수 있다는 것 하나만 장점이었다.

사파이어는 암묵적인 합의를 깨고 총을 쏠까 고민했다. 사파이어가 방아쇠를 당기기 시작하면 페리도트도 전기톱 대신에 총을 쏠 것이다. 그럼 둘 중 누구 하나가 죽거나 탄환이 떨어질 때까지 총격전이 일어날 것이고 금방 경찰이 벌떼같이 몰려들겠지.

여기까지 도착했는데 영국을 눈앞에 두고 잡힐 수는 없다. 바다 건너에는 벤체슬라스가 그의 유품을 쥐고 기다리고 있다.

도망치던 사파이어의 앞으로 누군가가 나타났다. 그는 사파이어를 등 뒤로 빠져나가게 두면서 뒤에서 쫓아오던 페리도트와 맞섰다.

“드디어 내가 나설 차례가 됐군!”

사파이어는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잠시 멈춰 섰고 뒤따라오던 페리도트 역시 전기톱을 아래로 내렸다.

“이건 또 뭐야? 웬 방해꾼이야?”

“내 이름은 스피넬. 이제야 내 실력을 보여주게 되서 기쁘군.”

스피넬은 등 뒤의 사파이어에게 씨익 웃으며 말을 건넸다.

“잘 봐두라고. 언젠가는 당신과 실력을 겨루게 될 테니.”

“알료샤가 보낸 건가?”

“반쯤은 내가 자원했어. 당신이 이런데서 죽으면 소문이 자자한 사파이어의 칼솜씨를 보지 못해서 아쉬울 것 같았거든.”

스피넬은 자루가 유난히 긴 중국대도를 꺼내들며 빙글 돌리더니 손에 착 감아쥐었다. 자루 끝부분엔 동그란 고리가 달려 있었는데 스피넬은 그 안에 긴 천을 감아 매더니 다른 손으로 그것을 감으면서 칼을 8자 모양으로 빙글빙글 돌리며 시험해 보았다.

날 길이는 60~70cm 정도 되는 것으로, 자루 역시 그와 비슷할 정도로 길어서 제대로 쥐고 힘을 실어 베면 도끼만큼의 파괴력이 나올 것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스피넬의 무기를 보더니 페리도트가 야유하듯이 외쳤다.

“반칙이다!”

“반칙 좋아하시네. 전기톱 들고 날뛰는 주제에.”

“당신이 누군진 몰라도 당신이랑은 관계없어. 난 사파이어를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빠져!”

“안타깝군. 난 사파이어를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스피넬이 칼끝을 까딱했다.

“덤비라고, 애송이. 시간 끌지 말고.”

페리도트가 더 이상은 경고로 끝내지 않고 전기톱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첫 공격은 허무하게 빗나갔다.

얼핏 보기엔 전기톱이 더 유리해보이지만 전기톱은 애초에 공구로 만들어졌지 검처럼 살상무기로 제조되지 않았다. 위력은 인정하지만 밸런스가 맞지 않아 동작이 커진다. 엔진부가 달린 손잡이가 아무래도 무겁다. 동작이 크면 빈틈도 많아진다는 소리다.

스피넬은 돌아가는 톱날이 눈앞에서 어른거리는데도 여유롭게 톱날 끝을 피해나가며 공격 기회를 잡았다. 돌아가는 전기톱이 안겨 줄 공포감은 이런 일과 인연이 없는 초짜한테나 먹히는 것이다.

주력무기에서 알 수 있듯이 스피넬은 원래부터 칼날을 섞어가며 싸우던 암살자다. 잔재주는 통하지 않는다.

스피넬이 가지고 노는 것처럼 보이자 페리도트가 마구잡이로 전기톱을 이리저리 휘둘렀으나 톱날은 조금도 스치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의 동작만 휘청거릴 정도로 커져서 몸을 주체하기가 힘들었다.

그 순간 스피넬이 옆으로 몸을 피하더니 정자세로 칼을 내려찍어 전기톱의 체인을 박살냈다.

돌아가던 속도가 있던 체인은 묵직한 칼날에 용케도 끊어지진 않았지만 그 충격 때문에 바깥으로 튕겨나가 위험하게 흩날렸다. 당황한 페리도트가 자신에게 톱날이 날아오는 줄 알고 전기톱을 멀리 내뻗으며 던지려고 하자 스피넬이 물처럼 유연하게 칼을 휘두르며 전기톱의 엔진부를 쳐냈다.

페리도트가 무기를 놓치자 스피넬이 재빠르게 칼날을 뒤집더니 칼등으로 페리도트를 베어 내렸다. 아뿔싸 하고 위를 올려다봤던 페리도트는 대도의 두꺼운 칼등에 그대로 가격당하고 뻗어버렸다.

스피넬은 현란하게 칼을 회수하더니 제자를 평가하는 스승처럼 가슴을 펴고 말했다.

“배짱은 나쁘지 않았다! 다음엔 더 노력하도록!”

물론 정신을 잃은 페리도트가 그 소리를 들었을 리 만무하다. 어쨌든 죽이진 않았으니까 기회는 다시 올 것이다.

스피넬은 자신의 실력이 어떠냐는 듯이 으쓱하며 뒤를 돌아보았지만 이미 사파이어는 사라지고 없었다.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사라지다니…….

알료샤는 사파이어에게 손 하나라도 까딱하면 목이 날아갈 줄 알라고 엄포를 놓았지만 스피넬은 언젠가 알료샤가 없는 곳에서 사파이어와 꼭 칼솜씨를 겨뤄볼 생각이었다. 그가 영국까지 갔다가 살아 돌아온다면 말이지.

스피넬은 피식 웃으며 칼을 어깨에 걸쳐 멨다. 그리고 동업자 된 도리로 페리도트를 차마 경찰이 연행해가게 둘 순 없어서 기절한 그를 질질 끌며 공원 밖으로 사라졌다.


차로 돌아가려던 사파이어는 조형물에 걸터앉아 긴 장대로 바닥을 무의미하게 긁고 있는 남자와 마주쳤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에메랄드.”

“내 이름은 기억해주는군. 페리도트와는 이미 만났겠지. 죽였나?”

“내가 상대한 게 아니라서.”

“그래.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다는 거군.”

장대의 재질은 나무가 아니라 진압봉같은 특수 플라스틱으로 되어 있었는데 장대 끝에는 짧은 쇠사슬이 달려있고 거기에 장대와 똑같은 재질의 짧은 추가 달려 있었다. 에메랄드는 장대를 어깨에 걸쳐 메고 목과 어깨를 풀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신과 다시 만나고 싶진 않았어. 같이 일해 봤고 실력이 어떤지 내 눈으로 봤으니까. 근데 이 일을 하다보면 어쩔 수 없지.”

“가족이 있다는 거 기억하고 있어. 아이들이 있다고 했지.”

“왜? 찾아가서 죽이게? 아니면 봐주기라도 할 참인가? 그럴 필요 없어. 최선을 다하라고. 애 딸렸다고 봐주는 거 쪽팔리니까.”

“다른 사람은 건드리지 않겠다. 이건 당신과 나 사이의 일이니까.”

“그래. 고맙군.”

에메랄드는 벤체슬라스보다도 키가 컸다. 2미터 가까이 되지 않을까. 살짝 넘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체구는 유전자부터 다른 게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는 단단하고 균형 잡힌 근육질이었다. 골격부터 다르다. 그와의 체급 차이는 이미 몸으로 겪어서 알고 있었다.

이전에, 피투성이인 사파이어를 가려주기 위해 에메랄드가 자신이 입고 있던 코트와 똑같은 것을 걸쳐주었는데 그 때의 사파이어는 아빠 옷을 입은 아이처럼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어깨넓이나 팔 길이라던가 전체적인 몸의 비율에서 이미 에메랄드를 못 따라간다는 소리다.

하지만 싸움은 그게 전부가 아니지.

“시작할까.”

에메랄드가 동의를 구하자 사파이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다음 순간 에메랄드의 장대가 바람 가르는 소리를 내며 쇄도해 들어왔다.

사파이어는 섣불리 맞붙지 않으며 일단은 에메랄드의 무기를 분석했다. 편곤이다. 현대에 저런 무기를 쓰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하긴 이 바닥은 상상을 초월하는 무기 사용자들이 널려있으니까.

사파이어는 실전에서 저런 병장기가 쓰이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데모를 진압하는 경찰들이 진압봉과 장대를 개조해서 저런 것을 만들어 썼다. 단순하게 봉으로 타격하는 것보다는 위력이 좋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상대의 무기를 무력화시키는데 더 효과가 좋다. 구조에서 알 수 있듯이 쇠사슬과 무게추 부분으로 상대의 무기를 감아버리면 상대는 꼼짝없이 빈손이 된다. 사파이어의 칼 같이 도검류를 붙잡기엔 딱이다.

어쩌면 사파이어가 칼을 쓸 거라고 미리 예상하고 들고 나온 게 아닐까.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다.

총의 등장으로 냉병기는 과거의 유물로 사라지고 그나마 남은 것이 도검류다. 총이 없었을 때는 각 무기에 따라 서로를 견제할 또 다른 무기들이 존재했는데 총이 나오고 나서는 모든 게 의미 없게 되어버렸다. 쏴버리면 끝나는 이야기니까.

반대로 생각하면 몇 몇 무기 빼고 전멸한 냉병기 싸움에서 편곤을 들고 나온 건 의표를 찌르는 한 수라는 소리가 된다.

에메랄드는 추 부분을 빙글 빙글 돌리며 사파이어가 접근하지 못하게 거리를 재고 있었다. 동시에 사파이어의 무기를 어떻게 뺏을지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사파이어가 속도와 기술로 승부한다면 에메랄드는 힘에다가 모든 것을 쏟아 부은 것 같았다. 어차피 속도로는 이길 수 없으니까 반대로 공격 하나 하나에 묵직한 힘을 싣는다. 한 대라도 맞으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사파이어는 양손으로 칼을 쥐고 중단세를 취했다. 변칙을 부리지 않고 가장 기본적인 자세로 맞선다. 공격과 방어, 둘 모두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는 자세지만 다른 의미도 있었다. 상대와 나의 거리를 재는 것이다.

사파이어가 방어적으로 나오고 도통 공격하려 들지 않자 에메랄드가 먼저 무기를 휘둘러왔다.

편곤의 추가 길게 뻗어있는 검신의 반절을 넘어 다가오자 사파이어가 바로 편곤을 후려치면서 안으로 쑥 파고들었다.

묵직하게 한 방 휘둘렀던 에메랄드는 곧바로 무기를 수습하지 못하고 공격범위를 내어주고 말았다. 사파이어 역시 위태롭게 무게추를 피했다.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는 무게추에 뒷덜미가 오싹해졌다. 제대로 맞았으면 머리가 깨졌을 것이다.

사파이어가 일격을 가하기 전에 에메랄드가 봉을 휘둘러 사파이어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제때 피하지 못한 사파이어가 허리를 가격당하며 몸이 틀어졌다. 칼끝은 에메랄드를 살짝 베어 내렸다. 제대로 맞았으면 에메랄드는 두 동강이 났을 것이다.

힘으로 쑤셔 박은 공격이 이런 것일까. 뼛골이 찌르르 울렸다. 사파이어는 반사적으로 허리를 감싸 쥐며 다른 손으로는 재빨리 칼을 앞으로 내뻗었다. 그리고 에메랄드가 재차 공격하지 못하게 방어하면서 뒤로 물러섰다.

잘못했으면 칼을 놓칠 뻔 했다. 에메랄드도 살짝이긴 하지만 칼에 베인 충격 때문에 섣불리 편곤을 휘두르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도 주마등을 봤겠지. 아내와 아이들을 쏙 빼닮은 사신이 그를 껴안으려고 했을 것이다.

에메랄드는 신중하게 다시 추를 빙글빙글 돌리며 공격 기회를 엿보았다.

방금 전 주고받은 공격으로 사파이어는 어렴풋이 편곤의 약점을 알 것 같았기에 이번에는 칼을 비스듬히 옆으로 내려 하단세를 취했다.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면서 공격하겠다는 소리다.

에메랄드 역시 사파이어의 신속성을 맛보았기 때문에 조금 전 같은 실수를 다시 하려고 들지는 않았다.

요컨대 편곤은 공격 하나하나가 큰 대신 타격이 빗나가면 수습할 수 없는 빈틈이 생긴다.

한 번 휘둘러서 사파이어를 맞추면 좋겠지. 못 맞추면 무방비 상태로 사파이어의 칼날에 노출된다. 에메랄드가 다시 공격하려고 편곤을 들어 올리자 한 발 빠르게 사파이어가 파고 들어갔다.

그것이 에메랄드의 계략이었다. 에메랄드는 부주의하게 편곤을 휘두르는 대신 사파이어의 무기를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무게추의 쇠사슬이 칼날에 감겨들자 사파이어가 칼을 뒤로 쑥 뺐지만 이미 얽혀 들어서 빠지지 않았다.

일순 사파이어의 당황한 얼굴과 에메랄드의 미소가 교차했다.

에메랄드가 사파이어의 칼을 확 잡아 빼려는 순간 설명할 수 없는 충격에 의해 에메랄드가 편곤을 놓쳤다. 그 충격 때문에 사파이어도 칼을 놓치고 말았다.

에메랄드의 편곤은 쇠사슬이 이어진 부분 바로 아래가 완전히 날아가 버렸다. 찢어진 것 같은 모양새다. 에메랄드와 사파이어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시선을 교차하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엄폐물을 찾아 몸을 숨겼다.

저격이다!

누구지? 누굴 공격한 거지? 에메랄드인가, 사파이어인가? 아니면 둘 다인가? 사파이어 사냥에 참가한 다른 암살자가 끼어든 건가?

사파이어는 품 안에 숨긴 권총을 꺼내들려고 했다. 어디에 있는지 모를 저격수는 제쳐두고서라도 눈앞의 에메랄드는 확실하게 처리해둬야 한다. 에메랄드도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는지 품 안에 숨긴 총을 꺼냈다.

그 순간 에메랄드가 숨긴 엄폐물 쪽으로 또 한 번 저격이 날아왔다. 손에 쥔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다음에는 정확히 손등을 꿰뚫어버리겠다는 듯이 겁주는 것 같았다.

충분히 맞출 수 있는데 일부러 빗맞힌 저격이다. 소름이 돋았다. 사파이어는 자신을 공격하지 않는 저격수가 누구인지 정체를 알아챈 것 같았다.

“피전 블러드.”

사파이어가 보석명을 말하자 에메랄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파이어와 함께 일할 때 그 저격 솜씨를 본 적이 있다. 조준속도가 인상적이었고 정확도도 대단했다. 긴 장대에 불과한 편곤의 한가운데를 정확히 꿰뚫을 정도라면 더 설명이 필요 없겠지.

어디에 숨어있을까. 거리는 얼마나 될까. 밤인데도 저격수의 총알은 눈이 달린 것처럼 에메랄드를 견제하고 있었다. 사파이어가 넌지시 제안했다.

“날 그냥 보내줘야 할 것 같은데.”

“그럴 순 없지.”

“저격수에게 대항할 셈인가?”

“나도 장 바티스트에 대한 신의라는 게 있어서 말이야.”

“알았다.”

사파이어가 엄폐물 바깥으로 나가 무기를 주워들었다. 자신의 칼에 감긴 쇠사슬을 풀어냈고, 무게추 부분이 날아가 버려서 기다란 봉에 지나지 않게 된 에메랄드의 무기 역시 그에게 던져주었다.

사파이어가 다시 칼을 쥐고 준비 자세를 취하자 저격이 멈췄다. 에메랄드는 끝부분이 날아간 봉을 쥐고 엄폐물 밖으로 나왔다.

이제부터는 전략이 통하지 않는 정직한 싸움이다.

“멍청하기는.”

숨어 있던 피전 블러드는 스코프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입술을 꾸욱 물었다.

피전 블러드는 둘 모두에게 기회를 줬다. 사파이어에겐 그대로 도망갈 기회를, 에메랄드에겐 싸움을 포기할 기회를. 둘 모두 그것을 거부했다. 알아서 하라지.

단, 피전 블러드는 사파이어를 엄호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명령은 지켜져야 한다. 에메랄드에게 두 번째 기회는 없다.

편곤이 아니라 봉과 칼의 싸움이 되자 사파이어가 압도적으로 에메랄드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에메랄드는 막는 것이 고작이었다. 위력은 떨어져도 저 민첩성은 따라가지 못한다.

엄호해주려던 피전 블러드 역시 잘못해서 사파이어를 맞추지 않으려고 미세하게 조준을 계속 바꿔갔다. 스코프로 지켜보자면 두 남자의 얼굴 표정까지 너무나 자세히 보인다. 죽음 앞의 절박함과 살인에 대한 머뭇거림이 있는 얼굴들.

저런 멍청이들. 피전 블러드는 짤막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그리고 사파이어가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는 순간 방아쇠를 당겼다.

저격은 에메랄드의 허벅지에 명중했다. 자세가 흐트러진 에메랄드가 한쪽 어깨로 무너지자 사파이어의 공격이 아슬아슬하게 빗나갔다.

에메랄드는 허벅지를 감싸 쥐며 바닥을 뒹굴었다. 사파이어는 그가 완전히 무력화 됐다고 판단하곤 즉시 공격을 멈췄다. 그리고 크나큰 고통에 소리도 지르지 못하는 에메랄드를 내려다보더니 재빨리 옷을 찢어 그의 환부를 강하게 조여 맸다.

터져나간 그의 상처를 보니 동맥이 손상을 입었다. 가만히 내버려두면 과다출혈로 죽을 것이다. 사파이어가 에메랄드의 손을 잡아끌어 허벅지 안 동맥에 닿게 해주었다.

“죽기 싫으면 꽉 누르고 있어.”

“왜……. 죽이지 않는 거지.”

“무력화 됐으니까.”

“거짓말엔 서투르군…….”

“피전 블러드는 첫 한 발로 당신을 죽일 수 있었을 거야.”

“기회를 줬다는 건가.”

“내가 베었으면 동맥이 날아가는 걸로는 끝나지 않았겠지.”

“감상적인 바보는 이 바닥에서 오래 못 살아. 정말, 멍청하군…….”

에메랄드는 뭐가 웃긴지 낄낄 웃었다. 감상적인 바보는 오래 살지 못한다. 맞는 말이다. 사파이어를 보자마자 편곤 따위로 상대할 게 아니라 총으로 쏴 죽여야 했는데.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었는데 에메랄드는 그것을 거부하고 사파이어와 병장기를 섞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어쨌든 바보는 일찍 죽게 마련이다. 감상 따위는 개나 주라지.

“죽지 마.”

“쪽팔리게. 하하하하.”

“죽지 마.”

“고마워.”

에메랄드는 구급차가 올 때까지는 살아있을 것이다. 그 다음에는, 글쎄 하늘에 맡겨야겠지.

사파이어는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을 피전 블러드에게 크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표정만큼은 평소와 다름없이 무표정했다. 스코프로 이 촌극을 지켜보던 피전 블러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저격 총을 회수하고 재빨리 그 자리를 떠났다.

“첫째가 그러더라.”

떠나려는 사파이어에게 에메랄드가 힘이 다 빠진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조그만 게 뭘 안다고 나보고 나가지 말라는 거야. 평소에는 내가 뭘 하고 돌아와도 아무것도 모르던 주제에. 이번만큼은 어떤 예감이 들었나보지. 이 꼴로 병원에 누워있으면 마누라한테 바가지는 엄청 긁히겠구만. 그래도 꼬마들한테 들려줄 이야기는 생겼으니까.”

“또 만나지.”

“다음엔 손님으로 오라고. 당신이랑 또 싸우기는 싫어. 징글징글해.”

사파이어가 고개를 끄덕이곤 사라지자 에메랄드는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어처구니가 없는지 웃음을 터뜨렸다. 결국에 그는 살았다. 엉망진창이긴 해도. 행운이 몇 겹으로 겹쳤다. 그나저나 이번 부상은 대충 넘어갈 수 없게 됐다.

슬슬 이 일도 그만둘 때가 됐나……. 에메랄드의 긴 한숨소리가 울렸다.


장 바티스트 고디에는 공원의 끝부분, 시청과 맞닿아 있는 곳에 서 있는 칼레의 시민 조각상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로댕의 작품이다. 죽기를 각오한 6명의 사람을 표현한 작품인데 머리를 감싸 쥐고 절절히 고뇌하는 모습이 마을을 살리기 위한 영웅이라기보다는 죽음 앞에 두려워하고 의심하는 인간의 본모습을 그대로 표현해냈다.

인간. 결국은 그것이 영웅의 본질이다.

두려워하고 의심하고 화내고 부정하고 끝내는 받아들인다. 체념과는 어딘가 다른, 의연한 기백이다.

무늬로만 유지하고 있는 미술상이지만 장 바티스트는 예술로 표현된 인간의 갖가지 본질을 보면서 자신만의 안목이 생겼다. 안목은 곧 철학이고 행동 기준이다. 나 자신의 근간이 된다.

이 나라 저 나라를 오가며 일을 따내는 세공사들과 달리 장 바티스트는 프랑스 바깥으로 나가본 적이 그리 많지 않다. 그는 프랑스에 대해 애착을 가지고 있었고 프랑스인으로서의 자부심도 있었다.

비록 자신이 사랑하는 나라 안에서 청부살인이라는 떳떳치 못한 일을 업으로 삼고 있지만 그는 프랑스라는 국가, 여기에 사는 사람들, 이 세계에 대한 어떤 소속감을 가지고 있었다. 소속감은 곧 책임감을 만들어낸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외국놈 둘이 바깥에서 싸우다가 그 문제를 프랑스 안으로 가지고 들어오면 장 바티스트로서는 자기 동네를 지켜야할 일종의 의무 같은 걸 느낀 달까. 비록 자신이 그 두 놈 중 하나에게 고용되어 다른 놈과 맞서 싸워야하는 입장이 되었다고 해도, 결국 자기 영역을 지키겠다는 책임감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장 바티스트는 벤체슬라스처럼 전투 능력이 월등해서 주인 자리를 차지하는 건 아니었다. 진지하게 싸우면 에메랄드는 장 바티스트를 죽일 수 있다. 장 바티스트는 자신의 한계를 잘 안다. 그렇기 때문에 벤체슬라스처럼 무력으로 억압하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보석들에게 족쇄를 채워두었다.

삶의 안락함과, 풍요로움과, 또 가정이라는 족쇄를…….

물론 전투능력이 없다는 소리는 아니다. 워낙 괴물 같은 신인들이 많아서 그렇지 그도 한 때는 킬러로서 활동했다. 그가 처음부터 세공사에다가 미술상이었던 건 아니다.

이곳은 사파이어를 저지하는 마지막 방어선이다. 그가 페리도트를 꺾고, 그 다음에 에메랄드까지 꺾었으면 이제는 장 바티스트와 대적할 것이다.

에메랄드를 죽인 시점부터 장 바티스트의 생존 확률은 극히 낮아진다. 자신의 으뜸가는 보석도 막아내지 못한 킬러인데 자신이라고 막아낼 수 있을까. 하지만 할 수 밖에 없다. 의뢰를 수임해버렸기 때문에.

신의. 잘 쓰이진 않지만 이 바닥에서는 신의도 화폐가치로 통한다. 장 바티스트가 의뢰를 맡아 놓고 결정적인 순간에 고용주를 배신해버린다는 악평이 퍼지면 누구도 그와 계약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믿음이란 곧 재산이다.

처음부터 수임하지 않았으면 될 일 아닌가. 그냥 사파이어를 가게 내버려두면 될 것 아닌가. 어차피 외국 놈들끼리 싸우는 것 아닌가. 프랑스를 지나치게 내버려두면 소란은 금방 잦아들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벤체슬라스가 건네는 돈을 받았고, 사파이어를 막아서게 됐다.

왜일까. 수십 수백의 암살자들이 흙발로 프랑스 땅을 짓밟으며 동양인 하나를 사냥하려고 드는 꼴이 보기 싫어서? 벤체슬라스가 자신의 피 같이 여기던 돈을 아무런 주저함 없이 건네주었기 때문에? 사파이어라는 피바람 부는 자연 재해가 순순히 바다를 건너도록 내버려둘 수 없었기 때문에?

알 수 없는 일이다. 자기 자신조차도 오래도록 동기를 알 수 없을 것이다.

등 뒤에서 기척이 들리자 장 바티스트는 심호흡을 하고 뒤돌아섰다. 사파이어가 시퍼런 칼날을 번뜩이며 그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장 바티스트는 “그래. 그래.”하고 혼잣말 하면서 옷깃을 가다듬었다.

“사파이어.”

“세공사 장 바티스트 고디에.”

“난 네 주인에게 고용됐다. 널 막으라고 말이지. 페리도트와 에메랄드는 이미 만났을 텐데, 네가 여기 있다는 건 그들이 실패했다는 소리군. 그 가짜 벨기에인과는 여태까지 거래해 온 우정이 있어서 말이야. 너도 내 입장이라면 똑같이 행동했을 거야.”

“그에게 친구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우린 친구가 아냐. 그런 엉터리 프랑스어나 쓰는 녀석과는 싫은데.”

사파이어는 더 대꾸하지 않고 조용히 칼을 들어보였다. 그러자 장 바티스트가 숨겨놓았던 총을 번개같이 꺼내들었다.

“안 되지.”

거리가 멀다. 칼로는 도저히 공격할 수 없고 장 바티스트는 어쩌면 이 거리에서 사파이어를 맞출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파이어는 그가 싸우는 것을 본 적이 없지만 그와 협업했던 임무에서 그가 에메랄드와 함께 저격으로 자신들을 엄호해줬다는 것은 기억했다. 사격솜씨가 좋을 것이다.

“다른 녀석들은 어떨지 몰라도 난 총성 울리는 것쯤은 신경 쓰지 않거든. 진작 이랬어야 돼.”

앞선 두 보석이 보기 드물게 비현실적이었기에, 정확히는 덜 야비했기에 총을 쓰지 않고 사파이어와 맞붙었다지만 장 바티스트는 다르다. 사실 이게 정상적인 반응이다. 화약의 시대에 냉병기라니,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장 바티스트가 방아쇠를 당기기 전에 누군가가 불쑥 나타났다.

“잠깐 기다려주겠어?”

마리야가 사파이어 앞을 막아섰다. 그러면서 사파이어에게 “알료샤가 보내서 왔어.”하고 속삭였다. 장 바티스트는 예상치 못한 증원군의 등장에 당황했다.

“마리야 이바노브나 바실리예브스키?”

“당신이랑 이렇게 얘기하는 것도 처음인 것 같네. 장 바티스트 고디에.”

“세공사가 왜 여기 있는 거야? 난 계약을 이행하는 중이야. 여기서 빠져.”

“안됐네. 나도 고용주한테 명령을 받아서 온 거거든.”

마리야는 손에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지만 장 바티스트는 함부로 공격할 수가 없었다.

그에게는 고객과의 신뢰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세공사 협회의 규칙이다. 세공사끼리 싸우지 말 것. 싸웠다가 어떤 꼴이 났는지는 그의 고용주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벤체슬라스 정도의 재력이니까 저 정도로 끝난 거지 장 바티스트가 똑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길거리의 노숙자와 다를 바 없는 신세로 전락할 것이다.

“비켜. 마리야.”

“쏠 수 있으면 쏴 봐. 근데 난 피전 블러드를 데리고 왔거든. 내가 다치거나 죽으면 협회에 대신 알려줄걸? 어떻게 할래?”

“빠지라고!”

“안 돼. 당신이 세공사로서의 신의를 지켜야한다면 나도 지켜야 하는 신의가 있어. 세공사끼리 싸우면 결말이 어떻게 되는지 잘 알고 있지? 벤체슬라스 꼴을 봐서 알 거 아냐. 그렇게 되고 싶어?”

당연히 거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싸워야겠다면 덤벼 봐. 오랜만에 현역 시절 실력을 보여줄 테니까. KGB 요원과는 싸워본 적 없지? 이쪽에는 사파이어도 있으니까 두 명을 상대해야 할 텐데 자신 있어? 벤체슬라스의 의뢰가 당신 목숨을 내다 버릴만한 가치가 있을까?”

장 바티스트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고민하다가 총구를 내렸다. 그러자 마리야가 “현명한 선택이야.”하고 격려해주었다.

“사실은 죽이고 싶지 않았던 거지? 마주치자마자 총을 쐈으면 끝날 일이었을 텐데. 페리도트와 에메랄드를 각각 따로 보낸 것도 그렇고. 사파이어가 포기하고 돌아가길 원했던 거지? 친구와의 우정도 친구의 보석도 깨기 싫었던 모양이지. 솔직하게 말하면 될 걸 당신도 은근 소심하네.”

“시끄러워. 친구 아냐. 그런 우정은 내 쪽에서 거절하고 싶어. 징그럽게.”

“위로가 될 진 모르겠는데 당신 보석은 안 깨졌어. 에메랄드는 좀 크게 다친 것 같더라. 아직은 살아있는데 좀 더 늦으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는걸?”

그 소리를 듣더니 장 바티스트가 크게 동요했다. 그리고 마리야가 눈짓으로 가리키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그 역시 자신의 보석의 죽음에 대해선 냉정해질 수 없는 모양이다. 자기 손으로 사지로 떠밀었음에도 불구하고.

마리야가 그 등에 대고 “당신 평판에 대해서는 걱정 마. 내가 잘 말해줄게!”하고 외쳤다. 장 바티스트가 사라지자 마리야가 사파이어를 돌아보았다.

“정보원들한테서 얘기 들었어. 당신이 하도 들쑤시고 다녀서 소문났더라. 한국 정보기관 소속이었다면서? 이 바닥에 들어오기 전에도 동업자였네. 근데 왜 그동안 당신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을까? 이렇게 되기 전에도 당신 실력이 꽤 좋았나봐. 신원이 철저히 감춰진걸 보니까. 이 일은 은퇴하기가 참 힘들어, 그렇지? 다음에 또 이야기 할 기회가 있을 거야. 이제 가.”

사파이어는 마리야의 도움을 받아 브로커와 접선했다. 알료샤에게 미리 언질을 들어두었던 브로커는 사파이어를 컨테이너 트럭 안쪽에 타게 해주었다. 수십 명이나 되는 불법입국자들이 타고 있었지만 그 중에 반 이상이 동양인이라 구석에 있는 사파이어는 잘 눈에 띄지 않았다.

영국으로 도피를 하든, 새로운 기회를 찾아 불법입국을 하든 갖가지 목적을 가지고 불안감에 떨며 모인 사람들은 새로 나타난 동승자의 싸늘한 눈빛과 손에 들린 무기들을 보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파이어를 굳이 자극하려고 하지 않았고 사파이어도 구석에 자기 자리를 확보한 채 남들과 조금도 가까워지려고 하지 않았다.

용케 검문검색에서 벗어난 트럭은 적재화물처럼 기차에 태워진 채 그대로 철로를 달려 터널에 진입했다. 빛도 들지 않는 어둠과 불안감 속에서 이따금씩 차체가 덜컹덜컹 흔들리는 일정한 감각만 남은 채, 그들은 바다 밑을 건넜다.

사파이어는 영국에 도착했다.


그에게도 이름이 있겠지. 그러나 그는 태어날 때부터 바유미 씨인 것처럼 살아왔다.

바유미 씨는 바유미 씨라는 이름으로만 알려져 있는 킬러였다. 그도 한때는 현장에서 뛰는 보석이었지만 지금은 세공사 협회의 대변인이라는 직책으로 서류작업을 더 많이 하고 있다. 스위스, 멀리 가더라도 중부 유럽을 좀처럼 떠나지 않는 그가 갑자기 영국에 나타났을 때는 벤체슬라스도 놀랐다.

“바유미 씨가 직접 오시는군요.”

“잘 지냈습니까.”

바유미 씨는 벤체슬라스가 내놓는 차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손님에게 마실 거리를 내놓는 것은 상식의 범주에 들어가는 예절이지만 바유미 씨에게는 그것이 뭐라고 할까, 잘 갈무리한 서류 한 뭉치 앞에 차를 내놓는 것과 비슷했다.

“내가 왜 찾아왔는지 알 거라고 생각합니다.”

“네.”

“짐작하고 있겠지요?”

“네.”

“협회는 더 이상 당신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영국에선 규칙이 좀 다르게 적용되지 않던가요?”

“당신이 내건 의뢰 때문에 유럽이 소란스러워졌습니다. 당신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유미 씨는 “스코틀랜드 사건도 빼놓을 수 없지요.”하고 덧붙였다. 협회는 벤체슬라스가 다른 세공사를 불태워 죽인 것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럼……. 이미 저는 제가 가진 카드를 모두 써버린 거군요.”

“당신이 말했듯이, 영국에서는 영국만의 규칙이 존재합니다. 이곳에서 당신 평판이 어떻게 되든 우리가 알 바 아닙니다. 당신이 영국에서도 쫓겨나게 된다면 그 땐 협회와 진지하게 이야기 할 기회가 생기겠지요.”

“사파이어 암살 의뢰까지 합하면 네 번이죠. 결국 세 번을 모두 쓴 셈입니다.”

“당신은 아직 당신 보석을 깨지 않았습니다.”

바유미 씨는 무언가를 암시하고 있었다. 벤체슬라스는 그 뜻이 뭘까 곰곰이 생각하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잠시 후에 그가 소리도 나지 않을 만큼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의뢰를 철회하라는 겁니까?”

“의뢰인의 특별한 주문이 아니라면 암살자가 일을 처리하면서 벌인 소란에 대해서까지 의뢰인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법이지요. 의뢰인은 의뢰를 철회하면서 암살자의 일처리 방식에 대해 동의하지 않음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에 대한 신뢰도는 나락으로 떨어지겠군요. 저는 소비자도 판매자도 되지 못할 겁니다. 사파이어는 계속 저를 죽이려고 할 거고.”

“자기방어는 일반인의 세계뿐만 아니라 여기서도 적용되는 상식입니다.”

단 둘이서 처리하라는 주문이다. 나머지 암살자들을 빼고. 더 이상 소란도 일으키지 말고. 그럼 세공사 협회는 눈감아주겠다는 소리다. 이건 터무니없이……. 관대한 주문이었다.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뭘 단단히 착각하고 있군요. 벤체슬라스 씨.”

바유미 씨는 전달할 것을 다 전달했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것이 협회가 제안하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당신이 제안하시는 거겠죠.”

“협회가 제안하는 기회입니다.”

바유미 씨는 확실히 못박아두었다. 사적인 판단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그의 태도에 벤체슬라스는 더 파고들지 않았다. 그저 협회의 이례적인 제안에 고개 숙여 감사했다.

“하지만 저는……. 제 자신을 지켜야합니다. 저는 제 자신을 지키기로 하고 여태까지 살아남았습니다. 당신도 아시다시피.”

“그럼 그렇게 흘러가게 두십시오.”

“찾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건강히 지내십시오.”

“안녕히. 라피스 라줄리.”

짧은 인사였지만 둘은 서로의 뜻을 확고하게 전달했다.

벤체슬라스는 의뢰를 철회하지 않을 것이다. 바유미 씨는 그것을 협회에 전달할 것이고. 협회의 경고를 무시한 대가로 벤체슬라스는 협회의 표적이 될 것이다. 그가 사파이어를 죽이든 죽이지 못하든 협회는 벤체슬라스를 제거하려고 하겠지.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기에 벤체슬라스는 그 동안 담아두기만 하고 표현하지 못했던 감사를 전했고, 바유미 씨는 적절하지 못한 호칭으로 벤체슬라스를 부름으로써 미묘하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바유미 씨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고 벤체슬라스는 자신의 경호원들에게 지시를 내리러 갔다.


공식적으로는 사파이어가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검거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보상들은 그것이 가짜임을 알고 있었다.

사파이어의 마지막 행적은 독일과 벨기에 국경 근처에서 목격된 게 다였고, 그 뒤로 얼마간의 공백이 있었다. 그러다가 세공사 장 바티스트 고디에가 임무 실패를 전하면서 벤체슬라스에게 계약금 일부를 반환한 사실이 알려지자 사파이어가 드디어 프랑스를 돌파해 채널 터널을 넘었다는 소식이 퍼져나갔다.

정보상을 이용하는 건 세공사뿐만이 아니다. 영국 정보기관 MI6는 해외에서 정보를 끌어다 모아 국내에 넘겨주었고, 영국 국내에서 방첩 임무를 수행하는 MI5는 그 정보를 받아다가 앞으로 일어날 무력사태에 대해 대비했다.

사파이어를 검거해버리는 게 제일 깔끔하지만 테러리스트에 가까운 그의 행적을 봐서 섣불리 건드렸다간 그가 도심 한복판에서 폭탄을 터뜨려버리는 미친 짓을 벌일지도 모른다. 민간인 피해자에 대해선 신경 쓰지 않겠지.

거기다가 그를 노리고 있는 불특정다수의 암살자들도 도발하게 될 것이다. 그들 모두가 거리낌 없이 시가전을 벌일만한 위험인물들인데 이런 게 점조직으로 퍼져있다 보니 일망타진도 어렵다.

아예 군경을 동원해서 계엄령을 내려버리자니 그건 그것대로 문제가 생긴다. 영국의 보안상태가 엉망진창이라는 걸 전 세계에 알려버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사파이어를 건드릴 수 없다면 문제의 근원이 되는 벤체슬라스를 구금하거나 암살하면 되는데 이런 일이 생길 줄 대비한 건지 현재 벤체슬라스의 행적은 묘연했다.

그리고 정말 이상한 일이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그에 대한 수사나 감시는 윗선에서 허가가 잘 나지 않았다. 세공사란 족속이 워낙 더러운 일들을 도맡아 하다 보니 벤체슬라스가 그동안 벌여왔던 일들이 드러나면 상황이 재미가 없어질 높으신 분들이 계시겠지.

사안 자체가 함부로 손대기 힘든 뜨거운 감자였다. 제일 좋은 해결책은 역시 사파이어가 죽는 것이다. 민간에 대한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국가기관이 정보를 사들이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내부에서도 정보를 빼돌리며 이득을 취하는 족속이 있었기 때문에 사파이어가 MI5의 감시망에 올라갔다는 사실이 바깥으로 흘러나왔다.

정보상은 그 이야기를 벤체슬라스에게 전해주며 “더 이상 자네와 거래를 할 수 없네.”하고 못 박았다.

“자네는 일을 너무 키웠어.”

“그리스 소식을 팔 때까지만 해도 꽤 좋아하셨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남의 나라 불장난이 영국까지 올 줄은 몰랐지. 더 이상 자네와 거래하면 내 평판도 나빠질 거야. 어쩔 수 없는 결정이야. 미안하네.”

“이해합니다.”

벤체슬라스는 정보상을 비난하지 않았다. 그렇게 차근차근 고립되어갔다.

벤체슬라스는 아파트를 처분한지 오래다. 그는 계속 이동했다. 사파이어보다는 사정이 훨씬 나았다.

큰일을 벌일만한 재산은 남아있지 않았지만 그에겐 아직 상당한 액수의 돈이 남아있었고 자신의 일을 대신 처리해줄 대리인도 있었다. 그는 값비싼 숙소와 저렴한 숙소를 번갈아가며 묵었고 런던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마치 사파이어가 오기를 기다리듯이.

도망가지 않되 순순히 잡혀 줄 생각은 없다. 그가 그 아수라장을 뚫고 나온 것에 대해선 경의를 표하겠다. 조력자의 도움을 받았다고 해도 말이지.

알료샤가 도와주지 않았으면 사파이어는 분명히 죽었을 것이다. 조력자도 능력의 범주에 넣는다면 그것 나름대로 사파이어의 실력이라는 소리가 되겠지만 벤체슬라스는 우정이나 사랑 따위의 허상은 믿지 않았다.

현실에 단단히 기반을 두고 신뢰할 수 있는 것은 돈이다. 돈.

돈은 적의마저도 호의로 바꾼다.

돈은 모르는 사람을 기꺼이 내 사병으로 만든다.

알료샤의 방식은 호의에 기반한 것이고 호의가 통하지 않을 경우 공포로 찍어 눌러야 하는 단점이 있다. 그리고 공포는 언제나 반감을 사게 마련이다. 목숨이 노려졌다지? 알료샤가 그 이상주의를 포기하지 않는 한 그의 공포정치에 반감가지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나올 것이다.

다행히 영국 안에는, 적어도 벤체슬라스의 주변에는 알료샤 패거리가 없었다. 제아무리 알료샤라도 바다 건너까지는 손이 뻗지 않는 모양이지. 직접 나타난다면 모를까. 하지만 저번 같은 술수는 통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사파이어는 지금 혼자라는 소리다. 내가 키워낸 보석을 날것 그대로 평가할 시간이 왔다.

벤체슬라스는 워털루 다리의 난간에 서서 흘러가는 강물을 내려다보았다. 정확히 여기였다. 사파이어를 잃어버린 곳이.

‘당신은 단 한 번도 내 낙원이었던 적이 없어.’

‘당신은 나의 신앙이었어.’

‘죽일 수가 없어요.’

벤체슬라스는 처음부터 사파이어를 깊이 증오했다. 사파이어를 학대하는 것에는 교육 목적뿐만 아니라 그를 마음 깊이 혐오하는 것도 담겨있었다.

부러질지언정 꺾이지 않을 것 같던 그 단단한 돌 같은 남자는 결국 벤체슬라스에게 길들여졌고, 무엇에도 금이 가지 않는 강도를 자랑하는 찬란한 보석이 되었다. 사파이어란 보석의 경도가 원래 그 정도로 높으니까.

그를 깊이 증오하고 혐오했던 마음은 시간이 지나가면서 차차 다른 것으로 변질되어갔다. 이름도, 태어난 나라의 말도, 자기 자신이 누구였는지도 잊은 남자는 자기 자신이 벤체슬라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도 잊은 채, 그리고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됐는지도 잊은 채 충실한 개가 되었다.

이전에도 충분한 재산을 형성하고 있었지만 사파이어의 실적은 벤체슬라스의 재력을 최고조로 올려주었다. 그는 그만큼 돈을 벌어다주는 기특한 존재였다. 배반하지 않고, 의문을 품지 않으며.

벤체슬라스가 사파이어를 보며 느꼈던 감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벤체슬라스 본인조차도 확신할 수 없다. 이제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둘 중에 하나는 확실하게 죽는다. 벤체슬라스는 어떤 강렬한 예감 같은 것을 느끼며 옆을 돌아보았다. 지켜보는 시선이 분명히 느껴졌다. 그의 시선 끝에는…….

칠흑으로 도색한 아구스타 브루탈레에 걸터앉아 한 발만 내뻗은 사파이어가 선명할 정도로 새빨간 사과를 한 입 베어 물며 벤체슬라스를 도발적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정말 탐스럽게 윤이 나는 새빨간 사과였다. 아담이 신의 말을 거역하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한 선악과가 저런 것일까. 선과 악을 구분할 줄 알게 되었다. 지혜가 생겨버렸다. 내가 누구인지 알아버렸다. 나의 신이었던 분이여, 절대자여, 나의 원수여. 보라, 내가 너를 거역한다.

벤체슬라스는 피조물의 배반을 오만하게 깔보았고 사파이어는 퍼포먼스는 이만하면 됐다는 듯이 사과를 옆으로 내던졌다.

다정한 인사 한 마디도 없이 총격전이 시작되었다. 그들이 서로를 이해하는 방식은 이런 것이니까.

벤체슬라스는 어디서든 사파이어가 자신을 습격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어디든 경호원을 대동하고 다녔다. 그래서 사파이어가 총을 꺼내들자마자 근처에서 위장하고 있던 경호원들이 사파이어에게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벤체슬라스 역시 재킷 안에 착용한 홀스터에서 권총을 꺼내 사파이어를 겨누었다.

사파이어는 아구스타를 장식으로 타고 있었던 게 아니듯이 바로 내뺐다. 벤체슬라스 역시 주차해놓은 자신의 애스턴 마틴으로 달려갔다. 영국에 넘어올 때 가지고 있던 벤츠는 무리한 임무수행을 감당하지 못하고 걸레짝이 되어버렸고 그 뒤에 애스턴 마틴을 새로 구입했다. 경호원 둘이 그를 따라왔고 나머지는 각각 다른 차량으로 달려갔다.

뒷좌석에 경호원들이 타서 무기를 꺼내들었고 벤체슬라스는 운전석에 탔다. 런던 시내의 처참한 교통체증을 생각해볼 때 시가전을 벌이는 건 그리 현명하지 않은 선택이다. 스펙이 어쨌건 간에 자동차는 다른 자동차 행렬을 파고들지 못한다.

반면에 오토바이는 어디든 갈 수 있다. 방탄유리를 씌워놓긴 했어도 사파이어가 자동차 틈새로 파고들어서 창문을 무차별적으로 갈기고 가면 안 깨진다고 장담 못한다. 당장 그의 무장을 확인하진 못했지만 손에 쥔 총 한 자루와 오토바이 측면에 붙어있던 일본도가 전부는 아닐 것이다.

사파이어가 독일에서 암살자들을 학살할 때만 하더라도 그는 적어도 소총과 유탄발사기를 가지고 있었다. 폭발물을 쓰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외곽으로 빠져야한다. 어쨌건 간에 수적으로는 벤체슬라스측이 유리하니까. 교외로 빠져서 넓은 공간을 확보하면 상대하기가 수월해질 것이다.

뒷좌석에서 총기를 점검하고 있던 경호원들은 고용주의 운전 실력에 대해 미리 알지 못했기 때문에 급발진에 대비하지 못하고 앞좌석 등받이에 머리를 박았다. 자동차 바퀴가 요란하게 공회전하며 앞으로 튀어나갔다. 바닥에는 타이어 긁힌 자국이 시꺼멓게 남았다.

벤체슬라스의 애스턴 마틴은 신사다운 차라는 이미지와 다르게 한 마리 짐승 같은 흉포함이 있었다. 코너링을 할 때만큼은 그다운 섬세함이 보였지만 직선도로를 내달릴 때는 어딘가가 미쳐버린 것 같은 무절제함이 있었다.

애스턴 마틴을 선두로 차량 몇 대가 감싸듯이 따라붙었고, 도로에 선 차량과 차량 사이에서 무서운 배기음이 터져 나오며 오토바이 한 대가 불쑥 치고 나왔다.

기계 뼈대를 고스란히 내보이는 칠흑 같은 오토바이는 도심에 한 마리 호랑이를 풀어놓은 것처럼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파고들며 애스턴 마틴에 접근하려고 했다. 물론 경호원들이 가만히 내버려둘 리 없다. 차 창문이 열리고 총격이 오갔다.

사파이어는 다른 차에는 관심 없다는 듯이 우지를 갈겼다. 운전자를 맞추려는 게 아니라 위협하려는 의도가 다분한 총질이었는데 유리에 총알이 퍽퍽퍽 박히며 하얗게 실금이 가자 경호원들도 섣불리 사파이어에게 접근하지 못한다. 저 미친놈, 보지도 않고 쏜다.

뇌가 어딘가 망가진 모양이다. 목숨이 하나뿐이라는 걸 인지하지 못하나?

도심 한복판에서 갑자기 차량추격전이 벌이고 총성이 오가자 시민들이 소리 지르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정차해있던 경찰차도 그 소리를 듣더니 곧바로 사이렌을 울리며 몰려오기 시작했다. 다른 차들은 총격전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얼른 차를 틀어 그들이 지나가게 해주었고 운전자들은 총에 맞지 않으려고 머리를 가리며 몸을 웅크렸다.

그 혼란 사이로 새로운 차량 몇 대가 추격전에 합류했다.

벤체슬라스는 백미러로 그들을 확인하며 혀를 찼다. MI5가 기회를 잡았군. 이렇게 되면 세공사 협회가 벤체슬라스의 목을 따기 전에 영국 정보기관에게 잡혀서 고문실로 먼저 끌려들어갈 것이다.

상황은 최악이다. 활로가 보이지 않는다. 추억을 자극하는 위기감이라고 할까. 옛날 생각이 많이 났다. 이런 사선을 몇 개나 헤쳐 나왔는데, 살아남는 것이 강함의 척도라 일컬어지는 세계지만 그것도 죽어버리면 끝. 까딱하면 끝나버리는 의미 없는 명성이다. 목숨을 거는 도박판이다.

벤체슬라스는 여태까지 강했다. 이번에도 운이 따라주는지 보자.

멈추지 않으면 발포하겠다는 경고가 들려왔고 당연히 그 소리를 듣고 멈춰 설리가 없으니 경찰이 총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천만다행으로 차량 행렬은 혼잡한 런던 시내를 벗어나 교외로 빠져나갔다.

이 중에서 제일 불리한건 사파이어다. 아마도 방탄복은 입고 있겠지만 그에게는 몸을 가려줄 철판이 없다. 오토바이는 까딱하면 사람이 죽어버리는, 달리는 관이다. 거기다 지금은 그를 죽이려고 드는 총구가 몇 개나 있다.

사파이어는 자신의 불리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걸 이용했다.

사파이어는 경호원 차량 한대에 가까이 달라붙어 공격을 가하려고 했다. 운전석 창문이 내려가고 총구가 뻗어 나오자 사파이어는 바로 속력을 줄여 뒤로 빠졌다. 총이 발사됐고 사파이어 대신 그 옆에 따라붙었던 경찰차가 맞았다.

총격을 당한 경찰은 바로 응사했다. 운전자는 단발에 죽지 않았지만 어깨를 맞는 바람에 핸들이 확 꺾였고 그대로 경찰차를 들이받았다. 뒤따라오던 MI5 차량 한대 역시 추돌한건 덤이다.

차량 세 대가 순식간에 추격전에서 빠져나갔다. 경찰은 동료가 당한 것을 참지 않았고 무자비한 공격을 가했다. 벤체슬라스를 지켜야하는 경호원들은 사파이어를 죽이기보다 경찰을 우선적으로 막아야 해서 바로 난잡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정체를 숨겨야하는 MI5는 뒤에서 사태를 관망하려다가 아무래도 영국의 공권력이 범죄자 집단에게 학살당하는 것을 가만 내버려둘 수는 없어서 싸움에 끼어들었다. 어찌됐건 그들도 공무원이고, 경찰 역시 그들이 지켜야하는 영국 시민이니까.

사파이어는 그들이 싸우게 내버려두고 애스턴 마틴에 접근했다. 이제 그를 호위하는 차량은 두 대. 그리고 사파이어에게 따라붙은 MI5의 다른 차량도 세 대.

사파이어는 주머니가 몇 개나 달린 전술재킷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오토바이 손잡이를 놓아버렸다. 뜬금없는 기행에 뒤따라오던 추격자들은 그가 자살이라도 하려는 건가 착각했지만 곧 그의 손에 걸린 안전핀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가장 가까이 있던 차량이 황급히 그에게서 떨어졌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사파이어는 안전핀 뽑힌 수류탄을 바닥에 내던졌고 폭발이 일어났다. 세열수류탄의 파편을 밑바닥에 직격으로 받은 자동차 한 대가 차체가 뒤집혀지며 추격전에서 이탈했다.

사파이어는 잠깐 손잡이를 놓았던 것 때문에 크게 휘청거리며 바닥에 넘어질 뻔 했지만 알료샤와 함께했던 기간 동안 그에게서 곡예주행을 배우기라도 한 건지 용케 균형을 다시 잡았다. 벤체슬라스도 그것을 보았다.

원래 저렇게 충동조절장애 수준으로 극단적인 성격이었던가? 사파이어를 가르치는 동안 대담성은 충분히 키워줬지만 저 정도로 무모하지는 않았는데.

사파이어 역시 자신의 행동을 반성했다. 두 번은 못 하겠다. 그러나 추격자들은 이제 그가 폭발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를 건드리기가 조심스러워졌다.

뒷좌석의 경호원들이 어떻게 할지 묻자 벤체슬라스가 “죽여.”하고 명령을 내렸다. 뒷좌석 창문이 내려가고 사파이어에게 총격이 퍼부어졌다.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달리고 있고, 도로의 요철에 따라 극심하게 흔들리고 바람이 방해하는 상황에서 눈 먼 총알에 맞을 확률은 높지 않다. 그러나 충분한 위협이 됐다. 사파이어는 자기 목숨이 한 개 뿐이라는 것을 제대로 인지하고 있는지 거리를 두고 떨어졌다.

상공에 경찰 헬기가 나타났다. 헬기에 탄 저격수는 다른 차바퀴를 노리는 것보다 제일 먼저 사파이어를 점찍었다.

저격수의 스코프에 사파이어가 정확히 걸린 순간, 예상치 못한 것이 그의 시야 옆에 들어왔다. 그가 저격수 생활을 하면서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것이기에 처음에는 믿지 않았지만, 곧 온 몸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RPG-7의 포탄이 헬기에 직격하기 직전이었다.

헬기가 폭발했다. 헬기를 요격한 청부업자는 재빨리 그 지역을 이탈하면서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이스칸다르에게 전해라. 이걸로 빚은 청산했다고. 이제 내 형제를 풀어줘라. 약속을 지켜라.”

전화 너머의 상대는 그가 더 이상 말을 하며 불필요한 정보를 전선에 남기지 못하도록 막으며 “형님이 기뻐하실 거다.”하고 한 마디만 덧붙인 채 전화를 끊었다.

전화가 끊기자마자 얼마 안 되서 알료샤의 귀에 소식이 들어갔다. 알렉산드로스의 아랍식 이름인 이스칸다르를 가명 중 하나로 사용하는 알료샤는 부하의 예상대로 기뻐하면서 총구를 내렸다.

그의 앞에 포박되어 있던 포로가 겁먹은 눈으로 알료샤를 올려다보았다. 알료샤는 조금 전까지 포로를 죽이려고 살기등등했던 것은 어디로 치워버렸는지 오랜 친구라도 되는 것처럼 즐겁게 그의 포박을 풀어주었다.

그는 정말이지, 공정하지 않은 게 싫었다.

생각 같아서는 사파이어에게도 경호원 차량 몇 대를 붙여주고 싶었지만, 아니 그보다는 사파이어를 차에 태우고 싶었지만, 아니 그보다는 사파이어를 여기 안락한 자리에 앉혀놓고 벤체슬라스 처형을 직접 주관하고 싶었지만 거기까지 가면 사파이어에게 용서받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헬기는 너무 나갔지, 헬기는!

페어플레이 정신을 잃은 유감스러운 시대다. 정말. 신사란 종족이 멸종해버린 건지.

알료샤는 꺼지라는 듯이 웃으면서 포로를 발로 걷어 차 아지트에서 내보냈고 속속들이 들어오는 보고를 듣고 있었다. 벤체슬라스의 짐작대로 그는 영국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상태였다. 그 대신 그의 손발이 되어줄 인력은 침투시켜 놨다. 불편함이란 사용하기에 따라 유용한 도구가 된다.

추격전을 계속 벌이고 있는 런던 교외의 상황은 그야말로 경악이었다. 사파이어가 세열 수류탄을 사용한 시점부터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어가긴 했지만 로켓 런처까지 나올 줄은 몰랐다.

그것도 경찰을! 경찰 헬기를 요격하다니! 테러다! 경찰 본부도 난리가 났고 당연히 MI5 본부도 난리가 났다.

우연인지 일부러 인지는 모르겠지만 포탄은 헬기의 꼬리부분을 맞췄고 꼬리가 터져나가면서 빙글빙글 돌았기 때문에 바닥에 추락하기 전에 조종사와 저격수가 바깥으로 뛰어내릴 기회는 있었다. 부디 그들이 죽지 않았기를.


런던 도심에서 일어난 총격전과 교외 지역의 교전으로 인해 여기저기서 속보가 이어졌다. 경찰 본부가 상황을 통제하기도 전에 언론사들이 발 빠르게 기사를 내보냈기 때문에 바다 건너에까지 벌써 소식이 퍼졌다. 뒤늦게 엠바고가 내려졌지만 이미 영국은 물론이고 유럽, 그리고 다른 대륙들까지 상황을 알게 되었다.

더 이상은 도로 위에 있을 수 없다. 벤체슬라스는 방향을 틀었다. 다른 도시로는 갈 수 없다. 길에는 이미 경찰이 깔려 있을 것이다. 모든 도시가 그들을 잡으려고 하겠지. 헬기가 터지는 장면은 벤체슬라스도 믿을 수 없었다.

알료샤인가……. 정말 끈질기게 방해하는군. 하지만 어차피 잘 됐다. 사파이어가 싱겁게 죽어버리면 그도 자기 손으로 매듭짓지 못했다는 불쾌감을 오랫동안 느끼게 될 테니까.

애스턴 마틴은 길도 아닌 숲을 파헤치고 들어갔고 그 뒤를 사파이어의 아구스타가 바짝 쫓았다. 벤체슬라스의 지시로 인해 경호원들이 남아서 다른 차량들을 교란시켰고 그 교란에 휘말려들지 않은 추적자 몇 몇이 숲으로 따라 들어왔다가 수풀과 나무에 가로막혀서 발목이 잡혀버렸다.

이걸로 잠깐의 시간은 벌 수 있을 테지만 오래가진 못할 것이다. 상관없다. 그 사이에 벤체슬라스나 사파이어, 둘 중 하나는 죽을 테니까.

애스턴 마틴 뒷좌석의 경호원들은 충실하게 계속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숲에서는 나무와 수풀에 가려 서로에게 공격이 먹혀들지 않았지만 그들이 숲을 빠져나와 개활지로 나오는 순간 다시 총알이 서로에게 닿았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잡초와 덩굴이 자라난 풀밭이 펼쳐져 있었고 그 위에는 버려진지 몇 백 년은 된 것 같은 중세시대의 유적이 서 있었다. 유적의 돌 벽을 타고 기어오르는 장미넝쿨에서는 계절을 착각한 장미 꽃송이들이 새빨갛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처참할 정도로 선명한 아름다움이었다.

성이었을까, 귀족의 저택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수도원의 일부였을까. 반 이상이 무너져서 검은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는 중세의 돌무더기는 굉음과 함께 나타난 이방인들을 수백 년 묵은 침묵으로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총알이 드디어 아구스타의 바퀴를 뚫었다. 균형을 잃은 사파이어가 오토바이와 함께 풀밭 위를 긁으며 미끄러졌다. 숲 안쪽에 유적이 있을 줄 모르고 속력을 줄일 생각을 못했던 벤체슬라스 역시 돌무더기를 들이받고 완전히 멈춰 섰다.

뒷좌석에 있던 경호원 하나는 충격으로 인해 앞좌석을 완전히 밀어버리고 튕겨나가 머리를 박고 뇌진탕을 일으켰고, 벤체슬라스의 바로 뒤에 앉아있던 경호원도 앞좌석을 눌러버리는 바람에 벤체슬라스 역시 위험해질 뻔 했다. 벤체슬라스는 용케 정신을 잃지 않고 운전석 문을 열었다.

뇌진탕을 일으킨 쪽을 보니 죽었는지 살았는지 불분명하지만 의식이 없는 건 확실하다. 자신의 뒤에 앉아있던 경호원을 보니 충돌의 순간에 방아쇠를 당긴 건지 뒤통수가 날아가 있었다. 운 나쁘게 총구가 머리를 향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벤체슬라스는 무기를 가지고 차에서 내렸다.

사파이어는 그 자리에 없었다.

벤체슬라스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파이어는 숨을 몰아쉬며 그에게 총을 겨누고 서 있었다. 벤체슬라스 역시 허리 아래로 손을 내밀어 사파이어에게 총을 겨눈 채였다.

“제법이군.”

“콘스탄티네스쿠.”

사파이어에게서 생각지도 못한 소리가 흘러나오자 벤체슬라스의 눈이 희미하게 커졌다. 원하던 반응이 아닌지 사파이어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다른 이름을 불렀다.

“미르체아.”

“닥쳐.”

벤체슬라스가 거의 즉답하듯이 내뱉었다. 조각상 같은 하얀 얼굴이 꾸깃해지자 사파이어가 입 꼬리만 끌어올려 미소 지었다. 웃음이라는 걸 모르는 기계가 어설프게 사람 얼굴을 따라하는 것 같은 섬뜩한 미소였다. 그러나 그 안에 분노라는 감정은 확실하게 담겨있었다.

“이게 당신 이름이군. 미르체아.”

벤체슬라스는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다. 사파이어는 겉보기엔 멀쩡해보였지만 여기까지 헤쳐 나오면서 얻은 부상이 있는 건지 고통을 억누르는 표정이었다.

“내 유품 내놔.”

“유품?”

“당신이 나한테서 훔쳐간 거 있잖아. 이 개새끼야!”

담담하게 말을 내뱉던 사파이어가 갑자기 버럭 소리쳤다. 자제하지 못하고 격한 감정이 터져 나온 듯 했다. 서로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면 좀 더 길고 거친 욕이 흘러나왔을 것이다. 벤체슬라스는 그런 사파이어를 비웃었다.

“버렸는데. 그딴 싸구려.”

“거짓말하지 마.”

“가지고 있기엔 너무 질 떨어지는 쓰레기라서.”

“미르체아, 콘스탄티네스쿠. 둘 다 루마니아 이름이지. 당신은 나를 만날 때 안드레이 플로레스쿠라는 이름을 썼어. 그것도 루마니아 이름이야. 당신 나이라면 차우셰스쿠 집권기 출생이겠군. 세쿠리타테 출신인가?”

“이 새끼가!”

사파이어가 자신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터무니없는 이야기들을 추리해나가며 술술 내뱉자 벤체슬라스가 포악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첩보원은 이게 짜증난다. 벤체슬라스가 직접 다시 가르쳐야 할 정도로 전투능력은 별 볼일 없지만 기본적으로들 머리가 좋다. 정보를 다루는 직업이니만큼 기본적인 직업 소양이 두뇌에 관한 거겠지.

하지만 자신의 과거가 억측이 뒤섞인 채 남의 입으로 마구 까발려지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경험이다. 발가벗겨지는 느낌이다.

“나한테 왜 그랬어.”

사파이어가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대답을 바라지 않은 물음이었다.

“나한테 무슨 원한이 있어서 이 꼴로 만들었어.”

“너 같은 놈들은 당해도 싸.”

“이유를 말해!”

“말해줄 것 같은가.”

풀 수 없는 수수께끼를 안은 채 죽어라. 죽을 때까지 널 번민하게 만들 거다.

“당신이, 네가 뺏어간 내 인생…….”

거기까지 말하고 속에서 울컥 치밀어 오르는지 사파이어가 잠시 말을 멈췄다. 사파이어의 말을 이어간 것은 본인이 아니라 벤체슬라스였다.

“뺏어가? 웃기고 있네. 넌 이미 죽은 목숨이었어. 누가 주워가든 문제없었다고.”

“네가 날 함정에 밀어 넣었어! 실수하도록! 실패하도록! 날 죽게, 자살하게 만들었다고!”

“헛소리 하고 있군. 망상도 정도껏 해야지. 네 실수는 온전히 네 거야. 네가 잘못한 거라고. 순전히 너의 미숙함 때문에. 너 때문이야. 너. 임무 실패도 네가 한 거고 너희 정보기관 파벌싸움에 휘말린 것도 네가 멍청해서야. 넌 그것밖에 안 되는 잡석이었어. 널 살려주고 여기까지 오게 한 건 나다. 나란 말이다. 내가 널 갈고 닦아줬어.”

“거짓말 하지 마!”

“그래! 거짓말이야! 뭐가 진실인지 모르겠지? 뭐가 사실이고 거짓인지도 구분할 수 없지? 넌 누구일까? 응? 네가 기억하는 게 사실 맞나? 넌 진짜로 첩보원이 맞나? 네 망상이 아니고? 네 멋대로 상상해낸 걸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게 아닌가?”

사파이어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진폭을 감지한 벤체슬라스가 그를 조롱하며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사파이어는 벤체슬라스의 목소리를 털어내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전부 사실이야.”

“본명도 모르는 주제에!”

“내 유품 내놔.”

“그딴 건 없어.”

사파이어가 감정을 억누르려는 듯이 부들부들 떨다가 짓눌려 터져 나오는 것 같은 고함을 지르면서 총을 난사했다.

벤체슬라스가 그의 손을 옆으로 밀치면서 총을 들이대자 사파이어 역시 번개같이 벤체슬라스의 손을 쳐냈다. 서로에게 들이댄 총구가 바깥으로 뻗어나가면서 발사됐다. 총을 든 채 무술을 펼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총알이 다 떨어져 방아쇠에서 달각달각 소리만 날 때까지 재빠른 공방전이 펼쳐졌다. 둘은 신속하게 총을 내버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칼을 꺼내들었다.

사파이어는 일본도. 벤체슬라스는 세이버.

둘 다 베기용이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거세게 휘두른 칼날이 캉 하고 부딪치면서 서로가 잠시 휘청였다.

일본도는 두 손으로 쥐고 쓰게 되지만 세이버는 구조적으로 한 손으로 휘두른다. 일견 세이버 쪽이 방어에 취약해보이지만 벤체슬라스는 공격을 흘려버리는 방식으로 방어를 대신했다. 세이버의 검신을 타고 일본도의 칼날이 주욱 미끄러졌다.

세이버는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치명적인 날카로움으로 베고 들어갔다. 사파이어의 빠르기에 필적하는 속도였다.

사파이어는 굳이 세이버를 막지 않고 자세를 낮추어 칼날을 피했다. 그러면서 곧바로 공세를 이어나갔다. 둘이 쓰는 무기가 다르고 그에 따라 취하는 자세도 달랐지만 둘의 공격은 어딘가 비슷한 데가 있었다. 오리지널과 복사본의 싸움. 스승과 제자의 싸움이었다.

세이버는 한 손으로 휘두르니만큼 몸의 균형이 흐트러지기 쉽다. 사파이어만큼의 안정성을 획득하려면 자연히 기본 품새가 커질 수밖에 없다. 동작이 커지다보니 그만큼의 기동성도 확보하게 된다.

바닥을 디뎌가며 빙글 돌기도 하고 큰 걸음으로 다가가기도 하는 벤체슬라스의 움직임은 왈츠처럼 보이기도 했다.

“예전보다 실력이 늘었군.”

벤체슬라스가 순수하게 칭찬했다. 사파이어는 담담하게 공격을 받아내면서 대꾸하지 않았다.

벤체슬라스의 빈틈을 파고드는 것은 다른 사람을 대할 때와 조금 달랐다. 두려웠다……. 벤체슬라스와 칼을 맞대는 것은 단순히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뿐만 아니라 트라우마와 직면하는 것이기도 했다.

눈을 돌려선 안 된다. 직시해라. 패배했을 경우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마라. 그 동안 저 남자가 저 손으로, 저 눈으로 무슨 짓을 해왔는지도 떠올리지 말고. 그로 인해 자신이 어떤 꼴을 겪었는지도 떠올리지 말고.

미래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미리 생각하지 마라. 존재하는 건 지금 이 순간뿐이다!

사파이어의 방어가 생각보다 견고하자 벤체슬라스는 다른 쪽으로 파고들었다. 뱀 같은 혀도 칼 대신 쓸 수 있는 법이다.

“넌 이 상황에서도 흥분하고 있겠지. 사실은 나에게 죽고 싶은 거지? 넌 죽음의 위험에 처하면 흥분하는 미친놈이니까. 아무런 가능성이 없는 놈은 남자가 범한다고 해도 몸이 열리지 않아. 넌 뼛속까지 변태라는 거다. 착취당하고 모욕당해야 살아있음을 느끼는 변태. 이 노예야.”

“이제는 살고 싶어졌어.”

사파이어가 확고하게 부정했다.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감정을 뒤흔들어서 허점을 만들 생각이었는데 그의 정신은 지금 취하는 방어만큼이나 단단했다.

“살고 싶어졌다고! 살아남을 거야!”

“웃기지 마라, 연쇄살인마가!”

사파이어가 한 발자국 내딛으면서 칼을 크게 휘둘렀다. 조금 전까지와는 비교되지 않는 위력이 담긴 일격이어서 벤체슬라스는 슬쩍 슬쩍 뒤로 피하며 계속 그를 조롱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죽여 놓고 살아남겠다고? 염치가 있어야지.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은가?”

“내 인생이야! 내 선택이고! 난 살아남을 거야!”

캉 캉 캉 치고받는 공방이 이어졌다. 날이 나가버려도 이상하지 않은 싸움이었다. 아니 이미 어느 정도는 날이 빠진 것 같다.

극도의 긴장 속에서 어느 순간 칼이 튕겨나갔다. 부러지진 않았다. 다만 다시 주워들고 보니 둘은 상대방의 칼을 바꿔 쥐고 있었다. 손에 익지 않은 무기일 텐데도 둘은 칼을 몇 번 휘둘러보더니 다시 맞붙었다.

어차피 대부분의 전투기술은 벤체슬라스가 가르쳤다. 그가 할 줄 아는 것이면 사파이어도 할 줄 안다. 조금 전까지 벤체슬라스가 취하던 큼직한 걸음걸이가 고스란히 사파이어의 태세로 옮겨갔고 벤체슬라스는 양손으로 칼을 쥐고 상황을 지켜보며 방어적으로 나섰다.

그렇게 몇 합 부딪치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다시 자기 무기를 던져주었다. 공중에서 칼을 넘겨받은 둘은 이제야 제대로 움직이겠다는 듯이 칼을 휘둘렀다.

“넌 이 희열을 잊지 못해.”

벤체슬라스의 입가에 교활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넌 사람 죽이는 맛을 절대 못 잊어. 나한테 돌아와라. 목숨만은 살려줄 테니.”

“웃기지 마.”

“넌 처음부터 정상인이 아니었어. 어설프게 그 쪽 세상에 발을 걸치고 있었지만 이제는 다신 못 돌아가. 넌 태어날 때부터 뇌가 망가진 인간이었단 말이다. 이 싸이코패스야. 너 같이 이상한 인간은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해. 이 괴물아.”

괴물이라는 말에 사파이어가 움찔했고 벤체슬라스가 재빨리 그것을 감지했다.

“넌 괴물이야. 괴물! 사람인 척 하지 마!”

“난 인간이야!”

“나는 네 욕구를 전부 채워줄 수 있어. 나는 너의 신이다!”

벤체슬라스의 노한 얼굴은 아가리를 쩍 벌린 뱀 같은 광기를 담고 있었다.

“너 같이 근본부터 뒤틀린 싸이코패스는 내가 주는 대로 받으면 돼! 내가 너에게 세상을 이해시켜줄 수 있어! 내가 명확하게 정의해주겠단 말이다!”

“더 이상 너의 정의는 필요 없어! 내가 해석한다!”

“장례식장에서 박수치며 웃는 미치광이가 말인가?”

사파이어의 부적절함에 대해서는 사파이어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다. 그의 평생 동안 풀어나가야 하는 과제였다. 적절한 것과 부적절한 것의 기준이란.

사파이어의 세계에선 사파이어 혼자만이 정상이고 나머지 모두가 미친 사람이었다. 사람의 죽음에 대해 왜 웃으면 안 된단 말인가? 웃기니까 웃는 것 아닌가.

다른 모든 사람이 그게 잘못된 거라고 지적했기 때문에 머릿속 지식으로는 담아두었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항상 의문이 남아있었다. 그가 여태까지 세상을 살아온 것은 그런 주입식 암기의 연속이었다.

그는 영원히 일반인의 세계에 녹아들 수 없을 것이다. 그게 사파이어의 상처였다.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의 머뭇거림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이 이기적인 남자가 사실은 얼마나 정상적인 생활을 원하는지.

보통 사람처럼, 흔하게 널린 저 사람들처럼! 공감하고, 이해하고, 남의 슬픔에 동화되어 같이 슬퍼하고, 남들이 웃을 때 같이 웃고, 공감대를 쌓아가며 친구를 만들고, 타인과 관계를 맺어가는 그 평범함을!

아니, 웃기지 마라. 너 같은 남자는 영원히 정상인이 될 수 없다. 벤체슬라스가 제일 잘 알고 있다. 사파이어 같은 인간들을 한두 번 본 게 아니다. 제 아무리 고뇌와 번민에 휩싸여도 그들의 눈물은 악어의 눈물일 뿐이다. 그들은 다른 종족이다. 일반적인 인간이 아니란 말이다.

이런 인간들에겐 교육이 필요하다. 밑바닥에서부터 하나하나 가르쳐가야 한단 말이다. 벤체슬라스가 직접 손을 잡고 이것은 뜨거운 것이고, 이것은 차가운 것이고, 이것은 꽃이며 이것은 칼이라는 걸 일일이 가르쳐야 한단 말이다.

스스로의 기준으로 세상을 해석하겠다고? 사파이어 같은 싸이코패스가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오해로 끝나지 않는다. 사파이어는 오래가지 못해서 죽을 것이다. 그는 오해를 많이 사는 인간이고, 더불어 원한도 많이 산다.

벤체슬라스도 그의 피해자였다.

서로의 신념을 담은 칼날이 만신창이가 되어가도록 맞부딪치다가 어느 순간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깨져버렸다.

깨진 파편이 얼굴과 손에 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둘이 짐승처럼 송곳니를 드러내며 맨 손으로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붙잡아서 물어뜯고, 걷어차고, 주먹질을 가하면서 엉망진창으로 서로를 두들겨 팼다.

서로를 이용하는 이기주의의 발로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한 때 서로를 욕정으로 갈구했던 손길들이.

“그래! 난 이해 못해!”

사파이어가 소리쳤다.

“영원히 이해 못할 거야! 남을 따라하면서 살아왔어! 그렇게라도 평범하게 살고 싶었어! 이해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최소한 이상하지는 않게! 난 노력했어! 섞여들려고, 함께 살려고! 그걸 네가 앗아갔어! 네가 기회조차 뺏어가 버렸어!”

“너의 기만은 무수히 많은 사람을 죽여!”

“적어도 난 암살자가 아니었어!”

“그래. 하지만 넌 이미 살인자였지. 보석이 되기 전에도. 네 스스로 선택했단 말이다! 사람을 죽이는 길을! 너 역시 뼛속부터 악당이야. 얼마만큼의 돈을 위해 사람을 죽였지? 어떤 미사여구로 치장하더라도 어떤 숭고함을 담고 있어도 그게 임무에 지나지 않았다고 해도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받아들여!”

사파이어 역시 도덕적으로는 결백하지 않다.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가 쾌락을 위해 사람을 죽인 것일까? 왜 그 길을 택했던 것일까? 무수히 많은 직업 속에서 왜 하필이면 첩보원이라는 직업을? 왜 그랬을까? 다른 길을 갈 수도 있지 않았을까?

몸싸움으로 들어가면 사파이어가 밀린다. 키도 체격도 벤체슬라스가 더 크다. 어쩔 수 없는 차이다. 하지만 인간의 신념은, 기백은, 때로 불가능한 차이를 극복하게 만든다. 한 인간의 인생이 담긴 분노가.

사파이어는 더 이상 고통조차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더 이상 벤체슬라스의 손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가진 것 없는 자의 주먹이 한 때 주인이었던 육신을 묵직하게 한 방 한 방 두들겨 박았다. 가드에 막혀 완전하게 충격이 먹혀 들어가진 않았지만 데미지는 차곡차곡 쌓여갔다.

그래, 손에 쥔 게 아무것도 없고 하찮은 노예한테 한 번 당해봐라. 초근접거리에 다가붙은 사파이어가 혼신의 힘으로 머리박치기를 먹였다. 신장 차이로 인해 벤체슬라스가 입을 정통으로 맞았다. 이빨이 부러지진 않았지만 입 안이 찢어지면서 피가 터져 나왔다.

머리가 흔들린 충격 때문에 벤체슬라스가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졌다. 사파이어는 그 위에 올라타서 손뼈가 부러질 정도로 주먹질을 했다.

“사과해. 사과해! 미안하다고 해! 인생을 빼앗아가서 미안하다고 해!”

“웃기지 마. 크큭.”

“나한테 저지른 짓에 대해 사과해!”

“나는! 내 인생에 대해! 절대로 사과하지 않아!”

벤체슬라스가 이해할 수 없는 힘으로 사파이어를 확 떠밀었다. 그 역시 자신의 인생을 걸고 싸우고 있었다. 자신이 한 선택에 대해 결코 사과하지 않는다. 남을 어떤 지옥으로 몰아넣었어도 그는 그 사실에 대해 미안해하지 않는다. 결정을 번복하지 않는다.

이번에는 사파이어가 바닥에 눕는 상태가 됐다. 벤체슬라스는 항상 그랬듯이 한 치의 자비가 없는 손길로 사파이어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그에게 규율과 복종을 가르칠 때처럼, 몇 번이고 따귀를 후려갈겼다.

어느 순간 사파이어가 벤체슬라스의 손목을 콱 움켜쥐었다. 벤체슬라스의 하얗고 억센 손아귀가 사파이어의 손가락 안에서 뿌드득하는 소리를 내며 비틀어졌다. 힘 싸움을 하느라 부들부들 떨리는 손과는 다르게 사파이어가 기계처럼 천천히 고개를 돌려 벤체슬라스를 올려다보았다.

“더 이상 너에게 지배당하지 않아. 내 인생은 내꺼야.”

벤체슬라스는 뒤통수가 오싹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다음 순간 사파이어가 괴성을 지르며 벤체슬라스의 복부에 연타를 먹였다. 순간적으로 힘이 빠지는 일격이었다. 뇌의 리미터가 끊겨버린 것 같은 필사의 공격이었다.

사파이어는 벤체슬라스를 곤죽이 되도록 패며 그 동안 억압되었던 울분을 모두 토했다. 벤체슬라스가 얼굴을 가리지 않았으면 쇠망치로 잘 다진 고기 같은 몰골이 되었을 것이다.

사파이어와 벤체슬라스는 둘 다 만신창이가 되었다. 벤체슬라스는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고 사파이어는 손목과 손가락뼈에서 절그럭거리는 느낌을 받으며 주먹질을 멈췄다. 치솟아 오른 상태의 아드레날린이 잠시 고통을 잊게 해주었지만 금방 현실을 직시하게 될 것이다. 몸 안 어딘가가 부러졌다고.

“웃기지 마. 내가 어떻게 이 자리까지 왔는데…….”

벤체슬라스는 끅끅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에는 흐느낌이 배어들어있었다.

사파이어는 저항하지 못하는 벤체슬라스의 옷깃을 확 벌리더니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어딘가에 있을 텐데. 있을 것이다. 분명히 있을 거다. 벤체슬라스는 거짓말을 하고 있으니까!

안주머니를 뒤지던 사파이어의 손끝에 무언가가 닿았다. 공단으로 싼 작은 케이스가 손에 잡히자 사파이어가 심각한 얼굴로 그것을 꺼냈다. 반지 케이스였다. 케이스를 열자 그 안에는…….

빈말로도 예쁘다고 할 수 없는 커다란 사파이어 반지가 들어있었다.

계시처럼 꿈에서나 보았던 그것을 실제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자 그 순간 사파이어의 정신이 억압하고 있던 마지막 빗장이 벗겨지면서 모든 것이 완전하게 기억났다. 그는 과거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그의 이름은 조영우가 아니다. 조영우는 정보기관에 입사할 당시에 가짜로 만들어낸 일종의 코드네임이었을 뿐.

그의 이름은 외자인데다가 독특해서 눈에 띈다고 했다. 눈에 띄는 요소만큼 첩보원으로서 결격 사유인 것도 없다. 흔하고 쉽게 잊히는 이름 조영우. 그는 본명을 버리고 조영우로 살아왔다. 본명은 그의 반지에 대한 추억과 함께 가슴 속 어딘가에 묻은 채.

태어났을 때부터 어딘가 이상한 아기였다고 한다. 어른들은 단어 사용에 조심했지만 결론적으로는 이상하다는 소리였다. 잘 울지도 않고, 떼쓰지도 않고, 어딘가를 가만히 바라본다거나, 일반적인 아기들과는 어딘가 반응이 다르다고 했다.

의사가 부모에게 무언가를 말했지만 부모는 그럴 리가 없다고 부정했고, 그 당시 의사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그에게 절대 알려주지 않았다.

그들은 부정하고 싶었을 것이다. 자식에게 조금이라도 흠결이 있다는 걸 인정하고 싶은 부모는 어디에도 없다. 내 자식은 완벽하게 정상적이다. 뭐가 다르단 말인가? 남들과 똑같다!

우리 애가 다른 애와 다른 점이 뭐란 말인가. 우리 애도 정상적인 인간으로 태어났다. 의학이 잘못됐다는 걸 증명해 줄 테다.

아이가 이상할정도로 조용하다는 건 어딘가 비범한 기질을 암시하는 게 아닌가. 그의 독특한 이름은 그런 특성에 맞춰서 지어졌다. 지자요수 인자요산(智者樂水 仁者樂山). 지혜로운 이는 물을 좋아하고 어진 이는 산을 좋아한다. 산과 같이 묵직하고, 고요하고, 어진 이가 되어라.

그런 바람을 담아 아이의 이름은 산이 되었다.

강산. 그것이 사파이어의 진짜 이름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문제가 많은 아이였다. 이상한 행동이 쌓여서 나쁜 평판이 되었고 어른들은 그를 우려 섞인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의 부모님은 이상한 아들을 위해 빌고 다니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강산은 부적절한 아이였다. 어느 아이가 부적절하지 않겠느냐마는 강산은 정도가 심했다. 사람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태어날법한 것들이 애초에 없는 것 같았다.

같은 나이 또래의 남자 아이가 벌레를 잡아 죽이며 즐거워한다면 강산은 벌레를 수십 마리 잡아다가 다리를 하나씩 뜯어내며 그 생물이 고통에 발버둥치는 것을 질리지도 않고 가만히 들여다보는 식이었다. 그런 차이가 있었다.

생물의 크기는 점점 커졌다. 덫을 놓아서 참새를 잡기도 하고 어떻게 잡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작은 쥐를 잡는 경우도 있었다. 종종 그것들이 끔찍하게 분해된 채로 발견되긴 했지만 어른들은 그 끔찍한 모습을 혐오스러워할 뿐 어린 강산의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강산이 작은 동물에게 이상한 짓을 하는 것을 초등학교 담임선생이 보았다.

아이에게 무턱대고 윽박지르는 것이 허용되는 시대였지만 담임선생은 강산의 행동에서 심상치 않은 징후를 발견했다. 그래서 아이의 손에 붙들린 작은 개를 놓아주고, 겁먹은 개를 품에 안으며 아이에게 물었다.

“왜 개한테 불을 붙이려고 했니?”

“궁금해서요.”

“그건 나쁜 짓이야.”

“왜요?”

“개가 아프잖아.”

“나는 아프지 않은데요.”

아이를 설득하는 데는 시간이 한참 걸렸지만, 아이가 표면적으로는 동물을 학대하지 않게 되었음에도 그것을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이해하게 되었는지는 의문이었다.

아이는 담임선생이 직접 손을 잡고 개의 머리를 쓰다듬게 시키며 “예쁘다. 예쁘다.”하고 주입식 교육을 시키고 나서야 그것이 잘못된 일이고 사회적으로 용인 받지 못하는 행동이라는 걸 알았다.

담임선생은 이 사건을 가만히 넘길 수 없었고 부모에게 알렸다. 강산은 크게 혼났다.

그때까지 아직 살아있던 산의 아버지는 가부장제의 엄한 교육을 받고 자란 사람으로, 아이의 잘못에 대해서는 엄하게 가르쳐야 한다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기에 강산은 피멍이 들도록 얻어맞았다. 그것이 강산이 이 세상에 태어나고 나서 첫 번째로 마주한 엄격한 규율이었다. 차가운 현실이었다.

산의 어머니는 의사의 선고를 받던 때부터 설명 못할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죄 지은 사람 같은 심정으로 아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눈물 흘렸다.

유전자의 결합을 부모가 제어할 수 없는 것인데도 아들의 잘못이 마치 자기 때문인 것 마냥 어머니는 울면서 빌고 다녔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하고. 어린 산에게는 그것이 이해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이유 모를 불편함으로 자리 잡았다.

중학생이 된 산이 학교에서 같은 반 아이를 잔인하게 폭행한 사건에 대해서도 어머니는 자신이 죄인인 것 마냥 빌고 다녔다.

도가 지나친 잔혹함이었고 정작 가해자인 산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점점 그는 고립되어갔다. 남자 아이들이 싸우면서 자란다고 하는 흔한 소리를 해도 산의 경우엔 그것이 상식선에서 한참 벗어났다.

산의 싸움은 싸움 정도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살기가 담겨 있었다. 산과 싸우면 정말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들자 아이들은 서서히 그에게서 거리를 두었고, 싸움도 교류도 하지 않게 되었다.

학부모들은 산을 퇴학시키라고 항의했다. 다른 학교로 전학 보내라고도 했다. 그때마다 그의 부모는 죄인처럼 불려나갔고 그들의 눈물은 고스란히 산에게 돌아왔다.

이상한 아이라는 별명이 붙어있던 산은 괴물이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었고 한 번 그렇게 불리자 그 다음부터는 어딜 가도 괴물 취급이었다. 산 역시 다른 사람 사이에 섞이려고 부단히 노력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부자연스러운 어색함은 지울 수 없었다.

아이들은 그것을 민감하게 알아챘고 그것으로 산을 물어뜯었다. 이따금씩 남보다 더 동정심을 가진 아이들이 접근하기도 했지만 사람과의 교류를 잘 해보려던 산이 그들 모두를 상처 입히고 우정을 파탄 냈기 때문에 곧 아무도 그에게 관심이 없게 되었다.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기엔 그의 발톱이 너무 날카로워서…….

모두가 거절하는 아이는 고독한 소년이 되었다. 고독한 소년은 이런 식으로 살다간 사회에서 고립되어 생존조차 어려워질 것이라는 걸 깨달았고, 곧 남을 모방하게 되었다.

그는 웃기지도 않는데도 웃는 법을 터득했다. 남들이 울 때 같이 울어야 한다는 것도 배웠고. 어떤 상황을 슬프다고 하는 것인지, 어떤 상황을 기쁘다고 하는 것인지도 배웠다. 마음 속 깊이 이해할 수는 없지만 머리로는 외워두었다. 그렇게 스스로를 사회화 시켜나갔다.

고등학생이 되자 그의 주변에는 여전히 친구 하나 없었지만 중학생 때처럼 대놓고 괴물취급 받지는 않았다. 내면으로는 점점 더 고독해졌다. 얼핏 보기엔 그 나이 또래의 다른 아이들과 다를 바 없는 정상인처럼 보였지만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가서 그 눈을 들여다보면 태어났을 때 가지고 있던 공허함이 아직 그대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조용하고 모범적인 아이. 성적도 나쁘지 않았다. 사고를 일으키지도 않고. 험한 말을 하는 법도 없고. 이상하게도 양아치들조차 그를 건드리지 않았다.

학기 초에는 그를 만만해 보인다고 착각한 녀석들이 한두 번 시비를 걸기도 했으나, 그 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양아치들은 강산을 보면 슬쩍 피해갔다. 그를 보면 사색이 되는 녀석도 있었다.

선생님들은 그를 좋아했다. 인간적인 매력은 전혀 없지만 서류상으로 전혀 문제될 것이 없고 무엇보다도 사고를 치지 않는 착한 아이니까.

그러다가 산의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죽었다. 어이없게 세상을 떠난 그가 남긴 것은 가난한 집안 살림이었다. 산은 외동아들이었지만 아이 하나를 키우기 위해선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 산의 어머니는 억척스럽게 일을 나가기 시작했다. 산은 그런 어머니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았고 자신의 진로를 결정했다.

학자금 대출을 받아 대학을 간다고 해도 결국 대출이다. 사회에 나오면 고스란히 빚이 된다. 4년제 학교의 빚은 얼마나 될까. 2년제를 가서 기술을 배우고 곧바로 취직할까? 아니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산이 그런 이야기를 넌지시 내비치자 그의 어머니는 단 한 번도 보인 적 없던 엄한 얼굴을 했다. 교육만큼은 포기하게 둘 수 없다. 뼛골을 갈아서라도 공부만큼은 시키겠다는 의지에 산은 계획을 바꾸어야했다.

그 때부터 산의 성적이 놀라울 정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진로도 이과로 정했다. 어차피 수학이나 과학 같은 사실에 기초한 단단한 것들은 예전부터 산의 마음을 끄는 데가 있었다. 뭐라고 할까, 편하게 해준다고 할까.

문학적 비유나 수사법은 아무래도 어려웠다. 산의 독특하게 조용한 성격은 “이과니까.”라는 농담으로 넘어가게 되었고 산은 곧 그게 이용하기 편한 가면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려울 것 없었다. 목표를 정하고 수행하기만 하면 된다. 성적을 높이려면 무슨 공부를 얼마나 해야 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저 계획을 짜고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다른 아이들은 죽을 것 같다고 괴로워하는 것을 산은 이해할 수 없었다.

산에게는 목표가 있었다. 대학의 명성은 상관없다. 전액 장학금. 조금이라도 빚을 줄이겠다는 것이 산의 목표였다.

다른 아이들이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장래희망을 틀어 막힌 절망 때문에 울더라도, 그리고 또 한 편에선 첫사랑을 꽃피워나가도 산은 그런 것과는 전혀 관계없이 인생의 단계를 밟아나갔다.

산은 무사히 수능을 통과했고 전액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들어갔다. 대학을 다니는 동안에도 그의 인생에 이렇다 할 기복은 없었다. 그는 점점 더 내면으로 고립되어 갈 뿐이었다. 타인을 관찰하며, 그들의 행동을 혼란스러워하면서.

어머니는 고생의 결과로 나날이 빠르게 늙어갔다. 대학 학비에 대한 걱정은 덜었어도 원래부터 세 들어 사는 집이었기 때문에 세살이에 대한 불안감이 있었다. 산에게는 돈을, 그것도 당장 벌어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대학을 졸업할 때쯤 되자 그에게는 또 다른 고민이 생겼다. 군대에 가야하나……. 면제되는 조건이 있지 않던가? 그가 군대에 가면 어머니는 혼자서 계속 그 개고생을 하게 되는 건가? 산이 당장 돈을 벌면 상황이 좀 나아질 것 같은데 그런 방법은 없을까?

졸업한다고 바로 일자리를 따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확실하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산은 동기들의 대화를 듣다가 학사장교 제도에 대해 알게 되었다.

직업군인.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산은 공군에 지원했다. 나중에 군인을 그만두더라도 공군 장교였다는 스펙이 있으면 다른 곳에 취직할 때 좀 더 유리할 것 같아서였다.

임관식 날, 산의 어머니는 직업군인의 길을 택한 아들을 보고 복받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터뜨렸다.

산은 어머니의 눈물을 보고도 아무런 생각이 없을 정도로 무감정한 괴물이었지만 어머니가 끼워주는 사파이어 반지에는 의문을 표했다. 임관반지? 사비로 마련하는 것이기 때문에 산은 반지를 구입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런 쓸데없는 데에 쓸 돈은 없다. 감상을 자극하는 용도 말고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물건 아닌가.

그러나 어머니의 생각은 달랐다.

“항상 미안했다. 변변히 해주는 것도 없고 자식이라고 있는 게 너 하나뿐인데……. 등록금 때문에 장학금 받으려고 공부하던 거 다 안다. 넌 속으론 착한 아이야. 내가 낳았는데 당연히 알지. 네가 비뚤어진 길을 가지 않도록 얼마나 빌었는데. 고맙구나. 그리고 미안하구나. 집안 형편 어렵다고 직업군인 된다고 했을 때 내가 얼마나 억장이 무너지는 줄 알았니. 평생 해준 게 없는 거 같아 이거라도 장만했다. 다른 사람들 다 끼고 있는데 너만 안 끼면 눈치 보이잖아……. 임관식이라는 거 평생 한번 있을 텐데…….”

산은 어머니의 감상적인 결정이 미련하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내지 않을 분별력은 있었다. 그리고 진작 그가 유례없는 또라이 싸이코라는 걸 파악한 다른 동기들이 그에게 “안아드려.”하고 무시무시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산은 그들의 압박적인 기대에 부응해 어머니를 품에 끌어안았다.

“감사합니다.”

이 반지 맞출 돈이면 좀 더 생산적인 일에 쓸 수 있었을 텐데. 집세를 낸다던가, 여기저기 골병이 많이 든 어머니의 치료비로 쓴다던가. 이따위 금속쪼가리를 맞추기 위해, 잘 끼고 다닐 일도 없는 장식품을 위해서 어머니는 얼마나 피땀을 쏟았을까. 생각할수록 미련한 선택이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미련함이라고 욕했던 이 반지는 훗날 수 없이 많은 아수라장 속에서 산의 인간성을 지켜주는 계기가 되었다.

강산 소위는 전투비행단 특수임무소대장으로 근무하면서 군인으로서의 자질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그는 잘 만들어진 톱니바퀴였다. 처세술엔 약해서 나중에 높은 자리까지는 올라가기 힘들어보였지만 임무가 주어지면 묵묵히 실행하는, 말 그대로 시키는 대로 다 하는 유능한 부하였다. 그에게 맡겨진 임무가 휘하의 병사들을 통솔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지휘관으로서도 훌륭하게 일처리를 했다.

그에게는 인간적인 면이라곤 조금도 없었지만 반대로 무감정한만큼 공정했다.

무언가를 시키기엔 정말이지 완벽하게 이상적인 인물이었다. 그런 강 소위에게 다른 정부 기관에서 스카웃 제의가 들어오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어, 강 소위. 어때. 할만 해?”

“이상 없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국정원에서 일할 생각 없나?”

“국정원 말씀이십니까?”

유능한 현장 요원은 항상 부족하단다. 강산은 스카웃 제의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중위로 진급하는 게 맞는 건가 아니면 이직하는 게 맞는 건가?

짧다면 짧은 군 생활이었지만 기껏 인간과의 관계를 피해서 천직을 찾았다고 좋아했더니 이번에는 군 안에서의 인사 관계에 시달려야했다. 휘하 병사들의 예측 불가능한 동기와 사고 가능성도 혼란을 가중시키는데 한 몫 했다.

돈이라도 많이 받으면 모르겠는데 군인 월급이라고 해봐야 어차피 그게 그거다. 강산이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싫으면 거절해도 되지만 지금 오간 얘기는 전부 잊어야 하네.”하는 말이 상대에게서 흘러나왔다. 강산은 거의 즉답하듯이 물었다.

“첩보원은 월급 얼마나 줍니까?”

그렇게 강산은 정보기관에 입사하게 되었다. 눈에 띄는 외자 이름을 버리고 조영우라는 가명을 쓰면서.

인간과의 관계를 피해가지 못하고 똑같은 혼란에 시달릴 거라면 돈이라도 더 받는 게 나았다. 그런 점에서 강산, 아니 조영우의 선택은 옳았다.

첩보원으로서의 훈련기간을 거치고 처음 해외 파견 임무를 배정 받았을 때,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자신이 하게 될 일에 대해 막연한 상상 밖에 없었다. 어렴풋이 뭘 하게 될 것이다 하는 인상은 있었지만 알다시피 첩보원이란 게 업무의 많은 것이 알려진 직업이 아니니까.

처음으로 살인을 저질렀을 때, 태어나기를 무감정하게 태어난 인간이었어도 강산은 변기통을 붙잡고 심하게 토했다. 자기 자신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어렸을 때 새나 쥐 같은 것을 잡아다가 장난치듯이 잡아 뜯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충격이었다. 그의 내면에서부터 무언가가 부서졌고, 바뀌었다.

군대에서는 이것을 위해 계속 훈련하지 않았는가. 특수임무반은 대테러 진압을 위한 부대다. 적을 무력화시킨다는 것은 적을 죽인다는 소리다. 결국 사람을 해치는 일이란 말이다.

하지만 그건 훈련이었고 가상이었다. 실제로 사람을 죽여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가 계속 군인을 하고 있었고 언젠가 테러 상황이 일어나거나 전쟁이 일어나서 진짜로 사람을 죽이게 되었다면 몰라도, 이렇게 적극적으로 사람을 죽여야 하는 일과는 인연이 없었겠지.

그러나 군인이 되겠다고 한 것도, 거기서 첩보원으로 이직하겠다고 한 것도 모두 강산의 선택이었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다.

금방 적응하는 것이 그의 또 다른 미덕이기에 그는 첫 살인의 충격을 뒤로하고 첩보원으로서의 커리어를 쌓아갔다.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 몇 번째 임무부터인가, 그는 공군 시절의 임관반지를 들고 다니는 버릇이 생겼다.

이번 임무에서 완전히 죽어버릴 수도 있다……. 병신이 될 수도 있고, 붙잡혀서 고문실로 끌려갈지도 모른다. 영영 실종될 수도 있다. 그런 생각들이 들자 그가 감상적이라고 비웃었던 그 반지에 집착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반지는 그가 생전 처음 느낀 사랑의 징표였기 때문이다.

두꺼운 껍질로 둘러싸인 괴물 같은 인간임에도 그의 내면에는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감정을 느끼는 인간이 들어 있었다.

그가 왜 이 길을 택한 것일까. 왜 군인에 머물러있지 않고 여기로 온 것일까. 돈을 위해서? 무엇을 위해 돈이 필요했나. 집이 가난했지. 나 혼자 먹고 살 거라면 군인으로도 충분했다. 왜 돈이 더 필요했나? 어머니 때문에?

어머니의 눈물은 언제나 귀찮고 성가신 것이었다. 산은 자신의 주변에 있는 귀찮고 성가신 것들을 용납하지 않고 제거했다. 왜 어머니에 한해서는 그러지 못했을까.

그 눈물이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사람이 그에게 손가락질을 하고 돌을 던져도, 괴물이라고 욕해도, 이해할 수 없는 괴상한 돌연변이라고 욕해도 그의 어머니만큼은 그를 믿었다. 그도 다른 사람과 다를 것 없이 똑같은 인간이라고. 겉모습은 어떨지 몰라도 내면은 완전히 똑같다고.

자식의 뇌가 어딘가 이상한 것 같다는 소릴 들었을 때 어머니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 아이가 자라가면서 점차 이상한 짓을 하고 남들에게 손가락질 받을 때, 그리고 자신의 눈으로 보기에도 정말 이상할 때 어머니의 마음은 어땠을까.

세상 모든 사람이 이 아이를 버려도 나만큼은 내 자식을 믿어줘야 하는 어머니가, 자기 자식이 정말로 남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아버렸을 때의 그 절망감은 어땠을까.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다니고 죄인인 것처럼 짐을 지고 살던 어머니가 우여곡절 끝에 자식이 제대로 커서 장성한 청년이 되어 번듯한 직업을 얻게 된 것을 보게 되었을 때 그 심정은 어땠을까.

임관반지는 그 모든 것을 담고 있었다. 남들이 보기엔 투박하고 별 가치 없는 물건일지 몰라도.

어머니가 계속 전해왔던 사랑한다, 사랑한다 하는 마음이 그 작은 물건에 담겨 있었다. 멍청하게, 받을 치료도 못 받고, 안 그래도 적은 월급에서 깎아가며 반지를 위해 돈을 모으면서, 눈물이 글썽거리는 눈으로 자식의 손에 그것을 끼워주었다.

두렵고 불안한 밤이면 산은 그것을 부적이라도 되는 듯이 꼭 안고 웅크렸다.

추적을 받을 때, 짐승들과 싸우며 노숙해야 할 때, 시신을 자신의 위에 덮고 위장해야 할 때, 자기를 찾는 목소리가 피칠갑된 복도 이곳저곳에서 들려올 때, 그 모든 순간에 그를 유일하게 위로해줄 수 있는 물건이 그것이었다. 인간성의 상징.

나는 괴물이 아냐.

내 안에도 인간이 들어있어.

이 미친 세계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이 따뜻함, 이 유일한 온기를 잊지 않도록.

“요원들 개인 소지품에까지 뭐라고 할 생각은 없는데. 그거 개인정보가 너무 들어간 거 아닌가? 그 반지 하나만으로 국적부터 군종에 기수에 이름까지 알 수 있는데. 눈에 안 띄게 조심 좀 해. 입사할 때 가명 썼지? 그 반지 이니셜만 봐도 본명과 다르다는 걸 알겠는데. 신원이 들통 날 부분은 지워. 아니면 아예 놓고 오던가.”

상사가 산의 반지를 보고 지적하자 산은 정보가 들어간 부분을 갈아내 버렸다. 그래도 반지 자체를 가지고 다니는 건 포기 못했다.

마지막 임무 때도, 그리고 산이 임무를 실패하고 이 세상과 작별해야 하는 순간까지도 반지는 산의 손 안에 있었다. 다른 나라로 도망치거나, 망명하거나, 정체를 숨기고 잠적할 수 있는 선택지가 있었지만 그가 죽어야 유족 앞으로 보상금이라도 나오기 때문에…….

반지를 쥐고 한참 울었던 것 같다. 그렇게 세상과 작별했다.

그래야 할 터였다.

“내 이름은 산……. 산이야. 이게 내 본명이야. 기억났어. 그리고 난 죽었어. 죽어야했어.”

사파이어가 손톱이 살을 파고 들어갈 정도로 반지를 꾸욱 쥐면서 벤체슬라스를 노려보았다. 망자의 원한이 담긴 눈이었다.

“죽게 내버려뒀어야지. 살리지 말고. 살려서 인형으로 만들지 말고!”

“네가 그렇게 잘났어?”

벤체슬라스가 입 안에 고이는 피를 뱉으며 물었다.

“그렇게 모든 걸 다 누려야겠어? 넌 운이 좋아서 좋은 나라에 태어나서 호의호식하면서 살았겠지. 국가라는 후원자가 요람부터 무덤까지 챙겨줬겠지. 네가 사람을 깔봐도 돼? 그렇게 기만해도 돼? 웃기지도 않는 걸 웃는 척 하면서 비웃어도 돼?”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너 같은 위선자는 썩어 문드러져야 돼. 너 같은 인간들은 남에게 얼마나 모멸감을 주는지 영원히 몰라. 너 같은 인간들이 제일 나쁜 인간들이야. 태어날 때부터 악해.”

벤체슬라스가 살아온 생애 그대로 독기를 담아 짓씹어 내뱉었다.

“네가 연기를 하고 있었다는 걸 내가 모를 것 같았나? 여태까지 다른 사람은 잘 속여 넘겼겠지. 이해되지 않는 걸 공감하는 척 하면서 그 뻔뻔스러운 낯짝으로. 싸이코패스면 싸이코패스답게 굴어. 네 웃음이 정말 어색하다는 걸 지적해줘야겠군. 오해를 사기 쉬운 웃음이야. 한 없이 비웃음에 가까우니까.”

“내가 기억 못하는 걸 가지고 욕해봤자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아.”

“해결해야 할 건 아무것도 없어. 너의 존재 자체가 문제니까.”

“나한테는 그게 최선이었어. 네가 알아? 다른 사람한테 공감하지 못하고, 평생을 괴물취급 받고, 정신이상자라고 손가락질 받는 거! 네가 그 고생을 알아?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아? 다른 사람이랑 조금이라도 비슷해지려고. 조금이라도 괴물에서 벗어나려고!”

“웃기지 마. 괴물로 태어났으면 괴물로 살아.”

사파이어는 벤체슬라스의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다. 이제는 그를 가만히 찍어 누르고 생각할 시간이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사파이어를 위협할 힘도 없으니까.

“너는……. 항상 날 깊이 이해했지. 내 상태를 너무 잘 알고 있었어. 마치 자기 자신처럼. 나한테는 불가능한 것들이 너에게는 숨 쉬듯이 자연스러워 보여. 너는 남에게 공감할 수 있는 거야. 그것도, 지나치게.”

“닥쳐.”

“너는……. 다른 사람을 너 자신처럼 이해할 수 있는 거야.”

“닥쳐, 이 괴물아. 너한테서는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여태까지 나를 학대한 건……. 너 자신을 학대하는 과정이었군.”

벤체슬라스가 그르륵 소리를 내면서 몸을 일으켰다. 피거품이 입가를 타고 흘러내렸다. 피와 흙먼지로 더러워진 손가락들이 서로에게 얽혀들었다. 아까처럼 묵직하게 힘이 담긴 주먹이 아니라, 앙금 같은 감정이 남아 서로에게 진득하게 물고 늘어지는 그런 지독한 싸움이었다.

5년이다. 5년간이나 몸을 섞어온 남자다. 숨소리만 들어도 안다. 학대를 가하는 쪽도, 당하는 쪽도 서로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사파이어가 오랫동안 느끼고 있던 수수께끼의 아귀들이 맞아가며 하나의 진실로 나타났다. 그는 왜 사파이어를 증오하고 혐오하면서도 손에서 놓지 못했을까. 왜 이토록 역겨워하는 남자를 안으면서도 쾌감에 절은 얼굴을 보여줬을까. 사파이어는 똑똑히 보았다. 항상 그의 품에 안겨 있었기 때문에.

“Te urăsc atât de mult.(난 네가 정말 싫어.)”

벤체슬라스는 여태껏 단 한 번도 쓰지 않은 언어로 속삭였다. 어째서인지, 사파이어는 그것을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사파이어는 그게 루마니아어라는 것도 몰랐지만 그 동안 함께 해 온 시간이 있기 때문에 그의 표정만 보고도 뭘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의 가면이 완전히 벗겨져 내렸다는 것도. 도피하듯이 외국어로만 살아오다가 처음으로 모국어를 썼다는 것도.

그래서 사파이어 역시 자신의 모국어로 대응해주었다. 5년만의 한국어였다.

“나도 네가 미치도록 싫어.”


벤체슬라스가 자기 입으로 진상을 고할 의지가 없다는 걸 확실히 알았기 때문에 사파이어는 그 동안의 단서를 끌어 모아 추리했다. 인간 행동 관찰하기가 취미였던 싸이코패스 첩보원이 한 인간의 동기를 얼마나 파고들 수 있는지 보자.

벤체슬라스는 이미 충분히 말했다. 제 입으로 술술 불어버린 셈이다.

벤체슬라스가 남보다 더 공감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알겠다. 그에 대한 징후는 여러 번 목격되었다.

언어를 습득하는 것 자체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각 언어마다 그 나라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처럼 녹아드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학습만으로 부족하다. 모방이 필요하다.

연기가 극에 달하면 더 이상 얼굴에 덮어 쓴 가면이 아니라 내가 직접 그 상대가 되어버린다. 벤체슬라스는 원어민들도 깜박 속아버릴 정도로 언어 능력이 훌륭하다. 언어란 결국 사람과 소통하는 수단이다. 사람과 교류하지 않는 언어는 발전하는데 한계가 있다.

사파이어가 아무리 위장해도 미국인으로 오해받았던 것처럼.

사파이어의 영어는 한국 공교육이 주입식으로 키워낸 것에 스파이 생활을 하며 현지에서 습득한 연기가 다다. 최대한 모방하려고 했지만 결국 따라 하기에 지나지 않고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체득했다고 말하긴 어렵다.

다행히 미국식 영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유럽인들은 그의 정체를 짐작하기 어려웠지만, 사파이어가 영국식 영어를 구사했거나 상대방이 미국인이었으면 바로 정체가 탄로 났을 것이다.

벤체슬라스는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 인격이 변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한 사람의 껍데기 안에 무수히 많은 인격이 들어있다고 할까. 벤체슬라스가 영국인인 척 하면 정말로 영국인 토마스 크로포드가 존재했고 스페인인 척 하면 라울 가르시아 로페즈라는 인물이 진짜로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언어의 유창성이나 억양이 전부가 아니다. 그는 행동부터 달라졌다. 그는 다른 문화에 물처럼 녹아들었다.

그의 뛰어난 언어 습득 능력은 공감이라는 재능에서 기인한다. 사파이어와는 정반대의 형질이다.

이런 형질을 가진 사람이 사파이어에게 원한을 품을만한 일이 뭐가 있을까. 그는 누구보다도 사파이어를 잘 이해했다. 어쩌면 사파이어가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만난 그 누구보다도. 어쩌면 사파이어를 낳은 사람보다도.

사파이어의 머릿속을 훤히 꿰뚫고 있는 공감능력자가 대체 감정 없는 싸이코패스에게 화를 낼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그는 사파이어의 감정 표현을 지적했다. 어색하기 짝이 없다고. 이것인가? 그가 모멸감을 느낀 것이? 그에게는 사파이어의 거짓이 훤히 보였을 것이다. 사파이어는 평생 동안 오해를 사왔던 남자다. 벤체슬라스의 눈에는 사파이어가 어떻게 보였을까.

체코 정보원이 제공해주었던 정보를 되짚어보자. 벤체슬라스가 루마니아 출신이고 30대 가량 되었다면 출생은 1980년대 후반이나 1990년대 초반 즈음이다.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집권기 시절의 루마니아다.

그가 나라를 차근차근 말아먹은 덕에 루마니아는 손꼽히는 빈국이었고 사회적인 불안은 극에 달했다. 동시대의 한국은 88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르고 나서 한창 호황기를 달리던 때였다.

벤체슬라스의 눈에 한국은 충분히 좋은 나라였을 것이다. 충분히 잘 사는 나라.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잘 자란 세상물정 모르는 도련님이 사파이어였을 것이다. 사파이어 개인의 삶이 어땠는지는 상상할 수 없었겠지.

거꾸로 생각해보면 그만큼 국가가 벤체슬라스에게 가혹하게 굴었다는 것이다. 태어난 나라라는 것만 가지고 남에게 저렇게 열등감을 품을 정도면.

열등감. 그렇다. 확실히 열등감이다.

잘 사는 나라에서 온 온실 속 화초 같은 도련님이 보여주는 억지스럽고 어색한 감정 표현은 벤체슬라스를 조롱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왜 하필이면 사파이어였을까? 그가 여태까지 살아오는 동안 그에게 모멸감을 준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단 말인가? 아니, 아니다.

그는 사파이어를 자기 자신처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사파이어의 거짓에 더 큰 모욕감을 느꼈다. 사파이어가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사파이어의 호의는 진짜 호의일리 없고 그의 악의도 진짜 악의일리 없다. 사파이어가 거짓말을 한다는 것 때문에 벤체슬라스는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을 느꼈을 것이다. 아마도 그것이 동기.

벤체슬라스가 강산이라는 인간을 사파이어라는 보석으로 만들게 된 근본적인 원한.

그렇다면 또 다른 의문이 생긴다. 왜 그는 사파이어를 죽이지 않았을까?

그 자리에서 죽여 버리면 간단하게 끝날 일일 텐데 왜 자신의 곁에 두고 보석으로 깎아내렸을까? 사파이어를 셀 수 없이 사지로 밀어 넣으면서도 죽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을까? 자신의 손으로 몇 번이나 죽인다고 했으면서도 결정적으로 죽이지 못했던 이유는 뭘까? 왜 그렇게 집착했나?

벤체슬라스가 남을 자신처럼 이해할 수 있다면 사파이어의 공허하고 무감정한 내면 역시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인간의 내면에 숨어 있는 악의와 거짓말을 숨 쉬듯이 자연스럽게 간파해내는 벤체슬라스에게 세상은 얼마나 지독한 곳이었을까? 마치 사파이어가 이해하지 못할 타인의 행동을 보며 혼란을 느끼는 것처럼, 모든 것을 깨진 유리조각처럼 날카로운 자극으로 받아들이는 벤체슬라스는 어떤 고통을 겪어왔을까?

난 네가 부러워.

그가 가끔 했던 말이다. 사파이어가 벤체슬라스와 함께 있을 땐 혼란스러운 세상이 명확하게 정의가 되었다면, 반대로 사파이어와 함께할 땐 벤체슬라스도 그만큼 세상에 대해 무감각해졌다는 것이다.

사파이어의 선천적인 공허함에 감응하여. 서로의 요철이 빈틈없이 맞물리듯이. 이 혐오스러운 남자와 함께 있으면 진통제를 맞은 것처럼 세상의 자극에 대해 둔감해지니까.

덜 생각하고. 덜 느끼고. 간단하고 단순한 도식만이 남는다. 그건 사파이어가 여태까지 느껴왔던, 그리고 항상 갈구해왔던……. 안식이다.

“넌 날 사랑한 거야.”

이것이 사파이어의 결론이다.

“내가 죽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내 유품은 계속 가지고 다녔어. 더 이상 의미가 없는 물건일 텐데도. 나는 그만큼 너에게 중요한 존재였던 거야.”

벤체슬라스가 혐오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사파이어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었다. 사랑을 이해하지도 못하는 남자에게 저런 분석을 듣다니.

내가 그를 사랑했단 말인가? 진심인가? 정말 역겹군.

하지만 이야기는 이걸로 끝이다. 벤체슬라스는 영원히 진실을 알려 줄 생각이 없었다. 자기 자신도 갈피를 잡지 못하겠으니 사파이어에겐 더 큰 수수께끼로 남겠지.

벤체슬라스가 지독히 광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혼신의 힘을 다해 사파이어의 목을 쥐었다. 마지막 힘을 끌어 모으면 그를 죽일 수 있을 것 같다. 근소한 차이지만 사파이어는 벤체슬라스보다 기력이 조금 더 남은 것 같다. 높은 확률로 벤체슬라스가 죽을 것이다.

살해당하겠지.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렇게 될 이야기였다.

“죽여.”

벤체슬라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날 죽이고 그 잘난 인생을 살아봐, 이 살인마야. 나도 내 아버지를 죽이고 여기까지 왔어. 나도 이렇게 딛고 일어섰으니 너도 이런 식으로 딛고 일어서겠지. 넌 사람 죽이는 일을 그만두지 못해. 너 역시 세공사가 되겠지. 여기서 살아남아봤자 이다음엔 협회가 찾아오겠군. 둘 중에 누가 살아남든 결국엔 죽어. 한 번 재주껏 살아남아보시지. 내 이야기는 여기까지야. 이제 날 죽여 봐, 이 괴물아.”

“죽이라고?”

사파이어는 자신의 목을 조르기 시작한 벤체슬라스의 손아귀를 한 손으로 붙잡아 으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꺾어 쥐었다. 그럼에도 목의 핏줄이 올라설 정도로 조여지고 있었다. 눈에 핏발이 서는데도 사파이어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는 섬뜩하게 무감정한 얼굴로 벤체슬라스를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내 인생을 이렇게 망가뜨려놓고 너는 퇴장하겠다고? 아니. 넌 살아야 돼. 나를 길들인 책임을 져야 돼. 대가를 치러. 함부로 죽을 생각 하지 마.”

언젠가, 벤체슬라스가 사파이어에게 이것과 비슷한 소리를 한 적이 있다. 그것이 고스란히 돌아오고 있었다. 자신이 여태까지 억압하던 자의 입에서.

“넌 영원히 이 지옥에서 살아야 돼. 이게 내 선택이다.”

사파이어의 손이 벤체슬라스의 얼굴을 쥐었다. 그 지긋지긋한 세월을 함께 하며 숱하게 본 얼굴이지만 마치 이 순간 처음 보기라도 한 듯이 벤체슬라스의 눈동자가 사파이어를 정면으로 직시했다.

그의 눈동자는 맑고 청명한 하늘을 담은 것 같은 투명한 푸른색이었다. 보석과도 같은 하늘색 눈동자. 그의 눈에는 희미하게 눈물이 고여 있었다.

사파이어의 오른손 엄지손가락이 벤체슬라스의 왼쪽 눈을 파고 들어갔다. 벤체슬라스가 참을 수 없는 비명을 터뜨렸지만 사파이어의 손은 멈추지 않고 더 깊숙이 파고 들어갔다.

“끄아아악! 아아아악!”

길고 끔찍한 비명이었다. 울지 않고 반성하지도 않는 악한 남자가 유일하게 터뜨리는 처절한 오열이었다. 한 쪽 눈을 희생해야만 비로소 울 수 있었던 남자.

벤체슬라스의 손이 사파이어의 팔과 어깨를 미친 듯이 잡아 뜯었지만 사파이어의 팔뚝에선 전혀 힘이 빠져나가지 않았다. 악독하게 사파이어를 붙잡고 늘어지던 하얀 손가락들이 힘을 잃고 늘어졌다.

사파이어는 이를 부드득 갈며 벤체슬라스가 완전히 의식의 끈을 놓을 때까지 그의 눈을 짓눌렀다. 벤체슬라스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자 사파이어는 근처에 떨어져 있던 그의 무기를 빼앗아 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잊고 있던 추격자들이 어느 샌가 포진해있었다.

“이 남자는 내꺼야.”

사파이어는 피인지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을 쓰윽 닦으며 무기를 고쳐 쥐었다.

“살려도 내가 살리고 죽여도 내가 죽여. 나는 이 남자에 대한 권한이 있어.”

누구도 사파이어의 혼잣말을 듣지 못했다. 정신을 잃은 벤체슬라스까지도.

사파이어는 벤체슬라스를 자신의 뒤에 남겨놓고 피로 얼룩진 얼굴로 난폭하게 씨익 웃으며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한결 홀가분하고 자유로워져서.


스위스, 세공사 협회.

늦은 밤이었다. 바유미 씨는 자원해서 데스크에 앉아 있었다. 협회 금고를 이용하는 고객 중에는 이따금씩 한밤중, 한밤을 넘어서 새벽에 방문하는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에 문은 언제나 열려 있었다.

다만 시간이 시간인지라 역시 건물 안엔 사람이 없었다. 유령이 나올 것 같은 고요한 시각이다. 바유미 씨는 싸늘한 한기를 느끼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하고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벤체슬라스가 마지막 권고를 무시하고 결국 사파이어와 일전을 벌여서 큰 소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협회는 더 이상 그에 대해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이미 협회의 암살자들이 그의 목을 치러 갔을 것이다. 그가 살아남지 못했다면 암살자들은 사파이어의 목을 대신 따오겠지.

바유미 씨는 안경을 벗으며 검토하던 서류를 내려놓았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이제 슬슬 눈이 안 좋아지기 시작한다. 몸 상태도 예전 같지 않고. 뻐근한 어깨를 풀면서 바유미 씨는 은퇴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은퇴라니. 가능한 일일까. 이 일을 하면서 침대에서 평화롭게 죽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바유미 씨는 잠시 상념에 잠겨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 때, 건물 문이 거칠게 쾅 열리더니 뚜걱뚜걱 발소리가 들려왔다. 손님인가? 고개를 돌린 바유미 씨 앞에 무언가가 난폭하게 내던져졌다. 자른 지 얼마 안 된 사람 목이었다. 바유미 씨는 그 얼굴을 알아보았다. 분명히 협회에서 보낸 암살자다.

머리를 던진 방문객은 피칠갑을 한 채 온 몸에서 핏방울을 뚝 뚝 떨어뜨리며 바유미 씨를 살벌하게 노려보았다. 바유미 씨는 놀란 기색 없이 깍지를 끼며 낯선 방문객을 관찰했다. 피칠갑 한 남자가 하얀 송곳니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여기가 세공사 협회인가?”

“당신은?”

“사파이어.”

“아, 당신이.”

말로만 듣던 라피스 라줄리의 보석이로군. 바유미 씨는 한결 여유롭게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눈앞의 남자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한 차례 평가가 끝나자 바유미 씨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사무적으로 물었다.

“어쩐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벤체슬라스에 대한 사살령을 철회해.”

“협회의 판결은 확고합니다.”

“바꿔.”

비정상적인 상황의 비정상적인 대화였다. 사람 머리가 굴러다니는데 나눌만한 이야기가 아니다. 사파이어는 나른한 듯이 고개를 뚜둑 뚜둑 꺾었다.

“나는 그 남자의 목숨에 대한 권한이 있어. 죽여도 내가 죽여. 당신들은 이 일에서 빠져. 이미 봐서 알겠지만 난 일을 크게 벌이는데 주저하지 않아. 곤란해지는 건 당신들 쪽일걸. 당신들을 난처하게 할 만한 정보를 내가 알고 있을지도 몰라. 그걸 모든 사람에게 공개해버릴 수도 있고. 내 옛날 직업이 좀 특수했거든. 없던 버릇도 생겨서 말이야. 내가 꼴리는 대로 저질러버리는 건……. 끝장나게 좋은 기분이더라고. 극단적으로 충동적인데다가 싸이코패스인 전직 첩보원이 어디까지 할 수 있나 보고 싶다면 계속 건드려봐.”

바유미 씨는 대답 없이 책상을 손가락으로 따각따각 두들기며 생각에 잠겼다.

사파이어 하나를 제거해버리는 건 손쉬운 일이다. 하지만 그가 말한 정보라는 게 걸린다. 단순한 무력 싸움이 아니다. 높으신 분들의 비위를 맞춰야 하는 세공사 협회 입장에서 보자면 누구에겐 득이 되고 누구에겐 해가 되는 정보만큼 위험한 공격수단도 없다. 정부 간에 이간질을 시킨다던가, 숨겨져야 하는 비밀을 까발린다던지, 그런 식으로 뒤흔들어놓을 수 있겠지.

이 남자는 그것을 직업적으로 하던 사람이다.

사파이어가 제안하는 것은 간단하다. 벤체슬라스에게서 손을 떼라는 것. 그럼 그는 입을 다물 것이다. 협회 입장에서는 규칙을 어긴 세공사 하나 처리하자고 초가삼간 불태울 필요가 없었다.

벤체슬라스를 죽이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을 것이다. 사파이어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다. 인터폴이 그를 열렬히 사랑하며 감시하는 와중에 굳이 협회가 노출될 필요가 있을까?

“저는 협회의 판결을 번복할 권한이 없습니다.”

“재량껏 처리해. 나는 내 거래조건을 말했어.”

“거래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거래.”

사파이어의 의중을 확실히 파악한 바유미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벤체슬라스를 놓아주는 게 이득이다.

이 남자는 거래라고 했다. 결정을 뒤집진 않을 것이다. 협회가 그들을 건드리지 않으면 그들도 협회를 건드리지 않을 것이다. 안 좋은 선례를 남기는 셈이겠지만 지금은 딱히 좋은 방법이 없다.

바유미 씨는 사파이어를 가만히 쏘아보다가 전화를 들더니 어딘가에 연락했다.

“터키석입니다. 제 권한으로 세공사 벤체슬라스에 대한 사살령을 일시 철회합니다.”

짤막한 통보였다. 바유미 씨가 전화기를 내려놓자 사파이어가 더 이상 볼 일 없다는 듯이 등을 돌려 걸어 나갔다.

바유미 씨의 판단은 옳았다. 건물 밖에 막 헬기 한대가 내려서고 있는 참이었다. 헬기에는 알료샤가 타고 있었다. 그는 손을 내밀어 사파이어가 헬기에 올라타게 도와주었다. 바유미 씨가 이 자리에서 거절했으면 헬기 째로 협회 건물에 공격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극단적으로 충동적인 미치광이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

헬기가 사라지는 것을 보며 바유미 씨는 다시 전화기를 들었다.

“터키석입니다. 이 시간부로 세공사 벤체슬라스, 보석 사파이어, 보석 알렉산드라이트를 블랙리스트에 올립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들과 충돌하지 마십시오. 이 안건을 회의에 올립니다.”

전화를 끊고 나니 다시 싸늘한 침묵이 찾아왔다. 바유미 씨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살아남았군요, 라피스 라줄리. 세상을 적으로 돌리던 당신에게 인생을 함께해 줄 동반자가 생겨서 다행입니다.

바라건대 우리 모두에게 안식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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