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몰락
아침이 되었다. 산 속의 아침은 빨리 찾아온다. 창문을 넘어온 햇살이 잠든 눈꺼풀을 살며시 건드리자 알료샤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알료샤는 누군가가 못된 장난을 하는 것처럼, 그 손길에서만 피하면 계속 잠을 잘 수 있을 것처럼 고개를 틀었지만 햇살은 알료샤가 눈을 뜰 때까지 부드럽게 그를 깨웠다. 결국 알료샤는 잠에서 깨버렸다.
사실 알료샤가 깨어난 이유는 햇살 그 자체보다 햇살이 깨울 누군가 때문이었다. 알료샤는 품에 안겨 있는 남자를 깨우기 싫어서 멀리 있는 커튼을 건드리려고 일어나는 대신 이불을 들어 올려 남자의 얼굴을 가려주었다.
곤히 잠든 남자가 품 안에서 꿈지럭거리자 알료샤의 입가에 나른한 미소가 피식 걸렸다. 남자의 느린 심장박동에 맞추어 알료샤도 서서히 호흡이 느려지다가 까무룩 다시 잠이 들고 말았다.
알료샤의 팔뚝이 사파이어를 더욱 깊숙이 끌어안았다.
두 시간이 더 지나서야 알료샤는 완전히 잠에서 깼다. 사파이어는 아직 눈을 뜨지 못했다. 알료샤는 사파이어가 깨지 않도록 팔베개 해주고 있던 팔을 조심조심 빼냈다. 그리고 잠든 사파이어의 이마에 짧게 키스해주곤 아침을 만들러 주방으로 들어갔다.
시골집은 도시 생활에서 누릴 수 있는 편의성과 거리가 멀었지만 있을 건 다 있었다. 어제 동네 사람이 가져다 준 계란이 있었기 때문에 아침식사로 블린을 만들 참이었다. 냉장고에 넣어두지 않았지만 닭장에서 바로 빼온 거라 며칠씩 걸려서 유통되는 도시 계란보다는 훨씬 신선할 것이다.
우유도, 버터도, 치즈도 모두 이 근처에서 생산됐고 주민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들이다. 블린에 곁들일 딸기잼은 멀리서 온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공장제는 아니다.
알료샤를 예뻐해 주는 바부쉬카는 곳곳에 퍼져있다. 진짜 어딜 가든 만날 수 있다. 그 마음씨 좋은 할머니들은 알료샤가 거절하지 않았더라면 아예 트럭 몇 대 분량으로 직접 만든 잼이며 과일 절임이며 크바스나 콤포트 같은 것을 보내줬을 것이다.
알료샤가 요리를 썩 잘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굶어죽진 않을 정도로 자기 앞가림은 할 줄 안다. 자기 입에 들어가는 거라면 대충 해먹거나, 아니 애초에 해먹지도 않을 것이다. 아는 가게에 들어가서 한 접시 주문하지. 가게 주인은 그에게서 돈을 받지 않을 것이다.
오늘 아침은 상황이 다르다. 알료샤는 나름대로 실력발휘를 했다. 블린은 반죽을 얇게 한 팬케이크인데 그 안에 다진 고기 소를 넣고 든든하게 먹든가 잼이나 크림 등을 곁들여서 디저트로도 즐길 수 있는 음식이다. 몇 장을 살짝 태우긴 했지만 대체로 얇고 반듯하게 구워져 나와서 알료샤는 만족했다. 이 이상은 바부쉬카의 손길이 필요하다. 진짜로. 한 분 모셔오고 싶다.
부엌을 난장판으로 만들면서 알료샤가 만들어낸 결과물은 산더미같이 쌓아올린 블린과 과일 샐러드로 만들려다가 실패한 비참한 무언가, 소금 간을 잘못한 계란 프라이, 이 중에서 유일하게 맛을 보장할 수 있는 수제 딸기잼이었다. 잼은 그냥 뚜껑을 땄을 뿐이다.
분명히 얼굴 근처에 손이 올라간 적도 없는데 뺨에 밀가루를 잔뜩 묻힌 알료샤가 자신의 창작물을 내려다보며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사파이어에겐 인간 사료 같은 단백질 덩어리가 아니라 더 훌륭한 식사가 필요하다! 알료샤가 만든 게 과연 사파이어가 먹던 헬스 트레이너 같은 식단과 비교해서 맛이 더 좋을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정성을 담아 무언가를 만들어냈다는 점이 중요하다.
사파이어가 깨기 전에 조용히 만들었다가 완벽한 아침상을 내놓는다는 게 목표였는데 기쁜 얼굴로 뒤돌아서니 초췌한 안색의 사파이어가 주방 문간에 기대어 서서 알료샤가 뭘 하고 있나 지켜보고 있었다. 아직 잠이 덜 깬 표정이었다.
“끼야악!”
알료샤는 호들갑을 떨며 사파이어를 양손으로 들쳐 안았다. 비몽사몽한 상태로 비틀거리던 사파이어는 아무런 저항 없이 알료샤의 품에 안겼다. 알료샤는 그대로 다시 사파이어를 침대에 데려다놓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나는…….”
“쉬잇!”
알료샤가 조용히 하라는 듯이 검지를 입에 댔다. 그리고 다급한 발걸음으로 다시 주방으로 돌아갔다.
뭘 하는 걸까.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알료샤가 쟁반에다가 자신이 아침 내내 만든 것들을 담아서 유명 레스토랑의 웨이터처럼 한 손으로 받치고 들어왔다. 그러다가 그릇을 한 번에 다 쏟을 뻔해서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다시는 장난치지 않고 제대로 두 손으로 들고 왔다.
알료샤는 작은 접이식 테이블 같은 침대 식판을 사파이어 앞에 펼쳐주고 그 위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사파이어가 가물거리는 눈을 깜박거리며 항변했다.
“난 환자가 아냐.”
“아내 아침식사는 남편이 차려주는 거예요.”
“난 당신 아내가 아냐.”
알료샤는 쓸데없는 공방을 차단하려고 사파이어의 이마에 쪽 하고 입맞춤했다. 그런 다음 손수 음식을 떠먹이기 시작했다. 우선은 심혈을 기울인 블린부터. 딸기잼을 넉넉히 올린 블린을 한 입 크기로 잘라서 입가에 갖다 대자 사파이어가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뒤로 뺐다.
“더 이상 지켜야 되는 규칙 같은 거 없잖아요. 처벌 받지도 않고.”
“아…….”
“아, 아, 아, 안되지. 생각은 나중에. 일단 먹고. 응? 일단 먹어요. 내가 고생하면서 만든 건데 그냥 무시할거예요?”
물론 딸기잼은 아니지만.
사파이어는 마지막까지 의심을 버리지 못한 눈으로 알료샤가 내민 것을 받아먹었다. 버터로 익힌 밀가루 반죽의 고소함과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당분, 푹 익힌 딸기의 상큼함이 어우러지면서 복합적인 향미가 코끝으로 느껴졌다.
사파이어는 두입 째부턴 군말 없이 받아먹었고 알료샤는 귀찮은 기색 없이 식사가 끝날 때까지 수발을 들어주었다. 물론 소금 간을 잘못한 계란 프라이는 반 이상이나 남겨서 결국 알료샤가 전부 먹어치워야 했지만.
“어땠어요?”
“맛있어.”
그 말에 알료샤가 활짝 미소 지었다. 사파이어가 감정표현을 하기 시작한 것이 하나하나 기쁘고 새로웠다.
그 날 템즈 강에서 사파이어의 추락을 보고 알료샤가 목 놓아 울던 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물론 완전히 진실도 아니지만, 또 완전히 거짓도 아니다. 절반 정도의 진실과 거짓이 섞였다고 할까.
알료샤는 원래 사파이어를 벤체슬라스의 손아귀에서 완전히 빼낼 생각이었다. 그러려고 도주 루트도 짜놓았다. 중간에 배로 이동한다는 계획은 있었지만 그게 워털루 다리에서는 아니었다. 조금 더 가야했다.
그런데 예기치 않게 사파이어가 떨어져 내려서 말 그대로 심장이 멎어버리는 줄 알았다. 물론 근처에 알료샤의 부하가 대기하고 있어서 금방 사파이어를 구해낼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기껏 준비해놓은 계획이 이렇게 어긋날 줄은 몰랐다.
결과는 크게 변함없으니까 그렇게 실성한 것처럼 목 놓아 울 일은 아니었다. 그 때의 오열은 다분히 계획적인 것이었다. 사파이어가 강물에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알료샤는 어쩌면 이것이 기회가 될 수도 있겠다고, 벤체슬라스를 완전히 단념시킬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그래, 연기를 좀 했다. 벤체슬라스는 그것에 속아 넘어갔다. 그가 겁에 질리는 꼴을 다른 사람도 봤어야 하는 건데.
벤체슬라스가 사라지고 나서 알료샤 역시 경찰에게 잡히지 않으려고 자리를 피했다. 사파이어는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던 녀석들이 진작 구해내서 심폐소생술을 하고 있었다. 사파이어는 물만 좀 먹었을 뿐 달리 다친 곳은 없었다. 충격이 커서 계속 기절한 상태였지만. 그렇게 해서 사파이어 역시 무사히 그 장소를 탈출.
남은 것은 벤체슬라스의 실낱같은 희망을 무너뜨릴 뒷공작이었다. 사파이어 체구의 동양인 남성의 시신을 구하는 건 크게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문제는 얼굴이었다. 어설프게 손대봐야 질릴 정도로 사파이어를 품에 안았던 벤체슬라스가 시신이 가짜라는 걸 못 알아볼 리 없다. 그래서 일부러 더 얼굴을 훼손했다. 명분은 충분했다. 며칠이나 물에 잠겨있었으니까.
사인 역시 여지를 주지 않고 단번에 즉사한 것으로 꾸몄다. 검시 결과를 속일 수 있냐고? 스코틀랜드 야드에 알료샤의 친구가 없을 것 같은가? 여우 같이 의심이 많은 벤체슬라스를 속이기 위해 사파이어의 옷을 벗겨서 시신에게 입히는 것으로 공작을 마무리했다.
알료샤의 예상대로 벤체슬라스는 꼼짝없이 속아 넘어갔다. 나중에 듣자하니 거의 바닥을 기어서 시신안치소를 나갔다지.
사파이어는 이제 벤체슬라스의 머릿속에서 완전히 죽어버렸다. 하지만 모든 걸 의심하는 남자라서 언젠가는 자신이 본 것도 믿지 않고 예리하게 파고들 것 같았기에 알료샤는 사파이어를 데리고 외딴 곳으로 도망쳐왔다.
북캅카스의 체첸 공화국.
처음에는 수도 그로즈니로 왔다. 여기까지만 와도 지금은 이빨 빠진 호랑이에 불과한 벤체슬라스가 쫓아올 수 있는 가능성이 한 없이 낮았지만 그래도 안심하지 않고 더 깊숙한 곳으로 몸을 숨겼다.
도시에서라면 돈으로 알료샤만큼의 권위를 살 수 있지만 시골로 들어가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알료샤는 자신이 왕으로 군림할 수 있는 몇 몇 마을을 알고 있었다.
과거에 알료샤에게 도움을 받아 그에게 갚아야할 빚이 있던 촌장은 알료샤가 갑자기 웬 동양인 남자를 데리고 왔어도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를 체류하게 허가해주었다. 마을 전체가 알료샤에게 빚이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그는 공포로 군림하지 않았고, 일종의 영웅 같은 존재였다. 사람들은 그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어린아이들만이 호기심 어린 눈을 빛내며 그와 그의 동행에 대해 이것저것 캐묻고 싶은 눈치였지만 어른들이 무섭게 주의를 주었기 때문에 감히 다가오지도 못했다.
이 마을에선 모두가 그의 편이다. 돈이 있다고 해서 함부로 침범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누군가가 마을을 들어오는 것도 나가는 것도 전부 알 수 있고, 외지인이 나타난다면 마을 사람 중 누구라도 알료샤를 대신해 그를 심문할 것이었다.
일단 여기까지 오자 알료샤는 한시름 놓았다. 애초에 동유럽이 그의 놀이터다. 여기서라면 밤에 자물쇠를 걸어 잠그지 않고 자도 걱정할 게 없다.
사파이어가 알료샤 몰래 집 밖으로 나간다고 해도 사방 몇 킬로미터 안으로 아무것도 없다. 들판이 있고, 언덕이 있고, 저 멀리에 울창한 숲이 있고, 험준한 산이 있고, 딱 이 정도다. 다른 마을이나 도시까지 가려면 몇 시간은 족히 걸어야 할 텐데 그 전에 마을 사람에게 붙잡히지 않을 리가 없다.
마을에서 유일한 동양인인 사파이어는 어딜 가나 눈에 띈다. 모든 사람이 감시 카메라나 다를 바 없는 상태기 때문에 알료샤는 종종 사파이어가 훌쩍 산책을 나가도 전혀 제지하지 않았다.
아니, 아니다. 딱 하나 걱정할 게 있다. 곰이나 늑대는 알료샤가 제어할 수 있는 변수가 아니다. 마을 남자들이 가축을 지키기 위해 항상 총을 가지고 다니니까 짐승이 민가까지 내려올 일은 별로 없겠지만.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마을 경계 밖으로 못 나가게 해야지.
그것 말고는 신경 쓸 것이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알료샤는 최고의 휴가를 만끽하고 있었다. 사파이어가 원한다면 이 휴가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예정이었다.
사파이어는 언덕 위로 툭 튀어나온 바위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발밑으로 보이는 언덕 아래는 완만한 경사의 초원이었고 소와 양이 풀을 뜯으며 한가로이 돌아다녔다. 그보다 더 멀리에는 성인인지 청소년인지 분간이 안 가는 남자가 말을 타고 돌아다니며 무리에서 떨어지려는 가축들을 다시 안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조금 추울 정도로 바람이 불었다. 이곳에 온지 며칠 안 됐지만 밤에는 정말로 추워진다. 계절 구분 없이 밤만큼은 겨울이 되는 것 같다. 집에는 커다란 난로와 넉넉한 땔감이 있고 사모바르에선 항상 물이 끓고 있지만 벽의 틈새로 파고 들어오는 외풍은 무시 못 할 것이었다.
체온이라도 나누기 위해 자연히 알료샤와 딱 붙어 자게 되는 밤이 계속 됐다. 사파이어에겐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사파이어는 깊은 상념에 잠겨 있었다. 깨달음이란 한 순간에 폭발하듯이 터져 나오는 것도 있지만 한 방울씩 떨어져 내리는 물이 어느 샌가 바위를 뚫는 것처럼 잔잔한 흐름 속에 자각하는 것도 있었다.
벤체슬라스가 그의 구원자가 아니라 사실은 학대자였고, 그에게 향했던 맹목성이 사실은 공포로부터 출발했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자 형용할 수 없는 갖가지 감정들이 솟구쳐 올랐다.
때때로 그것은 격류가 되었고 또 때로는 시냇물처럼 고요히 이 감정에서 저 감정으로 흘렀다. 그에게 인생을 몇 년간이나 빼앗기고 있었을까.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난 누구였단 말인가. 이것도 아직은 기억나지 않는다.
나에게 과거가 있었을까? 무엇이 있었을까. 내 이름은? 내 고향은? 나에게 가족이 있었나? 나는 어떤 사람이었지? 왜 이 지경이 되었나.
의문들이 떠오를 때마다 그에 대응하는 기억 파편들이 함께 떠올랐고 때때로 그 조각들은 모순되었기 때문에 혼란을 더 가중시켰다. 제대로 판단을 할 수가 없다. 이제는 내 머리마저 나를 속이고 있다. 무엇이 진짜 기억이고 무엇이 가짜 기억인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희미하게 선율만 기억나던 노랫소리를 떠올리려던 사파이어는 지금은 완전히 다른 기억에 사로잡혀 있었다.
아내가 있었던 것 같다…….
진짜 아내일까? 모르겠다. 하지만 그만큼의 친밀감을 느끼는 여자였다. 얼굴의 윤곽은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희미한 사항들이 기억난다.
사파이어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아내인 것 같은 여자는 분명히 직업이 변호사였다. 그들은 하얀 문에 종 같이 생긴 도어노커가 달린 집에 살고 있었고, 아침이 되면 아내가 먼저 출근했다. 사파이어가 나갈 때 즈음엔 언제나 옆집 개가 짖었다.
항상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장소에 의자를 끌고 나와 지나가는 모든 사람에게 인사하는 노인이 있었고 일주일에 세 번 이상은 보이던 아이에, 누군가가 칼로 낙서를 새긴 나무…….
그 기억 파편을 냉정하게 판단해보자면 배경은 아마 미국일 것이다. 그 동네가 추웠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항상 따뜻했던 것 같고, 캘리포니아나 그 근처일까.
사파이어가 이 기억을 심각하게 고민해보고 있는 이유는 엊그저께 떠오른 기억과 모순이 생겼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남편이 있었다. 그 때는 분명히 뉴질랜드에 살고 있었다. 동네의 모습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거기가 뉴질랜드라는 건 확실했다.
이 모든 게 거짓말이라면 대체 왜 진짜 기억처럼 떠오르는 것일까. 벤체슬라스는 어떻게 이런 기억들을 그에게 심어놓은 걸까? 사파이어가 기계도 아니고 기억을 따로 이식하는 방법도 없을 텐데. 머리뚜껑을 열고 뇌를 건드린다고 해도 불가능하다. 착잡해진 사파이어는 무릎을 끌어안고 앉았다.
이제는 내 이름이 사파이어가 아니라는 것도 알지만 이 이름을 버리면 갈 곳이 없다. 이름조차 기억이 나지 않기 때문에.
몸을 웅크린 채 전방을 노려보던 사파이어에게 누군가의 손이 담요를 덮어주었다. 알료샤였다.
알료샤는 사파이어 옆에 앉아서 저 멀리에 있는 목동에게 크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말을 타고 가축을 몰던 목동이 알료샤를 알아보곤 똑같이 손을 크게 흔들며 화답해주었다. 알료샤가 담요 째로 사파이어를 끌어안으며 물었다.
“기억나는 거 있어요?”
“많이.”
“말해 봐요.”
“의미 없어. 전부 가짜거든.”
“그럼 진짜 기억은 있어요?”
“없어. 아무것도 몰라.”
사파이어가 더 깊숙이 몸을 웅크리자 알료샤는 당장 그를 안고 집으로 들어가고 싶은 것을 꾹꾹 눌러 참았다.
“이름은 기억나요?”
“6개, 아니 7개 정도.”
알료샤는 더 건드리지 않았다. 어차피 차근차근 알아낼 시간이 많다. 이름 하나하나에 얽힌 기억들이 있을 것이고 기억은 무수히 많은 잔가지를 뻗어나가겠지. 그 안에서 사파이어가 길을 잃게 놔둘 순 없다. 어차피 그의 과거가 무엇이든, 진짜 모습이 뭐든 상관없다. 지금은 알료샤의 품 안에 있으니까.
“자, 생각 그만.”
알료샤가 기운 내라는 듯이 담요 위로 어깨를 위아래로 문질러대며 마찰시키자 사파이어가 웅크렸던 몸을 폈다.
“기억나지 않으면 새로 지어버리면 그만이니까.”
“싫어.”
“사람 이름을 계속 사파이어라고 부를 순 없잖아요.”
“이건 그 남자가 남긴 이름이니까.”
“아직도 그 남자 생각해요?”
“나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실마리니까.”
아직은 정신상태가 많이 불안정하기 때문에 알료샤는 그 이상 사파이어를 자극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의 심층의식에 아직 남아있는 벤체슬라스의 흔적을 모조리 지워내고 싶었다. 그가 문신처럼 새겨놓은 것들을 모두 파낸 뒤에 그 흉터를 자신으로 가득 채울 생각이었다.
정말 내키지 않지만, 당분간은 사파이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았다.
산과 초원은 도시와는 다른 자극으로 꽉 차 있었다. 바람, 풀이 스치는 소리, 호기심 많은 가축들, 벌레와 벌, 변덕스러운 하늘, 안개가 꼈다가 사라지는 것까지. 사파이어를 불쾌하게 자극하는 것들은 없었지만 모든 것이 생동감 있게 꽉 차 있었고 쉴 새 없이 흘러갔다.
사람들도 순했다. 이 곳 사람들은 사파이어가 여태 겪어온 악의적인 인종차별이라는 개념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아예 극동아시아인을 처음 보는 사람도 있었다. 알료샤의 권속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사파이어에게 적대적으로 굴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신기한 손님으로 대접받았겠지.
알료샤는 처음엔 마을 사람들이 사파이어에게 어떤 자극을 줄 지 몰라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필연적으로 몇 번씩 접촉하게 되었기에 결국에는 그들이 다가오는 것을 허용해주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질문들이 쏟아졌다. 마을 남자들은 그에게 바깥 세상에 대해 물었다. 어느 나라엘 가봤느냐, 거기는 이렇다던데 정말로 그렇느냐, 여기와 어떻게 다르냐…….
마을 여자들은 관습 때문인지는 몰라도 처음에는 사파이어에게 말도 걸지 못하고 도망가기 바빴지만 나중에는 집에서 만든 음식 등을 건네주며 그의 본질에 대해 물었다. 고향이 어디냐, 이름이 뭐냐, 그 나라에선 이런 것들을 어떻게 하느냐…….
사파이어를 제일 흔들어놓는 것은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에겐 자신들과 생김새가 완전히 다른 사파이어가 무섭고도 신기한 존재였다.
그러나 본능적으로 그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적어도 자신들에게 위해를 가하지는 않을 거라는 걸 알았는지 그 다음부터는 부끄러워하면서도 사파이어를 졸졸 따라다녔다. 알료샤가 아이들을 떼어놓기 위해 어디선가 축구공을 구해와 뻥 걷어차거나 과자 같은 것을 나눠줘도 잠시뿐이지 크게 효과가 없었다.
기억이 돌아오기 시작했다고 그의 무감각한 본성이 완전히 바뀌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정답게 미소 짓는 사람들의 얼굴은 또 하나의 숙제이자 풀어야 할 수수께끼가 되었다.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누군가가 인사를 해온다면 이제는 인사를 되돌려주는 것이랄까.
사람들이 키우는 가축들과 개들도 이방인이 신기한 모양인지 사파이어를 발견하면 한동안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개들은 처음에 사파이어의 모습만 봐도 경계하며 짖어댔지만 지금은 마을의 일원, 즉 자기들 무리의 일부라고 인식했는지 이제는 꼬리를 치며 반겨줬다. 갓 걸음마를 뗀 강아지들은 사파이어가 잠시 쉬려고 어디 앉아있는 모습만 보면 요란스럽게 깽깽 짖고 몰려와서 쓰다듬어달라고 포동포동한 궁둥이를 흔들어대며 꼬리쳤다.
시간은 느리게 흘러갔다. 급히 해야 할 것도, 반드시 해야 할 것도 없었다. 알료샤와의 생활은 단조로우면서도 하루하루가 새로웠다. 매일 새로운 요리를 하고, 쓸데없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햇볕을 쬐고, 밤이 되면 체온을 나누기 위해 그에게 안긴 채로 잠들었다.
알료샤는 그의 든든한 벽이 되어주었다. 이따금씩 사파이어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격정을 이기지 못하고 분노를 터뜨리면 알료샤는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었다가, 사파이어가 자기 자신도 해할 것 같아지면 그제야 그를 막아 세웠다. 헐렁하고 품이 넉넉한 옷에 가려져서 부각이 되지 않았을 뿐 알료샤는 벤체슬라스 못지않게 단단하고 강인한 남자였다.
워낙 작은 마을이라서 소문이 안 퍼질 수는 없다. 마을 사람들은 처음부터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알료샤와 동양인 남자의 관계에 대해 다들 알면서도 모르는 척 했다.
그들에게 동성애란 해괴한 것이고 사회적으로 용인 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의 종교도, 정부도, 그리고 국민감정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진작 마을에서 쫓겨났을 것이다. 알료샤였기 때문에 다들 애써 관심에서 지웠다.
그리고 또 가만 보니 이 동양인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불쌍하고 측은하다 여기는 것이 더 컸다. 처음에는 말 없고 무뚝뚝한 사람이라 성격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행동을 보니 나쁜 짓을 하는 건 아니다. 어딘가가 깊게 망가져 있을 뿐.
마을 남자들은 사파이어가 이해할 수 없고 어딘가 더럽게 느껴지는 존재라고 속으로 생각은 하면서도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안개가 짙게 낀 초원 위로 늑대가 튀어나와서 어린 송아지를 물고 가려던 것을 사파이어가 단발에 잡는 것을 보고 그에 대한 평가가 완전히 바뀌었다.
사파이어는 꽤 오랫동안 총기를 손에 쥐지 않았지만 무언가를 죽이는 실력은 아직 빛이 바래지 않고 남아있었다. 남자들은 사파이어가 늑대를 잡느라 빌려 썼던 총을 그대로 그에게 주었다.
그 다음부터는 누구도 사파이어와 알료샤의 관계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그들은 양식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마을의 재산을 지켜준 늑대사냥꾼을 존중했다.
그리고 다시 밤이 되었다. 알료샤는 난로에 장작을 밀어 넣고 이 정도면 오늘 밤을 충분히 넘기겠다 생각했다. 침대로 돌아오니 사파이어가 누워있지 않고 앉아 있었다. 약간 초조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잠깐 나갔다 와야겠어.”
“이 밤에? 어딜 가는데요?”
사파이어는 대답하지 않고 일어서려고 했다. 알료샤가 그 손을 붙잡았다.
“밤에 늑대 나오는 거 알잖아요. 내일 해요.”
“놔 줘.”
“위험하니까 안 돼요. 자, 누워요.”
알료샤가 침대를 팡팡 두드려도 사파이어는 다시 침대로 돌아올 생각이 없어보였다. 사파이어는 입술을 질끈 물며 눈동자를 굴리다가 결심한 듯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쌓여서……. 풀어야 돼. 그러니까 놔.”
알료샤는 한순간 그것을 못 알아들었다. 아니 알아듣기는 확실히 알아들었는데 그런 자기 자신을 의심했다. 알료샤가 확인차 물었다.
“쌓였다는 게 혹시 그거?”
사파이어가 얼른 대답하지 않고 꾸물거리자 알료샤가 장난스럽게 채근했다.
“진짜 그거? 남자끼리 왜 말을 못해요. 그거?”
사파이어가 손목을 비틀어 빼려고 했지만 손목을 감고 있는 손가락은 쇠사슬처럼 단단했다. 손을 탈탈 흔들어 빼려고 해도 연결된 손만 허우적거리는 꼴이었다. 알료샤는 사파이어가 제대로 대답할 때까지 놔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입가에 헤벌쭉 걸린 미소가 점점 크게 번져갔다.
“뭔지 모르겠는데. 왜 대답을 안 해줄까? 난 뭔지 도저히 짐작이 안 가는데. 쌓였다는 게 뭘까? 뭘 풀어야한다는 걸까?”
“놔…….”
“당당하게 말해 봐요. 왜 그걸 숨기려고 해요, 우리 사이에.”
“부끄러워…….”
믿을 수 없는 소리를 들었다. 지금 이 남자가 수치심을 느낀다고 말한 건가? 강철로 찍어낸 것 같은 이 남자가? 사파이어가 나머지 자유로운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부끄러워. 놔.”
나머지 손은 아직 알료샤의 손가락을 털어내려고 열심히 흔들고 있었다. 알료샤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툭 끊어졌다.
사파이어에게는 항상 힘 조절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엉겁결에 세게 당겨버렸다. 사파이어도 다부진 체격의 남자고 훈련받은 암살자라 힘으로 밀리는 일은 좀처럼 없는데 그를 둘러싼 주변인들이 정상이 아니라 언제나 그가 약자처럼 밀리는 듯이 보였다. 알료샤는 특히 더했다.
숨기고 있던 힘이 튀어나오자 사파이어보다도 알료샤 본인이 더 놀란 것 같았다. 사파이어가 침대 위로 넘어지자 알료샤는 반사적으로 그 위에 올라타기는 했으나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마치 흥분해 날뛰다가 실수로 주인의 손을 물어버린 개가 보일 것 같은 태도였다. 사파이어 역시 눈이 둥그레진 상태고, 알료샤도 잠시간 멈칫했다.
하지만 옷 위로 맞닿은 서로의 하반신이 그 충격을 잊게 해주었다.
“섰네.”
알료샤가 중얼거렸다. 사파이어가 양팔로 얼굴을 가리자 알료샤가 그 손을 다정하게 떼어냈다.
“얼굴 보여줘요.”
사파이어는 여태껏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스스로도 얼굴 근육이 그렇게 움직였다는 것에 어색해하는 것 같았다. 놀라움, 당혹감, 어리둥절함, 그런 것들이 뒤섞여서 마냥 회피하고 싶어 하는 얼굴이었다. 지금 알료샤가 비켜주면 당장 일어나서 저 밤 속으로 도망쳐 나갈 것처럼.
그는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알료샤와 떨리는 시선을 교환한 사파이어는 다시 완강하게 얼굴을 가렸다. 사파이어는 알료샤의 눈처럼 무언가를 그렇게 지극히 아끼고 따뜻하게 여기는 눈을 본 적이 없다. 저게 연인의 눈이라는 것도, 사랑하는 사람을 보는 눈이라는 것도 모르겠지.
알료샤는 사파이어의 손을 다시 떼어내지는 않았다. 그가 부끄러움이라는 생경한 감정을 만끽하도록 내버려두면서 맞붙은 하반신을 지그시 눌렀다.
“아…….”
“허락해줘요.”
사파이어가 대답하지 못하고 달아오른 얼굴로 입술만 빠끔거리자 알료샤가 좀 더 노골적으로 아랫도리를 문질러 올렸다. 팽팽하게 긴장된 아랫배가 자신의 아래에서 기대감으로 뒤틀리는 게 느껴졌다. 사파이어가 내뱉는 숨결에서 달큰한 냄새가 나는 것 같다.
“허락 없이 강제로 하고 싶지는 않아요. 좋다고 해줘요.”
“난 아직, 아직.”
알료샤는 사파이어를 더 궁지로 몰아붙이지 않고 그가 숨을 고를 수 있도록 잠시 물러났다. 약간이나마 진정된 사파이어가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렸다. 눈을 어디다 둬야할지 몰라서 이리저리 시선이 흩어지고 있었다.
“남자랑……. 섹스 하는 건……. 정상이 아냐.”
이 비정상적인 남자가 이제 정상을 찾기 시작한다. 당연한 수순이었을지도. 감정을 자각하고 자신이 인간이었다는 걸 인지하기 시작하면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도 생겨난다. 사파이어라는 남자가 가지고 있던 기준은 그런 것이었을 거다.
“당신한테 정상이라는 기준은 없었잖아요.”
“그렇지만, 그렇지만.”
“나랑은 부끄러워요?”
벤체슬라스와는 수없이 몸을 섞었으면서 나와는 부끄러운가? 알료샤는 벤체슬라스를 언급하지 않으려고 돌려서 물었다. 그럼에도 그 말 자체가 사파이어에게 그 남자를 떠올리게 한 모양인지 사파이어가 슬쩍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생각 그만. 지금은 생각하지 말아요. 쉿. 쉬이.”
알료샤는 사파이어가 다른 생각으로 빠지지 못하게 그의 얼굴을 양손으로 잡고 자신을 보게끔 고정시켰다.
“그럼 오늘 밤은 이대로 그냥 잘 거예요?”
사파이어는 대답하지 못했다.
“쌓였다면서요. 그냥 잘 거예요? 그냥 잘 수 있어요?”
“그러니까……. 놔 줘. 내가 혼자 풀 수 있어.”
“나도 쌓였는데.”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도 쌓였어요. 당신 때문에. 오랫동안. 손도 대지 않고.”
알료샤가 싱긋 웃었다.
“풀어줘요. 당신 손으로.”
“그건. 그.”
“다른 남자건 만지기 싫어요? 넣는 것도 아닌데. 자위는 많이 했잖아요?”
“못, 못 해.”
“싫으면 이대로 자요. 밖에는 나가게 할 수 없어요. 위험하니까. 아니면 당신만 풀어요.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 당신의 상황을 이용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선택지가 없는걸? 당신이 선택해요. 난 강제하지 않아요.”
이렇게까지 짓궂게 굴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알료샤도 슬슬 애가 타고 있었으니까.
오갈 데 없는 연약한 남자를 막다른 길로 몰아넣고 협박하듯이 뜯어내봐야 사파이어를 착취하던 다른 놈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알료샤는 그런 놈들을 경멸했다. 그들과는 차이를 두고 싶어 하지 않았는가. 알료샤는 강탈범이 되기 싫다. 그는 보호자다.
적당히 놀리고 슬슬 사파이어를 놔 줄 생각이었다. 물론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한다는 건 진심이었다.
산 속의 밤은 인간이 돌아다닐 수 있는 시간이 아니다. 가끔은 야생동물이 민가 근처까지 내려오기 때문에 안전상의 이유로라도 집에 붙어있어야 한다. 사파이어가 정 곤혹스러워한다면 알료샤가 손으로 빼 줄 생각도 있었다.
그런데 순간 사파이어가 알료샤의 바지 버클을 풀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결심한 듯이 주먹을 가만히 쥐었다가 다시 손가락을 펴고, 천천히 바지를 골반까지 내리고 그 안의 속옷을 더듬었다. 알료샤가 깜짝 놀라자 사파이어가 더 놀란 듯이 알료샤를 올려다보았다.
“풀어달라며…….”
“진심이에요?”
“당신은 계속 나한테 잘 해줬으니까…….”
“아니. 아니, 농담이에요. 억지로 할 필요 없어요. 당신 이용하고 싶은 생각 없어요. 하기 싫으면 그만둬도 되니까.”
“나도 빼야 돼……. 부끄러우니까 좀 닥쳐.”
욕 같지 않은 욕을 하고 난 다음에야 사파이어는 간신히 어색함과 수치의 늪에서 벗어난 것 같았다. 알료샤의 것은 속옷을 찢을 정도로 팽팽하게 솟아올라 있었다. 사파이어는 자신의 바지도 골반 아래로 내리고 속옷끼리 부비면서 크기를 가늠해보았다.
이게 안으로 들어간다면……. 아니, 그것까지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남자와의 섹스는 이제는 습관이 되어버렸지만 한 번 자각하고 나니 정말 끔찍한 낙인이었다. 몸은 남자 것을 갈망하지만 머리로는, 머리로는 도저히.
목덜미까지 빨개진 알료샤가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정말 이것까지는 묻고 싶지 않은데 너무 신경 쓰여서.”
“뭔데?”
“나랑 그 새끼 중에 누가 더 커요?”
해서는 안 되는 질문이었지만 정말 신경이 쓰여서 다른 것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 놈 얼굴조차 떠올리기 싫지만 이 남자는 계속 그 차이를 인지할 것이 아닌가. 반한 남자에게 속으로 평가당하는 것만큼 긴장되는 순간이 있을까.
아니 아니, 알렉세이 막시모비치.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랑이다! 사랑이야! 그리고 그 새끼랑은 비교할 수도 없는 체력이 있지! 남자는 결국 힘이다! 긴장한 알료샤에게 사파이어가 담담히 대답했다.
“당신 거는 넣어보지 않아서 몰라.”
평소의 사파이어대로 별 사심 없이 대답한 것이었지만 그게 알료샤에게는 몹쓸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당신 것은 넣어보지 않았다. 아직 넣어보지 않았다. 아직 넣지 않았다는 것은 언젠가 넣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사파이어를 안을 때 그는 어떤 식으로 반응할까. 어떤 표정을 보이고, 어떤 목소리로 울고. 지금도 소름이 돋을 만큼 섹시한 목소리인데 저 목소리가 내 가랑이 사이에서 예쁘게 운단 말인가.
“더 커졌네.”
“이것보다 더 커질 수 있어요.”
“그만 키워.”
“내가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닌걸!”
“무서우니까.”
한순간이었지만 알료샤는 음경축소술을 받을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알료샤의 심각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사파이어가 하던 것을 마저 하려다가 뭔가 생각났는지 고개를 들어 알료샤에게 물었다.
“입으로 해야 돼?”
“입?”
“그 남자한테는 입으로 자주 해줬어. 입으로 하면 크기 차이도 알 지 몰라.”
순간 알료샤의 눈앞이 깜깜해졌다. 사파이어는 담담하게 사람 머리를 망치 같은 것으로 때리는 습관이 있다. 말 하나하나가 그런 파괴력을 담고 있다. 본인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남자랑 섹스 하는 건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막상 자위로 풀려니까 입으로 빨아줄까 하고 묻는 이 남자를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상상만 해도 괘씸했다. 괘씸했다! 저 예쁜 입술에 그 놈 것이 들어갔다고 생각하면! 한 번도 아니다! 자주란다! 자주! 그리고 크기 비교라니! 그런 식으로 비교당하고 싶지 않아! 두려워!
아니아니, 알렉세이 막시모비치. 정신 차려라.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이 예쁜 남자가 입으로 해주겠다고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어쩔 줄 모르겠는 사람이!
“미안해. 입으로 하는 건 싫은가보지. 남자 입으로 하는 건 기분 나쁠 거야. 내가 이런 걸 잘 몰라. 사실은 사람들이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도 모르겠어.”
“아니! 아니! 아닌데! 너무 좋은데! 좋은데! 너무 좋아요! 너무 좋아!”
알료샤가 다급하게 말렸다.
“너무 좋긴 한데! 아니 진짜, 너무 좋다니까! 너무 좋다고!”
“진정해.”
“그, 으응, 끄응, 나는 굳이 당신이, 이런 상황에 처해있을 때 그 곤경을 이용하고 싶지 않아……. 으, 으으, 내 입으로 이걸 하지 말라고 해야……. 으으으.”
“하고 싶어, 하기 싫어? 어느 쪽이야?”
“나중! 나중을 위해! 아껴둬요! 울고 싶다!”
장하다. 알렉세이 막시모비치. 너의 영웅적인 자제력은 너의 일기장이 오래도록 기억할거야.
“그럼 손으로?”
“내가 하게 해줘요. 이것만은 허락해줘요. 당신 만지게 해줘요. 부끄러운 건 다 나한테 떠맡기고.”
사파이어도 이제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라서 견고하게 세워둔 이성이 풀어지고 있었다. 이젠 아무래도 좋았다. 알료샤가 말한 대로, 생각은 나중에. 어차피 더 이상 지켜야 할 규칙도 그에 따른 벌도 없다. 그는 완전히 자유다. 선택은 자기 자신이 하는 것이다. 사파이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료샤의 손을 허용했다.
알료샤는 사파이어가 이 이상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굳이 다른 옷은 벗기지 않았다. 그건 막 감정을 되찾아가기 시작한 남자에게 너무 잔인한 자극이다. 알료샤는 속옷만 벗겨 내렸다. 그의 것도, 자신의 것도.
예상은 했었지만 사파이어는 아랫배와 골반 부근까지 자잘한 흉터가 나 있었다. 옷을 벗기면 더 큼직한 흉터들이 있겠지. 살결 자체는 백옥 같았다. 노출은커녕 방탄복으로 두르고 살았기 때문에 햇빛을 받지 않아 본연의 피부색이 그대로 간직된 것이겠지. 알료샤의 눈길을 끈 것은 듬성듬성 나기 시작한 음모였다.
“이거…….”
까끌까끌하게 돋아나기 시작한 털을 쓰다듬자 사파이어가 반사적으로 등으로 기어서 도망치려고 했다. 알료샤는 더 언급하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왜 이렇게 됐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사파이어의 성기는 그의 체구에 비해선 크지도 작지도 않았지만 알료샤의 것과 나란히 놓고 비교하니 아담한 감이 있었다.
작지 않아. 작지 않아! 내가 큰 거야! 크기야 아무렴 어떤가! 귀여운데! 귀엽고 사랑스러운데! 남자 것은 입에 물어본 적 없지만 사파이어라면 몇 시간이고 빨 수 있을 것 같다. 농담 아니다.
사실은 그의 몸 곳곳을 맛보고 싶다. 그가 싫어할 짓은 하지 않는다는 이 빌어먹을 긍지 때문에 손을 대지 못할 뿐, 그가 언제라도 허락만 해준다면……. 긴 말도 필요 없다. 고개만 한 번 끄덕여준다면…….
그럴 리가 없지.
손 안에 잡히는 성기는 핏줄이 일어설 정도로 단단하게 모양이 잡혀 맥박치고 있었다. 자신의 것과 포개니 예민한 부분끼리 맞닿아서 한층 더 생생하게 느껴졌다. 사파이어는 자신의 아랫도리에서 우람하게 부피를 차지하고 있는 알료샤의 것을 보고 약간 겁먹은 것처럼 보였다.
“무서워요?”
“넣지 마…….”
“허락 없이는 안 넣을게요.”
알료샤는 자신의 것과 사파이어의 것을 한 손에 잡고 슬슬 문지르면서 다른 손으로는 그의 몸을 쓰다듬었다. 옷 아래로 파고 들어간 손이 맨살 위를 스치며 이곳저곳 예민한 부분을 건드리자 사파이어의 허리가 움찔 움찔 튕겼다. 미치겠다 정말.
“사랑해요.”
흉기같이 단련된 그의 몸은 투박하고 딱딱한, 전형적인 남자 몸이었지만 알료샤에게는 탄력적이고도 탐스러운 암사슴처럼 느껴졌다.
“내가 왜 이렇게 사랑한다, 사랑한다 하는 줄 알아요?”
손끝에 걸리는 유두가 사랑스럽다.
“난 항상 중심이 되고 싶었어요. 내가 대장이면 적어도 내 주변엔 문제가 없을 것 같았거든요. 그게 점점 더 커지면, 적어도 내 영향이 미치는 범위 안은 평화로우니까. 독재라고 해도 좋아요. 다른 놈보단 잘 할 자신이 있었어요.”
알료샤의 손끝이 훑고 내려가는 피부 위를 따라 따뜻한 온기가 지나가며 뒤이어 소름이 돋아 올랐다. 예민해진 몸이 그저 더듬기만 할뿐인 손끝을 무엇보다도 큰 자극인 것 마냥 받아들였다.
“은혜를 베풀고, 우정을 쌓고, 때로는 협박을 하고……. 그렇게 해서 사람에 대한 영향력을 얻었어요. 나도 알아요. 나를 무서워하는 사람이 더 많다는 거. 그렇게 해서라도 내 사람들을 만들었어요. 얼마간은 잘 유지되다가, 배반자가 생기고, 쭉정이를 걸러내고, 부서진 울타리를 고치고 나면 또 다시 작고 작은 왕국이 남죠. 내가 친구라고 부르는 사람은 많지만 진짜 친구는 한 줌도 되지 않는다는 거 잘 알아요. 그 한 줌 안에서도 마지막까지 믿을 사람은 없어요.”
알료샤는 여태껏 누구에게도 하지 않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이것이 알료샤라는 남자의 본모습이다.
큰 꿈을 안고 성을 쌓아올렸지만 결국엔 모래로 된 성이었고, 변덕스럽게 불어 닥친 바람에 성이 무너지고 나면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다시 기초부터 성을 쌓아올리는, 결국엔 같이 놀던 친구들도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놀이터에 자기 혼자 남아 해가 질 때까지 미련한 반복을 계속하는 소년.
협력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도, 때로는 누군가가 모래성을 발로 걷어차도, 그 때문에 생채기가 생겨도 씩씩하게 먼지를 털고 일어나서 다시 고집스럽게 작업에 매달리는 아이. 언젠가 이 성은 누구도 무너뜨리지 못할 장엄한 유산이 될 것이라고, 마치 낙원과 같을 것이라고…….
“난 믿을 사람이 필요했어요.”
어느 날 내 꽃밭에 당신이 피어나고.
“당신같이 헌신하는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내가 여태까지 봐왔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언젠가 배신하고, 이용하고, 무언가 이유가 있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복종했을 뿐 누구도 진정한 의미의 신뢰를 보여주지 않았어요. 당신의 헌신이 무엇이었든 간에 당신이 그 남자를 맹목적으로 보던 눈에 반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당신을 사랑하게 된 게. 당신의 눈을 얻고 싶어서. 그 남자를 보던 눈으로 나를 봐주었으면 해서.”
알료샤는 세상의 주인이었고 따라서 세상 만물은 알료샤의 것이었다. 그가 원한다면 길가의 돌 하나, 풀 한 포기까지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었다. 그것이 남의 보석이라고 해도. 나의 땅에서 피어난 꽃 한 송이이니 내가 가질 권리가 있었다.
처음에는 동정으로 시작했다. 모든 것이 내 것인데 어찌 불쌍히 여기지 않을까. 이 남자를 그저 그 폭력적인 성격파탄자의 손아귀에서 빼내주고 싶었다. 시작은 분명히 그랬다.
하지만 이 남자는 맞고, 깨지고, 학대당해도 도망가지 않고 계속 주인에게로 돌아갔다. 병적인 집착이 불쌍했다.
그러나 알료샤는 그 너머의 본성까지 봤다. 무언가를 섬기고 의지하는 것은 이 남자의 본성이다. 이 남자의 본질은 충성이다. 배반하지 않는 성질. 알료샤가 세상을 뒤져 찾아 헤맸지만 여태껏 단 한 번도 획득해보지 못한 특권. 헌신.
세상에 저렇게 아름다운 존재가 있을까.
“차르에겐 차리나가 필요해요. 나에겐 절대적으로 나를 믿어줄 사람이 필요해요.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
성기를 흔드는 손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사파이어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가 허리가 살짝 들리며 골반이 뒤틀렸다. 남자 손으로, 제정신이 들고 나서 남자 손으로 가게 되는 건 처음이다.
이건 정상이 아니라고 머릿속에 희미한 경고음이 울리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이 손을 뿌리칠 수가 없고, 또 한 편으로는 저 눈이. 저 눈에 발정할 것 같았다. 아니 이미 가랑이는 미친 상태다.
“사랑해요.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알료샤는 절정에 다다를 때까지 그 말을 속삭였다. 협박처럼 들리기도 했다. 일종의 최면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반복되는 주문에, 사파이어는 침대 시트를 잔뜩 구겨 쥐며 오래 참았던 것을 길게 사정했다. 틀어막지 못한 신음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나왔다. 뼛골이 지끈거리며 녹아내리는 것 같은 소리였다.
사랑하는 남자가 자신의 아래에서 자신의 것을 맞대고 자기 손으로 가버렸다는 사실이 알료샤를 미치게 만들었다. 사파이어가 사정 직후의 예민한 상태를 추스르지도 못했는데 알료샤가 성난 짐승같이 자기 것을 흔들어대자 아직 긴장상태를 풀지 못한 사파이어의 아랫배가 꿈틀 꿈틀 접혔다.
“그, 아앗, 그만! 잠깐!”
“하, 하아. 하아…….”
사파이어가 반사적으로 알료샤의 손을 잡아떼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알료샤의 팔을 잡은 채로 그의 힘에 휘둘려 자신의 것을 자신이 유린하는 것 같은 모양새가 됐다.
사정이 끝나지 않는 것 같다. 한 번 절정에 도달했으면 식어야하는데 계속 계속 자극돼서 날카로운 끝부분을 어루만지는 것 같은 충격이 머릿속을 헤집는다. 알료샤가 사정하는 순간 사파이어 역시 비명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오래 참은 두 남자가 첫 번째로 쏟아낸 것들은 양이 많아서 멀리 튀어나가지 못한 것들은 사파이어의 배에 고여 서로 엉겨 붙어 하나가 되었다.
알료샤는 그것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렸다. 사랑하는 남자와 첫 번째로 일을 치렀다는 만족감과 삽입까지는 가지 못했다는 불완전한 소유욕이 뒤섞였다. 알료샤와 사파이어의 물기 어린 눈길이 서로 마주쳤다.
알료샤는 따로 허락을 구하지 않고 입술을 포갰고, 사파이어는 그를 밀어내지 않고 받아들였다. 막 절정에 다다른 거친 숨결이 입 안에서 섞이고 교환되며 서로에게 서로를 전달했다. 몸 대신에 혀를 섞는 동안 잠깐의 휴식을 끝마친 성기가 다시 기운을 되찾았다.
알료샤가 사파이어의 입 안을 탐닉하고 있을 때, 잊고 있던 손길이 또 다시 두 개의 성기를 맞잡았다. 알료샤가 입을 떼고 아래를 확인하자 사파이어의 손이 슬슬 움직이고 있었다.
“난 아직……. 부족해.”
사파이어가 속삭였다.
“이건 내 선택이야. 난 더 필요해. 더. 끊을 수가 없어. 이상하다는 걸 알면서도……. 머리로는, 머리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데 몸은…….”
“쉬잇.”
알료샤가 사파이어의 입술에 짧게 키스했다. 그리곤 곧바로 다시 입술을 포갰다. 알료샤는 두 개를 한꺼번에 쥐고 흔들고 있는 사파이어의 손등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쳤다. 그에게서 거부하는 기색이 느껴지지 않자 알료샤가 그것으로 허락을 대신 구했다는 듯 힘을 주어서 자신이 리드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 사정은 첫 번째보단 덜 다급했고, 달콤한 여운이 더 길게 남았다.
“울 정도로 좋아요?”
알료샤가 사파이어의 눈가에 고인 눈물을 핥았다. 몽롱한 눈이 가늘어지자 사파이어의 눈꼬리를 타고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아.”
“내가 지켜줄게요.”
알료샤는 사파이어의 이마에 입맞춤하곤 그대로 그의 고개를 끌어안으면서 성기를 부비고 있는 하반신을 느리고도 힘차게 밀어 올렸다. 손아귀에 잡힌 사파이어의 손도, 그 손가락 하나하나마저 소중하게 쥐고서는 꺼지지 않는 욕정을 계속 불태웠다.
“그러니까 미쳐도 되요. 내가 지켜 줄 테니까. 이상해져도 되니까.”
몇 번인가의 사정 끝에 사파이어는 더 이상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기절하듯이 잠들어버렸다. 폭행 후에 따뜻하게 위로하는 손길이 아니라, 처음부터 소중하게 어루만지는 손길은 낯설고도 포근했다.
아침이 되었다. 간밤에 일을 치른 알료샤는 품 안의 남자를 그대로 안은 채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옷을 반쯤만 벗은 채로 수음했기에 분비물이 여기저기 튀어서 찝찝했지만 나른함과 포만감이 더 커서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잠든 사파이어를 깨우기도 싫다.
아침 해는 항상 그랬던 것처럼 알료샤를 깨우려고 창문 너머로 슬금슬금 비쳐 들어왔지만 오늘은 알료샤가 더 빨랐다. 알료샤는 햇살이 침대를 침범하기 전에 미리 이불을 들어서 사파이어를 가려주려고 했다.
“생각해봤는데.”
잠든 줄 알았던 남자가 불쑥 말하자 알료샤가 흠칫 놀랐다. 알료샤에게 등을 맡기고 누워있던 사파이어가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쳤다.
“생각해봤는데, 그래도 부족해.”
“일어났어요?”
사파이어가 갑자기 알료샤의 어깨를 밀면서 그를 눕히고 위에 올라타자 알료샤는 바보가 된 것처럼 눈만 깜박깜박 거렸다.
“그 남자가……. 나를 바꿔놨지. 알아. 다른 남자랑은 해 본 적이 없지만 이젠 남자 없이는 살 수 없는 몸이 돼버렸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알료샤의 눈동자가 사방팔방으로 마구 굴러가기 시작했다. 평화로운 아침은 한순간에 깨져버렸다.
이거 혹시, 설마, 설마. 설마 그거인가? 설마 그렇게 되는 건가? 순식간에 온갖 생각이 스쳐지나가고 알료샤는 각오를 다졌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 알료샤가 사파이어와 동시에 입을 열었다.
“내 뒤를 원한다면 줄게요.”
“박아줘.”
알료샤는 세상에서 제일가는 얼간이 같은 표정으로 눈을 깜박거렸다. 묘하게 말이 꼬인 것 같아서 다시 입을 열었는데 또 한 번 사파이어와 동시에 말이 교차됐다.
“박아달라는 건 그러니까.”
“남자 뒤에 박아본 적은 없어.”
또 꼬였다.
“음, 사파이어. 잠깐만요?”
알료샤가 상황을 정리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니까 지금 나랑 섹스하자고…….”
“응.”
“나는 당신한테 내 뒷구멍의 순결을 줄 생각이 있었는데.”
“그걸 원해?”
“당신이 원한다면 주겠지만 아니 아니 잠깐만. 박아달라고?”
“응.”
“내가 당신한테?”
“응.”
“그래요. 내가 당신한테 박는 거라고…….”
다음 순간 알료샤가 괴성을 지르며 일어나 앉았다. 덕분에 알료샤 위에 올라타 있던 사파이어가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무서워.”
“정말 감사합니다!”
알료샤의 얼굴 근육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처럼 풀어졌다. 콧구멍은 바보같이 벌름거리고 있어서 사파이어조차도 부담을 느꼈다.
“당신이 그 말을 해주길 얼마나 기다렸는데. 강제로는 하고 싶지 않았단 말이에요.”
사파이어로서는 착잡한 심정이었다. 아직도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아는 것보단 모르는 게 더 많은 상태지만 과거에 가졌던 가치관 등에 대해서는 어렴풋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사파이어 본인에게는 이렇다 할 금기가 없지만 그를 둘러싸고 성장시키며 자아를 만들었던 환경은 온갖 금기로 가득 차 있었다. 남자다운 것, 남자답지 못한 것, 행동해야 할 것, 피해야 할 것, 그 중에 딱히 구체적인 설명을 듣지 못한 채 무조건적인 혐오를 받은 것은 동성애에 대한 것이었다.
사파이어에게는 어차피 자신 빼고 모두가 이방인이었다. 세상 모든 것이 똑같이 낯설었고 그가 동성애에 대해 느끼는 거리감은 살인에 대해 느끼는 거리감과 다를 바 없었다. 사파이어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는 소리다. 좋지도, 나쁘지도.
다만 그 주제에 대해 말을 꺼내면 공포와 멸시 어린 반응을 매번 보았기 때문에 자연히 피하게 됐다. 사회적으로 이득 볼 것이 없다고 판단했고, 타인의 금기는 자연히 사파이어의 금기가 되었다. 사회화도 일종의 세뇌다. 남자와의 접촉은 역겨운 것이었다.
그 역겨운 짓을 기억을 잃었던 동안 수 없이 반복했고, 몸에 적응했고, 갈망하게 되었다. 남자의 것을 쑤셔 넣어서 몸 안 쪽을 후비고 문질러줘야만 풀리는 욕구가 개발된 것이다. 역겹지만 갈망한다. 양립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사파이어 본인부터가 이런 모순을 안고 있는데 알료샤의 얼굴을 보니 지금 그만두자고 하면 마치 어린아이에게 선물을 줬다가 도로 빼앗는 짓일 것 같았다. 사파이어도 그 정도쯤은 안다.
어쨌든 의지를 표명한 것까진 좋은데 이다음이 문제였다. 알료샤는 세상 제일가는 얼간이답게 사파이어를 멀뚱멀뚱 바라보고만 있었고 사파이어는 낯선 감각인 부끄러움을 만끽하며 얼굴을 감싸 쥐었다. 둘 중 누구도 먼저 움직이려고 하지 않아서 이번에도 성기가 둘을 대신해 재촉했다.
사파이어가 살짝 살짝 움직일 때마다 맞닿은 가랑이가 알료샤를 짓눌러서 알료샤의 것이 성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간밤에 질릴 정도로 그것과 맞대고 있었으면서도 그 크기를 깜박 잊고 있던 사파이어가 제정신이 드는지 알료샤의 품 안에서 빠져나오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허리를 알료샤에게 잡힌 상태다.
“취소하기 없기예요.”
알료샤가 사파이어의 마음을 읽은 듯이 못 박았다. 사파이어는 슬슬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눌러선 안 될 버튼을 눌러버린 것 같달까. 핵미사일 발사버튼 같은 거.
“일단 씻어야하는데.”
“오, 안되지. 어딜 빠져나가려고.”
“진짜야.”
“좋은 시도였어요.”
알료샤가 사파이어의 입술에 쪽하고 입맞춤했다. 그러더니 침대에서 내려서서 양팔로 사파이어를 들어 안았다.
“같이 씻으면 되지. 하하하하.”
“안 돼.”
“안되는 게 어디 있어요. 돼요. 돼요. 돼요.”
“준비 작업이 따로 있단 말이야.”
“준비작업? 무슨 준비작업.”
사파이어가 대답 없이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하자 알료샤가 사파이어를 들쳐 안은 손에 더욱 힘을 줘 단단히 결박했다.
“대답 안 해주면 이대로 뽀뽀할건데.”
그래도 대답하지 않자 알료샤가 마치 새가 부리로 쪼는 것처럼 짧게 입맞춤했다. 한 번의 입맞춤에도 반응이 없자 쪽쪽쪽 하고 연달아 입맞춤이 이어졌다. 입술 공격을 이겨내지 못한 사파이어가 깊은 결심을 하고 입을 열었다.
“안에 있는 거 비워야한단 말이야.”
그 말의 위력이 확실히 컸는지 입술 공격이 멈췄다. 사파이어는 자신이 내뱉고도 후폭풍을 감당할 수 없었고 알료샤는 사파이어의 예상과 완전히 빗나가서 그저 실실 웃고 있었다.
“아하하하, 난 또 뭐라고. 하면 되지. 하하하하. 걱정 마요. 내가 해줄게.”
“잠깐!?”
“아하하하, 쓸데없는 거 걱정하고 있었네. 귀여워. 하하하. 귀여워.”
“싫어! 놔!”
“싫은데. 안 놓을 건데.”
그렇게 알료샤는 사파이어를 욕실로 안고 들어갔다.
30분 후에 사파이어는 정신적인 만신창이가 되서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이미 녹초 상태였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알료샤가 알아서 다 했다. 수치심이라는 감각을 다시 인지하기 시작한지 얼마 안 돼서 사파이어는 대부분의 인간이 겪을 일 없는 극한의 수치를 계속 맛보고 있다.
사파이어를 구석구석 씻길 때 알료샤는 콧노래를 부르기까지 했다. 그는 오물투성이인 새끼 고양이를 길에서 주워 와서 따뜻한 물로 씻겨주는 마음씨 좋은 사람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더러워봐야 얼마나 더럽겠어, 귀여워 귀여워, 그저 이렇게 한 없이 온화한 얼굴이었다. 밝게 미친 남자에게 반 강제적으로 관장까지 당한 사파이어는 이대로 문을 박차고 도망갈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몇 킬로미터를 전력질주 할 수 있으면 가능성이 있어보인다. 발가벗은 상태고, 마을 주민과 마주칠 수도 있고, 비포장도로를 맨발로 달리며 야생동물까지 마주칠 위험만 감수한다면. 집 밖으로 나가서 몇 백 미터는커녕 몇 미터도 못 가서 바로 잡히고 말 것이다.
탈출에 성공했다고 해도 딱히 희망찬 미래가 기다리는 건 아니다. 뛰어봤자 알료샤 손바닥 안이다.
“자, 생각 그만.”
어느 샌가 알료샤가 다가왔다. 알료샤는 목부터 키스를 해왔다. 살짝 살짝 빨아들이며 키스마크를 만들면서 천천히 사파이어를 밀어 눕혔다.
“부끄러워하는 것도 귀여워서 좋지만 여기엔 당신과 나 밖에 없어요. 부끄러움에 중독되지 말아요. 나한테 맡겨요.”
알료샤가 다시 키스하려는데 돌연 사파이어가 그의 어깨를 짚더니 알료샤의 입술을 덮치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알료샤는 사파이어가 미는 대로 순순히 밀려주면서도 갑작스러운 태도변화에 놀랐다. 사파이어는 기어코 알료샤를 쓰러뜨리더니 그 위에 올라타서 고개를 뗐다.
알료샤를 가만히 내려다보는 사파이어의 눈에는 제어가 풀린 욕정이 담겨 있었다.
“껍데기를 뒤집어쓰는 건 쉬워. 난 항상 그래왔어. 감정을 틀어막는 것도. 어려운 일 아니지.”
알료샤는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바로 저 눈이었다. 채워지지 못한 갈망의 눈. 맹목적으로 요구하는 눈. 나에게 의존하는 눈. 사파이어는 침대 옆 협탁에 준비된 젤을 듬뿍 짜더니 자신의 뒤를 풀기 시작했다. 알료샤가 도와주려고 하자 다른 손으로 그 손을 찍어 눌렀다.
“난 비정상이야. 나도 알아. 뭐든 쑤셔 박고 싶어서 미치겠어. 몸 안이 간지러워. 박혀서 가는데 익숙해졌으니까.”
호흡이 점점 거칠어진다.
“당신이 내 선택을 존중한다면, 내가 지금 하는 것도 가만히 내버려둬. 당신말대로 여긴 우리 둘 밖에 없으니까. 부끄러움이란 것도, 계속되니까, 성가시거든. 윽, 응…….”
자신의 구멍을 풀던 사파이어가 알료샤의 성기를 붙잡고 문질러서 단단하게 발기시키더니 그것을 자신의 골에 대고 문질렀다. 콘돔을 씌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당신이 나한테서 뭘 보고 있는 건진 몰라도 난, 윽, 뼛속까지 변태야. 내가 지금, 당신을 얼마나 따먹고 싶어 하는지 안다면, 하, 으, 놀랄걸. 그러니까, 아으응, 얌전히 있어.”
알료샤의 눈이 감탄으로 반짝였다. 그는 홀린 듯이 대답했다.
“물론이죠.”
힘으로는 가볍게 제압할 수 있는 남자다. 체구도 알료샤보다 작고. 알료샤가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 다시 주도권을 되찾아 올 수 있지만 알료샤는 사파이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어디까지 할 수 있나 보고 싶었다.
사파이어는 자신의 몸 상태를 가늠해보며 알료샤의 것을 집어삼킬 수 있나 판단해봤다. 귀두를 갖다 댔을 뿐인데 벌써 크다는 게 느껴진다. 귀두의 툭 튀어나온 부분까지 들어오면 충격으로 몸이 떨리겠지.
그 다음엔 얼마나 집어넣을 수 있을까. 절반? 그것보다 좀 더? 이 자세론 섹스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항상 찍어 눌려지고 강제로 주어지는 섹스였으니까.
사파이어는 심호흡을 하며 몸의 긴장을 풀고 최대한 이완시켰다. 그리고 천천히 허리를 아래로 내렸다. 수치심은 습관화된 성욕 앞에 바람같이 사라졌다.
상대가 벤체슬라스 한 사람이었지만 여태까지 숱하게 섹스해온 탓에 구멍은 별다른 저항 없이 이물질을 받아들였다. 귀두 끝부분이 들어가자 사파이어가 허리를 떨었다가 숨을 몰아쉬곤 다시 나머지 부분을 천천히 집어삼켰다.
알료샤는 그 광경을 즐겁게 바라보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저 허리를 붙잡고 깊숙한 곳까지 쳐올리고 싶었지만 사파이어가 스스로 한다는 것에 매료돼서 지켜보기만 했다.
절반쯤 넣은 사파이어가 헉헉거리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알료샤의 것은 밑동으로 내려갈수록 굵기가 굵어지는 것 같았다.
“안 들어가요?”
알료샤가 자신의 배 위에 주저앉아 무릎 꿇은 사파이어의 허벅지를 다정하게 쓰다듬어주었다. 그러자 사파이어가 알료샤의 손을 잡으며 “안 돼.”하고 엄중하게 경고했다. 알료샤는 웃으면서 두 손을 깍지 껴 팔베개를 하며 사파이어를 내버려두었다.
잠시 숨을 고르던 사파이어는 다시 천천히 몸을 아래로 내렸다. 조금씩 조금씩 안으로 밀려들어갈 때마다 뜨거운 구멍이 움찔움찔 조여드는 것이 알료샤도 한순간 이성을 놓을 뻔한 자극이었다.
거의 다 내려앉은 사파이어가 마지막 뿌리까지는 박아 넣지 못하고 가쁜 숨을 쉬며 치명적인 눈길로 알료샤를 노려보았다.
“이제 움직일 거야.”
말하는 위치가 거꾸로 바뀌지 않았나? 알료샤가 사파이어에게 해야 할 소리 같은데. 어찌됐든 좋았다.
사파이어는 알료샤의 얼굴에 걸린 웃음을 보면서 몸 안에 들어찬 것을 넣었다 뺐다 천천히 상하운동하기 시작했다. 긴장했던 것은 처음뿐이었는지 곧 적응해서 움직임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자괴감은 익숙한 쾌감 속에 파묻혀갔다. 완전히 집어넣지 않았어도 알료샤의 것은 버거운 감이 있었다. 크기를 비교하자면 벤체슬라스와 크게 차이가 나지는 않는 것 같다. 모양이 달라서 안쪽을 자극하는 방식이 다를 뿐.
받기만 하는 섹스는 가만히 있어도 모든 것이 주어질뿐더러 이미 골백번도 더 한 익숙한 맞물림이었기 때문에 언제 어떤 자극이 올 지 예측이 됐다. 질리지는 않았지만 인스턴트식 해소가 가능한 섹스였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 같다. 내가 움직여야 하고, 내 안의 포인트를 찾아내야 하고, 또 알료샤의 습관은 어떤지 알아가야 하고.
사파이어가 어떻든 간에 알료샤는 좋기만 한 것 같았다. 쥐어 짜내지는 쾌감은 사파이어도 잘 알고 있다. 어디를 자극해야 남자가 즐거워하는지도.
사파이어는 요부같이 허릿짓을 하며 자신이 잘 느끼는 곳을 찾아내려고 이 곳 저 곳을 시도해봤다. 어떻게 보면 알료샤의 몸을 생체 자위도구쯤으로 사용하는 것 같은 섹스였다.
어느 순간, 가장 예민한 부분을 문지르자 사파이어의 등줄기가 파드득 떨리며 굳었다. 사파이어가 움직이지도 못하고 경직 상태로 있자 알료샤가 팔베개하던 손을 풀어 사파이어의 허리를 쥐더니 방금 전의 그 부분을 천천히 찔러 올렸다.
“거, 거기 아읏! 하지 마!”
“더 하라고 조이고 있는데.”
“내가, 으읏! 내가 할 거야!”
“못하잖아요, 지금.”
알료샤의 허릿짓이 점차 퍽퍽 소리가 날 정도로 격렬해졌다. 예민한 부분을 공격당하는 사파이어가 신음을 자제하지 못하고 허리를 꺾었다. 그러다가 버틸 수 없는지 알료샤의 가슴 위로 쓰러졌다.
“앗, 아, 아!”
사파이어의 허리를 붙잡았던 알료샤의 손이 아래로 내려가 단단한 엉덩이를 손 안 가득 쥐고 양 옆으로 벌렸다. 가슴 위로 쓰러진 사파이어에게서 기어 들어가는 단말마가 새어나왔다.
“이렇게, 박히고, 싶어서, 어떻게 참았어요?”
사파이어는 울어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너무 밀착한 나머지 움직이기 힘들어지자 알료샤가 사파이어를 안은 채 몸을 일으켜 앉았다. 몸 안에 박힌 몽둥이가 갑자기 각도를 틀어 내벽을 찌르자 사파이어가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알료샤는 달래듯이 사파이어의 허리부터 엉덩이까지 쓸어내리더니 그 상태로 퍽퍽 박아 올리면서 속삭였다.
“자위 해봐요.”
“윽, 으응, 흐읏…….”
“당신 손으로 직접 해봐요. 미쳐봐요.”
사파이어가 알료샤의 어깨만 쥐고 어쩔 줄 모르자 알료샤가 직접 사파이어의 손을 끌어다가 성기를 붙잡게 도와주었다. 그 다음부터는 재촉할 것도 없었다. 흥분으로 입술까지 발갛게 달아오른 사파이어가 뚝뚝 끊어지는 신음을 토해내며 자신의 것을 미친 듯이 흔들기 시작했다.
앞으로는 수음하고 뒤로는 무지막지한 물건에 박히면서 울부짖던 사파이어는 얼마 안 가 죽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사정했다. 사정하고 나서도 부족하다는 듯이 적극적으로 엉덩이를 흔들어대며 알료샤의 것을 먹어치웠다.
자신이 부추기기는 했어도 이렇게 강렬한 반응이 나올 줄 몰랐기에 알료샤도 결정적인 순간에 몸 밖으로 성기를 빼내지 못하고 그대로 사고처럼 사정했다.
자신의 제어에서 벗어난 갑작스런 사정이었기에 으그극하고 이가 갈렸다. 머리끝이 찌릿찌릿 울릴 정도로 강한 오르가즘이었다. 정액은 콘돔 안에 가득 찼다가 굵은 기둥을 타고 끈적끈적 질퍽하게 전체 부위를 적시며 고환까지 흘러내렸다. 아직도 울컥울컥 정액을 토해내는 성기 기둥은 사파이어의 몸 안에서 꿈틀꿈틀 부풀어 올랐다가 가라앉았다.
둘은 가쁜 숨을 토하며 사정 후의 강렬함을 가라앉히다가 눈이 맞고, 그대로 입술을 포갰다. 서로를 맛보던 고개가 떨어지자 둘 사이에 침 줄기가 길게 늘어졌다.
“좋았어요?”
“아직 부족해. 더 내놔.”
“조이지 말아요. 늘어질 때까지 박아 줄 테니까.”
“미치게 해봐.”
이렇게 사랑스러운 요구가 있을까. 알료샤가 청량하게 웃었다.
“분부대로.”
그리고 사파이어는 대책 없이 알료샤를 도발한 것을 후회했다.
알료샤는 허락이 떨어지기 전까지 자제하고 있던 것을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격렬하게 사파이어를 탐했다. 분명히 해가 막 뜨는 시간부터 섹스를 시작했는데 어느새 정오였다. 일반인보다 훨씬 웃도는 체력을 가진 사파이어도 지쳐 떨어질 정도가 되자 잠시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둘은 샤워를 하고, 간단하게 끼니를 때우고, 10분 정도 곯아 떨어졌다가 깨어나서는 완전히 회복한 체력으로 다시 서로에게 들러붙었다. 그렇게 몇 시간이 또 흘러갔다.
하도 사정해서 나중에는 하얀 기도 남아있지 않은 투명한 액체 같은 것이 흘러나왔다.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던 사파이어가 알료샤를 밀어내자 알료샤는 응석부리듯이 “한번 만요. 한번 만요.”하고 계속 치근덕거렸다.
“죽을 것 같아…….”
“그 동안 굶은 게 이것밖에 안 돼요?”
“그만해. 힘없어.”
“그럼 자요.”
“몸 안에 있는 걸 빼란 말이야.”
한참 박아대면서 피곤하면 자라니 퍽이나 설득력 있는 말이겠다.
“그럼 오늘은 이정도만 할 테니까 내일은 오늘 못했던 것까지 더 하는 거예요.”
“싫어. 그만할 거야.”
“허락해줬잖아요.”
사파이어가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온 힘을 다해 자신의 어깨와 가슴을 밀어내자 알료샤가 피식 웃으면서 몸을 뗐다. 힘이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다. 완전히 녹초가 된 모양이다.
굵은 몽둥이 같은 성기가 몸 밖으로 빠져나가자 소름이 돋으며 몸이 움찔 떨리긴 했지만 안도감이 찾아들었다. 구멍은 얼얼했고 제대로 닫혔는지도 알 수 없었다. 아마 그가 싸놓은 것을 질질 흘리면서 빠끔히 벌어져있겠지.
사파이어가 지친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으려 할 때, 또 다른 자극이 가해졌다.
“뭐, 뭐하는 거야.”
알료샤가 사파이어의 다리를 일자로 모으고 자신의 다리 사이에 가둬서 벌리지 못하게 하더니 가랑이 사이로 자신의 성기를 집어넣었다.
“쉬라니까요.”
“뭐하는 거야, 이거.”
“하다가 말았잖아요. 한번 싸고 풀게 해줘요.”
사파이어가 싫다는 대답을 하기도 전에 맞물린 사타구니를 침범한 성기가 난폭하게 고환을 비비기 시작했다. 몸 안에 집어넣었을 때보다 더 거친 것 같다. 가랑이니까 항문만큼 배려하지 않는 모양이다. 한계까지 짜내고 축 늘어진 성기가 아직 불이 꺼지지 않은 욕정 덩어리에 비벼져서 고통스럽게 발기했다.
“어, 섰다. 아직 기운 있네.”
“흐으……. 아냐. 힘들어. 힘, 힘들어.”
“아닌 거 같은데. 조금만 더 비비면 같이 갈 거 같은데.”
“그, 그만해. 그만! 하, 아아, 아!”
알료샤가 사정함과 동시에 사파이어도 억지로 짜낸 것 같은 절정을 맞았다. 머릿속까지 하얗게 텅 빈 사파이어는 침대 위에 완전히 늘어져 가슴만 들썩거리며 힘겹게 호흡했다. 알료샤는 그런 사파이어의 유두를 빨며 후희를 즐겼다.
“사양하지 말고 날 따먹어요. 언제든지 환영이니까.”
그 다음부터는 평화로운 일상에 온갖 변태적인 섹스가 추가된 나날이었다. 벤체슬라스가 일부러 과도하게 성감대 개발을 하지 않고 조절해가며 다루던 몸을 알료샤는 이제 내 것인데 뭐 어떠냐는 태도로 마구잡이로 손대기 시작했다.
사파이어로서는 성욕에 대해 포만감이 든 상태였기 때문에 더 이상은 거절하고 싶었다. 사파이어가 진짜로 할 마음이 없으면 알료샤는 강권하지 않고 물러나긴 했지만 그 대신 교묘한 방식으로 자꾸 사파이어를 자극해왔다.
식탁 아래로 발끝을 내밀어 정강이를 살살 쓸어 올린다던가, 일부러 뒤에서 끌어안고 귀 뒤에다가 키스한다던가. 귀찮아진 사파이어가 나중에는 위협하듯이 그를 밀어내자 알료샤가 아쉬운 듯이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많이 못 먹네.”
마치 키우는 동물이 좀처럼 살찌지 않아 아쉬워하는 것 같았다. 사파이어로서는 몇 달간의 성욕을 미리 채웠을 정도로 해댔는데 알료샤는 아직도 그가 섹스 기아에 시달릴까봐 걱정하는 눈치였다. 이대로 있다간 말라 죽을 것 같았기 때문에 사파이어는 생존을 위해서 다시 운동하기 시작했다.
“아깝다. 살쪄도 되는데. 난 신경 안 쓰는데. 살 좀 붙으면 귀여울 텐데.”
“시끄러워.”
“이젠 편하게 살아요. 암살 같은 거 안 해도 되니까. 내가 편하게 해줄게요.”
“당신 때문에 체력 키우는 거잖아.”
“나랑 그 짓 더 하려고? 기뻐요!”
“웃기지 마. 오늘 밤엔 따로 자는 거야.”
“싫어! 싫어어!”
정신 나간 것처럼 섹스에 몰두하는 이 생활은 커다란 장점도 줬다. 사파이어를 망령처럼 붙잡고 늘어지던 기억들의 날카로움이 누그러지기 시작한 것이다.
알료샤는 사파이어가 안 좋은 감정에 몰두할 시간을 주지 않고 범했기 때문에 분노와 증오 따위에게서 거리를 두고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그것들이 안겨준 충격도 서서히 빛이 바래가고 있었다.
그 대신 이제는 몸이 망가질 것 같았기 때문에 사파이어는 마을 남자들이 선물로 준 장총을 들고 밖으로 나돌아 다니기 시작했다. 낮 시간에는 무조건 나가있으려고 했다. 잠시라도 알료샤와 떨어져 있어야 쉴 틈이 생기는 것 같았다. 한 번 몸을 허락해주고 나니 알료샤는 목줄 풀린 개처럼 날뛰었다.
도시나, 적어도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동네라면 알료샤와 떨어져 잠시 다른 곳에 몸을 숨길수도 있을 텐데 이곳은 도망칠 방법이 없는 함정이었다. 영지라는 이름의 커다란 감옥이라고 할까.
집 밖으로 나가봐야 알료샤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사는 민가나, 숲이나, 어디까지 이어져있을지 모르는 기나긴 비포장도로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서 하루 종일 헤매다가도 저녁 즈음엔 결국 다시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사슬로 묶어두지 않아도 얽매인 삶이었기 때문에 알료샤도 사파이어가 밖으로 돌아다니는 것을 굳이 말리진 않았다. 사파이어가 결국 갈 곳이 없어서 자신에게 돌아오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은근한 쾌감이고 일종의 놀이였다.
알료샤는 사파이어를 구해내서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해주겠다는 맹세를 지켰다.
어느 날, 비포장도로에 흙먼지를 일으키며 낡은 승용차 한 대가 달려왔다. 마을 어귀까지 온 차는 더 이상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그 안에서 덩치 큰 남자 하나와 동양인 남자 하나가 내려섰다. 그들은 뒷좌석과 트렁크에서 짐을 꺼내더니 곧장 알료샤의 집으로 향했다.
“당신이 사파이어인가? 드디어 만나는군.”
동양인이 사파이어에게 악수를 걸어왔다.
“스피넬이라고 해. 지금은 알료샤 밑에서 일하고 있지.”
“제이슨!”
“알료샤! 오랜만이야……. 이름 부르지 말라니까!”
남자가 들고 있던 짐을 알료샤에게 거의 던지다시피 건넸다.
“첫 만남이라서 무게 좀 잡고 싶었는데 당신이 그렇게 본명을 불쑥불쑥 말해버리면 내가 뭐가 돼!”
“우리 사이에 감출 건 없는걸!”
“당신이랑 나는 그럴지 몰라도 이 남자랑은 처음 만나는 거잖아!”
“내 말은, 우리 사이에 감출 게 없다고.”
알료샤가 사파이어의 허리를 끌어안자 남자가 입을 떡 벌렸다.
“뭐야 이거. 둘이 무슨 관계야?”
“매일 매일 섹스하고 빨아주는 사이야!”
당황스러운 침묵이 감돌았다. 남자는 못 들은 척 하기로 했다.
“어, 어쨌든 당신을 한 번 만나고 싶었어. 그 재수 없는 남자에게서 벗어나서 다행이군. 언젠가 당신과 실력을 겨뤄보고 싶기도 하지만…….”
사파이어의 허리를 감아 안은 알료샤가 무시무시한 안광을 빛냈기 때문에 남자는 침을 꿀꺽 삼키고 화제를 돌렸다.
“뭐 그건 없는 얘기로 치고. 알료샤, 체코에서 들어온 소식인데.”
중요한 얘기가 오갈 것 같자 알료샤가 사파이어의 뺨에 입맞춤하며 “잠깐 얘기 좀 하고 올게요.”하고 윙크하고는 남자와 함께 다른 곳으로 사라졌다. 남자가 “뭐야, 진짜 사귀는 사이야?”하고 묻자 알료샤가 “응. 그러니까 합당한 예의를 갖춰.”하고 주고받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사파이어는 남자가 놓고 간 짐을 뜯어보았다. 시골 마을에서 구하지 못하는 몇 가지 공산품과 의약품, 그리고 아무리 봐도 가정용으로 보이지 않는 거대한 크기의 보드카 병이 몇 개나 들어있었다.
스피넬과 함께 온 덩치 큰 남자는 묵묵히 차와 집을 오가며 짐을 가져다놓고 있었다. 그는 사파이어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지만 말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술이라. 그러고 보니 술 때문에 곤욕을 치른 적이 있지. 이제는 과거의 일일 뿐이다. 알료샤는 자극의 종류보다 자극 그 자체를 좋아했기 때문에 사파이어에게 뭐든 시도해보라고 격려했지만 사파이어는 약물류는 손대기 싫었다.
약만큼 몸이 망가지는 느낌이 노골적으로 드는 것도 없다. 무언가를 안 한다는 결정도 한다는 결정만큼 확고한 본인의 선택이었기에 알료샤는 사파이어가 뭘 하든 내버려두었다. 자학만 빼고.
벤체슬라스가 자신에게 얼마만큼 복종하는지에 가치를 두었다면 알료샤는 사파이어가 얼마만큼 자발적으로 선택하느냐에 더 가치를 두었다. 그는 누구에게든 호의를 살 수 있었기 때문에 외압으로 인해 주어지는 사랑은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알료샤는 사파이어를 항상 원했지만 그가 자신의 의지로 알료샤에게 직접 다가오기를 원했다. 키스든, 침대로의 초대든.
사소한 것 하나하나까지 통제하던 벤체슬라스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사파이어도 꽤 피로를 느꼈다. 휠체어를 타고 생활하던 사람에게 어느 날 갑자기 두 발로 일어서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물론 알료샤는 사파이어를 휠체어 밖으로 내동댕이치며 달리라고 윽박지르지 않고, 웃는 얼굴로 인내심 있게 기다려주며 때때로는 사파이어의 손을 힘 있게 잡고 버팀목처럼 부축해줬지만.
계속 걷다보면 다리에도 근육이 붙듯이 사파이어도 무언가를 선택하는데 있어서 전처럼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다. 아주 사소한 것들. 오늘은 무엇을 입을까, 뭐부터 시작할까, 집 밖으로 나갔을 때 어느 방향으로 발걸음을 내딛을까 같은 것들에 대해서.
스스로 결정을 할 수 있게 되자 이제는 좋고 싫음에 대한 기준도 생기기 시작했다. 취향이었다. 사파이어로서는 과거의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을 하나하나 떠올리는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알료샤는 단 것을 좋아하는 편이다. 사파이어는 싫어하진 않지만 굳이 찾아 먹지는 않는 편이다.
알료샤는 색깔이나 맛, 소리같이 감각적인 것을 좋아하지만 사파이어는 숫자로 계산될 수 있는 단단하고 확실한 것을 좋아한다.
알료샤는 대체로 동물을 좋아하지만 사파이어는 대체로 동물에 관심이 없다.
우연히 관심사가 겹치는 경우도 있다. 둘 다 물을 좋아한다는 점이 그렇다. 알료샤는 물장구를 치는 등 물을 가지고 능동적으로 뭔가를 하는 것을 좋아하고 사파이어는 흐르는 물을 가만히 관찰하기를 좋아하는 등 세세한 부분에서 차이가 나지만, 어쨌든 물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은 변하지 않는다.
이 공통된 관심사를 알게 된 알료샤가 커다란 욕조를 구해다가 물을 채워 넣고는 그 안에서 사파이어와 거사를 치러보려다가 욕조가 깨지는 바람에 물난리가 나서 하루 정도를 고생하며 그 난장판을 치우기도 했다.
그 상황에서 사파이어가 웃었어도 감정표현을 했다는 것만으로 알료샤는 감동받았을 테지만 솔직히 그가 전혀 웃지 않아서 조금 위로받았다. 알료샤 나름대로는 욕조 섹스가 상당히 괜찮은 생각이었기 때문에.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이야기를 끝마쳤는지 알료샤와 남자가 다시 돌아왔다.
“내버려 둬. 뒤통수치는 놈이 한 둘도 아니고. 협회 때문에 어차피 당분간은 나도 크게 못 움직여.”
“손해가 막심할 텐데.”
“그 친구들은 거기까지인가 보지.”
“이런데 계속 처박혀 있으면 갈수록 영향력이 줄어들걸.”
“지금 내가 그런데다 신경 쓰게 생겼어? 응? 머리가 있으면 생각을 해보라고. 너 같으면 신혼에 마누라 두고 침대를 비울 것 같아?”
“인생 황금기처럼 보이긴 한데.”
“바로 그거야. 그리고 믿음직스러운 부관이 있는데 내가 더 신경 쓸 필요 있나? 응? 제이슨.”
“아주 능숙한데. 사람 굴리는 솜씨가.”
“알아들었으면 재량껏 처리하라고.”
보드카 병을 쥔 사파이어가 눈동자만 굴려 알료샤와 남자를 빤히 쳐다보자 알료샤가 이마를 탁 치며 깜박했다는 듯이 호들갑을 떨었다.
“내가 너무 늦었죠! 별로 중요한 얘기도 아니었는데!”
알료샤는 부하들에게 이만 가보라는 듯이 손짓했다.
“배웅은 안 할 테니까 잘 가. 난 바빠.”
두 남자는 알료샤의 면전에 대고 뭐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분명 차 속에서 그의 험담을 할 것이 뻔했다. 이방인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다시 차를 타고 사라지자 알료샤는 조금이나마 진지해보였던 모습을 벗어던지고 평소처럼 밝고 유쾌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보드카에 관심 있어요? 잘 됐네!”
“아니 이건 그냥 살펴본 거야.”
“그러고 보니 저번엔 맥주밖에 안 마셔봤죠!”
“아니 술이 뭔지는 나도 알아. 보드카는 안 마실 거야.”
“건배도 안 해봤다고 했으니까 오늘은 질릴 때까지 해봅시다!”
“아니 해봤어.”
알료샤는 사파이어의 대꾸를 건성건성 흘려들으면서 벌써부터 술자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대낮인데 벌써부터 술판인가……. 사파이어가 보드카 병을 내려놓고 슬쩍 집을 탈출하려고 하자 알료샤가 출입구를 막고 섰다.
“안되지, 안되지. 오늘은 주량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볼 거예요.”
“술은 싫어.”
“맘 놓고 흐트러져도 되요. 내가 딱 붙잡아줄 테니까.”
“취하게 만들어서 섹스할거잖아.”
알료샤는 대답이 없었다. 사파이어는 자신이 툭 던져놓고도 그 반응이 미심쩍었는지 알료샤를 의심스럽게 노려보았다.
“진짜야?”
알료샤는 필사적으로 눈알을 굴리며 딴청을 피웠다.
“내가 싫다고 하면 어쩔 거야.”
“싫다고 하지만 몸은 매번 좋아하던걸!”
“싫다고 미리 말하잖아, 지금.”
“끙. 끄응…….”
알료샤는 고개를 푹 숙였다.
“한 번만 허락해주세요.”
“안 돼.”
“그리고 잠들었을 때도 덮칠 수 있게 해주세요.”
“그것도 안 돼.”
“그리고 구멍 빨 수 있게 해주세요.”
사파이어의 말은 들은 척도 안하고 점점 요구사항만 늘어간다. 사고회로에 혼란이 온 사파이어가 팔짱을 끼고 가만히 생각에 잠기자 알료샤가 다급하게 흥정을 걸었다.
“그럼 뒤의 두 개는 빼 줄 테니까 술만! 음주 섹스만!”
“싫어.”
“나는 다 양보해주는데 내 생각은 하나도 안 해주고.”
“당신 요구사항만 말하고 있잖아.”
“알았어요, 그럼. 아무것도 안할 테니까 보드카는 마셔요.”
쉴 새 없이 쏟아진 요구들에 비하면 많이 물러난 셈이다. 사파이어는 뭔가 속는 것 같다고 느끼면서도 동의했다가 역시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술 먹는다는 원점으로 돌아왔잖아.”
“지금 고개 끄덕였다! 고개 끄덕였다! 취소하기 없기!”
취소는 없다고 말하면서도 상당히 물러터진 게, 사파이어가 완강히 거절하면 알료샤는 언제나 물러섰다. 물론 그 뒤로 몇 시간동안 아픈 강아지처럼 앓는 소리를 내며 칭얼대긴 했지만. 어쩌면 섹스는 협상을 진행하기 위한 단순한 카드였을지 모르고 알료샤의 의도는 단순히 사파이어에게 알콜이라는 자극을 제공하려던 것뿐인지도 모른다.
보드카는 액체로 된 불이었다. 목으로 넘기는 순간 차가운 불이 목구멍을 불태우며 식도를 쓸어내리고 위장까지 한 번에 내리꽂히는 묵직한 충격이 있었다. 사파이어는 인상을 절로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엄청난 속도로 해바라기 씨를 까먹고 있던 알료샤가 사파이어의 반응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첫 잔은 건강을 위하여. 건배하고 나서는 잔을 한 번에 비운다. 크기가 작은 샷잔이었지만 알료샤는 잔을 가득 채웠고 사파이어에게는 처음 시도이니만큼 반만 채워주었다. 그 반을 마시는데도 저런 반응이다.
알료샤야 유전자에 보드카가 박혀 있고 혈관을 타고 흐르는 액체 중 절반이 보드카라서 거침없이 들이킬 수 있지만 사파이어한테는 확실히 강한 모양이다. 그가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든 술을 안 먹은 지 몇 년은 됐을 테니까.
알료샤가 안주로 칼바사와 치즈를 올린 흑빵을 건네주자 사파이어가 찌푸린 인상을 펴지도 않고 그것을 우적우적 씹었다.
“왜 이런 걸 마시는데 건강을 위해서 라고 말하는 거지?”
“슬라브는 머리로 이해하려고 하면 안 돼요. 그냥 몸으로 받아들여요.”
사파이어가 벌써 취기가 오르기 시작한 눈으로 깜박깜박 쳐다보자 알료샤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이 남자에게 무언가를 비유하려면 자세히 풀어서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냥 관습.”
사파이어와 지내면서 몇 가지 요령이 생겼는데 그 중 하나는 “그냥 그런 거야.”라는 대답이었다.
처음에는 알료샤도 최선을 다해 모든 것을 설명해주려고 했지만 알료샤의 지식수준을 벗어나는 질문들이 쏟아졌기 때문에 알료샤도 중간에서 타협하고 “원래 그런 거야.”라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사파이어는 그것이 나름대로 타당한 대답이라고 생각했는지 그 말이 나오면 더 이상 묻지는 않았다.
이 남자는 갓난아기처럼 백치 같은 데가 있고, 또 어떨 때는 기계 같은 면이 있다. 하나하나 입력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과거에 정말 어떤 사람이었을까. 기억을 잃는다고 해서 일반 상식까지 잊어버리는 경우는 좀처럼 없다. 알료샤도 사파이어만큼이나 사파이어의 과거가 궁금해졌다.
“요새는 얼마만큼 옛날 생각이 나요?”
“살았던 곳, 가짜 이름, 얼굴들…….”
“들려줘요.”
“너무 많아.”
“아무거나. 하나라도.”
사파이어는 눈을 깜박거리다가 술이 더 필요한지 보드카 병을 집으려고 했다. 그러자 알료샤가 얼른 병을 들어서 사파이어의 잔을 채워주었다. 이번에는 한가득.
“한 번에 비워야하지?”
“원한다면 나눠마셔요. 난 그런 거 신경 안 쓰니까. 편한대로 해요. 편한대로.”
“당신은 러시아 출신이지?”
“우크라이나. 국적이 남아있다면 우크라이나. 집안이 러시아 혈통이긴 해요. 문화도 그 쪽이라고 생각하고.”
“복잡하군.”
“사실 별로 의미가 없긴 해요. 어렸을 때부터 여기저기 떠돌면서 지냈으니까. 미국에서도 살아봤고. 유럽 전체가 고향이기도 하고, 낯선 타지기도 하고…….”
“당신은 태어난 고향을 확실히 기억하고 있잖아. 돌아가면 되잖아.”
“유로마이단에 돈바스 전쟁까지 있었는데 거길 다시 돌아가라고? 시간이 지날수록 못 돌아가요. 어쨌든 내 얘기는 됐고. 당신 얘기를 해줘요. 듣고 싶어요.”
비록 알료샤는 홀짝홀짝 마셔도 된다고 했지만 사파이어는 잔에 든 보드카를 한 번에 비웠다. 앉아있어서 다행이지 서 있었으면 벌써 휘청거렸을 것이다. 술이 심리적 압박감을 덜어주었는지 사파이어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베이징에서 살던 때가 기억나.”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아파트 벽이다. 아무런 특징이 없는 벽이었다. 하얀 벽은 때가 탔고 아무런 장식이 없었다. 가끔은 가장 사소한 것이 제일 오래 기억에 남는다. 그 집은 창문으로 빛이 잘 들어오지 않아 항상 어두컴컴한 인상이었다. 냉기가 감도는 돌바닥 때문에 집 안에서도 신발을 신고 지냈고 가구랄 것도 없이 삭막하게 텅 빈 공간이었다.
하지만 제일 먼저 그 벽이 기억나는 이유가, 아무것도 없는 흰 벽이지만 한 면에는 커다란 지도가 붙어 있었고 그 위를 어지럽게 그은 선이라던가 압정으로 박은 메모지 따위가 다닥다닥 붙어있었기 때문이다.
무언가 중요한 일을 했다. 어렴풋이 그 감각이 기억난다.
거리로 나가면 닭장 같은 아파트 위로 어지럽게 엉킨 전깃줄이 하늘을 반쯤 가리고 있었고, 분주한 사람들의 시끄러운 말소리와 아침식사를 파는 가판대에서 풍겨 나오는 음식냄새가 뒤섞였다.
길쭉하게 튀긴 빵을 콩국과 함께 먹던 게 기억난다. 사파이어를 기억하고 매일 아침 인사를 걸던 중년 여성이 있었으며 항상 똑같은 자리에서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자세로 담배를 피던 노인이 있었다. 그런 사소한 것들이 기억난다.
“중국인이었어요?”
“몰라.”
“모른다고 하기엔 너무 자세히 기억하고 있는걸.”
“그런 식으로 따지면 국적이 10개는 돼.”
“10개 일수도 있지.”
“불가능한 소리군.”
“또, 또 뭐가 기억나는데요?”
“태국이랑 일본 이야기 중에 어느 쪽부터 듣고 싶어?”
“태국인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모를 일이지.”
“일본 얘기는 뭐예요?”
“중국이랑 다를 거 없어. 살던 동네, 아는 얼굴.”
“가족은요?”
“각 나라마다 아내가 하나씩 있으면 아무래도 이상하지?”
“무슨 제임스 본드도 아니고.”
“그럴지도.”
사파이어가 술을 한 잔 더 따르려고 하자 알료샤가 보드카 병을 쥐더니 이번엔 반잔만 따라주었다. 처음 마시는 것 치고 너무 많이 마셨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알료샤가 건네는 잔을 가만히 보던 사파이어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알고 있는 정보가 많다고 들었어.”
“누구한테 그런 소릴?”
“피전 블러드.”
“아아, 아가테.”
“당신은 보석을 이름으로 부르는군.”
“그들은 사람이니까요.”
“당신도 알렉산드라이트라는 보석명이 있잖아.”
“그들과 나는 다를 게 없으니까요.”
“당신은 왕이 되고 싶어 하잖아?”
“나는 인간의 왕이지 보석 같은 무기물의 왕이 아니니까. 나 또한 인간이고. 인간이라는 점에 있어선 그들과 다를 바가 없고. 물론 당신과도.”
“복잡한 개념이군.”
“간단한 개념이에요. 평등.”
알료샤 역시 잔을 한 번 더 채우더니 단숨에 들이켰다.
“그래서 정보 얘기를 갑자기 꺼내는 이유가?”
“당신이라면 내 과거에 대해 알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내가 당신 과거를 알면 여기서 이러고 있었을까요?”
“모른다는 소리인가?”
“나한테도 당신은 신비로워요. 당신 뒤를 캐보려고 노력했지만 아무것도 없어서.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어서.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구체적인 단서라도 있으면 그걸 시작으로 파고 들어갈 수 있을 것 같기는 한데 지금 말하는 것도 하나같이 애매한 것들뿐이고.”
“단서가 있으면 추리할 수 있다는 건가?”
“알아봐달라고 친구들한테 부탁할 수는 있죠.”
즉, 지금같이 애매한 상황에서는 이도저도 아니라는 거다.
“그 남자가……. 단서를 쥐고 있어. 그런 예감이 들어.”
“그 새끼 얘기는 꺼내지 말아요.”
갑자기 알료샤의 목소리 톤이 바뀌었다.
“그 새끼한테 다시 돌아갈 생각 꿈도 꾸지 말아요.”
“다시 돌아갈 마음 없어.”
“만날 생각도 하지 말라는 소리예요.”
“지금으로썬 그가 유일하게 내 과거를 쥐고 있어.”
“그럼 포기해요, 과거. 필요 없잖아요. 앞으로는 내가 지켜줄 테니까.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해줄게요. 당신 먹여 살리는 거 일도 아니니까.”
“난 내 이름이라도 알고 싶어.”
“하나 새로 지어요.”
“혹시 지금 기분 나쁜 건가?”
“당신한테 화난 건 아니에요.”
잠시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사파이어는 알료샤가 이 주제에 대해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어렴풋이 깨달았다. 그래서 화제를 바꾸었다.
“난 아직도 궁금한 게 있어.”
“뭔데요?”
“섹스 할 때.”
알료샤가 피식 웃었다. 웃음이 나올만한 주제였다.
“상대가 쾌감을 느끼면 즐겁나?”
“즐겁죠.”
“왜?”
“왜 아니라고 생각해요?”
“내 몸이 아니잖아.”
“내가 그렇게 만들었다는 만족감이 있잖아요.”
“하지만 내 자신이 그 감각을 느끼는 게 아니잖아.”
“내 몸에 직접 느껴지는 게 아니라고 해도 상대방의 표정이나 목소리나 행동이 좋은 거잖아요.”
“왜?”
알료샤는 슬슬 감을 잡았다. 알료샤는 자신의 잔에 다시 보드카를 채우더니 말했다.
“나는 당신이 싸이코패스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보면 알 수 있어요. 믿어도 좋아요. 난 사람을 대하면서 이 자리까지 왔으니까, 누군가를 보기만 해도 어떤 사람인지 대충 알 수 있어요. 당신은 차갑고 무감정하지만 속은 그렇지 않은걸. 당신 자신도 모르고 있을 뿐이지. 당신의 무감정은 순수한데가 있어요. 벤체슬라스와는 다른 점이라고 할까. 당신의 이기적인 행동은 나쁜 의도를 담고 있지 않아요. 모를 뿐이지.”
“난 사실 다른 사람에 대해 이해가 안 가는 게 많아. 그들의 행동을 보고 따라할 뿐이지.”
“그게 나빠요?”
“정상적인 게 아니니까.”
“비정상이면 어때서?”
“남들과 다르다는 게 알려지면.”
“사회에서 배척받을 거고 내 생존도 불리해진다. 무슨 말인지 알아요. 그걸 신경 쓰는 시점부터 당신은 다른 인간과 다를 바 없어요. 고민하고, 의심하고, 고독해하고. 정상으로 태어나는 인간은 많지 않아요. 우리 모두 어딘가 미친 채로 태어나서 가지치기를 당하고, 교정되고, 사람 꼴이 되는 거지.”
“난…….”
“내 세계에선 당신은 정상이고 당신이라는 표준이 존재해요. 이걸로 부족해요?”
알료샤가 보드카 잔을 들어 사파이어의 것과 부딪쳤다. 맑은 소리가 울렸다. 보드카를 한 입에 털어 넣은 알료샤가 진지한 얘기를 하려는 듯이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내 것이 되어줘요. 난 절대적으로 나만 바라봐줄 사람이 필요해요. 당신의 맹목성이 필요해요. 아무것도 할 거 없어요. 곁에만 있어줘요. 당신과 함께라면 우리는 세상을 지배할 수 있어요. 왕에게는 왕비가 필요하고 황제에게는 황후가 필요하죠. 내 반려자가 되어줘요. 당신이 허락만 한다면, 고개만 끄덕여준다면 되는 일이에요. 나는 지금 당신한테 청혼하고 있는 거예요.”
“난…….”
알료샤는 술의 힘을 빌어야만 입 밖에 낼 수 있었던 것의 결과물을 긴장된 눈으로 지켜보았다. 사파이어는 반 밖에 따라져있지 않은 보드카를 들이키곤 담담하게 대답했다.
“내 과거를 알아야겠어.”
승낙의 대답을 기다리던 알료샤가 고개를 푹 숙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그렇지. 사파이어답다.
“하지만 지금은.”
사파이어가 말을 이어가자 알료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사파이어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현기증을 느끼는지 비틀거리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몸이 앞뒤로 휘청이는 것을 보니 취한 게 분명하다. 사파이어는 이따금씩 고개를 흔들며 몽롱해지려는 정신을 바로 잡으려고 애썼다.
“지금은 좀 누워야겠어.”
알료샤는 사파이어에 비하면 아무렇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즉각 일어나서 사파이어를 부축해 침대까지 가게 도와주었다. 침대에 누운 사파이어는 그대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천장만 쳐다보았다.
“참 이상한 느낌이군.”
“취한 거예요.”
“섹스는 안 돼.”
그 와중에 사파이어가 그 말 만큼은 또렷이 말하자 알료샤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사파이어는 몇 번 눈을 깜박이다가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알료샤는 침대 옆에 앉아서 사파이어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가만히 쓸어 올려주곤 잠든 이마에 입맞춤 해주었다.
벤체슬라스는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미동도 하지 않는 것을 보아 그처럼 보이게 만든 정교한 인형인 줄 알았더니, 그가 맞았다.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뿐이다.
벤체슬라스는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의 등 뒤에 서 있는 사파이어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방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움직이지 않았다. 시간이 멈춰버린 것처럼 그 장면 하나만이 박제되어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유일하게 움직이는 것은 사파이어였다.
벤체슬라스의 압제에서 벗어난 뒤로 그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혐오감과 분노와 때로는 공포를 느꼈지만, 지금 이 순간은 그의 모습을 마주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강렬한 속삭임이 있었다.
그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멈춰버린 시간은 얄궂게 다시 풀리지 않을 것이다. 사파이어가 단서를 조합하고 추리할 시간은 충분할 것이다. 맞서라. 이겨내라. 공포와 대면해라. 사파이어는 이 방 안에서 무언가를 찾아내야 한다는 것을 초조하게 느끼고 있었다.
침대 위에는 자신의 모습이 보인다. 결박당하고 고문당한 채 처참한 모습으로 내버려져 있다. 모습만 봐도 과거의 상처가 떠오른다. 언제였을까. 저 정도로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면 항명의 크기도 컸을 것이다. 그의 인생이 망가지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가 아닐까.
무슨 짓을 해도 그 침대 근처로는 다가갈 수가 없었다.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침대 위의 자신은 공허하게 동공이 풀려 있었다. 시체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다행히 벤체슬라스는 침대에서 거리를 좀 둔 채 의자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굳이 섬뜩함을 감수하며 저기로 다가갈 필요는 없었다. 사파이어는 갑자기 벤체슬라스가 움직여도 자신을 채어 잡을 수 없도록 충분히 거리를 둔 후 크게 빙 둘러서 그의 앞 쪽으로 돌아갔다.
다시 보기에도 두려운 얼굴이었지만 그는 고개를 숙이고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다행히 눈은 마주치지 않아도 됐다.
그가 보고 있던 것은…….
“사파이어.”
귓가에서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사파이어는 잠에서 깨어났다. 악몽의 여파로 두 눈을 부릅뜬 채 천장을 노려보던 사파이어는 바로 옆에서 와 닿는 숨결 때문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사파이어를 끌어안고 잠들었던 알료샤는 품 안의 남자가 갑자기 기겁하며 자신을 밀어내자 물벼락을 맞은 듯이 놀라 깨어났다.
“뭐, 흡, 뭐? 사파이어? 왜 그래요?”
사파이어는 경악한 눈으로 알료샤를 보다가 그게 벤체슬라스가 아니라는 것을 식별하고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알료샤는 갑자기 깨어나서 제정신이 아니지만 사파이어가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는 것을 깨닫고 그를 달랬다.
“왜 그래요. 꿈 꿨어요?”
“그가 가지고 있어.”
“뭐를? 뭘요?”
“벤체슬라스가 내 유품을 가지고 있어.”
알료샤는 한 순간에 잠이 날아가 버렸다.
“당신 유품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나한테 가장 중요한 물건이었다는 것만 기억나.”
“그건 꿈일 뿐이에요. 환상이라고.”
“아니. 진짜야.”
“봐요. 앞뒤가 안 맞잖아요. 당신은 살아있는데 유품이라니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죽은 사람도 아닌데.”
“맞아. 난 살아있어. 그래서 모순이 생겨. 왜 내가 그걸 유품이라고 기억하고 있는지.”
“이제 그만 생각해요.”
알료샤는 슬슬 이 마을에서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사파이어의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조용하고 한적한 곳으로 왔더니 이제는 이 고요한 환경에서 더욱 자신에게 몰두할 계기를 만들어 준 셈이다.
사파이어를 위해 다른 자극이 필요했다. 생동감 넘치는 도시로 가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어디가 좋을까. 그리스의 따뜻한 바다가 좋을까? 그 많고 많은 섬 중에 한 곳에 틀어박히면 지중해의 햇살과 바닷바람이 그를 옭아매는 기억들을 털어내 줄 것이다. 관광객들도 그에게는 좋은 자극이 되겠지.
알료샤는 다시 잠들라는 듯이 사파이어를 가만히 도닥거려주었지만 사파이어는 그 품에서 벗어나 침대에 걸터앉았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모습이 아무래도 오늘 밤은 더 이상 잠들지 않을 것 같았다.
알료샤는 사파이어를 억지로 끌어당겨 다시 자리에 눕혔다. 평소와는 다른 강압적인 태도에 사파이어도 이변을 알아챘다.
“내가 바보라서 당신 풀어두는 줄 알아요?”
알료샤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평소처럼 무한한 자유를 긍정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사파이어는 그에게서 익숙한 냄새를 맡았다. 집착과 통제의 냄새였다. 알료샤가 작정하고 찍어 누르자 사파이어는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의 감정 변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병신이라서 기껏 당신을 구해낸 다음 치료해주고 다시 그 소굴로 돌아가게 만들까요? 내가 그렇게 멍청해 보여요?”
“화내는 건가?”
“슬슬 화나려고 해요.”
“왜지?”
“당신이 자꾸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리려고 하니까.”
“당신이 말한 대로 나는 내 의지로 선택할 뿐이야.”
“자살은 허용할 수 없어요. 자학도. 그 남자에게 다시 돌아가는 것도. 당신이 스스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범위 내에서만 허락할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또 다른 통제군.”
알료샤는 심한 모욕을 받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그런 말을.”
“제한된 자유는 제한된 통제야. 답이 정해져 있는 자유는 일부분만 예외로 풀어둔 구속이야. 당신은 당신이 통제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나에게 자유를 허용한 거야.”
“그런 말을!”
분석이 틀린 건 아닌데 알료샤가 크게 화를 냈기 때문에 사파이어는 곧바로 사과했다. 그를 화나게 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여태까지 사파이어에게 잘해주었기 때문에.
다만 그가 왜 이렇게까지 화내는지는 알 수 없었다. 사실을 말한 것뿐이지 않은가. 사파이어는 단지 알료샤가 벤체슬라스를 대신해 사파이어의 새로운 주인이 되려고 하는 건지 묻고 싶었다.
“내가 당신을 노예로 만들 것 같아요? 당신은 동반자예요. 계속 그렇게 말했잖아요.”
“평등한 존재에게는 구속하고 강제할 권리가 없어.”
“구속하고 강제하다니, 당신을 좋아하니까 그런 거 아니에요. 사랑하니까.”
“이해하기 힘든 개념이야.”
아무리 진심을 전달하려고 해도 이 남자에게는 닿지 않는다. 거절하는 게 아니라 이해 자체를 못하는 거니까. 알료샤의 노력은 보상받을 수 있을까? 그럴 가능성 자체가 있기는 한걸까?
“사파이어.”
알료샤가 사파이어를 감아 안은 팔에 꾸욱 힘을 줬다.
“과거에 집착할 필요 없잖아요. 나랑 있어요. 굳이 알려고 하지 마요. 앞으로의 인생은 나한테 줘요.”
“난 잘 못하는 거니까 당신이 대신 해줘. 당신이 어떤 남자에게 인생을 빼앗겼어. 몇 년 동안인지, 몇 십년동안인지는 몰라.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도 몰라. 가족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몰라. 사는 곳은 어디였고 어디서 태어났는지, 당신을 기억하는 사람은 있는지도 몰라. 인생의 중요한 순간들도 기억나지 않아. 나이도 몰라. 이름조차 기억이 안 나. 당신도 당신이 누구인지 몰라. 누군가가 당신을 그 곳에서 빼내주고 앞으로는 자신과 살아가는 것만 생각하라고 해. 과거는 잊으라고 하면서. 난 정말 이런 걸 잘 못해. 당신은 나보단 잘 할 거 같아.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는 거 말이야. 나한테 공감해봐. 이입해봐.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 같아?”
사파이어가 무언가를 이렇게 길게 말한 적이 있을까. 처음 들어보는 것 같다.
대부분이 단답형인데다가 묻는 것도, 말하는 것도 잘 없는 조용한 남자다. 이 남자가 이렇게 긴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을까. 표현하는 방법을 몰라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쭈욱 나열하는 이 미숙함이 얼마나 시리게 다가오는가.
“대답해줘.”
“이야기 하나 해줄게요.”
알료샤는 화제를 돌렸다. 사파이어도 어렴풋이 알료샤가 뭐라고 대답할지 아는 것 같았다. 그래서 더 재촉하는지도.
알료샤도 사파이어와 정확히 똑같이 행동했을 거다. 내 삶이다. 내 인생이란 말이다. 되찾으려고 하는 게 당연하다. 그게 누구든 간에. 바보천치라도 자기 이름은 안다. 개새끼도 자기 이름은 기억하고 있는 법이다. 하물며 인간이야.
그래서 알료샤는 대답할 수 없었다. 알료샤가 긍정해버리면 그게 곧 사파이어가 사지로 떠나는 것에 대한 허락이 되니까.
“한 연인이 있었어요. 남자와 여자였죠. 둘은 행복하게 살았어요. 어느 날 여자가 납치됐어요. 남자는 여자를 찾아내려고 했지만 모두 헛수고였고…….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 겨우 여자를 찾아냈어요. 여자는 그 시간동안 인신매매를 당하면서 무서운 일들을 겪었고 그것 때문에 기억을 잃은 상태였어요. 연인이었던 남자조차 기억하지 못한 채로. 남자는 여자를 정성껏 간호해서 기억이 다시 돌아오길 바랐어요. 자신과의 시절을 떠올리도록, 행복했던 시간을 다시 기억하도록. 남자의 헌신이 빛을 보기 시작해서 서서히 여자의 기억이 돌아왔죠. 순조로워 보였어요. 여자가 비명을 지르기 전까진. 왜냐하면……. 그동안 억눌러 묻어두었던 기억들이 한꺼번에 돌아왔기 때문에. 당신한테 내 노력을 기억해달라는 부탁은 하지 않아요. 나는 단지 저 남자처럼 어리석은 짓을 하기 싫어요. 나라면 억지로 떠올리게 하지 않을 텐데. 잊어도 좋으니까 아프지만 말아요. 내가 당신을 보호하겠다고 한 건 이것까지 포함해서였어요. 날 떠나지 마요. 당신은 아파질 거예요. 내가 계속 당신의 진통제가 되도록 해줘요.”
“그래도.”
사파이어가 입을 열었다.
“그 여자는 기억을 떠올려서 행복했을까?”
“그럴 리가. 다른 사람에 의해 강제로 악몽을 떠올린 건데 좋을 리가 없잖아요.”
“자신의 선택이라면 어땠을까?”
“그래도 아팠을걸요.”
“그렇지만 가치 있지 않았을까?”
알료샤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대화를 하면 할수록 자신이 원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오고 있었다. 한 번 풀리기 시작한 빗장을 다시 걸어 잠글 수 없는 것처럼.
사파이어를 억누를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란 말인가. 재갈을 물리고 족쇄라도 채우라고? 사파이어를 학대했던 다른 놈들과 똑같아지란 말인가? 이 내가?
자리를 반드시 옮겨야한다. 너무나도 한적한 생활이 그를 점점 더 내면으로 고립시키고 있다. 알료샤는 날이 밝자마자 도시에 있는 친구들을 불러서 바로 이 나라를 뜨겠다고 생각했다. 협회에서 가한 벌칙 때문에 예전만큼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할 순 없었지만 아직도 가고 싶은 곳은 언제든 어디든 갈 수 있었다. 그 정도는 가능했다.
“혹시 지금 불안해하는 건가?”
품 안의 사파이어가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해요?”
“이전에도 그런 숨소리를 들어서.”
“불안할 게 뭐가 있겠어요.”
대답은 그렇게 하면서도 알료샤 역시 마음 한 구석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초조함을 느꼈다. 일어날 수밖에 없는 자연재해를 막연히 기다리는 것 같은 심정으로.
알료샤는 사파이어를 데리고 체첸을 떠났다. 짐 정리도 필요 없었고 비행기 예약도 필요 없었다. 그의 인맥이 곧 돈이고 행동력이었다. 벤체슬라스와는 차원이 다른 힘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 동안 정이 들었는지 사파이어에게 잡다한 선물을 해주었지만 결국 세관에서 걸릴 물건들이라 알료샤가 전부 처분했다. 어차피 그들의 따뜻한 마음씨는 알료샤가 잘 봐두었다. 알료샤는 그것을 기억할 것이다.
부하가 구해다 준 낡은 차를 타고 그로즈니까지 이동했고 거기서 또 베슬란 공항까지 향했다. 비행기를 타고 국경을 넘었고, 나라들을 거치면서 결국 그리스에 도착했다.
산토리니 같이 관광지로 유명한 곳은 일부러 피했다. 사람이 너무 많다. 이번에는 너무 고립된 곳도 피했다. 아는 사람만 찾아오는 숨겨진 명소인데다가 적당히 활기가 있는 시골마을. 딱 그 정도면 됐다.
알료샤의 친구가 집을 내주었기 때문에 다른 준비는 전혀 필요 없었다. 사파이어는 시차 때문에 피곤해보였지만 알료샤가 그를 가만 내버려두지 않았기 때문에 나른한 인상으로 알료샤와 함께 동네 산책을 다녔다.
푸른 비단같이 넘실거리는 짙푸른 바다가 있고, 하얗게 칠한 집들이 있고, 동네 사람들만큼이나 이방인을 신기하게 여기는 고양이들과 그늘에서 잠을 자는 개들, 환상적인 석양과 바닷바람이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알료샤의 기대보다 더 사파이어의 정신을 잘 흩뜨려놓았다. 이런 시골에 관광객이 잘 오지도 않지만 동양인은 이질적인 생김새 때문에라도 더 신기한 존재였다. 며칠 묵다 가는 게 아니라 아예 현지에 집을 마련해서 푹 눌러 살 예정이라니 소문이 안 날 수가 없다.
동양인과 요란한 염색 머리의 외국인에 대한 소문은 금방 동네 전체에 퍼져서 알료샤와 사파이어가 어딜 가도 그들을 알아보고 손을 들어 인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언제나 온갖 주제에 대해 토론을 벌이고 있었는데 토론에 생판 모르는 사람이 참여해도 개의치 않았고 오히려 그래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사파이어는 그들이 쏟아내는 그리스어를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곧 사파이어가 그리스어를 전혀 모른다는 것을 알아챈 그리스인들이 최선을 다해 서투른 영어 단어로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기 때문에 사파이어는 더 도망칠 수도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알료샤가 불 난 데에 기름 끼얹듯 열정적으로 토론에 참가해서 한층 더 발을 뺄 수가 없었다.
알료샤 역시 사파이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어라고는 한 마디도 못했지만 손과 발을 열심히 이용해서 그리스인들과 소통하려고 했고, 그리스인들은 말이 통하지 않아도 어쨌든 대화를 하려고 하는 그의 태도를 높게 사서 짤막한 단어들을 알려주며 토론에 끼워주었다.
한 달이 지나기도 전에 알료샤는 벌써 친구 셋을 사귀었고 간단한 그리스어를 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그의 새로운 그리스 친구들은 알료샤 덕분에 러시아어에 말이 트이기 시작했다.
어딜 가든 토론이 있었다. 식당에서, 길가에 내놓은 테이블에서, 골목 어귀에서, 시장에서, 바닷가에서, 집 앞에서, 어디에서든지. 사색이 필요한 사파이어에겐 지옥 같은 환경이었다. 그가 조금이라도 고립되려고 하면 금세 낯선 사람이 그의 의식에 불쑥 끼어들어왔다. 심지어 길에 돌아다니는 고양이까지도 사파이어를 방해했다.
그리스의 바다와 바람과 하늘이 그에게 왜 그렇게 인생을 심각하게 사느냐고 물었다. 정말 끊임없이 물었다.
알료샤에게는 행복한 나날이었다. 사파이어가 더 이상 과거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딱 한 번, 사파이어가 이런 소리를 한 적은 있다.
“당신이 없었으면 내 세계는 아직도 단순했어.”
그는 이따금씩 고요한 삶을 그리워하는 것 같다. 물리적인 소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주어지는 것을 수행하기만 했던 삶에 대해.
“그걸 원해요? 천천히 죽어 가는걸? 소모품으로 사는 걸 원했어요?”
“그런 게 아냐. 하지만 가끔 모든 게 명확히 정의되던 건 그리워.”
“혹시 내가 당신을 인간으로 만들어 준 게 원망스러워요?”
“난 언제나 인간이었어.”
의미심장한 대화는 그렇게 끝났고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그의 내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간에 수면 위로 올라오는 것이 더 이상 없었기 때문에 알료샤는 이제 긴장을 풀어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제어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에 대한 그런 믿음이 있었다.
재난은 바깥에서 찾아왔다.
알료샤가 사파이어를 데리고 바닷가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골목 어귀에서 그들 앞으로 불쑥 튀어나오는 남자가 있었다. 작고 호리호리하고 가무잡잡한 남자로, 처음에는 그들과 우연히 정면으로 마주쳐서 길을 피하려는 줄 알았다.
그러나 알료샤가 살짝 몸을 틀어줘도 비켜 지나가지 않고 오히려 알료샤가 몸을 트는 쪽으로 마주해서 그제야 알료샤는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챘다. 그 순간 옆에 있던 사파이어가 남자에게 확 달려들더니 재빠르게 배에다 주먹질을 가하고 그의 팔을 비틀었다.
남자의 손에서 무언가가 떨어지며 쨍그랑 소리가 났다. 칼이었다.
사파이어는 남자를 제압해 팔을 꺾은 채 벽에 밀어붙였다. 거의 동물적인 본능으로 습격을 눈치 챘지만 사파이어도 알료샤와 마찬가지로 당황한 것 같았다.
그러나 사파이어가 채 입을 열기도 전에 알료샤가 바닥에 떨어진 칼을 줍더니 사파이어를 몸으로 가리고 서며 칼을 던졌다.
첫 번째 습격이 실패로 끝나자 바로 다음 공격을 가하려던 또 다른 습격자가 알료샤의 반격을 재빨리 피했지만 손등에 칼은 박혔다. 두 번째 습격자는 손을 쥐고 골목 너머로 도망가 버렸고 알료샤는 사파이어가 찍어 누르고 있는 남자의 머리를 벽에 쾅 쾅 박으며 거칠게 소리쳤다.
“넌 누구야? 목적이 뭐야?”
그리스어로 물어봤지만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좋아. 다시 한 번 머리를 쾅 박으면서 영어로 물었다. 그래도 대답이 없다. 러시아어. 역시 대답이 없다.
사파이어가 건조한 눈으로 알료샤에게 눈짓을 하자 알료샤가 그 신호를 알아들은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파이어가 뒤로 꺾은 남자의 팔을 점점 더 잔인하게 틀어 올렸다. 관절이 상상할 수 없는 각도로 틀어지기 시작하자 남자가 억눌린 비명을 질렀다.
사파이어는 기어코 남자의 손목을 부러뜨리고 난 후 팔뚝을 움켜쥐었다. 다음엔 팔꿈치, 그리고 어깨가 될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남자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이탈리아어 같았지만 사투리가 심해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사파이어가 남자의 팔뚝을 쥔 손에 꾸욱 힘을 주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영어.”
남자가 정신 못 차리고 몇 마디 더 이탈리아어로 말하자 사파이어가 다시 고통을 가하며 재차 “영어.”하고 못 박았다. 한 쪽 팔을 완전히 못 쓰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힌 남자가 그제야 말문이 트인 듯이 서툰 영어로 대답했다.
“올렉, 올렉이 시켰어!”
아는 이름인가? 사파이어가 알료샤를 돌아보자 알료샤가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언제 뒤통수치나 기다리고 있었다.”
“죽일까?”
“내버려둬요. 처리하는 게 더 귀찮아지니까.”
눈앞에서 자신의 목숨을 가지고 죽일까 말까 하는 대화가 담담하게 오간다. 남자는 이미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다. 사파이어가 손을 풀어주자마자 남자는 자빠질 듯이 비틀거리며 도망갔다.
알료샤는 사파이어의 손을 잡고 빠른 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동시에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에 연락했다. 하지만 그들이 모퉁이를 돌아섰을 때, 한 무리의 남자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좋아. 계획 변경.”
알료샤가 사파이어를 자신의 뒤로 밀며 어깨 관절을 풀었다. 아무 무기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게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무기야 뺏으면 그만이다. 한 놈이라도 족치면 곧바로…….
그러나 남자들 중 하나가 총을 꺼내드는 것을 보고 알료샤가 바람같이 사파이어의 팔을 잡아끌며 줄행랑을 쳤다.
“계획 취소! 계획 취소!”
급박하게 달리는 와중에도 알료샤가 핸드폰을 쥐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더니 막무가내로 소리쳤다.
“빨리 와! 있는 거 몽땅 들고 와!”
뒤에서 총성이 들려왔다. 골목이 좁고 구불구불한 게 다행이었다. 한 두 사람밖에 지나가지 못하는 골목에선 자연히 일직선으로 달리게 된다. 이런 환경에선 적은 인원으로 다수를 상대해볼 수도 있지만 총 앞에는 장사가 없다.
알료샤는 그동안 너무 풀어져 살았다고 생각했다. 총 한 자루쯤은 들고 다녔어야했는데. 자신의 세력권이라는 것만 너무 믿고 있었다. 적어도 마을에 당장 부를 수 있는 병력이라도 어느 정도 배치해뒀어야 하는 건데.
다른 섬에 있는 부하들이 바로 배를 타고 올 것이다. 30분은 걸릴 텐데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알료샤 혼자라면 어떻게든 빠져나갈 수 있을 거 같은데 사파이어가 딸려 있어서 문제다.
사파이어 역시 수없이 사지를 헤쳐 나온 일류 암살자지만 알료샤의 눈에는 언제나 보호해줘야 하는 대상이었다. 알료샤가 앞만 보고 달리는 사이 사파이어는 뒤에서 열심히 장애물을 만들며 알료샤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암살하고, 발각되고, 쫓기고, 숨는 건 그의 인생 그 자체였다. 지금 같은 상황도 수 없이 겪었다.
몇 달간 평화롭게 지냈기 때문에 몸이 굼떠졌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긴장 상태에 빠져들자 다시 옛 감각이 돌아왔다. 알료샤는 암살자답지 않게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데 더 익숙한 것 같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사파이어보다 더 당황하는 것 같았다.
어느 순간 사파이어가 알료샤의 팔을 잡아채더니 그를 골목 옆 틈새에 숨겼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 있는 빛도 들지 않는 그늘이었다. 근방 거주민이 창고처럼 짐을 보관해두는 자투리 공간이라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채기도 힘든 좁은 곳이었다.
사파이어가 알료샤를 와락 끌어안고 그 좁은 틈으로 들어가 알료샤의 입을 틀어막았다.
사파이어가 서늘한 눈으로 바깥을 가만히 내다보자 잠시 후에 그들을 쫓던 남자들이 요란하게 소리치며 그들이 있는 곳을 스쳐지나갔다. 남자들의 소리가 멀어지고 나서도 사파이어는 조금 더 기다리더니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아니, 그가 먼저 몸을 빼기도 전에 알료샤가 사파이어를 밀어 넣더니 자신이 바깥 동태를 확인하곤 먼저 나왔다. 그런 후 사파이어를 꺼내주고 다시 손을 잡고 달렸다.
“무기가 필요해.”
“작정하고 죽이려고 온 거 같은데. 이 정도면 이미 집도 털렸을 거 같은데.”
“다른 피난처는?”
“레안드로스네 가게로 가야 할 거 같은데!”
알료샤가 그리스에 와서 새로 사귄 친구, 술집주인 레안드로스 클로로스는 잔을 닦고 있다가 갑자기 이유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다.
“무기는?”
“술집인데 있을 리가 없잖아요. 그냥 숨어야지!”
조용하고 평화로운 시골 마을에 난데없이 총성이 울렸기 때문에 주민들은 두려움과 당황이 반반씩 섞인 상태였다. 범죄라고 해봐야 절도나 폭행이 가끔 일어나고 성범죄나 살인 같은 강력 범죄는 몇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동네다. 총격이라니. 경찰도 당황한 눈치였다.
시에스타 전에 가게 오픈 준비를 미리 해두고 한숨 자려고 했던 레안드로스는 누군가가 다급하게 가게 문을 두들기는 소리를 듣고 참 무례하다고 생각하며 문을 열어주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알료샤가 불안하게 주위를 둘러보며 일단 사파이어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레안드로스가 이게 무슨 일이냐며 묻기도 전에 알료샤가 가게 안으로 들어오더니 문을 걸어 잠갔다.
“알료샤?”
“도와줘. 여기에 좀 숨겨줘.”
“무슨 일이야 대체?”
“뒷방 있어? 뒷방으로 가. 절대 나오면 안 돼. 나중에 다 보상해줄게. 지금은 입 다물고 도와줘.”
우정을 쌓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친구지만 레안드로스는 이미 알료샤에게 큰 도움을 두 번이나 받았다. 다른데 가서 자랑스럽게 떠벌리고 다닐 수도 없는 불법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그는 알료샤에 대해 고맙게 생각하면서도 언젠가 갚아야 할 채무라고 느끼고 있었다.
아마도 지금이 그 순간이겠지. 레안드로스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무슨 일 인진 모르겠지만…….”
레안드로스가 뒷방에서 샷건과 탄환을 가지고 나와 알료샤에게 건네주었다.
“이걸로 저번에 진 빚은 없는 거야.”
“고마워. 친구.”
레안드로스는 친구라는 단어가 또 다른 족쇄처럼 느껴진다고 생각하며 알료샤의 충고대로 뒷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사파이어는 가게 안을 뒤져 식칼을 찾아냈다. 그리고 칼 손잡이에 천을 칭칭 둘러 감아 쉽게 미끄러지지 않도록 했다. 누구든 가게 안으로 들어온다면 사파이어가 처리할 것이다.
알료샤는 총에 탄환을 하나하나 채워 넣으며 창문마다 커튼을 치고 그 틈새로 바깥을 내다보았다.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제 곧 낮잠시간이기도 하고 경찰들이 돌아다니며 주민들에게 건물 안에 있으라고 말하고 있었다.
알료샤는 핸드폰을 흘끔거리며 시간을 쟀다. 거리의 경찰 역시 주민들만큼이나 무서워하고 있었다. 그들 역시 지원 병력을 불렀으리라. 그 지원 병력이란 게 언제 올지 미지수이기 때문에 경찰들은 순찰이라는 이유로 자리를 옮겼다. 마을 안을 돌아다니는 수상한 남자들과 마주치지 않기를 바라며.
경찰이 떠나고 난 자리에 알료샤를 쫓던 암살자 무리가 다시 나타났다. 확실히 숫자가 많았다. 그들 역시 초조한 기색이었다. 알료샤를 처리하는데 얼마나 받은 건진 모르겠지만 경찰이 개입한 이상 그들에게도 시간제한이 걸렸다.
그들은 닥치는 대로 건물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간단한 계산이다. 섬이고, 배를 타지 않는 이상 빠져나가지 못할 테니 이 안에 있는 건 확실하다. 그러니 어디에 숨었든 이 잡듯이 뒤지면 나온다.
총을 든 남자들에게 강제로 가택 수색을 당하는 주민들이 문을 발로 뻥 뻥 걷어차는 소리에 놀라 소리 지르거나 항의하는 것이 들려왔다. 그런 목소리들은 남자들이 총구를 들이대자 금방 사라졌다.
남자들이 이윽고 레안드로스의 술집 앞까지 다가왔다.
알료샤는 카운터 뒤에 숨어서 총을 내밀고 바깥 상황을 주시했다. 남자들이 안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대응하지 않고 그냥 보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문고리가 끼이익 돌아가자 알료샤의 손가락도 조용히 방아쇠 안쪽으로 걸렸다.
문고리를 돌려보던 남자들은 가게 문이 잠긴 것을 알고 발로 걷어차려고 했다. 그러나 일행 중 누군가가 여긴 술집이니까 지금 시간에 열지 않는 게 당연하지 않냐고 물었다. 그러고 보니 맞는 말인 것 같기도 하다. 시에스타 전이니까 열린 가게들도 하나씩 문을 닫아놓을 시간이었다.
남자들은 다른 건물로 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하는 말은 알아들을 수 없지만 그들의 기척을 듣고 있던 알료샤도 긴장의 끈이 놓였는지 한숨을 내쉬며 방아쇠에 걸었던 손가락을 풀었다.
그 때 사파이어가 알료샤의 옷자락을 가만히 잡아당겼다. 사파이어를 돌아보았던 알료샤는 그대로 그 쪽 방향에 난 창문을 보게 되었다. 창 밖에서 한 남자가 커튼 사이로 가게 안쪽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사파이어와 눈이 마주친 상태였다.
남자가 소리쳐서 일행들을 부르려는 순간 알료샤가 사파이어를 옆으로 밀고 번개같이 총을 겨누었다. 그대로 포화가 터졌다. 유리창 밖에 서 있던 남자는 산탄과 깨진 유리조각을 뒤집어쓰고 그대로 즉사했다.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던 남자들이 다시 달려와서 온 힘을 다해 가게 문을 걷어차 열었다. 문이 열리는 순간 알료샤가 제일 먼저 보이는 놈을 쏴버렸다. 놈은 죽었지만 다른 놈들이 총을 난사했기 때문에 알료샤는 사파이어를 감싸 쥐고 최대한 몸을 숨겼다.
무차별적인 총격이 가해졌지만 공격자 측은 공간 자체를 벌집으로 만들 화력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얼마 안 가서 총소리가 멎었고 다시 알료샤에게 기회가 돌아왔다. 이쯤 되면 죽었겠지 싶어서 가게 안의 동태를 살피던 한 놈의 머리가 날아갔다. 남자들은 적이 아직 죽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대응사격을 했지만 알료샤는 다시 몸을 숨긴 상태였다.
알료샤가 바깥에다 대고 총알 한 발을 허비하며 위협사격을 하자 남자들이 잠시 멈췄다. 그 사이에 사파이어가 재빨리 기어나가서 쓰러진 시체가 쥐고 있는 총을 획득하고 그대로 옆 기둥에 몸을 숨겼다.
사파이어가 알료샤에게 눈짓으로 신호하자 알료샤가 몸을 바깥으로 내밀고 엄호 사격을 해주었다. 입구로는 누구도 들어오지 못한다.
사파이어는 심호흡을 하며 스윽 일어서더니 입구 옆 창문을 내다보았다. 예상대로 한 남자가 입구 바로 옆에 쭈그리고 앉아 공격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사파이어는 그대로 창문을 깨며 남자의 머리에 총을 갈겼다.
공격의 방향이 입구뿐만 아니라 창문으로도 온다는 것을 안 남자들이 일제히 그 쪽을 향해 사격했지만 사파이어는 다시 팔을 안으로 집어넣은 뒤였다. 입구에서 가까웠기 때문에 각도가 조금만 틀어져도 바깥에 몸을 숨기고 있는 녀석들과 마주칠 수 있다.
사파이어는 총의 상태와 탄창을 확인해봤다. 모델은 글록 17. 총기 관리를 개판으로 해놓은 것 같지만 워낙 튼튼한 총이라 전투를 수행하기엔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장탄수 17발이지만 방금 전 한 발을 쐈으니 16발이 남았다.
이걸로 난사까지는 어려워도 충분히 대응은 가능하다. 상대를 짐작해보자면 인원수는 파악이 안 되지만 기관단총을 가진 녀석이 하나, 권총을 가진 녀석이 셋으로 보인다. 탄알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신중하게 하나씩 해치우면 승산이 있어 보인다.
어떻게 할까. 이대로 달려 나갈까? 예전처럼 방탄복을 온 몸에 감고 다니던 때라면 두 번 고민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지금은 한 발만 스쳐도 끝이다.
그렇지만 수적으로도, 화력으로도 압도적으로 밀리는 상황에서 시간을 두고 대치하다보면 결국 이 쪽이 죽게 된다. 심리전을 써야하나. 어떻게? 사파이어가 고민하고 있는 사이 알료샤가 사파이어 쪽으로 무언가를 굴려주었다. 술병이었다.
이걸로 어떻게 하라는 거지? 알료샤를 쳐다보니 알료샤가 사파이어에게 찡긋 하고 윙크를 해주었다.
바깥에 대기하고 있던 습격자들은 술집의 열린 문으로 무언가가 데굴데굴 굴러 나오자 순간적으로 머리끝까지 오싹해졌다.
누군가가 부주의하게 “수류탄이다!”하고 외쳤기 때문에 일순 그것이 정말 수류탄처럼 보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몸을 날려 피했지만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제야 지레 겁먹고 속았다는 것을 안 남자들이 아차 싶어서 고개를 드는 순간 사신이 술집 밖으로 걸어 나와 그들을 하나하나 총살했다. 남자들은 데굴데굴 굴러 나온 것이 술병이었다는 것을 두 눈에 담으며 죽었다.
사파이어는 침착하게 조준했고 순식간에 세 명을 죽였다. 패닉에 빠졌다가 재빨리 회복한 다른 놈이 사파이어에게 총을 겨누는 순간 술집 안에서 그림자 하나가 득달같이 뛰쳐나와 남자를 덮쳤다.
알료샤가 살인귀 같은 얼굴을 하고 남자의 입에 샷건의 총구를 밀어 넣었다. 무지막지한 쇳덩이가 강제로 밀고 들어오자 남자의 앞니가 깨졌지만 그 다음 순간엔 포화와 함께 뒤통수가 깨져나갔다.
알료샤는 죽은 남자가 채 쓰러지기도 전에 그의 손에서 총을 빼앗아 번개같이 조준하고 나머지를 쏴 맞췄다. 전의를 상실한 놈들은 이미 도망치고 있었다. 전투가 일단락되자 알료샤는 탄창부터 확인하고 바닥에 쓰러진 시신들에게서 무기를 노획하더니 사파이어에게 다가왔다.
“다친 데는 없어요?”
“괜찮아.”
사파이어는 알료샤가 건네는 기관단총을 받아들었다. 어디선가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꼼짝없이 건물 안에 갇혀 광란의 총격전을 내다보고 있던 주민 중 하나가 그 참상을 이겨내지 못하고 끔찍한 소리를 내지르기 시작했다. 알료샤가 소리 나는 쪽을 돌아보았다가 사파이어의 팔을 잡고 이끌었다.
이대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일이 커졌으니 죽이 됐든 밥이 됐든 알료샤에게 흠집이라도 내려고 더 악독하게 달려들 것이다. 시간이 꽤 지났으니 알료샤의 부하들도 슬슬 도착할 것이다. 해안가로 가는 게 낫겠다. 배를 타고 아예 다른 섬으로 이동해야한다.
그러나 적들은 알료샤의 생각보다 더 교활했다.
“불이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총격전과 별개로 마을 어딘가에서 큰 불이 났다. 불은 바람을 타고 빠른 속도로 번지기 시작했다. 건물 안에 갇혀있던 주민들도 바깥으로 대피하기 시작했다. 총에 맞아죽던가, 불에 타죽던가 죽는 것은 매한가지다.
혼란과 공포가 질병처럼 번졌다. 알료샤는 양떼처럼 도망치는 사람들에게 휩쓸려 사파이어의 손을 놓쳤다.
“바다로!”
어차피 이 틈바구니에서 사파이어를 다시 찾지는 못한다. 알료샤는 혼란에 빠진 사람들 머리 너머로 크게 소리쳤다. 다행히 사파이어는 그 소리를 들었다. 바다로 가라고. 바다로.
사파이어는 무기를 쥐고 사람들을 헤치며 달리기 시작했다. 기묘하게도 그는 극도의 흥분 상태에서 오히려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시계 초침이 째깍째깍 돌아가는 게 인지될 정도로.
사람들이 그의 얼굴을 보고 겁을 먹고, 그의 손에 들린 것을 보고 경악하며, 그가 마귀라도 되는 듯이 그에게서 멀어지려고 하고, 그의 주위로 원이 생겨났다.
그토록 친근하게 대해주던 사람들인데 지금은 사파이어를 이 소란의 근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공포와 경멸을 담은 눈으로 노려보면서 피난을 재촉하고 있었다. 상관없었다. 벤체슬라스의 세뇌가 벗겨지긴 했어도 사파이어에겐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두꺼운 겉껍질이 있으니까.
사실, 누구도 더 이상 사파이어에게 다가오려고 하지 않아서 오히려 편했다.
알료샤와 지내는 동안 감을 많이 잃었지만 그가 기억하는 평생 동안 숱하게 반복해온 작업이기 때문에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죽인다는 것. 전투를 수행한다는 것. 아주 익숙한 감각이다.
그 동안 휴식을 취하며 몸과 마음이 충분히 치유됐기 때문인지, 더 이상 금기와 벌칙이 없기 때문인지 사파이어의 기억은 어떤 방해도 없이 자연스럽게 과거로 과거로 흘러들어갔다.
사람들을 밀치며 바다로 향하던 사파이어는 운명처럼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모든 것이 딱 이 순간 이 자리에서 기억이 나야한다고 어떤 커다란 뜻에 의해 정해진 것처럼, 사파이어는 자신이 누구였는지 떠올렸다. 거기엔 어떤 극적인 충격도 없었다.
살다보니 어느 날 갑자기. 문득. 그런 식으로 떠올랐다.
사파이어는 홀린 듯이 자신의 조각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누군가가 어깨를 밀치며 도망가지 않았더라면 불이 다가오는 줄도 모르고 계속 그 자리에 서 있었을 것이다.
사파이어는 일단 살아야하기 때문에 피난에 우선순위를 두고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그의 뺨 위로 차갑게 식은 눈물 줄기가 흘러내렸다. 불가항력이었다. 그가 우는 것이 아니라 인체가 눈물을 밀어내고 있었기 때문에. 이상한 감각이었다. 기쁨이라고 해야 할까.
바다로.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자신이 누구였는지 드디어 윤곽이 잡혔다.
바다로. 적어도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뭘 했는지는 기억이 난다.
바다로.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내가 바로 누구인지.
입 안에서 짭짤한 맛을 느끼고 나서야 눈물이 입 안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알았고, 자신이 웃고 있기 때문에 눈물이 뺨을 타고 입 안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웃고 있었다. 압도적인 환희.
드디어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새파란 물결은 화염에 비추어 평소보다 색이 바랬고, 넘실거리는 파도 너머로 그리스 경찰의 선박과 주민들을 구하러 급하게 이쪽으로 배를 모는 어선들이 보였다.
인간들이 얼마나 궁지에 몰려있든 자연은 그저 큰물을 철썩이며 수천수만 년 전부터 그래왔듯이 파도를 만들고 해안선을 쓸어 내려가고 있었다.
큰 물. 머릿속에 스파크가 튀었다. 이렇게 바다 같은 큰 강이 사파이어의 머리에도 남아 있었다. 먼 이국에 있어도 커다란 강의 도도한 흐름은 그에게 고향을 떠올리게 해주었기 때문에 사파이어는 흐르는 물줄기를 좋아했다.
그 강의 이름은 한강이었다.
모순된 기억들 속에서 커다란 조각들이 맞물려 드디어 덩어리를 이뤄냈다. 이 기쁨을 어떻게 알려야할까. 소리쳐야하나? 양손에 총을 들고, 그를 죽이려고 하는 암살자들과 마주하며, 또한 섬을 집어삼키는 거대한 불을 등지고서?
사파이어는 자신을 알아보고 달려드는 습격자를 쳐다보지도 않고 머리를 날려버렸다. 사람 머리가 산산조각 나는 와중에도 이 이상 없을 정도로 웃고 있었기 때문에 소름이 오싹 돋을 정도로 괴기스러운 모습이었다.
해안가에서 사파이어를 기다리고 있던 알료샤가 그 모습을 보았다. 그의 곁에는 이미 배를 타고 도착한 부하들이 모여 있었다. 알료샤가 사파이어를 크게 소리쳐 부르자 사파이어가 그 쪽을 돌아보았다.
이리로 오라고 하고 있었다. 기시감이 들었다. 얼마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거긴 위험하니 이리로 오라고 하는 손짓, 다급한 외침, 절박한 눈길. 그 때와는 상황이 많이 다르지만 사파이어는 또 다른 작별의 시간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야만 했다.
“나 기억났어!”
사파이어가 다가올 생각을 하지 않기에 직접 그를 데려오려고 발걸음을 떼던 알료샤가 사파이어의 외침에 얼어붙었다. 정확히는 그 외침보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환한 웃음 때문에. 단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얼굴이다. 끔찍하게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사파이어가 무언가를 더 말하기도 전에 불붙은 나무가 하중을 이기지 못하고 쿵 쓰러졌다. 그가 나무 밑에 깔린 줄 알고 알료샤가 크게 놀라 소리쳤다. 다행히 나무는 사파이어에게서 비껴 넘어졌지만 이제는 불로 된 장벽이 되어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알료샤가 전력질주로 달려오자 그를 경호하던 부하들도 뒤따라 달려왔다.
선택해야한다. 알료샤에게 돌아갈 것인가, 떠날 것인가. 알료샤에게 돌아가면 다시는 과거를 찾을 기회가 없을 것이다. 그는 사파이어를 이전 주인처럼 학대하지는 않겠지만 안락한 새장 안에 갇혀 평생을 지내야 할 것이다. 그런 삶을 원하는가? 아니. 전혀.
알료샤를 떠나면 어떻게 될까. 알료샤는 크게 상처받겠지. 사파이어도 더 이상 알료샤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물질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알료샤가 경고한대로 묻어두었던 기억이라는 망령이 그를 물고 늘어지겠지. 고통스러운 작업이 될 것이다.
하지만……. 가치 있지 않을까?
알료샤는 거의 울 것처럼 보였다. 그는 직감적으로 사파이어가 떠날 거라는 걸 알았다. 가지 말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언젠가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평생 남을 상처 입히면서 이렇다 할 감상은 느껴보지 못한 사파이어였지만 알료샤의 그런 모습은 뭐랄까, 명확히 표현할 순 없지만 마음 속 어딘가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알료샤를 상처 입히는 건 사파이어가 의도한 바가 아니다. 그처럼 사파이어에게 잘해 준 사람이 없다. 사파이어는 자신의 방식대로 알료샤를 배려했다.
사파이어가 웃던 것을 멈추고 평소와 다름없이 진중한 얼굴로 돌아와 악수하듯이 말했다.
“또 만나지.”
그것이 사파이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인사였다. 사파이어는 달려오는 알료샤를 등지고 떠났다. 알료샤는 불타는 나무를 빙 둘러 돌아가려고 했지만 불길은 다른 건축물의 붕괴도 가속화하고 있어 점차 장애물이 되어 쓰러지는 것들이 많았다. 불의 장벽은 갈수록 두꺼워져갔다.
“가지 마!”
알료샤가 사파이어의 등에 대고 소리쳤다.
“가지 마! 떠나지 마! 내가 보호해 줄 수 있단 말이야! 내가 지켜줄 거야! 제발 가지 마! 나만 봐주면 돼! 당신 말고는 없단 말이야! 당신이 내 짝이야! 당신이, 유일하게…….”
사파이어가 걸음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알료샤는 불붙은 나무를 기어올라서 건너가려고 했다. 부하들이 뜯어 말리지 않았으면 그는 불에 타서 죽었을 것이다.
사파이어가 사라져가는 모습을 오래도록 두 눈에 담으며 알료샤가 울음을 터뜨렸다. 이번에는 템즈 강에서 즉흥적으로 연기했던 것과 다르게 진짜 오열이었다. 세상을 잃어버린 자의 눈물이었다.
세상의 왕이 되려던 소년은 그리스의 바다에서 가장 값진 보석을 잃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