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몰락
이 왕국, 이 장엄한 땅, 이 낙원,
질병과 전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도록 자연이 만든 이 성채,
이 행복한 사람들, 이 작은 세계,
바다 위에 있는 고귀한 보석 같은 이 섬,
덜 축복받은 나라들의 시기와 질투로부터 성벽과 해자를 두른 듯 자신을 지키는,
이 축복받은 나라, 이 잉글랜드,
이 젖과 꿀이 흐르는 왕들의 고향,
신앙적인 행위로 두려움과 존경을 받는 이 왕들,
이 선량한 사람들의 땅,
이 사랑스러운, 사랑스러운 땅은, 이제 망해버렸다.
그리고 난 그 꼴을 지켜보며 죽어가고 있다.
- 윌리엄 셰익스피어, 희곡 리처드 2세 中 랭카스터 공작 곤트의 존의 유언
“아, 대륙 것과 중국 개로군. 토마스 크로포드였던가? 그런 이름이지 않았나? 괴상한 이름으로 바꾸었군. 벤체슬라스? 그거 크리스마스 캐롤 아닌가?”
런던의 정보상이 쾌활하게 인사했다.
“요새는 나가려는 사람은 많아도 들어오려는 사람은 없어서 말이야. 브렉시트 때문에 좀 어수선하긴 해도 아직 살만하다네. 인종차별은 신경 쓰지 말게. 저런, 기분 나빴나? 그냥 받아들여.”
사파이어는 반응이 없었고 벤체슬라스는 무표정을 가장해야만 했다.
“협회에 마지막 동전 한 푼까지 탈탈 털린 세공사가 있다던데 그게 자네인가?”
“맞습니다.”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밀라노에서 이탈리아 세공사들과 전면전을 벌인 미남 신부가 있었다던데 혹시 자네인가?”
“네.”
“하하하하, 무슨 재주로 바티칸을 속였는지 궁금하구만. 성직자라니. 기발해. 어쨌든 이제 걱정은 말게. 섬은 대륙과 다른 법이 적용되니까. 이 땅에선 이 땅의 규칙만 잘 지켜주면 문제될 건 없을 거야.”
정보상이 너무도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렸기 때문에 벤체슬라스는 점점 부글부글 끓는 속을 숨길수가 없었다.
정보상이 대놓고 비웃는다고 해도 벤체슬라스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정보상이 바닥에 돈을 뿌리고 주우라고 굴욕을 줘도 얌전히 바닥을 더듬어야 할 처지였다. 다행히 정보상은 그 정도까지 무안을 주지는 않았다.
“뭐 어쨌든 이곳에선 자네가 누구인지 상관없다네. 영국에서의 기록은 깨끗하니까 대륙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알 바 아니지. 다시 한 번, 알비온에 온 걸 환영하네.”
벤체슬라스는 독일에서의 재산을 완전히 정리하고 영국으로 넘어왔다.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 큰 집을 더 이상 유지할 돈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고 떠난 집사가 언제 입을 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었다. 집사는 입을 다물겠다고 했지만 아무것도 믿지 않는 벤체슬라스가 당연히 인간의 불확실성 따위를 믿을 리 없다.
또, 독일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만큼 스위스에서 있던 일은 빠른 속도로 독일에 퍼져 벤체슬라스를 백안시 하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금력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남자였다. 인품과 존경마저도 돈으로 샀기 때문에 그것이 사라지자마자 원하든 원하지 않던 사방이 정말로 적이 되어버렸다.
독일 세공사들은 큰 건수만 물어가던 외지인을 처음부터 좋아하지 않았고 이제는 대놓고 건드릴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위치가 낮아져버렸기 때문에, 주저 없이 벤체슬라스에게 시비를 걸었다.
협회가 두 눈을 부릅뜨고 세공사끼리 분쟁이 일어나지 않는지 살폈기 때문에 스위스에서처럼 요란한 싸움이 벌어지진 않았다. 하지만 벤체슬라스는 배제됐다. 도태됐다. 그에게 일거리를 주려는 사람은 없었다.
가만히 앉아서 남은 재산만 까먹을 순 없기 때문에 벤체슬라스는 일단 부동산부터 정리했다.
집이 좁아지면 어차피 차를 둘 공간도 없어질 것이기 때문에 포르쉐는 팔고 벤츠만 남겼다. 같은 이유로 수납공간도 적어질 것이기 때문에 수백 벌의 의상 중 30여벌만 남기고 나머지도 모두 처분했다.
벤체슬라스가 금괴 같은 것을 모아두고 있던 것이 불행 중 다행이다. 협회가 잔고를 싹싹 긁어가기는 했어도 금괴는 벤체슬라스가 실물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만큼은 온전히 남았다.
급하게 처분했기 때문에 거의 헐값이었다. 런던으로 이주하고 나서는 이전 같은 저택 생활은 꿈도 꾸지 못했다.
방이 여러 개 딸린 80만 파운드짜리 아파트를 구했는데 살인적인 런던 집값 때문에 원래 가치보다 훨씬 고평가된 집이었다. 그 정도 값어치를 가지는 집은 아닌데 런던에 살려면 울며 겨자 먹기로 잡는 수밖에 없었다.
방이 하나하나 좁다는 것도 악몽 같은 요소였다. 벤체슬라스가 여태까지 살던 집들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거지소굴이었다.
벤체슬라스는 히드로 공항에 내려서는 순간부터 긴 머리를 한데 모아 질끈 묶고 발 빠르게 돌아다녔다. 예전에 영국에서 활동한 적이 있으니 그 때 인맥이 아직 남아있는지 확인했고, 런던의 정보상에게 얼굴을 비추러 갔다.
영국은 옛날부터 유럽 대륙과 묘한 거리감이 있었다. 자기들만의 독자적인 세계가 있어서 대륙에서 있었던 일이 영국에서는 아주 무시되는 경우도 많았다. 명성이든, 악행이든.
정보상 말마따나 브렉시트 때문에 사람들이 대거 탈출하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영국은 일거리가 많은 곳이었다. 증오가 많은 곳엔 암살자들의 일거리가 많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유럽 다른 곳만큼 커다란 금액이 달린 의뢰보다는 사소한 복수극 따위가 주 내용인 소액 의뢰가 많았지만, 일 자체가 많다는 게 축복 아닌가. 벤체슬라스처럼 남들에게 기피 받고 일거리를 따내지 못하는 상태의 세공사라면 더더욱 그랬다.
영국으로 거처를 옮기는데 주저함이 없었던 건 아니다. 벤자민 로빈스 암살과 MI6요원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었고, 증권거래소에는 아직 벤체슬라스의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유럽에서 더 이상 발붙일 곳이 없게 된 걸까? 프랑스에는 아직 A1 고속도로 난동으로 벤체슬라스의 인상이 강렬하게 박혀 있을 것이고 이탈리아는 말하지 않아도…….
스페인과 포르투갈 쪽은 외지인에 대한 배척이 심해서 후보에 올려놓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동구권 쪽으로 가자니 그 쪽은 정부의 입김이 너무 심하다. 알료샤의 놀이터라는 건 말할 것도 없고.
북유럽은 어떨까. 인구수가 적고 조용한 동네다. 범죄율이 낮은 만큼 사건을 은폐시키려면 더 많은 돈이 든다. 물가 때문에 다른 나라의 몇 배는 더 든다. 의뢰의 양 자체는 적다.
터키도 생각해봤다. 터키.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하지만 터키는 세속국가라는 이름으로 공격받아도 결국 이슬람권이기 때문에 그 쪽 암살단이 빈틈없이 시장을 차지하고 있다. 유럽의 조무래기가 발을 붙일만한 곳이 아니다.
갈 곳이 영국밖에 없었다는 거다.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일과를 모두 끝내고 아파트로 돌아온 벤체슬라스는 머그컵 한 가득 따뜻한 밀크티를 들고 창가에 섰다. 돈을 아껴야했기 때문에 찻잎 같은 사소한 것에도 변화가 생겼다. 마트에서 사 온 피지팁스(PG Tips)의 티백이 잔 안에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정말 강한, 강한 카페인이 필요했다. 변덕이 심한 하늘은 언제 비를 쏟아내려는지 알려주지 않고 어둑하게 인상을 찌푸리고만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고집스럽고 지긋지긋한 날씨다.
자, 다시 밑바닥부터 시작이다.
“당신이 벤체슬라스?”
여자의 목소리는 기품이 있으면서도 강단이 있었다.
여자는 일부러 얼굴을 꾸미지는 않았지만 목걸이나 브로치 같은 장신구로 자신이 어느 위치에 있는 사람이고 어떤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 확실하게 드러냈다. 향수도 경박하지 않고 절제되고 은은하게 뿌렸는데 수수해보이지만 단정하고 격식 있는 옷차림과 어울려 여자가 권위 있는 사람임을 보여주었다.
벤체슬라스는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18세기 어느 유럽 궁정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예의범절에 여자는 그저 절제된 미소로 답해주었다.
“당신이 파는 사파이어가 유명하다고 들었는데요.”
“알아주시니 감사합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죠. 난 경호원이 필요합니다. 보수당 의원과 만나야 하는데 사적인 만남이 될 겁니다. 눈에 띄게 몇 명이나 데리고 다닐 수 없어요. 당신은 확실하다고 들었는데요?”
“그게 제가 파는 서비스입니다.”
“당신의 사파이어는 동양인이라고 들었는데 이게 파파라치들에게는 좋은 먹잇감이 될 것 같군요. 인종에 필요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이 많아서요.”
“그 말인즉슨?”
“당신을 사려면 얼마가 듭니까?”
“저는 세공사입니다만.”
“그래요. 보석 세공사. 당신의 손을 사려고 합니다. 당신의 기성품이 아니라.”
“제 말은, 부인.”
“나는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실례했습니다. 여사님. 세공사들은 직접 일을 처리하지 않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습니다.”
“비싸게 구는군요.”
“조금만 더 들어주십시오. 편법이 있습니다. 사파이어를 구입해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현장에서 품질을 관리해드리겠습니다.”
여자는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벤체슬라스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하고 웃었다.
“업계 규칙이라고 하지만 허술하기 짝이 없군요.”
“완벽한 규제는 없으니까요.”
“좋습니다. 당신의 사파이어를 구입하겠습니다. 보수당 의원과 만날 때 착용할 브로치가 필요하군요.”
“구입 결정 감사드립니다.”
“영어가 나무랄 데 없는데요. 제대로 교육받았군요.”
외국인치고는.
벤체슬라스는 영국에서 살았다는 말을 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한 때 국적이 영국인이었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여자는 너무나도 이국적인 그의 이름을 보고 지레 외국인이라 짐작했을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벤체슬라스는 어느 나라를 가든 외국인이다. 이름과 신분은 가면같이 바꿔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억양은 좀 고치는 게 좋겠습니다. 경호원이 이튼스쿨 출신처럼 보이면 꽤 눈에 띌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코크니 억양은 어떠신지? 이대로 말하면 되겠습니까?”
“훌륭해요.”
“그럼 이대로 하겠습니다.”
벤체슬라스가 중간부터 억양을 바꿔 말하자 여자는 솔직하게 칭찬했다. 원어민이 들어도 감탄할 만큼 완벽했다.
“그럼 주문하신 사파이어 브로치를 들고 다시 방문하겠습니다. 시간 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벤체슬라스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깍듯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사파이어는 건강을 회복했다. 멍은 다 사라졌다. 상처도 아물어서 희미한 자국만 남게 되었고. 말랐던 몸도 다시 보기 좋게 근육이 올랐다.
지금까지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실전에 투입되지 않았고 트레이닝만 반복했다. 꽤 오랫동안 총을 잡지 않았지만 사격실력은 전혀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근접전에 대한 기억이 가물가물하기 때문에 칼은 다시 잡아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사파이어가 발목을 묶고 윗몸 일으키기를 30개쯤 하고 있을 때 벤체슬라스가 아파트로 돌아왔다. 이제는 따로 살 집을 마련할 형편도 안돼서 좋든 싫든 둘은 한 집에서 살아야했다. 각자 방이 따로 있기는 하지만 워낙 좁기 때문에 체력 단련은 거실에서 하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벤체슬라스가 사파이어를 슥 내려다보더니 말했다.
“다리는 풀어.”
벤체슬라스는 이제 사파이어가 부상을 입을 가능성까지 통제하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지금 그의 손에 들린 유일한 보석이다. 보석세공인이 보석 없이 무슨 장사를 하겠다는 건가?
이전에는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위험한 임무를 맡으며 아무렇지 않게 사파이어를 사지로 몰아넣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그런 일거리를 벤체슬라스 쪽에서 거절하고 있었다.
다시 보석을 키울 여력이 없다. 그가 부서져버린다면 벤체슬라스는 또 다시 자기 발로 뛰는 수밖에 없고 길거리 시정잡배와 다를 바 없는 프리랜서 킬러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그게 싫으면 옛 이름을 써가며 알료샤처럼 자신이 직접 일을 따내고 수행하고 돈까지 받아내는, 세공사이자 보석인 존재가 돼야하는데 그런 타협은 하기 싫었다. 그런 모멸감은 인생에 한 번으로 족하다.
공장장이 작업복을 입고 기름때를 묻혀가며 기계를 돌리고 있으면 다른 공장장들이 사교모임에 끼워주지 않으려 하는 게 당연하다. 알료샤는 아예 모든 사람을 공장 노동자로 만들려는가본데, 말도 안 되는 소리.
냉전의 결과가 증명하지 않았는가. 공산주의는 망했다. 인간은 남들보다 잘 살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본능이다. 사람은 못 먹는 것보다 다른 사람보다 못한 것을 먹는 걸 더 고통스러워한다. 벤체슬라스의 인생으로 체득한 것이다. 열등감은 힘이 세다.
이대로 굴러 떨어질 순 없다. 종자돈이 모이면, 사파이어를 잃어도 다시 재기할 수 있는 돈이 모이면 또 한 번 커다란 일감들을 물고 다닐 것이다. 그때까지 인내한다. 할 수 있다. 이미 한 번 해냈으니까.
사파이어가 자신이 시키는 대로 발목의 끈을 주섬주섬 푸는 것을 본 벤체슬라스가 그를 스쳐 지나서 다른 방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 때, 사파이어가 그를 잡아 세웠다.
소리 내서 무언가를 말하지는 않았지만 눈빛만 봐도 뭔가를 말하고 싶어 한다는 걸 안다. 의뢰나 돈벌이에 대해 몰두하고 있던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가 원하는 것을 선뜻 말하지 못하고 주저하자 짜증을 냈다.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허락해주시면…….”
“뭐?”
“혼자서 풀 수 있게 허락해주시면.”
벤체슬라스는 상황파악이 됐다.
“언제부터 부끄러움을 탔지?”
벤체슬라스가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 내리며 사파이어를 잡고 일으켜 세웠다. 눈을 보니 그는 부끄러워한 게 아니다. 벤체슬라스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러워하고 있었다.
독일에서 영국으로 이주해오고 집을 구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일거리를 따오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조금 신경질적으로 굴었을지도 모른다. 사파이어는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요 며칠간 그에게 관심을 쏟지 못했지. 먹이를 주지 않으니 개도 슬슬 안달이 나서 빈 밥그릇을 물고 주인 앞으로 오는 것이다.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를 끌고 욕실로 들어갔다. 어차피 자신도 씻어야 하고, 사파이어도 땀을 흘렸으니 샤워해야 한다. 욕실에서 범하면 뒤처리가 편하긴 하다. 콘돔과 윤활유는 집안 곳곳에 놔두었다. 콘돔은 자신을 위해서, 윤활유는 사파이어를 위해서.
샤워기에서 뜨거운 물이 쏟아졌다. 변덕스러운 날씨와 으슬으슬한 추위에 지쳐 있던 근육이 물줄기에 풀어졌다. 사파이어는 꽤 오랫동안 안달이 나있었는지 벤체슬라스의 손길이 닿자 달아오른 신음을 흘렸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자신을 고문실에 가두고 오랫동안 성고문 한 사람에게 다시 몸을 맡기려들지는 않겠지. 사파이어가 벌을 받는 방법과 마찬가지로 상을 받는 방법도 이것 하나였기 때문에 결국엔 다시 주인의 손을 갈구하는 수밖에 없다.
이전 보석들을 키울 때 벤체슬라스는 여러 가지를 통제해봤다. 처음에는 미숙해서 멍청한 짓도 많이 저질러봤다.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요소는 제한하면 안 된다. 가장 쉬운 방법이지만, 보석의 품질과 완성도가 떨어지게 된다. 이를테면 이런 적이 있다.
그가 첫 보석을 세공할 때의 이야기다.
인간의 의지를 꺾고 비정상적인 일을 수행하게끔 세뇌하는 데는 의식주를 제한하는 간단하고 효과적인 방법이 있다. 그 당시에 벤체슬라스는 식사를 보상으로 주었다. 산상노인이 하시시를 보상으로 암살자들을 세뇌시킨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큰 오산이었다.
처음에는 제법 괜찮게 시스템이 돌아가는 것 같았다. 약간만 굶기면 말을 잘 듣고, 절박해질 정도로 허기가 지면 뭐든 하게 된다. 당분을 제한하다가 보상으로 당분을 주면 그것도 상당히 효과가 좋다.
정말이지, 디저트는 효과가 좋았다.
물론 뒤룩뒤룩 살이 찌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잡동사니가 되어버리니 당분으로 섭취하는 칼로리를 계산하면서 식사량을 더 줄였다.
제대로 먹이지 않는 군마는 달리지 못한다. 말 그대로 밥을 걸고 싸우던 암살자는 얼마 안 가서 실수를 하기 시작했다. 실수에는 교정을 위한 벌이 있어야한다. 상을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래서 굶겼다.
실수는 더 늘었다. 더 굶겼다. 암살자는 결국 죽고 말았다. 첫 보석을 어이없게 깨뜨리고 나서 벤체슬라스는 자신이 미숙했다고 인정했다. 그래서 음식만큼은 절대 건드리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 다음 보석은 잠을 제한했다. 나름대로 괜찮은 방법이다. 자백을 받아내는 용도라면.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긴장과 흥분 속에서 일반인을 훨씬 웃도는 운동량을 소화해야하는 암살자에겐 썩 좋지 않은 방법이다. 먹을 것은 풍족하게 주었지만 잠을 제한하면서 복종시켰기 때문에 피로는 점점 쌓여갔고, 벤체슬라스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 암살자는 진짜로 미쳐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헛것을 보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러다가 환청을 듣더니, 피해망상에 시달려 벤체슬라스를 공격하려고 들었다.
처음 겪는 현상에 당황했던 벤체슬라스는 그를 곧바로 죽이지 않고 잠시 가둬두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는 동안 암살자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벤체슬라스는 잠도 건드리면 안 된다는 귀중한 교훈을 얻었다.
이런 실패들을 겪은 후에 그는 다른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먹는 것, 자는 것, 배설 같은 욕구들은 제한을 둬선 안 된다. 목적이 고문이라면 몰라도 수단으로 쓰기에는 정말 멍청한 짓이다.
그렇다면 사람을 꺾고 부러뜨려서 왜곡시킬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욕구는 아니지만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욕구들. 의외로 간단한 방법이 있었다. 성욕이었다.
벤체슬라스로서는 획기적인 생각이었다. 사실 그는 보석에게 필요 이상의 식비나 다른 경비가 나가는 것도 아까웠다. 보상으로 물질을 주기 시작하다보면 보석도 인간인 이상 더 좋은 품질을 계속 원하게 된다. 들어가는 돈이 많아지는 것이다.
그에 반해 성욕은 손쉬웠다. 한계까지 참게 했다가 풀어주면 된다. 단 한 푼도 들지 않고, 최고의 보상이다.
벤체슬라스가 여자 보석을 키우지 않는 건 이것 때문이었다. 임신해버리면 골치가 아파진다. 점점 무거워지는 몸은 어떻게 할 것이며, 낙태를 시킨다고 해도 몸에 무리가 많이 간다. 전투능력이 떨어지면 보석으로서의 값어치가 사라지게 되는 셈인데 그렇다면 성욕으로 보상해주기엔 적절치 않고 뭔가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돈이 나가는 다른 방법.
아무래도 그것만큼은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남자들만 골라서 장기말로 쓰기 시작했다. 어떤 식으로 몸을 망가뜨려놔도 적어도 임신할 걱정은 없다. 피전 블러드를 보고 나서야 저런 가능성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이 바뀌었지만 그 당시 벤체슬라스가 생각해 낸 최고의 방법이란 결국 성욕이었다.
그래서 그는 남자들을 범하기 시작했다.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원래부터 남자의 손길에 반응하는 사람이든 아니든, 결국에는 모두가 벤체슬라스에게 굴복했다. 성욕이 원래부터 별로 없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늘려놓으면 그만이니까. 사파이어가 그 증거다.
사파이어를 처음 길들일 땐 꽤 고생을 했다. 뇌구조부터가 일반인과는 많이 달랐기 때문에 성욕으로만 굴복시키기도 힘든 일이었다. 어쩔 수 없이 쓰지 않기로 한 필수 욕구들을 건드려야만 했다.
그럼에도 그는 단단했다. 내 것으로 만들기까지가 험난했던 만큼 노예로 만들고 나니 현재까지 만들었던 것 중에서 가장 괜찮은 작품이 나왔다.
처음에 그가 견딜 수 없어했던 것은 벤체슬라스의 손이었다. 벤체슬라스는 매춘부를 살 생각이 전혀 없었다. 돈을 들이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대신 파는 것인데 보석이 꺾이지 않는다고 여자를 붙여주면 어떻게 되겠는가?
지금 생각해보면 여자의 손길이 닿는다고 해서 이 굳건했던 남자가 반응했을까도 의문이다. 생물학적인 이유로 자극에 반응을 하기는 하겠지. 그러나 그는 여자의 몸에 미칠 것 같지는 않아보였다. 그때부터 그런 공허함이 있었다.
그런 그도 삶의 모든 것을 하나씩 차근차근 부서뜨리자 결국 남은 건 성욕이라는 자극밖에 없게 되었고, 집착하게 되었다. 그것마저 없으면 그는 시체다. 벤체슬라스는 그의 절대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하나밖에 없는 욕구를 무한대로 늘려놓는 건 정말 쉬운 일이다.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의 성기를 부드럽게 쥐었다. 오랜만의 자극 때문인지 성기는 이미 꼿꼿이 서 있었다. 천천히 기둥을 만져주는 것뿐인데 벌써부터 귀두 끝으로 액이 몽글몽글 맺혀 나오고 있었다.
많이 참았군. 애매하게 운동을 하다가 말아서 돌기 시작하다 목적지를 잃고 전신에 퍼져있던 피가 전부 하반신으로 쏠렸다. 벤체슬라스는 그 단단한 살덩이를 수음해주며 엉덩이 사이로 손을 파고들었다.
아직 엉덩이에 손대는 것은 두려운지 사파이어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저항은 없었다. 벤체슬라스의 손가락이 단단한 엉덩이 틈새를 벌리고 그 사이에 있는 연한 살점과 주름을 느긋하게 지분거렸다. 난롯가에서 잠든 개의 귀를 깨지 않도록 만지작거리는 주인의 손길과 비슷했다.
보기 드문 다정한 애무다. 사파이어는 벤체슬라스의 어깨에 매달려 움찔움찔 거리다가 얼마 안 가 길게 사정했다.
그의 어깨에 매달린 채 허리를 굼실굼실 떨면서 격한 숨을 몰아쉬던 사파이어는 주인이 입술을 탐해오자 지그시 눈을 감았다. 온 몸이 상처투성이인 흉기 같은 남자에게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요염함이었다.
“한 번으론 부족하지?”
벤체슬라스가 귓가에 대고 속삭이자 사파이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벤체슬라스는 항문을 지분거리던 손가락을 떼고 사파이어의 허리에 손을 감았다. 그리고 샤워기를 끄고 물이 뚝뚝 떨어지는 채로 욕실에서 나왔다.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를 침대에 눕히고 다리를 벌려 그 사이로 들어갔다. 삽입을 하려는 건가 싶었는데 길고 고운 머리칼이 허벅지에 닿았다. 주인의 머리통이 가랑이 사이에 푹 파묻히면서 아직 반쯤 서 있는 사파이어의 성기가 뜨거운 입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당연히 남자 것을 입에 무는데 거부감이 있다. 그래도 지금 사파이어를 그냥 뚫어버리는 건 별로 세심하지 못한 처사다.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를 조심스럽게 다루었다. 뜨거운 입안이 고통에 가까운 자극을 준다는 것도 잘 알아서 입 안 가득 물었다가 빼내고, 입술 끝으로 살짝살짝 물고, 기둥뿌리부터 귀두 끝까지 쓰윽 핥아 올리면서 애태웠다. 그러면서도 금방 사정하지 않게끔 완급 조절을 해서 사파이어는 머리가 붕 떠버리는 것 같았다.
창 밖에 내리던 비는 거센 폭우로 변해 있었다. 기압이 육신을 짓누른다. 느릿하게 퍼져가는 쾌감은 마약처럼 신경 사이사이로 파고든다. 가랑이 사이로 들썩거리는 머리통을 보는 것은 강렬하게 선정적이었다.
다른 사람의 것을 입으로 봉사해주고 있음에도 벤체슬라스가 굴욕적인 입장은 아니었다. 뭐라고 할까, 잡아먹는 것처럼 보였다.
사파이어가 다리를 꿈틀거리며 몸을 빼려고 하자 벤체슬라스의 손이 사파이어의 허벅지를 단단히 감고 끌어안았다. 아플 정도로 꽉 조이지는 않았다. 사파이어가 도망치지 못할 정도만 힘을 주었다.
성기를 빠는 자극은 더 빠르고 격렬해지는 일 없이 여유로워서 사파이어는 침대 시트를 쥐며 허리를 뒤틀었다. 천천히 달아올랐다. 사정의 순간 역시 극적이지 않고 오래 참았던 것을 그저 긴 여운을 즐기며 내뿜을 뿐이었다.
“아읏……. 아아아…….”
사파이어에게서 만족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가슴이 들썩거리며 산소를 갈구하고 있었다. 벤체슬라스는 입 안에서 꿈틀거리며 마지막 한 방울까지 쏟아내는 것을 곧바로 뱉어내지 않고 잠시간 그 상태로 가만히 있었다. 꿀꺽꿀꺽 하는 것을 보니 흘리지 않고 받아 마시는 모양이었다.
벤체슬라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혀끝을 내밀어 입술만 쓰윽 핥았다. 입술에 남아있는 잔여물을 핥는 것이지만 마치 먹이를 집어삼키고 혀를 날름거리는 뱀처럼 보였다. 탐욕스럽게 체액을 집어삼켰음에도 벤체슬라스는 여전히 깨끗해보였다. 완벽하고 틈이 없는 남자.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가 아직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 아마도 사파이어를 이 세상에 낳아준 부모보다도 더 잘 알겠지. 그에게 육신을 준 사람들보다도.
벤체슬라스가 사파이어의 한 쪽 다리를 잡고 들어 올려 어깨에 메자 자연히 사파이어가 아래로 질질 끌려 내려갔다. 무의식적으로 침대를 기어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려고 하자 벤체슬라스가 몸을 지그시 눌러 그를 압박했다. 그리고 키스를 해왔다.
사파이어는 자신의 맛이 나는 키스를 받아들이며 주인이 질질 끌고 내려가는 대로 몸을 맡겼다.
벤체슬라스는 입술을 떼고 기다란 중지를 사파이어의 입 안에 넣었다. 그의 치열과 입천장을 더듬으며 끈적할 정도로 침을 묻혔다. 사파이어는 주인의 손가락을 유혹적으로 빨아대면서 간청하듯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벤체슬라스는 중지로 사파이어의 혀 밑까지 지분거리다가 손가락을 빼냈다.
벤체슬라스의 손가락이 엉덩이 사이를 파고들었다. 침을 잔뜩 묻힌 손가락이 벌름거리기 시작한 항문 안으로 쉽게 들어갔다. 그 많은 고통을 겪었음에도 그의 몸은 아직도 뜨겁고 탄력적이었다.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의 몸 안을 익숙하게 더듬었다. 전립선의 위치는 굳이 찾아내지 않아도 알고 있을 정도로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주름이 어떤 모양인지, 어떻게 흥분하면 어떤 식으로 조여드는지, 절정에 다다를 땐 어떤 습관이 있는지, 어떻게 긁어줘야 좋아하는지, 모두 알고 있었다. 미칠 듯이 좋으면 아기처럼 발가락을 오므린다는 것도.
벤체슬라스가 몸 안을 긁기 시작하자 사파이어가 끙끙거리는 신음을 흘렸다. 벤체슬라스는 몸 안의 포인트를 꾸욱 누르며 손가락을 하나 더 집어넣었다. 두 손가락으로 부어오르기 시작한 곳을 비비고 문지르자 사파이어가 비명 비슷한 소리를 내며 파드득 다리를 떨었다.
벤체슬라스는 천천히 내벽을 문질러주며 사파이어가 절정에 다다를 때까지 마사지를 계속했다. 느긋하게 달아올랐던 것만큼 식는 속도도 느렸기 때문에 사파이어는 몇 번이고 드라이 오르가즘에 떨었다. 사파이어가 지쳐서 곯아떨어질 때까지 핑거링은 계속됐다.
헐떡이던 사파이어가 더 이상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자 벤체슬라스는 손가락을 빼내고 그의 다리를 어깨에서 내려주었다. 그런 다음 체액을 잔뜩 흘린 그의 몸을 젖은 수건으로 정성스레 닦아주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벤체슬라스의 바짓단은 팽팽하게 부풀어 올라 있었지만 굳이 쌓인 열기를 빼내려고 하지는 않았다. 손가락으로 쑤셔준 것만으로도 사파이어는 당분간 만족할 것이다. 개를 배불리 먹인 다음에 벤체슬라스는 침대 옆 작은 탁자로 가서 앉았다.
발기한 것이 성가시긴 했지만 내버려두면 잦아들 것이다. 쓸데없이 빼내는 건 아까운 짓이다. 정액도 체력도 자원이니까.
벤체슬라스는 싸구려 레드 와인을 한 병 땄다. 복잡한 향미는 없는 단순하고 직선적인 와인이었다. 싸구려지만 묵직함만큼은 칭찬할만한 수준으로, 폭우가 쏟아지는 밤에 그를 달래줄만한 술이었다.
한 잔은 잠든 사파이어를 보며 마셨다. 가득 따랐던 잔은 금세 비워졌다. 벤체슬라스는 또 한 잔을 따라내서 이번에는 창밖의 비를 내다보며 홀짝였다. 런던의 비는 고독한 남자를 창 안으로 들여다보며 쏟아지고 있었다.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를 데리고 의뢰인을 방문했다. 의뢰인이 명목상으로 사파이어를 구입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무장 없이 데려온 것은 아니다. 사파이어 역시 눈에 띄지 않는 영역에서 임무를 수행할 예정이었다.
얼핏 보면 그냥 라이더 수트처럼 보일 뿐인 검은 방탄 수트와 철제 너클, 접이식 톤파 두 자루가 사파이어의 무장이었다. 총기는 지급하지 않았다.
벤체슬라스는 수수한 검은 정장차림이었다. 눈에 띄지 않는 무명 브랜드에 검은 넥타이. 눈에 띄는 머리칼 때문에 다른 사람의 기억에 쉽게 남는다는 것도 알아서 선글라스까지 썼다. 권총 두 자루, 접이식 삼단봉, 그리고 발목에 숨겨놓은 버터플라이 나이프가 무장이었다. 벤체슬라스는 단순한 경호원처럼 보일 것이다.
그들을 경호원으로 고용한 여자는 노동당 의원으로, 오늘 보수당 의원과 만나기로 한 것은 다른 사람에게 알려져선 안 되는 사안이었다.
“말씀드린 사파이어 브로치입니다.”
벤체슬라스가 여자에게 사파이어를 보여주었다. 벤체슬라스를 기다리고 있던 여자는 사파이어에게 의례적인 인사를 하려다가 말고 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시간이 길어지는가 싶더니 여자의 얼굴 표정이 변했다. 놀란 얼굴이었다.
“왜 그러시죠?”
벤체슬라스가 물었다. 사파이어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여자의 표정 변화에 의아해할 뿐이었다. 여자는 벤체슬라스와 사파이어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여자는 뭔가가 미심쩍은지 자꾸만 사파이어를 들여다보았다. 사파이어는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지만 벤체슬라스는 재빨리 그를 자신의 등 뒤로 빼냈다.
“그는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봉사할겁니다. 경호는 제가 하겠습니다.”
“좋아요.”
“준비 되셨으면 출발해도 되겠습니까?”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벤체슬라스가 신호하자 사파이어는 미리 지시받은 대로 사라졌다. 그는 이제 그늘에서 방해 요인들을 제거할 것이다. 벤체슬라스는 여자의 옆에 붙어서 진짜 경호원처럼 파파라치들이나, 파파라치를 가장한 깡패들을 제거할 예정이었다.
벤체슬라스는 아무래도 여자의 반응이 신경 쓰였다. 예상치 못한 자극은 벤체슬라스가 통제해서 사파이어에게 영향을 주지 못하도록 막는 편인데 이번엔 의뢰인이라서 딱히 방법도 없었다. 벤체슬라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까 왜 그를 보고 놀라셨습니까?”
“아니, 내 착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잊어주세요.”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아는 얼굴 같아서……. 잠깐 놀랐을 뿐입니다. 하지만 다른 인종이라 비슷한 얼굴을 내가 착각한 것일 수도 있구요. 인종이 다르면 기억하기가 쉽지 않으니까.”
벤체슬라스의 뒷골이 따끔거렸다. 여자는 사파이어의 정체를 알고 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는 킬러입니다. 여사님이 알고 계시는 분과는 비교할 수도 없겠죠. 그는 밑바닥 인생입니다. 비슷하게 생긴 사람은 얼마든지 있잖습니까.”
“그래요……. 내 착각일겁니다. 깊게 받아들이지 마세요.”
벤체슬라스는 돈을 위해서 이번 일을 맡았지만 두 번 다시 이 여자에게는 의뢰를 받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너무 위험했다.
일은 순조롭게 끝났다. 벤체슬라스는 일반인으로 가장하고 접근해오는 놈들을 교묘하게 때려눕혔다. 두 의원이 만나서 무슨 얘기를 나눌 건지는 몰라도 아마 그들 사이에 어떤 합의가 맺어지면 손해를 볼 사람들이 있겠지. 그들이 보냈음직한 깡패들이었다.
의외로 직접적인 공격은 들어오지 않았는데, 사파이어가 지붕 위로 그들을 따라다니면서 미리미리 제거했으리라고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벤체슬라스는 무력은 물론이고 에티켓 면에서도 나무랄 데가 없어서 의뢰가 끝날 때쯤 여자는 벤체슬라스의 서비스를 재구매할 의사가 확실히 생겼다. 벤체슬라스 쪽에서 거절할 테지만.
“여성을 모시는 게 아주 능숙하군요.”
“감사합니다.”
“혹시 다른 서비스직에도 몸담지 않았던가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글쎄, 그런 태도가 느껴져서……. 오해하게 해서 미안합니다.”
“아뇨. 오해가 아닙니다.”
벤체슬라스는 흘러내린 선글라스를 다시 고쳐 쓰며 어딘가 숨어 있는 암살자가 있지 않나 골목골목을 살폈다. 위험 요소는 없었다.
“여사님이 짐작하신대로입니다. 지금은 판매하지 않습니다.”
“내가 짐작한 대로라면…….”
“네. 지골로였습니다. 신사와 숙녀, 모두를 모셨습니다. 제 경력 얘기는 이쯤해도 될까요?”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하군요.”
여자는 비록 자기도 모르게 침범하긴 했지만 그런 무례를 저질렀다는 것에 대해 스스로 상처받은 것 같았다. 벤체슬라스는 여자의 상처까지 보듬어 줄 수 있는 여유 공간이 없었다. 여자는 더 이상 사적인 질문을 하지 않았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품위 없고 부적절하다 느꼈기 때문에.
정작 벤체슬라스는 별 감흥이 없는 것 같았지만, 그것은 마치 스스로의 상처를 너무 오랫동안 봐왔기 때문에 남들 눈에 얼마만큼 처참하게 보이는지 알지 못하는 것과 같았다.
벤체슬라스에게 부끄러워해야 할 유일한 것은 돈이 없다는 것뿐이었다. 그것 외에 나머지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사파이어가 멀리 있어서 그들의 대화를 듣지 못한 게 다행이었다. 벤체슬라스도 그것을 알고 굳이 필요 없는 얘기까지 해주었다.
사파이어가 듣고 있었다면 절대로 꺼내지 않았을 이야기다. 그깟 일로 통제력을 상실할리는 없겠지만, 어떤 여지도 주고 싶지 않았다.
벤체슬라스는 의뢰를 완전히 끝마치고 나서 정보상에게 전화를 걸어 두 번 다시 이 의뢰인에게서는 일거리를 받지 않겠다고 말해두었다. 정보상은 이만큼 쉬운 난이도에 후한 보상을 주는 사람이 없다고 아쉬워했지만, 벤체슬라스 말고도 일을 원하는 사람은 많았기 때문에 알았다고 깔끔하게 대답한 후 전화를 끊었다.
집으로 돌아온 벤체슬라스는 샌드백 하나를 완전히 난도질 해놔서 걸레짝으로 만들어버렸다. 기분 나쁜 하루였다. 돈이 있었으면 피해갈 수 있는 불쾌였을 텐데 그러지 못해서 이 모든 것을 감당해야만 했다.
런던은 사파이어가 방문했던 어떤 도시보다도 혼란스러운 곳이었다. 파리도 상당히 혼란스러운 도시였지만 런던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도시 자체가 어딘가 세기말적인 불안감이 깔려있는 상황인 것도 그렇고, 세상에 대해 두텁게 두르고 있던 둔탁한 껍데기가 어딘가 얇아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전보다 모든 것이 좀 더 선명하게 느껴진다.
벤체슬라스는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사파이어에게는 이전만큼 관심을 쏟지 못했고 따라서 사파이어의 자유시간은 이전과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났다. 남는 시간 동안 사파이어가 하는 것이라고 해봐야 무기를 보강한다던가, 전투기술을 다시 점검한다던가, 체력을 단련하는 일 등이었다.
거리에 나가면 심심치 않게 시비가 걸렸는데 이전에는 아무 생각 없이 무시할 수 있는 것들이었지만 지금은 필요 이상으로 그의 신경을 자극했다. 그의 앞에서 원숭이 흉내를 낸다던가, 눈을 찢는다거나, 엉터리 중국어로 인사를 해온다거나…….
런던이 다른 곳보다 더 무례한 도시여서일까 아니면 사파이어에게 뭔가 변화가 생긴 것일까? 벤체슬라스에게는 이것을 말하지 못하고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는 매순간 무언가에 몰두하고 있었는데 금방이라도 어딘가로 떠나야 하는 사람처럼 초조해보였다. 타인의 감정에 둔감한 사파이어조차도 느낄 수 있는 불안이었다.
벤체슬라스는 이전만큼 큰 의뢰를 맡지 않았다. 일의 내용은 소소한 것이고 보상도 작다. 사파이어가 할 일도 적고, 따라서 사파이어가 받아야 할 밤의 보상도 작다. 정 참을 수 없으면 안아달라고 요청했지만 항상 무언가에 쫓기고 있는 벤체슬라스가 제대로 응해줄리 없다.
결국 사파이어는 남는 체력을 어떻게든 소진하기 위해 거리로 더 많이 나섰다.
템즈 강변은 사파이어의 혼란을 진정시켜주면서 더 증폭시키기도 하는 곳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강을 보면 마음이 편해졌다. 흐르는 물이라고 모두 좋아한 건 아니다.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강이어야 했다. 어쩐지 아주 익숙한 느낌이 든다. 확실한 건 자연은 말이 없다는 거다.
흐르는 물은 사파이어에게 말을 걸지 않았지만 강변에 정박해놓은 보트의 주인들은 매일같이 나타나는 동양인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삶이 팍팍해서 시비를 거는 사람도 있었고 단순히 자주 보이는 얼굴이라 친근감을 표하는 사람도 있었다.
사파이어는 그들 모두에게 대답하지 않았고, 곧 그는 누구에게도 호의를 사지 못하게 되었다.
집 대신 보트에서 사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 것도 처음 봤다. 늘어선 보트 사이로 유유하게 강물을 떠다니는 백조들의 모습도 생소했다. 그렇지 않아도 빈곤한 사파이어의 상식을 한층 더 의심하게 만들어주는 기인들의 행동까지, 명확한 정의가 사파이어의 교리라면 이 도시는 그것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죄악의 소굴이었다.
다른 사람의 행동양식을 관찰하기 좋아하는 사파이어에게도 이해하기 버거운 사람들이었다. 극히 상식적이면서도 비상식적이라고 할까. 전통을 소중히 여기는 만큼 전통을 깨버리는 독창성이 이 땅 여기저기에 널려 있었다.
도시 중심부는 그나마 사정이 나았다. 외곽으로 나가는 순간 사파이어는 정말 동물원에서 탈출한 진귀한 짐승처럼 구경거리가 됐다. 아이들의 관심은 성가시지만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었는데 노인들은 뿌리치기 곤란했다.
그에게 삿대질을 하는 영감부터 시작해서 어디에서 왔냐, 이름은 뭐냐, 영국에는 왜 왔냐, 무슨 일을 하고 있냐 등등 그의 신변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는 노인, 악의는 없이 그저 신기한 것을 보는 눈으로 그를 뜯어보다가 차 한 잔이나 파이 한 조각을 건네는 노파, 그의 앞에서 보란 듯이 침을 뱉고 멱살을 잡으려드는 정신 나간 노친네까지 총체적인 혼돈 그 자체였다.
사파이어가 할 수 있는 대응이라곤 전속력으로 도망가는 것뿐이었다. 벤체슬라스는 쓸데없는 시비에 시체처리업자를 고용할 만큼의 자금이 없다고 했으니까.
돌이켜 생각해보면 다른 나라에서도 이런 일을 겪지 않은 것은 아니다. 프랑스인들은 대놓고 귀찮게 굴었고 독일인들은 거리를 두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그 때는 그것들을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무시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온갖 것들이 그의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었다. 마취가 풀리며 날카로운 통증을 느끼기 시작한 것 같달까.
몇 번 봉변을 당하고 난 후에 사파이어는 번화가를 벗어나지 않게 되었다. 그의 작고 단순한 세계는 꿈을 꾸는 것처럼 행복으로 가득 차 있었다. 상과 벌이 있고, 명령과 복종이 있고, 그 뿐이었다. 그러나 꿈에서 깨고 나면 현실을 직시하게 되듯이, 바깥세상의 어지러운 모순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사파이어의 정신을 파고들었다.
요즘 들어서 자꾸 지나간 임무들이 떠올랐다. 가장 가까운 것부터 기억해낼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것까지. 뇌가 과거로 퇴행하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일을 끝마치고 나면 모든 것을 잊어버렸는데, 완전히 지웠다고 생각한 것이 사실은 머릿속 어딘가에 얌전히 잠들어 있다가 슬금슬금 새어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유쾌한 느낌은 아니었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섬뜩한 기억들도 있었다.
하지만 뇌 역시 몸의 다른 부분과 마찬가지로 관성이 있기 때문에 사파이어는 떠오르는 것들을 다시 진흙 바닥에 묻어두고 잊었다.
잊으려고 노력하니 금방 가라앉았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 평온한 상태가 잠깐 찾아오고 나면 런던의 혼란이 득달같이 달려들어서 다시 사파이어를 자극하는 식이었다. 그래서 기억이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진폭은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타워 브리지를 지나다가 다리 중간에 멈춰 서서 흐르는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던 사파이어의 등 뒤로 시끄러운 목소리들이 요란스레 침범해왔다. 듣기 싫어도 귀를 파고드는 대화였다. 여기가 좋다느니, 사진 찍자느니, 관광객이 할 법한 소리들.
목소리가 앳된 것으로 보아 성인은 아니다. 사파이어는 다른 사람의 사진에 강제로 찍혀 나오기 싫었기 때문에 슬쩍 자리를 피하려고 발걸음을 뗐다.
그 때, 그 목소리 중 하나가 “혹시?”하더니 사파이어를 불러 세웠다.
“저기, 잠깐만요! 저기요!”
사파이어가 고개를 돌려 쳐다보니 1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사파이어를 가만히 뜯어보고 있었다. 아이의 눈은 점차 커지더니 곧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탄성을 터뜨렸다.
“진짜야!? 진짜야!?”
“왜 그래?”
같은 일행인 여자아이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물었다. 사파이어도 마찬가지였다. 남자아이는 감격에 겨워서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바보같이 똑같은 말만 계속 하다가 가까스로 말했다.
“형이죠! 형 맞죠! 진짜죠! 내가 잘못 볼 리가 없어! 얼굴 기억하는데!”
사파이어는 대꾸하지 않고 의심스러운 눈으로 남자아이를 쏘아보았다. 그러자 아이가 흥분에 찬 웃음을 터뜨렸다.
“나 기억해요? 나 사샤예요!”
사샤는 그 한 마디가 자신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도 모자라 더 멀리 있는 과거의 기억 속으로 사파이어를 푹 밀어 넣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플래시백이 사파이어를 관통했다.
사샤. 사샤. 아이의 이름을 부르는 자신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우샨카를 쓴 아이가 콧물이 새어나오는 줄도 모르고 천진하게 깔깔 웃고 있다. 계절이 바뀐다. 시베리아의 극성맞은 모기떼가 악몽처럼 윙윙거린다. 풀밭을 적시는 짐승의 피. 어깨에 멘 총의 무게. 쉴 새 없이 흘러내리던 땀. 흥분해서 소리 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
내 목소리였던가? 뭘 외치고 있었지? 내용은 기억이 안 나지만 그 강렬했던 감정의 파편은 남아있다. 기억은 사소한 것들을 가지치기하고 빨리 감기해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다시 사샤가 웃는다. 사람들의 손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고 포옹하는 손길들이 느껴진다. 다음 순간 그는 어깨에 멘 총을 내리고 자신에게 웃는 사람들을 향해.
“형!”
사파이어는 어깨를 떨며 정신을 차렸다. 남자아이가 아직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얼굴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아요?”
사파이어는 심각한 얼굴로 대답했다.
“응.”
남자아이의 정체는 프랑스에서 맡았던 800만 유로짜리 계약의 주인공인 아이들, 그 중에서 대장 역할을 맡고 있던 사샤였다.
시간이 많이 지난 것도 아닌데 사샤는 못 알아볼 만큼 키가 훌쩍 컸고 어깨도 벌어지고 있었다. 변성기 때문에 흥분할 때마다 목소리가 듣기 싫게 갈라져 나왔고, 이제 수염이 자라기 시작하는 모양인지 드문드문 까슬하게 솜털 같은 수염이 돋아나있었다.
사샤는 러시아 억양이 강하게 남아있어도 이제 영어를 할 줄 알았다. 그래서 눈치로만 대화했던 예전과는 다르게 이제는 막힘없이 말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사샤를 알아본 사파이어는 그것으로 만족하고 그대로 자리를 피하려고 했는데 당연히 사샤가 놔줄 리 없었다. 사샤의 일행인 여자아이는 영국에 와서 사귄 여자 친구로, 사샤에게서 이야기를 몇 차례 들었는지 신기한 눈으로 사파이어를 훑어보고 있었다.
사샤는 사파이어에게 할 이야기가 많았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여자 친구와도 공유하고 싶어서 어쩔 줄 몰랐다. 자리를 피하고 싶은 남자와 그런 남자를 붙잡고 싶은 소년 사이에 끼어있던 여자아이가 한숨을 내쉬더니 둘을 데리고 카페로 갔다. 자리를 잡고 음료를 주문하고 나서야 사샤의 흥분이 좀 진정됐다.
음료가 나와도 사파이어가 손도 대지 않고 이 액체는 무엇인가 하는 얼굴로 자신 몫의 잔을 빤히 내려다보자 사파이어 대신 메뉴를 골랐던 여자아이는 좀 민망한 생각이 들었다. 여자아이의 반응을 가만히 파악하던 사파이어가 오해를 풀어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고 입을 열었다.
“난 이런 거 마시면 안 돼.”
“알레르기 있어요?”
“아니.”
“그럼 싫어하는 거예요?”
“허용되지 않았어.”
너무나도 기계적인 단어 선택에 여자아이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사파이어가 전혀 웃지 않자 분위기는 급속도로 심각해졌다. 이 남자가 오해를 사기 쉬운 성격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사샤는 슬슬 기분이 나빠지려고 하는 여자 친구를 달래면서 사파이어에게 물었다.
“혹시 아직도 그 남자랑 같이 다녀요?”
“그 남자?”
“그 하얀 머리 남자 있잖아요. 그 나쁜 사람.”
“응.”
“왜……. 도망가요. 형을 필요할 때만 이용해먹고 죽으라고 내버려두잖아요.”
“도망? 왜?”
“이미 죽을 고비 몇 번 넘겼잖아요. 그 뒤로도 많이 있었죠?”
“왜 도망가야하지?”
사파이어는 순수하게 의문을 말했다. 그에게 주어지는 임무가 위험하다는 것과 그가 주인으로부터 도망쳐야 한다는 것은 좀처럼 이해관계가 연결되지 않는 명제들이었다. 그제야 이 남자가 정신적으로 어딘가 이상하구나 하고 깨달은 여자아이가 자기도 모르게 불쌍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얼굴을 질리도록 봐왔기 때문에 사파이어는 나직하게 말했다.
“난 불쌍하지 않아. 그런 표정 짓지 마.”
“미안해요.”
“형 진짜 도망가요.”
사파이어가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갸우뚱하자 사샤는 설득하기를 포기했다. 자기도 모르게 동정적인 미소를 지을 뻔 했던 사샤는 사파이어의 경고를 떠올리고는 곧바로 화제를 바꿨다.
“그 얘기는 됐고, 나머지 애들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영국에 무사히 도착했던 아이들은 각종 포럼과 회의 등에 증인으로 참석했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아이들이 직접 무슨 발언을 한 것은 아니지만 존재 자체만으로도 인권 탄압에 대한 강력한 증거가 되었다.
아이들은 더 이상 그늘에 가려져 있는 의문의 증인이 아니었고, 한 번 모습이 드러났기 때문에 아이들이 사라져야 이득을 보는 세력도 섣불리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어차피 아이들은 이미 이용가치가 사라진 카드이기 때문에 굳이 아이들을 건드려서 이목을 더 끌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자유가 됐다. 아이들을 영국으로 빼돌릴 수 있게 도와주었던 기사단이라는 단체는 아이들의 생활이 안정될 때까지 후견인이 되어주었고, 영국 정부도 아이들을 보호해주었다.
성인이라면 난민 심사를 거쳐서 정식으로 난민 인정을 받았을 테지만 지금은 보호자가 필요한 나이이기 때문에 법적으로도 이런저런 작은 문제들이 생겨났다.
번거로운 서류작업과 관공서 출입을 거친 후에 아이들은 성인이 될 때까지 국적 선택에 대해 보류할 수 있게 되었고,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영국의 공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됐다.
기사단은 아이들을 위탁가정에 맡겼다. 그래서 하나둘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크레파스를 가지고 서로 그림을 그리겠다며 싸움을 벌이던 두 꼬마는 사이좋게 맨체스터의 한 마음씨 좋은 부부에게 맡겨졌다. 심심하면 그림을 그리고 놀던 아이들인지라 차츰차츰 색채 감각이 발달해서 지금은 미술에 두각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툭하면 사샤의 옷자락을 붙잡고 늘어지던 콜랴라는 꼬마는 에식스의 시골집에 맡겨졌다. 커다란 황갈색 고양이가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는 집인데 그 근방에서는 황금 고양이라고 불린단다.
사샤에게 의존하던 콜랴는 이제 고양이 옆을 졸졸 따라다녔고, 커다란 고양이는 아직 정서불안 증세에서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인간 아이에게 너그럽게도 자신을 섬길 수 있는 특권을 주었다.
콜랴는 이제 특별히 동물을 좋아하는 아이가 되었다. 장래에는 수의사가 되고 싶다고 한다.
일행 중 유일했던 여자아이는 카디프의 부유한 집에 맡겨졌다. 처음 얼마간은 밤마다 악몽을 꾸느라 위탁부모를 진땀나게 했는데 사랑과 관심으로 차츰차츰 회복되어서 지금은 밝고 사교성이 좋은 아이로 변했다고 한다. 워낙 해바라기 같이 웃고 다니는 아이라서 동네에서도 유명할뿐더러 싫어하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사샤로 말할 것 같으면, 일행 중 가장 나이가 많았던 사샤에게는 일괄적으로 위탁가정을 배정하지 않고 우선 선택권을 주었다.
사샤같이 사춘기에 접어들기 시작한 아이를 선뜻 맡으려는 가정은 별로 없기도 했고 사샤 역시 대도시 런던의 화려함을 보자 이곳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열망을 느꼈다. 그래서 사샤는 몇 가지 조건을 걸고 런던에서의 자유로운 생활을 만끽했다. 성적을 일정 등급 이상으로 유지할 것, 몇 시 전에 귀가할 것, 불량한 행위를 하지 않을 것, 이런 상식적인 것들이었다.
사샤에게는 보호자가 따로 붙었는데 명분상 보호자일 뿐이지 사실 거의 얼굴 보기도 힘든 동거인이었다. 어차피 규칙만 잘 지키면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기 때문에 사샤는 목숨을 걸고 영국까지 넘어와 얻은 자유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엇나가는 일 없이 성실하게 지냈다.
하루하루 자유에 대한 대가를 벌고 그것을 즐기는 삶은 정말이지 끝내줬다.
사샤는 이 모든 것을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한 마디라도 더 하려고 끊임없이 내뱉었다. 어린아이가 그러는 것처럼 이런 일도 있었고 저런 일도 있었다고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치는 모습은 처음 보는지라 사샤의 여자 친구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사샤의 등짝을 때려가며 웃었다.
아마 집에 돌아가서 샤워를 하려고 보면 등에 시뻘겋게 손자국이 남아있을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있을 정도로 사샤는 사파이어와 재회한 반가움에 완전히 정신이 팔려있었다.
사파이어는 사샤의 말을 중간에 끊는 일 없이 가만히 들어주었다. 사람들이 보이는 적의나 혐오감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지만 누군가가 이렇게 절대적으로 자신을 친근하게 여기고 마음속까지 열어주는 것은 드문 일이었기 때문에 열심히 들어둘 필요가 있었다.
어쨌든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사샤는 목소리가 거칠어질 정도로 말을 토해내고 난 다음에 겨우 멈췄다. 다 식어버린 음료를 벌컥벌컥 들이켠 사샤가 말했다.
“사는 게 너무 재밌어요.”
사샤는 앞날에 대한 희망과 현재의 기쁨을 담은 눈으로 사파이어를 바라보았다. 사파이어는 사람 눈이 별처럼 반짝인다고 생각했다.
“고마워요, 형.”
사샤가 기습적으로 악수해왔다. 억지로 사파이어의 손을 붙잡은 것에 지나지 않지만 사파이어는 움찔 놀랐다. 사샤에게 악의가 없다는 건 알지만 온 몸이 굳은 채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몰랐다.
사샤는 그 나이 또래의 아이가 깨닫기엔 너무나 많은 것을 담고 악수했다. 앞으로 어떤 풍파가 닥치더라도 변색될 일이 없는 평생의 우정을 뜻하는 악수였다.
사샤는 사파이어에게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했지만 사파이어가 거절했다. 벤체슬라스에게 허가받지도 않은 것이고 민간인을 암살업에 연관되게 할 수는 없었다. 사파이어에게도 위험한 일이고 사샤에게도 비합리적인 일이 될 것이다.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사샤는 이대로 헤어지면 언제 다시 사파이어를 만날 수 있을지 모르고 이것이 영원한 작별이 될 수도 있었기에 지금 아니면 말할 기회가 없다고 생각해서 꾹꾹 눌러 담았던 속내를 털어놨다.
“형이 킬러라는 거 알아요. 살인자라는 것도 알고 그게 나쁘다는 것도 알아요. 근데 형은 나한테 목숨의 은인이에요. 나한테는 좋은 사람이에요. 누가 나한테 묻는다면 난 그렇게 대답할거예요. 적어도 나한테는 좋은 사람이라고. 형이 그들을 죽이지 않았으면 내가 죽었을 테니까요. 형도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꼭 행복해져요. 난 사는 게 너무 재밌으니까. 형도 꼭 그래요.”
사샤는 마지막으로 손을 내밀었다. 사파이어는 여태 봐왔던 일반상식을 적용해서 사샤의 손을 잡고 단단하게 악수해주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하던데 이게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반응이겠지. 사샤의 반응을 보니 정답이었던 것 같다.
사파이어는 멀어져가는 사샤와 그 여자 친구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곤 등을 돌려 해가 지기 시작한 런던의 어둠 속으로 홀로 나아갔다.
벤체슬라스는 의뢰인을 만나러 사교파티가 열리는 저택으로 갔다.
처분하지 않고 남겨두었던 옷 중에서 가장 값비싼 브랜드의 소품을 최대한 멋스럽게 조합해 차려입었는데, 저택의 손님들과 비교하니 볼품없다고 느껴졌다. 보통 사람은 별 차이를 모르겠지만 손님들은 새로 나타난 백금발의 남자를 유심히 살펴보며 비웃고 있었다.
몸에 걸친 옷가지의 가치가 부족한 게 아니다. 아무리 공을 들여도 그들을 따라올 수 없는 차이가 있었다. 정식으로 교육받지 못한 불확실함이라고 할까. 손님들은 이미 이 남자의 정체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들 역시 언젠가는 맞춤 보석과 장신구를 구입할 예비 고객이었기 때문에 세공사라는 존재를 직접 봐두고 싶었던 것이다.
남자는 제법 돈이 있었던 것 같으나 태도에서 숨길 수 없는 빈곤함이 배어나온다. 돈이 있다고 해도 태어나기를 상류층으로 태어나서 지도계층이 될 교육을 받은 사람들과는 확연한 차이가 난다. 남자는 봉사하는 입장이고, 노동자고, 빵을 버는 입장이지만 그들은 다른 이에게 돈을 주는 입장이다.
벤체슬라스는 키득거리며 자신을 위 아래로 훑는 눈길들에 반응하지 않았다. 그런 모멸에는 익숙한 것처럼 보였다.
돈이 없다는 것은 부덕함이요 죄악이다. 돈이 있으면 존경을 살 수 있다. 모욕을 피할 수 있다. 벤체슬라스는 돈을 가지지 못한 벌을 받고 있는 것뿐이었다. 별로 화가 나지는 않았다. 그에게 세상의 진리란 그런 것이었으니까.
있는 자는 없는 자를 당연히 멸시해도 된다. 자신도 그래왔다. 기회가 생기면 또 그럴 것이다.
그 때까지는 귀족의 비위를 맞추며 최대한 그들과 비슷해 보이는 부르주아의 위치에서 다소곳하게 고개를 숙여야한다. 벤체슬라스가 자신의 위치를 너무도 잘 알았기 때문에 장난을 좀 걸어보려던 손님들도 그만 흥미를 잃고 말았다.
상대가 반항하고 발끈해야 놀리는 맛이라도 있는데 벤체슬라스는 시키는 대로 뭐든 고분고분 할 것 같아서 오히려 기분이 좀 나빠졌다. 인간 같지 않다고 할까.
누군가가 벤체슬라스에게 100만 유로를 줄 테니 자신의 것을 빨라고 시킨다면 벤체슬라스는 주저 없이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을 것이다. 그게 뭐 부끄러운 일이라고. 돈을 주신다는데. 추가 금액을 더 준다면 구두의 밑바닥까지 핥을 수 있다. 광기와도 같은 집착이었다.
벤체슬라스를 고용하려고 상담 예약을 잡은 의뢰인은 다행히 그 정도까지 성격이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무례한 손님들 때문에 마음이 상하셨겠군요.”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슬쩍 떠보는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벤체슬라스는 바로 깍듯이 인사했다. 의뢰인은 “이것 봐라?”하면서도 그에 대해서는 더 언급하지 않았다.
“당신이 파는 게 아쿠아마린이었던가…….”
“사파이어입니다. 아쿠아마린은 더 이상 팔지 않습니다.”
“그래. 사파이어. 어쨌든 당신 이름을 보고 사는 거니까요. 품목이야 아무래도 상관없지요.”
의뢰인은 별 생각 없이 했던 말인데 벤체슬라스에게는 표정을 변하게 할 정도의 칭찬이었다.
“인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쎄, 아직 인정한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고. 보석 종류만 보고 살 수 있나요? 누가 보석을 깎았는지 세공기술은 어떤지, 그 정교함이 관건이죠.”
벤체슬라스는 의뢰인이 자신을 마음껏 놀리게 내버려두었다. 그 결과로 돈을 벌 수 있다면야 그저 감사할 뿐이다.
“그래서 주문하시려는 것은 어떤 겁니까?”
“내가 친한 친구한테 선물을 해주고 싶은데 그 친구한테 이미 보석이 여러 개가 있거든요. 그런데 난 좀 특별한 걸 원합니다. 내가 선물하는 사파이어는 그 친구한테 오랫동안 기억되었으면 좋겠거든요.”
“그 말씀은…….”
“그 친구에게 다른 보석이 없으면 합니다. 아예 사라져버리면 좋겠네요. 그럼 내가 선물한 것만 영원히 기억하겠지요. 무덤까지 가지고 갈지도 모르고.”
의뢰인은 미묘하게 웃으면서 “당신 실력에 따라 다르지만.”하고 덧붙였다. 벤체슬라스는 재빨리 말뜻을 파악했다. 암살 임무다. 표적은 다른 세공사에게서 보석을 구입해 경호원으로 쓰고 있는 모양이다. 그 경호원을 모두 처치, 그리고 표적도 함께 처치하길 희망하는 의뢰 내용이다.
“친구 분이 보유하고 계시다는 보석을 알 수 있을까요?”
“글쎄, 이름까지는 내가 하나하나 모르겠는데. 한 10개 정도 가지고 있다고 들었어요.”
10개. 힘든 임무다.
“그래도 값어치 없는 잡석이라고 들었으니까. 기껏 해봐야 어디서 싸구려 잡동사니나 구해 모아놓고 있겠죠.”
품질이 떨어지는 보석이다. 전투력은 많이 낮겠지만 그래도 10명이나 되는 인원을 사파이어 혼자 상대할 수 있을까?
“제가 그 보석들의 품질을 봐야 판단이 설 것 같습니다.”
“그건 당신이 알아서 해요. 전문가는 당신이니까.”
“알겠습니다.”
벤체슬라스는 의뢰의 나머지 세부사항을 꼼꼼히 정리하고 난 후에 저택을 나왔다. 들어올 때와 다르게 나갈 때는 오만한 손님들의 눈길도 그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다.
당신들은 나에게 침을 뱉지만 결국엔 나의 손길이 필요해서 나를 고용하게 될 것이다. 당신들의 돈은 나에게로 이동하게 될 것이고 당신들의 부는 내 것이 된다. 웃을 테면 마음대로 웃어봐라. 나는 다시 제왕의 자리로 올라간다. 벤체슬라스는 삐뚜름하게 웃으며 아파트로 돌아갔다.
생활이 극단적으로 달라졌음에도 벤체슬라스가 돈을 아끼지 않는 것이 몇 가지 있었다.
첫 번째는 자신의 의상. 몇 천 유로짜리 수트를 덥석덥석 구입하는 건 아니지만 셔츠 같은 소모품이 조금이라도 헤어졌다거나 손상됐으면 바로 똑같은 품질의 새 제품을 구입했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것이 비싼 것이었기 때문에 지금 형편으로 다시 구입하는 건 부담스러웠지만 돈을 아껴선 안 되는 부분이었다.
후줄근한 차림새의 세공사가 얼마만큼의 설득력을 가진단 말인가? 내가 고객이라도 미심쩍어한다. 일거리를 얻지 못하면 수익이 없고, 수익이 없으면 번듯하게 꾸미지 못하고, 외형이 형편없으면 점점 더 일거리를 따내지 못하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따라서 옷에 대한 투자는 사업을 계속하기 위한 필수 비용이다.
그 다음은 유류대와 자동차 관리비. 벤츠라는 이미지만으로도 훌륭한 도구이자 방패막이 되지만 자동차는 원래 발을 대신하는 용도다. 차가 없으면 발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
재산이 넉넉했을 때 좋은 차를 구입해둔 건 현명한 선택이었다. 이전에는 밥 먹듯이 차량을 갈아치워서 잘 몰랐는데 돈 들인 만큼의 내구도는 확실히 있었다. 벤츠는 자주 망가지지 않았다. 지금 같은 상황에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마지막으로 무기. 사실 나머지 항목은 무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무기에는 정말로 돈을 아끼지 않았다. 물론 과감하게 한 번 쓰고 버리던 예전과 다르게 지금은 회수할 수 있으면 회수해서 몇 번이고 다시 쓰지만, 출처도 불분명한데다가 상태도 미심쩍은 저질 제품을 쓰지는 않았다. 차라리 다른 것을 줄이고서라도 무기만은 예전과 똑같은 수준을 유지했다.
옷과 차는 일을 따내기까지 고객에게 설득력을 더해줄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무기와 기술이야말로 벤체슬라스가 파는 진짜 서비스다. 좋은 무기와 방탄복은 보석과 자신의 생존 가능성도 높여준다. 솔직히 이건 줄이는 놈이 바보다.
이번 의뢰는 스코틀랜드까지 가야한다. 당연히 가방 세 개 분량의 무기를 들고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할 수는 없으니 차량으로 이동해야하는데 기름 값이 꽤 나올 것이다. 현지의 시체처리업자에게 일을 맡기려면 그 비용도 계산해둬야 하고.
벤체슬라스는 영수증을 잘 써주는 편이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제반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선금으로 총 보수의 일부를 받고 나머지는 계약이 완료된 후에 전부 받기로 했다.
영수증. 예전부터 발목 잡는 수단이라고 생각해왔다. 마리야 이바노브나가 들고 왔던 의뢰가 그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지 않는가. 당장 절박해서 세공사를 고용했던 의뢰인도 일이 끝나면 어떻게 태도가 돌변할지 모른다. 돈을 떼먹기 위해 세공사를 협박할 수도 있는 노릇이고……. 벤체슬라스는 평소엔 그런 위협성과 타협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방법이 없었다.
모든 준비를 끝마친 후에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를 준비시켜 차에 태웠다. 벤체슬라스가 스스로 처리해야하는 일이 이전보다 훨씬 많아졌기 때문에 요즘은 사파이어에게 이전만큼 관심을 쏟지 못한다. 통제력을 확인해보지 못했다는 소리다. 다행히 사파이어는 변함없는 것 같았다.
갓 망가지기 시작한 인간은 관성을 가지고 정상으로 되돌아가려고 한다. 그러나 망가진 지 오래된 인간은 마찬가지로 관성 때문에 망가진 상태를 계속 유지하려고 한다. 괜찮을 것이다. 사파이어는 나에게 예속되어 있다.
그러니까 초조해할 것 없다.
그 오래된 저택은 깎아지른 절벽 위에 굳건하게 서 있었다. 절벽 아래로는 바다가 요동치고 있었고 한 치의 타협도 없는 매서운 바람이 어둑어둑하게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하늘과 마찬가지로 이방인들을 밀어내고 있었다.
북해의 차가운 바람은 항상 따귀부터 때리며 인사를 해온다. 벤체슬라스는 점퍼 깃을 바짝 세우고 가죽장갑을 꼈다.
보석 10개. 사설경호원 7명. 표적 하나. 총 18명.
사파이어는 먼저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확실히 조용하고 눈에 덜 띈다. 장 바티스트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사파이어를 닌자라고 놀려댄 것도 영 근거가 없는 소리는 아니다. 벤체슬라스도 필요하면 그림자가 될 수 있었지만 직접 현장에 발을 들인지 꽤 오래 되었기 때문에 사파이어에게 밑작업을 맡겨두었다.
이번 일을 끝마치면 35만 파운드를 받을 수 있다. 큰돈이다. 이전이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금액이다. 지금도 크게 이득이 남는다곤 할 수 없다. 18명의 시신을 처리하는데 들어갈 비용, 정보를 은폐하는데 들 비용, 입막음비로 나갈 비용, 무기상에게 지급하는 비용…….
아니다. 아니다. 할 수 있다. 처음에도 이렇게 시작했다. 너무 오래전이라 기억하지 못하고 있던 것뿐이다.
벤체슬라스는 회상을 털어내면서 샷건을 옆구리에 꼈다. 이사카 M37. 저택의 주위로는 높낮이가 심한 언덕이 있지만 나무처럼 엄폐할 곳은 없으니 굳이 바깥에서 교전을 벌일 일은 없을 것이다. 상대도, 나도. 저택 안이 주 무대가 될 텐데 실내에서 다수를 상대하자면 산탄총이 괜찮은 선택이다.
벤체슬라스는 호흡을 가다듬고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사파이어는 날길이 60cm 남짓한 코다치를 쥐고 있었다. 이미 경호원 둘을 암살했다. 그림자 속에 숨어 있다가 뒤에서 조용히 튀어나와 입을 틀어막고 목을 길게 그었다.
들키면 안 된다는 긴장감과 살아있는 인간을 덮치는 희열, 저항하는 손길을 억압하는 그 흥분, 이곳이 사파이어가 있어야 할 곳이었다. 서로의 목숨을 건 강렬함이 이곳의 모든 것이었고 다른 것은 없었다. 세상의 모든 불필요한 소리가 음소거 됐다.
시신들은 일단 커튼 뒤에 숨겨놓았다. 저택을 돌아다니는 인원 중에 몇 명이 빈다면 금방 경보가 울리겠지만 시신이 발각되는 시간은 늦춰줄 것이다.
사파이어는 칼에 묻은 피를 비슷한 색깔의 커튼으로 닦아내며 발걸음을 옮겼다. 저택 안은 조용하고 어두웠다. 표적은 암살자가 자신의 목숨을 노린다는 걸 안다. 그래서 보석을 10개나 구입했다. 늦든 빠르든 그들과도 마주치게 될 것이다.
저택의 육중한 문은 그 너머의 소리를 거의 차단했기 때문에 어지간히 큰 소리가 아니면 문에 귀를 댄다고 해봐야 들을 수 없었다. 사파이어는 문을 열 때마다 조심스럽게 기척을 살피고 손잡이를 돌렸다.
그가 응접실의 문고리를 잡았을 때, 안에서 “들어 와.”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파이어는 문고리를 돌리지도, 그렇다고 놓지도 않은 채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들어오라니까.”
안의 목소리가 채근했다. 사파이어가 같은 편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할까. 속여 볼까? 방향을 틀어 다른 곳으로 갈까? 이 안에 있는 게 누구든 간에 경보는 금방 울리게 될 것 같은데. 사파이어는 주저 없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응접실에 으레 있을 가구들은 한 쪽으로 치워져 있었고 커다란 홀처럼 변해있었다. 그 한 가운데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사파이어의 것보다는 훨씬 긴 일본도를 어깨에 메고 이따금씩 코를 훌쩍이고 있었다. 얼굴은 병색이 완연했고 퀭하게 파인 눈 밑은 좋지 않은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는 피곤한 듯이 몸을 좌우로 기우뚱거리다가 고개를 틀어 사파이어를 바라보았다.
“네가 보석이군.”
그는 목소리도 이상했다. 발성 자체가 어딘가 불안정해서 듣는 사람까지 긴장하게 만들었다. 사파이어는 한 발자국 더 안으로 들어오며 조용히 문을 닫았다. 남자는 코를 한 번 더 훌쩍이더니 말했다.
“나는 앰버.”
사파이어는 대답하지 않았다. 남자는 애초에 사파이어의 대답도 기대하지 않은 것 같았다. 자신이 방금 뭘 말했는지조차 기억 못 하는 것 같으니까.
남자가 한 손을 부들부들 떨며 주머니에 넣더니 무언가를 꺼내서 코에 갖다 댔다. 그리고 인상을 찡그리며 깊게 들이마셨다. 잔뜩 비틀려 있던 표정이 묘하게 풀리더니 남자가 좌우로 고개를 꺾으며 어깨에 걸친 칼을 내렸다.
남자는 조금 전보다는 훨씬 나아보였다. 멀쩡해진 것 같다고 할까.
남자는 더 이상 사파이어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남자가 칼을 뻗어 사파이어를 가리키자 사파이어는 쥐고 있던 칼을 옆으로 들어보였다.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엄청난 반응속도로 달려들었다.
캉!
어둑한 방 안에서 무서운 기세로 칼날이 맞부딪쳤다. 일순 스파크가 튄 착각까지 일었다. 맞붙은 칼날은 힘겨루기를 하지 않고 곧바로 떨어졌다가 다시 격돌했다. 캉, 캉, 캉! 연달아 몇 번 부딪치고 나자 사파이어가 거리를 벌리고 섰다. 남자는 잠시 천장을 보며 코를 훌쩍이더니 다시 달려들었다.
지금은 사파이어가 불리했다. 좁은 공간을 감안해서 중간 길이의 칼을 준비했는데 이렇게 널찍한 공간에서 싸우게 될 것은 생각하지 못했다. 가구와 장애물이 널려있는 환경을 생각했지, 춤이라도 출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공간을 만들 줄이야. 천장도 높았다. 칼이 박힐 일은 없다. 리치가 긴 쪽이 당연히 유리하다.
사파이어는 총을 꺼낼까 고민했다. 아직은 저택 내의 다른 사람이 칼싸움 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다. 그러나 총성은 못 들을 수가 없겠지. 총을 쓰는 순간 은신은 할 수 없게 된다. 벤체슬라스가 뒤따라 들어올 것은 알고 있지만 그가 오기 전까지는 조용히 처리해두고 싶었다.
사파이어는 칼을 역수로 쥐고 남자의 공격을 사선으로 받아내 칼날을 끼이익 긁어내렸다. 그러면서 남자의 다리를 걷어찼다.
칼을 내려치기 위해 단단한 지지대처럼 서 있던 남자의 다리가 예상치 못한 공격 때문에 잠시 틀어졌다. 결과적으로 칼날의 방향과 힘까지 틀어지면서 사파이어에게 기회가 생겼다.
사파이어가 신속하게 남자를 베었다. 치명상은 입히지 못했지만 손목은 그을 수 있었다. 남자는 칼을 놓칠 뻔하다가 재빨리 다른 손으로 바꿔 쥐었다.
“아, 이런.”
남자가 몽롱한 음색으로 중얼거리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런 유감스럽다는 감탄사로만 넘길 수 있는 상처가 아니었다. 손목의 혈관과 힘줄이 같이 베였기 때문에 힘이 들어가지 않을 것이 분명했고, 피가 철철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런데도 남자는 어딘가 다른 사람의 몸을 보는 것처럼 상황을 관조하고 있었다. 남자는 손가락을 몇 번 움직여보더니 이 손은 못 쓰겠다고 판단하곤 나머지 멀쩡한 손으로 칼을 단단히 쥐었다. 사파이어가 보기에도 남자의 반응은 정상이 아니었다.
“이게 아주 끝내주거든.”
사파이어가 재차 공격하는 것도 잊고 자신을 보고 있자 남자가 설명해주었다. 술 취한 사람이 비밀을 공유하려는 것 같은 태도여서 사파이어는 무의식적으로 거부감을 느꼈다.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괴이함이 있었다.
남자는 이제 잘 움직여지지도 않는 손가락을 억지로 움직여서 주머니를 뒤지더니 아까 들이마신 것을 꺼내서는 또 한 번 깊게 흡입했다. 남자가 낮은 신음을 흘리며 약물이 몸 안에 퍼져나가는 순간을 잠깐 음미하더니, 아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덮쳐들어왔다.
근육을 증가시켜주는 약은 아닌 것 같다. 스테로이드는 효과를 보는데 시간이 걸리고, 저렇게 즉각적으로 신체능력을 올려주는 거라면 아마도 몸 전체를 좋게 만든다기보다 뇌의 제한을 풀어버리는 식이겠지.
남자는 더 이상 코를 훌쩍이지는 않았지만 이제는 코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코 밑으로 뭐가 흐른다는 것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손의 상처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으니 몸 안이 망가지는 것에 대해서도 둔감하겠지.
일순간 사파이어는 위기에 몰렸다. 틀렸다. 총을 꺼낼 수밖에. 판단이 조금 느렸던 탓일까. 권총을 꺼낼 틈도 없이 긴 칼날이 사파이어를 머리끝에서부터 베어 내렸다.
무척 익숙한 위기감이 든다.
사파이어는 칼날이 머리 위에 박히는 순간까지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긴 칼날은 벽에 몰려있던 사파이어를 끝가지 베어내리지 못하고 머리 위 벽에 박혔고, 순간의 실수가 만들어낸 그 기회가 두 남자의 생사를 갈랐다.
사파이어는 두 손이 허공에 묶인 남자의 배를 깊숙이 찔러 넣었다.
“으윽!”
순식간이었다. 남자를 관통해서 등 뒤로 뻗어 나온 칼날은 그대로 남자를 난도질해놓고 빠져나왔다. 남자가 울컥하며 피를 토했다. 벽에 박힌 칼은 끝끝내 빼내지 못한 채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
갈라진 배를 가리지도 못한 채 남자는 대자로 뻗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죽음이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죽음의 위기를 비껴낸 사파이어는 숨을 몰아쉬면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고 칼을 고쳐 쥐었다. 그리고 죽어가는 남자를 들여다보았다. 남자의 얼굴에선 이제 약기운의 몽롱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무척 고통스러워하고 있었지만 어떻게 비명을 질러야하는지 잊어버린 것 같았다. 남자와 시선이 마주치자 사파이어는 쭈그려 앉아서 그의 목에 칼을 들이댔다. 남자가 쿨럭쿨럭 피를 뱉어내며 속삭였다.
“고마워…….”
사파이어는 남자의 고통을 빨리 끝내주었다. 마지막 호흡을 끝으로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게 되자 사파이어는 벽에 박힌 남자의 칼을 돌아보았다. 남자가 약 기운 때문에 실수하기는 했지만 저택의 나머지 부분도 이렇게 널찍하다면 긴 칼이 필요할 것 같긴 하다. 무기가 없는 것보단 있는 게 나으니까.
사파이어가 벽에 박힌 칼날을 비틀어 빼내는 순간 방문이 덜컥 열렸다. 소리만 듣고도 사파이어는 반사적으로 칼을 들어 자신을 가렸다.
방문을 열고 뛰어 들어온 불청객은 처음부터 자신의 목표가 어디에 있는지 안다는 듯이 곧장 죽은 남자에게로 달려갔다. 열쇠구멍으로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 아닐까. 사파이어는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키 작은 남자였는데 비쩍 마르기까지 해서 비현실적이고 기괴한 인상이었다. 그는 죽은 남자의 주머니를 발작적으로 뒤지더니 약을 찾아내고는 킬킬 웃었다.
그는 곧바로 약 하나를 흡입하더니 죽은 남자가 그랬던 것처럼 긴 신음을 흘리면서 약 기운이 퍼져나가는 감각을 음미했다. 그런 다음 자신을 경계하는 사파이어를 돌아보았다.
“난 너랑 싸울 생각 없어. 난 이 새끼가 언제 죽는지 기다리고 있었거든. 난 갈 거야. 너랑 난 못 본거야.”
“넌 누구지?”
“앰버.”
키 작은 남자는 사파이어와 싸울 마음이 없다고 했지만 사파이어는 달랐다. 남자가 방을 가로질러 도망치려고 하자 사파이어가 그 앞을 칼로 막아섰다.
“너랑 싸울 생각 없다고 했잖아!”
“넌 죽어야 돼.”
“왜!”
“명령이니까.”
“죽인 셈 쳐! 죽였다고 하라고! 왜 너랑 목숨 걸고 싸워야하는데!”
사파이어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 남자는 보석이 아닌가? 하지만 방금 자기 입으로 이름을 말했는데? 죽은 남자와 이름이 같긴 하지만 죽은 남자를 부른 것 같지는 않다. 자신의 이름일 것이다.
보석이 임무를 포기하고 싸우길 거부할뿐더러 거짓말을 하라고 종용하는 것도 사파이어에겐 납득이 가지 않는 것들이었다. 이 남자는 처벌을 두려워하지 않는 건가?
사파이어가 도저히 비켜줄 생각이 없어보이자 남자가 죽도록 원망하는 눈으로 사파이어를 노려보더니 품 안에서 총을 꺼내들었다. 사파이어는 그것을 신호로 알아듣고 번개같이 총부터 쳐냈다. 그가 칼을 꺼냈더라도 똑같이 대응할 생각이었지만 총성에 대해서는 한층 더 반응이 빨랐다.
키 작은 남자는 어이없을 만큼 무력했다. 들고 있던 총이 튕겨나가자 이번에는 단검을 꺼냈으나 애초에 장검과 상대가 되지 않았다. 사파이어는 손쉽게 남자를 처리하면서 이 남자가 정말 킬러가 맞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난도질되어 바닥에 쓰러진 남자는 훌쩍이고 있었다.
“싫어. 이렇게 죽기 싫어. 이렇게 죽기 싫다고. 아파. 아파.”
남자는 사파이어에게 침을 뱉었다. 침은 사파이어의 발치에도 닿지 못했다.
“약만 있으면 돼. 약만…….”
죽음을 앞둔 순간에도, 아니 오히려 죽음을 앞두었기 때문에 남자는 약에 대해 집착했다. 남자가 죽지도 않고 계속 꼼지락거리는 것을 내려다보던 사파이어는 칼을 들어서 남자의 고통을 빨리 끝내줬다.
남자가 마지막 기력으로 쥐고 있던 약이 바닥에 툭 떨어져 데굴데굴 굴러가자 사파이어가 그것을 발로 콱 짓밟았다. 빠직하는 소리가 나며 약을 감쌌던 케이스가 부서지고 가루들이 그 주변으로 퍼졌다.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가 숨겨놓은 시신을 발견했다. 저택 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설마하니 벌써 다 처리했을 리는 없고. 사파이어와 다른 쪽으로 돌면서 남은 인원을 정리하면 시간을 절약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벤체슬라스는 문이 열려있는 방향을 확인하고 그 반대방향의 복도로 향했다.
총성이 울리기 시작하면 사방에서 경호원들이 뛰쳐나올 것이다. 오히려 총소리를 듣고 벤체슬라스 쪽으로만 인원이 다 몰릴지도 모르지. 그럼 사파이어는 숨어있는 표적을 여유롭게 찾아 나서면 된다.
벤체슬라스에게 위험도가 좀 더 있기는 해도 이 정도쯤이야 예전에는 일상이었다. 사파이어가 미리 정리해놔서 빠진 머릿수까지 계산하면 벤체슬라스가 처리해야 할 숫자는 더 적겠지.
벤체슬라스는 샷건을 장전하고 문을 하나씩 열면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식당으로 추정되는 곳에 도착했을 때, 벤체슬라스는 곧바로 방아쇠를 당기지 않고 눈앞의 상황을 잠시 가늠했다.
“개새끼……. 사기꾼 새끼……. 네가 날 속였어…….”
하얀 식탁보였을 것이 분명한 천이 덮여 있는 긴 테이블 위에 한 남자가 누워 있었고, 그 위에 여자가 올라탄 상태였다.
그들 주변으로 암홍색 액체가 꿀렁꿀렁 퍼져 나와 흰 식탁보를 물들이고 테이블 아래로 뚝 뚝 떨어지고 있었다. 익숙한 비린내가 풍겨왔다. 피비린내. 여자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남자의 몸을 칼로 푹푹 찌르며 미친 듯이 욕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여자가 문가에 선 벤체슬라스를 확 쳐다보았다. 벤체슬라스는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며 나직이 말했다.
“움직이지 마.”
여자는 부릅뜬 눈으로 벤체슬라스와 그의 총을 번갈아 쳐다봤다. 눈동자 돌아가는 속도가 심상치 않았다. 정신질환이 있는 것 같다고 할까.
“경호원 중에 여자가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고. 넌 보석이겠군. 이름이 뭐지?”
“애, 앰버.”
“호박이라.”
벤체슬라스가 총구 끝으로 남자 쪽을 가리켰다.
“같은 편을 죽인 거 같은데.”
“같은 편 아니야! 이, 빌어먹을, 개새끼! 지옥에서 썩을, 사기꾼, 새끼!”
여자의 난도질이 다시 시작됐다.
“내 분량을 속였어! 내, 내 몫을! 아아악! 아아! 그게 어떤 건데! 어떤 건데!”
돈 얘기인가? 여자의 손에 쥔 칼은 이미 뚝 부러져서 자루만 남은 상태였다. 나머지는 남자의 몸에 박혀 있었다. 여자는 자신의 손이 다치는 줄도 모르고 죽은 남자를 계속 쑤셔 박고 있었다.
벤체슬라스는 수수께끼는 그냥 수수께끼로 남겨두기로 했다. 벤체슬라스는 이성을 되찾지 못하는 여자를 겨냥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최대한 머리를 노려서 한 방에 죽을 수 있게 해줬다.
산탄총의 커다란 총성이 저택 안에 울리자 미친 여자의 욕지기도, 죽은 남자를 퍽퍽 때리던 소리도 모두 총성의 여운에 묻혀 결국 조금 전보다 더한 적막에 잠기게 됐다.
여기저기서 고함소리와 발소리, 방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사파이어는 눈앞에 있는 경호원을 어떻게 처리해야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그 때, 커다란 총성이 들려왔다. 수문장 같이 문을 지키고 서 있던 경호원이 그 소리를 듣고 품 안에서 총을 빼들며 소리가 난 쪽으로 달려갔다. 벤체슬라스가 돌입한 모양이다. 사파이어는 경호원이 지키고 서 있던 문을 끼익 열었다.
안에는 이미 시신이 있었다. 전투를 대비하고 칼을 고쳐 쥐었던 사파이어는 칼끝을 바닥으로 내렸다. 시신은 코와 입에서 거의 검은색에 가까운 피를 흘리고 있었다.
몸이 다 식지 않은 걸 봐서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다. 타살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고 자살인가 하면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뭐였을까. 사고사? 아니면…….
사파이어는 시신의 주머니를 뒤졌다. 예상대로 약병이 손에 쥐여 나왔다. 세 개가 들어 있었는데 모두 텅텅 비어있었다. 약물 과다 복용으로 죽었겠군. 사파이어는 이 미지의 성분이 자신에게도 어떤 피해를 줄지 몰라서 바로 병을 버렸다.
이 보석도 앰버였을까? 사파이어는 죽은 자를 잠시 들여다본 후에 곧바로 다른 방으로 향했다.
7명의 경호원 중에서 적어도 4명은 달려왔다. 2명은 이미 처리한 걸 확인했다. 사파이어가 속도가 느린 걸까 아니면 다른 보석들을 상대하고 있는 걸까? 10개라고 했는데 2개는 이미 깨졌고, 나머지는 8개다. 각각의 실력이 어떨 진 모르겠다.
10개면 적어도 세공사가 3명 이상은 된다. 의뢰인이 잡석이라고 표현한 걸 보면 뜨내기 수준이겠지만 머릿수로 밀어붙이는 화력은 무시 못 한다.
벤체슬라스는 산탄총을 견착하고 침착하게 장전해 경호원을 하나씩 하나씩 해치웠다. 한 놈은 확실하게 죽였고 두 놈 째부터는 엄폐해서 권총으로 총격전이 벌어졌다.
벤체슬라스 역시 기둥 뒤에 몸을 숨기곤 남은 탄환 수를 계산했다. 조금 빠듯할 거 같은데.
벤체슬라스는 일부러 천장에 걸린 샹들리에를 쐈다. 커다란 샹들리에의 지지 고리가 박살나면서 크리스탈이 잔뜩 달린 샹들리에가 바닥으로 추락해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커다란 장애물을 하나 만든 셈이다. 크리스탈 파편이 도탄 사격을 한 것처럼 숨어있는 놈들에게 튄 것도 예상치 못한 이득이었고.
적이 잠시 당황하는 동안 벤체슬라스는 부족한 탄환을 채워 넣었다. 그리곤 총신 아래에 붙어있는 바를 철컥 잡아당겨 장전하며 기둥 뒤에서 나왔다. 기다렸다는 듯이 포화가 쏟아지려고 했지만 벤체슬라스는 적이 숨어있을 곳을 대강 짐작해서 아예 거기다 대고 사격을 해버렸다. 고개는 내밀지 못하고 총구만 뻗었던 손은 발사된 산탄에 갈기갈기 찢겼다.
벤체슬라스는 사신같이 뚜걱뚜걱 걸어가서 손을 쥔 채 비명을 지르는 경호원의 머리통을 날려버렸다.
하나, 둘, 그리고 셋. 순식간에 셋이 죽고 나머지 하나는 패닉에 빠져 도망치기 시작했다. 벤체슬라스는 그의 등에다 대고 총을 발사했다. 산탄이 마지막 경호원의 목숨을 앗아가자 벤체슬라스는 다시금 산탄총을 장전하며 저벅저벅 발걸음을 옮겼다.
저택 어딘가에서 간헐적으로 총성이 들려왔다. 사파이어가 걷고 있는 복도는 정적이 깔려 있었다. 총성이 나는 곳으로 모든 소음이 빨려 들어간 것처럼. 경호원들은 물론이고 보석까지 다 저 쪽으로 향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표적은 어디에 숨었을까. 저택을 벗어나지는 않았겠지. 자동차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창밖을 내다보면 저 멀리까지 억센 풀이 자라난 들판밖에 보이지 않는 황량한 곳인데 자동차 같은 게 돌아다니면 발견을 못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표적은 집 안에 숨어있다. 어디일까. 위층? 아래층? 숨겨진 방이 있나? 지하실인가? 이런 오래된 저택은 비밀통로도 있음직하다.
사파이어는 이제 제법 대담하게 소리 나는 것에도 신경 쓰지 않고 방문을 열고 다녔다. 자신이 확인한 방이라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 방문은 열어두었다.
몇 분 동안은 아무런 수확이 없었다. 그러다가 방문 하나를 열었을 때, 사파이어는 안에 있는 것을 보고 잠시 그대로 멈춰 섰다.
방 안에는 네 명의 사람이 서 있었다. 모두 문 쪽을 바라보고 서 있었는데 고개는 아래로 숙이고 있고 호흡이 심상치 않았다. 기괴한 모습이었다. 사람이라기보다 사람 껍데기를 씌운 괴물 같은 느낌이라서 사파이어는 어떻게 대응해야할지 잠시 고민했다.
사파이어는 재빨리 긴 칼을 버리고 품 안에서 권총을 꺼냈다. 칼이 바닥에 떨어지며 철그럭하는 소리를 내자 바닥을 내려다보며 가쁜 숨을 들썩들썩 쉬고 있던 네 명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사파이어는 주저하지 않았다. 방아쇠를 당기자 한 사람의 머리가 날아갔다. 나머지 셋이 이성을 잃고 달려왔다. 그들은 총을 꺼내지 않았다. 사파이어는 문을 열고 서 있었기 때문에 일단 문을 닫았다. 열고 나오는 놈부터 차례대로 죽일 생각이다.
그런데 방문을 긁는 소리와 발악이 들려올 뿐 문고리가 돌아가지는 않았다. 사파이어는 일단 안에 있는 놈들이 방문에 대고 사격을 가할까봐 문 옆으로 비켜섰다. 그런데 아무 반응도 없었다.
이런 건 또 처음이다. 사파이어에게는 기회였기 때문에 오히려 사파이어가 문에다 대고 총을 쐈다. 안에서 비명소리가 울렸다.
저것들은 인간이 아닌가? 지능이 없단 말인가? 총이 없을 수는 있지. 하지만 상대가 총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지 않는가? 한 명이 총으로 당했으면 문 같이 뚫리기 쉬운 것 뒤에는 서 있으면 안 된다는 걸 생각하지 못하나? 애초에 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지 않나?
상대의 비이성이 사파이어에게도 전염되었는지 사파이어가 직접 문고리를 돌려 방문을 열었다. 안에 있는 놈들이 모두 죽었는지 확인하지도 않은 채. 문에 바짝 붙어있던 하나가 죽었고, 그 시신이 총알받이가 되어주면서 아직 살아있던 나머지 둘이 사파이어에게 달려들었다.
벤체슬라스의 발자국마다 피가 찍혀 나왔다. 걷는 곳마다 피 웅덩이였다. 그가 지나가는 길에 시신이 하나씩 쓰러져 있었고, 구두 밑창에 찍혀 나오는 피가 희미해질 때쯤 또 다른 피 웅덩이를 밟게 되면서 피발자국은 복도 저편으로 끊임없이 이어졌다.
예상외로 달려 나오지 않는다. 정말 이것뿐인가? 그럼 나머지 보석은 전부 사파이어가 상대하고 있단 말인가? 사파이어를 찾아내야했다. 이전에는 그가 깨지든 말든 자신의 목숨만 보전하면 될 일이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사파이어는 살아있어야 한다. 최대한 다치지 않고.
벤체슬라스는 산탄총을 장전하며 다시 저택 입구의 커다란 홀로 돌아왔다.
누군가 있었다.
“당신 보석이야?”
상대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벤체슬라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려보이는 건지, 진짜 10대인지 분간이 안 가는 남자였는데 유들유들 웃는 꼴이 영악하기 짝이 없었다. 더 알아가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이건 시건방진 애새끼다. 곧 죽을 녀석이니까 어찌돼든 상관없지만.
“재수 더럽게 없네. 전부 위에다 가둬놨는데. 난 좀 쉬려고 했더니만.”
“넌 이름이 뭐지?”
“앰버. 당신 이름은 뭐야?”
벤체슬라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살살 웃으며 들러붙으려던 애새끼가 벤체슬라스에게서 자신과 비슷한 냄새를 맡았는지 싸가지 없는 본모습을 드러냈다.
“에이 씨발 좋게 좋게 가려고 했더니. 사람 말 무시하는 거 기분 나쁘네?”
“아까도 앰버라는 보석을 봤지. 여자였는데. 한 남자를 난도질하고 있었어. 죽은 남자도 이름이 앰버였나?”
“야. 이 새끼야. 대화라는 건 주고 받는 게 있어야…….”
벤체슬라스가 싱긋 미소 지었다. 천사를 조각한 것 같이 어떤 성스러움마저 느껴지는 미소여서 세상 경험이 아직 한참 부족한 어린 양아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벤체슬라스는 주저 없이 놈의 다리를 쐈다. 정강이가 완전히 박살났다.
“으아악! 아아악! 아악!”
놈이 기우뚱 쓰러지더니 피를 분수처럼 사방에 흩뿌리며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벤체슬라스가 놈에게 다가가 죽다 만 벌레처럼 발작을 하고 있는 놈의 배를 꾸욱 짓밟으며 총구를 들이댔다.
“일단, 꼬마야. 총 든 사람한테는 예의를 갖춰야 한단다. 기본 상식이지. 둘째, 대화라는 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성립이 된단다. 너 같이 사물에 지나지 않는 도구는 인간이 말하는 대로 따르면 되는 거야. 셋째, 난 너 같은 애새끼가 싫어. 한 번에 죽이지 않고 총알 낭비한 것도 돈 아까워. 그만한 가치도 없어 보이는데. 넌 질이 떨어져 보여. 그러니까 닥치고 내가 묻는 것에 고분고분 대답하지 않으면 이다음은 총알을 허비하지 않고 천천히 고문하면서 죽여줄 거야.”
박살난 다리를 부여잡고 울고 있던 양아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벤체슬라스는 “좋아.”하면서 배를 짓누르던 다리를 떼 주었다.
“다시 물어보지. 10개의 보석은 각각 어느 세공사의 소속이지? 이름이 전부 앰버인가?”
즉각 대답이 나오지 않자 벤체슬라스는 다시 상냥하게 미소 지으면서 박살난 다리를 꾸욱 짓밟았다.
“끄아악! 아아악!”
“대답.”
“네……. 네! 맞아요! 맞아요! 아악! 다리! 다리!”
“맞다는 말로는 설명이 안 되잖아. 자세히 대답해.”
“한 사람이요! 한 사람이에요! 주인님은 한 사람이에요! 10명 다 앰버 맞아요! 떼 줘요! 떼 달라고!”
정말 입이 가볍군. 고문을 당하고 있다곤 하지만 충성심이 처음부터 없는 걸지도 모른다. 어쨌든 묻는 말에 대답은 해주었으니 벤체슬라스는 발을 떼 주었다.
“그 다음 질문. 위층에 뭘 가둬놨다는 거지?”
다리 한 쪽이 날아간데다가 방금 무서운 꼴을 당했기 때문에 양아치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나머지 놈들, 보석, 보석이요! 네 명을 가뒀어요! 암살자가 그리로 갈 줄 알았으니까! 두 명일 줄은 몰랐으니까!”
“그리고 넌 바깥에 나가서 노닥거릴 생각이었다?”
“나는, 나는 그냥 그 놈들 이용만 하면 되니까……. 아악!”
양아치가 이 상황에도 살살 머리를 굴려가며 거짓말하려는 것이 보이기에 벤체슬라스는 다시 상처를 지그시 밟았다가 뗐다.
“난 지금 총알도 아깝고 시간도 아까워. 내가 널 과다출혈로 죽게 내버려두면 죽는데 시간이 얼마 걸리는 줄 알아? 온 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느낌을 겪어보고 싶나?”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잘못했어요, 제발…….”
“보석 넷을 어떻게 가둬놓을 수 있는 거지? 너 같은 게 마음대로 돌아다닐 정도면 나머지도 돌아다니고 있을 거 같은데.”
“마약, 마약이요. 마약을 써요.”
그 한 마디만 듣고도 벤체슬라스는 무슨 말인지 알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어떻게 보면 하시시로 젊은 청년들을 중독 시켜 암살자로 키워낸 산상노인의 직계 후예라고 할 수 있는 방법이다. 마약이라.
한 세공사가 10개나 되는 보석을 키우고 있다. 품질은 눈앞에 있는 놈을 보면 답이 나오고. 마약으로 길들인다는 소리를 들으니 아까 죽은 남자를 난도질하던 미친 여자의 행동도 이해가 간다.
이따위를 암살자라고 할 수 있나? 그냥 한 무리의 광인들이지. 전투기술도 형편없고 어쨌든 소모가 빠른 유형이지만 반대로 부족한 머릿수를 채워 넣기도 빠르다. 마약은 그만큼 간편하고 치명적이다. 벤체슬라스는 좋아하지 않는 방법이다. 마약이라는 비용이 필연적으로 계속 나가게 되니까.
상대는 싼 값에 대량의 잡석을 파는 상인이다. 남기는 건 별로 없겠지만 머릿수로 밀어붙여서 많은 양의 의뢰를 따내고, 싸구려 품질로 형편없이 일을 끝낸 다음 또 다른 일을 맡는 식이다. 시궁창 인생이 아닐 수 없다. 벤체슬라스가 가장 경멸하는 유형의 인간이다.
호박석은 무슨. 플라스틱으로 찍어낸 싸구려 인조 비즈겠지.
어쨌든 세공사가 여러 명 붙어있지 않다면 난이도는 낮은 편이다. 눈앞의 약은 놈은 상태가 멀쩡한 걸 보니 용케 중독되지 않고 자신이 보상으로 받는 마약을 화폐로 사용하고 있었겠지. 다른 중독자들을 이간질시키거나 자신의 수족처럼 부리면서.
무슨 이득이 있었을까? 어차피 세공사한테는 똑같은 돈벌이 수단일 텐데. 자신이 피해를 입지 않고 남을 이용해서 보신한다는 발상은 벤체슬라스의 덕목과도 맞지만 글쎄, 벤체슬라스는 이런 기생충 같은 놈이 제일 싫다. 보석인척 하는 쓸모없는 돌덩어리 같으니.
“그래. 이제 다 알겠군.”
“사, 살려줘요. 살려주세요.”
“이런 일을 하면서 영원히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지? 남을 이용하고 그 의미 없는 사다리를 최대한 기어오르면 언젠가는 여기서 탈출할 수 있을 것 같았지? 아니. 벗어날 수 없다. 너도. 나도.
벤체슬라스는 산탄총 끝으로 머리를 후려쳐 양아치를 기절시켰다. 이 놈은 정신을 잃은 동안 점점 몸 밖으로 피가 빠져나가서 다시는 눈을 뜨지 못하고 그대로 죽게 될 것이다. 어쨌든 탄환 한 개는 아낀 셈이니까.
벤체슬라스는 위층에 있을 사파이어를 찾아 나섰다.
두 놈은 눈에 초점이 풀려 있었다. 좀비같이 달려들긴 해도 일말의 이성 비슷한 게 남아있는지 맨손은 아니었다. 무기는 사파이어가 바닥에 떨어뜨린 긴 칼과 정확히 똑같은 물건들이었다. 공장에서 대량으로 찍어낸 칼인 것 같다. 사파이어는 바닥을 굴러다니던 칼을 얼른 쥐었다.
이제 양 손에 칼이 하나씩, 긴 칼은 공격용이고 중간 길이의 칼은 방어용이다. 사파이어는 어디서 공격이 들어와도 흐트러지지 않고 쳐낼 수 있도록 단단히 기마자세를 취했다.
첫 합이 맞붙었다. 한 손으로 막아내기 버거운 힘이었다. 그게 둘이나 있으니 긴장을 놓을 수가 없다. 다행인 점은 힘과 이성을 맞바꾸었는지 상대의 공격이 생각만큼 예리하진 않았다는 것이다. 위력만큼은 인정하지만.
사파이어는 한 놈의 칼을 쳐내고 다른 놈의 칼을 비껴 내렸다. 중간 칼로 막고, 긴 칼로 찌른다. 공격이 제대로 먹혀 들어갔지만 치명상은 아니었고 무엇보다 약을 복용한 상대는 고통을 잘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도리어 괴성을 지르며 더 악랄하게 달려들었다.
사파이어는 힘을 주어 놈의 목을 베어냈다. 깔끔하게 잘리지 않아서 턱선 부터 가슴 아래를 사선으로 베어버리는 식이었지만 놈은 피를 쏟아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완전히 무력화 됐다.
그러나 한 놈에게 너무 집중한 나머지 등 뒤에서 찔러오는 칼을 미처 막지 못했다. 사파이어가 예리한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리는 찰나, 철컥하고 장전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총성이 울렸다. 사파이어를 등 뒤에서 덮치려던 놈은 등에 산탄총을 맞고 반쯤 날아가듯이 앞으로 쓰러졌다.
벤체슬라스가 두 놈이 확실히 죽었는지 돌아보더니 교전이 일어난 방 안으로 한 발자국 걸어 들어왔다.
“다친 데는?”
“없습니다.”
사파이어가 칼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대답했다.
여태까지 처리한 머릿수를 계산해보니 대충 다 처리한 것 같다. 남은 건 표적뿐. 벤체슬라스가 아래층부터 뒤지면서 올라왔고 사파이어는 위층을 뒤지고 있었으니 이제 남은 곳은 하나였다. 복도 맨 끝의 방.
사파이어가 앞장서고 그 뒤에 벤체슬라스가 바짝 붙어서 따라갔다. 총은 뒤에서도 엄호할 수 있지만 칼은 그럴 수가 없다.
방문을 여니 한 남자가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아니, 내다본 게 아니다. 창틀에 침대시트를 벗겨내 엮은 밧줄이 늘어져 있었다. 남자는 창밖으로 탈출하는 누군가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남자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벤체슬라스가 사파이어를 방 밖으로 끄집어내며 “추적해!”하고 명령했다. 사파이어가 급히 달려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벤체슬라스는 방 안의 남자에게 총을 겨누고 외쳤다.
“움직이지 마!”
남자는 싸울 의사가 없다는 듯이 양손을 들어보였다가 침입자의 얼굴을 알아봤는지 얼굴 표정이 변했다. 당황한 얼굴에서 놀라움이 번져나갔다.
“당신은 보석이 아니잖아?”
벤체슬라스는 대답 없이 총구를 계속 남자에게 겨눈 채 한 발자국씩 다가가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창틀에 걸쳐져있던 임시 밧줄은 풀밭 위에까지 늘어져 데롱거리고 있었고, 밧줄을 타고 내려갔을 도망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벤체슬라스가 다시 남자를 돌아보았다.
“당신이 세공사인가?”
“그래……. 당신도 세공사잖아?”
“날 아나?”
“그 머리칼은 잊기 힘들지. 얼마 전에 협회에 전 재산을 털렸다면 더더욱.”
“세공사나 보석이나 말재주 없는 건 똑같군. 총 든 사람한테는 말을 가려서 해야 한다는 걸 모르나?”
“당신은 날 죽일 수 없어.”
“설명해봐.”
“세공사니까.”
단순하고 명확한 설명이었다. 세공사끼리 싸우지 말 것. 분란을 일으키지 말 것. 서로 죽이려고 하지 말 것. 그것이 협회가 말하는 규칙이고 이 바닥의 불문율이었다.
실제로 알료샤는 벤체슬라스를 죽이려다가 심한 징계를 받았다. 협회 소속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피해자인 벤체슬라스까지 소동에 휘말렸다는 이유로 재산을 뜯겼다.
협회는 그 정도로 세공사 사이에 싸움이 나는 것을 싫어한다. 작은 싸움이 암흑가의 전쟁으로 번지면 막을 길이 없다. 그렇게 되면 세공사들에게 비밀스런 의뢰를 맡겼던 권력자들과 부자들이 자신의 과거를 지우려고 들겠지. 국가가 나서서 경찰력을 동원하는 건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군대도 투입될 수 있겠지.
눈앞의 남자가 지적한대로 벤체슬라스는 몸을 사려야했다. 벤체슬라스는 벌써 두 번이나 사고를 쳤다. 이다음 기회는 없다는 경고를 들었다.
눈앞의 남자는 자신의 설득이 먹혀들어가자 긴장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맹수의 목에 밧줄을 걸었다. 벤체슬라스는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것 같았지만 방아쇠에서는 손가락을 뗐다. 남자는 한 발자국 더 나갔다.
“세공사가 보석을 따라다니면서 직접 일처리를 하다니, 사기 아닌가?”
“그래? 내 눈 앞에 있는 건 뭐지 그럼?”
“나는 10명이나 되는 보석을 관리하러 나왔을 뿐이야. 감시하지 않으면 한두 놈 도망갈지도 모르니까.”
“정말 수준 떨어지는군. 마약을 쓰면서도 통제가 안된다라.”
게다가 그 10개의 보석은 모조리 깨지고 말았다. 이 남자가 원가를 얼마나 들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값싼 인조보석이라고 해도 그만큼의 머릿수가 한 번에 사라진 건 뼈아픈 손실이겠지.
이미 벤체슬라스와 사파이어가 여기에 당도한 것을 본 순간 그는 모든 걸 깨달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손실에 대해서는 크게 아쉬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얼마나 적게 들였을까. 아무리 헐값에 팔아도 이윤이 남는 수준이라니. 어울리고 싶지 않은 족속이다.
“당신 보석은 모두 깨뜨렸으니까 장사 계속하려면 다른 보석을 더 준비해야할걸.”
“세공사가 개입하지 않았으면 내 것이 당신 보석을 집어삼켰을걸.”
“헛소리 하고 있네.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쓰레기가.”
벤체슬라스가 인상을 확 찌푸렸다.
“내가 저거에 들인 돈이 얼마인 줄 알아? 내가 너처럼 날로 먹는 줄 알아? 나는 최고만 상대하는 일류야. 너 같은 잡부가 감히 내 수준에 갖다 대?”
하긴 지금같이 예외적인 상황이 아니면 남자는 벤체슬라스는 물론 사파이어조차 만날 일이 없었을 것이다. 주제에 맞지 않는 일이다. 운 좋게 최상위 등급의 보석과 기술자를 만난 행운에 감사는 못할망정.
세공사만 아니었으면 가만두지 않았을 텐데 바다 너머의 협회는 이곳에서의 행동까지 제어할 정도로 힘이 세서 벤체슬라스는 애써 화를 누르며 뒤돌아섰다. 의뢰는 목표 인물을 죽이는 것뿐이었으니까 세공사는 이대로 내버려둔다. 이다음에 다시 만날 일은 없겠지.
그러나 남자 역시 자신이 받은 모욕을 참을 수가 없는지 넘어선 안 되는 선을 넘어버리고 말았다.
“라피스 라줄리.”
벤체슬라스가 우뚝 멈춰 섰다.
“당신 코드네임이 그거였지? 청금석. 알고 있어. 깨끗한 척 하고 있네. 아무런 흠결이 없어 보이지만 그냥 고고한 남창 아냐. 당신이랑 나는 당연히 같은 수준이 아니지. 나는 처음부터 세공사였고 당신은.”
벤체슬라스가 뒤돌아서서 바람같이 다가왔다. 코앞까지 다가와 이마를 맞대고 눈을 빤히 들여다보자 남자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움츠렸다.
“다시 말해봐.”
“나는 처음부터 세공사였고.”
“다시 말해봐.”
“당신은 처음부터 보석.”
벤체슬라스가 들고 있던 산탄총의 개머리판으로 남자를 찍어 내리기 시작했다.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속도였다.
남자 역시 타인을 제압할 만큼의 완력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습엔 당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협회의 규칙 때문에 벤체슬라스가 자신을 공격하지 못할 것이라고, 자신이 운 좋게 맹수의 목에 건 밧줄이 계속 버텨줄 거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방어하지 못했다.
남자는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바닥에 넘어졌다. 남자는 이러다 정말 죽을 것 같다고 느꼈다. 그래서 시퍼렇게 날 선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벤체슬라스가 또 다시 산탄총으로 구타하기 전에 그만 하라는 듯이 손을 들었다.
“잠깐, 잠깐만! 세공사끼리 싸우면 안 돼! 규칙을 알잖아!”
“입 닥쳐.”
“기다려! 잠깐 기다려! 콘스탄티네스쿠!”
벤체슬라스가 막 산탄총을 찍어 내리려다가 그대로 움직임이 멎었다. 두 눈을 질끈 감았던 남자는 자신의 외침이 효과가 있었던 건가, 벤체슬라스의 이성이 돌아왔나 싶어서 조심스레 눈을 떴다.
그는 살면서 그런 얼굴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악마가 실존한다면 바로 저 얼굴이다. 남자는 격렬한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순수한 악이 깃든 얼굴이 숨 막히는 불안감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당신 이름을 알게 됐어. 우연히.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그래. 유감이군.”
“지금이라도 정신을 차리면 나도 이 일에 대해서 입을 다물 테니까…….”
“그럴 필요 없어.”
억센 하얀 손아귀가 남자의 멱살을 붙잡더니 무서운 힘으로 일으켜 세웠다. 벤체슬라스는 남자를 창가로 질질 끌고 갔다. 저항할 수 없는 악력이 남자의 뒷덜미와 허리 벨트를 잡고 짐짝처럼 들어 올리더니 창밖으로 반쯤 내밀었다. 남자가 버둥거리며 소리쳤다.
“잠깐! 기다려! 진정해! 이러면 안 돼!”
“내 이름은 콘스탄티네스쿠가 아니거든.”
벤체슬라스는 남자를 밖으로 내던졌다. 온 몸이 중력에서 해방되는 느낌과 함께 무서운 속도로 바닥이 가까워지는 것을 보며 남자가 비명을 질렀다. 추락은 한순간이었다.
사파이어는 죽은 표적을 내려다보며 절도 있게 칼을 휘둘러 피를 털어냈다. 표적은 얼마 도망가지 못하고 거친 풀밭 위에서 죽었다.
문득 등 뒤에서 먼 비명소리가 들려오기에 고개를 돌리니 저택 창문에서 한 남자가 막 떨어져 내렸다. 바닥에 닿기까지 한순간이었다. 끔찍한 비명이 중간에 뚝 끊겼다.
사파이어는 그 쪽으로 저벅저벅 다가갔다. 창문에서 떨어진 남자는 목이 꺾인 상태였지만 아직 죽지 않고 피거품을 물고 있었다. 남자는 자신의 시야를 가리는 사파이어에게 마치 도와달라는 듯이 떨리는 손을 들어올렸다.
어떤 요청인지 분간할 수 없었기에 사파이어는 잠시 망설였다. 살려달라는 소리인가, 죽여 달라는 소리인가? 살려달라고 해봐야 도와줄 수 없고 죽여 달라고 해봤자 그는 몇 초 안으로 죽을 것 같다. 그 몇 초의 고통도 싫다는 건가.
나름대로 판단을 끝낸 사파이어가 남자의 목숨을 끊어주려고 칼을 드는 순간 저택에서 벤체슬라스가 빠른 속도로 걸어 나왔다. 손에 뭔가가 들려 있었다.
벤체슬라스의 모습을 보고 사파이어는 한 발자국 비켜섰다. 벤체슬라스는 벽난로에 불을 붙일 때 썼음직한 휘발유 연료통을 가지고 와서 아직 죽지 못한 남자에게 콸콸콸 들이붓기 시작했다. 남자의 눈이 경악으로 얼룩졌다. 남자가 제발 그냥 죽여 달라고 애원했지만 애원하는 입 속으로도 휘발유가 쏟아져 들어갔다.
남자가 자비를 구하면서 사파이어 쪽을 돌아보았다. 사파이어가 허락을 구하는 듯이 벤체슬라스 쪽을 쳐다보자 벤체슬라스가 무서운 눈으로 사파이어의 요청을 불허했다. 사파이어는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섰다. 남자는 휘발유를 뱉어내고 그르륵하는 소리를 내면서 바닥을 기려고 했다.
그 순간 불붙인 성냥이 남자에게 툭 떨어졌다. 불은 순식간에 휘발유에 들러붙어 산소를 공급받으며 미친 듯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불붙은 남자가 “그아악! 그아악!”하고 비명 지르면서 잘 움직여지지도 않는 몸을 구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불을 끄기는커녕 더 부추길 정도로 느려서 몸 곳곳이 더 잘 타오르도록 불만 더 붙이는 꼴이었다.
사람이 타오르는 모습은 끔찍하고 역겨운 광경이었다. 살아있어서 더 참혹했다.
타인의 고통에 둔감한 사파이어도 이 잔인한 죽음의 강렬함에는 약간 놀랄 정도였다. 벤체슬라스는 석고상처럼 아무런 표정변화 없이 불타는 남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남자는 점점 더 커다란 불이 됐다. 남자의 몸을 연료삼아 타오르는 불은 검은 연기를 내뿜었다. 단백질이 익어가는 역한 냄새가 났다. 오그라드는 살점이 가장 끔찍한 모습으로 마지막 발악을 했다가 서서히 움직임이 멎어갔다.
벤체슬라스는 남자가 완전히 죽은 것을 확인하고 뒤돌아섰다.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고 누군가가 신고할지도 모른다. 오래된 저택에 관심 없는 소방서라도 들불의 가능성은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겠지. 그들이 현장에 도착하기 전에 시체를 전부 치울 수 없을 것이다. 시체처리업자가 도착할 수도 없을 것이고.
벤체슬라스는 큰 실수를 저질렀다. 그 사실에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표적은?”
벤체슬라스가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묻자 사파이어가 표적의 시신이 누워있는 곳을 가리켰다.
“처리했습니다.”
“좋아. 돌아가지.”
“시체 처리는 어떻게 합니까?”
“네가 신경 쓸 일 아니야.”
“이대로 내버려두면 발각됩니다.”
“언제부터 너에게 판단할 권한을 줬지?”
사파이어가 입을 다물자 벤체슬라스는 그대로 앞장서서 걸어 나갔다. 사파이어는 아직도 불타오르고 있는 남자의 시신을 슥 돌아보곤 벤체슬라스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콘스탄티네스쿠.”
바유미 씨가 물었다.
“그게 당신 이름입니까?”
벤체슬라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협회 건물 안이었지만 어쩐지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설었다. 벽도 천장도 기억하던 것보다 더 높다. 벤체슬라스는 비현실적인 몽롱함을 느끼며 다시 앞을 돌아보았다. 바유미 씨가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오.”
“그럼 당신은 뭡니까?”
“내 이름은…….”
“신중하게 생각하십시오.”
바유미 씨의 경고에 벤체슬라스는 마른 입술을 한 번 더 핥았다.
정체성을 결정하는 첫 이름. 다른 존재로서 삶을 시작하는 새로운 이름이다.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선택이었다. 과거로는 돌아갈 수 없다. 불공평한 일이었다. 누구도 그에게 무언가를 선택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갓 태어난 아기에게 뛰라고 한 다음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는 식이었다.
벤체슬라스는 입술을 질끈 물었다. 첫 번째 이름. 세공사로서 살아가게 될, 인간으로서의 첫 번째 이름.
“나는…….”
바유미 씨는 재촉하지 않고 차분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한 발 내딛기가 이렇게 힘들 줄이야. 벤체슬라스는 한심하게도 옷자락을 꾸깃하고 쥐었다. 손에 고인 땀 때문에 끝자락이 축축해지는 게 느껴졌다. 어차피 별 값어치도 없는 옷이긴 하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여태까지 잘 해오지 않았는가. 벤체슬라스는 첫 이름을 결정하고 입을 열었다.
벤체슬라스는 눈을 번쩍 떴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가로등 빛이 창문에 친 블라인드 틈사이로 파고들어 천장에 이상한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창 밖에서는 경적소리가 울렸고, 잠시 후에 말다툼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벤체슬라스는 온 몸이 경직된 상태로 눈만 굴려 여기가 어딘가 확인했다. 금방 기억이 돌아왔다.
여기는 런던이다. 내가 마련한 아파트고. 스코틀랜드까지 가야 했던 의뢰는 뒤처리가 깔끔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해결했다. 의뢰인에겐 보상금을 지급받았고. 모든 게 괜찮다. 괜찮다. 진정해라. 다 내가 이룬 것이다.
벤체슬라스는 몸을 일으켰다. 차갑게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기분 나쁜 악몽이었다.
꽤 오랫동안 잊고 살았는데 과거에 대한 꿈을 꾸고 말았다. 끈적하게 들러붙는 악몽의 잔상이 그를 꽤 길게 흔들어놓았다. 다행히 현실은 단단한 바닥에 기초를 두었기 때문에 벤체슬라스는 곧 안정을 되찾았다.
집은 있다. 차도 있고. 금괴 몇 개는 팔지 않고 아직 가지고 있다. 그러니 재산도 있는 셈이다. 몸은 어디 하나 아픈데 없이 건강하다. 아직 젊고, 힘이 넘친다. 사파이어도 있다. 나의 충실한 인형.
벤체슬라스는 욕실로 들어가 샤워기를 틀고 그 아래에 섰다. 뜨거운 물이 정신을 들게 해줬다. 식은땀을 씻어 내리자 아까보다 훨씬 더 나아졌다. 일어난 김에 차를 한 잔 마셔야겠다. 이 나라에 오면 이상하게도 차를 찾게 된다. 찻잎의 품질이 좋다면 더 좋겠지만 춥고 으슬으슬한 밤에는 고급차든 저급차든 신경 쓰지 않게 된다. 몸을 따뜻하게 데울 수만 있다면.
싸구려 티백으로 차를 우린 다음 우유를 조금만 넣고, 설탕은 전혀 넣지 않는다. 벤체슬라스는 밀크티 잔을 들고 사파이어의 방으로 향했다. 조용히 문을 여니 문 틈새로 빛이 흘러들어가 침대 위의 사파이어를 조심스레 비췄다.
그는 등을 돌린 채 자고 있었다. 완전히 무방비한 상태. 사파이어를 깨우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벤체슬라스는 다시 문을 닫았다. 내 소유물이 제대로 있나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다.
벤체슬라스는 다시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차는 빈말로라도 맛이 좋다고 할 수 없었지만 따뜻한 온기는 확실히 정신건강에 도움이 됐다.
벤체슬라스는 창밖을 내다보며 차를 홀짝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로 차를 반쯤 비운 벤체슬라스는 남은 것을 협탁 위에 올려놓고 다시 침대 위로 올라갔다. 그는 최대한 빛이 들어오지 않는 그늘 속으로 몸을 밀착시켜서 무릎을 껴안고 몸을 웅크렸다.
밤이 깊도록 벤체슬라스는 그 자세로 침대 끄트머리를 가만히 응시하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벤체슬라스가 본 것과 달리 사파이어는 고요한 밤을 보내고 있지는 않았다. 그는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는 아직 스코틀랜드의 저택을 헤매고 있었다. 열리지 않는 문과 먼지 날리는 두꺼운 커튼들이 그의 세계였다.
미친 사람들의 괴성이 사방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코를 훌쩍이는 소리도 들리고, 무언가에 항의하는 소리, 깔깔 웃는 소리가 어지럽게 뒤섞였다. 사파이어는 잔뜩 긴장한 채로 무기를 점검해봤다. 손에 쥔 칼만 있을 뿐 분명히 품 안에 넣어뒀던 권총은 보이지 않았다.
장면이 확 바뀌는가 싶더니 사파이어는 누군가와 칼을 섞으며 싸우고 있었다. 칼날이 머리 위에서 번뜩거렸다. 이 불안한 느낌, 이 익숙한 위기감.
칼날은 머리 위로 떨어지지 않고 벽에 박혔지만 그 순간 사파이어는 그 방에서 튕겨져 나와, 그 오래된 저택에서 강제로 끌려나왔다. 그를 둘러싸고 있던 환경이 모래성처럼 와르르 무너져 내리면서 새로운 장면으로 바뀌었다.
수술실 같이 하얀 복도가 끝없이 이어져 있고 온기라고는 전혀 없는 창백한 조명이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여기는……. 사파이어는 갑자기 다리 쪽에서 격통을 느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발가벗은 상태였고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빨간 망사스타킹만 신은 상태다. 다리 한 쪽은 부상을 입어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손에 쥔 무기는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게 기억났다. 뒤에서 머리를 박박 민 식인 살인마가 쫓아오고 있었다. 사파이어는 절뚝거리며 복도를 달려 도망쳤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추격전이 계속됐다. 속도는 좀처럼 나지 않았고 그와 살인마 사이의 거리는 점점 좁혀졌다. 익숙한 긴장이 그의 뒷덜미를 물어뜯었다.
그 감각은 엎드린 그에게 드리워지던 긴 머리칼의 끝부분 같이 예리한.
장면이 바뀌었다. 그는 범해지고 있었다. 신경을 후벼 파는 통증과 불쾌감이 온 몸을 소름 돋게 만들었다. 등 뒤에 맞붙은 근육질의 몸과 목덜미에 와 닿는 타인의 머리칼이 토하고 싶을 정도로 역겹다.
사파이어에게는 이것이 남자와 하는 첫 섹스였다. 섹스라기보다는 강제적인 침범이었다. 몸을 약탈당하는 중이었다.
정말 싫다. 싫다. 싫다. 좋고 싫음을 딱히 구분하지 않던 평소와 달리 지금은 모든 것이 역겹고 불쾌하고 싫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가로막히고 틀어 막혀서 해소할 수도 없는 싫음이었다.
스트레스가 극한에 달했을 때, 사파이어는 돌연 모든 것을 떠올려버렸다. 그의 머릿속이 그를 지키기 위해 단단하게 걸어놨던 자물쇠가 어느 순간부터 녹이 슬고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충격이 쌓이고 쌓여서 아주 사소한 자극으로, 그 사소한 기억으로 깨져버리면서 잊고 있던 모든 것들이 봇물처럼 밀고 들어왔다. 엄청난 깨달음이었다.
사파이어는 비명을 지르며 정신을 차렸다. 꿈에서 깼다기보다 악몽에서 강제로 추방된 각성이었다. 사파이어는 패닉에 빠져서 발작을 일으키고 있었다. 꿈에서 깨달은 것들의 파편 하나하나는 산사태처럼 쏟아지는 바윗덩어리 같아서 사파이어의 이성을 압도하고, 그를 다른 나락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벤체슬라스가 침대 위로 올라와 사파이어를 진정시켰다.
사파이어는 한순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커흑……. 커헉…….”
사파이어가 호흡곤란을 일으키기 시작하자 벤체슬라스가 양 손으로 그의 머리를 잡고 자신을 바라보게 고정시키며 베개에 지그시 눌렀다.
“숨 쉬어.”
“컥……. 헉…….”
“멈추지 마. 천천히. 천천히…….”
벤체슬라스는 금방이라도 움직임이 멎을 것처럼 격렬하게 뛰는 사파이어의 심장에 대고 멈추지 말라고 한 것이다.
머리를 붙잡혀서 고개를 뒤틀 수 없게 된 사파이어가 발작적으로 팔다리를 퍼득거리다가 벤체슬라스의 어깨를 잡고, 그의 옷을 구겨 쥐고, 힘이 빠지며 서서히 팔 아래로 내려왔다. 벤체슬라스가 단단히 붙잡고 있자 서서히 발작이 잦아들며 이성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오자 벤체슬라스가 땀에 젖은 사파이어의 이마를 쓸어 올려주었다.
사파이어는 빠른 속도로 꿈을 잊어가고 있었다. 그의 뇌는 몸을 극도의 스트레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깨졌던 자물쇠를 복구해서 다시 과거의 기억들을 단단히 밀어 넣고, 봉쇄하고, 가두었다.
사파이어 역시 현실이란 단단한 기반 위에 세워진 것이라서 벤체슬라스의 얼굴을 제대로 식별하게 되자 점차 안정을 되찾았다. 그의 정체성이란 보석이고, 노예고, 복종하는 자다.
꿈에서 뭘 봤는지 뭘 깨달았는지도 떠올리지 못하겠다. 무언가 엄청 중요한 것이라는 어렴풋한 느낌은 있지만 동시에 절대로 기억해서는 안 될 위험한 것이라는 경고신호도 같이 울리고 있어서 사파이어는 불안한 눈동자를 흔들거리며 벤체슬라스의 품에 안겼다.
평소와 같이 나를 이 혼란 속에서 구해주세요. 모든 것을 명확하게 정의하는 당신의 그 권능으로.
벤체슬라스는 다시 잠들지 못하는 사파이어를 끌어안고 이따금씩 “쉬잇.”하고 달래주며 밤을 지새웠다.
모든 것이 잘 되어 가는데 왜 이렇게 불안한지 모르겠다.
벤체슬라스는 간밤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고 사파이어는 혼란스러웠던 밤을 빨리 잊었다. 해가 뜨고 또 하루가 시작되자 사파이어는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의 정신은 견고하다.
벤체슬라스는 피곤해보였지만 오늘은 다른 의뢰인과 상담하러 나가야 했기 때문에 정장을 차려입고 있었다. 사파이어를 내버려두려던 벤체슬라스는 생각을 바꾸어서 사파이어도 함께 데리고 갔다.
지난밤에 그런 일이 있었으니 혼자 내버려뒀다간 어느 쪽으로 변화가 일어날지 모른다. 이번 일까지만 맡고 당분간 휴식을 취하면서 그에게 어떤 틈새가 생기지 않았는지 점검해봐야겠다.
의뢰인은 피카딜리 서커스 광장에서 만나자고 했다. 의심이 많고 용의주도한 사람이라서 사전에 만날 약속을 잡지 않은 사파이어가 같이 나타나면 나쁜 인상을 줄 게 분명했기에,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를 관광객들이 잔뜩 앉아있는 분수대 계단에 대기시켰다. 어차피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다.
사파이어는 멀어져가는 벤체슬라스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주변 사람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소음 때문인지 약간 두통이 있었다. 이따금씩 시야를 가리는 빨간색 2층 버스가 지나가서 눈에 가해지는 자극은 한층 더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예술가들이 바로 근처에 자리를 잡고 공연을 하기 시작했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온갖 자극에 약간 멍해진 상태로 광장을 둘러보던 사파이어의 어깨에 누군가의 손이 턱 얹혔다. 사파이어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나 진짜 더 이상은 못 참겠다.”
알료샤였다.
“나 당신 납치할래요. 당신 허락 없이.”
벤체슬라스는 꽤 큰 건수를 물었다. 영국 안에서 인지도가 쌓여가고 있다는 소리다. 넘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벌써 그를 지명하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건 그의 실력이 원래부터 뛰어났음을 반증한다. 보석을 세공하는 솜씨도, 그 자신의 암살 능력도.
돈을 번다는 기쁨도 있었지만 고객들이 자신의 능력을 알아봐주고 인정해준다는 사실이 뿌듯했다. 그의 부는 운이 좋아서 이루어냈던 것이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다시 일어설 수 있다.
이야기가 생각보다 빨리 끝났기 때문에 벤체슬라스는 광장에서 기다리고 있을 사파이어에게 서둘러 돌아가려 했다. 그런 벤체슬라스의 앞에 누군가가 불쑥 나타나 그를 가로막고 섰다.
후드를 덮어쓴 동양인 남자였는데 벤체슬라스는 처음에 그가 우연히 자신의 진행방향을 막은 건줄 알았다. 그러나 옆으로 돌아서 가려고 해도 그가 옆걸음질 치며 막아서자 그제야 고의인 것을 알았다.
“뭐야?”
“나 기억해?”
남자가 후드를 벗었다. 뺨에 관통상을 당한 흉터가 있었고 나머지는 깨끗했다. 남자의 눈은 적개심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당연히 벤체슬라스는 남자를 알아보지 못했다.
“구걸은 다른데 가서 하지 그래.”
“내 이름은 스피넬이다.”
“아.”
남자가 이름을 말하자 그제야 벤체슬라스가 기억해냈다. 독일에서 그가 레이피어로 벌집을 만들어놨던 남자다.
“죽지 않고 살아있었군?”
“덕분에.”
“그래서 내 앞에 나타난 이유가 뭐지? 취직 활동이라도 하려고?”
벤체슬라스는 자신이 내뱉은 말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자가 정말로 찾아올 줄은 몰랐다. 사파이어처럼 부러뜨려서 고분고분한 성격으로 만들어놓기엔 시간과 노력이 많이 걸릴 것 같고, 지금 당장은 하청으로 굴릴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남자의 눈을 보면 그런 건 염두에도 두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지만.
“취직 좋아하네,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가. 허세는 이제 안 통해.”
남자도 협회가 벤체슬라스에게 어떤 벌을 내렸는지 알고 있는 것 같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중간을 유지하던 벤체슬라스의 심경이 콱 뒤틀렸다.
“보석 주제에 세공사한테 시비질이라니 배짱 좋은데.”
“그따위 계급논리도 이제 안 통해.”
남자가 툭 내뱉었다. 그 한 마디 속에서 벤체슬라스는 심상치 않은 냄새를 맡았다. 익숙하고도 거부감이 드는 악취였다. 벤체슬라스는 남자를 노려보다가 물었다.
“너도 그 이상한 사회주의 사이비 종교에 들어간 건가?”
“애초에 보석이 일을 하고 세공사가 돈을 가져가는 게 말이 안 되는 시스템이지.”
벤체슬라스는 더 확인하지 않았다. 조금 있으면 눈앞의 남자가 공산당 선언 암살자 버전을 읊을 기세여서 그냥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알료샤 패거리에 들어간 모양인데 이 남자의 인생이 그 사기꾼에게 휘말려 들어서 어떻게 망가지던 알 바 아니다. 굳이 엮이기 싫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같은 모멸감을 견뎌야 하는 이유가 알료샤 때문인데.
벤체슬라스가 남자를 피해서 갈 길을 가려고 하자 남자가 또 한 번 막아섰다. 벤체슬라스가 차가운 눈으로 그를 내려다봤다.
“비켜. 거렁뱅이야.”
“안 돼.”
벤체슬라스가 품 안으로 손을 집어넣자 남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런던 한복판에서 총질이라도 하려고?”
“안될 거 없지.”
“당신은 여기서 사고를 더 치면 안 될 텐데? 말했지. 허세는 안 통한다고.”
“허세인지 아닌지 볼까.”
벤체슬라스가 품 안에서 천천히 손을 빼내자 남자가 잔뜩 긴장했다. 벤체슬라스의 손에는 총이 아니라 너클이 끼워져 있었다. 남자가 움찔하는 순간 벤체슬라스의 주먹이 날아왔다.
사파이어는 다짜고짜 손을 채어 잡는 알료샤를 거칠게 흔들며 털어내려고 했다. 이전 같았으면 순순히 손을 놔줬을 알료샤는 이번엔 사람이 아주 바뀌어버린 것처럼 집요했다. 그의 손가락은 모양만 사람 손인 쇠사슬처럼 사파이어를 결박했다.
알료샤가 사파이어를 질질 끌고 가기 시작하자 사파이어가 알료샤를 걷어찼다. 매서운 위력이 실린 발길질일 텐데도 알료샤는 흔들림이 없었다.
거리의 사람들은 두 남자 사이에 싸움이 난건가 싶어서 하던 것도 멈추고 둘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사파이어의 저항이 점점 심해지자 알료샤가 대뜸 걸음을 멈추고 사파이어를 와락 끌어안았다. 둘의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놀란 소리를 터뜨렸다.
알료샤는 사파이어를 양 팔로 감아 끌어안고 동정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더 이상은 같은 실수 저지르지 않을 거예요.”
“놔!”
“당신 말 듣고 놔줬다가 후회 많이 했어요. 이젠 그러지 않을 거야.”
“놓으라고!”
“싫어! 또 다치잖아! 그 남자한테 돌아갈 거잖아! 맞을 걸 알면서도! 망가지면서! 박살나면서!”
이쪽을 쳐다보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
“그 놈이 그럴 가치가 없다는 거 왜 몰라! 충성을 왜 그런데다 낭비하고 있어! 당신은 인간이야! 제대로 대우받아야 돼! 사랑받아야 한다고! 당신은 세뇌된 거야! 세뇌된 거라고!”
마지막 두 마디는 쇠망치처럼 사파이어를 쾅 쾅 때렸다. 사파이어가 놀란 눈으로 알료샤를 올려다보자 알료샤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툭 떨어졌다. 그는 용케도 이성을 되찾았다. 눈물 한 방울이 오열로 번지진 않았다.
그러나 사파이어의 얼굴 위에 툭 떨어진 그 한 방울이 사파이어 본인에게는 무엇보다도 강력한 화학작용을 일으켰다. 뇌가 몸을 보호하기 위해 굳게 닫아두었던 기억이 그 눈물 한 방울 때문에 어처구니없이 풀려나왔다.
자신을 위해 이렇게 울어주던 사람이 있었다. 독일, 슈바르츠발트에서. 당신은 세뇌된 거다. 당신은 당신만의 삶이 있었다. 당신의 이름을 기억해내라. 당신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으, 윽!”
알료샤는 사파이어가 품 안에서 경직되며 두 눈을 부릅뜨자 당황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누그러뜨렸다. 그 다음에 예상치 못한 반응이 나왔다. 사파이어가 알료샤의 품을 밀어내면서 밑바닥을 기는 것 같은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쥐어짜내는 고통의 소리였다.
“아, 윽, 아악, 아아악! 아아아악!”
사파이어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굽어지는 손가락이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암시했다. 알료샤는 놀라서 얼른 사파이어를 떼어냈다. 둘의 모습을 지켜보던 거리의 시민들은 극적인 광경 때문에 이게 무슨 드라마나 영화 촬영일거라고 생각했다가 동양인 남자의 연기가 너무 자연스러웠기 때문에 슬슬 연기가 아니라 진짜 상황이 아닌가 의심하기 시작했다.
사파이어가 바닥에 무릎을 꿇자 상황이 급변했다. 저건 아픈 척 연기하는 게 아니다. 진짜다! 상황을 지켜보던 사람 중 몇 명이 괜찮냐며 다가왔다. 알료샤는 그들에게 물러서라고 손짓하며 사파이어를 부축했다.
그러나 사파이어가 알료샤의 손길을 거부했다. 아니, 끔찍한 것을 보기라도 하는 듯이 알료샤의 손을 털어내면서 점점 더 처참한 소리를 질렀다. 그는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그의 눈에는 알료샤가 어떻게 보이는 걸까.
사파이어가 자신의 양 손을 보더니 벌레 같은 것이 붙어있기라도 한듯이, 그것도 한 마리가 아니고 수십 마리는 되는 것처럼 털어내기 시작했다. 손을 털고, 어깨를, 머리를 발작적으로 털고 급기야 그 손길이 자신을 긁어내리려고 하자 알료샤가 자신의 몸을 끼워 넣으며 그것을 막았다.
그 때, 극도로 분노에 찬 외침이 들려왔다.
“손 떼! 그에게서 떨어져!”
스피넬은 벤체슬라스의 주먹을 가뿐하게 피해냈다. 공격은 하지 않고 살살 약 올리면서 고개만 빼고 있는 것을 보니 시간끌기가 분명하다. 대체 왜? 그가 벤체슬라스의 발목을 잡아서 무슨……. 이득이 있다고…….
벤체슬라스는 머릿속에 떠오른 가능성 때문에 숨을 들이켰다. 스피넬이 그것을 보고 씨익 웃었다.
“왜? 한 대 쳐보시지, 백인 나리? 응?”
“비켜.”
벤체슬라스가 진짜로 총을 꺼내들었다. 이제는 누군가가 보든 말든 상관없었다. 스피넬은 총을 보자 두 손을 들어 올리며 순순히 물러섰다. 벤체슬라스는 그를 무시하고 달리기 시작했다.
사파이어. 사파이어. 미칠 듯이 불안했다. 왜 생각하지 못했단 말인가. 저 남자가 나타나서 그 사이비 종교 같은 소리를 할 때 바로 알아봤어야 했는데.
정서불안 상태의 값비싼 보석을 길바닥에 내버려 둔 채로 싸구려 도발에 놀아나고 있었다니. 누군가가 주워갈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왜 당연하다는 듯이 알료샤가 바다 건너편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그를 떠올리기도 싫었기 때문에?
광장에 다다르니 소란이 벌어져 있었다.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지나가니 무릎 꿇은 사파이어와 그를 부축하는 알료샤의 모습이 보였다. 사파이어는 고통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를 일으켜 세우려는 알료샤의 손을 보자 벤체슬라스는 격노를 터뜨렸다.
“손 떼! 그에게서 떨어져!”
알료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벤체슬라스가 당장 달려가서 그를 붙잡아 떼어내려고 하는데 대뜸 그의 앞을 막아서는 사람이 있었다.
또 스피넬이었다. 벤체슬라스는 더 이상 참지 않고 그에게 주먹을 박아 넣었다. 스피넬은 이번엔 피하지 못하고 얼굴에 제대로 일격을 맞고 뒤로 나동그라졌다. 상황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경악했다.
스피넬은 한 순간 바닥에 뻗었다가 재빨리 몸을 일으켜 세워서 벤체슬라스의 허리에 매달렸다. 벤체슬라스가 급소를 붙잡힌 짐승처럼 사나운 기세로 내려다보자 스피넬이 씨익 웃었다. 벤체슬라스의 발길질이 날아와도 그는 손을 떼지 않았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달려 나와서 벤체슬라스와 스피넬을 떼어내려고 했다.
그 사이에 알료샤는 이판사판으로 사파이어를 품에 안고 달리기 시작했다. 자기보다 체격이 작다고는 해도 엄연히 남자 체구인데 이렇듯 가뿐하게 들고 뛰는 모습이 비현실적이었다.
벤체슬라스의 노성이 쩌렁쩌렁 울렸다.
“사파이어!”
한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이 사파이어가 패닉 상태에서 빠져나왔다. 몸이 그렇듯이 뇌도 관성이 있다. 여태껏 길들여졌기 때문에 주인의 목소리에 단번에 반응했다.
사파이어는 자신을 안고 있는 알료샤의 품 안에서 격하게 저항하며 그의 팔 밖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사파이어가 바닥에 내려서는 것을 본 벤체슬라스가 외쳤다.
“죽여!”
사파이어는 고개를 돌려 벤체슬라스를 확인하고 다시 알료샤를 바라봤다. 잠에서 깬 것처럼 정신없는 상황이다. 무기는? 발목에 단검을 하나 숨겨두긴 했다. 꺼낼 틈이 있을까?
알료샤와 대치하고 선 사파이어가 잔뜩 긴장한 것에 반해 그런 사파이어를 내려다보는 알료샤의 눈은 씁쓸한 애정을 담고 있었다.
“죽일 거예요?”
“난……. 명령을 받았어.”
“사파이어. 날 봐요. 당신이 결정해요. 누구의 말도 듣지 말고. 저기 있는 남자 말도 듣지 말고. 당신 스스로 판단해요. 날 죽일 거예요?”
“나는, 나는.”
“죽여! 당장!”
벤체슬라스가 스피넬을 완전히 떨어뜨려놓고, 행인들도 뿌리치면서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사파이어는 숨겨두었던 단검을 재빨리 꺼내들었다. 알료샤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사파이어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시야가 흔들거렸다. 세상은 멀쩡한가. 흔들리는 건 내 눈인가.
사파이어가 어찌할 바를 모르자 알료샤가 지그시 눈을 감으며 양 팔을 벌려주었다. 사파이어가 헤매지 않고 찌를 수 있게. 지척까지 다가온 벤체슬라스가 악귀 같은 형상으로 “죽이라고!”하고 외쳤다.
굉장히 익숙한 거부감이 든다…….
사파이어는 단검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이상했다. 사파이어의 뺨 위로 눈물줄기가 흘러내렸다. 사파이어는 도움을 바라는 듯이 벤체슬라스를 돌아보았다.
“죽일 수가 없어요…….”
눈을 감고 사파이어의 칼을 기다리던 알료샤가 대답했다.
“잘 대답했어요. 이제부턴 내가 책임질게요.”
알료샤가 눈을 뜨고 사파이어를 와락 붙잡아 자신의 등 뒤로 돌렸다. 그리고 벤체슬라스와 정면으로 맞섰다.
“그는 스스로 선택했어. 난 그의 의지를 존중한다.”
“그는 내 보석이야! 내 재산이야!”
“그는 인간이야.”
벤체슬라스가 알료샤를 지나치려는 순간 알료샤가 그의 멱살을 붙잡아 바닥에 메다꽂았다. 뒤통수부터 처박힌 충격은 아찔했다. 알료샤가 냉엄하게 선언했다.
“그는 이제 내 보호 아래 있다. 그에게 볼 일이 있으면 나를 거쳐서 가라.”
“사파이어!”
바닥에 찍혀 눌린 벤체슬라스가 독기 어린 눈을 빛내며 소리치자 사파이어의 어깨가 크게 떨렸다. 그러나 벤체슬라스가 더 말하기도 전에 알료샤가 그를 걷어찼다. 사파이어에게 쏟아지는 언어적인 폭력조차 용서하지 못한다. 보는 것만으로도 사파이어를 겁에 질리게 하는 저 눈알까지 뽑아버릴 의사가 있었다.
길에서 난투극이 벌어졌다는 신고가 접수되었고 경찰이 나타났다. 알료샤는 벤체슬라스를 한 번 더 걷어찬 다음 사파이어의 손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벤체슬라스는 얼떨결에 끌려가는 사파이어의 뒤통수를 악랄하게 물어뜯었다.
“돌아와! 명령이다! 죽여 버릴 거야!”
사파이어가 흠칫흠칫 떨자 알료샤가 더 가까이 밀착해왔다.
“나를 믿고 조금만 더 따라와 줘요.”
뒤에 남겨진 벤체슬라스는 멍하니 있을 틈이 없었다. 경찰들이 혼란스러운 인파를 헤집고 나오며 벤체슬라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여기서 경찰에게 붙잡히면 점점 더 사파이어와 거리가 떨어질뿐더러 무엇보다도 그는 지금 총을 가지고 있다. 도망쳐야한다.
벤체슬라스가 달리기 시작하자 뒤에서 “거기! 멈춰!”하는 외침이 들려왔다.
사파이어의 손을 잡고 달리던 알료샤는 길가에 세워진 오토바이가 시동이 아직 걸려있는 것을 보고 냅다 뒷좌석에 사파이어를 태웠다. 그리고 자신은 앞에 올라탔다. 잠시 볼 일이 있어 오토바이를 내버려두었던 원래 주인이 그 모습을 보고 허겁지겁 달려왔다.
“당신들 뭐하는 거야!”
알료샤가 스로틀을 콱 붙잡고 돌리려다가 그 소리를 듣고는 품 안을 뒤적거리더니 무언가를 공중에 흩뿌렸다. 10파운드짜리 지폐 한 묶음이 폭죽이라도 되는 것처럼 팔랑팔랑 흩날렸다. 오토바이 주인은 물론이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까지 그 광경을 보고 놀랐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돈을 줍느라 정신이 없었고 오토바이 주인은 그런 사람들에게 가로막혀 발이 묶였다.
알료샤는 사파이어를 뒷자리에 태운 채 그대로 내뺐다.
아직 경찰의 추적을 받고 있는 벤체슬라스가 골목을 통과해 바깥으로 빠져나오자마자 그 앞으로 사파이어를 태운 알료샤가 순식간에 스쳐지나갔다.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알료샤의 허리를 잡고 있던 사파이어는 골목 어귀에 서 있는 주인을 알아보았다.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오토바이가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고 있었다.
알료샤가 고개를 돌려 등 뒤의 사파이어에게 물었다.
“두려워요?”
사파이어는 그저 알료샤의 허리를 잡은 손에 힘을 좀 더 줄 뿐이었다. 사파이어가 귀에 대고 “앞.”하고 짧게 속삭이자 알료샤가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확실히 미친 짓이기는 하다. 차량 사이로 곡예 주행을 하면서 앞도 보지 않다니. 두렵냐고? 확실히 두려울 것이다. 멀리 있는 주인의 분노보다도 눈앞에 있는 교통사고의 가능성에 대해.
피카딜리 서커스 광장을 빠져나온 오토바이는 여왕 폐하의 극장을 지나쳐 트라팔가 광장으로 진입했다.
사파이어에게는 모든 것이 몽롱했다. 거리의 불빛은 혼탁하게 일그러져 춤추고 있었고 차량 소음과 북적이는 인파가 뒤섞여 하나의 물결같이 보였다. 얼굴 위로 무언가가 툭 떨어져 내렸다. 물방울이었다. 그것을 기점으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록 알료샤의 운전은 사파이어를 약간 불안하게 만들었으나 지금까지는 순탄하게 달리고 있었다. 사파이어는 도로 위로 떨어져 끔찍하게 갈려나가는 것을 상상하기 싫었기 때문에 알료샤의 등에 더더욱 몸을 밀착했다. 알료샤가 웃느라고 몸이 들썩거리는 것이 느껴졌지만 웃음소리는 바람에 전부 흩날려 잘 들리지 않았다.
알료샤에게는 그야말로 환상적인 시간이었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두 번, 아니 세 번이나 연달아 받은 것처럼. 아름다운 도주행이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뒤에서 또 다른 오토바이가 미친놈처럼 따라붙기 전까지는.
벤체슬라스였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어디서 탈취했는지 오토바이를 타고 알료샤의 뒤를 바짝 쫓아오고 있었다. 그는 이제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전 재산이 든 지갑을 통째로 뺏긴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달까. 핏발 서서 제정신이 아닌 눈은 이 거리에서도 식별이 가능했다.
하지만 사파이어는 이미 자신이 데리고 있다. 뒷자리에 태워서 바짝 몸을 밀착시킨 상태인데 건드려봐야 얼마나 건드릴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안일했다. 총성이 터졌다.
“блять!(씨발!)”
당황한 나머지 러시아어가 튀어나왔다. 설마하니 진짜 쏠 줄은 몰랐다. 알료샤가 고개를 돌려 벤체슬라스에게 소리 질렀다.
“иди нахуй!(저리 꺼져!)”
벤체슬라스는 대답하지 않고 한 손으로 스로틀을 쥔 채 다른 손으로는 좀 더 정밀하게 알료샤를 겨냥하고 있었다. 사파이어가 맞아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광장을 지나치긴 했지만 트라팔가 광장은 평소에도 사람이 많다. 오늘은 무슨 행사가 있는지 평소보다 더 몰려있었다. 근처에서 총성이 터지자 사람들이 일순 당황하더니 누군가가 “총소리다!”하고 외쳤고, 곧 혼란이 질병처럼 번져나갔다.
오토바이 두 대는 이미 채링크로스 역 쪽으로 빠져나갔지만 순식간에 총격에 대한 신고가 쏟아져 들어가서 피카딜리 서커스의 난투극 신고건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많은 경찰 차량이 나타났다.
벤체슬라스는 분명히 경고했었다. 남의 손에 들어가게 두느니 차라리 깨버리겠다고. 알료샤라고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은 건 아니지만 지금은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두 남자 사이에 낀 사파이어는 혼자서만 시간이 천천히 흘러간다고 느꼈다. 모든 것이 비현실적이었다. 해방감과, 낯설면서 동시에 낯익은 기억들이 현실과 교묘하게 섞였다. 언젠가 이 거리를 본 것 같다. 아닌가? 착각인가? 무엇이 진짜 기억이었는지도 분간이 가질 않는다. 어제 있었던 일조차도.
사파이어를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의 뇌였다.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모든 것을 잊어야만 했다…….
잊고, 왜곡하지 않으면 정말로 미쳐버릴 것 같으니까. 몸이 그것을 버틸 수 없으니까. 결국 죽고말테니까. 그래서 뇌는 기억을 변형시켰다. 자신에게 거짓말을 했고, 망각 속에 잠들게 만들었다. 자기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
지금까지는 이것이 괜찮은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의 삶에 변화라고 할 것은 없었다. 극히 규칙적인 삶이었다. 명령이 있고, 임무를 수행하고, 보상을 받는다. 얼마나 단순하고 아름다운 세계였는가.
하지만 어느 날부터 사파이어에게 질문을 던지는 존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인간의 감정에 대해, 본성에 대해, 자기 자신에 대해, 어디에서 왔는가, 어디로 갈 것인가, 무엇으로 살 것인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
그의 뇌는 최선을 다했다. 이전에도 몇 번 기억을 열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잔혹한 고문으로 더 단단하게 땜질을 당했기 때문에 다시는 기억해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게 되었다.
기억하지 마. 잊어.
나는 너를 살리려고 하는 거야.
넌 아파. 아픈 상태야. 더 떠올리면 죽어.
고개를 낮춰. 머리를 숙여. 그가 시키는 대로 해.
나는 널 사랑해. 누구보다도 사랑해.
나보다도 너를 사랑하는 건 없을 거야.
그러니까 그에게 복종해. 순종해. 판단하지 마.
그럼 적어도 폭행은 가해지지 않아. 적어도 더 이상 상처받지는 않아.
지금 이 상태는 유지할 수 있어. 지금 이대로.
사실은 이 혼란이 현실이었다. 이 불빛과 소음과 무례한 사람들과 잔인한 무관심, 욕설, 저 지긋지긋한 눈길들이. 세상에 대해 두텁게 두르고 있던 방어막이 허상이었고. 이 날카로운 자극들이, 불쾌감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들이었다. 사파이어의 무의식이 계속 도망치고 있었을 뿐. 암흑 속으로. 점점 더 깊은 암흑 속으로.
사파이어의 눈가로 눈물이 흘러내리면서 급속도로 식었다. 다행히 비가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눈물은 나오자마자 씻겨 내려갔고, 바람과 함께 튕겨나갔다.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알료샤는 뒷자리의 그런 변화를 알 리가 없었다.
오토바이는 사보이 극장을 지나쳐 워털루 다리에 들어섰다. 하늘의 얼굴이 얼마나 끔찍한지. 격노한 구름이 지상을 노려보며 큰 비를 예고하고 있다. 템즈 강은 흙탕물빛으로 요동치며 다리 위의 추격전이 어떻게 끝날지 지켜보고 있었다.
벤체슬라스가 기어코 한 발을 명중시켰다. 알료샤가 타고 있던 오토바이 바퀴가 터지면서 그대로 비에 젖은 다리 위를 길게 미끄러졌다. 뒤에 타고 있던 사파이어 역시 반동으로 튕겨져 나갔다. 한 순간이었다.
도로 위를 데굴데굴 굴렀던 알료샤는 자신이 적어도 죽지 않았다는 것에, 그리고 극심한 부상도 입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하며 비틀비틀 고개를 들었다가 퍼뜩 사파이어 생각이 났다. 사파이어는 도로 저 편에 하늘을 보고 누워있었다.
알료샤보다도 벤체슬라스가 행동이 빨랐다. 뒤따라오던 벤체슬라스는 오토바이를 멈춰 세우고 바닥에 발을 디뎠다. 그 역시 꼴이 말이 아니었다. 벤체슬라스가 다가가기도 전에 사파이어가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사파이어는 어질어질한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다리 난간을 잡고 몸을 부축하며 천천히 일어났다.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벤체슬라스가 쥔 총은 총구가 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빗물이 총신을 타고 뚝 뚝 떨어져 내렸다. 벤체슬라스는 얼굴에 들러붙는 긴 머리칼을 수습할 생각도 하지 않고 사파이어를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그에게 선택권을 주고 있었다. 돌아올 것인가. 죽을 것인가.
사파이어가 결정하지 못하자, 그보다는 정신이 나간 것처럼 보이자 벤체슬라스가 명확하게 말해주었다.
“돌아와.”
벤체슬라스는 총을 쥐지 않은 손을 내밀었다.
“돌아와, 낙원으로. 난 널 진정시켜 줄 수 있어. 너에게 필요한 모든 걸 줄 수 있어. 너를 잠들게 해줄 수 있어. 나에게 돌아와.”
“당신은 단 한 번도 내 낙원이었던 적이 없어.”
점점 굵어지기 시작한 비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지만 사파이어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목소리엔 전혀 변화가 없었다. 달리는 오토바이에서 구른 충격 때문인지 불안정하게 몸이 흔들리기는 했다.
당신이라는 말 한 마디 때문에 벤체슬라스는 벼락을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사파이어의 눈동자를 보면서 그것은 점점 더 사실로 다가왔다. 그의 통제력이 흐르는 모래처럼 손 틈새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급속도로.
사파이어의 기억이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그의 흐리멍텅한 눈에 점차 이지적인 빛이 깃든다. 그는 어디까지 떠올리고 있는 것일까. 벤체슬라스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래도, 다시 한 번 회수하면, 한 번만 더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번에는……. 한 번 더 그를 돌려놓을 수 있다.
“사파이어.”
알료샤가 벼랑 끝에 선 아이를 부르듯이 불안한 기색으로 부르며 조심조심 사파이어에게 다가갔다.
“거긴 위험해요. 조금만 더 앞으로……. 조금만. 기대지 말고…….”
사파이어는 몹시 피곤해보였다. 다른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죽을 만큼의 피로, 아주 늙어버린 피로만이 보였다. 숨을 쉬고 서 있는 게 고작일 뿐인. 숨 막히는 긴장감이 있었다. 세상이 끝나기 직전의 고요함처럼.
벤체슬라스 역시 숨도 쉬지 못하고 사파이어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내 손으로, 저걸 내 손으로 끝장을 내야……. 물론 죽일 수 있다. 물론이지. 왜 당연한 것을 고민하고 있나. 미친 보석은 죽여야 한다.
사파이어는 어떤 공격성도 보이지 않았다. 왜 자신을 이렇게 만들었냐며 울부짖지도 않았고. 그저 여기가 어딘지 알아보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조금 전까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아려오는 몸은 뭐가 문제인지.
하지만 그 중에 가장 존재감이 큰 건 피로였다. 기절할 것 같은, 더 이상 이성적인 생각이 불가능한 피로. 사파이어는 바로 조금 전에 들은 알료샤의 경고도 잊어버리고 난간에 몸을 기댔다. 그러지 않으면 정말 그 자리에 쓰러져 죽을 것 같았다.
“나는 당신을…….”
사파이어가 벤체슬라스에게 말했다가 곧바로 정정했다.
“당신은 나의 신앙이었어.”
사고가 일어났다. 지친 몸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는 머리가 만들어낸 사고였다. 사파이어는 균형을 잡지 못하고 위태롭게 기우뚱하더니 뒤로 몸이 떠밀렸다. 사파이어 본인조차도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그나마 가까이 다가갔던 알료샤 역시 입을 떡 벌리며 허우적거렸다. 언제나 그렇듯이 중력이 더 빨랐기 때문에 알료샤는 손가락 한 마디 차이로 사파이어의 손을 놓쳐버렸다.
뒤로 떨어져 내리는 사파이어의 마지막 얼굴이, 그 놀란 얼굴이 벤체슬라스의 머리에 깊게 각인됐다. 저 얼굴은 내 품 안에서만, 내 팔 안에서만 보여야 하는 얼굴이었다. 죽는 순간까지도. 저 마지막 순간이!
사파이어는 세차게 요동치는 강물 속으로 떨어졌다.
“아, 아, 아!”
알료샤가 난간을 짚으며 이상한 소리를 냈다. 그것은 곧 절규가 됐다.
“아, 안 돼! 안 돼! 안 돼!”
벤체슬라스가 비틀거리며 달려가 알료샤를 옆으로 밀쳐내고 강물을 내려다보았다. 그럴 리가 없다. 고작 강에 떨어졌다고? 떠올라라. 무사할 것이다. 조금 깊을 수도 있지. 그게 어쨌다고?
템즈 강엔 온갖 종류의 배가 돌아다닌다! 누구든 사파이어가 떨어져 내리는 것을 봤을 것이다. 곧바로 구해줄 것이다! 안달할 것 없다. 지금 당장은 떠오르지 않아도, 눈에 보이지 않아도 분명히 금방 나타날 것이다.
“내가 도와준다고 했는데. 구해준다고 했는데.”
“연기 그만해. 네가 꾸민 짓이지?”
벤체슬라스가 알료샤에게 말했다. 하지만 알료샤는 벌린 입을 다물 줄 몰랐다.
“너무 늦었어. 너무 늦었다고. 눈앞에서. 눈앞에서…….”
“연기 그만하라고!”
두려움이 벤체슬라스에게도 전염됐다. 알료샤가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오열을 터뜨리며 머리를 감싸 쥐고 절규하자 벤체슬라스 역시 무언가가 완전히 끝장나버렸다는, 다시는 되돌릴 수 없다는 파멸감을 느꼈다.
현실의 초침은 냉혹하게 돌아가고 있었고 저 멀리에 잊고 있던 경광등 불빛이 번쩍번쩍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대로 있을 순 없다. 도망쳐야한다.
벤체슬라스는 세워두었던 오토바이에 다시 올라탔다. 알료샤는 아직 그 자리에 앉아 목 놓아 울고 있었다. 저렇게 멍청할 수가 있나. 진위를 확인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사파이어는 죽지 않았다. 아마도 죽지 않았을 것이다.
물에 떠내려 오는 오필리어의 시체를 보기 전까지 햄릿도 이렇게 생각했다.
며칠이 지난 뒤 하류에서 남자의 시신이 발견됐다. 스코틀랜드 야드가 신원미상의 남자를 샅샅이 훑고 난 뒤에야 벤체슬라스에게도 기회가 왔다. 벤체슬라스는 정보상의 도움을 받아 시신안치소의 직원을 매수했다.
서류로 받아본 남자의 정보는 이러했다. 동양인. 남성. 키 170대 후반. 다리에 오래된 골절 흔적 있음. 지문정보 없음. 사인은 템즈 강 바닥에 있던 철제 폐기물에 흉부가 뚫려 즉사. 비로 인해 불어난 강물을 타고 흘러내려가다가 하류에서 발견. 사후 며칠이나 물속에 있었기 때문에 정확한 신원 확인 불가능.
벤체슬라스는 이것들을 믿지 않았다. 직접 보고 확인해야했다. 직원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지만 벤체슬라스가 아무 말 없이 두툼한 지폐 다발 두 덩이를 건네주자 직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신을 꺼내주었다.
바디백을 열자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는 끔찍한 몰골이 눈에 들어왔다. 물에 며칠 동안 잠겨있었던 데다 강물 속에 있는 알 수 없는 파편들에 여기저기 긁혀서 본 모습을 많이 잃어버린 얼굴이다. 직원은 단순히 징그러워서 고개를 돌렸고 벤체슬라스는 다른 이유로 그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손으로 시야를 가리던 벤체슬라스가 헛기침을 하고 조심히 시신의 얼굴을 보았다. 죽은 자는 피가 다 빠진 것처럼 창백했고, 너무 부어서 알아볼 수 없었다. 그의 머리칼이 검은색인데다가 생전에는 단정했을 거라는 것 정도만 유추할 수 있었다.
어차피 이것을 원한 게 아니다. 벤체슬라스는 바디백의 지퍼를 마저 내렸다.
그 옷은 사파이어가 죽던 날 입고 있던 옷과 정확히 똑같았다. 자신이 직접 줘서 안다. 몇 번은 자신의 손으로 입히기도 했다. 옷 색깔도, 재질도, 크기도. 모든 것이 일치하는군. 좋아.
벤체슬라스는 뒷목이 뻐근한 듯이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갑자기 힘이 빠져서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뇌물을 받은 직원이 얼른 그를 일으켜 세워주었지만 벤체슬라스는 다시는 시신을 볼 수가 없었다.
벤체슬라스는 거의 기다시피 해서 그 곳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두 번 다시 그 곳을 찾지 않았다. 신원 미상의 남자는 형식적인 서류작업을 거친 다음 무연고 사망자로 처리되었다.
벤체슬라스는 뼈아픈 손실을 입었다. 이제 그가 소유하고 있는 보석은 없다. 아파트로 돌아와도 그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없다.
무감각하고 아무런 생각이 없는 인형 같은 남자였지만 잃고 나서야 그 온기만큼의 공허함을 느꼈다. 이따금씩 그가 보석의 부재를 깜박하고 “사파이어.”하고 이름을 불렀다가 돌아오지 않는 대답을 한참 기다리고 나서야 “그랬었지.”하고 납득하곤 했다.
벤체슬라스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긴 작업이 될 테지만 보석은 또 구할 수 있을 것이다. 품질이 낮은 것으로 시작해서 점차적으로 또 올라가면 된다.
그는 감상에 잠길 시간이 없다. 현실이란 건 녹록치가 않다. 맡아놓은 의뢰가 있고, 감춰야 하는 정보가 있고, 지불해야 하는 돈과 받아야 하는 돈이 있는데다가……. 그리고 또, 그리고 또…….
“사파이어.”
“네.”
벤체슬라스는 화들짝 놀라 옆을 돌아보았다. 분명히 목소리를 들었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가 운동을 하고 있을 거실은 텅 비어있었다. 혹시나 싶어서 그의 침실로 가봤지만 잘 정돈된 침대만이 덩그러니 있을 뿐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벤체슬라스는 이게 무슨 일인가 생각하다가 문간에 비스듬히 몸을 기댔다.
“그랬었지.”
벤체슬라스는 조용히 문을 닫고 등을 돌렸다.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 전에 차를 한 잔 마셔야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