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벤체슬라스의 집사 슈테판 베르너는 주인이 아무런 기별 없이 돌아오자 놀라면서도 반갑게 맞이했다. 미리 언질을 주었더라면 주인이 직접 대문을 여는 수고는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그의 젊은 주인은 사생활을 중시하는 사람이라 운전기사는 물론이고 정원사라던가 가정부도 따로 고용하지 않았다. 고용인들의 관리자로 일해 왔던 슈테판에게는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어차피 벤체슬라스는 부자연스러울 만큼 조용하고 깨끗하게 사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감사하게도 손이 많이 가지 않았다.
슈테판의 눈으로 보자면 벤체슬라스는 여태껏 만나온 어떤 부자들보다도 신사였다. 인간적인 정이 떨어지긴 하지만 그는 인격적인 모멸을 가하지는 않았다. 심기가 불편할 땐 날카롭게 곤두 서 있는 신경을 눈치 채게 함으로써 슈테판이 스스로 거리를 두게끔 만들었지 그에게 즉각적으로 욕설을 내뱉지는 않았다.
급료에 대해서도 그는 깔끔했다. 줘야할 돈을 깎거나 미루지도 않고 바로바로 지급했으며 원단무역상답게 의복 등 복리후생에 대해서는 너그러웠기 때문에 슈테판으로서는 품위유지비로 사용될 돈도 아끼는 셈이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차가운 인상은 있는데 이것은 슈테판이 여태 모셔왔던 다른 모든 주인들도 마찬가지로 가지고 있던 모습이었기 때문에 딱히 특별하지는 않았다.
벤체슬라스는 항상 모든 사람들과 거리를 두었고 친구라고는 없어보였다. 유일하게 속내를 털어놓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은 그의 경호원인 에이든 스미스 씨였는데 이 스미스 씨라는 인물도 워낙 조용하고 말이 없어서 슈테판 입장에서는 수수께끼 그 자체였다.
그러나 세월이 그에게 가르쳐주었듯이, 쓸데없는 사항에 깊게 관심가지면 이 일을 오래 하지 못한다. 슈테판은 둘이 연인사이라고 해도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다녀오셨습니까.”
“베르너 씨.”
벤체슬라스의 외투를 받아들려던 슈테판은 그의 얼굴을 보고 흠칫 놀랐다. 노련한 집사마저도 순간 자제하지 못하고 사람을 빤히 쳐다보게 만드는 얼굴이었다. 벤체슬라스는 그의 무례를 지적하지 않고 간결하게 말했다.
“며칠 동안 집에서 나가주셔야겠습니다. 호텔이든, 어디 머물 곳이든 찾아서 나가주십시오. 돈은 드리겠습니다.”
“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벤체슬라스는 대답하지 않고 집사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슈테판은 가까스로 평정을 되찾아 고상하게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짐을 챙겨서 나가보겠습니다.”
“아니, 지금 당장 나가야합니다. 내가 부를 때까지 돌아오지 마십시오.”
“저어……. 같이 가셨던 스미스 씨는…….”
“나가시오.”
벤체슬라스의 어투가 강압적으로 변하자 슈테판은 곧바로 질문을 그만두었다. 옷을 갈아입을 시간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슈테판은 간신히 자기 방에 가서 지갑만 가지고 나와야 했다.
벤체슬라스는 어딘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것처럼 보여서, 슈테판이 문 밖으로 나설 때까지도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슈테판은 괜히 그를 자극해선 안 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면서도 어딘가 꺼림칙한 느낌이 들어 주인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저어, 주인님?”
벤체슬라스가 아직 뭔가 더 남았느냐는 듯이 슈테판을 돌아보자 나이 든 집사는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머뭇머뭇 거리다가 “아닙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하고 발걸음을 뗐다.
슈테판이 채 몇 발자국 가기도 전에 쾅 하고 저택의 문이 닫히며 문을 걸어 잠그는 소리가 났다. 슈테판은 굳게 닫힌 문을 돌아보며 떨떠름함을 털어내지 못했다.
그는 차마 주인에게 “울고 계신 겁니까?”라고 물어보지 못했다.
집사의 발걸음이 느릴 것을 알기 때문에 벤체슬라스는 지금부터 자신이 할 작업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저택 안에 음악소리를 켜두었다. 음량을 높여서 저택 밖까지 들리게 해두었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안토니오 비발디의 니시 도미누스(Nisi Dominus), 안드레아스 숄이 불렀다.
벤체슬라스는 차고로 가서 벤츠의 트렁크를 열고 안에 든 짐을 꺼냈다. 부피가 상당한 물건이었는데 천으로 둘러싼 데다 그 위를 끈으로 단단히 묶고 있어서 내용물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윤곽으로 짐작하건데 그것은 커다란 동물이거나 고깃덩어리였다. 축 늘어지는 짐을 어깨에 걸쳐 메자 짐의 한쪽 끝에서 핏방울이 천을 적시더니 바닥에 똑 똑 떨어져 내렸다.
벤체슬라스는 서두르지 않고 차분하게 한 걸음 한 걸음 차고를 빠져나가 저택 안 쪽, 열쇠가 잠겨 있는 방으로 향했다. 마치 장례식 운구를 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방이다. 언젠가 반드시 사용하게 될 것을 알았기에 개조 공사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방 안의 방음장치는 몇 겹으로 되어 있어서 그 어떤 소리도 밖으로 새어나가지 못했다.
피를 씻어내기 위한 수도 배수 시설도 있었고, 장시간 사람을 가둬도 문제가 생기지 않게끔 환기 장치도 있었다. 벽과 천장에는 몇 사람을 걸어놓아도 끄떡없을 튼튼한 고리와 쇠사슬들이 달려 있었다.
방 한 구석에는 감옥같은 철창이 있었는데 대형견을 가두기엔 크고 그렇다고 사자나 호랑이 같은 맹수를 가두기엔 좁은 감이 있는 애매한 사이즈였다. 사람이 들어가면 허리를 펴고 일어서진 못하고 앉거나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정도가 고작일 것이었다.
철창에는 밖에서 잠글 수 있는 자물쇠가 달려 있었다. 이 방의 희생자가 누구든지 간에 고문을 당하고 남는 시간엔 이 철창 안에 갇혀 있을 것이 뻔했다.
벤체슬라스는 메고 온 짐짝을 시체안치소의 부검대처럼 보이는 커다란 철판 위에 내려놓았다. 짐을 묶고 있던 끈을 풀고 천을 벗겨 내리자 정신을 잃은 사파이어가 그 안에서 나왔다.
차에 싣기 전에 한 차례 구타를 당한 모양인지 얼굴에는 멍이 들어 있었고 입가와 코에 피가 흐른 자국이 있었다. 손과 발은 단단하게 결박되어 있었고 몸에는 이미 채찍질을 한 흔적이 있었다.
수면유도제를 먹여놔서 당분간은 눈을 뜨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혹사당한 몸이니까.
선물포장지 같이 사파이어를 감싸고 있던 천과 끈을 모두 풀어내 바닥으로 던진 벤체슬라스는 팔다리의 결박이 단단한지 다시 한 번 확인한 후, 혹시라도 사파이어가 눈을 뜨고 반항할 것을 대비해 철판의 위아래에 있는 고리에 각각 손과 다리의 결박을 끌어다가 묶었다.
벤체슬라스는 자신이 상처 입힌 몸을 손으로 쓰윽 훑어 내렸다. 목젖이 툭 튀어나온 건장한 목울대를 쓰다듬고, 쇄골을 더듬고, 차가운 공기에 고개를 들고 돋아난 유두를 손바닥으로 지그시 누르며 그 감촉을 확인하고, 잘 발달된 복근의 결을 따라 골반 뼈가 툭 튀어나온 하반신까지 내려왔다. 사타구니를 더듬으니 며칠 사이에 까슬하게 음모가 자라 있었다.
벤체슬라스는 셔츠의 소매를 한단씩 접어 팔뚝까지 걷어 부치고 구석의 서랍에서 면도칼과 면도크림을 꺼내왔다. 그는 물렁하게 축 늘어진 성기와 고환을 만지작거리며 어디까지 음모가 돋아나있는지 확인한 후 면도크림을 넓게 펴 바르기 시작했다.
의식이 없음에도 차가운 면도크림이 살갗에 닿자 사파이어가 반사적으로 움찔 움찔 떨었다. 그것을 본 벤체슬라스가 크림을 잠시 손에 쥐고 체온으로 데운 다음 다시 펴 발랐다. 크림을 다 바르고 나자 면도칼날이 느릿하게 피부를 훑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사각사각하며 짧게 돋은 털들이 깎여나갔다.
사파이어가 정신을 잃어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동안은 아무런 폭력도 가하지 않았다. 벤체슬라스의 학대에는 그런 원칙이 있었다. 그는 잔인함을 유용한 도구로 사용했지만 무절제는 혐오했다. 하지만 사파이어가 눈을 뜨고 다시 자극을 느끼는 상태가 되면, 자신이 무슨 짓을 당하고 있는 건지 인지할 수 있게 되면 형벌은 다시 시작될 예정이었다.
음모를 다 밀고 나서 남은 크림까지 깨끗하게 닦아내 정리하니 성기와 고환은 거슬거슬한 부분이 한 군데도 없이 매끈해졌다.
내 것이다. 내 소유물이다. 이 안에 든 씨앗까지 내꺼다. 그가 만약에 사파이어를 교배시켜서 품종을 남겨놓고 싶다면 그 자식의 앞날까지 모조리 내 것이다. 벗어날 수 있을 줄 아느냐. 너 같은 잠재력을 가진 원석의 유전자라면 그냥 내버릴 수 없지. 벗어날 수 없다. 넌 내거다. 널 깨뜨려버리게 되더라도, 네 시체까지 내 것이다.
벤체슬라스는 더 손질이 필요한 곳이 있는지 세심하게 살핀 후 몇 군데의 체모를 말끔하게 밀었다. 그런 다음 긴 호스에 연결된 샤워기를 가져와 미지근한 물을 틀고 사파이어를 말끔히 씻기기 시작했다.
말라붙은 피가 씻겨나가자 피부에 남은 것은 멍과 채찍자국, 오래된 흉터들이었다. 이 상태로 익사시킬 수는 없기 때문에 얼굴은 수건을 적셔서 조심조심 닦아냈다. 닫힌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미약한 신음이 흘러나왔지만 아직은 눈을 뜨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의 턱을 쥐고 잠시간 얼굴을 감상했다. 소유권을 주장하듯이 자신이 만들어놓은 흔적들이 낙인처럼 찍혀 있었다.
차라리 죽어버리면 내가 편해질까? 자신도 모르고 있던 취향이란 혹시 네크로필리아가 아닐까? 움직이지 않는 인형에 대한 성애도 있다는데 혹시 그건 아닐까? 어떻게 생각하나, 내 종이여. 네가 눈을 감아버려야만 내가 이토록 안심하는데.
벤체슬라스는 장난감 다루듯이 사파이어의 입술을 엄지 끝으로 꾸욱 눌러보았다. 실리콘 인형같이 말랑한 촉감이지만 체온은 분명히 인간이다. 입술을 꾸욱 짓누르다가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의 얼굴을 놔주었다. 잠들었을 땐 어이없을 정도로 멍청한 얼굴이다.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에게 정조대를 채우고 철창 안으로 밀어 넣은 후 자물쇠를 잠갔다. 이번에는 요도 안까지 파고들어가는 정조대라서 발기할 수도 없고 사정할 수도 없는 물건이었다. 오줌 한 방울까지 허락을 받아야만 쌀 수 있다.
다시 한 번 그의 이성을 철저히 박살낼 필요가 있다. 다시는 생각 따위를 하지 못하게.
벤체슬라스는 의자를 끌고 와서 철창 앞에 놓고 앉았다. 그는 사파이어가 깨어날 때까지 지치고 초췌한 눈으로 한참동안 사파이어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신이 들자마자 찾아온 것은 온갖 종류의 통증이었다. 눈앞이 하얗게 멀 것 같은 단발적인 격통은 아니었지만 몸의 이곳저곳을 벌레가 물어뜯는 것 같은 짜증나는 쓰라림이 있었다.
사파이어는 우선 자신이 제대로 숨을 쉬고 있는지 확인했다. 폐를 떼어냈으면 호흡은 물론이고 눈조차 뜨지 못했을 텐데 왜 장기가 사라진 게 아닌지 고민한 건지 모르겠다.
미약하지만 호흡은 가능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몸이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깨달았다. 팔다리가 단단히 묶여 있다. 그 상태로 엎어져 있어서 불편한 팔뚝이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과연, 이것 때문에 본능적으로 호흡부터 확인한 걸지도.
붕대 감긴 팔 쪽으로는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다른 팔에 힘을 두 배 더 줘야 했다. 힘겹게 돌아눕고 나서 사파이어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뼛골이 지끈지끈 울렸다.
많은 양의 산소가 들어가자 정신이 맑아지면서 몸의 다른 상태도 느껴지기 시작했다. 체온이 많이 떨어져있었고 가랑이 사이가 어쩐지 불편했다. 고개를 아래로 내리니 정조대가 채워진 성기가 눈에 들어왔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하고 몇 초 간 생각해보던 사파이어는 곧 모든 것이 떠올라 다시금 뒷머리를 박았다. 낯선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금속 재질에다가, 옆에는 쇠창살이다……. 천장이 아니고 철창 안에 갇힌 건가. 하긴 이렇게 낮은 방은 없을 테니까. 주변 환경을 파악하다가 고개를 돌린 사파이어가 움직임이 딱 멎었다.
철창 앞에 의자를 가져와 앉은 벤체슬라스가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 모를 모습으로 사파이어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사파이어는 등으로 기어 벽으로 도망쳤다. 도망쳤다고 해봐야 애벌레처럼 꿈틀거려서 몇 번 움직이지도 못한 채 차가운 벽에 닿았을 뿐이다. 그러나 도망치려는 시도 자체가 벤체슬라스를 자극한 것인지 벤체슬라스가 의자에서 일어나 철창의 자물쇠를 풀더니 문을 열고 명령했다.
“나와.”
본능은 도망치라고 경고 신호를 울리고 있었지만 이성이 그것을 가볍게 무시했다. 시간을 끌어봐야 그를 더 화나게 만들 뿐이다. 어차피 이 안에선 도망갈 곳이 없지 않은가. 사파이어는 겁먹은 짐승 같은 눈으로 벤체슬라스를 슥 올려다보고는 묶인 손과 무릎으로 바닥을 기어서 철창을 나왔다. 학대당한 개가 또 맞을 걸 알면서도 주인에게 갈 수 밖에 없는 모습이었다.
“핥아.”
벤체슬라스가 구두 앞코를 내밀었다. 사파이어는 그 구두를 잠시간 바라보다가 혀를 내밀어 구두를 핥기 시작했다.
구두에 쌓인 먼지나 오염물에 대한 거부감은 얼마 안 가 사라졌다. 비참함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꽤 편리하다. 벤체슬라스는 어떤 주저함이나 불쾌감도 드러내지 않고 자신의 구두를 핥고 있는 만신창이 남자를 메마른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다가 구둣발로 그를 걷어찼다.
사파이어의 어깨를 걷어차 쓰러뜨린 벤체슬라스는 발끝으로 사파이어의 고환을 지그시 밟았다. 딱딱한 구두 밑창이 여린 부분을 짓밟자 사파이어의 묶인 다리가 반사적으로 뱃가죽까지 움츠러들었다.
“안 치우면 다리를 잘라버릴 거야.”
사파이어가 오들오들 떨면서 다리를 내리자 벤체슬라스가 다시금 부드럽게 짓밟았다. 고환을 드러내는 건 내장을 드러내는 것과 같다. 표피를 자극하기만 해도 머릿속을 바늘로 쑤시는 것 같은 자극이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데 고통도 고통이지만 이 부위는 급소다. 이보다 더 직접적으로 목숨을 내어놓는 행위가 있을까. 내 목숨을 상대의 자비와 변덕에만 맡겨야 한다.
“넌 겁에 질리는 걸 좋아하는군. 그래서 일부러 내 말을 어기는 거야.”
음낭이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며 성기의 뿌리를 단단히 세워가는 것을 본 벤체슬라스가 정조대를 발끝으로 톡톡 두들기며 말했다.
“발기할 수 있을 것 같은가? 지금 당장 널 거세해 버릴 수도 있는데. 그럼 좀 고분고분해지겠군.”
“용서해주세요…….”
“거짓말 하지 마. 넌 용서를 바라는 게 아니잖아. 네 안에 있는 이기성을 내가 모를 것 같은가. 너는 날 이용하는 거야. 네 안에 있는 음란한 욕망을 채우려고. 그래서 너는 나를 배신하고 또 배신하지. 난 널 믿지 않아. 네가 상처받지 않는다는 것 안다. 너는 인간이 아니야. 네가 이해하는 유일한 거라곤 네 몸에 가해지는 것뿐이지. 나에게 의존하라고 몇 번이고 말했을 텐데. 내가 무엇이든 주겠다고. 너의 표면적인 욕망이든, 네 눈 안에 들어있는 변태적인 욕구든……. 내 낙원에서 나갈 시도조차 하지 말란 말이다.”
벤체슬라스가 발끝을 엄하게 꾸욱 누르자 사파이어가 고개를 뒤로 젖히며 숨 막히는 소리를 냈다. 정조대에 갇힌 성기는 몸집을 키우지 못해 그 안에서 구겨지고 있었다.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를 일으켜 세워 부검대 같은 철판 위에 손을 짚고 허리를 굽히게 했다. 그런 다음 발목을 결박하고 있던 끈을 잘라내고 다리를 넓게 벌리도록 했다.
“너는 항상 똑같은 실수를 반복해. 그건 더 이상 실수가 아냐. 의도한 거지.”
사파이어는 불안한 듯이 등 뒤를 흘끔 살폈다. 벤체슬라스가 무언가를 꺼내왔다. 젤과 콘돔, 그리고 성기를 삽입하는 자위도구였다.
보통 이런 도구는 여성의 질 모양을 본떠 만들지만 이것은 달랐다. 재질이 투명해서 내부의 구조가 훤히 보였는데, 길고 구불구불하게 생긴 것이 설명해주지 않아도 인체의 어떤 부분을 본뜬 건지 짐작이 갔다. 항문이었다.
본인이 쓸 것인가? 사파이어에게 쓸 것인가? 사파이어는 정조대를 차고 있는데? 젤을 바른 손가락이 항문 안을 쑤시고 들어오자 사파이어가 순간적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강한 악력의 하얀 손아귀가 사파이어의 머리채를 잡곤 철판 위에 쿵 찍었다.
몸 안을 침범해 들어오는 손가락은 점점 더 용서가 없이 안으로 안으로 파고들었다. 평소보다 더 깊게 들어오는 손가락 때문에 사파이어가 “끄응.”하는 신음소리를 냈다.
“두려운가?”
두 개로 늘어난 손가락 때문에 사파이어는 대답대신 숨이 헉 하고 빠져나가는 소리를 냈다. 내벽을 더듬던 손가락이 빠져나가자 사파이어는 잠시나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다음 순간 정체를 알 수 없는 충격이 몰려왔다.
“뭐하는……. 아읏, 아앗! 안 들, 안 들어가요! 아, 아! 안, 안 돼!”
비정한 손이 엉덩이 한 쪽을 으스러뜨릴 듯이 꽉 쥐고 벌렸고 다른 손으로는 자위도구의 끝 부분을 구멍 안으로 쑤셔 넣고 있었다.
성기를 안에 넣으라고 만든 물건이지 딜도처럼 어디에 넣으라고 만든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끝 부분의 모양이 들어가기 쉬운 구조가 아니었다. 말랑말랑한 실리콘으로 되어 있다지만 전체 지름이 최소 5~7cm는 되는 물건이었다. 들어가지 않는 게 당연했다.
“힘 빼. 들어가는 거 알아. 나야 네 괄약근이 찢어지든 말든 상관없지만 곤란해지는 건 너일걸. 기저귀 차고 살고 싶지 않으면 힘 빼.”
힘을 뺀다고 해서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니다. 사파이어의 허벅지가 후들후들 떨렸다. 조금이라도 힘을 빼려고 하면 다시 그 물건이 안으로 밀고 들어오려고 했다. 항문이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는 건 몸의 방어본능이라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다.
벤체슬라스는 잠시 자위도구를 치우더니 산부인과에서 쓰는 질경을 꺼내왔다. 질경은 자위도구와 다르게 쉽게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꾹꾹 밀어 넣은 오리 부리 같이 생긴 질경을 천천히 벌리기 시작하자 사파이어가 입을 벌리고 “아, 아, 아.”하는 안타까운 소리를 냈다.
“조이지 마.”
벤체슬라스의 손이 엉덩이를 느리게 쓸어 올리며 항문 주름을 어루만지자 사파이어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허리를 움찔거렸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긴장이 풀어지면서 사파이어가 더는 힘을 주지 않았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엉덩이 근육이 풀어진 것을 느낀 벤체슬라스가 질경을 스윽 꺼내자 항문은 완전히 닫히지 않고 빠끔히 열려 있었다. 벤체슬라스는 자위도구 끝 부분에 충분히 젤을 바르고 다시 삽입을 시도했다.
이번에는 끝 부분이 푹 하고 파여 들어갔다. 들어가는 순간 사파이어가 짧은 탄성을 터뜨렸지만 그 다음에 쭉쭉 밀고 들어오는 것은 도저히 막을 재간이 없었다. 다 삽입하고 나서도 2~3cm 부분이 툭 튀어나와있어 사파이어의 엉덩이 자체가 자위도구가 된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딜도 같지는 않겠지. 벌 받는 게 기분 좋아서는 안 되니까.”
벤체슬라스가 사파이어의 등 위로 고개를 숙이고 머리칼을 늘어뜨리며 그 귓가에 속삭였다.
“널 자위도구로 쓸 거다. 네 몸 안에 자위할거야.”
몸의 고통과는 다른 예리한 통증이 머릿속을 후벼 팠다. 섬광 같은 충격이었다. 언젠가 이것과 똑같은 일을 겪어본 것 같다.
언제였을까? 어제였을까? 1년 전? 10년 전? 눅눅하고 곰팡내 나는 지하실이었고, 발가벗겨진 채 결박되어 있었고, 공포와 수치심과 분노를 느꼈고, 그리고 이 등에 와 닿는 머리칼, 머리칼의 감촉이.
사파이어가 고개를 들려고 하자 다시금 “안 돼.”하고 손아귀가 덮쳐와 머리를 찍어 눌렀다. 사파이어는 필사적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바지 지퍼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항문은 이미 한계까지 벌어져 있는데 그 안에 저 흉기를 쑤셔 넣는다면…….
“제, 제발……. 안 돼요, 아앗! 아, 윽, 죽어요. 찢어져요! 아, 아아…….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넌 항상 죽고 싶어 했잖아.”
벤체슬라스가 “웃지 마.”하고 속삭여서 그제야 사파이어는 자신의 입가에 걸린 웃음을 알았다.
“아, 아냐. 안 돼. 싫어. 싫어, 무서워.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눈물이 줄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웃고 있는 입 안으로 들어가기도 했고 식은땀 고인 목으로 흘러내리기도 했다.
벤체슬라스가 달콤한 와인이라도 되는 듯이 그 눈물을 길게 핥아 올리면서 사파이어의 안에, 정확히는 항문에 꽂힌 자위도구에 자신을 삽입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항문 끝부분이 이 이상 없을 정도로 무자비하게 벌어지면서 몸이 찢어질 것 같은 위기감이 들자 사파이어가 억눌린 상태로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아아아악!”
“아프다고 하는 것 치고는 불알은 단단한데?”
용서가 없는 손아귀가 고환을 쥐자 자신이 얼마나 발기했는지, 정조대 안에서 성기를 구긴 채 얼마나 단단하게 세웠는지 느껴졌다. 이 욕구는 절대로 해소될 수 없었다.
중간까지는 느긋하게 삽입하던 벤체슬라스가 갑자기 변덕을 부려서 뿌리 끝까지 한 번에 박아 넣었다. 사파이어의 목에서 쇳소리 가까운 단말마가 터져 나왔다. 성기가 물어뜯기는 듯이 강하게 조여서 벤체슬라스 역시 인상을 찌푸렸다. 고통을 가하는 자 역시 고통을 느꼈다.
“아직 기절하지 마.”
벤체슬라스가 사파이어의 따귀를 때렸다. 눈이 희게 돌아갔던 사파이어가 헐떡이면서 다시 정신을 차렸다.
몸 안에 통나무 같은 게 강제로 삽입된 것 같다. 몸의 상태를 눈으로 확인할 수 없어서 상상은 점점 더 무섭게 변질되어가고 있었다.
몸 안의 장기가 한계까지 말려 올라가는 상상을. 벤체슬라스가 여기서 거칠게 움직이다가 몸 안에 박힌 게 한꺼번에 빠지기라도 하면 창자도 같이 딸려 나오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상상들을.
영구적인 장애를 안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보다도 이대로 몸이 찢어져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더 컸다.
항상 무언가를 한 꺼풀 덮어씌운 듯이 둔탁한 감각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었는데 지금 이 순간은 척추를 울리는 현실감이 있었다. 그 현실은 지옥이었다.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파이어에게는 이것이 무엇보다도 큰 형벌이다. 나, 내 상태, 내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유일한 진리니까.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가 구멍의 조임을 풀든 말든 성기를 넣었다 뺐다 추삽질을 하기 시작했다. 몸 안에 꽉 들어찬 것이 성기가 들어오고 나감에 따라 부풀었다가 가라앉았다가를 반복하면서 이미 위태로울 정도로 짓눌린 전립선과 방광을 더 꾹꾹 눌러댔다.
자극이 계속되자 방광이 차오르면서 오줌이 밖으로 분출되려고 했지만 요도를 틀어막고 있는 이물질이 있어서 어떤 액체도 흘릴 수가 없었다. 그것은 곧 아랫배를 바윗덩어리로 누르는 것 같은 압박이 되어 사파이어를 고문했다.
“풀어, 풀어주세요.”
벤체슬라스는 그 말이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사파이어를 완전히 무시하고 쑤셔 넣기를 계속하다가 어느 순간 허릿짓이 격렬해지며 가장 깊숙이 박아 넣고 몸을 파르르 떨었다. 꿈틀, 꿈틀하고 사정의 여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것이 느껴졌다. 지독하게도 그는 신음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사파이어는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감내했다. 딱히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벤체슬라스가 몸에서 빠져나가자 그의 성기가 차지하고 있던 부피만큼이 줄어들면서 상대적으로 해방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방광의 압박은 그대로였다. 성기와 고환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빼주지 않으시련가. 빼주지 않으시련가. 사파이어는 잔인한 주인에게 학대받는 가축처럼 안절부절 못하며, 오로지 주인의 자비만을 바라며 훌쩍임을 삼켰다. 다리 사이로 벤체슬라스가 잔뜩 싸놓은 것이 길게 늘어져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이 보였다.
인간을 성욕 처리 도구로 사물화 시켜버리다니……. 그런 건 지금 당장 어찌되든 좋았다. 몸 안에 든 것을 빼내주었으면 했다. 핏줄이 터질 것 같이 일어선 성기를 잔뜩 구기고 있는 정조대와 요도를 막고 있는 심까지도.
벤체슬라스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몸의 긴장이 풀리면서 엉덩이 근육이 움찔움찔 몸 안에 든 것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몸은 이물질을 견뎌내지 못하니까. 그러나 항문에 박힌 자위도구가 1cm쯤 겨우 빠져나갔을 때, 발길질이 날아왔다.
“아아아악!”
빠져나갔던 것이 고스란히 처박히는 것으로 모자라 오히려 1cm쯤 더 박혔다.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가 밀어내고 있는 자위도구를 구두 밑창으로 콱 콱 내리찍으며 짓밟고 있었다. 자신이 싸놓은 정액이 사방으로 튀는 것에도, 자신의 몸에 튀는 것에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사파이어의 벌려진 다리가 전기충격 당하는 개구리처럼 크게 삐꺽거렸다. 이미 몸에 힘을 주지 못하는 사파이어를 유일하게 지탱하는 것은 싸늘하게 냉기가 감도는 철판뿐이었다.
침이 질질 흘러내려 눈물과 뒤섞였다. 눈앞이 번쩍거리고 시야가 멀어졌다가 가까워졌다가를 반복했다. 신경세포의 전기신호를 직접 눈으로 보는 것처럼 빛 무리가 반짝였다.
사파이어는 헐떡이다 못해 호흡곤란에 시달리면서도 어느 순간 허리를 크게 꺾었다. 항문이 박살나고 성기가 정조대 안에서 망가져가면서도, 그는 사정없이 절정에 도달해버렸다. 드라이 오르가즘의 난폭한 쾌감이 아주 잠깐의 순간이지만 그를 죽음의 영역에 들여놓았다가 다시 이승으로 추방했다. 그 짧은 순간은 하얀 빛만이 가득한 황홀경이었다.
“이 변태가.”
벤체슬라스가 속삭이면서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고환의 표피를 뽀드득 문질렀다.
“너한텐 모든 게 쾌감이야. 죽는 것도, 몸이 망가지는 것도. 킬러가 아니면 똥구멍이나 팔면서 살아갈 주제에. 너 같이 생긴 걸 누가 돈 주고 사. 주제를 알아야지. 팔수도 없게 망가뜨려주겠어.”
무서운 선언이었다. 사파이어가 보상을 받는 유일한 수단이라곤 이것밖에 없는데.
그에겐 아무것도 없단 말이다. 팔다리도 없고, 귀도 들리지 않고, 말도 할 수 없고, 냄새도 맡을 수 없는 사람에게, 가진 거라곤 시력밖에 없는 사람에게서 눈을 빼앗겠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소리였다.
그저 용서해달라고 비는 수밖에 없었다. 벤체슬라스에게 저항하면 그를 이길 수 있을까? 양 손의 결박이 풀린다고 해도 과연 그와 맞서 싸워서 이길 수 있을까? 불가능했다. 그의 끝 모를 잔인함과 폭력성은 그의 인생처럼 뼈대, 근육, 핏줄 하나하나에까지 배어있었다.
그는 강한 남자였다. 폭군이었다.
사파이어는 부수지 말아달라고 애원하면서 목 놓아 울었다. 그게 그의 첫 번째 오열이었다. 벤체슬라스가 다시 몸 안으로 파고 들어올 때도 오열은 멈추지 않았고 점점 더 심해졌다. 다시없을 비통한 소리였다.
“그래. 그 소리야.”
벤체슬라스가 뿌리 끝까지 박아 넣으며 이를 악물고 짓씹었다.
“참회해. 참회하라고.”
사파이어는 단검을 쥐고 미로를 달리고 있었다.
기억이 난다. 언젠가 이런 임무를 수행했던 것 같다. 목표가 뭐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쫓기고 있었다는 것만큼은 생생하다. 그 순간의 긴장이, 필사적인 생존 본능이 그의 온 몸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상하게도 생각한 것만큼 몸이 빠르진 않았다. 전력질주를 해도 약을 맞은 것처럼 팔다리가 느렸다. 깊은 물속에 빠진 것처럼 허우적거릴 뿐이었다.
도망쳐야 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미로였고 빛조차도 들지 않았지만 여기서 빠져나가야 했다. 절망이 그를 뒤통수부터 집어삼켰다.
허우적거리며 제대로 도망가지 못하는 사파이어를 거대한 손으로 잡아챈 건 키가 3미터는 될 것 같은 거인이었다. 분명히 인간이었지만 덩치는 산 같았고 온 몸은 검은 그림자에 쌓여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사파이어는 단검을 휘둘렀지만 공격자의 피부는 바위나 강철처럼 칼을 튕겨낼 뿐이었다.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칼이 튕겨져 나가자 사파이어는 급한 대로 이빨을 써서 물어뜯으려고 했지만 오히려 자신의 턱이 부러질 것 같았다.
사로잡힌 사파이어가 공중에 들렸다. 이런 적이 있었단 말인가? 거인의 손이 사파이어의 다리 한 쪽을 손잡이라도 되는 것처럼 쥐었다. 거인의 두꺼운 검지와 중지 안에 사파이어의 근육 잡힌 허벅지가 다 잡혔다. 무릎과 정강이는 나머지 손가락 안에서 부러질 것처럼 느껴졌다.
“이 벌레 같은 게.”
“이렇게 작은 주제에.”
“감히 대들어?”
“생각보다 귀엽군.”
“죽이기 전에.”
“한 번 따먹어야겠어.”
“맛을 봐야겠어.”
“박살내주마.”
“망가뜨려주마.”
“다시는 원래 몸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만들어주지.”
여러 목소리가 뒤섞였다. 거인 한 사람이 내는 소리였지만 그 안에는 무수히 많은 군중이 들어있었고, 그것들 모두 사파이어가 한 번씩은 꼭 들어본 소리였다. 그가 죽인 사람들의 목소리였다.
그들은 사파이어를 죽이길 원했고 동시에 사파이어의 몸을 가지길 열망했다. 사파이어는 미친 듯이 저항했다. 몸을 침범하려는 예고가 토할 것 같은 역겨움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그는 너무 미약했고 결국 두 다리가 아이 손에 붙잡힌 인형처럼 양 옆으로 쫙 벌어졌다.
저항해. 저항하라고. 망가져버리면 안 돼. 여기서 박살나면 안 돼. 다시는 돌아갈 수 없어. 다시는 저 밝고 따뜻한 세계로 돌아갈 수 없어. 그의 주인도 그를 보호하지 못해. 이 차갑고 어두운 세계에서 영원히 썩어문드러지게 되는 거야…….
사파이어는 급소를 공격당한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저항도 하지 못하는 미약한 존재의 고함은 도리어 정복자에게 즐거움이 되어주었다. 핏줄이 터져 충혈 되기 시작한 눈동자가 부릅 뜨였다.
믿을 수 없는 크기의 성기가 그의 몸 안으로 밀고 들어오려고 강제로 항문을 열고 있었다. 저런 게 들어올 리 없다. 들어올 수가. 골반이 박살나고 말 것이다. 안 된다.
“힉……. 흑……. 아악……. 흐아아악! 아아악! 아아아악!”
기어코 귀두가 몸 안으로 파고 들어오는데 성공했고 부욱하면서 몸 어딘가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망가진다. 망가진다! 사파이어는 심장이 터질 것처럼 소리 질렀다. 몸 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성기가 점점 더 안쪽으로, 안쪽으로 밀면서 귀두 끝으로 그의 심장을 꾸욱 짓누르는 착각까지 들게 했다. 갈비뼈 아래까지 박힌 것 같다.
움직임이 멈췄나 싶어서 사파이어가 숨을 헐떡이며 아래를 확인하니 배가 엄청나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명백하게 몸 안에 든 성기의 모양으로 불뚝 튀어나온 상태였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자신의 작고 보잘 것 없는 성기는 몸 안을 꿰뚫은 것에 비하면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성기가 몸 안의 모든 장기를 끌어낼 듯이 바깥으로 쭈욱 빠져나갔다가 한꺼번에 다시 치고 들어왔다.
사파이어는 공중에 들린 채 혀가 비죽 튀어나오고 눈이 희게 돌아갈 때까지 범해졌다.
그리고 사파이어는 악몽에서 깨어났다.
미간으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심장이 격렬하게 뛰고 있었다. 사파이어는 다시 철창 안에 갇혀 있었다. 항문 안에 든 것은 빠져나갔고 몸도 깨끗하게 씻긴 상태였다.
팔을 묶었던 결박은 풀렸지만 그 대신 팔다리에 각각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고리가 달린 족쇄라 사파이어를 어디에든 걸어놓을 수 있었다. 정조대는 계속 채워진 상태지만 요도를 막고 있던 것은 빠져나갔다는 느낌이 들었다. 방광을 자극하던 게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그가 정신을 잃은 사이에 제대로 배출을 해주었나보다.
어쨌거나 고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벽에 걸린 고문기구들과 설비들을 보면 그가 겪어야 할 것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벤체슬라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 방은 창문이 없어서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도 분간이 가지 않았다. 휴식시간인건 확실하겠지. 사파이어는 더 물러날 데도 없는 좁은 철창 안에서 있는 대로 몸을 구석으로 붙여 웅크리고 앉았다.
온 몸의 격통 때문에 눈을 뜬것이 차라리 저주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파이어는 무릎을 끌어안고 그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몇 초 지나지 않아 그의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용서받지도 못한데다가 의지할 데도 없는 자의 흐느낌이었다.
벤체슬라스는 링거 바늘과 수액을 들고 왔다. 사파이어는 철창 안 구석에 쭈그려 앉은 채로 잠들어 있었다. 어차피 소리쳐봐야 바깥에 들리지도 않지만 소리 내서 울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다만 보기 흉할 정도로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그다운 울음이다.
벤체슬라스는 잠든 사파이어를 붙잡고 끌어내 철창 바닥에 눕혔다. 잠든 동안 그가 뒤척이지 않도록 손발의 족쇄 고리를 창살에 고정한 후 한 쪽 팔을 잡고 고무줄로 묶어서 튀어나온 혈관을 찾아냈다.
벤체슬라스는 혈관 자리를 소독한 다음 링거 바늘을 끼워 넣었다. 반창고로 고정하고 고무줄을 풀어주자 영양제 수액이 사파이어의 몸 안으로 흘러들어가기 시작했다.
식사는 주지 않을 생각이다. 길들이기 작업이 아니라 벌주기니까. 힘을 빼놔야 정신 부수기가 더 수월해진다. 고통에는 역치가 없지만 진통제도 놔주었다.
사파이어가 모든 것을 체념해버려서 더 이상 맞서 싸우기를 그만둬버리면 이 작업이 의미가 없어진다. 인간 정신을 세공하는 묘미가 바로 이것이다. 사파이어는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결국 벤체슬라스에게 복종해야한다는 결론에 도달해야만 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며 포기해버리는 순간 그는 값비싼 쓰레기가 될 뿐이다.
벤체슬라스는 화가 다 풀린 것이 아니다. 투자한 돈을 허투루 날릴 수 없다는 집념만이 그를 아직 제정신으로 남게 해줬다. 사파이어를 살리고 있는 것은 돈의 논리인 것이다.
다만……. 사파이어는 자신이 남에게 어떤 상처를 얼마만큼 주는 사람인지 평생 동안 이해하지 못하겠지.
사파이어가 금전적인 가치를 잃어버린다고 해도 벤체슬라스는 그를 깨뜨려버릴 수 있을까? 이전에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었다. 그는 헛돈 나가는 것을 용서하지 못한다. 이것만큼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사파이어는? 그에 대해서는? 그가 아무런 가치가 없어져도 주저 없이 그를 죽여 버릴 수 있을까?
벤체슬라스는 힘겹게 긍정했다. 자기 자신을 다독이며, 할 수 있다고, 당연하지 않느냐며. 사파이어를 고문하는 것은 좀 더 품질 좋은 보석으로 만들기 위한……. 그를 더 충실한 노예로 세뇌시키기 위한……. 작업일 뿐이다. 그것 외에는 없다.
그는 아무도 믿지 않았다. 자신의 손으로 키워낸 사냥개가 무한한 믿음과 애정을 보여도 그것조차 믿지 않았다. 그에겐 모든 것이 영원히 부족했다. 사람을 믿지 못하면서 절대적인 충성을 원하는 열망이 계속 제물을 집어삼켜야 하는 불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사파이어가 얼마나 많이 그에게 고백했든, 얼마나 간절하게 빌었든 벤체슬라스 스스로가 사파이어의 숭배를 납득하지 않았다. 그는 아무도 용서하지 않았다. 자기 자신조차도.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의 턱을 쥐고 입술을 열어서 혀를 얽었다. 기나긴 키스였다.
사파이어는 사지가 부자연스럽다고 느꼈다. 머리로는 움직이라고 신호를 보내고 있는데 어딘가 답답하고 굼뜬 느낌이 들었다. 무언가에 가로막혀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왜 그럴까? 몸을 내려다본 사파이어는 숨을 들이켰다가 비명을 질렀다.
팔다리가 없었다. 절단되어 있었다. 팔은 팔꿈치 위까지 잘려 있었고 다리는 무릎 위까지 잘려 있었다. 잘린 부분은 용접을 한 것인지 고리 달린 철판으로 마무리가 되어 있었다.
팔다리가 없다니. 없다니! 사파이어는 이성을 잃고 없는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곰 인형같이 뭉툭한 작은 팔다리 토막이 허공에서 애처롭게 움직였다. 그 모습이 끔찍해서 사파이어는 한층 더 광란했다.
한참 뒤에야 그는 제정신을 차렸다. 온 몸이 땀범벅이 된 채 사파이어는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팔다리가 사라졌음에도 아직 그것이 생생하게 붙어있는 것 같고,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없는 부위가 불에 타오르는 것처럼 끔찍하게 아팠다.
사파이어는 환상통에 시달리며 듣는 사람의 뒤통수가 얼어붙는 절규를 내질렀다. 목은 이제 완전히 쉬어버렸다.
그 때, 어떤 소리가 들렸다. 사파이어가 숨을 헐떡이며 그 쪽을 돌아봤다. 형태를 알아보기도 전에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덩어리로 뭉친 불안감이었다. 사파이어는 짧은 팔다리를 버둥거려서 바닥을 기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저 알 수 없는 불쾌로부터.
두꺼운 근육을 가진 남자가 짧은 팔다리로 테디베어처럼 버둥버둥 기는 모습은 기괴했다. 이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아수라장에 뛰어들면서 필요하다면 건물과 건물 사이도 가뿐하게 뛰어넘는 가벼운 몸이었는데 그것을 지탱해주던 사지의 뼈와 근육들이 사라지니 무겁고 부담스럽기 짝이 없는 몸이었다.
가슴 근육이 공포에 의한 헐떡임으로 심하게 들썩거렸다. 사파이어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다고 해서 조금이라도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건 아닌데 자제할 수가 없었다.
결국 사파이어는 파도처럼 밀려오는 근원 모를 불안감에 잡히고 말았다. 질식할 것 같았다. 그것들은 손과 발, 혀를 가지고 있는 덩어리들이었다. 사람이었다. 남자였고, 사파이어를 윤간하는 무리였다. 사파이어가 여태까지 죽여 왔던 모든 사람들이었다.
팔다리가 없는 만큼 엄청나게 가벼워진 사파이어는 봉제인형처럼 공중에 들려 이 손 저 손으로 넘겨졌다. 몸 안으로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성기들이 밀고 들어왔다. 내벽을 짓누르고 자신의 욕심을 해소하면서, 때로 의도치 않게 전립선을 발견해 짓누르곤 했다.
그 광란의 윤간 속에서 사파이어 역시 발기하고 말았다. 자신의 몸을 가리거나 상대를 밀어낼 최소한의 수단도 잃어버린 채 사파이어는 결국 실금할 때까지 범해졌다. 목구멍에도 수 없이 많은 성기가 처박혀 정액과 오줌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냈다.
팔다리 끝에 달린 고리는 능욕의 종류를 더 다양하게 만들었다. 양 다리의 고리가 천장의 쇠사슬과 묶여서 거꾸로 선 상태로 고정된 사파이어는 죽지 않는 이상 결코 이 지옥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혀를 깨물려고 했다.
불확실한 방법이지만 이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자살시도는 금방 발각됐고 입에는 다물어지지 못하게 고정 장치가 삽입됐다. 사파이어는 이제 죽을 수단도 빼앗긴 채 단순한 고깃덩어리가 되어 끝없이 능욕당할 뿐이었다…….
사파이어는 온 몸의 신경이 경직된 채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악몽의 날카로운 자극이 아직 그를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팔다리의 부자연스러움도 여전했다. 그것이 현실이라는 걸 알기까지는 얼마간의 시간이 걸렸다.
팔다리를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건 사실이었지만 다행히 꿈과 다르게 어디 하나 절단된 곳 없이 제대로 붙어있었다. 쇠창살에 고정된 것뿐이다.
혼란에 빠진 사파이어를 단단하게 붙잡아 다독이는 손길이 있었다. 벤체슬라스가 그를 끌어안고 있었다. 이 비좁은 철창 안으로 들어와 사파이어의 광란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사파이어는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팔다리의 족쇄를 보았다가, 쇠창살을 확인하고, 고개를 돌려 벤체슬라스를 올려다보았다. 벤체슬라스는 무감정한 눈으로 그 혼란을 마주하며 또박또박 말했다.
“그건 허상이야.”
네가 본 게 뭐든 간에. 그건 가짜야. 이게 현실이고. 내가 너에게 주는 것만이 확실한 사실이야. 깨어나.
벤체슬라스의 단호함이 모든 현상을 명확하게 만들었다. 사파이어는 무너지듯이 그에게 몸을 밀착시키며 흐느꼈다. 도망쳐도 안식처 따위는 없기 때문에 결국 자신의 학대자를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사신 같은 남자가 응석을 부리게 될 것이라고 누가 상상하겠는가? 나 외에는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모습일 것이다. 이 남자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내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벤체슬라스는 쇠창살에 고정해놓은 팔다리를 풀어주었다. 족쇄는 그대로였지만 구속에서 자유로워진 사파이어가 몸을 움츠리려고 들자 그것을 찍어 누르며 다리를 벌리고 그 사이에 자신의 허리를 끼워 넣었다. 사파이어의 팔에 꽂아놓은 링거 바늘이 거칠게 흔들렸다.
“S자 결장까지 들어갈 수 있나 확인해볼까.”
사람의 몸으로 불가능해보이지만 벤체슬라스 정도의 크기라면 어쩐지 가능할 것 같기도 하다. 가능성에 대한 상상은 무서웠다. 사파이어가 저항하며 다리를 오므리려고 하자 벤체슬라스가 무릎으로 그 허벅지를 강제로 벌리고 누르면서 자신의 물건을 삽입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사파이어가 헐떡이면서 벤체슬라스의 어깨를 밀어내자 링거바늘로 피가 역류해 고무관의 일부분이 빨갛게 물들었다. 벤체슬라스는 용서 없이 밀어 넣었다. 고환까지 항문 안으로 전부 밀어 넣을 기세였다. 사파이어가 꿈에서 겪었던, 갈비뼈 아래까지 성기가 들어차는 것 같은 환상이 계속됐다.
사파이어는 등으로 기어 도망쳤지만 비좁은 철창 안에서는 자신을 더더욱 단단한 벽으로 몰아넣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주인의 커다란 품과 단단한 벽 사이에 갇힌 채 사파이어는 겨우 숨 쉬는 것만 할 수 있었다.
서로의 호흡이 느껴질 정도로 가슴이 맞붙은 채, 벤체슬라스가 뱃가죽으로 사파이어의 고환을 쓰윽 문질러 올렸다. 꿈의 여운 때문인지 이런 폭력 속에서도 그는 발기하고 있었다.
사파이어는 허우적거리다가 쇠창살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자신을 구원해 줄 어떤 수단도 없었지만 철창 밖으로 빠져나간 팔만이 자유였다. 벤체슬라스는 그것도 용납하지 못하고 사파이어의 팔뚝을 움켜쥐고 다시 철창 안으로 끌어들여 깍지를 낀 채 짓눌렀다. 그가 화를 내며 쿵 쿵 골반을 찍어 올리자 사파이어의 눈이 흐리게 감기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의 체내에 사정하고서도 화난 추삽질을 멈추지 않았다. 이윽고 그가 길게 방뇨하자 동시에 사파이어가 찬 정조대 안에서도 끈적한 하얀 액체가 흘러나왔다. 환희에 겨워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가 벤체슬라스의 허리에 꽈악 감겼다.
기나긴 고문의 시간이었지만 벤체슬라스는 지친 기색이 없었다. 그 역시 미친 암살자를 키워내고 관리하는 존재라 비정상적인 체력을 가지고 있었다.
사파이어가 지쳐 떨어질 때까지 범한 벤체슬라스는 씻는 것에도 자유를 주지 않고, 인형을 다루듯이 사파이어를 철창 안에서 끌어내 자신의 손으로 직접 구석구석 씻겼다. 자신이 몸 안에 방출한 것까지 공들여 닦아냈다.
사파이어는 벤체슬라스에게 수치심을 느끼지 않았지만 몸 안으로 끔찍한 것들을 집어넣는 고통은 거부했기 때문에 관장하기를 싫어했다. 벤체슬라스가 “내가 직접 주먹을 넣어서 창자를 끄집어 내 씻겨주길 바라는 건가.”하고 속삭이자 사파이어는 미약한 저항마저 그만두었다.
관장으로 몸 안에 있는 정액과 오줌까지 모두 빼내고 나자 이번에는 샤워기의 물로 성기를 집요하게 괴롭혔다. 발기하지도 못한 채 갇혀있는 물건을 수압으로 괴롭히는 건 질 나쁜 고문이었다.
이제 체력이 바닥나서 더 이상 사정할 기운도 없는 상태로, 신경만 계속 자극됐다. 사파이어는 울부짖느라 완전히 쉬어버려서 쇳소리 밖에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자극이 가해질 때마다 들릴 듯 말 듯 피곤한 신음만 흘릴 뿐이었다.
점점 시간개념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이곳에 며칠 동안 갇혀 있었는지도. 몇 주는 되지 않았을까? 어쩌면 몇 달 동안인지도. 창문도 없고 시계도 없는 방인데다가 하는 것이라곤 죽은 듯이 자는 것이든가 징벌에 가까운 섹스를 하는 것이었다.
그 외의 나머지조차도 자신의 손으로 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식사부터 배변까지. 식사라고 해봐야 링거 바늘로 주입받는 영양제나 비타민 보충제, 그런 것들이었다. 수분만큼은 충분히 공급받았지만 고체로 된 식사는 주어지지 않았다. 먹는 게 없으니 나오는 것도 적을 수밖에 없었다.
사파이어는 뒤처리에 대해서도 집요할 정도로 자유를 제한받아서 아주 사소한 것 하나 하나까지 벤체슬라스의 손을 거쳐야했다. 반신불수의 환자나 갓난아기 같은 취급이었다.
그것들 모두가 점점 더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없게 만들었다. 벤체슬라스와는 딱히 대화랄 것도 나누지 않았다.
무언가를 씹거나 말하는 활동도 하지 않으니 점점 생각하는 속도도 느려진다. 가장 최근의 기억조차도 가물가물하다.
마지막 임무가 뭐였더라. 숲에 갔었지. 늑대를 봤다. 어떤 노인을 죽여야 했던 것 같은데. 난 왜 이렇게 벌을 받고 있는 걸까? 이건 벌인가? 아닌가? 알 수가 없다. 주인은 계속 화가 나있는 것 같으니 아마도 벌이 맞겠지. 내가 무언가를 잘못한 모양이다. 그런데 그게 뭔지 모르겠다. 기억도 나지 않는다…….
생생한 악몽도 점차 빈도수가 줄고 충격적인 잔상이 완화되면서 서서히 사라져갔다. 악몽을 꾸지 않는 것만 해도 자극이 덜해서 이런 생활에도 슬슬 견딜 수 있을 것 같아졌다.
사파이어의 변화에 따라 벤체슬라스의 폭력성도 점점 더 누그러져 갔다. 꿈을 꾸지 않고 생각도 하지 않는 삶이란 이토록 단순하고 고요하다.
벤체슬라스가 이 방을 나섰다가 돌아오는 것 정도가 시간을 구분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이다. 그가 나갔다 돌아오면 철창문이 열리고, 밖으로 끌려 나가거나 안으로 집어넣어지거나, 그의 아래에서 다리를 벌리든가 그의 것을 입에 물던가…….
기껏 키워놓은 근육이 빠졌다고 평가하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사파이어는 시간이 꽤 많이 흐른 것을 알았다.
목숨만 간신히 유지할 만큼의 영양분을 섭취하는데다가 사용하는 열량은 그의 배는 된다. 근육은 물론이고 체지방까지 빠졌다. 원래부터 마른 몸매였던 것을 딱 보기 좋을 정도로 두툼하게 만들었는데 그게 고스란히 다시 빠진 것이다.
거울이 없으니 사파이어는 자신의 몸 상태를 잘 모르겠다. 얼굴을 더듬어보면 뼈대가 좀 더 도드라지는 것은 알겠지만.
몸의 멍 자국은 옅어지는 것이 있는가 하면 새로 생긴 것도 있고, 키스 자국이 붉게 물들었다가 사라져가는 곳에는 또 다른 키스자국이 아로새겨졌다. 이빨자국도 있었다. 이렇게 되니 어떤 것이 원래 피부색이었는지 모르겠다. 아직 하얀 부분이 드문드문 남아 있었는데 검푸른 멍이 원래 색깔이고 그 위에 하얀 얼룩이 여기저기 번진 것처럼 보였다.
사파이어가 자신의 손만 멍하니 내려다본다든가 습관적으로 어디다 머리를 계속 박는 등 이상행동을 하기 시작하자 벤체슬라스는 체벌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어디서 구해왔는지 모를 구속복을 입혀서 사파이어가 자해하지 못하도록 자신을 끌어안는 형태로 옷을 끌어당겨 결박시켰다. 하반신은 여전히 발가벗은 상태로, 가랑이의 정조대만이 몸에 걸친 유일한 물건이었다.
얼마간은 평화가 찾아왔다. 강압적인 섹스도 없었고, 성적인 접촉도 자극도 없었다. 자고, 눈을 뜨고,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것들을 하고, 다시 잠들고, 그것뿐이었다.
그 과정 내내 벤체슬라스가 철창 밖에 있었고 사파이어는 사육당하는 짐승처럼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했다. 집요한 관찰이었다.
또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벤체슬라스가 사파이어를 철창 밖으로 끄집어냈다. 걷어차거나 따귀를 때리지도 않았다. 기나긴 유배 생활이 끝난 것일까. 사파이어가 우두커니 서서 유순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자 벤체슬라스가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다리 벌리고 서.”
또 열락의 시간이 찾아온 것인가? 사파이어는 고분고분 그 말을 따랐다. 부검대 같은 철판에 상반신을 기대고 다리를 벌리고 서자 벤체슬라스가 뒤에 다가와 섰다. 무언가를 짜내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더니 곧 항문에 차갑고 축축한 것이 닿았다.
며칠만의 자극인지라 사파이어의 어깨가 작게 떨렸다. 무언가를 잔뜩 묻힌 벤체슬라스의 손가락이 사파이어의 몸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연고 같은 것일까? 손가락은 꼼꼼하게 내벽을 더듬으며 그 정체모를 것을 묻히고 있었다.
손가락은 전립선을 건드리지 않고 금방 빠져나갔다. 사파이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돌아보자 벤체슬라스가 손가락을 닦으며 차가운 눈으로 사파이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벤체슬라스는 방 한 구석에 놓인 이동식 욕조를 질질 끌고 왔다. 플라스틱 재질이라 그리 무겁지 않아보였지만 안에 무언가가 가득 찬 것 같은 묵직함이 있었다. 천으로 덮여 있어서 무엇이 들어있는진 보이지 않았다.
천을 걷어내자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욕조 한 가득 들어 있는 밀웜(Mealworm)이었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것들이 꾸물꾸물 얽혀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욕조 안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사파이어는 순간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가 간신히 현재 상황을 추리했는지 충격을 받은 얼굴로 벤체슬라스를 돌아보았다. 그의 주인은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들어가.”
그 어떤 가학성이나 악의도 없는 미소였다. 깜박 속아버릴 것만 같았다. 사파이어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면서 저도 모르게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러자 벤체슬라스가 사파이어의 어깨를 잡고 욕조 쪽으로 강하게 밀었다. 웃는 낯을 유지한 채.
“들어, 가.”
사파이어의 도리질이 점점 더 거세졌다.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으으.”하는 원초적인 거부의 소리만이 튀어나오다가 그 후에 “싫어요.”하고 제대로 인간처럼 말을 했다.
사파이어가 자기 발로 욕조 안에 들어갈리 만무했기 때문에 벤체슬라스가 친절하게 사파이어의 다리를 벌려서 욕조를 사이에 두게 하고 어깨를 짓눌러야 했다.
“주사기로 집어넣기 전에 네 발로 앉아. 벌레로 관장하고 싶지 않으면.”
원래부터도 힘으로는 벤체슬라스를 당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저항이라는 걸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약해진 상태였다. 꿋꿋이 버티고 선 다리가 서서히 기마자세로 무너지면서 엉덩이 끝이 욕조의 꿈틀거리는 수면 위에 닿았다.
단내 나는 끈적한 액을 바른 따뜻한 육질이 다가오자 벌레들이 온기에 반응해 꾸물꾸물 기어오기 시작했다. 인간의 체온은 깜짝 놀랄 정도로 뜨겁지만 벌려진 항문이라는 좁고 어둡고 축축한 동굴은 벌레들을 자극하고도 남았다.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가 어디까지 저항하나 관찰했다. 분명 격렬한 반응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벌레를 사용해본적은 없으니까. 벌레의 혐오스러운 모습이 안겨줄 정신적인 충격이 분명 사파이어가 감추고 있는 본모습, 반역의 칼을 갈고 있는 모습을 드러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사파이어가 한 저항이라곤 미약한 도리질뿐이었고, 그 다음에는 그저 울뿐이었다. 몸으로 벤체슬라스를 밀어낸다든가 욕조를 걷어찬다든지, 상상할 수 있는 반항은 하지 않았다. 우는 것만이 그의 유일한 저항 방법이라도 되는 것처럼. 용서해달라거나 살려달라고 빌지도 않았기 때문에 벤체슬라스는 곧바로 그를 일으켜 세웠다.
벌레는 한 마리도 그의 몸 안에 침범하지 않았다. 잠시 운 좋게 살 위에 올라탔던 녀석들이 중력에 의해 다시 욕조 안으로 투둑투둑 떨어지자 사파이어가 등 뒤를 단단히 지탱하는 벽 같은 가슴에 기대어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다.
벤체슬라스는 손끝으로 사파이어의 눈물을 닦아주면서 다른 손으로는 성기와 고환을 정조대채로 쥐며 주물럭거리다가, 정조대를 풀고 오랜만에 성기 기둥을 쓰다듬으며 수음을 해주었다.
사파이어는 해방이 믿기지 않았지만 그의 몸은 오랫동안 이때만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몇 번의 손짓에 금방 빳빳하게 일어섰다. 그 동안 전립선이 문질러져 드라이 오르가즘으로 망가진 사정만 어설프게 하던 몸이라 오랜만에 성기 자체가 주물러지는 건 간지러운 곳을 긁는 쾌감과 눈앞이 싸해지는 시원함이 있었다.
울던 사파이어가 쾌감을 이기지 못하고 뒷머리를 비비며 고개를 쳐들었다. “아, 아.”하는 안타깝고 절박한 신음이 벤체슬라스의 귓가에 곧바로 울렸다.
첫 번째 사정은 간단하고 빨랐다. 오래 참은 정액이 거의 덩어리 비슷한 모양으로 꿀렁꿀렁 튀어나왔다. 제법 멀리 튀어나갔지만 욕조의 벽을 넘지는 못하고, 욕조 안으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꾸물거리는 벌레들에겐 그야말로 재난이었다.
벤체슬라스는 손을 멈추지 않았고 연속으로 두 번, 세 번 사파이어를 사정하게 만들었다. 사정 횟수가 늘어날수록 정액이 묽어졌다. 단백질이 든 뜨거운 액체가 후두둑 후두둑 떨어질 때마다 욕조 안의 벌레들이 발작을 했다가 액체 주변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난 아직도 널 믿지 않아.”
벤체슬라스가 후희를 즐기라는 듯이 사파이어의 성기 기둥을 천천히 쓸어주며 말했다.
“네가 거짓말하지 않는 게 사실이라고 해도 널 믿을 수가 없어.”
“차라리 죽여주세요……. 더 이상은, 이제는…….”
“절대로 안 돼.”
벤체슬라스가 식은땀이 흐르는 사파이어의 목덜미를 핥아 올렸다.
“넌 이 지옥에서 영원히 살아야 돼.”
죽음을 원하는 자에게 죽음을 준다면 그건 영원한 안식을 안겨주는 것에 지나지 않을 터이다. 형벌을 가하려면 죽고 싶어 하는 자를 영원히 살게 해야 한다. 나비를 박제하듯이.
사파이어를 범하면서 벤체슬라스는 불을 지펴둔 화로에 손을 뻗었다. 철판 위에 누워 정상위로 다리를 벌리고 있는 사파이어는 아무런 기운이 없는 건지 벤체슬라스 쪽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몇 번이고 사정한 성기도 힘이 없어서 늘어져 있었다.
벤체슬라스는 새빨갛게 달궈진 인두를 불 속에서 꺼냈다. 열기가 대단했다. 인두를 들고 있는 자신에게도 부담이 될 정도로.
힘없이 늘어져 있던 사파이어가 인두 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벤체슬라스가 인두를 몸 쪽으로 끌어당기자 사파이어는 손등으로 눈꺼풀을 덮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벤체슬라스는 자신의 다리 아래 깔린 한심한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온 몸이 피멍으로 물들어 있었고 키스자국과 이빨자국으로 뒤덮여 있었다. 생긴 지 얼마 안 된 상처와 오래된 상처가 있었고, 끈과 족쇄로 묶여서 자국이 남은 곳 사이로 얼마 안 남은 멀쩡한 피부가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볼품없는 몸이 마르니까 더 볼품없다. 이 남자의 어디에 그렇게 분노하게 되는 걸까. 낙인을 찍고 싶었다. 이 남자의 몸에 평생 가는 흔적을 남겨서 이 남자가 영원히 자신의 소유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누구에게? 결국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것인데.
인두로 지져버리기에 좋은 곳이 어딜까. 고민하며 이곳저곳에 인두를 들이 대보던 벤체슬라스는 최후의 순간에 결국 인두를 내동댕이치고 말았다. 그리고 사파이어의 몸을 지져버리는 대신 더 강하게 박아 올리며 기어코 사파이어의 목에서 다시 고통스런 신음이 터져 나오게 만들었다.
벤체슬라스는 자신에 대해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내가 그를 지져버리지 않는 것은 그가 그럴 가치조차 없기 때문이라고. 지질 수 없던 것이 아니라고.
만국의 보석이여, 단결하라!
알료샤의 아지트에 들어서자마자 걸려있는 플래카드를 보고 마리야 이바노브나는 강렬한 거부감을 느꼈다. 소비에트 연방 시절을 살아왔고 한 때는 공산주의에 투신했던 마리야에게 그것은 대단한 기만으로 보였다.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꿔서 돌아가도록 할까. 마리야가 뒷걸음질로 다시 아지트를 빠져나가려는 순간 안 쪽 방문이 열리고 만면에 환한 미소를 지은 알료샤가 두 팔을 번쩍 들며 다가왔다.
“마리야!”
역시 내가 판단을 잘못했던 게 틀림없다. 마리야는 등을 돌려 나가려고 했다. 알료샤는 마치 사이비 종교 모집원이 마음을 바꿔 달아나려는 입회자를 붙잡는 것처럼 마리야의 손을 덥썩 잡았다.
“세상에 이게 웬일이야! 너무너무 반가워! 어서 와요!”
“이 손 좀 놔주겠어?”
“으응, 싫은데 싫은데! 놔주면 갈 거잖아!”
“안 놔주니까 더 가고 싶은데.”
마리야가 손을 비틀어 빼려고 탈탈 흔들자 알료샤가 그 흔들림마저 악수로 바꿔서는 굳고 단단하게 악수를 하고 손을 놓아주었다.
알료샤가 얼마나 강한 힘으로 붙잡았는지 마리야의 손목엔 알료샤의 손자국이 뻘겋게 남아있었다. 마리야는 인상을 찌푸리며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알료샤는 주인이 등 뒤에 간식을 숨기고 있을 거라고 기대하는 개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마리야의 이곳저곳을 뜯어보았다.
“아가테는? 응? 아가테는 어디 있어?”
“피전 블러드는……. 그보다 당신이 어떻게 본명을 아는 거야?”
“우리 사이에 비밀이 어디 있겠어!”
“소름끼치니까 남의 과거사 좀 캐지 말아줄래?”
“애정이라고 해줘, 애정!”
좋아, 또 다른 잠재적인 보석 도둑이 눈앞에 있군. 마리야는 불쾌감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지만 알료샤는 머리를 두들기면 청명한 소리가 날 정도로 해맑은 미소로 응대했다.
“아가테는 볼 일이 있어서 잠시 고향으로 돌아갔어.”
“고향? 아아, 아이제나흐였던가?”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아?”
“어머님이랑 저번에 인사도 했는걸! 건강이 안 좋아 보이시던데. 좀 나아지셨으려나?”
마리야는 뒷덜미에 소름이 돋는 것을 애써 숨기며 태연한 척 가장했다. 자신이 피전 블러드 본인이었으면 앞뒤 가리지 않고 정말 여기서 도망쳐 나갔을 것이다. 마리야는 화제를 돌리려고 플래카드를 가리켰다.
“어쨌든 간에 저건 뭐야?”
“멋있지? 옛날 생각나지 않아?”
“그냥 불쾌한데.”
“좋았던 소비에트 시절이 생각나지 않는단 말이야?”
“새파랗게 어린 게……. 당신 나이로 따져봐야 소비에트 시절은 까마득히 어렸을 때 아냐? 초등학생? 아니면 그 이하?”
“사람을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하면 안 돼, 마리야.”
알료샤가 능글맞게 히죽 웃었다.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아직 한참 젊은 누님인걸!”
“은근슬쩍 넘어가려고 하지 마. 능구렁이 같은 게.”
그런데 결국 또 본인의 나이 얘기는 쏙 빠졌다. 그러고 보니 마리야는 알료샤의 개인사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
알료샤가 들으면 “섭섭한걸! 내가 얼마나 내 얘기를 많이 하고 다니는데! 자, 명함 줄게!”하고 시시콜콜한 정보까지 다 말해줄 것 같지만 막상 알아보려고 하면 철저하게 가려진 부분이 많은 비밀스러운 남자다.
누군가의 뒤를 캐내는 것이 직업이었던 마리야에게도 알료샤는 벅찬 남자였다. 예전 인맥을 동원해서 신상정보를 파악하려고 해도 알료샤 얘기가 나오면 다들 조개처럼 입을 꽉 다물어버리고는 했다.
“당신이 내 나이 또래일거라고는 생각 안 해, 알렉세이 막시모비치.”
“우리 사이에 부담스럽게 부칭까지 부르기야?”
“전부터 말하고 싶었는데 당신도 나 이렇게 불러줬으면 좋겠거든? 마리야 마리야하고 이름만 부르니까 기분이 좀…….”
“우리 사이에!”
“벤체슬라스는 꼬박꼬박 부칭까지 붙여줬는걸.”
“그 새끼 얘기가 왜 나와?”
장난스럽던 분위기가 갑자기 싸늘해졌다. 마리야는 속으로 웃었다. 이게 약점이구나.
“사람이 재수 없는 건 둘째 치고 예절만은 깍듯하게 지키던걸.”
“실망이야, 마리야 이바노브나. 사람의 의도가 중요한 거지 형태가 중요한 게 아냐. 에티켓으로써는 어떨지 몰라도 매너로써는 꽝인 게 그 놈이야.”
“거 봐, 이제 제대로 불러주네.”
“내가 별로 좋아하는 접근 방식은 아니야, 마리야 이바노브나. 아무리 당신이 그 놈 뒤통수를 때려서 나한테 도움을 요청하러 왔다고 해도 이런 식의 도발은 아니지.”
이번에는 마리야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놀랐어? 내가 모를 것 같았어? 슈투트가르트까지 가서 난리쳤다며. 그걸 뭐라고 하면 좋을까? 과거에 대한 속죄? 아니면 증거 지우기? 그렇게 유령 보듯이 보지 마. 우리 사이에 비밀은 없잖아?”
비밀이어야 했다. 어떤 것은 비밀이어야만 한다.
“오히려 당신 의도를 알고서도 환영해 준 나를 믿어줬으면 좋겠는데. 당신이 날 이용할 걸 알면서도 받아주는 거잖아. 내가 얼마나 믿음직한 아군인지 알겠지?”
“감사를 표하라는 거야?”
“우정을 약속하라는 거야.”
“우정이라니. 충성을 맹세하라는 소리겠지.”
“당신한테 다른 방법이 있어?”
하기는, 마리야도 딱히 기댈 곳이 없기 때문에 알료샤에게로 왔다. 정말 내키지 않지만.
“나쁘지 않은 조건이야, 마리야. 당신한테 내 노예가 되라는 것도 아니고 친분관계를 맺자는 거야. 평등하게.”
“그래, 평등한 친분 관계 말이지?”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 말이야.”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오, 아니지. 당신이 협상 조건으로 들고 온 게 목숨을 구해달라는 거잖아. 그런 걸 테이블 위에 꺼내놨다간 교섭이 시작되기도 전에 결렬이지. 나 같아도 도망가겠다.”
“그럼 나한테 뭘 원하는 건데?”
“흠…….”
알료샤는 턱을 괴고 잠시 마리야를 뜯어보았다. 유용한 도구라는 건 알지만 어디에 써야할지 몰라서 손에만 들고 있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나중에 내가 요구하면 들어줄 거야?”
“내 목숨이나 피전 블러드를 내놓으라는 건 싫은데. 은퇴자금도.”
“하하하하, 그런 건 손 안 대. 걱정 마. 나 돈 많아.”
그리고 내 대신 죽어줄 병졸들의 목숨도 많아.
“지금 당장은 당신을 가지고 뭘 해야 하는지 모르겠는걸. 하지만 일단 당신을 받아줄게. 보호해 줄 테니까, 내가 요구할 땐 보답해.”
“딱히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네.”
“그럼 우리 이제 친구다?”
알료샤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마리야는 머뭇거리다 그 손을 잡고 악수했다. 알료샤가 활짝 미소 지었다.
“드디어!”
“돌아온 탕자를 받아주는 아버지 같은 표정이네.”
“알료샤의 품은 언제든 누구에게나 열려있다고!”
“하지만……. 난 세공사인걸?”
“세공사든 보석이든 인간이 다를 게 있나! 서 있는 위치만 약간 다를 뿐이지. 저 플래카드에 써놓은 게 뭐라고 생각해? 만민평등의 기치 아니겠어?”
“당신만 빼고 말이지.”
“공산당에도 총비서라는 직책은 있잖아.”
“내 눈에는 그게 총비서가 아니라 차르로 보여서 말이야.”
게다가 공산주의도 아닌 것 같아. 익숙한, 독재정치의 냄새가 난다고 할까.
“배짱 좋은데, 마리야. 난 그런 거 좋아해.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데 날카롭게 파고드는 건 여전하고.”
“보호해준다며.”
“아니, 오해하지 마. 당신은 이미 내 영역 안에 들어와 있어. 길바닥에서라면 몰라도 내 집에 들어온 손님을 지키는 건 주인의 의무지. 내가 이미 당신을 받아주겠다고 했잖아. 그건 걱정하지 말라고. 당신이 제일 걱정하는 게 그거지? 협회의 꼬리자르기보다……. 옛날 친구라던가, 옛날 상사라든지, 옛날 적이라든지, 많잖아.”
“그리고 벤체슬라스도.”
“그 놈 돈 떼먹은 거 있어?”
“아니, 보상금으로 꼬셨거든. 돈을 떼먹진 않았어. 지금도 세공사 협회에 찾아가면 그 사람 앞으로 돈 내줄 거야.”
“그럼 걱정할 거 없을걸. 걸레라서 돈이면 다 되거든. 좀 열 받긴 해도 시간 지나면 잊을걸. 돈 떼먹으면 말 그대로 지옥 끝까지 쫓아오지만.”
“그 사람에 대해 잘 알고 있네?”
“알기 싫었지만 말이야.”
알료샤는 인생에서 안 좋았던 모든 기억들을 끌어올리기라도 하는지 형용할 수 없이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들을 다시 억지로 쓸어내려는 듯이 알료샤가 화제를 바꿨다.
“그래서 말인데, 일이 어쩌다가 그렇게 커진 거야? 무슨 일을 했길래?”
“자세한 건 말해주기 싫은데.”
“말해주라. 당신 입으로 듣는 게 낫잖아. 내가 다른데 가서 직접 뒷얘기 캐고 다니는 것보다.”
“내 뒷조사 할 거라고 그렇게 당당하게 앞에서 얘기하는 거야?”
“뭐 어때.”
웃는 낯이고 유쾌한 분위기지만 협박이다. 그리고 마리야의 입으로 직접 들려주지 않으면 어디까지 캐고 다닐지 모른다. 정말로 알려주기 싫은 부분까지 전부 다 알게 될 테지. 기회를 줄 때 순순히 불어버리는 게 낫다.
“난 내 정보 회수하면 그만이었어. 벤체슬라스와 사파이어 제거는 덤이었고.”
“사파이어 제거?”
“난 절대 그들한테 악감정이 없어. 알지?”
“벤체슬라스는 죽든 말든 상관없는데 사파이어 얘기는 좀 거슬리는걸.”
“그한테 관심 있어?”
“엄청 관심 있어.”
좋아. 그렇다면 이 주제는 건드려선 안 되겠군. 마리야는 슬쩍 말을 돌렸다.
“나 혼자 힘으로는 역부족이라는 걸 알고 있었어. 당신도 알다시피 피전 블러드가 근접 전투에 뛰어나다곤 할 수 없잖아. 저격으로만 처리할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지. 그래서 보완할 필요가 있었어.”
“그래서 벤체슬라스를 고용했다?”
“보상금 주고.”
“그래서?”
“세공사가 다른 세공사를 고용한다는 게 자주 있는 일은 아니잖아. 그렇지? 의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는 해도 정보가 퍼져나가는 걸 반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단 말이야. 의뢰인도, 의뢰인 옆에 있는 사람들도 말이지. 다른 세공사와 함께 일은 처리하지만, 모든 게 끝난 다음에는 뒷정리도 해야 하는 거야.”
“그게 벤체슬라스 제거였다 이거지. 그럼 처음부터 돈 줄 생각 없었던 거 아니야?”
“내가 말했지. 그들한테 개인적인 악감정은 없다고. 난 나를 살리기 위해서 움직였을 뿐이야. 재수가 좋다면 그들도 어떻게든 살아남았겠지. 지금처럼 말이야. 그러니까, 돈을 떼먹을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던 거야. 그한테 주겠다고 한 돈은 사실 그대로야. 그를 죽여야 한다는 말만 하지 않은 것뿐이지.”
“교활하네. 그리고 감상적이고.”
“당신도 내 입장이라면 이랬을걸.”
“아니. 나 같으면 벤체슬라스는 죽이고 사파이어는 데려왔을 거야.”
마리야는 피부가 따끔거렸다. 오해를 확실히 풀어둘 필요가 있었다.
“당신이 벤체슬라스랑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사파이어랑은 정말 아무런 감정도 없어.”
“그래? 이전에 사파이어 사냥에 앞장서서 참가하셨던 것 같은데?”
“그런 것도 기억하고 있네……. 돈이 걸린 문제였잖아.”
“그래그래. 딱히 그것 가지고 뭐라고 하는 건 아냐. 그 때는 내가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당신이 모르고 있었을 테니까. 그걸 누가 탓하겠어.”
알료샤는 자신이 넓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 한껏 관대한 얼굴을 했지만 마리야는 밑바닥에 깔린 긴장감을 읽었다. “이전의 일은 묵과하겠다. 그러나 이다음은 없다.” 이런 경고였다.
“사파이어가 좋은 보석이라는 건 나도 알아. 벤체슬라스는 남이 보기에도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보석을 학대하더라고. 인권착취적인 청부업자가 한둘은 아니지만……. 기회가 있었다면 나도 사파이어를 내버려뒀을 거야. 하지만,”
“하지만?”
“그가 주인에게 맹목적이라는 거 당신도 알잖아. 당신이 더 잘 알지 않을까?”
알료샤가 굳게 입을 다물고 인정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바로 그 맹목성과 헌신, 충성심 때문에 그에게 그렇게 깊게 빠져들었던 것이다. 그 눈동자가 내게 향한다면 좋으련만.
“그래서 결국은 그 둘을 제거하려다가 실패하고 겨우 도망쳤어. 그래도 임무는 완수한 거니까 고객에게서 클레임이 들어올 일은 없었지. 협회도 딱히 뭐라고 한 건 아니고. 단지…….”
“단지?”
“글쎄, 그게 그렇게 다국적 첩보전이 될 줄은 몰랐거든. 사상자가 그렇게 많이 생길 줄도 몰랐고. 이 일도 오래 하다보면 다른 나라 요원이라고 해도 알음알음 관계를 맺게 되거든. 친구도 생기고…….”
“적도 생기고. 이야기는 꼬이는 거고.”
“그렇지.”
“알았어. 이정도만 알아둘게. 당신 인간관계를 하나하나 알자고 그러는 건 아냐. 그래도 맥락이라는 걸 파악해둬야 내가 나중에 어떻게 대응할지 그림이 나오거든.”
“솔직히 지금도 의구심이 들어. 당신을 믿어도 되는 걸까?”
“이런, 마리야. 하하하. 하하하하.”
알료샤의 웃음소리는 항상 그렇듯이 청량음료 같이 상쾌했다.
“나 친구 많아. 하하. 이런. 너무 얕보였나? 당신이 말한 대로 표현하자면 차르처럼 많아. 당신이 날 찾아온 건 정답이었다는 거야.”
황제처럼 친구가 많다니.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을 것이다. 친구의 양도, 질도, 종류도 군주처럼 많겠지. 그것을 친구라고 부르는 것이 옳을까? 하인 아닐까? 마리야 자신을 비롯해서.
“당신 얘기는 이만하면 됐고 사파이어 얘기를 좀 더 해보고 싶은데.”
“뭐? 난 더 이상 아는 거 없어. 내가 말한 게 전부야.”
“잘 지내고 있던가?”
“잘 지내냐고 있냐니, 구체적으로 어떤 거?”
“밥은 잘 먹고 있는지. 어디 다친 데는 없는지. 살이 더 빠지지는 않았는지. 혹시 나를 그리워하고 있는지…….”
“몰라, 이 스토커야.”
사파이어와 얼굴을 맞댄 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데다가 관계가 깊지도 않았다. 게다가 알료샤가 질문하는 것들은 상궤를 가볍게 벗어나는 것들이다. 그러다가 마리야가 뭔가 떠올랐는지 “아!”하는 소리를 냈다.
“흘러가는 분위기로 봐서는 사람 하나 잡을 것 같던데. 지금쯤 혼나고 있지 않을까?”
“혼난다고?”
“명령불복종이 몇 번 있었거든.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는데. 표적 앞에서도 바로 죽이지 못하고 몇 번씩 주저하고. 늑대한테 물려서 제정신이 아니었을 수도 있고.”
“잠깐 잠깐 잠깐 잠깐, 마리야. 마리야?”
“응?”
“무슨 말인지 하나씩 차근차근 설명해줄래?”
마리야는 자신이 본 것을 처음부터 차근차근 풀어놓았다.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알료샤의 얼굴에서 점점 웃음기가 사라져갔다. 나중에는 마리야가 눈치를 볼 정도로 험악해졌다. 마리야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더니 이야기가 끝날 때 즈음엔 거의 들리지도 않게 됐다.
1년 내내 축제를 살아가는 것처럼 싱글벙글 웃는 낯이 기본인 알료샤는 지금은 단단한 화강암처럼 변해있었다.
“벤체슬라스가 협회에 가서 받아야 할 돈이 있다고?”
침묵을 지키던 알료샤가 입을 열자 마리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보다 톤이 훨씬 내려간 목소리 때문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알료샤는 마리야를 물끄러미 보다가 어디 간다는 말도 없이 갑자기 안쪽 방으로 휙 들어가 버렸다. 안쪽에서 뭔가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혼자 남겨진 마리야는 굉장히 어색해진 상태로 태연한 척 방 안을 둘러보며 평정을 가장했다.
슈테판 베르너는 그의 신비로운 주인이 해고마저도 비밀스럽게 한 건가 싶어서 침울한 상태였다. 하지만 꼬박꼬박 급료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해고당한 건 아니구나 싶어 마음이 놓였다. 게다가 슈테판에게 호텔비도 내주겠다는 것을 기억했는지 웃돈도 얹어주었다. 부족한 금액은 나중에 정산하라고 서면상으로 기별이 왔지만 전화는 걸려오지 않았다.
슈테판으로서는 본의 아니게 휴가를 즐기는 셈이었다. 가만히 대기하고 있어도 돈이 들어오긴 하지만 좀이 쑤셔서 견딜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이제는 화가 좀 풀리지 않으셨을까. 그런 나날을 보내던 와중 벤체슬라스에게서 저택으로 돌아오라는 연락이 왔다.
슈테판은 그 소식을 듣고 얼마 안 되는 짐을 챙겨 당장 체크아웃을 했다. 장기투숙객이 갑자기 계산을 하고 나가려하자 호텔 측도 사정이 궁금한 모양이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슈테판은 주인을 어떻게 대해야할까 고민하면서도 동시에 반가움과,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간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물론 그것은 일터이긴 하지만 이미 그 곳에서 생활한 나날이 있으니 일종의 집이었다.
저택은 이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정원이 관리가 안 되서 풀이 자란 것을 빼곤 망가진 곳도 없고 내부도 어질러져 있지 않았다.
사실 자리를 비운 시간이 꽤 길었기 때문에 슈테판은 각오하고 있었다. 저택에 도착해서 짐을 내려놓자마자 두 팔을 걷어붙이고 젊은 주인님이 어질러놓은 것을 말끔히 정리하리라고. 비록 주인의 명령으로 저택을 떠나있기는 했으나 슈테판이 부재하는 동안 주인은 노련한 집사의 도움이 간절히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르게 집 안에도 슈테판이 정리할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먼지가 좀 쌓였다는 것 말고는 정말 치울 것이 없었다. 가득 차는 일이 없는 냉장고는 유통기한을 넘겨 상한 식재료 같은 건 하나도 없이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주방도 마찬가지였다.
슈테판은 미약한 기대감을 안고 세탁물을 살폈지만 주인의 옷가지 역시 빨래부터 다림질까지 나무랄 데 없이 처리되어 있었다. 그만큼 슈테판이 할 일은 줄어들었지만 그는 오히려 정체모를 실망감을 느꼈다. 보살핌이 직업인 사람에게 보살핌이 필요 없는 사람만큼 유감인 것이 없다.
이 집에서 유일하게 엉망인 것은 자신의 방으로, 허둥지둥 나갈 때 그 상태 그대로였다. 그것을 보자 슈테판은 자신이 느낀 위화감의 정체를 알았다.
이 집에는 사람이 살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모양만 그럴싸하게 만든 인형의 집 같달까. 슈테판이 집에 없는 동안 벤체슬라스 역시 다른 곳에 있었던 것일까?
“베르너 씨.”
집사가 돌아온 것을 보고 벤체슬라스가 나른한 얼굴로 인사했다. 그다지 반가워하는 기색도 없이 안부조차 묻지 않고 그는 바로 필요한 것을 명령했다.
“며칠 동안 스위스에 갔다 올 일이 생겼습니다. 그 사이에 집을 부탁합니다.”
“출장가시는 겁니까?”
“예.”
“알겠습니다. 그럼 우선 청소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지시하실 것이 더 있는지요?”
“난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베르너 씨. 당신의 믿음은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습니까?”
“주인님?”
“당신을 함구하게 하려면 얼마가 필요한지 묻고 있는 겁니다.”
벤체슬라스가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슈테판은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조차 짐작하지 못했다. 믿음을 사겠다니?
“당신은 이미 급료만큼 잘 해주고 있지만 나는 그 이상을 제안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부터 내가 맡길 일은 당신에게 추가 소득을 안겨주겠지만 당신 역시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합니다. 영원히.”
“그게 무슨……. 무슨 말씀이신지요?”
“얼마나 충성스럽냐고 묻고 있는 겁니다.”
슈테판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어졌다. 이런 모욕이 있나! 집사의 표정 변화를 보고 벤체슬라스가 바로 깍듯이 사과했다.
“당신의 경력을 헐뜯는 건 아닙니다. 난 지금 당신에게 선택권을 주고 있는 겁니다. 한 발자국 더 들어올 것인가, 아니면 여기까지 선을 그을 것인가.”
“무엇을 제안하시려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여태 모신 분들이 시키신 그 어떤 은밀한 일도 단 한 번도 발설한 적이 없습니다. 그건 주인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전의 계약에 대해서는 주인님께 말씀 드릴수도 없고, 혹시라도 주인님과의 계약이 해지된 후 다른 저택에 가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봉사하는 사람이지 비밀을 퍼뜨리고 다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요. 당신의 직업윤리를 무시하고 있었군요. 미안합니다.”
벤체슬라스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집사에게 건넸다.
“잠긴 문의 열쇠입니다. 열어보라고 주는 건 아닙니다. 열지 말라고 맡기는 것이지.”
무표정하던 벤체슬라스의 얼굴이 일순 섬뜩하게 날카로워졌다. 영혼을 파는 인간이 계약서에 마지막 사인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악마 같은 모습이었다.
“절대로 열지 마십시오.”
“하지만…….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그 방은 이전부터 잠긴 상태 아닙니까? 안에 들어갈 일도 없는데요. 굳이 저한테 열쇠를 맡기지 않으셔도…….”
“무슨 소리가 나도 들어가지 말란 말입니다.”
“안에 무엇이 있나요?”
“대답할 수 없습니다.”
집사는 충직하게 말을 잘 듣는 편이었지만 이번 지시는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남을 믿지 못할 정도면 자기가 지니고 있으면 될 것 아닌가? 왜 굳이 집사를 시험하는 것일까? 집사는 그것을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지만 벤체슬라스는 그 의중을 읽었다.
“내가 가지고 있다가 분실하면 저 문을 열 방법이 없어지고. 집에 두고 가자니 그대로 도둑맞아서 사라져도 곤란하고. 그래서 당신에게 맡기는 겁니다. 반드시 가지고 있으십시오. 잃어버리지 말고, 누군가가 훔쳐가게 내버려두지도 말고. 당신에게 열쇠를 보관하는 겁니다. 알겠습니까?”
“예, 알겠습니다.”
그제야 집사는 납득했다. 방 안에 들어있는 게 무엇이든 굉장히 중요한 물건임이 틀림없다. 아마 금고 같은 용도로 사용하고 있나보지. 그래서 주인은 저렇게 몇 번이고 너를 믿을 수 있느냐, 믿을 수 있느냐 하면서 재차 확인을 한 것이다.
결국 벤체슬라스는 슈테판에게 열쇠를 맡겼다. 귀중품을 맡길 수 있을 정도로 충실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런 식으로 판단하자 오히려 주인에게 인정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 안에서 무슨 소리가 나도 들어가지 말라는 구절이 조금 걸리긴 하지만.
벤체슬라스는 잠시간 물건을 평가하는 눈으로 슈테판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낮고 묵직하게 말했다.
“부탁합니다.”
벤체슬라스는 짐을 챙겨서 그날 오후에 저택을 떠났다. 슈테판은 또 다시 혼자가 되어 저택 안을 돌아다니며 수리할 곳이 있는지 점검하고, 치울 수 있는 곳은 바로 치웠다. 내일은 하루 종일 대청소를 해야 할 것 같았다.
벤체슬라스는 가혹한 주인이 아니라서 늙은 집사 한 사람에게 저택의 창문 전체를 다 닦으라고 명령하지는 않았지만 슈테판 본인의 위생 기준이 그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주인이 맡긴 열쇠는 아예 고리에 끈을 묶어 펜던트처럼 만들어서 목에 걸은 후 셔츠 안으로 집어넣었다. 몸과 밀착시켜놓으면 잊어버릴 일이 없다. 주머니에 넣어놨다간 언제 깜박하고 흘릴지 모르고 방에 두고 다니기에도 애매하니까.
주인이 도둑 얘기를 언급했는데 혹시 자신이 저택에 없을 때 강도라도 들었던 것일까? 그 염려하던 모습을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부자들이 사는 지역이지만 큰 저택에 소수의 사람이 살고 있다는 건 도둑에게 유혹적인 먹잇감이다. 벤체슬라스가 이번 출장에서 돌아오면 그에게 사람을 더 고용하자고 제안해 볼 생각이었다. 적어도 정원사는 있어야 저 부지가 관리되지 않겠는가. 그러고 보니 제초작업도 해야겠다.
하루 일과를 끝마친 슈테판은 저택의 문이 모두 잠겼는지 확인하고 창문을 닫은 후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도중에 벤체슬라스가 열어보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방문이 있어서 잠깐 멈춰 섰지만, 주인의 지시대로 그는 절대 안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무슨 소리가 나도 열지 말라는 주의가 떠올라서, 그렇다면 혹시 안에 살아있는 무엇이 있단 말인가 하고 방문에 귀를 가까이 대보긴 했지만 곧 자신의 불경을 탓하며 물러섰다. 물론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슈테판은 자신의 행동을 부끄러워하면서 그 자리를 떠났다.
사파이어는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완연한 어둠은 아니었다. 간신히 장님 신세를 면할 만큼의 조명이 구석에 켜져 있었고 조명의 약한 밝기와 색깔로 봐서는 언제까지고 심야가 계속되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지금은 새벽일까? 아니면 초저녁일까? 사파이어는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웬일로 결박이 풀려 있었다. 고리 달린 족쇄는 그대로였지만 적어도 사지는 쭉 뻗을 수 있었다.
철창의 문은 열려 있었다. 철창 밖으로 나가도 된다는 소리지만 그럴 기력이 없었다. 그래도 지금 아니면 언제 다시 나갈 수 있을지 모르니까. 사파이어는 엉금엉금 바닥을 기어 철창 밖으로 나가다가 그대로 정신을 잃듯이 잠들었다.
분명히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의식이 툭 끊겼다가 다음 순간 숨을 들이키면서 깨어났다. 얼마나 잠들었던 걸까. 아니 얼마나 정신을 잃었던 거지? 아주 잠깐이었을 수도 있고 몇 시간이었을 수도 있다.
벤체슬라스는 돌아오지 않았다. 어쩌면 오늘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사파이어는 다시 철창 밖으로 기어나가려다가 손에 거슬리게 얽혀 있는 링거 주사바늘을 느끼고 그대로 잡아 뽑았다.
손등에는 더 이상 주사바늘을 꽂을 자리가 없어서 팔뚝 안 쪽 혈관에 찔러 넣은 것인데 격렬한 섹스 때문에 피가 고무관으로 역류했다가 다시 들어오기를 반복하면서 바늘이 막혀버렸다. 링거를 뽑은 곳에서 피가 흘러나왔지만 오히려 개운한 느낌이 들었다.
“물…….”
밖으로 기어 나온 사파이어는 힘이 없어서 철판 다리에 머리를 대고 기대어 있다가 갈증 때문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벤체슬라스는 인체의 한계를 잘 안다. 음식은 먹지 않아도 얼마간 버틸 수 있지만 수분을 섭취하지 않으면 오래가지 않아 죽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물 만큼은 원 없이 마시게 해줬다.
그것도 벤체슬라스가 곁에 있을 때의 이야기지 지금은 아니다. 내가 내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무언가를 직접 하는 게 얼마만일까. 사파이어는 정신 차리려고 노력하면서 마실 수 있는 물을 찾아봤다.
방 안에는 정수기나 물병 같은 것은 없었다. 물을 얻을 수 있는 수단이라곤 샤워기 밖에 없었다. 사파이어는 힘겹게 거기까지 기어가서 수도꼭지를 틀었다. 벽에 걸어놓은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사파이어는 그 아래 주저앉은 채 비를 맞듯이 샤워기 물을 맞았다. 물을 삼킬 기력은 남아있다는 게 다행이었다. 얼굴을 때리는 물이 코와 입으로 흘러들어왔다. 정신을 들게 하면서 동시에 몽롱하게 만드는 물이었다. 비에 익사한다면 이런 느낌일까.
쏟아지는 물줄기가 그를 때리는 것 같으면서도 부드럽게 달래주는 손길처럼 느껴졌다. 사파이어는 갈증을 해소하고 나서도 눈을 감고 한동안 그대로 물을 맞고 있었다.
그러다가 수압이 약해졌다. 조금 약해진 감이 있지만 어쨌든 물로 된 이불같이 느껴졌기에 사파이어는 깜박 샤워기 아래서 잠이 들 뻔 했다. 그러나 어떤 목소리가 사파이어를 잠들기 직전의 무의식에서 강제로 끄집어냈다.
“스미스 씨……?”
아침이 되었다. 슈테판 베르너는 오늘은 반드시 대청소를 하리라고 마음먹었다. 크게 집안과 정원으로 나누었고 일단 집안부터 손을 보자고 생각했는데 창문을 내다보니 오늘은 날씨가 화창하고 좋았다.
이런 날을 집안을 청소하느라 무의미하게 보내는 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슈테판은 계획을 바꿔 정원으로 나갔다.
우선 잔디를 손질하고 잡초를 뽑았다. 나무는 내버려두었다. 그가 취미로 원예를 한다지만 전문적으로 가지치기를 할 줄 아는 것은 아니다. 나무와 조형물은 정말로 정원사의 손길이 필요하다.
잔디밭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스프링클러를 돌리자 분무기로 물을 뿌리는 것처럼 물이 리드미컬하게 탁탁탁 끊어져 나와 잔디를 푸르게 적셨다. 부지가 꽤 넓었기 때문에 여러 대의 스프링클러가 돌아가며 물을 뿌리는 모습이 햇살과 어우러져 장관을 이뤘다.
넓은 부분을 대충 정리하고 나서 슈테판은 자신이 가꾸고 있는 텃밭의 상태도 확인했다. 그가 급하게 집을 나가고 나서 시간이 많이 흘렀기 때문에 텃밭은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서 대부분의 작물이 말라죽은 상태였다.
원래부터 업무 외에 약간의 취미를 주인이 허락해준 것이기 때문에 주인이 작물들을 말려 죽였다고 해도 불만을 제기할 입장은 아니지만 그걸 보니 가슴이 쓰렸다.
그래도 아직 생명력 좋게 살아있는 녀석들이 몇 몇 있었기 때문에 차마 죽일 수는 없어서 일단 말라비틀어진 놈들을 뽑아다가 처리했다. 그런 다음 아직 살아있는 불쌍한 녀석들을 구제하기 위해 수도에 연결된 고무호스를 끌고 와 수도꼭지를 틀었다.
수압이 신통치 않았다. 그가 자리를 비운 동안 수도관에도 문제가 생긴 것일까? 스크링클러와 동시에 물을 사용해서 그런가? 그러고 보니 세탁기를 돌리고 나온 게 기억이 나는데. 물을 한꺼번에 너무 많이 써서 그런 걸까? 하지만 이전에는 멀쩡했는데?
어디선가 물이 새고 있는 게 틀림없다. 재수가 없으면 배수관이 터졌을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으니 슈테판은 배관을 확인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슈테판은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물이 새는 부분을 발견해야하기 때문에 물은 계속 틀어두었다. 모든 방을 샅샅이 뒤졌지만 물이 새는 곳은 없었다.
벽 안에서 새는 건가 싶어 벽을 두드려 봐도 이상한 소리는 나지 않았다. 화장실도 멀쩡하다. 세탁기도 계속 돌아가고. 정원을 내다보니 스프링클러도 작동하고 있다. 눈에 보이는 건 이 정도인데 뭔가가 물을 더 사용하고 있는 걸까?
다른 저택과 배관이 이어져 있을 리는 없다. 그러기엔 거리가 너무 멀다. 정말 배관문제라면 수리공을 불러야하는데 주인이 없는 사이에 승낙 없이 공사를 할 수는 없으니 난처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가만 내버려두면 집 안에 홍수가 날지도 모른다. 곰팡이가 잔뜩 낄지도 모르고. 원단무역상인 주인의 의상 보관실이 떠오르자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슈테판은 포기하지 않고 문제의 근원지를 찾았다. 훌륭한 집사라면 불평하지 않고 어떤 임무도 수행해내는 법이다. 하지만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방을 뒤졌지만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그럼 대체 어디서……. 확인하지 못한 방이 두 개 있었지만 하나는 문을 열 수가 없었고 다른 하나는 주인이 열쇠를 주면서 절대로 열지 말라고 했던 방이다. 열지 못하는 방은 내버려두더라도 열 수 있는 방에 대해서는 갈등이 생겼다.
어떤 게 현명한 선택일까? 주인의 말을 충실하게 지켜서 확인해보지 않고 배관 문제가 곪아 터지도록 만드는 게 나을까, 아니면 확인해보고 처리하는 게 나을까?
벤체슬라스는 슈테판을 신뢰했기 때문에 그 열쇠를 맡겼다. 그러나 슈테판의 의무는 집을 잘 지키고 문제를 처리하는 것이다. 양립할 수 없는 모순이 생기자 슈테판은 발을 동동 구르며 고민했다.
결국 슈테판은 타협했다. 그는 거짓말을 할 수 없다. 문을 열어보고 정말 배관문제가 맞는다면 처리할 일이고, 그 방이 문제가 아니라면 다른 방이 문제일 테니 다시 방문을 걸어 잠글 것이다.
그런 다음 주인이 돌아오면 주인에게 모든 사항을 보고한 후 그에게 처벌을 맡겨야겠지. 해고당할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건 신뢰를 이런 식으로 보답 하냐는 말을 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슈테판은 정직함만은 지킬 것이다.
슈테판은 목에 걸고 다니던 열쇠를 꺼내 문의 잠금장치에 밀어 넣고 돌렸다. 으스스하게 끼익하고 긁히는 소리가 날 줄 알았는데 열쇠는 아무런 소리 없이 부드럽게 돌아갔다. 방문 역시 조용히 매끄럽게 열렸다.
슈테판은 금단의 방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긴장한 상태로 안을 둘러보았다. 밝은 곳에서 안을 들여다봤기 때문에 처음에는 아무런 빛도 없이 어두컴컴한 줄 알았다. 어둠에 시야가 적응되자 방 안에는 빛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의 조명이 켜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슈테판은 방 불을 켜려고 벽을 더듬다가 포기하고 눈을 가들게 뜨며 방 안을 살폈다. 물소리가 나는 것을 보니 여기서 물이 새고 있던 게 맞다.
그런 방은 본 적이 없다. 방 한가운데에는 시체 안치소에서나 볼 법한 부검대 같은 철판이 놓여 있고 한 구석에는 짐승을 가둬놓는 것 같은 철창이 있었다. 벽에는 쇠사슬이 걸려 있었고 어디에 쓰는 건지 모르지만 섬뜩해 보이는 도구들도 걸려 있었다. SM플레이에서 쓸 법한 외설적인 도구들도 있었다.
그리고 한쪽 벽에 샤워기가 걸려 있었고 거기서 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 샤워기 물줄기 아래에 한 사람이 주저앉아 있었다. 그게 사람 모양이라는 걸 확인하자 슈테판은 자기도 모르게 호흡이 턱 막혔다. 처음엔 시신인 줄 알았다. 머릿속이 하얗게 딱 멈췄다.
그런데 그 주저앉은 사람이 꿈틀 움직였다. 살아있구나! 슈테판은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그 사람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아는 얼굴이었다.
“스미스 씨……?”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름을 불러보았는데 그가 눈을 떴다. 힘겹게 고개를 들어 슈테판과 눈길을 마주하자 슈테판은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정말로 그가 맞다!
늙은 집사는 몇 초간 당황하다가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샤워기를 끄고 그를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 어둠 속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스미스 씨의 몸은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만신창이였다.
그는 집사의 손길이 닿자 쇳소리 같은 비명을 터뜨렸다. 지옥의 형벌을 받은 사람이 낼 것 같은 끔찍한 소리여서 슈테판은 하마터면 그를 놓칠 뻔 했다.
슈테판은 그를 방 밖으로 끄집어내고 충격적인 탄식을 내뱉었다. 밝은 빛 아래에서 본 스미스 씨의 모습은 처참했다. 얼마나 맞았는지 얼굴은 피멍과 부어오른 곳으로 가득했고 몸에는 매질을 가한 자국과 물어뜯긴 자국, 멍 자국과 상처로 얼룩져 있었다.
게다가 슈테판이 알아보지 못했을 정도로 야윈 상태였다. 이전에는 그래도 균형 잡힌 몸매를 가진 건장한 청년이라고 생각했는데.
슈테판은 경찰을 불러야하나 구급차를 불러야하나 감이 잡히질 않았다. 둘 다 불러야하나? 스미스 씨는 왜 이런 꼴이 된 것일까? 이 방의 정체는 뭔가? 그의 주인이 이런 짓을 벌였단 말인가? 그럼 주인은 범죄자인가?
너무 많은 질문이 한꺼번에 가엾은 집사를 덮쳤다. 그가 우왕좌왕하는 사이 정말 오랜만에 햇빛을 받은 스미스 씨가 눈꺼풀을 파르르 떨면서 정신을 차렸다.
사파이어는 아침햇살 같은 강렬한 빛은 정말 오랜만에 봤다. 심한 자극이었다. 눈을 감고 있어도 눈꺼풀의 붉은 안쪽까지 투영하는 빛은 일종의 폭력이었다. 사파이어가 얼굴을 가리면서 고개를 돌리자 슈테판이 얼른 그를 햇빛이 들지 않는 그늘 쪽으로 옮겨주었다.
맨살에 닿는 차가운 바닥이 정신을 또렷하게 만들었다. 사파이어는 빛에 적응하기 시작한 눈을 깜박거리며 주위를 둘러보고, 자신을 내려다보고, 슈테판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상황파악이 되는지 멍한 얼굴에 지성이 떠올랐다. 그것은 차츰차츰 처참한 형상으로 변해가 마치 세상의 종말을 바라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심각하게 변했다.
슈테판의 동정적인 얼굴이, 끔찍한 광경을 본 사람이 짓게 되는 자연스러운 경악이, 이 부드럽고 포근한 햇살이며, 그의 얼굴에 새겨진 주름이 한 순간 섬광처럼 사파이어의 기억을 불러 일으켰다.
오래된 과거가 아니었기 때문에 금방 기억해낼 수 있었다. 생긴 것은 전혀 달랐지만 한순간 슈테판의 얼굴은 죽은 목사와 닮아보였다. 벤체슬라스가 그토록 지우고 없애려고 했던 기억이 완전히 망가지지 않고 플래시백으로 되살아났다.
슈바르츠발트의 공기가, 늑대에게 물렸던 기억이, 모닥불과 피전 블러드의 인생 이야기와, 교회에서 보았던 이해할 수 없는 스테인드글라스, 한 손에 목을 부러뜨릴 수 있을 것 같았던 늙은 목사가 자신을 위해 울어주었던 것, 그리고……. 오로지 자신만이 기억하고 있던 감정이 떠올랐다.
누가 대신 겪어주는 것이 아니기에 감정만큼은 다른 사람에게 말로도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생생했다. 그는 목사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 죽여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죽일 수가 없었고 그 이면에는 더 거대한 불복종의 이유가 숨어있었다. 거기까지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중요한 것은 사파이어가 명령에 불복했다는 것이다.
그가 목사에게 느꼈던 온갖 사소한 감정들이 티끌처럼 떠올랐다. 목사가 어리석어보였고, 그의 눈물이 좀 짜증나기도 했고, 그가 나에게 중요한 것을 말하려 한다는 절박함도 느낄 수 있었고, 그를 살려두고 싶었다.
내 손으로 아프지 않게 죽여준다는 것은 핑계였을지도 모른다. 거짓말을 했단 말인가? 내가? 이 발견도 놀라운데 목사에게 느꼈던 화도 신선했다. 그가 정체를 숨기고 거짓말 하지 않았기 때문에 화가 났다. 왜냐하면 거짓말하지 않으면 그는 그 자리에서 죽게 되었을 테니까.
그가 원망스러웠다. 살려고 하지 않아서.
여기까지 떠오른 것이 눈꺼풀을 한 번 깜박일 순간에 일어난 일이다. 그 다음에 뇌세포는 재빨리 경험과 정보들을 뒤져 이다음에 일어날 일들을 추리해나갔다.
불복종으로 인해 자신이 이 벌을 받게 되었고 벤체슬라스의 분노는 아직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는 용서해준다고 한 적이 없다. 고로 사파이어는 이 안에 갇혀있어야 한다. 벤체슬라스가 허락한 범위는 이 방 안까지니까.
하지만 그는 지금 밖에 있다. 집사가 문을 열고 꺼내준 것이다. 집사는 허락을 받은 것일까? 그의 반응으로 보아서 사파이어가 이 안에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집사는 주인의 의지에 반하게 된 것이다.
살인청부업자가 자신의 비밀을 알게 된 힘없고 하찮은 집사를 그냥 내버려둘까?
“스미스 씨?”
집사는 사파이어가 다시 고꾸라져 정신을 잃을까봐 불안해하면서 이름을 불렀다. 이게 다 무슨 일이냐고 묻고 싶은 얼굴이었지만 사파이어는 집사의 의문을 해결해주는 대신에 그를 거부하듯이 손바닥을 내밀어 휘젓고는 다시 기어서 방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집사가 그를 제지하자 사파이어가 잔뜩 쉰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죽게 될 거야. 난 이 방에서 나온 적이 없어. 당신도 그렇게 알고 있어야 돼.”
“잠깐, 잠깐만요. 제정신이 아니군요! 진정하세요. 상처 치료부터 합시다!”
사파이어가 집사의 멱살을 잡더니 얼굴을 확 끌어당기고는 속삭였다.
“베르너 씨, 당신 주인은 살인청부업자야. 난 그에게 종속된 킬러고. 그 분이 당신에게 이 방을 열고 날 끄집어내라고 지시했어?”
“예? 예?”
“아니면 당신은 죽게 될 거야. 그러니까 난 다시 들어가야 돼.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당신 지금 상태가,”
“죽는다고!”
사파이어가 일갈하자 슈테판이 움찔 놀랐다. 지금 상태로는 슈테판 같은 사람마저 쉽게 사파이어를 제압할 수 있었지만 쇳소리 같은 외침에 담긴 기백은 그를 물러서게 했다.
그러나 슈테판은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따귀를 맞은 듯이 고개를 젖혔다가, 절레절레 저으면서 팔뚝을 걷어붙였다. 그리곤 사파이어의 어깨를 잡고 끄집어냈다.
“당신은 중상을 입은 환자입니다, 스미스 씨. 이대로 내버려두면 당신은 죽어요. 난 인간으로서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주인님이 어떤 분인지는 나중에 차차 듣기로 합시다. 당신은 당장 치료를 받아야합니다.”
“놔! 놓으라고!”
“당신은 지금 정상적인 판단을 못해요! 죽는단 말입니다! 내가 아니고 당신이!”
그리고서 집사는 독일어로 무어라고 불평을 토해냈다. 아마도 사파이어가 독일어를 모르리라 판단한 것이겠지만 사파이어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똑똑히 알아듣고 있었다.
“집사 이전에 나는 인간이란 말입니다. 사람이 죽어가는 걸 눈앞에서 지켜보도록 내버려두라니 그게 사람이 할 소리인가…….”
그는 아무래도 조금 전 사파이어가 말했던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게 틀림없다. 그가 주인으로 모시는 남자는 살인청부업자라고. 집사에 손에 질질 끌려가는 사파이어가 “도망가.”하고 작게 속삭이자 완고한 독일인 집사는 콧방귀 소리만 낼 뿐 별다른 대답이 없었다.
슈테판은 사파이어를 세 번째 침실로 데리고 가 침대에 눕혔다. 주인의 침실은 감히 침범할 수 없고 슈테판의 침실은, 글쎄, 슈테판도 잠을 자기는 해야 하니까.
그는 이 방을 하룻밤 묵는 손님에게 드리는 방으로 알고 있었지만 사실은 사파이어가 벌이 아니라 상을 받을 때 쓰는 방이었다. 그러니 어떻게 보면 사파이어의 방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딱딱한 철창 바닥에서만 자다가 정말 오랜만에 푹신한 침대에 파묻히자 사파이어는 그 안락함에 저항할 수가 없었다. 집사가 팔다리의 족쇄를 벗기는데도 가만히 있던 사파이어는 그가 전화기로 경찰에 신고하든가 구급차를 부르려고 하자 갑자기 벌떡 일어나 앉았다.
집사는 아무런 힘도 없는 야윈 젊은이가 매달려봐야 우습게 뿌리칠 수 있었지만 너무나도 필사적인 모습에 전화를 다시 내려놓았다. 하지만 사파이어는 치료는 하겠다는 집사의 강한 의지만은 꺾지 못했다.
“당신 정말 멍청하군.”
“감사합니다.”
집사는 소독약과 연고를 바르고 붕대를 감는 등 응급처치 밖에 하지 못했다. 그래도 훨씬 나았다. 사파이어가 뼈는 부러진 곳이 없는 것 같다고 말하자 집사의 표정이 그제야 조금 풀어졌다.
그는 사파이어에게 억지로 옷을 입히진 않았지만 적어도 이불은 덮어주었다. 그런 다음 미지근한 물을 준비해 와서 충분히 마시게 해주고 주방으로 가서 뭉근한 죽을 끓였다. 아주 묽게 끓인 오트밀죽이었다.
적당히 식힌 죽을 쟁반에 담아 다시 침실로 돌아오니 사파이어는 다시 잠든 상태였다.
정신없는 상황이 한바탕 지나가고 나자 다시 의문들이 떠올랐다. 그가 모시는 주인의 정체란 대체?
살인청부업자라고 했는데 비유일까 아니면 사실일까? 스미스 씨는 왜 이런 일을 당한 걸까? 자기 입으로 킬러라고 했는데 이것도 정말일까? 정말 경찰을 부르지 않아도 될까? 정말 의사를 부르지 않아도 되나?
그가 말한 게 모두 사실이라면 슈테판은 지금 당장 짐을 싸서 도망가야하지 않을까? 그러나 벤체슬라스가 진짜로 살인청부업자라는 증거가 없지 않은가. 그가 스미스 씨를 고문실 같은 방 안에 가둬놓은 건 확실하지만.
차갑고 인간성도 없지만 나름대로 신사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뒤에서 고문실을 꾸리고 있는 괴물이라니……. 소름이 돋았다.
어찌됐든 슈테판은 사파이어를 이대로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집사로서 그가 주인을 모시고 봉사한다는 것은 적어도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했을 때의 이야기다. 그는 추정일 뿐이긴 하지만 연쇄살인마에게 복종할 생각은 없다.
독일은 한 때 국가 자체가 한 미치광이에게 복종해 수백만의 사람을 죽인 전적이 있다. 아닌 건 아니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슈테판이 받은 교육이다. 독일이 나아가기로 결정한 길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겁이 나는 건 사실이다. 주인이 돌아오면 이 모습을 보고 뭐라고 할까? 말싸움이 일어나는 건 두렵지 않다. 두려운 건 그가 총이나 칼을 꺼내들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었다.
그 때는……. 그 때는 슈테판도 목숨을 걸고 싸울 각오가 있었다.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당장 내 목숨만 생각한다면 이 고문피해자를 내버려두고 집에서 나가면 된다. 아니면 사파이어의 권유대로 그를 다시 고문실에 넣는 방법도 있고.
두 가지 모두 떠오르자마자 부정해버린 선택지다. 전자는 살아가면서 평생 후회할 일이 될 것 같고, 후자는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방법일 것 같다.
아니면 이런 것도 있다. 사파이어의 의견을 무시하고 경찰에 신고해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정말 간단하게 처리될 텐데. 그것이 제일 상식적인 대처이기도 하다. 혹은 주인이 오기 전에 부상자를 데리고 도망쳐버리면 될 일이다. 주인이 돌아오기까진 앞으로 며칠 더 시간이 있을 테니 진지하게 방법을 생각해보기로 할까.
슈테판이 잠든 사파이어의 얼굴을 심각하게 들여다보며 고민하고 있는데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대문에서 난 소리가 아니다. 현관문이다. 슈테판이 잘못 들은 건가 싶어 잠시 기다리니 이번에는 현관문을 쿵쿵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대문을 열고 들어왔단 말인가? 담을 넘어왔을 수도 있지. 그런데 담을 넘어온 도둑이 다시 신사가 된 것 마냥 예의바르게 초인종을 누르며 누군가 문을 열어주길 기다릴까? 문을 부수고 들어오거나 창문을 깨고 들어올 수도 있는데.
문을 두드린다는 건 누군가에게 문을 열어달라는 소리다. 안에 누군가가 있다는 걸 확실히 알고 있는 것처럼. 그런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방문자도 오지 않는 이 저택에.
혹시……. 주인이 돌아온 것일까?
거기까지 생각이 흐르자 슈테판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주인이 스위스로 가는 여정에서 마음을 바꿨을 수도 있고 역시 집사를 못 믿겠다고 돌아온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단순히 나를 시험해보려고……?
대문을 열고 들어와도 집사가 마중 나오지 않으니 잠긴 현관문 앞에서 슈테판을 불러내는 걸 수도 있다. 문을 두들기는 소리는 멈추지 않았고 계속 됐다. 선택을 빨리 해야 한다.
슈테판은 식은땀을 흘리며 현관으로 나갔다. 가는 길에 무기가 될 만한 것을 필사적으로 찾아봤다. 마침 벽난로 옆에 있는 쇠꼬챙이가 눈에 들어와서 그것을 쥐어 등 뒤에 숨긴 슈테판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현관문을 열었다.
스위스, 취리히.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휘감은 신사가 뚜걱뚜걱 구두소리를 내며 빌딩 안으로 들어섰다. 소화하기 힘든 구성을 자연스럽게 소화하는 패션 감각도 감각이지만 어깨까지 내려오는 찰랑찰랑한 백금발 머리칼은 정말 눈에 띄었다.
데스크에 앉아있던 직원은 한 무리의 코끼리가 들이닥친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것 같은 태도로 신사가 코앞까지 다가오길 기다렸다. 그 침착함은 영 근거가 없지는 않은 것으로, 눈앞의 신사가 재산을 얼마나 보유했든 간에 이곳의 고객 대부분이 그만큼 혹은 그 이상의 재력을 가진 부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이곳은 은행이었다.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알 정도인 시중은행은 아니었다. 간판도 없고 적극적인 홍보도 없는 이곳은 스위스에 있는 수 백 개의 프라이빗 뱅크 중 하나의 사무실이었다.
이곳의 진짜 이름은 세공사 협회였다. 스스로 영향력 있는 단체라고 주장하는 곳은 많지만 여기만큼 금력을 보유한 곳이 없었다. 자금이 곧 힘이다.
세공사 협회라고 주장하는 단체들의 각축전 속에서 협회라는 단어를 대명사처럼 획득하게 된 곳이 이 곳이다. 다른 곳은 각각 밀라노 협동조합이라던가, 바르셀로나 귀금속 장인회라던지 하는 길고 자세한 명칭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암살자들을 고용하는 부유한 권력계층은 킬러 노조 따위가 생기는 것을 원치 않는다. 어떤 조직이나 단체든 일정 크기를 넘어서지 못한다. 특출나게 강한 자가 나타나면 그가 독재하지 못하도록 사방팔방에서 물어뜯은 것이 인간 사회의 역사다.
협회의 권위는 권력자들이 허락한 범위만큼만 컸다. 그것이 금융, 검은 돈까지 보관해주는 은행이라는 테두리였다.
데스크 직원은 재빨리 신사를 분석했다. 재킷은 검은 벨벳 재질에 하얀 무늬가 거미줄처럼 기하학적으로 퍼져 있는 생로랑의 것이었다. 몇 천 유로는 되어 보인다.
셔츠는 푸른 대리석을 연상케 하는 프린트 실크 셔츠로, 검은 재킷 안에 입으니 파란 불꽃같은 인상을 주었다. 벨루티에서 저 셔츠와 비슷한 것을 본 것 같다. 넥타이는 폭이 얇고 검은색이었지만 희미하게 파란색으로 각인 같은 것이 되어있는 물건이었다.
상의까지만 보면 요란하고 과시적인 성격인 것 같지만 바지와 구두는 여느 사교모임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격식 있었다. 검은 바지는 아무런 장식이 없지만 티내지 않아도 드러나는 좋은 재질인데다가 신체의 윤곽을 드러내면서도 절제된 멋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진짜는 구두였다.
요란스럽게 광을 내진 않았지만 정성스런 손길로 관리되고 닦아져 자연스러운 광이 나는 검은 옥스포드 구두. 가죽의 재질부터 좋아 보인다. 펀칭이나 술 같은 장식 역시 아무것도 없다. 그야말로 단정하고 정석적인 구두로 뒷굽의 높이도 일부러 높이지 않았다. 눈앞의 신사는 그러지 않아도 키가 크니까.
사람을 볼 때 신발을 주의 깊게 보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만 누군가 관심을 가지고 그의 옷차림을 살펴본다면 구두에 가장 관심을 가질 것이다.
섬세한 외모와 화려한 옷차림 아래 숨겨진 본질을 드러낸 달까. 어딘가의 귀족 저택에서 신분을 숨기고 몰래 빠져나온 고귀한 혈통을 슬쩍 암시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데스크 직원은 유럽의 귀족들은 물론이고 왕족까지 영접한 적이 있다. 눈앞의 신사는 흉내만 그럴싸하게 낸 가짜다. 이렇게 꾸민 사람이 으레 그렇듯이 자신을 알아달라고 거들먹거리지 않는 것은 주목할 만하지만.
마침내 직원이 어떤 태도를 취해야할지 결정하자 신사가 데스크 앞까지 다가와서 입을 열었다.
“벤체슬라스. M.”
“계좌 개설을 희망하십니까?”
“보상금을 수령하러 왔는데.”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벤체슬라스는 직원이 컴퓨터를 조회하는 동안 건물 안을 빙 둘러보았다.
오랜만에 오는 곳이다. 눈앞의 직원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지만. 어차피 벤체슬라스도 그를 처음 본다. 새로 고용됐겠지. 이전 직원이 어떻게 됐을 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은퇴하기에 쉽지 않은 직업이니까 아마도 제거됐겠지.
멀리서부터 직원이 자신을 위아래로 뜯어보는 눈길을 알고 있었다. 호되게 경을 칠 무례함에도 불구하고 벤체슬라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태도를 고치지 않으면 그는 언젠가 교체될 것이다. 그의 선임이 그러했듯이.
예전에는 이것보다 더 크고 넓어보였는데. 지금도 인상적일만큼 층고가 높고 활짝 트인 공간이다. 거대한 유리창 너머로 비쳐 들어오는 햇빛 역시 옛날과 마찬가지로 푸른 기가 있었고. 묵직한 데스크 역시 마찬가지. 바닥과 천장도 그대로. 변한 것은 쾌적한 분위기를 연출하려고 장식해둔 식물들의 종류였다. 굳건하게 변함이 없는 곳이다.
몇 가지 추억과 함께 옛날 기억이 떠오르려고 하자 갑자기 기분이 확 나빠졌다. 벤체슬라스는 불쾌함을 털어내며 다시 데스크 직원에게 고개를 돌렸다. 데스크 직원은 이미 작업을 모두 끝내고 고객이 상념에서 빠져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생글생글 웃는 낯을 보니 이전 사람보다는 좀 더 오래 버티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좌로 입금하시겠습니까, 현금으로 수령하시겠습니까?”
“현금으로.”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고객이 누구인지, 이 사람이 정말 그 사람이 맞는지 확인하는 작업조차 없다.
세공사 협회에 들어와서 간 크게도 다른 사람의 이름을 사칭하는 바보가 있을까. 사칭하려는 시도가 있다고 해도 분간해낼 자신이 있다는 태도였다. 그것이 완전한 허세는 아니다. 힘에 기반을 둔 당연함, 자연스러움.
도둑과 사기꾼은 효수해버리면 된다. 현상금을 걸어버리면 된다. 규칙을 제정하면 된다. 벤체슬라스가 협회에 방문하는 것을 싫어하기는 해도 이들이 가지고 있는 권력은 인상 깊었다.
데스크에 손가락을 따각거리며 기다리고 있으려니 안쪽에서 어깨가 떡 벌어진 경비가 카트에 가죽을 두른 하드케이스 가방 3개를 싣고 나왔다. 경비는 주차장에 있는 차까지 카트를 끌고 가서 직접 짐을 실어줄 것이다.
150만 유로를 현금으로 받는 과정이 이렇게나 간단하다. 경비 역시 협회 소속이고 한 때 암살자였을 것이다. 건물 안과 밖에는 감시카메라가 수도 없이 달려있을 것이고 문제가 생기면 뛰어나올 인원들도 상주해있을 것이다.
이곳은 안전하다. 이곳의 규칙을 따른다면.
마리야 이바노브나는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뒤통수를 때리긴 했어도 돈에 대해서는 거짓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만큼은 칭찬할 만하군. 벤체슬라스가 미소 짓자 직원이 그에게 인사했다.
“좋은 하루되시길.”
벤체슬라스는 곧바로 독일로 돌아가진 않았다. 취리히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카페에 앉아 커피를 한 잔 마셨다.
사파이어가 아사하지 않도록 영양제를 자동으로 공급하는 기계를 켜두고 나왔다. 철창문도 열어두었고. 탈출을 시도할 기력도 없을 테니 기껏 해봐야 물을 마시거나 볼 일을 보거나, 딱 이정도일 것이다.
나머지는 잠만 자겠지. 그것 말곤 딱히 할 일도 없을 것이다. 며칠 놔둔다고 죽지는 않을 거다.
사파이어는 이제 충분히 안정된 것 같았다. 슬슬 다시 풀어줘도 되지 않을까. 여태까지 사파이어에게 마약 같은 약물류는 쓰지 않았다. 중독돼서 금단증상을 보이면 골치 아픈데다가 약물의 강한 효과는 벤체슬라스도 통제하기 힘들었다.
지속적으로 투여해야 해서 돈이 꾸준히 나가게 되는 건 덤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사파이어가 반항하는 모습이 점점 더 잦아지면 약물을 쓰는 것도 진지하게 고려할 생각이다.
이전에도 이런 일이 없었던 건 아니다. 사파이어 이전의 보석들은 증세가 더 심했다. 그나마 많이 나아져서 어느 정도 스타일을 정착시킨 게 지금이라고 할까.
깨지고 깨뜨린 보석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의 이야기가 거기까지였을 뿐. 사파이어는 오래갈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에게는 다른 보석들과 다른…….
“안녕하신가.”
불청객이 끼어들었다. 낮게 깔린 목소리지만 기본적으로 톡톡 튀는 그 음색을 못 느낄 리 없다. 사방팔방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감귤류의 역한 향수 냄새도.
향수가 나쁜 게 아니다. 뿌리고 다니는 놈이 천박하게 뿌려 대서 그렇지. 커피는 향이 중요한데 무례하게도 그걸 몽땅 덮어버리는 걸 뒤집어쓰고 이런 곳엘 오다니, 벤체슬라스가 아는 이런 몰상식한 인간은 하나밖에 없다.
벤체슬라스는 고개를 들었다. 햇빛을 등지고 선 청년이 그를 그늘진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거지가 이런 곳엘 다 오는군.”
“몸 팔아서 이런데 오는 게 낙이지? 이 걸레야.”
둘은 정답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벤체슬라스는 알료샤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느긋하게 훑었다. 여느 때처럼 변태적인 패션이었다.
비록 발렌시아가 같은 브랜드로 도배를 해놓긴 했지만 오히려 발렌시아가 측에서 브랜드 이미지 훼손으로 소송이 들어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차려입었다고 할까. 그 와중에 신발은 나이키 운동화였다.
돈은 많이 들였는데 일부러 공들여서 거지같이 입었다는 점이 참으로 그답다. 경의를 표한다. 차브 패션도 그의 센스는 따라가지 못한다.
보기만 해도 정신이 아득해지는 화려한 꽃문양의 봄버와 그 안에 입은 새빨간 후드 티, 바지는 100미터 밖에서도 식별이 가능하다 못해 나 여기 있다고 광고하고 다니는 수준의 형광색 트랙수트 팬츠였다.
정말이지 강렬한 형광색이다……. 이렇게 낭비되지 않아도 충분히 근사한 룩을 펼칠 수 있는 아이템일 텐데. 벤체슬라스는 디자이너에게 유감을 느꼈다. 그가 신고 있는 나이키에 대해서도 동정을 느꼈다.
기껏 에어 조던을 신어놓고도 각 부분의 색깔을 따로 칠해 놨다. 그것도 두 쪽 다. 일부러 망치려고 작정한 게 틀림없다. 최대한 어울리지 않는 색깔로 어설프게 덕지덕지 칠해서 튜닝 실패한 꼴이 마치 알료샤의 인생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알료샤는 그 시선을 잘못 이해한 것인지 한순간 자부심에 찬 얼굴을 해보였다가 다시 한껏 열 받은 얼굴로 돌아왔다.
“돈을 처발라도 내 센스는 못 따라오겠지?”
“그래……. 영원히 못 따라가겠군.”
뉘앙스가 묘했지만 알료샤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관광하러 다닐 만큼의 여윳돈은 없을 텐데, 구걸이라도 하러 국경까지 넘었나?”
“잠깐만 잠깐만.”
알료샤는 벤체슬라스의 허락도 없이 맞은편 의자를 끌어당기고 앉더니 진동이 울린 핸드폰을 꺼내며 벤체슬라스의 말을 막았다. 너 같은 것의 헛소리보다 이게 더 중요하다는 태도여서 벤체슬라스는 그대로 이 자리를 뜨고 싶었다.
어울려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고 무례하다고 지적해봤자 듣지도 않고 좋다고 더 몰상식한 짓을 해댈 것이 바로 알료샤다. 알료샤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무언가를 확인하더니 그대로 움직임이 멎었다.
잠시 후에 알료샤는 태연하게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벤체슬라스를 쓱 쳐다보고, 깍지를 꼈다.
“구두보다 운동화가 좋아. 어디에 좋냐면, 사람을 걷어차기에 좋지. 차여보면 그 차이를 알거야. 구두는 딱딱하긴 해도 있는 힘껏 힘이 안 실리거든.”
“뜬금없이 쫓아와서 시비인가.”
“사파이어 얘기 들었다.”
알료샤가 승냥이 같이 웃기 시작하자 벤체슬라스가 그를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순간 벤체슬라스의 어깨를 찍어 눌러 다시 자리에 앉히는 거대한 손이 있었다.
고개를 돌리니 서빙 하던 직원이 냉담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카페테라스에 앉아 있던 모든 사람이 벤체슬라스를 돌아보았다. 나이도, 성별도, 인종도 없었다. 주민으로 보이는 사람도,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도, 직원도, 손님도. 그들 모두가 알료샤의 친구들이었다.
끅끅거리던 알료샤의 웃음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딱 사파이어가 당한 것만큼 돌려준다.”
현관문을 두드리고 있던 것은 주인이 아니라 생전 처음 보는 남자들이었다. 그들은 당황하는 집사를 밀어젖히고 안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오더니 주위를 둘러보며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슈테판이 생각한 것보다 더 좋지 않은 결과였다. 진짜 도둑이 든 것이다! 슈테판이 넘어지면서 등 뒤에 숨겼던 쇠꼬챙이를 떨어뜨렸고 쨍그랑 소리가 났다. 남자들 중 하나가 슈테판을 돌아보더니 그의 멱살을 잡았다.
“보석은 어디 있지?”
“보석……. 몰라요…….”
“다 알고 왔어!”
벤체슬라스가 귀금속을 어디다 보관하는지는 슈테판도 모른단 말이다! 알아도 내줄 리가 없지만 남자들은 막무가내였다. 슈테판은 남자들이 자신을 해칠까봐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때, 쇳소리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 떼지 않으면 쏜다.”
슈테판의 멱살을 잡았던 남자가 순순히 손을 놨다. 맨 몸에 파자마 바지만 겨우 걸친 사파이어가 힘겨운 숨을 몰아쉬며 벽에 몸을 기댄 채 두 손으로 남자들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다. 몸은 야위었을지 몰라도 눈빛은 생생하게 날이 서려있었다.
사파이어가 집사에게 고갯짓을 하자 슈테판이 남자들에게서 벗어나 사파이어의 뒤로 피신했다.
“네가 사파이어?”
남자들 중 하나가 묻자 사파이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료샤 형님이 널 찾으신다…….”
남자는 말하다가 말고 사파이어를 위아래로 자세히 뜯어보았다.
“완전 박살났잖아? 저 꼴은 또 뭐야? 고문이라도 당했나?”
“이 상태로 데려가면 우리가 죽는 거 아니냐?”
“우리가 한 짓도 아닌데.”
“형님이 이유 같은 걸 물어보겠냐. 우리가 안 했다고 해도 안 믿어줄 거고 화풀이로 얻어터지겠지.”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없나…….”
남자들의 토론에 찬물을 끼얹듯이 사파이어가 내뱉었다.
“난 가지 않는다.”
남자들이 일제히 사파이어를 돌아보았다.
“네 생각이 어떻든 간에 넌 우리랑 가야 돼.”
“난 여기 있도록 명령받았다.”
“우리도 널 데려오라고 명령받았어.”
“그래. 그럼 어쩔 수 없군.”
사파이어가 진짜로 총을 쏘려고 하자 남자 중 하나가 급히 그를 말렸다.
“잠깐만! 대화로 하자고! 기다려!”
“5.”
“응?”
“4.”
“잠깐만!”
“3.”
그래도 사파이어는 최대한 천천히 숫자를 세주긴 했다. 남자들은 허겁지겁 현관문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 중에 하나가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 사파이어의 사진을 찍는데 성공했다. 그 소란 속에서도 용케 흔들리지 않고 잘 나온 사진이었다. 안에 담긴 몰골이 처참하긴 했지만.
정원으로 나간 남자들은 그래도 현관문 바깥까지는 나왔으니 사파이어가 봐주겠지 하는 생각이 있었는데 사파이어는 현관까지 따라와서는 나머지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안되겠다……. 일단 튀어!”
“데려오랬잖아!”
“총격전 하다가 죽일 셈이냐! 아니면 우리가 죽는데!”
알료샤는 살아있는 사파이어를 원하지 사파이어의 시체를 들고 가면 결코 즐거워하지 않을 것이다.
남자들은 하는 수 없이 정원을 달려 대문까지 도망쳤다. 남자들이 담을 넘어 도망가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사파이어는 총을 내렸다. 총의 무게를 견딜 수 없었던 것인지 무너지듯이 스르륵 주저앉았다. 그런 사파이어를 부축하는 손길이 있었다.
“세상에, 세상에.”
당황한 집사는 그 말 밖에 할 줄 모르는 것처럼 반복했다.
집사는 남자들이 사라진 정원 저편과 엉망이 된 현관과 숨을 쌔액쌔액 몰아쉬는 사파이어를 번갈아 쳐다보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간신히 갈피를 잡고는 사파이어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그를 부축하고 침실로 돌아갔다.
알료샤는 독일에 있는 부하들에게서 문자를 받았다. 사진이 들어 있었다.
실패했다느니, 상처 입히지 않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느니, 자기들이 한 짓이 아니라느니 온갖 변명이 써진 문자는 대충 흘려듣고 사진을 눌렀던 알료샤는 그대로 움직임이 굳었다. 도망치다가 찍은 것이 분명한 구도였다. 사파이어가 총을 겨누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그의 피부. 이상하군. 분명히 뽀얀 피부라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검푸른 멍이 원래 색깔이었던 걸까? 밝은 부분이 오히려 멍처럼 보인다.
상처, 흉터, 생채기. 밧줄에 묶인 자국. 물어뜯긴 이빨자국. 보기 흉한 자국들이 몸을 뒤덮고 있었다. 얼굴도 얻어터진 흔적이 역력하다. 하지만 제일 충격적인 건 바짝 말라버린 몸이었다.
다른 사람이 보면 그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별로 심각하게 마른 건 아니지 않냐고. 그냥 평소보다 약간 더 마른 상태인 것 아니냐고.
사파이어가 근육을 더 키워놨다가 지금 상태가 된 것을 본 사람이라면 더 강한 표현을 쓸 수도 있겠지만 그들 중 누구도 알료샤만큼의 충격은 받지 않을 것이다. 알료샤의 눈에는 그게 마치 뼈만 남아서 굶어죽기 직전의 기아 상태로 보였다.
사진을 보냈던 녀석은 필사적으로 자기변호를 하고 있었다. 이미 빡 돌아버려서 이성을 잃은 알료샤는 “알았다.” 한 마디만 보내고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로 집어넣었다.
눈앞의 빤들빤들한 걸레 새끼는 아무것도 모른 채 도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 몸에 걸친 것 하나 하나가 사파이어를 갈아서 마련한 것이겠지.
웃음이 나왔다. 사람이 극도로 화가 나면 감정 표현이 어딘가 이상해지는 모양이다. 알료샤의 웃음이 신호라도 된 것인지 카페에 대기시켜놓은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벤체슬라스를 돌아보았다. 나의 충성스러운 병졸들.
“딱 사파이어가 당한 것만큼 돌려준다.”
그와 동시에 린치가 시작됐다. 알료샤는 벤체슬라스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날 기회를 주지 않고 앉은 자세 그대로 테이블을 강하게 걷어차 벤체슬라스를 뒤로 떠밀었다. 앉은 상태로 복부를 맞은 벤체슬라스는 의자 째로 뒤로 넘어져 잠시 몸을 가누지 못했다.
그런 벤체슬라스를 떡대 좋은 남자들이 찍어 눌렀다. 알료샤는 의자에서 일어나 자신의 신발을 한 번 내려다보곤 어떤 각도로 걷어차야 첫 발길질이 깔끔하게 먹혀 들어갈까 생각해봤다.
“잘 잡고 있어라.”
엉덩이부터 걷어차는 걸로 시작해볼까. 보나마나 사파이어에게 성고문도 신나게 했을 텐데. 똑같이 되돌려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남자들에게 등을 찍어 눌려진 채 긴 머리칼을 흐트러트린 벤체슬라스가 등 뒤를 쓱 돌아보더니 품 안에서 번개같이 총을 꺼냈다. 피닉스 암즈의 HP22A. 손바닥 크기만 한 작은 총이지만 근거리에서 누군가의 머리를 뚫어버리기엔 이만한 게 없다.
벤체슬라스를 억압하던 남자가 흠칫 놀람과 동시에 커다란 총성이 터지고 남자의 고개가 뒤로 확 꺾였다. 피가 튀고 총구에서 뿜어져 나온 연기와 화염이 일순간 주변을 침묵시켰다.
기습을 했는데도 총을 꺼낼 수 있을 줄은 몰랐다. 벤체슬라스는 몸을 틀어서 한 놈을 더 죽이고 바닥을 짚으며 일어섰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다른 사람들은 미처 총을 꺼내지 못했다.
총을 꺼내들었으니 싸움판의 주도권이 벤체슬라스에게 넘어온 듯 보였지만 다음 순간 요란하게 튜닝한 나이키 운동화가 벤체슬라스의 복부에 처박혔다.
복부를 정통으로 맞은 벤체슬라스가 순간적으로 힘이 빠져 상반신이 꺾이면서 정체모를 손에 머리채를 잡혔다. 그 다음에 바로 불벼락 같은 손바닥이 날아와 따귀를 갈겼다.
따귀질 두 번에 입 안쪽이 터졌는지 입가로 핏방울이 터져 나왔다. 폭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곧바로 머리채 잡은 손이 머리를 아래로 찍어 누르면서 바로 아래에서는 무릎이 쳐올려졌다.
머리가 흔들려서 정신을 못 차리던 벤체슬라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벤체슬라스의 예쁘장한 얼굴을 아예 뭉개놓으려던 알료샤는 무릎으로 가격한 게 저 잘난 콧대가 아니라 재빨리 얼굴을 가린 손바닥이라는 걸 알고 욕설을 내뱉었다.
마침 벤체슬라스가 머리채를 잡혀서 굴욕적으로 고개 숙여 인사하는 자세처럼 된 것이 알료샤의 사타구니를 조준하기에 딱 좋은 위치였기 때문에 벤체슬라스는 번개같이 총구를 겨누었다. 알료샤도 급소를 내주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기에 꽉 쥐고 있던 벤체슬라스의 머리채를 풀었다.
알료샤의 손바닥 자국이 얼굴에 시뻘겋게 남은 벤체슬라스가 입가로 흘러내리는 피를 닦으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너무 불리하다. 자신은 혼자다. 자신 빼고 모두 적이다.
알료샤는 부하들이 벤체슬라스를 쫓아가게 내버려두고 뒤에서 여유롭게 따라갔다. 벤체슬라스의 뺨을 갈긴 손이 얼얼할 정도였다. 주먹으로 턱주가리를 날려버릴 수 있었지만 일부러 따귀를 때렸다. 그에게 모욕을 주려고.
이렇게 쉬운 것을. 진작 할 수 있었던 일이다. 사파이어의 허락만 기다리면서 너무 오랫동안 저 새끼를 내버려뒀다. 결국엔 이렇게 되지 않았는가. 기사도도 정도껏 했어야지. 이제는 봐 줄 생각이 없다. 아예 죽여 버릴 것이다.
벤체슬라스는 카페를 벗어나자마자 총을 쐈다. 거리의 시민들은 이 싸움과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갑자기 일어난 총격전에 비명을 지르면서 머리를 가리고 몸을 숙였다. 미친 듯이 뛰어 도망가는 사람들은 벤체슬라스를 쫓아오는 추격대의 속도도 느리게 만들었다.
벤체슬라스는 주차해놓은 차로 뛰어가 신속하게 시동을 걸고 바닥에 스키드 마크가 남을 정도로 공회전을 하며 엑셀을 밟아 도망쳤다.
나는 혼자다. 혼자다. 내가 살아남으려면 일을 크게 키워야한다. 공권력이 개입하도록. 경찰이 나타나면 벤체슬라스도 위험해지지만 상대도 똑같이 위험해진다. 도망칠 수 있을 것이다.
트렁크에 실린 돈 가방이 생각났지만 지금은 돈보다 목숨이었다. 시간이 있다면 이 돈을 주고 급하게 용병이라도 고용할 수 있겠지만 알료샤는 그것까지 생각해둬서 벤체슬라스에게 한 치의 틈도 주지 않을 것이다. 돈이라면 뭐든 가능했는데.
알료샤는 처음부터 벤체슬라스를 죽일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추격전도 대비해서 차량까지 수배해 놨다. 한두 대가 아니었다. 자동차로 거리를 벌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꼼짝없이 시내에서 추격전을 벌이게 생겼다.
벤체슬라스는 운전하면서 동시에 총까지 쏠 수는 없었다. 반면에 상대는 2인 1조나 3인 1조로 차량 한대씩 나눠 타서 하나가 운전을 하고 나머지 하나는 공격을 할 수 있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취리히 시내가 난장판이 됐다. 평소에는 흔적을 지우는데 전력을 다하는 벤체슬라스였지만 오늘은 최대한 흔적을 남기는데 주력했다. 그럼에도 이상하리만치 경찰이 나타나지 않았다.
나의 다급함이 1분 1초를 길게 느끼게 만드는 것일까 아니면 오늘은 뭔가 이유가 있어서 경찰이 늦장을 부리는 것일까? 벤체슬라스를 쫓아오는 차량들은 금방이라도 그의 트렁크를 들이받을 것 같았다.
난 혼자다. 혼자. 나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세상은 모두 나의 적이고 내가 나를 지켜야만 한다. 나한테는 나 밖에 없다.
고독한 싸움은 언제나 해왔다. 그가 태어나던 순간부터. 사파이어의 얼굴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내 손으로 만든 유일한 나의 편이었는데 지금은 사용할 수가 없다. 그는 독일에, 벤체슬라스가 만든 고문실에 갇혀 있으니까. 만신창이가 되서.
애초에 사파이어 때문에 저 미치광이가 달려드는 것이긴 하지만.
벤체슬라스는 입술을 질끈 물었다. 따귀 맞은 곳이 점점 부어오르고 있었다. 영혼까지 울리는 모욕감이었다.
보헤미아의 선한 왕 벤체슬라스 이야기.
서리바람이 몰아치던 겨울, 벤체슬라스는 땔감을 줍는 농민을 보았다. 왕은 시종을 불러 저 자가 누구인지, 어디 살고 있는지 물었다. 시종이 답하기를 저 농부는 산자락에 살고 있는 착한 사람이라고 했다.
왕은 추운 날에 고생하는 백성이 가여워 시종에게 고기와 술과 땔감을 준비하라 일렀다. 그리고 시종을 대동하고 친히 발걸음을 옮겨 농부가 사는 곳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 눈보라가 거세 시종이 더 이상 갈 수 없다고 하자 왕은 자신이 대신 칼바람을 맞을 테니 시종에게 자신의 등 뒤에 붙어서 자신의 발자국을 그대로 따라오라 일렀다.
시종이 왕을 믿고 따르니 왕이 내딛는 발자국 한 걸음마다 온기가 피어나 매서운 겨울바람도 방해가 되지 못했다.
선한 벤체슬라스는 이후 성인으로 추앙받아 고아와 과부, 죄수와 노예, 모든 가난하고 불쌍한 자들의 아버지가 되었다. 프라하에는 그의 이름을 딴 광장이 있고,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딴 명절을 기념한다.
벤체슬라스는 라틴어화 된 슬라브식 이름인데 그 뜻은 더 많은 영광이다.
벤체슬라스는 좋은 이름이다.
예로부터 악인들은 위대한 이의 이름을 훔쳐 악행을 자행해왔다. 그렇게 하면 마치 그들의 업적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처럼.
벤체슬라스는 도심을 벗어나 산간도로로 들어섰다. 무기가 없지는 않았다. 권총은 품 안에 들어갈 만큼 작은 것으로 항상 휴대하고 다녔고 차에는 조수석 밑바닥에 라이플이나 샷건을 넣어뒀다. 람보르기니 우라칸을 검사하려고 드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스위스의 산악은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잔인하기까지 한 험준한 산맥이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있고 그 준엄한 자연 아래 시원한 바람이 내리 부는 풀밭과 무수한 들꽃들이 하늘하늘 흔들리고 있었다. 다른 나라보다 채도가 선명한 하늘은 새파란 배경과 몽실몽실한 하얀 구름이 대비를 이루어 이곳이 천국의 일부인양 착각 들게 만들었다.
그 많은 독재자들과 권력자들이 차지하려고 했지만 정복하지 못했던 이 중립국은 적으로 오지만 않는다면 누구든 환영했다. 풀과 바람이, 돌과 산이, 꽃과 짐승들이.
벤체슬라스는 낭떠러지 가장자리에 깔린 산간도로를 아슬아슬하게 달리며 자꾸만 뒤를 살폈다. 그의 차가 이름답게 허리케인처럼 도로를 휩쓸고 지나가면 도로 옆에 핀 꽃들이 광풍에 확 고개를 꺾었다가 다시 살랑살랑 피어올랐다.
추적자들이 따라왔다. 드디어 경찰의 모습도 보였다.
스위스의 자연은 목숨이 경각에 달린 남자의 절박함을 예로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그저 고고히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그의 다급함도, 세상에 자기 편 들어줄 사람 하나 없는 고독함도, 세상을 적으로 돌린 막막함도 자연의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짐승들만이 이따금씩 인간들이 내는 굉음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고개를 숙이고 풀을 뜯을 뿐이었다.
알료샤는 자신의 본명인 알렉세이가 좋았다.
어린 시절에는 자신의 이름의 기원이 되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이야기만 나오면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세상에는 별처럼 많은 군주가 있고 그 군주들을 다스리는 군주도 있다. 왕 중의 왕이라니, 모든 독재자가 열망했던 그 왕관은 어린 알료샤의 마음에도 작은 불을 지폈다.
내가 세상의 주인이고 내가 규칙을 제정한다. 내가 평화로우라면 평화로운 것이고 서로 싸우라면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다.
알료샤는 자신의 손길 아래 세상이 평화롭기를 원했다. 동네에 싸움이 없고, 술 먹고 아내를 패는 주정뱅이가 없으며, 어린이들이 장난감을 가지겠다고 서로 싸우지도 않고, 그 어떤 슬픔과 절망도 없는 낙원을 만들고 싶었다.
저 하늘의 붉은 별 같은 권위를 가진 통치자들이 어린 알료샤의 생각보다 더 엉망으로 나라를 다스려서 알료샤의 작은 꿈은 점점 더 커져갔다.
사람이 양과 돼지 같은 존재라서 스스로 판단할 수 없고 누군가의 지휘를 반드시 받아야만 한다면, 독재가 필요하다면 그 자리는 알료샤의 것이었다.
사람들은 싸움을 멈추는 법을 모른다. 서로 평화롭게 사는 법도 모르고. 그들은 아무것도 할 줄 모른 채 우왕좌왕 할 뿐이다. 그렇다면 내가 당신들을 대신해 선택해주겠다. 뭐가 옳고 그른지 판단해주겠다. 어떤 것이 당신들에게 더 좋은 것인지 골라주겠다.
너무나 많은 머저리와 사기꾼이 권력을 쥐고 있으니 알료샤가 하는 작업이란 결국 정당한 물건을 정당한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뿐이었다. 권력 쟁취가 아니다. 원상태 복귀다. 알료샤는 세상의 주인이 될 운명이었다.
세상에는 왕을 사칭하는 야심가들이 많이 있다. 왕의 이름을 빌려다 쓰면 자신이 진짜 왕이라도 되는 줄 아는 것처럼. 그들 중에 몇몇은 정말 왕 같은 지위를 획득하기도 한다. 알료샤는 그들보다 한 발자국 더 나가는 존재다.
그래그래, 네가 왕일 수는 있겠지. 허나 짐은 황제이니라.
알료샤가 돈을 무시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피 묻은 돈만 움켜쥐고 있으면 지금 같은 상황에는 전혀 대처하지를 못한다. 결국 돈이란 건 사람을 사기 위해 있는 것이다. 농부의 손을, 의사의 손을, 재단사의 손을, 병사의 손을 사기 위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들 자체를 소유하면 안 되는가? 돈을 주고 일일이 서비스를 거래하는 것보다. 알료샤의 화폐는 우정이었다. 벤체슬라스가 내심 바라고 있는 권위를 알료샤는 진작 획득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의 신이었다.
이것이 너와 나의 차이다, 가짜 왕이여.
공교롭게도 이번에 알료샤가 탄 차는 람보르기니 무르시엘라고였다. 그의 친구가 헌상한 것이다. 이제는 생산이 중단되어 구할 수도 없다. 그만큼 가치도 높다.
돈으로 살 수 있는 람보르기니와 돈으로 살 수 없는 람보르기니의 대결.
알료샤를 둘러싸고 있는 차량들은 왕을 호위하는 기사단처럼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좁은 도로라서 그들이 길을 막고 있자 뒤따라오는 경찰들은 좀처럼 추월을 할 수가 없었다.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경광등이 번쩍이는 게 보였지만 그게 다였다. 멈추지 않으면 발포를 하겠다던가, 무력을 행사하겠다던가, 그런 경고도 무의미한 것이었다. 뒤에서 아무리 들이받아 봤자 알료샤를 보호해 줄 또 한 꺼풀의 막이 기다리고 있다.
벤체슬라스는 옆으로 바짝 따라붙는 회색 재규어에게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벤체슬라스가 길 안쪽으로 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압박하는 건 쉬웠다.
벤체슬라스를 들이받을 듯이 계속 안으로 밀고 들어오던 재규어는 벤체슬라스가 정말 죽음을 각오하고 휘청휘청 거리며 몸체를 들이받으려 하자 주춤거리면서 점점 밖으로 밀려났다. 재규어의 타이어가 산간 도로의 가장자리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질 수준이 되자 재규어가 공격을 포기하고 속도를 줄여 뒤로 빠져나갔다. 절벽에서 떨어져 죽을 순 없으니까.
어쩌면 그게 목적이었을지도 모른다. 재규어를 공격하는데 신경을 쓰고 있어 벤체슬라스는 자신이 차지하던 안쪽 자리를 내줬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려고 하니 뒤에서 검은 쉐보레가 불쑥 치고 나왔다.
벤체슬라스는 입술을 씹으며 엑셀을 짓밟았다. 조금 전까지 벤체슬라스가 했던, 도로 가장자리로 밀어 넣는다는 전략은 쉐보레가 그대로 이어받아서 벤체슬라스를 점점 가외자리로 밀고 있었다. 낙사하라는 악의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운전자의 웃음이 보일 정도다.
벤체슬라스는 시선을 정면에 고정한 채 한 손이 운전대 그 자체가 된 것처럼 아주 미세하게 조정하며 몸을 숙여 조수석 바닥을 뒤졌다. 까딱해서 핸들이라도 살짝 틀어지면 그대로 무언가를 들이박고 죽거나 낙사해서 죽거나 할 텐데 어차피 가만히 있어도 죽게 될 위기다.
운 좋게 벤체슬라스의 손끝에 총기가 닿았다. 총신을 짧게 자른 소드 오프 샷건이었다. 장전은 이미 되어 있었다.
벤체슬라스는 창문을 내릴 여유도 없어서 그대로 조수석 창문에 총구를 바짝 들이댔다. 벤체슬라스를 밀어붙이며 압박하던 운전자가 옆을 슬쩍 돌아보더니 입을 떡 벌렸다. 그 순간 샷건이 발사됐다.
람보르기니의 창문이 박살나면서 쉐보레의 유리도 깨져버렸다. 쉐보레가 갑자기 미친 듯이 핸들을 꺾더니 벽을 들이받고 빙글빙글 돌면서 뒤에 따라오는 차량과 추돌했다. 운전자는 즉사했다.
벤체슬라스의 람보르기니 역시 사고가 날 것처럼 위험하게 핸들이 꺾였지만 금방 다시 균형을 잡고 도로를 달려 나갔다. 벤체슬라스는 귀에서 삐이익하고 울리는 소리에 인상을 찡그리다가 손등에 유리 조각이 박힌 것을 보았다. 심각한 상처는 아니었다.
산산 조각난 조수석 창문으로 미친 듯이 바람이 들어왔다. 숨쉬기 힘들 정도로 폐를 압박하는 바람 때문에 긴 머리칼이 어지럽게 휘날렸다. 벤체슬라스는 백미러로 뒤편의 상황을 확인하면서 탄창을 확인했다.
알료샤는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충성스러운 부하들만이 사고 차량을 비껴 지나오며 또 다른 공격 대형을 이루고 있었다.
여우 사냥을 당하는 여우의 심정이 이런 것일까. 사냥개들이 미친 듯이 짖으며 떼로 몰려오면 신사들은 말을 타고 그 뒤를 느긋하게 따라올 뿐이다. 결국 여우는 인간이 원하는 방향대로 도망치다가 비참하게 사살 당한다.
나는 절대로 여우가 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사냥꾼이다. 내 인생에 걸고 맹세했다. 절대로 피해자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죽을 수 없다. 절대로.
잇따른 경고에도 불응하던 차량들에 대해 슬슬 적극적으로 제재를 가하려던 스위스 경찰은 차량 선두에서 총격전이 일어나고 한 차량이 사고 나서 운전자까지 죽는 것을 보고 더 이상 말로 경고하지 않았다.
뒤에서 방어막이 되고 있던 차량들은 스위스 경찰이 들이받는 것에 대해 대비해야했다. 뒤에서 차량 충돌이 일어나면서 또 한 무리의 차들이 떨어져 나가자 알료샤도 슬슬 앞으로 나설 때가 됐다고 판단했는지 속도를 높였다.
알료샤가 쓰윽 나오자 다른 차량들이 그가 나올 수 있도록 길을 내주었다. 왕이 전장에 나섰다.
벤체슬라스는 옆에 들러붙는 차량을 이판사판으로 들이박았다. 있는 힘껏 부딪칠 생각이었는데 공격자측이 지레 겁을 먹어서인가 핸들을 격하게 꺾어버리는 바람에 차는 람보르기니가 들이받기도 전에 허망하게 허공을 날았다.
뒤따라오는 차량들이 보기엔 퍽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한 순간 절벽을 날았던 차는 그대로 바닥으로 추락해 엉망진창으로 우그러지고 터져버렸다.
나와라. 나와라. 어서. 벤체슬라스는 백미러를 살피며 주문처럼 중얼거렸다. 무르시엘라고의 모습이 보이자 벤체슬라스가 드디어 하는 웃음을 지었다. 알료샤가 무서운 속도로 가까워졌다.
마침 알료샤가 따라붙는 순간이 경사가 심한 코너로 진입하는 구간이었기 때문에 두 차량은 일순간 속도를 늦출 수밖에 없었다. 잠깐이었지만, 알료샤와 벤체슬라스가 일직선상에 서서 서로를 마주보았다.
알료샤는 데저트 이글을, 벤체슬라스는 소드 오프 샷건을 서로에게 들이댔다.
두 총이 격발됐지만 코너의 각이 심했던지라 서로 아슬아슬하게 비껴나갔다. 벤체슬라스가 선두, 그리고 그 뒤가 알료샤가 되었다.
알료샤는 벤체슬라스의 트렁크를 들이받기 시작했다. 벤체슬라스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트렁크에는 150만 유로가 현찰로 들어있단 말이다. 물론 알료샤는 그것을 모르고 있겠지만.
아니, 진짜로 모를까? 벤체슬라스가 스위스에 언제 어디에 있을 거라는 것까지 알고 있던 알료샤다. 그가 왜 스위스에 왔는지 그 이유를 정말로 모를까?
트렁크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도?
알료샤는 물론 트렁크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안다. 돈은 그의 목표가 아니지만 벤체슬라스를 긁어놓는 데는 이만한 게 없다. 그의 상처를 직접적으로 후벼 파는 것이랄까.
어떤 바보가 150만씩이나 되는 돈을 현찰로 들고 다닌단 말인가. 그는 은행도 믿지 못한다. 세공사 협회도 믿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미련하게 계좌에 넣지 않고 직접 들고 다니지. 아주 좋은 먹잇감이다. 트렁크가 터져서 150만 어치의 유로 지폐가 공중에 흩날리면 얼마나 장관일까.
추격전의 차량 행렬은 뱀처럼 구불구불한 코너들이 몰려있는 구간으로 들어섰다. 속도는 느려졌고 운전은 더 섬세해졌다. 까딱 실수하면 절벽 아래로 떨어지게 된다. 그들엔 또 다른 위험요소가 있었다. 경찰들이 발포하기 시작한 것이다.
취리히를 벗어났기 때문에 이제는 주경찰 뿐 아니라 연방경찰실에서도 대응하기 시작했다. 어디까지 나와 줄 것인가. 방첩기관? 대테러부대? 성대하게 나와 줄수록 벤체슬라스에겐 유리하다. 알료샤에겐 절대적으로 불리해진다. 본인은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지만.
자동차 엔진 사이로 툭툭툭하고 공기가 끊겨나가는 굉음이 들렸다. 헬기까지 등장했다. 헬기의 몸체에는 경찰 마크가 없었다. 특수부대인가? 아니면…….
“세공사 협회.”
벤체슬라스가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승기를 잡았다!
알료샤는 헬기의 모습을 확인하고 중얼중얼 욕설을 내뱉었다. 좀 더 시간이 있을 줄 알았는데.
헬기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한 사람이 온 몸으로 바람을 맞으며 추격전의 선두에 선 두 차량을 보고 있었다. 헬기에는 아무런 무기도 달려있지 않았지만 그 존재 자체가 무기라도 되는 것 마냥 차량들을 압박하고 있었다. 뒤따라오는 경찰들만이 저 헬기가 어디 소속인가 의아해할 뿐이었다.
오만할 정도의 권위였다. 내가 나타났으니 너희들은 이빨을 숨기고 잠잠해져라, 이런 신호였다.
그러나 한창 불이 붙은 싸움판에 그런 경고가 먹힐 리가 없다. 협회 헬기가 자신의 모습을 충분히 보여줬음에도 차량들이 멈춰 서지 않자 헬기는 계획을 바꿔서 차량들을 지나쳐 앞서나가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헬기가 사라지자 알료샤가 이때라는 듯이 앞으로 바짝 치고 나와서 벤체슬라스의 뒤꽁무니를 측면에서 들이박았다. 경찰이나 쓸법한 전술이다. 벤체슬라스가 순간적으로 위험하게 휘청거렸지만 곧 동물 같은 감각으로 다시 균형을 유지했다.
벤체슬라스의 왼쪽에 따라붙었던 알료샤는 운전석 창문이 내려가고 샷건의 총구가 불쑥 튀어나오자 다시 뒤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미 발사된 샷건의 모래알 같은 총알 파편은 무르시엘라고의 근사한 도장을 흉하게 긁어놨다.
상관없다. 애초에 박살내려고 가지고 나온 거니까.
복잡한 코너구간이 끝나고 넓은 초원과 완만한 경사의 직선 도로가 나타났다. 벤체슬라스는 곧바로 도로를 이탈해 풀밭 위로 질주했다. 드문드문 민가가 있는 초원이었는데 저 끝에 숲이 있었다. 숲으로 들어갈 생각이다.
알료샤가 놓칠 수 없다는 듯이 그 뒤를 따랐고 알료샤의 부하들이, 그리고 경찰들이 몰려들었다. 이미 소식을 들은 다른 구역의 경찰차들이 합세해 푸른 초원은 수십 대의 자동차 바퀴자국으로 검게 얼룩졌다.
람보르기니 같은 차를 오프로드로 끌고 나오다니 배짱도 좋다. 지금은 이것 말곤 방법이 없었다. 도로만 달리다보면 언젠가 따라잡히게 된다. 협회가 나타났으니 어떤 식으로든 도움을 줄 것이다. 그 전까지 알료샤를 떼어놔야 한다.
만신창이 람보르기니가 나뭇가지와 수풀에 득득 긁히면서 숲을 달렸다. 알료샤의 부하들은 차츰차츰 한 대씩 낙오되기 시작해 경찰과 교전을 벌이고 있었다. 두 대의 람보르기니, 우라칸과 무르시엘라고만이 미친 싸움의 끝에 남아 서로를 물고 뜯는 사냥을 계속하고 있었다.
결국 두 차는 사이좋게 나무를 들이받고 완전히 멈춰 섰다. 운전자가 앞 유리를 깨고 튀어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충격이었다. 숲의 꽤 깊은 부분까지 들어왔다.
두 대 모두 운전석의 문이 간신히 열리고 바닥을 기듯이 두 남자가 밖으로 나왔다. 벤체슬라스는 아직까지 손등에 꽂혀 있던 유리조각을 잡아 뽑으면서 차 안에서 나머지 무기를 몽땅 꺼냈다. 샷건, 단검, 6발 남은 게 고작인 권총.
알료샤는 데저트 이글과 소방 도끼를 꺼냈다. 서로의 시선이 마주치기도 전에 다시 총격전이 시작됐다. 먼저 데저트 이글을 갈기던 알료샤는 벤체슬라스가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샷건의 총구를 들이대자 얼른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샷건이 발사되고 작은 알갱이 같은 탄환들이 나무 몸통에 드드득 박혔다. 벤체슬라스는 신속하게 장전하면서 알료샤가 숨어있는 곳으로 저벅저벅 다가갔다. 폐를 다친 모양인지 쿨럭쿨럭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나무 뒤에는 알료샤가 없었다. 벤체슬라스는 동물같이 총구를 틀었다. 알료샤가 옆으로 빠져서 데저트 이글을 들이대고 있었다. 두 총이 동시에 발사됐고, 벤체슬라스는 피했다. 알료샤는 탄환의 일부분을 맞았다.
“아악! 젠장!”
제발 어깨 한 쪽만이라도 날아갔으면 했는데 재수 없게도 팔을 긁힌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알료샤의 손끝으로 피가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피를 본 알료샤는 순간적으로 행동이 빨라지면서 미친 듯이 남은 탄환을 들이붓기 시작했다.
벤체슬라스는 비싼 고철덩어리가 되버린 람보르기니를 방패막이 삼아서 그 뒤로 숨어 탄환을 세 봤다. 샷건은 다 썼다. 나머지는 단검, 그리고 6발 남은 권총.
알료샤 역시 데저트 이글을 다 써버렸다. 남은 건 도끼.
벤체슬라스가 몸을 일으키더니 알료샤에게 총을 갈겼다. 도끼를 들고 달려오는 알료샤에게 떨리는 손으로 쏘는 총이 맞을 리가 없다. 결국 6발짜리도 무용지물이 됐다. 다 쏜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달각달각 소리만 내고 있는데 알료샤의 도끼날이 머리 위를 덮쳤다.
벤체슬라스는 오히려 앞으로 돌진해 알료샤를 들이받았다. 벤체슬라스의 머리를 조준했던 도끼는 벤체슬라스의 어깨 뒤 허공을 찍으면서 공격 실패로 끝났다. 벤체슬라스가 단검을 휘두르자 알료샤가 도끼 자루 끝으로 벤체슬라스를 찍었다.
빠르고 짧은 리치와 길고 느린 리치. 어느 쪽이 이길까. 날붙이가 몇 번 캉캉 부딪치더니 결국엔 무기도 놓쳐버리고 완전히 육탄전으로 돌아섰다.
단검을 놓친 벤체슬라스가 아차하는 순간에 알료샤의 주먹이 날아왔다. 눈앞이 아찔했다. 주먹은 그대로 안면을 강타해 코를 부러뜨려놓았다. 벤체슬라스는 코피를 줄줄 흘리면서 물러섰다.
물러선다고 봐줄 알료샤가 아니다. 알료샤는 다시 벤체슬라스의 머리채를 휘어잡더니 다른 손으로 몇 번이고 따귀를 후려갈겼다.
벤체슬라스도 이번에는 그냥 맞고만 있지 않았다. 벤체슬라스가 낭심을 걷어 차올리자 알료샤가 얼른 다리를 틀어막기는 했으나 일부분이 스쳤기 때문에 척추를 찌르르 울리는 격통이 머릿속을 하얗게 만들었다.
벤체슬라스의 얼굴은 이제 한 쪽이 완전히 부어서 눈이 작아질 정도였다. 정말 보기 흉했다. 몇 번이고 잡힌 머리칼도 북북 뜯겨서 평소에 보던 윤기 나는 고운 머리칼은 사라지고 없었다.
벤체슬라스는 코피를 쓱 닦으면서 손가락을 뚜둑 뚜둑 꺾으며 주먹을 쥐었다.
알료샤가 충격에서 아직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이에 벤체슬라스의 발길질이 쏟아졌다. 벤체슬라스는 알료샤를 쓰러뜨리고 축구공 걷어차듯이 무차별적으로 알료샤를 걷어찼다. 정통으로 머리를 차였으면 뇌가 흔들릴 뻔 했다.
맞고 있던 알료샤가 어느 순간 벤체슬라스의 발목을 턱 잡았다. 그러더니 무서운 악력으로 발목을 옆으로 꺾어서 벤체슬라스를 쓰러뜨렸다.
벤체슬라스가 흙 위로 넘어지자 알료샤가 재빨리 그 위로 올라탔다. 알료샤도 많이 얻어터졌는지 입가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알료샤는 벤체슬라스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벤체슬라스 역시 순순히 당해주진 않고 알료샤를 올려다보는 자세임에도 그의 멱살을 잡았다.
둘이 동시에 서로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뿌드득 하면서 목뼈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둘 다 얼굴이 터져버릴 것처럼 시뻘겋게 달아오르며 혈관이 튀어나왔다.
둘 중 어느 하나는 어느 순간 정신을 잃을 것이다. 그 때가 바로 죽는 순간이다. 서로를 목 조르는 손아귀가 점차 극단으로 치달을 무렵, 바로 옆에서 총성이 터졌다.
둘은 동시에 손을 놨다. 알료샤와 벤체슬라스 둘 모두 호흡곤란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숨을 고르고 정신을 차리기 전까진 누가 총을 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다 헐떡이면서 겨우 불청객을 돌아보았다.
40대 후반, 아니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눈가의 주름이 아니면 나이를 짐작하기 힘들 정도로 매끈한 피부였다. 남자는 뱅헤어를 하고 있었다. 귀를 덮는 검은 단발머리는 풍성해보였지만 얼굴은 금욕적일 정도로 마르고 야위어보였다.
수염은 면도자국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깔끔하게 밀려 있었고 피부색은 윤기 나는 연한 구릿빛이었다. 코는 매부리코로 끝부분이 정말 새의 부리처럼 두드러지게 휘어있었다. 이런 인상 속에서 그의 눈은 망자를 심판하는 아누비스 신 같이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떨어지십시오.”
그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정중했지만 그의 말에 부탁하는 기색이라곤 없었다. 벤체슬라스는 아직까지 숨을 헐떡이고 있었고 알료샤는 순순히 손을 들어 보이며 벤체슬라스에게서 떨어졌다. 그럼에도 남자는 겨눈 총구를 내리지 않았다.
“바유미 씨…….”
벤체슬라스가 힘겹게 그의 이름을 내뱉었다. 남자는 벤체슬라스에게 흘끗 눈길을 주었다가 알료샤를 바라보았다. 감정이 담겨있지 않은 사무적이고 차가운 눈이었다.
“알렉세이 막시모비치, 보석명 알렉산드라이트 씨.”
“알료샤라고 불러주세요.”
“당신은 경고 누적 횟수를 넘어섰습니다. 당신에겐 마땅한 처벌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협회는 이미 당신에게 여러 번 기회를 줬습니다. 이번 사건은 그냥 넘어갈 수 없습니다. 일이 너무 커졌습니다. 당신도 알고 있을 텐데요.”
“웃기고 있네. 내가 언제부터 협회 소속이었습니까? 당신들을 존중해주는 것뿐이지.”
“아니. 협회는 존중받지 않습니다. 협회는 규칙입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알료샤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남자의 태도는 마치 왕 놀이를 하는 어린아이에게 “이제 집에 갈 시간이란다.”하고 알려주는 어른 같았다. 알료샤는 비틀거리며 일어서더니 마지막 반항만큼은 포기 못하겠다는 듯이 벤체슬라스에게 피 섞인 침을 뱉었다. 그리고 비척비척 숲 저편으로 사라졌다.
남자는 이제 벤체슬라스에게로 돌아섰다.
“많이 컸군요. 라피스 라줄리.”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긴장이 풀어지려던 벤체슬라스가 다시없을 정도로 충격 받은 눈이 되어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가장 어린 시절의 가장 깊은 악몽을 끄집어 낸 것 같은 눈이었다.
벤체슬라스는 만신창이가 되서 독일로 돌아왔다. 빈손이었다.
협회는 충분히 해외토픽감인 그 난동을 무슨 재주를 부렸는지 조용히 무마시켰다. 기사는 단 한 줄도 나가지 않았다. 경찰의 수사도 없었고 증거도 말끔히 지워졌다. 인터넷 게시판에 취리히에서 있었던 난동에 대해 묻는 글이 몇 개 올라왔지만 음모론 같은 관심을 남긴 채 싹 사라지고 말았다.
협회는 벤체슬라스에게 지급했던 150만 유로를 다시 회수하는 것으로 모자라 그의 재산 대부분을 벌금으로 가져갔다. 협회 자체의 힘이라기보다 협회를 가려주기 위해 힘 쓴 권력자에게 바쳐야 할 것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 돈은 고스란히 벤체슬라스의 주머니에서 나갔다.
그는 집을 나설 때보다 훨씬 가난해진 채 돌아왔다. 모든 것을 쥐고 있었는데 한 순간에 전부 잃어버렸다.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다음 기회는 없어요.”
협회의 대변인, 바유미 씨가 그렇게 말했다.
그는 전혀 늙지 않은 것 같았다. 머리 모양이나 옷차림 등 생김새에 전혀 변화가 없는 것도. 그는 죽음을 의인화한 사람 같았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찾아오는 죽음.
그가 옛 이름을 불렀던 것을 떠올리고 벤체슬라스는 어깨를 떨었다. 도저히 털어낼 수 없는 기억이다. 그가 죽을 때 관 속에 넣어져 무덤에 함께 묻힐 기억이겠지.
협회는 잔고는 싹 털어갔어도 부동산은 건드리지 않았다. 그래서 적어도 그에게 돌아올 집은 존재했다. 람보르기니는 아주 박살나버렸지만 그래도 벤츠와 포르쉐는 아직 남아있다. 그리고 사파이어도 있다. 그는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돈을 벌 수단은 아직 남아있다.
옷이나 기타 사치품을 처분하면 당분간은 버틸 수 있는 자금이 만들어질 것이다. 그걸 기반으로 또 벌어나가면 된다.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여기까지 일구어내지 않았는가. 또 할 수 있다.
지치고 피곤한 얼굴로 돌아온 벤체슬라스를 맞이해준 건 코트를 입고 여행 가방을 발치에 둔 집사였다.
“또 울고 계시군요.”
집사의 인사에 벤체슬라스는 잠에서 깨어난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인지 집사는 그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그는 무언가 할 말이 많아보였지만 거친 숨만 간신히 누그러뜨리더니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벤체슬라스의 손에 쥐어주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주인님이 안 계시는 동안 그 방을 열어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배관이 터져서 물이 새는 줄 알았거든요.”
멍하니 풀어져 있던 벤체슬라스의 눈에 충격이 서서히 번져갔다.
“네. 방 안에 뭐가 있는지도 다 봤습니다. 그리고 방 안에 계신 분을 끄집어 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만히 내버려뒀으면 죽었을 테니까요. 저는 인간으로서 사람이 눈앞에서 죽는 걸 그냥 보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주인님이 어떤 분인지도 대충 들었습니다. 저는 이 댁의 집사직을 그만두겠습니다. 주인님이 저를 해치려 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저는 멀리 떠날 겁니다. 주인님의 비밀에 대해서도 발설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지만 이 모든 걸 말씀드려야만 했습니다. 저는 주인님과 다르게 정직하게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게 제 긍지입니다. 죽이려면 죽이세요.”
“나는……. 어차피 당신한테 지불할 돈이 더 이상 없습니다.”
“잘 됐군요.”
벤체슬라스는 집사가 떠나가는 모습을 몽롱한 기분으로 지켜보았다. 집사가 대문을 나가는 것을 보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사파이어는, 사파이어는 아직 집에 있는 건가? 도망치지 않았을까? 집사가 그를 어디론가 보냈다거나 아니면 그가 자유의지를 가지고…….
벤체슬라스의 발작적인 걱정은 쓸데없는 것이었다. 사파이어는 얌전히 벤체슬라스의 침실에 대기하고 있었다.
그가 떠날 때보다 멍은 많이 빠져 있었고 상처를 치료했는지 여기저기 붕대를 감고 있었다. 몸의 절반을 붕대로 감아놓은 것은 벤체슬라스도 마찬가지였다. 침실 문을 열었던 벤체슬라스는 가만히 서서 자신을 보고 있는 사파이어를 마주하고 한참 동안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사파이어가 입을 열었다.
“베르너 씨를 처리해야합니까?”
“뭐?”
“베르너 씨를 죽여서 입막음해야 합니까?”
사파이어는 그의 기준으로 지극히 당연한 것을 묻고 있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저 학대받은 몸으로 뭘 하겠다고? 지금이라면 산들바람도 그를 때려눕힐 수 있다. 벤체슬라스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시체처리반을 고용할 돈도 빠듯한 상태다.
“이리 와.”
벤체슬라스가 허우적거리며 손짓했다. 사파이어가 다가올 거라고 믿지는 않았지만 그것 말곤 마땅히 할 게 없었다. 사파이어는 오랫동안 자신을 학대한 남자에게 주저 없이 다가갔다. 벤체슬라스는 멍이 완전히 빠지지 않은 사파이어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사파이어는 그의 주인에게 솔직하게 고백하는 수밖에 없었다.
“사실은 베르너 씨를 죽이기 싫었습니다.”
“입 다물어.”
벤체슬라스가 지친 듯이 사파이어를 끌어당기더니 그저 품 안 가득 그를 안고 구석으로 질질 끌고 갔다.
“그냥 입 닥쳐.”
침대도 아니고 의자도 아니다.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를 안은 채로 구석 벽에 기대어 그대로 무너지듯이 스르륵 주저앉았다. 빛이 들지 않는 곳이었다. 어린아이가 봉제인형을 끌어안고 구석에 숨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벤체슬라스가 아직 낫지 않은 부분을 건드렸기 때문에 사파이어가 움찔하면서 몸을 뒤척였다. 그 움직임에 벤체슬라스의 상처가 건드려져 벤체슬라스 역시 나직하게 신음했다.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의 목덜미에 고개를 푹 파묻은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자는 것도 아니고 우는 것도 아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눈으로 가만히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사파이어는 자신이 허가 없이 고문실을 나왔다는 것 때문에 막연한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지만 낌새를 보니 벤체슬라스가 폭력을 휘두를 것 같지는 않아 마음을 놓았다.
환자 둘이 최대한 서로에게 자극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그 커다란 방에서 구석의 조그만 자리만 차지한 채 서로를 의지하고 있었다.
벤체슬라스는 이제 함부로 사파이어에게 손찌검을 할 수 없었다. 적어도 재산 수준을 회복하기 전까지는. 그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장사수단이 사파이어이기 때문에 잘못 손을 댔다가 그가 망가지기라도 하면 이전의 생활수준은 결코 회복할 수 없을 것이다. 뼈아픈 상실이었다.
사파이어가 그런 속사정을 알 리 만무하다. 그저 주인이 화를 내지 않는다는 것이 뜻밖의 행운일 뿐.
“나는 결코 아무도 믿지 않아.”
벤체슬라스가 묵묵히 입을 열었다.
“난 혼자야. 혼자. 영원히 혼자야. 나는 너도 안 믿어. 나는 계속 널 의심할거야.”
사파이어는 대꾸하지 않고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러나 벤체슬라스가 교리문답을 하는 것처럼 말했다.
“너는 나 배신하지 마.”
“네.”
“배신하지 마.”
“네.”
“그래도 널 믿지 않아.”
평소의 벤체슬라스는 자신이 느끼는 혼란을 명확하게 정리해주는데 오늘은 벤체슬라스가 오히려 혼란의 주체였다. 그는 자신이 내뱉는 모순을 인지하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아니 대화 자체를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끝없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파이어는 벤체슬라스가 주는 자극에 대해 떠오른 것을 거짓 없이 담백하게 말했다.
“차라리 죽여주세요.”
“거짓말하지 마. 넌 죽고 싶어 한 적이 없어. 단 한 번도. 넌 죽고 싶어 하는 게 아냐. 넌 살아야 돼. 난 네가 혐오스럽거든. 난 네가 싫어. 넌 살아야 돼. 네가 살고 싶다고 하면 그 땐 널 죽일 거야. 지금은 안 돼. 체념하지 마. 난 네가 가장 싫어하는 선택만 하고 싶어.”
사파이어는 또 다른 의문이 떠올랐다.
“절 사랑하십니까? 혹시 이게 사랑인가요?”
벤체슬라스가 피식 웃었다.
“넌 사랑을 이해 못하잖아. 필요하지도 않잖아.”
“사랑하시나요?”
“사랑해.”
그리고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를 안은 손을 더욱 단단히 조이며 “거짓말이야.”하고 속삭였다. 사파이어는 이해하기를 포기해버렸다.
“그래. 아무런 생각도 하지 마.”
벤체슬라스가 중얼거렸다. 드디어 혼란이 진정되고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한 목소리였다. 마치 세상은 생각이라는 소음으로 가득 차 있는데 그런 모든 자극에서 벗어나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 고요함에 들어선 것 같은 평화로움이었다.
아무도 믿지 않는다면서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를 끌어안은 채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자신이 잠든 사이에 사파이어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 항상 의심하는 남자가 오늘은 칼날에 베이는 것을 감수하고 칼을 끌어안고 자는 모양새였다.
벤체슬라스와 다르게 사파이어는 잠을 충분히 자두었기 때문에 졸음이 오지 않아서 난감했다. 주인을 거역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몇 시간이고 얌전하게 안겨있는 수밖에 없었다.
“많이 컸군요. 라피스 라줄리.”
벤체슬라스는 어린 시절 이후로 그토록 겁에 질려본 적이 없다.
남자는 어떤 비난이나 경탄도 담지 않은 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남자가 자기 생각을 드러내는 것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충격이 한층 더 했다. 차라리 매도했으면 잔상이 덜 했을 텐데 칭찬했기 때문에 오히려 남자의 말은 벤체슬라스의 머리 깊숙이 박혔다.
“당신은 먼 길을 달려왔습니다.”
“그, 그만.”
“누구도 인정하지 않겠지만 나는 당신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그만 하세요.”
“그 동안 수고가 많았습니다. 많이 힘들었겠군요.”
“그만해!”
일갈하는 순간 벤체슬라스가 헉하고 숨을 들이키며 꿈에서 빠져나왔다. 눈을 뜨는 것 자체가 폭력이었다.
품 안에는 아직 사파이어가 안겨 있었고 창문 너머로는 해가 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길게 늘어지는 붉은 노을이 갈퀴처럼 방 안으로 들어와 바닥을 기어 그들에게 조금씩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기분 나쁜 석양이다.
잠든 주인을 밀어내지도 못한 채 가만히 안겨있던 사파이어는 어느 샌가 벤체슬라스의 품 안에서 잠들어 있었다. 눈이 감긴 그의 얼굴은 순하고도 어려 보인다. 자신이 잠든 동안 그가 제정신을 찾고 복수하지 않았다는 것에 벤체슬라스는 안도했다.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사파이어의 복종은 이제 자연법칙이 되어가고 있었다.
믿음직한 물건에 대해 느낄 든든한 신뢰를 벤체슬라스는 곧바로 부정했다. 아니, 세상에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제일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다. 나머지는 모두 적이다. 잠재적인 배반자다.
돈만이 그나마 믿을 수 있는 물질이다. 돈은 곧 나의 인격이고, 나의 보호자고, 나를 충족시켜주는 절대자다. 사파이어는 불확실하다. 그를 믿어야만 하지만, 그리고 가끔은 정말로 그렇게 되지만, 아니, 아니다.
그를 믿을 수가 없다…….
영원히 믿을 수 없을 것이다.
벤체슬라스는 불안한 눈으로 석양을 노려보며 잠든 사파이어의 머리칼을 쓰다듬고 이마에 키스했다. 이토록 역겨운 저녁을 다시 맞이하게 될 줄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