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탄의 사수
꿈을 꾸다니 그에게는 좀처럼 없는 일이었다.
꿈속에서 그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막연한 불안이 안개처럼 바닥에 깔려 있었는데 금방이라도 해일이 되어 닥쳐올 것 같은 긴장감이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절대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꿈 속 세상은 텅텅 비어서 자신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딱 한 사람이 있었다. 그의 신, 그의 절대자, 벤체슬라스.
벤체슬라스는 평소와 같은 차분한 색상의 양복을 입고 백금발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마네킹이었다. 그에게는 얼굴이 없었다. 그가 살아있는 인간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도자기 재질인데다 얼굴이 없다는 것도 양립할 수 있는 사실로써 꿈 안에 존재했다.
뭔가가 심각하게 잘못됐다…….
꿈 속 세상의 바닥은 대리석 같이 모든 것을 비추는 하얀 타일이었고 하늘 역시 아이보리색에 가까운 기묘한 하얀색이었다. 바람 한 점 없는 무풍지대였지만 더위는 없었다. 태양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열기랄 것도 없었다.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세계 속에서 밑바닥에 깔려 있던 불안은 점점 더 부풀어 올라 무릎께까지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얼굴 없는 벤체슬라스가 돌연 그의 손목을 으스러질 듯이 쥐더니 속삭였다.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기는 기분이 어때?
사파이어는 눈을 부릅떴다. 정지된 상태로 천장을 몇 초간 노려보고 있다가 그제야 숨을 몰아쉬었다. 잠들어있는 동안 질식 직전까지 간 것일까. 호흡은 좀처럼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식은땀으로 온 몸이 축축했다.
이런 일은 좀처럼 없는데. 한참 뒤에야 사파이어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자각했다. 악몽을 꾼 것이다.
꿈을 꾸었다. 가짜일 뿐이다. 그렇게 판단하자 예민하게 곤두 서 있던 신경이 다시 무감각한 껍질을 뒤집어쓰며 표면의식 아래로 내려갔다. 세상은 다시 둔탁하고 별로 색채가 없는 모습으로 돌아왔다.
사파이어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낯선 천장이고 낯선 방 안이었다. 새로운 아파트다. 숙소를 배정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사파이어는 메마르고 침착한 눈동자를 되찾았다. 잠시 가만히 앉아있던 사파이어는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벗으며 욕실로 들어갔다.
그의 식단에 변화가 생긴 만큼 체형도 약간은 변했다. 벤체슬라스가 이전부터 지적한 것도 있었고 쿠르트 하스 전 때 직접 몸으로 겪은 만큼, 체급을 늘려야 할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사파이어도 작다고 할 만한 체격은 아니지만 그가 상대하는 것들이 인간의 범주를 가볍게 넘어서는 괴물들이라는 게 문제였다.
키는 어떻게 할 수 없지만 근육은 확실히 두꺼워졌다. 사격에 방해되지 않을 만큼만 키웠다. 이전에 입던 옷은 치수가 작아져서 한 치수 큰 옷을 입어야 할 지경이었다. 체격이 커진 만큼 그걸 유지하려면 또 그만큼 먹어야한다.
사파이어는 이전에는 음식이라기 보단 사료에 가까운 자신의 식단에 대해 이렇다 할 감상이 없었지만 지금은 뭔가 단조롭다고 느꼈다. 그렇다고 해서 알료샤가 주었던 것들이 그리운 건 아니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너무 자극적이다. 특히 술은…….
사파이어는 물기를 닦으면서 하반신을 내려다보았다. 음모가 깨끗하게 밀려 있었다. 음모의 대부분을 어설프게 손가락으로 뜯겼기 때문에 반쯤 뜯기다 만 가닥들이 안으로 파고들어가기 시작해서 어쩔 수 없이 전부 밀어야만 했다.
한 번 밀고 나니 그 다음부터는 까슬하게 돋아나는 억센 털들이 참을 수 없이 자극적이라 주기적으로 밀게 되었다. 벤체슬라스를 원망하는 마음은 들지 않는다. 사파이어가 잘못한 거니까. 자신이 규칙을 깬 것이다. 알료샤가 강권해도 거절했어야 했다.
알료샤와 못 만난 지는 꽤 됐다. 오히려 다행이다. 그는 이해하기 힘든 남자고, 혼란스러운데다가, 불쾌감까지는 아니지만 좋지 않은 자극을 자꾸 안겨주는 사람이다.
알료샤가 등장하기 이전, 사파이어의 원래 세상은 단순하고 오류가 없었다. 가끔씩 둔탁한 감각을 비집고 미약한 호기심 같은 것이 올라오긴 했지만 어떤 자극도 없는 그의 세상에서는 무언가를 알아야겠다는 욕구도 금방 희미하게 사라져버렸다.
다른 모든 것이 두꺼운 장갑을 낀 것처럼 뿌옇게 느껴지는 것 대신에 성욕과 안락한 잠자리에 대한 욕망은 무엇보다도 강렬했다.
벤체슬라스는 그 모든 것을 충족시켜주었다. 규칙만 잘 따르면 보상이 있는 단순하고 명쾌한 세상이었다. 그것이 최근 들어서 점점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머리가 아팠다.
사파이어는 상념에 잠겨 있다가 시계를 확인하고는 아침 루틴이 밀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계획이 틀어지는 것, 그리하여 불명확함과 혼란이 찾아오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다. 사파이어는 심각하게 번질 수 있는 의문들을 가볍게 털어버렸다.
우선은 아침식사. 시큼하게 발효된 품퍼니켈(Pumpernickel)이라는 호밀빵과 염도를 낮춘 자우어크라우트, 그리고 수비드 방식으로 대량 조리한 기름기 없는 소고기. 거기에 단백질 쉐이크와 비타민 보충제.
한 끼분의 식사는 플라스틱 통에 담겨 냉장고 안에 일주일치가 들어 있었다. 영양소를 맞춘다고는 하지만 매번 똑같은 음식을 먹다가는 결핍이 생기게 마련이니 며칠 간격으로 메뉴에 약간의 변화를 주지만, 크게 달라지는 점은 없었다.
탄수화물, 단백질, 비타민. 기름을 아예 안 먹는 것은 아니지만 글쎄, 굳이 맛있게 만들 필요가 있을까?
하루의 첫 번째 과제라고 할 수 있는 아침식사를 끝내면 그 다음은 총기 손질과 무기류 점검이다. 손상된 무기는 벤체슬라스가 가져간다. 사용했던 무기의 나머지는 사파이어가 정비한다. 총을 분해해서 먼지를 닦고 재조립하는 과정은 거의 매일 하는 것이니만큼 눈 감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진짜로 눈을 감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왜 그래야하는가?
대부분의 청부업자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벤체슬라스와 사파이어가 쓰는 총기는 일련번호가 없다. 탄알에 남은 강선흔 때문에 꼬리를 잡힌다고 총의 강선 자체를 갈아버리는 자들이 있지만 애초에 총 자체를 추적할 수 없으면 무용지물 아닌가?
피해자의 몸속에 박혀 있던 총알이 어떤 권총에서 발사되었다는 것을 알아냈다고 해보자. 총기의 일련번호로 그 총의 소유자를 찾아내서 수갑을 채우면 끝나는 일인데 일련번호 자체가 없다면 누가 쐈는지, 누가 책임이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굳이 강선을 갈아내서 명중률을 희생시킬 필요가 없다.
이 일련번호 없는 총기를 구입하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돈이 크지만 그렇다고 이걸 완전히 믿을 수도 없다. 범죄자에게 흘러들어오는 이 무수한 총기가 전부 공장에서 제대로 생산된 제품이라곤 할 수 없다.
어설프게 만든 가짜도 있을 것이고, 재수 없으면 손 안에서 터져버리는 사태도 발생한다. 총을 분해해서 닦고 재조립하는 것은 즉, 그런 재수 없는 사태가 일어날 확률을 최소화하기 위한 과정이다.
총기 손질이 끝나니 이번에는 도검류가 남았다. 최근에는 도검류를 잘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다 할 점검은 필요 없었다. 금속 피로도 우려할만한 것이 아니고 날을 새로 갈아야 할 만큼 이가 빠진 것도 아니다. 다음으로 넘어가볼까.
장비를 점검했으니 이제는 트레이닝 시간이다. 아파트 안에 샌드백이 설치되어 있지만 오늘은 팔굽혀펴기부터. 미끄러지지 않도록 반장갑을 낀 사파이어가 바닥에 두 손을 짚고 물구나무를 서더니 그대로 팔굽혀펴기를 하기 시작했다.
벽에 기대지 않은 채 순전히 자신의 몸으로 균형을 잡고 규칙적으로 호흡을 내뱉으며 천천히 몸을 올렸다 내렸다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몸이 내려온 채로 움직임이 멎었다.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기 때문에.
그 상태로 눈동자만 굴려 확인하니, 전화에서 소리가 나고 있었다. 사파이어는 가볍게 몸을 들어 올려 탄력으로 튕겨내고는 손바닥을 탁탁 털며 일어섰다.
그에게 연락할 사람은 단 하나밖에 없다.
“말씀하십시오.”
사파이어는 전화를 받은 채로 주인의 지령을 하나도 빠짐없이 듣고 있었다. 그리곤 “알겠습니다.”하며 전화를 끊었다.
사파이어의 행동이 조금 전보다는 약간 더 빨라졌다. 그대로 옷을 입기엔 땀을 흘린 상태라 샤워를 한 번 더 해야 했다. 욕실로 들어간 사파이어는 물로만 샤워하고 그대로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상태로 나와 옷장을 뒤져 옷을 꺼내기 시작했다.
검은 정장, 하얀 셔츠, 짙은 남색 넥타이. 셔츠 위에 껴입을 검은 가죽재질의 홀스터. 어차피 재킷으로 가려질 것이다. 그런 다음 양말을 무릎까지 고정시켜줄 가터. 그리고 허리에 찰 벨트.
모든 게 전략무기였다. 홀스터에는 권총을 두 자루 넣었고 양말 가터에는 나이프를 숨겼다. 벨트 안쪽에는 교살용 쇠줄이 들어갔다.
옷을 차려입은 사파이어는 거울 앞에 서서 가지런히 넥타이를 맸다. 거울 너머에서 자신을 빤히 노려보는 사내는 분명 많은 사람의 이목을 끌만한 눈빛을 하고 있었지만, 경호원이라는 위장 신분은 그 모든 것을 그럴듯하게, 납득 가능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넥타이까지 멘 사파이어는 검은 가죽장갑을 끼고 귀에 낄 이어폰을 챙긴 후 아파트를 나섰다.
세상은 언제나 그를 적의 어린, 그리고 탐욕스런 시선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는다. 눈빛을 혓바닥이라고 치환할 수 있다면 그가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마다 끈적한 시선이 들러붙어 그의 살결을, 옷 안의 은밀한 부분까지 샅샅이 벗겨 핥으려고 들 것이다.
사람들이 그를 보는 시선은 그러했다. 인간을 인간으로 보는 게 아니라 마치 먹음직스러운 고깃덩어리를 보는 것 같은 그런 눈으로.
여자들은 그를 선택한다. 남자들은 그를 증오하고. 또 남자 중에도 노골적으로 그를 원하는 시선들이 있다. 그들은 사파이어의 내면에는 관심이 없다. 먹음직스러운 외모만이 그들의 흥미를 끌 뿐.
그들은 대놓고 쳐다보든, 최소한의 양심이라도 남아 곁눈질로 흘끔거리든, 자신들의 눈으로 사파이어를 강간하고 있었다.
사파이어의 무딘 정신이 그 시선들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 다행이다. 그렇지 않으면 목표물 이외에 사상자가 더 늘어날 것이다.
신비로운 환상을 자극하는 저 섹시한 남자가 사실은 오늘 내 목숨을 거두어갈 사신이라는 걸 알게 되면 그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들은 해골의 형상인 줄도 모르고 죽음을 열렬히 원하고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사파이어는 경호원 중 하나를 뒷방에서 몰래 처치하고 시신을 숨겼다. 이제 그들 중 하나로 섞여 들어갈 수 있다. 목표물은 자신의 종말이 코앞에 다가왔다는 것은 꿈에도 모른 채 파티장에서의 연설을 계속했다. 사파이어는 최적의 타이밍을 기다리며 음울한 눈으로 목표물의 등 뒤를 노려보고 있었다.
얼마안가 파티장은 난장판이 됐다. 사파이어는 목표물 자체는 조용히 처리했다. 그 뒤에 빠져나오는 과정에서 잡음이 생겼을 뿐. 목표물은 남자 화장실 두 번째 칸막이 안에서 살해당했지만 눈치 빠른 경호원이 금방 돌아오지 않는 주인의 상태를 의심했고, 그래서 간단히 발각돼버렸다.
일을 저지르고 나면 거의 대부분의 뒤처리는 업자들이 해주기 때문에 사파이어는 뒷일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편이었다. 그가 집중해야하는 것은 무사히 빠져나오는 것이다.
사파이어는 가지고 간 무기를 모두 소모한 것으로 부족해 경호원들의 무기를 빼앗아 총격전을 벌이면서 그 난장판을 빠져나왔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하루였다. 팔다리도 모두 제대로 붙어있고, 심각한 부상은 입지 않았고, 임무는 깔끔하게 처리했고.
눈으로 사파이어를 애무하던 군중이 정작 자신이 피를 뒤집어쓰자 얼굴에 튄 피를 닦아내며 소리를 지르고 난동을 피우긴 했지만, 그래도 전체적으로 다른 날과 크게 다를 것 없는 하루였다.
유령이 되어 아파트까지 돌아오는데 성공하자 쌓여있던 긴장이 한꺼번에 풀렸다. 일을 끝마치고 난 후에 그는 꼭 물 한 병을 비운다. 갈증으로 목이 타들어가는 것 같다. 벤체슬라스가 절대적인 규칙이라고 못박아둔 것은 아니지만 살인 후에 물을 마시는 건 일종의 불문율이었다.
사파이어로서는 그래야 한다기보다, 생리적으로 그게 자연스러우니까 물을 마시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마시지 않는 게 이상하다. 객관적으로도 이상한 일일 것이다. 벤체슬라스가 그렇게 화를 내는 것을 보면 분명히 그렇다.
오늘은 다른 날보다 상태가 괜찮은 편이었다. 바짓단 말고는 눈에 띄게 피가 튄 곳도 없었고 찢어진 부분도 없다. 셔츠는 온통 땀에 젖었지만 원래 소모품이니까. 사파이어는 옷을 벗어 바닥에 툭툭 떨어뜨리고 나신이 되어 욕실로 터벅터벅 걸어 들어갔다.
암살과 추격전으로 잔뜩 치솟아있던 아드레날린이 떨어지면서 반대로 하반신에 피가 쏠리기 시작했다. 이 스트레스를 풀 곳이 필요하다. 사파이어는 보상의 시간을 기대하며 몸 구석구석을 씻었다.
성기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서서히 힘이 들어가기 시작해서 반쯤 발기했지만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으며 그것을 아무 생각 없이 물끄러미 보고 있자 다시 발기가 풀렸다. 똑같은 사항으로 몇 번이고 고문당하면 바보라도 학습을 하게 마련이다.
벤체슬라스는 따로 연락을 주지 않았다. 본인이 직접 오던가, 이 뒤에 또 어떤 지시를 내릴 것이다. 사파이어는 피와 땀을 씻어낸 뒤에 수건 한 장을 두르고 나가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상태로 침대에 몸을 묻었다.
전화는 울리지 않았고 아파트 문이 열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살육의 흥분을 금방이라도 성감으로 바꿀 준비가 되어있던 몸은 고요하고 차분한 상태가 계속 이어지자 열기를 누그러뜨렸다.
사파이어는 눈을 감았다. 몸은 피곤하지만 정신은 각성되어 있는 상태에서 잠에 빠져들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정상인의 기준으로 보자면 비현실적인 일이기는 하다. 조금 전까지 사람을 죽여 놓고 아무렇지 않은 듯이 일상으로 돌아오려고 하다니. 하지만 사파이어가 정상인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미 오래 전에 죽었을 것이다. 그가 사는 세상은 미쳐야만 살아갈 수 있는 곳이다.
눈을 감고 시야를 차단한 채 한참을 그러고 있자 어느 샌가 자신도 모르게 선잠이 든 모양이다. 몽롱한 정신 사이로 전화 소리가 면도날처럼 파고들었다. 깨어있다고 생각은 하는데 몸은 반쯤 잠든 상태였기 때문에 몸을 일으켜 전화를 받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전화소리는 금방 끊어지지 않고 인내심 있게 사파이어를 기다려주었다.
“자고 있었나?”
“아닙니다.”
“목소리가 가라앉았는데.”
“쉬고 있었습니다.”
벤체슬라스의 평소 목소리는 차분하고 매끄럽다. 머릿속이 공허해서 이렇다 할 감정이 없는 사파이어와는 다른 유형의 목소리다. 지성과 교양, 그리고 냉소주의가 합쳐진 결과라고 할까.
벤체슬라스가 의뢰인에게 말하는 방식과 사파이어에게 말하는 방식도 사뭇 다르다. 의뢰인에게는 사무적인 친절함이 있지만 사파이어에게는 일말의 가식조차 벗어던진 진짜 모습이 나온다. 사물의 환심을 사려고 하는 사람은 없다.
둘의 관계에서 벤체슬라스는 항상 능동적이고 사파이어는 항상 수동적이다. 그는 주인이고 언제나 본인의 의지를 관철한다. 사파이어는 하인이고 언제나 그의 의지를 받든다.
벤체슬라스는 남에겐 보이지 않는 내면을 사파이어 앞에선 편하게 드러낸다. 그래도 되는 특별한 관계이기 때문에, 자신의 소굴로 돌아온 악마가 그러는 것처럼 사근사근하게 웃는 인간의 껍데기를 벗고 냉혹하고도 웃음이 없는 본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것은 남에게는 허용하지 않는 은밀하고 사적인 관계였다. 그들 둘만의 세상.
“듣고 있나?”
“예.”
“준비해서 이리로 와.”
사실은 약간 상념에 잠겨 있었기 때문에 사파이어는 세부사항을 잘 듣지 못했다. 그러나 임무완수 후에는 으레 따라오는 결과가 있었기에, 사파이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포상입니까?”
“아니.”
벤체슬라스는 간단히 부정해버렸다.
“세공사가 방문할 예정이다.”
벤체슬라스는 베를린 서쪽 지역에 있는 그루네발트(Grunewald)에 빌라를 구했다. 혼자 사는 집이 이만큼 클 필요는 없었지만 그는 사생활을 완전히 보호할 수 있는 개인공간을 원했다.
침실이 5개에 욕실도 5개. 차고가 따로 있고 정원 부지가 널찍하게 있다. 개인 수영장이 따로 있고 원한다면 홈시어터도 쓸 수 있다. 그러나 벤체슬라스는 영화보다는 차라리 오페라를 볼 인물이다.
5개의 침실 중에서 3개는 놔두고 2개는 다른 방으로 개조했다. 하나는 무기 저장고, 다른 하나는 체력단련실. 그 외에 커다란 방 하나가 통째로 드레스 룸이었고 와인 저장고가 따로 있었다.
거기에다가 장서가 가득 차 있는 서재, 벽난로가 있는 응접실, 12사람이 앉을 수 있는 커다란 식탁이 있는 식당과 무늬 있는 대리석으로 꾸민 화이트 톤의 주방. 그리고 용도를 알 수 없는 비밀스러운 방이 하나 있었다.
그 방과 무기저장고는 항상 잠겨 있었다. 열쇠는 벤체슬라스가 가지고 다녔다. 그는 어느 누구에게도 두 방의 안쪽을 보여주지 않았다. 집사에게조차도. 그 방의 정체는 사파이어만 알고 있었다. 오직 그만을 위한 방이니까.
이 집에서 살고 있진 않지만 이 방만큼은 오로지 사파이어 하나만을 위해 준비된 방이다. 정작 사파이어는 이 방에 절대로 들어갈 일이 없기를 바라는 곳. 고문실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스미스 씨.”
50대 중반의 독일인 집사가 사파이어를 알아보고 문을 열어주었다. 그는 슈테판 베르너라는 이름으로, 집을 구함과 동시에 고용됐다. 그는 사파이어를 에이든 스미스라는 이름의 미국인으로 알고 있었다.
표면적으로 사파이어는 벤체슬라스의 경호원이었다. 슈테판은 집사 일을 오래하면서 입을 다물고 많은 것에 관심가지지 않는 게 좋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에 그 정도 설명으로 충분히 만족했다.
사파이어는 집사가 안내하는 대로 응접실로 갔다. 커피 테이블을 사이에 둔 긴 소파 두개에는 세 사람이 서로 마주보고 앉아있었다.
벤체슬라스와 두 여자. 한 명은 이미 두 번이나 칼을 맞댄 적이 있으니 기억이 난다. 피전 블러드라는 이름이었던가. 다른 하나는 그 보석을 소유하고 있는 세공사겠지. 사파이어가 들어서자 벤체슬라스가 등 뒤를 돌아보곤 손짓했다.
“이리 와.”
집사는 깍듯이 인사하고 사라졌고 사파이어는 소파로 다가가 벤체슬라스의 옆자리에 앉았다. 벤체슬라스는 소유물을 과시하기라도 하듯이 사파이어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편안하게 다리를 꼬았다. 소파의 반 이상을 혼자 차지하는 편안한 자세였다.
벤체슬라스의 맞은편에 앉은 여자는 미묘한 분위기를 넘어서 노골적으로 퇴폐적인 소유욕을 드러내고 있는 벤체슬라스를 보고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놀라야 돼?” 이런 태도였다. 오히려 여자 옆에 앉은 보석이 희미하게 동요하는 모습을 보였다.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의 어깨에서 손을 풀고 꼬았던 다리를 내리며 대화에 제대로 임할 자세를 취했다.
“마리야 이바노브나 바실리예브스키.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는 건 처음이로군.”
“당신 얘기는 많이 들었어. 라울 가르시아 로페즈.”
“지금은 벤체슬라스야.”
“당신은 이름을 너무 자주 갈아치우니까.”
“이름 얘기하러 여기까지 온 건 아닐 텐데.”
“실례했어. 당신한테 의뢰를 맡기고 싶어. 정확히는 당신이 나랑 같이 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어.”
벤체슬라스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마리야를 가만히 탐색하다가 입을 열었다.
“마리야 이바노브나, 난 당신을 잘 몰라.”
“피차 마찬가지야, 벤체슬라스.”
“내 보석을 몇 번 깨부수려고 했지. 지금 와서는 손을 잡자고?”
“이 바닥에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거 알잖아.”
“맞는 말이지. 맞는 말이지만 사과는 들어두고 싶은데.”
“미안했어.”
마리야는 즉답하고는 벤체슬라스의 반응이 영 떨떠름 하자 “더 해야 돼?”하면서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당신한테 악의가 있는 건 아니었어. 나도 돈을 벌어야 했으니까. 당신이 나였다면 당신도 똑같이 그랬을걸.”
“맞는 말이야.”
“화해하고 넘어가자고?”
벤체슬라스는 그 말엔 대답을 해주지 않고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마리야의 옆에 앉은 피전 블러드를 쳐다보았다.
“당신 보석도 유명하던데. 소문이 자자해. 그 저격 솜씨는 나도 몇 번 봤지. 근사해.”
“눈독 들이는 거야?”
“그럴 리가.”
“당신 사파이어야말로 오히려 유명하지. 내건 조용해. 난 조용한 걸 유지하고 싶어. 단골손님들 때문에 꾸준히 벌기는 하니까.”
“부러운 이야기군.”
벤체슬라스는 비꼬지 않았다. 순수한 경의였다. 모든 것의 가치를 돈으로 재단하는 그에게 꾸준한 수익 루트라는 것은 성공의 척도로 보였다. 전직 첩보원이었다는 배경 때문에 이 여자를 대하는 데에 긴장을 늦출 순 없었지만, 이것만큼은 진솔한 반응이었다.
그것을 읽었는지 굳어있던 마리야의 표정이 희미하게 풀어졌다.
“그래서, 내 이야기를 들어줄 거야?”
“내가 왜 당신 요구를 들어줘야하지?”
“왜냐면 의뢰비를 전부 당신에게 줄 거니까. 좋아하지? 돈. 좋아한다고 들었어.”
“얼마인데?”
“150만 유로. 최소.”
벤체슬라스는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무표정을 가장했다. 저번 의뢰가 다수의 의뢰인을 짜내서 간신히 100만 유로를 벌어들인 것이었고, 의뢰의 난이도는 생각한 것보다 더 어려웠기 때문에 거기서 소모한 돈도 많다.
마리야가 하려는 얘기는 어떤 건지 몰라도 단일 의뢰로는 금액이 크다. 군침이 돈다는 소리다.
“표정 보니까 알겠네.”
“무슨 표정?”
“숨기려고 하지 마. 당신보다 20년은 더 이쪽 일을 했으니까. 속내를 들키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야. 좋아하지? 돈.”
“좋아해.”
“돈 다 줄 테니까 나랑 손잡고 일 처리해줘.”
벤체슬라스는 마리야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마리야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때마침 집사가 “실례하겠습니다.”하고 문을 열고 들어와 차와 다과를 두고 나갔기 때문에 긴장된 분위기가 잠시 흐트러졌다.
“그러니까 당신 말은, 당신 돈은 한 푼도 안 들이고 날 고용하고 싶다는 거 아닌가. 의뢰비로 날 사는 셈이지.”
“싫어?”
“싫을 리가.”
“내 돈은 줄 수 없어. 나도 은퇴 후를 생각해야하거든.”
마리야는 집사가 두고 나간 쟁반에서 찻주전자를 집어 들어 찻잔에 차를 따라내고 설탕과 크림을 한 스푼씩 넣어 잘 저은 다음 한 모금 마셨다.
찻주전자와 찻잔 세트는 마이센으로, 하얀 바탕에 푸른 꽃문양이 그려진 것이었다. 찻잎은 로네펠트의 얼 그레이. 다과로는 초콜릿 코팅을 입힌 에클레어였다.
극진한 대접은 아니지만 적어도 홀대하는 것은 아니다. 마리야가 차를 마시기 시작하자 옆에 있던 피전 블러드가 에클레어를 한 개 집어 들었다. 벤체슬라스는 자신의 보석을 전혀 제지하지 않는 마리야를 흥미롭게 관찰했다. 마리야는 차를 한 잔 더 따라내 피전 블러드에게 건네주면서 벤체슬라스에게 말했다.
“당신이랑 당신 보석 관계는 어떤지 모르겠는데, 우린 그렇게 억압적이지 않거든.”
“장 바티스트 고디에도 그런 소릴 하던데.”
“우리가 그 사람들보다 더 느슨할걸.”
“특별한 철학이라도 있나?”
“그런 걸 가지기 시작하는 순간 목숨을 스스로 깎아먹는 거야. 굳이 있다고 하면 KGB 시절의 경험에서 얻은 교훈이라고 할까. 규칙이 없다는 게 내 규칙이겠네. 당신은 어때?”
“어리석은 질문이었군. 사과하지.”
“받아들일게.”
마리야는 찻잔을 내려놓고 다시 협상할 자세로 돌아왔다.
“일 얘기로 돌아가자면, 세공사의 영수증이 발각됐어.”
“영수증?”
“당신도 발행해본 적 있을걸? 당신이 파는 건 사파이어니까, 사파이어 반지 몇 개라던가, 사파이어 목걸이 몇 개라던가…….”
“아아. 알겠군.”
암살, 납치, 첩보 같은 계약에 진짜로 법적인 효력이 있는 문서를 작성할리 없다. 그러나 계약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기 때문에 이따금씩 증서를 남겨둬야 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50만 유로짜리 계약을 맺었는데 의뢰인은 세공사가 일을 제대로 처리할지 아니면 돈만 떼먹고 사라질 사기꾼일지 확신할 수 없다.
그래서 총 계약금 50만 유로 중에 어느 정도를 떼어 선 계약금으로 지급하고 나머지 차액은 일이 완전히 끝난 다음 지급하는 식이다. 혹은 의뢰인이 특정한 추가 업무를 지시했고 거기에 보너스가 달려 있는데, 세공사가 그 추가 업무를 이행했을 경우 추가적으로 받아야 하는 돈에 대한 증서, 뭐 그런 것들이다.
그런 증서를 “누구를 암살했으니 누군가에게 얼마를 줘야 함” 이런 식으로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그들이 제공한 서비스의 품목명을 바꿔서 가짜 영수증을 만들게 됐고 여기서 세공사와 보석이라는 개념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벤체슬라스를 예로 들자면, 세공사 벤체슬라스가 고객에게 100만 유로짜리 사파이어 제품을 팔았다고 기재되고 그 다음에 어떤 방식으로 대금을 지급받을지가 기재된다. 미리 받은 돈이 전체 금액의 10%니 나머지는 특정 기간 동안 할부로 받는다던가, 일시에 지급받는다던가, 이런 식으로.
영수증이라는 이름의 계약서이니만큼 의뢰인과 세공사, 둘 모두가 나눠 갖는다. 세공사는 자신이 받을 대금에 대한 증빙으로써, 그리고 의뢰인은 자신이 지불해야할 대금에 대한 증빙으로써.
세공사가 영수증을 잃어버리면 의뢰비에 대한 청구권을 잃게 되는 셈이고 의뢰인이 잃어버리면 고의든 아니든 간에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실수로 분실했다면 위약금 얼마를 더 무는 선에서 끝날 수 있지만 고의로 파손한 게 밝혀지면 세공사가 직접 목숨을 끊으려 들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 영수증이란 것이, 고가의 사치품이라면 핑계대기가 쉽다. 굳이 보석이 아니더라도, 와인이라든가 시계라든가, 그럴 듯 해보이면 뭐든 가능하다. 실제로 세공사 업계에 있지만 스스로를 시계 장인으로 소개하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보석이 제일 흔하고 핑계대기에 편하니까. 서비스를 구매하는 측에서도 보석이라는 명칭을 편하게 여긴다. 암살을 의뢰하느라 몇 백만의 돈을 썼다는 것보다는 보석 따위의 사치품을 사느라 돈을 낭비했다는 편이 지탄을 덜 받는다.
지탄이라기보다, 전자는 범죄의 영역이고 후자는 도덕의 영역이다.
“그 영수증이 발각됐다는 소리가 대체 뭐지?”
“원래는 계약이 끝나면 의뢰인측이 파기해야 돼. 서비스와 재화가 오고 간 시점에서 이미 의미가 없어진 물건이니까. 서로를 위해서 없애는 편이 좋지. 굳이 발각될 리스크를 질 필요가 없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 계약에 대한 증거가 아직까지 남아있다면…….”
“누군지는 몰라도 신뢰를 저버렸군.”
“맞아. 아마 세공사에 대해 약점을 잡고 싶었겠지. 세공사는 자신이 암살을 의뢰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자기도 뭔가 상대를 위협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싶었을 거야.”
수를 쓴 것 치고는 멍청한 방법을 썼다고 생각하지만 의뢰인이 불안을 느꼈을 거라는 건 이해가 간다. 고객층이 고객층이니만큼 재산 기반, 정치 생명 같은 게 끝장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니까.
“세공사의 영수증을 가지고 있던 건 어떤 돈 많은 모나코인인데 정계로 나가려다가 들통이 났다나봐. 귀금속으로 몇 십만 유로씩 쓰면 수상하기는 하지.”
“증거도 지우지 않았고.”
“맞아.”
“그래서 이 부주의한 의뢰인 때문에 세공사들이 위험에 처했다, 뭐 그런 걸 말하고 싶은 건가?”
“신분을 수십 개씩 갈아치우는 당신이라도 긴장될 텐데?”
“전혀. 난 내가 뿌린 위험요소는 전부 회수했거든. 그리고 영수증을 발행해준 얼간이만 발등에 불이 떨어졌겠지. 다른 사람은 신경 쓸 거 없잖아.”
“그거 말인데……. 한 두 사람이 아니라서.”
마리야의 대답에는 벤체슬라스도 할 말을 잃었다.
“우량고객이셨군?”
“VVIP고객이셨지.”
“사람을 그렇게 많이 죽여 놓고 정계로 나가려고 했다고?”
“정치인들은 전쟁을 일으키잖아.”
“그래. 하지만 암살 의뢰는 흔한 일이 아니지.”
그러니까 그 의뢰인이라는 사람이 가지고 있던 게 세공사 한 사람만의 영수증이 아니었다는 거다. 발각된 계기는 어느 한 장이었겠지만 조사가 들어가면서 이전 암살의뢰에 대한 증거들이 하나둘씩 포착되기 시작한 것이다.
“협회에서도 긴장하고 있겠는데?”
“의뢰비 일부는 협회에서 지원하기도 한 거야. 당장 목숨이 위험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니까.”
“그런 것 치곤 150만은 너무 적지 않나?”
“분할해서 150만이야. 다른 사안까지 합하면 더 클걸.”
“그래서 그 150만짜리가 뭐에 대한건지 슬슬 들려줬으면 좋겠는데.”
“내부고발자가 있어.”
“그 내부고발자를 처리하면 150만을 주겠다?”
“한 번에 알아듣네.”
“증인도 증거도 없으면 수사가 더 진행되지 않을 테니까. 짐작하기 쉽지. 그런데 난 아직도 궁금한 게 있어. 정말 좋은 이야기를 들고 와줬는데, 마리야 이바노브나. 당신이 얻는 이득이 뭐지?”
단 한 번도 벤체슬라스의 시선을 피하지 않던 마리야 이바노브나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벤체슬라스는 추궁하듯이 그 시선 끝을 집요하게 따라갔다.
“일의 난이도는 둘째 치고 금액으로만 보자면 150만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야. 나한테도 그렇지만 당신에겐 더하겠지. 그런데 그걸 온전히 나한테 넘겨주고 당신은 얻는 이득이 뭐야? 이유가 있을 것 아니야?”
“당신이 말한 대로 난 의뢰비를 보상으로 걸고 당신을 고용하는 셈이야. 이유를 알려줄 필요가 있을까?”
“명확하지 않은 일은 나도 꺼려지거든.”
“그 큰돈을 앞에 두고서도?”
“그 큰돈을 앞에 두고서도.”
분위기가 날카로워졌다는 것을 보석들이 감지했다. 싸움이 날 것인가?
피전 블러드가 긴장된 눈으로 마리야를 흘끔 쳐다보자 마리야가 진정시키려는 듯이 피전 블러드의 허벅지에 손을 올려놓았다. 사파이어도 벤체슬라스 쪽을 확인했더니 벤체슬라스는 간단하게 고개를 저었다. 마리야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KGB에 몸담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졌으니까 거짓말 해봐야 소용없겠지.”
“현명하군.”
“내 신상이 걸려있어. 정확히는 그 의뢰인이 아니라, 내부고발자에게. 내부고발자가 좀 위험한 리스트를 가지고 있거든.”
“그러니까 의뢰라기보다는 당신 개인 사정으로 움직이는 건데? 왜 의뢰의 형식으로 처리하려고 하지?”
“그래야 돈을 지원받을 거 아니야.”
“날 사려고?”
“당신 사파이어는 유명하니까. 실력도 내 눈으로 봤고.”
“당신한테는 당신 보석이 있잖아.”
“완벽을 기하는 게 나빠?”
벤체슬라스는 자신이 쓸데없는 곳까지 파고 들어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유야 어쨌건 간에 사파이어가 지명된다는 것은 벤체슬라스의 명성이 높아짐을 의미하기도 한다. 경쟁자라고 할 수 있는 다른 세공사가 지명할정도이지 않은가. 자부심을 가질만한 대목이었다.
“당신이 거절한다면 또 다른 사람을 알아보지 뭐.”
“거절한다고 한 적은 없어. 좋아, 의뢰를 수락하기로 하지.”
벤체슬라스가 계약 수립을 위해 악수하려고 손을 내밀자 마리야가 그 손을 마주 잡으며 덧붙였다.
“당신 웃는 거 처음보네. 훨씬 낫잖아. 계약 맺을 때 말고 자주 좀 웃어봐.”
마리야와 피전 블러드는 돌아갔다. 집사는 응접실을 치웠고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를 세 번째 침실로 데리고 갔다.
3개의 침실 중 한 개는 벤체슬라스 본인이 쓰고 나머지 한 개는 집사에게 주었다. 세 번째 침실은 기타 용도로 놔두었는데 어차피 이 저택에 와서 묵고 갈 손님 같은 건 없기 때문에 용도 미정이라고 해도 어떤 식으로 쓰이게 될지는 처음부터 뻔한 일이었다.
포상의 시간이다.
고상하고 야만적인 시간이었다. 이전에는 둘만의 공간에 아무도 없었지만 지금은 집사인 슈테판 베르너 씨가 집 안을 돌아다니기 때문에 그가 소리를 듣지 못하도록 차단할 필요가 있었다. 사파이어가 마음껏 울부짖을 수 있도록, 억눌린 스트레스의 밑바닥까지 긁어내도록.
빌라 안 곳곳에 설치된 스피커에서는 바흐의 하프시코드 협주곡 5번 알레그로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부엌으로 가려던 슈테판은 노랫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을 듣고 정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음악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주인인 벤체슬라스 씨가 무언가 집중해서 하고 있는 일이 있다는 표시다. 그의 주인은 방해받는 것을 싫어한다. 다행스럽게도 슈테판의 취미는 원예였기 때문에 그가 주인의 작업이 끝날 때까지 지루하게 기다리지는 않을 것이다.
사파이어는 눈가리개를 하고 있었다. 방 안에는 음악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이 집에서 음악소리가 들리지 않지만 정작 사용할 때는 바깥에다 음악을 틀어놓는 방이 두 개가 있는데 하나가 이 곳이고 다른 하나는 고문실이다.
그러니 사파이어는 음악이라는 불경한 자극에서 벗어난 채, 또한 시각이라는 정보까지 차단되어 신경을 오로지 촉각에만 쏟고 있었다.
세공사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를 범하는데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다른 이에게 맡기는 일도 없었다. 이 작업의 의미와 가치를 안다면 대리인을 시킨다거나 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다른 이를 시켜서 먹이를 주기 시작하다보면 개는 그를 주인으로 모시게 된다. 먹이만큼은 내 손으로 줘야한다. 그것이 이 부와 풍족함을 이루게 한 사냥개에 대한 최소한의 의무다.
시각이 차단된 사파이어는 벤체슬라스의 손끝에 의지해 그가 안겨주는 자극 하나하나를 집중해서 느끼고 있었다. 상아로 조각한 것 같은 섬세한 손이지만 눈이 가려지고 난 후엔 모양이나 색깔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섬세하지만 단단하고, 지적인 권위가 있는 얇은 손가락은 자신이 내키는 대로 사파이어를 만지고 쓰다듬으며 자신이 만들어놓은 영역을 재확인한다. 하얀 손끝이 사파이어의 오래된 상처를 훑어 내려가고, 그 다음엔 입술이 닿는다.
이전에 겪은 고문의 흔적들에는 애정이 담긴 키스가 내려앉고, 아직 채찍 자국이라던가 갈퀴로 뜯긴 흔적이 없는 매끈한 부분에는 예술작품을 칭송하듯이 쓰다듬는 손길이 있다.
벤체슬라스도 종종 신음을 흘린다. 만족하는 소리, 한숨 같은 긴 소리, 기식음. 베갯머리에서 나직하게 속삭이는 음담패설이라던가 명령이나 질책, 다정한 위로 같은 것들…….
주인을 만족시킨다는 것은 사파이어에게도 즐거움을 안겨준다. 그것은 받는 입장에서의 즐거움이 아니라 주는 입장에서의 즐거움이다. 내가 그를 기쁘게 하다니. 내가 그에게 가치가 있다니.
내가 뭔가를 해낸 것이다. 내가. 그가 나에게서 얻어가거나, 나에게 무언가를 준 것이 아니고 내가 그에게 이 즐거움과 만족을 준 것이다. 평소에는 접하기 힘든 달성감이다.
향기라고 해봐야 비누향 정도 밖에 허용되지 않은 사파이어와 다르게 벤체슬라스는 평소에도 여러 종류의 향수를 쓰고 있다. 사업적인 이유에서든, 위장 목적이든 간에.
사파이어는 그 향기의 구성 성분을 특정하거나 분석할 수는 없지만, 매번 달라지는 향기 속에서도 그 밑바닥의 근본은 언제나 단단하게 벤체슬라스의 모습을 구성하고 있다. 이를테면 머스크향이라던가, 가죽의 냄새, 약간의 민트, 숲에서 느낄법한 냄새들…….
그 근본 위에 덧입힌 옷이라고 할 수 있는 다른 향기들은 매번 다르다. 꽃향기 같은 것도 매번 종류가 바뀐다. 그러나 벤체슬라스는 무절제하게 낭비하는 법이 없었고, 사파이어가 그의 품에 안길 때 즈음엔 압도되지 않을 만큼의 희미한 잔향만이 남아있었다.
그의 체취는 그 속에서도 분간할 수 있다. 제왕의 향기. 다스리는 자, 군림하는 자의 냄새. 그는 사파이어에게 완벽함을 요구하는 것만큼이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철두철미하게 관리한다.
그도 인간이라 인간적인 악취가 날 때도 있지만 그것이 5시간 이상을 넘어가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유리 같은 깨끗함. 비인간적이고, 용서가 없는. 그는 필요하면 오물을 뒤집어쓰기도 하지만 그 자신은 본래 어딘가 뒤틀린 깨끗함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사파이어의 공허함과는 결이 다른 깨끗함이었다. 그것은 마치 어딘가……. 손상된 듯한.
“집중해.”
벤체슬라스가 하반신을 쳐올리는 바람에 사파이어의 생각이 중간에서 뚝 끊겼다. 귀두 끝이 정확히 전립선을 짓뭉갰기 때문에 입 밖으로 커다란 탄식과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의 물건은 흉기에 가깝다. 사파이어가 인문학에 대한 약간의 지식이라도 있었다면 벤체슬라스의 골반에 달린 것을 “사티로스에게서 떼어와 붙였다.”고 표현할 것이다. 그 정도로 벤체슬라스의 성기는 크다.
그러나 사파이어는 고대 그리스의 문화와 예술도, 신화적인 상식도 몰랐기 때문에 그저 크다고만 생각했다. 가끔씩 위장을 하기 위해 벤체슬라스의 옷을 입다보면, 물론 기본 체격차이가 있지만 바지에서 그 차이를 더 느낀다.
벤체슬라스가 사파이어보다 다리가 더 길지만 바지통도 한쪽이 더 넓다. 아마도 그 커다란 물건을 수납하기 위함이겠지.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의 눈가리개를 풀어주고 그를 돌려 눕혀 자신을 보게 했다. 헐떡이며 울부짖기 시작한 그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자신의 것과는 다른 저 어두운 동공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이 남자의 멍한 정신에 동화되는 것 같다. 그에게는 고민도, 앞날에 대한 기대도 없겠지. 내가 만든 인형이다.
흉기를 품에 안는 배덕감. 사파이어의 몸은 단단하고 거칠다. 체구는 자신보다 작지만 뼈대는 투박하고 피부는 크고 작은 흉터와 굳은살로 덮여있다. 요새는 근육이 더 붙어서 상체가 조금 더 두꺼워지고 묵직해졌다.
짐승 같은 남자지만 내 품 안에서는 고분고분하다. 자신의 치부와 급소를 온전히 내맡긴 채 어떤 의심도 하지 않는 순종적인 노예. 이 남자의 머릿속에는 얼마만큼의 자아가 남아있을까. 이름을 잊고, 기억을 잊고, 자신이 누구였는지, 어디서 왔는지, 그런 것 따위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두터운 껍질이 덮여 있는 이 남자의 둔감함이 가끔은 부럽다. 벤체슬라스도 온전히 누리기만 하는 입장은 아니다. 노예의 노예가 된다는 것은 왕관의 무게를 짊어져야 하는 압박감과 정확히 똑같다.
그는 돈을 아끼기 위해서 사파이어에게 다른 욕구를 허용하지 않았고, 그 대신 자신의 몸으로 그의 봉사에 대한 대가를 지불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나의 몸이지만 내 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돈이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의 노예를 위한 남창이 되는 것이다.
숱하게 많은 사람을 죽인 킬러라도 살결은 따뜻하다. 만지면 부드럽고, 손 안에 잡히는 묵직한 촉감이 있다. 여자의 살결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어차피 인간과 인간이 살을 맞대는 것에 크게 차이는 없다.
남자가 남자와 몸을 섞는다는 것에 대해서도 거부감은 없다. 이 방 안에는 세상의 상식이 통용되지 않는다. 그들 둘만의 은밀하고 사적인 낙원이다. 노예와 주인이 존재하고, 주는 자와 받는 자가 존재할 뿐이다.
보상으로써의 섹스라는 것은 사파이어가 즐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완전히 풀어지는 것보다는 어느 정도 통제받는 것을 더 좋아한다. 그의 본성이다.
어디를 만져야 울고 어디를 자극해야 몸을 떨면서 좋아하는지 벤체슬라스의 손끝이 기억하고 있다. 질릴 정도로 사파이어를 안았기 때문에. 그의 몸 안에 대해서는 더 속속들이 알고 있다. 어디가 전립선인지, 어디를 어떻게 찔러줘야 헐떡이는지.
사랑한다는 거짓말을 속삭여주면 그는 한층 더 발정한다. 그 자신도 그게 진실이 아니라는 것은 어렴풋이 아는 것 같다. 섹스가 끝나고 난 후엔 사랑에 대해서 매달려오지 않으니까.
벤체슬라스가 사파이어를 이용하는 것만큼 사파이어도 벤체슬라스를 이용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본인은 그런 자각도 없을 테지만. 그 역시도 이기적인 본성이 있는 남자다. 주인의 손에서 먹이가 떨어지면 등을 돌릴 개처럼, 늑대의 유전자는 숨기지 못한다.
사파이어가 딱딱하기는 해도 몸의 탄력성은 확실히 감탄할만하다. 고양이 같은 유연성도 있고. 평소에는 조용한 그지만 침대에서는 응석을 부리며 있는 힘껏 조여오기 때문에 그의 내면에는 인간의 여린 부분이 들어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이만큼 쑤셔댔는데도 아직까지 늘어지지 않고 졸깃한 탄성을 유지하는 구멍에는 종종 벤체슬라스도 자제력을 잃곤 한다.
“아아……. 아응…….”
“아직 몇 번 따먹지도 않았어.”
사파이어의 눈이 벌써부터 풀어지려고 한다. 벤체슬라스는 그의 뺨을 가볍게 툭툭 쳐서 정신이 들게 했다. 억눌린 채 박히는 섹스지만 그의 다리는 벤체슬라스의 허리를 휘감고 있었다. 더 달라고 졸라대는 것처럼, 그의 달뜬 신음소리가 욕정을 자극했다.
벤체슬라스는 깊숙이 파묻은 성기를 힘 있게 박아 올리면서 사파이어의 유두를 빨아들였다. 느리게, 리듬 있게 골반만을 움직이던 추삽질이 어느 순간부터인가 쿵 쿵하고 일정한 박자로 힘을 담아 박히기 시작했다.
사파이어의 배 위에는 이미 세 번 정도 싸놓은 정액이 끈적하게 고여 있었다. 슬슬 묽어지기 시작한 정액과 쿠퍼액이 다시 발기하기 시작한 성기 끝으로 뚝 뚝 흘러내렸다.
열락을 이기지 못한 사파이어가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하자 벤체슬라스는 앞선 사정의 여운으로 빨갛게 달아오른 사파이어의 입술에 가볍게 입맞춤했다. 그리곤 촉촉하게 물기가 어려 다시금 쾌락에 풀어지기 시작한 그의 눈동자를 직시하며, 입을 벌리고 혀를 섞었다. 그의 말캉한 혀를 빨아들이고 입천장을 핥고 치열 하나 하나를 혀끝으로 더듬어가면서 그를 숨 막히게 범했다.
사파이어의 몸은 체모랄 것이 별로 없이 매끈하다. 몇 몇 군데는 강제로 제모하거나 시키기도 했지만 원래부터 그렇게 털이 많은 편은 아니었다.
얼마 전에는 벌을 준다고 음모를 강제로 뜯어버려서 지금은 사타구니도 털 없이 말끔하게 밀려 있었다. 털을 밀고 나서 더 민감하게 변한 것인지 가랑이를 만지고 주무를 때마다 몸이 파드득 떨리는 게 느껴졌다.
벤체슬라스의 하얀 손가락이 뜨거운 숨결로 벌어진 사파이어의 입술 사이를 파고 들어갔다. 섬세하고 아름다운 손이지만 뼈대는 강직하다. 손가락은 사파이어의 혀를 제멋대로 누르고, 턱을 벌리게 하고, 입술을 장난감이라도 되는 것 마냥 만지작거렸다.
아랫도리의 자극에 정신이 팔린 사파이어는 손가락이 주는 자극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양 쪽의 자극을 처리하지 못하고 애처로운 신음을 흘려댔다. 사파이어는 입 안을 침범한 손가락을 어느 샌가 진하게 핥아 올리고 있었다. 유혹적으로 빨면서 쾌감에 겨워 눈물 고인 눈으로 주인을 간절히 올려다보았다.
벤체슬라스는 그 솔직한 음란함과 의존성이 기특했다. 그는 사파이어의 배 안에 깊숙이 사정하며 속삭였다.
“너는 날 배신하지 않아. 절대로 배신하지 않아.”
“노골적이더라.”
마리야 이바노브나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되는데 내가 무슨 보석 도둑인 것 마냥 굴더라고. 눈앞에서 그렇게 영역표시를 해대고. 끌어안고 있고. 어린애한테서 곰 인형을 뺏는 것 같은 느낌이 들잖아. 정작 널 훔쳐가고 싶어 하는 건 그 쪽이었던 것 같은데 말이지?”
“난 저 사람이랑 계약 안 해요. 걱정 마요.”
“계약? 아냐. 그런 관계가 아냐. 그가 널 원하면 넌 납치될 거야. 인신매매 되는 거지.”
“사파이어도 그런 거예요?”
“모르지. 그럴 거야. 아마도.”
피전 블러드는 가발을 여러 개 두고 거울 앞에서 이것저것 써보고 있었다. 원래는 긴 머리였는데 임무 수행 중에 머리채를 잡혀서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긴 뒤로는 군인마냥 머리를 밤송이처럼 박박 깎았다.
킬러로 활동할 때는 어떨지 몰라도 이 상태로 길거리를 나돌아 다니면 확실하게 많은 사람의 이목을 끈다. 시비를 거는 사람도 종종 있었다. 동양인이라서 시비가 걸렸고, 여자라서 시비가 걸렸으며, 여자인데 머리는 또 왜 그렇게 짧냐는 시비들이었다.
마리야와 함께 다니면 레즈비언이라고 욕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대부분의 시비는 무시했지만 쫓아와서 물리적인 위해를 가하면 그 때는 가만두지 않았다. 마리야도 그걸 원하지 않았고.
시비를 건 상대방은 자기가 뭘 건드렸는지도 모른 채 몸의 어딘가가 부러지거나, 신체의 일부분을 잃어버리고는 미친놈마냥 남에게 함부로 시비 걸면 안 된다는 귀중한 인생 교훈을 얻었다.
시비 정도라면 어쨌든 용서할 수는 있다. 쫓아와서 싸움을 건다고 해도 두들겨 패주면 그만이다. 하지만 불특정다수의 시선이 집중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피전 블러드는 마침내 너무 어색하지 않으면서 적당히 활동성을 유지할 수 있는 단발머리 가발을 발견했다.
“그럼 이번 임무는 사파이어랑 같이 움직이게 되나요?”
“그럴 거야. 그럴 확률이 크지.”
“당신은요?”
“난 사실 별로 개입하고 싶지 않아. 만약에 움직인다고 해도 벤체슬라스랑 움직이게 될 걸. 그 쪽도 그걸 원할 테고. 가뜩이나 잠재 보석도둑 취급을 하는데 말이야.”
“그 사람은 원래 그렇게 경계심이 강한가요?”
“나보다는 네가 더 많이 접했을 거 아냐.”
“그래봐야 전투 상황이었는데요.”
“저 조각상 같은 얼굴에 속으면 안 돼. 악마야, 저건. 나도 이번 일 아니면 별로 접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선택권이 없으니까.”하고 마리야가 중얼거렸다. 피전 블러드는 마리야의 표정을 살피다가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이 끝나면 고향에 좀 다녀오고 싶은데요.”
“왜?”
“어머니가……. 건강이 안 좋으시데요. 수술해야 할지도 모르고.”
“그래, 알았어. 이번 일 끝나고 다녀와. 수술할지도 모른다고? 수술비는?”
“당신이 준 건 낭비하지 않고 모아두고 있었으니까요. 충분할거예요.”
“알았어. 고향이 어디라고 했지?”
“아이제나흐 근처예요. 시골이에요.”
다행히 마리야는 평소와 같이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나한테 거짓말만 하지 마.”
“거짓말 안 하는 거 알잖아요.”
“그냥 말해두는 거야. 들어둬. 거짓말만 안 하면 나는 웬만해선 다 들어주니까. 직업병이라고 생각해. 여태 뒤통수 맞은 게 너무 많아서.”
“알아요.”
“너랑 나는 계약 관계야. 알지? 이번 일 끝나고 네가 손을 완전히 떼고 싶다면 그냥 말만 해. 네가 입이 무겁다는 건 이전에 겪은 일들로 알고 있으니까. 널 추적하거나 죽이진 않을 거야. 비밀만 제대로 지킨다면 말이지. 하지만 감시는 가끔 할지도 몰라. 나도 살아야 하잖아?”
“귀에 못이 박히겠네요.”
“무덤까지 갖고 가라고.”
베를린에 자리 잡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번에는 슈투트가르트로 가야했다. 벤체슬라스는 저택을 집사에게 맡긴 채 차고에서 벤츠 S클래스 쿠페를 꺼냈다.
프랑스에서 벤츠를 걸레짝으로 만든 이후로 한 대 더 구입한 건데, 슈투트가르트에 벤츠 본사가 있는 만큼 프랑스에서보다는 눈에 덜 띌 거란 심산이었다. 마리야는 피전 블러드를 데리고 따로 움직이기로 했다.
이번 의뢰의 목표인 내부고발자는 페터 괴츠만이라는 이름의 남자다. 가명일 것이다. 이게 진짜 이름이라고 해도 지금은 신분을 위장하고 있을 확률이 높고.
나이는 40대에서 50대 사이. 모발은 갈색이 더 많이 섞인 더티 블론드에 안구의 색깔은 별 특징이 없는 연한 푸른 눈이라고 한다. 머리칼은 염색할 수 있다. 눈알은 갈아 끼울 수 없을 테니 안구로 식별해야 할 텐데 푸른 눈이 한둘인가?
아예 사진이 있다면 좋겠지만 목숨 걸고 내부고발을 하면서 그런 것을 남겨뒀을 리 없다. 특별히 눈에 띄는 흉터나 신체적인 사항에 대해서도 정보가 없다.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다.
그나마 목표를 식별할만한 습관이라면 오른손 검지로 왼손 팔등을 긁는 습관이 있다고 한다. 습관이라고 할 정도면 한두 번 그러는 것도 아니고 눈에 띌 정도로 자주 할 것이다. 지금으로썬 그를 식별할만한 게 이 정도 밖에 없다. 정보가 더 필요하다.
“차지키고 있어.”
슈투트가르트에 도착한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를 벤츠에 남겨두며 말했다. 벤체슬라스와 함께 차에서 내려선 사파이어는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한지 벤체슬라스를 빤히 쳐다보았다.
“정보상을 만나고 와야 하니까. 30분에서 1시간 정도 걸릴 거다.”
“알겠습니다.”
사파이어는 마침 주인의 손에 이끌려 절도 있는 걸음걸이로 눈앞을 지나가는 도베르만과 별반 차이가 없는 모습으로 차 옆에 딱 버티고 섰다. 벤체슬라스가 사라질 때까지 부동자세로 서 있던 사파이어는 그의 하얀 머리칼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경직되어 있던 어깨를 풀고 주변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타인의 감정에 둔감한 축복이 이럴 때 빛을 발했다. 시선, 시선들.
남에게 완전히 무관심한 사람부터 시작해서 동물원의 진귀한 짐승을 보듯이 호기심을 가지고 빤히 훑어보는 눈,
그들이 가진 동양인 스테레오타입보다 잘 생긴 외모에 관심을 보이는 눈,
매력적이고 신비한 존재를 부위별로 토막 내어 품평하는 것 같은 노골적인 욕정의 눈,
자신과 다른 생김새에 적의를 가지는 눈,
저 외국인 노동자가 우리 일자리를 빼앗으러 왔을 거라 생각하는 악의가 가득한 눈,
동양인치고는 덩치가 있어 보이지만 그래도 우습게 때려눕힐 수 있을 것 같다는 이상한 자신감에 찬 눈. 그 눈들.
몇몇 시선은 “나는 당신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표현했지만, 사파이어는 상대방의 미소에는 미소로 답해줘야 한다는 개념을 잘 몰랐기 때문에 금방 호의 어린 시선들도 잃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파이어는 사람들을 관찰했다. 자신을 훑어보는 시선까지 관찰했다. 그에게는 다른 사람의 행동양식이 탐구의 대상이었다.
자연스럽다는 게 뭘까? 저들은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타인의 관심을 끌지 않고 저 안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간다는 것은, 그러니까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평범하게 산다는 것은 대체 어떤 것일까?
사파이어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어떤 상황에 웃어야하고 어떻게 웃어야하는지, 어떤 상황에 어떤 감정표현을 해야 적절한지를 미리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에게는 그것이 항상 궁금했다. 부적절함과 부조리함은 항상 그의 몫이었기 때문에 그는 타인의 자연스러움이 언제나 흥미로웠다.
저들에게는 저것이 숨 쉬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것이다. 사파이어에게는 학습해야 하는 과제가.
사파이어의 무례함은 다른 사람의 악의와는 뭔가 달랐다. 그의 무례함은 의도하지 않은 것이다. 어딘가 어색한 것이었다.
외계인이 인간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동료 인간들이여, 반갑습니다. 저는 평범한 인간입니다.”라고 접촉을 시도하는 것 같달까. 나 역시 인간이라는 자각은 확실하게 있지만, 그는 항상 거리감을 느꼈다.
타인의 불행에 큰 유감을 표시해야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도 극히 최근 들어서 알게 됐다. 이를테면 타인의 죽음이나, 신체 절단이라던가, 시각이나 청각을 잃는 장애에 대해서 라던가…….
자신의 몸에 대한 거라면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 본능이니까. 내 몸에 닥치는 고통과 위해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피하려 들고, 막으려고 든다. 사파이어도 공포를 느낀다. 믿기지 않지만 가끔 재미를 느끼기도 하고.
하지만 그것이 타인과 연계됐을 경우에 그것은 세상에서 제일가는 수수께끼가 되었다.
사파이어에게 있어서 다른 사람의 존재는 혼란으로 가득한 것이었다. 그 안에는 흥미로운 부분도, 이해 못할 공포와 거부감을 안겨주는 부분도 있었고, 어떤 부분은 전혀 이해하지 못해서 미지의 영역으로만 남겨둬야 하는 것들도 있었다.
알료샤는 그 혼란의 극단에 서 있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사파이어는 그를 만날 때마다 두통을 느끼곤 했다. 그가 자신에게 악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사파이어 자신도 알료샤가 주는 자극에 어느 정도 흥미를 느끼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가만히 내버려두지만.
벤체슬라스는 이 모든 혼란을 한 번에 정리해주는 굳건한 반석이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혼란스럽지 않았다. 모든 것은 명확하고 단순했고 그 이상까지는 생각하지 않아도 됐다. 명령과 복종이 있고, 상과 벌이 있고, 지배와 피지배가 있을 뿐이다.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에게 설명할 수 없는 확신을 주었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우월한 누군가가 강한 의지를 가지고 운명을 개척해나가는 것에 순응하기만 하면 되는 안락함.
그에게 의존한다면 혼란과 자극으로 숨통을 짓누르던 세상도 몇 가지의 딱 맞아떨어지는 퍼즐 조각으로 바뀌어 사파이어의 심적 부담감을 없애주었다.
그렇기에 지금과 같은 수난도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있었다.
“니하오!”
가고일 석상처럼 표정 없는 얼굴로 정면을 직시하던 사파이어에게 누군가가 조롱을 가득 담아 외쳤다.
사파이어는 눈동자만 스륵 굴려 소리의 근원지를 찾았다. 사파이어보다 키가 큰 남자가 일행 두 명과 함께 키득거리며 사파이어 쪽을 보고 있었다. 일행 중 한 명은 보란 듯이 손가락으로 눈을 가늘게 찢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인종차별이다. 어떻게 대꾸해야하더라. 이토록 노골적인 시비는 오랜만이기 때문에 사파이어는 잠시 어떤 반응을 보여야할지 몰라 그대로 서 있었다.
사파이어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시선을 돌리기는커녕 자신들을 빤히 보고 있자 사파이어를 조롱하던 패거리들이 도리어 기분이 나빠졌는지 이쪽으로 성큼 다가왔다.
“뭘 그렇게 쳐다봐? 이 중국 놈아!”
“니가 기어 나왔던 하수구로 다시 돌아가!”
거리의 사람들이 이쪽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비난의 눈길이 절반, 판단하지 않는 눈길이 그 반의 반, 나머지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와 동조의 얼굴들이었다. 그들 중 누구 하나도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이 시비는 온전히 사파이어의 몫이었다.
그들이 코앞까지 다가왔지만 사파이어는 자리를 옮기지 않았다.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차 좋은데? 네 거냐? 원숭아.”
“훔치려고?”
그들은 위협적으로 굴었지만 벤츠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섣불리 긁었다가는 자신들의 가난한 인생으로 수리비도 내지 못할 것이라는 걸 잘 알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제 이 동양인 남자가 어떻게 나올 것인가 흥미진진한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꼼짝없이 당하고 말 것이다. 물론 저 남자도 체격이 제법 있지만 세 사람한테는 당하지 못할 것이다.
주먹질이 오갈까? 피를 보게 될까? 경찰에 신고해야하지 않을까? 아니, 그냥 가만히 있을까?
“이거 벙어리 아냐?”
“독일어 할 줄 모르냐? 응? 이 나라에 오려면 독일어를 배워야지!”
“물러서.”
잠시 생각하던 사파이어가 힘겹게 독일어로 한 마디를 떼자 야유의 의미가 확실한 감탄이 터져 나왔다.
“동물이 말도 하네!”
“발음이 너무 안 좋아서 못 알아들었는데 뭐라고?”
“물러서라고 했다.”
“뭐?”
너무 지나치다 싶었는지 드디어 지켜보던 시민들 사이에서 그들을 뜯어말리려는 사람들이 나왔다. 그러나 그들보다 한 발 먼저 누군가가 그 틈 사이로 파고들었다.
“내 차 앞에서 뭐하는 거야?”
딱 보기에도 비싼 수트에 비싼 구두, 명품으로 휘감은 남자다. 보기 드문 백금발의 머리칼은 관리가 잘 되어 있었고 얼굴 역시 돈을 들여 잘 가꾼 인상을 주는 남자였다.
키가 크고 호리호리하다는 인상이 있었지만 막상 눈앞에서 보니 웬걸, 수트 너머에 있는 근육질은 이 동양인 떡대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할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남자에게서 느끼는 위압감은 보기보다 큰 체구보다 목소리에서 나오는 지성과 교양의 흔적이었다. 그는 나무랄 데 없이 깔끔한 표준 독일어를 썼다. 아나운서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길에서 처음 보는 사람에게 함부로 시비 거는 유형의 인간들이 그렇지만 그들은 교육받은 사람에 대한 열등감과 동경, 약간의 공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남자의 등장이 불편했다.
벤츠의 주인이고 명품을 휘감은 부자인데다가 교육도 많이 받은 것 같다. 외국인이 독일어를 쓸 때 풍기는 묘한 위화감도 없으니 독일인이겠지. 외국인과 싸움을 하는 거라면 몰라도 자국인과 시비가 걸리는 것은 그들에게도 꺼림칙한 일이다.
그들은 시민권을 믿고 외국인이다 싶은 사람만 골라서 괴롭혔기 때문에, 번듯한 계층의 독일 시민에겐 어떻게 대해야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당황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고 그 부끄러움을 무마시키기 위해 해서는 안 될 짓을 했다.
“이건 또 뭐야. 원숭이랑 붙어먹는 게이야?”
“돈 좀 있다 이거냐? 호모 자식아!”
흔한 양아치라고 생각하고 그들을 무시하려던 벤체슬라스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사파이어가 숨을 들이키며 불안한 눈으로 벤체슬라스를 흘끔 쳐다봤다. 시비를 건 놈들은 그 미묘한 신호를 알아채야했다.
벤체슬라스는 품을 뒤져 지갑을 꺼내더니 그 안에서 지폐를 몇 장 꺼냈다. 그리고 지갑을 다시 품에 넣은 다음, 지폐를 놈들의 얼굴에 내던졌다.
멍하니 있다가 돈 세례를 맞은 놈들이 당황하며 얼떨결에 지폐를 잡았다가 얼굴을 확 붉히면서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힘만 믿고 주먹부터 내지르는 동작이었는데 엉성한 자세도 자세고 힘도 속도도 한심해서 벤체슬라스는 가볍게 주먹을 피했다. 그리고 제일 먼저 달려드는 놈의 정강이를 구둣발로 걷어찼다.
가볍게 찬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온 몸이 흉기인 청부업자다. 기본적으로 실리는 힘이 다르다. 정강이를 걷어차인 놈이 소리를 지르며 비틀거리고 균형을 잃자 벤체슬라스가 그 머리채를 잡고 고개를 비틀더니 주먹으로 눈을 때려버렸다.
안구가 파열되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 무심한 주먹질이었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너무 잔인하다는 소리가 터져 나오기도 전에 벤체슬라스는 놈의 목에다 주먹질을 가하고 머리채를 쥔 손을 풀었다.
눈과 목을 가격당한 놈이 바닥에 스르륵 쓰러졌다. 어디서 묻었는지 모르겠지만 벤체슬라스의 주먹에 피가 묻어있었다. 그가 끼고 있던 반지가 본의 아니게 너클 같은 효과를 낸 모양이다.
동료가 얻어맞고 쓰러지는 것을 본 나머지가 격분해서 달려들었다. 사파이어가 재빨리 한 놈을 끌어내 맞섰고, 벤체슬라스는 나머지 하나의 공격을 가뿐하게 피한 채 손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도발했다.
“멍청한 것들은 이래서 죽어야한다니까.”
“이 개새끼야!”
“돈 잘 주워두는 게 좋을 거다. 병원비로 쓰려면. 빌어먹고 살려면 그 정도 눈치는 있어야지, 거지새끼들아.”
분노로 빨갛게 달아오른 놈의 얼굴이 지나친 흥분으로 푸르죽죽하게 변했다. 놈은 이제 온 몸으로 돌진했다. 그러면서 벤체슬라스의 옷깃을 구겨 쥐었다.
표정 변화가 별로 없던 벤체슬라스가 돌연 강한 불쾌감을 내보이며 인상을 구겼다. 그러더니 믿기지 않는 악력으로 놈의 멱살을 잡아 바닥에 내다 꽂았다. 관절기로 나머지 한 놈을 막 제압하고 일어선 사파이어는 그 모습을 보면서 시간이 더 걸리겠구나 짐작했다.
벤체슬라스는 무시무시한 폭력성으로 놈을 걷어찼다. 집요하게 가랑이 사이를 걷어차서, 그를 지켜보던 군중이 탄식과 비난의 소리를 터뜨렸다. 고환을 얻어맞은 놈은 전기충격이라도 받은 듯이 몸을 움츠렸다가 두 세대 더 맞고는 아예 기절해버린 것 같았다.
벤체슬라스의 발길질에는 용서가 없었다. 그는 기어코 놈의 바짓가랑이가 무언가 알 수 없는 액체로 젖고 나서야 폭행을 그만뒀다. 오줌은 아니었다. 색깔이나 질감으로 봐서는 피, 아니면…….
놈은 생식능력을 영영 잃게 되었다.
벤체슬라스는 마지막으로 축구공을 걷어차듯이 놈의 기절한 머리를 걷어차고는 거기에 침을 뱉었다. 그런 다음 구겨진 옷을 단정하게 편 다음 소매 부분이 뜯어지지 않았는지 점검했다.
벤체슬라스는 이제 자신을 비난의 눈초리로 쏘아보는 군중을 마주 노려봐주었다. 벤체슬라스가 누군가를 지목하자 핸드폰을 꺼내 현장을 찍으려던 사람이 움찔 놀라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아무것도 안한 주제에 지금 와서 나를 비난하겠다고? 웃기지 마시지. 이런 일이 생기기 전에 누구라도 이놈들을 말렸으면 일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 거야. 할 말 있나?”
대답은 없었다. 벤체슬라스가 눈짓으로 명령하자 사파이어가 차에 올라탔다. 벤체슬라스는 수군거리는 소리들을 무시하고 차에 타 시동을 걸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다음부터는 묵인하지 마라.”
벤체슬라스는 조금 전까지의 격정이 거짓말이었다는 듯이 냉정한 상태로 되돌아왔다.
“넌 내가 만든 작품이야. 네 실력에 대한 비난도 용납하지 못하는데 인종 따위로 깎아내리려고 드는 꼴은 두고 볼 수가 없다. 내 얼굴에 먹칠하는 셈이지. 널 평가하고 다듬는 건 나야. 다른 놈들은 그럴 권한이 없어. 이런 시비는 나에 대한 모욕이라고 간주해라.”
“알겠습니다.”
“다친 데는 없나?”
“없습니다.”
“좋아.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흠집부터 나면 내 손해니까.”
그러나 냉정해 보이는 건 얼굴뿐인지 벤체슬라스는 음악을 틀었다. 차이코스프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의 알레그로 논 트로포가 흘러나왔다. 환희에 찬 것 같은 격정적인 피아노 선율이 그의 분노를 조금 누그러뜨리는 것 같았다.
사파이어와 같이 있을 땐 예술품이나 감정을 자극할만한 매체에 노출시키는 법이 없는데 어지간히 평정을 잃었던 모양이다. 양아치가 구겨 쥐었던 수트가 생각보다 비싼 것이었기 때문인지도.
잠시 음악을 감상하던 벤체슬라스가 소리를 낮추고 입을 열었다.
“마리야 이바노브나와 연락을 취했다. 이번 임무에선 피전 블러드와 같이 행동하게 될 거다.”
“파트너입니까?”
“그래. 일시적인 협력 관계지. 위장도 필요해. 군중 속에서 암살할 가능성도 있다. 도심에서는 저격하는 편이 나으니까 네가 미끼 역할을 할 가능성도 있어.”
“어느 쪽을 우선시합니까?”
“목표 달성. 그리고 너의 생환. 피전 블러드는 마리야 쪽이 책임질 거다. 그렇지만 호의를 베풀어서 나쁠 거 없겠지. 가능하다면 피전 블러드도 보호해라.”
“알겠습니다.”
“뒤통수 칠 것 같으면 제거해.”
벤체슬라스가 슈투트가르트 미술관 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아깝지만 어쩔 수 없지.”하고 중얼거렸다.
오만하고 도도한 성격이었지만 예상외로 그는 인종차별을 하지 않았다. 그런 것은 돈이라는 절대적 가치에 비하면 하찮은 기준일 뿐이다. 백인종이라고 해서 내 사업에 이득이 되는가? 나에게 손해를 끼치면 인종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가 된다.
반대로 나한테 득이 된다면, 누가 인종 같은 것에 신경을 쓰겠는가? 성별을 나누는 것만큼이나 바보짓이다. 인종, 성별, 나이, 생김새, 모두 쓸데없는 기준이다. 나에게 돈을 벌어다주고 내가 이용해먹을 수 있다면 그는 누구든 간에 두 팔 벌려 환영했다.
저번에 맞붙은 스피넬이라는 녀석은 훌륭한 보석의 자질이 보였지만 갈고 닦아야 하는 과정이 많아 보였고 피전 블러드는……. 글쎄, 어쨌든 저격 실력이 대단하지 않은가. 저격에 있어서는 사파이어조차도 한 수 접어야 할 것이다.
사파이어보다 근접전 능력이 떨어질지 몰라도 저격 암살 업무에 특화된 킬러로 굴린다면 상당한 수익을 안겨줄 것 같은 인물이다. 마리야에게서 뺏어올 수 있다면 말이지. 그저 가능성일 뿐이었지만 정말이지 탐나는 실력이었다.
물론 유용한 도구는 내 손에 있어야 가치가 있다. 남의 손에 들린 명검이라고 해봐야 나를 죽일 흉기일 뿐이다. 그럴 바엔 부숴버리는 게 낫지.
사파이어는 벤체슬라스가 말한 것들을 표면적인 의미 이상으로 확대해서 해석하지는 않았다. 그러기엔 사파이어의 사고회로가 너무 둔하다. 그가 하는 거라곤 앞으로 있을 임무에 대해 벤체슬라스가 준 정보들을 조합해보면서 막연하게 상상하는 것뿐이었다.
현실적이고 군더더기 없는 상상이었다. 발각되었을 때 어떻게 도망칠 것인가, 도시의 지형지물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피전 블러드와는 몇 번 몸을 맞대고 싸운 적이 있으니 신체적인 부분이나 전투 습관에 대해서는 대충 파악하고 있다,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 또 제거해야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당장 내일 아침 벤체슬라스가 피전 블러드를 납치해 와서 사파이어와 함께 사육하겠다고 선언해도 사파이어는 어떤 충격도 받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를 둘러싼 주변 환경에 “동거인이 늘어났다.”하고 한 줄 추가될 뿐인 무미건조한 변화일 테니까.
그러나 벤체슬라스가 새로운 보석을 더 총애하기 시작한다면 어떨까? 글쎄, 거기까지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사파이어는 질투하게 될까? 무엇에 대해서?
방금 아주 일반인처럼 생각했다. 적어도 사파이어가 느끼기로는 그랬다. 사파이어가 원래부터 필요한 말 외에는 말을 잘 하지 않고 침착하고 조용한 성격이라는 건 알지만 평소보다 더 조용한 것 같아서 벤체슬라스는 운전대를 잡은 채 옆 좌석을 흘끗 돌아보았다.
사파이어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위화감이 느껴졌다. 그게 뭘까. 변화를 민감하게 알아채는 벤체슬라스라고 해도 5도 정도만 올라간 입 꼬리는 분간할 수 없었다. 사파이어의 입가에 걸린 것은 미소라고도 변화라고도 할 수 없는 미묘한 무언가였다.
다음날 오후 4시경. 슈투트가르트의 중심가 거리인 쾨니히슈트라세에 턱시도를 차려입은 두 남자가 나타났다.
평소에도 엄격한 드레스 코드를 지키는 벤체슬라스는 별 위화감이 없는 모습이었지만 사파이어는 어쩐지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해보였다. 어색해 보인다는 것은 남의 평가일지도 모르고, 정작 사파이어의 눈은 평소처럼 착 가라앉아 있었다.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의 옷깃을 제대로 펴주며 어디서 묻었는지 모를 하얀 실밥을 떼어주었다. 그리곤 재차 확인했다.
“이름은?”
“크리스티안 장입니다.”
“신분은?”
“중국인 부호입니다.”
“상세한 내용을 말해봐.”
“국적은 중국이지만 미국에서 자랐습니다. 영어를 사용하고 독일어는 할 줄 모릅니다. 독일에는 사업과 투자 목적으로 왔습니다.”
“좋아. 제대로 숙지했군.”
그들이 마지막으로 세부사항을 점검하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마리야와 피전 블러드가 나타났다.
마리야는 연한 푸른색의 새틴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피전 블러드는 아이보리색 이브닝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곱게 올림머리를 하고 있는 것을 보니 가발을 쓴 모양이다. 평소에는 화장을 전혀 하지 않다가 지금은 진한 화장을 하고 있어서 화장을 지우고 난 다음엔 인상착의를 구분하는데 혼란이 올 것 같았다.
“편리하군.”
벤체슬라스의 감상은 짧지만 칭찬이 들어있었다. 저건 여자만이 가능한 위장이다. 사파이어에게는 불가능하다. 저런 사소한 차이점도 있군.
정작 피전 블러드 본인은 무거운 화장이 익숙하지 않은지 불편한 표정이었다. 둘이 다가오자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를 피전 블러드 쪽으로 밀고는 마리야에게 팔을 굽혀 내밀었다. 마리야가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며 밀착하더니 벤체슬라스에게 속삭였다.
“굳이 오늘 해야겠어?”
“괜찮은 기회잖아. 빨리 처리할수록 당신에겐 이득 아닌가?”
“당신이랑 다르게 난 일을 크게 저지른 다음에 돈 들여서 정리하지 않는다고. 원래부터 심하게 어지르지 않는단 말이야.”
“프랑스에서 그 난리를 쳐놓고 잘도 그런 소릴 하시는군.”
피전 블러드는 기본 교양은커녕 일반 상식도 없는 사파이어에게 팔짱을 껴야 좀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고 귀띔해주었다. 사파이어는 얼른 벤체슬라스를 보고 모방했다. 피전 블러드가 사파이어의 팔을 가볍게 잡고는 말했다.
“이번에는 적이 아니라 동료네, 사파이어.”
“그렇군.”
“당신과 나는 부부라는 설정이야.”
“알고 있어.”
“젠장, 갑갑해……. 화장 지우고 싶어. 하이힐도 벗고 싶어.”
화장에 대해선 잘 몰라도 하이힐의 불편함은 사파이어도 공감할 수 있는 주제다. 지금과는 상황이 많이 다르긴 했지만.
“난 독일어가 모국어니까 대화는 내가 이끌어갈 거야. 당신은 자신 없으면 가만히 있으면 돼.”
“알고 있다.”
두 쌍의 커플은 남들에게 들리지 않을만한 소리로 대화를 주고받으며 파티가 열리는 장소로 향했다.
기부금 조달을 목적으로 한 자선파티였다. 오늘 밤의 목표는 내부고발자의 뒤를 봐주고 있는 유력자로, 그가 죽어야 내부고발자가 숨어있는 굴에서 튀어나올 것이다. 혹은 그를 찾아낼만한 어떤 단서를 얻을지도 모르지. 부딪쳐봐야 안다.
네 명의 사신이 파티장 안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자선사업 파티를 하기엔 조금 뜬금없는 장소일지도 모른다. 쾨니히슈트라세는 돈 많은 부자들의 고상하고 기품 있는 사유지와는 거리가 먼 번화가였다.
쇼핑센터와 음식점이 있고 관광객과 거리 공연을 하는 예술가들이 있다. 카페테리아의 테이블이 거리로 나와 있고 시끄러운 활기가 가득한 거리다. 보안에 있어서는 취약하다고 할 수 있다.
파티 주최자인 요한 자이델이 돈 많은 상류층만을 위한 시간이 아니라 좀 더 많은 사람에게 교류의 기회를 열어두고 싶다고 했던가. 그런 것 치고는 호텔 하나를 통째로 전세내서 초대받은 사람 이외에는 들어오지 못하게 한 게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지만.
보여주기 식으로 친근함을 가장하는 것이다. 적어도 일반인들은 존재하는지도 모를 곳에서 상상도 못할 방법으로 사치와 유흥을 즐기는 건 아니니까.
“왼쪽에 경호원 둘.”
피전 블러드가 속삭이자 사파이어가 눈길을 슬쩍 돌려 왼편을 확인했다. 눈에 띄는 검은 양복이 아니라 다른 손님과 마찬가지로 적당히 품위 있어 보이는 복장을 한 두 남자가 파티장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체크하고 있었다.
손님들에게 위압감을 주지 않으려 했다 해도 귀에는 이어폰을 끼고 있어서 조금만 자세히 보면 경호원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습관적으로 옷을 누르고 있었는데 아마 안에 총이 들어있는 것 같았다.
“오른쪽에는 셋이군.”
“무시해. 너무 눈길 주지 말고. 대화는 내가 할 테니까.”
그들은 문 앞에서 가로막혔다. “초대장을 보여주시겠습니까.”하는 안내인의 말에 피전 블러드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초대장을 건네주었다.
초대장을 살펴보고 피전 블러드와 사파이어의 얼굴을 확인한 안내인이 파티에 초대된 손님이라는 것을 확인하자 사교적인 미소를 지으며 “좋은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하고 안으로 들여보냈다.
자, 이제 본격적인 시작이다.
잘 차려입은 부자들이 삼삼오오 모여서서 칵테일 잔을 들고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고, 테이블 위의 핑거 푸드를 채워 넣어야하는 직원들은 손님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그러나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한 쪽에서는 현악기를 연주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목표는 어디에 있을까. 사파이어가 사람들의 얼굴을 재빠르게 훑으며 표적을 찾는데 누군가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실례합니다. 혹시 성함이?”
40대쯤 되어 보이는 남자였다. 쾌활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고 두 눈에는 친근한 사교성이 담겨 있었다.
이런 파티에 흔히 있는 인물이었다. 인맥으로 인맥을 늘려나가고 그것을 기반으로 자신의 사업이든 재산이든 불리는 사람. 이들에게 사교 파티는 기회의 장이고 전쟁터였다. 이들은 새로운 사람을 보면 접근하지 않고는 버틸 수 없는 유형의 사람이었다. 그 상대가 누구건 간에, 일단 내가 파악해두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표적을 찾느라 정신이 팔려있던 사파이어가 눈동자만 굴려 눈앞의 남자를 빤히 쳐다보자 남자의 얼굴이 약간 경직됐다. 그 짧은 사이에 남자는 사파이어의 눈에서 무언가 안 좋은 것을 읽어냈다. 피전 블러드가 사파이어의 팔을 꽈악 조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남편은 독일어를 할 줄 몰라서요.”
“아, 아! 그러시군요! 실례했습니다.”
“저는 나딘 장이라고 합니다. 남편은 크리스티안이구요.”
“만나 뵈어 반갑습니다, 부인! 독일어가 아주 유창하시군요?”
“저는 독일인이니까요.”
피전 블러드의 대답에 남자가 잠시 당황했다. 방금 전 그의 태도는 아주 미묘해서 인종차별로 보일수도 있었다. 동양인이면 당연히 외국인일 것이다, 독일어를 따로 배운 사람치고는 잘한다, 그런 선입견들……. 남자는 자신의 평판에 흠이 가지 않도록 재빨리 화제를 바꾸었다.
“슈투트가르트에서는 처음 뵙는 것 같군요.”
“우리는 포츠담에 살고 있으니까요. 슈투트가르트에는 남편 사업차 왔답니다.”
“그러시군요. 남편 분께서는 그러면 외국 분……이신가요?”
“네. 미국에서 오래 살다가 이번에 독일로 이주했어요.”
남자는 눈앞의 커플을 재빨리 분석했다.
둘 다 동양인이고 한 쪽은 외국인, 한 쪽은 독일인이다. 장이라는 성씨로 봐서 중국계일 것이다. 그 이상은 알 수 없고. 포츠담에 살고 있다니 돈 깨나 있는 모양이다. 여기에 초대될 정도면 이미 어느 정도 재산이 있다는 소리고. 사업차 왔다는 걸로 봐서 물주일 것 같은데…….
알아둬서 나쁠 것 같지는 않다. 나중에 이들, 정확히는 이들의 돈을 어떻게 이용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순식간에 결론을 낸 남자가 거슬리지 않게 싱긋 웃으면서 “대화 즐거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다른 사람들을 만나야해서…….”하고 자리를 피했다.
남자가 사라지자 피전 블러드가 계속 웃는 낯을 유지하면서 사파이어에게 속삭였다.
“의심하잖아.”
“대화는 맡겨두라고 하지 않았던가.”
“웃으란 말이야. 평범하게.”
“어떻게 웃지?”
피전 블러드는 설마 하는 심정으로 사파이어를 돌아보았다. 사파이어의 얼굴은 심각했다. 그는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피전 블러드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한 번 웃어봐.” 했다가 사파이어의 미소를 보고는 바로 만류했다.
“됐어. 가만히 있어.”
“왜?”
“더 이상해보여. 당신은 그냥 긴장해서 얼굴이 굳어있는 걸로 해둘게.”
그러나 피전 블러드는 조금 전 자신이 본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어서 다시 물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웃어본 적이 없는 거야?”
“몰라.”
그들에게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뒤편에서 마리야와 벤체슬라스는 최대한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않으며 파티장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두 보석이 위기를 모면하는 모습을 보고 마리야가 벤체슬라스에게 말했다.
“심하네.”
“동감이야.”
“저 남자는 대체 어디서 주워온 거야?”
“위장 임무 때 발각되기 쉽겠는걸. 연기를 좀 더 잘해야겠어.”
“아니 내 말은, 당신 나이를 생각하면 저 남자를 어디서 데려와서 키운 것도 아니고……. 저 남자도 원래 생활이 있었을 거 아니야? 망가진 거야?”
“남의 보석에 관심이 많군, 마리야 이바노브나.”
“당신이야말로 내 피전 블러드에게서 관심 끄시지. 루비는 사파이어보다 비싼 보석이야. 피전 블러드는 그 중에서도 최상급품이라고.”
“잘 알고 있어.”
파티 주최자이자 표적인 요한 자이델이 나타났다. 다행히도 내부고발자와 다르게 요한 자이델의 인상착의는 사진으로 남겨져 있어서 한 눈에 식별할 수 있었다.
표적이 나타나자 보석과 세공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리로 쏠렸다. 피전 블러드가 뒤 쪽으로 고개를 돌려 마리야에게 눈빛으로 신호를 보냈지만 마리야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요한의 주위에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위장하고 있지만 경호원도 둘이나 붙어 있었고 그와 친분을 쌓으려고 접근하는 사람들이 넷, 다섯, 아니 그 이상이 모여 있었다.
사파이어 역시 어떻게 행동해야할지 가늠이 되지 않아 벤체슬라스를 돌아보며 그에게 판단을 맡겼다. 벤체슬라스가 따라오라는 듯이 눈짓하자 사파이어가 피전 블러드의 손을 놓고 그의 뒤를 따랐다.
벤체슬라스는 인적이 뜸한 휴게실로 가더니 누가 보고 있는지 확인한 후 품 안에서 얼음송곳 두 자루를 꺼내 사파이어에게 건넸다. 이 호텔에서 쓰고 있는 비품과 같은 브랜드였다. 나중에 현장에서 흉기가 발견되더라도 외부인의 소행이라곤 짐작하기 어려울 것이다.
“지금은 안 돼.”
벤체슬라스가 경고했다.
“요한의 시신은 최대한 늦게 발견돼야 한다. 목격자가 생기지 않도록 해. 은폐하는 것도 잊지 말고.”
“혈흔은 어떻게 할까요.”
“가능하면 만들지 마. 생기면 가리도록 하고.”
“내부고발자에 대한 정보는 어떻게 합니까?”
“그건 마리야와 내가 찾아본다. 너희는 요한을 제거하면 바로 탈출해.”
“알겠습니다.”
그리고 벤체슬라스는 덧붙였다.
“웃는 게 아주 형편없더군. 연습을 더 해야겠어.”
“죄송합니다.”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의 고개를 잡고 끌어당겨 가볍게 입맞춤했다. 예상치 못한 접촉에 사파이어의 눈이 크게 떠졌다.
“상 받고 싶으면 더 열심히 해.”
벤체슬라스는 격려하듯이 사파이어의 뺨을 툭툭 두들기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중요한 일을 시키기 전에 간식을 미리 주는 셈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사파이어는 고요한 수면에 파문이 인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무슨 일 있었어?”
“아무것도.”
다시 파티장 안으로 돌아오자 피전 블러드가 물었다. 피전 블러드는 요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지만 사파이어의 변화는 충분히 알아챘다.
사람들 상대를 하던 요한은 기존 인맥관리가 어느 정도 끝났는지 잘 모르거나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다가 사파이어와 피전 블러드의 앞에까지 왔다. 요한은 그들을 못 알아보는 눈치였지만 일단은 주최자의 의무를 다해 친근하게 인사했다.
“즐거운 시간 보내고 계신지요? 실례지만 성함이?”
“크리스티안 장입니다.”
“나딘이에요.”
“장……. 장……. 아! 반갑습니다!”
그래, 분명히 명단에 그런 이름이 있었다. 투자할 곳을 찾는 중국인 부자라고. 요한이 돈을 줘야 되는 관계가 아니라 돈을 받는 쪽이다. 요한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웃음을 지었다.
요한이 악수하려고 내미는 손을 사파이어가 굳게 잡고 흔들어주자 순간 요한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사업가라고 하기엔 손이 지나치게 거칠다. 못박인 손의 거친 촉감은 썩 유쾌하지 못하다. 거기다가 악력이 마치…….
“남편은 독일에 온 지 얼마 안 되서 독일어를 잘 못한답니다.”
피전 블러드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사파이어가 악수하던 손을 놓자 요한은 악몽에서 깨어난 것 같았다. 요한은 본능적으로 안 좋은 느낌이 들었지만 자신의 착각이겠거니 했다. 확인 차 눈앞의 남자를 다시 보자 남자는 환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저 미소를 의심할 수 있단 말인가? 요한의 표정이 다시 풀어졌다.
“아, 그러시군요. 말씀은 들었습니다. 미국에서 오셨다구요? 그럼 영어로 대화하도록 할까요.”
요한이 영어로 말을 해오자 피전 블러드는 크게 당황했다. 독일 억양이 강하게 남아있지만 그의 영어는 나무랄 데 없이 유창했다.
사파이어가 독일어를 잘 못한다는 명목으로 자신이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끌어가려고 했는데, 언어가 장벽이 되지 못하는 이상 이제는 사파이어의 연기에 맡겨야 했다. 피전 블러드는 불안한 눈으로 사파이어의 표정을 살폈다.
사파이어의 얼굴에는 아까 전의 기괴하게 비틀린 미소와는 다르게 지금은 사람 좋아 보이는 선량한 미소가 걸려 있다. 내심 놀랐다. 저런 웃음을 지을 수 있으면서 아까는 도대체 왜?
“이런 날에 사업 얘기를 하는 건 적절하지 못하겠지만, 자이델 씨……. 저희는 일정이 조금 바쁩니다. 괜찮으시다면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를 나눠도 될지……?”
“그럼요. 그럼요. 귀하신 분들인데 제가 배려가 없었습니다. 자리를 옮기도록 할까요?”
사파이어는 너무도 쉽게 요한을 속여 넘겼다. 피전 블러드는 사파이어라는 남자에 대해 의아함을 느끼며 두 사람의 뒤를 따라갔다. 보석들이 표적과 함께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마리야가 어느 샌가 돌아온 벤체슬라스에게 물었다.
“무슨 짓을 한 거야?”
“약간의 마법이라고 할까.”
벤체슬라스는 의미심장하게 검지로 입술을 톡톡 두들겼지만 마리야는 그 은유를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가늘게 뜨며 의심스러운 듯이 벤체슬라스를 노려보았다. 벤체슬라스가 입가심이라도 하려는 것인지 테이블 위에 놓인 샴페인 글라스를 집어 들어 술을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형편없군. 자선 파티라면서 이따위 쓰레기를 내놓다니. 아주 속물이야.”
벤체슬라스는 딱 한 모금 마셨을 뿐인 샴페인을 다시 내려놓고 마리야에게 말했다.
“이제 우리도 움직이도록 하지. 시간이 없으니까.”
요한 자이델의 경호원들은 주인의 뒤를 따르는 동양인 부부를 무례할 정도로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제 할 일을 하고 있는 것이지만…….
“저 분들은 누구죠? 시선이 너무 부담스럽네요.”
피전 블러드의 말에 요한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경호원들에게 물러나라고 손짓했다.
“죄송합니다, 부인. 제 경호원들인데 배려가 없었네요. 하지만 그들은 자기 일을 하고 있었던 것뿐이니까요. 일부러 무례하게 굴려던 건 아니었을 겁니다.”
“그렇군요.”
“그렇지만 기분이 나쁘셨다면 사과드립니다.”
피전 블러드는 요한의 대답에 싱긋 웃어주었다. 감시 카메라 수준으로 요한을 따라다니던 시선 몇 개가 사라지고 나머지 경호원들은 조금 전보다는 덜 노골적으로 그들을 흘끔흘끔 보면서 수상한 기색이 있나 지켜보고 있었다.
요한은 둘을 작은 객실로 안내했다. 연회장과 호텔의 몇 층만 전세 냈을 뿐 다른 부분은 일반 숙박객들이 묵고 있었기 때문에 복도 저 너머로 이쪽을 힐끔거리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돈이 오갈 얘기가 많기 때문에 객실을 몇 개 빌려두었다. 숙박 용도는 아니고 분리된 공간이 필요해서다.
요한과 동양인 부부가 방 안으로 들어서자 경호원 둘이 따라 들어오려고 했지만 요한이 문 앞에서 제지했다. 그리곤 중요한 얘기가 오갈 테니 문 앞을 지키고 있으라고 해두었다. 경호원들은 두 손을 모아 옷자락 안쪽의 총을 지그시 누르며 문 앞을 지키고 섰다.
사파이어는 애써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던지고 재빨리 방 안의 구조를 파악했다.
일반 객실이다. 작은 창문이 있고, 높이는 2~3층 가량밖에 되지 않는 저층이다. 벽지는 차분한 녹색이고 바닥은 따뜻한 느낌의 재색 카펫이 깔려 있다. 물을 조금 흘리는 정도야 가려서 보이지 않을 테지만 핏자국은 확실히 눈에 띌 것이다.
어디서 처리할 것인가? 화장실 문이 보였다. 슬쩍 안쪽을 보니 칸막이 쳐진 욕조가 보였다. 숨기기 괜찮아 보인다. 물을 틀어놓으면 피도 어느 정도 해결될 거고. 자 그럼……. 어떻게 유인한다…….
요한이 경호원들에게 무어라고 말하고 있는 동안 사파이어는 재빨리 피전 블러드를 끌어당겨서 품 안에 숨기고 있던 얼음송곳 하나를 꺼내 건넸다.
“유인해야 돼.”
“어디로?”
“욕실.”
“알았어.”
피전 블러드는 송곳을 치마 안쪽에 숨기더니 갑자기 호들갑을 떨었다.
“자이델 씨! 잠깐만 이리로 와주실래요? 큰일 났어요!”
“무슨 일입니까?”
“잠깐만 이리로 와주세요!”
피전 블러드는 상세한 내용을 말하지 않고 그저 다급한 소리만 냈다. 요한은 문을 닫고는 급히 소리가 나는 곳으로 갔다.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끼기엔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다. 요한이 화장실 가까이 다가오자 피전 블러드가 요한의 손을 덥썩 잡더니 안으로 쑥 끌어당겼다.
“아니…….”
“이것 좀 보세요!”
요한은 당황했지만 여자의 손을 곧바로 뿌리치지는 않았다. 상대방의 행동이 당혹스럽긴 했지만 여성의 손을 함부로 뿌리치는 것은 무례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무엇보다 완력으로 치자면 이 여자는 나보다 훨씬 약할 것이 아닌가?
사파이어가 똑같은 행동을 했다면 곧바로 경계했을 테지만 피전 블러드 상대로는 그런 것이 덜했다. 요한은 칸막이가 젖혀진 욕조 안 쪽으로 떠밀렸다.
“아니 도대체 왜 이러는 겁니까? 뭐가 있다고요?”
그 순간 갑자기 그의 등 뒤에서 턱시도를 입은 두꺼운 팔뚝이 튀어나와 그의 목을 단단히 졸랐다. 사파이어가 요한의 목을 팔뚝으로 졸라 소리를 내지 못하게 막으면서 “찔러.”하고 낮게 말했다.
피전 블러드는 치마 아래 숨겼던 송곳을 꺼내서 요한의 급소를 푹푹 찌르기 시작했다. 요한이 꺽꺽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비명을 질렀지만 목을 너무 단단히 조르고 있어서 소리는 크게 튀어나오지 못했다. 피전 블러드의 아이보리색 드레스에 핏방울이 튀기 시작했다.
“증거가 남고 있어.”
“가만있어. 죽이는 게 우선이야.”
몇 번의 난도질 끝에 요한 자이델은 죽었다. 사파이어는 요한의 시신을 욕조 안으로 완전히 밀어 넣고 샤워기를 틀었다. 요한의 핏물이 배수구 구멍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사파이어는 피전 블러드의 상태를 확인했다. 피가 많이 튀지 않게 주의해서 찔렀음에도 핏방울은 치맛단에 선명하게 튀어있었다.
“위장할 수 있겠나?”
“생리라고도 변명 못하겠는데.”
사파이어는 주변을 슥 둘러보곤 커다란 수건을 찾아내 피전 블러드의 허리에 감아주었다.
“가려.”
“이걸로 어떻게……. 아.”
“이거라면 위장할 수 있겠지.”
“흉기는 어떻게 하지?”
“욕조에 둬. 지문이 씻겨 내려갈 거야.”
피전 블러드가 자이델의 옷자락으로 송곳의 손잡이 부분을 닦고 쏟아지는 물줄기 아래에 버리는 동안 사파이어는 객실로 나가 탈출로를 찾아봤다.
자신은 창문으로 탈출할 수 있지만 피전 블러드는 불가능할 것 같다. 그렇지 않아도 드레스에 하이힐 차림이니. 문 밖으로 나가야하는데 적당한 핑계거리가 뭐가 있을까. 사파이어가 궁리하는 동안 피전 블러드가 나왔다.
“내 허리 잡고 있어. 나한테 맡기고.”
문 앞을 지키고 서 있던 경호원들은 문이 열리자 반사적으로 객실 안쪽을 돌아봤다. 그러나 방 안을 자세히 보기도 전에 허리에 수건을 감은 동양인 여자와 그 남편이 바깥으로 나왔다. 여자는 얼굴을 붉힌 채 경호원들에게 말했다.
“다친 거 아니에요! 다친 게 아니고……. 갈아입을 옷 같은 게 있을까요?”
무슨 상황이기에 허리에 수건을 감고 있고 갈아입을 옷을 찾는단 말인가? 경호원들이 얼른 상황파악을 하지 못하자 여자가 더더욱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들을 힐난했다.
“이걸 꼭 내 입으로 말해야겠어요? 그게 흘렀단 말이에요!”
그제야 경호원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했다. 그들은 여자가 처한 당황스러운 상황에 동조해 똑같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여자의 아이보리색 드레스로 봐서 핏자국은 눈에 잘 띌 것이다. 상류층 여성도 이런 실수를 하는군. 하지만 여성의 문제에 대해선 그들은 입을 다물고 있는 수밖에 없다. 그들이 우왕좌왕 하는 동안 여자의 남편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우리는 잠깐 자리를 비울 테니까 방 안에는 들어가지 마십시오. 자이델 씨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잠깐 자리를 비운다니…….”
“옷을 갈아입어야 하니까.”
“아, 예……. 알겠습니다.”
경호원들은 동양인 부부가 사라지는 것을 멍청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경호원들은 품위 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키득거렸다.
사파이어와 피전 블러드는 경호원들의 시선을 피해 한산한 곳으로 갔다. 핑계를 잘 대고 빠져나오긴 했지만 이다음이 문제다. 수건을 감고 다니는 드레스 차림의 여자는 확실히 눈에 띈다.
벤체슬라스는 일을 처리한 후 탈출하라고 했지만 이대로 거리에 나갔다가는 사방팔방 목격자를 만들 것이 뻔하다.
“세탁실에 가면 옷 한 벌쯤 찾아 입을 수 있지 않을까?”
“목격자가 더 생길거야.”
그들이 탈출 방법을 궁리하는 동안 누군가가 나타났다. 그러더니 그들에게 총을 겨누었다.
“꼼짝 마.”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사파이어와 키가 엇비슷했고, 총을 겨누고 있는 손은 떨리지 않았다.
“요한 자이델의 신병은 우리가 인도한다. 그는 어디 있지?”
경찰? 정보원? 군인인가? 억양을 들어보니 독일인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벤체슬라스라면 미묘한 억양 차이만 듣고도 어느 나라 사람인지 간파하겠지만 사파이어에겐 그런 재주가 없다.
그 대신 사파이어는 그의 체구를 눈으로 훑고 있었다. 상대는 총을 겨누고 있었음에도 그 시선에 오히려 자기 자신이 긴장했다. 사파이어가 그를 보며 뭔가를 가늠하다가 고개를 돌려 피전 블러드를 확인했다. 피전 블러드가 “왜?”하고 묻자 사파이어가 대답했다.
“내가 처리하지. 가만히 있어.”
사파이어는 속옷만 남기고 발가벗겨진 남자를 두들겨 패며 어느 기관 소속이냐고 캐묻고 있었다. 그 옆에서 피전 블러드는 치수가 큰 남성 양복을 입으며 지긋지긋한 하이힐을 벗어던졌다. 피전 블러드가 신기엔 남자의 구두는 사이즈가 컸지만 불편한 하이힐보다는 훨씬 나았다.
“왜 요한 자이델을 찾고 있나? 정보원인가?”
“대답……할 것……. 같냐…….”
“그럼 죽어야지.”
“잠깐만.”
피전 블러드가 사파이어를 만류하더니 “송곳 하나 더 있지?”하고 물어서 그에게서 얼음송곳을 받아들었다. 피전 블러드는 날카로운 송곳 끝을 확인하고는 발가벗겨진 남자에게 말했다.
“대답 안하면 지금부터 고문을 시작할건데 우리한테도 시간제한이 있거든. 시간이 너무 걸린다 싶으면 죽일 거야. 천천히 죽는 방식으로. 그건 싫지?”
“미친…….”
남자의 입에서 욕설이 흘러나오자 피전 블러드가 그의 손톱 밑에 송곳을 끼워 넣고 꾸욱 밀어 넣었다.
“끄아아악……. 읍! 읍!”
“소리 못 지르게 입 막고 있어. 자, 다시 한 번 물어볼게. 어디 소속이야?”
“미친년아!”
“그 대답이 아닌데.”
송곳이 두 번째 손가락 속으로 파고들어감과 동시에 손톱이 날아갔다.
“아아악……!”
피전 블러드는 피가 줄줄 흐르기 시작한 손을 들어 남자에게 직접 보여주었다.
“아프지? 아파보이지 않아? 세 번째 손톱도 날릴래? 이 정도면 본부에서도 이해해줄걸? 어려운 거 아니잖아. 이름만 말해. 목숨은 살려줄게. 아니면 이다음엔 눈알을 날려버릴 거야.”
“절대……. 말 안 해!”
“죽여야겠다.”
피전 블러드가 결론을 내리자 사파이어가 망설임 없이 남자의 목을 꺾었다. 피전 블러드는 남자의 옷에 송곳의 피를 닦고는 그의 권총을 챙겼다.
“우리 말고 요한을 노리던 세력이 있는 것 같은데.”
“여기서 빠져나가야 한다.”
“알고 있어. 당신 세공사한테는 당신이 말해. 마리야한테는 내가 말할 테니까.”
“나한테도 무기 줘.”
“어느 걸로 할래?”
피전 블러드가 송곳과 권총을 보여주자 사파이어는 그 중에 송곳을 집어 들었다. 벤체슬라스가 몇 번이고 언급했듯이 피전 블러드의 사격 솜씨는 사파이어보다 좋을 것이다. 저격 총이 아니라도. 사파이어는 원래부터 근접전에 더 강했으니 송곳을 가지는 게 옳았다.
사파이어와 피전 블러드는 호텔 뒷문으로 빠져나왔다. 해가 지기 시작한 쾨니히슈트라세는 아까보다 통행인이 많이 줄어들어 있었다. 호텔 근처를 지키고 있는 덩치 큰 남자들이 이어폰을 누르며 어딘가와 무전을 주고받다가 갑자기 다급한 기색으로 호텔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요한의 시체가 발각된 모양이다.
그것을 보고 사파이어와 피전 블러드는 뛰기 시작했다. 경호원 몇 명이 그들을 보았지만 호텔 안의 사건과 그들이 연관이 있으리라곤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두 보석의 발목을 잡는 것은 경호원이 아니라 다른 존재였다.
“멈춰!”
백인 남자 둘이 그들을 쫓아오기 시작했다. 경찰인가? 아니, 제복은 입지 않았다. 조금 전 죽인 남자같이 어느 정보기관 소속일까?
그들만 사파이어와 피전 블러드를 쫓는 건 아니었다. 또 다른 인물이 따라붙었다. 이번에는 관광객처럼 보이던 동양인 여자였다. 그리고 또 하나. 거리의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던 흑인 남자가 추격 대열에 합류했다.
“갈라져야겠군.”
“어디로!”
“내가 유인할 테니 엄호해 줘.”
사파이어는 그 자리에 멈춰 섰고 피전 블러드는 계속 달렸다. 사파이어는 가장 가까이 따라붙는 놈을 채어 잡아 배에 주먹질을 가했다.
도심에서 갑자기 폭행 사건이 일어나자 지나가던 시민들이 소리 지르며 사건 현장에서 피해섰다. 사파이어는 피전 블러드가 사람들 사이로 안전하게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 얼음송곳을 꺼내 역수로 단단히 쥐었다.
벤체슬라스와 마리야는 두 보석이 표적을 데리고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바로 자리를 떴다. 찾아야 하는 정보는 마리야가 잘 알고 있다. 벤체슬라스는 호위 역할이다. 벤체슬라스가 턱시도 안에서 권총과 소음기를 꺼내 조립하는 것을 보고 마리야가 말했다.
“그걸 쓸 일이 없어야 할 텐데.”
“맞는 말이야. 지문처리하기가 귀찮거든.”
“일을 시끄럽게 만들지 않겠다는 발상은 없어?”
“수단방법 가리면 돈 못 벌지.”
“처리업자에게 지불하는 비용만 줄여도 큰 이득일 것 같은데.”
“타당한 지적이군.”
벤체슬라스는 마리야의 충고를 받아들여 그 다음에 마주치는 경호원을 권총 밑 부분의 쇳덩어리로 가격해 기절시켰다. “여기는 출입금지 구역입니다.”하고 손을 뻗어 저지하기만 했을 뿐인데 너무 과하다 싶은 조치였는지 마리야가 벤체슬라스를 의미심장한 눈으로 쳐다보자 벤체슬라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 충고를 받아들여서 처리업자에게 들일 비용을 줄인 것뿐이야.”
“어련하실까.”
벤체슬라스는 머리에서 피를 흘리는 경호원을 질질 끌어다가 그늘진 구석에 숨기곤 그의 품을 뒤져 3단 진압봉을 찾아냈다.
“총알 값은 굳히겠군.”
마리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벤체슬라스가 “칭찬으로 듣겠어.”라고 화답하듯이 싱긋 웃었다.
마리야는 요한의 개인 객실을 찾아냈다. 그는 잠깐 외출을 나갈 때도 사무실을 통째로 들고 나가는 그런 유형의 사람은 아니었는데, 혹시 있을지 모를 기회를 잡기 위해 최소한의 도구는 가지고 다녔다.
마리야는 요한의 노트북을 찾아냈다. 마리야가 USB를 꺼내 필요한 정보를 캐내는 동안 벤체슬라스는 객실 바깥을 살피고 있었다. 경호원 하나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서둘러야겠어.”
“재촉하지 마. 매너 없게.”
마리야의 대꾸에 벤체슬라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별 생각 없이 받아친 농담일 테지만 그 짧은 말의 어떤 부분이 벤체슬라스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 같았다. 마치 그가 목표로 하는 양식 있는 인간에 대한 도전이라고 할까.
벤체슬라스는 더 이상 마리야에게 말을 걸지 않고 경호원이 문 가까이까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경호원은 닫혀 있어야 할 객실 문이 살짝 열려있는 것을 보고 확인차 문을 열어봤다가 그대로 하얗고 억센 손아귀에 사로잡혀 몸싸움을 벌였다.
벤체슬라스는 품 안의 격렬한 싸움과는 별개로 발끝으로 소리도 나지 않을 정도로 살포시 방문을 닫았다. 그리곤 경호원을 바닥에 찍어 누르며 기절할 때까지 구타했다.
“숙녀분이 계신데 노크는 하고 들어와야지, 이 야만인아.”
마침 작업을 끝낸 마리야가 USB를 챙기면서 그 모습을 보았다.
“당신 설마 내가 한 마디 했다고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지?”
“뭘 단단히 착각하고 있군, 마리야 이바노브나.”
“21세기에 귀족놀음 적당히 해줄래? 그건 그렇고 무기 있으면 나도 하나 줘.”
벤체슬라스는 경호원의 품을 뒤져 3단 진압봉과 권총을 찾아내 마리야에게 건네주었다.
“필요한 건 다 찾았나?”
“응.”
“노트북을 아예 통째로 들고 가버리면 될 거 아닌가?”
“위치 추적기라는 말 들어본 적 없지?”
“아하.”
요한 자이델 같은 부자가 자신의 중요한 물건에 아무런 조치를 해놓지 않았을 리 없다. 요한이 사망했다고 해도 사망사건을 수사하는 경찰이 사라진 물건의 위치를 찾아볼 테고. 벤체슬라스는 복도를 확인한 후 안전하다는 판단이 들자 문을 활짝 열고 비켜섰다.
“숙녀 분 먼저.”
“고마워라.”
마리야가 총을 장전하면서 밖으로 나갔다. 벤체슬라스는 그 뒤를 따라 나가며 객실 문을 닫고 문고리 위에 “방해하지 마시오.”라는 팻말을 걸어두었다.
사파이어는 송곳을 쥔 채 자신을 경악스런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군중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채어 잡혀 바닥에 쓰러진 놈은 충격을 아직 이겨내지 못했는지 일어서지 못하고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추적자들은 섣불리 군중 사이를 헤치고 나와 나서지 못했다. 정체를 드러내지 않겠다는 거군. 상황이 이 지경이 됐는데도 숨겠다는 거다. 그렇다면 끄집어내는 수밖에.
사파이어는 바닥에 쓰러진 남자를 일으켜 세워 목에 송곳을 들이댔다. 사방에서 만류하는 소리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사파이어가 금방이라도 남자를 찌를 것처럼 보이자 군중을 밀치고 한 남자가 총을 겨누며 다급하게 나왔다.
“무기 내려놔! 무기…….”
남자는 말을 더 이상 잇지 못했다. 총성이 터짐과 동시에 남자가 무언가에 떠밀리듯 바닥에 쓰러졌다. 하늘을 보고 드러누운 남자의 이마에는 깔끔한 총알구멍이 나 있었고 그 옆으로 핏줄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남자는 눈을 부릅뜬 채 죽었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총성이 일으킨 반향은 어마어마했다. 사람들이 혼란스러운 양떼처럼 서로를 밀치며 도망가기 시작했다.
사파이어 역시 그 틈에 뒤섞여 도망치려고 했다. 그러나 인파를 비집고 사파이어에게 접근한 흑인 남자가 공격을 해왔다. 남자의 걷어차기에 당했으면 정말 뒤로 날아갈 뻔 했다.
운 좋게 공격을 피한 사파이어가 재빨리 남자에게 송곳을 비틀어 박아 넣었다. 옷 안에 방탄복을 껴입고 있었지만 다른 부위는 노출되어 있던 남자에게 얼음송곳 같이 찔러 들어오는 공격은 치명적이었다.
남자 역시 몸을 틀어서 공격을 피하려고 했지만 송곳은 허벅지를 깊게 관통했다. 남자가 외마디 비명을 터뜨렸고 사파이어는 신속하게 송곳을 잡아 빼 몇 번 더 찔러서 남자를 무력화시켰다.
근육이 너무 탄탄하게 부풀어 오른 나머지 깊숙이까지는 파고 들어가지 못했지만 쫓아오는 속도는 충분히 느려질 것이다. 남자는 허벅지 안의 동맥이 뚫렸는지 확인한 다음 절뚝거리며 사파이어를 뒤쫓았다.
사파이어가 인파를 벗어나 쇼핑센터 쪽으로 빠져나가자 누군가가 그의 뒤통수에 총구를 들이대고 “멈춰!”하고 외쳤다. 사파이어보다 체구가 훨씬 작은 여자였다.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전에 총이 먼저 발사될 것이다.
사파이어는 얼음송곳을 쥔 채 모든 움직임을 멈췄다. 여자는 전력으로 쫓아오고 있었던 것인지 숨을 헐떡이면서 총 끝으로 사파이어의 머리를 쿡 찔렀다.
“요한 자이델의 정보는 어디 있지?”
여자는 독일어를 쓰고 있지 않았다. 영어였다. 미국식 영어고, 어떤 억양인지는 분간할 수가 없다. 말의 투박함으로 봐서는 동아시아 국가의 어딘가, 이 정도 밖에 알 수가 없다.
사파이어가 고개를 돌리지 못한 채 눈동자만 굴려 여자를 노려보자 여자가 다시 한 번 총구로 쿡 찔렀다.
“허튼 짓 하지 마!”
“그는 죽었다.”
“그건 알 바 아니야. 리스트는 어디 있냐고!”
“리스트?”
순간 총성이 탕 울리면서 여자의 고개가 홱 꺾어졌다. 여자는 총을 놓치며 쓰러졌다. 미간이 정확하게 뚫려있었다. 사파이어는 반사적으로 총성이 날아온 곳을 쳐다보았다. 피전 블러드가 사파이어에게 총구를 겨누면서 뛰어오고 있었다.
“숙여!”
사파이어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자 피전 블러드가 총을 연사했다. 사파이어를 쫓아오던 추격자들이 전부 즉사했다.
피전 블러드는 장탄수를 세어가며 쏘고 있었던 것인지 총알이 다 떨어진 것을 확인하지도 않고 빈총을 내버렸다. 그리고 죽은 여자에게서 권총을 낚아채더니 다른 추적자가 더 있는지 살폈다.
그런 다음 더 이상 쫓아오는 사람이 없다는 판단이 들자 사파이어의 어깨를 툭 쳤다.
“뭐해? 도망가자고!”
사파이어와 피전 블러드는 쇼핑센터의 통로를 건너 건물 바깥쪽으로 달려 나갔다. 총성 때문인지 이미 사람들은 도망가고 숨어서 인기척은 없었다.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피전 블러드가 달리던 것을 멈추었다. 사파이어도 덩달아 속도를 늦췄다. 피전 블러드는 빠른 걸음으로 걸으면서 이제야 자신이 노획한 총을 살폈다. 남아있는 총알은 5발이었다.
“무기는 어때?”
피전 블러드가 묻자 사파이어가 피투성이인 송곳을 들어 보여주었다.
“다치진 않았어?”
“덕분에.”
“방금 그 여자가 뭐라고 한 거야?”
“요한 자이델의 리스트를 묻고 있었다.”
“리스트? 그게 뭔데?”
“모르지.”
사파이어는 피에 젖어 미끌거리는 얼음송곳의 손잡이를 옷에다가 닦으며 단단하게 고쳐 쥐었다.
“특등사수 이상이군.”
“감이지.”
피전 블러드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가 문득 이 남자가 칭찬을 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인간적인 감정이라곤 아예 없을 줄 알았는데. 당신은 사람이라기보다 뭔가 기계처럼 보이거든. 터미네이터 같은 거.”
“난 인간이다.”
“알아. 그냥……. 의외라서 그래.”
“의외?”
“됐어. 넘어가자고. 여기서 빠져나가야지.”
사파이어와 피전 블러드는 더 이상의 방해 없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마리야가 가져온 정보 안에는 목표인 내부고발자 페터 괴츠만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몇 몇 국가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정보가 들어 있었다. 해당 국가 입장에서는 위험을 무릅쓰고 회수할만한 가치가 있어보였다.
사파이어의 보고를 받은 벤체슬라스는 “정보기관들이군.”하고 단정 지었다. 이해관계에 따라 요한 자이델을 살려둬야 할 세력도 있었을 것이고, 어떤 세력은 그를 죽여야 했을 것이다. 그 사이에 끼어든 것이 예상치 못한 존재인 세공사와 보석들.
“첩보전으로 번지는 건 예상치 못했는데.”
벤체슬라스는 피 묻은 셔츠를 벗으며 중얼거렸다. 마리야와 탈출하던 도중에 기어코 몇 명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탈출할 당시에는 바깥에서 일어난 소란의 원인을 알지 못했지만 나중에 사파이어에게서 보고를 듣고 나서야 이유를 알게 되었다.
혼란스러운 인파를 일종의 지형지물처럼 이용해서 그림자처럼 사라질 수도 있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그들을 노리는 자들에게도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공격할 기회가 되는 것이다.
추격자들 대부분의 시선이 앞서 나타났다 사라진 두 보석들에게 쏠려 있었기 때문에 뒤늦게 호텔에서 나오는 세공사들에게는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지만, 사실 그들이 회수해야 하는 정보는 세공사들이 가지고 있었다.
그것을 간파한 몇 몇은 세공사들을 덮쳤다가 그대로 살해당했다.
상의를 벗은 벤체슬라스는 바지를 내려다보더니 “젠장.”하고 혀를 찼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바지에도 피가 튀어있었다. 이건 처분을 하더라도 핏물을 한 번 뺀 다음에 버려야 할 지경이다.
옷을 입은 채로 그대로 욕실로 들어가려던 벤체슬라스가 사파이어에게 따라 들어오라는 듯이 손짓했다. 사파이어는 벤체슬라스만큼 심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입고 있는 턱시도에도 피가 튀어 있었다.
욕실 안으로 사파이어를 끌고 들어간 벤체슬라스는 샤워기 물을 틀면서 사파이어의 턱시도를 벗겼다. 물에 젖기 시작해 옷이 잘 벗겨지지 않자 사파이어가 스스로 옷을 벗으려고 했지만 벤체슬라스가 그것을 제지하며 직접 한 장 한 장 옷을 벗겼다. 이 손길마저도 보상의 일환인 전희니까.
상의를 다 벗기고 나자 하의가 남았다. 벤체슬라스는 물에 젖어 윤곽이 완전히 드러난 바지의 가랑이 부분을 손으로 더듬으며 조금씩 힘을 주기 시작한 성기의 모양을 덧그렸다.
고요하던 사파이어의 숨결이 조금씩 흥분을 담아가기 시작했다. 통제로 가득한 그의 삶에서 이 시간은 거의 유일하게 감정 표현이 허락된 시간이다.
사파이어의 눈이 익숙한 쾌감을 떠올리며 가느스름해졌다. 벌써부터 눈이 풀리려는 징조가 보인다. 날이 갈수록 몸의 감도가 좋아져가는 것 같아서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의 변화를 눈여겨보았다.
사파이어가 조르듯이 입맞춤 해오려 하자 벤체슬라스가 사파이어의 어깨를 벽으로 강하게 밀어붙인 다음 먼저 키스를 했다. 내가 주는 것이다. 네가 요구하는 게 아니고.
윗입술을 물었던 이빨이 그대로 아랫입술로 내려가고, 입을 벌려서, 안을 탐닉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손은 착실하게 바지와 속옷을 벗겨 내렸다. 자신의 것도 벗어 완전히 나신이 된 두 몸이 쏟아지는 물줄기 아래에서 음란하게 엉겨 붙었다.
주인이 안겨주는 쾌감에 지그시 눈을 감고 있던 사파이어가 무겁게 눌려있던 표정을 풀며 아련하게 눈을 떴다. 벤체슬라스는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박히고 싶으면 빨아서 내 걸 세워.”
사파이어는 고분고분 무릎을 꿇고 벤체슬라스의 물건에 입맞춤하더니 조심스럽게 물건을 입에 머금었다. 입 안의 뜨거운 숨결과 부드럽고 여린 점막이 성기 끝에 닿자 벤체슬라스가 허리를 꿈틀 떨었다.
익숙한 자극이지만 아직도 완전히 무던해지진 못한 감각이다. 사파이어는 이를 세우지 않았다. 처음에는 몇 번이고 이를 세워서 입을 강제로 벌리는 철제 재갈을 물려놓고 익숙해질 때까지 몇 번이고 구강성교를 시켜야했다.
그가 혀를 꿈틀거리며 목젖을 찔러대는 물건을 뱉어내려고 발악하고 속 안에 있는 것을 게워내며 시뻘게진 얼굴로 눈물을 뚝뚝 흘리던 때가 기억난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겠지.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의 입 안을 범하면서 고개를 젖혔다. 다른 남자를 범한다면 과연 이만큼 흥분할까? 자신조차도 대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이었다.
사파이어의 굴종은 육체적인 쾌감 말고도 설명하기 힘든 다른 정신적인 만족감이 있었다. 잔인하고 가학적인 만족감이었다.
원본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꺾고 부러뜨려서 지금의 그를 만들어냈고 내 것으로 낙인찍은 지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그를 범할 때면 벤체슬라스 안에 있는 어두운 욕구가 시커먼 불길처럼 타올랐다.
아무런 감정이 없는 상대에게는 결코 이만큼 열정을 불태울 수 없다. 아무런 사랑의 감정이 없거나, 아무런 복수의 감정이 없다면…….
그러니까……. 엉덩이에 박아 넣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운 일이다. 항문 안에는 이빨이 달려있지 않으니까. 하지만 누군가의 머리통을 자위도구로 쓸 수 있다는 것은 절대적인 권위와 영향력을 의미한다.
죽음의 대리인 같은 이 조용한 남자에게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굴욕을 가하는 것이다. 물론 그들이 몸을 섞는 시간은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은밀하고 개인적인 시간이니 광장에서 섹스 하는 것처럼 남에게 보란 듯이 과시할 수는 없지만.
벤체슬라스가 사파이어의 머리칼을 쥐고 자신의 하반신에서 떼어냈다. 사파이어의 빨갛게 상기된 입술 밖으로 흉악하게 발기한 커다란 성기가 주욱 빠져나왔다. 벤체슬라스는 성기를 잡고 귀두 끝으로 입술을 몇 번 문지르더니 사파이어의 뺨을 툭툭 두들기며 “일어서.”하고 명령했다.
사파이어가 일어나서 등을 돌리고 벽에 손을 짚자 벤체슬라스가 그를 다시 돌려세워 자신을 보게 했다.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의 한 쪽 다리를 들어 올리고 구멍을 차근히 풀어주었다.
손가락의 단단한 뼈대가 여린 점막을 헤치고 몸 안으로 침범해 들어오자 사파이어가 허리 끝을 떨었다. 몇 십 번이고, 몇 백 번이고, 몇 천 번이고 반복해 온 일인데도 그의 몸은 환희로 들뜬다.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와 정면으로 눈을 마주한 채 그의 몸 안으로 푹 파묻혀 들어갔다. 눈 앞의 남자는 아둔한 개가 되어 주인이 안겨주는 다소 폭력적인, 그러나 유일한 위로의 몸짓을 온 몸으로 받아내며 달뜬 신음을 흘리고 있었지만 그와는 반대로 안식을 베풀어주는 벤체슬라스는 놀라울 만큼 머릿속이 싸늘했다.
머리와 하반신이 따로 노는 것처럼 온 몸의 세포는 폭력과 흥분으로 거칠게 움직이고 있었는데 그의 내면은 바람 한 점 부는 법 없이 고요했다. 사파이어의 머릿속이 순백의 무지로 번져나가 눈이 멀어버리는 황홀함으로 물드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안식이었다.
벤체슬라스는 언제나 그에게 베푸는 입장이었지만 이따금씩 사파이어에게서 무언가를 얻기도 했다. 이름도, 과거도, 기억도 잊어버린 남자의 텅 빈 공허 속에서, 그리하여 아무런 고민도 판단도 없는 철저한 무자극의 세계 속에서.
“난 가끔 네가 부러워.”
벤체슬라스가 중얼거렸지만 자기 신음에 묻힌 사파이어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슈바르츠발트 가도를 따라 벤츠 한 대가 유령처럼 매끄럽게 지면을 달려간다.
날이 좋을 때면 너른 들판의 연녹색 풀빛이 산들바람에 스쳐 시원한 광경을 자아내지만 오늘은 안개가 끼어 우중충한 날이다. 드문드문 민가가 있고, 제법 본격적인 마을이 있고, 가축을 풀어놓는 목초지가 있는 광경을 지나면 운전자의 시야는 돌연 거대하고 울창한 삼림을 마주하게 된다.
하늘을 찌를 듯이 곧고 높게 솟은 전나무와 가문비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서있고 이끼 낀 바위와 무성한 초목이 인간 문명의 영역인 아스팔트 도로로는 진출하지 못한 채 제 몸으로 숲의 경계선을 이루고 있다.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독일의 아름다운 자랑이지만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은 본래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을씨년스러운 대자연의 위엄을 드러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처럼 짙은 안개가 낀 숲의 광경은 뻗어 나온 나뭇가지 하나마저 옛 괴물의 뒤틀린 손가락으로 보이게끔 착시현상을 일으켰다.
우중충한 녹빛이 어두운 그림자를 지게 하는 모습은 이 삼림의 이름 그대로 검은 숲(Schwarzwald)이었다.
벤츠의 뒤로는 폭스바겐 아테온 한 대가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따라오고 있었다. 두 차량은 짙게 깔린 안개를 뚫고 한참을 더 달리다가 인적 없는 도로변에 멈춰 섰다.
차 문이 열리고 네 사람이 내려섰다. 피전 블러드는 검은 가죽 케이스로 싼 헌팅 라이플을 어깨에 메고 있었고 사파이어는 커다란 백 팩 하나를 등에 매고 손에는 위장무늬가 그려진 더플 백을 들고 있었다. 더플 백 안에는 무기가 가득 들어 있었다.
벤체슬라스는 주변을 돌아보고 있는 사파이어에게 다가서서 옷깃에 발신기를 달았다. 그 모습을 보고 마리야가 대꾸했다.
“개목걸이 다는 거야?”
“안전상의 이유라고 해줬으면 좋겠는데.”
“난 피전 블러드에게 그런 거 달아본 적 없어.”
“그건 당신 사정이고. 내건 키우는데 들어간 돈이 많거든. 죽는 것도 아니고 잃어버리면 아깝거든.”
비인간적인 모습이긴 하지만 벤체슬라스의 행동도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는 것이, 숲에서는 길을 잃기가 쉽다. 특히 이런 날에는 더.
숲을 헤치고 들어가야 하는 두 보석과 달리 세공사들은 숲 바깥에 있을 테니 혹시라도 둘이 조난되는 상황이 벌어지면 누군가는 그들을 구출할 수 있게 대비해두는 것이 좋다.
마리야가 발견한 정보를 토대로 페터 괴츠만이 숨어 있을만한 장소를 좁히고 좁혀서 여기까지 왔다. 슈바르츠발트는 특정한 지역만을 포함하는 국소적인 숲이 아니라 드넓은 산맥이다. 그 안에는 마을도 도시도 여러 개가 있고 국가의 관리를 받는 곳도, 그렇지 않은 곳도 많다.
관광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곳이 있다면 지나가는 여행객마저 기름을 넣고 잠시 쉬는 용도 외에는 정차하지 않고 스쳐 가버리는 곳도 있다. 그런 곳에서 남의 이목을 끌지 않고 한 사람을 찾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보물찾기를 하듯이 지도의 범위를 좁혀가며 추정해낸 곳이 여기다. 사파이어는 눈앞에 펼쳐진 깊은 숲을 보면서 아무런 판단도 하지 않았지만 피전 블러드는 미심쩍은 얼굴로 마리야를 돌아보았다.
“정말 이 안에 표적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더 이상 단서가 없어. 부딪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잖아.”
“당신이 시키는 거니까 따르는 거긴 하지만…….”
벤체슬라스는 둘의 대화를 들으며 피전 블러드에게는 복종훈련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이라면 저렇게 말대꾸를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내 것이 아니고 남의 것이니까 내버려두는 것일 뿐.
둘 사이엔 벤체슬라스는 감지하지 못하는 어떤 유대감이 있는 건지 피전 블러드는 곧 반박을 그만두었다. 그리곤 마음을 다잡은 듯이 수풀을 헤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사파이어 역시 벤체슬라스 쪽을 한 번 돌아보고는 아무런 대꾸 없이 피전 블러드의 뒤를 따라 숲 속으로 들어갔다.
마리야는 초조해보였다. 벤체슬라스에겐 돈이 걸린 문제지만 마리야에게는 어쩌면 목숨이 걸린 문제로 발전될지도 모르는 사안이었다. 내부고발자가 가지고 있는 정보는 그만큼 파멸적이었다.
“당신 같은 사람이 이런 실수를 할 줄은 몰랐는데.”
“이 일을 20년 넘게 하다보면 말이야, 벤체슬라스. 어딘가에는 얼룩이 남게 돼.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절대로 막을 수 없는 얼룩이 지는 거야. 내 말이 무슨 말인지 나중에 알게 될 거야.”
“글쎄. 경력으로 치자면 나도 그 정도는 되는데.”
피전 블러드가 사라진 방향을 보고 있던 마리야가 벤체슬라스를 돌아보더니 위 아래로 훑어보았다.
“당신은 꽤 젊어 보이는데? 40대는 아닐 거 아냐.”
“글쎄.”
“당신이 흡혈귀가 아니라면 갓난아기 때부터 암살자로 살아왔다는 건데 말이 안 되잖아.”
벤체슬라스는 어깨를 으쓱할 뿐 대꾸하지 않았다. 마리야 역시 더 파고들지는 않았다. 적어도 입 밖으로 소리 내서 추리하지는 않았다. 머릿속으로만 이런 저런 가능성을 계산해볼 뿐. 잠시 생각하던 마리야가 정리를 끝냈는지 입을 열었다.
“어쨌든 당신이랑은 별로 껄끄러운 관계가 되고 싶지 않으니까.”
“현명한 생각이야. 은퇴를 생각하려면 일을 벌일 게 아니라 정리해야지.”
“난 동료들보다는 오래 살아남은 편이야. 신중하게.”
“여태까지는?”
“여태까지는.”
그리고 둘의 대화는 완전히 끊겼다. 피차 서로의 과거를 캐묻지 말자는 암묵적인 합의가 깔려 있었다. 두 세공사는 보석들이 사라진 방향을 잠시 바라보다가 각자 차에 올라타서는 그 자리를 떠났다.
번호판을 몇 개씩 갈아치우고 다니지만 벌써 그들의 차량번호는 어딘가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런 정보를 남기면 뒤처리할 때 귀찮아진다. 벤츠와 폭스바겐이 사라지고 난 자리에는 인기척에 잠시 물러나있던 안개가 다시금 짙게 몰려와 바닥에 깔렸다.
사람들 소리에 지레 겁을 먹고 숨어 있던 동물들이 수풀 속에서 고개를 내밀고 조심조심 밖으로 나와 다시 자기들 영역을 차지했고, 이따금씩 불어오는 바람이 스치고 지나가는 나뭇가지는 악령의 손가락처럼 길 잃은 여행자를 유혹하듯이 숲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앞서서 걷던 피전 블러드가 문득 뒤를 돌아보더니 사파이어에게 손을 내밀었다. 뒤따라오던 사파이어가 그 손짓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채 우두커니 서 있자 피전 블러드가 사파이어의 더플 백을 빼앗아 쥐었다. 제법 무게가 나가는 것이었지만 피전 블러드는 휘청거리는 일 없이 거뜬하게 들어보였다.
“당신이 무거운 거 다 들고 있는 거 같으니까 나눠지자고 하는 거야.”
“고맙군.”
“이번 작전은 무모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런 판단은 하지 않아.”
“이번 일이 무모하지 않다고?”
“판단 자체를 하지 않아. 그런 건 나에게 허용되지 않았으니까.”
피전 블러드는 사파이어를 지긋이 바라보다가 등을 돌려 다시 앞장서서 걸으려고 했다. 그러나 무언가 풀리지 않은 것이 있는지 다시 사파이어를 돌아보았다. 사파이어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눈빛이었다.
알료샤가 종종 저런 표정을 지었던 것 같은데, 알료샤가 가르쳐 준 동정이라는 감정과는 조금 달라보였다. 사파이어는 혹시나 해서 확인해보았다.
“날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 글쎄…….”
피전 블러드가 답답한지 머리를 긁적였다.
“미안. 나도 모르겠네. 내 표정이 무례했던 거면 미안해.”
“무례했다고?”
“그렇게 느끼지 않았어? 난 내가 무례를 저지른 것 같은데. 아니면 됐어. 넘어가자고.”
피전 블러드 역시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사파이어에게 종종 감정적인 혼란을 안겨주었지만 다른 사람보다는 훨씬 명확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몇 걸음 걷던 피전 블러드는 역시 마음속의 거스러미를 무시할 수 없는지 다시 사파이어를 돌아보았다.
“당신은 정말 아무런 감정이란 게 없어?”
“있다만.”
사파이어는 아주 잠깐 머뭇거렸다. 그도 감정을 느낀다. 분노라든가, 공포라든지……. 기쁨이나 즐거움, 슬픔, 그런 원초적인 게 뭔지는 사파이어도 안다. 그런데 피전 블러드는 뜬금없이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걸까?
“쓸데없는 참견이라는 건 알지만, 당신과 당신 세공사의 관계는 뭐야? 마리야와 나 같지 않다는 건 알겠어. 그렇지만 당신한테도 당신 삶이 있을 거 아니야?”
“내 삶?”
“당신이 어떤 이유로 저 남자한테서 벗어나지 못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신한테도 당신만의 자아라는 게 있을 거 아니야. 좋아하는 거라든가, 싫어하는 거라든가, 앞으로 뭘 하고 싶다든지……. 당신도 이 일을 하기 전의 삶이 있을 거 아니야? 너무 개인적인 걸 묻고 있는 거라면 미안해. 그런데 당신은 연기가 아닌 거 같거든. 과거가 없는 척 하는 거.”
“과거.”
“당신의 진짜 모습 말이야.”
피전 블러드는 자신이 사파이어의 어떤 중요한 부분을 부쉈다고 확실히 느꼈다. 적어도 망가뜨리기는 했다.
“미안해……. 잊어줘. 표정 보니까 내가 잘못했어. 터무니없는 상황이라서 나도 예민해졌나봐.”
“내 표정이 어떻길래?”
“망연자실한 얼굴이야. 악몽을 꾸고 있는 건지, 그 악몽에서 깨어난 건지.”
정직하게 “당신의 주요 부품이 망가져버린 것 같은 기괴한 얼굴을 하고 있어.”라고는 대답하지 못해서 피전 블러드는 에둘러 말했다. 그러나 사파이어는 피전 블러드의 대답을 갈망했다기보다는 바로 조금 전의 질문에 골몰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 대답 따위야 어떻든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자극을 줘도 그에게는 두꺼운 벙어리장갑을 씌운 것 같은 둔탁한 울림일 테니까. 그 안에서 바늘처럼 날카롭게 틈새를 파고드는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는 그와 그의 주인에 대한 것이었다.
“그 분은…….”
피전 블러드가 자기 자신을 머저리라고 생각하며 사파이어의 침묵을 이용해 대화를 끊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려는데 뒤에서 사파이어가 중얼거렸다. 이런, 끝난 주제가 아니었던 건가? 고개를 돌린 피전 블러드는 사파이어의 눈을 보고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 분은 나의 신이야.”
사파이어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크게 벌어져 번들거리는 빛을 띠고 있었다. 그 눈에는 숨길 수 없는 광기가 담겨 있었다. 미치광이의 얼굴. 가련하고 섬뜩한 모습이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더 없는 행복과 환희에 잠기는 미친 눈을 보고 피전 블러드가 동정의 빛을 띠었다. 학습의 결과로 인해 사파이어는 그 신호를 확연히 알아볼 수 있었다. 사파이어의 얼굴에서 미친 기색이 사라졌다.
“그 표정이 뭔지 알아. 난 불쌍하지 않아.”
“이 얘기는 그만하자고. 내가 잘못했어.”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안개가 짙어졌다. 습하고 차가운 안개는 옷 안으로 파고들어 뼈까지 으슬으슬 떨리게 만들었다.
훈련받은 암살자라고 해서 추위나 더위에까지 면역이 있는 것은 아니다. 피전 블러드는 물론이고 사파이어까지 옷깃을 단단히 추켜올렸다. 앞장서던 피전 블러드가 잠시 멈춰 서서는 위치와 방향을 가늠해보았다.
“길을 잃은 건 아닌데 여전히 무모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네. 숲 한가운데서 뭘 어떻게 찾으라고? 페터 괴츠만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을 리도 없잖아? 그리고 숲 속에 오두막 지어놓고 숲지기같이 살고 있다니……. 인근 마을에서 수소문 하는 게 제일 빠를 것 같은데.”
“세공사들이 합리적으로 판단했겠지.”
“마리야는 그래 보이지 않았는걸. 당신 주인이면 몰라도.”
물론 피전 블러드는 벤체슬라스조차 믿지 않았다. 명령 하달과 수행이라는 단순한 구조만 가지고 있는 사파이어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의심하는 피전 블러드의 사고방식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는 피전 블러드처럼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다. 임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 자잘한 사항은 그 때 그 때 자기 자신이 판단하고 결정을 내리기도 했지만, 전략과 계획 단계에서 생각해 본 적은 없던 것이다. 이쯤 되니 피전 블러드와 세공사 마리야의 관계가 궁금해졌다.
“세공사 마리야는 어떤 인물이지?”
“아까 대화를 이어가자는 거야? 뭐, 난 당신만큼 비밀이 많지는 않으니까……. 마리야랑은 대학 졸업하고 만났어. 당시 난 좀 복잡한 일을 겪고 있었고 마리야는 마리야대로 절박해보였고……. 마리야가 가벼운 일을 제안했지. 난 이 놈의 세상 어떻게 되든 알 바 아니라서 수락했고. 첫 임무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어. 그리고 재능을 발견한 거지. 마리야 덕분에 이런저런 빚은 금방 갚았어. 그 뒤로는 저축해오고 있지.”
“말이 많군. 처음 이미지와 많이 다른데.”
“당신과 나는 처음에 적으로 만났잖아. 누가 그 상황에서 자기소개를 해? 너무 수다스러우면 그만 둘까?”
사파이어는 잠시 생각해보았다. 피전 블러드가 입을 다물어버리면 풀벌레 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것 같다. 둘 다 완전히 침묵하는 상태여도 사파이어에겐 어떤 감정적인 불편함도 없지만, 굳이 입을 막을 필요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계속 말해줘.”
“남한테 흥미가 생기나봐?”
“사람을 관찰하는 것 자체는 좋아해.”
“당신 얘기는 하기 싫고?”
“기억이 안 날 뿐이야.”
“이름 정도는 알고 있을 거 아니야. 사파이어 같은 코드네임이 아니라.”
“몰라.”
“그거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안 들어?”
“왜 그래야하지?”
“왜냐면……. 당신한테도 가족이란 게 있지 않을까? 친구라던가.”
“그렇군.”
사파이어가 깔끔하게 수긍해버려서 피전 블러드는 더 이상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다른 사람 같으면 저기서 의문점을 더 가질법한데 사파이어는 주어진 현상만 받아들이고 거기서 끝나버리는 식이었다.
실전에서 맞대는 이 남자가 괴물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은 별개로 이 남자의 속내는 어린아이라던가 하얀 도화지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순백색이었다. 거짓말을 한다거나 무언가 꾸미는 성격은 아닐 거라는 걸 요 몇 번의 경험으로 깨달았다.
이 성격으로 세상을 어떻게 살아왔을까? 원래 성격이 아닌가?
피전 블러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남의 인생에 깊게 개입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 사파이어가 여태 만나온 인간군상 중에 워낙 특이한 유형이라 잠깐 관심이 생겼을 뿐, 피전 블러드 역시 기본적으로는 철저하게 개인주의에다가 자신에게만 집중하며 살아가는 성격이었다.
“깊은 이야기는 나도 하고 싶지 않아. 이다음에 적으로 만나면 내 약점을 쥐어주는 꼴이 되잖아. 적으로 만나기도 싫지만.”
“그렇군. 알았어. 그럼 묻지 않지.”
“좀 더 물어봐도 돼. 내가 대답하기 싫은 부분은 대답하지 않을 거지만.”
“잠깐.”
사파이어가 피전 블러드를 제지했다. 그리곤 고개를 들고 무언가에 깊이 집중했다. 앞 쪽 어딘가를 바라보던 시선이 고개를 돌리더니 왼쪽과 오른쪽을 살폈다.
“소리가 들린다.”
피전 블러드는 “무슨 소리?”하고 묻는 대신에 손에 들고 있던 더플 백을 조용히 내려놓고 어깨에 멘 헌팅 라이플을 내려서 금방이라도 조준할 수 있게 쥐었다. 사파이어가 재빨리 더플 백을 뒤져서 권총과 나이프를 꺼냈다.
권총은 글록 17로 장탄수가 17발 들어가고, 가볍고, 튼튼했다. 나이프는 커다란 보위 나이프로 도검소지허가증이 반드시 필요해 보이는 물건이었다. 다른 나이프는 캠핑 도구라고 속여 볼 가망이 있어도 이 정도로 커다란 칼날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변명할 생각도 없긴 하지만.
사파이어가 무기를 꺼내든 채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자 피전 블러드는 이다음에 뭘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피전 블러드가 “뭘 해야 해?”하고 묻자 사파이어가 검지를 입에 대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하더니 뭔가를 들은 듯이 조심스레 뒤돌아섰다. 그리고 움직임이 굳었다.
수풀 너머에 사파이어와 똑같은 모양으로 몸을 움츠린 채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짐승이 있었다. 커다란 늑대였다.
늑대의 모습을 확인한 피전 블러드 역시 그 자리에 못박힌 듯이 서서 움직일 수 없었다. 그들이 직업적으로 사람을 사냥하긴 하지만 야생동물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피전 블러드가 조심스럽게 총을 들어 겨냥하려고 하자 사파이어에게 고정되어 있던 늑대의 눈이 돌연 피전 블러드에게 못 박혔다.
눈을 깜박거리지도 않고 으르렁거리는 위협의 소리도 없었지만 명백한 경계였다. 놈은 총이 뭔지 아는 것이다. 피전 블러드는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내가 주의를 끌지.”
사파이어의 목소리가 들리자 다시 늑대의 눈이 사파이어 쪽으로 향했다. 늑대는 이제 이빨을 드러내며 무시무시한 으르렁 소리를 냈다.
“총을 쏘면 도망갈 거야.”
“늑대는 혼자 다니지 않아. 확실히 죽이지 않으면 위험해.”
눈앞의 놈은 정찰병일수도 있다. 무리의 우두머리는 저것보다 더 클 수도 있고. 잠깐 대치해도 인간들이 공격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으면 늑대 쪽에서 먼저 도망갈 텐데 놈은 꼼짝도 않고 있었다.
미친 늑대거나, 놈의 영역에 우리가 들어와 있는 것이거나……. 다른 늑대에 대해선 생각하지 말자. 우선은 놈을 처치하고 볼 일이다. 이쪽에는 무기가 있다. 아주 많이. 물어뜯기지만 않는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 필요한 것은 운과 담력.
사파이어가 피전 블러드 쪽으로 슬쩍 위치를 옮겨서 등으로 가리고 서자 늑대가 몸을 낮게 웅크리고는 포복하듯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둘은 단 한 순간도 서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공격 순간을 예측할 수가 없었다.
사파이어가 나이프를 고쳐 쥐는 순간 늑대가 아가리를 쩍 벌리며 달려들었다.
사파이어는 칼을 쥔 손으로 목을 가렸다. 현명한 선택이었다. 급소를 노리고 달려든 늑대의 첫 번째 공격은 불발로 끝났고 사파이어는 늑대의 거대한 덩치에 잠깐 밀렸지만 곧 늑대의 배를 발로 차 뜯어냈다.
바닥에 착지한 늑대가 다시 달려들려고 하는 순간 피전 블러드의 헌팅 라이플이 불을 내뿜었다. 사파이어와 늑대가 너무 가깝게 붙어 있어서 제대로 조준하지 못했는지 첫 발은 빗나갔다. 귀 옆에서 터진 총성에 사파이어의 귀가 먹먹해지면서 일순 정신이 멍해졌다.
화들짝 놀란 늑대가 펄쩍 뛰어 뒤로 물러서더니 영리한 눈으로 피전 블러드를 노려보았다. 긴장 때문에 숨을 씨근씨근 몰아쉬던 피전 블러드가 본능적으로 고함을 터뜨렸다. 인간같이 키가 큰 동물이 커다란 소리를 내면 대개의 야생동물은 겁을 집어먹고 도망가게 마련이다.
눈앞의 늑대는 그러지 않았다. 늑대는 도리어 차분하게 인간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인간이 위협하는 방식을 아는 것이다. 손에 든 것이 없다면 자신의 이빨질에 갈가리 찢길 연약한 존재라는 것도.
늑대는 혼자 다니지 않는다. 확실하다. 무리 생활을 하는 늑대임에도 혼자 돌아다니는 개체가 있다면 너무 약해서 도태됐거나, 부상을 입었거나, 아니면 늑대 사회에서도 용인하기 힘든 미치광이다…….
“진정해.”
“총 소리를 듣고도 도망가지 않아.”
“그래. 이상한 녀석이군.”
“다친 데는?”
“아직 모르겠어. 뼈가 부러진 것 같진 않군.”
“너무 가까이 붙어 있어서 조준하기가 힘들어. 다음번엔 죽여 버릴 수 있어.”
“믿어보지.”
늑대는 둘 중 누구를 습격해야 하나 고민하는 것 같았다. 인간들이 말소리를 주고받는 것은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다. 상황이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함에도 늑대는 도망치지 않았다. 도망갈 수 없는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지켜야 하는 새끼라도 있다던가…….
생각하기 싫지만 이런 가능성도 있다. 늑대는 사람을 사냥해본 적이 있는 것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키 큰 동물이 사실은 걸어 다니는 연한 살덩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식인 늑대는 속으로 인간들을 비웃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늑대의 시선이 피전 블러드 쪽으로 너무 기울었고 고개를 돌리지도 않는다는 것을 안 사파이어가 소리를 내서 늑대의 주의를 끌었다. 사파이어가 발치의 돌멩이를 걷어차자 늑대가 다시금 이빨을 드러내며 사파이어를 노려보았다.
사파이어가 손에 쥔 글록을 들이댔지만 늑대는 경계하지 않았다. 총구가 긴 헌팅 나이플은 알아보면서 권총은 알아보지 못한다. 총의 화약 냄새를 맡고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알아챔직도 하지만 긴장된 대치상태에서는 늑대의 두뇌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늑대는 으르렁거림을 멈추지 않으면서 한 발 한 발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고개를 틀고 등을 내보이며 그대로 달아났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서 늑대가 사라지고 난 후에도 피전 블러드는 늑대가 있던 방향으로 겨누고 있던 총을 거두어들이지 못했다. 그 대치상태 동안 제대로 숨을 못 쉬고 있었는지 피전 블러드가 막힌 숨을 탁 몰아쉬었다.
“갔나?”
피전 블러드의 총구가 아래로 내려가려는 순간 수풀 속에서 늑대가 펄쩍 뛰어나와 달려들었다!
피전 블러드의 온 몸이, 세포 하나하나가 새빨간 경고 신호를 울렸다. 뇌가 모든 정보를 급속도로 받아들이면서 모든 신경세포가 번쩍번쩍 빛났다. 1초를 쪼개 무수히 많은 시간 티끌로 나눈 입자들이 사진을 찍어놓은 것 마냥 한 컷 한 컷 스쳐지나갔다.
늑대가 뛰어오르고, 노린내 나는 거대한 아가리가 쩍 벌어지고, 섬뜩한 송곳니가 침에 번들거리는 모습이, 그리고 그 다음 순간 칼을 쥔 손이 자신의 앞으로 쑥 뻗어 나오고, 사파이어의 등이 자신을 가로막고 서고, 늑대가 사파이어를 물었다!
콰직하는 소리가 났다. 늑대는 분노에 차 입에 문 것을 거칠게 뒤흔들며 찢어놓았다.
늑대가 문 것은 사파이어가 내밀었던 글록이었다. 늑대의 치악력에 그 튼튼한 권총이 콰직콰직 박살나는 소리가 났다. 그러나 완전히 깨져버리지는 않고 방아쇠 어딘가를 건드렸는지 늑대의 입 안에서 총이 발사됐다.
총구가 바깥쪽으로 향하고 있었기에 늑대가 맞지는 않았지만 총알이 발사되면서 터져 나온 포화는 늑대의 입에 순간적인 화상을 입혔다. 늑대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사파이어는 치명적인 허점을 보인 늑대를 완전히 끝장내려고 칼을 단단히 쥐고 앞으로 나섰다. 그런 사파이어의 어깨를 잡아채는 손이 있었다.
피전 블러드가 번개 같은 속도로 사파이어를 밀치고 총 끝을 늑대의 머리에 조준하더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마지막 순간, 그 찰나의 순간에 광기가 깃든 노란 눈으로 피전 블러드를 정면으로 노려본 늑대는 이마 한 가운데에 깔끔하게 구멍이 뚫리면서 죽어버렸다.
늑대가 바닥에 털썩 쓰러지고 총구 끝에서 연기가 피어오름에도 피전 블러드는 경직된 상태로 움직이지 않았다. 늑대가 완전히 죽었는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몇 초 후에 피전 블러드가 총 끝으로 늑대를 툭 건드려보았다. 총알이 뇌를 완전히 꿰뚫었는지 늑대는 어설프게 살아있지 않았고 깨끗한 모습으로 죽어 있었다. 늑대의 죽음을 확인하자 피전 블러드가 총을 내려놓고 사파이어의 상태를 다급히 확인했다.
“부상은?”
“모르겠다.”
“옷 벗어봐.”
피전 블러드가 상의를 벗기려고 들자 사파이어가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막았다. 손이 피투성이였다. 피전 블러드가 욕설을 내뱉더니 보급품 가방을 뒤져서 물병을 찾아내 피를 씻어냈다.
왼쪽 팔뚝이 약간 찢어져 있었다. 완전히 물어뜯긴 것은 아니지만 스친 모양이다. 위치로 봐서 살을 물렸고 뼈에는 손상이 없는 것 같다. 근육이나 신경은 어떨까? 피전 블러드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상처를 보자 사파이어가 나직하게 대꾸했다.
“꿰매야겠군.”
“기다려봐. 일단 소독부터 해 줄게.”
“방금 총 소리 때문에 위치가 발각됐을지도 모른다.”
“치료가 우선이야.”
“이동이 우선이다.”
“늑대가 더 있다면 어차피 피 냄새 때문에 들키게 되어 있어. 치료가 우선이야.”
타당한 지적이었기에 사파이어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피전 블러드가 상처를 치료하도록 내버려두었다.
피 때문에 잘 몰랐지만 다행히 사파이어의 상처는 그리 크지 않았다. 먼저 환부를 소독하고, 소독한 바늘과 실로 환부를 꿰맨 다음 항생제를 주사했다. 그리고 염증을 가라앉히기 위해 진통제도 먹였다. 부어오르는 것을 막지는 못할 테지만 임시 조치로써는 훌륭하다.
상처를 붕대로 감고 나자 다치기 전과 별반 다를 것 없이 움직일 만큼은 되었다.
“능숙하군.”
“남의 몸이니까 꿰매기 쉬운 거야. 스스로 할 땐 한 손으로 해서 어렵거든.”
“특수부대 소속이기라도 했나?”
“군대랑은 인연 없어. 재능을 늦게 발견했다고 말했지. 당신처럼 거친 일을 했을 뿐이야.”
“그렇군. 치료해줘서 고맙다.”
다행히 늑대는 혼자 돌아다니던 놈이었는지 다른 무리가 나타나지는 않았다. 아니면 총소리를 듣고 아예 도망가 버렸을 수도 있고.
사파이어를 치료하고 나서 늑대를 제대로 둘러볼 수 있게 되자 피전 블러드는 헌팅 라이플을 어깨에 메고 늑대의 시체를 발끝으로 툭 건드려보았다. 죽었음에도 그 덩치와 형상은 아직까지 무시무시했다.
“늑대는 계약 내용이 없었던 거잖아…….”
“무슨 일이든 생기는 법이니까.”
“그래. 이다음에는 허리케인에 휘말리겠네. 자연재해도 포함시켜야지.”
재미없지만 나름대로 농담을 걸었다고 생각했는데 사파이어가 전혀 반응이 없어서 피전 블러드는 조금 무안해졌다. 머쓱한 심정으로 돌아보니 사파이어는 피전 블러드의 대답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 눈치였다.
“독일에서 허리케인 나는 거 봤어?”
“아니.”
“방금 건 농담이었어. 젠장, 나도 재미없다고 맨날 까이는데 당신은 더 심하네.”
“그런가.”
“그나저나 늑대가 나올 정도로 외진 곳이면 사람도 없을 텐데. 정말 이 숲 안에 표적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모르지. 하지만 명령을 받았으니까.”
“명령이라면 죽을 거야?”
“죽어야지.”
피전 블러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긴, 사파이어를 우둔하다고 욕할 수도 없는 것이 자기 자신도 당장 마리야의 지령을 거절하지 않고 어쨌든 숲 안으로 들어온 상태다. 마리야는 진작에 선택권을 줬다. 하기 싫으면 거절해도 된다고.
마리야와 계약을 맺은 건 피전 블러드 본인의 의지다. 명령을 따르는 멍청이라고 비웃는다면 피전 블러드 본인의 얼굴에도 침을 뱉는 격이다.
“젠장…….”
하늘을 올려다본 피전 블러드가 나직이 욕설을 내뱉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새벽부터 숲에 들어왔던 게 아니었고 늑대와 대치하고 싸운 시간, 사파이어를 치료한 시간 등등을 계산해보면 충분히 해가 질만했다. 야영을 감안하고 짐을 가져오긴 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숲에 늑대가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포식자 동물이 있는 숲 안에서 취침이라…….
“일단 불부터 피워야겠어. 불이라도 있으면 짐승들은 도망가겠지.”
“인간에게 발각된다만.”
“인간이면 처치하기가 더 쉽지.”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숲 속에서 만날 수 있는 노상강도나 범죄자에 대한 불안감을 가지게 마련인데 둘은 오히려 범죄자 쪽에 서 있는 입장이라 사람의 등장을 걱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 쪽에서 그들을 피해가야 한다.
“밤에는 어차피 못 움직이니까 하룻밤 자고 움직일 생각을 하자고. 당신 상처도 두고 봐야 돼. 열이 나기 시작하면 골치 아파지니까.”
“알았다.”
“도와줘. 일단 나뭇가지부터 모아봐.”
해는 빠른 속도로 졌다. 작은 모닥불이 타닥타닥 피어오르고 있었고 뚜껑 열린 전투 식량이 모닥불 위에서 자글자글 데워지고 있었다. 그 옆으로 침낭이 두 개.
사파이어는 붕대를 벗고 소독을 한 번 더 한 다음 진통제를 또 먹었다. 원래부터 튼튼한 몸 빼고는 남는 게 없는 남자다. 피전 블러드는 더 이상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자 사파이어를 내버려두고 자신의 할 일만 묵묵히 했다.
밤이 되자 기온이 급속도로 내려가면서 입김이 하얗게 서려나왔다. 풀벌레 소리와 새가 잠들기 전에 마지막으로 우는 소리, 그리고 이제 잠에서 깨어나 활동하기 시작한 야생동물들의 소리가 밤의 숲을 시끄럽게 울렸다.
어디선가 캐앵하고 울부짖는 괴상한 소리가 들려오자 피전 블러드가 그 쪽을 돌아보았다. 사파이어가 대답했다.
“여우야.”
“여우?”
“여우 우는 소리다.”
“잘 알고 있네. 그러고 보니 아까 늑대 습성도 잘 아는 것 같던데.”
“글쎄. 막상 닥치니까 기억이 나.”
“당신 정말 과거에 뭐했던 거야? 당신이야말로 특수부대 소속 아니야?”
“그런가. 그럴지도 모르겠군.”
“또 뭐가 기억나는데?”
“떠올리려고 하면 머리가 아파. 혼란스럽고. 싫은 느낌이 들어.”
피전 블러드는 자신이 선을 넘었다는 것을 알았다.
“아……. 미안해. 그만 캐물을게. 그만 두자.”
“당신 얘기를 해줘.”
사파이어 쪽에서 요청해왔다. 항상 생기 없고 무감정한 눈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모닥불의 불빛 때문인지 지금은 그의 눈이 아주 약간 인간적으로 보였다.
“뭘 알고 싶은데?”
“아무거나.”
“그래, 그럼……. 이름부터 시작할까. 코드네임으로 계속 부르기엔 어색하니까. 피전 블러드가 루비의 최상등급을 부르는 명칭이라는 거 알아? 비둘기의 피 같다는 거야.”
“내 경우엔 사람 피겠지만.”하고 피전 블러드가 자조했다.
“내 진짜 이름은 아가테야. 이미 알고 있겠지만. 알렉산드라이트였던가……. 그 사람이 대놓고 말해버렸잖아. 그 땐 가슴이 철렁했어.”
사파이어는 기억을 더듬어봤다. 그런 일도 있었던가. 아마 파리에서 작전 수행을 할 때였던 것 같다.
피전 블러드와 처음 대면한 때였지. 발레와 무술을 접목시켜 공격하던 알비노 쌍둥이도 기억난다. 알료샤가 나타났고, 그가 피전 블러드를 보며 반가워했지. 아가테라고 했었다.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사파이어가 고개를 끄덕이자 피전 블러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사람과는 별로 엮이기가 싫어. 부담스럽다고 할까.”
“동감이야.”
“게다가 나에 대해 너무 많이 알아. 지나칠 정도로. 내가 알려주기 싫은 부분까지 알고 있어. 그 사람이랑 있으면 안전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단 말이야.”
사파이어는 이번에도 공감했다. 알료샤는 지나치게……. 사람을 파고든다. 내어주기 싫은 부분까지 멋대로 침범해서는 예측 못할 자극으로 사람을 건드린 달까.
“알료샤와는 어떻게 알게 된 거지?”
“이름으로 부르는 거야? 그 사람이랑 친구야?”
“알료샤라는 이름으로 부르라던데.”
“난 싫어. 그렇게 부르는 거. 억지로 친한 척 하는 것 같고 이상하고 부담스러워. 당신도 그 사람이랑 너무 가까워지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쓸데없는 참견일지도 모르겠지만. 나 같은 경우엔……. 아니다. 그만두자. 너무 개인적인 얘기야.”
“듣고 싶어.”
“내 약점이 될 부분이라 별로 알려주고 싶지가……. 하긴 당신한테 말해봐야 당신은 어디 가서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칠 것 같지도 않아. 당신 세공사한테 말고는. 내 이름이 아가테라고 했지. 보면 알겠지만 난 원래부터 독일인은 아니야. 입양된 거지. 알료샤는 내 부모님에 대해 알고 있어. 아니, 원래 부모 말고 나를 입양해 준 사람들 말이야. 그게 나를 불안하게 만들어.”
“킬러치고는 정보가 너무 밝혀졌군.”
“알료샤는 빅 브라더 같은 사람이야. 독자적인 정보망이 있을 거야. 마리야도 알료샤를 싫어해. 그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모르겠어.”
“어쩌면 나에 대해서도.”
“어쩌면 당신에 대해서도. 맞아. 그럴지도 모르지.”
전투식량이 다 데워졌다. 피전 블러드가 나뭇가지로 뜨거운 캔을 살살 건드려 불 밖으로 끄집어냈다. 사파이어에게 하나를 건네주고 나머지 하나는 자신의 앞으로 끌어당기면서 피전 블러드가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어쨌든……. 당신이 알렉산드라이트를 알료샤라고 부른다면 나도 아가테라고 불러도 돼. 사실 코드네임으로 불리는 건 나한테 좀 어색하거든. 딱히 당신과 친구가 되겠다는 소리는 아니야. 그냥 아가테라고 수십 년 동안 불리다보니까 그게 익숙해서 그래. 사람과 대화하는 느낌이 든 달까.”
“아가테.”
사파이어가 피전 블러드의 이름을 불러보자 피전 블러드가 웃음을 터뜨렸다.
“다른 여자였으면 먹혔겠다. 확실히 먹혔겠어.”
“무슨 뜻이지?”
“당신은 그럭저럭 잘생긴 남자야. 목소리는 상당히 좋은 편이고. 당신이 살인청부업자라는 걸 모르는 여자들은 당신이랑 한 번 자보고 싶다고 생각할걸. 위장임무 때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을 거야.”
알고 있다. 이미 몇 번이나 속여 넘겼다. 필요하다면 그는 표적들을 유혹했다. 남자든 여자든 가리지 않고. 그를 갈망하는 사람들은 셀 수 없이 많았기에 그는 욕망의 눈빛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자기 자신은 도저히 공감할 수 없지만.
“과거가 딱히 좋은 거라곤 할 수 없어.”
피전 블러드가 화제를 바꿨다.
“내가 기억 못하는 과거라면 묻어두는 게 나을 때도 있지. 이미 아는 것도 묻어두고 싶은데 모르는 건 또 어떤 위험성이 있을까. 내가 과거로 돌아간다면 내 기원에 대해 알아보지 말고 그냥 묻어두라고 했을 거야. 그럼 내가 이 자리에 있지도 않았겠지. 어떤 인생을 살게 됐을까. 평범하게 남자를 만나서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고……. 아마 그렇게 흘러갔을 거야.”
“무슨 일이 있었길래?”
“뻔한 이야기잖아. 서구세계에 입양된 동양인이 자신의 뿌리를 알고 싶어 한다. 진짜 부모가 누구인지, 왜 버려졌는지, 뭐 그런 것들 말이야……. 결말도 뻔하지.”
뻔하다는 말은 사파이어에겐 통하지 않는다. 그에게 일반 상식을 기대하면 안 된다. 사파이어가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는 눈으로 바라보자 피전 블러드가 포기한 듯이 털어냈다.
“난 한국인이었어. 단 한 번도 그랬던 적이 없지만 어쨌든 한국인이었지. 난 갓난아기 때 독일로 왔어. 사실 한국에 대해 기억나는 건 아무것도 없어. 하지만 당신도 알잖아. 사회의 소수로 살아간다는 게 어떤 건지.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고향이라고 해도 고향 그 자체가 존재한다면, 차별 당하다보면 어느 순간부터 그런 걸 동경하게 되는 거야. 갈망하게 돼. 내 존재가 소수가 아닌 곳. 나 같은 사람이 다수로 있는 곳. 그런 곳에서는 차별 받지 않을 거라고 착각하게 돼. 인종차별도 없고, 더불어 성차별도 없을 거라고 착각하게 되어버리는 거야. 멍청하게.”
전혀 웃긴 이야기가 아니었지만 피전 블러드는 낄낄 웃었다. 아마 자기 자신의 어리석었던 결정에 대해 웃는 걸지도 모른다.
“대학을 졸업하고 일자리를 구하기 전에 이 문제를 확실히 해두고 싶었어. 그 때가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았거든. 내가 그 땅에서 뭘 찾으려고 했는지도 가물가물하지만 그냥 막연하게 가봐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어. 그래서 한국에 갔지. 그 때까지 한국어라고는 배워본 적이 없어. 그들이 뭐라고 하는지 단 한 마디도 못 알아듣겠더군. 그래도 아름답다고 생각했어. 적어도 거기선 눈 찢어진 동양 계집애라는 소리는 안 들었거든. 그냥 계집애였지. 그래도 그게 어디야. 독일에서는 피부색에다가 성차별까지 겹쳤는데, 거기서는 적어도 인종차별은 없었던 거니까. 전 세계 어딜 가도 내가 여자라서 당하는 차별은 있어. 그렇게 생각하면 이건 남는 장사였던 거지.”
“미안하군. 성차별 이야기는 잘 이해가 안 가.”
“그걸 이해한다면 당신을 사기꾼이라고 했을 거야.”
“한국에 가서 결국 어떻게 됐지?”
“많은 기관들을 방문했지. 많은 사기꾼들을 만났고. 힘들었어. 결국 날 낳은 사람을 찾아냈지. 내가 뭘 기대했던 건지는 모르겠어. 뭘 원했을까. 왜 버렸는지에 대한 이유? 미안하다는 사과? 포옹이나 애정을 원했을까? 그들의 눈물을 원한 걸까? 알 수 없는 일이지. 아마 앞으로도 모를 거야.”
식사가 식어가고 있었지만 피전 블러드는 그것을 조금도 건드리지 않았다. 사파이어도 마찬가지였다. 피전 블러드에게는 허기보다 중요한 이야기였고 사파이어에게는 흥미롭기 짝이 없는 타인의 인생이었으니까.
“처음에 그 사람들은 날 만나려고 하지 않았어. 그렇지만 결국 만나게 됐지. 그들은 사과하지 않았어. 미안해하지도 않았고. 귀신을 본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보더라고. 마치 죽었어야 했는데 왜 여기 있냐는 듯이……. 나는 그들에게 있어서 태어나선 안 되었던 아이였던 거야. 그들에겐 아들이 있었지. 나를 버리고 난 다음에 태어난 아이래. 모든 것이 그 아이를 위해 준비된 것이었을 뿐 나를 위한 건 아무것도 없었던 거야. 그렇게 된 이야기지. 당신이라면 평생 겪지 않았을 이야기네. 가난해서 버렸다면 몰라도 남자여서 버려지지는 않았을 거야.”
“혹시 지금 유감을 표해야 하는 상황인건가?”
“그래.”
“유감이군.”
“무리하지 마. 당신이 나한테 악감정 없다는 거 알아. 당신은 그냥 감정이 없는 거야.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 감이 안 잡히는 거지. 그냥 당신답게 가만히 내버려두면 돼. 이제 나한테는 꽤 옛날 얘기가 되어버렸으니까 딱지가 떨어져도 한참 전에 떨어졌어.”
“딱지는 비유인건가?”
“그래. 정신적인 상처. 이야기를 계속해도 될까?”
“계속해.”
“세상이 자신의 존재를 원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 것만큼 잔인한 순간이 있을까? 난 마음씨 좋은 독일 부부의 자식이 되었지만 인종 때문에 독일에서도 항상 이방인이야. 독일인으로 자랐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항상 이방인이고. 전 세계 어딜 가도 내가 고향이라고 부를 곳은 없지. 내가 속해 있는 곳은 없는 거야. 바꿔 말하자면 내가 속할 곳을 내 스스로 결정하게 되는 거지. 남들처럼 단순하게 주어지는 게 아니라 내가 능동적으로 결정해야 하는 거야. 그리고 난 독일인으로 남기로 결정했어. 어려운 선택도 아니었어. 한국이 나에게 우호적이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가망이 전혀 없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다시 독일인으로 돌아가는 건 정말 쉬운 일이거든.”
피전 블러드는 자신의 정체성을 결정했다. 더불어 그 순간 세상에 대한 믿음도 온전히 내다버렸다.
유년기 시절부터, 아니 그 이전에 독일에 막 도착한 갓난아기일 때부터 차근차근 쌓여 온 모든 것들이 한 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기대, 희망, 이상향에 대한 동경, 어쩌면 나를 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환상.
그런 것들은 현실의 냉혹함 앞에는 너무나도 연약했고 보잘 것 없었다.
“그 뒤로는 딱히 목표가 없어지더라고. 잘 살아야겠다, 번듯하게 살아야겠다 뭐 그런 것들 말이야. 될 대로 되라 하고 살았지. 부모님한테는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 아니, 그 한국인들 말고 독일 부모님들 말이야. 내가 은혜를 갚아야 할 대상이 있다면 바로 그 분들이야. 그것만큼은 부정할 수가 없더라고. 길바닥에서 죽던가, 거지가 됐던가, 매춘부가 됐던가, 장기매매로 생을 마감하던지……. 그렇게 끝날 수도 있는 인생이었는데 어쨌든 독일은 선진국이거든. 지붕과 따뜻한 식사를 제공해주고 대학 졸업장까지 손에 쥐게 해줬어. 애정도 나쁘지 않게 받았고. 근데 안 좋은 일은 꼭 한 번에 겹쳐서 오더라. 아버지가 암에 걸렸어. 난 돈이 필요했고. 그리고 마리야가 나타났지.”
피전 블러드가 처음부터 저격수로 이름을 떨친 것은 아니었다. 마리야 이바노브나가 얼굴을 반쯤 가리는 선글라스를 끼고 피전 블러드, 아니 아가테였던 여자와 처음 만났을 땐 둘 사이에 어떤 신뢰도 없었다.
마리야는 아가테에게 물건 배달을 부탁했고 아가테는 꽤 위험했던 첫 임무를 완수하면서 보상으로 큰돈을 받았다. 그렇게 둘 사이의 첫 계약이 성공적으로 종료되고 아가테는 피전 블러드가 되었다.
“아버지는 결국 암을 못 이겨냈어. 그래도 시도는 해봤다는 거에 대해 난 만족해. 안 그럼 평생 후회했을 거야. 그 시도를 해볼 수 있게 마리야가 돈을 줬지. 그 다음부터는 쭉 이런 식이야.”
전투식량은 이제 먹을 수 없을 만큼 차갑게 식어버렸다. 피전 블러드는 전투 식량을 다시 모닥불 위에 올려놓으며 “말이 너무 많았네.”하고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그래도 과거가 존재하지 않는 것 보단 나으니까.”
“지금 그거 위로야?”
“위로?”
사파이어가 고개를 갸웃했다.
“내 말이 위로인건가?”
“아니……. 고마워.”
사파이어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말이 피전 블러드에게 어떤 위안을 준 것 같았다. 이 반응을 잘 기억해둬야 할 것 같았다.
둘은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잊었던 허기가 존재감을 강하게 드러내며 다시 맹렬하게 몰려오기도 했고, 사파이어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 딱히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위기는 아까전보다 훨씬 더 온화해진 상태였다.
돌아가면서 불침번을 서기로 하고 피전 블러드가 먼저 잠들었다. 사파이어는 아까보다는 작게 타오르는 모닥불에 나뭇가지를 연료로 밀어 넣고 불이 좀 더 타오르게 낙엽을 뿌리면서 피전 블러드의 이야기를 곱씹어보았다.
그에게 있어서 타인의 인생이란 수수께끼로 가득한 혼돈이었고 언제나 부족한 정보로 추리해내야 하는 미완성 그림이었다. 이렇듯 직접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항상 몇 가지 요소가 빠져있는 수수께끼였는데 아예 정답과 해설까지 모두 알려주자 피전 블러드라는 인간에 대한 흥미가 사라졌다.
싸늘하게 비웃는 것은 아니었다. 확연하게 완성된 어떤 물체에 대해 느끼는 안도감, 편안함, 믿을 수 있는 단단함, 그런 것들이었다.
정의를 내려 보자. 어쩌면 이게 사람들이 말하는 우정이라는 게 아닐까? 사파이어는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고 감도 잡히지 않는 개념이지만 이게 그것이라면 썩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리에서 암살 대상이었던 뚱뚱한 영국인 남자가 우정에 배신당했다며 울부짖었고, 그 남자의 동료라던 정보부 요원은 우정을 짓밟혔다며 분노했던 모습이 떠올랐다. 아직까지도 그들의 행동이 혼란스럽게 느껴지고 그들의 감정 변화에 전혀 공감할 수 없지만 이해해보려고 노력은 했다.
그의 인생은 이렇다 할 기복이 없이 평탄한 것이었다. 큰 잘못을 저지르면 큰 벌을 받았기 때문에 차츰차츰 실수도 줄고 있었다.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서 큰 유감은 없었다. 극히 최근 들어서야 다른 인간의 행동양식을 모방하고 그 의미를 파악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필요가 있을까? 사파이어는 이미 훌륭하게 연기를 해오고 있었다. 적어도 임무 수행을 못할 정도는 아니다. 남을 이해해야겠다는 욕구가, 다른 사람처럼 돼야겠다는 욕구가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 그리고 무언가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이 막연한 불안감은 어디서 생겨나고 있는 것일까.
과거. 과거에 대해서 집착해 본 적은 없다. 그에게는 현재만이 존재했을 뿐이고 미래조차 없었으니까.
그러나 날 것 그대로인 남의 인생 이야기를 듣고 나서 그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벤체슬라스가 그의 부모가 아니라는 것쯤은 안다. 이전에는 그것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나는 어디서 왔단 말인가?
이전에는 모든 게 단순했는데. 밤이 깊어가도록 사파이어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피전 블러드가 사파이어를 흔들어 깨웠다. 동도 트지 않은 새벽이었다. 타닥타닥 피어오르고 있던 모닥불은 어느 샌가 완전히 꺼져 있었다. 자연스럽게 꺼진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끈 흔적이 있었다. 피전 블러드가 껐을 것이다.
잠시간 멍한 얼굴로 피전 블러드를 올려다보던 사파이어가 날카로운 눈빛을 되찾고 일어나 앉았다. 피전 블러드가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해보였다. 사파이어는 가방을 뒤져 무기를 꺼냈다. 글록은 어제 늑대에게 물어 뜯겨서 못 쓰게 됐지만 총기는 많이 있었다.
벤체슬라스는 무기에 돈을 아끼는 사람이 아니다. 무게 때문에 제한이 걸려서 그렇지 그런 제한마저 없었다면 아예 유탄발사기까지 챙겨줬을 것이다. 사파이어는 발터 P99을 꺼내들었다.
“상황은?”
“누군가가 있어.”
“동물인가?”
“사람 소리 같아.”
“야영객이나 조난자일 가능성은?”
“이 새벽에?”
무슨 소리가 들린다. 동물이 아니고 사람으로 추정된다. 아군이 합류한다는 소리는 없으니 적이거나 우연한 만남일 가능성이 있지만 날이 밝지도 않은 이 새벽에 인적 없는 숲 속을 돌아다닐 사람이 있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역시 적일까? 적이라고 가정해도, 그들의 위치를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목표는 무엇인가?
“목표는 페터 괴츠만이겠군.”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몇 명이나 되나?”
“둘 이상. 아니 셋. 아니……. 그 이상일지도.”
“알았다.”
사파이어가 조심스럽게 일어나 쭈그린 상태로 살금살금 걸었다. 커다란 나무 하나를 엄폐물 삼아 몸을 기댄 사파이어가 피전 블러드에게 손짓을 해보였다. 숨어라. 엄호해라. 피전 블러드는 고개를 저었다.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다.
사파이어는 다시 손짓해서 야영의 흔적과 가방들을 가리라고 지시했다. 피전 블러드가 낙엽들을 끌어 모아 숨기고 있는 동안 그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자박 자박 걷던 발소리가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사파이어는 늑대와 대적할 때 썼던 보위 나이프를 쥐고 한 손에는 권총을 든 채 발소리가 지척에 닿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소리가 공격범위 안에 들어왔다고 판단한 순간 사파이어가 나무 바깥쪽으로 튀어나갔다.
바닥을 박차며 나뭇가지를 우지끈 부러뜨리는 소리에 발소리의 주인공이 움찔 놀라는 것이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방어하려는 것도 느껴졌지만 그 속도보다 사파이어가 더 빨랐다. 그는 어둠 속에서 덮쳐오는 사신과도 같았다.
사파이어가 상대방을 덮쳐 쓰러뜨리고 그 위에 올라타며 목에 칼날을 지그시 밀었다. 칼끝이 살갗과 딱 붙어 있어서 조금만 움직이더라도 큰 상처가 날 것 같았다. 상대방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둘 다 이 숲의 어둠에 익숙해진 상태라지만 서로 상대방의 얼굴은 제대로 식별할 수 없었다. 간신히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서로의 손에 들린 무기 정도. 사파이어가 칼을 꾹 밀어 넣으면서 위협했다.
“총 버려.”
상대는 손에 쥔 권총을 쉽사리 포기하지 않았지만 자신이 사파이어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는 것보다 사파이어가 칼을 꾸욱 찔러 넣는 게 더 빠를 거라는 걸 깨달았는지 총을 버렸다.
“누구냐 넌.”
“페터 괴츠만을……. 찾고 있다. 너는 누구지?”
“그를 왜 찾는 거지?”
“너는 누구냐고 물었는데.”
“질문은 내가 한다. 죽고 싶지 않으면 대답해.”
“그건 대답할 수……. 잠깐, 잠깐! 알았다. 말하겠다. 그만, 칼을 조금만 치워줘라.”
목소리로 미루어보아 30대 중반은 되어 보이는 남자였고 영어는 몹시 서툴렀다. 영국식 영어를 쓰고 있었지만 말의 습관과 억양으로 보건데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이었다.
이정도로 분석할 수 있는 이유는 사파이어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프랑스어로 둘러싸인 환경에서 지냈기 때문이다. 남자는 프랑스인이었다. 적어도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나라에서 왔다.
“나는 그를 죽이라고 고용된 청부업자다…….”
“거짓말.”
“아니다. 나는 그를 죽여야……. 허억!”
“다음 기회는 없다. 똑바로 대답해라. 어느 기관 소속인가?”
남자가 헛소리를 계속하자 사파이어가 살짝 뗐던 칼을 쑤욱 밀어 넣었다. 남자의 목 살갗이 베이면서 핏줄기가 한 방울 흘러내렸다. 남자가 겁에 질려서 뻐끔뻐끔 거리며 대답을 못하자 사파이어가 다시 칼을 살짝 떼 주었다.
남자는 패닉 상태에 빠지지 않으려는 것인지 숨을 몰아쉬면서 대답을 할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다. 이 남자는 대답하지 않겠군. 사파이어는 망설임 없이 남자를 죽이려고 했다. 그 때 총성이 울렸다.
피전 블러드가 쏜 것이다. 사파이어가 뒤를 흘끗 본 사이 남자가 온 힘을 다해 사파이어를 밀치고 힘으로 그를 찍어 눌러 이번에는 자신이 사파이어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몸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사파이어가 총으로 남자를 쏘려다가 몸싸움에 밀려서 총을 놓치고는 칼을 쥔 손까지 거꾸로 비틀려 자신의 목을 찌르는 모양새가 됐다. 순간 방심해서 당하기는 했지만 잔뜩 흥분한 남자와 달리 사파이어는 표정 변화 없이 냉정한 상태였다.
사파이어가 무릎으로 사타구니를 올려치자 남자가 헉하는 소리를 냈다. 사파이어는 남자에게 잡혀 비틀린 손을 다시 힘으로 풀어내더니 눈 깜짝할 새에 남자를 베어버렸다.
두꺼운 칼날이 섬뜩한 소리를 내며 살을 베고 지나가자 남자의 목에서 피가 쿨쿨 쏟아졌다. 얼굴 위로 피가 후두둑 떨어졌지만 사파이어는 개의치 않고 재빨리 손을 놀려 남자를 완전히 죽였다. 그리고 시체를 밀어내며 일어났다.
사파이어는 놓쳤던 총을 회수하고 남자가 버린 총까지 주워들며 피전 블러드에게로 다시 돌아왔다.
“하나 잡았어.”
“정보기관들이군. 페터 괴츠만도 표적인 것 같다.”
“그가 가지고 있는 정보가 어지간히 위험한 물건인가보지. 이제 해가 뜰 시간이야.”
사방이 급속도로 밝아지고 있었다.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깜깜한 어둠이었는데 어느 샌가 시퍼렇게 밝아오는 아침이 숲을 깨우고 있었다. 시야가 확보되면서 곳곳에 숨어있는 암살자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 둘이 아니었던 것이다.
피전 블러드가 “Scheisse!(젠장!)”하고 욕설을 내뱉었다.
“저격으로 얼마나 처리할 수 있을 것 같나?”
“전부 다.”
“전부 다?”
“그치만 이렇게 노출된 상태에서는 내가 먼저 죽어.”
“알았다.”
사파이어가 “알았다.”하고 대답하면 그 다음은 항상 격렬한 전투를 대비해야한다. 이제는 일종의 신호가 되어가고 있었다. 피전 블러드는 그의 짧은 대답에서 “내가 미끼 역할을 할 테니 네가 사냥해라.”라는 뜻을 읽었다.
피전 블러드가 고개를 끄덕이자 사파이어가 바닥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은 침엽수림 사이를 사신이 질주하고 있다. 생김새는 사람이지만 그는 슈바르츠발트의 깊은 어둠을 배회하는 악령이 틀림없다. 그는 총구 앞에서도 도망가지 않고 그림자처럼 사라졌다가 수풀의 그늘 속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가 총을 쏘기 시작하자 숲 속의 암살자들 역시 총을 쏘기 시작했고 시끄러운 총성 속에서 누가 누구의 총에 맞았는지, 비껴나갔는지 분간할 수도 없었다.
쭉쭉 뻗은 나무들은 일견 시야가 트여 보이지만 사실은 엄청나게 제한하고 있다. 눈앞의 풍경을 감옥의 쇠창살처럼 세로로 어지럽게 가로막고 있는데 사신은 그 사이에서 불쑥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다.
사람 그림자가 보일 때마다 암살자들은 그 쪽에 대고 총을 쐈고, 그 와중에 어디서 날아오는지 모를 총탄에 하나씩 하나씩 암살자들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저격이다. 저격수가 따로 있다! 하지만 저격수에게 신경을 쏟을 여력도 없을 만큼 사신의 칼날은 급작스럽게 닥쳐왔다.
모두가 모두의 적이었다. 지금은 이름 모를 저격수와 불쑥 나타나는 사신 같은 남자 때문에 일시적으로 단결이 된 상태지만 원래는 서로가 서로의 등에 칼을 꽂아야 하는 사이다.
그들은 목표는 전부 페터 괴츠만이었지만 그 하나의 목표를 노리는 라이벌이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다. 페터를 죽여야만 하는 자들과 페터를 살려야만 하는 자들이 싸우고 있었다.
서로의 조국을 위해, 시민의 안녕을 위해.
사파이어는 그런 그들을 모조리 도륙하고 있었다. 임무를 위해.
이제는 해가 제법 높게 솟았다. 새벽부터 광란의 살육이 벌어진 숲 속은 시신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습격자가 전부 다 죽은 건 아니다. 많은 수가 도망쳤을 것이다. 그들의 목표는 페터 괴츠만이니까 사실 교전을 할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타인을 해치고 자신도 그만큼의 상처를 입던 사파이어는 중간부터 폭발적인 아드레날린에 정신이 몽롱해져 어느 순간부터 눈앞에 있는 것을 맹목적으로 쫓기 시작했다. 더 이상 저격수의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가 쫓고 있던 암살자는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수풀과 나무 사이를 지나 연기가 흩어지듯이 사라졌다. 그는 환상을 쫓고 있던 것인지도 모른다. 달리던 사파이어의 발이 점차 빠른 걸음으로 변했고, 조금 더 느려졌고, 이윽고 멈춰 섰다.
사파이어는 숨을 몰아쉬면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양손이 모두 피투성이였다. 무슨 짓을 한 건지 그 두꺼운 칼날이 부러져 있었다. 사파이어는 망가진 칼을 버리고 다른 손에 쥔 총을 확인했다. 탄창이 비어 있었다.
사파이어는 이제야 여기가 어딘지 가늠해보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총성도, 비명도. 인간의 폭력성에 놀란 숲 속 짐승들마저 울부짖는 것을 멈춘 것 같은 고요함이었다.
다시 돌아가야겠군. 하지만 어느 방향으로 얼마만큼 달려왔는지 모르겠다. 조난당한 것이다. 어이없게도. 사파이어는 옷깃에 부착된 발신기를 만지작거렸다. 발신기가 붙어있지 않았다. 격렬한 전투 중에 떨어져버렸을지도.
사파이어는 숨을 고르고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어디선가 물소리가 나고 있었다. 물을 따라가면 적어도 숲에서는 빠져나갈 것이다.
사파이어는 아까 전과 달리 발걸음이 무겁다고 느꼈다. 이상할 만큼의 피로감이 몽롱한 정신과 뒤섞여 시야를 어질어질 흔들었다.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마를 짚어보니 열이 나고 있었다.
그제야 팔뚝의 상처가 기억났다. 팔뚝에 감아놓은 붕대는 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자신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것인지 남의 피인지 분간이 안 간다. 아마 균도 파고 들어갔겠지. 그러고 보니 진통제도 먹지 않았다. 상처가 부어오른 것이 느껴졌다. 열은 거기서부터 시작하고 있었다.
이거 아주 난처하군. 무기도 없다. 숲을 빠져나가는 동안 아무도 발견하지 않기를 빌 수밖에. 막상 여기서 나간다고 해도 지금 그의 상태로는 의사보다 경찰과 먼저 마주하게 될 것이다.
물소리를 따라간 사파이어는 흐르는 냇물을 발견했고 거기서 얼굴과 손의 피를 씻었다. 그리고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물줄기를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
슈바르츠발트 기슭에 위치한 작은 루터교회의 늙은 목사는 분명히 무슨 소리를 들었다고 확신했다. 그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지만 무언가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 그런 강렬한 예감이 있었다.
목사는 굽은 등을 펴고 느린 발걸음으로 교회 본당으로 향했다. 어차피 텃밭에는 더 할 일도 없었다. 본당 건물에 도착하자 문이 열려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원래부터 문을 잠가 두지는 않았다. 모든 사람의 안식처이니만큼 누구든 편하게 들어오라는 의미인데다가 신에게 다가오려는 사람을 감히 막을 수는 없었기에. 단지 이 근처 주민들은 특별한 일이 아니면 교회에 오지 않는데다가, 이곳도 너무 외진 곳이라 평소에 사람이 올 일이 없었기 때문에 의외였다.
누가 온 걸까? 문을 살펴본 목사는 손잡이에 피가 묻어 있는 것을 보고 예삿일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목사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가에서 멀지 않은, 강단의 기준으로 맨 끄트머리에 있는 기다란 의자에 한 남자가 지친 듯이 앉아 있었다. 바닥에 한 방울씩 떨어진 핏자국이 그가 있는 자리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가 목사를 발견하고 화들짝 놀랐다. 목사는 그를 진정시켰다.
“다쳤습니까?”
본인이 물어놓고도 어리석은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대답하지 않아도 남자가 상처투성이인 것을 알 수 있었다.
목사는 거북이보다는 훨씬 빠른 속도로 남자에게 다가갔다. 의자에 앉아있는 남자는 동양인이었고 젊은 청년이었다. 이 마을 주민들 중에는 동양인이 없다. 관광객일까? 슈바르츠발트에 캠핑하러 오는 사람들이 이따금씩 있으니 그런 사람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목사가 그를 다시 앉혔다.
“앉아있으세요. 그냥 앉아있으세요. 저런…….”
남자는 대답하지 않고 목사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독일어를 모르는 걸까? 부상의 충격 때문에 정신이 없는 걸지도 모르지.
목사는 잠시만 기다리라고 하더니 본당 안쪽으로 사라졌다가 구급상자를 들고 나타났다. 남자는 목사가 자신의 상처를 알콜 솜으로 닦아내고 소독약을 바르고 치료하는 걸 가만히 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문이 열려 있어서 들어왔습니다.”
그는 영어를 썼다. 목사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 눈을 가늘게 뜨며 기억을 더듬었다. 오랜만에 쓰는 거라 가물가물했지만 그는 영어로 대답할 수 있었다.
“그렇군요. 당신이 누구든 간에 환영합니다. 이곳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으니까요. 그런데 어쩌다 이렇게 다쳤습니까?”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목사는 더 캐묻지 않았다. 그가 관광객이 아니라 도둑일수도 있고, 정말 사고를 당한 것일 수도 있지만 거기까지는 자신이 알 바가 아니다.
이따금씩 이런 곳까지 구걸을 하러 오는 걸인들도 있었지만 그는 내쫓지 않았다. 그럴 권한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남자는 목사가 자신을 경계하지 않는다는 것에 약간 놀라는 것 같았다. 오히려 그야말로 의심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나를 의심하지 않습니까?”
“왜지요?”
“내가 강도거나 도둑이라면…….”
“글쎄요, 내 눈에 보이는 건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 부상자인데……. 나머지는 주님이 알아서 하시겠지요.”
목사는 원래 색깔을 알기 힘든 남자의 팔뚝 붕대를 풀었다가 작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곤 손을 떨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침착하게 알콜 솜을 집어 들었다.
남자의 상처는 그 정도로 부어올라있었다. 상처를 닦고 깨끗한 붕대로 갈아주는 것은 할 수 있지만 항생제 주사 같은 것은 없다. 남자의 눈을 보니 제정신도 아닌 것 같다. 이마를 짚어보니 열이 나고 있었다.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은데요.”
“병원은 안 됩니다.”
멍하니 정신을 놓고 있던 남자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목사는 남자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작업을 마저 했다. 다행히 항생제는 없어도 진통제는 있었기 때문에 임시방편으로 열과 고통은 해소될 수 있었다.
“조금만 더 있다가 가겠습니다.”
“필요한 만큼 얼마든지 머무십시오. 이곳은 모든 사람의 안식처니까…….”
남자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고개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딱딱한 나무 의자지만 지금 이 순간엔 그를 지탱해주는 유일한 것이었다.
고요한 곳이었다. 내부는 별다른 장식 없이 소박했고. 널찍한 창문으로 비쳐 들어오는 햇빛은 광량이 적당하고 부드러워 포근하고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정면의 강단 쪽에 있는 창문은 스테인드글라스로 되어 있었는데 그림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남자로선 알 수 없었다.
지금처럼 몸이 망가진 상태가 아니더라도 이곳은 잠을 불러일으킬 장소였다. 벤체슬라스의 품 안이나 지친 몸을 끌어당기는 침대의 감촉과는 다른, 뭔가 다른 종류의 수면욕을 채워주는 곳이었다.
목사는 눈을 감고 있다가 그대로 곯아떨어진 남자를 부축해 긴 의자에 눕도록 해주었다. 그리고 그가 잠을 잘 수 있도록 자리를 피해주었다.
목사는 구급차를 부르지도 않았고 경찰에 신고하지도 않았다. 텃밭에 밭일 도구를 내버려두고 왔다는 것이 떠올라 그것을 정리하러 갔을 뿐이다.
점심시간이 되었기 때문에 목사가 그를 깨웠다. 곤히 잠들어 있던 남자가 물벼락을 맞은 듯이 놀라며 깨어나자 목사는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예리하게 날이 선 칼 같은 인상의 남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잠든 모습은 무방비 그 자체였다. 요람 안의 아기를 깨운 듯이 남자는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이내 원래의 칼 같은 눈으로 되돌아왔다.
남자는 눈동자를 굴려 자신이 어디에 있는 건지 확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래 머물러서 미안합니다. 나가보겠습니다.”
“식사라도 하고 가십시오.”
목사는 당장 떠나려는 남자를 잡아서 바깥으로 이끌었다. 오늘은 화창하니 날씨가 좋아서 바깥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해도 좋을 것 같았다. 본당 옆에는 창고로 쓰이는 작은 건물이 있고 그 옆에 긴 벤치가 두 개 있었는데 처마가 그늘을 지고 있어서 앉아서 쉬기에 알맞았다.
목사가 준비해 온 점심식사는 호밀 빵에 얇게 썬 햄과 치즈가 들어간 샌드위치, 사과 두 알, 그리고 우유였다.
“혼자 지내다보니까 대접해드리기가 녹록치 않네요.”
남자가 자기 몫의 샌드위치를 받아들고도 머뭇거리며 베어 물지를 못하자 목사는 혹시 입에 안 맞는 음식인가 염려했다. 한참 무언가를 생각하던 남자가 결심했는지 샌드위치를 먹기 시작했다. 남자는 사과와 우유는 거부하지 않았다.
목사는 남자에게 자신 몫의 사과마저 양보했다. 남자의 우람한 팔 두께로 봐서 분명 이 정도 식사로는 부족할 것이다. 어쨌거나 목사는 상당히 나이가 들었기에 젊은이처럼 먹을 수도, 그만큼 소화시킬 수도 없었다.
목사에게도 저런 때가 있었지만 이제는 지나간 시절인 것이다. 비록 엄청나게 조용하고 말수가 없다곤 하지만 젊은이의 행동 하나 하나에서 느껴지는 활기는 단조롭게 살아가는 늙은 목사에게 신선한 자극이 되어주었다.
목사의 눈길이 남자의 다친 팔뚝에 닿았다. 목사는 반사적으로 자신의 팔을 쥐었다. 타인의 고통을 보자니 어쩐지 자신도 그런 고통을 겪게 되지 않을까, 아니 이미 팔이 조금 아픈 것 같다 하는 착각을 느껴서였다.
목사는 남자가 자신의 이런 행동도 알아챌까봐 멋쩍어서 마치 팔이 가려웠던 것처럼 슥슥 긁는 척을 했다. 한참을 하지 않았던 습관인데 오랜만에 자극이 가해지자 참을 수 없는 불편함이 느껴져서 목사는 팔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고는 남자가 먹던 것을 가만히 내려놓았다. 둘 사이에 묘한 시선이 오고갔다. 남자가 최종적으로 확인했다.
“페터 괴츠만?”
목사의 동공이 크게 벌어졌다. 그는 숨을 들이켰다가 깊은 한숨으로 내쉬었다.
“내 이름은 파울 랑에입니다.”
“가명일수도.”
“가명일수도. 그러나 진짜 이름일수도.”
“페터, 괴츠만.”
남자가 다시 한 번 확인하자 목사가 더는 부정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올 것이 왔구나. 각오는 하고 있었다. 모든 것을 계획한 처음 그 순간부터 목숨을 내려놓을 것 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행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자신을 암살할 남자를 자기 손으로 돕게 될 줄은 몰랐지만.
목사는 눈을 감았다. 이 순간이 올 것을 알고 있었지만 죽음이 닥쳐오는 것을 끝까지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곧장 다가올 것 같은 죽음은 다가오지 않았다. 목사는 다시 눈을 떴다. 남자는 무언가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난 당신을 죽여야 돼. 당신도 알고 있겠지만. 그런데, 이상하군. 뭔가가 아주 잘못됐다는 느낌이 들어. 뭔지는 모르겠지만.”
늙은 목사는 이 순간이 농담인가 싶었다.
자신을 죽이려는 암살자와 한가하게 점심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어쩌면 이 조용한 암살자가 마음을 바꾸어 그를 살려줄지도 모른다. 죽음의 시간이 늦춰지고 있는 것만큼은 확실한 사실이니까.
어쩌면 이 남자가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동정심과 인간성에 호소해볼까. 그러나 남자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는 순간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목사가 성직자로 살아온 인생이 그것을 알았고, 성직자가 되기 이전에 첩보원으로 살아온 경험이 그것을 알았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과 다르게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다. 그 뿐이다.
그들에겐 동정심도 이해도 없고, 그것의 동기가 되는 악의마저 없다. 그들은 이해하지 못할 뿐이다. 그들에겐 자기 자신밖에 없다. 남자에게선 아주 익숙한 냄새가 났다. 목사가 수라장을 헤쳐 나오며 봐왔던 수많은 싸이코패스들의 냄새가.
그러나 남자에게 아주 감정이 없다고 단정 짓기에는 지금의 침묵은 설명이 되지 않았다.
“당신은…….”
한참 만에 남자가, 사파이어가 입을 열었다.
“목숨이 노려질 걸 알고 있었지. 그런데 피투성이인 남자를 의심하지도 않고 도와줬어. 왜지?”
“여기는 교회니까요.”
교회인 게 어떻다는 거지? 사파이어가 설명을 더 요구하는 눈으로 바라보자 목사가 씁쓸하게 웃었다.
“특별히 내가 더 선하다거나 당신의 정체를 알았기 때문에 목숨을 구걸하려고 한 건 아닙니다. 여기는 교회고 나는 성직자니까요. 내가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든 지금은 일개 목사일 뿐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었으니까 도운 것뿐입니다.”
“당신은 과거와 완전히 연을 끊은 게 아니야.”
“맞습니다. 해야 할 일이었기 때문이죠. 내부고발에 대한 이야기죠?”
사파이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목사가 다시 물었다.
“나는……. 당신은 나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습니까?”
“제거 대상이라는 것 뿐.”
“어차피 당신 손에 죽게 될 테니 알려주세요. 당신은 어느 기관 소속입니까?”
“기관? 난 그런 거 아니야.”
“그럼……. 아.”
목사의 주름진 눈꺼풀 사이로 연한 푸른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늙은 목사는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상대방의 정체를 파악해버렸다.
그의 얼굴에 새겨진 세월의 흔적은 그 주름의 깊이마다 숱하게 겪어온 경험과 정보를 축적하고 있어 눈앞의 낯선 남자가 알려주지 않는 사항까지도 알아채버렸다. 눈꺼풀을 몇 번 깜박거릴 시간 안에.
터무니없는 추측일수도 있지만 대체로 그의 추측은 옳았다. 목사도 한때 이 남자 같은 젊은이였다. 이런 젊은이들을 많이 스쳐지나온 데다가 그들 중 많은 수가 죽어가는 동안 자신은 오늘날까지 살아남았다.
“당신은 보석이군요.”
목사가 자신의 목숨을 걸고 폭로하려고 했던 것이 이들의 정체다. 모를 수가 있겠는가.
“당신에게도 세공사가 있겠지요. 당신은 자의로 그 길을 택한 겁니까, 아니면 타의인가요?”
여태까지 사파이어에게 이런 질문을 한 사람은 없었다. 사파이어는 잠깐 생각해보다가 짧게 대답했다.
“몰라.”
“그럴 리가……. 사람을 죽인다는 것에 대해 아무런 죄책감도 없나요?”
“명령이 있고 난 그걸 따를 뿐이야. 간단하잖아.”
“사람을 죽이는 거란 말입니다.”
“뒤처리는 항상 들키지 않게 잘 하고 있어.”
목사가 이해하지 못할 표정을 짓자 사파이어는 자신의 대답이 뭔가 잘못됐나 의아해했다. 익숙한 혼란이긴 하지만 목사의 얼굴은 화난 것 같기도 하고, 상처받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늙은 목사의 얼굴은 인종이 다르고 나이대가 다르다고 해서 오해할 수 있는 얼굴이 아니었다. 사파이어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의 비탄이었다. 사파이어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 속해 있는.
“사람을 죽이는 건 나쁜 일입니다.”
목사는 여태껏 누구도 그에게 해주지 않은 당연한 사실을 말해주었다.
“왜?”
그것이 사파이어의 해묵은 의문을 되살려냈다.
“법에 의해 금지되었다는 건 알고 있어. 살인을 들키면 내가 제약을 받는다는 것도 알아. 다른 사람에 의해 구속 되서 내가 죽을 수 있다는 것도 알고. 그래서 나쁜 거야. 거기까지는 알고 있어. 그런데 왜 사람을 죽이는 것 자체가 잘못된 거지? 들키지 않으면 되잖아? 들켜서 나쁜 것 아닌가?”
“누군가가 당신을 죽인다고 생각해보세요.”
“그건 안 돼.”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하는 짓이 정확히 그것과 똑같단 말입니다.”
“하지만……. 그건 남이잖아? 내가 아니고.”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도 목사는 사파이어가 불쌍했다. 종교에 귀의하기 전에도 목사는 이 남자 같은 젊은이들에게 측은함을 느꼈다. 그들은 죽을 때까지 모를 것이다. 이해하려고 노력은 할 테지만 평생 남과 같아질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남자는 그런 기회마저 박탈당했다. 목사는 세공사라는 집단이 무엇을 하는 자들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따위 악은 세상에서 뿌리 뽑아야 한다는 것도. 적어도 누군가는 알고 있어야했다. 더 이상 이 환멸 나는 짓거리가 재생산되지 않도록.
“당신을 날 죽여야한다면서 머뭇거리고 있지요. 왜 당장 명령을 따르지 않습니까? 당신 주인은 나를 죽이라고 했을 텐데요.”
“맞아.”
“당신의 질문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요? 궁금하지 않습니까?”
“확실히 성가시긴 해.”
“당신도 모르고 있는 양심은 아닐까요?”
“그게 뭔지는 많이 들어봤어. 아닐 거야. 하지만 당신은 점점 말이 많아지는군. 목숨을 구걸하고 싶어졌나?”
“목숨 걱정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날 좀 보십시오. 난 살만큼 산 늙은이입니다. 오늘을 넘기면 난 앞으로 얼마나 더 살까요? 당신보다는 살날이 적겠지요. 하지만 당신은……. 나보다는 당신이 문제 아닙니까.”
“내가?”
“그렇게 젊은 나이에,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미래가 있는데…….”
“하고 싶은 말이 대체 뭐야?”
“암살자가 되기 이전에 당신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세상이 끊임없이 그에게 묻는다. 너는 무엇이었느냐. 너의 과거는 어디 있느냐고.
사파이어가 부상을 입기는 했어도 눈앞의 늙은 목사는 맨 손으로도 죽일 수 있을 정도로 연약해 보인다. 그 역시 이전에는 자신과 비슷한 일을 했을 테지만 세월의 흐름이 그의 육신을 덮었고, 지금 그의 눈빛으로는 사람은커녕 동물 한 마리도 제대로 못 죽일 것 같다.
이전의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몰라도 지금은 슬쩍 누르기만 해도 손자국이 남을 정도로 부드러운 인간이었다. 목사가 그에게 묻는다. 너는 어떤 사람이었느냐고.
왜 그에게서 절박함이 보이는 것일까. 저 절박함의 목적은 무엇일까. 사파이어는 자신에게 목숨 구걸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누가 절박함을 연기하고 자신을 속이려 드는 건지도 구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늙은 목사는 뭔가 달랐다. 왜 그는 나를 안타까워하는 것일까. 나에게서 무엇을 보았기에?
“당신은 사람을 죽이고 싶습니까? 그게 당신이 원하는 겁니까?”
“좋아한다 싫어한다고는 생각해보지 않았어. 단지 그래야 하니까.”
“당신이 원하는 건 뭡니까?”
“내가 원하는 것…….”
목사와의 대화가 슬슬 짜증스러워지고 있었는데 마침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 나왔다.
“내가 원하는 건 휴식이야. 난 쉬고 싶어. 항상 피곤하거든.”
“사람을 죽여야만 휴식을 취할 수 있나요?”
“그래야 보상을 받잖아.”
“당신에게 보상을 주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질문이 너무 많군.”
“당신은 개가 아닙니다. 시키는 대로 하고 먹이를 얻어먹는 짐승이 아니란 말입니다. 당신은 인간입니다.”
슬슬 인내심에 한계가 온 사파이어가 목사를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사파이어는 움직일 수 없었다. 늙은 목사가 울기 시작한 것이다. 살려달라고 우는 게 아니라는 것은 안다. 그럼 무엇 때문에 울고 있는 것일까. 눈물은 언제나 자극이 커다란 감정이었다.
“이렇게나 젊은데……. 이렇게나 어린데……. 인생을 저당 잡혀서…….”
한 주먹에 목을 으스러뜨릴 수도 있을 것 같은 이 연약한 늙은 목사는 눈앞의 불쌍한 남자만 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눈에는 이용당하고 소모된 무수히 많은 영혼들이 보였다.
그들 모두가 순진했고, 자신은 옳은 일을 한다고 믿었고, 또 누군가는 협박을 당해서 일회용품이 되었다. 태생부터 악해서 살육 자체를 즐기는 놈들도 있었지만 그들에게도 다른 기회가 주어졌더라면 다른 인생길을 갈 확률이 있지 않았을까?
가능성, 가능성에 대한 질문이다. 그들이 이 길을 걷지 않았더라면. 혹시. 어쩌면.
자신 역시 머나먼 길을 돌아서 여기까지 왔다. 용서받을 수 있을 거라곤 생각지 않는다. 그의 교리가 속죄를 바라는 모든 자에게 선물처럼 구원을 안겨준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그 자신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었다.
여태껏 살아오면서 내가 해치고 죽여 온 자들은 누가 위로한단 말인가? 그들의 고통은? 목사가 이렇게 쉽게 구원을 받아버리면 그들이 느껴야 했던 고통과 두려움은 누가 보상을 해준단 말인가?
신이? 신은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목사 본인은? 신은 자신에게 죄책감까지도 맡기라고 했지만 과연 인간이 그럴 수가 있는 존재란 말인가?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행동을 용서할 수 없을 테지만 그럼에도 이 길은 가야만 하는 길이었다. 악행을 악행이라고 깨닫는 것 자체만으로도 값어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세공사에게 인생을 저당 잡힌 이 남자는 옳고 그른 게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한 채 오늘 또 하루 살아남거나, 혹은 우연히 죽고, 결국 나락으로 떨어지겠지. 누군가의 장기말이 되어서 1회용 소모품으로 사용되고 이용가치가 떨어지면 버려지는 것이다.
사람이 쓰레기처럼 버려진다.
이런 젊은이들을 이용하는 악의야말로 모든 것의 근원 아닌가. 세공사들, 그들은 오래오래 살 것이다. 건강하게, 비단옷을 걸치고, 손끝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으며.
늙은 목사가 슬픈 이유는 한 가지 더 있었다. 이 남자는 아직까지도 그를 죽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눈을 보면 이 남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살인을 저질러 왔으리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나 명령을 받았음에도 자신을 죽이는 것을 주저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안에는 아직 어떤 인간성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늙은 목사는 정말이지 이런 것을 보는 데에 지쳤다.
“큰 고통은 안겨주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 최대한 빨리 죽여줄 테니.”
목사의 눈물을 완전히 오해한 사파이어가 엉뚱한 소리를 했다. 그로서는 최선을 다해 추론한 결과가 이것이다. 이것이 타인의 감정을 알지 못하는 사파이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목사는 점점 더 걷잡을 수 없이 오열했다.
이 무자비한 남자의 내면에 있는 선함을 느꼈기 때문에. 목사가 발 빼고 빠져나왔다고 생각한 세계가 자신은 아직도 건재하고 세세토록 영화로울 것이라고 잔인하게 선언하고 있는 셈이었다.
사람이 도구처럼 사용되고 무가치하게 버려지는 순환은 계속될 것이다. 목사의 삶은 의미가 없었던 것일까. 지은 죄에 대한 대가가 이것이란 말인가.
표적을 앞에 둔 사파이어는 막상 아프지 않게 죽여주겠다고 말은 했지만 그걸 실행할 도구가 없어서 난처했다. 사파이어로서는 날붙이를 쓰는 게 상대의 고통을 최대한 덜어주는 방법인데 지금은 자신의 두 손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오열하는 늙은 목사는 사파이어가 적당한 도구를 찾는 동안 몇 분간 더 목숨을 부지하게 됐다.
그리고 그것이 사파이어에게는 수난의 씨앗이 되었다.
“사파이어.”
주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사파이어의 머릿속에 휘몰아치던 모든 혼란이 잠식됐다.
사파이어는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근원을 바라보았다. 장례식에라도 참석한 듯이 검은 수트에 검은 넥타이를 맨 백금발의 주인이 저벅저벅 걸어오고 있었다. 비인간적인 엄격함이 깃든 눈은 조각상 같은 미모마저 퇴색하게 만들었다.
벤체슬라스의 뒤로는 마리야 이바노브나와 피전 블러드의 모습이 보였다. 떨어진 발신기를 중심으로 피전 블러드를 찾아내고 거기서 사파이어가 사라진 방향과 범위를 가늠했겠지. 그 범위 내에서 식별할 수 있는 건물이 이 교회였던 거고. 추리하기 쉬운 결과다.
벤체슬라스의 얼굴을 보는 순간,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사파이어가 목사를 흘끗 돌아보았다.
딱히 신호라고도 할 수 없는 작은 행동이었지만 만약 이게 신호였다면 그 대상은 벤체슬라스가 아니고 분명히 목사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목사는 그 신호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나 자신의 소유물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는 벤체슬라스는 그 미묘한 행동의 변화를 알아채고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늙은 목사는 그저 작은 시골마을의 목사인 척 해야 했다. 사파이어가 신호를 보낸 것처럼. 다른 사람들은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하고 지나쳤을 것이다. 사파이어가 나중에 그를 죽이러 다시 나타날지 어떨지는 몰라도 지금 당장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그는 도망가지 않았다.
“사파이어, 보고해.”
벤체슬라스가 채근했다. 목사의 착각일까, 그를 돌아보는 사파이어의 눈길이 일순 원망스러워 보였다. 역시 착각일까? 사파이어는 제 주인에게 돌아서서 대답했다.
“페터 괴츠만입니다.”
“빨리 찾았군.”
코앞까지 다가온 벤체슬라스가 자신의 소유물을 위 아래로 쓰윽 훑더니 팔뚝에 감긴 붕대를 보고 “쯧.”하고 혀를 찼다. 그런 다음 자신보다 한참 작은 목사를 무감정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무감정하지만 그 눈에는 악의가 담겨 있었다. 마치 냉혈동물, 그래 뱀 같은 눈으로.
“꽤나 고생하게 만들었더군, 늙은이. 서류작업에 능숙한 모양이야. 알고 있는 정보랑 일치하는 게 거의 없는데. 회심하고 신의 종이라도 되길 원했나? 모사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던데.”
“벤체슬라스.”
마리야가 다급한 기색으로 부르자 벤체슬라스가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재촉하지 마, 마리야 이바노브나. 이 늙은이 꼴 좀 봐. 도망 못 가.”
“당신 신원이 걸린 문제가 아니니까 그렇지.”
“당신이 보상비를 걸고 날 고용했지. 그럼 내 작업 스타일도 알 거 아냐. 걱정하지 마. 깨끗하게 해결해줄 테니.”
둘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듣고 목사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당신들이 세공사들이군.”
“내 자랑하는 사파이어 단검은 잘 구경하셨나? 당신은 원한을 너무 많이 샀어. 은퇴 생활을 즐기고 싶었으면 입을 다물고 있었어야지. 아무런 힘도 없는 게 영웅놀이라도 하고 싶었나? 위키리크스처럼 말이야.”
벤체슬라스는 목사를 조롱하고 있었다. 그답지 않은 행위였다.
“당신 같은 사람들이 어디서 무슨 짓을 하던 관심 없어. 신경 안 쓴다고. 가서 북극곰을 구하든 열대우림을 구하든 마음대로 해. 그렇지만 내 안위를 건드리는 순간 지옥 끝까지 쫓아가서 목구멍에 칼을 쑤셔 넣어주지. 곧 죽을 당신에게는 별로 도움 되지 않을 충고일 테지만 말이야. 어쨌든 150만 유로는 내거니까. 당신 목숨이 그것밖에 안 된다는 거야. 150만 유로. 이 싸구려야.”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에게 “죽여.”하고 가볍게 명령했다. 사파이어는 즉각 움직이지 않았다. 그답지 않게. 벤체슬라스는 곧바로 벼락같은 분노를 터뜨리지 않고 짧게 헛웃음을 지었다.
그가 평소 모습답지 않게 목사에게 독설을 퍼부을 때부터,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의 행동거지를 곁눈질로 훑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도발은 목사의 얼굴에 침을 뱉는 것뿐만이 아니라 사파이어에 대한 확인 작업이기도 했다.
사파이어는 움직여야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딘가가 망가진 것인지 머리와 몸이 따로 놀고 있긴 하지만 몸은 주인의 목소리에 반응해 충직하게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목사가 낮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당신 안에 선한 인간이 들어있다는 걸 압니다.”
벤체슬라스의 하얀 얼굴이 악마같이 확 일그러졌지만 목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사파이어에게 말했다.
“당신에겐 그 따위 보석 이름이 아니라 진짜 이름이 있을 겁니다. 인간으로서의 이름. 당신의 삶이 있었을 거고 당신 자신의 인생이 있었을 겁니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당신이 그 길에서 벗어나 빛 아래로 나오기를. 나를 구원하신 분이 당신에게도 안식을 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웃기지 마, 이 노망난 늙은이가. 내 보석에 손자국 내지 마! 신 같은 건 없어. 내가 바로 신이다! 그에게 안식을 줄 수 있는 것도 나뿐이야! 너희의 위선적인 신 따위와 비교하면 훨씬 현실적이지. 나는 부름에 응답해. 나는 필요한 걸 충족시켜줘. 그 잘나빠진 신에게 빌어봐라. 지금 당장 살려달라고. 어때? 신이 응답하나? 스파이를 그만두고 도망친 게 결국 허상의 세계였다는 거다, 이 과대망상증 환자야.”
목사는 단 한마디의 반박도 하지 않았다. 물론 기도도 하지 않았다. 그는 상처 입은 짐승처럼 말을 쏟아내는 벤체슬라스에게 나직이 대답했다.
“당신에게도 안식이 있기를.”
벤체슬라스가 입을 딱 다물었다. 여태 살아오면서 제일 어이없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멍한 표정이었다. 벤체슬라스가 사파이어에게 명령했다.
“죽여.”
사파이어가 혼란스러운 눈으로 벤체슬라스에게 명령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이 시선을 되돌려주자 벤체슬라스가 먹이에 시선을 고정한 뱀처럼 두 눈을 부릅뜨고 외쳤다.
“죽여!”
사파이어가 겁에 질려 화들짝 놀랐다. 그 사이 목사는 도망쳤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최대 속도로 움직이는 거북이와 엎치락뒤치락 할 정도로 느리게 움직였는데 생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온 것을 직감했는지, 아니면 더 이상 본래 정체를 숨길 필요가 없어졌는지 젊은이 못지않게 빨리 움직였다.
뒤에서 사태를 관망하던 마리야가 이 한심한 작태에 혀를 차면서 “꼴좋네! 깨끗하게 해결해준다고?”하고 조롱을 날리며 목사의 뒤를 쫓았다. 피전 블러드는 복잡한 눈으로 사파이어와 벤체슬라스를 번갈아 쳐다보고는 곧바로 자신의 세공사를 뒤쫓았다.
벤체슬라스의 얼굴이 이 이상 없을 정도로 무섭게 일그러졌다. 사파이어는 심하게 떨고 있었다. 벤체슬라스는 가까스로 이성을 붙잡고 낮게 뇌까렸다.
“임무 수행이……. 우선이다.”
사파이어는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숨소리만 내도 이 자리에서 잡아먹힐 것 같았기 때문에.
벤체슬라스는 간신히 화를 억누르고 있는 모양인지 어떤 말소리도 내지 않고 사파이어에게 가라는 듯이 손짓했다. 사파이어는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았다. 손에 아무런 무기도 들지 않았지만 사파이어는 도망친 목사를 뒤쫓았다.
사파이어까지 사라지고 나자 벤체슬라스가 핏줄이 얼어붙는 것 같은 고함을 내지르며 허공에 대고 분노를 터뜨렸다.
한 때 첩보원이었던 늙은 목사는 자신의 과거와 완전히 연을 끊은 게 아닌 것이 확실해졌다. 그는 교회 창고 뒤편으로 사라졌는데 지하실로 보이던 창고 문을 여니 다른 비밀 문이 숨어 있었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만한 작은 토굴이었는데 마리야는 피전 블러드를 앞서서 들여보냈고 자신은 그 굴의 끝이 어디일지 가늠해보고 있었다. 때마침 사파이어가 도착했다.
“무기 아무것도 없지?”
마리야의 질문에 사파이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야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MP-446 바이킹을 건네주었다. 장탄 수 10발짜리 권총이었다.
사파이어는 무기를 받아들고는 창고 안을 살펴 벽에 걸려 있는 녹슨 도끼를 집었다. 나무 장작을 팰 때 쓰는 용도인 듯 한데 사용한지 오래되었는지 날은 뭉툭해보였다. 그래도 자루는 썩지 않고 아직 단단했다.
“이 안으로는 피전 블러드가 쫓아갔어. 어차피 혼자서밖에 못 움직일 테니까 밖으로 나가.”
사파이어가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마리야가 잠시 그를 잡았다.
“당신 주인이랑 끝낸 얘기지만, 페터 괴츠만은 반드시 죽어야 돼. 그래야 내가 살아. 그러려고 당신 주인을 고용한 거야. 당신도 함께. 당신이 일을 제대로 처리해야 당신 주인이 화를 덜 낸다는 소리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사파이어는 잠시 생각해보다가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야는 더 이상 사파이어를 붙잡지 않았다.
“그럼 얼른 가서 처리해. 주저하지 마. 당신 등 뒤에 서 있는 악마가 더 화내기 전에.”
굴의 끝은 슈바르츠발트의 외딴 숲 속으로 이어져 있었다. 언젠가 이런 일이 생길 줄 알고 미리 마련해 둔 탈출로다.
위기를 틈타 도망쳤을 땐 막상 아드레날린이 치솟아서 한창 때처럼 몸을 움직일 수 있었지만 이 나이에 장거리를 뛰기는 무리였는지 굴을 빠져나올 때쯤 되자 목사는 거의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심장에 무리가 갔는지 목사는 숨을 헐떡이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여기서 끝나게 되는가? 목사가 도망쳐봐야 앞으로 얼마나 더 도망치겠는가? 이왕 끝날 거라면 조금 더 가치 있게, 그리고 고통스럽지 않게 끝나고 싶다.
그 때 절박한 목사의 어깨를 붙잡는 손이 있었다. 깜짝 놀란 목사가 바닥에 쓰러질 뻔 하자 어깨를 붙잡은 손은 재빨리 목사를 부축했다.
“페터? 페터 괴츠만?”
그의 옛 이름을 알고 있는 또 다른 누군가다.
“진정하세요. 당신을 도우러 왔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네덜란드에서 왔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나라가 당신을 보호…….”
목사를 부축한 남자는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총성과 함께 쓰러졌다. 남자의 피를 정면으로 뒤집어 쓴 목사는 발작적으로 얼굴을 털어내며 주저앉았다. 그리고 엉금엉금 기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네덜란드인을 쏜 사람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숲에 총성이 한 발 더 울렸다. 그리곤 잠시간 고요한 침묵이 돌더니, 자박자박 발소리와 함께 또 다른 인물이 나타났다. 짧은 포니테일을 하고 있는 갈색머리 여자였다.
여자는 목사의 팔뚝을 잡고 일으켜 세우려다가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야생동물 같은 감각으로 주위를 살폈다. 여자의 총구에서 불이 뿜어지자 숲 속 저편 어딘가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즉사하지 않고 바닥을 구르며 피를 흘리는 비명소리였다.
여자는 다시금 목사를 일으켜 세웠다.
“덴마크가 당신을 보호합니다.”
“살려주시오. 제발 살려주시오…….”
“고개 숙여요!”
여자의 외침에 목사가 고개를 확 움츠렸다. 여자는 몸을 낮추는 게 약간 늦었기 때문에 어깨를 관통 당했다. 여자가 총을 놓치고 비명을 지르자 목사가 재빨리 그 총을 쥐었다. 손이 떨리긴 했지만 아직도 사격하는 방법은 기억하고 있었다. 여자가 씨근거리며 목사를 떠밀었다.
“여기서 북쪽……. 아니 그 방향……. 그 쪽으로 쭉! 쭉 가요! 돌아보지 말고!”
여자의 외침을 뒤로하고 목사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도망쳤다. 여기저기서 총성이 들려왔다. 비명소리와, 외침과, 놓쳤다, 발견했다, 여기다, 죽여라, 엄호해라, 온갖 소리가 뒤섞였다.
이 수라장에서 완전히 발을 뺀 줄 알았는데. 한 번 진흙탕에 빠지면 다시 깨끗해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죽음을 각오했다고 생각했는데, 전부 내려놓았다고 생각했는데 사신이 눈앞에서 목에 닿을 듯 말 듯 낫을 들이대자 잊고 있던 생존 본능이 되살아났다.
살고 싶다. 살고 싶었다. 단 1분 1초라도 더 살고 싶었다.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이 바라듯이.
당신이 오라하시면 가야겠지만 이 방법으로는 싫습니다. 너무나도 두렵고 무섭습니다.
이 순간 목사가 제일 빠르고 깔끔하게 모든 것을 정리할 수 있는 수단이 손에 들려 있었다. 재수 없게 누군가에게 팔다리를 맞거나, 한 번에 즉사하지 않아서 피 웅덩이에서 허우적거리는 것 대신에 총알 한 방으로 뇌수를 날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종교는 자살을 허락하지 않는다. 물론 살인도 허락하지 않지만 이 상황에선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아니 잠깐, 어쩔 수 없다면 내가 죽고 모든 것이 끝나는 게 가장 이상적이지 않을까?
살인과 자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이라면 성직자는 어느 쪽을 택할까? 그렇지 않으면 순순히 살해당하란 말인가? 신은 이것도 용서해주실 것인가?
한편, 표적을 쫓아 굴 밖으로 나온 피전 블러드는 전부 사살한 줄 알았던 라이벌들이 아직도 한 가득 남아있다는 것을 알고 혀를 찼다.
마리야와 합류해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총을 교체했고 총알도 넉넉히 챙겼다. 그렇다곤 해도 사냥해야 할 것이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다. 현재 숲 속 사냥꾼들은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상황이었다. 적과 아군이 뒤섞여서 누가 누구 편인지 분간하기도 쉽지 않았다.
피전 블러드에게는 단순하고 명확한 상태이기는 했다. 나 빼고 모두 죽여라.
얼마든지 도망가라, 사냥감들아. 내 총알은 너희를 놓치지 않아. 길리슈트를 입고 벌레에게 온 몸을 물어뜯기며 그 자리에서 몇날며칠이고 표적을 기다리고 있다가 일격필살의 저격을 하는 것만이 피전 블러드의 재능은 아니다.
피전 블러드가 시대를 조금만 잘못 타고났더라면 원하는 모든 것을 맞출 수 있는 능력을 얻는 대신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사격에는 무수한 변수가 있다. 바람의 방향, 세기, 습도, 기온, 총의 상태, 강선의 휘어짐, 중력, 총의 흔들림, 총을 쥐고 있는 사람의 흔들림, 호흡,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변수는 표적의 예측할 수 없는 움직임이다.
상대를 계산하고 나를 계산해서 쏜다, 맞춘다. 하나하나 계산할 수 없는 사소한 것들이 모여 경험이 되고 경험은 곧 예지에 가까운 감이 된다.
피전 블러드는 숲을 걸어가며 탄환 한 발에 한 사람씩 반드시 맞췄다. 정확히 머리가 아니더라도 팔이 됐든 다리가 됐든 꼭 맞추고 말았다. 뛰지는 않았다. 쏘는 족족 표적을 맞추는 마법의 탄환이 있다면 굳이 사냥감을 뛰어서 쫓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게다가 한 사람에게 두 발 이상의 탄환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저격의 달인이라고 남들이 멋대로 붙인 별명이 있지만 피전 블러드도 실수할 수가 있다. 최대한 탄환을 퍼부을 대상은 표적 하나 뿐이다. 나머지는 이 추격전에서 빠지거나 아니면 영원히 잠들어라.
그 때 누군가가 숲을 전력 질주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사파이어였다. 사파이어는 손에 쥔 총은 단 한 번도 쓰지 않고 낡은 벌목용 도끼를 들고 달려가며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찍어 내리고 있었다. 흡사 아메리카 원주민이 토마호크로 적을 학살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감을 되찾은 건가? 그에게선 어떤 주저함도 보이지 않았다.
사파이어가 본의 아니게 주변에 있는 인원들을 싹쓸이 해주고 있기 때문에 피전 블러드는 피격당할 염려 없이 목사를 뒤쫓을 수 있었다.
사파이어는 눈가에 튄 피를 털어내며 도끼날을 휘둘러 끈적하게 붙은 핏방울을 떨궈냈다.
총을 쏘는 것은 화약 냄새와 반동이 있지만 어딘가 비현실적인 감각이 있다. 내가 방아쇠를 당겼기 때문에 상대가 죽었다는 것을 눈으로 봐서 알겠지만 손으로 전해지는 감각은 탄환이 폭발하는 충격밖에 없달까. 그러나 도끼로 사람 머리를 찍는 건 전혀 다른 경험이었다.
피 맛을 보자 그는 다시금 단순하고 고요한 세계로 돌아왔다. 그의 머릿속에는 표적의 위치와 최적의 기회, 그리고 반항하는 상대를 어떻게 죽이고 반격을 어떻게 막아낼 것인가, 이런 수학 공식 같은 개념밖에 남지 않았다.
다친 몸이 피곤하다고 비명을 지르고 있지만 머릿속의 평온함과 맞바꿀 것은 아니었다.
목사를 죽여라. 그것이 그의 절대자께서 하신 말씀이다.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아가리를 쩍 벌린 악어처럼 고함을 치던 얼굴이 뇌리에 각인되면서 사파이어의 눈동자 역시 매섭게 날카로워졌다.
저 앞에 목사의 등이 보인다. 그는 이제 뛰지도 못하고 기다시피 도망가고 있다. 필사적이다. 그는 손에 총을 쥐고 있지만, 등을 돌려 사파이어의 모습을 확인했으면서도 그 총을 쏘지 못한다. 사격하는 방법을 잊은 건 아닐 텐데 부들부들 떨기만 할 뿐 어쩌지를 못한다.
그는 총을 자신의 머리에 대봤다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이윽고 그만둔다. 하지만 총을 어디다 던져버리지는 못한다. 남을 쏘지도 자신을 쏘지도 못하는 주제에.
사파이어가 저 늙고 힘없는 목사를 따라잡는 건 간단한 일이다. 지금 상태로는 몇 초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날이 무디긴 하지만 아까와는 달리 지금은 도끼도 가지고 있다. 목사의 머리를 박살낼 수 있다. 목사는 저항하지 못할 것이다.
죽여. 그는 명령을 따라야 한다. 죽여. 벌이 두렵지 않단 말인가? 주인의 진노를 마주하고 싶은가? 죽여. 죽여야 한다. 죽여!
도망치던 목사는 시시각각 등 뒤에 다가오는 사냥개의 숨소리에 그 공포만으로도 숨이 멎을 것 같았다. 피칠갑을 한 건장한 남자가 도끼를 들고 그를 죽이러 달려오고 있다. 마침내 발소리가 뒤통수 바로 뒤에까지 닿았을 때 목사는 문장도 단어도 되지 못한 소리를 지르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기다리던 도끼날은 덮쳐오지 않았다. 그의 신께서 자비를 베풀어 마지막 순간의 고통을 아예 느끼지도 못하게 만드셨단 말인가? 기적이 일어났나? 나는 벌써 죽은 것인가? 눈을 뜬 목사는 체할 듯이 숨을 들이켰다.
온 힘을 다해 목사를 찍어 내리려고 허공에 도끼를 치켜 든 사파이어가 머뭇머뭇 거리며 그를 죽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상하다 이상하다 하고 본인 스스로도 의아해 하는 것이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 한순간이었지만, 목사는 사파이어의 눈동자 안에서 두려움을 읽었다.
가엾구나. 가엾어라.
다음 순간 들려온 총성에 목사의 머리에 구멍이 뚫렸다. 목사는 무엇에 맞았는지도 모른 채 죽었다. 뇌가 완전히 기능을 멈추고 온 몸의 세포가 죽어갈 때까지 걸린 시간은 목사가 두려워하며 예상하던 것보다 훨씬 짧았다.
3초, 2초, 1초……. 그에게 주어진 죽음의 고통은 자비로웠다.
표적을 처단한 피전 블러드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총구를 몇 초간 그대로 겨누고 있다가 사파이어에게 다가왔다.
“뭐해!”
피전 블러드가 소리치자 사파이어가 악몽에서 깨어난 것처럼 “핫!”하고 도끼를 내렸다. 피전 블러드는 목사가 확실하게 사망한 것을 확인하고 난 다음에 사파이어에게 화를 냈다.
“바로 앞에서 총이라도 쐈으면 당신 죽었어!”
“아…….”
“죽였어야지!”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나며 누군가가 탁탁탁 뛰어왔다. 마리야 이바노브나였다.
“죽였어?”
“보세요.”
피전 블러드는 마리야 쪽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대답했다. 마리야가 죽은 목사의 맥박을 재보더니 엎드려 죽은 그를 돌려 눕혔다. 그리고 그의 품 안을 뒤졌다. 원하는 것이 나오지 않자 마리야의 손길이 점점 더 신경질적으로 변해갔다.
그러다가 가장 안쪽 주머니에서 USB 하나와 작은 편지봉투가 나오자 마리야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마리야는 그것들을 품 안에 넣고는 사파이어에게 손을 내밀었다.
“총 돌려줘.”
사파이어가 얼떨결에 총을 돌려주자 갑자기 마리야가 그것으로 사파이어를 겨누었다.
“마리야?”
“이쪽으로 와, 아가테.”
피전 블러드가 갑작스런 상황 변화에 당황하며 마리야 곁에 붙어 서자 마리야가 말했다.
“벤체슬라스를 고용한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었어. 그렇지만 전부 다 말한 것도 아니야. 어쨌든 거짓말은 하지 않은 거니까.”
사파이어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도끼를 든 채 그 총구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마리야가 무슨 말을 하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내가 말했지. 난 살고 싶다고. 살아야겠다고.”
마리야가 무언가를 더 말하려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입을 다물었다. 저승길 선물이랍시고 신중하지 못하게 이것저것 떠벌리는 성격은 아니다. 죽이고 난 다음에 시신에 대고 하는 말이라면 모를까.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까.
“그들이 이걸 원해. 이래야만 내가 살아.”
“그들?”
뒤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마리야가 날 선 눈으로 뒤를 돌아보는 순간 총격이 가해졌다. 피전 블러드는 마리야를 주저앉히며 재빨리 뒤에 응사했다. 나무를 엄폐물 삼은 벤체슬라스가 그들에게 총알을 퍼붓고 있었다. 그가 기회를 만들어 준 틈을 타 사파이어 역시 엄폐물 뒤로 숨었다.
“이렇게 뒤통수를 때리는군, 마리야 이바노브나.”
“개인적인 원한이 있는 건 아니야, 벤체슬라스.”
“그러시겠지.”
벤체슬라스가 다 떨어진 탄창을 갈며 저편에 숨은 사파이어에게 외쳤다.
“다 죽여!”
도끼를 쥔 사파이어가 나무 뒤에서 뛰쳐나왔고 저격 총을 든 피전 블러드가 그를 막아섰다. 마리야는 나무 뒤의 벤체슬라스와 총격을 주고받았다.
피전 블러드는 긴 총신을 가로로 들어 사파이어의 도끼를 막았다. 이전에는 사파이어와 몸싸움을 벌일 정도로 체급차이가 크지 않았지만 지금은 사파이어가 근육을 확 늘려놓은 터라 힘에서 밀리기 시작했다.
피전 블러드가 이를 부득부득 갈며 뒤로 밀리는 것을 본 마리야가 사파이어에게 총을 겨누었다. 그러나 벤체슬라스가 바로 방해를 해왔기 때문에 더 이상 이쪽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도끼날과 총신 사이에서 끼이익하고 거슬리는 쇳소리가 났다. 피전 블러드는 도끼날을 옆으로 흘려 미끄러뜨리고 곧바로 총을 견착해 사파이어를 겨누었다.
하지만 방아쇠를 당기기도 전에 사파이어가 몸을 틀어서 그대로 피전 블러드의 다리를 걸었다. 그대로 넘어뜨리려는 속셈이었겠지만 피전 블러드가 제때 다리를 빼는 바람에 넘어지지 않았다.
거리를 벌리면 안 된다. 저격수에게 먼 거리를 내어주는 순간 죽는다! 저격수는 저격수대로 필사적으로 적과 떨어져야만 했다. 근접전으로는 사파이어를 이길 수 없다. 적어도 이 상태에서는.
“결국 이렇게 되네, 사파이어. 우린 친구가 된 줄……. 알았는데!”
피전 블러드가 개머리판으로 사파이어의 턱을 거의 후려칠 뻔했다. 정통으로 맞았다가는 뇌가 흔들려서 그대로 뻗었을 게 뻔하다. 운 좋게 피해낸 사파이어가 그 말에 대답하지는 않고 도끼를 찍어 내렸다.
피전 블러드는 허벅지에 차고 있는 권총을 좀처럼 꺼내들 수 없어서 초조했다. 라이플로는 도저히 공격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권총이 있어야 한 번 총을 쏠 시도라도 해볼 수 있는데 그런 기회마저 주지 않는다. 사파이어에게도 목숨이 걸린 문제니까.
뒷걸음질 치던 피전 블러드가 제법 커다란 돌부리를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그대로 발이 걸려 뒤로 넘어졌다. 뒤통수를 찧은 피전 블러드가 고통에 인상을 찡그렸다가 기겁하며 두 눈을 부릅떴다. 사파이어의 도끼날이 눈앞에서 번쩍였다.
“아가테!”
마리야가 소리쳤다. 피전 블러드는 그대로 얼어붙어버렸다. 도끼는 피전 블러드의 머리를 찍지 않고 귀 바로 옆에 찍혔다. 운이 엄청나게 좋았던 모양인지 귀에 상처도 나지 않았다. 귀 끝에 서늘한 도끼날이 닿아 오금이 저렸다.
사파이어는 무뚝뚝하게 “빗나갔군.”하고 중얼거렸다. 과연 우연히 빗나간 것일까?
피전 블러드는 사파이어가 재정비 할 시간을 주지 않고 허벅지에 찬 권총을 꺼내 그의 배를 쿡 찔렀다. 사파이어의 움직임이 멎었다.
“움직이면……. 쏠 거야.”
피전 블러드가 그의 아래에서 빠져나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총을 계속 겨눈 채. 쏘거나, 쏘려는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사파이어가 피전 블러드에게 기회를 한 번 준 것처럼.
피전 블러드는 식은땀을 훔치며 사파이어의 뒤에 있는 마리야에게 소리쳤다.
“난 괜찮아요! 도망가요, 마리야!”
마리야는 피전 블러드의 상태가 괜찮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대로 도망쳐버렸다. 피전 블러드는 사파이어에게 “고마워.”하고 속삭이고는 달아났다. 사파이어가 쫓아가려하자 몇 번인가 위협사격이 날아왔다.
사파이어는 한심하게도 눈앞에서 목표를 놓쳤다. 불가항력이었다. 어쨌든 간에 도끼는 총을 이기지 못한다. 임무 실패에 대한 대가는 쓰디쓰겠지.
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이 들자 온 몸의 힘이 빠지면서 사파이어가 도끼를 툭 놓쳤다. 잊고 있던 열이 염증과 함께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런 사파이어의 등 뒤로 인간의 형상이라 할 수 없는 악귀 같은 모습의 벤체슬라스가 덮쳐왔다.
불의의 기습에 머리를 강하게 맞은 사파이어가 그 자리에 고꾸라져버렸다. 벤체슬라스는 죽음의 신 같은 손아귀 힘으로 축 늘어진 사파이어를 끌어당겨 짐짝처럼 어깨에 메고는 저벅저벅 숲을 빠져나갔다.
“넌 나를 아주 실망시켰어. 너에게서 반역의 기미가 보여.”
오페라와는 다르게 숲에는 수십 구의 시신이 남았다. 사파이어는 아가테를 죽이지 않았고, 마탄의 사수는 무사히 살아남아 주인과 함께 도망쳤다. 그리고 악마는 제 의무를 다하지 못한 7번째 총알을 벌하기 위해 지옥문을 열고 무저갱으로 내려갔다.
악마는 배반자를 용서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