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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도의 화신 알렉산드라이트의 땀과 눈물과 헌신으로 얼룩진 일주일간의 사랑이야기 (6/24)

기사도의 화신 알렉산드라이트의 땀과 눈물과 헌신으로 얼룩진 일주일간의 사랑이야기

이것은 기사도를 아는 남자, 알렉산드라이트의 땀과 눈물과 헌신으로 얼룩진 일주일간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벤체슬라스가 꼭 지 성질머리마냥 다른 사람 배려 안하고 뒤처리를 더럽게 해놓고 파리를 떠났기 때문에 알료샤가 프랑스를 뜨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알료샤 본인부터가 A1 고속도로를 개판 오 분 전으로 만들어 놓았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하지 말기로 하자. 그렇지 않아도 아끼던 차를 잃어서 가슴이 쓰리다.

그야 물론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자기 의지로 차를 몰고 나가서 범퍼카 하듯이 다른 차를 박아댄 게 주요 원인이긴 하지만, 그러니까 누가 사파이어를 괴롭히라든가? 내 잘못 하나도 없다. 다 죽은 놈들 잘못이다.

그 고속도로에서 많은 친구를 자동차 사고, 방화, 체포 따위로 잃긴 했지만 알료샤에게는 아직도 많은 아군이 남아 있었다. 인생사 독고다이로만 살아가는 싸가지 없는 벤체슬라스와는 차원이 다른 재산이다.

사실 그 성격으로는 어느 무리에 끼고 싶어도 끼워주는 사람이 없어서 선 바깥에서 손가락이나 쪽쪽 빨 운명이다. 하지만 알료샤는, 다들 아는 것처럼 인품이 훌륭하지 않은가. 내 입으로 말하긴 뭣하지만 요정 같은 존재라고 할까, 후훗.

알료샤는 무리의 중심이었다. 벤체슬라스를 피 냄새 풀풀 풍기는 폭군이라고 비유해보자. 어느 누구도 피냄새를 환영하지 않는다. 썩은 내 나는 왕은 왕이더라도 모두에게 미움 받는다.

알료샤는? 알료샤는 그야말로 리더의 자질을 모두 갖추고 있다. 일단 품격이 있고, 결단력도 있고, 남의 의견을 적절히 수용하는 융통성까지 있다. 완벽하다. 그야말로 완벽하다고 할 수 밖에.

벤체슬라스가 인형으로 가득 찬 방에서 혼자 독재정치를 펼치고 있는 동안 알료샤는 직접 자기 발로 동네를 돌아다니며 주민들 하나하나를 챙겨주고, 안부를 물어봐주고, 잔디를 대신 깎아주는 일 등의 사소한 일을 도맡아 할 것이다.

이런 다정한 남자는 동네 축구를 벌여도 양 진영에서 서로 1순위로 뽑아갈 인물이다. 반면에 벤체슬라스는……. 글쎄, 그가 축구 모임에 낄 수 있다면 그 때 포지션을 생각해보기로 하자.

알료샤가 취한 행동은 간단했다. 전화를 걸어서 친구들에게 난장판을 처리하도록 부탁했고, 짐을 처분한 다음, 프랑스를 떠나서, 독일에 도착했다. 독일에도 많은 친구가 있었다. 모든 것이 전화 한 통으로 해결될 일들이었다.

벤체슬라스는 보안을 문제로 아직 제대로 된 거처를 마련하지 못한 모양인데, 알료샤한테는 6시간 밖에 걸리지 않는 일이었다. 돈이 꽤 많이 들긴 했는데 알료샤가 미안한 얼굴로 웃어주자 그의 친구는 “됐어. 자네 일이라면 그냥 해주지.”하고 넘어가서 그 중에서도 어느 정도의 금액을 아낄 수 있었다.

인맥은 재산이다, 어리석은 벤체슬라스여. 돈? 물론 중요하지. 잘 만든 인맥은 돈으로도 치환할 수 있다. 인간이 어떻게 혼자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선사시대도 아니고. 원시인도 저렇게 살진 않았을 것이다.

처음에는 알료샤도 벤체슬라스를 자기 무리에 끼워주려고 했다. 그가 아직 저 수전노의 본성을 모르던 시절이었다. 벤체슬라스는 뭐라고 할까, 극도로 이기적인 남자다. 조금도 손해를 보려고 하지 않는다.

손해 보기 싫어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지만 벤체슬라스는 그것이 좀……. 지나치다고 할까. 돈 받고 더러운 일을 대신 해주는 청부업자들이 물론 제정신 박힌 놈들로만 가득 찬 건 아니지만 벤체슬라스는 무리에서 배척당하기 적격인 사람이었다.

가령 늑대를 예로 들어보자. 늑대는 무리 생활을 한다. 일반적인 인식과 다르게 고독한 늑대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늑대 무리 안에서의 질서와 문화와 관습이 있고 나름의 사회가 존재한다.

사회에는 규칙이라는 것이 있다. 규칙을 깨는 개체는 모두가 싫어한다. 모두를 위험에 노출시키기 때문이다. 늑대 무리 안에서도 당연히 도태되는 개체가 나오는데 어딘가가 많이 부족해서 무리에 전반적으로 해악을 끼치는 놈이거나 아니면…….

“싸이코패스라고 밖에 설명을 못하겠네.”

기억을 더듬던 알료샤가 중얼거렸다. 알료샤는 선글라스 다리를 질겅질겅 씹으며 회상에 잠겨 있다가 입 안에서 플라스틱 맛이 나기 시작하자 정신을 차렸다. 선글라스 다리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갓 이빨이 나기 시작한 강아지가 의자 다리를 작살내놓은 것처럼 너덜너덜하게 변해버렸다.

하지만 알료샤는 완벽주의자가 아니니까 상관없다. 알료샤는 상대방의 얼굴이 훤하게 비쳐 보이는 미러 선글라스를 다시 썼다. 그는 사람들의 관심과 시선을 즐겼다. 그래서는 안 될 장소에서까지도.

알료샤는 누군가의 멱살을 쥐고 있던 왼손을 스르르 풀었다. 단단하게 감겨 있던 손가락이 풀리자 알료샤에게 붙잡혀 있던 사람이 그대로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그는 기절한지 오래였다. 앞 이빨도 다 깨졌다.

알료샤는 헝겊인형처럼 널브러진 남자를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이빨은 물론이고 저 턱주가리로는 앞으로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할 것이다. 알료샤의 잘못은 아니다. 다 상대가 자처한 것이다.

죽이지는 않았으니까 자비로운 거야! 이 정도면!

알료샤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저격총은 창틀에 거치된 채 방치되어 있었는데 혹여라도 발사될까봐 고정을 풀어서 아래에 내려놓았다. 창 밖에는 평화로운 걸 넘어서서 지루하기까지 한 베를린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고, 창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도보를 한 동양인 남자가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방금 전까지 자신에게 어떤 위험이 닥쳤는지, 그리고 그게 어떻게 해결됐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알료샤는 창틀에 팔꿈치를 올리고 자신의 양 손바닥에 얼굴을 올려놓은 채 동양인 남자의 걸음걸이를 행복하게 지켜보았다. 자연스럽게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얼굴을 반쯤 가리는 미러 선글라스가 햇빛을 반사해 번쩍번쩍 거렸지만 저 멀리 있는 남자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감시당한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냥 아주 조금……. 섬뜩한 느낌이 뒷덜미를 스쳤을 뿐이다.

선글라스의 반짝임은 마치 “난 여기 있어요! 여기를 봐주세요!”하는 것 같았지만 애석하게도 가장 자기를 봐줬으면 하는 사람은 절대 돌아보지 않고, 유모차를 타고 지나가던 아기의 눈에만 띄었다.

아기가 알료샤와 눈이 마주치자 알료샤가 쪽하고 키스를 날렸다. 아기가 허공으로 손을 뻗어 저 멀리 있는 알료샤를 잡으려는 듯 조물락거리자 유모차를 밀던 엄마가 아기를 내려다보곤 아기의 시선 끝에 있는 알료샤를 발견했다.

알료샤는 차별이 없는 사람이라서 물론 아기의 엄마에게도 가상의 키스를 날려주었다. 아기와 엄마는 빠른 속도로 사라졌고 알료샤는 아기 엄마가 보여준 노골적인 거부에 작은 상처를 받았다.

자신이 뭔갈 잘못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난 배려심 넘치는 사람이니까 내가 이해해주기로 한다.

알료샤는 다시 동양인 남자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그는 많이 느린 속도로 걸었다. 그를 관찰한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원래 저렇게 느리게 걷던 사람인가? 사파이어는 언제나 신속함이 인상적이었는데.

알료샤는 자기가 없던 사이에 그의 몸에 무슨 일이 생긴 건지 걱정이 들었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러지 않았는가. 알료샤는 그의 얼굴에 흔적처럼 새겨져 있던 피멍과 다른 상처들을 잊지 못한다.

처음엔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세공사가 자기 밑에 킬러를 두고 그들을 보석이라고 부르면서 진짜 보석상처럼 무슨 원석을 판다던가, 무슨 반지나 목걸이를 판다던가, 무슨 장식물을 판다던가 하는 식으로 서비스를 팔고 있었지만 그건 단순히 영수증에 적을 말이 없어서 위장하는 것뿐이다.

보석이라고 지칭은 할 뿐 그들도 이름과 자아가 있는 인간이다. 세뇌와 폭력으로 사람을 도구화시키기도 하지만, 보석 입장인 킬러들도 완전히 자기 생활을 빼앗기는 건 아니었다. 자아를 가지고 있단 말이다. 취향이 있고, 기억이 있고, 습관이 있다.

그런데 벤체슬라스는……. 그가 파는 물건들은 어딘가 이상했다. 무슨 짓을 한 건진 모르겠지만 그는 정말로 사람을 백지화시켜서 자신의 입맛대로 개조해 세상에 내놓았다. 사람을 정말 보석 같은 무기물로 바꾸어놓는 것 같았다.

벤체슬라스가 수십 명씩 휘하 킬러를 갈아치우는 박리다매 상인은 아니지만, 그가 판매 품목을 갈아치울 때면 뭔가 큰 일이 한 번씩 벌어지곤 했다.

그는 자기 손에 들어오는 돈 말고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에 거리낌 없이 난리를 쳤고, 뒷세계의 위태로운 고요함을 이따금씩 흔들어놓는 그의 파문을 싫어하는 사람이 굉장히 많았다. 벤체슬라스는 적이 많았다.

자기 인생 자기가 꼬는 거고 정해진 수순을 밟아나가는 것뿐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보석들은 불쌍했다. 알료샤는 벤체슬라스의 새로운 보석이 어떤 인물인지 궁금했을 뿐이다.

그래도 살아있는 사람을 어떻게 기계로 바꿀 수 있겠는가. 어느 정도 본래 성격은 남아있겠지 싶었는데, 실제로 본 남자는 알료샤의 상상보다 더 처참한 상태였다.

인정한다. 사파이어의 소문을 듣고 신비로움을 느꼈고, 처음에는 분명히 동정이었다. 그가 궁금했고 그의 사연이 어떤지도 자세히 알고 싶었다. 그렇게 그를 관찰하기 시작했고 동정은 차츰 호감으로 바뀌었다.

그는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남자였다. 그리고 알료샤는 보호본능 빼면 남는 게 없는 사람이다.

사파이어는 한 줌의 값어치도 없는 벤체슬라스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저것도 세뇌의 결과일까. 아니면 자기도 기억 못하는 본래 성격일까. 어느 쪽이든……. 굉장히 탐이 났다.

알료샤는 저런 싸이코보다 훨씬 더 잘 해줄 수 있는데. 정말 자신 있었다. 저런 맹목성이 나를 향한다고 생각해보라. 벤체슬라스를 보는 그 눈길로 나를 봐준다면.

여태까지는 거부당하기만 했다. 그러나 알료샤는 기회는 언제든 있다고 생각했다. 객관적으로 봐도 그가 벤체슬라스보다 백만 배 낫다. 사파이어에게는 시간이 더 필요할 뿐이다.

알료샤는 행복한 앞날을 그리며 미소 짓고 있다가 무언가를 보고는 돌연 등을 돌려서 급한 발걸음으로 그 자리를 떠났다.

알료샤가 감시하던 동양인 남자에게 스킨헤드 무리가 시비를 걸어온 것이다.


큰일이다! 스킨헤드의 목숨이 위험해!

가진 거라곤 백인 유전자 밖에 없는 불쌍한 청년들이다. 내세울 것도 그것밖에 없단 말이다. 돈 없지, 직업도 없지, 애인도 없지, 성격도 나쁘지, 같은 패거리 말고는 친구조차 없는 인생들이다.

여럿이서 몰려다녀야 남을 괴롭힐 용기라도 생기는 족속들인데 눈앞에 있는 남자는 다른 차원의 거주민이다. 저거 저거, 눈 봐라. 벌써 어떻게 죽일지 궁리하고 있다.

백인 우월주의, 네오나치, 인종차별주의자 스킨헤드야 몇 마리쯤 죽어도 세상에 큰 해악은 되지 않지만 사파이어가 경찰과 엮이는 것만큼은 절대로 안 된다! 그렇지 않아도 네오나치에 강경하게 대응하는 독일 경찰인데!

네오나치의 N 소리만 들려도 벌써 경광등을 켜고 차 몇 대 분량의 경찰이 달려와서 진압봉으로 인정사정없이 두들겨 팰 것이다. 경찰이 올 때쯤엔 사파이어는 이미 몇 놈을 해치운 뒤일 테고, 증인도 증거도 필요 없이 훌륭하게 현행범으로 연행되겠지.

저 청년들을 사파이어의 손아귀에서 구해내야 한다!

알료샤는 동양인 남자와 한 무리의 대머리 청년들 사이에 늦지 않게 끼어들었다.

“안녕하신가, 친구들.”

“이건 또 뭐야?”

알료샤는 길게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이미 행인들이 이쪽을 보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누군가가 핸드폰을 꺼내드는 모습도 보였다. 사진을 찍거나, 신고를 하겠지. 요즘 같은 세상엔 동영상으로 찍어서 유튜브에 올라가는 것도 충분히 있음직하다.

알료샤는 외투 안쪽으로 총을 내밀며 행인들에게 총구가 보이지 않도록 했다. 그러나 정면에 선 청년들은 그것을 똑똑히 보았다.

닭벼슬도 아니고 빨간색과 초록색으로 정신없게 머리를 염색한 놈이 갑자기 나타나서는 총구를 들이대는 것이다. 걷어차면 날아가게 생긴 주제에 눈매가 맘에 들지 않는 이 동양인 녀석과 같이 때려눕힐까 하던 스킨헤드 무리는 움찔하며 뒷걸음질 쳤다.

“문제 일으키기 싫지? 등 돌리고 가. 이거 진짜 총이야. 시험해보고 싶으면 덤비고. 난 진짜 쏘니까.”

물론 청년들은 만만해 보이는 상대라면 누구에게든 주먹을 휘둘러댔지만 주먹은 총알보다 약했다. 그리고 세상엔 어이없는 이유로 총을 쏴대는 또라이들이 많이 있다. 청년들은 재수 옴 붙었다며 도망쳤다.

조무래기들을 물리친 알료샤는 심호흡을 하고 활짝 웃으며 뒤돌아보았다.

“안녕. 또 만났네요.”

물론 사파이어의 성격을 아는지라 살갑게 인사가 돌아올 것을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그걸 넘어서서 사파이어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알료샤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깨달음을 얻었는지 “아!”하고 표정을 풀었다.

그러니까 방금 전까지의 얼굴은 “누구셨더라?”하고 깊은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던 것이다.

이름을 잊었던 모양이다! 경계하는 것보다 더 슬프다! 그러나 사파이어가 잊고 있던 건 이름뿐이었는지 금방 과거를 언급했다.

“이번에도 도움을 받는군. 저번에는 고마웠어.”

심장에 좋지 않은 감격이 알료샤를 엄습했다. 알료샤는 부담스럽게 눈을 반짝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알료샤라고 불러줘요.”

“알료샤.”

알료샤는 영웅적인 자제심으로 미쳐 날뛰려는 욕구를 참았다. 드디어 이름을 불러주었다! 저 끝장나게 섹시한 목소리로! 역시 최고야! 짜릿해! 항상 새로워!

알료샤는 스스로의 기준으로 상 줘도 될 정도로 점잖게 굴었다고 생각했지만 사파이어는 언제나처럼 금방 도망갈 듯이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알료샤의 표정으로 속내가 다 드러난단 말이다.

“어디 가고 있었어요?”

“재활훈련 하고 있었어.”

“재활훈련?”

“재활훈련.”

알료샤는 세부사항이 더 필요해서 물어본 것인데 사파이어는 알료샤가 말을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한 번 또박또박 말해주었다. 눈치가 없는 점도 상당히 귀엽다. 어떤 면에서는 추리력이나 판단력 등 머리가 좋아 보이기도 하는데, 일반 상식이라든가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가끔 백치 같은 느낌이 든 달까.

백치면 어떤가! 백치 좋다! 알료샤는 그런 것쯤은 신경 쓰지 않아! 오히려 좋아! 보호해주고 싶어!

“재활훈련이라니 어디 다쳤어요? 큰 부상이라도? 무슨 일 있었던 거 아니죠?”

“다리 다쳤어. 큰 부상이었어. 큰일이었어.”

성실하게 하나하나 대답해주던 사파이어는 다시 이 남자의 페이스에 휘말려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혼란스러운 남자다.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마치 머리 하나를 자르면 두 개가 자라나는 히드라처럼 질문이 끊임없이 솟아난다.

사파이어는 그것이 대화를 지속시키기 위한 수작이라는 것을 몰랐다.

“난 당신이랑 말하면 안 돼. 이번 일은 보고할 거야.”

“왜! 어째서! 그 수전노가 그렇게 시키던가요? 꼬박꼬박 일러바치지 않으면 혼내겠다고?”

“고문당했어. 난 고문당하는 거 싫어.”

“응, 맞아. 네 말대로 혼났고 난 더 이상 혼나고 싶지 않아.”라고 대꾸하듯이 평이한 어조였지만 정작 담담한 사파이어 본인과 다르게 알료샤는 충격을 받았다.

머릿속에 이리저리 널려있던 퍼즐 조각 하나가 맞춰졌다. 사파이어가 파리 시내에서 얼마간 완전히 사라진 적이 있다. 벤체슬라스는 뺀들뺀들한 얼굴을 당당히 치켜들고 돌아다녔음에도. 그때였을까. 고문의 시기라는 것이.

나랑 대화를 했기 때문에? 그게 이유라고?

벤체슬라스가 왜 자기 장사도구에서 손 떼라고 발악을 했는지 이해가 갔다. 놈은 다른 사람을 인간으로 보기는 할까? 알료샤는 헛웃음을 터뜨리더니 사파이어가 도망가지 못하게 퇴로를 막았다.

“난 지금부터 당신을 납치할 거예요. 두 시간 동안. 그런 다음 당신은 운 좋게 탈출해서 주인한테 돌아가는 거고. 당신은 시키는 대로 길을 걷고 있었는데 갑자기 내가 나타난 거야. 그래서 강압적으로 끌고 간 거야. 다행히 당신에게 별 일은 생기지 않았어요. 이게 다 알료샤 때문이지. 이 정도면 괜찮은 변명이죠?”

“그건 거짓말이잖아.”

“납치는 진짜로 할 건데?”

알료샤가 사파이어의 손목을 덥썩 잡았다. 그 순간 사파이어가 알료샤의 손을 쳐내더니 자신의 손목을 탁탁 털고, 팔뚝을 털고, 미친 듯이 머리를 털기 시작했다.

사파이어는 다리를 절뚝이며 뒤로 물러서더니 쥐어 짜내듯이 숨을 몰아쉬면서 머리를 감싸 쥐었다. 너무나도 격렬한 반응이었기에 알료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 윽……. 싫어……. 잡지, 마. 잡지 마……. 싫어…….”

알료샤는 놀란 눈으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사파이어의 손목을 움켜쥐었던 손이다. 엄청난 죄책감이 몰려왔다. 알료샤는 숨도 못 쉬고 공황상태에 빠진 사파이어가 간신히 이성을 되찾자 그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사파이어가 발작적으로 그 품을 밀어내며 벗어나도 알료샤는 다시 천천히 그를 안아주었다. 그것이 세 번 정도 반복되자 사파이어가 더 이상 알료샤를 밀어내지 않았다. 사파이어는 혼란스러운 눈동자를 굴리며 다급하게 속삭였다.

“난 이러면 안 돼.”

알료샤는 그를 더더욱 깊게 안아주며 가만히 달래주었다. 평소의 장난기 어린 표정은 완전히 사라졌다.

“이건 다 알렉산드라이트라는 악당이 저지른 거예요. 당신은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 전부 알료샤 탓이야. 전부 내 탓이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있어요.”

사파이어는 몸에서 힘을 빼지 못한 채 한참토록 어색하게 안겨 있었다.


알료샤는 사파이어를 납치해서 근처 공원으로 갔다. 둘은 벤치에 앉아 공원을 걷는 사람들과 돗자리를 깔고 누운 연인들과 주인과 함께 따사로운 햇살을 즐기는 개를 보았다.

연쇄살인마에게도 쫓겨보고 온갖 종류의 변태에게도 추격 받아봤지만 이토록 온건한 납치는 처음이다. 사실상 사파이어가 지금 당장 일어나서 호텔로 돌아간다고 해도 알료샤는 그를 붙잡지 않고 “이런, 놓쳐버렸네.”하고 유감스러워하기만 할 것 같았다.

사파이어는 옆에 앉은 남자가 아직도 부담스러웠지만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은 좋았다. 그 때, 알료샤가 무언가를 보더니 “여기서 기다려요.”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파이어가 그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알료샤는 공원 한편에 있는 아이스크림 트럭으로 가서 바닐라 아이스크림 두 개를 사가지고 다시 돌아왔다.

“자!”

알료샤가 내미는 아이스크림을 사파이어는 멀뚱멀뚱 쳐다보고만 있었다.

“먹어요!”

“난 이런 거 먹으면 안 돼.”

“안 먹으면 후회할 텐데!”

그러다 불현듯 알료샤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혹시 알레르기 있어요?”

“아니. 그건 아닌데…….”

사파이어는 어쩔 수 없이 아이스크림을 받아들었다.

“음, 이건 아이스크림이라는 건데.”

“뭔지는 나도 알아. 그 정도로 바보는 아냐. 단지 이런 건 허용되지 않았어.”

“천하에 극악무도한 알렉산드라이트가 강제로 아이스크림을 먹였다! 아이고, 이런 나쁜 놈이 있나! 당신은 최선을 다해 명령을 지키려고 했는데 이 나쁜 놈이 강제로 협박해서는…….”

“알았어, 알았어.”

사파이어는 아이스크림을 한 입 물었다. 순간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오는 맛과 향의 향연 때문에 일순간 신경을 온통 이 쪽으로 빼앗겼다.

그동안 너무 담백한 것만 먹고 살았고, 음식의 종류도 다양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닐라 아이스크림만으로도 사파이어에게는 큰 자극이었다. 차갑고, 달콤하고, 부드럽다. 유지방의 농후한 맛과 바닐라의 입맛 당기는 향, 그리고 또 설명하긴 힘들지만 단맛도 두 가지 이상의 종류가 섞여있는 것 같았다.

세상에 이런 맛이 다 있을까.

사파이어가 견디기 힘들었던 건 딱 한가지다.

“너무 달아.”

“너무 달다고 하지만 벌써 반 이상이나 먹었는걸.”

알료샤의 지적에 사파이어가 자신의 아이스크림을 내려다보았다. 정말이었다. 불꽃놀이 같은 감각을 따라가느라 정신없이 먹은 모양이다. 알료샤가 청량하게 웃었다.

“바닐라보다 더한 걸 사줬으면 큰일 날 뻔 했겠네.”

알료샤는 약속을 지켜서 두 시간 후에 사파이어를 풀어주었다. 풀어준다고 해도 애초에 어딘가에 구속해놓은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슬슬 일어날까요.”하고 벤치에서 일어난 정도지만. 사파이어는 항상 그렇듯이 속내를 알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알료샤에게 담담히 말했다.

“난 오늘 있었던 걸 전부 보고해야 돼.”

“악당 알료샤가 강제로 납치해서 먹기 싫은 걸 억지로 먹였다는 보고도 빠뜨리면 안 돼요.”

“그건 거짓말이잖아.”

“거짓말? 무슨 거짓말? 거짓말이 어디에 있는데? 난 안 보이는데? 내가 주머니에 넣어놨던가?”

“난 거짓말을 하면 안 돼.”

“나는 정말로 당신을 납치했던 건데요.”

“아니잖아.”

“맞아요. 당신이 도망가지 않은 것뿐이지.”

듣고 보니 그게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사파이어는 알료샤의 궤변에 넘어가기 시작했다. 마음 한 구석으로 떨떠름함을 느끼면서. 알료샤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혹시라도 그 쫌생이가 내 탓이라는데도 또 혼내려고 들면 나한테 와요. 언제든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사파이어는 있는 그대로 말했다. 알료샤가 이렇게 말해두라고 한 부분까지. 의자에 앉아 보고를 듣고 있던 벤체슬라스는 “그 또라이 새끼.”하며 미간을 짚었다. 잘 떼어놓고 왔다 싶었는데 귀신같이 달라붙는다. 스토커가 따로 없다.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것이다. 사파이어에게 아이스크림을 먹인 것이다. 얼마나 공들여서 통제된 환경을 준비했는데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깨버리고는 말 그대로 남의 개에게 먹을 것을 함부로 준다. 몰상식도 정도껏이어야지.

사파이어가 하나도 숨김없이 말한 것은 칭찬할 만하다. 알료샤의 짐작대로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를 건드리지 않았다. 그런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니까. 거기다가 문제의 원인이 눈 앞에서 도발을 하고 있지 않은가. 내가 저질렀다고 당당하게 자백까지 하는데.

알료샤를 죽이지 않으면 이 게임이 끝나지 않을 것이다. 죽여야 되는 세공사가 하나 더 늘었다.

벤체슬라스가 앉은 상태로 손만 까딱거리자 사파이어가 다가왔다. 앉으라고 지시하자 사파이어가 벤체슬라스의 무릎 위에 앉았다. 키 170대 후반의 성인 남자인데 다른 남자에게 안긴 모습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였다.

벤체슬라스가 체형은 호리호리해도 키는 꽤 큰 편이니까. 사파이어가 다른 사람보다 키는 작아도 균형 잡힌 근육질의 몸매라면 벤체슬라스는 근육이 잘 발달된 몸이라도 키가 커서 눈에 잘 띄지 않는 감이 있었다. 거기다 캐주얼한 옷은 잘 입지 않고 정장을 기본으로 입고 다니다보니 더 부각이 되지 않았다.

성인남자 둘의 체중을 견뎌야 하는 의자의 상태가 안쓰러웠지만 의자는 묵묵히 잘 버텨주었다. 벤체슬라스는 품 안의 사파이어를 끌어안고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자기주장이 강한 감귤류의 향수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그 희미한 잔향마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알료샤는 지나치게……. 자극적인 남자다. 취향과 개성이라는 것을 배제해버린 사파이어에게 있어서 알료샤는 존재 자체가 시한폭탄 같은 남자다. 언제 터질지 모르고, 옆에 있는 화약도 같이 터뜨릴 가능성이 다분하다.

품 안에 안긴 사파이어는 주인이 무슨 고민을 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등 뒤에 와 닿는 따스한 감각이 좋아서 얌전히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사실은 징벌을 각오하고 있었는데, 그 어떤 손찌검도 없다.

허벅지 위에 얌전히 올려놓은 사파이어의 손등 위로 벤체슬라스의 손이 겹쳤다. 가늘고 긴 손가락이다. 온갖 무기를 다루느라 두껍게 못이 박힌 사파이어의 손과 비교하자면 색깔부터 극명한 차이가 난다.

벤체슬라스의 손도 그간의 전투경험을 보여주듯이 단단히 못이 박혀 있었지만 사파이어의 투박함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뭐라고 할까, 석공의 손과 학자의 손의 차이라고 할까.

그러나 뼈의 모양에서 남성적인 느낌은 확실히 풍겨 나온다. 우아하고 늠름한 주인의 손. 그 손이 사파이어의 손가락 사이사이를 파고들더니 꽈악 움켜쥐었다. 짙은 소유욕의 표시. 벤체슬라스의 손은 하얀 손가락으로 된 수갑처럼 사파이어를 옭아맸다.

“너는 내 것이지?”

“네.”

“너는 내가 없으면 아무런 가치도 없어.”

“네.”

“너는 나를 돋보이게 하는 물건이야. 내가 만들었어. 너는 아무것도 아냐. 내가 너에게 의미를 부여했어. 내가.”

사파이어는 그 최면적인 목소리에 지그시 눈을 감았다.

“당신 뜻대로.”


물론 알료샤가 독일로 넘어온 것은 사파이어를 쫓아온 게 맞지만 그게 전부 다는 아니었다.

프랑스에서 사파이어의 목에 걸려 있던 현상금은 아직도 풀리지 않았다. 공개계약이라서 아무나 참가할 수 있지만 의뢰인의 숫자도 한 명이 아니었고, 의뢰인 몇 사람이 잡혀 들어간다고 해도 수배가 철회되지 않는 이상 보석 사냥은 계속될 예정이었다.

그게 국경을 넘어가서 피라미들이 1차적으로 걸러진 거지. 그런 다음은 현상금의 액수로 2차 거름망이 훑고 지나갔다. 독일까지 넘어가서 보석 하나 깨부수겠다고 그 금액을 용인할 수 있는 청부업자들만이 남았다.

물론 파리에서만큼 벌떼같이 몰려들지는 않는다. 하지만 가만히 내버려둬도 좋을 것은 없기에 알료샤는 그야말로 그늘 속에서 홀로 헌신을 다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나도 사파이어 사냥 참가할래!”하고 아군인 척 끼어들어서 청부업자 무리를 몰살해버린다던가, 어제처럼 저격수를 급습해서 반병신으로 만든다던가, 아니면 오늘처럼 이렇게…….

“안녕하신가, 친구들.”

쇠 지렛대를 어깨에 걸친 알료샤를 보고 사파이어 살해 계획을 짜고 있던 남자들이 의자를 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총 5명이었고, 그 중에는 전문 청부업자가 둘, 나머지는 이런 일을 처음 해보는 뜨내기였다.

그들은 알료샤가 누군지 모르고 있었다. 이 얼굴을 모르다니 이 바닥에 발을 들인지 얼마 안 된 것은 확실하다. 알료샤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 요란한 염색머리를 확인한 순간 현상금이고 뭐고 다 포기하고 줄행랑부터 칠 것이다. 그게 상식이다.

어쨌든 정체모를 남자에게 비밀장소가 발각된 건 맞으니까. 청부업자들이 칼과 몽둥이를 꺼내들자 알료샤의 등 뒤로 열댓 명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들고 있는 것부터 정상적인 게 없었다. 공사장에서 쓸 법한 대형 해머부터 삽, 곡괭이, 각목……. 옷차림새도 정말 공사현장에서 볼법한 것들이었다. 안전모에 형광조끼, 왜 쓰고 있는 건진 모르겠지만 보안경까지.

청부업자들이 갑자기 들이닥친 패거리의 모습에 놀라자 알료샤가 가볍게 윙크했다.

“오늘 컨셉이야. 맘에 들어?”

“형님, 귀찮은데 그냥 다 죽이죠.”

“가만히 있어봐. 선택권은 줘야할 거 아니야.”

알료샤가 어깨에 걸치고 있던 쇠 지렛대를 지휘봉처럼 앞으로 내밀어 청부업자들을 가리켰다.

“네 놈들의 사악한 계획을 파탄 내러 왔다. 하지만 난 자비로우니까 선택권을 주지. 행운으로 알라고. 지금 당장 현상금을 포기하고 독일 밖으로 내뺀다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물론 너희들의 돈이랑 무기는 몰수다. 키우는 개는 예외적으로 봐주도록 하지.”

“뭐야 이건 또? 웬 미친놈이야?”

“미친놈? 하하하……. 복선이란 말 들어본 적 있어?”

“엉?”

“사망 복선이다, 이 새끼야!”

알료샤가 주머니에서 총을 꺼내더니 정확히 미간을 쏘았다. 총이 있는데 왜 꺼내들지 않았던 것인가, 왜 공사 현장에서나 볼 법한 것들로 무장하고 있었는가, 그보다 이들은 대체 누구인가, 그런 질문에 대한 답은 한 사람이 죽고 난 뒤에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게 돼 버렸다.

“복선 깔지 마! 뒈지고 싶지 않으면 복선 깔지 마! 다 죽여 버릴 거니까!”

저 미친놈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총을 든 상대 앞에서는 한없이 이해심 많아지고 점잖아 지는 것이 인류의 보편적 상식이다.

“거봐. 쓸데없는 대사 안 치니까 좋잖아. 하지만 난 신사니까 너희가 총을 꺼내들지 않는다면 나도 꺼내들지 않아. 아, 방금 건 예외야. 스스로 죽겠다고 복선 깐 놈은 죽어야 돼. 저렇게 액션 영화 단역 엑스트라 같이 뻔한 소리나 하는 놈은 모두 다 죽는 거야. 알았어?”

“진정하십쇼, 형님.”

“빡치게 하잖아. 어쨌든 간에,”

알료샤가 다시 쇠 지렛대를 까딱거리며 말했다.

“골라. 뒤질 건지 튈 건지.”

대답은 빨랐다. 둘은 등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고 나머지 둘은 무기를 들고 덤벼들었다. 그 중 하나는 숨겨두었던 총을 꺼내들었다. 물론 알료샤가 총을 보자마자 놈을 쏘아버렸기 때문에 대항하는 인원은 한 명 밖에 남지 않았다.

알료샤의 등 뒤에서 지루한 듯이 기다리고 있던 패거리들이 눈을 빛내며 맞붙었다. 그 중에 일부는 도망친 두 놈을 뒤쫓아 가 아작을 내고 있었다. 알료샤는 유감이라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청부업자들의 무기를 주섬주섬 챙겼다.

“목숨 낭비야 진짜. 아깝다니까.”

그는 이렇게 오늘도 사파이어의 목숨을 위협하는 요소를 제거했다. 그늘에서 활약하는 참된 기사도의 화신이었다. 비록 사파이어는 이 사실을 모를지라도.


“안녕. 또 만났네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와서 뒤를 돌아본 사파이어는 해맑게 웃는 알료샤의 얼굴을 확인하고 그의 손에 들린 것을 내려다보았다. 코가 부러져 코피를 잔뜩 흘리며 기절한 남자였다.

사파이어가 아무 말 없이 그것을 가리키자 알료샤가 남자의 옷깃을 쥔 손을 풀었다. 기절한 남자가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알료샤.”

“이제 이름으로 불러주는 거예요? 기뻐!”

“희한한 걸 들고 다니는데.”

“아 이 사람? 신경 쓰지 말아요. 이제 아무것도 아니니까.”

바닥에 쓰러져 있는 이 남자가 사파이어의 등 뒤를 덮치려던 암살자였다는 것을 사파이어는 모를 것이다. 앞으로도 쭉. 알료샤는 주먹으로 남자를 두들겨 팬 것이 틀림없다. 주먹에서 핏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는데 분명히 본인의 피는 아니었다.

“그래서 오늘도 재활훈련 하는 거예요?”

“아니. 당신을 찾고 있었어.”

“나, 나를?!”

알료샤는 “그럴 리가 없는데.”, “왜지?”, “이거 현실인가?”하는 얼굴로 휙휙 바뀌었다. 최종적으로 안착한 것은 극도로 행복해 보이는 바보스러운 얼굴이었다.

“나를 왜 찾으셨을까? 내 제안에 대한 대답? 같이 살자는 거…….”

“한번만 더 개수작 부리면 내 손으로 직접 멱을 따주지.”

잠깐 동안이지만 알료샤는 사파이어와 동거 생활하는 것까지 꿈꾸고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사파이어가 있고, 그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고, 그가 샤워하는 모습을 문 뒤에서 몰래 훔쳐보고, 그와 부끄러운 짓을 하고……. 행복했다. 행복했다……. 예상치 못한 폭언이 사파이어의 목소리로 흘러나오자 알료샤는 그대로 굳었다.

“그렇게 전달하라고 했어.”

“벤체슬라스가?”

“응.”

“자기 손으로 직접 내 목을 따겠다고?”

“아니, 내 손이지. 내 손으로 당신을 죽인다고 했어.”

알료샤는 머리를 두 번 얻어맞는 것 같았다.

“잠깐, 잠깐만. 정리 좀 해볼게요. 그러니까 그 걸레가 나보고 말을 전달하라고 했는데,”

“응.”

“자기 손이 아니고 당신 손으로 날 죽이겠다고 협박한 거라고?”

“그렇지.”

“그리고 당신은 그거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고?”

“명령이니까.”

사파이어는 그렇게 대답했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명령이지만, 잘 모르겠군.”

“잘 모르겠다니. 역시 망설여져요?”

“아니, 글쎄. 모르겠어. 이게 무슨 느낌인지.”

“역시 내가 소중해서?”

“소중하다? 글쎄, 모르겠어. 좋은 느낌은 아니야.”

사파이어의 대답 한마디 한마디에 시시각각 표정이 변하던 알료샤가 마지막으로는 안쓰러운 얼굴을 했다. 사파이어는 알료샤의 눈빛이 의미하는 게 궁금했다.

“그 눈 말인데. 나랑 얘기할 때마다 그런 표정을 짓던데. 그게 뭐지?”

“이건 동정이라는 감정이에요.”

“동정? 불쌍해? 내가? 왜?”

알료샤는 그 질문엔 대답하지 않고 사파이어를 껴안으려고 했다. 당연히 허가받지 않은 침범이었기 때문에 사파이어는 그를 밀어내며 거절했다. 그러나 알료샤가 두 번째로 시도했을 땐 밀어내지 않았다.

“이건 사랑이라는 감정이고.”

알료샤가 속삭이자 사파이어가 간결하게 부정했다.

“그럴 리가 없어.”

알료샤는 놀란 눈으로 품 안의 사파이어를 내려다보았다. 쏟아지는 감정을 분간하지 못해 혼란스러워하던 사파이어가 사랑이라는 단어에 대해서만큼은 단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정답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듯이.

“사랑은 뭔지 알고 있어. 사랑은 그 분이 나한테 주시는 거야. 다른 사람은 주는 게 불가능해.”

사파이어의 눈은 맹목적으로 미쳐있었다. 지고지순한 숭배의 눈.

그 눈을 보며 알료샤는 소름이 돋았다. 이 눈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이 시선에 내가 담길 수 있다면. 가지고 싶다. 가지고 싶다. 질투가 나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 사파이어의 시선 끝에 항상 오롯이 담겨있는 백금발 걸레에게.


한 번만 더 개수작 부리면 사파이어를 시켜서 처단하겠다고 했지만 정작 그 개수작의 기준이 무엇인지는 사파이어도 몰랐기 때문에 예상과 달리 피바람은 불지 않았다. 그러나 알료샤는 집요했다.

“정말 날 죽일 거예요? 진짜? 진짜로?”

“명령받으면 할 수 밖에 없잖아.”

“섭섭해! 진짜 아무 느낌 없어요? 우리 사이에?”

“우리 사이?”

“몇 번 씩이나 거친 호흡과 뜨거운 시선을 교환한 사이인데!”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아, 긴박한 전투 속에서의 흥분을 말하는 건가. 그거라면 이해가 간다. 사파이어는 이상한 방향으로 납득해버렸다. 그가 눈치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알료샤의 농담은 혼자만 이해되고 혼자만 웃기는 경우가 많은데다가 이따금씩 수위를 불쑥불쑥 넘어간다.

“아프지 않게는 죽여줄 수 있어.”

“내가 죽음의 고통을 겪을 게 싫어서? 역시 꺼려지니까? 역시 날 사랑해서?”

“시끄러워서.”

“너무 슬프다……. 나는 기회가 있어도 당신을 죽이지 않을 건데.”

“고맙군.”

“왜냐면 당신이 좋으니까.”

사파이어는 반쯤 기계적으로 대답하던 것을 멈추고 알료샤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당신이랑 이야기하다보면 너무 복잡해져. 난 단순한 게 좋아.”

“마치 내가 당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그런 불변의 진리처럼?”

“그러니까 그걸 그만 해.”

“세상에 이만큼 단순한 게 어딨다고! 좋아해요! 사랑해! 나랑 같이 살자!”

사파이어의 인내심에 한계에 다다랐다. 알료샤를 버려두고 자리를 뜨려는 순간 “찾았다!”하는 소리와 함께 일련의 남자들이 나타났다. 계속된 거부에 상심해있던 알료샤는 마침 화풀이 상대가 나타나서 그런지 활력을 되찾은 것 같았다.

“인상착의. 동양인에……. 어디……. 맞는 거 같은데? 옆에 있는 건 뭐야?”

“잘 봐요, 사파이어. 내 사랑이 얼마나 직선적이고 단순한지.”

알료샤는 사파이어에게 윙크를 날리곤 남자들 쪽으로 돌아섰다.

“이건 또 뭐야? 닭 벼슬 같이 생긴 게.”

“닭 벼……. 지금부터!”

새벽녘에 닭이 우는 소리와 비슷한 정도의 성량이 터져 나왔다. 예상치 못한 고함이라 남자들은 물론 뒤에 있는 사파이어까지 흠칫 놀랐다. 알료샤는 인간 확성기라도 된 것 마냥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로 외쳤다.

“사랑의 증명을 시작하겠다! 덤벼라, 이 단역 엑스트라들아!”


잘도 그런 낯부끄러운 소리를 외쳤구나. 머릿속 상태가 정상이 아닌 것처럼 알료샤의 전투력도 정상은 아니었다.

사파이어는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진 3분간의 학살극을 뭐라 설명해야할지 몰라 착잡했다. 대화 내용으로 보아 남자들의 목표는 분명히 자신이었는데 단 한 놈도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하고 갈려나갔다.

알료샤는 총을 꺼내려는 놈들은 모두 죽였지만 칼로만 덤비는 놈들에겐 신사의 도리를 다해 평생 안고 갈 장애만 안겨주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보기 드문 페어플레이 정신이다.

길거리 싸움이 이기면 장땡이라지만 저렇게 싸우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싶은 장면들이 펼쳐졌다. 쓰레기통이 날아다니고, 사람이 날아다니고, 빼앗은 총에서 탄창을 분리하더니 개머리판으로 때리고, 그대로 붙잡아서 자기 옆구리에 끼고는 엉덩이를 인정사정없이 두들겨 패고…….

분명히 목숨이 걸린 싸움일 텐데 진중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저 안에서 알료샤에게 두들겨 맞고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느끼고 있을지 몰라도 밖에서 지켜보자면 코미디 쇼 같은 광경이었다.

알료샤의 키는 벤체슬라스와 비슷하고 체구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옷을 워낙 헐렁하게 입고 다녀서 말라보일 뿐이지 몸은 의외로 근육이 튼실하게 들어차지 않았을까. 걷어붙인 팔뚝의 두꺼움을 보자면 분명히 기본 근육이 있는 사람이긴 하다.

그런데 움직임은 인간이라기보다 심해의 연체동물 같은 느낌이 들었다. 괴상했다.

알료샤는 남자들을 가지고 놀면서 두들겨 패 쓰러뜨렸다. 무기 없는 개인이 무기를 가진 대여섯 명의 남자와 붙어서 전원을 쓰러 눕혔다. 소란이 지나가고 난 후에 알료샤의 손에는 상대에게서 뺏은 무기가 들려 있었다.

바닥에 뻗은 남자들 중 반수 이상은 장애 확정이다. 몇 명은 총을 들고 까분 나머지 죽었다. 사람 목숨이 길바닥에 흩뿌려진 모습인데 어째선지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다시는 내 사랑을 우습게보지 마라! 알겠냐!”

알료샤는 들고 있던 무기를 내던지면서 일갈했다. 그리곤 얼굴에 튄 피를 닦으며 사파이어에게 다가왔다.

“경찰 올 거 같으니까 도망가죠! 손잡아요!”

“아니…….”

“싫으면 내가 안고 가지 뭐, 하핫!”

그렇게 사파이어는 번쩍 들려 알료샤의 품에 안겼다. 당황한 사파이어가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해도 알료샤의 손아귀 힘은 자비가 없었다.

“하핫, 간지러워. 가만히 있어요. 안전한데까지만 이렇게 갈 거니까!”

“아니, 잠깐. 내려놔. 내 발로 걸을 거야.”

“하하……. 자꾸 저항하면 뽀뽀해버린다?”

섬뜩한 경고에 사파이어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알료샤는 고분고분해진 사파이어를 안고 그대로 착실하게 뛰어 범행 현장을 빠져나갔다.


알료샤는 몇 블럭을 지나고 나서야 사파이어를 내려주었다. 물론 베를린에 이 둘만 있는 건 아니니까 그 몇 블럭을 지나가는 동안 온갖 사람의 시선이 둘에게로 쏟아졌다. 사파이어는 노출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초조해졌다.

알료샤는 그런 것쯤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지만.

“배달 끝!”

“물어볼 게 많은데…….”

“잠깐잠깐 그 전에. 나 배고파요. 말하고 보니까 진짜 배고파. 아, 배고파. 왜 이러지?”

알료사가 사파이어의 말을 중간에서 끊고 자신의 배를 문지르더니 “아!”하는 탄성을 냈다.

“나 아침도 안 먹고 이러고 있었구나! 뭐 간단한 거라도 먹으러 가요. 내가 사줄 테니까!”

“그러니까 물어볼 게…….”

“먹으면서! 일단 먹으면서! 응?”

사파이어는 또 알료샤의 페이스에 휘말려 들어서 그에게 손을 잡힌 채 질질 끌려갔다. 둘이 다다른 곳은 피자와 맥주, 간단한 간식거리를 파는 카페테리아였다. 알료샤는 바깥에 자리를 잡고 사파이어를 앉힌 다음 주문하러 갔다.

시간이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알료샤는 바람같이 돌아왔다.

“마르게리타 피자 두 판에 맥주 두 잔. 설마 피자 한 판은 먹을 수 있겠지. 맥주 먹어봤어요?”

“그런 건…….”

“허용되지 않았겠지. 알았어요. 쓰레기 같은 알료샤가 억지로 먹인 거니까 부담 갖지 말고 시도 해봐요. 개수작 부리면 내 목 따겠다던데 기준치가 어느 정도인지 알아봅시다!”

사파이어가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알료샤가 다시 사라졌다. 그리고 주문했던 음식들을 받아가지고 돌아왔다. 놀라운 속도였다. 미리 만들어져있던 걸 데워서 주기만 했을 뿐인지, 알료샤가 가게 주인의 머리에 총을 들이대고 협박을 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알료샤는 테이블에 음식과 맥주잔을 늘어놓고는 사파이어의 맞은편에 앉았다.

“잘 먹겠습니다! 잘 먹어봐요!”

배고프다고 한 건 농담이 아니었는지 알료샤는 바로 피자 한 조각을 집어 들고 입 안에 우겨넣기 시작했다. 사파이어는 피자를 마시는 건지 씹어 삼키는 건지 모를 알료샤와 근사한 냄새를 풍기고 있는 마르게리타 피자를 바라보곤 잠시 고민했다.

알료샤는 정신없이 먹고 있는 것 같아도 눈길로는 사파이어의 행동을 하나하나 훑고 있었다. 머뭇거리던 사파이어는 고민을 끝냈는지 피자를 한 조각 집어 들었다. 알료샤의 눈매가 웃음기를 품고 휘어졌다.

마르게리타는 단순한 피자다. 구구절절이 설명하지 않아도 모양새를 보면 단번에 알 수 있지만. 토마토 소스, 바질, 모짜렐라 치즈, 그리고 도우. 이게 끝이다. 피자 전문점도 아니고 이런데서 구색 맞추려고 팔고 있는 피자가 눈이 돌아갈 만큼 맛있을 확률은 낮다. 그래도 사파이어에겐 이 정도가 딱 적당한 자극이었다.

그의 평소 식단은 헬스 트레이너의 식단에 가까웠는데 일반인의 식사보다는 열량이 더 높지만 조미료는 소금과 아주 가끔 후추가 들어가는 정도로 매우 담백했다.

비율로 따지자면 단백질을 가장 많이 섭취하고 그 다음은 적당한 양의 식이섬유질과 비타민, 그리고 나머지를 탄수화물로 채웠다. 부족하면 단백질 쉐이크로 보충하고. 그걸로 모자란 성분이 있다면 영양제를 먹거나 주사를 투여했다.

벤체슬라스가 살이 빠졌다고 언급한 것도 있고 스스로도 최근의 전투에서 느낀 바가 있기 때문에 요새는 근육을 키우려고 더 단백질을 섭취하고 있었다. 말이야 그럴듯해도 사실상 인간용 사료를 퍼먹는 느낌이었다. 본인은 별 불만 없는 것 같지만.

어쨌든 간에 요약하자면 심심하고 재미없는 식단이다. 사파이어에게 있어서 식사는 즐거움과 연결되는 것이 아니었고, 필요한 열량과 영양소를 얻는 연료 보급과 비슷한 개념이었다.

그런 점에서, 피자나 아이스크림은 왜 먹는지 모를 불합리성의 결정체였다. 영양소가 풍부한 것도 아니고 열량만 지나치게 높다. 근육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 지방만 쌓이게 만드는데 그 지방도 별로 좋은 종류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이것들을 먹는 건…….

“맛있죠?”

알료샤는 피자를 한 입 베어 물고 씹다가 움직임이 멎어버린 사파이어에게 실실 웃으며 물어봤다. 사파이어는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알료샤는 그의 미뢰에 벌어지고 있을 일을 익히 알고 있었다.

토마토와 밀가루, 치즈 따위를 그냥 먹어서는 이런 맛이 나지 않는다. 요리는 맛의 조합이고 화학으로 이뤄낸 예술이다. 영양소를 따지면 물론 불합리적인 측면도 있겠지. 그게 뭐 어때서? 맛있는데!

사파이어에게는 기호란 게 없었을 것이다. 아주 예전에는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당장은 없는 게 확실하다. 머릿속이 표백되어버렸을 테니까.

한 판이라고 해봐야 어차피 한 명이 다 해치울 수 있게 작은 사이즈로 나온 피자다. 알료샤는 사파이어가 한 조각을 다 먹고 두 조각 째를 집어 드는 것을 보고 맥주잔을 들어서 그의 맥주잔에 살짝 부딪쳤다.

사파이어가 뭐하냐는 듯이 멀뚱멀뚱 보자 알료샤가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이건 건배라는 건데.”

“뭔지 알아. 친밀한 사이에 하는 사회적인 의식이잖아.”

사파이어는 “위장 임무 때 한 번 해봤어.”하고 덧붙였다. 알료샤는 그가 몹시 가여웠다.

“그래서……. 잔을 부딪쳤으니까 한 잔 들이켜야죠?”

“지금은 낮인데.”

“낮이고 밤이고 술 마시는 덴 상관없지!”

옳으신 말씀.

“알콜이 들어가면 신경이 느슨해져. 취약해진다고.”

“내가 있는데! 내가 보호해줄 건데!”

“당신도 술 마셨잖아.”

알료샤는 황급히 입을 닦았다. 건배한지 얼마나 됐다고 그는 벌써 반 이상을 들이킨 상태다. 분명히 다 마시면 또 한 잔 주문하러 갈 기세다.

“아니 무슨 음주운전도 아니고 그렇게 빡빡하게 굴 거 없잖아요. 거기다가 나쁜 놈들은 내가 방금 다 때려눕혔는걸?”

“그거에 대해서 말인데…….”

“자, 다시 건배! 마실 때까지!”

알료샤가 끈질기게 굴어서 사파이어는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술을 아예 안 마셔본 것은 아니지만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사파이어의 일상과는 별로 인연이 없는 물건이다.

벤체슬라스는 그에게 불필요한 것을 허용하지 않았는데 술은 불필요한 순위에서도 최상위권에 드는 것이었다. 다른 것은 어떻게 이유를 잘 갖다 붙인다고 해도 알콜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맥주는 기껏해야 5도 가량의 낮은 도수였지만 술을 아예 안 마시는 사파이어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취기를 돌게 했다. 향긋한 보리냄새가 액체 표면에서부터 피어올랐고 입에 한 모금 머금는 순간 홉의 쌉싸름한 맛이 조금 전까지 감돌던 피자의 기름기를 지워주었다. 톡 쏘는 탄산도 새롭고 신선한 자극이었다.

알콜은 즉각적으로 신경에 파고들었는데 항상 잘 벼린 칼날처럼 또렷한 사파이어의 의식이 어딘가 긴장이 풀리면서 느슨해졌다. 편하게 몸이 풀어지는 감각이었는데 맥주를 더 마실 때마다 이 감각은 점점 더 강해졌다.

이것을 비유하자면 뭐라고 할까, 임무를 끝마치고 돌아와서 밤에 침대에 눕는 것 같달까? 기분 좋은 고양감이었다.

효능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맥주가 입 안의 기름기를 씻어준 덕에 다음에 베어 문 피자는 맨 처음 씹은 한 입처럼 맛의 강렬함이 생생했다. 토마토소스의 신 맛, 담백한 도우, 오븐에서 녹아내린 치즈의 맛까지.

사파이어가 원래부터 말을 많이 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지금은 아예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알료샤에게 무언가 물어볼 것이 있다고 추궁하던 것은 싹 잊은 것 같았다.

알료샤는 즐거웠다. 일단 배가 고픈 상태였다가 피자와 맥주로 굶주린 위장을 가득 채워서 포만감에 좀 몽롱해져 있었고, 상대방에게 무언가 즐거운 경험을 선사해준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기쁜 일이다. 특히나 내가 호감을 품고 있는 상대라면.

알료샤는 일부러 사파이어가 질문하지 못하도록 화제를 돌리면서 막고 있었다. 보나마나 방금 전 남자들이 누군지, 왜 알료샤가 자신을 쫓아다니는지, 자기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등등을 물어볼 테지.

굳이 알려줄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알료샤가 여태까지 잘 보호해왔을 뿐더러 사파이어가 한 번 경계하기 시작하면 정말 그림자처럼 시야에서 사라져버리기 때문에 그에게 괜한 걱정을 안겨주기 싫었다.

사파이어 본인이 숨지 않는다고 해도 벤체슬라스가 그를 어딘가에 숨겨버릴 것은 자명하다. 이렇게 스쳐지나가듯이 한 번씩 마주치는 기회가 절실하고 귀한데 굳이 그걸 내 발로 차고 싶지는 않았다.

알료샤가 어느 순간부터 피자를 뜯던 손을 멈추고 자신을 가만히 관찰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자 사파이어가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쳐다보지?”

“아니……. 이제야 사람 같은 표정을 짓는구나 싶어서요. 하하, 귀엽네.”

“사람 같은 표정? 나는 사람이야. 가만히 있어도 인간인데.”

“그럼요, 그럼요.”

착하다, 알료샤. 말대꾸 하는 거 아니야. 옳지. 알료샤는 스스로를 칭찬했다. 이런저런 농담을 던지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리는 건 알겠지만 얌전히 있으면 이 시간을 좀 더 오래 지속시킬 수 있다. 그저 고개를 끄덕여주고 “옳습니다, 맞습니다.” 하고 대꾸해주면 되는 일이다.

“왜 그렇게 웃고 있지?”

“글쎄요, 하하. 왜 그럴까?”

“당신한테는 규칙이란 게 없는 것 같아.”

“예측할 수 없는 게 인간이니까. 그게 좋지 않아요? 삶은 단조로운 게 아니에요. 색깔로 가득 차 있는 거지. 쓴 맛도 있고, 단 맛도 있고.”

“무슨 비유지, 그건?”

알료샤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웃었다. 감정에 대해서 걸음마 수준인 남자에게 너무 많은 것을 한꺼번에 풀었다. 한 번에 너무 욕심 부릴 필요 없겠지. 차차 가르쳐 줄 수 있을 것이다.

“다음에 합시다, 다음에. 마저 먹어요.”


사파이어는 호텔로 돌아왔다. 객실로 돌아오니 방 안에는 손님이 있었다. 잘 빗어 넘긴 갈색 머리에 베이지색 플란넬 정장을 입은 남자가 벤체슬라스와 대화를 하고 있다가 막 이야기가 끝났는지 자리에서 일어나는 참이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둘은 말을 멈추고 문가를 돌아보았고, 사파이어는 방 안의 상황이 짐작이 안 가서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갈색머리 남자가 먼저 벤체슬라스에게 말했다.

“그럼, 전달 드린 사항은 다음과 같고 제가 연락을 한 번 드리겠습니다.”

“금액은 신경 쓰지 말고. 물건이 하나 더 구해지면 알려주시죠.”

“알겠습니다.”

둘은 독일어로 말하고 있었지만 사파이어는 그들의 대화를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갈색머리 남자는 테이블 위에 늘어놓았던 서류들을 가지런히 챙기더니 가방에 넣고는 사파이어가 서 있는 문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곤 “실례.”하면서 사파이어를 스쳐 지나 객실을 나갔다.

그 짧은 사이에 남자는 분석적인 눈으로 사파이어를 재빨리 훑어보았다. 사파이어는 그 시선을 알아챘지만 벤체슬라스의 손님들은 거의 대부분 사파이어를 그런 눈으로 보기 때문에 별 의미는 없다고 생각했다.

손님이 나가고 나자 벤체슬라스가 사파이어에게 손짓했다.

“이리 와.”

사파이어가 다가오자 벤체슬라스가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사파이어를 끌어안고 탐색하기 시작했다.

“그 싸구려 향수 냄새가 또 나는데. 그 거지 놈 만났나? 내가 시키는 대로 했고?”

“네. 전달했습니다.”

“보나마나 무시했겠지. 오늘 있었던 일 전부 다 말해봐.”

그래서 사파이어는 가감 없이 보고했다. 벤체슬라스는 알료샤가 사랑한다고 고래고래 소리질러대며 고백한 것도 웃어넘겼고, 갑자기 나타난 남자들을 연체동물처럼 이상한 동작으로 두들겨 팼다는 것도 웃어넘겼고 심지어 피자를 먹었다는 부분까지 웃어넘겼지만 맥주 부분에서는 그 웃음이 싹 사라졌다.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의 입가에서 나는 술 냄새를 맡고 인상을 팍 찡그렸다. 그는 뒷목을 잡고 고개를 젖히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간 그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았다.

사파이어에게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는 입을 다물고 곰곰이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사파이어를 빤히 노려보았다. 사파이어는 본능적으로 불안감을 느꼈다.

다음 순간 눈앞에 벼락이 쳤다.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의 따귀를 몇 대나 갈기곤 그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침대로 질질 끌고 갔다.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에게 화가 나지는 않았다. 전혀. 다만 그가 통제 밖의 자극을 받고 왔기 때문에 그것을 씻어낼 과정이 필요했다. 알료샤가 도발할 것이라는 건 짐작하고 있었지만 술을 먹일 줄은 몰랐다.

준다고 다 받아먹는 사파이어도 교정이 필요하긴 했다. 그런 것들은 분명히 먹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었다. 벤체슬라스가 정한 규칙이다. 허용되지 않은 행위다.

침대까지 다다르자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의 멱살을 쥐고 일으켜 세우더니 침대로 내던졌다. 벤체슬라스보다 체격이 작은 사파이어는 그의 폭압에 저항 한 번 못하고 침대 위로 나동그라졌다.

아니, 저항하지 않았다는 말이 옳다. 이유도 모른 채 따귀를 맞고 머리채가 뽑힐 듯이 우악스럽게 잡혀 끌려왔지만 사파이어는 그의 주인에게 저항하지 않았다. 반사적으로 터져나올법한 생리적인 방어기제까지 억누르면서.

그는 절대자에게 거스르지 않는다. 절대자의 진노는 예고 없이 찾아오는데다 그가 무엇 때문에 화를 내는지는 사파이어의 아둔한 머리로는 짐작할 수 없는 것이기에. 순종하고 감내하고 묵묵히 받아들일 뿐.

그러나 벤체슬라스의 시선으로 보자면 전혀 화가 난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사파이어의 고분고분함도 그다지 기특하게 생각되지는 않았다. 필요한 작업이 있으니까 그걸 하는 것뿐이다. 섬세한 관찰력 덕에 그는 사파이어가 떨고 있는 것을 알아챘다.

이것은 두려움이다. 내가 그에게 미치는 영향력이고 통제하는 힘 그 자체다.

사파이어가 내구력이 좋다고는 해도 그도 일단은 인간인지라 지금은 정신적으로 한계에 다다른 것을 안다. 쿠르트 하스가 남겨놓은 트라우마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당분간은 다정하게 대해 줄 생각이었다. 상처가 치료될 때까지만.

하지만 사파이어가 다른 자극에 눈을 떠서 자신의 통제력을 벗어나게 될 것 같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흠집이 좀 생기더라도 재교육을 하는 수밖에.

벤체슬라스의 손이 바지 버클을 풀자 사파이어는 눈을 감았다. 당연히 닥쳐올 거라고 짐작한 징벌은 평소와는 다른 형태로 엄습해왔다. 팬티까지 한 번에 끄집어 내려진 바지는 완전히 벗겨지지 않고 허벅지에 걸쳐진 채, 성기와 골반만을 드러냈다.

익숙한 열락을 대비하던 사파이어에게 찾아온 것은 감았던 눈이 번쩍 뜨일 만큼의 고통이었다. 벤체슬라스의 하얀 손가락이 음모를 잡아 뜯고 있었다.

그 어떤 혹독함에도 저항하지 말아야한다는 것을 잊고 본능적으로 손이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음모를 부욱부욱 뜯어내고 있는 주인의 손을 양 손으로 붙잡아 떼어내려고 했다.

벤체슬라스는 말로 경고하지 않았다. 그 대신 음모를 뜯던 손을 멈추고 고환을 움켜쥐어 강하게 힘을 주었다. 사파이어의 억눌린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벤체스라스는 사파이어가 완전히 굴종할 때까지 손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이대로 터뜨려버려도 난 상관없어. 너는 어떨지 몰라도.”

단어가 되지 못한 비명과 헐떡임이 이상한 소리가 되어 흘러나왔다. 사파이어는 정신 못 차리고 벤체슬라스를 떼어내려고 하다가 가까스로 그의 목소리를 듣고는 필사적으로 다른 것을 잡아 뜯고 할퀴었다. 자신의 몸이라던가, 침대 시트 같은 것을.

비명이 흐느낌으로 바뀌자 벤체슬라스가 손을 놔주었다. 그리고 다시 음모를 뜯어내기 시작했다. 우둑투둑 소리가 나면서 굵은 털이 뽑혀나가고 골반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난 널 모욕하고, 꺾고, 부러뜨릴거다.”

네가 내 발 밑에 바짝 엎드리도록. 고개를 들려는 시도조차 하지 못하게. 너의 머리를 짓밟고 그 위에 군림할거다.

내가 너에게 이런 짓을 해도 넌 받아들여야만 하는 거야. 산 채로 너의 내장을 뽑거나, 눈알을 뽑아내도 손 하나 까딱해서는 안 돼. 그게 이 세계, 네가 알고 있는 유일한 세계의 유일한 법칙이다.

나는 너의 신이다. 너의 지배자고 너의 종교이자 너의 교리다.

사파이어의 손은 어느 순간부터 침대시트를 한 움큼 비틀어 쥔 채 혈관이 튀어나올 정도로 힘을 주고 있었고, 다리는 오므리려는 시도도 하지 못한 채 벤체슬라스의 잔인한 손짓 한 번 한 번에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동양인의 체모는 굵고 두껍다. 완전히 뽑혀 나오거나 뽑혀 나오다가 반쯤 뜯겼거나 엉망진창이 된 음모 사이로 핏기가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이정도로는 큰 상처라고 할 수 없다. 정신적으로는 효과가 있었을지 몰라도. 신체적 손상이라고 해봐야 얼마간 쓰라리고 따끔거리기만 할 뿐 멀쩡히 나을 것이다. 벤체슬라스가 체벌의 손을 멈추자 사파이어가 양 손으로 눈을 가리고 어깨를 들썩였다.

울고 있지는 않았다. 통증과 충격을 애써 누그러뜨리고 있을 뿐.

“너는 규칙을 어겼다. 알고 있나?”

“네…….”

“자위해.”

벤체슬라스의 간결한 명령에 사파이어는 눈을 가렸던 손을 내려서 억지로 자신의 성기를 쥐었다. 그러나 뱃가죽이 떨릴 만큼 고통을 겪었고, 모공에서 피가 배어나오고 있는 골반이 몹시 따끔거렸기 때문에 성기는 쉽게 일어서지 않았다.

사파이어가 도움을 바라는 눈으로 벤체슬라스를 올려다보았지만 주인은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 냉혹한 눈으로 자신이 내린 명령이 잘 수행되나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성기를 쥐고 강제로 쓸어 올리던 사파이어가 도저히 안 되겠는지 한 손을 아래로 내려서 고환 아래에 있는 회음부를 지그시 눌렀다. 항문 안의 전립선도 누르고 싶지만 자기 손으로 닿기 힘든데다가 벤체슬라스가 그것까지는 허용해주지 않을 것 같다.

“끄응…….”

회음부를 꾹 꾹 눌러대며 억누른 신음소리가 흘러나오자 벤체슬라스가 “입술 물지 마.”하고 재차 명령했다.

“아, 앗, 아아……. 아흐…….”

“손이 멈췄잖아.”

벤체슬라스의 지적에 사파이어의 손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반응 없던 성기가 힘을 주어 일어나기 시작했다. 벤체슬라스는 그 모든 과정을 똑똑히 노려보았다. 사파이어는 용서가 없는 그 시선을 한껏 여려진 눈으로 애원하듯이 쳐다보았다.

저 손길 없이는 진정한 안락도 없을 뿐더러 절정에 도달하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이건 벌이니까. 하면 안 되는 짓을 했으니까. 자비란 없을 것이다. 알고 있다. 알고 있다…….

“용서해주세요……. 용서, 해, 주세요……. 아앗, 아, 아!”

발기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사파이어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허리를 움찔움찔 떨어대면서 사정했다. 자극이 충분히 쌓였다기보다, 분명히 저 말을 하면서 사정했다. 벤체슬라스의 시선에 관통당하면서 자신의 잘못에 대해 용서해달라고 빌며.

규칙을 어겼다는 배덕감, 벌을 받는 쾌감, 매번 고통스러운 벌을 받으면서도 규칙 어기는 것을 그만두지 못하는 변태. 그는 고통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사실은 벌을 받고 싶은 것이다. 사실은 인정사정없이 망가지고 싶은 거고 결국엔 죽음에 이르고 싶은 것이다.

벤체슬라스는 안도했다. 자신의 통제력이 아직 굳건해서.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의 근육 잡힌 허벅지를 달래듯이 어루만져주었다. 네가 내 것인 이상, 나는 너에게 화내지 않아. 나의 보석. 나의 작품. 나의 노예.


알료샤는 우울했다. 비오는 날에 바람맞은 남자만큼 우울한 존재가 또 있을까. 형광색 우비를 뒤집어 쓴 알료샤는 공연히 길가의 돌을 걷어찼다. 비가 오기 때문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해보지만 섭섭한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따로 약속을 잡아놓은 것도 아니고, 사파이어가 매일매일 밖에 나온다고도 장담할 수 없고, 길에서 마주칠 확률도 어떨지 모르지 않은가. 물론 맨 마지막은 계산에 넣지 않아도 된다. 그는 사파이어의 행동을 감시하고 있으니까.

오늘은 사파이어가 거리로 나오지 않았다. 오늘은 영화관에 데리고 갈 생각이었는데……. 기대가 너무 지나쳤던 걸까. 의미를 잃은 표 두 장이 알료샤의 손 안에서 구겨졌다. 사파이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서 울적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 들었다. 역시 어제 먹인 피자와 맥주가 화근이 되었던 건가?

아니 그 백금발 걸레 놈은 불만이 있으면 알료샤에게 직접 말을 할 것이지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한 들개도 아니고 왜 죄 없는 사파이어만 괴롭힌단 말인가? 알료샤에게 덤빌 용기는 없고 자기 손 안의 보석은 마음껏 괴롭힐 생각이 들고?

사파이어가 승낙만 해준다면 알료샤는 당장 그 걸레를 지구상에서 완전히 없애버릴 수 있다. 자신 있다. 인맥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이다.

그 놈은 알료샤를 거지라고 불러대지만 알료샤도 모아놓은 돈은 꽤 있다. 상식적인 범위 내에서 가지고 있을 뿐이지, 그 놈의 재산 크기가 비정상적인 거니까.

돈이 많으면 할 수 있는 건 많겠지만 그것들 모두 사람 간의 관계와 기회를 희생시키면서 숫자로 교환한 것이 아닌가. 그게 무슨 보람이 있을까? 무인도에 갇혀서 수백만 톤의 황금을 끌어안고 홀로 고독히 죽어가는 게?

“사파이어만 오케이라고 해주면 다 해결되는데…….”

궁시렁거리던 알료샤의 눈앞에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우울한 기분으로 우비에 떨어지는 빗방울의 감각을 느끼던 알료샤가 고개를 들었다. 험상궂은 거한과 그 뒤에 스킨헤드 한 무리가 서 있었다.

“이 놈이냐? 저번에 총 들이대고 협박했다는 게.”

“어엉?”

알료샤는 인상을 팍 찌푸리고 거한을 노려보았다. 누구더라……. 거한은 모르겠고, 뒤에 있는 빡빡이 놈들 중에 한두 놈은 얼굴을 알아볼 것 같기도 했다. 사파이어에게 시비를 걸다가 총을 보고 도망간 놈들이다. 알료샤가 한숨을 푸욱 내쉬며 말했다.

“나 오늘 우울하니까 그냥 가라. 살려줄게.”

“살려줘? 죽는 건 너야, 이 새끼야.”

“내가 인심 썼다. 딱 한 번만 봐줄 테니까 지금 가면 너희는 산다. 안 그럼 죽는다.”

“하하, 이거 웃기는 새끼네.”

“잠깐만, 잠깐만.”

알료샤가 손을 들어 상대방의 말을 막더니 주머니를 뒤져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러시아어로 짧게 몇 마디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알료샤는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고 거한을 올려다보았다.

“5분밖에 간직하지 못할 테지만 내가 인생의 교훈 하나 알려준다. 첫째는 단역 엑스트라 같이 사망 복선을 깔지 말라는 거고 둘째는 사람이 그냥 갈 길 가라고 하면 갈 길 가야 안 뒤진다는 거다. 말하고 보니까 두개네. 나 자비롭네.”

“뭐야, 이 새끼!”

거한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어디선가 날아온 총알이 그의 머리를 꿰뚫었기 때문이다. 위쪽에서 날아온 총알에 의해 대각선으로 머리가 뚫린 거한이 피를 쏟으며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고 알료샤는 피곤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장인 듯한 거한 하나만 믿고 있던 조무래기들은 그 대장이 눈앞에서 어이없게 죽어버리는 것을 보고 기겁했다.

“5분도 안 걸렸잖아.”

알료샤의 말을 끝으로 근처에 숨어있던 저격수들이 스킨헤드들을 전부 사살해버렸다. 총성이 울리고 시체가 바닥에 쓰러지며 목격자의 비명이 울렸다. 알료샤는 어딘지 모를 곳을 향해 엄지를 치켜 올려주었다.

다른 임무를 위해 근처에 있던 저격수들은 알료샤를 도와주었기 때문에 임무를 포기하거나 현재 위치를 버리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거나 또 다른 기회를 잡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감수할 만큼 알료샤의 부탁은 위력이 있었다.

그들 모두 알료샤에게 은혜를 입었거나 협박을 당했기 때문에.

알료샤는 경찰이 오기 전에 터덜터덜 그 자리를 벗어났다. 비는 오지, 사파이어는 보이지 않지, 괜한 시비에 휘말렸지 정말 우울한 날이었다. 죽은 놈들? 그 놈들은 죽어도 쌌다.


그 다음날에도 사파이어는 나타나지 않았다. 알료샤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사파이어가 했던 말들이 하나씩 스쳐 지나갔다. 다리를 다쳤어. 재활훈련 중이야. 고문당하고 싶지 않아. 알료샤가 손목을 잡았을 때 보인 병적인 거부반응도 떠올랐다. 그는 맞고 있는 것이다. 학대당해서 정신이 상처 성이인 것이다.

호기롭게 벤체슬라스의 인내심의 한계를 알아보자고 했지만 정작 그에게 돌아가서 체벌을 받아야 하는 건 사파이어 아니던가. 자신이 대신 겪어줄 고통도 아니면서 얼마나 위선이었단 말인가.

사파이어가 이미 자신에게 말해두지 않았던가. 그것들은 허용되지 않은 것들이라고. 그는 이미 경고했었다. 그 경고를 무시한건 나 자신이지 않은가. 그 결과로 인해 사파이어는 아마 지금쯤……. 그가 겪고 있을 일들은 나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 백금발 걸레가 만악의 근원이지만.

사파이어가 심한 꼴을 당하지만 않았으면 한다. 볼 때마다 상처뿐인 그에게 알료샤는 조금이라도 인생이라고 할 만한 것을 안겨주고 싶었다. 아무도 그에게 주지 않는 것을. 사랑이라던가, 보살핌이라던가, 이 멋진 세상의 온갖 감각적인 즐거움을.

삶은 선물이다. 알료샤같은 킬러가 하기엔 우스운 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선물이다. 태어나서 살아간다는 것은 자극으로 가득 찬 세상을 걸어 나간다는 것이다. 무기물처럼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것은 죽은 것과 다를 바 없다.

물론 그 죽음을 남에게 선사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세상사라는 게 살다보면 서로간의 입장 차이도 있고 불가피하게 타인의 손해를 발판삼아야 할 때가 있지 않은가.

웃고 떠들고 즐기는 게 뭐가 나쁜가? 웃음이 있어야 눈물도 가치가 있다. 킬러는 인형처럼 감정이 없는 게 제일 적합하다고? 이것 역시 일종의 서비스업이다. 사람을 대하는 일이다. 인간의 끝장은 인간의 손으로 내주는 것이 인간에 대한 도리 아닐까?

알료샤의 철학이 많은 사람에게 공감을 사지 못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 하나만큼은 자부심을 가져도 좋은데, 그는 어디 사는 백금발 걸레처럼 인간을 인간 아닌 무언가로 바꾸어놓지는 않았다.

그것은 인간 멸시다. 삶에 대한 증오다.

삶조차도 똑바로 보지 못하는 게 죽음에 대해서는 어련할까. 그 걸레에게 있어서는 죽음도 황금과 교환할 수 있는 대상일 것이다. 생각할수록 알료샤와는 정반대의 인물이다.

상념이 어쩌다가 귀하디귀한 사파이어에게서 꼴 보기 싫게 돈 자랑해대는 백금발 싸가지에게로 흘러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알료샤는 아직도 우울했다. 우울해서 누군가를 해치고 싶었다.

조금 전까지 삶이며 인간에 대한 도리 운운하던 것은 어디다 팽개쳤는지, 알료샤는 우울과 화를 동시에 해소할 것이 필요했다.

사파이어 사냥에 뛰어든 현상금 사냥꾼들은 일단 알료샤 주변에선 씨가 마른 상태다. 소문이 퍼졌나보다. 물론 바라던 바긴 하지만 막상 필요할 때 없으니 섭섭했다.

사파이어를 만나지 못한다면 굳이 밖에서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닐 필요가 없다. 날씨가 흐릿한 것이 또 한바탕 비가 내릴 것 같으니까 집에 돌아가서 계획을 짜야겠다.

방법은 많다. 다음에 사파이어를 만난다면 그 자리에서 확 낚아채서 어디론가 도망간다던가. 그 땐 진짜 죽이려고 들려나? 그는 벤체슬라스의 명령만을 절대적으로 따르니까. 하지만 꽤 매력적인 생각이다. 가능성을 점쳐보자.

알료샤가 차량 수배까지 생각하며 발걸음을 돌리는데 웬 갈색머리 사내가 그와 몸이 부딪칠 뻔했다.

“Entschuldigung.(미안합니다.)”

사내는 습관적으로 사과하며 알료샤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상태였던 알료샤는 사내를 민망할 정도로 빤히 노려봤지만 갈색머리 사내는 그런 것에 신경 쓸 틈이 없어 보일만큼 급한 기색이었다.

알료샤를 스쳐지나간 사내는 어떤 남자와 접촉해서 근처의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괜히 심기가 뒤틀린 알료샤는 “오냐, 너 잘 걸렸다.”하는 마음으로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칸막이가 있어서 각 테이블마다 개인 공간이 나뉘어져 있는 형태의 가게였다. 알료샤는 두 남자가 앉은 테이블 뒤편에 앉았다. 주문하지 않으면 귀찮게 굴 것 같아서 주문은 먼저 했다. 콜라로.

그런 게 메뉴에 있기는 한 건가 싶을 정도로 어이없는 주문이지만 의외로 알료샤 같은 엉뚱한 주문을 하는 사람이 많은지 진짜로 콜라가 나왔다. 시중 가격의 두 배로.

가게 안의 다른 손님들은 정상적으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에스프레소, 카푸치노, 카페라떼, 뭐 그런 것들. 알료샤의 심기를 건드린 갈색머리 녀석까지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알료샤는 그 잔을 빼앗아 놈의 얼굴에 확 끼얹고 싶은 욕구를 자제하며 둘의 대화를 엿들었다.

“신원을 들키지는 않았습니다.”

갈색머리 놈이 말했다.

“벤체슬라스는 제가 진짜 부동산 업자인 줄 알더군요. 잘 속여 넘겼습니다.”

어라, 아는 이름이 흘러나온다. 우연의 일치일수도 있겠지만 저게 그렇게 흔한 이름은 아니지 않은가. 알료샤의 청각이 극도로 예민해졌다.

“일단은 건물 몇 개를 소개하기로 했는데 마지막에 그의 보석이 들어오더군요.”

“실제로 봤나?”

“예. 동양인치고는 커 보이더군요.”

보석이 들어왔는데 동양인이고 주인 이름이 벤체슬라스……. 이 이상 우연이 겹칠 수 없다. 알료샤는 칸막이에 등을 바짝 댄 채 둘의 대화를 하나도 놓치지 않을 기세로 엿들었다.

“위협적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습니다.”

“모르는 게 당연하지, 자네는. 별 다른 특이사항은 없었나?”

“개인적인 감상이지만 눈을 보니까 아주 미친놈 같더군요. 피 냄새가 난다고 할까요. 소름끼치는 남자였습니다.”

“그래, 그건 정말 개인적인 감상이군. 별로 쓸모는 없는 정보야.”

“죄송합니다.”

“또 다른 건?”

“벤체슬라스는 서두르는 기색이더군요. 우리 입맛대로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인할 수 있겠나?”

“그에게 부동산을 소개해주기로 했으니까요. 그는 따라올 겁니다.”

“보석은 같이 오나?”

“잘 모르겠습니다만, 연락을 취해서 확인해볼까요?”

“괜한 짓 하지 마. 그 놈은 의심 많은 여우라서 수상한 냄새가 난다 싶으면 바로 발을 뺄 거야.”

알료샤는 팔짱을 낀 채 전방을 노려보고 있었지만 그의 신경은 온통 뒷좌석의 남자들에게 쏠려 있었다. 알료샤의 눈은 평소의 유쾌한 장난기를 전부 잃어버리고 무섭도록 집중하는 눈으로 바뀌어있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 경호원을 데리고 오건 말건 둘 다 처리해버리면 되니까. 우리한테 유리한 곳인데다가 인원도 우리 맘대로지. 잘하면 한꺼번에 없앨 수 있겠어.”

“현상금은 한 쪽에게만 걸린 거 아닙니까?”

“놈의 보석을 잡아봐야 놈은 또 다른 보석을 키울 테니까. 벤체슬라스의 목이 더 비싸게 팔리겠지.”

어떤 놈이 말하고 있는 건지는 몰라도 마지막 말만큼은 인정한다. 그건 딱히 가로막고 싶지 않다. 근데 사파이어를 위험에 빠뜨릴 계획을 세우고 있지 않은가.

알료샤는 당장 이 자리를 피바다로 만들까 생각해보다가 여기서 두 놈만 족쳐봐야 뒤에 숨은 세력을 찾아낼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놈들이 이야기를 다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날 때까지 팔짱낀 손을 풀지 않은 채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두 놈은 몇 분 뒤에 대화를 끝냈다. 갈색머리 놈은 만나기로 한 장소를 상대방에게 말했고 칸막이 너머의 알료샤 역시 그 주소를 똑똑히 들었다. 상대는 갈색머리에게 보수인 듯한 돈을 넘겨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갈색머리는 다음에 또 이용해달라며 그를 보냈다.

그러니까 이놈은 이제 이용가치가 없다는 거다. 필요한 정보는 다 듣기도 했고. 이놈은 이제 세상에서 사라져도 되는 것이다. 갈색머리 남자가 돈을 챙겨서 카페를 나가자 알료샤도 자리에서 일어나 그림자처럼 그 뒤를 따랐다.

10분 뒤에 갈색머리 남자는 베를린 골목 안 쪽 한편에서 부러진 갈비뼈를 움켜쥐고 숨을 씩씩 몰아쉬고 있었고 알료샤는 그 앞에서 손가락의 긴장을 풀며 다시금 주먹을 쥐고 있었다.

갈색머리 남자는 살려달라며 빌었고 알료샤가 묻지도 않은 것들을 굳이 알아서 토해내기 시작했다. 이거 정보원으로서는 영 쓸모가 없는 놈이다. 금방 배신하는 걸 보니 믿을 수도 없고. 죽여야겠구만.

알료샤는 감정을 담아 남자를 구타했다. 남자는 알료샤를 단순히 염색머리를 한 깡패라고 기억할테지만 그것도 곧 쓸모없는 정보가 될 것이다. 조만간 그는 시력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될 테니까.

남자가 완전히 기절해서 축 늘어진 것을 보고 알료샤는 핸드폰을 꺼냈다. 운이 좋으면 장애를 안고 살아남는 거고, 운이 좋지 않다면 글쎄, 자업자득이라고 해두자.

“여보세요.”

만인의 아이돌이라고 자부하던 청량음료 같은 목소리는 평소의 빛을 잃고 낮게 착 가라앉아 있었다. 전화 너머의 상대도 알료샤의 목소리를 듣고 긴장한 것 같았다.

“애들 모아봐. 다는 말고. 50명 정도만. 크게 한바탕 놀아야 할 일이 있어. 뒤처리는 알아서 하고. 알았지?”

평소의 부탁이 아니라 일방적인 명령이다. 그러나 전화 너머의 상대는 감히 불쾌감을 표시할 배짱이 없었다.

알료샤갸 웃는 낯으로 사람을 대한다지만 그건 알료샤가 상대보다 지위가 낮거나 평등하기 때문에 부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지위가 높은 자가 낮은 자들에게 선의를 베푸는 것이다. 알료샤의 친구와 노예들은 이 사실을 결코 잊지 않았다.

누가 대장인지를 망각했다가 어떤 사단이 일어나는지는 익히 보았으니까. 그게 그들이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유다.


다음 날, 알료샤는 갈색머리 놈이 친절하게 알려준 주소로 왔다.

벤체슬라스가 구매한다는 부동산이라기에 또 요란한 호화저택일 줄 알았더니 약속장소는 웬 폐건물이었다. 철거를 하려는 건지 건물을 짓다가 말았는지 모르겠지만 멀쩡한 건물이었다면 그리 비싸지 않은 아파트였을 것 같았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놈이 이런 곳에 산다고? 그럴 리가. 아마도 사파이어를 따로 살게 하기 위한 장소가 필요했을 것이다. 놈의 결벽증을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보석이다, 작품이다 하고 애지중지하는 척 하지만 실상은 같은 공간에서 숨 쉬는 것도 싫겠지.

자신은 인간이고, 그는 도구니까.

알료샤는 건물 앞에 써서 한숨을 한 번 내쉬곤 하얀 해골이 그려진 검은 발라클라바를 뒤집어썼다. 안면에 뼈대가 그려진 것이어서 스켈레톤이 걸어 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알료샤는 거기에 어두운 렌즈의 고글을 써서 눈을 가렸다.

알료샤는 바닥에 드르륵 끌던 알루미늄 야구방망이를 어깨에 걸쳐 메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세공사들은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 전투력이 있다. 적어도 휘하의 보석들을 제압할만한 전투력은 확실히 가지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잡아먹히기 때문이다.

보석의 질이 낮아서 제압하는데 크게 힘을 들일 필요가 없다면 세공사의 전투력도 낮을 가능성이 있지만 품질 좋은 귀한 보석을 가지고 있는 세공사가 싸움을 못할 확률은 없다고 봐야한다. 벤체슬라스는 귀한 보석을 가지고 있는 축에 속했다.

그의 보석인 사파이어가 업계에서 알음알음 소문이 나면서 덩달아 벤체슬라스의 명성도 높아졌다. 사파이어 이전에도 그는 유능한 보석들을 키워냈다.

벤체슬라스는 신원을 자주 바꿨기 때문에 이름이 바뀌면 이전 이름을 가지고 뭘 했었는지 가려지는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사정을 모르는 업계 초짜라면 몰라도 이 일을 어느 정도 한 사람이라면 벤체슬라스의 과거 행적과 실력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는 일이 없었다. 그는 강했다.

강하고 고독하고 적이 많은 남자였다. 전 세계를 대상으로 정재계의 거물이나 유명인사, 때로는 정부를 상대로 일거리를 받는 세공사들인지라 누구도 그들이 일정 규모 이상의 단체를 만드는 것을 환영하지 않았다.

세공사들이 분리되어 있어야 의뢰인들이 그들을 쉽게 부려먹을 수 있었고 착취할 수 있었다. 세공사들도 서로서로 경쟁하는 관계라지만 일단 동업자이기도 하고, 이런 상황에서든 좋든 싫든 힘을 합쳐야 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벤체슬라스는 대부분의 상황에서 비협조적이었다. 벤체슬라스는 본인의 이득을 위해선 얼마든지 타인을 희생시키고 조직의 틀을 깨버렸다. 벤체슬라스가 퍼뜨린 무한한 이기주의 때문에 모처럼 세공사들 사이에 제대로 된 동맹이나 연합이 만들어지려고 해도 수포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세공사들이 서로를 불신했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이기주의자가 벤체슬라스뿐만인 것은 아니지만 그는 뭐랄까……. 묘하게 신경을 거스르는 구석이 있는 남자였다. 항상 홀로 고고한 것도 그렇고, 타인을 비천한 것 보듯이 내려다보는 태도도 그렇고, 붙임성도 없다. 인간적인 면으로는 도저히 좋아할만한 요소가 없는 남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함부로 공격할 수 없었던 것은 그는 일단 돈이 많았고, 그 돈으로 쌓아올린 성채와 해자, 그리고 하인들이 있었으며, 그 자신이 강력했기 때문이다. 단독으로는 이런 사람을 건드리지 못한다. 하지만 패배자들이 힘을 합친다면?

이 건물에는 벤체슬라스 하나를 잡기 위해 수십 명이 숨어있었다. 세공사를 사냥한다는 건 어마어마한 사건이 될 것이다. 물론 세공사도 얼마든지 암살 의뢰의 대상이 되지만 그건 일에 대한 것이고 이것은 린치다.

세공사의 보석을 건드리는 것? 보석은 사물이다. 마구 다루다가 깨질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의 보석을 부수는 일도 있다. 그건 아직 재물손괴의 범주에 속한다. 그러나 그 보석으로 사람을 죽인다면? 그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것은 살인이다. 세공사는 사람이다.

사파이어의 목에 현상금을 걸었던 물주들도 이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최종적으로는 벤체슬라스의 발목을 꺾어버리는 게 목적이라는 것도.

그러나 그들은 결국 벤체슬라스가 죽길 원하는 것 아닌가? 그의 목을 원하지 않나? 왜 한 발 앞서서 그의 목을 따 흥정의 대상으로 사용하면 안 되나? 뭐, 당장 죽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제압해서 고문 쇼를 벌여도 좋겠고, 처형권을 경매에 붙여 팔아도 좋겠고.

벤체슬라스의 목숨은 좋은 값을 받아낼 것이다. 그가 쌓아올린 원한의 값이다. 벤체슬라스가 죽은 뒤에는 그의 질 좋은 보석을 얻어다 추가 수익을 올릴 수도 있겠지. 좋은 도구는 누구나 환영하는 법이다.

용의주도한 남자니까 아마 오늘도 경호원 역할로 그 푸른 빛깔의 보석을 대동하고 나타날지 모른다. 그 놈을 조심해야한다. 날카로운 칼은 내 손에 있을 때 가치가 있는 것이지 남의 손에 쥐여 있을 때는 제거대상 1순위다.

그러나 건물의 그늘 속에 숨어서 백금발의 남자와 그의 동양인 경호원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에게 나타난 것은 하얀 해골이 그려진 발라클라바를 뒤집어 쓴 괴한이었다.

“뭐야, 너? 새로운 인원인가?”

“새로 사람을 뽑았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너 이름이 뭐야?”

“알렉산드라이트.”

“어엉?”

“Меня зовут Александрит.(내 이름은 알렉산드라이트.)”

다음 순간 금속 배트가 풀스윙으로 날아와 앞에 있던 사람의 머리통을 정통으로 날려버렸다. 깡 하는 소리와 함께 두개골이 으스러지는 소리가 나며 목이 완전히 돌아가 버렸다.

눈과 눈을 마주보면서 사람의 머리에 무언가를 전력으로 휘두를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여기 있는 많은 피라미들은 한 번씩 사람을 해쳐본 경험이 있겠지만, 그 중 얼마나 많은 수가 자기 손으로 직접 사람을 족쳐봤을까?

총이나, 멀리서 던져대는 다른 무기가 아니라 직접 마주보고 서서 이렇게.

옆에 있던 동료는 사람 하나가 어이없게 죽는 것을 보고 입을 떡 벌렸다. 제대로 상황파악을 하기도 전에 자신에게도 금속배트가 풀스윙으로 날아왔다. 조준이 약간 빗나갔는지 금속배트는 머리 대신에 입에 명중해 이빨을 다 깨 놨다. 코가 함께 부러지면서 코피가 터져 나왔다.

“아아, 가만히 있었어야지.”

발라클라바 괴한이 나른하게 탄식했다. 이빨이 다 깨진 놈은 바닥에 털푸덕 넘어졌다가 어지러운 머리를 흔들며 바닥을 기어 도망치려고 했다. 얼마 기어가지도 못한 채, 그의 등을 짓밟는 워커발이 있었다. 사신 같은 무게감이었다.

워커발 한 쪽이 몸무게를 완전히 실어 등 위에 올라타더니 다른 발이 그의 머리를 콱콱 짓밟기 시작했다.

“악! 악! 살려, 살려줘! 살려……. 줘…….”

워커발은 비명소리가 멎을 때까지, 이윽고 찰박찰박 물기 어린 소리만 남을 때까지 머리를 밟아댔다. 입구의 두 놈을 처리한 알료샤는 피 묻은 배트를 시신의 옷에 비벼 닦아내고 다시 어깨에 걸쳐 멨다.

워커 밑창이 피로 흥건하게 젖어서 걸을 때마다 피발자국이 찍혔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알료샤가 안쪽으로 사라지고 난 뒤 몇 분 후, 건물 안으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성별도 나이도 제각각이었다. 인종도 뒤섞여있었다. 그들은 각자의 총과 칼을 확인하면서 건물 안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쓸려나가고 있습니다! 다 죽고 있다구요!”

“무슨 소리냐고, 그게. 한 놈이잖아? 벤체슬라스 말고 또 있나? 사파이어라는 보석인가? 그 놈이 난리를 치고 있는 거야?”

“그게 아니고 열……. 아니 스무 명……. 아니……. 아아악!”

무전기 너머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사라지기 전에 총성이 들렸는데, 무전이 끊기고 나서도 어디선가 총성이 들려왔다. 교전중인가? 누가 쏘고 있는 건가? 벤체슬라스가 나타나기는 한 건가? 열 명, 스무 명이라고? 그가 낌새를 눈치 챈 건가?

온갖 가능성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데 꺼져있던 무전기가 다시 켜지며 누군가가 인사를 해왔다.

“Привет.(안녕하신가.)”

평소와 다르게 낮게 깔린 목소리지만 상대의 본래 목소리 톤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평소에는 말 그대로 청량음료 같은 상쾌한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다. 지금의 목소리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무전기를 들고 있던 남자는 상대가 누군지 한 번에 알아채고는 할 말을 잃었다. 그는 뭔가 각오할 시간이 필요했다. 잠시 뜸을 들이더니 그가 무전기에 대고 말했다.

“알렉산드라이트?”

“Да, ты знаешь мое имя.(그래, 내 이름을 알고 있군.)”

“당신이 여기서 뭘 하는 거지?”

“Ой люлі, люлі, Налетіли гулі, налетіли гулі, Та й сіли на люлі.(잠들어라, 잠들어라. 비둘기가 내려와 요람 위에 앉는구나.)”

질문에 대한 답은 없이 무전기 너머에서 음산한 노랫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남자는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알렉산드라이트……. 아니 알렉세이 씨. 미안하지만 난 러시아어를 몰라. 왜 여기 있는 건지 이유를 알려줬으면 좋겠는데.”

“Стали думать і гадать, Чим дитятко годувать.(그리곤 생각하기 시작하지. 아기에게 무엇을 먹일까.)”

말은 알아듣지 못해도 곡조로 이것이 자장가라는 것은 알겠다. 전혀 다른 의미의 자장가가 될 것이고 한 번 빠져들면 절대로 깨어나지 못할 잠이라는 것도. 관과 무덤으로 끝날 자장가가 될 것이다.

남자는 무전기를 내려놓았다. 대화는 통하지 않는다. 알렉산드라이트가 왜 나타났는지는 모르겠다. 저렇게 열 받은 상태로. 우리가 뭔가를 잘못했나? 그의 심기를 건드릴 일이 있었단 말인가? 이유를 말해주지 않으니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그가 벤체슬라스를 감싸줄 일이 있단 말인가? 알렉산드라이트의 넓은 인맥에 벤체슬라스도 포함이 되어있었던 건가? 믿기 힘든 일이었다. 어쨌거나 전투를 대비해야했다.

남자는 알렉산드라이트가 러시아어를 쓴다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다. 알렉세이라는 이름이나, 친한 사람에게만 허용하는 알료샤라는 호칭부터 그가 러시아 쪽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는 한 번도 러시아어를 쓴 적이 없다.

그의 모르는 일면을 오늘 본 셈인데 재수 좋게 살아남으면 두고두고 퍼져나갈 이야기가 될 것이다. 알렉산드라이트가 러시아어를 쓰기 시작하면 당장 도망가라고.


벤체슬라스는 중개인과 약속한대로 그가 알려준 주소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려서는 순간부터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지만 벤체슬라스는 일단 건물 부지 안으로 들어섰다. 완전히 폐건물이었다.

주문한대로 아파트가 맞기는 하지만 몇 십 년 전에나 아파트라고 불렸을 물건이지 지금 상태로는 딱 철거하기 직전이다. 아니, 철거 공사가 진행 중일까? 지어지지도 않은 건물을 추천했을 리가 없는데. 착오일지도 모르겠다. 흔하진 않지만 어쩌다가 한 번씩 생기는 일이다.

돈 많은 거물들을 대상으로 보석이라는 암살 서비스를 판매한다곤 하지만 세공사들은 범죄자들이다. 법의 영역에서 벗어난 자들이 법이 제공하는 혜택을 받으려면 비싼 값을 치러야한다. 집이나 차를 구하는 것부터 치료를 받고 은행계좌를 여는 것까지 정상인보다 웃돈을 얹어줘야 정상인만큼의 권리를 누릴 수 있다.

그마저도 위험을 감수해야한다. 사기꾼에게 속아 넘어갈 가능성, 자신이 아니더라도 자신이 하청을 준 업자가 사기꾼에게 당할 가능성, 상대가 강도로 돌변할 가능성…….

규칙이 없다는 것은 만인에게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소리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절대적인 것은 없다. 덩치가 더 크고 힘이 더 센 세력이 일시적으로 주도권을 쥘 뿐 그마저도 오래가지는 못한다.

그러니까, 이런 일도 있을 수 있다. 자신이 일을 맡긴 업자도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까이거나, 혹은 그 업자가 내 뒤통수를 까거나.

어쨌든 일단 그를 만나야했다. 그도 허위매물에 속은 걸지 모르고, 그게 아니라면 그의 머리에 총을 들이대고 진실한 대화를 나눠볼 수 있을 테니까.

벤체슬라스는 품 안의 베레타 9000을 더듬어보곤 옷매무새를 바로 한 뒤 쓰러지기 일보직전인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광을 잘 낸 페라가모 구두가 뚜걱뚜걱 소리를 내며 공터 같은 건물 안을 울렸다.

사파이어를 혹사시켰기 때문에 숙소에 놔두고 왔지만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데리고 올 걸 그랬다. 중개인이 사기꾼이라고 해도 벤체슬라스는 그를 제압할 자신이 있었다. 단지 비싼 옷에 피를 묻히기가 싫었을 뿐이다.

그러나 더 안쪽으로 들어가기 전에 벤체슬라스는 복면을 쓴 두 사람에게 제지당했다.

“외부인은 들어오지 마.”

“어? 잠깐만. 머리 색깔이?”

못 박힌 야구방망이를 어깨에 걸친 녀석이 벤체슬라스를 알아보는 기색이었다.

“세공사잖아. 형님이 말한 그 녀석 같은데.”

“당신이 벤체슬라스인가?”

벤체슬라스는 대답하지 않고 두 놈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경계하지 말라고. 오늘은 당신이 목적이 아니니까.”

“형님한테 보고해야하나?”

“미쳐 날뛰는 중일 텐데. 말이 통하긴 할까?”

벤체슬라스는 품 안의 권총을 꺼내들려던 것을 멈추고 둘을 가만히 관찰했다. 다른 세공사의 끄나풀인 모양이지. 누구일까?

벤체슬라스를 알고 있다면 어찌됐든 웃으면서 만날 수 있는 얼굴은 아닐 텐데.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것은 알겠다. 그렇다면 다른 누군가와 싸우고 있다는 소리인가? 계산을 하다가 판단을 끝낸 벤체슬라스가 입을 열었다.

“너희는 뭐야?”

“독일인일 줄 몰랐는데.”

“독일인 아니야. 독일어를 할 줄 알뿐이지. 누구냐고 물었는데.”

“그래? 외국인치고는 완벽하게 말하는데? 독일인인줄 알았어.”

“질문에 대답해.”

실랑이는 오래가지 않았다. 멀리서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싶더니 엄청난 속도로 가까워지면서 굉음이 되어 바닥과 충돌했다. 비명은 지면에 접촉하는 순간까지 끔찍하게 커졌다가 무언가가 퍼석 깨지는 소리와 함께 멎어버렸다. 동시에 핏방울이 튀었다. 길을 가로막고 있던 둘은 물론이고 벤체슬라스에게도.

벤체슬라스의 하얀 얼굴에 핏방울이 튀어 주륵 흘러내렸다. 바닥에는 조금 전까지 사람이었던 무언가가 사람 비슷한 무언가로 변해 뒤통수를 바닥에 박고 퍼져있었다. 부릅뜬 두 눈에서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혈관이 파열된 모양이다. 벤체슬라스는 미간을 꿈틀거리더니 사람이 떨어져 내린 곳을 올려다보았다.

그들이 있는 곳 바로 옆에는 꼭대기 층까지 이어진 계단이 있었는데 그 계단 끝에서 아래로 떠밀린 모양이다. 꼭대기 층의 계단 난간에는 하얀 해골이 그려진 발라클라바를 뒤집어 쓴 놈이 아래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발라클라바에 고글을 쓰고 있다고 해도 어째서인지 그게 누구인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알렉산드라이트.”

혼잣말로 중얼거렸을 뿐인데 꼭대기 층의 남자는 입모양으로 그것을 알아보기라도 한 것인지 가운데손가락을 곧게 치켜들어 벤체슬라스에게 화답했다. 벤체슬라스는 그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아서 그의 유치한 대응을 무시하고 자신을 가로막는 둘에게 다시 돌아섰다.

“그래서, 너희는 알렉세이의 부하들인가?”

“그렇지.”

“왜 저놈이 여기 있는 거지?”

“자세한 건 잘 몰라. 우리는 형님이 시키는 대로 하니까. 그리고 당신을 들여보내지 말라는 소리도 들었지. 그러니까 들어가지 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봐서 알겠지?”

“전혀 모르겠는데.”

“우리랑 싸울 생각 하지 마, 세공사. 당신이 단독 세력인 건 알고 있어. 우리가 형님을 따른다고 해도 우리는 다른 세력이야. 갱을 적으로 돌리고 싶진 않지?”

벤체슬라스는 이제야 그들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복면을 쓰고 있었지만 입 부분을 가리고 있어서 눈과 이마는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중동계로 보인다. 터키인일까? 그 쪽 갱단이랑 얽혀서 좋을 게 없다. 벤체슬라스는 순순히 뒤로 물러섰다.

“잘 생각했어. 우리도 당신이랑 싸우고 싶진 않으니까.”

“난 여기서 부동산 중개인을 만나기로 했는데. 알렉세이가 무슨 짓을 벌이는 진 몰라도 내가 선약을 걸어둔 장소야.”

“그 중개인이라면 이미 죽었을걸. 아니면 병신 됐거나.”

“그게 무슨 소리지?”

“그건 형님한테 직접 물어보는 게 좋을 거야.”

“계약이 파기됐다면 난 돌아갈 거야. 여기에 더 이상 볼 일이 없군.”

“아니, 그건 안 되겠어. 일이 끝날 때까지 당신은 남아줘야 해.”

들어가는 것도 안 된다. 하지만 돌아가는 것도 안 된다. 벤체슬라스는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다치기 싫으면 내 발목 잡지 마. 나는 돌아가겠어. 내가 너희들을 가만히 내버려두는 것도 너희 세력을 존중해서야. 그 잘나빠진 갱단이 무서운 게 아니라. 이 차이를 알아야지. 내 개인영역을 침범하면 내가 시간 들여 예의라는 것을 가르쳐주지.”

“날카로운데. 우린 당신한테 악감정이 있는 게 아니야, 세공사. 시키는 대로 하는 것뿐이지.”

틀리지 않은 말이지만 남의 사정을 다 봐주다간 내가 손해 보기 십상이다. 벤체슬라스는 그들을 무시하고 돌아서려고 했다. 가지 못하게 막는다지만 뭘 어쩔 셈인가? 손을 대는 순간 전쟁선포다. 그건 상대도 잘 알고 있을 터.

그러나 벤체슬라스가 등을 돌리는 순간 안쪽에서 남자 셋이 도망쳐 나왔다. 그들의 차림새를 봐서 안에서 어떤 지옥이 펼쳐지고 있는지 짐작이 갔다.

자신의 피와 남의 피로 피칠갑을 한 남자들이었다. 간신히 무기를 떨어뜨리진 않고 손에 쥐고 있었는데 그걸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었다. 그들은 살기 위해 도망치고 있었다.

벤체슬라스가 떠나지 못하도록 잡고 있던 둘은 “저거 우리 애들이야?”, “아닐걸. 아니네.”하고 무심히 말을 주고받았다. 한 가운데에 있던 벤체슬라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품에서 총을 꺼내 남자들을 겨누었다.

“이런!”

“진정해. 너흴 쏘려는 게 아니니까.”

복면을 쓴 둘이 황급히 옆으로 물러나자 벤체슬라스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남자들을 쐈다. 침착하게 한 발. 실내고 가까운 거리라지만 그래도 움직이는 표적인데 총알은 정확히 한 남자의 이마를 꿰뚫었다.

사격 시의 반동으로 인해 총구가 크게 흔들렸는데도 벤체슬라스는 곧바로 다음 표적을 조준해 또 한 번 방아쇠를 당겼다. 두 번째 남자가 죽었다. 하지만 세 번째는 죽이기에 너무 가까워진 상태였다. 세 번째 남자는 동료 둘이 옆에서 죽는 것을 보고 죽음의 공포도 잊고 광분 상태가 되어 벤체슬라스에게 달려들었다.

벤체슬라스는 총을 거꾸로 그러쥐고 손잡이로 남자를 후려쳤다. 남자가 자신에게 달려드는 것을 그대로 이용해 그를 잡아채 비틀어서 팔 안에 가둔 다음 눈을 한 번 찍고, 그가 기절할 때까지 쇳덩어리 권총으로 그를 내리찍었다.

남자는 기절한 건지 죽은 건지 몸을 축 늘어뜨렸다. 벤체슬라스는 그를 바닥에 툭 떨어뜨려놓고 총에 이상이 없는지 확인한 다음 품 안에 다시 넣었다. 그리곤 옷매무새를 바로 했다. 피가 조금 묻어버렸지만 크게 문제되는 수준은 아니었다.

깔끔하고 신속한 동작이었기 때문에 계속 지켜보고 있지 않았더라면 방금 뭐가 지나갔을지도 모를 정도였다. 벤체슬라스를 붙잡아두려던 둘은 계획을 수정했다. 이 남자가 원하는 대로 하도록 내버려두고 자신들은 나중에 보고만 하기로.

알료샤는 이 정도로는 미칠 듯이 화내진 않을 것이다. 그도 벤체슬라스의 실력을 알고 있을 테니 어쩌면 관대하게 눈감아주지 않을까.

“사파이어란 놈이 괴물이라는 소리는 들었는데.”

“그를 키운 게 나야.”

벤체슬라스는 죽은 남자들에게서 무기를 빼앗았다. 권총 두 자루, 나이프 하나, 너클. 쇠파이프 같은 길고 큰 무기는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가지고 있어봐야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좁은 실내에서는.

벤체슬라스는 권총 두 자루의 탄창을 확인하고 총의 상태를 가늠한 다음 한 손에 한 자루씩 쥐었다. 그리고 남자들에게 고갯짓을 했다.

“시간낭비하지 말고 앞장 서. 알렉세이가 무슨 짓을 하는 진 모르겠지만 빨리 정리할수록 내 시간도 덜 뺏기겠지.”


“알료샤, 아니 알렉세이 막시모비치.”

남자가 다급하게 호칭을 바꿔가며 알료샤를 불렀다. 남자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던 알료샤는 “이놈 봐라?”하고 동작을 멈추었다. 남자는 자신의 말이 효과가 있다고 판단했는지 절박한 미소를 지어가며 알료샤에게 매달렸다.

“오해, 그러니까 오해가 있었던 것 같은데 우리 후회할 짓은 하지 맙시다. 말로 합시다. 말로.”

“내가 널 죽이지 말아야 할 이유를 80가지만 대봐.”

“하하, 이런 상황에 농담도…….”

“농담으로 들리나?”

“천만에요, 천만에. 미안합니다.”

다행히 알료샤는 자신을 이름과 부칭으로 불러주는 사람에게 항변의 기회도 주지 않고 머리를 으깨버리는 무뢰한은 아니었다. 남자는 이제부터 선택을 잘 해야 했다. 운 좋게 몇 초간의 목숨을 구했으니 그 다음에 할 말은 몇 분의 삶을 더 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첫 번째 이유로는 우리 어머니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러시아인이고…….”

“틀렸어.”

“예?”

알료샤는 대답을 들려주지 않고 일단 남자를 죽였다. 그의 인내심은 남자가 존칭으로 불러줬을 때까지만 유지됐다. 그게 마지노선이었다. 알료샤는 분이 풀리도록 남자의 시신을 팬 다음에 내뱉었다.

“난 우크라이나 출신이야.”

이름 가지고 판단하면 안 되지, 이 가짜야. 알료샤는 그렇게 덧붙이며 다음 사냥감을 찾아 나섰다.

거의 다 정리되기는 했다. 적어도 그래 보인다. 알료샤가 앞장서서 죽이긴 했어도 그가 끌어 모은 수십 명의 부하들이 곳곳에서 학살을 벌이고 있었다. 벤체슬라스 하나 잡자고 만반의 준비를 해 온 모양인데 설마하니 알료샤가 낄 줄은 몰랐겠지.

알료샤가 개입하지 않았으면 벤체슬라스는 정말로 죽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만큼은 안타까운 일이다. 확 죽어버릴 것이지. 그러나 이 아까운 기회를 놓치고서라도 알료샤는 이들을 막아야 했다. 사파이어가 위험하기 때문에. 다른 건 다 필요 없다. 오직 사파이어뿐이다.

그건 그렇고 조금 전 죽인 놈을 다시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알료샤는 자신에 대한 정보를 가리는 법이 좀처럼 없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다녔지.

처음 보는 놈이 자신을 풀 네임으로 부른다고 해도 크게 놀랍지는 않다. 아마 어디선가 뿌린 명함이 돌고 돌아서 이런 놈한테까지 흘러들어온 모양이지. 그렇지만 자신에 대한 잘못된 정보가 퍼지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 진실이다. 알료샤는 신사중의 신사요 기사 중의 기사이며 이 시대의 보기 드문 양심이자 만인의 귀감이라던가, 페어플레이 정신을 추구하는 진정한 스포츠맨이라던가…….

물론 사람들이 헷갈려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알료샤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그의 개인사는 복잡하다. 말소된 지 오래겠지만 그에게 국적이 있다고 하면 우크라이나일 것이고, 태어난 고향이나 다녔던 초등학교, 어린 시절의 친구들까지도 하나하나 짚어낼 수 있다.

그야 뭐 러시아인 가정이긴 했지만 우크라이나에서 살고 있으면 우크라이나인 아닌가. 특히 성장을 거기서 했다면 말이다.

알료샤가 러시아에 대해 가지는 감정은 복잡 미묘하다. 다른 사람이 그런 섬세한 부분까지 알거라곤 생각하지 않고, 그래주기를 바라지도 않지만, 그렇다면 적어도 아픈 부분은 건드리지 말아야지! 민감하단 말이다! 나도 내가 어떤 정체성을 가져야하는지 모르겠어!

말이 나온 김에 알료샤는 자신에 대해 할 이야기가 아주 많다. 남이 굳이 묻지 않아도 하고 싶은 얘기가 산더미지만 딱히 누구에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한다고 들어줄 사람도 없어서 입을 다물고 있는 것뿐이지 절대로 다른 세공사와 마찬가지로 입 꾹 다물고 어설픈 신비주의를 고집하는 건 아니다!

가명? 알료샤는 언제나 본명을 썼다! 너희가 믿지 않는 것뿐이야! 알료샤는 항상 자신을 당당하게 드러내고 다녔다. 요즘 같은 시대에 진실이라는 당당함은 태양의 광휘와도 비견될 것이어서 사람들이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한다.

아무리 이게 진짜라고 말해도 자기가 먼저 의심하고 믿지 않는 것이다. 저게 진짜일리 없다, 진짜 이름일리 없고 진짜 신분일리 없다, 이러면서 스스로의 상상으로 괴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가만 있어봐라. 말리지 마라. 할 얘기가 많다. 애당초 세공사라는 것들이 아주 미심쩍은 사기꾼 집단 아닌가! 뭐가 고급 청부업자란 말인가! 이런 건 그냥 쏴서 죽이면 이기는 게임이다! 운이 좋으면 유치원생도 할 수 있다!

물론 유치원생한테 그런 걸 시켜선 안 되겠지! 요컨대 세공사란 놈들은 번지르르한 말로 포장만 잘했다 뿐이지 자기가 직접 일을 할 생각은 않고 보석이라는 이름으로 자신 밑에 하청업자를 두고 그걸 착취하는 구조가 아닌가!

이야기가 왜 여기까지 흘러갔지! 그래! 방금 그 어설프게 존칭으로 부른 놈! 이미 죽었지만 한 번 더 패주고 싶다!

“광증이 도졌나보군.”

재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드레날린에 찌들어 있던 알료샤의 사고를 한 순간에 현실로 되돌려놓을 위력이 있는 목소리였다. 알료샤는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했다. 벤체슬라스가 알료샤의 부하 둘을 데리고 여기까지 왔다.

알료샤는 그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더니 히죽 웃었다.

“비싼 휴고 보스 수트가 엉망이 됐는데. 세탁비 깨나 나오겠는걸?”

“시끄러워.”

“돈으로 떡칠하지 않고는 자신감 없어서 길거리에도 못 나오는 분인데 그런 꼴이 되서 안 됐어.”

벤체슬라스 옆에 선 두 사람은 알료샤가 광기를 터뜨리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그들은 입구를 지키는 역할이었다. 벤체슬라스가 보이면 그를 잡아둬야 하기도 했고. 알료샤는 그들의 실책을 탓할까?

그들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고 있자 알료샤가 벤체슬라스에게 못 박힌 듯이 시선을 고정한 상태로 손만 휘휘 내저었다. 그들은 알료샤의 관대한 용서에 안도하며 다시 자기들이 있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내가 오늘 여기서 선약이 있을 거란 걸 미리 알고 난리를 쳐놓은 것 같은데, 알렉세이 씨.”

“잘 알고 있네.”

“시비 거는 거냐? 이 미치광이야.”

“목숨 살려줬더니 말하는 꼬락서니하고는. 너 때문이냐? 사파이어 때문이지!”

“내 물건에서 손 떼라고 했지.”

“현상금 아직도 걸려 있는 거 알아, 몰라.”

“현상금?”

“프랑스에서 난리칠 때 걸렸던 거.”

벤체슬라스는 기억을 더듬다가 “아, 그런 게 있었지.”하고 짧게 대답했다. 알료샤는 지금이라면 저 놈을 쳐 죽이고 사파이어를 자신이 데려와 애지중지 보살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강렬한 열망과 가능성을 느꼈다.

“너의 가장 소중하고 귀한 보석이라며? 관리 좀 제대로 하지?”

“그건 네가 알 바 아니고.”

벤체슬라스는 무언가가 떠오른 듯이 표독스럽게 알료샤를 쏘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사파이어한테 이상한 짓을 해놨더군?”

“뭐? 맥주랑 피자 이런 거? 이 독재자야. 나치랑 다를 게 뭐야? 네 품 안이라면 어떨지 몰라도 길에 내놨을 땐 사회의 룰이라는 게 있다는 걸 이제 좀 알 때가 되지 않았나?”

“그는 내 재산이야.”

“그는 인간이야.”

벤체슬라스는 싸움을 중단하고 알료샤를 싸늘하게 보다가, 한 호흡 가다듬은 다음 다시 입을 열었다.

“아까, 내가 선약이 있다고 했지. 난 여기서 부동산 중개인을 만나기로 했어. 그는 어디에 있지?”

“못 알아들었나본데, 넌 함정에 빠진 거야. 현상금 때문에. 그건 사기꾼이었다고. 중개인 따위가 아니라.”

“그래서 함정에 빠진 나를 대신해 사기꾼을 처단했다. 나 때문이 아니라, 사파이어 때문에?”

“그래.”

“역시 네가 죽어야 끝날 집착인가?”

벤체슬라스는 총을 손에 쥐고 있었다. 알료샤는 허리에 차고 있는 총을 꺼내 들어서 조준하려면 2초는 걸린다. 실수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아까 부하들은 보내지 말았어야한다.

지금 이 자리에서 알료샤를 쏴버린다면 완전범죄가 가능하다. 어차피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난장판이니까 알료샤가 누구 총알에 맞든 알아낼 방도가 없다. 하지만 알료샤는 두렵지 않았다.

“쏴 봐.”

벤체슬라스는 총을 쥐고만 있을 뿐 총구를 들어 알료샤에게 겨누지는 않았다. 그저 얼음장 같은 시선만 고정하고 있을 뿐. 알료샤는 보란 듯이 비웃었다.

“넌 돈 말고 가진 게 없지. 네 편은 하나도 없어. 문제가 생겨도 네 쪽에 서 줄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변호인도 구할 수 없을 거다. 세공사끼리 싸우면 관심가질 사람이 많을 거야. 난 친구라고 부를 사람이 많아. 너처럼 세뇌에 의한 게 아니라, 내가 호의를 베풀어서 만든 관계들이지. 그들은 내가 죽으라면 죽어. 기꺼이. 기쁘게 말야. 넌 어떨까?”

“나한테는 사파이어가 있어.”

“그러니까 네가 죽고 나면 소유권자가 없어질 보석 아닌가. 누구 손에 들어가든 상관없는 일이 되겠지. 내가 말하고 있는 건 너다. 너 말이야, 너. 너의 죽음 말이다.”

“그래. 세공사끼리 싸우면 이야기가 재밌어지겠지. 그건 너한테도 해당되는 말이야. 너도 날 건드리지 못해.”

알료샤는 발라클라바를 쓰고 있는 상태로 씨익 웃었다. 하얀 해골그림으로 가려진 얼굴이지만 벤체슬라스는 그 너머의 송곳니 가득한 웃음을 볼 수 있었다. 서로에게 짖어대고 있는 형국이지만 둘 모두 서로에게 먼저 손을 댈 수는 없다. 전쟁을 각오하지 않고서야.

“사파이어 시켜서 나 죽인다고 했다며? 네 손 더럽히지 않고.”

“기쁘지 않나? 짝사랑하는 남자에게 죽는 건데.”

“사파이어가 그대로 실종되면 기분이 어떨 것 같아? 가장 아낀다는 보석이 남의 수중으로 들어가서 그대로 사라지는 거야.”

“깨지지 않는다면 찾아내서 내 손으로 깨버리면 그만이야. 임무 도중에 죽거나, 내 손으로 죽이거나. 남의 손에 들어가게 두지는 않아. 지옥의 밑바닥까지 뒤져주지. 특히 너 같은 거지한테 줄 바에야.”

“걸레가.”

“거지가.”

벤체슬라스는 할 말을 다 했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이런 궤변으로 가득 찬 사이비 교주랑 대화하고 싶지 않았다. 시간낭비기도 하고. 그는 당장 집이 필요하단 말이다. 언제까지고 호텔 생활을 할 수 없다. 위치가 너무 노출된다.

사파이어를 옆에다 끼고 있는 건 통제가 용이하기도 하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날이 잘 선 칼을 24시간 끼고 있다는 소리도 된다. 그는 지금 당장은 순종적으로 보이지만 언제 미쳐서 벤체슬라스에게 달려들지 모른다.

벤체슬라스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자기 자신과 돈 말고는 아무것도.

“할 얘기는 다 한 것 같으니까 난 돌아가도록 하지.”

“누구 맘대로?”

“내가 내 멋대로 가겠다는데 무슨 상관이야.”

“널 죽이려고 이만큼의 인원이 기다리고 있었다잖아. 물론 난 사파이어밖에 신경 안 쓰지만. 그 뒤처리를 내가 대신 해주고 있는데 감사인사 한 마디도 없이? 뒤처리는 니가 해야지.”

“난 부탁한 적 없어.”

“그냥 확 죽게 놔둘까? 생각해보니 사파이어는 놓고 온 모양인데. 여기서 너만 죽어버리면 모든 게 깔끔하게 해결될 것 같은데?”

어차피 알료샤는 사파이어만 손에 넣으면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세공사들 간의 암묵적인 규칙이나 금기 같은 것도 신경 쓰지 않으니까.

잔당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겠지만 알료샤가 정말로 부하들을 데리고 모조리 철수해버리면 남은 인원을 벤체슬라스 혼자 상대해야한다. 별로 좋은 결과는 아니다. 벤체슬라스는 큰 한숨을 내쉬었다. 이놈과 손을 잡는 것만큼은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았는데.

“이번만 협력하도록 하지. 앞장 서.”


나렉 바르사미안은 고향 아르메니아를 떠나온 것을 후회한 적이 없다. 여태까지는. 고향에 남아봤자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다. 언젠가 다시 돌아갈 생각도 없었다. 아르메니아가 그에게 남겨준 것은 이름과 씁쓸한 추억뿐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사소한 것조차도 아주 소중하게 느껴졌다. 내가 왜 그걸 붙잡고 있지 않았을까. 언젠가 이렇게 죽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개죽음이 될 것이라는 걸.

세계 각지의 전장을 돌아다니며 용병 생활을 하던 나렉은 자진해서 보석이 되었다. 그 편이 돈을 더 벌 수 있을 것 같았고, 민간인 사이에 숨어서 누군가를 암살한다는 건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보다 훨씬 안전한 환경으로 들렸다. 자유는 용병 생활 때보다 없었지만 어차피 돈이 없으면 자유란 것도 의미가 없다.

그가 이 일을 한지는 3년이 조금 넘었다. 그 동안 많은 사람들을 죽였지만 세공사 사냥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궁금하기도 했다.

세공사 중에는 직함만 세공사일 뿐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얼간이들이 있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보석이라고 불리는 실무직을 제압할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이 좋은 사람이 많았다. 이런 바닥에서는 오래 살아남기가 힘들다. 살아남는다는 것 자체가 실력이고 곧 경력이다.

그런 점에선 용병과 별로 다를 게 없다. 재수와 운에 의한 것이든, 순수하게 실력에 의한 것이든, 적은 죽었는데 나는 살아있다는 건 어쨌든 내가 상대보다는 우월하다는 증명이 된다.

나렉은 이번에는 운이 자신을 도와주길 바랐다. 알렉산드라이트의 등장은 전혀 예상치 못한 사건이었다. 그건 그의 주인도 인정할 것이다. 그러니 이번만큼은 전장에서 다져온 실력이 아니라, 운이 그의 목숨을 살려주길 바랐다.

저들의 재수가 나쁘기를. 눈 먼 총알에 맞거나, 방심해서 칼에 베이거나, 발을 헛디뎌서 계단을 구르기를.

알렉산드라이트의 실력은 방금 눈으로 봤다. 저런 게 세공사라는 족속이라면 한 번에 두 명 이상을 상대하고 싶지는 않았다. 알료샤를 어떻게 제압해야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거기에 또 세공사가 한 명 더 등장했다.

본래 표적인 벤체슬라스. 인원이 이만큼이나 갈려나가지 않은 상태라면 벤체슬라스 상대로 충분히 싸움을 벌여 볼만 했지만 지금은…….

나렉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도망갈까 생각해봤다. 보석 생활은 확실히 어떤 면에선 용병 시절보단 쾌적했지만, 어떤 면에서는 절대 오래 할 일이 못 됐다.

그는 운이 좋아서 멀쩡한 상태로 이 일을 하고 돈도 받을 수 있었지만 다른 불쌍한 녀석들은 온전한 정신을 가진 경우가 드물었다. 약에 찌들어있거나, 미쳤거나, 너무 맞아서 바보가 됐거나…….

지금까지 벌 만큼 벌었으니까 이번에는 손을 털고 이 바닥을 아예 뜨는 것이다. 목숨을 걸 가치는 없다. 그런 건 세상에 없다. 지금이라면 동료들을 버리고 여길 몰래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다.

동료라고 해봐야 끈끈한 우정 같은 게 있는 건 아니다. 그들 모두가 현상금으로 묶인 일시적인 동맹이다. 서로의 뒤통수를 때린다고 해봐야 잠깐 유감을 느끼고 말 사안이다. 나중에 살아서 다시 만난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결정을 내린 나렉이 자신이 숨어있던 창고 문을 빠끔히 열고 텅 빈 복도를 내다보았다. 총성과 비명은 저 멀리서 들리고 있었고 가까이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지금이다!

나렉은 발소리가 크게 울리는 것도 개의치 않고 출구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저 쪽 멀리 있는 계단참에서 사람의 모습이 얼핏 보이자 누구인지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고 일단 총을 갈겼다.


벤체슬라스가 발소리를 먼저 들었다. 고개를 살짝 내밀어 누구인지 확인하려다가 본능적으로 머리를 모퉁이 안쪽으로 다시 집어넣은 벤체슬라스의 눈앞으로 아슬아슬하게 총알이 스치고 지나갔다.

바로 뒤에 붙어있던 알료샤가 대놓고 “아깝다!”하고 소리쳤다. 벤체슬라스는 방금 머리통이 날아갈 뻔 했는데도 크게 놀라지 않고 모퉁이 바깥쪽으로 손만 내밀고 위협사격을 가했다. 그에게 총을 쏜 범인은 이미 도망가고 없었다. 발소리로 보아 저 멀리 달려가는 중이었다.

벤체슬라스는 알료샤를 버려두고 그를 뒤쫓기 시작했다. 호흡이 전혀 흐트러지지 않은 채 총을 쥐고 달려가는 모습을 뒤에서 보고 있자면 사람이라기보다 사람처럼 보이게 만든 정교한 기계 같은 느낌이 들었다.

벤체슬라스는 감정적인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알료샤는 그 뒤를 느긋하게 따라갔다. 서두를 것이 전혀 없었다. 이 기회에 벤체슬라스가 확 죽어버리면 더 좋고.

도망치던 나렉은 자신을 쫓아오는 상대방을 돌아보고 나서야 그가 벤체슬라스라는 것을 알았다. 방금 전 총알이 운 나쁘게 맞았으면 그는 임무를 달성한 셈이 되고, 도망치지 않아도 되며, 두둑한 보상을 받을 수도 있었을 것인데.

아까운 일이다. 하지만 돌아서서 응전하자니 그는 이미 많은 용기를 잃은 상태다. 무섭단 말이다. 목숨은 한 개 뿐인데. 반면에 그를 쫓아오는 벤체슬라스는 자기가 사냥감인 처지임에도 오히려 사냥꾼처럼 보였다. 그는 나렉의 모습이 보일 때마다 총을 쐈다.

나렉은 “벤체슬라스의 장탄수가 몇 발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앞으로 몇 발 남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머리로는 생각하면서도 몸으로 닥쳐오는 공포는 맘대로 제어할 수가 없었다.

사기가 꺾이면 다 끝나는 얘기다. 나렉이 뒤로 총구를 내밀고 몇 발 쐈지만 표적을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고 쏘는 눈 먼 총알이 맞을 리가 없다. 오히려 자신이 얼마나 겁에 질려있는지만 보여주는 셈이었다. 그리고 벤체슬라스는 그 공포의 냄새를 확실히 맡았다.

뒤를 바짝 쫓던 벤체슬라스가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서더니 제대로 겨냥해서 도망자의 다리를 쐈다. 움직이는 표적인지라 빗나갈 경우를 대비해서 골반과 엉덩이를 노렸다. 어설프게 허벅지나 종아리를 노렸다간 총알만 날릴 테니까.

충분히 계산하고 쏜 것임에도 총알은 제대로 명중하지 않고 나렉의 허리를 스쳤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효과적이었다. 나렉이 크게 비틀거리자 벤체슬라스는 다시 한 번 겨냥해서 이번에는 왼쪽 장딴지를 맞췄다. 적은 이제 도망가지 못한다.

나렉은 다리를 절뚝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뒤에다 대고 닥치는 대로 총을 쐈다. 벤체슬라스는 얼른 엄폐물 뒤로 몸을 숨겼다. 상처 입은 짐승이 텅 빈 총을 붙잡고 방아쇠만 달각거릴 때까지 기다린 다음, 총성이 멈추자 목표에게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벤체슬라스는 나렉을 발로 차 쓰러뜨리고 구둣발로 상처를 짓밟았다. 거친 숨소리와 비명이 함께 터져 나왔다. 벤체슬라스는 남은 총알을 세 보고는 총알이 다 떨어진 총을 저 멀리 내던졌다. 그리고 나머지 손에 들고 있는 총으로 나렉을 겨눴다.

“이름.”

곧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자 벤체슬라스는 상처를 밟고 있는 발에 꾸욱 힘을 주었다.

“끄아아악!”

“이름.”

“나렉……. 나렉 바르사미안!”

공격자의 이름을 들은 벤체슬라스가 그 이름을 가지고 골똘히 생각하더니 내뱉었다.

“마르코 리치의 보석이군. 코드네임이 마노였던가?”

바로 정체를 간파하는 모습에 나렉은 소름이 돋았다.

“날 죽이라고 투입됐을 테지. 그런데 적 앞에서 도망이나 가다니. 형편없는 싸구려군. 임무도 내팽개치고. 아예 발을 뺄 셈이었나?”

“그, 그래! 난 당신 죽일 생각 없어! 난 이제 이 생활 그만둘 거야! 당신이랑 원한 지고 싶지 않아! 살려줘!”

“멍청하기는. 그만두고 싶다고 그만둘 수 있을 줄 아나. 임무를 포기하고 도망갔다고 쳐. 세공사가 그걸 못 찾아낼 것 같은가? 정보원들은 네가 어딜 가든 감시하고 있을 텐데.”

“그래도 여기서 개처럼 죽기는 싫어!”

“이 바닥에 들어온 순간 넌 이미 개야. 우리 모두 진흙탕 개새끼들이고.”

그러나 벤체슬라스는 바로 방아쇠를 당기진 않았다.

“기회를 주지. 내가 묻는 말에 제대로 대답하면 보내주겠어. 그 다음엔 어디서 벌레같이 죽든 내 알 바 아니지.”

“그, 그래!”

“이 일에 개입되어 있는 세공사가 몇 명이지? 마르코 리치 한 사람만은 아닐 텐데. 알고 있는 이름을 전부 대봐.”

“나는 세공사들 이야기는 잘 몰라…….”

“그럼 죽어야지.”

“아니! 잠깐만! 안토니오…….”

갑작스레 총성이 울렸다. 이름을 외치려던 나렉의 머리에 구멍이 뚫렸다. 벤체슬라스는 그가 죽는 것을 보고 번개같이 반응했다. 나렉을 죽인 총구는 이다음엔 바로 자신을 향할 것임을 알기에. 벤체슬라스가 몸을 피하자 조금 전까지 그가 서 있던 자리에 총알이 박혔다.

“배신자는 죽어야지.”

새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렉이 이름을 완전히 내뱉기 전에 처리하려고 했던 모양인데 이미 이름 부분까지는 들었다. 성씨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안토니오 데 루카. 그러니까, 이탈리아 놈들이 개입되어있다는 소리군. 어련하실까.

밀라노의 원한을 아직도 잊지 않은 모양이지. 마르코 리치와 다르게 안토니오 데 루카는 세공사니 보석이니 하는 것과는 관계없는 프리랜서다. 어떻게 보면 킬러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지만……. 벤체슬라스는 자신의 예상보다 원한을 더 많이 산 모양이다.

나렉 바르사미안의 입을 막은 것은 나이를 구분하기 어려운 동양인이었다. 20대 초반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30대일수도 있다.

사파이어를 소유한지 꽤 됐지만 그에 한해서만 익숙할 뿐이지 다른 동양인은 아직도 낯선 거리감이 있었다. 인종이 다른데다가 접점이 별로 없어서일까.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사파이어가 이 남자보다는 크다는 것이다. 키도 덩치도. 동양인 평균치보다는 크지 않을까.

눈이 가늘어서 바늘처럼 예리하다는 느낌을 주는 남자가 벤체슬라스에게 총을 겨눈 채 그림자 속에서 천천히 나왔다. 벤체슬라스가 모르는 얼굴이다.

“세공사? 아니면 보석?”

“스피넬이라고 불러.”

“내가 아는 스피넬이 아닌데.”

“세공사 한 사람이 보석 이름을 독점하는 건 아니잖아?”

옳으신 말씀이다.

“지금 활동하는 사파이어 중에서 제일 유명한 게 당신이 가지고 있는 보석이라며. 만나보고 싶었는데. 여기에는 안 왔나?”

“네 주인은 누구지?”

“알려줄 필요 없는데. 당신 보석도 동양인이라면서? 유색인 시종을 둔 백인 주인님 같은 놀이를 하고 싶었나?”

“알려줄 필요 없지.”

짧은 대화 속에서 벤체슬라스는 몇 가지를 감지했다. 남자는 미국식 영어를 쓴다는 것, 중국 억양이 배어나온다는 것, 어느 지방인지까지는 확실하게 구분할 순 없지만 광동어는 아니라는 것. 그러니까 홍콩은 제치고……. 영어의 유창성과 습관을 봐서는 중국계 미국인일 수 있다. 침착을 가장하지만 사실은 다혈질인 성격도 잘 알겠고.

누가 주인일까. 어디와 연관된 것일까. 삼합회? 그럴 리가. 아시아 쪽과는 척을 진 기억이 없다. 접점 자체가 없기 때문에.

눈앞에 있는 남자는 신인이다. 주인의 정체도 알 수 없고 남자 본인의 실력도 어떨지 모른다. 아직 검증되지 않았을 뿐인 일류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뒤통수에 대고 직접 총을 쏘진 않겠지만 어떤 식으로든 벤체슬라스가 죽길 바라는 알료샤가 금방 합류해서 구해줄 것 같지는 않고, 지금은 이 미심쩍은 남자와 단 둘이서만 대치해야 한다.

벤체슬라스는 상대를 도발해보기로 했다.

“너희들은 인간 같지도 않으면서 항상 기어오른단 말이야. 작은 원숭이처럼 짖어대는 것 밖에 모르는데 시끄럽기만 할 뿐 아무런 힘도 없어. 나약해 빠져가지고는. 너희가 잘하는 거라곤 주인님들 물건을 빠는 것뿐이지. 안 그런가? 너도 총 들고 설치는 것보다는 뒷구멍을 파는 게 더 효율적일 텐데 말이야.”

남자는 굳은 얼굴로 싸늘하게 웃었다. 벤체슬라스는 입 꼬리를 끌어올리며 씨익 웃었다. 도발이 먹히고 있다. 이렇게 단순할 줄이야.

“그래, 노란 것들은 노예일 뿐이야. 노예면 노예답게 사람인 척 하지 말고 바닥이나 핥아.”

다음 순간 남자가 벤체슬라스에게 달려들었다.

흥분이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상황에서는 조준하고 쏜다는 게 의미가 없긴 하다. 남자는 절제 없이 총을 쐈고 벤체슬라스는 총알의 수를 세어가며 응사했다. 섣불리 다 써버릴 수가 없는 것이, 벤체슬라스는 그의 무장을 모른다.

숨겨둔 다른 무기가 있을 수도 있고, 권총을 다 쓰고 나면 옷 안쪽에서 기관단총을 꺼내들지도 모른다. 도발이 생각보다 쉽게 먹힌다는 점이 우스웠다. 어쩌면 도발에 넘어간 척 연기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벤체슬라스와 다르게 장탄수를 계산하지 않고 쏘고 있던 남자는 금방 총알이 다 떨어졌다. 방아쇠에서 달각달각하는 소리가 나자 그제야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지만 마침 벤체슬라스도 총알이 다 떨어졌기에 안도했다. 그가 품 안에서 베레타를 꺼내들기 전까지는.

남자는 총을 보고 몸을 날려 피했다. 그것을 보고 벤체슬라스는 남자가 더 이상 화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판단했다. 이제는 주도권을 쥔 쪽이 바뀌어서 벤체슬라스가 남자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남자가 칼 같은 무기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총알을 이길 순 없다. 물론 베레타의 탄창이 비면 다시 상황이 원점으로 돌아가긴 하지만 그 이전까지는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는 것이다. 벤체슬라스는 총알을 신중하게 쓸 생각이었다.

“스피넬이라고 했던가. 다시 묻지. 너의 주인은 누구지?”

대답은 없었다. 그 대신 남자는 네모난 검신이 곡선으로 휘어진 커다란 대도를 들고 일어섰다. 저걸 어디에 숨기고 있었는지도 놀랍지만, 뜬금없는 무기의 등장에 헛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상대의 실력을 모르는 이상 마냥 비웃을 수만은 없다. 킬러라는 건 어떤 방법을 사용해서든 사람을 죽이면 그만이다. 사파이어가 제대로 검술을 사용할 줄 알아도 상황에 따라 도끼나 톱 같은 공구를 더 선호하는 것처럼.

“총을 칼로 맞설 셈인가?”

“탄창이 무한은 아닐 테니까.”

“한 발이라도 맞으면 끝날 텐데.”

“마지막 한 발이 떨어지면 곤란해지는 건 그쪽일걸.”

맞는 말이다. 절대라는 것은 없다. 벤체슬라스는 탄창이 비었을 때를 대비해야한다. 그 때, 등 뒤에서 불길한 기척이 들리더니 무언가가 날아와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 쨍그랑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칼이었다. 박물관에서나 볼 법한 길고 얇은 레이피어였다.

“아아, 젠장. 아까워.”

탄식이 들려왔다. 벤체슬라스는 인상을 구기며 뒤를 노려보았다. 그 순간 남자가 빈틈을 노리고 칼을 휘두르려고 했지만 남자의 발치에 바로 총알이 박혔다. 번개 같은 반응속도였다. 벤체슬라스는 남자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총을 겨눈 채 그를 견제하고 있었다.

벤체슬라스의 뒤에선 알료샤가 진심으로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저 칼이 명중했으면 알료샤는 고민 없이 손 털고 여기서 나가는 건데. 그리고 사파이어를 해방시킬 것이다. 그를 데리고 살면서 다시 인간적인 감정을 가르쳐주고, 그와 사랑을 나누고, 부끄러운 짓을 하고…….

“난 신사니까 곧 맨손이 될 놈에게 무기를 안 줄 수가 없었어. 망할, 저런 악당한테까지 예외 없이 적용되는 기사도라니……. 이 망할 고귀함.”

“이건 또 어디서 구해 온 거야?”

“들고 설치는 놈이 있길래 두들겨 패고 뺏어왔지.”

“네 놈 손에 들린 건 뭔데?”

벤체슬라스가 지적하자 알료샤가 손에 들고 있던 칼라니시코프 소총을 등 뒤로 숨겼다.

“아무것도 아닌데?”

“이거 가져가고 그거 내놔.”

“싫어! 배은망덕한 자식아! 그걸로 알아서 싸워! 아니 그냥 죽어!”

그러더니 알료샤는 벤체슬라스의 맞은편에 있는 남자에게 엄지를 치켜 올려 세웠다.

“나대신 그놈 반드시 죽여줘! 나랑 마주치지는 말고! 힘내!”

그리고 알료샤는 사라졌다. 벤체슬라스는 물론이고 남자까지 어이가 없어졌다.

“같은 편 맞아?”

“후우…….”

벤체슬라스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레이피어를 집어 들었다. 어떤 시대착오적인 놈이 자동화기의 시대에 17세기의 유물을 들고 다닌단 말인가. 이걸로 킬러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소리 아닌가.

변태가 넘쳐나는 바닥이라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놈들이 너무나도 많다. 하긴, 볼링공을 쓰는 놈도 본 적이 있으니까.

알료샤는 벤체슬라스를 일부러 엿 먹이려고 이런 걸 던져줬을 것이다. 자기는 상식적인 무기를 골랐으면서 벤체슬라스에게는 얇은 도검 한 자루를 던져줬다고? 의도가 빤히 보인다.

아마 그의 계산으로는 벤체슬라스가 익숙지 못한 무기를 휘두르다가 실수를 하게 만들어서 치명상을 입게 만들 속셈이었겠지만,

“오랜만이라 잘 될지 모르겠군.”

벤체슬라스는 레이피어를 다룰 줄 안다. 다룬 지 오래되어 손에 쥐고 몇 번 휘두를 땐 어색했지만 금방 예전같이 익숙해졌다.

벤체슬라스는 칼날로 곡예를 부리듯 허공을 가볍게 베다가 날렵하게 휘둘러 빙글 돌리며 앞으로 내찔렀다. 공격하기보다는 칼 자체를 시험해보는 동작이었는데 날이 잘 선 것을 보니 진짜 실전에서 사용하고 있던 칼임이 분명했다.

“이 바닥은 정신이상자가 너무 많아.”

“테스트는 끝났나?”

남자의 질문에 벤체슬라스가 우아한 동작으로 칼을 거둬들이곤, 오라는 듯이 손을 까딱였다.

남자는 벤체슬라스의 초대에 망설임 없이 응했다. 탕하는 소리와 함께 총알이 발사됐지만 우연인지 총알은 칼날의 표면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제대로 맞았으면 칼날이 깨졌을 텐데 아까운 일이다.

남자가 칼날 너머로 웃었다. 설마? 두 번째로 총이 발사됐고 남자는 두 번째 총알도 요행히 비껴냈다. 과연 우연일까? 남자는 세 번째 기회는 주지 않았다. 조준해서 쏘기엔 남자가 너무 가까워져서 벤체슬라스는 허공에 총알을 낭비하고 말았다. 이로써 베레타는 끝났다.

무거운 칼날이 공기를 베는 소리를 내며 벤체슬라스의 머리칼 몇 올을 잘라냈다. 벤체슬라스는 탄창 빈 베레타를 내던지고 제대로 레이피어를 쥐었다. 거리를 벌려야한다. 저 칼의 무게를 이겨내기엔 레이피어는 너무 얇다. 부러지거나 손에서 튕겨나갈 것이다.

“여유는 사라졌나봐? 백인 주인님.”

“참 단순하군.”

눈에 빤히 보이는 도발에 넘어가는 성격이었지만 남자는 실력자가 분명했다. 보석으로서는 신인일지 몰라도 어디선가 비슷한 일을 하고 있던 게 틀림없다. 살인기술을 가르친다고 해도 마음가짐은 가르칠 수 있는 게 아니다.

실전이란 보호구를 착용하고 타격지점을 공략해서 점수를 따내는 스포츠와는 다르다. 칼을 든 둘이 서로를 죽이려고 드는 것인데, 상대의 칼날이 나를 벨지도 모른다는 공포감과 내가 상대를 베어 죽일지도 모른다는 공포감 둘 모두의 중압감을 이겨내야 한다.

총이라면 간단하다. 목표를 겨냥하고 쏘면 끝난다. 그때까지 내가 감당해야 할 것이라곤 상대의 총에 맞을지도 모른다는 압박감과 이 방아쇠를 당기면 상대가 죽겠지 하는 막연한 죄책감 같은 것이지만, 냉병기는 다르다.

칼은 상대의 살에 쑤셔 넣어지는 그 순간과 그 감촉을 사용자에게 모두 전달한다. 인간을 도륙한다는 감각을.

남자는 확실히 도살자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사람을 베어 죽인다는 것에 대해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저런 것은 누가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긴 세공사 사냥을 보내면서 사람을 해치는데 손을 벌벌 떨 초짜를 보낼 리가 없지. 그건 벤체슬라스에 대한 무시다.

자, 그럼 상대도 전심전력을 다하는 것 같으니,

“실력을 감상해보실까.”

벤체슬라스는 칼끝을 상대에게 향해 쭉 뻗었다가 곧게 치켜 올려 자신의 앞에 수직으로 세워 예를 표했다. 그런 다음 본격적으로 공격 자세를 취하며 칼을 겨누었다.

예리한 정적이 감돌았다. 찰나의 순간, 정적이 깨지며 대도의 두꺼운 날이 위력적으로 공격해 들어왔다. 레이피어는 그것에 맞서지 않았다. 상대를 향한 칼끝은 유지한 채, 가볍게 휘둘러 공격을 피했다. 경기용 레이피어처럼 낭창낭창하게 휘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송곳 같은 느낌으로, 잘 휘어지지 않고 정말 찌르기 중심의 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저런 것에 부딪치면 부러져버린다. 거스르지 않고, 맞서지 않고, 흐르듯이 피한다. 대도는 대도대로 위력 중심으로 부딪쳐오고 있었으나 단 한 번의 맞붙음도 없어서 안달이 나고 있었다. 레이피어는 긴 칼이다. 거리가 멀어지면 불리한건 대도 쪽이다.

찌르기인가 베기인가, 두 칼날의 간격은 목숨의 간격이었다.

대도는 자루가 긴 칼이다. 양손으로 쥐고 휘두르면 최대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지만 무거운 만큼 동작이 커진다. 벤체슬라스에겐 방어만 잘 해내면 얼마든지 기회가 생기는 조건이다. 상대도 그것을 깨달았는지 어느 순간부터 정면으로 나서는 것을 멈추고 칼을 역수로 쥐더니 방어 자세를 취했다.

서로가 먼저 공격하기를 기다리는 형국이었다.

벤체슬라스가 몇 번 급소를 노리고 찔렀지만 남자는 역수로 쥐고 있던 칼날로 모두 튕겨냈다. 벤체슬라스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한 번 까딱 꺾고는 찌르기로만 일관하던 공격 패턴을 바꾸었다.

세이버라도 쥔 듯이 칼날을 휘두르기 시작하자 찌르기를 방어하던 남자는 크게 놀랐다. 실전에는 플뢰레, 에페, 사브르 같은 개념이 없다. 찌르기 용으로 만들어진 칼이라도 필요하면 휘두르기, 베기 용으로도 쓸 수 있다. 그게 위협이든 정말 공격을 목적으로 했든 간에.

남자로서는 펜싱을 상대로 하는 것도 처음일 것이다. 익숙하지 않은 검술을 상대하려니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리겠지. 벤체슬라스는 그 적응시간마저 주지 않을 셈이었다.

얇은 칼날이 탄력적으로 휘어졌다. 이런 칼은 타격에는 적합하지 못하지만 그 대신 변칙성이라는 특성을 갖게 된다. 여기 저기 찔러 들어오고 이따금씩 베어 들어오는 공격까지 막아내던 남자는 어느 순간부터 페이스를 잃기 시작했다.

그리고 벤체슬라스는 남자가 갖다 바치다시피 한 공격권을 내다버릴 생각이 없었다.

두어 번인가 대도의 칼날이 레이피어를 쳐냈지만 레이피어는 그 타격에 거스르지 않고 튕겨 나갔다가 다시 탄력을 이용해 공격해 들어왔다. 벤체슬라스가 앞으로 쭉 쭉 밀고 나오면 그만큼 남자는 뒤로 밀려났다.

“칼을……. 이렇게……. 잘 쓴다는……. 소리는 없었는데…….”

“사파이어는 알면서 나에 대한 정보는 몰랐단 말인가.”

“이런 망할!”

“그를 세공한 게 나야. 잘 보고 배우도록.”

초조해진 남자가 몇 번 큰 공격을 휘둘렀지만 도리어 자세만 흐트러지는 꼴이 되었다. 벤체슬라스는 여유롭게 물러섰다가 남자가 빈틈을 보이는 순간을 노려 가차 없이 찔러댔다.

찌르기가 최초로 먹혀들어가자 그 다음부터는 그저 난도질일 뿐인 칼부림이 계속됐다. 어깨를 찔려서 비틀거리던 남자가 그 다음 찌르기를 막지 못하고 손목을 내주었다. 레이피어의 예리한 칼날이 손목을 관통하자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칼을 놓쳤다.

벤체슬라스는 공세를 멈추고 그를 비웃는 천박한 짓은 하지 않았다. 무례도 정도껏이어야지.

벤체슬라스는 최선을 다해 남자를 구멍 내고 긁어놓았다. 위력적이지 않아 보이지만, 레이피어를 사용한다는 건 결국 칼만 한 크기의 송곳으로 사람을 죽을 때까지 찌른다는 것이다. 잘 휘어지기도 하는 송곳이라서 칼날이 비틀어 빠져나가며 벌려놓는 상처와 거기서 튀는 피는 덤이었다.

남자는 바닥에 쓰러졌다. 벤체슬라스는 피가 끈적하게 묻은 칼날을 허공에 슥 휘둘러 털며 처음 시작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의 적에게 경의를 표했다.

“살아남으면 또 만나도록 하지. 내 밑으로 들어와도 좋아. 괜찮은 실력이었으니까.”

쓰러진 자리에서부터 피가 고여 나와 웅덩이를 이루기 시작한 남자는 대답이 없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것은 기사도를 아는 남자, 알렉산드라이트의 땀과 눈물과 헌신으로 얼룩진 사랑 이야기다. 누구든 알료샤와 3일, 아니 딱 이틀만 같이 있어도 그가 심상치 않은 또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치 지금처럼.

알료샤는 어디서 구해왔는지 모를 카세트라디오를 드럼통 위에 올려놓고는 버튼을 눌렀다. 최대 음량으로 키운 노래가 흘러나왔다. 잔잔히 깔리는 피아노 인트로를 배경음 삼아서 알료샤는 손에 쥔 칼라시니코프 소총을 장전했다.

소총 말고도 알료샤가 노획한 무기는 많았다. 무기뿐이 아니라 부하도 많았다. 벤체슬라스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자산이지!

번호판을 바꿔달아도 기분 나쁘게 돈지랄하는 벤체슬라스의 취향은 눈에 띌 수밖에 없다. 빈민가에도 포르쉐를 끌고 나타날 놈 같으니. 건물 밖에 주차해 둔 차량을 보고 현상금 사냥꾼 잔당이 모여들었고, 알료샤 일행이 안에서 나머지를 처리하는 동안 바깥에는 그만큼의 인원이 또 포진했다.

걸레 하나를 족치기 위해 이만큼의 인원이 모이다니 솔직히 감동했다. 벤체슬라스의 목을 따겠다는 그 마음가짐, 칭찬하고 싶다! 알료샤는 힘껏 응원한다! 절대 말리지 않아!

그러나 사파이어가 개입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다.

알료샤는 차가운 도시남자지만 후훗 내 남자에게는 따뜻하겠지. 내 남자만큼은 확실하게 보호한다! 그것이 나의 철학이다!

정작 일을 벌려놓은 세공사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야 그렇겠지. 세공사들에게도 협회 같은 기관이 존재한다. 공인된 기관은 아니고 사조직일 뿐이지만 이 바닥 생리가 그렇듯이 가장 힘 센 놈이 대장 자리를 꿰차고 앉아서 중재자 역할을 맡고 있다. 세공사끼리 분열이 나면 이득을 보는 것은 소비자뿐이다.

협회는 그러니까, 세공사 사이의 불화를 중재해서 서로 자멸하는 것을 막기 위해 존재하는 셈이다. 물론 그건 허울 좋은 구실일 뿐이고. 요컨대 싸우지 말라는 소리다.

그러나 눈 가리고 아웅이다. 방법은 많다. 의뢰의 형태로 어떤 세공사가 지목되면 그도 목표물 하나가 될 뿐이다. 보석을 들여서 처리해버리면 “일이었으니까.”라는 핑계로 슬쩍 넘어갈 수 있고. 벤체슬라스가 사파이어를 시켜서 알료샤를 죽이겠다 운운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알료샤야 협회고 나발이고 이 세계의 규칙 같은 건 신경 쓰지 않기 때문에 크게 제약받는 건 없다. 그것 때문에 적이 많지만, 반대로 그것 때문에 편을 들어주는 사람도 존재한다.

또 그가 규칙을 절대적인 권위로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 금기나 마구 건드리고 다니는 건 아니다. 예를 들어서 세공사끼리 반목하지 않는 규칙 같은 것은, 직접적으로 알료샤에게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최대한 지켜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빈틈을 보이면 공격당한다. 누구 하나 매장할 수 있으면 벌떼같이 몰려든다. 이 세계의 법률은 고결한 맹세와 미덕 아래 세워진 것이 아니다. 철저하게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 뿐이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모두가 서로의 적이다. 벤체슬라스가 죽어버리면 깔끔하게 끝나는 이야기지만 그를 함부로 죽일 수 없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알료샤가 벤체슬라스를 직접 죽여 봤자, 이번에는 알료샤 토벌대가 만들어질 것이다.

물론 수틀리면 규칙이고 뭐고 없다. 그것 역시 모두가 인정하는 또 하나의 룰이다. 송곳니를 드러낸 맹수들에게는 힘과 이익만이 절대 정의다.

그러나 알료샤가 정말 내키지 않지만 벤체슬라스의 목숨을 구해주는 것은 그런 이유뿐만이 아니다. 이 혼탁한 세상의 한 줄기 빛이요, 구원의 표상인 알료샤는 이미 몇 세기 전에 멸종해버린 기사도를 간직한 남자이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신사적으로 살아가기엔 이 세상은 너무나 비열하다. 후훗.

사파이어는 그의 헌신을 알지 못할 것이 분명하고 벤체슬라스는 배은망덕하기 그지없는 근본 없는 천것이라 감사한 줄도 모를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료샤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헌신을 다한다.

신사다움을 지키기 위해선 고통을 감수해야하니까. 허나 그것은 가치 있는 싸움이다, 알렉세이 막시모비치.

“형님 눈이 돌아갔는데.”

“말 걸지 마. 우리가 총 맞는다.”

알료샤가 도시의 비정함을 씁쓸하게 씹어 삼키며 세상의 고뇌를 짊어진 히어로 놀이를 하고 있는 동안 뒤처리를 끝마친 벤체슬라스는 레이피어를 내던지고 자기가 챙겨왔던 베레타를 다시 주워 품에 넣은 후, 유유히 그 장소를 빠져나갔다.

벤체슬라스라고 알료샤의 추태를 보지 못한 것은 아니다. 보고도 못 본 척 했을 뿐이지. 저런 것과 매번 엮여야 하는 자신의 처지는 누가 가엾게 생각해준단 말인가.

알료샤가 난리를 쳐 준 덕에 자기 돈 들여서 처리업자를 고용해 시체처리나 증거물 청소를 시키지 않아도 된다는 점은 좋게 생각할만하다. 이미 총성이 요란하게 울렸으니 경찰도 시끄럽게 몰려올 테고. 독일 경찰은 상대하기가 껄끄럽다.

벤체슬라스가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고 사라졌지만 싸움의 구도는 이제 벤체슬라스 사냥에서 알료샤의 학살로 바뀌었기 때문에 현상금 사냥꾼들은 돈이 아니라 목숨을 위해 원하지도 않는 싸움을 벌여야했다. 그러다보니 사냥꾼들은 슬슬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우리가 저 또라이랑 싸울 필요가 없잖아?”

지당하신 말씀.

“계획 변경이다. 철수하자고!”

“어딜 감히!”

“으아아악!”

저 멀리 있을 거라고 생각한 알료샤가 그들 뒤에서 나타났다. 하얀 해골이 그려진 발라클라바는 이제 피에 물들어 시뻘건 해골로 바뀌어 있었다. 알료샤는 발라클라바에서 피를 뚝뚝 떨어뜨리며 그들에게 총구를 들이댔다. 칼라시니코프가 아니다. 또 다른 총을 빼앗은 모양이다.

“시비를 걸었으면 죽어야지!”

“아니 당신이랑은 싸울 이유가!”

“내 영역을 건드리면 전쟁이다!”

“당신 영역이 아니잖아!”

“사파이어!”

알료샤는 방아쇠를 당겼다. 당겼다기보다, 무차별로 갈겼다. 그러더니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덧붙였다. 이미 그의 말을 들을 사람은 죽고 없었지만.

“벤체슬라스는 죽여도 돼! 그건 적극적으로 응원한다! 파이팅!”


그날은 보석 5개가 깨지고, 3개가 중상을 입고, 열댓 명의 프리랜서 킬러가 사망하고,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날이었다. 그 날을 기점으로 사파이어의 목에 걸려있던 현상금은 철회되었다. 벤체슬라스 하나 잡자고 입은 손해가 너무나도 막심하기 때문에.

알료샤가 벤체슬라스 사냥에 끼어든 것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지만, 보석의 목에 현상금을 걸어서 다른 세공사를 음해하려 했다는 소식이 협회에 알려진 게 화근이었다. 요컨대 판이 너무 커졌다. 들키지 않았으면 되는 건데.

벤체슬라스가 비록 친분관계를 맺기에 유쾌한 인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에 대한 린치를 묵과할 수는 없다. 한 번 허용해주기 시작하면 무절제한 폭력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갈 것이다.

협회는 진상조사에 착수했다. 그 말은, 희생양을 찾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찔리는 구석이 있는 관련인물들은 몸을 사려야만 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벌이라는 것은 재판을 열어서 징역을 몇 년 때리고 교도소에 구금하는 그런 상식적인 것이 아니다. 죽음이다. 경우에 따라서 일벌백계를 위한 잔인한 죽음이 될 수도 있다.

소식을 전해들은 벤체슬라스는 알료샤가 처벌 대상자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유감스러워했다. 누구보다도 일을 요란하게 벌려놓은 것 같은데, 이번에도 그의 인맥이 엉뚱한 곳에 입김을 불어넣은 것은 아닐지.

정말이지 바퀴벌레 같은 남자다. 사파이어에 대한 노골적인 집착을 알게 된 이상 더더욱 그를 제거하고 싶어졌다. 내 재산을 도둑질 해가겠다고 당당하게 선언까지 하지 않는가.

귀찮은 것들을 피해 기껏 독일로 거주지를 옮겼더니 여기서도 귀찮은 일이 생길 것이 뻔히 보였다. 또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단 말인가? 그럴 순 없지. 내가 옮기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내 영역에서 나가야 한다.

누군가는 알료샤의 방약무인한 행동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 굳이 내가 나서고 싶지는 않지만 나를 건드리는데도 가만히 있을 순 없지. 벤체슬라스는 그에게 분명히 경고했었다.

그가 그토록 집착하는 남자의 손으로 죽여주겠다고.

사파이어는 어떤 망설임도 없을 것이다.


“말 걸지 마. 닥쳐. 말 걸지 마. 아무도 말 걸지 마.”

알료샤는 침대에 엎어진 채 중얼거렸다. 차렷 자세로 엎어진 상태라 얼굴이 침대 시트에 파묻혀 그가 하는 말은 거의 웅얼거리는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우울한 경고가 대부분 들리지 않는다고 해도 어차피 그에게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사파이어는 알료샤가 어떤 고생을 했는지 절대 알지 못할 것이다. 아니 뭐 딱히 알아달라고 사정하는 건 아니다. 모양 빠지는 일이니까. 호감 있는 남자에게 잘 보이고 싶은 그런 심리가 있지 않은가.

그렇기는 해도 벤체슬라스의 경계심을 극한으로 자극했다는 건 확실히 알료샤의 실수였다. 아마도 다시는 사파이어를 만나지 못하겠지……. 다시는 못 만난다니! 아니 그럴 리가 없다! 그런 불길한 소릴 하다니! 그럴 리가 없어!

기껏해야 일주일이나, 한 달이나, 몇 달이라던가, 일 년……. 일 년 동안 만나지 못하는 건 싫어! 그건 싫어! 만나러 갈 거야!

알료샤가 엎어진 상태로 발광하기 시작하자 침대 옆에 탁자를 두고 포커를 치고 있던 부하들이 조심스럽게 탁자를 들어서 슬금슬금 움직여 침대와 거리를 두었다. 가까이 있으면 머리채를 잡힐지도 모른다.

알료샤가 협회의 살생부에 올라갔다는 소리는 없었지만 평소부터 이런저런 사고를 치고 다니느라 어차피 요주의 인물이었으므로 이번 사건을 계기로 알료샤의 아지트도 탈탈 털렸다. 그래서 그는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아는 동생들에게 신세를 지면서 저렇게 하염없이 우울의 바닥을 긁고 있을 뿐.

발광이 좀 잠잠해지나 싶더니 알료샤의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포커를 치던 사람들이 공포영화라도 보는 심정으로 알료샤를 돌아보았다. 알료샤는 흐느껴 울고 있었다.

“야, 저거 진짜냐…….”

“가서 물어봐.”

“내가 왜……. 무서운데.”

“왜에에에!”

“으아아악!”

알료샤가 벌떡 일어나자 포커가 뒤집히면서 난장판이 됐다.

“왜인지 100자 이내로 설명해봐!”

“뭐를요! 뭐를요!”

“왜 그를 구해주고서도 난 기억되지 못해?! 왜지?! 물론 나도 각오는 하고 있었어! 근데 왜냐고!”

“아악, 머리! 머리! 놔요!”

“왜 숭고한 건 이렇게 고통스러운 거야!?”

고생이란 고생은 있는 대로 다 했는데 남는 게 없다. 사랑하는 남자는 그의 헌신을 알지 못할 것이고 타인은 그의 기행을 “그 인간은 항상 그러니까.”로 일축하겠지. 피땀 흘렸지만 자기만족밖에 없는 결과. 고결한 사람이 살아가기엔 너무도 가혹한 세상이다.

지금 이 순간 알료샤의 고통을 이해하는 사람은 알료샤에게 머리칼을 붙잡힌 채 우드득 우드득 뜯어지고 있는 부하뿐이었다.

부하의 괴성과 반쯤 뜯긴 머리칼을 남긴 채, 그림자 속에서 사랑하는 남자를 지키던 알료샤의 노력은 이렇게 끝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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