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in Teil
호텔 창문 너머로 깨끗한 베를린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파란 세계지도 화면이 뜬 텔레비전에서는 종소리가 울리며 타게스샤우의 인트로 음악이 흘러나왔다.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를 뒤에서 끌어안은 채 그의 성기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 손목과 발목이 같이 묶인 사파이어는 눈가리개를 한 채 몸을 한껏 벌리고 주인의 품 안에 안겨 있었다.
견딜 수 없을 만큼 한계까지 몰린 자극 때문에 이따금씩 다리가 발작적으로 오므라졌지만 같이 묶인 손목 때문에 몸을 오므리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벤체슬라스는 그를 품에 안고 팔과 다리 사이, 열린 옆구리로 손을 집어넣어 반쯤 기계적인 동작으로 성기를 쓸어내리고 있었다.
벤체슬라스는 품 안의 사파이어에게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그는 아나운서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오늘의 뉴스에 집중했다. 사파이어의 성기는 콕 링(cock ring) 3개로 단단히 결박되어 있었는데, 귀두 바로 아랫부분, 뿌리 끝, 고환 부분이었다.
얼마만큼 긴 시간을 문질러진 걸까, 성기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검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벤체슬라스가 실수로 귀두라도 스칠라치면 사파이어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비틀었다. 지금의 사파이어에게는 손바닥의 요철과 지문 한 결 한 결의 자극까지 송곳으로 후벼 파는 것 같은 큰 자극이었다.
“아윽……. 윽…….”
사파이어가 가녀리게 몸을 떨며 고개를 숙일 때마다 벤체슬라스가 그 턱을 붙잡고 몸을 똑바로 세우게 만들었다. 사파이어가 몸을 꼿꼿이 세운다고 해봐야 벤체슬라스보다는 키가 작다. 벤체슬라스가 TV를 보는 데는 전혀 방해되지 않았다.
벤체슬라스는 고개를 살짝 숙여 사파이어의 어깨에 머리를 올려놓고 하반신의 상황을 흘끔 쳐다보았다. 사정을 통제하려고 링을 채워놓긴 했지만 더 기둥을 건드렸다간 싸버릴 것 같았다. 벤체슬라스는 기둥을 훑던 손을 풀고 사파이어에게 잠시 호흡을 가다듬을 시간을 주었다. 아주 잠깐이었다.
그런 다음, 벤체슬라스는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고환의 표면을 뽀드득 뽀드득 문지르기 시작했다.
“흐아악! 그만! 아! 그만!”
사파이어의 허리가 접힐 듯이 앞으로 움츠러들자 벤체슬라스가 다시금 엄한 손길로 그 턱을 치켜들고 자신의 가슴에 등이 밀착되게끔 몸을 똑바로 펴게 했다.
이틀 정도 사파이어를 사정하지 못하게 했다. 이 상태로 계속 괴롭혔다. 자거나 먹거나 생리현상을 해결하는 시간이 아니면 계속. 풀어지지 못한 흥분이 계속 쌓이고 쌓였다가 아무런 자극 없이 가라앉고, 그 다음에 또 발기했다가 가라앉고를 반복하면서 사파이어의 몸은 손만 대도 자지러질 것처럼 예민해졌다.
아무런 의미 없이 가지고 노는 것은 아니었다. 복종과 규율에 대한 훈련이었다. 아울러 그의 몸에 대한 통제권을 누가 가지고 있느냐를 알려주는 행위기도 했다.
자신이 키워놓은 맷집이다.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 사파이어가 흐느껴 울기 시작하자 벤체슬라스는 ‘저번보다 인내심이 더 늘었군.’하고 생각했다.
“이제 그만……. 학, 하악……. 풀어주세요……. 제발…….”
“안 돼.”
“제발……. 아, 응, 앗, 아아!”
“시끄러워. 뉴스 소리가 안 들리잖아.”
벤체슬라스가 꾸짖듯이 사파이어의 성기를 철썩 때리자 잔뜩 발기해서 치솟은 성기가 출렁거리며 아래로 튕겼다가 다시 튀어 올라 뱃가죽을 때렸다.
“아아앗! 아아!”
벤체슬라스는 자꾸만 아래로 굽어지는 사파이어의 턱을 아예 한 손으로 받쳐서 강제로 고정시켜놓고 다른 손으로는 벌을 주듯이 성기를 철썩철썩 때렸다.
눈가리개를 한 사파이어의 얼굴 위로 눈물 줄기가 흘러내렸다. 뜨거운 숨이 뿜어져 나오는 목이 격렬하게 맥박치고 가슴은 고통과 해소되지 못한 쾌락으로 부풀어 올랐다.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가 다리를 오므리지 못하도록 가랑이 사이에 자신의 다리를 집어넣고 옆으로 확 벌렸다. 허벅지가 양 옆으로 벌어지면서 대퇴근이 당겨지며 사파이어의 성기도 한층 더 기세 좋게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사파이어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완전히 벤체슬라스의 품에 밀착한 채 울었다.
세 개의 링이 강하게 조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파이어가 금방이라도 사정할 것처럼 몸에 힘을 주자 벤체슬라스는 다시 한 번 손을 뗐다. 사파이어가 안타까운 신음을 흘렸다. 벤체슬라스는 막 TV에서 흘러나오는 프랑스 테러 소식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급한 대로 집과 재산을 처분하고 도피하듯이 독일로 오긴 했지만 장 바티스트가 뒤처리를 잘 해준 건지, 아니면 돈을 주고 고용한 처리업자들이 일을 잘 해준 건지 벤체슬라스는 테러범 용의선상에 올라오지 않았다. 현상금을 보고 그 추격전에 참전했던 어중이떠중이들이 대거로 잡혀 들어간 소식만 줄곧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런, 품 안의 사파이어를 잊고 있었다. 손을 놀려선 안 되지. 벤체슬라스는 성기 기둥을 잡고 귀두 끝 부분을 느리게 문질러주며 다음 뉴스에 귀를 기울였다. 사파이어는 이제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가슴과 배에 닿는 그의 호흡으로 그가 실신 직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를 안은 채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방 한편에 설치된 거울 앞으로 갔다. 그리고 그 앞에서 눈가리개를 풀어주었다.
울고 애원하느라 눈이 빨개진 사파이어가 갑자기 시야가 돌아온 것을 느끼곤 어리둥절하며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벤체슬라스는 그를 거울 밑 서랍 위에 올려놓고 바지 버클을 풀었다.
사파이어를 발가벗겨 엉망진창으로 가지고 노는 동안 벤체슬라스 자신은 거리에 나가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옷을 차려입고 있었다. 바지 속에서 흉기 같은 성기를 꺼내든 벤체슬라스는 다시 사파이어를 들어 그 가랑이 사이에 자신의 것을 비볐다.
제모가 말끔히 되어있는 만큼 벤체슬라스의 성기는 핏줄의 굵기와 모양까지 무섭게 현실적이었다. 대리석 조각상같이 깨끗하고 고고한 그의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그야말로 괴물의 음경이었다.
사파이어의 성기도 체구에 비하면 그다지 작은 편은 아니었는데 벤체슬라스의 것을 갖다 대니 애처로울 정도로 작아보였다. 사파이어는 겁먹은 눈으로 거울 너머의 그것을 바라보았다. 벤체슬라스가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네 눈에 있는 갈망이 보여.”
벤체슬라스의 속삭임에 사파이어가 반사적으로 자신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공포가 서려 있었지만 반대로 기대감의 미소도 걸려 있었다.
“이걸로 널 뚫어줄 거다. 네 몸무게만큼 뚫어 올릴 거야.”
벤체슬라스는 일부러 단어 하나하나를 강조하고 있었다. 느리게, 강렬하게.
사파이어의 눈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저런 흉기 같은 것을 내 몸에……. 손발이 결박되어 있는 이 상황에서 벤체슬라스가 손을 놓으면 말 그대로 자신의 몸무게만큼의 힘으로 저것이 내 내장 안에 박히게 된다. 발버둥 쳐도 도망칠 수 없고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저 괴물 같은 성기가 내……. 내…….
귓가에 벤체슬라스의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웃고 있군.”
사파이어는 눈을 떼지 못하고 벤체슬라스의 것을 보고 있던 시선을 들어 올려 자신을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그의 말대로, 사파이어의 입가에는 웃음이 걸려 있었다. 머리 어딘가가 이상해지는 것 같다. 미쳐가는 것 같다.
사파이어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어 부정했지만 입에 걸린 웃음은 사그라질 줄 몰랐다. 사파이어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웃었다.
“애원해.”
벤체슬라스가 상냥하게 속삭이자 사파이어의 이성이 툭 끊겼다. 이젠, 이젠 머리가 이상해져버려도.
“죽여……주세요. 뚫어서 죽여주세요. 앗, 아악! 아아아악!”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벤체슬라스가 사파이어를 들어 올리고 있던 손에서 힘을 풀었다. 꼿꼿이 기립하고 있던 커다란 성기가 사파이어의 안을 한 번에 꿰뚫고 들어갔다. 사파이어가 비명을 질렀다. 내장 안을 비집고 들어온 성기는 용서 없이 자신의 몸무게만큼의 힘으로 위로 위로 밀고 올라왔다. 엉덩이가 으깨져버릴 것 같다. 벤체슬라스의 골반은 용서가 없었다.
벤체슬라스는 거울 앞에서 선 채로 박아대며 사파이어의 하반신을 엉망진창으로 박살냈다. 사파이어는 거울에 비치는 자신을 보며 비통하게 울부짖었다. 어느 순간 벤체슬라스가 사파이어의 성기를 틀어막고 있던 링을 풀어주었다. 동시에 강하게 박아 올리자 한계에 몰려 있던 성기 끝에서 진한 정액이 걷잡을 수 없이 튀었다.
이틀간 고문당한 끝에 얻은 사정의 쾌감과 인정사정없이 망가지는 항문의 쾌감에 사파이어가 단말마 같은 비명을 질렀다. 누군가가 소리를 듣고 살인사건이 일어났다고 경찰에 신고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뒤틀린 음욕의 소리였다.
벤체슬라스는 이틀 간 사정을 틀어막은 것을 보상해주기라도 하려는 것인지 사파이어에게 사정 후의 여운을 허락하지 않고 무자비하게 유린하며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냈다. 길게 사정하며 잠깐 호흡이 멎었던 사파이어가 질식 직전에서 돌아온 사람처럼 숨을 몰아쉬면서 이제는 목청 높여 소리 질렀다.
“그만! 그마안! 제발! 그만, 아, 아악! 이, 이젠, 이젠, 아, 아, 싫어, 안 돼! 안 돼에에!”
사정을 바라는 다급함과는 다른 종류의 절박함이었다. 사파이어가 필사적으로 도리질을 치며 벤체슬라스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자기 스스로에게 자극만 더 주는 꼴이었다. 사파이어의 애원은 소름이 오싹 돋을 정도로 가학성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벤체슬라스는 알면서도 일부러 사파이어를 더 몰아붙였다. 사파이어는 오줌을 분출하고 말았다.
인간으로서 가장 밑바닥 수치심까지 강요당한 사파이어가 끅끅거리고 울면서 힘없이 흔들렸다. 아직 이 정도 감정이 남아있을 줄은 몰랐는데.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의 애원에도 아랑곳 않고 그를 쥐어짜면서 더 이상 어떤 액체도 나오지 않을 때까지 범했다.
실 끊어진 인형처럼 벤체슬라스에게 안겨 흔들리고 있는 사파이어에게선 이제 눈물만이 흘러 나와 바닥에 톡 톡 떨어지고 있었다.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가 기절하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손발을 묶은 결박을 푸니 사파이어는 망가진 인형처럼 축 늘어진 채 제 발로 서지 못했다. 벤체슬라스는 폭풍 후에 평온이 찾아오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사파이어를 안아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커다란 자쿠지에는 냉기를 간신히 면한 미지근한 물이 가득 차 있었다. 벤체슬라스는 옷을 벗지 않은 채 욕조 안으로 한 발 한 발 천천히 들어갔다. 몸을 굽혀 사파이어를 물에 집어넣는데도 조심스러웠다.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의 발끝부터 물에 닿게 했다.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물이라 사파이어가 깜짝 놀라 발끝을 떠는 일은 없었다.
벤체슬라스는 자신이 가한 고통의 크기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타인의 고통에 전혀 공감하지 못하던 그가 지금은 사파이어의 고통에 대해 무한한 공감을 보이고 있었다. 사파이어가 자신의 분신, 아니 자기 자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사파이어는 뚝뚝 끊겨가는 의식 사이로 자신의 몸이 물속으로 빨려 들어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를 안은 채 그대로 욕조에 앉아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몇 분 동안 벤체슬라스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사파이어를 자신의 품에 끌어안고 가만히 호흡했다.
기절할 정도로 피곤한 상태인 사파이어는 딱 잠들지는 않은 상태로, 그러나 또렷할 정도로 의식을 갖추진 못한 상태로 그 호흡을 가만히 느꼈다. 요람과도 같은 느린 호흡이었다. 자신의 심장 박동마저 느려질 정도로.
가슴과 밀착한 등에서는 사파이어의 심장 박동이 느껴진다. 그 심장이 완전히 평온한 상태로 접어들자 벤체슬라스는 약간의 파문이 일어도 사파이어가 놀라지는 않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는 물속에서 사파이어의 피부를 조심스럽게 더듬었다. 살짝 굽어져 있는 손끝부터 시작해서 손가락, 손가락 사이, 손바닥과 손등, 손목, 그리고 팔까지 다정하게 어루만졌다. 위로와 위안을 주는 손길이었다.
“흐응…….”
사파이어의 코끝으로 여러 가지가 뒤섞인 신음이 흘러나왔다. 목소리는 완전히 쉬어 있었고, 갈라지는 그 끝에선 쓰라린 고통이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 내는 소리에는 희미한 만족감이 묻어나왔다. 이것은 고통을 겪고 난 후의 안식이기 때문에.
벤체슬라스는 시간을 들여 사파이어의 몸을 어루만졌다. 특별히 성적으로 자극하지는 않는, 자신이 남긴 상처를 탐색하는 손길이었다. 잔뜩 부어올라 있는 항문 근처에 손길이 닿자 사파이어의 닫힌 눈꺼풀 사이로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벤체슬라스는 마치 자신이 아픈 것처럼 “쉬잇, 쉬잇.”하고 달래주며 사파이어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가 자신의 품 안에서 악몽을 꾸지 않도록, 벤체슬라스는 나직이 콧노래를 불러주었다. 욕조안의 물결이 작게 찰싹이는 가운데 고통을 가라앉히는 중저음의 콧노래가 욕실 벽을 울렸고 그 사이로 이따금씩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치료하고 달래기 위해 일부러 상처를 입힌다. 철저하게 박살을 낸 후에 그것을 내 취향대로 조립하고, 고쳐나가면서, 길들인다. 고통을 주는 과정은 준비 작업이다. 인간을 진짜로 망가뜨려서 개조하는 시간은 지금 이 시간, 위로하는 시간이다.
따뜻한 보살핌에 기대게 만들어 절대적인 권력을 차지한다. 너에게 안식을 줄 수 있는 것은 나 밖에 없다는 것을 뼛골 깊숙이, 뇌리에 새겨준다. 그것은 이윽고 영혼을 죄는 사슬이 된다. 굴종시키고, 복종하게 만들어, 노예가 되게 한다.
그리곤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게 잔가지를 쳐내간다.
인간의 정신은 강철보다 강인하지만 유리조각같이 깨지기 쉬워서 그것을 쪼개고 다듬는 데는 장인의 기술이 필요하다. 힘을 너무 주면 가루가 되어버리고, 힘이 너무 약하면 다듬어지지 않는다.
약간의 오차로 귀한 원석이 쓸모없는 돌덩어리로 변하든가, 비할 데 없는 가치를 지닌 보석으로 변한다. 세공사는 즉 인간을 조각하는 기술자들이다. 그리고 벤체슬라스는 그 중에서도 실력이 뛰어났다. 그는 그 사실에 자부심을 가졌고, 자신에게 질투하는 타인의 열등감을 즐겼다.
그것은 자신이 이루어 낸 성취에 대한 일종의 트로피였다.
사파이어는 원래부터 훌륭한 소질을 가진 원석이었다. 지금 같은 모습으로 만들어내기까지 꽤 공을 들였고 지금도 주기적으로 이렇게 추가적인 손질을 한다. 보석은 이따금씩 연마해주지 않으면 빛을 잃는다.
사파이어는 반드시 벤체슬라스에게 의존해야만 한다. 그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몸이 되어야만 한다. 자비로운 손길로 사파이어를 보살피며 콧노래를 자장가처럼 불러주는 벤체슬라스였지만 표정은 섬뜩할 만큼 무기질적이었다.
어떤 감정도 없이, 단순히 필요한 작업이니까 한다는 듯이. 어떤 연민도 없고 약간은 지루해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눈을 감고 온전히 몸을 내맡긴 사파이어가 벤체슬라스의 표정이 어떤지 알 길은 없다. 상처 입은 몸을 보듬어 안아주는 손에, 그 따뜻함에 의지할 뿐. 그는 공포 그 자체이자 피난처이기도 하고, 두려움을 주는 존재이자 안정을 주는 존재이기도 했다.
사파이어에게 있어 신이란 벤체슬라스의 손 그 자체였다. 벌을 내리고 상을 주는 절대적인 권위. 매질하고 학대하는 주인에게라도 개는 결국 돌아가고 만다. 개의 세상에서는 주인이 전부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가 주는 시련이 끝나면, 그의 진노가 지나가고 나면 안식이 찾아온다.
이 때 그는 나에게 생을 주는 사람이고 절대적으로 나를 지켜주는 보호자다. 나의 따귀 맞은 영혼을 연민으로 쓰다듬어주시는 분. 지칠 대로 지친 나는 그의 품 안에서 완전히 무너져 내린다. 그가 없으면 숨도 쉬지 못할 만큼 심장이 함몰된 채로.
그렇게 유사 죽음 속에서 나는 깊은 잠에 빠져들고 어떠한 공포와 고통도 느끼지 않게 되며 평화를 얻는다…….
벤체슬라스는 품 안에서 들려오는 흐느낌이 완전히 멎고 쌔근거리는 규칙적인 숨소리로 변할 때까지 사파이어를 다독였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시간이었다.
벤체슬라스는 급하게 독일로 이주해온지라 아직 거주할만한 곳을 마땅히 찾지 못하고 호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파이어를 따로 떼어놓는다는 것도 어불성설이어서 벤체슬라스는 좋든 싫든 사파이어와 한 객실을 쓰고 있었다.
돈이야 있었지만 벤체슬라스가 만족할만한 방범과 보안을 갖추기까진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호텔 생활은 당분간 계속될 예정이었다.
800만 유로짜리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한 대가로 벤체슬라스는 질릴 만큼 사파이어를 안아주고 있었다. 너무 풀어지지 않게 이따금씩 엄한 채찍질도 가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의 몸이 너무 개발되지 않도록 조심했다.
암살 임무 수행 중에 젖꼭지가 스쳐서 조준이 빗나갔다는 얼간이 같은 이유는 벤체슬라스의 철학으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그런 일이 발생하면 아예 유두를 잘라버리고 말지.
몸을 개발해서 성노예 같은 것으로 쓰려고 한다면 사파이어보다 훨씬 곱게 생기고 나긋나긋한 남자를 골라 성교의 기술만 가르칠 것이다. 그렇게 해서 고급 창부로 굴려 고객에게 팔아넘긴다면 계산기를 두들겨볼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꾸준한 청부업으로 벌어들이는 돈 보다는 수익이 적다.
어중간하게 성감이 개발되었다간 이도저도 아니게 된다. 사파이어는 벤체슬라스가 생각하는 가격에 팔릴만한 얼굴도 아니고 무엇보다 이미 흉기가 되도록 훈련받았다. 그의 몸은 투박하고 상처투성이며 딱딱하다.
사파이어는 결코 못생긴 얼굴은 아니다. 잘생긴 축에 속한다. 임무 수행에 영향을 주는 정도는 아니지만 확실하게 대부분의 여성에게 호감을 받고 몇 몇 남성에게 호감과 질투를 동시에 사는 얼굴이다.
하지만 이 얼굴로 매춘을 시켰을 때 과연 암살 임무보다 돈을 더 벌어올 수 있을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가학적인 성향의 변태를 손님으로 받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지만 그랬다가는 금방 망가져버린다. 사파이어를 키워낸 돈에 비하면 웃음이 나올 정도로 적은 금액이라고 할 수 있다.
살집이 별로 없고 슬림한데다 그마저도 근육으로 들어찬 몸도, 키와 성기 크기도 좋은 점수를 받긴 힘들다. 사파이어의 주 용도는 칼이다. 무언가를 베고 자르고 죽일 때 쓰는 것이지 품에 안으려거든 다른 좋은 대안책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안으려면 안을 수야 있겠지만, 굳이?
이러쿵저러쿵해도 역시 돈 때문에 매춘은 생각하고 있지 않다. 청부업보다는 확실히 못 번다. 그리고 벤체슬라스에게는 돈이 전부였다. 돈이야말로 세상을 이루는 진리고, 힘이고, 영향력이었다. 돈이 없으면 자기 자신도 지키지 못한다. 돈이 바로 정의다.
그럼 돈 말고 뭐가 있단 말인가? 벤체슬라스의 안전과 안락을 보장하는 호화 저택도, 얼마든지 갈아치우는 스포츠카도, 고급 수트와 미슐랭 쉐프의 요리도, 한 모금 한 모금이 예술작품인 와인도 모두 돈이다.
돈. 돈. 돈이 있으면 악마도 고용할 수 있다. 돈이 있으면 줄을 서지 않고도 천국에 들어간다. 돈이 바로 인간이고 인간의 존엄이다.
만약 매춘이 청부업보다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다면 벤체슬라스는 주저 없이 사파이어를 팔아넘겼을 것이다. 그 뿐인가. 자신의 몸도 팔았을지 모른다. 그것에 대해 어떤 죄책감이나 부끄러움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상념이 지나치게 깊은 곳으로까지 흘러가자 벤체슬라스는 고개를 저어 잡생각을 털어냈다. 그는 쌔근쌔근 숨을 쉬며 침대에 잠들어 있는 사파이어를 한 번 보고 몇 시간은 일어나지 않으리라 짐작하며 방을 나섰다. 라운지에 가서 커피를 즐길 생각이었다.
벤체슬라스는 에스프레소를 주로 마신다. 설탕을 붓고, 젓지 않은 채로. 풍부한 크레마 위에 설탕을 부어주면 설탕이 쓰디쓴 카페인 입자들을 잔 밑바닥까지 끌고 내려간다. 절제된 쓴맛과 복합적인 향기를 즐기고 나면 밑바닥에 깔린 설탕이 달콤하게 마무리를 해준다.
취향이라는 것도 돈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니까. 커피 한 잔의 즐거움도 벤체슬라스에게 있어선 자신이 이뤄낸 성과에 대한 찬사였다.
그러나 몇 발자국 가지 않아서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벤체슬라스는 전화를 받았다.
“누구십니까.”
“당신이 세공사입니까?”
전화 너머에서 중년 남자가 절박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의 사파이어 반지가 필요합니다. 단체로요. 12개가 필요합니다.”
벤체슬라스는 그것이 장난전화인 줄 알았다.
“누구신지 모르겠지만 부끄러운 줄 아십시오. 끊겠습니다.”
“기다려요! 제발! 나, 난 소개를 받았단 말입니다! 당신은 정말 실력이 좋다면서요!”
남자는 억누르고 있었지만 목소리에 물기가 어려 있었다. 이토록 절박한 남자가 장난을 칠 것 같지는 않다. 벤체슬라스는 복도 한편에 기대고 서서 핸드폰을 다른 손으로 바꿔들었다.
“자세히 말씀해보시죠.”
“그러니까……. 당신의 사파이어 반지가 정말 최고라고 들었습니다. 우린 그게 필요합니다. 12개요. 꼭 사고 싶습니다.”
“제 반지는 굉장히 비쌉니다만.”
“각오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다. 우린 그게 반드시 필요해요.”
벤체슬라스는 속으로 혀를 찼다. 어떤 놈인지 몰라도 세공사들의 연락처를 뿌리고 다니는 놈이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일거리라면 굳이 마다할 필요가 없으니까. 벤체슬라스는 잠시 생각해보더니 전화 너머의 남자에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예약을 잡아드리죠. 상담을 하신 후에 구매 결정을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네,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벤체슬라스는 예비 고객에게 천천히 시간을 들여 약속 장소와 시간을 알려주었다. 전화 너머의 남자는 사근사근해진 벤체슬라스의 어투에 안도하는 듯 했다.
“제 이름은 한스 노이만입니다.”
벤체슬라스는 다리를 꼰 채 그 위에 깍지 낀 손을 얹고 눈앞의 남자와 그 남자의 뒤로 서 있는 11명의 사람들을 죽 훑어보았다.
남자는 연한 갈색머리에 충혈 된 푸른 눈을 가진 40대 후반의 남자였는데, 떡진 더벅머리와 깎지 않아서 덥수룩하게 자라난 수염 등 꼴이 말이 아니었다. 간신히 샤워는 한 모양이지만 옷은 후줄근했다. 남자의 뒤에 서 있는 11명의 사람들도 남자와 별로 다를 바 없는 차림새였다.
한스 노이만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자기가 직접 벤체슬라스에게 연락을 취하고 약속까지 잡아놨으면서도 무엇부터 말해야할지 갈피를 못 잡고 볼을 긁적이고 있었다. 그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보였지만 일행 중에서는 가장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 같았다.
“어디서부터 말해야하지. 어, 미안합니다…….”
“우선 노이만 씨. 제 전화번호를 어디서 알게 됐는지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하르트만이라는 형사가 있습니다. 파울 하르트만이요. 그 사람이 소개해줬습니다.”
모르는 이름이다.
“계속해보시죠.”
“그러니까, 어, 전화로도 말씀드렸지만……. 우리는 당신의 서비스가 필요합니다.”
남자는 누가 엿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주위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대부분의 의뢰인은 그 단어를 직접 말하는 것을 꺼려한다. 그래서 벤체슬라스가 대신 말해주었다.
“암살입니까, 납치입니까, 첩보입니까?”
“예? 예? 미안합니다. 뭐라구요?”
“암살, 납치, 첩보. 어느 쪽입니까?”
뒤에 선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 “말해요, 노이만. 말해요.”하고 다그쳤다. 남자는 침을 삼키며 눈을 깜박거리더니 대답했다.
“암살입니다. 우리는 한 남자를 죽여야 합니다. 그 놈은 죽어야만 합니다.”
“알겠습니다. 암살은 다른 서비스보다 처리 비용이 큽니다. 시신이 발각되길 원하시는지, 저희 쪽에서 처리하길 원하시는지, 고객께서 직접 처리하실 건지에 따라서도 가격이 달라집니다. 의뢰의 난이도에 따라서도 금액이 달라집니다. 의뢰비용으로 얼마를 준비하셨습니까?”
“80만 유로. 우리 12사람이 합해서 80만 유로를 모아왔습니다.”
벤체슬라스의 얼굴이 희미하게 찌푸려졌다. 의뢰인이 우르르 몰려 들어올 때부터 알아봤어야하는 건데. 12명이 모여서 80만 유로면 암담한 수준이다. 다른 세공사에게는 이 정도도 감지덕지일지 모르지만 벤체슬라스에게는 아니었다. 그에게는 확고한 철학이 있다. 최고의 서비스, 최고의 가격.
벤체슬라스의 표정 변화를 읽은 남자가 다급해졌는지 덧붙였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게 80만입니다. 우리 중에 재산을 완전히 처분하는 사람도 몇 명 있습니다. 시간이 조금 걸릴 뿐입니다. 그러면 90만. 90만까지 드릴 수 있습니다.”
“딱 잘라 말씀드리겠습니다, 노이만 씨. 100만 이하로는 받지 않겠습니다. 계약의 난이도를 떠나서 저희 쪽에서 기본비용으로 나가는 돈이 있기 때문입니다.”
“100만으로 해요.”
뒤에서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눈 밑이 움푹 파여 들어간 어두운 금발의 여자가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피워 물면서 툭 내뱉었다.
“내가 사채 쓸 테니까. 100만으로 해요. 내 아버지 집도 처분할거고. 그러니까 100만으로 한다고 해요.”
“한나…….”
“나한텐 이제 남은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안 그래요? 당신들은 안 그래? 난 저 사람이 필요하다면 장기라도 빼서 팔 거야. 원하는 대로 불러보시죠. 그 대신 나는 반드시 당신이 필요해. 알아요? 성함이 뭐였더라, 벤체슬라스 씨?”
여자는 며칠이나 자지 못했는지 눈 밑이 검고 볼이 홀쭉했다. 여자는 담배 연기를 폐 속 깊숙이 들이마셨다가 손끝을 덜덜 떨면서 심호흡을 하듯이 내뱉었다.
“당신 혼자 짊어질 필요 없어요.”
옆에 있던 여자가 금발머리 여자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나랑 분담해요. 나도 잃을 거 없어요. 나도 있는 대로 다 처분할거에요. 산 사람은 살아야죠, 한나.”
“나도. 나도 잃을 거 없습니다. 두 분이서만 나눠질 필요 없습니다. 나도 마지막 동전 한 개까지 내겠습니다.”
벤체슬라스는 입을 다문 채 돌아가는 상황을 주의 깊게 지켜보았다. 이들은 절박하다. 절박한 사람은 뭐든 한다. 여자가 장기 운운한 것은 농담이 아닐 것이다. 필요하면 은행이라도 털겠지. 살인이라도.
하지만 살인만큼은 하지 못하겠다고 그에게 대신 암살해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사채를 지면서까지 부족한 돈을 끌어 모으며. 벤체슬라스는 꼬고 있던 다리를 풀었다.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볼 수 있을까요.”
옷차림새에서 짐작이 갔지만 그들은 결코 잘 사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 중에는 보조금을 받아 생활하는 사람도 있었다. 배경도 직업도 생활수준도 전부 다른 사람들이지만 그들이 공유하고 있는 몇 가지 사항이 있었다.
베를린에 거주한다는 것. 자녀 중에 최소 1명 이상의 아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아들이 사라졌다는 것. 그들은 먹고 사느라고 자녀에게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정신적으로 몰려있기도 했고. 그래서 자신들의 아들이 마약에 손대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마약 얘기는 나중에 경찰 조사가 진행되고 나서야 알게 됐다.
아이들은 아마 죽은 것 같다. 짐작밖에 할 수 없는 것은,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자기들의 아이가 죽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물증이 없다. 증거가 없기 때문에 경찰도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그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그들은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피해자가 이렇게 많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못했고, 세상에 자기 자신만 홀로 남겨진 것 같은 절망감을 느꼈다.
그들이 말한 형사, 파울 하르트만은 최대한 그들을 도와주려고 했다. 하지만 그도 경찰이고 공무원이다. 움직일 수 있는 데는 한계가 있다. 피해자가 연대 단위로 늘어났음에도 국가가 그들을 위해 공식적으로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파울 하르트만은 그들에게 청부업자의 전화번호를 알려준 것이다. 짐작하기 어렵지는 않다. 세공사 인맥과 처리업자 리스트를 따라가다 보면 경찰이나 기타 공권력과 연결되는 경우도 많다. 벤체슬라스가 어디서 각 나라 정부의 첩보 하청을 받겠는가.
아이들은 거리의 마약상에게서 마약을 접한 것으로 추정된다. 잡아도 잡아도 사라지지 않는 문제가 마약이니까, 있음직하다. 하지만 그 다음이 문제다. 거리의 마약상은 잡아들여도 공급되는 루트까지 잡아들이기는 힘들다. 아이들은 아마 마약상의 유혹을 거쳐서 더 깊은 곳까지 들어갔을 것이다.
아이들에게 닿는 마약의 시초는 한 BDSM클럽이다. 그 곳을 소유하고 있는 남자는 통칭 질 드 레라는 인물로 본명은 알려진 바 없다. 단독 세력은 아니지만 그가 정확히 어느 세력의 소속인지도 불명확하다. 네오나치, 백인 우월주의, 가능성은 얼마든지.
피해자 모임 중 한 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경찰에 분개하며 얼마 전 자기 손으로 범인의 목을 따겠다고 그 클럽에 들어간 적이 있다. 그 이후로 그 사람은 다시는 발견되지 못했다.
경찰이 해결해주지 못할 거라면 살인죄를 짊어지고서라도 자기 손으로 처리하려 했던 다른 부모들은 헤아릴 길 없는 비탄과 공포를 느꼈다. 그들은 너무나 무력한 것이다. 그들이 누구와 싸울 수 있을 것인가. 상대는 조직이다. 총도 가지고 있을지 모르고.
무엇보다도 그놈들은 사람을 죽여 봤을 것이다. 피해자들은 아니고.
그들이 누구에게 탄원할 수 있을 것인가. 누구에게 이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호소할 수 있을 것인가. 죄를 짊어지겠다는 각오는 있지만 그것을 실행할 능력이 없다. 아이를 잃은 부모가 복수 말고 뭘 생각한단 말인가.
세상에 악마가 있다면 기꺼이 이 영혼을 주마. 내 마지막 살점 한 조각과 뼛조각까지 주리라. 이 분노. 이 슬픔. 이 증오.
“우리 모두 지옥에 떨어질 각오를 하고 있습니다.”
벤체슬라스는 한스 노이만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한스는 한 순간도 눈을 피하지 않고 청부업자의 유리알 같은 무기질적인 눈을 마주 들여다보았다. 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이미 많은 눈물을 흘렸지만 그는 아직도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뒤에 선 다른 모든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악마는 그들의 감정에 관심이 없었다. 기꺼이 살인죄를 지고 지옥불에 들어가겠다는 그들의 각오에도 관심이 없었고. 하지만 그들이 생의 기반까지 팔아가며 준비한 금액은 수긍할 만 했다.
표정의 변화가 전혀 없던 벤체슬라스가 계약을 수락하기로 마음을 먹고는 곧바로 그들을 위로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 의뢰를 맡아드리겠습니다.”
벤체슬라스는 주먹을 꽉 쥔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한스의 손을 위로하듯이 덮어주었다. 이제 눈앞에 있는 12명의 사람들은 그의 고객이기 때문에 그들의 상처도 벤체슬라스의 관심사에 들어갔다.
12명의 사람들은 눈앞의 악마가 복수를 해주겠다는 말을 듣고 구원을 받은 것처럼 마음의 짐을 놓았다. 그들은 비로소 꾹꾹 눌러 담았던 오열을 터뜨렸다. 벤체슬라스는 그들이 마음껏 울게 내버려두고, 그들이 현찰로 가져온 80만 유로를 챙겼다.
“나머지 20만 유로는 계약이 완료된 후에 수금하겠습니다.”
그리고 벤체슬라스는 그들을 내버려둔 채 그 자리를 떠났다.
마약상 루카스는 요 며칠 동안 근처를 서성이는 동양인 남자를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었다. 항상 회색 후드를 뒤집어쓰고 그 위에 가죽재킷을 걸친 놈이다. 키는 자신보다 머리 하나가 없었고 체구는 왜소했다.
루카스 본인도 마른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저 놈은 골격 자체부터 작은 느낌이 들었다. 놈은 오늘도 길 건너편에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음울한 눈빛은 묘하게 거슬리는 데가 있었다.
루카스는 바닥에 침을 탁 뱉고 길을 건너 놈에게 다가갔다. 놈은 머리를 박박 민 키 큰 남자가 험악한 얼굴로 자신에게 다가오는데도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숨결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가 되어서야 루카스가 남자를 내려다보며 말을 걸었다.
“형씨, 나한테 볼 일 있어?”
후드를 쓴 동양인 남자가 고개를 들어 루카스를 올려다보았다. 보는 각도가 달라지니 마냥 음울해보이던 얼굴도 인상이 조금 달라져보였다.
성인이 맞기는 한 걸까? 동양인 나이는 가늠하기 힘들지만 이 남자는 어딘가 소년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가만 보니 꽤 귀여운 구석이 있는 얼굴이기도 하고. 루카스가 살짝 열 받은 상태라 그게 눈에 안 들어와서 그렇지.
“나한테 볼 일 있냐고 묻잖아.”
“Sorry, dude. I wanted to buy something from you. But I couldn't talk to you.(미안해. 뭘 좀 사고 싶은데. 말을 걸지 못했어.)”
이민자인줄 알았더니 외국인인 모양이다. 동양인 남자는 미국식 억양에, 목소리도 나쁘지 않았다. 루카스는 항상 미국 영어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베를린 뒷골목에서의 삶은 좋게 봐줘야 시궁창의 삶이다. 루카스 같은 인간이 뉴욕 거리를 활보하며 영화 같은 생활을 할 수 있는 확률은 없지만 그래도 항상 그의 가슴 한 구석엔 헐리웃 영화가 심어준 환상이 잠들어 있었다.
남자가 본의 아니게 루카스의 환상을 건드린 나머지 루카스의 짜증은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루카스가 싱글싱글 웃으며 영어로 물었다.
“뭐야, 외국인이었어? 손님이야?”
동양인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줍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며칠 동안 먼발치에서 음울한 눈으로 루카스를 보고만 있었던 건 어쩌면 수줍어서 말을 걸지 못하고 있던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자 신기하게도 모든 게 용서가 됐다.
루카스는 남자에게 호감을 느꼈다. 이전에 몇 번 동양인과 자 본 적이 있는데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지만 파트너들이 하나같이 너무 마르기만 한 몸매라서 별로 맛있다고 느끼진 않았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후드티와 가죽 자켓으로 가리고 있지만 몸매가 탄탄해 보이는 것이 옷의 윤곽으로도 보인다. 저 껍데기를 벗기면 어떤 몸이 들어있을까. 루카스는 아주 잠시간, 미묘하게 느껴질 정도로 짧은 시간 동안 남자를 위 아래로 관찰했다. 그리곤 다시 마약상이라는 신분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뭘 사고 싶은데?”
“뭘 가지고 있지?”
“형씨가 원하는 거라면 다 있지. 말만 해봐. 없는 거라도 구해다 줄 수 있어.”
“사실은 내가 약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종류를 잘 몰라.”
“그래? 그럼 추천해줄까?”
남자가 또 한 번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카스는 긴장 풀라는 듯이 남자에게 살짝 윙크하면서 주위를 살피고 주머니 속에서 종이로 몇 겹이나 싼 조잡한 물건을 꺼내 남자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리고 누가 지켜보기라도 하듯이 얼른 감추라는 듯 남자의 품 안에 밀어 넣어주었다.
“이봐. 내가 항상 여기 서있는 거 알지? 형씨랑 첫 거래기도 하고 아직 시작한지 얼마 안 됐다니까 내가 주는 선물인 셈 치고 받으라고. 약이 떨어지면 또 와. 좋은 걸로 주지. 돈은 가져오라고.”
남자는 “고마워.”하고 대꾸하고는 루카스가 쥐어준 물건을 자켓 안 쪽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도망치듯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루카스는 남자의 뒷모습을 끈적한 눈길로 오랫동안 훑고 있었다.
남자는 이틀 뒤에 또 나타났다. 돈을 들고서. 그렇게 해서 둘 사이에 제대로 된 거래가 성립이 되었고, 그게 시작이었다. 남자를 네 번째 만나게 되자 루카스도 슬슬 그에 대한 궁금증이 싹트기 시작했다.
“근데 형씨는 미국인이야? 독일에는 왜 왔어? 일 때문에 온 건가?”
“그건 말해줄 수 없어.”
“어디 출신이야? 미국 태생이야? 아니면 이민으로 미국인이 된 거야?”
“당신은 궁금한 게 참 많군.”
“내가 미국에 대한 환상이 있어서 그래. 악감정은 가지지 말라구.”
처음에는 키도 작고 체구도 왜소한데다 거슬리는 눈빛을 가진 짜증나는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보면 볼수록 남자는 이상하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었다.
무언가가 깊게 가라앉은 것 같은 음울한 눈동자는 여전히 변함없었지만 그게 바로 그의 퇴폐적인 매력이었다. 남자의 눈에는 항상 충족되지 못한 갈망 같은 게 밑바닥에 잠들어 있었다. 루카스는 그 욕망의 냄새를 맡았다.
자신을 가만히 훑어보는 루카스의 눈길을 느꼈는지 남자가 그 치명적인 눈빛으로 루카스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당신, 나한테 관심 있지.”
“어?”
“남자한테 관심 있어?”
짧은 대화였지만 루카스는 많은 것을 읽었다. 그 안에는 명백한 허가가 담겨 있었다. 루카스는 더 이상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래. 나 남자 좋아해. 그리고 형씨는 매력적이야. 귀엽다고.”
“나랑 섹스하고 싶어?”
어떤 미사여구도 없이 본론으로 돌진하는 게 마치 송곳 같은 것으로 사람의 가슴을 푹푹 찔러대는 것 같다. 루카스는 도리어 당황했다. 그 동안 이리저리 몸을 굴려대면서 자신이 누군가를 당황시킬 수 있다고만 생각했지 남에게 당한다고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남자가 악수하듯이 루카스의 손을 잡고는 엄지 끝으로 루카스의 손등을 예사롭지 않게 쓰다듬었다.
“난 약을 더 많이 사고 싶어. 더 얻을 수 없을까.”
루카스는 바보가 된 것처럼 침을 삼켰다가 주위를 재빨리 둘러보았다. 그리고 남자를 끌어당기고 귓가에 속삭였다.
“비밀 SM클럽이 있어. 위치를 알려줄 테니까 오늘 밤 7시에 거기로 와. 그런 다음에 약과 섹스 얘기를 해보자고.”
“좋아.”
“이렇게 화끈한 성격일 줄 몰랐는데.”
루카스의 감탄에 남자가 피식 웃었다. 그 치명적인 눈매는 변하지 않은 채 입 꼬리만 기계적으로 살짝 올라가는 웃음이었다. 그게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섹시한 느낌이 들어서 루카스는 발기할 뻔 했다.
안될 말이다. 그는 아직 오늘의 할당량을 다 채우지 못했다. 손님에게 물건을 다 팔기 전까지는 잠깐 재미 보는 것도 안 된다. 이제 숨길 것이 없어진 루카스는 대놓고 남자를 뜯어보며 끈적하게 웃었다.
“보스가 당신을 마음에 들어 할 거야. 귀여운 남자는 언제나 환영하거든.”
“위치나 알려줘.”
남자는 평소처럼 친밀감 없는 얼굴로 돌아왔다. 조금의 틈도 내어주지 않는 저 차가운 도도함은 푸른빛이 감도는 시린 얼음조각을 닮았다. 그 점이 또 못 견디게 사람을 자극했다. 더럽히고 싶은 깨끗함이 있다고 할까.
루카스는 보스가 손대기 전에 먼저 남자를 한 번 맛이나 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그에게 클럽의 주소를 가르쳐주었다.
클럽은 예상외로 도심 한복판에 있었다. 물론 1층에 당당히 간판을 내걸고 BDSM클럽이라고 광고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으슥하게 외진 곳에 있지는 않았다. 눈에 띄지는 않는 곳이었다. 그건 확실했다.
계단을 통해 지하 1층으로 내려가서 SM클럽이라고 작게 명패가 붙어있는 철문이 바로 클럽의 입구였다. 초인종을 눌러야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구조였는데 그걸 누르니 안에서 건장한 남자가 문을 열어주었다.
위압감 주는 정장이 아니고 평범한 옷을 입은 남자였다. 이런 곳은 종종 술 취한 얼간이들이 행패를 부리려는 목적으로 오기도 하니까 그런 놈들을 입구에서 막아내는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입구를 지키는 건장한 남자는 사파이어를 내려다보더니 안으로 들어가라는 듯 고갯짓했다. 클럽 안은 의외로 건전했다. TV가 있고, 테이블이 몇 개 있고, 앉아서 맥주를 마시는 사람이 몇 명 있고, 바에는 술병과 바텐더가 있었다.
이게 다 일리는 없다. 위장이다. 바텐더가 사파이어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안쪽으로 들어가라고 손가락으로 가리켜주었다.
바 옆에 문이 두 개가 있었는데 하나는 화장실 문이었고 하나는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고 써져있는 문이었다. 사파이어는 출입금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하나 통과했을 뿐인데 그 안쪽은 사이키 조명과 레이저 불빛이 정신없이 돌아가는 환락의 굴이었다. 무대 위에는 스트리퍼들이 춤추고 있었고, 가죽 목걸이와 체인을 옷 대신 입은 근육질의 남자들이 사파이어에게 윙크를 하면서 곁을 스쳐지나갔다.
음악은 환각을 일으킬 정도로 최면성이 있는 것이었다. 낮은 베이스와 빠른 비트, 폭력적인 두들김이 고막을 쾅쾅 울리며 유린했다. 뇌까지 파고드는 음악이었다. 소리를 지르지 않으면 바로 옆에 있는 사람과 대화하지도 못할 정도로.
목표 지점에 들어섰다고 판단한 사파이어는 제거 대상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이 클럽의 주인은 어디에 있을까. 사파이어가 채 몇 발자국 가지도 않은 순간, 조명이 비치지 않는 어둠 속에서 억센 팔뚝이 튀어나와 사파이어의 팔을 으스러뜨릴 듯이 붙잡고 끌고 들어갔다.
거대한 근육질 품 안에 갇힌 사파이어의 귓가에 대고, 굵고 탁한 목소리가 울렸다.
“기다리고 있었다, 보석.”
사파이어가 반격을 하기도 전에 강인한 팔뚝이 목을 졸라왔다. 공중에 반쯤 들린 채 버둥거리던 사파이어는 산소 부족으로 정신을 잃고 축 늘어졌다. 근육질의 괴한은 늘어진 사파이어를 어깨에 걸쳐 멘 채 안쪽으로 통하는 비밀 문을 열고 그 안으로 사라졌다.
몽롱하고 둔탁한 정신 사이로 고요한 피아노 선율이 흘러들어와 사파이어를 깨웠다. 깊은 물 속에 침잠해 있다가 억지로 수면 위로 끄집어내지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저 멀리 들리던 피아노 소리도 좀 더 가까이서 선명하게 들려왔다. 드뷔시의 달빛이 낡은 오디오에서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사파이어는 그 음악의 이름을 몰랐다.
사파이어는 X자 형틀에 서서 결박되어 있는 상태였다. 옷은 그대로였지만 묵직한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 것이, 몸 구석구석을 뒤져 무기를 전부 빼앗아간 모양이다. 사파이어는 자신의 몸 자체에는 이상이 없다는 것을 파악하고 눈을 돌려 주위를 탐색했다.
창문이 없는 방이었고 희미하게 푸른빛이 감도는 창백한 조명이 방 안을 밝게 비추고 있었다. 부검실이나 아니면 정육공장의 발골 작업장 같은데서 볼 수 있는 불빛이었다. 밝지만 따뜻하지 않고, 살 속에 감춰진 진실을 무덤덤하고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게 만드는 조명이었다.
방 안은 깨끗했다. 방 안에 있는 어느 선반을 쓸어보아도 먼지는 묻어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방 안의 가구를 보면 과학 실험실이나 아니면 주방을 연상케 했는데, 한쪽 공간을 차지한 유선형의 가죽 소파와 검은색 커피 테이블, 그 위를 장식하는 하얀 도자기 장식과 난초를 보면 여느 저택의 응접실처럼 보이기도 했다. 난초는 조명 때문에 한층 더 지쳐보였는데 이곳에서 나가지 못하면 며칠 안으로 시들어버릴 것처럼 생기가 없었다.
가구는 그야말로 섬뜩한 것들이었다. 바퀴달린 철제 카트 위에 하얀 리넨이 깔려 있었고 그 위에 수술도구 같은 것들이 차분히 정렬되어 있었는데 어쩐지 조리도구라는 인상을 주었다.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날 길이 30cm에 이르는 큰 칼, 톱, 망치 등의 도구에는 피가 한 방울도 묻어있지 않았지만 그것들은 명백하게 피 냄새를 품고 있었다. 새파랗게 날이 서고 관리가 잘 된 모습이 오히려 반반한 겉모습 뒤에 연쇄살인마의 본성을 숨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방에서 제일 신기한 것은 바닥에 배수구가 있다는 것이었다. 밑바닥으로 통하는 새까만 배수구멍을 틀어막고 있는 철제 트랩도 유난히 반짝반짝 빛났다. 매일매일 청소하지 않고서야 저런 색을 낼 수가 없다. 강박증적인 깨끗함이었다. 이 방의 용도가 무엇이기에 저런 게 있는 것일까.
사파이어가 그것들을 둘러보며 여기서 어떻게 빠져나가야하나 궁리하는데 방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정신이 들었군.”
남자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사파이어를 곁눈질로 훑어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는 잔잔하게 클래식이 흘러나오는 오디오를 끄고는 철제 식탁의자를 질질 끌고 와 사파이어의 앞에 놓고 앉았다. 그가 사파이어를 관찰하는 것만큼 사파이어도 그를 관찰했다.
그는 머리를 완전히 밀어버린 백인 남성으로 나이는 30대에서 40대 사이로 보였다. 눈썹의 숱은 짙고 두꺼웠으며 안와가 깊어서 이토록 밝고 객관적인 조명 아래서도 눈 밑에 그늘이 졌다. 그 그늘 속에서 번뜩이는 푸른 눈에는 상대를 피부 아래쪽까지 관찰하는 통찰이 담겨 있었다.
남자의 체모는 짙은 갈색이었고, 깔끔하게 면도를 했음에도 얼굴에는 풍성한 수염을 짐작케 하는 수염자국이 뺨과 턱, 입까지 이어져 있었다. 매일매일 면도를 하지 않으면 3일 안으로 덥수룩해질 수염이었다.
남자는 매우 건장했다. 떡 벌어진 어깨에는 골격부터 커다란 쇄골과 그 쇄골에 붙은 거대한 삼각근이 있었고, 커다란 가슴은 두꺼운 철판처럼 갈비뼈를 감싸고 있었다.
남자는 벌거벗은 몸에다가 도축업자가 입을법한 어두운 비닐 앞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그 밑으로 뻗어 나온 허벅지와 정강이는 거인인가 싶을 정도로 뼈가 굵었다. 그 위를 감싼 근육들 역시 군살 없이 탄탄해서 사람이라기보다는 강철 같다는 인상을 주었다.
발에는 고무장화를 신고 손에는 라텍스 장갑을 끼고 있었는데 그것들 모두 이 방에 있는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어떤 오염물질도 묻어있지 않았다.
남자는 한참이나 사파이어를 들여다보다가 굵고 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쿠르트 하스. 바깥에서는 질 드 레라고 알려져 있지. 그들이 뭐라고 부르든, 내 이름은 쿠르트야. 그게 내 본질이지. 본질, 본질이 전부야. 네 이름은 뭐지, 보석?”
사파이어는 대답하지 않았다. 쿠르트 하스는 침묵조차도 대답으로 받아들였다.
“너의 이름이 사파이어라는 것은 알고 있다. 나는 그런 걸 묻는 게 아니야. 너의 진짜 이름은 뭐지? 너의 본질에 대해 묻고 있는 거야.”
사파이어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쿠르트에게 돌려줄 것은 경계와 적개심이 뒤섞인 눈길이었다.
“좋아. 견고하군.”
쿠르트는 깔끔하게 포기했다.
“그들이 세공사를 고용한 모양이군. 세공사 벤체슬라스. 명성이 자자하더군. 오만하고 허영심 많은 남자야. 재미있는 얘기가 많아. 너는 그 남자의 단 하나뿐인 보석이고. 현재까지는 말이지. 네 주인의 이전 장난감들에 대해 궁금하지 않나? 목소리를 들려주지 그래.”
“관심 없어.”
“드디어 말했군. 근사한 목소리야. 나쁘지 않아.”
쿠르트의 푸른 눈 속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는 사파이어의 목소리에 순수하게 감탄했다. 와인을 감상하는 것 같은 태도였다.
“가늘고 여린 목소리일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괜찮군. 울 땐 어떤 소리로 울지? 남자를 안는 쪽인가, 아니면 남자에게 안기는 쪽인가? 이런, 다시 대답하지 않는군. 상관없지. 시간은 많고 네 목소리는 질리도록 듣게 될 테니까.”
쿠르트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사파이어에게 다가섰다. 그가 손끝으로 얼굴을 더듬자 사파이어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손길을 피해냈다. 묶여있는 상태에서 저항해봐야 우스울 뿐이다. 쿠르트는 명백하게 싫어하는 신호를 전부 무시하고 자신이 질릴 때까지 사파이어의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청결하고 신선하군. 품질이 좋아.”
쿠르트가 얼굴을 확 들이밀자 사파이어가 최대한 고개를 뒤로 뺐다. 쿠르트는 사파이어의 목에 얼굴을 묻고 쇄골과 목선에서 피어오르는 향기를 깊게 들이마시며 귀 아래까지 올라왔다.
“냄새도 안 나고. 향긋해. 이런, 긴장했군. 식은땀에서는 그 특유의 냄새가 나지. 그걸 빼고는 놀라울 정도로 냄새가 없군. 흥미로워.”
라텍스 장갑을 낀 손끝이 귓불을 만지작거리다가 목선을 타고 내려갔다. 그리고 한 겹씩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거칠지 않게. 느긋하게. 지퍼를 내리고 단추를 한 개씩 풀며.
상의를 벗기고 하얀 속살이 드러나자 쿠르트가 고개를 숙이고 그 몸에 코를 밀착한 다음 배꼽 아래에서부터 가슴 위까지 냄새를 빨아들이며 올라왔다. 차가운 공기와 긴장 때문에 사파이어의 유두는 딱딱하게 솟아있었다.
쿠르트는 그 유두에서 어떤 향기라도 풍겨 나온다는 듯이 콧속 깊숙이 숨을 들이마시며 냄새를 음미하더니 고개를 떼고 손끝으로 유두를 더듬었다. 사파이어의 몸이 크게 움찔 떨렸다.
“네 이름을 알고 싶어. 네 진짜 이름.”
한 손으로 지분거리던 것이 곧 양 손 모두로 바뀌었다. 사파이어는 형틀이 덜컹거릴 정도로 몸을 흔들며 저항했지만 바닥에 고정된 형틀은 단단했다. 쿠르트는 그런 저항을 완전히 무시하며 계속 유두를 만지작거렸다.
“사파이어가 너의 본명일리 없어. 너는 좀 더 인간다운 이름을 가지고 있을 거야. 인간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나는 게 아니니까. 인간은 태어나고 자라고 만들어지지. 어머니의 얼굴은 기억나나? 고향은 어디지? 무엇이 널 이렇게 만들었나? 어쩌다가 암살자가 된 거지? 인생의 가장 큰 악몽은 뭐였나? 마지막 질문에 대한 대답은 금방 바뀌게 될 거야. 너에게 가장 큰 악몽을 안겨줄 수 있게 되어서 기쁘군. 그러나 나머지에 대한 대답은 듣고 싶어. 나는 너를 상대하고 있는 거야. 너의 이야기를. 나는 인간으로서의 너를 원해. 보석이나, 다른 사물이 아니라.”
유두는 빙글빙글 돌려졌다가, 만지작거려졌다가, 꼬집히고, 할퀴어지고, 튕기는 등 변칙성이 강한 자극에 유린됐다. 바로 뒷부분의 행동을 예측할 수 없는 강한 자극 때문에 사파이어는 뇌 속이 칼날 같은 것으로 후벼 파이는 듯, 눈앞이 아찔아찔했다.
이 남자는 고문 기술자다. 단순히 고문을 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기술로 승화시킨 사람이다. 그 역시 벤체슬라스와 마찬가지로 인체의 한계를 잘 알고 있다.
몸을 들썩이고 뱃가죽을 파르르 떨어대던 사파이어가 쥐어 짜내듯이 외쳤다.
“그만……. 그만해!”
“네 이름을 말해.”
“몰라. 몰라!”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어떻게 자아를 잃어버릴 수 있지? 너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야.”
벌을 주듯이, 유두 한 쪽이 강하게 꼬집혀졌다. 엄지와 검지로 단단하게 잡고 비틀어대면서 마치 가슴에서 유두를 뜯어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잔인하게 끄집어 당겼다. 사파이어가 고개를 젖히며 비명을 질렀다.
“고통에는 둔감할 줄 알았는데. 의외군. 많이 개발된 몸도 아니야. 원래부터 예민한거군. 알고 있나? 네 몸은 원래부터 예민해.”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신체 상태에 대한 분석을 타인의 입으로 듣는 것은 크나큰 굴욕이었다. 사파이어가 묶인 몸 중에 가장 자유로운 부분인 머리를 움직여서 쿠르트의 목을 물어뜯으려고 들었다. 쿠르트는 재빨리 얼굴을 뒤로 빼면서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이거 걸작이군!”
쿠르트는 유두를 유린하던 것을 멈추고 사파이어의 머리채를 잡아 뒤로 확 젖혔다. 그리고 입을 쩍 벌리더니 그의 목울대를 물어뜯었다.
“끄아아악! 아아악!”
사파이어의 묶인 팔다리가 덜컹덜컹 흔들렸다. 손발이 부들부들 떨리고 경련이 멈추질 않았다.
쿠르트는 맞닿은 입술 사이로 핏줄기가 흘러내릴 때까지 사파이어의 목에서 입을 떼지 않았다. 사파이어는 이대로 남자에게 목을 물려서 뼈가 부러지고 신경이 끊어지며 죽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쿠르트는 그를 죽이지 않았다. 아직은.
쿠르트가 입가에 묻은 피를 쓰윽 닦더니 맛있는 소스를 핥아먹기라도 하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손끝을 빨았다.
“달콤해. 아주 맛있군.”
사파이어의 목에는 정말 살점을 물어뜯기 직전까지 간 이빨자국과 상처가 나 있었다. 쿠르트는 사파이어의 머리채를 놔주지 않은 채 그 피를 싹싹 핥았다. 사파이어가 숨을 몰아쉬자 잔뜩 핥아지고 있는 목이 위태롭게 맥박 쳤다.
쿠르트는 헐떡이고 있는 사파이어를 내버려두고 등을 돌려 신중하게 날붙이를 골랐다. 칼은 크기와 용도에 따라 종류별로 있었지만 아직 이걸 사용할 때가 아니다. 목적에 맞는 도구란 게 있는 법이다.
그는 시간을 들여 준비하고 싶었다. 전희가 있는 섹스처럼 말이다. 지금 단계에서 함부로 칼날을 휘둘렀다가 저 깨끗하고 아름다운 살결에 흠집을 내고 싶지는 않다. 모처럼 얻은 질 좋은 고기인데 난도질을 해놓을 수야 없지.
늘어선 도살용 칼 옆에는 그 칼만큼이나 날이 잘 선 커다란 재봉용 가위가 놓여 있었다. 쿠르트는 가위를 들고 몇 번 시험해보곤 다시 사파이어에게 돌아섰다.
쿠르트는 사파이어의 옷을 한 장 한 장 가위로 잘라 벗겨 내렸다. 서걱서걱하는 소리가 울리며 차가운 가위 날이 살결에 닿을 때마다 사파이어는 온 몸을 긴장시켰다. 상반신을 완전히 벗긴 쿠르트는 이제 바지의 버클을 풀고 가위질을 하기 시작했다.
“너는 애원하지 않는군. 아직은 버틸만한가? 어느 정도까지 피를 흘려봤나?”
사파이어는 쓰라린 목을 쳐든 채로 눈동자만 아래로 굴려 쿠르트를 내려다보았다.
“또 대답하지 않는군. 조용하고 침착해. 단정하고 깨끗한 느낌이 들어. 이름과 정말 잘 어울리는군. 사파이어. 사, 파, 이어. 빙하의 단면을 본 적 있나? 그 새파란 빛깔은 침범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지. 어떤 균도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은 냉혹함이야.”
바지가 완전히 벗겨져 내리고 속옷마저 조각나 바닥에 떨어졌다. 순식간에 발가벗겨진 피부에 지하의 냉기가 닿자 닭살이 돋았다. 사파이어는 철창 너머에 갇힌 짐승이 그러는 것처럼 쿠르트가 하는 짓을 맹수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피를 쏟을 정도로 목줄기를 물어 뜯겼음에도 기회만 생기면 언제든 다시 물어뜯으려고 기회를 엿보는 눈이었다.
쿠르트는 조각품을 쓰다듬듯이 사파이어의 맨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나는 네가 마지막 순간까지 저항하기를 원해. 순응하고 체념하는 건 원하지 않아. 나는 너를 마지막 한 조각까지 정복하고 싶어. 다른 녀석들은 너무……. 빨리 포기했지.”
쿠르트의 손이 사파이어의 성기를 완전히 덮었다.
“한 움큼도 안 되는군.”
성기는 긴장해서 발기하지 않았다. 키가 2미터 가까이 되는 쿠르트에게 있어서는 사파이어의 모든 것이 작았다. 단순히 성기뿐만이 아니라. 그의 손이 거대해서 더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것도 있었다. 쿠르트가 물건을 가늠하는 기준으로 보자면 사파이어는 인간이라기보다 잘 만든 인형이었다.
이렇게 작은 몸에 있을 게 다 있다니. 굳은살이 두껍게 박인 손가락도 쿠르트의 눈으로 보자면 귀여웠고, 여자와는 확실히 구분되지만 그래도 여전히 작은 신체 골격도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요컨대 그는 신기한 장난감이었다. 쿠르트는 그의 열등함에 사랑스러움을 느꼈다.
사파이어는 사실 격렬한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남의 감정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본인의 감정까지 무뎌지는 것은 아니니까.
남들보다 더 무감각할 뿐 그 역시 인간이었고, 살갗 아래 들어있는 본능을 완전히 긁어내진 못했다. 남을 죽인다고 해서 자신의 죽음에까지 무덤덤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죽음에 대해서는 남들보다 배로 민감하다.
사파이어는 죽음과 고통을 구분할 줄 알았다. 무언가를 죽이는 게 직업인 사람은 으레 알고 있을 것들이다. 사파이어는 따로 지령이 내려지지 않으면 불필요한 폭력을 휘두르진 않았다. 그는 사람을 단번에 죽이는 법을 안다. 고통을 최소화시키는 법도 알고.
벤체슬라스도 그런 종류의 무절제함은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돈을 아끼는 것만큼이나 폭력을 낭비하는 것도 싫어했다. 기교를 부린 폭력은 다른 폭력보다 더 주의를 끈다.
길에서 시체가 발견되면 경찰이 수사를 시작하겠지만 온 몸이 토막 난 시체가 예술적인 조각상으로 재조립된 채 발견된다면 수사 인원이 두 세배로 늘어나고 수사 속도도 더 빨라질 것이다.
벤체슬라스가 사파이어를 훈육할 때도 나름의 이유와 원칙이 있었다. 그의 고문에는 뭐랄까……. 금욕적인 데가 있었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흥청망청 피를 흘려대며 환락의 비명을 즐기는 고문자였다. 그는 연회를 개최하는 자이고 폭식을 즐기는 자이며 방탕하게 술을 뿌려대는 자다. 그의 만찬은 잔인함이고, 타인의 고통이다.
비록 그가 깊은 지성으로 빛나는 눈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 안에 잠들어 있는 무절제한 본성은 숨겨지지 않았다. 그는 포식자, 항상 굶주려있는 포식자의 눈을 하고 있었다.
쿠르트의 손이 사파이어의 성기를 완전히 감싸 쥐고 그 중심을 어루만지듯이 주물럭거리기 시작했다. 표피 아래 덮여있는 뿌리를 조금씩 잡아당기듯이 힘을 주어 애무했다. 힘 조절을 잘못하면 생식기 안쪽의 근육이 뚝 부러질 것 같은 위태로운 긴장이 있었다.
그러나 쿠르트의 손길은 아주 부드러웠다. 부드럽고도, 강직했다.
“혼자서는 이런 느낌을 받을 수 없겠지. 어느 정도의 힘으로 수음하나? 부드럽게? 아니면 격렬하게? 여자를 안아본 적 있나? 이 얼굴이라면 크게 어려울 것도 없겠지. 남자들에게서도 환영받을 거야. 주는 쪽이었나, 받는 쪽이었나?”
겁에 질려 반응이 없던 몸도 계속되는 자극을 이길 수 없었는지 아래쪽으로 피가 몰리기 시작했다. 사파이어는 단순히 두려움 말고도 설명하기 힘든 거부감이 발끝에서부터 스멀스멀 기어 올라와 허리를 지끈거리게 만드는 것을 느꼈다.
그는 하반신에 남의 손길을 허락해 본 적이 없다. 벤체슬라스는 그에게 매춘을 시킨 적이 없고 그 역시 남과 자 본 적이 없으니, 어떻게 보면 이게 남과 성적인 교류를 하는 그의 첫 경험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자기 손으로 자위를 하는 것은 성교로 치지 않고 벤체슬라스는 한 개인과의 교류라기보다 하나의 현상이니까.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의 세계관이자 신이었다. 그가 베푸는 은혜와 시련은 워낙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에 수치스럽지도 않았고, 수치스러워서도 안 됐다.
그러나 지금은 거부감이 들었다. 이 손이 그에게 쾌감을 주려고 하는데도 사파이어는 벌레가 기어오르는 것 같은 불쾌감을 느꼈다.
“싫, 어.”
사파이어가 자신의 감정을 명확히 깨닫지 못한 채 의아해하며 입 밖으로 소리를 냈다. 쿠르트는 손을 멈추지 않은 채 고개를 들어 사파이어를 깊은 눈으로 들여다보았다. 그 관대한 푸른 눈동자에는 시간이 걸리는 상대의 고해를 차분히 들어주는 이해심이 담겨 있었다.
사파이어는 속에서부터 형태를 이뤄가는 불쾌감의 존재를 점점 더 또렷이 인식하기 시작했다.
“싫, 어. 싫어. 기분 나빠. 기분 나빠! 기분 나빠! 손 떼!”
사파이어가 무시무시하게 고함을 치기 시작했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소리였다.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강한 힘으로 형틀이 덜컹덜컹 흔들렸다. 생기 없이 무감각하던 사파이어의 눈에 어느 때보다도 강렬한 살기가 담겨 있었다.
쿠르트는 묶인 짐승을 범하는 것 같은 배덕감을 느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남의 손이 처음이로군. 난 너의 첫 남자가 되는 거야. 넌 정말 순수하군. 어린아이처럼 아무것도 몰라. 이 머릿속은 완전히 백지겠지. 자신의 감정도 제대로 알지 못해. 지금부터 무슨 일을 당할 건지도 잘 모르겠지. 그저 싫다는 감각 뿐. 내가 알려주지. 이건,”
쿠르트가 사파이어의 귀를 핥아 올리더니 낮고 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강간이야. 나는 지금부터 널 강간한다. 너의 몸을 강제로 꿰뚫어서 내 정액을 깊숙이 뿌려줄 거야. 그리고 한 방울도 남김없이 널 쥐어 짜내서 마시고, 음미할거다. 너를 먹어 치워버릴 거야. 너의 순수를 더럽히고, 너의 정신을 붕괴시킬 거야. 너의 고귀한 푸른 빛깔을 잃게 만들고 타락하게 만들 거다. 죽을 만큼 저항해. 날 실망시키지 말도록.”
강제로 발기하게 만들고 사정을 유도하는 강압적인 손길에 사파이어의 성기가 완전히 서서 빨갛게 흥분했다. 사파이어는 혼란과 두려움이 뒤섞인 눈으로 자신의 아랫도리를 내려다보았다. 다리를 오므리려고 안간힘을 써도 어정쩡한 자세로 허벅지 안쪽만 파들파들 떨릴 뿐이었다. 사정이 임박했다.
“흐으……. 하……. 싫어……. 싫, 어!”
“똑바로 봐.”
쿠르트의 거대한 손이 사파이어의 뒤통수를 붙잡고 고개를 돌리지 못하도록 아래로 고정했다. 그러면서 성기를 유린하는 손을 더욱 격렬하게 움직여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넌 내 손으로 강간당하는 거다.”
“싫, 으, 아, 아아! 아아아앗! 아아, 싫어! 놔, 놔아……. 놔아아!”
사파이어는 비명을 지르며 사정했다. 이전에 겪어본 것과는 다른 종류의 폭력이 머릿속을 엉망진창으로 헤집고 뭉개 놨다.
쿠르트는 마지막 한 방울의 정액까지 쥐어 짜내고는 기둥뿌리를 단단히 쥔 채 오줌방울을 털듯이 귀두를 털어냈다. 뒷머리를 잡혀 시선이 고정된 사파이어는 고개도 돌리지 못하고 그 장면을 보고 있었다. 계속 뇌리에 각인될 장면이었다.
“너는……. 아주 근사한 향기가 나는군. 아주 끝내주는 향기가 나. 넌 스스로를 아프게 하는 걸 즐기는 모양이야. 사실은 남에게 강제로 침범 당하는 게 즐겁지 않나? 상처 입은 꽃은 오래 살진 못하지만 처참할 정도로 진한 향기가 나지. 너한테서는 꼭 그런 냄새가 나. 아주 맛있는 냄새가……. 싸기만 했을 뿐인데 이 정도 반응인가? 더러워진 느낌이 드나? 아주 좋아. 지금까지는 청결한 거니 이 감각을 잘 기억해두도록 해. 모든 게 끝나고 나면 변기통으로 변해있을 테니까.”
그 순간 예상치 못한 반응이 사파이어에게서 흘러나왔다. 빠드득 빠드득 소리가 울릴 정도로 이를 갈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 정도는 눈빛이 죽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파이어는 이름 그대로 시퍼런 안광을 빛내며 쿠르트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쿠르트 하스는 이 남자의 굴하지 않는 단단함에 반했다. 아마도 사랑에 빠진 것 같았다.
쿠르트는 철제 카트 아래에서 빨간 망사스타킹과 에나멜 재질의 빨간 하이힐을 꺼냈다. 망사스타킹은 그물코가 헐거운 것으로 허벅지까지만 올라오는 것이었다. 허벅지 끝부분은 빨간 레이스로 장식되어 있었다. 하이힐은 굽의 길이가 10cm는 훌쩍 넘는 킬 힐이었다.
이런 걸 신는다면 굉장히 불편한 자세로 어정쩡하게 뒤꿈치를 든 채 온 몸을 고정시켜야 할 것이다. 쿠르트는 사파이어의 매끈한 허벅지와 종아리를 쓰다듬었다. 군데군데 오래된 흉터와 상처가 있었지만 눈에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다.
“제모는 직접 하나? 아니면 누군가에게 관리 받는 건가? 그것도 아니면 선천적으로 털이 없나? 그럴 리가 없는데. 여긴 멀쩡하잖아.”
쿠르트의 손이 사파이어의 음모를 더듬었다. 사파이어는 참을 수 없는 역겨움으로 파르르 떨었다. 쿠르트는 그것을 흥분의 표시로 받아들였다.
쿠르트가 사파이어에게 하이힐과 스타킹을 신기려고 발목의 족쇄를 풀자 기다렸다는 듯이 사파이어가 무릎을 찍어 올렸다. 쭈그려 앉아있던 쿠르트의 얼굴에 무릎이 정면으로 박혔다. 두 손과 나머지 다리 한 쪽이 아직 묶여 있는 상태였지만 충분히 쿠르트에게 한 번 더 공격을 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파이어의 무릎이 두 번째로 올려쳐졌을 땐, 쿠르트가 중간에서 그 무릎을 덥썩 잡았다. 쿠르트는 시큰거리는 코를 감싸 쥐고는 코피가 나지 않나 확인하더니 그대로 벌떡 일어났다.
위험하다 하고 느낀 순간 쿠르트의 거대한 주먹이 사파이어의 배를 강타했다.
복근에 힘을 주지 않은 상태에서 첫 일격이 들어왔기 때문에 눈앞이 아득해지는 충격이 배 안의 장기를 울렸다. 순간적으로 “헉!”하고 숨이 내뱉어지며, 공기를 들이마실 수 없는 상태가 됐다.
쿠르트는 여유를 주지 않고 몇 번이고 배에 주먹을 박았다. 두 번째부터는 반사적으로 배에 힘이 들어갔지만 팔다리로 몸을 가릴 수도 없는 상태에서는 그저 고통을 감내하는 수밖에 없었다.
쿠르트의 주먹은 뼈와 근육으로 된 공성 망치였다. 그 주먹에는 상대를 헤아리는 자비도 없었고, 몸 안의 장기가 파열되든지 말든지 힘 조절도 하지 않는 잔인함이 있었다.
주먹이 한 번씩 배에 박힐 때마다 뚝뚝 끊어지는 비명을 지르던 사파이어가 동공이 벌어지며 몸에 힘이 빠지자 쿠르트는 주먹질을 멈췄다. 그리곤 조금 전까지 자신이 두들겨 패던 뱃가죽을 따뜻한 손길로 쓰다듬었다.
“발기했군.”
쿠르트가 지적하지 않아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파이어에겐 하반신의 상황이 너무나 잘 보였다. 성감 때문이 아니라는 걸 본인이 제일 잘 안다. 몸이 스스로를 지키려는 방어기제던가, 아니면 단순히 생물학적인 반응인지, 아니면…….
“정신적인 문제야. 정신적인 문제. 너는 상처받는 걸 정말 좋아하나보군.”
사파이어는 구속이 풀린 다리를 들어 올리려고 했지만 배 아래쪽으로 도저히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쿠르트는 고분고분해진 사파이어의 나머지 다리 한 쪽을 마저 구속에서 풀어주고 스타킹과 하이힐을 신겼다. 우스꽝스럽고 기괴한 모습이 되었다.
사파이어는 배를 얻어맞은 충격에서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는지 숨을 헐떡이면서 쿠르트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눈빛은 아직 죽지 않았지만 조금 전처럼 무모하게 덤벼들지는 않았다.
“Du bist anständig, mein Fraeulein.(정말 아름답군, 아가씨.)”
낮고 탁한 목소리와 별개로 쿠르트의 독일어는 거칠지 않았다. 내용을 제하고 소리만 듣는다면 이따금씩 책을 암송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목소리가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 중 하나였다. 사파이어의 등골을 타고 소름이 돋아 올랐다.
비할 데 없는 폭력을 휘두르나, 그는 신사였다. 그 역시 고통과 위안을 적절히 안배해서 베풀어 줄 수 있는 유형의 인간이었다. 사파이어는 그에게 놀아나는 것이 끔찍하게 싫었다. 자신의 뼈대를, 머리 안을 강제로 헤집고 침범하는 것 같았다.
자기 자신이라는 존재를 말 그대로 강탈하는 것 같았다.
쿠르트는 사파이어의 양 손도 풀어주었다. 풀자마자 두 손을 등 뒤로 돌려 가죽 수갑을 단단히 채웠다. 가죽 재질은 일반적인 제품과 별로 다를 것이 없었지만 그것을 연결하는 체인은 공사장에서나 쓰일 것처럼 두꺼웠다.
쿠르트는 사파이어를 안아들고 소파로 갔다. 그런 다음 소파에 사파이어를 눕히고, 망사스타킹 신은 다리 아래로 손을 집어넣어 오금을 꽉 붙잡았다. 그대로 힘을 주어 몸을 들어 올리자 단단하게 근육 잡힌 엉덩이가 쩍 벌어지며 검붉기도, 분홍빛이 감돌기도 하는 항문이 서늘한 조명 아래 활짝 드러났다.
쿠르트는 그 모양의 깨끗함에 또 한 번 감탄했다. 그의 주인은 그를 주기적으로 안아주고 있을 것이다. 이런 종류의 남자는, 이렇게 금욕적인 남자에게는 보상해줄 방법이 그리 많지가 않다. 이 남자의 맹목성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다.
예민한 몸을 가지고 있지만 개발이 많이 된 것도 아니고, 여기로 받아들였을 남자는 주인 한 사람이었겠지. 세공사 벤체슬라스는 물건을 깨끗하게 쓰고 잘 관리하는 모양이다. 그의 성격을 짐작해볼 수 있다.
1회성 소모품에 지나지 않는 남자를 이렇게 가꾸어놓다니, 벤체슬라스 본인에 대해서도 호기심이 생겼다. 이 남자를 먹어치우고 나면 다음엔 세공사를 직접 찾아보기로 할까. 예쁜 단검이긴 해도 자신에게 칼을 들이밀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오만하기 짝이 없다는 세공사의 맛은 어떨까.
사파이어는 자신의 발끝을 장식하는 날카로운 굽의 힐도, 자신의 몸을 고깃덩어리처럼 보이게 만드는 빨간 망사스타킹도, 자신의 엉덩이를 들어 올리고 가랑이 사이에 얼굴을 들이밀고 있는 짐승 같은 남자도, 모든 것이 증오스러웠다.
생사를 건 혈투에서 느끼는 희열이나, 공포나, 투지 같은 것과는 다른 종류의 강렬한 감각이었다. 그 눈이 쿠르트에겐 좋은 먹잇감일 뿐이었다. 쿠르트는 사파이어의 시선에서 단 한 순간도 눈을 떼지 않고 항문에 입을 댔다.
갈라진 틈새로 혀가 파고들고, 꽉 닫혀 있는 내벽을 두툼한 혀로 문지르고 두들기고 휘저으면서 몸을 강제로 열어가기 시작했다. 쿠르트는 일부러 큰 소리를 내며 빨았다. 진미를 즐기는 것처럼 구멍을 먹고 있었다.
타인에게, 동의하지 않은 방법으로 자신의 신체를 훼손당한다는 불쾌감 때문에 사파이어는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기시감이 들었다. 아주 예전에 딱 이것만큼 불쾌한 경험을 했던 것 같다.
어떤 거였더라. 어디서였지, 누구에게 당했고, 무슨 상황이었단 말인가. 딱 이만큼 강렬한 감각. 증오, 분노, 무력감, 불쾌감, 오물에 잠식되는 것 같은, 자기 자신이 더러워지는 느낌. 사파이어의 머릿속에 섬광이 터졌다.
그 때, 침입자는 그에게 앞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사파이어는 뒤에서 습격당했고 그대로 침입자에게 깔려 강제로 몸을 침범 당했다.
폭력적인 첫 관계였다. 다리 사이를 타고 흐르는 것이 피였던가, 정액이었던가, 겁에 질린 자신이 실금을 했던 것인가. 조각난 기억들이 난폭하게 떠올랐다가 흩어졌다. 그는 남자와 섹스 해 본 적이 없었다.
그 때 그것이 첫 경험이었고 그 행위 안에는 사랑이라는 요소가 단 하나도 없는, 일방적인 약탈이었다. 그는 자신을 억압하는 힘에 두들겨 맞고 찍어 눌려지면서 자신의 급소를 흉기 같은 물건으로 유린당했다.
목이 다 쉬도록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고 도와달라고 외치며, 상대를 저주했던 것이 기억난다. 그 때 침입자는 사파이어를 옴짝달싹 못하게 억누르고 등을 압박하면서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모르는 남자에게 인생이 망가지는 기분은 어때?
그 때 목덜미에 와 닿았던 침입자의 긴 머리칼은 지금 생각해도 눈이 부시는 하얀 금발의……. 더 이상은. 더 이상은 생각할 수가.
폭발하듯이 터져 나온 기억의 파편들에 묻혀 있던 사파이어가 기절 상태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두 눈을 부릅떴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모르지만 사파이어의 두 다리가 쿠르트의 손아귀를 떨쳐내더니, 날카로운 굽 끝으로 그를 마구 찍기 시작했다.
사파이어는 반 광란상태에 빠져 발작하면서 자신에게 들러붙는 손과 몸을 닥치는 대로 찍고 밀어내며 등으로 기어 도망쳤다. 체격차이가 상당히 나기 때문에 몸으로는 언제든 제압할 수 있다고 방심하고 있던 쿠르트는 큰 부상을 입었다.
굽 길이가 10cm가 넘어가는 하이힐은 유사시에는 단검 못지않은 흉기가 된다. 얼굴을 찍힌 쿠르트는 피를 철철 쏟으며 고함을 질렀다.
사파이어는 이 상태에서 쿠르트를 완전히 죽일 수가 없었다. 일어나서 절뚝거리며 도망치는 것이 최선이었다. 쿠르트는 머리를 찍힌 건지 눈을 찍힌 건지, 스스로도 부상의 정도를 짐작할 수 없어서 바닥을 더듬거리며 기고 있었다.
그는 금방 회복될 것이다. 사파이어는 철제 카트 위에 종류별로 놓여 있던 칼 중에 중간사이즈의 칼을 등 뒤로 쥐고는 방문을 향해 달렸다.
뒤에서 무시무시한 외침이 들려왔다. 쿠르트는 사파이어를 산채로 뜯어먹겠다고 소리를 질러댔다. 산채로 그 살을 뜯어내서 씹어주마, 최대한 오래 살려두고 천천히 죽일 것이다, 퍼덕거리는 심장을 꺼내서 아직 뛰고 있을 때 뜯어먹을 것이다…….
사파이어는 본색을 드러낸 식인종의 외침을 귀로는 들었지만 중요한 정보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는 완전히 냉정을 되찾은 상태였다. 머릿속을 분할할 수 있다면 그의 머리는 지금 도주, 생존, 적 처단 등으로 나뉜 상태다. 거기에는 두려움이 끼어들만한 공간이 없다.
사파이어는 방문을 향해 달려가 온 몸으로 부딪쳤다. 걸쇠가 걸려있는 것 같았지만 원래부터 수술실 문처럼 앞뒤로 열리는 문이었다. 사파이어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왜소하긴 하지만 그도 170cm 후반대의 키에 근육으로 다져진 몸을 가진 성인 남자다.
전력으로 달려와서 몸을 날려 부딪치자 문의 걸쇠가 박살나는 소리가 들리며 문이 활짝 열렸다. 사파이어는 엎어질듯이 기우뚱했다가 금세 다시 균형을 잡고 몸을 일으켜 밖으로 도망쳤다.
바깥은 수술실 같은 조명이 서늘하게 비추고 있는 기나긴 복도였다. 긴데다가 거미줄처럼 어지럽게 얽혀 있기도 했다. 복도에는 이렇다 할 장식이 없었는데 이따금씩 모퉁이에 의자라든가, 그림이라든지, 꽃병같이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장식되어 있었다.
마치 악몽에 나올 것 같은 이 기나긴 미로 속에서 잠깐 휴식이라도 취할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것처럼. 하지만 분노한 식인종에게서 도망치고 있는 사파이어에겐 쉴 여유가 없었다.
달리다가 한쪽 힐이 벗겨졌지만 나머지는 미처 벗지 못했다. 어설프게 벗으려고 들었다가는 그대로 넘어져서 돌이킬 수 없는 시간 손실이 날 것 같았다. 손이 등 뒤로 묶여 있지 않았다면 진작 팽개쳤을 물건이다.
한 쪽 다리가 다른 쪽 다리와 10cm가 넘게 차이난다는 것은 대단한 페널티였다. 사파이어는 뒤뚱거리면서 필사적으로 달렸다. 모퉁이를 돌고 돌아서 보이는 문마다 전부 손잡이를 건드려보았다. 문들은 전부 잠겨 있었다.
뒤에서는 이미 혼란 상태에서 회복한 쿠르트가 괴성을 지르며 쫓아오고 있었다. 그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큰 소리를 내서 사파이어에게 자신이 어디쯤 왔는지 위치를 알려도, 사파이어가 그 소리를 듣고 도망가도 금방 그를 따라잡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는 것 같았다.
오히려 사냥놀이를 즐기는 것 같기도 했다. 사파이어를 어떻게 요리할건지 예고하는 섬뜩한 고함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사파이어는 더 이상 모든 문을 건드려 볼 수 없었다. 등 뒤로 손이 묶인 상태에서, 그것도 칼을 놓치지 않고 문고리를 돌려보려면 시간을 굉장히 잡아먹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언제까지고 도망만 갈 수도 없다. 복도에 이렇다 할 장식물이 없다는 건 숨을 곳도 없다는 소리다. 지금 상태에서는 쿠르트에게 정면으로 덤빌 수도 없다. 어차피 손이 풀려도 그에게 정면으로 대항할 방법은 없어 보인다. 저 정도 체격차이는 사파이어가 조금 더 근육량을 늘린다고 해서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총이 필요하다. 아니면 리치가 긴 날붙이라도.
식은땀 나는 도주 끝에 사파이어는 간신히 열리는 문 하나를 찾아냈다. 모퉁이를 빙글빙글 돌면서 도망친 까닭에 쿠르트의 목소리는 꽤 멀어져 있었다. 사파이어는 앞뒤 생각하지 않고 일단 문을 열고 안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소리 나지 않게 문을 닫은 다음 바깥의 소리를 가만히 듣던 사파이어는 쿠르트의 소리가 조금 전보다 더 멀어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방 안을 제대로 둘러 볼 여유가 생겼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방 안은 지옥이었다.
세상에 대해 정서적으로 두터운 장갑판을 두르고 살아가는 사파이어에게도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사파이어라서 크게 당황하는 수준으로 그쳤지,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일반인이라면 이 압도적인 지옥도에 충격 받아 그대로 주저앉거나 토하거나 패닉상태에 빠져 다시 문을 열고 나갔을지도 모른다.
방 안은 새빨갛고 은은한 조명으로 가득했다. 종류는 여러 가지였지만 색감은 하나같이 다 빨간색 계통이었다. 스트립쇼 클럽에서 볼 법한 강한 조명부터 정육점의 선반을 장식할 은은한 붉은 색까지.
그러나 이 방 안을 뭐라고 표현해야할까. 정육점이라고도 할 수 없고, 도축장이라고도 할 수 없고, 더더군다나 스트립쇼 클럽은 아니었다. 가장 근접하는 묘사라면 가구 전시장인데 사파이어의 빈곤한 상상력으로도 구역질을 참기 힘든 작품들이 널려 있었다.
그것들은 모두 사람으로 만들어진 가구였다.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기 때문에 사파이어는 처음에 그것들이 모두 죽은 사람으로 만들어진 것인 줄 알았다. 그러나 사파이어의 숨소리가 그들 중 몇몇을 깨웠다.
눈을 뜬 그들은 죽음의 문턱에서 현실로 돌아왔다는 절망을 담아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지옥의 밑바닥에서 고문 받는 망자들이 낼 소리였다. 그것이 하나, 둘, 셋, 넷, 그 이상으로 늘어나자 사파이어의 무신경한 머릿속도 완전히 공포에 잠식됐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테이블, 아니 테이블화 된 남자가 멀쩡한 손을 내밀어 사파이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사파이어는 그 손에 닿는 것이 무서웠다. 킬러가, 여태까지 수없이 많은 사람을 죽인 킬러조차도 그 광경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파이어는 이들을 조용히 시켜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금방 발각되고 말 것이었다. 이 소리가 쿠르트에게까지 닿아 사파이어마저 사로잡히면 어떻게 될까. 이 많은 가구들 중 하나가 될까?
사파이어는 필사적으로 남자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했지만 그들 중에는 이미 눈이 없거나 귀가 안 들리는 사람이 많았다. 혀가 잘린 사람도 있었다. 저 식인종이 그들에게 진통제를 줬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들은 생생한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었다.
잠재우는 것이 불가능한 고통의 소리였다.
등이 활짝 벌어져 유리판으로 고정되고 척추와 무릎이 기둥화 된 인간 테이블이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소리로 무어라 속삭였다. 사파이어는 그 테이블 모양의 인간에게 다가가 귀를 기울였다. 그는 간청하고 있었다.
“죽여줘……. 죽여줘……. 죽여줘…….”
그는 눈도 귀도 입안의 혀도 멀쩡했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마주보게 설계되어 있었다. 가만히 내버려둬도 과다출혈로 죽게 되겠지만 죽음까지 다다르는 시간이 너무나 길고 고통스럽다. 그의 눈에는 더 이상 삶에 대한 희망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이 고통을 끝내고 이 속박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손이 묶인 사파이어는 그를 도와줄 수 없었다. 다행히, 무슨 변덕이었는지 모르겠지만 테이블 남자의 한 손은 어떤 구속도 없이 풀려 있었다. 다른 한 손이 가구의 일부가 된 것과 달리 남자의 한 손은 완전히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사파이어는 등을 돌려 손에 쥔 칼을 그에게 넘겨주고 말했다.
“이 구속을 풀어줘. 그럼 편하게 해주지. 도와줘.”
남자는 마지막 기력을 끌어 모아 칼을 쥐고 사파이어의 가죽 수갑을 잘라 풀어주었다. 그가 손에 힘을 줄 때마다 벌어진 피부와 신경에서 피가 흘러나오며 고정된 나사가 들썩였지만 그는 비명을 지르면서도 사파이어를 풀어주었다.
손이 풀린 사파이어가 다시 등을 돌려 남자에게서 칼을 건네받았다. 남자는 약속을 이행하라는 듯이 간절한 눈으로 사파이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사파이어는 그의 머리를 쥐고 목을 드러낸 다음 그의 동맥을 잘라냈다. 이 순간엔 이게 최선의 방법이었다.
남자는 끔찍한 고통을 겪으며 피를 쏟았지만 사파이어가 동맥을 끊기 전에 이미 혈액을 많이 잃은 상태였기 때문에 고통을 길게 겪지 않고 사망했다. 남자가 죽는 것을 보고 다른 가구들이 자비를 갈구하기 시작했다.
사파이어는 일단 아직까지 한쪽 발에 신겨져 있는 힐을 벗어서 구석으로 던져놓고 나머지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나도 죽여줘……. 나도…….”
“제발…….”
“끝내줘……. 빨리…….”
악마의 창의력이라는 게 이런 것일까. 복부를 절개해 피부를 박리해서 전구를 감싼 남자가 있었다. 그를 뭐라고 불러야할까. 인간 전등? 그 옆에는 투명의자에 앉은 것 같은 자세로 온 몸의 관절이 철골 뼈대와 나사로 고정된 남자가 있었다. 인간 의자라고 불러야 할까.
변기로 추정되는 사람도 있었다. 살았는지 죽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세 사람을 엮어서 침대로 만든 것도 있었다. 피부가 붙은 세 사람 중 하나는 확실히 죽었지만 나머지 둘은 아직까지 숨을 헐떡이며 살아있었다.
그들 모두가 간청하고 있었다. 죽여 달라고. 이 고통에서 해방시켜달라고.
살려달라는 애원도 있었다. 애석하게도 절대 살아남을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가구들이 그렇게 간청했다. 골반 뼈가 완전히 드러난 상태에서, 척추까지 변형된 상태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단 말인가? 현대 의학은 이들 중 얼마를 살려낼 수 있을까?
하지만 여긴 병원도 아니고, 사파이어는 의사도 아니다. 병원 시설과 의료진을 데려올 만한 시간적 여유도 없다. 그들은 모두 죽게 될 것이다. 천천히 고통스럽게 자신의 운명을 마주보며 죽던가, 조금이라도 빨리 죽던가. 둘 중 하나다.
사파이어가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인도주의는 그저 신속하고 정확하게 목숨을 끊어주는 것뿐이다.
사파이어는 살고 싶다고 간청하는 사람들은 건드리지 않았다. 그들은 1시간인지 2시간인지 모르겠지만, 얼마 남지 않은 삶을 끝까지 살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건 그들의 선택이다. 그들은 긴 고통을 골랐다.
사파이어는 죽여 달라는 목소리에는 두 번 고민하지 않고 칼을 휘둘렀다. 왜 그랬을까. 사파이어는 이 모든 것을 무시할 수 있었다. 그가 여기에 있는 매 분 매 초가 쿠르트에게서 도망갈 수 있는 시간을 내다버리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이 인간 가구들의 운명을 무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부르는 외침, 세상에 대한 저주, 흐느낌, 빨리 고통을 끝내줘서 고맙다는 인사까지, 사파이어는 그들의 유언을 들으며 귀한 시간을 허비했다.
방 안의 목소리가 절반 넘게 사라진 후에야 사파이어는 살육을 그만뒀다. 이젠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수가 없다. 도망쳐야만 했다. 사파이어가 방을 나서자 뒤늦게 결정을 바꿨는지 자신의 고통도 끝내달라고 간청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사파이어는 그들의 요청에 응할 수 없었다.
부디 그들이 빠른 안식을 얻기를.
다시 길고 복잡한 복도의 미로였다. 아까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지금은 손이 묶여있지 않다는 것, 칼을 쥐고 자신을 보호한다는 것, 그 망할 놈의 하이힐을 벗어버렸다는 것 정도다.
잠깐 신었을 뿐인데 격하게 달렸던 것 때문인지 발가락뼈가 부러질 것처럼 욱신거렸다. 가능하다면 이 거슬리는 스타킹도 벗고 싶었지만 쓸데없는 짓을 하느라 시간을 빼앗기고 싶진 않았다.
쿠르트의 소리가 들려오지 않기 때문에 사파이어는 굳이 뛰지 않았다. 그리고 그제야 주변을 돌아볼 여력이 생겼다. 기묘한 장소였다. 이 큰 공간에 창문이 하나도 없다니. 지하일까, 아니면 지상인데 창문이 없는 것뿐일까?
사파이어가 정신을 잃은 뒤로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여기는 클럽의 한 부분일까 아니면 기절한 사이 다른 곳으로 이동된 것일까?
수십 명의 희생자를 납치 해다가 저런 식으로 박제하고, 개조하고, 해체하려면 그에 걸맞은 설비도 필요하고 보안은 더더욱 중요하다.
이런 짓을 벌이려면 베를린 같은 대도시 한복판보다는 외딴 지역이 더 나은 선택일 것이다. 독일 경찰이 아무리 증거를 찾지 못해서 쿠르트 하스를 검거하지 못했다고 해도 꼬리가 길면 언젠가 잡히기 마련이다.
아니면 쿠르트의 뒤를 봐주는 세력이 따로 있는 걸까? 불가능한 건 아니다. 사파이어가 인터폴에 몇 번이고 지명수배 당할 일들을 저지르고도 멀쩡히 돌아다닐 수 있는 건 돈으로 매수한 정치인들, 공무원들, 그리고 현장 증거부터 시신까지 싹 처리해주는 업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비록 그 모든 것을 벤체슬라스가 처리한다고는 하지만 사파이어도 어느 정도 이 바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안다.
쿠르트도 일종의 하청일 수 있다. 무엇을 위한 하청일까. 스너프 포르노? 가능성 있다. 보복? 글쎄……. 부자들을 위한 유흥? 이것도 생각해봄직 하다.
사파이어가 하달 받은 명령은 쿠르트를 제거한 후 이 곳을 탈출하는 것이지만 벤체슬라스는 추가 정보를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쿠르트에게 돈을 주고 여흥을 즐기던 고객들이 있다면 자신들의 신상을 보호하기 위해 세공사를 제거하려고 할지도 모르니까.
깊게 생각하지는 말자. 사파이어에게 주어진 임무는 매우 단순하다. 쿠르트를 죽일 것. 그리고 탈출할 것.
근접전으로는 어쨌든 쿠르트를 죽일 수 있는 확률이 희박하다. 정면은 절대 불가능하고 뒤에서 덮쳐 급소를 노린다고 해도 성공을 보장할 수 없다.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총인데 사파이어가 가지고 왔던 무기는 모두 빼앗겼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맨 첫 번째 방에 있을까? 아니면 쿠르트가 따로 보관하고 있을까?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그 방에 무기가 있을 거라곤 장담할 수 없을 뿐더러 중간에 쿠르트와 다시 마주칠 수 있다. 위험한 선택이다.
사파이어는 다시 닥치는 대로 문고리를 돌리면서 돌아다녔다. 아까와는 다르게 지금은 시간적인 절박함도 없고 손도 자유로웠다. 총을 발견할 수 있을지 어떨지는 몰라도 적어도 이 칼보다 나은 것은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상대가 곰 같은 남자라고 해도 맨 손으로 사람을 해체해서 가구로 만들 수 있는 건 아니다. 그것에 사용한 도구가 있을 것이다. 꽤 많이. 종류별로.
사파이어는 수술실 같은 문을 발견했다.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간 사파이어는 이 방만 다른 곳보다 더 냉기가 감도는 것을 느꼈다. 망사스타킹 말고는 몸에 걸친 게 없기 때문에 사파이어는 부르르 떨면서 방 안을 둘러보았다.
도축공장 같았다. 벽과 바닥은 모두 타일로 되어 있었는데 오염물질을 발견하기 쉽도록 모두 하얀 색이었다. 바닥에는 배수구가 있었는데 핏물 섞인 물이 약간 고여 있었다.
핏물은 천장에 걸어둔 고깃덩어리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도축되어 해체까지 끝마친 고기였다. 모양은 돼지와 유사했지만 어딘가 위화감이 들었다. 껍데기도 돼지 껍데기와 별로 차이가 없고 해체된 모양만 봐서는 다른 고기와 차이점을 잘 모르겠는데 왜 이상하다고 느끼는 걸까?
가까이 다가가서 고깃덩어리를 살펴본 사파이어는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갈비뼈 모양이 인간의 것이었다. 왜 이걸 알아보지 못했을까. 가축의 고기라고 인식했던 것이 한 번 인간의 몸으로 보이자 갈고리에 걸려 있는 모든 것들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길쭉한 것은 동물의 꼬리가 아니었다. 끝부분에 손가락이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가죽을 벗겨놓으면 얼핏 보기에 뭐가 뭔지 눈에 잘 안 들어온다. 그러나 지금은…….
사파이어는 식인종의 식량 저장고에 제 발로 들어온 셈이다.
이 방에는 장난쳐놓은 것이 없었다. 인간을 순수하게 먹을 것으로 취급한 증거들만 여기저기 널려있을 뿐 살아있는 사람으로 전등을 만든다던가, 테이블을 만든다던가 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비현실적으로 깨끗하기도 했다. 식인종이라도 자기 입에 들어가는 식재료는 청결하길 원할 테니까.
사파이어는 아까보다는 부담감을 덜 느꼈다. 이 방에는 살아있는 사람이 없다. 한 때 사람이었던 무언가가 부위별로 나눠져서 보관되어 있을 뿐. 사파이어에게 죽여 달라고 허우적거리며 손을 내미는 인간 모양의 무언가도 없고 끔찍한 쇳소리로 애원하는 것도 없었다.
희생자들의 머리도 어디다 치워뒀는지 희멀건 한 눈으로 사파이어를 멍하니 바라보는 시선들도 없었다. 있는 거라곤 냉장고 안의 싸늘한 침묵뿐.
이들에게는 오히려 고통이 끝났다. 산 채로 해체된 것인지, 살해당한 뒤 해체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죽고 난 뒤에는 아픔이란 게 없다. 그건 확실하다.
사파이어는 갈고리에 걸린 시신들을 내버려두고 이들을 해체한 도구가 방 안에 있나 뒤지기 시작했다. 뼈까지 분해하려면 톱이나 도끼를 사용했을 것이 틀림없다.
그것 말고도 도축용 칼은 크다. 사파이어가 가지고 다니는 살상 무기와는 목적이 다르다지만 원래 목적이 고깃덩어리를 썰고 뼈 사이로 파고들고 근육과 힘줄을 자르게 만들어진 물건이다. 쿠르트의 살과 근육에도 충분히 먹힐 것이다.
사파이어의 예상은 적중했다. 사파이어는 줄 톱과 전기톱, 도축용 손도끼를 발견했다. 전기톱은 배터리가 다 나갔는지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줄 톱과 손도끼 중 하나를 챙겨야겠는데 도끼로는 쿠르트에게 치명타를 주기 힘들어보였다.
사파이어는 줄 톱을 챙겼다. 톱날은 살짝 스치기만 해도 큰 피해를 준다. 사파이어도 벌거벗은 상태지만, 앞치마 하나만 두르고 있던 쿠르트도 마찬가지다.
무기를 찾자 사파이어는 곧바로 방을 빠져나왔다. 방 안의 냉장고 같은 냉기와 더불어 생기 하나 없는 기묘한 침묵이 그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저들의 고통은 나의 고통이 아니고 저들과 달리 나는 아직 살아있지만 저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나 역시 몇 십 킬로그램의 고깃덩어리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건 사람을 굉장히……. 이상하게 만든다.
방 밖으로 나온 사파이어는 복도 저 편에 있는 쿠르트를 보았다. 쿠르트도 사파이어를 찾지 못한 채 한참을 돌아다니다가 드디어 발견하고는 웃음을 터뜨리며 달려오기 시작했다.
쿠르트는 벌목 도끼와 쇠사슬을 들고 있었다. 다행히 총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사파이어는 맞서 싸울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등을 돌려 도망쳤다.
쿠르트의 눈으로 보자면 예쁘게 포장한 고기가 눈앞에서 살랑거리고 유혹하며 잡힐 듯 말 듯 도망치기를 반복하는 것으로 보였다. 저것은 명백하게 나를 유혹하고 있는 것이다. 잡아먹히고 싶어서. 나에게 살해당하고 싶어서!
이렇게 재밌는 놀이가 또 있을까. 저건 요 근래 손에 넣은 것 중 품질이 가장 좋은 고기다. 맛도 환상적일 것이다. 저런 최고급 육질은 그냥 낭비해선 안 된다.
부위별로 나누고, 보관하고, 저장하고, 어떤 부분은 염장을 하고, 또 어떤 부분은 마리네이드하고……. 굽기도, 튀기기도 하고, 훈제하기도 한 다음 만찬을 즐길 것이다. 정말 끝내주는 식사가 될 것이다.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고. 그 맛을 그리워하겠지.
덕분에 내 얼굴이 좀 망가지긴 했지만 진미를 얻기 위해선 이 정도 희생은 감수해야하는 법이다. 아름다운 꽃에는 가시가 있다고들 하지 않나.
짐승을 도살한다는 것은 그 생명의 무게를 진다는 것이다. 살해당하는 쪽이 목숨을 걸고 발버둥 친다고 해서 그 발악을 나무랄 수는 없다. 아니 오히려, 그 발악이야말로 조미료다. 포상을 더욱 값지게 하는.
사파이어를 뒤쫓아 달리는 쿠르트의 앞치마 안쪽에서 거대한 성기가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도살의 희열, 무언가를 살해하는 희열을 느끼며 그는 흥분하고 있었다.
저 살덩이에 내 물건을 꽂아 넣고 마구잡이로 난도질하면서 입 안 가득 그 살점을 물어뜯을 것이다. 정말이지, 너무나 아름다운 상상이었다.
사파이어는 언제까지고 도망만 칠 수가 없었다. 직선거리에서는 도망치는데 한계가 있다. 단순히 계산 해봐도 쿠르트가 그보다 키가 크고, 다리도 더 길다. 장거리 달리기를 시키면 언젠가는 따라잡히게 된다.
장애물이 없으면 만드는 수밖에 없다. 사파이어는 모퉁이를 돌면서 모퉁이마다 있는 기물들을 쓰러뜨리고 넘어뜨리고 던지기 시작했다. 꽃병이 깨지고 의자가 박살나고 석고 조각이 산산조각 났다. 효과가 있었는지 바짝 쫓던 쿠르트의 속도가 조금 느려졌다.
하지만 사파이어에게도 예상치 못한 장애물이 됐다. 정신없이 도망치는 과정에서 모퉁이를 어느 방향으로 몇 번 돌았는지도 기억하지 못한 채, 사파이어는 자신이 장애물을 만들어 두었던 곳으로 다시 돌아와 버렸다.
적의 발목을 잡던 것이 이제는 자신의 발목을 잡게 됐다. 상황은 더 불리했다. 쿠르트는 장화라도 신고 있지만 사파이어는 맨발이나 다를 바 없었기 때문에.
맨발로 도망치는데 뒤까지 살피면서 발아래의 유리조각까지 피해가기란 어려운 일이다. 어느 순간, 사파이어는 깨진 사기 조각을 밟았다. 격통이 순식간에 무릎 위까지 찌르르 울렸지만 발을 멈출 수 없었다.
뒤에서 쿠르트가 그 모습을 보고 “하하하!”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사파이어는 복도에 핏자국을 찍어대면서 달렸다. 뛸 때마다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셈이었기에 이제는 어딘가에 숨을 수도 없었다.
시간제한이 하나 더 걸린 셈이다. 사파이어는 발의 상처가 얼마나 위중한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간 입어왔던 부상으로 판단하자면 꽤 깊게 베였다는 것 정도. 과다출혈은 이전에도 몇 번 겪어봤지만 그 때는 지혈을 할 수 있었다.
지금은 글쎄, 어쨌든 전라에 빨간 망사스타킹만 신고 식인 연쇄살인마에게서 도망치는 것도 처음 겪는 일이니까.
시간이 갈수록 체력이 떨어질 것이다. 흘러나오는 피 때문에 더 빨리. 사파이어는 느려질 것이고, 사로잡힐 것이다. 그런 뒤에는 강간당하고 고문당하고 해체되겠지. 부위별로 요리 되서 식인종의 뱃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결정해야한다.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무기를 찾아 헤매느라 시간과 체력을 더 쓰던가 아니면 손에 들고 있는 무기로 맞서 싸우던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전력으로 달려오던 쿠르트는 어째선지 지금 저벅저벅 걷고 있었다. 그 대신 큰 소리로 원시인이 동물 사냥을 어떻게 했는지 설명해주고 있었다. 쿠르트와 거리를 꽤 벌린 사파이어에게도 똑똑히 들릴 정도였다.
인간은 다른 육식동물 같은 강한 근육이나 발톱도 없었고 순간적으로 빨리 달릴 수도 없는 대신 지구력을 얻었다고. 인간은 그저 사냥감을 하나 짚은 후 그것을 계속 따라갔다고. 그것이 지쳐 쓰러질 때까지. 더 이상 도망치지 못할 때까지.
인간은 그저 쫓아가기만 하면 되는 게임이었다고. 그런 다음, 지쳐 쓰러진 사냥감을 어깨에 얹고 동굴로 돌아오면 그만이었다고. 바닥에 피 발자국을 찍으며 도망치는 사파이어를 사슴 한 마리로 만들어버리는 비유였다.
그는 서두를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그의 말 그대로 사파이어가 지쳐 떨어질 때까지 그저 쫓아가면 되니까. 사파이어가 친절하게 발자국도 남겨주고 있지 않은가.
사파이어는 자신이 남긴 흔적들을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부상당한 다리를 들고 벽을 짚으며 한쪽 다리로 껑충껑충 뛰기 시작했다. 핏방울이 바닥에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했다. 모퉁이 두 개를 그렇게 돌고 나자 중간에서 흔적이 완전히 끊겼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때 정말 운 좋게도 사파이어는 자물쇠가 잠기지 않은 문을 발견했다. 앞서 발견한 두 방이 정상적인 방이 아니었던 것처럼 이곳도 또 다른 지옥에 지나지 않겠지만 지금은 물불 가릴 때가 아니다.
사파이어는 얼른 안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사파이어를 추적하던 쿠르트가 끊긴 흔적을 발견하고 욕설을 지껄이는 걸 가만히 듣던 사파이어가 무기를 찾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등 뒤에서는 무수히 많은 눈동자가 공허한 시선으로 사파이어를 노려보고 있었다.
한쪽 벽면을 채운 기다란 선반이 위 아래로 몇 줄씩 늘어서 있었는데 그 선반 한 가득 사람의 머리가 진열되어 있었다. 방부처리를 한 머리들이 하얗게 죽은 시선으로 사파이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거의 대부분이 젊은 청년들의 얼굴이었다. 이렇게 많은 젊음이 박제된 채 전시되어 있다니.
이 방은 일종의 신전이었다. 다른 쪽 벽에는 벽면부터 천장까지 이어지는 사진의 행렬이 있었다. 다닥다닥 붙은 사진은 한 장 한 장이 끔찍한 모습이었다. 선반에 놓인 머리들의 생전 모습이 다양한 감정을 품고 사진 안에 담겨 있었다.
공포, 두려움, 억지웃음, 저항, 분노, 절망, 체념. 고문하는 사진부터 강간하는 사진까지. 사진의 구도는 철저히 가해자의 시선이었고 관음 하는 시선이었다.
쿠르트 하스는 자신의 전리품을 숭배할 공간을 만든 것이다. 뼈로 만든 제단과 불 붙여놓은 양초도 있었다. 저 양초는 과연 무슨 지방으로 만든 것일까.
참상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을 때가 아니다. 쓸 만한 무기를 찾아야 한다. 서랍과 선반을 미친 듯이 헤집으며 뒤지던 사파이어는 등 뒤에서 쾅 하고 울리는 굉음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문 밖에 쿠르트 하스가 웃으며 서 있었다. 문이 잠긴 걸 안 쿠르트가 도끼를 휘둘러 나무문에 구멍을 낸 것이다. 쿠르트는 구멍으로 안을 들여다보며 사파이어의 행동을 비웃고 있었다.
잠시간 사파이어를 지긋이 관찰하던 푸른 눈동자가 문가에서 멀어지더니 곧 쾅 쾅 하면서 문이 울리기 시작했다. 도끼로 문을 박살내고 있는 것이다.
틀렸다. 무기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 싸움에 대비해야한다. 사파이어는 줄 톱을 쥐고 문 쪽으로 돌아섰다. 문이 부서지고 쿠르트가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사파이어는 선반에 있던 머리를 하나 잡아 쿠르트에게 던졌다.
쿠르트도 죽은 머리가 날아올 줄은 몰랐기 때문에 미처 반격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머리가 두 개, 세 개 더 날아왔다. 그리고 그 사이로 톱날이 쑥 파고 들어와 쿠르트의 목을 노렸다. 목을 노렸지만 결과는 썩 좋지 않았다.
톱날은 쿠르트의 팔뚝만 긁고 빠져나갔다. 사파이어가 급습하기엔 쿠르트의 키가 너무 컸고 게다가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안타깝게도 목의 혈관을 베지는 못했다. 쿠르트는 도끼를 붕 붕 휘둘렀지만 사파이어는 이미 뒤로 빠져서 제단과 기물들을 쓰러뜨려 장애물을 만들고 있었다.
내가 불리한 상황이라면 상대에게도 불리한 요건을 만들어주면 된다. 쿠르트 같은 거대한 덩치가 이런 방 안에서 날뛰려면 충분한 공간이 필요할 것이다. 물건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어서 발 딛기도 힘들다면 사파이어와 동일한 페널티를 얻는 셈이겠지.
쿠르트는 자신의 신전이 망가지는 것에 크게 분노했다. 쿠르트는 사파이어의 온전한 살코기를 얻겠다는 계획을 수정하고 도끼를 마구잡이로 찍어 내리기 시작했다. 광분한 식인종의 도끼날에서 벗어나기엔 사파이어의 상태가 너무 안 좋았다.
벽에 몰린 사파이어에게 머리 위로 도끼날이 내리 찍혔다. 수 없는 사선을 넘나든 결과 사파이어는 죽음 앞에서 눈을 질끈 감지는 않았지만, 겁에 질려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도끼는 사파이어의 정수리 바로 위에서 벽에 박혀버리고 말았다. 쿠르트가 힘 조절을 잘못한 탓이다.
쿠르트는 빠지지 않는 도끼날을 낑낑거리며 빼내려고 했고 그 사이에 사파이어는 쿠르트의 몸 옆으로 빠져나가 그의 몸을 몇 번 긁어내리는데 성공했다. 등과 허리 각각 한 번씩, 장딴지 두 번, 정강이까지.
톱날에 베인 쿠르트가 괴성을 지르며 사파이어에게 돌아섰다.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지만 조금도 타격을 입은 것 같지 않았다. 쿠르트는 이제 도끼가 필요 없었다.
그는 맨 손으로 사파이어를 제압해 멱살을 잡고 들어올렸다. 그리고 손에 쥔 줄 톱을 빼앗은 다음 사파이어의 배를 사정없이 난타하기 시작했다.
사파이어는 사파이어대로 몸을 뒤로 빼면서 타격을 제대로 받지 않으려고 애썼다. 한편으로는 목을 쥔 손을 떼어내려고 하면서 다리로는 쿠르트를 걷어찼다. 일격 중에 하나가 제대로 먹혔는지 쿠르트가 가랑이를 감싸 쥐면서 사파이어를 놓쳤다.
사파이어가 바닥에 떨어진 도끼를 집어 들려는 순간 쿠르트가 발로 그것을 멀리 걷어찼다. 다시 한 번 몸싸움이 붙었다. 무기 없이 맨 손으로 맞붙는 것은 이미 숱하게 예상했던 대로, 사파이어의 처참한 패배로 끝났다.
쿠르트는 사파이어의 머리채를 잡고 질질 끌어서 안쪽으로 향했다.
안에는 커다란 방이 하나 더 있었는데 정육공장의 일부를 떼어다가 개조해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도마 겸 조리대로 쓰이는 것 같은 커다란 나무 탁자가 있었고 벽에는 길이가 다른 소시지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그 소시지 아래에는 폴라로이드 사진이 한 장씩 붙어 있었는데, 전부 사람 얼굴이 찍혀 있었다. 방 한 구석에는 공장 설비인 것이 확실한 대형 분쇄기가 놓여 있었다. 저기다 무엇을 분쇄하는지는 뻔히 알 수 있었다.
놀이시간은 끝났다. 사파이어는 쿠르트를 지나치게 화나게 만들었다. 쿠르트는 이제 적당히 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는 벌을 주고 싶었다. 길고 끔찍한 벌을.
천장에는 다용도로 쓰이는 쇠사슬들이 크기별로 걸려 있었다. 쿠르트는 그 쇠사슬 중 하나를 풀어내서 사파이어의 손을 등 뒤로 돌려 칭칭 감아 묶었다. 단단한 결박이라고 할 순 없지만 지금같이 정신없는 상태에선 이 정도로도 충분한 구속이 될 것이다.
쿠르트는 사파이어를 끌고 가 나무탁자를 마주보고 서게 했다. 도마 겸용으로 쓰이는 탁자에는 날이 시퍼렇게 선 클리퍼가 박혀 있었다. 구속된 사파이어를 품 안에 가둔 채 클리퍼를 뽑아든 쿠르트가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넌 정말 나를 화나게 했어. 단번에 끝내줄 생각이 들지 않는군. 바로 죽을 기대는 버리는 게 좋을 거야. 이거 보이나?”
쿠르트가 칼끝으로 벽에 걸린 소시지와 사진을 가리켰다. 쿠르트는 소시지를 하나하나 짚어가며 말하기 시작했다.
“레온 슈미트, 23살짜리였지. 금발머리가 귀여웠어. 올리버 괴츠, 27살. 너무 울어댔지. 엘리아스 마이어, 24살짜리 반항아. 그래, 안는 맛이 있었지. 씹는 맛도 좋았고.”
쿠르트는 자신의 희생자를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이 그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도. 그들을 어떻게 요리하고 먹었는지, 맛은 어땠는지도.
“이게 단순히 살코기로 만든 거라고 생각하나? 응?”
쿠르트가 칼등으로 사파이어의 성기를 살살 문질렀다.
“내가 그들을 잘라냈지. 그들을 토막 냈어. 가장 소중한 부분을 말이야. 그리고 갈고, 양념해서, 창자에 넣고 보관했지. 염장한 고기가 얼마나 오래갈 수 있는지 아나? 나는 그들을 세상에 남겨준 거야. 이건 그들의 증거야. 내 전리품이고. 난 남자들을 영원히 소유할거다. 너도 마찬가지야. 너는 특별히 더. 나에게 상처를 남겼으니 나도 너에게 기억할만한 것을 줘야겠지. 금방 죽을 생각 하지 말라고 했다. 넌 꽤 오래 살아남아야겠어. 천천히, 천천히 말이야. 발끝에서부터 널 먹어치울 거야. 오래 살려두고 널 잘라나갈 거야. 그 동안은 가랑이 사이에 있는 이거, 이것부터 상실해야할 거다. 넌 나를 너무 화나게 했어. 천천히, 조금씩, 몇 번이고 잘라주지. 뿌리 끝부분까지. 널 완전히 적출해서 전혀 다른 형태로 만들어주겠어. 그런 다음 다시 달아주지. 여기, 여기에 말이야.”
쿠르트는 완전히 겁에 질려 쪼그라든 성기를 칼등으로 툭툭 쳤다. 쿠르트는 품 안에 갇힌 사파이어가 어떤 식으로 몸을 떠는지, 긴장해서 몸을 굳히는지, 감정이라곤 조금도 없을 것 같은 남자가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을 흘리고 있는지를 느끼면서 그 공포와 긴장을 만끽했다.
이것이다. 인간사냥 후에 쿠르트가 얻는 보상이란 것이.
쿠르트는 사파이어를 다섯 번에 걸쳐 잘라낼 생각이었다. 원래도 그렇게 크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성기지만 겁먹어서 쪼그라드니 정말 작게 느껴졌다. 다섯 번이나 내려칠 수 있을까?
그 사이에 사파이어가 과다출혈이나 쇼크사로 죽는 건 원하지 않기 때문에 시간을 들여 고문할 수 없다는 게 안타까웠다. 성기를 잘라내고 나면 일단 그를 치료할 것이다. 고환을 들어내는 것도 잊어선 안 된다.
그를 살려놓고, 그의 눈앞에서 그의 신체를 식재료로 만드는 과정을 하나하나 지켜보게 해야 한다.
그런 다음 그를 요리해서 하나하나 그에게 떠먹여줄 것이다. 그의 눈앞에서 나도 만찬을 즐기고. 한 달 정도는 살려둘까. 하반신부터 너무 먹어버리면 박아댈 곳이 없다. 손끝의 말초신경도 잊지 않고 먹어줄까.
이 예쁘장한 얼굴을 거울 앞에서 하나씩 떼어 내주면 어떻게 비명 지르고 발악할까. 쿠르트가 한 손으로는 사파이어의 성기를 쥐고 고정한 채 다른 손으로는 클리퍼를 치켜들었다.
쿠르트의 품에 갇힌 사파이어는 진땀을 흘리면서 대응책을 떠올렸다. 뒤로 묶인 손끝으로는 쿠르트의 앞치마와 그 너머에 있는 단단한 복근이 만져진다. 그리고 손을 조금만 더 아래로 내리면…….
치켜든 클리퍼가 서늘한 빛을 번뜩이며 도마 위로 내려찍히는 순간 사파이어가 온 몸의 힘을 빼고 주저앉았다. 동시에 자신이 톱으로 긁어놓은 쿠르트의 상처를 손가락으로 거칠게 헤집었다.
사파이어가 쿠르트보다 체격이 훨씬 작다고 해도 몇 십 킬로그램이나 되는 몸무게가 갑자기 힘을 완전히 빼고 주저앉아버리면 쿠르트같은 덩치도 당황하게 마련이다.
아무런 준비 없이 성기만 붙잡고 있었기 때문에 몇 십 킬로그램의 무게가 이동하면서 겨냥이 비뚤어지자 쿠르트는 사파이어의 성기를 잘라내려던 클리퍼로 자신의 손등을 찍고 말았다. 게다가 톱으로 베인 상처가 마구잡이로 헤집어져서 자기도 모르게 품 안에 있는 사파이어를 떨쳐냈다.
클리퍼의 칼날은 정확히 손등에 찍혔다. 모르긴 몰라도 이제 왼손은 쓸 수 없을 것이다. 쿠르트가 무지막지한 비명을 지르자 그의 몸 틈새로 빠져나왔던 사파이어가 몸을 일으키더니 다시 없을 고함을 외치면서 쿠르트에게 몸통박치기를 먹였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자만이 낼 수 있는 기이한 힘이었다. 쿠르트는 자기보다 덩치가 훨씬 작은 남자에게 속수무책으로 떠밀려서 방 뒤편의 대형 분쇄기까지 끌려갔다. 사파이어가 혼신의 일격을 가하자 쿠르트가 균형을 잃고 분쇄기의 투입구 안으로 넘어졌다.
갑작스런 공격에 정신 못 차리던 쿠르트가 상황 파악을 하고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 순간 사파이어가 이마로 분쇄기의 버튼을 찍으면서 분쇄기가 가동되기 시작했다. 숱하게 많은 살점과 뼈를 갈아낸 분쇄기가 무서운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쿠르트는 비명을 지르며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돌아가는 톱날에 장화와 앞치마 옷자락이 끼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자비 없이 끌려들어가기 시작한 쿠르트는 발끝에서부터 갈려나가기 시작했다.
“으아악! 아아악! 아아아악! 멈춰! 멈춰! 아아악!”
살점이 말려 들어가기 시작하자 쿠르트가 발작적으로 기계를 두들겨대며 소리쳤다. 기계는 그의 외침을 들어주지 않고 무자비한 힘으로 그를 조금씩 집어삼켰다.
차라리 머리부터 갈렸더라면 빨리 끝났을 고통인데 우연인지 그가 여태 자행한 악행에 대한 결과인지 그는 길고 끔찍한 죽음을 맞이했다. 아니, 그럴 운명이었다. 아직 죽지 않았으니까. 얼마 남지 않은 그의 생에는 그가 남에게 입혔던 것과 비슷한 정도의 고통이 남아 있었다.
기계는 자신의 주인을 갈면서 한편으로는 그 결과물인 다진 고기를 뱉어냈다. 쿠르트 정도의 덩치라면 상당히 많은 양의 고기가 나올 것이다. 소시지로 만든다면 어느 정도의 분량이 나올지 짐작할 수 없었다.
벌써 정강이까지 말려들어간 쿠르트는 저주를 멈추고 살려달라고 빌기 시작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많이 들었던 소리인가. 자기 입으로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머리 박치기로 버튼을 누른 사파이어는 이마가 살짝 찢어졌는지 머리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사파이어는 몽롱한 상태로 쿠르트가 형벌을 받는 꼴을 지켜보고 있었다. 저건 죽지도 않고 정말 오래 살아있는군.
저 정도 갈렸으면 맨 정신으로 버티기 힘들 텐데. 피를 너무 많이 잃었거나 너무 고통스러워서 정신을 잃음직도 한데 쿠르트는 피눈물을 흘리면서 꿋꿋이 살아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그를 쉽게 죽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것처럼.
다진 고기를 받아내는 통이 가득 차서 쿠르트가 배출구로부터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그의 근육과 살점과 힘줄들은 거칠게 갈린 하얀 뼈와 뒤섞여 바닥을 흥건하게 적셨다.
쿠르트는 기어이 하반신을 다 갈리고 내장까지 빼앗긴 다음 심장 부근께 까지 몸이 사라지고 나서야 모든 움직임을 멈추었다. 악독할 정도로 오래 살았다.
그의 발버둥과 고함이 멈추고 기계 돌아가는 소리만 남고 나서야 사파이어는 악몽에서 깨어난 듯이 정신을 차렸다. 쿠르트의 시신은 아직도 갈려나가고 있었다. 사파이어는 멈춤 버튼을 누르지 않고 기계가 제 할 일을 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사파이어는 등 뒤로 어설프게 묶인 쇠사슬을 이리저리 흔들어서 구속을 풀어냈다. 그리고 손목을 문지르며 쿠르트의 잔해로 다가갔다.
한줌의 피와 살점들로 변해버린 식인 연쇄살인마를 내려다보면서 사파이어는 정신 나간 듯 웃기 시작했다. 웃지 않고는 참을 수가 없었다. 사파이어는 몇 번이고 살점들을 걷어차면서 지칠 때까지 웃었다. 그는 살아남았다. 살아남았다!
분이 풀릴 때까지 시체에게 화풀이하던 사파이어는 정신을 차리려는 듯이 스스로의 얼굴을 때리고 다리를 절며 그 곳을 빠져나왔다. 이제 그를 가로막는 것은 없었다. 여기서 탈출하는 것만 남았을 뿐.
방을 나서기 전에 사파이어는 쿠르트의 클리퍼를 챙겼다. 이 상태에선 도끼 같은 것은 휘두르기 힘들고, 클리퍼는 날이 잘 섰으니까 누구에게 찍든 간에 아주 효과적일 것이다.
쿠르트의 부하들은 다리 다친 동양인 하나가, 그것도 발가벗은 상태에 빨간 망사스타킹 하나만 신은 변태가 어떻게 저런 힘을 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저 상태로 놈은 벌써 둘을 해치웠다.
처음엔 네모난 클리퍼 하나만 들고 있었는데 한 놈을 해치우고 난 후 총을 빼앗아 들면서부터는 정말 걷잡을 수 없는 재앙이 되었다.
그들은 식인을 하지 않았지만 어렴풋이 자기 보스가 무슨 짓을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그들도 책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클럽 안쪽에 비밀 공간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거기에 들어갈 수 있는 건 극소수일 뿐이지만 안에서 무슨 빌어먹을 일들이 일어나는지도 얼추 알고 있었다.
그들의 죄악이라면 보스의 악행을 말리지 않았다는 것, 이따금씩 예쁘장한 남자들을 납치해 바쳤다는 것, 혹은 순진한 청년들을 마약으로 꾀어서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게 한 것, 가끔씩 안에서 도망쳐 나오는 불쌍한 자식들을 사로잡아서 다시 지옥으로 던진 것 등등이다.
그들은 언젠가 맞이할 개죽음에 대해 이미 오래 전부터 합의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일을 하는 놈들은 곱게 죽을 수 없는 법이다.
쿠르트의 부하 중 몇몇은 이미 동양인 남자의 몰골을 보고 보스의 운명을 직감했다. 그래서 맞서 싸우지 않고 도망쳤다. 그러나 그들이 멀쩡한 클럽 공간까지 나왔을 때, 그 곳은 이미 아비규환의 아수라장이었다.
무대 위에서 춤추고 있던 스트리퍼들은 어디론가 도망갔고 바에 있어야 할 바텐더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쿵쿵 울리던 노랫소리는 완전히 멈춰 있었고 아직까지 요란하게 돌아가는 것은 조명뿐이었다. 바닥에는 시체가 널려 있었다.
그 한가운데에, 검은 정장에 짙은 남색 셔츠를 입은 백금발의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는 얼굴에 튄 피를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총을 장전하고 있었다. 저 남자가 범인이다 하고 인식하는 순간 남자가 그들에게 총격을 가했다.
악귀에게서 도망쳐 나왔더니 바깥에는 악마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안에서 도망쳐 나오는 나머지 인원은 이것을 모르고 있었다. 몇몇은 중간에 숨어 있다가 사파이어의 등 뒤를 급습하려고 들기도 했다. 미로의 출구를 찾았던 사파이어는 어느 정도까지는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것도 다 떨어져가고 있었다.
바깥으로 완전히 나갈 수 있을까. 몸에 새겨진 전투의 경험 때문에 눈앞의 조무래기들은 물렁한 살덩이로만 느껴졌지만, 그 물렁한 살덩이도 수십 개가 있으면 나중엔 이쪽이 지쳐 떨어지게 된다.
다친 다리는 이제 감각이 없었다. 다리를 완전히 못 쓰게 되는 건 아닐까. 여기서 죽어버린다면 다리 불구가 되는 것쯤은 사소한 문제에 지나지 않을 테지만. 사파이어는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임무는 끝났다. 그는 보상을 받고 싶었다. 나에게 평화를. 치유를. 보호를. 마지막 문을 열고 클럽으로 나가는 순간, 사파이어는 시신들 사이에 고고히 홀로 서 있는 백금발의 주인을 보고 지친 얼굴을 풀었다.
나의 안식이시여.
그리고 사파이어는 그대로 쓰러져버렸다.
벤체슬라스는 수익을 방어하러 왔다. 그가 사파이어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사지로 몰아넣는 것과 사파이어를 싸구려 취급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벤체슬라스는 아낌없이 투자해서 사파이어를 키워냈다. 귀한 보석이다. 의뢰를 완수하기 위해 최고의 장비를 투입하는 것이지 그렇다고 사파이어를 무슨 길거리에 널린 잡석마냥 취급하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들인 돈이 얼만데.
단일 임무라고 해도 아직 베를린에서의 기반이 없는데다가 사파이어를 잃으면 귀한 장사도구를 잃는 셈이다. 게다가 고작 100만 유로짜리 의뢰를 위해 사파이어를 소모하고 싶지는 않았다. 사파이어는 그것보다 더 벌어들일 수 있는 녀석이다. 훨씬 더.
만약에 사파이어가 임무를 실패했다고 해도 어쨌든 의뢰비는 이미 받았다. 잔금 20만 유로를 아직 받지 못했지만 그건 차차 받아내면 될 일이고.
돈을 받은 이상 일은 깔끔하게 처리한다. 벤체슬라스가 여태껏 쌓아올린 명성의 기반이 그것이다. 사파이어가 죽어버렸다면 벤체슬라스라도 대신 나서서 일을 처리해야했다.
사파이어를 투입하고 나서 6시간이 지났지만 복귀하지 않았기에 벤체슬라스는 직접 장비를 챙겨들고 몸소 현장으로 나섰다. 클럽 바깥의 위장용 바에 있는 놈들은 총으로 겁을 주니 아무런 저항 없이 도망가 버렸다.
클럽 안으로 밀고 들어가자 처음엔 바텐더가 벤체슬라스에게 맞서려고 했지만 어깨에 총알을 두 개 박아주니 이 녀석도 군말 없이 사라졌다. 총성 때문에 스트리퍼들은 도망갔고. 나머지는 살육의 시간이었다.
회원제로 운영되는 비밀클럽이라 손님들은 정상적인 놈들이 없었다. 사회에서 어느 정도 지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이 참극에 대해 입을 다물 것이다. 이런 변태 클럽과 연관되어 있다는 걸 밝히고 싶지 않을 테니까.
벤체슬라스는 도망가는 사람들을 굳이 쏘지 않았다. 그러나 저항하면서 조금이라도 이빨을 드러내는 놈들은 모두 죽였다.
홀을 정리하고 나자 안쪽 문이 열리면서 웬 놈들이 쏟아져 나왔다. 탄창을 갈고 있던 벤체슬라스는 지원군이 나온 줄 알고 놈들에게 총을 갈겼다. 놈들은 바보같이 그걸 다 맞고 쓰러졌다. 벤체슬라스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 같았다. 마치 뒤에서 누군가에게 쫓겨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탄창을 두 번째로 갈고 있자 앞서 쏟아져 나온 남자들에 대한 의문점이 해결됐다. 안쪽 문을 열고 사파이어가 모습을 드러냈다.
처참한 몰골이었다. 발가벗은 상태고, 무슨 일을 당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빨간 망사스타킹을 신고 있고, 다리 한 쪽은 절고 있는데다가 머리에서 피도 흘리고 있었다. 자잘한 상처도 많았다.
사파이어는 기절할 것 같이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 벤체슬라스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곧바로 쓰러졌다.
그래, 살아있었군.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에게 다가가 들쳐 안으려고 했다.
다음 순간,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를 자신의 다리 뒤로 밀어놓고 앞에서 달려오는 남자들에게 총을 갈겼다. 사파이어의 등 뒤를 덮치려던 남자들은 웬 백금발의 사내가 무시무시한 형상으로 총구를 들이대는 것을 보고 몸을 날려 피했지만 결국 그 진노를 피해가진 못했다.
총을 든 이 미치광이는 인간이 맞나 싶을 정도로 침착하고 행동이 정확했다. 눈앞에서 사람의 살에 총알을 박아 넣으면서도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저항하지 않아도 죽이고, 저항하면 더 잔인하게 죽인다.
벤체슬라스는 시야에 들어오는 마지막 한 놈까지 처단하고 나서야 총구를 거뒀다. 어차피 불을 지를 셈이다. 여기서 빠져나오지 못하면 불타죽겠지. 불길과 연기가 번져나가면 소방차가 달려올 것이다. 기다렸다는 듯이 경찰들도 들이닥치겠지.
벤체슬라스는 정신을 잃은 사파이어를 안아다가 바깥 공간에 눕혀주고 바 안에는 연료통에 담아온 기름을 구석구석 꼼꼼히 뿌리기 시작했다.
시신이 가득한 바에 불을 지르고 나서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를 안아들고 그 아수라장을 빠져나왔다. 바깥에는 이미 아우디를 세워두었다.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를 뒷자리에 눕혔다. 그리곤 시동을 걸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그 자리를 떠났다.
아우디가 사라지고 나서 몇 분 후에 화재신고가 들어갔는지 저 멀리서 소방차의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경찰차도 몇 대나 나타나 건물 주변을 에워쌌다.
질 드 레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연쇄살인마의 엽기적인 사건이 독일을 뒤흔들어 놓았다. 여태껏 물증이 없어서 질 드 레, 본명 쿠르트 하스를 잡아넣지 못하던 독일 경찰은 지하 SM클럽의 화재를 계기로 내부를 조사했다가 수백구의 시신을 발견했다.
비록 불에 타서 많은 증거들이 훼손됐지만 수십 건의 실종신고와 관련된 DNA들이 잔해 속에서 나왔다. 쿠르트의 시신도 불 탄 잔해 속에서 나왔는데 분쇄기에 몸이 말려들어가 거의 대부분이 갈려버린 끔찍한 몰골이었다. 신기하게도 머리만큼은 갈리지 않고 남아있었다.
잔해 속에서 자식들의 DNA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피해자 유족들은 예상외로 차분한 반응을 보였다. 그들에겐 더 이상 남아있는 눈물이 없었다. 누가 그들을 탓하겠는가.
그들은 살인마가 천벌을 받았으며, 신이 그를 벌하지 않았다면 악마라도 그를 지옥으로 끌고 갔을 것이라고 말했다.
방송으로 내보내기엔 끔찍한 내용이 많아서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많았지만 인터넷에는 벌써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뜬구름 잡는 소리가 많았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궁금하게 여기는 것이 하나 있었다.
대체 어떻게 그토록 큰 불이 시작된 걸까? 그 불이 아니었다면 지금도 도시의 지하 어딘가에서 식인 만찬이 벌어지고 있었을 것이다. 불은 사고였을까 아니면 누군가의 의도에 의한 것일까?
추측들이 난무했지만 진실은 산더미 같은 정보에 묻혀 사라졌고 금방 사건의 충격 자체도 사람들의 머리에서 잊히게 되었다.
세상에는 그것 말고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끔찍한 사건들이 항상 일어나고 있기에.
사파이어는 붕대 감은 발을 끌어안은 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병원에는 데려갈 수 없는 몸이라서 벤체슬라스가 직접 의사를 데리고 와 치료하게 했다. 돈이야 있으니까 제대로 된 의사를 데려오는 건 문제도 아니다.
의사는 백발의 노인으로 말이 없고 확실한 성격이었다. 그는 환자가 어쩌다 이런 부상을 입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묻지 않고 최선을 다해 치료해준 다음 받기로 한 금액을 받고 떠났다.
벤체슬라스는 며칠 동안 사파이어를 보살펴주었다.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 먹이고, 씻기고, 옷을 입히고, 상처를 봐주었다. 둘 사이에 여태까지 별다른 대화는 없었다.
그러다 오늘, 벤체슬라스의 손이 닿자 여태 침묵하던 사파이어가 갑자기 머리를 감싸 쥐더니 그의 손길을 피해 침대 구석으로 달아났다.
“싫어요. 싫어요. 싫어요. 싫어, 싫어, 싫어, 싫어…….”
벤체슬라스는 즉시 손을 뗐다. 저건 위태로운 상태다. 더 건드리면 깨진다.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가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을 때까지 미동도 없이 그를 지켜만 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도 손길이 닿지 않자 사파이어가 방금 전까지 자신이 뭘 하고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듯 머리를 감싸 쥐던 손을 내렸다.
“아, 방금, 뭐가…….”
“이리 와.”
벤체슬라스는 다가가지 않고 부르기만 했다. 사파이어는 그 품 안을 바라보았다가 벤체슬라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가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혼란스러워했다.
그래, 시간이 더 필요한 모양이군. 벤체슬라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사파이어가 “그냥 가만히 안아주세요.”하고 작은 목소리로 요청했다.
벤체슬라스는 하얀 이불을 펼쳐들고 사파이어를 이불 째로 가만히 감싸 안았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침대에 같이 누웠다. 벤체슬라스에게 등을 맡긴 사파이어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고 있는 눈치였다.
“제가 뭐 이상한 말이라도…….”
“쉬잇.”
벤체슬라스가 규칙적인 호흡을 전달해주자 사파이어도 그 소리를 들으면서 가만히 안정을 되찾아갔다. 벤체슬라스가 변덕을 부려 가끔 이렇게 따사로운 햇살처럼 자비를 베풀 때면 걷잡을 수 없이 잠이 쏟아졌다. 익숙하지 않았지만, 겪을 때마다 항상 좋았다.
문득, 사파이어는 어떤 것이 떠올랐다. 충격적인 기억들 밑에 깔아두고 있던 앙금 같은 것이었다. 어떤 내용인지도 기억나지 않았고, 그 기억이 떠올랐을 때의 불쾌한 감각만이 희미하게 남아있었지만 그게 굉장히 중요한 기억이라는 막연한 느낌이 있었다. 뭐랄까, 초조했다. 사파이어는 벤체슬라스에게 있는 그대로 털어놨다.
“쿠르트에게 강간당할 뻔 했습니다.”
“그래서?”
“삽입까지는 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기억이 났습니다.”
사파이어를 가만히 끌어안고 있던 손에 일순 힘이 들어갔다. 벤체슬라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기억이지?”
“그게…….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좋은 기억이었나?”
“나쁜 기억이었습니다. 그것만 기억납니다.”
“그래. 나쁜 기억은 잊어야지. 계속 떠올리고 싶나?”
“아니오. 하지만……. 중요한 것 같아서.”
“중요하지 않아.”
벤체슬라스가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러나 확고하게 속삭였다.
“그건 중요하지 않은 기억이야.”
“하지만…….”
“중요하지 않은 기억이야.”
사파이어는 벤체슬라스를 거역하지 않는다. 어떻게 이런 자비를 거역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목소리에 단 하나의 거짓이라도 있단 말인가? 절대자가 내게 거짓말을 할 리 없다. 그의 말은 언제나 진실이다. 사파이어는 유순하게 대답했다.
“네.”
“잊어.”
“네…….”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를 조금 더 깊게 끌어안고 턱 밑에 그의 정수리를 갖다 댔다.
“넌 나한테 의지하면 돼. 나한테 의존해. 너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나야. 다른 건 모두 사소해. 기억할 가치조차 없어.”
사파이어는 자장가 같은 목소리를 들으며 잠에 빠져 들어갔다. 등을 돌리고 있어서 벤체슬라스의 얼굴을 보지 못한 것이 다행이었다. 벤체슬라스는 유리눈알 같이 섬뜩한 무기질적인 눈으로 품 안의 사파이어를 내려다보면서 입으로는 천사같이 다정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 말에 단 하나의 거짓이라도 없는 것처럼.
넌 내가 만든 가짜 낙원에서 아무 생각하지 않고 지내면 돼.
아무것도 고민하지 마.
판단하지 마.
너는 나만 바라보고 나만 따르면 돼.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
아무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