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바닥 없는 게헨나
800만 유로짜리 오픈 컨트랙트가 시작되었다.
보기 드문 현상금을 내건 이 대형 사냥 시즌은 처음에 오스트리아에서 시작했다. 첫 현상금은 500만 유로에서 출발했는데 프리랜서 청부업자 5명과 보석 12개, 세공사 3명을 희생시킨 후에 600만 유로로 올라갔다.
사안이 독일 국경을 넘어가서 연방경찰청, 독일 연방헌법수호청과 엮이기 시작하자 현상금은 700만 유로로 더 올라갔다. 그것이 스위스로 넘어가자 800만 유로로 뛰었다.
그리고 이제 프랑스로 건너왔다.
동시에 청부업자들, 첩보원들, 그리고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속속들이 프랑스에 입국하기 시작했다.
장 바티스트 고디에가 에메랄드를 데리고 왔다.
에메랄드는 190cm가 넘어가는 키에 재규어가 연상되는 근육을 가진 거인 같은 흑인이었다. 목소리는 낮은 밑바닥에서 울리는 것 같은 저음이었고, 어깨 골격에서 알 수 있듯이 뼈 자체도 굉장히 두꺼운 남자였다.
“안녕하신가, 가짜 벨기에인.”
장 바티스트는 신상인 것이 분명한 톰포드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는데 일부러 가격표를 떼지 않고 안경다리에 단단히 묶어 달랑거리게 하고 있었다. 옆에 서 있는 건장한 체격의 에메랄드도 똑같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지만 다행히 가격표는 뗀 상태였다.
벤체슬라스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혐오감을 내비쳤다.
“정말 추하군, 장 바티스트.”
“패션이라고 해주겠어?”
“차브 패션 같은데.”
“감히 그런 말을!”
장 바티스트는 따귀라도 맞은 듯이 정색했다. 벤체슬라스는 사과하지 않았다. 둘 사이에 오가는 것이 악의 가득한 우정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에메랄드는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저 오래 서 있기가 싫은 것 같았다.
“나 다리 아픈데, 장 바티스트.”
“아무데나 대충 앉아.”
“앉지 마. 내 집이야.”
그제야 에메랄드가 벤체슬라스를 쳐다보았다.
“앉아도 되겠습니까?”
벤체슬라스는 괜한 고집을 피웠다간 자기만 속이 좁고 유치한 인간이 된다는 것을 알기에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에메랄드는 장식적이고 섬세한 하얀 식탁 의자를 빼다가 앉았다. 에메랄드의 거대한 덩치를 버텨내려고 의자가 안간힘을 쓰는 모습은 보고 있기에 딱했다.
장 바티스트는 에메랄드를 서운한 듯이 노려보았다.
“너 진짜 너무하네.”
“뭐가.”
“네 세공사는 나잖아. 나한테는 왜 존댓말 안 써.”
“너니까.”
“그럼 왜 이 자식한테는 존댓말 쓰는데?”
“다른 사람이니까?”
벤체슬라스는 에메랄드의 말이 지당하다고 생각했다. 약간의 실랑이 끝에 둘 사이의 다툼이 진정됐다. 에메랄드가 얌전히 잡지를 보고 있는 동안 세공사끼리 대화가 오갔다.
“그래서 무슨 일로 찾아왔나? 굳이 욕먹을 거 알면서.”
“자네한테 좋은 소식을 전해주러 왔지.”
“불길한데.”
벤체슬라스와 장 바티스트는 서로 가장 끔찍한 모습으로 뒈져버리기를 바라는 악우이기도 하지만 동업자에 공조자, 협력자이기도 했다. 물론 라이벌인 것은 변함이 없고. 싫어도 엉겨붙어야하는 불쾌한 관계였다. 서로가 서로에게 끈적거리며 들러붙는다고 생각하면서 정신승리하고 있기는 하지만.
“800만 달러짜리 거물이 들어왔다는 건 알고 있겠지.”
“유로겠지.”
“그래그래. 어쨌거나.”
“그게 왜?”
“파리 보석세공인 조합도 그 일거리에 뛰어들 모양이던데.”
“그건 또 뭐야. 언제 생겼나?”
“지금?”
잡지를 보고 있던 에메랄드가 피식 웃었다. 벤체슬라스는 그 웃음이 심히 거슬렸다.
“자네 보석이 웃는데?”
“냅둬. 원래 저래.”
“그 보석세공인 조합인지 사기꾼 집단인지 하는 건 뭐하는 놈들이야?”
“나를 필두로 하는 우수한 장인조합이라고 할까.”
벤체슬라스는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그 말을 몇 초간 음미해보았다. 그리고 깔끔하게 대답했다.
“내 집에서 꺼져.”
“말 좀 들어봐.”
“안 사. 꺼져.”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이 외국인아.”
“다단계 하나 만들어놓고 거기 가입하라는 거 아냐. 안 사.”
“나눠먹자고. 자네도 할 거 아냐. 외국 놈들도 엄청 들어왔다고. 경쟁이 치열할거야. 800만이라고, 800만. 이런 일이 있던가? 카르텔 짜서 수익 나누자는 게 썩 나쁜 얘기는 아니잖아. 안 그래?”
“구성원이 누구누구인데?”
“나랑 자네.”
“그리고?”
“나랑 자네.”
벤체슬라스는 부드럽게 웃었다.
“꺼져, 이 개자식아.”
“이야기 아직 끝난 거 아냐. 난 에메랄드를 가지고 있고 자넨 그 뭐냐, 닌자를 가지고 있지.”
“사파이어야. 그의 이름은 사파이어라고. 똑바로 말해.”
“그래그래, 동양인 남첩.”
“이 새끼가.”
“에메랄드, 너 이 일 한지 몇 년 됐지?”
남성 향수 코너를 열심히 읽고 있던 에메랄드가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
“한……. 8년?”
“그래, 8년. 8년 동안 이 업계에서 살아남는 놈이 흔한 줄 알아? 에메랄드는 진짜 보석이야. 대단한 놈이라고.”
“그렇게 칭찬해줄 것까지야.”
“자부심을 가져. 넌 진짜 대단한 놈이야. 대물이라고.”
에메랄드는 장 바티스트의 중의적인 칭찬에 어깨를 으쓱했다. 남자의 자부심을 당당하게 드러내면서.
“이 녀석만 있어도 일당백은 할 거다. 자네도 그 중국인,”
“사파이어. 그리고 중국인 아냐.”
“그래, 사파이어. 대단한 놈 아냐. 실적이 엄청나잖아?”
“당연하지. 누가 갈고 닦았는데.”
“우리 둘이면 솔직히 다른 잡놈들 안 끼워줘도 해볼 만하지 않나? 머릿수 많아져봤자 나눠 먹는 파이가 작아질 뿐이야. 800만 받아다가 제비용 떼고 자네랑 나랑 나눈다고 해도 최소 200만은 가져갈걸.”
“난 얼마나 줄 거야, 장 바티스트?”
“아 넌 좀 가만히 있어. 보던 거나 마저 봐. 돈 얘기는 나중에 해줄 테니까.”
에메랄드는 궁시렁거렸지만 그 이상의 말대꾸는 하지 않았다. 장 바티스트가 에메랄드를 떼어놓고 다니는 것도 이해가 된다. 둘의 만담을 보고 있으면 저게 정상적인 주종관계인지 혼란스러워진다.
장 바티스트는 자신과 에메랄드의 관계를 원청과 하청이라고 부르지만, 이 바닥에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 원청과 하청이라고 부를 관계가 있다면 그것은 보석을 구매하는 사람과 보석을 제공하는 상인뿐이다. 보석의 서비스는 거래 대상이다.
“800만이라는 금액이 그냥 걸린 건 아닐 텐데 말이야.”
“사상자만 50명이 넘어갔다는군.”
“일반인 껴서?”
“아니. 업자들이.”
일반인이 끼게 되면 일단 사건의 유형이 달라져버린다. 공권력이 대놓고 움직일 것이고 국제 사회가 공조할 것이다. 800만 짜리 일이라고 해도 그런 일에 섣불리 손 댈 바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일은 조용하니까 번창하는 것이다. 하지만 업자가 50명씩이나 죽어나가고 다친다면 그건 그것대로 위험하다.
“일의 내용이 뭐길래?”
“젠장, 가끔은 그 무거운 엉덩이 좀 떼서 스스로 알아봐. 내가 정보 물어다주는 하인인가?”
“스스로 자처하고 있잖아.”
“나는 거래 제안을 하러 온 거지, 정보만 낼름 내 줄 생각 없어.”
“이야기를 들어봐야 일을 맡을지 말지를 결정하지.”
지당하신 말씀이다. 벤체슬라스가 말한 게 아니라면 당연하다며 수긍했을 텐데 말하는 주체가 워낙 평소부터 싸가지가 없기 때문에 순순히 인정해주기가 싫었다. 장 바티스트는 눈썹을 찌푸리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호위 임무야.”
“호위?”
“호위라고 할 수도 있고, 물건 이동이라고 할 수도 있지. 물건이 살아서 배송돼야 한다는 점만 빼면 별다를 것도 없어.”
“그래서? 단순히 물건 배달인데 사람이 50명이나 죽어나갔다?”
“그거야 물건 배송을 막으려 드는 놈들이 있으니까. 일의 골자는 이거야. 특정인을 어떤 지점까지 배달한다. 그 과정에 반대 세력의 방해가 있다. 뭐 그런 거지.”
“그래? 얼핏 들리는 소문으론 독일 정보기관도 여기에 껴 있다는데?”
“그러든가 말든가. 여긴 프랑스잖아.”
“자네의 솔직한 감상을 물어보고 싶은데, 장 바티스트.”
벤체슬라스가 다리를 꼬고 몸을 의자 깊숙이 묻더니 편한 자세로 장 바티스트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장 바티스트가 그 시선을 부담스러워할 때쯤 벤체슬라스가 물었다.
“그 800만이라는 돈이 정말로 위험을 감수할만한 가치가 있나?”
“내 생각을 묻는 건가?”
“자네 생각을 묻는 거지.”
“나는 감수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봐.”
장 바티스트는 대출 심사를 결정하는 은행원 같은 벤체슬라스의 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어쨌든 지금 당장 도움이 필요해서 거래를 요청하는 쪽은 장 바티스트였다. 을의 위치인 것이다. 벤체슬라스가 꼬고 있던 다리를 풀었다.
“수익은 7대 3으로 하지. 내가 7.”
“미친놈아.”
“6대 4.”
“정확히 반반이야. 이런 미친놈을 봤나.”
“난 얼마나 줄 거야, 장 바티스트?”
“아 넌 좀 닥치라고.”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날도둑놈 같은 제안이 들어왔다. 눈 뜨고 코 베어갈 놈이다. 에메랄드가 집요하게 돈에 대해 물었지만 장 바티스트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 대신 세공사끼리 거래 성립의 악수가 오갔다.
‘그래서 말이야, 장 바티스트.’
‘응.’
‘그 사파이어란 놈은 어때?’
검은 천으로 눈이 가려진 남자가 두 손을 뒤로 묶인 채 다소곳이 무릎을 꿇고 앉아있다. 창 밖에는 비. 남자의 눈앞에 바지 지퍼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샅내 나는 두꺼운 살덩어리가 내밀어진다. 뜨거운 살 냄새와 배타적인 수컷 냄새가 후각을 파고든다.
비는 폭우로 번질 예정이 없는지 고요히 창문을 두드리고 있다. 불 꺼진 어두운 방에는 고간을 내민 채 창 밖 풍경을 감상하는 백금발의 남자와 그 앞에 결박되어 무릎 꿇고 앉은 남자, 둘 뿐이다.
‘남의 물건이라서 말이야. 나도 잘 본 적은 없어.’
‘그 벤체슬라스라는 세공사랑 같이 다닐 거 아냐?’
‘네가 특이 케이스인거야, 에메랄드. 누구도 나처럼 널 대우해주지 않는다고.’
‘다른 사람들은 보석한테 돈 안 줘?’
‘돈을 왜 줘. 안 주는 게 정상이지.’
‘그럼 뭘 주는데?’
‘글쎄……. 뭔가 결핍된 걸 채워주지 않을까?’
무릎 꿇은 남자는 서구의 평균보다는 체격이 작다. 성인 남자의 윤곽이 뚜렷하게 보이는 얼굴 골격이 아니라면 소년이라고 착각이 들지도 모른다. 근육은 잘 잡혔고 흉기같이 단련됐지만 햇빛을 잘 받지는 못한 피부라 유독 하얗다. 백인 같이 하얀 것은 아니다. 지하실에서 키운 식물 같은 창백함이라고 할까.
‘결핍된 게 뭔데?’
‘뭐든 있지 않을까? 먹을 거라든가. 술이라든가. 여자나 남자라든가.’
‘그걸 사서 줄 바엔 그냥 돈으로 주는 게 낫잖아.’
‘돈을 줘버리면 안되지. 그러니까 대신 그런 걸 제공하는 거야.’
‘참 이해가 안 간다.’
‘나처럼 보석 생각해주는 사람이 또 어디 있겠냐. 나 같은 사람 없어. 돈으로는 절대 안 주는 거야. 그게 상식이야.’
결박된 남자는 눈이 가려졌지만 냄새와 체온으로 자신의 코앞에 내밀어진 살덩어리를 인지한다. 역하고 거부감이 드는 그것을 남자는 소중하게 냄새 맡는다. 남자는 마른 입술을 한 번 훑고는 눈앞에 내밀어진 살덩어리를 조심스레 핥아 올리기 시작한다.
‘그치만 돈을 안 주면 뭘로 처자식을 먹여 살려?’
‘그러니까 그런 게 없다고. 네가 특이한 케이스라고. 내가 얼마나 네 사정을 봐주는지 알겠냐?’
‘가족이 없다고?’
‘이 일 하는 놈들이 가정이 있는 게 더 비정상 아니냐?’
‘그럼 뭘 위해 살아가는 건데?’
‘위에 말한 거 전부가 해당되지 않을까?’
‘끔찍하다, 정말. 무슨 목적으로 인생을 살아? 목표가 있기는 해?’
‘너, 나도 독신이라는 거 잊은 거 같다?’
발기한 살덩어리의 표면에는 불뚝 튀어나온 혈관이 우둘투둘 솟아나있다. 남자의 혀끝은 그것의 모양을 덧그리듯이 쓰다듬고 핥으며 차츰차츰 자신의 입 안에 그 전체를 물어가기 시작한다. 이빨이 닿지 않게. 조심스럽게. 얼굴이 추해지도록 입술을 오므리며 자신의 입을 하나의 자위도구로 변형시킨다.
‘그럼 사파이어한텐 뭘로 보상해주는 거야?’
‘몸이겠지, 아마도?’
‘그걸로 납득이 돼? 나 같으면 냅다 고용주 죽이겠다.’
‘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냐.’
‘넌 나한테 돈 주잖아. 넌 예외지.’
백금발의 남자는 무심하게 창밖의 인간군상을 내다본다. 파리에서 살아보니 생각한 것 보다 비가 많이 내린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마르세유로 갈 걸 그랬나. 백금발의 남자는 자신의 하반신에 대해 완전히 잊고 있다. 그 사이, 무릎 꿇은 남자는 물기 어린 소리를 내며 고개를 앞뒤로 흔들기 시작한다.
‘그래서 네가 자꾸 남첩 남첩하고 놀리는구나.’
‘놀리다니, 사실인데.’
‘그럼 그냥 액세서리 같은 놈이야? 전투력은 아예 없고?’
‘아니. 그거 괴물이야.’
남자는 입 안에 가득 들어찬 것을 혓바닥으로 감싸며 목구멍까지 끌어당긴다. 살덩어리의 끝부분을 자신의 목젖으로 비비고 누르면서 숨 막히는 봉사를 계속한다. 그러다가 숨이 막혔는지 물건을 입에서 빼고는 거친 숨을 몰아쉰다.
그것도 잠시, 남자는 다시 기둥을 입술로 물고 애무하며 살살 빨아올린다. 끝 부분까지 올라왔던 애무의 흔적이 다시 뿌리까지 내려가더니 이번에는 두 개의 고환에 키스한다. 숭배하는 것 같고, 의식적인 키스였다.
‘내가 벤체슬라스 놈 마음에 안 들면서도 적으로 안 돌리는 이유가 뭔데. 그거 괴물이야. 그러니까 너도 함부로 자극하지 마.’
‘왜? 어떤데?’
‘내가 그 동양인보고 자꾸 닌자라고 하잖아?’
‘응.’
‘반쯤은 진담이야. 진짜 닌자일지도 몰라. 어디서 납치해 와서 세뇌시킨 걸지도 몰라.’
‘황당하네.’
남자가 고환을 빨기 시작하자 백금발의 남자가 그의 머리칼에 손을 올린다. 그리곤 머리칼 속으로 부드럽게 손가락을 밀어 넣어 두피를 쓰다듬는다. 남자의 목덜미부터 척추 끝이 부르르 떨린다. 칭찬받는 쾌감. 주인의 손길. 무릎 꿇은 남자의 하반신에서 바짓단이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다.
‘칼 쓰는 걸 본적이 있는데 귀신같이 잘 쓰더라. 날붙이는 가리지 않고 다 잘 쓰는 거 같고. 나이프 파이팅도. 사격도 나쁘지 않아. 저격도 수준급이고. 모신나강으로 곰 잡았다는 소리도 들었다. 모신나강. 미친 거 아니냐?’
‘그 나무로 만들어진 거?’
‘그래. 나무로 만들어진 거. 진짜 2차 대전 때 쓰던 거. 뭔 유물을 들고 싸워?’
‘곰을 잡았다고?’
‘그런 얘기가 있어. 내 눈으로 보지는 못했지만. 곰도 잡고 개머리판으로 두 놈 머리를 아주 박살을 내놨다더라. 그런 거 보면 제정신은 아니지.’
‘너랑 나도 제정신 아니잖아.’
‘그렇다고 우리는 눈앞에서 사람 머리 으깨지는 거 보고 눈 하나 깜짝 안하진 않잖아. 놀라기라도 하지.’
‘난 안 그럴 수 있는데.’
백금발의 남자는 좀처럼 사정하지 않는다. 무릎 꿇은 남자의 입이 빨갛게 부어오르기 시작했음에도 백금발 남자의 흉기는 단단히 솟아오른 채 하늘을 찌르고 있을 뿐, 절정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백금발의 남자는 격려하듯이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한층 더 애정을 담는다. 무릎 꿇은 남자는 빨간 입술을 한번 앙 다물고 혀로 입 주변을 정리하더니 입을 크게 벌려 다시 한 번 살덩어리를 목젖 깊숙이 문다.
목구멍을 벌리고, 스스로의 식도로 살덩어리를 밀어 넣는다. 본인 선택에 의한 질식. 머리가 하얗게 멀어버리는 것 같다. 현실감각이 사라지는 이 시간. 숨을 쉬지 못해 질식해 죽을 가능성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스스로를 위험에 내던지는 것을 그만두지 못한다.
‘들으면 들을수록 불공정 거래인데. 가족도 없어, 돈도 안 줘, 섹스만이 보상이야, 근데 그것도 잘 안줘. 그런 주제에 시키는 건 항상 목숨을 건 정도의 임무고. 누가 이런 걸 응해?’
‘머리에 이상이 생긴 변태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자기가 죽는 걸 원하는 변태가 있다고?’
‘왜 없겠어.’
어느 순간, 무릎 꿇은 남자가 쿠욱 하는 소리를 내며 어깨를 크게 떤다. 목구멍 안 깊숙이 밀어 넣은 것이 잘못 걸린 모양이다. 아까부터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던 남자의 목이 벌떡 벌떡 기도를 열었다 닫았다하며 산소를 갈망한다.
기특하게도 남자는 스스로 물건을 입에서 빼진 않는다. 백금발의 남자는 두 손으로 남자의 머리통을 쥐고는 질식해가는 그 목구멍 안으로 천천히 피스톤 질을 하기 시작한다. 남자의 목 안에서 위액 같은 것이 와락 밀려올라온다.
무릎 꿇은 남자는 거의 쓰러질 지경이 되지만 이대로 죽는 것이 낫다는 판단을 한 것인지, 자신의 생존본능도 무시하고 그 다정한 손길에 자신의 머리를 바친다. 절대적인 굴종. 절대적인 복종.
백금발의 남자는 한 인간의 생명을 자신의 손으로 쥐었다 폈다 하며 그 가학성에 깊은 만족을 느낀다. 다음 순간, 그는 사정한다.
무릎 꿇은 남자는 위액과 함께 역류한 정액을 다시 삼키거나 뱉지 않고 그대로 입에 머금고 있다. 가슴을 들썩이며 입술을 오물거린다. 그의 학대자가 내어준 것을 입 안 가득히, 구석구석, 잇몸 사이사이에 배어들도록 하고 있다.
그의 소유가 완전해지도록. 이빨 사이사이에 그 비릿하고 역한 액체가 끼도록. 백금발의 남자는 소유물의 뺨을 상처 하나라도 낼까 조심스럽고 소중한 손길로 쓰다듬는다. 그 따뜻한 애정의 온기가 뇌를 녹여버릴 것 같다.
“사랑해.”
백금발의 남자가 설레는 거짓말을 속삭인다. 그리곤 무릎 꿇은 남자의 머리칼을 개에게 하듯이 쓰다듬어주며 약속한다.
“언젠가 내 손으로 죽여주마. 사파이어.”
무릎 꿇은 남자는 그 말을 듣고 벼락이라도 맞은 듯이 그대로 사정해버린다. 그의 바짓단이 축축하게 젖는다.
창밖의 비는 방 안의 소리를 제외한 나머지를 이 세상에서 음소거 하듯이 지워버렸다. 거리에서 올라오는 소리도, 차의 경적음도, 생동감을 주는 그 모든 소리를 지워버린 채 우중충한 잿빛 세상에 단 둘만을 남겨놓았다.
이대로 이 세상이 파멸해버린다 해도 이 공간만이 뚝 떼어져 온 우주에 단 둘만 있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을 것이다. 지극히 사적이고 은밀한 시간이었다.
무릎 꿇은 남자는 입 안에 머금고 있던 것을 이제야 삼켰다. 그의 몸 안, 장기 하나까지 주인의 흔적이 새겨들도록. 백금발의 남자가 손의 결박을 풀어주자 무릎 꿇은 남자는 그제야 쓰라린 손목을 문지르며 눈을 가리고 있던 천을 벗어냈다. 쾌감에 달떠 이지러진 눈빛에 제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사파이어는 이제 일 할 준비가 되었다.
에메랄드는 언제나 파리는 낭만과 쓰레기가 굴러다니는 도시라고 생각했다.
개선문이라던가 에펠탑이라든지 하는 곳을 들고 와서는 그게 파리의 얼굴이라고 정체성을 땅땅 굳혀버리려는 시도가 있는데 에메랄드가 보기엔 말도 안 되는 억지일뿐더러 파리의 다른 개성까지 몰살시키려는 그 뭐냐, 파시즘의 일환으로 보였다.
사실 에메랄드는 파시즘이 뭔지 모른다. 장 바티스트 고디에가 파시즘이니 파시스트니 하는 말을 써서 주워들었을 뿐이지.
그의 고향인 세네갈에 비하면 여기는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에메랄드는 파리의 쓰레기까지 사랑했다. 세네갈에서의 유년시절이 딱히 악몽과 피로 점칠 된 것은 아니다. 단지 지나치게 지루했고, 인상 깊게 지루했고, 평생 영혼에 박힐 정도로 지루했다는 기억만이 남아있다.
파리는 온갖 자극으로 가득 찬 도시였다. 이따금씩 장 바티스트와 함께 세계 각국의 다른 도시를 여행하기도 했지만 그 어디서도 파리 같은 곳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프랑스에 와서 많은 것을 얻었다. 집이 있고, 가족이 있고, 재산도 있고……. 장 바티스트는 이 모든 것을 그에게 준 장본인이지만 에메랄드는 그를 딱히 주인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장 바티스트 쪽에서도 그렇게 생각해주길 바라진 않은 것 같고.
둘은 오랫동안 신뢰를 쌓아온 사업 파트너다. 에메랄드라는 이름은 그 뭐냐, 사업상의 가명이라고 해둘까. 그의 진짜 이름은 생각만 해도 따분해지는 세네갈의 흙길바닥과 건조한 모래 냄새를 떠올리게 만들기 때문에 가족조차도 모른다. 사실 그의 가족은 그가 이민 2세대나 뭐 그런 거쯤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가족이 알고 있는 그의 이름은 다미앙이다. 흔하고, 기억에 잘 남지 않는 이름이다. 그의 아내는 콩고에서 왔다. 난민 출신이고, 그의 아내도 콩고에서 쓰던 이름보다는 여기에서의 새로운 출발을 기념해 새 이름을 지어 쓰고 있다. 이름과 함께 내전의 기억도 지우고 싶은 모양이겠지.
가족 생각을 하면 항상 감상적으로 변한다. 그의 내면에 있는 부드러운 어떤 부분이 자극된 달까. 비록 가족은 평생 그가 무슨 일을 하고 돈을 벌어오는지 모를 테지만 그래도 좋았다.
아내의 잠든 얼굴을 보는 것, 아내가 바가지를 긁는 것, 아내가 만든 요리의 냄새, 그리고 갓 태어난 강아지와 별로 구분이 안 되는 내 새끼들, 이 모든 것이 에메랄드의 목표였다. 그의 도덕관이 다른 사람과 차이가 많이 난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지만 극히 간단한 인생인 것이다.
목을 몇 개 따고, 그걸 돈으로 바꿔서, 처자식을 먹여 살린다. 처자식이 이걸 알면 반대할거라는 것도 물론 어렴풋이는 알지만 젠장 그렇게 하나하나 따지면 세상에 벌어먹고 살 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자, 자, 생각이 너무 깊은 곳으로 빠졌다. 일을 할 땐 일에만 집중하는 게 에메랄드가 여태 쌓은 실적의 비결이다. 비결이라고도 할 수 없는 당연한 소리지만 이걸 지키지 못해 황천길로 가는 놈들을 많이 봤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눈앞에 핀이 뽑힌 수류탄이 굴러왔을 때 해야 할 것은 그걸 덮든가, 주워서 던지든가, 피하든가, 대처방법은 많은데 꼭 일에 집중 못하는 놈들은 기억도 못하는 무슨 꽃밭을 본다던지, 인생에 가장 행복하던 때를 본다던지, 죽은 사람이 와서 끌어안아 주는 그런 것을 보다가 폭사해버리는 것이다.
그런 것들은 추억이 아니다. 사신이다.
다음 순간 에메랄드는 일에 집중 못하는 머저리 놈들 리스트에 자기 이름도 올려놓았다. 눈앞에 그림자가 드리워지자 소스라치게 놀란 것이다.
에메랄드가 너무 깊게 상념에 잠겨있던 탓일까? 눈앞에 다이버 수트 같은 전신 방탄복을 입은 남자가 와서 섰다. 에메랄드는 쪼그리고 앉아 작업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자를 올려다보아야만 했고, 햇빛을 등지고 선 남자는 일순간 정말 사신처럼 보였다.
누구지? 경찰인가? 굳어있던 에메랄드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사파이어?”
남자는 소리 내서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긍정의 빛을 보였다.
“맞나보군. 그동안 말로만 들어서 말이야.”
“I can’t speak French. Though I can understand what you are saying.(난 프랑스어 못 해. 알아들을 수는 있지만.)”
“Ah, well then…….(아, 그렇다면…….)”
에메랄드가 몸을 펴고 일어서며 어색한 발음의 영어로 인사하며 손을 내밀었다.
“내 이름은 에메랄드야. 잘 부탁하지.”
쭈그려 앉아있을 땐 잘 몰랐는데 허리를 펴고 보니 사파이어는 에메랄드에 비하면 거의 어린아이 같이 느껴질 정도로 키가 작았다. 체구도 훨씬 작고.
사파이어는 에메랄드가 내민 거대한 손을 빤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들어 에메랄드의 얼굴을 마주했다. 이렇게 보니 정말 작은 남자다. 다윗과 골리앗의 체급 차이가 이런 느낌일까. 사파이어는 에메랄드가 내민 손을 붙잡고 짧고 단단하게 악수했다.
“난 사파이어.”
“난 여태까지 혼자서 일해서 말이야. 누구랑 같이 협업을 해본 적은 없는데.”
“나도.”
사파이어는 극단적으로 말수가 적은 남자였다.
에메랄드는 장 바티스트를 친구라고 생각하지만 그의 인종차별적 언행에는 동의하지 않고 종종 그의 생각 없는 발언에 대해 개자식이라고도 생각하기 때문에 사파이어를 섣불리 동양인 스테레오 타입에 끼워 맞추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파이어는 정말로 조용했다. 머릿속에서 스멀스멀 닌자라는 단어가 떠올랐지만 에메랄드는 그것을 애써 무시했다. 큰 고민 없이 유쾌하게 사는 것이 에메랄드의 철학이긴 했지만 인종차별만큼은 용납할 수 없는 주제다. 본인이 겪어봤기 때문이다.
사파이어는 에메랄드가 작업하고 있던 것을 스윽 내려다보고는 옆에다가 자신의 자리를 만들었다. 사파이어가 들고 온 것은 커다란 트렁크와 검은 더플 백으로, 트렁크 안에는 분해된 바렛 M82가 들어있었다.
검은 더플 백에는 손잡이까지 합쳐 총 길이가 60cm는 되어 보이는 톱이 한 자루 들어있었고 가죽 케이스에 꽂은 택티컬 카람빗 나이프 두 자루, 분해된 파마스 돌격소총이 있었다.
“전쟁이라도 일으킬 셈인가?”
“자주 들어.”
“응?”
“그 말 자주 들어.”
사파이어는 담담하게 분해된 총기들을 재조립했다. 군더더기 없고 신속한 움직임이었다. 에메랄드는 자신의 무기를 정비해야한다는 것도 잊고 사파이어의 무장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근접전 무기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구경 좀 해봐도?”
“물론.”
사파이어가 너무나도 깔끔하게 승낙하자 오히려 더플 백에서 무기를 꺼내기가 머쓱해졌다. 에메랄드는 눈치를 살살 보더니 톱을 꺼냈다. 날 길이는 30cm 정도, 손잡이도 30cm였다. 손잡이는 여느 택티컬 나이프처럼 검은색에 그립감이 좋았는데 재질은 강화 플라스틱이었다.
네모반듯한 직선이었고, 얼핏 보거나 자세히 보거나 어떻게 보더라도 원예 용도로 쓰임직한데 이런 걸 암살무기라고 들고 왔다는 점이 에메랄드의 풍족하지 못한 상상력을 심각하게 자극했다.
대체 이걸로 사람을 어떻게 죽일까? 톱이니까 뼈를 써는데 용이한 것은 알겠다. 하지만 사람 살에 박히면 그대로 뚝 부러질 것 같은데? 내구성을 고려한 것인지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일체형으로 되어 있었다.
자세히 보니 여느 도검처럼 날밑 아래에 자루 쇠가 이어져 있고 그것을 강화 플라스틱 으로 감싼 것이다. 전투 중에 싸우다가 플라스틱 손잡이가 부러진다고 해도 그 안에 들어있는 자루 쇠를 쥐고 계속 싸울 수 있을 것이다. 심이 부러진 건 아니니까.
“멋진데.”
“줘.”
사파이어가 톱을 빼앗아갔다. 그리곤 에메랄드가 카람빗 나이프를 꺼내 구경하기도 전에 그것을 채가더니 오른쪽 다리에 찬 레그 홀스터에 끼웠다. 사파이어는 다이버처럼 보일 정도로 전신을 감싸는 수트를 입고 있었는데 주요 부위에 방탄 패드가 붙여져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자체가 방탄복이었다. 근접전을 선호한다고 하니 아마 방검 기능도 있을 것이다.
에메랄드는 순간이지만 자신의 처지가 초라했다. 장 바티스트가 나에게 준 것은 방탄 코트밖에 없다…….
애초에 사파이어가 이렇게까지 무장을 해서 나올 줄은 몰랐다. 800만 유로라는 금액을 바로 옆에서 듣기는 했지만 장 바티스트는 그 이후에 딱히 언질을 준 게 없기 때문이다. 내가 잘못인가? 아니다. 내 잘못일리는 없다.
장 바티스트가 벤체슬라스 욕을 그렇게 해대니까 아마도 벤체슬라스의 성격이 괴팍해서 인형놀이 하듯이 자신의 보석을 저렇게 치장해서 전투로 내보내는 것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사파이어는 양 다리에 홀스터를 차고 있었는데 왼쪽에는 그 특이하게 생긴 톱, 오른쪽에는 카람빗 나이프 한 쌍을 찼다. 허리 뒤편으로는 조립한 파마스를 비스듬히 찼는데 유사시에 바로 꺼내들 수 있는 모양새였다. 권총은 따로 소지하지 않았다.
분해된 바렛까지 조립을 마친 사파이어가 배를 깔고 누우며 바렛의 위치를 조정했다.
“준비하지 그래.”
“응?”
“작전 시간이 다가온다.”
사파이어를 관찰하느라 시간을 너무 뺏겼다. 이러다가 이번에 황천길을 넘어가는 건 에메랄드가 될 지도 모른다. 에메랄드는 정신을 차리고 나머지 준비를 했다. 파리 한 귀퉁이의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옥상에서, 암살자 둘이 저격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작전은 극히 간단하다. 곧 냉동탑차 한 대가 이 지점을 지나갈 것이다. 민간차량으로 위장했지만 그 안에 실려 있는 것은 상품이 아니라 사람일 것이다. 위장이니만큼 무장을 단단히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병력이라고 해봐야 운전자와 조수석에 앉은 사람, 둘 정도. 품 안에 총기는 숨기고 있겠지만 사파이어나 에메랄드처럼 총기와 도검류, 방탄복을 두르고 있진 않을 것이다.
저격으로 차의 기동력을 제거한다. 바퀴를 쏜다는 말이다. 그런 다음 적을 무력화시키고, 그러니까 죽이고, 반항하지 않으면 죽이지 않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그럴 확률이 얼마나 될까, 결국 죽을 것이다.
일이 끝난 다음에 탑차를 화물칸 째로 옮기면 임무 성공이다. 논란의 여지가 없이 깔끔한 작전이다. 적어도 몇 백 미터 거리를 두고 상황을 지켜보는 장 바티스트 고디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럼 그럼, 누가 생각해낸 작전인데.
맞은편에 앉은 벤체슬라스는 영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여태까지 정말 그렇게 허술하게 살아온 건가?”
“자네가 결벽증이란 생각은 안 해봤나? 독일인들은 그 버릇 좀 고쳐야 돼. 삶의 모든 것을 1mm까지 재단하려고 든다니까.”
“독일인 아냐.”
“그래그래, 가짜 벨기에인이겠지. 지금은. 하지만 자네 핏줄에 흐르는 게르만 혈통은 부정할 수 없을걸.”
벤체슬라스는 장 바티스트의 멱살을 잡으려다가 손가락을 뚜둑뚜둑 꺾으며 간신히 자제했다.
장 바티스트의 이리저리 찔러보기는 하루이틀된 것이 아니다. 벤체슬라스의 진짜 신원을 알아내려고 부단히도 애쓰는 모양인데 영 헛다리짚고 있는 꼴을 보면 피식피식 웃음이 나기도 하지만 때때로 저 가는 목을 닭 모가지마냥 콱 졸라버리고 싶었다.
둘은 백업으로서 여기에 대기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일이 틀어질 경우를 대비해.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경찰이 개입하게 되서 세공사들의 정체가 탄로 나게 될 것 같으면 이 자리에서 보석들을 처분해버리는 것도 계획에 들어가 있다.
장 바티스트는 에메랄드를 어떻게 처분할지 몰라도 벤체슬라스는 확실하게 사파이어를 죽일 생각이다. 그깟 보석이야 또 만들어내면 그만이다.
탑차가 등장했다. 마트에 납품되는 아이스크림 상표를 단 흔해빠진 트럭이었다. 네모반듯한 컨테이너 안에 사람이 들어있을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할까. 탑차에는 호위가 붙어있지 않았다. 운전석과 조수석에 탄 놈들은 인상이 험악해 보이긴 하지만 그 둘 말고 다른 병력은 보이지 않고.
800만 유로짜리라기엔 너무 허술한 거 아닌가? 현실은 소설과 달라서 때때로 일이 물 흘러가듯이 풀려나가는 경우도 있지만 지나치게 큰 금액의 사건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풀려나가면 그것만큼 불안한 일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대포음에 가까운 총성이 울리며 바렛의 총탄이 자동차 바퀴를 아작 내버렸다. 펑크를 냈다던가, 총알이 바퀴를 뚫었다던가 하는 귀여운 수준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아작을 내버렸다.
장 바티스트 고디에가 기겁하며 입을 떡 벌렸고 벤체슬라스는 식어가는 홍차를 마저 들이켰다. 바퀴가 박살난 냉동탑차가 기우뚱하더니 그대로 스키드 마크를 만들며 길바닥 위를 주르륵 미끄러졌다.
끼이익하고 듣기 싫은 소리가 거리에 크게 울렸다. 장 바티스트는 어디에 눈을 둬야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는 차를 보았다가, 암살자들이 저격하고 있는 옥상을 올려다보았다가, 벤체슬라스를 돌아보았다.
“미쳤어! 미쳤어?”
“뭘 이런 걸 가지고 그러나.”
“바렛? 바렛이야?”
“바렛이지.”
“전쟁이라도 일으킬 셈인가?”
“그 말 자주 들어.”
벤체슬라스는 밍밍한 홍차에 대해 유감이라고 생각했다. 영국에선 다른 건 몰라도 맛있는 밀크티만큼은 원 없이 마실 수 있었다.
“뭘 그렇게 호들갑을 떠나. 자네가 작전을 짜왔고, 난 그걸 실행하는 거야. 내가 일하는 스타일을 잘 알 텐데. 1mm의 오차도 없는 완벽주의 말이야.”
탑차는 용케 쓰러지지 않았지만 단 한 번의 일격에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운전석과 조수석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품 안에서 총기를 꺼내들며 차에서 내렸다.
저격수를 찾으려고 두리번거리는 순간 폭발음이 또 한 번 울리며 총탄이 조수석에서 내린 사람의 머리통을 꿰뚫었다. 뒤통수가 산산조각 나 날아가는 것이 확실히 보였다. 몸은 저격의 위력을 버티지 못하고 뒤로 떠밀려 나동그라졌다.
에메랄드는 어찌해야할지 모르는 사람이 그러는 것처럼 어색하게 휘파람을 불었다. 재장전을 하던 사파이어가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러지.”
“음, 아니, 아무것도 아냐.”
에메랄드는 장 바티스트가 신신당부 했던 말을 다시금 떠올렸다. 사파이어를 함부로 자극하지 말 것. 지금은 같은 편이니까 이만큼 든든한 존재도 없지만 언젠가 일을 하다가 서로 상반된 입장으로 만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미래였다.
이 바닥에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원수도 없지만 사파이어만큼은 어떤 식으로든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달까.
사파이어가 나머지 타겟을 저격으로 날려버리려고 하는 순간, 옥상 위에 나란히 배를 깔고 누워 있던 둘은 피격됐다.
총알이 아스팔트 바닥을 드르륵 긁고 패는 소리는 온 몸의 전기 신호를 자극한 듯이 섬뜩한 것이었다. 다행히 첫 발이 빗나갔기 때문에 둘은 몸을 숨길 시간을 벌었다. 둘은 동물적인 감각으로 엄폐물 뒤에 숨으며 총알이 날아온 방향을 가늠해보았다.
그러나 상대는 빨랐다. 곧 두 발 째의 총알이 박혔다.
“어쩐지 일이 잘 풀린다 했지.”
에메랄드가 고개를 들어 방향을 확인하려고 했지만 그 때마다 총알이 날아왔다. 성가신 방해였다. 사파이어가 조준렌즈의 표면을 거울삼아 엄폐물 밖으로 슬쩍 내비치는 순간 총알이 득달같이 날아와 그것을 튕겨냈다.
하마터면 손목이 날아갈 뻔했다. 사파이어는 손을 절레절레 털면서 혀를 찼다.
“조준 속도가 상당히 빠른데.”
“어느 쪽이 나갈까?”
“내가 나가지. 엄호해줘.”
역할이 정해지자 에메랄드는 베레타 ARX-160을 꺼내서 견착하고는 사파이어에게 나가라는 듯이 고갯짓을 해보였다. 사파이어가 엄폐물 밖으로 나가자 에메랄드의 돌격소총이 포화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에메랄드가 저격이 날아오지 못하도록 위협사격을 해주는 동안 사파이어는 옥상 문을 열고 탈출해 건물 아래까지 내려가는데 성공했다. 사파이어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파마스를 꺼내었다.
“이건 예상외인데.”
“예상외를 넘어서,”
“쫄지 말라고, 장 바티스트. 장사 한 두 번 하나? 나머지는 처리반한테 맡기면 돼. 우리한테 필요한 건 시간이야. 우물쭈물 할 시간 없다고. 그 무거운 엉덩이 들고 일어나지. 직접 처리해야겠어.”
벤체슬라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정장 재킷 안에서 미니 우지를 꺼내들었다. 장 바티스트 역시 중얼중얼 뭐라고 욕지기를 내뱉으면서 기관단총을 꺼내들며 벤체슬라스의 뒤를 따랐다.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가 먼저 거리 상태를 확인하며 위협 요소를 제대로 제거하는지 지켜보고는 안전하다 싶은 범위를 엄폐물을 이용해 이동했다. 사파이어는 자신이 방패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벤체슬라스가 이렇게 가까이 있으리라는 건 모를 것이었다.
저격수는 냉동탑차에 접근하는 벤체슬라스와 장 바티스트를 쏘지 않았다. 목표로 노리고 있는 것은 사파이어 하나뿐인 듯 했다. 사파이어가 저격수가 숨어 있는 건물 가까이 접근하자 총탄이 번개같이 날아와 지면에 박혔다.
사파이어는 움츠리는 대신 몸을 앞으로 튕겨 건물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사파이어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신원 미상의 저격수가 이를 부드득 갈더니 숨어있던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사파이어는 닫힌 옥상 문을 발로 차고 진입해 들어갔다. 옥상에는 조금 전까지 저격수가 있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무기가 든 가방, 바닥에 널린 탄피, 단단히 고정된 드라구노프 저격소총.
저격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벌써 내뺀건가? 그럴 리 없다. 이 건물에 돌입할 때까지 사파이어를 노리고 있었으니까. 아래층 어딘가에 숨어있지 않다면 여기 어딘가에 있다는 소린데. 어디 있지?
사파이어가 뒤돌아서려는 순간 드르륵 하는 총소리가 귓전을 스쳤다. 사파이어는 발작적으로 몸을 숙이며 숨었다.
옥상 문 뒤에 숨어 있던 저격수가 러시아제 PP-2000으로 사파이어가 숨어 있는 곳을 집요하게 쏴 갈기며 한 발 한 발 안전한 곳으로 도망쳤다. 파마스를 쥐고 고개를 숙인 채 숨을 헐떡이던 사파이어가 총을 마주 쏴 갈기기 시작했다.
저격수의 목적이 여기서 도망치는 것이니만큼 잊지 않고 옥상 문 쪽도 쏴줬다. 어느 순간, 총알이 나가지 않고 방아쇠에서 달각달각하는 소리만 울렸다. 탄알이 다 떨어진 것이다. 허리춤을 더듬었지만 예비탄창은 없었다. 상대방도 총알이 다 떨어진 건 마찬가지인 모양인지 조용했다.
사파이어는 레그 홀스터에 찼던 톱을 꺼내들고 엄폐물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곤 그를 막 덮치려던 저격수와 정면으로 마주했다.
저격수는 여자였다. 상대에게 머리채를 잡힐 것을 감안했는지 머리칼은 밤송이같이 짧게 깎여 있었고, 목까지 오는 검은 방검복을 입고 있었다. 오른손에는 토마호크를 들고 왼손에는 얼음송곳 같이 뾰족하게 생긴 나이프를 거꾸로 그러쥐고 있었다.
사파이어와 여자는 눈이 맞자마자 서로에게 도끼와 톱을 휘둘렀다. 머리를 노리고 내려찍는 사파이어의 톱날을 여자가 도끼날 밑으로 감아내 옆으로 흘렸다. 동시에 사파이어의 자세를 무너뜨리며 나이프를 찍었다.
사파이어가 여자의 손목을 쥐었지만 체격도 비슷한데다 자신만큼 훈련된 전투원이라서 힘의 차이는 엇비슷했다. 송곳 끄트머리 같은 칼날이 사파이어의 어깨에 찍힐 듯 말듯 멀어졌다 가까워졌다를 반복했다.
서로 엉긴 채 치열하게 접전을 벌이는 톱과 도끼도 쇳가루가 드득드득 갈리는 소리를 냈다. 이 중에서 밀린 쪽은 확실하게 죽는다. 톱이 박히거나, 도끼가 박히거나.
대치는 오래가지 못했다. 사파이어가 톱을 비틀어 빼며 여자의 어깨부터 가슴 아래까지를 횡으로 그어 내렸다. 방검복이 톱날도 막아내는지는 의문이지만 여자가 제때 몸을 뒤로 뺀 덕에 표면만 스치고 말았다.
큰 행동이었던지라 그 다음 동작까지는 커다란 틈이 생겼고, 그 틈을 여자가 파고들었다. 여자는 휘청이는 사파이어를 도끼로 찍어 내렸고, 확실히 기회를 잡기 위해 그의 다리를 걷어 차 넘어뜨렸다.
도끼는 방검 기능이 있는 방탄 수트에 맞고 튕겼지만 사파이어는 그대로 발이 꼬여 고꾸라졌다. 그 위를 여자가 올라타서 왼손에 쥔 나이프를 단단히 쥐고 사파이어의 목에 들이댔다.
긴장으로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고 둘은 숨을 고르는 동안 서로 공격하지 않는 암묵적인 조약을 맺었다.
“너한테 딱히 원한은 없어.”
여자가 마른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사파이어가 꿈틀거리기라도 하면 바로 목에 들이댄 나이프를 조금 더 깊게, 더 깊게 찔러 넣으면서.
“하지만 난 명령을 따라야 돼.”
“난 사파이어.”
“피전 블러드.”
통성명을 한 둘은 휴전이 끝났다는 것에 동의했다.
사파이어가 허리를 튕겨 몸을 일으켰다. 사파이어의 목에 나이프를 들이대고 있던 여자는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고 그 틈을 타 사파이어가 나이프 쥔 여자의 손을 붙잡아 거꾸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곤 여자의 목에 찔러 넣으려고 몸싸움을 벌였다.
그 때 무언가가 사파이어의 등을 후려갈겼다. 한 대, 아니 두 대, 세 대!
예상치 못한 일격인데다 일순 눈앞이 아득해질 정도의 통증이었다. 사파이어는 여자를 확 떠밀고 바닥을 거의 기다시피 엉거주춤하게 뛰어서 도망쳤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총구를 아직까지 들이대고 있던 제 3의 인물이 여자에게 물었다.
“부상은?”
“없습니다.”
“사냥해.”
사파이어의 등에 총을 3발이나 쏜 것은 통굽인 검은 앵클부츠에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입은 여자였다.
여자는 품속에서 권총 한 자루를 꺼내 저격수에게 던져주었다. 저격수는 탄창을 확인하고 일어나서 사파이어를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둘은 옥상을 벗어나 건물 아래층으로 달려갔다. 옥상에 남은 여자는 그들을 곧바로 따라가지 않고 난간으로 아래쪽 상황을 내려다보았다.
건물 아래쪽에서는 마침 벤체슬라스가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여자는 벤체슬라스의 백금발 머리카락만 보고도 상대가 누군지 파악이 됐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마리야 이바노브나 바실리예브스키. 세공사도 참전하는가.”
“우리도 여기 있잖아.”
“그렇긴 하지.”
벤체슬라스는 옥상의 여자와 눈빛을 교환하다가 다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장 바티스트는 쇠 지렛대를 들고 탑차의 컨테이너를 열려고 이리저리 끼워보고 있었다. 아까의 충격 때문인지 컨테이너가 조금 찌그러진 모양인데 덕분에 문이 제대로 열리지 않았다.
“보지만 말고 도와주지 그래.”
벤체슬라스는 장 바티스트가 낑낑거리는 꼴이 불쌍해서 그의 손에서 지렛대를 빼앗고 그를 옆으로 밀어냈다. 그런 다음 잠금 쇠가 걸린 부분을 몇 번이고 힘껏 내리쳤다. 호리호리한 체격과 가는 손가락에서 나올 것 같지 않은 괴력 덕분에 얼마 안가 컨테이너의 문이 덜컹 열렸다.
“자, 이제 어떤 분이 계시는지 볼……까…….”
안을 들여다보고 나서, 장 바티스트는 물론이고 직접 문을 연 벤체슬라스도 할 말을 잃었다.
사파이어는 들어왔던 입구로 바로 내려갈 수 없었다. 두 층을 내려왔을 때 복도 옆문이 덜컹 열리더니 안에서 중국도를 든 남자가 튀어나왔다. 남자는 곧바로 사파이어에게 달려들었다.
소리를 지르며 부주의하게 밀고 들어오는 것을 보니 발목잡기용으로 뿌려놓은 초짜에 불과했다. 사파이어는 남자가 휘두르는 칼을 톱날 사이에 끼워 넣고 비틀어서 공격을 무마시킨 후, 긴장감에 몸이 굳은 남자가 아주 잠깐 방심을 한 틈을 타 그를 톱으로 긁어내렸다.
살짝 휘둘렀을 뿐인데 치명상이다. 남자의 몸에서 피분수가 솟구쳐 나왔다.
사파이어는 한쪽 다리에 차 두었던 한 쌍의 카람빗 중에 하나를 꺼내 쥐고는 남자의 숨통을 끊어놓았다. 톱으로 마무리를 짓기에는 톱날이 뼈 사이에 박혀서 나오지 않을 위험성도 있을 뿐더러 뒤에서 쫓아오는 암살자가 넉넉하게 시간을 줄 것 같지도 않았다.
남자의 죽음이 신호탄이 됐는지 복도에 있던 문들이 일제히 열리면서 칼을 든 남자들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남자들은 처참한 모습으로 죽은 희생자와 그 앞에서 피 묻은 톱을 쥐고 있는 사파이어의 모습을 보고 주춤주춤하더니 고용주에게서 받기로 한 돈을 도저히 뿌리칠 수 없는지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사파이어는 응전하지 않고 등을 돌려 도망쳤다. 아래층으로 달려 내려갔다. 계단이 남자들의 발소리로 쿵쾅쿵쾅 울렸다.
한층 아래에는 숨어있는 인원이 없는지 복도가 조용했다. 그러나 바로 아래 계단에서 또 다른 인원이 올라오고 있었다. 사파이어는 방향을 틀어야했다. 복도 끝에 또 다른 층계가 보였기 때문에 그리로 뛰었다. 뒤에서 남자들이 고함을 치며 칼을 들고 몰려왔다.
그런 남자들 뒤로 총성이 몇 발 울렸다.
사파이어를 노리던 저격수, 피전 블러드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남자들을 담담하게 죽이며 추적을 계속했다. 같은 목표물을 노린다지만 그것 말고는 접점이 없는 관계고 협력이란 말의 무게는 이 세계에선 다 삭은 실낱 한 올 보다도 쉽게 끊어졌다.
앞만 바라보던 남자들이 뒤에서 공격을 받자 칼을 들고 뒤를 돌아보았다. 웬 여자가 자신들을 공격하고 있는 것을 보고 일부는 여자에게 달려들었다.
피전 블러드는 총알을 아껴야겠다고 생각했다. 총을 다용도 벨트에 끼워 넣은 다음, 피전 블러드는 도끼와 나이프를 쥐고 남자들을 참살하며 길을 트기 시작했다.
한편 사파이어는 복도 끝 층계참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알비노 쌍둥이와 마주했다.
“넌 진짜 등신이야, 베나르.”
“너도 베나르잖아, 베나르.”
“그럼 이름으로 불러, 시릴.”
“너나 이름으로 불러, 다비드.”
쌍둥이는 둘이 싸우느라 정신이 없어보였다. 둘이서 길을 완전히 막고 있지만 않았더라면 사파이어는 그들을 무시하고 지나갔을 것이다. 쌍둥이는 서로 부모님에 대한 안부까지 신랄하게 묻더니 그제야 사파이어에게 고개를 돌렸다.
“기다리고 있었어, 동양인.”
“반가워.”
“난 시릴 베나르.”
“난 다비드 베나르.”
둘은 각각 사이스(sais)를 한 쌍씩 들고 있었는데 가운데의 길게 뻗은 부분은 완전히 송곳모양으로 날카로웠고 양 옆에 팔처럼 뻗어 나온 가지는 여느 도검의 코등이와 다르게 손가락처럼 휘어져있었다.
사파이어가 둘의 병장기를 유심히 보는 것을 알자 쌍둥이가 갑자기 화색을 띄었다.
“이게 뭔지 알아?”
“알고 싶어?”
“가만있어, 시릴.”
“싫은데, 다비드.”
“내가 설명할거야. 이건 사이스라는 칼이야. 본 적 있어?”
“영화에도 나왔다고. 시릴이 바보라서 그런데 원래는 사이라는 이름이야. 단수라고.”
“너는 그게 주력 무기인가본데.”
쌍둥이 중 하나가 턱짓으로 사파이어의 톱을 가리켰다.
“이거 보여? 이 손가락같이 생긴 거?”
“이거에 걸리면 끝나지. 손 쓸 틈도 없을걸.”
쌍둥이는 정말 친절하게도 자신들이 어떤 방식으로 사파이어를 무력화시키고 제압할 것인지 알려주었다. 무기의 사용법까지도.
사파이어는 이유를 알 수 없지만 피곤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사파이어는 사회적 관습이란 걸 잘 모른다. 사파이어가 대놓고 한숨을 쉬자 쌍둥이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지루한가본데?”
“너 때문이잖아, 시릴.”
“아닌데. 너 때문인데, 다비드.”
“닥쳐.”
드디어 사파이어가 끼어들었다.
“닥치고 덤벼. 짜증나게 하지 말고.”
그러자 쌍둥이의 유쾌한 말장난이 뚝 그쳤다. 쌍둥이는 눈앞의 먹잇감을 빤히 쳐다보는 뱀처럼 사파이어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무기를 쥐고 다가왔다.
“바로 죽이지 마.”
“너나 바로 죽이지 마.”
“반반하게 생겼으니까 가지고 놀다가 죽일 거야.”
“너 다음엔 내 차례야.”
사파이어는 알비노 쌍둥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어느 놈부터 죽일까. 공격을 시작할 기회를 노리고 있는데 쌍둥이 중 하나가 사이스를 휘두르며 사파이어에게 바짝 붙어왔다.
둘은 일란성 쌍둥이이긴 하지만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움직임이 똑같았다. 둘 중에 틈이 더 보이는 놈을 먼저 죽이려고 했던 사파이어도 마치 거울의 상을 붙여놓은 것 같은 둘의 움직임 때문에 잠시 주춤했다.
그 사이에 공격이 파고 들어왔다. 두 개의 사이스, 아니 네 개, 아니 세 개인가. 두 쌍의 무기도 똑같이 생겨서 구분할 수가 없었다. 앗 하는 사이에 사이스의 끝부분이 방탄복을 푹 찔러왔다. 꿰뚫리진 않았지만 뒷머리가 아찔해지는 순간이었다.
누가 누군지 구분이라도 됐으면 좋겠다. 톱날이 좋은 점은 살짝 스치기만 하더라도 피해가 막심하다는 것이다. 어느 한 쪽만 살짝 긁어주기라도 하면 구분이 되서 한층 더 대응하기 편할 텐데.
사파이어가 거리를 두고 서자 쌍둥이도 잠시 물러섰다. 한 사람을 둘로 복제해놓은 것 같이 움직임도 똑같았고 숨을 고르는 것도 똑같았다.
“빠르네.”
“빨라.”
“생각보다 유연하고.”
“유연하네.”
눈앞의 쌍둥이가 어딘지 모르게 소름끼치는 점은 인간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인간처럼 보이게 잘 만든 인형 같았다.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감정이 일반인과 많이 달라서 문제다. 둘은 재밌는 게임이라도 즐기는 것처럼 사파이어를 죽이려 들고 있었다.
쌍둥이는 사파이어가 입고 있는 방탄 수트가 방검기능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다음에는 다른 곳을 공격할 것이다. 좀 더 노출된 곳.
쌍둥이가 사파이어의 몸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위 아래로 훑으며 약점을 찾아내는 것과 동시에 사파이어도 자신의 약점이 될 만한 부분이 어디일까 생각했다. 패드가 붙어있지 않은 관절부위. 손. 얼굴. 기동성을 위해 트여있는 옆구리. 치명상을 입힐 곳은 많다.
사파이어가 마땅한 대비책을 생각하지 못한 사이 쌍둥이는 계산을 끝내고 다시 공격해 들어왔다.
네 자루나 되는 송곳 끝이 일시에 파고들자 사파이어가 반사적으로 톱을 휘둘렀으나, 마치 그것을 노렸다는 듯이 사이스의 날 부분과 손가락같이 휜 코등이 사이부분이 그 틈새를 쑥 파고 들어오더니 확 비틀어서 톱날의 방향을 틀었다.
그 밑으로 또 다른 사이스가 파고 들어오더니 반대 방향으로 틀어서 사파이어는 톱을 놓쳤다. 심을 부러뜨리지 않기 위한 방책이었을지 몰라도, 실수였다.
톱을 놓친 것과 동시에 쌍둥이 중 하나가 사파이어의 손목을 붙잡고 몸을 밀착시켜왔다.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뺀 사파이어에게 고개를 쭈욱 늘려 다가오더니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된 사파이어의 턱 선을 진하게 핥아 올렸다.
그는 사파이어가 다른 손에 든 카람빗을 휘두르자 재빨리 몸을 빼고는 눈을 가늘게 휘며 웃었다.
“무슨 맛이야?”
“짭짤해.”
생리적인 불쾌감이 든 사파이어는 손등으로 턱을 쓸어내리더니 홀스터에 낀 나머지 한 자루의 카람빗을 꺼내들었다. 초근접전은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 사파이어도 자신의 단점이 뭔지 잘 알고 있다. 어느 정도는 거리를 둬야 수월한데. 톱은 다시 주워들기엔 위험이 너무 컸다.
쌍둥이는 장난스럽게 발끝을 톡톡거리며 발레하듯이 춤을 췄다. 그러고 보니 움직임이 이상하다고 느꼈던 게, 전투기술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무용을 보는 것 같았다. 쌍둥이의 날렵하게 잘 빠진 몸매도 무용수의 근육질 몸매와 비슷했고.
“얼굴은 건드리지 마, 시릴.”
“알았어, 다비드.”
“나 먼저?”
“너 먼저.”
사파이어는 두 자루의 카람빗을 역수로 쥐고 호흡을 골랐다. 다음 순간, 쌍둥이가 다시 사이스를 휘두르며 접근해왔고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칼날과 칼날이 맞부딪치며 요란한 금속음이 울렸다.
쌍둥이는 사파이어를 가지고 노는 게 확실했다. 적어도 많이 봐주는 것은 느껴졌다. 마치 쥐 한 마리를 잡은 고양이 두 마리가 죽이기 전에 장난감 가지고 놀듯이 툭툭 건드리며 노는 것 같달까.
사파이어는 필사적으로 막아냈지만 이렇게 근접전에서, 그것도 체격차이가 나는 두 사람을 버텨내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사이스 한 자루가 사파이어의 얼굴을 아슬아슬하게 스칠 듯하자 쌍둥이 중 한 쪽이 소리쳤다.
“얼굴은 안 된다니까!”
“실수할 수도 있지!”
자기들끼리 싸우면서도 공세는 멈춤이 없었다. 사이스 한 자루의 끝 부분이 사파이어의 눈알 앞까지 쑥 찌르고 들어왔다.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 순간 총성이 울렸다.
쌍둥이 중 한 쪽이 실 끊어진 인형처럼 앞으로 쓰러졌다. 사파이어를 궁지에 몰아붙이고 있던 나머지 한 쪽이 그것을 보고 새된 비명을 질렀다.
“다비드!”
“안녕, 친구들.”
청량음료 같이 상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몬과 오렌지가 뒤섞인 시트러스 계열의 향기도. 그 어떤 아수라장이라도 흥겨운 파티장으로 만들어버릴 것 같은 목소리였다.
사파이어는 그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형제를 잃은 쌍둥이는 사파이어에 대한 공격을 잠시 멈추고 쓰러진 형제를 더듬거리더니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뒤를 노려보았다.
붉은색과 녹색이 뒤섞인 염색머리를 한 남자가 해맑게 웃고 있었다. 한 손에는 연기와 화약 냄새가 피어오르는 총을 쥔 채.
“불공평한 것 같아서 조금 균형을 맞춰봤어.”
“너, 넌 또 뭐야. 감히 다비드를. 내 동생을 쐈어!”
“나 너희 알아. 베나르 쌍둥이지? 페어플레이 정신 몰라?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그러더니 남자는 들고 있던 권총을 뒤로 휙 던졌다.
“난 신사니까 공정하다고. 자, 덤벼. 너희랑 다르게 1:1로 붙어줄게. 이번엔 총 안 쓰고.”
형제를 잃은 쌍둥이, 시릴이 노성을 지르면서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해맑게 웃고 있던 남자가 돌연 악귀 같은 얼굴로 변하더니 등 뒤에 숨기고 있던 장도리로 쌍둥이의 머리를 찍어 내렸다.
기습적이었고 예상치도 못한 무기였던 데다가 분노에 눈이 먼 시릴은 그 일격에 머리를 내주었다. 뇌진탕이 올 정도로 두개골이 흔들린 모양인지 달려오던 관성도 잊고 그 자리에 무릎을 픽 꿇었다.
남자는 도살자의 눈으로 시릴의 머리가 함몰될 때까지 장도리를 후려쳤다. 피범벅이 되고 뇌수가 튈 지경이 되자 남자는 표정을 풀며 장도리를 옆으로 내던졌다. 시릴은 무릎을 꿇은 채로 죽었다.
남자는 피 묻은 손을 시릴의 옷에 슥슥 문질러 닦더니 곧바로 반가운 표정을 지으면서 사파이어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이에요! 정말 오랜만이야! 반가워요! 나 기억해요?”
“알렉산드라이트.”
“알료샤라고 불러줘요!”
알료샤는 10년 지기 친구를 만나기라도 한 듯이 반가움에 차서 사파이어를 껴안으려고 들었다. 사파이어 입장에서는 이 남자가 적인지 아군인지 분간이 가지 않아서 경계에 찬 태도로 밀어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알료샤가 순순히 뒤로 물러서며 손대지 않겠다는 듯이 양 손을 들어보였다.
“미안해요. 너무 반가워서! 잘 지냈어요?”
“당신이 적인지 아군인지 모르겠는데.”
“그런 섭섭한 소릴. 난 모두의 친구가 되고 싶은 데요!”
“그 친구 후보를 방금 눈앞에서 망치로 죽인 것 같은데.”
“저런 질 나쁜 애들은 곁에 두고 싶지 않구요.”
어쨌거나 목숨을 살려준 건 사실이다. 사파이어는 카람빗을 다시 홀스터에 끼고 바닥에 굴러다니던 톱을 주워들었다. 그리고 짧게 인사했다.
“도와줘서 고맙군.”
“허억.”
알료샤가 양 손으로 입을 감싸며 감격에 찬 소리를 내뱉었다. 눈에서 별빛이 쏟아질 듯이 반짝거렸다. 부담스러운 눈이었다. 이 남자와 함께 있다 보면 어딘가가 굉장히 거북해진다. 사파이어는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그 때, 잊고 있던 인물이 뒤에서 나타났다. 등 뒤에서 발소리가 탁탁 들려오자 사파이어가 고개를 돌려 확인했고, 사파이어의 맞은편에 있던 알료샤는 그 인물이 누군지 한 번에 알아보고 또 한 번 반갑게 소리쳤다.
“아가테!”
등 뒤에서 뛰어오던 존재는 마법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 소리에 깜짝 놀라 굳어버렸다. 더 다가오지 못하자 알료샤가 직접 뛰어나가며 두 팔 벌려 그 존재를 껴안았다. 사파이어를 저격했던 암살자, 피전 블러드였다.
“세상에 이게 얼마만이야! 아가테, 잘 지냈나요?”
“어, 어, 어.”
여자는 어찌해야할지 몰라서 일시적으로 망가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더니 가까스로 알료샤를 떼어내면서 한 발 물러섰다.
“다, 다, 당신. 당신. 어.”
“알료샤예요. 나 기억해요?”
“당신이 왜 여기, 여기에?”
피전 블러드는 사파이어를 노리는 남자들을 전부 죽인 게 아니기 때문에 당연한 이치로 뒤에서 또 다른 남자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알료샤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품 안에서 또 다른 권총 한 자루를 꺼내들어 태연하게 남자들을 죽이면서 피전 블러드의 안부를 물었다.
“왜기는! 나도 이 일 하기로 했어요. 그러니까 있지! 세상에, 대체 이게 얼마만이야? 잘 지냈어요? 마지막으로 본 게 어디지? 함부르크였나요? 어디였더라? 뮌헨?”
시선은 피전 블러드에게 고정되어 있었지만 총알은 한 발 한 발 확실하게 남자들을 죽이고 있었다. 빗나가는 법도 없었다.
확실히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이런 상황에 이런 태도는 보이지 않을 법 하지만, 여자는 다른 의미로 눈앞의 남자에게 무서움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알료샤는 나머지 인원을 처리하고 나서 제대로 대화를 할 준비가 됐다는 듯이 완전히 피전 블러드 쪽으로 돌아섰다.
“물론 나도 당신이랑 같은 편이었는데. 같은 편이었는데 말이죠? 생각이 바뀌었어요. 아 참, 사파이어는 알고 있나요? 둘이 이미 만났나요?”
“그는 내……. 내 표적입니다.”
“그것 참 안됐네요. 참 유감이에요.”
피전 블러드는 이 거리라면 지금 당장 총을 빼서 사파이어를 죽일 수도 있었지만, 감히 그럴 수가 없었다. 눈앞의 알료샤는 위험할 정도로 동공이 벌어져 있었다. 섬뜩한 눈이었다.
“이 남자를 보고 나니까 편을 바꾸고 싶어지더라구. 가끔 그럴 때 있잖아요. 내 말 이해하죠? 난 돈 필요 없거든. 아가테, 그래도 우린 친구니까 생각해서 말해주는 거지만……. 기회를 줄게요. 여기서 죽을래요, 아니면 내 핑계 대고 돌아갈래요? 당신 주인은 이해해줄거야. 나 같은 또라이 다시없으니까.”
임무 실패에 대한 처벌은 어느 세공사를 막론하고 혹독하다. 그러나 이 남자에 한해서는 그것을 감내하는 게 꽤 괜찮은 거래로 느껴졌다. 피전 블러드는 잠시간 고민하더니 교전할 생각이 없다는 걸 보여주듯이 손에 들고 있던 토마호크와 송곳 같은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그리곤 “Danke schön.(고맙습니다.)”하고 인사하고 방향을 돌려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알료샤는 여자의 등 뒤에다 대고 “마리야한테 내 안부 전해줘요!”하고 인사했다. 알료샤는 여자는 순순히 보내줬지만 그 뒤에 몰려오는 또 다른 청부업자들에게는 자비가 없었다.
알료샤는 피전 블러드가 놓고 간 토마호크와 나이프를 들고 도끼질을 해가며 남자들을 토막 내기 시작했다. 비명과 피가 튀었다. 눈앞에 있는 것을 사람으로 보지 않아야 가능한 움직임들이었다.
사파이어 하나를 죽이기 위해 달려오던 남자들은 알료샤에 비하면 거쳐 온 지옥의 수가 다르기 때문에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고 패닉에 빠지거나 광분상태가 되어 이성을 잃었다. 그렇게 달려들고, 죽었다.
알료샤는 콧노래가 나올 정도로 흥이 나오는 모양이었다. 숨을 헐떡헐떡 몰아쉬면서도 루이 암스트롱의 라 비 앙 로즈를 꿋꿋이 부르고 있었다.
마지막 남자를 찍은 도끼가 뼈에 찍혀서 잘 빠지지 않자 남자를 발로 밀어내면서 겨우 도끼를 뽑아낸 알료샤는 이제야 한숨 돌리겠다는 듯이 자랑스러워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뒤에 있어야 할 사파이어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알료샤는 엉망이 된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이럴 줄 알았지.”
벤체슬라스와 장 바티스트는 낭비할 시간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눈앞의 광경에 잠시간 멍할 수밖에 없었다. 컨테이너의 열린 문 안으로 바깥의 빛이 쏟아져 들어갔고, 어두운 컨테이너 안쪽에 있는 것이 아주 잘 보였다.
어린아이들이었다. 5명의 아이들이 컨테이너 구석에 몰려서 눈물 젖은 얼굴로 겁에 질려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다. 벤체슬라스와 장 바티스트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벤체슬라스가 먼저 시작했다.
“개자식아.”
“나도 몰랐어!”
“개자식아!”
“나도 몰랐다고!”
800만 유로라는 현상금이 어디에 걸려있는지 몸으로 체감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성인일거라고 생각했다. 왜 그렇게 짐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상상해본적도 없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건가. 버릴 거야?”
“버리기는.”
버리기엔 계획 착수에 들어간 돈이 너무 크다. 800만이라는 돈을 상정하고 쏟아 부었기 때문에. 무기와, 입막음비와, 청소부를 고용하는 비용에, 중간 아지트로 사용할 곳과 이동수단으로 사용할 차량까지…….
거기다 위험요소는 따로 있다. 이 차는 호위되는 차량이었다. 누군가는 800만 유로라는 현상금이 지급되는 걸 거부하는 것이다. 이미 싸움을 걸었으니 중간에 끝낼 수도 없다. 돈을 챙기든가 그냥 개죽음만 당하던가. 벤체슬라스는 언젠가 장 바티스트의 목을 따겠다고 다짐했다.
이미 시간이 너무 지체됐다. 일 못한다고 동네북처럼 이리저리 걷어차이는 프랑스 경찰이지만 도심 한복판에서 몇 번이고 울린 총성에 대해서는 굼뜬 엉덩이가 누구보다도 가벼워질 것이다.
둘의 처음 계획과 비교해도 많이 틀어졌다. 이미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은 착각까지 들었다. 벤체슬라스는 컨테이너 문을 활짝 열고 아이들에게 나오라고 손짓했다. 아이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그 중에 가장 나이 많은 아이가 앞장서서 나오자 다들 그 뒤를 졸졸 따라 나왔다.
벤체슬라스와 장 바티스트는 5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데리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도주용 차량에 거의 가축수송 하듯이 아이들을 꽉꽉 눌러서 태운다음, 운전석과 조수석에 올라탔다. 벤체슬라스가 운전대를 잡았다.
장 바티스트가 수배한 차량이니만큼 본인이 운전하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금방이라도 일을 저지를 것 같은 벤체슬라스의 눈을 보자니 운전대를 내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쨌거나, 벤체슬라스의 매끄러운 운전 실력에 비하면 장 바티스트는 형편없다.
벤체슬라스가 열 받은 얼굴로 운전대를 쥐자 장 바티스트가 슬금슬금 눈치를 보더니 조용히 안전벨트를 맸다.
장 바티스트가 우려한 것과 달리 벤체슬라스는 운전에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탑승 가능 인원 이상을 태운 차가 무겁기도 했고 저게 800만짜리이기 때문에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딱히 어린아이이기 때문에 조심스러워한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상처입기 쉬운 800만짜리 고가품을 운송한다고 할까. 급하게 구한 싸구려 차임에도 불구하고 코너링마저 우아했다. 그들 뒤에서 경광등을 켠 르노 메간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경찰이다.”
장 바티스트의 중얼거림에 벤체슬라스가 백미러를 흘끗 보더니 엑셀을 강하게 밟았다. 의심차량을 쫓아오며 멈추라고 경고하던 경찰차는 눈앞에서 꽁지 빠지게 달아나는 차량을 보고 확신하며 사이렌을 울리기 시작했다.
“장 바티스트, 하나만 묻지.”
“뭔가?”
“이 차 방탄유리인가?”
“그럴 리가.”
그 다음부터는 용서 없는 운전이었다. 장 바티스트는 이를 악 물고 참아냈지만 불편한 자세로 뒷자리에 엉켜있는 5명의 아이들은 소리를 질러댔다.
운전대를 잡으면 그 사람의 본래 성격이 나온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한다면 조금 전의 섬세한 운전 솜씨와 비교해 완전히 반전되는 지금 상황은 벤체슬라스의 양면성을 보여주는 섬뜩한 증거기도 했다.
벤체슬라스는 차축이 찌그러지건 말건 닥치는 대로 돌진했다. 그래봐야 별 볼일 없는 엔진에다 한계에 다다른 무게 때문에 경찰차를 뿌리칠 정도의 속도는 내지 못했다.
그래서 벤체슬라스는 인도로 차를 몰았다.
도로 신호를 완전히 어기고 역주행까지 해가면서 도주하는 벤체슬라스에게 멈추지 않으면 발포하겠다고 경고까지 하던 경찰차는 시민들 틈으로 불쑥 파고드는 차량을 보고 마땅한 대응책을 찾지 못했다.
발포는 말도 안 되는 일이고 차량을 앞질러가서 바리케이트를 만들어 저지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자칫하면 시민의 목숨이 위험해진다. 그러나 빨리 선택해야한다. 어느 쪽이든 골라야한다면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저지하는 수밖에.
벤체슬라스는 경찰에게 충분히 판단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다행히 아직까지 한 사람도 치이지 않았지만 치이더라도 약간의 유감만을 느낄 터이다. 인도 위를 미친 듯이 내달리던 차가 옆 골목으로 방향을 홱 틀어 파고들어갔다. 뒤를 바짝 쫓던 경찰차는 무전기에 대고 도주차량의 경로를 시끄럽게 외치면서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벤체슬라스는 경찰이 총을 쏘지 못하게 일부러 방해하고 있었다. 장 바티스트야 어떻게 되든 알 바 아니지만 일단 자신의 목숨이 소중하고 뒷자리에 있는 실신 직전의 800만 유로짜리 아이들도 소중했다.
이미 경찰도 뒷좌석에 아이들이 타고 있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함부로 쏘지는 못하겠지만 운전자를 죽이는 것쯤이야 재고해볼 가치도 없는 문제일 터.
직선 도로에서 따돌리지 못한다면 도시의 지형지물을 활용하는 수밖에.
“계단이야!”
“알아.”
차가 전복될 위험을 무릅쓰고 계단을 덜컹덜컹 굴러 내려갔다. 뒷좌석의 아이들은 자동차 앞 유리로 보이는 시야가 무섭도록 기울어지는 것과 자신들의 엉덩이가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붕 뜨는 것을 느끼며 울부짖었다.
무식한 방법으로 계단을 통과하고 바닥에 착지한 차는 당장 휠 캡이 떨어져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밑바닥이 긁히고 망가져있었다. 뒤쫓아 오던 경찰 역시 영화에서나 볼 법한 도주 방법에 혀를 내둘렀지만 빙 둘러갈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벤체슬라스를 따라 계단을 달려 내려왔다. 그러나 벤체슬라스보다 속도는 좀 느렸다.
“자네 탓이야.”
벤체슬라스는 옆도 돌아보지 않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장 바티스트는 양 손으로 조수석 손잡이를 쥐고 신이든 악마든 누구에게든 간절하게 빌고 있다가 그게 무슨 황당한 소리냐는 듯이 벤체슬라스를 노려보았다.
“방탄유리로 해놨어야지.”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지!”
“800만짜리 요인을 납치하려면서 유리는 일반 유리로 해놨다고? 허술하기는.”
벤체슬라스는 경찰차가 다시 따라붙기 전에 큰 거리로 빠져나왔다. 여기서는 시위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팻말을 든 시위대가 경찰과 대치하고 서 있었고 방패로 벽을 만들고 일자로 선 경찰들은 묵묵히 시민들의 고함을 받아냈다. 시위가 벌어지는 곳 주변으로는 빠져나가지 못한 차량들이 정체되어 있어 혼란스러웠다.
경찰들이 질서의 끝자락이라도 붙잡고 통행을 원활히 유지시키려고 했지만 운전자들마저 창문을 열고 “이건 또 무슨 시위요?”하고 묻는 통에 도통 속도가 나질 않았다. 언제 그 자리에 퍼져도 이상하지 않을 도주차량 역시 그 행렬에 끼어들었다.
누가 먼저 시작했을까. 시위대 쪽에서 비명 같은 소음이 터져 나왔다. 경찰들이 일사불란하게 한 쪽으로 달려갔고 시위대도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면서 저항했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 다섯을 태운 차 한 대를 찾는다? 불가능한 일이다.
벤체슬라스와 장 바티스트는 800만짜리 아이들을 데리고 무사히 탈출했다.
건물을 빠져나온 사파이어는 벤체슬라스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계획대로라면 함께 도주하는 것이 맞는데, 중간에 꼬인 게 한두 개가 아니라서 작전이 변경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사파이어를 완전히 적진 한복판에 놓고 가지는 않았으리라는 기대가 조금이나마 있었다.
거리 어디에서도 벤체슬라스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사파이어는 단념했다. 그의 주인은 그를 버리고 갔다.
계획이 틀어졌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 이제부터는 자력으로 탈출해야한다. 이렇게 많은 시체와 증거들을 남겨놓고.
총격전이 벌어진 거리에는 이미 경찰차가 한대 와 있었다. 시위 진압으로 인원이 많이 빠지지 않았더라면 벌써 몇 대는 와 있었을 것이다. 나머지 차량은 조금 뒤에 도착한다. 경관 하나가 현장을 조사하고 있었다.
길거리에 널브러진 시신과 망가진 차량, 그리고 활짝 열린 채 내버려진 컨테이너를 보며 증거를 수집하고 있었다. 폴리스라인은 이제 막 치려는 모양이었다.
사파이어는 벤체슬라스를 찾으러 왔다가 경관과 마주쳤다. 절대 일반 시민이라고 오해할 수 없는 상태였다. 사파이어는 피칠갑을 한데다 양 다리에 무기까지 차고 있었기 때문에 경관은 그를 보자마자 총을 빼들었다.
“움직이지 마!”
경관의 총구가 부들부들 떨렸다. 살인사건이야 몇 번 봤고 시체도 본 적이 있기 때문에 담력은 어느 정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머리가 산산조각난 시신은 여태 본 적이 없고 눈앞에 피범벅이 되어 서 있는 유력 용의자도 본 적이 없다.
제일 무서운 건 눈이었다. 눈을 보면 알 수 있다. 경관은 자신이 끔찍한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게 아닐까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은 백업이 없다. 내 뒤를 지켜줄 아군이 없단 말이다.
살인귀가 확실해 보이는 눈앞의 남자가 다리춤에 찬 톱으로 자기를 끔찍하게 살해하지 않을 거란 보장이 있을까? 물론 내 손에는 총이 쥐어져 있지만 피가 뚝 뚝 떨어져 내리는 톱날이라는 건 생각보다 정신적인 충격을 크게 안겨준다.
사파이어는 경관을 빤히 보고 있다가 달려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경관이 뒤에서 멈추지 않으면 쏘겠다고 외치고 있음에도 그런 경고조차 염두에 두지 않는 것 같았다.
사파이어는 직선으로만 달리는 실수를 범하지 않았다. 쓰레기통을 뛰어넘고 물건들을 넘어뜨리며 장애물을 만들었다. 조준하기가 상당히 성가셔졌다. 가볍게 뛰어오르는 날렵한 점프력은 사슴과의 동물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경찰이 차마 총을 쏘지 못하고 욕을 내뱉으며 사파이어의 뒤를 쫓았다. 이제부터는 쏠 것이다. 제정신이 돌아왔기 때문에 매뉴얼대로 집행할 것이다. 경찰은 사파이어를 쫓아가면서 시야를 어느 정도 확보하자 그 자리에 멈춰 서서는 사격자세를 취했다.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무언가가 그의 목을 콱 졸랐다. 두꺼운 팔뚝이었다. 근육으로 된 바이스 같은 힘이었다. 경관은 총을 놓치고 목을 죄는 팔뚝을 뜯어내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혼절해버렸다.
도망치던 사파이어는 뒤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자 뒤를 흘끔 돌아보았다. 거대한 덩치의 에메랄드가 기절한 경관을 품에 안은 채 손을 흔들고 있었다.
에메랄드는 경관을 바닥에 내려놓고 사파이어에게 다가왔다.
“아직 탈출하지 못했을 줄 알았지.”
“왜 도우러 오지 않았지?”
“뒤처리하느라고.”
에메랄드가 어깨를 으쓱하면서 자신이 있던 옥상 지점을 가리켜보였다. 물론 거리에서 옥상 상황이 보일 리는 없지만 옥상 난간에 걸쳐진 사람 팔뚝이라든가 다리들을 보고 사파이어는 납득했다.
“장 바티스트는 네 주인과 먼저 튄 것 같은데.”
에메랄드가 가자는 듯이 고갯짓했다.
“항상 있는 일이지. 그들을 탓할 거 없어. 살아서 다시 만나면 없어지는 일이니까. 가자고.”
사파이어가 고개를 끄덕이곤 발걸음을 옮기려하자 에메랄드가 “잠깐.”하고 붙잡았다. 에메랄드는 어디서 구해왔는지 생수 한 병을 따서 사파이어의 머리 위에 콸콸 부어주었다. 핏물이 뚝뚝 떨어지던 머리끝과 얼굴에서 피가 씻겨나갔다.
몸을 씻기에는 당연히 역부족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드디어 사람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 에메랄드는 자신의 거대한 코트 안에서 딱 자신 것만큼 거대한 코트를 또 한 벌 꺼내더니 사파이어에게 둘러주었다.
“괜한 주의 끌고 싶지 않으면 말이야. 그 무기들은 안 보여주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에메랄드에겐 어색하지 않은 크기였지만 사파이어에게 입혀놓으니 어린아이가 아빠 옷을 걸쳐 입은 것처럼 우스꽝스러운 모양새가 되었다. 펑퍼짐한 품 때문에 확실히 코트 안에 무엇이 들어있을진 가늠할 수 없는 모양새가 되었다.
에메랄드는 전투 후의 피로 때문인지 정신이 살짝 나간 것처럼 나른해 보이는 사파이어를 이끌고 골목을 빠져나왔다. 에메랄드의 굵고도 울림이 깊은 목소리가 사파이어의 혼곤한 정신을 파고들었다.
“긴장하지 말라구. 인생은 긴장 푸는 거야.”
거리의 행인들은 똑같은 색깔과 똑같은 사이즈의 코트를 입고 지나가는 동양인과 흑인을 보면서 킬킬거렸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두 사람이 방금 수십 명을 죽인 살인자라는 것은 짐작하지 못했다.
사파이어와 에메랄드는 무사히 탈출했다.
이번 일을 처리하기 위해 장 바티스트가 물색해놓은 아지트는 아지트라고 불러주기 민망할 만큼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지하 주차장같이 넓은 공터 하나에 사무실 용도로 쓸 수 있는 방 하나, 욕실이 딸린 화장실 하나, 그렇게 끝이었다.
기물은 다 낡아빠져서 솜이 삐져나오는 커다란 소파 하나와 모서리가 다 벗겨진 커피 테이블이 전부였다. 딱 한 가지, 보안이 완벽하다는 것만 칭찬해줄만 했다.
차는 여기까지 달려온 게 신기할 만큼 아지트에 도착하자마자 완전히 퍼져버려서 다시는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원래부터 중고차를 어디서 싸게 구입한 모양이지만 그마저도 벤체슬라스가 잔인하게 학대해서 완전히 엔진 수명을 죽여 버린 것 같았다.
뒷좌석 문을 열자 아이들이 오들오들 떨며 밖으로 나왔다. 장 바티스트는 정신이 빠진 것처럼 보였다. 벤체슬라스는 오직 자신의 옷이 구겨진 것만이 신경 쓰이는 듯 했다.
“그래, 이런데를 아지트로 쓰려고 했다고…….”
“원가 절감을 해야 우리한테 돌아오는 게 더 클 거 아냐.”
장 바티스트가 벤체슬라스에게 대꾸했다.
“게다가 이만큼 인원이 많을 거라고 생각도 못했고. 머무는 시간도 적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아이들은 한 구석에 몰려서서 눈물 젖은 얼굴로 두 사람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벤체슬라스는 일단 그 자리에서 800만짜리를 내다버릴 수 없기에 데려오긴 했지만 막상 아지트까지 도착하고 보니 앞으로의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난감해졌다.
장 바티스트는 솜뿐만이 아니라 스프링까지 삐져나오기 시작한 소파에 가서는 털썩 누워버렸다. 토하지 않은 게 용했다.
아이들 중에 가장 나이 많아 보이는 아이가 다른 아이들을 감싸며 둘의 안색을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나와서는 벤체슬라스에게 말을 걸었다. 장 바티스트는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였다.
벤체슬라스는 팔짱을 낀 채 아이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나직하게 한 두 마디 대꾸했다. 대화가 꽤 길게 이어지는가 싶더니 벤체슬라스가 장 바티스트에게 다가와서는 누워있는 그를 발로 찼다.
“무슨 짓이야?”
“도버 해협까지 데려다 주기로 한 바냐 아저씨가 자네냐고 묻는데?”
“뭔 소리야, 그건 또?”
“모르니까 맞아야지.”
벤체슬라스가 정말 발로 밟을 기세였기 때문에 장 바티스트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아니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게끔 설명을 하라고. 일단 쟤네는 누구야?”
“몰라. 러시아어를 쓰는데, 벨라루스어도 섞여있군.”
자기들 얘기를 하는 것 같자 가장 나이 많은 아이가 다가와서는 벤체슬라스를 조심스럽게 톡톡 두들겼다. 벤체슬라스가 자신을 돌아보자 아이가 다시 속사포처럼 무어라고 말을 쏟아냈다. 장 바티스트가 통역을 바라는 듯이 쳐다보자 벤체슬라스가 입을 열었다.
“정치범의 아이들이군. 맨 처음 현상금 걸렸을 때부터 의심했어야하는데.”
“정치범이라고?”
“그렇지 않으면 어떤 미치광이가 800만이나 걸겠나.”
“정치범의 애들을 누가 원하는데?”
“우리가 알 바 아니지. 영국행 배에만 태우면 우리 일은 끝나는 거니까.”
그렇지만 장 바티스트가 이런 귀찮고 위험한 일에 무책임하게 자신을 끌어들였다는 사실을 용서할 수 없는지 벤체슬라스는 다시 한 번 발을 들었다. 장 바티스트는 벤체슬라스의 구두 밑창에 짓밟히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 때, 아지트 문이 열리고 에메랄드와 사파이어가 들어섰다. 궁지에 몰려있던 장 바티스트는 얼씨구나 하고 에메랄드에게 달려갔다.
“살아있었군! 정말 다행이야!”
“뭔 소리야?”
에메랄드는 유난히도 반가워하는 장 바티스트를 대놓고 의심했다.
“뭔가 이상한데, 장 바티스트.”
“이상하다니. 난 평소랑 똑같은데?”
“아닌 거 같은데. 뭔가 구린내가 나. 뒤에서 내 욕했어?”
둘이 투닥거리는 사이 사파이어는 거대한 코트를 벗어던지고 허벅지에 찬 무기까지 꺼내서 바닥에 툭툭 떨어뜨렸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습관이지만 피가 잔뜩 묻은 흉기가 바닥에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서 아이들은 떨며 고개를 돌렸다.
사파이어가 그 모습을 흘끔 봤지만 딱히 아이들을 위해 피 묻은 무기나 옷을 다른데다 숨겨야한다던가 그런 생각은 하지 못했다. 왜 그래야 하는지 이유도 알 수 없었다.
습관적으로 무기까지 모두 벗어서 바닥에 내려놓은 사파이어가 이제야 갈증을 느끼는지 주위를 둘러보았다. 테두리가 다 벗겨진 낡은 커피테이블 위에 생수 한 병이 놓여 있었다. 다가가서 그걸 집은 것도 습관이었고, 그대로 한 병을 다 비울 때까지 벌컥벌컥 물을 들이켠 것도 습관이었다.
숨도 쉬지 않고 500ml를 비워버리는 것은 어쨌든 흔한 광경은 아니었기 때문에 투닥거리던 장 바티스트와 에메랄드도, 구석의 아이들도, 팔짱을 끼고 선 벤체슬라스도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특히 벤체슬라스가 즐거워보였다.
사파이어가 물병 하나를 완전히 비우고 입을 닦으며 빈 병을 커피테이블 위에 내려놓자 벤체슬라스가 팔짱을 풀고 다가가서는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더니 핏자국과 먼지로 얼룩진 사파이어의 얼굴을 다정하게 닦아주었다.
“수고했다.”
그리곤 누가 보든 말든 상관없이 사파이어를 끌어당겨 부드럽게 입맞춤했다. 장 바티스트가 “야 이 미친놈아, 애들이 보고 있다고.”라고 말해도 전혀 귀에 들리지 않는 듯이.
벤체슬라스는 그대로 사파이어의 손목을 잡고 욕실이 딸린 화장실로 향했다. 뒤에서 장 바티스트가 “여기 애들도 있다! 하려면 너네 집에 가서 해!”라고 외쳤지만 벤체슬라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운데손가락을 보여주는 것으로 자신의 의지를 간결하게 표명했다.
벤체슬라스와 사파이어가 욕실 안으로 사라지자 나머지 사람들, 장 바티스트와 에메랄드, 그리고 아이들만이 굉장히 어색한 분위기를 공유하게 되었다.
정적이 감도는가 싶더니 아이 중 하나가 울음을 터뜨렸다. 슬픔이 아니라 무언가를 요구하는 울음이었다. 자신의 몸에 뭔가 불편한 것이 생겼기 때문에 그것을 해결해달라는 요청이었다.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보기도 전에 지린내가 풍겨 와서 장 바티스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들에 대해서는 딱히 아는 게 없는데……. 그는 에메랄드가 구원자라도 되는 듯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너 애 봐 본적 있냐?”
시설이 낡은 것 치고는 뜨거운 물은 제대로 나왔기 때문에 욕실 안은 금방 수증기로 가득 찼다. 벤체슬라스는 자기 손으로 직접 사파이어의 옷을 벗겨주었다. 대충 씻었던 머리와 얼굴도 제대로 씻겨주었고, 그의 피부를 더듬어가며 몸 구석구석을 씻겨주었다.
사파이어는 그의 손길이 은밀한 부위를 얼마나 노골적으로 만져대든 단 한 번도 저항하지 않았다.
오히려 안락함마저 느꼈다.
사파이어는 시킨 일을 잘 처리했기 때문에 보상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벤체슬라스는 그렇게까지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인물은 아니었다. 바깥에 아이들이 있는데 남자와 남자가 폭력적인 신음소리를 아무런 자제 없이 흘려댈 수는 없는 일이다.
콘돔이라던가, 뒤처리는 또 어떻고? 사파이어가 몸을 밀착해오며 열락을 바라자 벤체슬라스가 그의 머리를 감싸 쥐고 귓가에 입술을 대며 속삭였다.
“여기서는 안 돼.”
최대한 낮게 깐 목소리였지만 욕실 벽에 울려서 꽤 크게 들렸다.
“여기서는 참아. 그 대신 더 큰 상을 주지. 넌 오늘 잘 해줬다. 중간에 일이 틀어졌는데도 마무리를 잘 해줬어.”
고막에 닿을 듯이 가까운 위치에서 자신이 애정을 갈구하는 존재에게 칭찬받는다는 것은 그 어떤 마약보다도 강렬한 쾌감이다……. 사파이어가 달뜬 호흡을 내뱉으면서 아랫도리를 세우자 그 변화를 벤체슬라스가 알아챘다.
벤체슬라스는 아래를 슥 내려 보더니 사파이어의 단단히 발기된 성기와 고환을 부드럽게 쥐었다.
“이건 해결해야겠군.”
쏟아지는 따뜻한 물줄기 속에서 벤체슬라스는 입술을 빨아들이듯이 키스를 하며 사파이어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벽에 등을 대고 선 사파이어는 얌전하게 몸을 내맡기면서도 반쯤은 기대와, 또 반쯤은 불안을 담고 벤체슬라스를 올려다보았다.
벤체슬라스는 새가 모이를 쪼는 것처럼 짧은 키스를 몇 번이고 하더니 그 깊고 신비한 눈동자가 느른하게 잠기도록 가늘게 뜨면서 진한 키스를 해왔다.
혀와 혀가 얽히고 숨결과 숨결이 뒤섞였다. 사파이어가 동공이 풀리며 자신에게 매달려오는 동안 벤체슬라스는 아래쪽의 손놀림을 착실히 해나갔다. 서두르지 않고, 끈적이게, 따뜻하게…….
정지 상태로 굳어있던 허리가 슬금슬금 움직이며 앞뒤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사파이어가 하반신의 자극에 정신을 빼앗긴 사이 벤체슬라스는 다시 입 안의 사정에 집중했다.
이따금씩 무기를 잃고, 방법을 잃으면 이 입으로 사파이어는 적을 물어뜯는다. 적의 피가 쏟아지는 건 예사고 뜯다 만 살점이 어딘가에 끼어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개라면 정말 충실한 개다.
벤체슬라스는 단 한 순간도 눈을 떼지 않고 입을 탐했다. 집요할 정도로 눈동자를 들여다보면서, 치열을 훑고, 입천장을 핥으며, 혀를 빨아들였다. 성기를 잡아 흔드는 손은 갈수록 거칠어져서 스스로 허리를 흔들던 것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나중에는 손에 의해 하반신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위와 아래의 자극에 호흡이 달린 사파이어가 고개를 떼어내고 숨을 몰아쉬면서 신음을 흘리기 시작하자 벤체슬라스가 얼른 그 입을 틀어막았다. 벽이 얇단 말이다. 욕실에 울리는 소리는 바깥까지 들릴 것이다.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철벅철벅 살 부딪치는 소리는 어떻게든 무마할 수 있다지만 신음소리는 그럴 수가 없다. 명백한 본능의 소리이기 때문에.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가 내뱉는 작은 신음과 숨결 하나하나까지도 전부 집어삼켰다. 입을 틀어막은 채 사정을 재촉하면서 자신의 가장 충실하고도 사랑스러운 인형에게 최대의 애정을 쏟아 부었다.
그 한없는 따뜻함과 편안함에 잠겨, 사파이어는 허리를 부르르 떨면서 진한 정액을 토해냈다.
사정의 순간만큼은 걷잡을 수 없는 격렬한 떨림이 있었다. 터져 나온 신음은 입술과 입술 사이에 가로막혀 입 안에서 공허하게 사라졌다. 벤체슬라스는 호흡곤란이 된 사파이어에게서 입을 떼어내며 흥분으로 발갛게 달아오른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주었다.
사파이어가 풀린 눈으로 벤체슬라스를 가만히 보았다. 물에 젖은 눈동자가 음란하기 그지없었다.
벤체슬라스는 아직 사정의 여운에서 헤어 나오지 않은 사파이어를 끌어안고 등을 도닥여주며 속삭였다.
“나머지는 돌아가서. 알았지?”
나머지는 돌아가서 보상해주겠다고 했지만 벤체슬라스는 급한 불을 껐을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살인이라는 커다란 폭력 뒤에는 흥분이 타다만 불처럼 숨죽이고 살아있다. 제대로 물을 뿌려서 잔불까지 꺼주지 않으면 언제 다시 살아날지 모른다.
한 발 뺐기 때문에 사파이어는 얌전한 개처럼 온 몸을 내맡기고 있었지만 완전히 노곤노곤한 상태는 아니었다. 근육 세포 하나하나에 언제든 다시 발화할 수 있는 긴장이 완전히 숨이 끊어지지 않은 채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그렇지만 사파이어는 칭찬을 연료 삼아 버텨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도록 훈련시켰으니까.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를 완전히 씻기고 나서 직접 수건을 들고 몸의 물기를 닦아주었다. 샤워 후에 다시 입힐 옷이 없었지만 별로 개의치 않았다.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의 수치심까지 통제했기 때문에, 자신의 소유물이 벌거벗고 거리를 행보한다고 하면 수치심을 느낄 대상은 오히려 벤체슬라스인데 다행히도 벤체슬라스 역시 그런 의식은 희박했다.
여기서 중요한 차이점은 사파이어는 수치심이라는 걸 모르지만 벤체슬라스는 알면서도 무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벤체슬라스는 몸을 닦아준 수건을 사파이어의 하반신에 로인 클로스처럼 감아주었다. 별나기는 하지만 어쨌든 성기를 가린 시점에서 최소한의 도리는 한 것이다.
욕실 문을 열고 나오자 장 바티스트가 그들을 보고 말했다.
“믿을 수가 없군, 정말.”
“뭐가?”
“일말의 양심도 없는 놈이란 건 알았지만 애들이 있는데 어떻게 그런…….”
“안 했어.”
에메랄드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의 허리를 손으로 감고 끌어당기며 말했다.
“어쨌든 난 돌아가겠어. 내가 해야 할 일은 다 끝났겠지. 나머지는 당연히 자네가 알아서 처리하겠지. 현상금 지급인한테 아이들을 넘기든, 도버 해협 너머로 보내주든 알아서 하라고. 내 몫의 돈은 잊지 말고.”
“아직 안 끝났는데?”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당연히 현상금 지급인은 만나러 가야돼. 그 때까지는 우리가 이 애들을 맡고 있어야 돼. 그럼 어떻게 할 건데? 무슨 물품 보관소에라도 맡겨놓을까?”
“계획에 이런 건 없었어.”
“계획은 애초에 틀어졌잖나.”
벤체슬라스가 사파이어의 허리에 감았던 손을 풀었다. 세공사끼리의 논쟁이 격화되자 사파이어는 둘에게서 시선을 떼고 방 안을 둘러보았다. 곰팡내 나는 음습한 방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넓다. 용케도 파리 시내에서 이런 장소를 구했군.
구석에 몰려있던 아이들은 어른들이 자신들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는지 긴장이 조금 풀어져 있었다. 아이들은 반라의 사파이어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생물을 보듯이 흥미로운 눈으로 훑어보고 있었다.
악의가 담기지 않은 인종차별이었다. 아니, 저 눈을 인종차별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무지에서 비롯된 호기심이었다. 사파이어는 아이들의 시선을 담담히 마주보았다. 자신 역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존재는 인간종의 어린 개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몇 분 뒤에 에메랄드가 짐을 한보따리 들고 나타났다.
“다녀왔어. 팬티는 샀는데 옷은 못 사겠더라. 집에 우리 애들 입던 옷 있으니까 그거라도 몇 벌 가져올게. 우리 애들은 이제 작아서 못 입으니까. 이 중에 몇 명은 맞겠지. 오늘 먹을 빵이랑 물 사왔어.”
에메랄드는 가져온 짐을 커피테이블 위에 풀어놓다가 살벌한 분위기를 눈치 챘다.
“분위기 왜 이래?”
그제야 세공사들은 말싸움을 멈추었다. 벤체슬라스는 서늘한 눈으로 에메랄드가 가져온 짐을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그래. 그럼 확실히 해두자고. 이 아이들을 맡아놓는 기간은 최대 1주일로 해두지. 그 이상은 협력할 생각 없어. 혼자서 끌어안든 어디 팔아넘기든 알아서 하라고. 아이들 관리는 매일매일 번갈아가면서 한다. 오늘은 자네가 남아. 내일은 사파이어를 보내지. 지급인과 협상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자네가 나한테 약속한 금액을 줘야 해. 동의하나?”
“동의하지.”
“좋아.”
장 바티스트가 협상에 응하고 이야기가 원만하게 끝나자 벤체슬라스가 멍하니 서 있던 사파이어의 손목을 잡고 끌었다.
“난 돌아가겠어. 먹이를 줘야 하거든.”
벤체슬라스는 잘 알고 지내는 처리업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적당한 금액만 내면 아무 말 없이 사건 현장부터 시신, 증거와 공문서까지 처리해주는 처리업자는 이번에도 아무런 질문 없이 와서 벤체슬라스에게 차 키를 건네주고 갔다.
그는 벤체슬라스 옆에 서 있는 반라의 동양인에 대해서도 일절 묻지 않았다. 벤체슬라스는 두둑이 웃돈을 얹어주며 감사를 표했다.
사파이어에게 구해준 아파트는 보안이 썩 좋은 편은 아니다. 곧잘 소리가 울리기도 해서 벤체슬라스는 무슨 마음이 들었는지 방향을 바꿔 자신의 거처로 향했다. 성인 남자가 마음껏 울부짖어도 사생활을 침해받지 않는 곳이었다.
물론 목욕수건만 걸친 사파이어가 집 안에 들어설 때까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을 정도로 보안성이 강하기도 했다.
집 안에 들어서고 문을 닫자마자 벤체슬라스가 사파이어의 목욕수건을 벗겨 내렸다. 걸친 거라곤 그거 하나뿐이었는데 이제는 완전히 실오라기 하나 없는 나신이었다. 반면에 벤체슬라스는 에르메네질도 제냐 수트를 차려입고 있어서 둘의 대비가 도드라졌다.
물론 이리저리 구겨지고 사파이어를 씻기느라 많이 젖기도 한 정장이지만, 어쨌든 고급 정장이었다. 벤체슬라스는 블레이저를 벗어 대충 아무데나 던져두며 사파이어를 이끌고 침실로 향했다. 평소의 강압적인 모습과는 달리 꽤 신사적이었다.
침실은 따뜻한 상아색과 연한 푸른색의 인테리어로 깔끔하고도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 천장에는 이 집에 원래 달려있던 것이 분명한 샹들리에가 달려 있었고 벽지의 패턴은 플뢰르 드 리스였다.
이 방에서 가장 현대적인 느낌을 주는 것은 침대였는데 장식 없는 묵직한 갈색 원목의 토대가 틀을 이루고 있었고 그 위의 매트리스는 스프링소리도 나지 않을 만큼 푹신했다. 시트는 매일 매일 가는 모양인지 티 없이 밝은 하얀색이었다.
하지만 생활감이라곤 느껴지지 않았는데 누군가가 길게 거주하는 집이라기보다 사적인 용도로 몇 달간 빌리는 호텔 스위트룸 같은 인상이었다.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를 침대에 앉혀놓고 그 앞에서 느긋하게 셔츠 단추를 풀어 내렸다. 제대로 된 섹스를 이루는 요소 중에 여유로움이라는 항목이 있다면 지금의 광경은 나무랄 데 없이 만점을 받을 만 했다.
주인이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사파이어는 벤체슬라스의 벗은 몸을 관음적으로 훑으며 서서히 달아오르는 흥분을 즐겼다. 벤체슬라스는 그 관음적인 시선을 오히려 도발적으로 부추기며 사파이어의 이성을 음란으로 밀어 넣었다.
마지막 옷가지까지 벗어 내린 벤체슬라스는 침대 위로 한쪽 무릎을 걸치며 사파이어에게 몸을 밀착시켰다. 시선을 마주하고, 호흡을 교환하고, 입술을 겹쳐갔다. 정중하고 화려한 키스였고 혀를 섞는 순간부터는 내면의 짐승을 자제하지 않았다.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의 어깨를 짚고 결코 거칠지는 않게, 그러나 힘 있게 밀어서 사파이어를 침대 위로 쓰러뜨렸다. 그런 다음 사파이어가 다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밀도 높은 애정을 쏟아주었다.
벤체슬라스는 자신이 냈던 상처의 흔적, 그 희미한 흉터 하나하나까지 소중하게 쓰다듬고 핥아주면서 사파이어가 마음껏 응석부리도록 경계를 풀어주었다. 이것은 그래도 되는 포상이었다.
평소의 일방적이고 다급한 섹스와는 다른, 제대로 순서를 갖춘 정찬 코스 요리 같은 섹스에 사파이어는 익숙하지 못한 간질간질함을 느꼈다. 억지로 밀어붙여지는 쾌감이 아니라 서서히 달아오르는 쾌감이었다.
사파이어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될 때까지 애무하던 벤체슬라스가 어느 순간 사파이어의 한 쪽 무릎 아래에 손을 집어넣고 들어 올려 자신의 어깨 위에 맸다. 그리곤 제대로 밀착되도록 사파이어를 끌어당겨서 하반신과 하반신을 맞댔다.
둘 모두 발기한 상태였고, 성기는 맥박이 느껴질 정도로 생생하게 뜨거웠다. 벤체슬라스는 맞댄 성기를 느리게 문질러대면서 사파이어의 목에 키스마크를 남겼다. 문질러지는 성기와, 맞닿은 뱃가죽과, 가슴의 유두가 서로 비벼졌다.
사파이어가 단내 나는 한숨을 내쉬자 벤체슬라스는 침대 옆 협탁 서랍을 열고 그 안을 뒤져서 윤활유를 꺼냈다. 윤활유를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많이 짜낸 벤체슬라스는 그것이 잠시 따뜻해지도록 손에 쥐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사파이어의 항문에 발라가며 천천히 구멍을 풀기 시작했다.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상태였기 때문에 별다른 노력 없이 구멍은 금방 풀렸다. 오히려 손가락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듯이, 살아있는 생물처럼 뻐끔거리며 더 큰 것을 노골적으로 원하고 있었다.
벤체슬라스는 절대로 서두르지 않았다. 손가락을 두 개, 세 개로 늘려가면서 조금 무리하게 박는다 해도 찢어지지 않도록 충분히 풀어준 다음에야 자신의 것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사파이어는 한계에 다다른 숨을 헐떡헐떡 몰아쉬면서 고개를 내려 벤체슬라스가 자신의 것을 단단하게 세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서랍에서 콘돔을 꺼내 포장을 찢고 자신의 성기에 씌우는 모습까지도.
완전히 준비가 끝난 벤체슬라스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전에 준비를 해두라는 듯이 사파이어에게 짧게 입맞춤하고는 귀두 끝을 항문에 천천히 밀어 넣었다. 별다른 저항이랄 것도 없이 성기가 안으로 밀려들어갔다.
내장 안을 꽉 채우는 압박감이 고통이랄 것도 없이 바로 쾌감으로 치환돼서 사파이어의 뒷골을 울렸다. 사파이어가 고개를 뒤로 젖히고 푹신한 베개에 뒤통수를 비비며 만족감을 표시하자 벤체슬라스가 뿌리 끝까지 밀어 넣었다.
“아, 앗!”
“버거워?”
벤체슬라스가 한숨 같이 묻자 사파이어가 고개를 저었다. 평소에 받아들이는 크기와 똑같을 텐데 여느 섹스와는 다르게 버거운 게 확실하기는 했다. 이토록 공들인 흥분이 없었기 때문에 평소보다 내벽이 더 좁아져 있는 탓이다.
자기도 모르게 힘을 꽉 주고 주인을 쥐어 짜내면서도 자신의 몸이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없었다. 딱히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벤체슬라스는 계속 해나갔다.
벤체슬라스는 상반신은 고정한 채 허리만을 움직여 쿵 쿵 박기 시작했다. 절도 있는 움직임이었다. 박혀 올려지는 사파이어가 자꾸만 위쪽으로 밀려 올라가서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의 손가락에 깍지를 끼고 침대 시트 위로 부드럽게 찍어 눌렀다.
밀려 올라가지도, 저항할 수도 없게 된 사파이어는 하반신에 계속 가해지는 충격에 매 순간 시야가 점멸하듯이 애처로운 신음을 토해냈다.
몇 번인가의 피스톤질 끝에 사파이어는 허리를 비틀며 사정했다. 몸 안에 파고든 성기가 밀어내는 것처럼 정액이 밀려나와 배 위에 쏟아졌다. 너무 흥분해서 귀두 부분이 빨개진 성기가 파르르 떨리며 까딱까딱 움직였다.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가 호흡을 고르도록 잠시 기다려주었다가 다시 내벽을 묵직하게 비비고 문질러주면서 전립선을 자극했다. “아, 아.”하고 달뜬 소리를 내던 사파이어가 이제는 거의 끙끙거리는 소리를 냈다.
벌써 지쳤을 리 없다. 그의 몸 상태는 내가 잘 안다. 벤체슬라스 역시 몰려오는 사정감을 참으며 완급 조절을 하고 있었다. 창밖엔 아직 밤이 내려앉지 않았지만 벤체슬라스는 밤이 다 가도록 사파이어를 귀여워해줄 생각이었다. 벌을 줄 때의 용서가 없는 것과 같이 상을 줄 때에도 관대한 베풂이 있어야했다.
벤체슬라스는 어깨에 걸친 사파이어의 다리를 핥아주었다. 발목부터 시작해서 종아리 위까지 혓바닥으로 진하게 쓸고 올라가자 사파이어가 다리를 파르르 떨어대며 비명을 질렀다.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의 허리를 쓰다듬으며 진정시켜주고는 다리를 내려 자신의 골반을 감싸게 했다. 그런 후 고개를 숙여 사파이어의 쇄골을 물면서 다시 한 번 강하게 박아 올리기 시작했다.
한쪽 손의 깍지가 풀린 사파이어가 침대 시트를 쥐었다가, 밀어냈다가, 벤체슬라스의 팔뚝 밑으로 손을 집어넣어 그의 몸을 만졌다. 밀어내기도 하고 할퀴기도 하던 손이 자극을 이겨내지 못하고 다시 침대 시트를 구겨지도록 쥐어짰다.
등허리가 휘어지며 쾌감의 힘겨움을 참아내고 있던 사파이어가 눈물이 글썽거리는 눈으로 벤체슬라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만 할까?”
“더, 더…….”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에게 입맞춤하며 박아 올리던 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본인도 사정감을 더 이상 참지 못했기 때문에 한 번은 풀어내야 했다. 사파이어는 몸 안에서 더 커지는 성기를 느끼며 자지러지는 비명을 토해냈다.
더 이상은 압박감을 버틸 수가 없었다. 구멍이 찢어질 것 같았다. 지독한 쾌락은 지독한 고통과 구분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사파이어의 얼굴은 가장 큰 잘못을 저질러서 고문을 받을 때와 똑같았다.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의 고개를 감싸 쥐고 강하게 끌어당기며 그의 몸 안에 사정했다. 콘돔을 끼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하반신이 축축해지는 느낌이 들었지만 몸 안에 배출해냈다는 만족감은 다르지 않았다.
벤체슬라스는 숨을 고르며 느리게 성기를 비벼 문질렀다. 막 절정에 다다른 성기와 내벽이 움찔움찔 떨리며 서로를 자극했다.
섹스는 해가 지고 한밤이 다 되도록 계속되었다. 몇 번인가 사정하고 응석부리듯이 신음하고 비명을 토해내던 사파이어는 더 이상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평소에도 깊은 고민은 하지 않는 머릿속이었지만 이제는 아예 박히는 것 밖에 모르는 바보처럼 아둔해져있었다.
이 침대 위 세상에서는 화약도 칼날도 없고 의뢰와 의뢰인도, 시신도, 죽음을 앞둔 긴장도 없다. 내가 어떤 끔찍한 모습으로 죽게 될까, 어떤 고통을 당하고 어떤 지옥을 보게 될까 하는 막연한 불안감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순백의 세계였기 때문에 도리어 평화를 느꼈고, 그래서 죽고 싶었다.
죽으면 아무것도 느끼지 않아도 될 테니까.
이 절정이 깨어지지 않도록. 이 시간이 끝나지 않도록. 다시 현실로 내던져지지 않고 이 자리에서 모든 게 끝나도록. 차라리 벤체슬라스가 자신을 죽여줬으면 했다. 더 이상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가 없다.
살고 싶어 하는 건지, 죽고 싶어 하는 건지도 분간할 수가 없었다.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제대로 된 단어의 형태가 아니었고 어딘가 망가져 있었다.
남자와 섹스를 하고, 항문에 박히고, 전립선이 문질러져서 눈앞이 하얘지는 쾌감을 느끼며 계속 싸기만 하는 것을 반복하는 행위인데 왜 이것에 몰두하는 것일까. 내가 싼다고 해서 상대방이 싸는 것은 아닌데 왜 내 오르가즘이 상대방의 기쁨이 되는 것일까.
벤체슬라스는 확실히 의무감만으로 쑤셔주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팔 밑에 갇혀 그를 올려다보면 누구라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를 절정 지옥으로 몰아넣으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 역시 고문을 가할 때와 별반 다를 바 없는 표정이었다.
사파이어는 투명한 액 밖에 나오지 않을 때까지 쥐어 짜내져서 결국에는 피로감에 지쳐 혼절하고 말았다.
사파이어는 다음 날 점심나절이 되어서야 회복됐다. 벤체슬라스의 품 안에 갇힌 채 덜걱덜걱 흔들리던 것이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인데 눈을 떠보니 침대 시트도 새것으로 갈아 끼워져 있었고 몸도 끈적이지 않았다.
사파이어가 정신을 잃었을 때 벤체슬라스가 직접 욕조에 안고 들어가 씻긴 것일까. 겉 부분의 땀과 체액만 씻긴 것이 아니었다. 항문 사이로 불쾌하게 흘러나오는 액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미 안쪽 처리도 끝냈을까?
몸을 일으켜 앉아보니 허리가 찌르르 울리긴 했지만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눅진눅진하게 피로가 가라앉아서 어디든 머리만 대면 다시 곯아떨어질 것 같았지만 일단은 일어나야했다.
벤체슬라스는 침대에 없었다. 침대 옆 협탁을 보니 자리를 비운다는 메모가 남겨져 있었다. 사파이어에게는 어제 그 아이들을 돌보러 가라는 지령이 떨어져 있었다. 약도와 주소까지.
침대 발치에는 오늘 입을 옷이 잘 포개져 있었다. 벤체슬라스가 사려 깊은 성격이라곤 하지만 이 정도까지 세심한 남자는 아니다. 아마 가정부, 특히 이런 상황에 대해 입이 무거운 가정부를 고용했으리라.
옷은 검은 바지에 갈색 터틀넥이고 신발은 워커였다. 장비와 무기를 빼고 사파이어에게 지급하는 것들은 그리 비싼 물건들이 아니다. 벤체슬라스 본인은 유명 브랜드의 고급 수트나 예술적인 오트쿠튀르를 입으면서 자신의 작품이라고까지 칭하는 보석에게는 상표도 없는 싸구려 옷을 입히는 것이다. 소모품에게는 돈 낭비 할 필요가 없으니까.
몸에 맞고 보온 기능이 있으면 만족하는지라 사파이어는 자신이 받는 차별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배가 고프다는 것뿐.
침실을 나가니 긴 복도가 있었고 거실과 화장실을 헤맨 끝에 겨우 부엌을 찾았다. 부엌과 식당은 따로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 부엌 한 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대리석 아일랜드 카운터는 조리대이자 그 자체로 식탁으로 사용되는 것 같았다.
카운터 위에는 비닐 랩으로 싸놓은 닭 가슴살 샐러드와 단백질 쉐이크가 놓여 있었다. 사파이어에게 있어서는 사료와도 같은 식단이기 때문에 자신 몫의 음식이라는 걸 바로 알았다. 벤체슬라스는 가끔 변덕이 들면 먹기도 할 메뉴겠지만, 보통은 전문 쉐프가 차려주는 음식을 먹는다. 사파이어로서는 이름도 생소하고 맛도 가늠하기 힘든 것들이다.
사파이어는 카운터 한 귀퉁이에 앉아 묵묵히 식사했다. 맛은 무미건조하고 싱거웠다. 배가 차고 영양소가 있으면 그걸로 된 거겠지.
벤체슬라스와의 섹스를 빼고 삶의 전반을 이루는 모든 활동이 사파이어에게는 달성해야 할 하나의 과제일 뿐이었다. 전투 중에는 이따금 희열을 느끼기도 하지만 흥분이 주는 착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어쨌든 희열과 함께 공포도 느끼고 있으니까.
식사를 끝마친 후에 사파이어는 곧바로 어제의 아지트로 향했다. 대중교통을 사용하지 말고 차고에 있는 오토바이를 사용하라고 써져 있어서 확인해봤더니 세 대의 스포츠카 옆에 검은 두카티가 한 대 서 있었다. 헬멧은 안장 위에 올려져 있었다.
이 몸 상태로 오토바이의 엔진 진동을 버텨낼 수 있을까. 잠시 서서 스트레칭을 하며 가늠해봤더니 무리하지만 않으면 가능할 것 같았다. 사파이어는 헬멧을 쓰고 오토바이에 앉아 시동을 걸었다.
다른 부분에서 돈을 아낀다 뿐이지 무기와 장비는 최고급품으로 아낌없이 지원받는다. 사파이어의 존재 의의가 그것이니까. 최고의 무기, 최고의 실력, 최고의 서비스. 그것은 세공사 벤체슬라스의 자존심이기도 했다.
자신의 이름값과 명성을 위해 남들이 비웃을 정도로 사파이어에게 고가의 물건을 쓰게 해준다. 세공사 중에는 여러 싸구려 보석을 놓고 박리다매로 밀어붙이는 사람들도 있어서, 주머니칼을 간신히 면할 정도의 장비만 지급하고 자살특공대로 밀어붙이는 악질도 있었다.
벤체슬라스는 관리하는 보석의 수가 극단적으로 적은 대신 품질관리가 엄격하다.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으니 쓸데없는 야유를 듣지 않아도 되서 그거 하나만은 쾌적했다. 헬멧을 쓰고 있으면 인종은 알 수 없으니까. 거기다 두카티라니. 도로 위의 차량들이 부딪치지 않으려고 알아서 비켜주었다.
아지트에 도착한 사파이어는 두카티를 밖에 놓았다간 도둑맞을 거란 판단을 하고 건물 안에 놓기로 했다. 문을 열고 오토바이를 끌고 들어가니 여기저기 퍼져 있던 아이들이 놀란 듯이 한 구석으로 몰려 자기들끼리 똘똘 뭉쳤다.
여태까지 얼마나 많은 일을 겪었을까. 발작적이기까지 한 아이들의 두려움은 분명히 PTSD의 징후였다. 사파이어는 자신의 상처도 잘 모르기 때문에 타인의 상처는 당연히 이해하지 못했다. 안다고 해도 어떻게 도와줘야하는지도 모르겠고.
오토바이를 구석에 놓은 사파이어가 헬멧을 벗고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아이들은 낯선 침입자가 어제 본 동양인이라는 것을 알자 긴장을 풀었다. 아이들 중에 나이가 가장 많아 보이는 아이가 물어왔다.
“아저씨, 이름이 뭐에요?”
러시아어였다. 사파이어는 러시아어도 알아들을 수 있지만 대답까지 하려면 머리를 꽤 굴려야했다. 그래서 평소와 같이 대답했다.
“알아들을 순 있지만 난 영어로 말해.”
애석하게도 아이는 영어를 잘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도 인간의 말소리가 서로 오갔다는 점에서는 안도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아이는 상대방이 알아들었겠거니 짐작하고 멋대로 말하기 시작했다.
“전 사샤에요. 얘들은 절 사쉬카라고도 불러요. 아저씨는요?”
“사파이어.”
사파이어는 정직하게 대답했다가 일순 전기를 맞은 듯이 동요했다. 어떤 기억이 그의 뇌리를 섬광처럼 파고들었다.
사샤. 사쉬카. 아이의 웃음소리. 콧등에 주근깨가 있는 소년이 갈색 우샨카를 눌러쓰고 웃고 있는 모습. 해가 지는 황혼의 들판.
딱 거기까지였다. 사파이어는 자신이 방금 본 것이 무엇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사파이어에게 말을 걸었던 아이는 사파이어의 변화에 약간 겁을 먹었다.
“아저씨, 괜찮아요?”
사파이어는 간신히 현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심각한 얼굴로 대답했다.
“응.”
아이들을 돌보라고 했지만 정확히 뭘 하라고 지시한 사항은 없었기 때문에 사파이어는 자기들끼리 모여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내버려두고 비어있는 낡은 소파로 가 앉았다.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곰팡내 나는 물건이었다.
타일도 깔려 있지 않은 시멘트 바닥에는 어젯밤 아이들의 잠자리였는지 얇은 모포가 깔려 있었다. 사파이어와 벤체슬라스가 자리를 떠나고 나서 에메랄드가 몇 번 더 짐을 옮겼는지 아이들은 장난감까지 가지고 놀고 있었다. 장난감이라고 해봐야 쓰다 만 스케치북에 반 이상 닳아진 크레파스, 눈알이 하나 빠진 인형 정도였지만.
소파에 앉으니 잊고 있던 피로가 다시 몰려온다. 아이들은 얌전했고 이따금씩 서로 자기가 장난감을 가지겠다며 빽빽 소리 지르는 아이들은 사샤라는 아이가 단호하게 말해서 중재했다.
사샤는 14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였는데 제일 작은 아이가 6살쯤 되어보였으므로 이 무리 안에서는 그야말로 대장님 같은 존재였다.
사샤가 질서를 제대로 잡는 것을 확인한 사파이어는 몸을 쭉 펴고 소파 위에 길게 누웠다. 상반신만 간신히 눕히고 다리 부분은 팔걸이 밖에 걸쳐야 할 정도였다. 머리를 소파 시트에 대자마자 잠이 무겁게 몰려왔다.
까무룩 잠들었다가 깨었다가 하면서 불을 켜고 끄듯이 이성이 날아갔다가 제정신이 들었다가를 반복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호흡이 멎는 것 같은 순간을 느끼며 의식을 완전히 놓고 잠에 빠져들었다.
죽음 같은 평화는 30분밖에 가지 못했다. 사파이어는 아이들이 날카롭게 소리 지르는 것에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벌떡 일으켰다. 반사적으로 허리춤을 더듬었지만 오늘은 총도 칼도 가지고 있지 않다. 사파이어는 잔뜩 경계태세인 맹수 같은 눈으로 재빨리 아지트 안을 훑어보았다. 침입자의 흔적은 없었다.
외부의 요인으로 소리 지르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자 사파이어는 이제야 아이들의 상태를 살폈다. 5명의 아이 중에 둘은 멀찍이 서서 무서운 듯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고 사샤는 무엇에 화가난건지 팔짱을 낀 채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날카롭게 소리 지르는 것은 두 아이였다. 6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와 그보다 약간 더 큰 아이.
사파이어가 다가와서 두 아이들을 내려다보자 아이들이 논쟁을 멈추고 사파이어를 올려다보더니 몸을 움츠렸다. 한창 감정이 격해져 있었는데 그것이 이제는 방향이 바뀌어 사파이어에 대한 두려움으로 전염될 예정이었다.
남의 감정에 둔감한 사파이어라도 아이들이 “나 이제 울 거다.”하고 온 몸으로 내보이는 신호를 알아채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사파이어는 등 돌리고 선 사샤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지?”
영어를 잘 알아듣지 못하는 사샤라도 자기에게 말을 건다는 것쯤은 알았다. 사샤는 여전히 등을 돌린 채로 심통 난 듯 대답했다.
“난 몰라요. 알아서 하세요.”
좋아. 뭔가 갈등이 생겼군. 알아들었다. 사파이어는 사샤를 내버려두고 두 아이들을 관찰했다. 아이들은 눈앞의 무서운 아저씨가 시간이 지나도 자신들을 때리기는커녕 윽박지르지도 않자 마음이 놓이는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던 얼굴 표정을 풀었다.
아이들 사이에는 반쯤 채워진 스케치북이 있었고 두 아이의 손에는 원래부터 반쪽짜리였던 빨간색 크레파스가 반으로 똑 부러져 각각 손에 쥐여져 있었다.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다가 서로 이 색깔을 쓰겠다고 자기들끼리 싸운 모양이다. 옥신각신하다가 크레파스가 부러졌을 것이고. 그때부터 소리를 질러댔겠지.
사파이어의 시선이 증거에서 증거로 옮겨가며 추리하고 있다는 낌새를 느끼자 아이들이 서로 자기변호를 하려고 혀 짧은 소리로 열심히 서로를 일러바쳤다. 앞뒤도 안 맞는 말이고 일관성 있게 서로를 비난하기만 하는 말이었다. 사파이어는 혼란스러워졌다.
계속 서서 현장을 내려다보기 귀찮아져서 사파이어는 바닥에 앉았다. 무서운 아저씨가 순식간에 자기들보다 키가 낮아지자 아이들이 사파이어에게 찰싹 달라붙어서는 침을 튀겨가며 옛날 얘기라던가 자신의 취미에 대해서까지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쳤다.
아이들이 작은 새처럼 재재거리는 것은 상관없는데 신체적으로 접촉하는 것은 아무래도 불편했기에 사파이어는 아이들을 밀어냈다.
친밀감을 한껏 쌓아올리고 있다고 생각하던 아이들이 그 명백한 거부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곤 기어코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짜증 섞인 울음소리를 내자 뒤돌아 서 있던 사샤가 고개를 홱 돌리더니 두 아이 중 나이가 좀 더 많아 보이는 쪽을 품에 안고 방 저 쪽으로 갔다.
사파이어는 나머지 아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이는 빨개진 눈으로 크레파스를 고집스럽게 쥐고 있었다.
사파이어는 스케치북을 내려다보았다. 뭘 그리려고 한건진 잘 모르겠지만 온통 빨간색으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집으로 보이는 것도 있고 나무로 보이는 것도 있고 동물인가 싶은 것도 있었다. 모두 빨간색이었다.
일반적인 어른이 봤다면 어딘가 불편한 느낌이 들긴 하지만 아이들의 세계겠거니 하고 넘어갈 것이고, 아동심리학자가 보면 진지하게 치료 방법을 고민할 그림이었다. 사파이어는 둘 중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해결책을 찾았다.
사파이어는 한 쪽에 방치된 크레파스 상자를 들여다보았다. 쓰다가 만 것들인지 상태가 좋은 게 별로 없었다. 에메랄드의 자식들은 파란색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지 파란색 계통 크레파스는 멀쩡한 게 많았다.
사파이어는 색깔을 고르는 데 딱히 이렇다 저렇다 할 취향이 없었다. 자신의 손에 맞을 정도로 적당히 큰 것을 집어서는 스케치북 위를 죽죽 긋기 시작했다.
빨간 크레파스를 쥔 채 울고 있던 아이가 울음을 그치고 사파이어가 하는 짓을 가만히 보았다. 뭔가를 그리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낙서처럼 보이지도 않고. 빗줄기라고 해도 너무나 통일성 없는 파란선의 나열뿐이었다.
아이는 몇 분간은 흥미롭게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사파이어가 자신들의 그림을 망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그의 손에서 스케치북을 빼앗아갔다. 그리고 사파이어의 손에 있는 파란색 크레파스까지 빼앗아가서는 꽃과 사람과 태양을 그리기 시작했다.
저 쪽 구석에서 사샤가 울음을 달래주고 있던 아이도 그 광경을 보고는 사샤를 밀어내며 이 쪽으로 왔다. 아이는 이제 쓸모없게 된 빨간색 크레파스를 내던지고 상자를 뒤져서 노란색 크레파스를 찾았다.
두 아이는 언제 싸웠냐는 듯이 머리를 맞대고 스케치북을 가득 채워나갔다. 이따금씩 콧물 훌쩍이는 소리만 났다.
사파이어는 아이들의 그림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색감이 요란했다. 두 아이는 각자 자신만의 색을 골랐지만 그것 외에 다른 선택지는 또 모르는 것 같았다.
사파이어는 크레파스 상자를 뒤져 초록색 크레파스를 집어냈다. 그리고 아이들 사이에 껴서 한 귀퉁이를 칠해나가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그린다는 의도는 완전히 없어보였다. 아이들이 그어놓은 선에 초록색을 입히는 것처럼 보였다. 초록색 집, 초록색 태양, 초록색 나무, 초록색 꽃…….
구석에 있던 사샤도 화가 누그러졌는지 셋이 뭘 하고 있나 구경하러 왔다. 성인 남자 하나와 아이 둘이 스케치북 하나에 매달려 크레파스 몇 가지로 열중하고 있는 모습은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재밌는 광경이었다.
아이들의 창작물을 반 이상 채워나가던 사파이어가 어느 순간 크레파스를 놓았다. 더 이상 동참해줘야 할 필요도 못 느꼈고 피로를 더 크게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완전히 한 팀이 되었다고 생각한 아이들이 까르륵 웃으며 사파이어의 얼굴에 크레파스를 확 문질렀다.
사파이어는 화들짝 놀랐다. 제 때 얼굴을 뒤로 빼서 희생당한 부분은 코 끝 뿐이었다. 파란색 점이 생겨난 것처럼 크레파스 자국이 콕 찍혔다.
“못 써! 너네들 혼나!”
지켜보고 있던 사샤가 엄하게 나무랐다. 아이들은 대장님의 불호령 때문에 자신들의 행동이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사파이어는 소매로 코 부분을 슥슥 문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소파로 가 누웠다.
크레파스를 쥐고 있던 손이 초록색으로 물든 것이 눈에 들어왔지만 지금은 손을 씻을 기력도 없었다. 사파이어는 사샤가 아이들을 혼내는 소리를 들으며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사파이어는 누군가에게 흔들려서 깨어났다. 눈을 뜨니 백금발의 주인이 평소같이 냉정한 얼굴로 사파이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주 잘 자는군.”
사파이어가 일어나 앉자 벤체슬라스가 물었다.
“얼굴에 그건 뭐야?”
“예?”
“얼굴에 뭐가 묻었는데. 잠깐.”
사파이어가 얼굴을 만지려고 하자 벤체슬라스가 그의 손을 잡아챘다. 그러더니 초록색 크레파스 자국이 남은 손을 보았다.
“즐거운 시간을 보낸 모양인데.”
“지우는 걸 깜박 했습니다.”
사파이어는 벤체슬라스의 지적을 듣고는 얼굴과 손을 씻으러 화장실로 들어갔다. 벤체슬라스는 작게 혀를 찼다. 아이들을 돌보라고 했지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고 하지 말라고 정해놓진 않았으니까. 자신의 책임이다.
몇 분 뒤, 사파이어가 깨끗해진 얼굴로 나왔다.
“내일은 에메랄드가 올 거다. 교대로 하루씩. 알겠나?”
“예.”
어른들이 자신들을 여기에 놔두고 떠날 거라는 걸 안 아이들이 둘에게, 특히 사파이어에게 인사했다.
“그럼 내일 모레 봐요, 아저씨!”
“또 같이 놀아요!”
사파이어는 이렇다 할 감정을 느끼지 못한 채 아이들을 돌아보았고 벤체슬라스는 그런 사파이어를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벤체슬라스는 장 바티스트와 함께 현상금 지급인을 만나러 갔다.
접선장소는 하얏트 리젠시 파리 에투알 호텔, 에펠탑이 보이는 스위트룸이었다. 현상금 지급인은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흑인 여성으로, 에티오피아인이었다.
“에티오피아에서 태어난 거지 국적은 프랑스랍니다.”
기사단의 대변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성은 면도날 같은 인상을 주는 단발머리와 차갑고 이지적인 느낌을 주는 이목구비와는 반대로 웃을 때는 눈매가 봄날의 꽃밭처럼 따뜻해졌다.
머리칼 한 오라기조차 빈틈이 없게 턱 선에 맞춰 자른 머리가 퍽 인상적이었다. 저 찰랑이는 머릿결은 태어날 때부터 저랬을까 아니면 돈과 노력의 산물일까. 장 바티스트가 그런 것에 몰두하고 있는 동안 벤체슬라스는 다른 것에 집중했다.
“기사단이라면 구호기사단입니까?”
“글쎄요.”
여성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여성은 기사단이라고만 했지 어떤 특정한 이름을 말한 것은 아니다. 대리인이라고 본인을 소개하면서 변호사라고 직업도 못 박아뒀으니 “내 입장상 의뢰인의 정보를 함부로 알려줄 수 없다.”는 표시를 하는 것이리라.
뭐, 아무렴 어떤가. 벤체슬라스는 돈만 받으면 된다. 하지만 장 바티스트가 눈치 없게 끼어들었다.
“구호기사단이 800만씩이나 줄 리가 없잖아. 앰뷸런스는 굴려도 800만짜리를 돈으로 뿌리기엔 너무 눈에 띈다고.”
“시끄러워.”
“게다가 구호기사단이라면 NGO단체니까 청부업자 말고 좀 더 다른 기관에 문의하겠지. 인터폴이라던가 바티칸이라던가……. 많잖아. 정보기관들.”
여성은 두 남자가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면서 “알아서들 판단하시길.”하고 웃었다.
기사단이라는 이름을 표방하는 신비주의 단체는 차고도 넘치도록 많지만 그 중에서 800만 유로를 현금 지급할 수 있는 단체는 손에 꼽는다. 아니, 존재하기는 할까? 여성은 둘의 궁금증이 더 깊은 곳까지 파고들기 전에 중간에 흐름을 끊었다.
“법적인 용어로 설명해봐야 이야기만 복잡해질 테니 간단하게 말씀드리자면, 두 분이 가지고 계신 물건을 목표 지점까지 운송하시면 현상금이 걸린 목표가 달성되는 것으로 간주하고 현상금이 지급됩니다. 물건을 확실히 가지고 계시다는 것은 이미 확인했습니다.”
“그 물건이 어린아이들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까?”
“네, 물론이죠.”
“이거 무슨 인신매매입니까? 나중에 우리에게 올 피해 같은 건 없습니까?”
“인신매매라기보다 구출이라고 해둘까요. 좋습니다. 배경 상황을 모르시는 것 같으니 전부 설명해드리죠. 어떤 게 궁금하신가요?”
“기사단이라는 게 대체 뭡니까?”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다른 건요?”
“왜 아이들이죠?”
여성은 웃는 얼굴이었지만 긴 이야기를 준비하는 것인지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꼬고 있던 다리를 풀더니 테이블 위에 놓인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벨라루스의 정치 상황에 대해서는 알고 계신지요?”
“알렉산드르 루카셴코가 20년 넘게 집권하고 있는 건 알고 있습니다.”
“2017년도에 대규모집회가 열린 적이 있습니다. 루카셴코에 대한 하야 요구로까지 번진 시위죠. 경찰의 강경 진압으로 논란이 꽤 큰 사건이었습니다.”
여성은 있는 사실만을 얘기하고 있었지만 벤체슬라스는 대충 감을 잡았다.
“그래서, 그 관련 세력의 아이들이 저 애들이란 겁니까?”
“네.”
여성은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깔끔하게 대답했다.
“행방이 묘연한 사람이 많습니다. 국제사회는 증언이 필요합니다. 증언의 신빙성은 둘째 치고 그 숫자 자체가 부족하니까요.”
“아이들이 증인이 될 거란 말입니까?”
“글쎄요. 거기까지는 제가 대답할 사항이 아닌 것 같은데요.”
“그렇군요.”
아이들 신원에 대한 문제는 대충 해결됐다. “그런데,” 하고 여성이 덧붙였다.
“아이들을 획득하는데 상당히 방해를 받으셨을 걸로 예상합니다만.”
“정확히 아시는군요.”
“반대 세력이 있을 거라고 당연히 짐작은 하셨겠죠?”
“겪기 전까진 잘 몰랐습니다.”
“저희가 800만 유로를 내건 것처럼 아이들을 다시 본국으로 송환하는데 걸린 현상금이 있습니다. 의뢰인은 누구인지 저희도 자세히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괜찮습니다. 대충 짐작이 가는군요. 옆에 있는 강대국이겠죠.”
“저희도 그렇게 짐작하고 있습니다. 짐작일 뿐입니다.”
“그 나라에서 특수부대 요원은 투입하지 않는답니까?”
“그러기엔 너무 눈에 띄니까요. 저희가 세공사분들께 수배전단지를 뿌리는 이유를 생각해주시죠.”
정치적인 문제지만 대놓고는 해결할 수 없고 그래서 그림자의 손을 빌리겠다. 충분히 수긍이 가는 이야기였다.
“유감스럽지만 목표지점으로 신병을 인도하는데도 상당한 방해가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거야 그렇겠지. 이쪽은 800만을 걸었지만 저 쪽은 얼마를 걸었을지 모른다. 800만보다 더할 수도 있겠지. 그 정도 값어치가 있는 사안이라면. 한 정권이 끝장나버리는 이야기라면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금액일수도 있다.
“그 위험수당까지 합해서 800만입니다. 이 점은 확실히 해두어야겠군요.”
추가금액은 없다. 더 줄 수는 없다. 벤체슬라스는 여성이 내건 조건에 환한 미소로 응답했지만 속으로는 당장이라도 장 바티스트의 목을 졸라버리고 싶어서 어쩔 줄을 몰랐다.
800만이라는 정해진 예산 속에서 이미 사전 준비로 까먹은 돈이 있다. 여기서 앞으로 얼마나 더 수익을 까먹을지 모른다. 모든 일을 끝마치고 나면 손에 얼마가 들어올지도 모르고, 수익이 안 남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른다. 장 바티스트도 완전히 머저리는 아닌지 여성의 말들을 곱씹어보고 있었다.
어쨌든 자세한 계약내용을 확인한 것으로 한시름 놓기는 했다. 의뢰인의 실체가 유령이 아니고 확실하게 돈을 지불해줄 대상이 있기 때문에, 일만 제대로 끝마친다면 800만 유로라는 돈이 들어오는 것이다.
“힌놈의 골짜기.”
“예?”
“게헨나라고 불립니다. 몰록이라는 신에게 아이들을 산채로 불태워서 인신 공양하던 곳이죠.”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나려는데 여성이 뜬금없는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몰록. 몰렉. 소 머리를 한 신이요. 이 신에게는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제사를 드렸습니다. 어린아이요. 이 신의 형상은 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안에다 불을 지펴서 새빨갛게 달궈요. 신의 팔은 안쪽으로 굽어져 있는데, 이 동상이 빨갛게 달궈지면 아이를 그 손에 올린다음 신의 품 안으로 굴립니다. 아이는 굴러 떨어지면서 산채로 타오르지요. 아이의 비명소리를 부모가 듣지 못하게 하려고 악기 소리를 시끄럽게 냈다는군요.”
“무슨 얘기를 하는 겁니까?”
“가끔 보면 이 세상 자체가 불지옥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아주 환멸이 난답니다.”
여성은 피로한 표정을 지어보였다가 조금 전의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날카로운 눈빛을 해보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신비주의 단체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기사단은 적어도 아이들 시체로 세상을 일궈나가지는 않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아이들을 안전하게 데려다주세요.”
“돈만 주신다면야. 흠집 하나 내지 않고 보내드리죠.”
벤체슬라스는 단 하나의 거짓말도 섞지 않고 대답했다. 그것은 자신의 경력에 대한 자부심이기도 했다.
현상금 지급인과 대화를 끝낸 후, 벤체슬라스는 장 바티스트와 갈라졌다. 오늘은 사파이어가 아이들을 돌봐주기로 한 날이니까 장 바티스트는 바로 자신의 거처로 돌아갈 것이다. 에메랄드는 아마도 오랜만에 집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겠지.
벤체슬라스에게는 볼 때마다 적응이 안 되는 사항이다. 킬러가 가정이라니? 게다가 부인뿐이 아니다. 자식까지 낳았다. 그걸 묵인해준 장 바티스트도 어이가 없다. 본인이라면 사파이어에게 그런 자유를 줄까?
천만에.
보석은 세공사가 장인의 손길로 갈고 닦아낸 작품이다. 하지만 사물일 뿐이고 언제든 깨지고 망가질 수 있다. 때에 따라선 세공사 본인의 손으로 부숴버려야 할 때도 있다. 작품을 작품으로써 사랑해주는 것과 인격을 부여해주고 사랑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아지트에 도착하니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모여서 놀고 있었고, 사파이어는 구석에 있는 다 낡은 소파에 누워 잠들어있었다. 바보 같을 정도로 태평스러운 얼굴이었다. 거기다 얼굴에 파란 점까지. 크레파스로 찍힌 자국이다.
아이들과 뭘 했는진 모르겠지만 그 모습을 보니 심기가 썩 편하지는 않았다.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를 흔들어 깨웠다. 곤히 잠에 빠져있던 사파이어가 의식이 들며 멍한 눈으로 깨어나는 것은 평소의 날 서린 눈빛에서는 볼 수 없는 무방비한 순수함이 있었다.
그 순수함은 벤체슬라스의 얼굴을 인식하자 금방 깨졌다.
“아주 잘 자는군.”
사파이어는 주인에게 꾸짖음을 들은 개처럼 송구스러워했다. 거기까지는 별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사파이어의 손에 물든 초록색 크레파스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벤체슬라스는 인형이나 도구가, 개가, 마치 사람인양 구는 것이 싫었다. 그렇다고 800만 유로짜리 아이들에게 왜 이 남자를 이렇게 만들었냐고 화낼 수도 없는 노릇이고.
벤체슬라스가 사파이어를 데리고 아지트를 나설 때, 아이들이 사파이어에게 인사했다. 다음에 또 보자고. 사파이어는 무표정한 얼굴로 아이들을 돌아보았지만 벤체슬라스는 기분이 확 나빠졌다.
그는 언제나 아이들이 싫었다. 거리 조절하는 법도 모르고 불쑥 다가오는 것도 싫었고, 남의 인생을 함부로 침범해서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바꿔놓고 가는 게 싫었다.
무엇보다, 자기 개에게 함부로 먹이 주는 게 싫었다.
이틀이 지났다. 사파이어는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피로감은 딱히 없었다. 어제는 할 일이 없어서 하루 종일 잤기 때문에. 요 며칠 동안은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가지 않고 벤체슬라스의 저택에서 지내고 있었다. 어차피 그 아파트도 벤체슬라스가 준 것이다. 개인의 짐이랄 것도 없었고 돌아가고 싶다거나 미련도 없었다.
벤체슬라스와 딱 붙어 지내는 동안은 사생활이라는 게 없을 정도로 사소한 것 하나 하나까지 통제 당했지만 원래 사생활이라는 건 인격이 있는 존재나 누리는 특권이다. 사파이어는 오히려 예속되는 것에서 안정감을 느꼈다.
어제는 장 바티스트와 에메랄드가 아이들을 지키고 있었고 오늘은 사파이어가 아이들과 함께 있을 차례다. 계획이 약간 수정되었다. 오늘 오후나 내일을 기점으로 아이들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킬 것이다.
접선책에게 아이들을 넘기고 아이들이 무사히 바다를 건너면 그걸로 임무 종료. 세공사들은 돈을 얻고, 그들의 개들은 보상으로 뼈다귀 하나쯤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에메랄드는 가족을 부양할 만큼의 수익을, 사파이어는 침대의 보상을.
벤체슬라스가 아이들을 경호하라고 확실하게 못 박아뒀기 때문에 사파이어는 기본 전투복을 챙겨 입었다.
주요 부위에 방탄 패드를 이어붙인 검은 방탄복은 얼핏 보면 레이싱 수트와 별로 차이가 없기 때문에 이것만 입고 파리 시내를 돌아다녀도 패션 센스가 독특하다는 인상을 줄 뿐 모든 사람이 돌아볼 정도로 특이해보이진 않는다. 거기다 헬멧에, 근사한 두카티를 끼고 있으면 더더욱.
무장은 베레타 쿠거 한 정과 예비 탄창 한 개, 워커에 숨길 수 있는 군용 나이프 한 자루였다.
벤체슬라스는 꼼꼼했다. 이번에는 크레파스는 손도 대지 말라는 둥, 아이들을 보호하기는 하되 같이 놀지는 말라는 둥 세세한 지시가 있었다. 저번에 있던 일을 나무라거나 책잡지는 않았다. 그건 본인의 잘못이라고 인정했으니까.
하지만 이다음부터는 어중간하게 봐 줄 생각이 없었다. 물론 사파이어는 그의 명령을 어길 생각이 없었다.
아직 어둑어둑한 도로를 달려 아지트에 도착한 사파이어는 두카티를 세워놓고 아지트의 문손잡이를 잡았다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손잡이를 돌리는 감각이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사파이어가 손잡이에서 손을 떼고 뒤로 물러나는 순간 문이 폭발했다. 다행히 헬멧을 벗지 않은 상태였지만 사파이어는 폭발의 압력을 정통으로 맞고 뒤로 날아갔다. 터져나간 철제문이 사파이어의 얼굴을 찍을 뻔하다가 바로 옆에 쿵 떨어졌다.
사파이어는 귀에서 삐이이하고 울리는 소리를 느끼면서 잠시간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나 사파이어는 금방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서 자신의 몸에 붙은 불을 껐다. 바닥을 구르고 손발을 털어내며 불을 끈 사파이어는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상태로 총을 꺼내들고 장전하며 터진 문 안 쪽을 들여다보았다.
헬멧이 제대로 긁혀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헬멧을 벗어던진 사파이어는 연기에 콜록거리며 어두운 아지트 안을 재빨리 살펴보았다. 폭발로 인해 작은 불이 났고, 그 불은 아이들의 장난감이나 모포라던가 기타 쓰레기를 집어삼키면서 덩치를 키워가고 있었다.
안에 있어야 할 아이들은 없었다.
사파이어는 혹시라도 침입자가 숨어 있을까봐 경계 자세로 문 뒤와 그늘진 구석을 살피며 화장실, 욕실 안까지 살폈다. 어디에도 아이들은 없었다. 스위치를 눌렀는데도 전구에 불이 들어오지 않는 걸 보면 전기도 끊긴 모양이다.
사파이어는 재빨리 단서들을 찾아냈다. 일단 바닥. 아지트 문이 바닥을 거세게 긁은 흔적이 있다. 조금 전에 생겨났을지도 모르지만 확실한 건 문이 안 쪽으로 열리는 방향으로 긁혀있다는 것이다. 폭발은 바깥을 향했으니까 이건 이치에 맞지 않는다. 누군가가 강제로 침입한 흔적이다.
핏방울이 한 두 방울 떨어져 있었다. 아이들의 피 일까? 아니면 침입자?
구석에 있던 낡은 소파와 커피 테이블은 평소와 다른 형태로 비뚤어져 중앙까지 밀려나 있었다. 아이들이 저걸 밀고 바리케이드를 친 것일까? 그럴만한 힘이 있었을까? 아니면 침입자의 손길을 피해 이 좁은 공간 안에서 도망 다니다가 저렇게 된 걸까?
전기 배선은 확실히 끊어져 있었다. 날카롭게 잘린 단면을 보니 니퍼 같은 것으로 누군가가 끊은 것이 확실하다. 또 다른 단서가 있나? 조용히 덩치를 키워가던 불은 사파이어에게 더 이상의 시간을 주지 않았다. 사파이어는 불길을 피해 일단 아지트 밖으로 나왔다.
아이들이 자기 발로 나간 것은 아니다. 납치당했다. 벤체슬라스에게 이 사실을 바로 보고해야했다.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에게 휴대폰을 허용하지 않는 대신 이번 임무에서 사용하라고 무전기를 주었다. 무전기는 두카티의 좌석 안쪽에 부착되어 있었다.
하지만 사파이어가 무전기를 꺼내들기도 전에 총격이 날아왔다.
어두운 곳에서 눈 먼 총알이 사람을 한 번에 맞추기는 쉽지 않은 일이라 사파이어는 다행히 피해 없이 몸을 숨길 수 있었다.
지하주차장 같은 이 공간은 건물을 떠받칠 기둥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몸을 숨기기도 쉬웠지만, 총격을 가하는 상대 역시 어디에 숨어 있는지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사파이어는 베레타의 장탄수를 계산해보고 총격이 어디서 날아왔는지 방향을 가늠해보았다.
눈 먼 총알은 이번엔 두카티의 표면을 스치고 지나갔다. 근사한 검은 도장이 총알 때문에 할퀴어지면서 흉터 같은 자국이 죽 그어졌다. 그 자국의 방향으로 사파이어는 상대의 위치를 파악했다. 사파이어는 총알이 날아온 쪽에 대고 경고 사격을 하면서 조금씩 위치를 이동했다.
공격자는 두카티의 맞은편에서 세 번째 기둥 뒤에 숨어 있었다. 사파이어가 집요할 정도로 총격의 방향에 변화를 주지 않고 사격을 하면서 다가왔기 때문에 공격자는 사파이어가 지척에 닿았을 때야 그가 이동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중얼중얼 욕을 해대며 탄창을 새로 갈아 끼던 공격자는 눈앞에 불쑥 나타난 사파이어를 보고 비명을 질렀다. 사파이어는 바로 공격자의 무릎을 쏴버렸다. 사파이어에게 총구를 들이대던 공격자는 무릎이 날아가자 반사적으로 다리를 감싸 쥐며 총구를 아래로 내렸다.
사파이어는 그 손도 쏴버렸다. 이제 탄알이 다 떨어졌기 때문에 사파이어는 침착하게 예비 탄창으로 갈아 끼우면서 무력화 된 공격자를 워커발로 짓눌렀다.
“아이들은 어디 있지?”
공격자는 갓 스무 살을 넘겼을까, 아직도 얼굴에 솜털이 보일 듯이 어린 얼굴이었다. 스페인 억양이 강하게 묻어나는 프랑스어로 뭐라뭐라 외치는 것을 보니 이 녀석도 국경을 넘어온 뜨내기 청부업자임이 분명했다.
사파이어는 피가 쿨쿨 쏟아져 나오는 상처를 짓누른 발에 더더욱 힘을 주어 짓이겼다.
“아아악!”
“대답해라.”
“죽어, 이 새끼야!”
영어를 못 알아듣는 건 아닐 텐데 영 딴 소리를 하고 있기 때문에 사파이어는 주저 없이 놈의 다른 쪽 다리도 쏴버렸다. 여기서 살아나가든 그러지 못하든 놈은 앞으로 제 다리로 걸을 수 없을 것이다.
“다시 한 번 묻겠다. 아이들은 어디 있나.”
놈은 대답하지 않고 적개심 가득한 눈으로 사파이어를 노려보았다. 그 기개만큼은 인정해줄만 하지만 그것도 여기서 살아남을 때나 가치가 있는 것이지 죽고 난 뒤에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다.
사파이어는 이 뜨내기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판단했다. 사파이어가 심문을 그만 두고 이마에 총을 들이대자 용기 있는 척 하던 놈의 표정이 급변했다.
“자, 잠깐! 잠깐만! 죽일 필요는 없잖아!”
“넌 아는 게 없으니까.”
“아이들이고 뭐고 난 몰라! 난 널 잡으라는 지령을 받은 거라고!”
“나를?”
“수배가 내려졌으니까!”
수배? 이건 또 금시초문이다. 사파이어는 몇 초간 놈의 죽음을 유예해주었다.
“네가 벤체슬라스의 유일한 하수인이라는 그 놈이지? 네 목에 현상금이 걸렸다고! 나뿐만이 아냐! 널 죽이려는 놈들이 한 트럭일거다! 살려줘! 난 더 이상 못 움직인다고! 봐봐, 총알도 없어! 다리도 병신이고 손도 한 쪽 밖에 못 쓴다고! 눈 감아줘!”
“왜 나한테 현상금이 걸린 거지?”
“그거야 나도 모르…….”
탕 소리와 함께 놈의 고개가 뒤로 홱 꺾였다. 사파이어는 더 들을 게 없다는 듯이 놈을 죽여 버리고 시체를 발로 떠밀었다. 아까운 시간을 허비했다. 새로운 정보를 듣긴 했지만 아이들의 실종과는 어쨌든 관계없는 일이다.
벤체슬라스에게 얼른 이 사실들을 보고해야했다. 그는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사파이어의 짐작대로 벤체슬라스는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의외인 점은 사파이어가 예상한 것보다는 화를 덜 낸다는 점이었다. 사파이어의 보고를 들은 벤체슬라스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커튼을 걷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침 해가 떠올랐지만 오늘의 파리는 먹구름이 가득하기 때문에 음울한 빛이 건물들의 채도를 낮추고 있었다.
적들도 행동이 빠르군. 대장의 얼굴이 누군지 보고 싶다. 벤체슬라스는 나른한 목을 꺾으며 침대 밑에 보관해두었던 상자를 잡아당겨 꺼냈다. 나무판을 짜서 만든 상자 안에는 유탄발사기, 기관단총, 각종 권총, 탄창들, 시퍼렇게 날이 선 도검류가 들어 있었다.
무기들을 가늠해보던 벤체슬라스는 일단 샤워실로 가서 몸을 씻고 나왔다. 그런 다음 드레스룸에 들어가서 옷을 차려입었다. 검은 바지에 팔뚝까지 걷어붙인 하얀 드레스 셔츠. 그 위에 레그 홀스터와 전술 조끼를 걸쳤다. 손에는 검은 가죽장갑을 꼈다. 평소에는 풀고 다니던 백금발의 머리도 이번에는 포니테일로 모아 묶었다.
벤체슬라스는 신중하게 무기를 골라 무장하면서 사파이어에게 던져 줄 무기들도 챙겨 더플백에 담았다.
세공사가 휘하의 보석들만 믿고 자기 손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엉덩이 무거운 족속들이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거의 대부분의 세공사가 한 때는 누군가의 지령을 받는 킬러였다.
벤체슬라스도 그 중 하나였고 따라서 수익을 방어해야 할 때가 오면 그는 언제든 다시 현역으로 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우아한 것을 좋아했지만 수익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미친개가 될 수 있었다.
준비를 마친 벤체슬라스는 장 바티스트에게 연락을 하며 차고에 가서 벤츠를 꺼내 무기를 실었다. 시동을 걸자 세단의 묵직한 엔진음이 기분 좋게 몸을 울렸다. 벤체슬라스는 검은 선글라스를 끼면서 벤츠의 엔진이 제공하는 그 기분 좋은 떨림을 만끽했다.
사실은 기분이 굉장히 나쁜 상태였기 때문에 화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벤체슬라스는 비발디의 콘체르토를 켜고 느긋하게 엑셀을 밟았다. 검은 유령 같은 벤츠가 무기와 열 받은 사신을 태운 채 저택을 빠져나갔다.
“사쉬카 형아, 우리 어디 가는 거야?”
“가만있어, 콜랴.”
아이들 중에 누구보다도 겁을 먹은 것은 사샤였다. 너무 어린 아이들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하지 못하고 그저 주변 분위기에 덩달아 겁먹은 채 떨고 있었다. 자다가 납치당한 아이들은 눈물 자국이 얼룩진 얼굴을 문질러대면서 코를 훌쩍이고 있었다.
사샤는 덜덜 떨면서 납치범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아이들 중에 조금이라도 시끄러운 소리를 내려는 아이가 있으면 얼른 품에 안고 다급하게 달래면서 납치범들의 눈치를 보았다.
사샤 역시 사리를 판단할만한 나이는 아니었다. 그래도 감옥과 사형이 뭔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나이였다. 자신과 아이들이 정확히 어떤 식으로 희생되는건진 모르지만, 정치의 희생양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납치범들은 요 며칠간 본 아저씨들과는 완전히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이 사람들은 섬뜩했다.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지만 이들의 폭력은 훈련된 폭력이었다.
사샤는 아이들을 데리고 국경을 몇 개 넘으면서 훈련된 폭력이 어떤 사태를 일으키는지 너무 많이 봤다. 경찰도 그들을 도울 수 없다. 자신들을 보호해주겠다던 어른들도 이미 많이 죽어나갔다.
이번에 만난 사람들도 그렇게 됐을까? 우린 누구에게 의지해야하는 걸까? 이대로 죽는 걸까? 어떻게 죽게 될까? 아플까? 죽고 싶지 않다. 왜 우리가 죽어야 하는가? 이제 막 인생이 시작됐는데, 나도 언젠가 어른이 되어서 삶을 계속 살아가고 싶은데!
사샤는 자신이 울면 다른 아이들이 완전히 패닉 상태에 빠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울지도 웃지도 못한 채 이상한 얼굴로 아이들을 달래면서 속으로 기도했다. 누구에게든. 누구에게든. 신이든, 악마든, 그 누구에게든.
사파이어는 긁힌 두카티를 끌고 불타는 아지트로부터 한 블럭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누군가가 신고를 했는지 벌써 소방차가 달려와서 불을 끄고 있었다. 그런 사파이어의 옆으로 검은 벤츠 한 대가 미끄러지듯이 다가와 서더니 운전석의 창문이 열렸다.
벤체슬라스가 사파이어를 흘끗 보면서 말했다.
“뒷좌석 문 열고 가방 꺼내.”
사파이어는 벤체슬라스의 말 대로 뒷좌석의 문을 열고 무기가 가득 든 더플 백을 꺼냈다. 열어보지 않아도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잘 알 수 있을 정도로 무거웠다.
이른 아침인데다가 시민들의 관심은 온통 화재진압 현장에만 쏠려있었기 때문에 사파이어는 남들의 주의를 끌지 않고 벤체슬라스가 가져온 무기로 재무장 할 수 있었다.
“합류합니까?”
“따로 떨어진다. 위치는 지정해주지. 아이들은 무조건 살아있어야 한다. 다칠 것 같으면 네가 다쳐.”
“알겠습니다.”
“방해하는 게 있으면 다 죽여 버려.”
그 때, 장 바티스트가 빨간색 푸조를 타고 나타났다. 옆자리에는 에메랄드가 타고 있었다. 빨간색이라고는 하지만 거의 핏빛에 가까울 정도로 진하고 낮은 색이었다. 장 바티스트 역시 무장상태였고 에메랄드는 한창 총기를 손질하고 있었다.
“페리도트를 불렀어. 지금 오고 있어.”
장 바티스트가 말했다. 벤체슬라스는 고개를 끄덕였고, 사파이어는 그게 인명이라는 것을 대충 짐작했다. 장 바티스트는 정말 헐레벌떡 달려온 것인지 정신이 없어보이다가 이제야 벤체슬라스가 어떤 상태인지 파악하는듯했다.
“많이 열 받은 모양인데. 무서운 걸.”
“자네가 보초만 잘 섰어도 이런 일 없잖아.”
“내 탓인가. 에메랄드가 있을 땐 아무 일 없었다고. 너 몇 시에 들어갔지?”
“12시 넘어서. 마누라가 바가지 엄청 긁었다고.”
“그 때까지는 경비가 있다는 걸 안거야. 새벽에 급습해서 데리고 갔겠지.”
어쨌든 일이 터지고 난 뒤에 서로를 탓해봐야 쓸모가 없다. 벤체슬라스는 길어지려는 사담을 중간에서 끊고 말했다.
“공격이 들어올 건 예상하고 있었지. 그래서 아이들 옷에다 추적기를 달아놨어.”
“언제?”
“둔감해빠진 자네가 모를 때.”
“애들이 떼버릴 수도 있잖아.”
“5명 모두에게 붙여놨어.”
아이들이 옷을 갈아입는다던가, 위치추적이 안 되는 곳으로 끌려갔다던가, 5명이 뿔뿔이 흩어진다던가 하는 가능성은 있었지만 지금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보단 나았다.
“그래서 계획은?”
“가서 족치고, 800만을 다시 회수한다.”
벤체슬라스는 그 말을 끝으로 엑셀을 밟아 선두로 달려 나갔다. 그 뒤를 빨간 푸조 한 대와 두카티 한 대가 따랐다.
아이들의 위치는 파리 북쪽에 있는 생드니로 찍혔다. 이동 경로를 보니 공항으로 가려는 모양인데 지금은 잠시 멈춰있는 상태였다.
벤체슬라스의 지시로 중간에 사파이어가 갈라졌고, 시내 안으로 진입해서는 장 바티스트와도 갈라졌다. 벤체슬라스는 신호가 삑삑거리며 울려나오는 창고 앞에 차를 멈춰 세웠다. 그리고 MAC-11을 두 자루 꺼냈다.
바깥에서 쏘기엔 명중률이 떨어지는 기관단총이지만 실내에서 누군가를 갈겨버리기엔 이만큼 적절한 것도 없다. 총알이 빠른 속도로 떨어질 것을 대비해 잊지 않고 이사카 M37도 꺼내 등에 멨다. 산탄총의 탄알은 넉넉히 챙겼다.
적이 얼마나 될 진 모르지만 총알이 부족한 것보다는 남아도는 게 나으니까. 부무장으로는 람보가 가지고 다닐법한 큼지막한 보위 나이프를 챙겼다.
사파이어는 다른 쪽에서 창고로 돌입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벤체슬라스가 가져다 준 무기는 대우 정밀 USAS-12와 우지 한 자루, 예비탄창 각각 두 개, 그리고 다목적 손도끼였다. 사실상 무기보다는 총알이 많았다. 사파이어가 오늘 아침에 가지고 나간 무기가 있기 때문에.
사파이어의 체구로는 이걸 다 들었다간 날렵하게 움직이기는커녕 거북이와 속도를 겨뤄야 할 정도로 느려질 것이다. 지금처럼 투입되는 아군이 많아야만 가능한 무장이었다. 사파이어는 무기를 몽땅 챙긴 후에 명령이 떨어지길 기다렸다.
에메랄드와 장 바티스트는 백업이었다.
“저격 진짜 오랜만에 해보네.”
“장 바티스트.”
“응?”
“나도 방탄 수트 줘.”
“뭔 소리야, 뜬금없이.”
“나한테 코트만 주는 건 양심적으로 너무하지 않냐?”
장 바티스트는 에메랄드가 또 헛소리를 하고 있다고 웃어넘기며 스코프를 들여다보았다. 벤체슬라스와 그 맞은편의 사파이어가 막 창고 안으로 돌입하려하고 있었다. 아직 수상한 움직임은 없었다. 경계를 풀지 않고 주변을 살피는데 핸드폰이 경쾌하게 울렸다.
“여보세요.”
장 바티스트는 스코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전화를 받았다. 그리곤 씨익 웃었다.
“응. 돌입해.”
나무 상자와 컨테이너로 가득 찬 창고 안은 쇳덩어리로 만든 미로 같았다. 복면을 쓴 남자들은 돌아가면서 순찰을 하며 늦은 아침 식사를 통조림으로 때우고 있었다. 남자들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웃기지도 않는 농담을 하고 카드놀이를 하면서 때때로 음담패설을 던졌다.
돌연 그들의 머리 위로 벼락이 내리쳤다. 총성이 드르륵 드르륵 울리면서 첫 번째 희생자가 바닥에 쓰러졌다. 늘어져 있던 남자들이 후다닥 일어나며 무기를 챙기고 총격에 대비하라고 소리쳤다.
그 목소리 중 몇 개가 벌써 사라졌다. 남자들은 미로 같은 컨테이너 사이에 몸을 숨기며 침입자의 위치를 가늠했다. 소리가 울려서 어디서 들려오는지 알 수 없었다. 앞쪽이라는 건 확실했다.
모두의 주의가 앞으로 쏠려있는 사이에 뒤에서도 총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앞에서 들려오는 기관단총의 소리와는 다른 묵직한 소리였다. 앞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다다다닥 하는 소리라면 뒤에서는 퉁 퉁 퉁 퉁 하는 소리랄까.
“둘로 갈라져!”
남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뒤에 대고 명령을 내린 남자가 다시 앞을 돌아보았을 때, 하얀 얼굴에 핏방울이 잔뜩 튄 백금발의 남자가 송곳니를 드러내고 웃으며 그의 턱에 총구를 들이댔다.
놀라서 숨을 들이키는 순간 남자의 머리가 날아갔다. 머리통이 터지면서 뇌수가 튀고 남자가 쓰러졌다.
벤체슬라스는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을 도륙하면서 계속 치고 나갔다. 너무 약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벤체슬라스의 반대편에서 진입하고 있는 사파이어는 앞쪽의 사신에 겁을 집어먹고 뒤로 도망쳐 나오는 조무래기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연사되는 샷건의 위력은 적들에게 지대한 공포를 심어주었다. 눈앞에서 사람이 작은 파편으로 조각나는 것을 본 남자들이 패닉 상태에 빠져서 도망 오던 쪽으로 다시 돌아가다가 기관단총을 맞고 죽던가, 바닥에 주저앉던가 하다가 모두 죽임 당했다.
남자들은 모두 군사 훈련을 받았지만 실전에서 사람을 죽여 본 숫자는 세공사 측이 훨씬 많다.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에게 일부러 잔인하게 죽이라고 명령했다. 겁을 줘서 상대를 공황상태에 빠뜨리는 것은 좋은 전략이다.
물론 훈련받은 인원인 만큼 금방 공황상태를 극복할 것이다. 그러니 이런 작전은 초반에 빠르게 쓸고 나가는 게 중요하다.
마치 어장의 물고기를 몰듯이 앞뒤로 학살을 해가며 전진하던 둘은 중간 지점에서 딱 만났다. 창고 안의 모든 사람이 죽었고 둘은 가져왔던 무기의 절반을 사용했다. 벤체슬라스는 쓸모가 없어진 기관단총을 내버리고 등에 맨 샷건을 꺼내들었다.
“그건 이제 쓰지 마라.”
벤체슬라스가 사파이어의 총을 보며 말했다. 사파이어는 아직 총알이 남아있기에 USAS-12를 바닥에 내버리지 않고 등 뒤로 돌려 찬 다음 우지를 꺼내들었다.
벤체슬라스는 탐지기를 꺼내 아이들의 위치를 다시 확인했다. 분명히 이 창고 안이었다. 컨테이너 안 어딘가에 숨겼을까? 벤체슬라스와 함께 신호를 찾아가던 사파이어가 문득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곤 워커발 끝으로 바닥을 톡톡 두들겨보았다. 소리가 달랐다.
사파이어가 바닥을 덮은 방수포를 걷어내자 문고리가 달린 비밀 문이 하나 나타났다. 문고리를 잡아들어 올리니 빛줄기 하나 없는 캄캄한 어둠 속에 아이들이 있었다.
아이들은 눈물 자국으로 엉망이 된 얼굴로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사파이어의 얼굴을 알아본 아이들이 구세주를 만난 듯 손을 위로 뻗었다.
“아저씨! 아저씨!”
“꺼내줘요!”
사파이어가 벤체슬라스에게 허락을 구하듯이 돌아보자 벤체슬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파이어는 망설이지 않고 아래로 곧장 뛰어내리더니 아이들을 품에 안고는 한 명씩 위로 올려주었다. 아이들은 위로 올라가는 사다리를 붙잡고 한 명씩 기어 올라갔다.
사파이어가 마지막으로 사샤를 올려주려고 하자 사샤가 사파이어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리고 울음을 터뜨렸다. 걷잡을 수 없는 오열이었다.
“나, 나 죽는 줄 알았어요……. 죽는 줄 알았어요. 너무 무서웠어요…….”
사파이어는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사샤를 떼어내고는 사다리를 붙잡게 도와주었다. 사샤는 진정하지 못한 채 어깨를 들썩이면서 한참을 울었다. 사파이어가 도움을 구하듯이 벤체슬라스를 올려다보자 벤체슬라스가 주변을 경계하며 사샤에게 말했다.
“지금 안 올라오면 진짜 죽는다. 머리가 돌아가면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알 텐데.”
눈곱만큼의 배려도 없는 발언이었지만 잔인한 만큼 사실이었기 때문에 사샤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위로 올라갔다. 아이들은 여태까지 자신들의 지지목이었던 대장이 울음을 터뜨리자 걱정 되서 “형 괜찮아?”하고 모여들었다.
한숨 돌릴 틈도 없었다. 바깥에서 총성이 울렸다. 천둥같이 하늘을 울린 한 발의 소리는 잠시 텀을 두더니 드드득 드드득하고 응전하는 소리와 함께 몇 번이고 울렸다. 장 바티스트가 저격하는 소리다.
바깥에 새로운 무리가 나타난 모양이다. 아니면 매복하고 있다가 기습할 생각이었던지. 창고 내부의 인원이 너무 약했던 것의 의문이 풀렸다.
“목표는 나였군.”
벤체슬라스는 실소했다. 사파이어의 목에 현상금이 걸렸다는 것은 최종적으로 벤체슬라스를 잡겠다는 소리다. 그는 지금 보석을 단 한 개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동맹조차 없는 세공사니까.
만약 장 바티스트와 손잡고 일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장 바티스트도 벤체슬라스를 죽이려고 들었을지 모른다.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지금 반대편에 선 사람들 중에서도 벤체슬라스와 사이가 나쁘지 않은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들은 딱히 악감정 때문에 그 쪽에 선 게 아니다. 돈 때문이다. 모두가 공유하는 단 하나의 가치.
벤체슬라스를 증오하는 건 현상금을 내건 물주다. 누구의 미움을 샀을까. 짐작 가는 곳은 많다. 글쎄, 미움이라기 보단 열등감의 발로라고 봐야 옳겠지. 사파이어가 죽으면 벤체슬라스는 어쨌든 당장 혼자가 된다. 사파이어의 목을 따겠다는 것은 즉, 벤체슬라스에 대한 도전이다.
800만 유로짜리 아이들은 덤으로 얻는 수익이고. 어느 쪽이든 쏠쏠하게 벌어들이는 장사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로 짐작하건데 적은 한 둘이 아니다. 아주 작정하고 몰려온 모양이다. 고립되면 어쨌든 죽음뿐이다. 창고에 가둬놓고 불을 질러버리는 수도 있으니까. 행동을 빨리 해야 한다.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를 시켜 뒤쪽으로 나갈 수 있는지 확인했다. 사파이어가 뒤를 확인하러 간 사이 벤체슬라스는 아직도 눈이 멍한 사샤에게 다가가서 힘껏 따귀를 갈겼다.
“정신 차려.”
사샤는 뺨을 감싸 쥐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벤체슬라스를 올려다보았다.
“너흰 800만짜리란 말이다. 여기서 죽으면 곤란해. 진짜로 죽고 싶은 거면 저놈들을 기다릴 거 없이 내가 당장 죽여주지. 어떻게 할 거냐? 선택해.”
“시, 싫어요.”
“똑바로 대답해.”
“죽기 싫어요! 죽기 싫다고! 죽고 싶지 않아! 살고 싶어!”
“그럼 똑바로 행동해. 네가 정신 놓으면 나머지 애들도 다 죽는다. 봐라. 보이냐?”
벤체슬라스는 사샤의 머리채를 잡고 아이들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아이들이 “아저씨 나빠요! 형아 괴롭히지 마요!”하고 항의하는 소리를 무시한 채, 벤체슬라스가 사샤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저 애들이 전부 다 죽는단 말이다. 네 손으로 죽이는 거야. 고개 돌릴 생각 하지 마라. 네 선택이야. 네가 대장이라고.”
“살 거야! 살 거야! 살 거라고! 이 악마!”
사샤가 증오에 차서 내뱉자 벤체슬라스가 피식 웃었다. 그의 800만짜리는 아직 쌩쌩한 모양이다.
“지옥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면 악마를 잘 따라오는 게 좋을 거다.”
그 때, 사파이어가 돌아왔다.
“뒤는 아직 깨끗합니다.”
“앞장서라. 내가 엄호하지. 내 명령 기억하나?”
“아이들이 다칠 것 같으면 제가 희생하겠습니다.”
“좋아.”
둘의 눈치를 보던 사샤가 입술을 꽉 깨물더니 옷자락을 쥐면서 말했다.
“나, 나한테도 총, 한 자루, 주세요.”
사샤는 독기를 가득 담아 벤체슬라스를 노려보았다.
“나, 나는, 짐이 아냐. 나한테도 총 줘요! 쏠 줄 알면, 되잖아! 이 아저씨, 아니 이 형은 우릴 구해줬단 말이야! 난 짐짝 아냐! 누군가를 희생시키기 싫어!”
“웃기고 있네. 800만짜리가.”
벤체슬라스가 사파이어의 옷깃을 확 잡아끌더니 그대로 입술을 물어뜯듯이 키스했다. 입 안에 혀를 집어넣어 마구 헤집는데도 사파이어는 저항하지 않았다.
사샤는 그 광경을 보고 크게 놀랐다. 내 소유물이라고 낙인을 찍어대며 과시하던 벤체슬라스가 사파이어를 떼어내고 입을 닦으며 깔보듯이 말했다.
“이건 내거야. 내 물건이라고. 내가 하라는 대로 하는 인형이야. 내가 살라고 하면 살고 죽으라고 하면 죽는 거야. 너도 짐짝에 불과해. 살려주니까 앞뒤 분간 못하고 기어오르는가본데, 너희들 앞으로 걸린 현상금이 없으면 지금 당장 여기서 죽든 말든 아무래도 상관없어. 너흰 돈 때문에 살아있는 거야. 돈. 그게 다야. 그러니까 입 다물고 시키는 대로 해.”
사샤가 이를 빠드득 빠드득 가는 소리를 들으며 벤체슬라스는 보란 듯이 비웃었다. 사샤는 자신이 어리고 아무런 힘도 없다는 것을 이렇게 처절하게 느껴본 적이 없다.
사샤는 고개를 숙이고 분을 삭이다가 아이들을 한데 모아 손을 잡았다. 어쨌든 아이들을 통솔하는데 있어서 이 자리에서 사샤보다 능숙한 사람은 없었다. 사샤가 흐트러지면 다른 아이들이 위험해진다.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그 맞는 말을 이런 표독스러운 악마에게서 들었다니 몸이 떨릴 만큼 화가 났다.
“시간이 너무 지체됐군. 가지.”
벤체슬라스의 명령에 사파이어가 앞장서서 길을 뚫고 나가기 시작했다. 중간에 아이들이 섰고, 그 뒤를 벤체슬라스가 엄호하며 따라갔다.
창고 밖으로 나오는 순간 사파이어는 공격받았다. 창고 문 옆에 착 달라붙어있던 그림자가 확 덮쳐들어서 사파이어에게 칼을 찔러 넣었다. 기습을 받은 사파이어는 그림자와 얽혀들며 몸싸움을 벌였다. 그림자는 밤송이같이 머리칼을 짧게 깎은 여자였다.
여자는 사파이어와 거리를 두고 물러서며 벤체슬라스에게 총구를 들이댔다.
“멈춰.”
벤체슬라스 역시 여자에게 총을 들이대며 대치 상태가 되었다.
“당신이 세공사 벤체슬라스인가?”
“마리야 이바노브나의 보석인가. 이름이 루비였던가?”
“피전 블러드.”
“그래. 기억하고 있지. 저격의 달인이라며. 탐나는 능력이야.”
여자는 사파이어에겐 칼을, 벤체슬라스에겐 총을 겨눈 채 어느 한 쪽에게서도 긴장을 풀지 않았다.
“난 명령을 받았어.”
“마리야가 시키던가.”
“당신 보석은 내가 부수겠어.”
“거절한다면?”
여자가 벤체슬라스를 향해 겨누고 있던 총구를 살짝 틀었다. 그 끝에 걸린 것은 아이들이었다.
“당신의 800만이 날아가게 되지.”
물론 벤체슬라스는 이 거리에서 여자를 맞춰 단번에 죽일 수 있다. 그렇지만 여자가 방아쇠를 당기는 걸 멈출 수 있을까? 적어도 아이들 중 하나는 맞을 텐데 재수 없게도 저건 연사가 가능한 권총이다. 순식간에 전부 다 맞을 수도 있다.
“사파이어를 내주면 나와 아이들은 내버려둘 건가?”
“내가 받은 명령은 그것밖에 없으니까.”
“알았다.”
사파이어가 명령을 기다리는 눈으로 벤체슬라스를 돌아보았다. 벤체슬라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희생해.”
다음 순간, 사파이어가 나이프를 꺼내들며 여자에게 달려들었다.
피전 블러드는 약속을 지켰다. 총구를 거둔 피전 블러드는 벤체슬라스가 아이들을 데리고 사라질 때까지 다시 총을 꺼내들지 않았다. 그 대신 사파이어와 칼날을 주고받으며 근접전을 펼쳤다.
그러다가 피전 블러드가 다시 권총을 꺼내들자 사파이어도 가지고 있던 우지를 꺼내들었다. 드르륵 하면서 총성이 울렸다. 서로 방탄복을 입은 상태였기 때문에 관통은 되지 않았지만 뼈가 부러질 만큼 탄환으로 얻어맞는다는 것엔 변함이 없었다.
피전 블러드는 몸을 굴려 도망쳤다.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완전히 도망간 게 아니라는 걸 안다. 벤체슬라스가 방금 말한 대로 피전 블러드가 저격의 달인이라면 이렇게 될 것을 미리부터 계획하고 어딘가에 숨어서 저격전을 하려고 준비를 해놨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사파이어가 훨씬 불리해진다. 그 저격 실력은 일전에 한 번 제대로 맛봤다. 조준 속도가 인상적이었다.
사파이어는 엄폐물 사이로 몸을 숨겼다. 벌써 어디선가 총알이 한 발 날아와 사파이어가 숨은 곳 근처를 강타했다. 벌써 시작된 건가. 내가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이라곤 예비탄창이 남아있는 우지나 아니면 몇 발 남지 않은 USAS-12정도다.
산탄총으로 저격수를 찾아낼 수 있을까? 사파이어가 궁리하는 사이에 총알이 한 발 더 날아왔다. 이번에는 사파이어가 숨어있는 곳을 좀 더 가까이 때렸다. 이미 그가 어디 숨어있는지 알고 있는 것 같은 조준이었다.
사파이어는 숨을 죽인 채 다음 피격을 기다렸다. 세발 째라면 그도 위치를 특정할 수 있다. 그러나 다음 총알은 없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날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심리전이 시작된 건가.
사파이어를 포기했을 리는 없다. 사파이어로 하여금 “상대방이 포기한 건가”하고 착각하게 한 후 엄폐물 밖으로 나오게 하려는 속셈이겠지.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대로 숨어있을 수도 없다. 사파이어는 심호흡을 한 후 몸을 날렸다.
다리 한 쪽은 날아갈 각오를 하고 다른 엄폐물로 몸을 날렸는데 어째선지 총성이 들려오지 않았다. 그 대신, 저벅저벅 발소리가 들려왔다. 전략을 바꾼 건가? 사파이어는 총을 쥐고 발소리가 다가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발소리가 지척에 닿자 엄폐물 밖으로 일어서면서 총을 들이댔다.
“깜짝이야!”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백인 남자였다. 햇빛에 그슬린 듯한 구릿빛 피부와 대조를 이루는 금발머리가 건강한 매력을 뽐내고 있었다. 갓 소년을 졸업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이 들 정도로 싱싱함이 있었다. 남자가 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사파이어지? 얘기 들었어.”
남자가 악수하자는 듯이 손을 내밀었지만 잔뜩 긴장 상태인 사파이어가 당연히 그 손을 잡을 리 없었다.
“난 장 바티스트 고디에의 부하……. 보석이야. 이름은 올리……. 페리도트야. 본명 말할 뻔 했다. 잊어줘. 페리도트라고 불러줘.”
대충 짐작할 수 있는 이름이다. 올리버, 올리비에, 뭐 이런 이름이겠지. 잊으려고 해도 첫 만남이 너무 인상적이라 제대로 잊을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저기 숨어있던 여자는 내가 처리했어. 일행이랑 합류하지 그래. 난 뒤처리하러 갈 테니까. 다음에 또 만나면 좋겠어, 사파이어.”
페리도트는 찡긋 윙크를 하며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되는 정보로 작별인사를 했다.
“죽이지는 않았다구. 그건 그렇고 에메랄드네 애들 귀엽더라. 만나봤어? 그럼 다음에 또 보자구.”
그리고 남자는 나타났을 때만큼이나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뭔가 싱거운 느낌이 들었다.
남자가 처리해놓은 시신들을 사파이어가 보지 못해서 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창고 앞쪽에서 교전을 벌이던 무리 중 일부는 이미 창고 안으로 돌입했었고 그들은 이미 전부 끔찍한 모습으로 피투성이가 되어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있었다.
본의 아니게 벤체슬라스 일행이 충분히 말다툼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 셈이다.
추격자의 나머지 분대가 창고 안으로 진입해있었다. 페리도트는 창고로 들어서며 한쪽 벽에 세워뒀던 피투성이 전기톱을 다시 집어 들었다. 그리곤 휘파람을 불며 시동을 걸었다.
벤체슬라스는 창고를 빙 둘러 앞쪽으로 돌아갔다. 창고 앞에서 들리던 총소리는 이미 멎었고, 창고 안쪽에서 희미하게 모터 돌아가는 소리와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전장이 창고 앞에서 내부로 옮겨진 모양이다.
저격 포인트에 있어야 할 장 바티스트와 에메랄드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죽은 걸까? 도망간 걸까? 아니면 창고 안으로 이동한 걸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그들은 정리를 잘 해주었다.
벤체슬라스가 굳이 창고 앞으로 돌아온 이유는 차를 여기다 댔기 때문이다. 포화 속에서 벤츠가 벌집이 되지 않고 살아있길 바랐다. 이동수단이 없어지는 것도 큰 문제지만 벤츠 같은 예술품이 걸레짝이 돼버리는 것도 가슴 아픈 일이기 때문이다.
사샤는 주기적으로 뒤를 돌아보며 아이들이 모두 잘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했다. 이 중 가장 어린아이는 자신이 손을 꽉 붙잡고 있었고, 나머지 세 명 역시 서로 손을 붙잡게 한 채로 자신의 뒤를 딱 달라붙어 따라오게끔 통솔하고 있었다.
벤츠는 다행히 그 포화 속에서 살아남아있었다. 벤체슬라스가 구석진 곳에다 주차해놓은 것도 있지만 장 바티스트가 포격이 그쪽으로 쏟아지지 않도록 다른 쪽으로 유도해준 것도 있을 것이다. 벤체슬라스가 차의 시동을 걸고 아이들을 태우려고 하자 사샤가 버티고 섰다.
“안 기다려요?”
“누구를?”
“형이요!”
“내가 희생하라고 했잖아. 살아남았으면 알아서 뒤따라오겠지.”
“진짜 죽었으면 어떻게 해요!”
“그럼 다음은 너희들이 죽을 차례지. 오히려 그에게 감사해야할 텐데?”
“당신 진짜 악마야! 피도 눈물도 없어!”
“고맙군.”
이야기가 길어지는 게 싫었기 때문에 벤체슬라스는 차문을 열고 아이들을 강제로 밀어 넣었다. 작은 아이들은 뒷좌석에 태우니 비좁지만 4명이 탈 수 있었다. 사샤는 꼼짝없이 조수석이었다.
사샤가 사파이어를 기다려야한다는 막연한 책임감으로 차에 타지 못하자 벤체슬라스가 사샤의 멱살을 잡고 강제로 조수석에 태우더니 안전벨트까지 단단히 동여맸다.
“그가 죽어서 죄책감을 느낄 것 같으면 악착같이 살아남아라. 개죽음 당하지 말란 말이다. 내 고생도 물거품이 되는 거야. 지금 이 순간 네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다.”
“난 절대 당신을 용서하지 못할 것 같아. 어른이 되어서도.”
“그러던가.”
그러니까, 악착같이 살아남으라는 말은 접수된 모양이다. 어른이 될 계획까지 가지고 있다니. 벤체슬라스에게 얼마나 저주를 퍼붓든 상관없다.
벤체슬라스에게 있어 저주는 공기와 같다. 그는 항상 그것을 호흡하며 살아간다. 저주를 제하고 나면 현상금이 남기 때문에, 욕을 하던 침을 뱉던 어쨌든 살아남겠다고 다짐하는 건 좋은 일이다.
사파이어가 모퉁이를 돌아 나오지 않았더라면 사샤는 눈알이 빠질 정도로 벤체슬라스를 노려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파이어가 신체의 어디 하나 잃어버린 곳 없이 무사히 나타나자 조수석의 사샤는 물론이고 뒷자리의 아이들까지 환호했다.
정작 벤체슬라스는 크게 놀라거나 기뻐하지 않았다. 당연히 나타나야 하는 것이 나타났다는 태도였다.
“살아남았군.”
“예.”
“상대는?”
“다른 사람이 처리했습니다. 페리도트라고 합니다. 죽이지는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장 바티스트 쪽이군. 알고 있어.”
마리야 이바노브나와는 접해본 적이 그리 많지 않다. 물론 척을 지기도 싫다. 소문을 듣자하니 마리야는 소비에트 연방 시절 KGB에서 활동한 첩보원이었다고 한다. 소련 해체 이후로는 레드 마피아와 결탁하여 살아온 모양이고 지금은 프리랜서 청부업자로 활동 중이다.
세공사들의 출신 배경은 모두 다르고 실력만 있으면 살아남는 업계라지만 원래부터 정보 공작과 첩보, 암살이 본업이던 프로와는 역시 엮이기 싫다.
“수고했다. 난 칼레로 향한다. 두카티가 박살나지 않았으면 그걸 타고 따라와. 아니면 다른 차량을 구해서 쫓아오도록 해. A1 고속도로에서 합류한다.”
사파이어에게 지시를 내리던 벤체슬라스는 시야 옆에서 무언가가 움직이는 것을 감지하고 눈동자를 굴려 옆을 확인했다.
일련의 남자들이 이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복면을 쓰고 무장한 남자들이었다. 그들 역시 막 벤체슬라스 일행을 발견한 건지 잠시 자리에 멈춰 섰다. 새로 나타난 남자들의 신원을 가늠해보던 벤체슬라스의 눈이 충격으로 커졌다.
다음 순간,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의 멱살을 잡고 주저앉혔다.
드르륵 하고 총성이 울렸다. 총알은 자동차의 유리창을 뚫지 못한 채 순식간에 거미줄 같은 하얀 금을 만들어냈고, 검게 도장한 차체에 퍽퍽 박히며 총알 자국을 만들어냈다. 차 안의 아이들이 소리를 질러댔다. 벤체슬라스는 운전석 문을 열고 외쳤다.
“문 열지 마! 고개 숙여! 방탄유리다! 고개 숙여!”
벤체슬라스의 말을 듣고 몸을 최대한 아래로 끄집어 내렸던 사샤가 뒷자리의 아이들을 붙잡고 하나씩 좌석 아래로 끌어당겼다. 총알이 퍽퍽 박힐 때마다 사샤도 몸을 떨면서 비명을 질렀다.
벤체슬라스는 가지고 있던 샷건을 장전하더니 차의 본넷에 걸치고 쏘기 시작했다. 사파이어 역시 등 뒤에 매고 있던 USAS-12를 꺼내서 벤체슬라스 옆에 거치하더니 쏘기 시작했다.
사격을 가하던 남자들은 산탄총이 연사가 가능할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는지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들 역시 엄폐물을 찾아서는 뒤에 숨어서 총격을 가했다.
“이런 젠장할…….”
벤체슬라스의 하얀 얼굴이 꾸깃하고 일그러졌다. 사파이어가 다음 지시를 기다리며 벤체슬라스를 슬쩍 돌아보았다.
“저건 스페츠나츠다. 알파 부대인지 빔펠 부대인지 분간이 안 가는군. 진짜로 특수부대까지 개입할 줄은 몰랐는데. 전쟁을 생각한 건 저쪽이었나 보군.”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옷차림에, 복면을 썼고, 이 정도 거리에선 무기의 종류도 알아볼 수 없다.
그러나 벤체슬라스는 그들의 정체를 간파할 수 있었다. 러시아도 그의 주요 고객이었기 때문에. 남자들이 대열을 이루는 방식, 대응하고 공격하는 방식, 모든 것이 낯익었다. 한 때는 그들과 같이 일한 적도 있다.
세공사는 말하자면 용병과 다를 바 없는 존재들이라 영원한 적도, 아군도 될 수 없다. 어제까지 친구였던 세력과 오늘 당장 총구를 서로 겨눌 수도 있고.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너무 불리하다.
벤체슬라스에겐 아이들이 살아있어야만 절대적으로 이득이다. 하지만 저들에겐 어떨까? 저들에겐 아이들의 생사가 얼마만큼 중대한 문제일까? 아이들을 데려갈 수 없게 된다면 저들은 어떤 행동을 취할까?
벤체슬라스는 정답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저들이 일을 처리하는 방식은 상궤를 벗어나는 것이었기에.
어디선가 연기가 피어올랐다. 기름을 태우는 검은 연기, 그리고 매캐한 냄새가 풍겨오기 시작했다. 불을 지른 것이다. 기름을 이미 뿌려둔 모양인지 불은 마구잡이로 번져가는 게 아니라 창고를 감싸면서 불의 길을 만들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불이라.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어차피 이 난리를 쳤으면 경찰이 오지 않을 수 없다. 군대도, 대테러 진압부대도. 일을 그르쳐서 그들이 제때 뜨지 못하게 된다고 하면 적어도 증거만큼은 없애야한다. 불만큼 확실하게 증거 인멸하는 방법은 없다.
벤체슬라스는 빨리 결정해야했다. 차에는 더 이상의 인원을 태울 수가 없다. 누구 한 사람 내리라고 할 수도 없고. 사파이어를 태운다고 해서 그가 전력에 도움이 될까? 겁에 질린 아이들을 품에 끼고? 글쎄.
벤체슬라스는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타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사파이어에게 일렀다.
“여기 남아. 난 먼저 탈출한다. 뒷정리하고 합류하도록 해. 살아남으면 바로 따라오도록.”
사파이어는 자신의 목숨이 걸린 일임에도 불구하고 무미건조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색이 된 것은 오히려 사샤였다.
“또 버릴 셈이에요?! 또?!”
“닥쳐. 시간 없어.”
“내가 뒷자리 갈게요! 내 무릎에다 콜랴 앉히면 되요! 저 형 태워요! 버리지 마! 버리지 말라고! 살아 돌아왔는데 또 죽으라고 버리는 거잖아!”
“네가 내릴래?”
벤체슬라스는 나직하게, 그러나 확고하게 물었다.
“내릴 거면 지금 말해. 네 자리 내주고 저 녀석 태울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 이상은 못 태워. 무거워서 못 달려. 다 같이 죽는 셈이지. 빨리 결정해.”
“아니, 그, 난…….”
“빨리 결정해!”
벤체슬라스가 일갈하자 가만히 있던 사파이어가 “가십시오.”하면서 운전석 문을 닫았다. 그리곤 닫힌 운전석 문에 기대어 나머지 예비탄창을 털어 총을 장전했다.
창문 너머로 사파이어를 슥 내려다 본 벤체슬라스는 느리게 차바퀴를 굴려서 사파이어가 최소한 다른 엄폐물에 몸을 숨길 수 있게끔 여유를 만들어주고, 바로 달리기 시작했다.
창고에 불을 지른 남자들은 거세지는 불길을 보고 약간이나마 안도감을 느꼈다. 불길의 벽이 강철이나 시멘트로 된 것도 아닌데도, 차가 이 맹렬한 불지옥을 뚫고 나갈 수는 없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상대방이 얼마나 또라이인지 가늠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악마는 불을 두려워하지 않는 법이다. 아이들을 다섯이나 태우고 있음에도.
벤츠가 무식한 힘으로 불길을 뚫고 달려 나왔다. 미치광이 같이 앞을 노려보는 흰 얼굴의 남자가 운전대를 움켜쥐고 있었다. 차에 불이 붙었지만 그런 것쯤은 전혀 개의치 않는듯했다.
쏜살같이 스쳐지나가는 차의 속도와 마찬가지로 아이들의 끔찍한 비명소리도 강렬하게 터져 나왔다가 순식간에 멀어졌다. 남자들은 차의 뒤에다 대고 총을 쐈지만, 그보다 먼저 남자들의 뒤통수에 총을 갈기는 또 다른 사람이 있었다.
사파이어는 세 사람을 죽인 후에 총을 바꿨다. 점점 격렬해지는 불길 때문에 몸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머리털에서 단백질 그슬리는 냄새가 났다.
뒤에서 공격받아 동료를 셋이나 잃은 남자들은 일단 사파이어를 죽이기 위해 다시 등을 돌려 응전했다. 그 사이에 남자들 중 한 팀은 대열에서 벗어나 자동차에 올라타 벤츠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제물로 바쳐 영원히 타오르는 게헨나의 불. 그 안은 지금 성인 남자들의 시체로 가득했다. 사파이어는 남은 탄알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확인하며 다목적 도끼를 손에 쥐었다. 지옥 같은 열기가 도끼마저 뜨겁게 달군 상태였다.
남자들은 불에다 대고 총을 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길 안에 있는 저 미치광이가 확실히 죽었다는 보장도 없고, 가만히 내버려두면 또 자신들의 뒤통수를 노릴 것이 분명했기에 확실하게 죽일 필요성을 느꼈다.
남자들은 불길이 얼마 남지 않은 퇴로를 완전히 막기 전에 창고 부지 안으로 들어갔다. 창고 안에서도 이변을 느꼈는지 얼마 안 되는 생존자들이 바깥으로 달려 나오고 있었다.
몸이 불 붙은 사람이 비명을 지르며 달리다가 바닥에 몸을 굴려 불을 끄려고 했지만 결국 길고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됐다. 불타죽거나, 총에 맞아 죽거나, 아니면 뒤에서 전기톱을 들고 쫓아오는 미친놈에게 죽거나, 서로 죽고 죽이는 수밖에 없었다.
불완전연소의 새까만 연기도 열기만큼 치명적인 장애 요소였다. 누가 누구인지 분간하기도 어렵고 까딱하면 여기서 모두들 잘 익은 통구이가 될지도 모른다.
그 순간, 검은 안개를 뚫고 도끼날이 날아와 한 남자의 머리에 박혔다. 순식간이었다. 두개골을 쪼갠 도끼날이 비틀어 빠져나가면서 다시 연기 속으로 숨었다. 남자들이 마구잡이로 총을 갈긴 덕에 눈 먼 총알로 동료 둘이 죽었다. 그러자 다들 총을 쓰지 않고 나이프를 꺼내들었다.
그야말로 생지옥이다. 조금이라도 인간적인 감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광경을 보고 지옥을 안 떠올릴 수가 없다. 토막 난 시체, 벌집이 된 고기조각, 아직 살아서 바닥을 기는 반 토막짜리 인간, 비명, 사그라지는 비명.
나이프를 쥔 채 경계하던 남자의 뒤에서 억센 팔뚝이 나와 그의 얼굴을 쥐고 비틀더니 무방비상태로 드러난 목에 도끼날을 꽂아 넣었다. 도끼는 순식간에 두세 번 목을 찍고는 빠져나갔다.
남자가 사방에 피를 흩뿌리면서 처참하게 비명 지르자 동료들이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패닉에 빠져 칼을 휘둘렀다.
그러던 중 한 남자의 나이프 끝에 금속성의 무언가가 턱 걸렸다. 남자는 흠칫 놀라 그 쪽을 쳐다보았다. 새까만 연기를 뚫고 악귀 같은 얼굴을 한 사파이어가 도끼날을 찍어 내리며 튀어나왔다. 평소의 무감정한 표정은 온데간데없었다.
이 순간만 유일하게 살아있음을 느끼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의 눈은 흥분과 살기로 얼룩져있었다. 그것은 희열이었다.
사파이어는 이빨을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비정상적이다 싶은 체력을 가진 사파이어였지만 수적 열세에다가 오래 끄는 전투에는 역시 당해내지 못했다. 거기다 방탄복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몸이 뚫리지 않게 보호해주는 것이지 충격까지 막아주진 못한다.
아침부터 폭발에 휘말리고 총에 맞아가고 칼에 찔릴 뻔하며 생사의 고비를 넘겼던 것들이 이제는 버티기 힘든 피로로 다가오고 있었다. 손에서 힘이 빠지는 게 느껴졌다.
상황은 절대적으로 사파이어에게 불리했다. 사실 다른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싸울 이유가 없다. 혼란스러워서 지금은 적과 아군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 뿐 그들의 목표는 애초에 사파이어, 그리고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이미 여기를 떠났으니 남은 건 사파이어. 그를 죽이면 현상금을 받을 수 있다. 얼마나 달콤한 이름인가. 돈 말이다. 돈. 돈은 조금 전까지 서로에게 칼날을 겨누던 적도 일시적으로 동맹상태로 만들 수 있었다.
이윽고 사파이어는 포위되고 말았다. 불길과 그를 죽이려는 살인자들에게 둘러싸여. 사파이어는 피곤과 나른함에 젖어 고개를 뒤로 젖혔다.
여기서 멍해지면 안 된다. 지금 당장은 혈관에 흐르는 아드레날린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야한다. 여기서 살아남지 못하면 그에게 주어지는 것은 영구적인 어둠, 망각, 소멸뿐이다. 죽음 뒤의 세계는 아무것도 없다.
사파이어를 둘러싼 인원도 서로 눈치를 볼 뿐 어느 누구 하나 섣불리 나서질 못했다. 그들은 방금 전에 사파이어가 도끼 한 자루로 사람을 어떻게 해체하는지 봤다. 누군가가 공격을 시작하면 바로 가세하겠지만 자기 자신이 나서서 희생양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얇은 유리판 같던 대치상황을 깬 것은 어느 청량한 목소리였다.
“안녕, 여러분!”
모든 사람이 뒤돌아보았다. 이 불길 속에서 비닐 재질의 샛노란 레인 코트를 입고, 광이 번쩍번쩍 나는 새빨간 레인부츠를 신은 남자가 해맑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빨간색과 녹색이 뒤섞인 염색머리도 비범했다.
그는 손을 흔들다가 갑자기 코트 안에서 기관총을 꺼내더니 갈기기 시작했다. 기나긴 전투 끝에 총알이 다 떨어져가던 시점이었기에 근접 무기만 들고 있던 사람들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져갔다.
남자가 기관총 난사를 끝내고 나자 절반 이상이 죽었다. 한 가운데에 있던 사파이어는 신기하게도 단 한발도 맞지 않았다.
“휴!”
남자는 힘겨운 작업을 끝냈다는 듯이 이마를 닦는 척 하며 기관총을 내버리고 품에서 커다란 마체테를 꺼내들더니 그대로 달려들어 나머지를 내려찍기 시작했다. 상황을 지켜보던 사파이어가 그 공격에 가세했다.
“너, 너!”
한 남자가 소리쳤다.
“알렉시잖아! 너, 너 우리 편이잖아!”
“네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랬지!”
“미친 거 아냐? 야 이 미친새끼야!”
“내가 여러분과 한 편이었던 건 바로! 이! 순간! 을! 위해서였어!”
알료샤는 비명 지르는 남자를 마체테로 퍽퍽 찍으며 조각조각 냈다.
“너희들 전부 신사답지 못해. 알아? 페어플레이가 아니라고! 어쩜 이렇게 가녀린 사람 하나한테 이렇게 우르르 몰려들 수가 있어! 난 용서 못해!”
사파이어는 알료샤가 시체에 대고 화내는 것을 비현실적인 눈으로 보고 있었다. 입이 가벼운 것과 비례해서 몸놀림도 가벼운 남자였는데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길 아지랑이와 겹쳐서 그의 움직임이 환각처럼 보였다.
쉴 새 없이 쏟아내는 그의 수다도 환각적이긴 했다. 알료샤는 마지막 한 사람까지 깔끔하게 처리하고는 몸을 빙글 돌려 사파이어에게 달려왔다. 사파이어는 그가 일정거리 이상 다가오지 못하게, 정확히는 자신을 끌어안지 못하게 도끼날을 내밀어 제지했다.
“또 만났어! 또 만났어! 거짓말은 하지 않을게요! 사실 당신 보려고 지원한 거였거든! 난 현상금 받으려고 한 게 아냐! 정말이야! 그건 그렇고 세상에, 다친 데 없어요?”
“당신,”
“응?”
“개 같아.”
“개라니 어떤 개를 말하는 걸까? 푸들 같아요? 비숑 프리제? 사랑스러운 비글?”
“잭 러셀 테리어.”
사파이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 남자와 있으면 자신의 안에 있는 뭔가가……. 휘둘린다. 별로 좋은 감각은 아니다.
“어쨌든 또 도움을 받았군. 고마워.”
“고맙대……!”
알료샤는 감격에 차서 양 손으로 입을 가리며 눈에서 별을 쏟아냈다. 흡사 슈퍼스타를 배알한 열성 팬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알료샤는 “지금 당장이라도 너를 껴안고 싶다고!”하는 강렬한 눈빛을 내보였지만 사파이어는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끼는지 몸을 뒤로 뺐다.
“하지 마.”
“응, 응! 난 강제로는 하지 않을게요!”
순간 위험한 얘기가 오갔지만 사파이어가 눈치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어쨌든 다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야…….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당신 주인은 이번에도 당신을 버리고 갔네요. 주인 자격이 없어, 정말. 돈 밖에 모르는 걸레새끼. 그러니까 누구도 좋아하지 않지.”
벤체슬라스를 중얼중얼 욕하던 알료샤가 표정을 바꾸더니 진지하게 말했다. 여태까지 유쾌하고 장난스럽던 모습이 전부 거짓말인 것처럼. 지금 이 순간 그가 말하는 모든 단어 하나하나가 진실이었다.
“나랑 같이 가요. 당신 주인은 이미 몇 번이고 당신을 유기했으니까, 나랑 같이 가요. 내가 주워줄게요. 난 당신을 학대하지도 않을 거고, 죽을 걸 뻔히 알면서 사지로 밀어 넣지도 않을 거예요. 당신이 허락만 한다면 지금 당장 여기서 빼내줄게요. 돌아가 봤자 당신 주인은 당신을 장기말로 쓰고 버려요. 그 놈은 그렇게 희생시킨 사람이 많아요. 당신은 인간이에요. 한 인간으로 존중받아야하고 사랑받아야 해요. 내가 그걸 줄 수 있어요. 모두. 전부 다.”
“나는,”
“당신은?”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던 알료샤를 사파이어가 중간에서 끊자, 알료샤가 초조하게 물었다. 사파이어는 숨이 막히는지 호흡을 고르더니 나머지 문장을 말했다.
“임무가 있어.”
짧은 순간이지만 기대감을 품었던 알료샤가 그 대답에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사파이어는 그를 내버려두고 불길 속을 뒤져 자신이 타고 왔던 두카티를 찾아냈다.
두카티는 파손되지 않은 상태였고 충분히 탈 수 있었다. 현상금 사냥꾼들이 남겨놓은 잔해 속에서 용케도 멀쩡한 다른 사람의 헬멧을 찾아낸 사파이어가 헬멧을 쓰기 전 알료샤를 돌아보더니 짧게 말했다.
“또 만나지.”
그것을 끝으로 사파이어는 불길을 뚫고 그의 주인을 뒤쫓으러 갔다.
불 속에 혼자 남겨진 알료샤는 어이없다는 듯이 “하, 하하.”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머리를 감싸 쥐고 외쳤다.
“아, 되게 섭섭하네!”
A1 고속도로는 지옥이었다. 하늘에는 헬기가 떠 있고 프랑스 경찰이 고속도로를 통제하고 있었다.
일반 차량은 일찌감치 고속도로를 빠져나가 지금 한창 지옥의 아귀다툼이 벌어지는 구간을 제하면 나머지는 한산했다. 그리고 그 아귀다툼이 벌어지는 곳에서는 타이어 바퀴가 터져나가고 총알이 창문에 박히는 싸움이 일어나고 있었다.
벤체슬라스가 선두에 서 있었고 그 뒤를 추격자들이 바짝 쫓고 있었다. 잊을 만하면 뒤쪽 유리창에 총알이 퍽퍽 박혔지만 차량의 장갑에 돈을 들인 만큼 그 정도 총격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하지만 이 차에 탄 인원 중 전투원은 운전자인 자신을 제하고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마땅히 대응할 방법도 없었다.
그 때, 둘 사이를 빨간 푸조가 치고 들어왔다.
장 바티스트였다. 벤체슬라스는 인정사정없이 엑셀을 밟아대는 도중에도 눈길을 슬쩍 돌려 장 바티스트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가 운전대를 잡고 있었고 옆에 에메랄드도 타고 있었다. 에메랄드가 뭔가 대응을 하려는 모양이었다.
둘 다 살아있었군. 죽어버렸으면 800만은 온전히 내 것이 됐을 텐데 말이야. 벤체슬라스는 웃기지도 않는 농담에 자조하며 아군에게 자신의 뒤를 맡겼다.
“조금만 더 왼쪽으로, 장 바티스트.”
“못 해! 죽어!”
“이거 못 맞추면 어차피 죽어.”
“아아아아아아아!”
장 바티스트가 기합인지 괴성인지 모를 것을 지르며 운전대를 확 꺾자 에메랄드가 창문 밖으로 몸을 반쯤 빼고는 뒤따라오는 추격자들에게 총을 갈겼다. 평소에는 느긋하기 그지없는 성격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기계 위에다 인간의 가죽을 덮어씌운 것처럼 동작이 신속하고 정확했다.
악착같이 쫓아오던 차량 중 한 대에 총알이 전부 명중했다. 앞 유리가 깨지면서 운전자가 사망했고 그대로 운전대가 틀어지면서 달리던 속도대로 옆 차를 들이박고 전복되면서 큰 사고가 일어났다.
“두 마리 처치했고.”
에메랄드가 차 안으로 다시 몸을 집어넣으면서 빈 탄창을 새 탄창으로 갈아 끼웠다. 다시 창 밖으로 몸을 내밀려던 에메랄드가 무언가를 보고 숨을 들이키며 다시 조수석에 몸을 밀착시켰다.
장 바티스트의 차량 옆으로 은색 시트로앵이 바짝 따라붙더니 운전석의 창문이 스윽 내려가고 운전자가 이쪽을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장 바티스트는 고개를 돌려 운전자를 확인했다가 마주 씨익 웃어주며 엄지를 치켜 올렸다.
시트로앵을 몰고 나타난 페리도트가 엄지에 똑같이 엄지로 대답하고는 다시 운전석 창문을 올리고 뒤로 빠졌다.
“쟤 차 언제 샀대?”
“쟨 결혼 안 했잖아. 돈 모아서 샀을걸.”
“난 토끼 같은 내 새끼들 먹여 살려야 되니까 돈 더 줘.”
“웃기지 마.”
장 바티스트와 페리도트가 뒤를 막아주는 동안 벤체슬라스는 한숨 돌릴 여유가 생겼다. 이미 무기를 들고 저택을 나올 때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각오한 일이지만 더 이상 프랑스에 머물 수는 없다.
아마 지금쯤 생방송으로 TV에 중계되고 있을 것이다. 테러범인가, 범죄자들의 싸움인가, 헤드라인은 어렵지 않게 짐작이 된다. 하지만 청부업자들에게 불리한 만큼 뒤를 바짝 쫓아오는 특수부대원들에게도 달갑지 않은 소식일 것이다.
간도 크지. 남의 나라에서 이렇게 눈에 띄는 작전을 할 줄이야. 잃는 것은 저 쪽이 더 클 것이다.
벤체슬라스는 사이드미러를 흘끗 쳐다보았다가 백미러를 조정해서 뒤쪽 창문 너머를 자세히 내다보았다. 총에 맞아서 하얗게 실금이 가 있는 유리였지만 뒤편의 상황은 얼추 보였다. 아까의 두 배는 되는 차량이 어느 샌가 새까맣게 몰려오고 있었다.
“판이 이렇게 커질 줄 몰랐는데.”
어떤 놈인지 몰라도 단단히 악에 받친 모양이다. 저 정도 인원이면 아군 둘로는 감당하기 버거운데. 그 때, 몰려오는 차량 사이를 무언가가 날렵하게 가로지르며 치고 나오는 것이 보였다. 불길을 뚫고 나오느라 온전한 구석이 없는 검은색 두카티였다.
그 모습을 확인하고 벤체슬라스가 씩 웃었다.
“어서 와라.”
선두에 선 벤츠를 쫓던 차량들은 뜬금없이 나타난 검은색 두카티를 보고 놀라서 자기들끼리 들이박을 뻔 했다. 두카티는 그 정도로 위험하게 차들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지금 이 고속도로에 일반인이 있을 리는 없다. 적 아니면 아군이란 소린데, 안타깝게도 이들 대부분의 목적은 어린아이 다섯 명이던가 사파이어 하나로 갈린다. 그리고 사파이어를 쫓는 사람들은 대부분 사파이어의 인상착의를 알고 있다.
저 놈이다. 세공사 벤체슬라스의 유일한 보석.
차량 두 대가 사파이어를 사이에 끼우고 창문을 내리더니 총구를 겨누었다. 멍청한 짓이었다. 사파이어가 속도를 약간 늦추자 두카티가 뒤로 쑥 빠졌고 총을 겨누고 있던 둘은 서로에게 총격을 가하는 것으로 끝났다.
각 차량에 타고 있던 암살자들이 죽자 운전자들이 뒷좌석을 돌아보더니 서로를 들이박았다. 사파이어는 그 틈새를 빠져나가 앞으로 치고 나가더니 벤체슬라스 대열에 합류했다.
검은 두카티가 푸조와 시트로앵 사이를 스쳐 지나가자 에메랄드와 페리도트가 창문을 열고는 뒤에다 대고 엄호사격을 해주었다. 뒤에서 쫓아오던 차량들은 섣불리 사파이어를 공격할 수 없었다.
사파이어는 벤츠 옆에 딱 붙어서 고개를 돌려 헬멧의 정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자신의 복귀를 알렸다. 벤체슬라스는 운전대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조수석의 사샤에게 말했다.
“발밑에 가방이 있을 거다.”
사샤는 발끝을 더듬었다. 무언가 걸리는 게 있었다. 조수석 밑에 숨겨놓은 가방이었다. 가방을 끄집어 내 열어보니 긴 탄창이 붙은 총이 한 자루 들어 있었다. 사샤가 벤체슬라스를 쳐다보자 벤체슬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샤는 창문을 열고 사파이어에게 총을 건네주었다. 사파이어는 총을 받아들더니 바로 속력을 줄여 대열에서 이탈했다. 그리고 뒷자리로 돌아갔다.
사파이어가 건네받은 것은 슈타이어 TMP로 장탄수가 30발쯤 되는 기관권총이다. 오토바이를 몰고 있는 상태에서는 적절한 선택이다. 사파이어는 벤츠 대열의 뒤꽁무니에 제일 가까이 따라붙는 놈을 위협사격으로 몇 번 갈겼다.
집요하게 운전석만 노렸다. 방탄유리가 아니라면 유감이고 방탄유리더라도 이렇게 고속으로 달리는 와중에 앞 유리가 퍽퍽 금이 가면 놀라서 핸들을 꺾지 않을 수 없다. 방해공작은 훌륭했고 사파이어는 차량 세 대를 동시 추돌시켜서 이 추격전에서 완전히 낙오시켜버렸다.
공격당한 추격자들은 창문을 열고 사파이어에게 총을 갈기기 시작했다. 사파이어는 한 번에 총알을 다 쓰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몇 번씩 끊어서 응사했다. 뒤 쪽의 교란 작전이 격렬해지는 동안 선두의 차량들은 쾌적하게 탈출 루트를 짜고 있었다.
중간에 빠질 것인가, 어디로 어떻게 빠질 것인가, 칼레까지 가는 길은 어떻게 정할 것인가. 이따금씩 에메랄드와 페리도트가 사파이어를 돕긴 했지만 사실상 그들의 임무는 벤츠의 뒷부분을 감싸듯이 보호하는 것이었다.
사파이어는 스키드 마크가 죽죽 그어지는 도로 위 지옥에 남겨진 채 두카티 한 대로 달리는 차량 사이를 누비며 사보타주를 계속 했다. 무모한 작전인 것은 알고 있다. 사실상 죽는 것 밖에 방법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이것 말고는 다른 수가 없다. 전투 중에는 죽음이나 패배에 대해 생각해선 안 된다. 그것이야말로 목숨을 앗아가는 사신이다. 두려움을 마취시켜야한다.
그러나 완전히 혼자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때 즈음, 또 한 번 구원의 손길이 나타났다. 그야말로 뜬금없이.
노란 바탕 위에 검은 줄을 그은, 범블비 컨셉트카 쉐보레 카마로가 나타났다. 난장판을 비집고 나온 쉐보레의 뒤로 일련의 차량들이 대열을 이루어 다른 차량들을 밀어내며 도로를 점령했다. 새까맣고 우중충한 차량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색깔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쉐보레는 다른 차들에게 감히 자신과 같이 달릴 수 있는 기회도 주지 않았다.
운전석을 들여다본 사파이어는 헬멧을 쓰고 있었음에도 움찔하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운전석 안에서 알료샤가 입을 벌리고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여길 보라는 듯이 열심히 손을 흔들던 알료샤가 손짓으로 무언가를 전달하려고 했지만, 손을 정신없이 흔드는 것이 문제인지 아니면 손으로 말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인지 의도가 잘 전달되지 않았다.
사파이어가 인내심을 가지고 한참 쳐다봐주자 알료샤가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사파이어에게 앞으로 가라는 신호를 해보였다. 사파이어가 고개를 들어 뒤의 추적자들이 얼마나 남았나 확인하자 알료샤가 좌석 옆에서 권총을 꺼내들어 보여주었다. 그리곤 다시 한 번 가라는 듯이 손짓했다.
사파이어는 말로 감사함을 전달할 수 없었기에 알료샤가 했던 것처럼 총 든 손을 들어 살짝 흔들어주었다. 알료샤는 그것을 보고 운전대를 붙잡고 있었다는 것도 잊고 입을 가리며 환호성을 질렀다. 딱 2초간의 일탈이었지만 보는 사람은 모골이 송연해지는 장면이었다.
사파이어가 벤츠 대열에 합류해 저 앞으로 사라지자 알료샤는 웃음을 거두고 광기에 물든 살인귀의 얼굴로 돌아와 운전대를 잡아 꺾었다.
알료샤를 뒤따르던 차량은 모두 그의 친구들이었다. 알료샤와 우정을 쌓은 사람들이거나, 그에게 받은 은혜를 갚으려는 사람들이거나, 혹은 이런 지옥에 뛰어들 수밖에 없을 만큼 약점을 잡힌 사람들이 모두 그의 편이었다.
알료샤가 신호를 보내자 그를 따르던 차량들이 다른 차를 들이받기 시작했다.
석양이 지는 칼레의 항구에는 면도날 같은 인상을 주는 단발머리를 한 흑인 여자가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두 남자와 함께 가방을 들고 서 있었다.
그들 앞으로 지옥을 정면으로 뚫고 나오기라도 한 듯이 꼴이 말이 아닌 벤츠 한 대가 와서 놀라울 정도로 소리 없이 멈춰 섰다. 그게 벤츠의 마지막이었는지 벤츠는 휠 캡을 떨어뜨리며 영구적으로 움직임을 멈추었다. 부디 영원한 안식을.
차 문이 열리고 벤츠와 마찬가지로 꼴이 말이 아닌 백금발의 남자가 내려섰다. 그가 조수석과 뒷좌석의 문을 열어주자 눈물까지 다 말라붙어버린 아이들이 비틀거리면서 내려섰다.
여자의 옆에 서 있던 남자들이 얼른 달려가서 아이들의 상태를 확인했다. 여자는 가방을 자신의 다리 옆에 둔 채 그 자리에 서서 벤체슬라스가 다가올 때까지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축하합니다.”
“돈 주시죠.”
여자는 지체 없이 가방을 내밀었다. 벤체슬라스가 가방을 열고 금액을 확인하는 동안 여자가 말했다.
“여기까지 곧 경찰이 들이닥칠 텐데요.”
“걱정해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그건 우리가 처리할 일입니다.”
“그렇군요.”
“배를 타는 것보다는 해저터널로 유로스타를 타는 게 더 빠를 텐데요.”
“그건 우리가 처리할 일이지요.”
“그렇군요.”
금액이 정확히 맞다. 벤체슬라스는 가방을 닫고 깔끔하게 미소 지었다.
“다음에도 또 이용해주시길.”
“다음엔 만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요. 저는 대리인일 뿐이니까요.”
곧 빨간 푸조와 은색 시트로앵이 벤츠와 똑같은 몰골로 굴러 와서 멈춰 섰다. 그리고 검은색 두카티가 나타났다. 푸조와 시트로앵에서 내린 남자들이 기진맥진 상태인 것에 반해 두카티 운전자는 비교적 멀쩡해보였다.
두카티 운전자가 헬멧을 벗자 아이들이 그에게 달려가서는 와락 끌어안았다. 특히 사샤가 제일 격하게 끌어안았다. 사실 사파이어는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기 때문에 다섯 명이나 되는 아이들의 체중을 받아낼 체력이 없었다.
“끄흥…….”
사파이어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자 사샤가 놀라서 떨어졌다. 그리곤 아직까지 사파이어의 다리에 매달려 있는 다른 아이들을 떼어냈다.
“괜찮아요? 많이 다쳤어요?”
“아파.”
“많이 아파요? 크게 다쳤어요?”
“물.”
사샤가 허둥지둥 주변을 찾아보다가 검은 양복의 남자들에게 “물 있어요?”하고 다급하게 물었다. 남자들이 구호키트에서 생수를 꺼내주자 사샤가 얼른 그것을 사파이어에게 건네주었다.
사파이어는 숨도 쉬지 않고 그 자리에서 물병 한 병을 다 비웠다. 하루 종일 제대로 식사도 하지 못하고 쉬지도 못한 채 지옥을 몇 번씩이나 헤쳐 나오며 여기까지 왔다. 물이 들어가자 잊고 있던 통증이 한꺼번에 밀려오는지 사파이어가 몸을 움츠리면서 박살난 벤츠에 몸을 기댔다.
“손대지 마.”
사샤가 걱정스러워하며 사파이어를 살펴보려고 하자 벤체슬라스가 차갑게 제지했다.
“계약은 끝났어. 너는 더 이상 그와 상관없는 사이야. 그는 내 것이야. 치료하는 것도 내가 한다. 떨어져.”
“당신 진짜!”
“더 이상 널 보호할 의무가 없단 말이다, 꼬마야. 손 떼지 않으면 그 손 부러뜨려주지.”
흑인 여자가 그들 사이에 끼어들더니 사샤를 자신의 품 안에 끌어안고는 중재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아이들은 이제 우리 소속입니다. 피차 문제 일으키지 말죠.”
“먼저 침범하지 않으신다면야.”
여자는 웃는 얼굴이었지만 자기 몸으로 사샤를 가려 확실하게 보호하고 있었다. 벤체슬라스는 손을 댈 의도가 전혀 없다는 듯이 양 손을 들어 보이며 뒤로 물러섰다. 여자의 품에 안긴 사샤가 다른 아이들과 함께 자리를 떠나게 되자, 사샤가 소리쳤다.
“나 안 잊을게요! 형은 절대로 안 잊을게요! 고마워요! 고마웠어요! 살려줘서 고마워요! 고마워요 정말……. 나 안 잊을 거예요, 어른이 되서도…….”
마지막은 울음소리로 얼룩졌다. 사파이어는 멀어져가는 아이들을 피곤한 눈으로 가물가물 쳐다보았다.
아이들은 이제 지옥에서 벗어나 안전한 곳으로 갈 것이다.
어른이 되겠다고. 좋은 꿈이다.
그 다음엔 장래희망을 가져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빨간색 크레파스 말고 다른 색으로 그림을 그려보는 것도 괜찮은 시도일 것이다. 노란색 태양, 초록색 나무, 분홍색 꽃, 여러 가지. 정말 여러 가지. 그리고 또 뭐가 있을까. 많이 있을 것이다.
살아서, 성장하고, 고민하고 괴로워하고, 환희를 느끼고, 사랑을 해보고, 싸움도 하고, 우정을 만들었다가 배신도 하고, 화해하고, 사과하고, 파티를 즐기고. 그렇게 어른이 된다.
그렇게 살아간다. 살아남는다.
내일이라는 기회비용을 이 세상의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당연하게 획득한다.
일상을 살아간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겠지.
사파이어의 무릎이 꺾이며 그대로 몸이 아래로 추락했다. 그것을 강하게 붙잡는 손이 있었다. 한 번 힘이 풀린 사파이어는 다시 힘을 주어서 제대로 일어서지 못하고 그 억센 손에 몸을 맡겼다.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를 양 손으로 들어 올려 품에 안은 채, 멀어져가는 사파이어의 의식에 대고 냉혹하게 선고했다.
“너는 이 밑바닥 없는 지옥에서 못 벗어나. 남들처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곤 꿈도 꾸지 마. 넌 내 품 안에서만 안식을 느낄 수 있어.”
벤체슬라스는 기절한 사파이어를 안고 해가 저물어가는 어둠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