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라이트
요원이 둘이나 행방불명 됐음에도 불구하고 영국 정보부는 네이슨과 벤자민에 대해 더 이상 수색을 감행하지 않고 사건을 종결시켰다. 어쨌든 기밀서류는 사라지지 않았으니 된 것 아니냐는 태도였다.
수색을 한다고 해봤자 첩보원이 마음먹고 숨어버리면 찾아낼 방도가 없다. 정보를 들고 적국으로 도망가 버리면 알아낼 수도 없고. 어쩌면 벤자민의 행방불명에는 네이슨이 연관된 것인지도 모른다. 네이슨이 정보를 빼돌리려다가 벤자민에게 발각됐고 그래서 제거했다, 이런 이야기도 상상해봄직 했다.
어쨌든 진실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버리고 요원들 여럿이 투입될 뻔한 첩보전은 시작도 하기 전에 싱겁게 끝났다. 일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물론 의문스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상부에서 그 일은 덮어두라는 지시가 내려왔기 때문에 일선에서는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손을 떼는 수밖에 없었다. 말단 직원이 손댈 수 있는 정보는 한정되어 있고 다른 부서에서 어떤 프로젝트가 진행 중인지도 모르는 게 태반이기 때문에 또 다른 일과 엮인 것이 있겠거니 할 뿐이었다.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제가 진 빚도 있으니까요. 이걸로 탕감이 된 셈인지?”
“물론이지요.”
시계방의 노인, 파리를 주름 잡는 정보상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눈앞의 남자에게 차를 권했다. 꼼빠니 꼴로니알의 달콤한 과일향기가 나는 가향홍차. 이런 자리에서 마시기엔 지나치게 달고 가볍고 화사한 향기가 나는 것이었지만 남자는 위스키보다 이것을 더 좋아했다. 인생에는 쓴맛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인생의 다채로운 색깔을 보라. 그것이 그의 철학이었다.
파리 시내에서 일어난 사건과 시체는 정보상이 처리할 수 있지만 국경을 넘어가는 문제는 일개 상인 따위가 함부로 손을 쓸 수가 없다. 이럴 때 평소에 쌓아둔 인맥이 빛을 발한다.
눈 앞의 남자는 정보상의 주요 고객 중 하나로, 정확히 어느 정도의 재력과 권한이 있는지 모르지만 영국 정보부에도 입김이 닿는 사람이었다. 정보상은 그에게 과거의 빚과 이번 사건의 해결을 맞바꾸자는 거래를 했다.
그는 쉽게 거래를 받아들였고, 사건을 종결시키는 데는 이틀도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 말인데, 누가 이렇게 요란하게 사고를 친 거죠?”
“그건 함부로 말씀드릴 수 없겠군요. 저도 신용을 가지고 장사를 하는 입장이니까요.”
“물론이죠. 그럼요. 무례를 저지를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궁금했어요.”
사회의 반항과 저항이라는 요소를 한데 뭉쳐놓은 것 같은 외모와는 다르게 그의 태도는 싹싹하고 신사같이 점잖았다. 푸른색으로 물들인 것이 분명한 머리는 염색약이 다 빠져 나가서 녹색으로 변해있었고 그 머리색으로도 모자란 지 일부분을 선명한 붉은 색으로 염색했다.
서브컬처 계열의 종사자나 개성을 중시하는 프로그래머라던가 예술가라든지 그런 직종이면 그다지 특이할 것도 없는 모양새지만 그의 직업은 극히 신중해야하고 눈에 띄지 않는 편이 좋은 것이었기 때문에 더 특이했다.
길거리를 50m만 걸으면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꽤 생길 것이다. 녹색과 빨간색으로 머리를 염색한 사람. 머리색만으로도 반경 1km 안에서 그를 찾아낼 수 있다. 별로 좋은 징조는 아니다. 청부살인업을 하는 사람에게는.
“하지만 정보를 사겠다면 어쩌시겠습니까?”
“아, 그런 것이라면.”
노인이 미소 지었다.
“얼마를 내시렵니까?”
“얼마짜리 정보인가요?”
노인은 작은 헛기침을 터뜨렸고 그의 태도에서 남자는 가격이 어이없을 만큼 싸다는 것을 알았다. 돈을 받겠다는 것은 명목상일 뿐 사실은 그냥 알려줘도 상관없는 내용인 것이다.
남자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노인의 눈치를 보고는 지폐를 한 장 뺐다. 노인의 표정에 변화가 없었기 때문에 지폐를 두 장 꺼내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노인은 천천히 지폐를 챙기더니 입을 열었다.
“세공사이신 벤체슬라스님입니다.”
“저런. 동구권에 있지 않았나요?”
“얼마 전에 거처를 옮기셨더군요.”
“파리에 말입니까?”
“네.”
이 바닥이 워낙 은밀해서 입 다물고 있으면 누가 죽어나가는지도 잘 모르지만 벤체슬라스의 경우에는 더 심했다. 그는 지나치게 배타적이었다. 이기적이고, 유능했다. 몇 번 마주친 적은 있다. 별로 좋은 인상은 아니었다. 기다란 백금발이 인상적인 미남이었는데.
“아쿠아마린이라는 보석을 파는 사람이었죠?”
“글쎄요. 품목이 바뀐 듯 합니다만.”
“그 사람은 파는 물건이 자주 바뀌는군요.”
하기는 보석상과 보석세공인이 한 가지 광물에만 매달리고 있으면 그건 그것대로 기이해 보인다. 벤체슬라스는 여태까지 푸른빛 보석을 주로 다루었다. 남자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그의 판매 상품은 아쿠아마린이라는 보석이었고. 어쩌다가 죽게 되었을까.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서 벤체슬라스는 어쩌다가 MI6를 건드렸답니까?”
“개인적인 일이라고 하시더군요. 그 이상은 알지 못합니다.”
“어지간히 원한이 쌓이지 않고서야 자기 돈을 들여서 누군가를 죽이진 않을 텐데요.”
벤체슬라스의 가치관 순위 중에 최우선을 차지하는 게 돈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남자는 궁금증이 생겼다. 그러나 정보상도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이다. 물결의 흐름은 알지만 물방울 하나하나의 성분까지는 알지 못한다. 그것은 신의 영역이다.
“나머지는 제가 알아봐야겠군요. 정보를 팔아주셔서 고맙습니다.”
“구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알렉세이님.”
“알렉시라고 불러주세요. 여기에 있을 때는.”
그의 친구들은 그를 알료샤라고 부른다.
알료샤는 여러 이름을 가지고 있다. 알렉세이, 알렉시, 알렉스, 알렉산더, 알렉산드르…….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가 반기는 이름은 친구들이 애정을 담아 불러주는 알료샤다.
세공사 알료샤는 여러모로 이단적인 인물이다. 튀는 외모와 튀는 이름, 튀는 정체성. 다른 모든 청부업자들이 그림자를 자처하고 있을 때 그 혼자서만 빛 아래에 당당히 나온다. 아예 광고를 하고 다니는 수준이다.
그는 인생은 유쾌한 것이며 다양한 맛이 있는 색의 복합체라는 지론을 펼치고 다닌다. 비록 그 다양한 색의 인생을 자신의 손으로 거두고 다니기는 하지만 인생이 색깔로 가득한 것이라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직업이 누군가를 죽이는 것뿐이지 그렇다고 해서 장례식 속에서 인생을 살 필요는 없다. 그것은 뭔가를 죽이는 것을 주요 업무로 하는 다른 모든 직업에 대한 모독이다.
생에 대한 미치광이 같은 이론에 대해서는 딱히 이렇다할만한 반발이 들어오지 않지만 그가 가장 비난받는 부분은 세공사 본인이, 자기 스스로가 보석을 자처하면서 사람을 죽이고 다닌다는 것이다.
그것을 비유하자면 뭐라고 할까, 조각을 만드는 조각가가 자신 자체가 끌이라며 자신이 쪼아대는 조각과 사랑에 빠지는 것 같다고 할까. 화가가 자기 스스로 붓이라며 자기가 그려가는 작품 그 자체와 사랑해버리는 것이다. 뭐라 설명하기 힘든 불쾌감이고, 거부감이며, 남을 깔보는 것 같은 기만 같기까지 하다.
알료샤는 친구가 많다. 일반인 기준으로도 그는 꽤 다정한 편이다. 친구들을 보살피고, 기념일을 챙겨주고, 힘들 때 곁에 있어준다. 뒤에서 뭐라고 욕하건 간에 앞에서는 그를 거절하는 사람이 없다. 그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간에. 그는 발이 넓기 때문이다. 지지자도 많고. 여러모로 아이돌 같은 존재다.
알료샤가 벤체슬라스에 대해 충분히 알아보는 것은 전화 몇 통으로 충분했다. 돈을 쓸 필요도 없었고 그 동안 쌓아놓은 우정으로 충분히 값을 치렀다.
알료샤는 전화를 끊고 소파에 몸을 기대며 천장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그에게 성심성의껏 정보를 끌어 모아다 준 친구는 전화기 너머로 들려주는 알료사의 다정다감한 말 몇 마디로도 며칠 동안 밤잠을 자지 못할 것이다.
이다음에 도움이 필요하면 다시 기꺼이 도와줄 테고.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은 다들 어딘가 상실되어 있다. 결핍되어 있고. 부족하다. 무엇이 부족한지조차 모른 채 뭔가가 비어있다고 느끼며 살아간다. 그것을 채워주는 사람은 성인과도 같이 보인다.
알료샤가 한 것은 정말로 값싸고 크게 힘도 들지 않는 것이었다. 인사를 하고, 하루를 물어보고, “저런.”이라고 해주는 것. 그 정도. 그 정도 교류에 누군가는 구원을 받는다.
“사파이어. 사, 파, 이어.”
알료샤는 음절 하나하나를 입 안에서 굴리듯이 발음해보았다. 돈에 미친 백금발의 걸레가 요즘 공들여 키운다는 보석 이름이다. 시장에 투입된 지는 얼마 되지 않은 것 같다. 듣자하니 실력이 대단하다지.
어떤 사람일까. 어떤 작품일까. 벤체슬라스에게 드는 본능적인 거부감만큼이나 그가 키워내는 작품에 대해서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어떤 완벽성과 장인정신이 있었다. 시리도록 푸른 깨끗함. 날카로움. 알료샤는 눈을 감고 찬연히 빛나는 고결한 남빛 보석, 사파이어에 대해 상상해보았다.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
알료샤는 눈을 가늘게 뜨고 갓 떠오른 욕망을 단단하게 굳혔다. 내 눈으로 직접 봐야겠다.
알료샤는 그 남자를 퐁네프 다리 아래에서 찾았다. 그는 강둑에 걸터앉아 흘러가는 세느 강물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체구가 작았다. 동양인이고, 검은 머리칼은 단정하게 잘라서 청년이라기보다 소년 같은 인상이었다. 조용하고 중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는 우등생 소년 같은 인상.
피부는 희고 깨끗한 편이었지만 검붉은 피멍이 드문드문 든 지금은 별로 의미가 없었다. 남자는 목부터 아래까지 붕대를 감고 있었다. 옷에 가려 보이지 않는 부분도 붕대로 싸여있을 것이 뻔했다.
저 작은 남자를 저 지경으로 만든 게 누굴까. 이따금씩 동양인 사냥을 하러 다니는 놈들이 있다. 인종차별은 나날이 늘어가고 강도도 거칠어지고 있다. 세공사들이 보석이라고 부를 정도로 공들여 키워내는 암살자라면 순순히 얻어터지지는 않겠지만 당장 눈으로 결과물을 보니 측은지심이 들었다.
알료샤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Bonjour.(안녕하세요.)”
남자가 고개를 돌려 알료샤를 바라보았다. 정면으로 본 그의 얼굴은 한층 더 참혹했다. 웃으며 인사를 걸었던 알료샤도 일순간 정색했다. 알료샤는 그의 멀쩡한 오른쪽 얼굴만 보고 있었기 때문에 왼쪽 얼굴이 어떤 상태인지 짐작하지 못했고, 그래서 충격은 한층 더 컸다.
남자의 왼쪽 얼굴은 입술이 부어터졌고 눈은 잘 뜨지도 못할 정도로 피멍이 들어있었다. 남자는 멀쩡한 눈으로 알료샤를 깜박깜박 쳐다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Sorry, but I can't speak French well.(미안하지만 난 프랑스어를 잘 못합니다.)”
생긴 것과 다르게 목소리는 제대로 무게가 잡힌 성인남자였고, 목이 쉬어있을 거라고 짐작케 하는 외견과 달리 목소리 자체는 낮고 묵직하고 깔끔해서 듣기 싫지 않았다. 알료샤는 금방 남자가 마음에 들었다. 알료샤는 영어로 물었다.
“옆에 앉아도 될까요?”
남자는 주위를 둘러보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강둑은 충분히 길었고 사람이 없었다. 누구나 자신만의 개인 공간을 가질 수 있을 만큼.
“왜죠?”
“왜냐하면, 난 당신을 알기 때문이죠.”
질문을 승낙으로 받아들인 알료샤가 남자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사파이어, 당신 이름이죠?”
남자가 경계하는 기색을 띄자 알료샤가 재빨리 덧붙였다.
“나도 동업자입니다. 벤체슬라스와는 몇 번 일을 같이 한 적이 있죠.”
벤체슬라스라는 이름이 나올 때 남자의 어깨가 흠칫 떨리는 것을 알료샤는 놓치지 않았다.
“그가 이렇게 만들었나요?”
“당신 누굽니까.”
“난 이름이 많습니다. 알렉스, 알렉세이……. 내 친구들은 날 알료샤라고 부르죠. 알료샤라고 불러주세요.”
“난 당신 친구가 아닌데요.”
“알렉산드라이트.”
뜬금없이 광물 이름을 딴 코드네임이 나오자 남자의 눈이 둥그레졌다. 마치 사람에게 개 목줄을 갖다 댄 것 같은, 그런 놀라움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나 역시 보석이고, 보석을 깎는 사람입니다. 내 스스로가 작품이고 내가 나 자신을 만드는. 이해되나요?”
전혀. 이해될 리 없다.
“그래서 나한테 용건이 뭡니까?”
알료샤는 대답 대신에 손을 뻗어 남자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쥐었다. 남자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알료샤의 손을 밀어내려다가 갑자기 고통스런 신음을 흘리며 옆구리를 쥐었다.
“다쳤나요?”
남자는 알료샤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반응으로 보건데 분명히 갈비뼈가 나갔다. 그뿐이 아니라 남자는 날파리가 붙은 듯이 발작적으로 자신의 머리를 털어냈다. 명백하게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의 반응이었다. 놀라서 커졌던 알료샤의 눈동자가 동정으로 휘어졌다. 곧 그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불쌍해라…….”
예상치 못한 소리를 듣자 남자가 “이건 또 뭐야?”하는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 얼굴을 알료샤가 덥썩 잡았다. 이번에는 남자가 안간힘을 써도 그 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미친놈은 힘이 센 법이기에.
“내가 도와줄게요.”
알료샤는 버려진데다 부상까지 입은 강아지를 발견한 어린아이처럼 남자를 소중하게 품에 안았다. 남자가 숨을 헐떡이며 그 품에서 도망치려고 했지만 부러진 갈비뼈의 고통만 더 가중시킬 뿐이었다. 알료샤는 남자의 등을 토닥이며 괜찮다고 속삭여주었다.
급기야 남자가 욕지기를 내뱉고 말았다.
“이거 완전히 미친놈 아냐!”
사파이어는 퐁네프 다리까지 나왔다가 휴식을 취하기 위해 강변으로 내려갔다. 다리 위와 달리 사람은 별로 없었다. 사파이어는 강둑에 앉아 흘러가는 강물에 멍하니 시선을 풀었다.
죽지 않았다는 점에서 행운이다. 갈비가 두 대 나갔고 가벼운 뇌진탕이 있었고 몸의 이곳저곳을 물어뜯긴데다가 실제로 살점이 파인 곳도 있지만 어쨌든 살아있다는 점이 중요했다.
고문실에 들어가면 그냥 나오는 법이 없는데 어쨌든 이번에는 운이 좋다고 할 수 있었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한 건지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벤체슬라스는 그냥 분노하는 일이 없고, 한 번 화를 내면 어설프게 끝내지 않는다.
이번에는 분명 어딘가가 절단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손가락이라든가, 발가락이라든가, 잃어버려도 몸을 움직이는데 크게 지장 없는 선에서. 그가 마음먹고 사파이어를 제거하려고 했다면 지금쯤 여러 토막으로 조각나서 각각 다른 장소에서 시신이 처리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벤체슬라스가 폭력을 기술로 승화시킬 수 있는 것은 그 폭력이 규율에 기반을 둔 것이기 때문이다.
요 며칠간 사파이어는 약간의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그 뚱뚱한 영국인이 죽어가며 울고 애원하고 소리친 것도 그렇고, MI6 요원이 이해할 수 없는 분노를 터뜨리며 달려든 것도 그렇고. 이해할 수 없는 감정들이 한꺼번에 몰아닥치니 제아무리 무감각한 사파이어라도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느낌. 그게 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벤체슬라스의 폭력은 그것을 잊게 해주었다. 흠집이 난 보석을 다시 갈무리하고, 보강하고, 새로 긁어내고, 다시 새것처럼 만들고……. 그리고는 새로운 고객에게 다시 대여할 준비가 된 것이다.
혼란스럽던 것은 사라졌다. 그가 보는 세계는 이전처럼 무채색이고 낭비 없이 절제된 세계로 돌아왔다. 감정의 파편이 던지는 불꽃같은 색깔의 티끌들은 없었다.
사파이어를 재교육시킨 벤체슬라스는 의심 없이 사파이어를 밖에 내보내주었다. 보석은 안락한 곳에 내버려두면 빛이 바랜다. 꺼내어서 갈고 닦고 햇빛 아래에 과시하듯 치장하고 사람이 사용해야한다. 그래야 값어치가 있다.
아직은 훈련을 다 소화할만한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몸이 나을 동안은 파리 시내의 지리를 조금이라도 더 자세히 알아두는 편이 합리적이다. 그래서 사파이어는 거리를 걸었다.
지하철을 타고 욕을 먹고 시비가 걸리며 사람들 사이를 스쳐 지나다녔다. 얼굴도 기억할 수 없는 친절한 행인들이 이따금씩 붕대를 칭칭 감은 그에게 괜찮냐고 말을 걸어오는 경우가 있었지만 사파이어는 그 친근한 관심에 대꾸하지 않았다.
곧 모든 사람이 그를 경멸하게 되었다.
사파이어를 내성적인 성격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무지한데다 사려 깊지도 못한 분석이다. 사파이어에게 세상이 너무나 넓고 혼란스러운 것뿐이었다. 살아있는 것보다는 살아있지 않은 것이나 죽은 것과 더 친한 사람들이 있다. 사파이어는 그런 종류의 인간일 뿐이다.
흘러가는 강물을 멍하니 보며 정신적인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문득 옆에서 어떤 기척이 느껴지더니 누군가가 프랑스어로 인사를 걸어왔다. 고개를 돌리니 말문이 막히는 인상의 남자가 미소를 짓고 서 있었다.
다른 색으로 염색했을 테지만 물이 빠져서 초록색이 되었을 뻣뻣한 머리칼에 붉은색으로 또 염색을 해서 초록색과 붉은색이 얽힌 머리칼을 하고 있는 남자였다.
옷차림새는 말쑥했지만 여느 파리지앵의 절제된 느낌은 없었다. 미국식 개성이라고 해야 할지, 뉴욕 번화가 한복판에 가면 이런 사람을 많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옷차림이었다.
무엇보다도 말문 막히게 하는 것은 그의 태도였다. 인사 한 마디였지만 그는 눈빛이나 몸짓이라든가 얼굴빛 같은 비언어적 표현으로 다양하게 친절함을 내보였다. 누가 보기에도 좋은 사람이라는 판단이 들 정도로.
사파이어의 단순한 세계에 또 형용 못할 복잡함이 비집고 들어오자 사파이어는 잠시 생각하더니 혼란 속에서 대꾸할 말거리를 찾았다.
“미안하지만 프랑스어 잘 못합니다.”
남자는 호의적인 눈으로 사파이어를 훑어보았다. 사파이어가 비사교적인 시선으로 응대해주었지만 남자는 그런 것쯤은 개의치 않는듯했다. 남자는 기어코 사파이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알료샤. 알료샤라……. 알렉세이의 애칭이다. 러시아 사람인가? 슬라브인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하긴 민족과 국적은 별개의 것이니까. 그렇다고는 해도 억양에서조차 러시아어를 감지할 수 없다. 또 다른 첩보원인가?
스스로를 청부업자라고 밝혔다지만 당연하게도 사파이어는 남자를 믿지 않았다. 벤체슬라스의 이름이 그의 입에서 나왔을 때는 살짝 놀라긴 했지만.
뭐라고 표현하긴 힘든데 사파이어는 남자에게 이유를 알 수 없는 거부감을 느꼈다. 자신과 정반대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고. 눈치라는 것을 잘 모르고 남의 감정에 공감도 잘 못하는 사파이어지만 이 남자만큼은 피해야한다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그것은 어쩌면 문명화의 산물인 눈치나 공감 같은 미묘한 개념보다 좀 더 직접적인…….
그래, 생존본능에서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남자가 사파이어를 와락 끌어안았을 때 사파이어의 생존본능이 극에 달했다.
“이거 완전히 미친 놈 아냐!”
어떻게 그 품에서 벗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사파이어는 무사히 도망쳐서 거처로 돌아오는 데까지 성공했다. 알료샤랴는 남자는 마치 종교 지도자가 새로 입회하는 신자를 환영하는 것 마냥 모든 것을 감싸 안아줄 듯한 태도로 사파이어를 끌어안은 채 도닥여주었다.
사파이어로서는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던 것이, 제 아무리 무감각하고 남의 감정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목석이라고 해도 자기가 하는 일이 원한을 많이 산다는 것쯤은 안다. 친구의 얼굴을 하고 등에 칼을 꽂을 적이 넘쳐난다는 것도 알고.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대뜸 친한 척을 하면 그것만큼 이상한 일도 없다.
사파이어가 우려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그저 몇 분간의 포옹 끝에 그를 밀어내고 간신히 탈출할 수 있었다. 갈비뼈와 옆구리가 지끈거려서 절뚝절뚝 느리게 도망쳤지만 알료샤는 더 이상 쫓아오지 않았다.
몇 걸음 걷다가 뒤를 돌아보니 알료샤는 그 자리에서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사파이어를 바라보고 있었다.
“끔찍했어.”
“무엇이?”
저도 모르게 혼잣말이 흘러나왔는데 거기에 누군가가 대답을 했다. 혼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주방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작은 주방 안에서 벤체슬라스가 셔츠 소매를 걷어붙이며 나왔다. 얼굴에는 상냥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뭐가 끔찍했지?”
“아, 그게…….”
사파이어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의 눈동자에 배어나오는 두려움을 읽고 벤체슬라스는 억지로 답을 얻어내려 하지 않았다. 두려움은 뇌가 잘 돌아가지 못하도록 만든다. 벤체슬라스는 멍청이를 만들고 싶지 않다.
그렇지만 조금 전 사파이어가 중얼거린 말은 유념해두어야 했다. 그가 무언가에 대해 표현을 했다. 감상을 했단 말이다. 사파이어가 무엇을 대답해야하고 무엇을 물어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해 혼란스러운 눈으로 그 자리에 서 있자 벤체슬라스가 대신 그 혼란에 대답해주었다.
“얼마간은 같이 있을 거야. 넌 흠집 났으니까. 상처가 나을 때까지 내가 관리해야지.”
왜 벤체슬라스가 본인의 거처에 있지 않고 여기에 있는지,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명쾌한 대답이었다. 그가 사파이어의 곁에 있으면 세상이 단순해지고 명확해진다. 무시무시한 학대를 가하기도 하지만 또 신과 같은 절대적인 권위와 안정감을 주는 존재.
물론 벤체슬라스가 곁에 있어준다는 것은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사파이어는 아직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의 몸은 아직 물어뜯긴 학대와 엄한 교육을 기억하고 있다. 사파이어가 빳빳하게 선 채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지 벤체슬라스가 손을 내밀었다.
“이리 와.”
사파이어는 그 말에 얌전히 따랐다. 사파이어가 가까이 다가오자 벤체슬라스가 사파이어의 허리에 손을 감고 확 끌어당겼다.
“크윽!”
“많이 아픈가?”
“아픕니다.”
벤체슬라스는 얼마 전의 악마적인 잔혹성은 어디 갔는지 세상에 이보다 더 다정한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부드럽고 섬세한 손길로 사파이어의 머리칼을 쓸어 올려주었다. 사파이어는 벤체슬라스가 이끄는 대로 순순히 끌려갔다.
딱히 다른 방법도 없었다. 상처를 쥐고 있는 사람에겐.
벤체슬라스에게선 좋은 냄새가 난다. 그는 코가 아플 정도로 향수를 뿌려대는 유형은 아니지만 필요할 때 적절히 사용하는 미덕은 가지고 있다. 본인은 향수같이 향이라는 흔적이 남는 것을 별로 좋아하진 않는 것 같지만, 원단 무역상으로 일하자면 어쨌든 향수가 필요할 때도 있는 법이다.
그 향수들의 이름은 겐조라던지, 아르마니라던지, 휴고 보스라던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사파이어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얘기다. 베이스 노트가 어떻고 베르가못 향이 어떻고 하는 분석은 필요 없이 좋다 나쁘다로 구분할 수 있으면 그걸로 족하다.
벤체슬라스에게선 페로몬과 뒤섞여 좋은 냄새가 난다.
벤체슬라스의 손길을 따라 침대에 앉은 사파이어가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벤체슬라스는 자신의 매력을 어떻게 다뤄야하는지 아는 사람이다.
“포상입니까?”
“그래.”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요?”
도구가 되어버린 인간과 키우는 개의 세계는 단순하다. 행동이 있으면 보상이 있다.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행동이 잘못된 것이면 그에 따른 벌이 있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상이나 벌이 있다는 것은 받아들이기에 의문이 생긴다. 이유 없이 매 맞는 벌은 물론이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간식을 주겠다고 유혹하는 것 역시.
“다쳤을 땐 잘 먹어야 금방 나으니까.”
벤체슬라스가 이 모양 이 꼴로 다치게 한 것이지만 사파이어는 그걸로 수긍했다. 섹스와 쾌락은 그의 인생에 남은 유일한 단맛이기에.
사파이어는 살해당할 뻔 했다는 것을 쉽게 잊어버리고 보호자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어린아이처럼 손을 내밀었다. 벤체슬라스가 그 손을 맞잡으며 사파이어의 머리 위로 고개를 숙였다가 일순간 움직임을 멈추었다.
희미한……. 레몬과 오렌지의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그것은 잔향이었다. 사파이어가 향수 따위를 뿌릴 리는 없다. 그런 걸 준적도 없고, 사파이어 역시 그런 것엔 관심도 없을 테니까.
사파이어에게 가용자금으로 쓰게끔 푼돈을 얼마간 주기는 했지만 실제로 그가 돈을 쓰는 걸 본 적은 없다. 필요한 모든 것은 벤체슬라스가 제공하고 있으니까. 그럼 이 침입자 같은 향기는 뭘까. 다른 누군가의 향기다.
그러고 보니 사파이어가 “끔찍하다.”는 소리를 했지. 이 향은 그 끔찍한 누군가의 자국일까.
벤체슬라스가 고요한 분석을 하는 사이 사파이어는 왜 그가 움직이지 않나 의아해져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를 뒤로 밀어 쓰러뜨린 뒤 자신도 침대 위로 올라갔다. 사파이어는 아직도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있는 눈치였다.
누굴까. 기껏 닦아놨더니 남의 보석에 지문을 남겨놓은 도둑놈이. 여자 향수는 아니다. 그건 분명하다.
사파이어가 누굴 유혹하고 다닐 거라는 상상도 하기 어렵다. 하지만……. 정말 벤체슬라스의 생각대로만 흘러갈까?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불쾌하고도 상큼한 향기가 퍼져 나오는 사파이어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손은 허리를 감싸 쥔 채, 단단하게 쥐어 자신의 품 안에서 옴짝달싹하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사파이어가 숨쉬기 힘들어진 것인지 가쁜 숨을 내쉬었지만 벤체슬라스가 그 손을 풀어주는 일은 없었다.
“아, 잠깐…….”
목에 묻은 입술이 움찔거리자 사파이어가 어깨를 떨며 자극에 반응했다.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의 귓볼을 물었다. 귓볼을 물고는, 귓바퀴를 입술로 훑고 올라가더니 그의 냄새를 콧속 깊숙이 들이마셨다.
귀에 전해지는 자극에 품 안에 갇힌 사파이어의 떨림이 한층 더 심해졌다. 향을 음미한 벤체슬라스는 섬세한 전채요리를 먹듯이 사파이어의 귀를 잘근잘근 씹으며 맛보기 시작했다. 고문실에서의 혹독한 이빨질과는 달랐다.
애정이 담긴, 자못 장난스러운 잘근거림이었다. 이따금씩 귓등에 작게 소리 내며 키스하는 것도 참아내기 힘든 자극이었다.
“아…….”
기어코 신음이 터져 나왔다.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한숨 같은 신음이었다. 감미로운 괴롭힘을 받아내던 사파이어가 벤체슬라스의 손을 밀어내기 시작했지만 셔츠 아래 감춰진 그의 체형은 날렵하고도 단단하게 근육이 잡힌, 말 그대로 그리스 조각상 같은 것이었다.
모양에서도, 질감에서도. 대리석 같은 손아귀 힘이었다. 밀착한 사파이어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벤체슬라스는 먹이를 물어뜯는 육식동물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귓바퀴를 핥아대던 혀가 귓속으로 침투하자 신음소리가 더욱 아찔하게 커졌다.
“아, 읏, 그만! 하, 응, 귀는, 아앗, 귀, 귀 그만……!”
도망가지도 저항하지도 못하니 품 안에서 파르르 떨다가 몸을 축 늘어뜨린 사파이어에게 벤체슬라스는 말 그대로 가혹한 사랑을 퍼부어주었다. 소유욕이 뚝뚝 묻어나는 애무였다. 귓속이 이상해질 것 같다. 뜨겁고 축축한 물기와 말캉하고도 단단한 심이 있는 혀의 놀림이.
이대로 뇌까지 범해지는 것 같다.
혀끝으로 고막을 툭툭 두들기던 벤체슬라스가 그대로 사파이어에게 속삭였다.
“넌 누구의 것이지?”
“나, 나는…….”
묻고 대답하는 과정에서도 벤체슬라스는 애무를 멈추지 않았기에 사파이어는 연신 신음을 흘리고 아픈 허리를 비틀며 헐떡였다. 머리가 이상해져서 대답하는 것도 간신히 했다.
“당신 거…….”
“너에게 이걸 줄 수 있는 건 나뿐이야.”
“아읏, 아, 아아…….”
“넌 나를 벗어나선 살 수가 없어.”
너에게 고통을 주는 것도, 쾌감을 주는 것도 모두 나의 권한이야. 고통을 잊게 해주지. 그리고 넌 내 안에서 울부짖으면 돼. 다른 놈이 너에게 손대는 건 용납할 수 없다. 넌 나만의 것이야. 나의 작품이야. 내가 살라고 하면 살고 죽으라고 하면 죽는 거야.
벤체슬라스는 레몬과 오렌지향이 나는 침입자의 흔적을 자신의 냄새로 덮어버렸다. 그리곤 그가 망가뜨린 것을 고쳐놓기 위해, 뇌가 녹아내릴 듯한 애무를 계속했다.
“안녕. 또 만났네요.”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파이어는 고개를 슬쩍 돌려 뒤를 확인했다가 그대로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사파이어가 타고 있는 것은 분명히 파리 시에서 공공 자전거로 운영하는 노란색 벨리브인데 어째 앞으로 치고 나가는 순간 속도는 투르 드 프랑스에 나올 법한 경기용 자전거 같았다. 숱한 훈련으로 단련된 다리 근육의 승리였다.
가볍게 인사를 걸었던 알료샤는 사파이어가 자신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그대로 내빼는 것을 보고 작은 상처를 받았다.
정말이지 틈이 없는 남자다. 그래서 알료샤는 민트색 베스파를 타고 사파이어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사파이어에게는 재난의 날이었다. 저 정체불명의 괴한이 또 나타났다. 자전거를 빌린 게 현명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덕분에 지금은 스쿠터에게 쫓기고 있다. 순간적으로 치고 나가는 속도가 빨랐다고 해도 자전거가 원동기에 밀리는 것은 당연한 일. 사파이어는 끈질기게 쫓아오는 알료샤를 따돌리려고 앞바퀴를 확 꺾어 좁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스쿠터가 들어오기엔 좁은 길이다. 알료샤는 사파이어가 숨어들어간 골목 앞에 멈춰 섰다. 멀어져가던 사파이어의 뒷모습을 아련하게 쳐다보던 알료샤는 생각을 굳혔는지 핸들을 꺾어서 그 거리를 떠났다.
뒤를 흘끗 돌아본 사파이어는 알료샤가 더 이상 쫓아오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골목을 벗어났을 때, 눈앞에 알료샤가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안녕.”
사파이어의 두 눈이 전례 없이 휘둥그레졌다. 입술을 꽉 깨문 채 그 자리에 급정거한 사파이어가 앞으로 튀어나갈 뻔 하자 알료샤가 얼른 그를 붙잡아주었다.
“큰일 날 뻔 했네요.”
“당신 때문이잖아!”
“그거야 당신이 도망가니까요.”
알료샤는 마음을 굳게 먹었던 것이다. 계속 사파이어를 쫓아가기로. 그렇게 해서 골목의 끝이 어딘지 계산해 우회로를 돌아 먼저 도착해 있었다.
앞으로 튀어나갈 뻔 했다가 알료샤의 도움으로 간신히 공중에 멈춰 선 사파이어는 당연하게도 아직 자전거 안장 위에 올라타 있었다. 어설픈 무게 균형은 오래 가지 못했다. 자전거가 옆으로 쓰러지면서 사파이어가 그대로 알료샤의 품에 폭 안기게 되었다.
폭이라고 표현하기엔 너무 아담한 감이 있는데 둘의 체격 차이로 보면 적절한 표현이었다.
사파이어는 밀어내고 당기고하면서 실랑이를 벌이다 겨우 알료샤의 품에서 벗어났다. 그의 얼굴엔 명백하게 짜증이 배어나와 있었다.
“당신 진짜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아무것도 없어요. 인사를 했을 뿐.”
“왜 날 쫓아다니는 거야?”
“내가 가는 길에 우연히 당신이 있었을 뿐이라고 대답하고 싶지만 거짓말이니까 나중에 들통 났다간 당신이 나에게 호감을 가질 기회마저 차버릴 테니 그냥이라고 해둘까요.”
한 문장에 저렇게 많은 정보를 담아서는 안 되는 거다. 저게 무슨 소리인가 생각해보던 사파이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쓰러진 자전거를 다시 주워들었다.
“인사 했으니까 이젠 됐겠지. 난 갈 거야.”
“어디 가나요?”
“알아서 뭐하게.”
“가는 방향이 같다면…….”
“따라오지 마.”
알료샤는 충실하게도 사파이어의 말을 어겼다. 사파이어는 옆에서 달리는 민트색 베스파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오늘은 도로의 상태를 보러 나온 거란 말이다. 누군지도 모를 짐 덩어리를 붙이고 다닐 생각은 없다.
알료샤는 자기 자신이 짐 덩어리라고 생각하지도 않을 뿐더러 사파이어가 자신의 짐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그의 해맑은 웃음이 그것을 증명했다.
둘의 낭만적인 여정은 바스티유 광장에서 끝났다. 참지 못한 사파이어가 자전거를 반납해버린 것이다. 사파이어는 광장을 뒤져서 구시대의 유물에 가까운 공중전화를 찾아냈다. 알료샤는 그럴 마음이 없었지만 사파이어가 “들어오기만 해 봐라.”하는 눈빛으로 너무나도 강렬하게 자신을 쏘아보았기 때문에 문을 열고 공중전화 박스 안으로 같이 들어가고 싶어졌다.
사파이어는 벤체슬라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접니다.”
“접니다.”
벤체슬라스는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와서 이상하다고 생각했고, 전화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을 수 없는 목소리라서 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벤체슬라스는 전화를 받고도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그러다가 “사파이어?”하고 되묻자 전화기 저편에서 “예.”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건 무슨……. 무슨 전화로 하고 있나?”
“공중전화입니다.”
“왜지?”
“보고드릴 사항이 있습니다.”
벤체슬라스가 “말해봐.”하고 대답하기도 전에 작은 실랑이가 일더니 전화기가 누군가의 손으로 넘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곤 목소리가 바뀌었다.
“여보세요?”
사파이어가 무슨 일에 휘말린 걸까. 온갖 가능성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경찰이나 공권력의 손에 붙잡혔을 가능성도 있다. 그럴 경우엔 주저 없이 사파이어를 버릴 준비도 되어 있다. 벤체슬라스는 목을 가다듬은 후 대답했다.
“누구십니까.”
“오랜만입니다. 나 기억하나요? 알렉세이입니다.”
알고 지낸 알렉세이가 한 둘인가. 하지만 저 말투는 기억이 난다. 애석하게도 잊기가 힘들다.
“알료샤?”
“당신에게 그렇게 불러도 된다고 허락한 기억은 없는데요. 알렉세이라고 불러주시죠.”
한편 수화기 너머에 있는 사파이어는 알료샤를 거의 죽이려 들고 있었다. 진심으로.
뒷처리야 언제나 시체처리반이 대신 해주었기 때문에 이렇게 인파가 많은 곳에서 사람 하나쯤 죽여 버려도 별 문제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알료샤는 사파이어의 그런 살의를 마치 어린아이 장난 받아주듯이 하하 웃으면서 손짓 몇 번으로 넘겼다.
“댁의 보물을 길에서 우연히 발견했어요. 우. 연. 히.”
이제야 상황파악이 됐다. 사파이어에게서 풍기던 레몬과 오렌지향은 이 재수대가리 없는 이상주의자의 것이다. 불쾌감 때문에 벤체슬라스의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 냄새를 지우고 자신의 냄새를 덧입히려고 쓸데없는 고생을 했다.
“남의 물건에 대한 배려나 존중이란 게 아예 없으신데, 알렉세이 씨.”
“귀중한 물건은 품에 안고 다녀야죠. 혼자서 늑대가 득시글거리는 소굴에 방치해둘 게 아니라.”
“본인이 늑대라고 인정하시는지?”
“전혀? 길 가다가 지갑 주은 사람 정도가 적당할 것 같은데?”
둘 사이에 말이 점점 짧아지고 있다. 알료샤는 한 손으로 사파이어를 제압하다가 슬슬 성가셔졌는지 사파이어를 자신의 단단한 팔뚝 안에 가두었다. 좁은 공중전화 박스 안에 성인남자 둘이 서로 껴안고 있는 것을 보고 행인들이 침을 뱉으며 지나갔다.
사파이어는 죽여 버리겠다는 눈으로 알료샤를 노려보았지만 알료샤의 시선은 수화기 너머 저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다. 살짝 미소를 띈 채.
“내가 제안 하나 하죠, 벤체슬라스 씨?”
“제안?”
“엊그저께 이 남자를 처음 봤는데. 상태가 너무 안 좋더라고. 가정교육을 못 받아서 물건 험하게 다룬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내가 보기에도 참 딱하더이다. 돈 줄 테니까 이 물건 나한테 팔죠? 얼마 받으렵니까?”
“팔라고?”
“팔라고. 너 돈에 환장한 걸레잖아.”
일순, 한 톨의 온화함을 간신히 유지하던 어조가 돌변했다.
수화기 저 쪽의 벤체슬라스는 팔짱을 낀 채 방금 전 알료샤의 발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입이 찢어질 것 같이 귀 끝에 걸렸다. 거래 제안에 대한 화답이 아니었다. 저 새끼를 어떻게 갈기갈기 찢어 죽일까 하는 행복한 상상에 대해서였다.
“너 거기 꼼짝 말고 기다려라, 거지새끼야.”
그리고는 전화가 툭 끊어졌다.
뚜 뚜하는 신호음이 들리는 수화기를 사파이어에게 들려주며 알료샤는 “큰일 났다, 우리.”하고 자못 과장스런 태도를 해보였다.
“당신 주인이 상당히 화가 났나봐요.”
사파이어는 대답하지 않았다.
“걸레를 걸레라고 하지 그럼 뭐라고 해.”
알료샤는 반성의 기미가 조금도 없었다. 그러기는커녕 전화박스 밖에서 더러운 야유를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징그러운 키스를 날려주기까지 했다. 무형의 키스를 받은 행인들이 기겁을 하며 그 자리를 떠났다.
알료샤는 품에 안은 사파이어를 더욱 단단히 껴안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나랑 떠날래요?”
“뭐?”
“나랑 떠나요. 내가 기회를 줄게요. 저런 남자랑 같이 있지 마요. 당신은 더 소중히 대우 받아야 하는 사람이에요. 그런 식으로 당신을 망가뜨려선 안 되는 거예요. 내가 당신한테 기회를 줄게요. 한 번 생각해봐요.”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세공사 벤체슬라스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게 내가 도와주겠다고 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벗어난다? 그의 통제 밖으로? 여태까지 생각해보지 않았던 주제다. 사파이어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지?”
“왜냐니…….”
“왜 벗어나야하지?”
시종일관 웃음으로 대하던 알료샤가 심각한 눈으로 사파이어를 내려다보았다. 정말 심각한 동정이었다.
평생 철창 안에 갇혀 지낸 짐승은 철창 밖의 세상을 상상하지 못한다. 햇빛과 자유라는 건 오히려 미지의 두려움으로 가득 찬 존재일 것이다. 그는 심각하게 망가져 있었다. 아니, 망가졌다는 표현은 옳지 못하다. 정상인 무언가에서 정상이지 못한 무언가로 변한 것을 망가졌다고 한다면, 원래부터 정상일 기회가 없었던 그는…….
그를 표현하자면 망가졌다기보다…….
“불쌍해라…….”
알료샤는 사파이어를 자신의 품 안에 더욱 깊숙이 끌어안고 그 정수리에 턱을 괴며 속삭였다.
“내가 도와줄게요.”
그 순간 성난 엔진 굉음이 바스티유 광장에 울렸다. 짐승을 풀어놓은 것 같은 자동차 엔진소리는 교통난으로 시달리는 파리 시내에서 듣기 힘든 스포츠카의 소리였다.
사람들이 쳐다보건 말건 광장 한편에 스포츠카가 멈춰서더니 거기에서 검은 정장을 입은 백금발의 남자가 내려섰다. 벤체슬라스였다. 대리석 조각상 같은 그 얼굴은 바로크 시대에서나 볼 법한 노골적인 분노로 가득했다.
그는 공중박스를 발견하고 곧장 이쪽으로 걸어왔다.
벤체슬라스는 조금의 주저도 없이 공중전화박스의 문을 잡더니 거세게 벌컥 열었다. 그리곤 안에 있는 두 사람을 붙잡아 강제로 끄집어냈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어울리지 않는 괴력이었다.
알료샤가 사파이어를 끌어안고 있었기에 알료샤의 멱살을 붙잡고 끄집어내서는, 또 이해 못할 힘으로 둘을 강제로 떼어내더니 사파이어는 자신의 품에 안고 알료샤를 강하게 밀어냈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알료샤가 제대로 대처하지도 못하는 와중에 돌연 벤체슬라스가 사파이어의 입술을 물어뜯었다.
지켜보던 행인들이 온갖 의미가 담긴 탄식을 터뜨렸다. 과시적이고 과격한 키스였다. 키스라기보다 혀 섞기, 아니 혀 빨기라고 보는 편이 맞았다.
옷만 벗지 않았다 뿐이지 경범죄 카테고리에 들어갈 법한 음란행위였다. 일부러 보란 듯이 사파이어의 입을 탐하며 벤체슬라스는 경멸하는 눈으로 알료샤를 노려보았다. 알료샤는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그 작태를 빤히 쳐다보았다. 둘 사이의 시선은 단 한순간도 어긋나지 않았다.
사파이어는 얌전하게 입 안을 내어주며 반항하지 않았다. 주변의 시선이라던가, 더럽다고 힐난하는 눈빛이라든지, 속삭임이라든지, 그런 것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사파이어의 제한된 시선에 그런 것은 들어오지 않는다.
알료샤는 보란 듯이 사람들 앞에서 사파이어를 탐하는 벤체슬라스도 그렇고,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얌전히 안겨 몸을 내어주는 사파이어의 모습도 기가 막힌 것 같았다.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의 입 안을 마음껏 맛보고 나서 겨우 입을 떼어주었다. 그리곤 사파이어의 팔뚝을 강하게 붙잡고 그대로 차로 질질 끌고 가 조수석에 태웠다.
그대로 내빼는 건가 싶었는데 어라, 다시 돌아온다. 그러더니 갑자기 알료샤에게 발길질을 했다. 정확히 낭심을 노리고 올려 차기를 했는데 알료샤가 거의 동물적인 감각으로 그 다리를 중간에서 막았다. 막긴 했어도 손이 얼얼했다.
“니가 사람이냐, 이 짐승아.”
“안 팔아.”
“뭐?”
“안 판다고. 이 거지 새끼야.”
비록 알료샤가 벤체슬라스를 이름 대신에 “걸레”라든지 “백금발 걸레”라든지 “돈만 밝히는 걸레”라든지 하는 별명으로 부르고 있지만 벤체슬라스의 남을 깔보고 경멸하는 표정 하나만큼은 인정했다.
예술작품에 가까운 오만함이었고, 이 세상 누구에게 보여주더라도 단번에 그 사람을 기분 나쁘게 할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알료샤가 보증할 수 있다.
벤체슬라스의 거지새끼란 단어는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너는 돈이 없다.”부터 시작해서 “네가 지불할 만큼의 능력이나 되냐.”, “이 무능력한 새끼야.”, “입만 산 새끼가.”, “이상주의는 딴 데 가서 포교해라, 사기꾼아.” 등등…….
벤체슬라스는 입을 열지 않고도 표정으로 많은 말을 할 수 있는 재주가 있었다. 알료샤는 누구에게나 다정하고 어딜 가든 친구를 만들 수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죽었다 깨나도 비호감인 이 백금발 걸레에게는 그 원칙이 무색해지는 것 같았다.
어느 정도의 재수 없음일까. 그래, 이 바스티유 광장에서 혁명이 다시 한 번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귀족적인 재수 없음이라고 할까.
그러니까 말 그대로, 프랑스 대혁명을 일어나게 만든 그 당시 귀족 나리 같은 재수 없음이다. 단두대에 세워버리고 싶단 말이다. 정말이다. 목을 잘라버리고 싶다.
벤체슬라스는 낭심 걷어차기를 실패했으면서도 알료샤에게 충분히 모욕을 준 다음 등을 돌려 자신의 차로 갔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에 올라타더니 그대로 짐승 같은 엔진소리를 내며 광장을 떠났다.
이제 혼자 남은 알료샤만 바보 같은 꼴이 되었다. 알료샤에게는 벤체슬라스 같이 사방이 막힌데다가 빠른 속도로 이 장소를 벗어날 수 있는 스포츠카가 없기 때문에 그 주변 모든 행인의 시선을 받으며 민트색 베스파를 타고 여길 떠나는 수밖에 없었다.
알료샤는 이를 부드득 부드득 갈며 베스파에 올라탔다.
사파이어는 벤체슬라스가 파리 시내를 레이싱 코스로 착각한 걸까 하고 짐작할 만큼 아둔하지는 않았다. 벤체슬라스는 전방 그 자체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액셀을 밟고 있었다. 앞을 가로막는 게 그 무엇이든 간에, 그는 철천지원수처럼 모든 것을 노려보았다.
사파이어는 진작 안전벨트를 맸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았다. 어쨌거나 타인에게 잘 공감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런 상황에서 큰 덕목이다. 기본적으로 세상을 불투명한 렌즈를 끼고 바라보는 것 같은 둔탁함이기 때문에 사파이어는 이 상황에서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무감각할 수 있었다.
사파이어가 입을 연 것은 그로부터 몇 분 뒤였다.
“앞에 사람 있습니다.”
단순한 정보 전달이었고 벤체슬라스는 그것에 이렇다 할 대꾸를 하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행인을 간신히 치지 않고 아슬아슬 비껴 지나갔을 뿐.
차에 치이진 않았지만 순간적으로 죽음과 키스할 뻔한 행인이 뒤에서 고래고래 욕설을 지껄여댔다. 그랬을 것이다. 이미 까마득히 멀어져서 어떻게 생겼는지도 보이지 않으니까.
경찰차가 나타나기 전에 스포츠카는 시내를 벗어나 도시 외곽으로 나갔다.
도심이 사라지고 숲길로 들어서자 미친 듯이 밟아대던 속도도 어느 정도 줄었다. 벤체슬라스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스포츠카는 매끄럽게 국도를 달리고 있었다. 조금 전의 상황만 아니라면 둘이서 숲으로 드라이브라도 나온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한참 만에 벤체슬라스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언제부터였나.”
“예?”
“저 놈과 접촉한 게.”
“그저께인것 같습니다.”
“왜 나한테 말을 하지 않았지.”
“중요하지 않은 사안 같아서요.”
중요하지 않은 사안 같다. 하필이면 저 남자가, 가까이 붙어도 기분 나쁜데 심지어 껴안기까지 하고 있었는데도. 중요하지 않은 사안이었다. 그래서 나에게 알릴 의무가 없었다. 그렇게 말하고 있는 건가.
벤체슬라스는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사파이어를 돌아보았다. 사파이어는 감정이 담기지 않은 눈을 깜박깜박 거리며 나지막하게 주의했다.
“사고납니다.”
적절한 충고였기 때문에 벤체슬라스는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몸은 끔찍이 아끼기 때문에 사파이어가 임무 도중 죽거나 불구가 된다고 해도 별로 신경 쓰지 않겠지만, 그게 자신의 이야기여선 안 되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물건보다는 사람이 소중하고 이왕 부서질 거면 물건이 대신 부서지는 게 훨씬 나으니까.
하지만 이 물건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지려고 한다. 손에 들고 있는 칼이 어딘가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해보자. 예상치 못한 순간에 칼자루가 부서진다든가, 어딘가 미세한 흠이 있어서 약간의 충격에도 칼날이 부러져 자신의 눈으로 튄다던가, 그런 최악의 상황을.
유려한 곡선의 스포츠카는 매끄럽게 지면을 굴러 외진 길로 타고 들어갔다. 이제는 완전히 자연으로 뒤덮인 환경이었다. 몇 세기 전에는 말이나 마차가 다녔을법한 길일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쓰는 사람도 기억하는 사람도 없이 방치된 길이다.
길 끝에는 버려진 폐허가 한 채 있었다. 과거에는 귀족의 저택으로 쓰였을법한 돌담 저택이었지만 지금은 벽이 무너지고 지붕이 허물어지고 검은 입구만 떡 벌리고 서 있는 을씨년스러운 곳이었다.
벤체슬라스는 저택 앞에서 차를 멈춰 세우고 시동을 껐다.
“네가 누구 것인지 확실히 각인시킬 필요가 있겠군.”
“저는 당신 겁니다.”
“안 믿어.”
사파이어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어떻게 대응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진실을 말했을 뿐인데 벤체슬라스는 즉각 그것을 부정해버린다. 하지만, 난 거짓말하지 않았는데? 그럼 어떻게 대답해야한단 말인가? 벤체슬라스가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은 알겠다. 어째서지?
알료샤는 처음에는 정말 별 것 아닌 사항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두 번째로 만난 것이고, 선을 넘어가지 않았는가. 그래서 보고하지 않았는가. 이전까지는 별 일 아니었다. 오늘부터 별 일이 된 것이다.
최근 들어 사파이어의 단순한 세계가 혼란스러워지는 것이 잦아졌다. 지금 벤체슬라스에겐 그런 혼란을 풀어주고 이해해줄 배려심은 없었다.
“내려.”
벤체슬라스가 명령하자 사파이어가 머뭇머뭇 차 문을 열고 내렸다. 벤체슬라스가 따라 내리더니 조수석 쪽으로 돌아가 사파이어의 팔뚝을 잡고 이끌었다. 저승사자 같은 손아귀 힘이었다.
지옥의 입구같이 검은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는 아치형의 문 앞에서 사파이어는 처음으로 발을 바닥에 딱 붙인 채 버티고 섰다. 벤체슬라스가 감정 없는 눈으로 사파이어를 돌아보았다. 사파이어의 무감각함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무기질적인, 마네킹 같은 얼굴이었다.
“저는 벌 받게 되는 겁니까?”
“아니.”
벤체슬라스의 목소리는 높낮이가 없고 분노도 깃들어있지 않았다.
“각인 행위.”
설명은 그것으로 충분히 해줬다고 판단했는지 벤체슬라스가 다시 자비 없는 힘으로 사파이어를 잡아끌었다. 사파이어는 마저 끌려들어가기 전에 한 가지를 더 물었다.
“전 죽게 되는 겁니까?”
“반항하면 죽여.”
앞을 보고 대답했던 벤체슬라스가 나머지 말은 사파이어를 똑바로 바라보며 또박또박, 천천히 대답해주었다.
“그러니까 자극하지 말고 따라 들어와.”
음산한 저 돌 벽에는 무엇이 숨어있을까. 중세시대 흑사병의 병균이 아직 저 깊숙한 곳 어딘가에 살아남아서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올 날만 기다리고 있을까? 아니면 왕과 귀족을 떼 몰살시킨 혁명의 광풍이 이곳에도 들이닥쳐 이곳의 주인을 끌고 나갈 때 울렸던 비명이 벽돌 틈 사이사이에 깃들어 있을까?
삶의 자취가 사라진 이 곳, 어둠 속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을까? 짐승인가? 악마인가? 아니면 시체가 있을까? 푸른 수염의 희생자들이 아무에게도 발견되지 못하고 아무에게도 기억되지 못한 채 이곳에 잠들어 있을까? 사파이어도 그 중에 하나가 될까?
공간이 주는 음산함은 무시할 수 있다. 그러나 죽음은……. 죽음은 너무나도 선명하다. 죽음은 뱀과 같이 두 갈래 난 혓바닥을 가진 섬뜩한 존재다. 언제나 산 사람의 목덜미를 노리고 있다.
사파이어는 타인에게 죽음을 선사하지만 자기 자신만은 죽고 싶지 않은 나약하고 이기적인 인간이었다.
본능은 저항하라고 외친다. 그러나 벤체슬라스는 저항하면 죽여 버리겠다고 했다. 저항하지 않으면 살 수 있다. 살 수 있을까? 순순히 따르면 살 수 있을까?
폐허 저택의 안쪽에는 신기하게도 무너지지 않고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방도 있었다. 수백 년 묵은 먼지 냄새가 불쾌한 호기심으로 그들을 맞이했다. 벽에도 눈이 달려 있는 것 같은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빛도 잘 들지 않는 곳에 도착하고 나서야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의 손을 놓아주었다.
사파이어에게 돌아선 그의 얼굴은 유난히 소름끼치게 만든 표정 없는 마네킹 같았다.
“규칙은 하나다. 저항하지 말 것.”
목소리도 높낮이 변화가 없다.
“울고 싶으면 울어. 소리 질러. 비명 지르고. 발악해. 그러나 저항하는 순간 죽인다. 너 하나 못 죽일 것도 없어. 보석은 또 키워내면 되니까.”
사파이어는 모골이 송연해졌다. 벤체슬라스는 임시 고문실을 찾아낸 것이다. 자기 자신도 구조나 안정성을 모를 이런 폐허 속까지 끌고 들어왔다는 건 혹시 모를 우연한 증인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겠지. 아무리 도와달라고 소리쳐도 절대 다른 사람이 들을 수 없는 깊은 수렁 속으로.
이제부터 무슨 짓을 당할까. 한기가 들어서 몸이 덜덜 떨렸다.
“벗어.”
벤체슬라스가 명령하자 사파이어는 벌벌 떨면서도 옷을 벗었다. 속옷까지 다 벗고 알몸이 되자 이번에는 “뒤돌아 서.”하는 명령이 내려졌다.
사파이어는 등을 돌리고 서서 먼지가 가득 쌓인 낡은 책상에 손을 짚고 섰다. 전성기 때는 화려한 책상이었을 것이다. 귀족의 편지가 여기서 작성되고 문건이 오갔을 것이고. 하지만 지금은 먼지와 거미줄과 오래 묵은 쥐똥만 있을 뿐이다.
벤체슬라스가 등 뒤에 다가섰다. 어중간하게 벌리고 선 사파이어의 다리 사이를 툭 차서 벌리더니 그 안에 자신의 하반신을 끼워 넣었다. 아직 바지는 벗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고급옷감 바짓단 위로 단단하게 발기한 벤체슬라스의 것이 느껴졌다.
그다지 뜨겁지는 않은 입김이 목에 닿았다. 격렬하고 무자비한 징벌을 각오했는데, 벤체슬라스는 자신이 낸 멍 자국과 상처 위주로 가볍게 입맞춤을 하고 있었다. 열정적으로 빨아들이지도 않는, 이따금 쪽 쪽 소리만 날 뿐인 키스였다.
차가운 공기에 드러난 맨살에 그 정도의 자극은 감질나기만 했다. 벤체슬라스의 손끝이 사파이어의 살결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하얀 면장갑을 낀 손이 값비싼 예술작품을 다루는 것 같은 모양이었다.
옆구리를 길게 쓸어내리며 골반까지 내려갔던 손이 척추를 타고 등골을 훑으며 다시 목까지 올라왔다. 식욕을 느끼며 군침을 삼키는 호흡이 사파이어의 등에 닿았다. 벤체슬라스는 그의 냄새를 음미하며 자신이 냈던 상처 하나 하나를 핥아주었다. 진하고, 느리게.
잔뜩 긴장되어 있던 몸이 애무로 녹진녹진 풀리자 두려움에 떨던 사파이어에게서도 신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애무가 좀 더 노골적으로 변했어도 사파이어는 단 한 번도 손으로 벤체슬라스를 밀어내지 않았다. 고문을 감내하듯이, 쾌감을 묵묵히 받아냈다.
손가락이 항문을 파고들기 시작하자 사파이어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제아무리 애무로 녹인다고 해도 항문은 질이 아니다. 윤활유 없이는 뻑뻑하다. 벤체슬라스가 지갑에 콘돔이나 성관계시 필요한 물건들을 넣고 다닐 사람일까? 글쎄.
딱 하나 기댈만한 점은 벤체슬라스는 남의 몸이야 어떻든 간에 자신의 몸은 끔찍이 아낀다는 점이었고, 죽인다음 새로 키워내도 되는 암살자 따위를 위해 자신의 신체를 상처내가면서 벌하지는 않을 거라는 것이었다.
그 판단이 옳았다. 손가락으로 입구를 몇 번 지분거리던 벤체슬라스도 이대로 들어가기엔 무리라고 생각했는지 무릎을 꿇더니 그대로 입구를 핥으며 빨기 시작했다.
“아앗! 아!”
각오하고 있었으나 큰 신음이 터져 나왔다. 물기 어린 야릇한 신음소리는 돌 벽을 타고 울려 천장까지 닿았다. 엉덩이에 자동적으로 힘이 들어가 세게 조였지만 벤체슬라스의 두 손아귀는 그 단단한 엉덩이 근육을 꽉 잡고 좌우로 벌렸다.
책상에 기대고 선 사파이어의 팔뚝이 부들부들 떨렸다. 남에게 아래를 빨리면서 침으로 범벅이 되는 기분은 형용할 수 없이 불쾌하고도 난잡했다.
침으로 충분히 적신다음 벤체슬라스는 손가락으로 구멍 안을 팠다. 한 개로 시작해서 두 개, 세 개……. 인간흉기로 키워낸 암살자도 몸 안쪽은 여리다.
벤체슬라스는 다시 일어서서 손가락으로 내장 안을 쑤셔대며 자신의 몸을 사파이어의 등에 밀착시켰다. 사파이어는 입술을 꽈악 깨문 채 고통을 동반한 쾌감을 버텨내고 있었다.
“소리 내.”
벤체슬라스가 속삭였다.
“건방지게 이성 유지하려고 들지 말고 그냥 미쳐버려. 울부짖으라고. 네 가장 더러운 밑바닥까지 내거야. 다 드러내.”
“읏……. 으읏…….”
질끈 감은 두 눈의 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한 번에 밀어붙이면 봇물 터지듯이 터져 나올 것이다. 아찔하게 무너져 내리는 광기의 소리가.
벤체슬라스는 바지의 버클을 풀었다. 재단사에게 치수를 재어가며 맞춘 고급 정장바지가 허벅지까지 내려가며 수트 안에 숨겨진 짐승을 드러냈다. 문명의 껍데기를 벗은 야만이었고, 폭력이었다.
바위 같은 허벅지 근육 위로 굵은 핏줄이 툭 튀어나와있었고 핏줄은 단단하게 발기한 성기까지 이어져 있었다. 유일하게 찾아볼 수 있는 문명의 흔적은 음모가 제모 되어 있다는 것 뿐.
벤체슬라스가 성기 기둥을 사파이어의 엉덩이 골 사이에 밀어 넣고 위 아래로 쓰윽쓰윽 비볐다. 필사적으로 참아내는 사파이어의 신음소리가 점점 더 자제를 잃으며 툭 툭 터져 나왔다. 폭력으로 가득한 의도와 다르게 벤체슬라스는 상냥한 손길로 사파이어의 긴장을 풀어주며 힘을 빼게 만들었다.
물론 이대로 범할 생각이다. 콘돔 없이. 가장 원초적인 모습으로.
성기의 끄트머리가 항문에 맞추어졌다. 꾸욱하고 밀려들어가면서 귀두가 파묻혔다. 튀어나온 요철 부분까지 한 번에 들어오자 사파이어의 허리가 크게 떨렸다.
“하윽!”
그것이 신호탄이었고, 벤체슬라스는 뿌리까지 한 번에 자신을 밀어 넣었다.
“흐아아악!”
이 이상 없을 정도로 구멍이 세게 조여들었다. 벤체슬라스도 진격을 잠시 멈추는 수밖에 없었다. 강제로 밀어붙여진 사파이어가 책상 쪽으로 몸을 빼면 바로 그만큼 벤체슬라스가 몸을 더 밀어붙였다.
결국에는 책상과 등 뒤의 악마에게 갇혀 사파이어는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까드득하는 소리가 나면서 책상에 사파이어의 손톱자국이 났다.
“헉, 헉, 헉…….”
사파이어는 밭은 숨을 몰아쉬며 자신의 안에 가득 들어찬 물건을 어떻게든 적응해보려고 애썼다. 몸 안에 굵고 단단한 칼이 관통해있다고 상상하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사파이어가 간신히 숨을 고르자 벤체슬라스가 허리를 스윽 빼더니 한 번에 쿵 하고 박아 올렸다.
“아악!”
“울어.”
한 번 더 쿵.
“아윽, 아아! 아악!”
“더 울어.”
쿵 쿵 박아 올리는 강도가 점점 더 세졌다. 사파이어는 뒤꿈치를 들어 올리며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앞뒤로도 도망갈 수 없는 상태에서 발꿈치만 들어 올리는 것은 결국 자신의 얼마 남지 않은 자유를 스스로 반납하는 꼴이 되었다.
사파이어는 반쯤 공중에 들린 채로 박히면서 학대당하는 짐승처럼 비명을 내질렀다. 질끈 감고 있던 눈이 어느 샌가 번쩍 뜨였고 곧 다시 충격으로 일그러졌다. 하지만 기특하게도, 단 한 번도 벤체슬라스를 밀어내지는 않았다.
벤체슬라스는 굵고 두꺼운 물건으로 사파이어의 몸 안을 맛보고 탐닉하면서 귀두 끝으로 느껴지는, 몸 안의 부어오른 부분을 마사지하듯이 꾸욱 꾸욱 눌렀다.
고통뿐이던 사파이어의 신음소리에 달큰함이 배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내벽이 부르르 떨리더니 그대로 골반과 허리가 흔들리고 척추와 등까지 파들파들 떨렸다. 사파이어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숨이 막히는 듯한 단말마의 소리를 가쁘게 토해냈다. 사정없이 가버린 것이다.
이제부터 지옥의 시작이었다.
벤체슬라스의 두 손이 사파이어의 골반을 잡고 단단히 고정하더니, 살이 퍽퍽 부딪치는 소리가 날 정도로 빠르고 강하게 박기 시작했다.
“아악! 아아악! 그만! 그, 그만! 제발! 흐아아악!”
고뇌와 비탄의 오열이 터져 나왔다. 발꿈치로 간신히 지탱하던 몸도 이제 거의 책상에 엎어진 상태로 덜컥덜컥 흔들리고 있었다. 낡은 책상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이 거칠게 삐꺽거렸다.
사파이어는 손톱 밑에 나무 조각이 박히는 줄도 모르고 책상을 드드득 드드득 긁으며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도와달라고 소리쳤다. 아무도 듣지 못하는 무력한 고함이었다.
벤체슬라스는 자신이 사정할 때까지 용서 없이 박아댔다. 숨만 거칠어졌을 뿐, 그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사파이어의 몸 안에 길게 사정을 하고 난 후에도 그는 몸을 빼지 않았다.
그 대신 거의 엎어진 상태인 사파이어를 강제로 일으켜서는, 몸 안에 자신을 끼운 채로 걷게 해 돌 벽에 기대게 했다. 사파이어가 울음을 그치지 못하고 가슴을 들썩이면서 얼룩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그만해주세요……. 용서해주세요.”
벤체슬라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물론 애원을 들어주지도 않았다.
벤체슬라스의 손이 골반 앞으로 향했다. 그는 두 손으로 사파이어의 성기를 쥐고는 아직도 가라앉지 않은 기둥을 흔들어대 다시 기운을 차리게 했다. 사정을 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성기는 잔뜩 예민해져 있는 상태였다.
사파이어가 체념한 눈으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자신의 하반신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몸이 장난감처럼 다른 사람의 손에 희롱되고 있었다.
벤체슬라스의 손이 불현듯 귀두를 덮었다. 그리곤 예고 없이 손바닥으로 귀두를 마찰하며 비비기 시작했다.
“아, 안 돼! 흐아악! 안 돼! 아, 아, 아! 아! 그, 그만! 제발! 아! 그만!”
사파이어는 저도 모르게 손을 내릴 뻔 했다. 귀두를 마구 비벼대고 있는 손바닥을 거의 붙잡아 뜯어낼 뻔 했지만 귓가에 거세게 울리는 “죽여버린다!” 한 마디에 반사적으로 손을 뗐다.
사파이어는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가 벽을 짚었다가 쳤다가 안절부절 못했다. 다리는 힘을 잃고 앞으로 쓰러졌고, 성기를 붙잡혀 거기에 몸이 지탱된 채 끝없이 고문당했다.
숨이 넘어가는 소리가 폐에서 그르륵 울렸다. 제대로 호흡조차 할 수 없었다. 눈자위가 희게 돌아가며 혀가 입 밖으로 비죽 튀어나왔다. 이제는, 더 이상, 어떤 것도.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가 완전히 기절하기 전에 손을 떼 주었다. 몇 초간 숨을 쉴만한 간격을 주었다가, 다시 귀두를 비비고 문질러댔다. 몸 안에 집어넣은 자신의 물건을 이따금씩 앞쪽으로 꾸욱 꾸욱 눌러주면서.
벤체슬라스의 손바닥에 뜨끈한 액체가 묻어나왔다. 사정이라기엔 묽었고, 지린내가 났다. 사파이어가 자신의 손에 실금한 것이다. 사파이어는 이제 거의 감각을 잃어갔다. 전기 자극을 주면 꿈틀꿈틀 떨리는 살덩어리 같이, 뇌를 유리조각으로 쑤셔대는 것 같은 자극에 저항하지도 못하며 그저 달뜬 숨만 내쉬었다.
벤체슬라스는 고문을 그만 두고 기둥을 단단히 쥔 채 거친 요철이 있는 돌 벽에 사파이어의 귀두를 잔인하고 느리게 문질러주었다. 고통으로 흘린 식은땀이 고여 있는 사파이어의 쇄골에선 뭐라 말할 수 없이 달콤한 향내가 풍겼다.
벤체슬라스는 그 목을 길게 핥아 올리며 낮게 쉰 목소리로 선언했다.
“넌 내 거야. 너한테 상을 주는 것도 벌을 주는 것도 나야. 난 널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어. 넌 나 없인 살 수 없어. 넌 나만의 것이다. 나의 칼이야. 내가 만든 작품이야.”
사파이어는 마지막 한 음절을 들으며 완전히 정신의 끈을 놓았다. 그렇게 망가진 인형처럼 벤체슬라스의 품 안에 온전히 안겼다.
알료샤는 며칠 동안 파리 시내를 뒤지고 다녔지만 사파이어를 다시는 찾지 못했다. 그에게 반해버렸다던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많이 지나고 나서 둘 사이에 관계가 깊어지면 그럴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 알료샤를 움직이는 행동원리는 동정심이었다. 피멍이 빠지지 않은 얼굴로 자신에게서 있는 힘껏 도망치던 그 남자의 뒷모습을 잊지 못한다. 그는 세상 모든 것을 뒤에다 떼어놓고 달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며칠간의 수색결과 끝에 알료샤가 조우한 것은 유난히 건강상태가 좋아 보이는 벤체슬라스였다. 피부가 반짝반짝 윤기 도는 것이 한 며칠 굶겨놓고 싶을 정도로 재수 없었다. 언제나 그렇듯 관리가 잘 된 백금발의 머리칼은 발칙하게도 비단같이 찰랑거렸고, 표정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오만했다.
주제에 어울리지 않게 지가 무슨 칼 라거펠트라도 되는 것 마냥 위아래 꽉꽉 채워서 검은색 패션으로 도배를 해놨는데, 개성이라는 덕목에서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알료샤가 보기에도 분하지만 인정해 줄 수밖에 없는 특유의 아우라가 풍겨 나왔다.
벤체슬라스는 샹젤리제의 드넓은 길을 걷고 있었다. 별로 말을 섞고 싶지는 않았는데 이런 길에선 숨기가 더 어렵다. 둘은 정면으로 마주쳤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알렉세이.”
“벤체슬라스.”
이 정도면 여느 신사 모임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점잖다. 둘 다 수고했다. 물론 저 짧은 말 안에 헤아릴 수 없는 복잡 미묘한 모욕이 노골적으로 담겨 있었지만 둘 사이의 대화가 걸레와 거지로 시작하지 않은 점만으로도 충분히 칭찬할 만하다.
“이것 참 만나서 안 반갑군.”
“나도 마침 혐오스럽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그래. 그럼 다시 갈 길 가도록 할까.”
“잠깐.”
스쳐 지나가려는 벤체슬라스를 알료샤가 붙잡았다.
“사파이어는 어디 있지? 왜 안 보여?”
“동업자끼리 상도덕이라는 게 있어야하는데 말이야, 알렉세이 씨. 남의 물건에 손대는 거 아니라고 배우지 않았나?”
“넌 사람을 물건 취급하나?”
“안 될 건 또 뭐야? 이 살인자야.”
벤체슬라스가 표독스럽게 쏘아붙였다.
“안될 게 뭐냐고. 살인 청부업으로 먹고 사는 주제에. 이 벌레야. 원한도 증오도 아냐. 넌 빵을 위해 사람을 죽이는 거야. 돈을 벌기 위해서 사람을 죽이는 거라고. 그런 주제에 날 욕해? 네놈 새끼가 나보다 깨끗하면 얼마나 깨끗하냐? 난 적어도 거짓말은 안 해. 피 묻은 돈으로 먹고 살고 싶으면 그 아가리 닥치고 남의 물건에서 손 떼라.”
“생긴 거랑 다르게 입이 참 더러워.”
“남의 장사도구에서 손 떼라고 했다.”
샹젤리제 거리는 워낙 넓은데다가 둘은 대화내용의 험악함과는 다르게 친근한 미소까지 지어가면서 대화하고 있었고 목소리도 크지 않았기 때문에 지나가는 사람들은 둘 사이에 무슨 얘기가 오고가는지조차 짐작하지 못했다.
“날 너랑 똑같은 부류라고 생각해주길 바라는 모양이지? 걸레.”
그 단어가 나왔다.
“내가 직업에 대한 윤리의식이 부족한 점은 사과하지. 근데 난 적어도 인간을 인간으로 봐. 너처럼 사냥개 기르듯이 기르는 게 아니라. 넌 키우는 개가 늙거나 다치면 바로 버릴 놈이야. 네 손으로 끝을 내 줄 배짱도 없다고. 그러고선 네 손 더럽히지 않은 채 깨끗하고 고고하게 살아가지. 넌 그걸 돈을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아니, 그건 그냥…….”
알료샤의 눈이 미소로 휘어지면서 번뜩하고 빛났다.
“닭 새끼만도 못한 겁쟁이 쫄보 새끼야.”
벤체슬라스는 반응이 없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였는데, 그 손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자연히 알료샤의 시선이 그 쪽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주머니의 윤곽 위로 무언가가 툭 튀어나와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하, 이 새끼가?”
“뭐가.”
“시내 한복판에서 총을 쏠 셈인가?”
“안 될 거 없지.”
“동업자에게 말이야.”
“늙어서 침대에서 죽을 생각을 했나?”
“진짜 총이냐?”
“글쎄?”
아니, 저건 허세다. 벤체슬라스는 그럴 놈이 아니다. 바른 말 조금 했다고 총을 갈길 정도면 이미 지난 번 바스티유 광장에서 알료샤를 피떡으로 만들어야했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한 짓이라곤 걷어차기를 한 번 한 것 뿐이고, 그것도 실패했다.
욕을 하고 소리를 지르고 시끄럽게 구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 이건 연기다. 벤체슬라스는 자신의 안온한 삶을 한 순간의 감정에 내다버릴 인물이 아니다.
“우리 둘 사이에 반목이 있다고 하면 정보상이 참 좋아할 거야. 세공사 협회도 말이지.”
“약을 너무 빨아서 뇌에 구멍이 난 건 알겠는데, 알렉세이 씨. 내가 말하는 건 단순한 거야. 내, 물건에서, 손, 떼.”
둘의 대화에서 욕을 빼면 그 내용은 정말로 단순한 것이다. 말 그대로 사파이어에게서 관심을 거두라는 것이다. 사파이어는 벤체슬라스의 장사 도구니까. 돈을 벌어다주는 존재다. 청부업을 하기 위한 도구인 것이다.
알료샤가 동업자라곤 하지만 다른 동업자의 장사 도구에 손을 대다니 있어서 안 되는 일이다. 그런 논리로 보자면 벤체슬라스의 말이 지당하다. 한 가지, 사파이어도 한 명의 인간이라는 점을 뺀다면.
“사람 죽인다고 사람이기를 포기해야하는 거냐?”
“또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려는 건지.”
“그래그래, 네 말대로 피 묻은 돈으로 하루하루의 빵을 산다. 의사도 그렇고 군인도 그래. 누군가는 의도적으로 죽이고 누군가는 실수로 죽여. 사람 죽이는 게 목적이 아닐 때도 있어. 그러나 어쨌든 누군가는 사람을 죽이고, 누군가는 죽어가.”
“우리처럼 죽이고 돈을 받는 게 목적은 아니지, 이 위선자야.”
“우리가 그들과 다를 게 뭔데? 응? 설명할 수 있나? 군인이 나라를 지킨다고, 그것 참 숭고하군. 그 총구 끝에 있는 게 누군가? 사람 아냐? 의사가 사람을 살린다고. 그거 고귀한 일이지. 실수로 죽여 버릴 때도 있지만 어쨌든 의도한 건 아냐. 의도와 명분을 걷어내면 사람을 죽였다는 단순한 사실이 남지. 우리가 그들과 다를 게 뭐야? 의도? 목적? 가리지 않고 죽인다는 거?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부터 죽어 마땅한 놈들까지? 넌 얼마나 많은 강간범을 죽여 봤나? 얼마나 많은 살인자를 죽여 봤고? 너도 너 모르게 나라 몇 개는 구했을 텐데. 안 그래?”
“그래. 그리고 무수히 많은 지옥을 만들어냈겠지. 궤변 늘어놓지 마라. 너 같은 건 청부업이 아니라 사이비 교주 같은 걸 하고 있어야 돼. 이 사기꾼아. 이제 내 앞에서 꺼져. 말 섞기도 귀찮군.”
“사파이어를 놔줘.”
“내 물건에 대해 왈가왈부 하지 마.”
벤체슬라스는 정말로 더 이상 말대꾸를 해 줄 의향이 없어보였다. 알료샤는 스쳐 지나가는 그를 타는 듯한 눈길로 노려보았고, 벤체슬라스 역시 알료샤를 얼음장 같은 눈길로 쏘아보았다.
다행히 그 날 샹젤리제에 총성이 울리진 않았다.
이번엔 좀 심하군.
조르주는 아내와 아이가 딸린 40대 후반의 의사다. 글쎄, 공식적으로 등록된 의사는 아니지만 이 일을 한 지는 20년이 넘었고 그의 손끝에서 온갖 총상과 찢어진 상처와 박살난 육신들이 치유되었으니까 그는 의사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 의료업을 하는, 말 그대로 서비스업을 위한 서비스업을 하고 있었다.
벤체슬라스는 다른 세공사들과 달리 그를 자주 부르지는 않았다. 본인이 망가뜨리지 않는 한 그의 물건은 대체로 상하는 법이 없었다. 그러니까……. 조르주를 부를 정도로 망가지지만 않았다는 것이다. 어중간한 법이 없었다. 아예 다치지 않거나, 아예 죽어버리거나.
조르주는 이 청년을 세 번 봤다. 고용주가 많은 것을 말해주지 않아도 그는 환자의 몸 상태와 상처로 환자가 어디서 무슨 짓을 하고 다녔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이 동양인 청년은 근접전을 선호하는 모양이다. 사용하는 근육과 발달된 모양, 어느 부위가 어떤 식으로 손상되었는지를 본다면. 청년은 크게 다친 적이 없었고 주로 혼자 치료하기 애매한 상처, 예를 들어서 어디가 찢어져서 꿰매야한다던가, 그런 이유로 조르주와 얼굴을 마주 했다. 그 때는 이렇게 침대에 묶여있지도 않고 눈이 가려지지도 않은 상태였다.
조르주는 이 청년의 이름을 모르지만 환자를 구분하기 위해 속으로 자신이 붙여놓는 이름 같은 게 있었다. 이 청년에게는 어린 왕자라는 이름을 붙였다.
별로 이렇다 할 철학적인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 때 마침 자신의 딸이 보고 있던 책이 그것이었고, 동양인이라고 이름 붙이기엔 그의 환자 중엔 동양인이 5명이나 있으니까. 그들에게도 황당한 이름이 붙어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깡빠뉴, 파란 체크무늬 의자, 선인장…….
왜 사람다운 이름을 붙이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그게 오히려 기억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필요 이상으로 친근함을 느끼고 싶지도 않았다. 조르주의 인생에서 열과 성을 다해 사랑하고 집중하고 인간적인 교류를 하는 것은 그의 아내와 딸로 족했다.
어린 왕자는 갈비뼈가 부러져 있었고 한 번은 제대로 처치해놨지만 어떤 강한 충격에 의해 어긋나있었다.
그것을 다시 맞추는데 힘과 땀과 끔찍한 비명소리가 수반되었고. 온 몸에 물어뜯긴 자국과 피멍도 가득했다. 다행히 목숨에 지장을 주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다 나을 때까지는 꽤 짜증나는 쓰라림이 계속될 것이다. 의외로 장기는 멀쩡했다. 마약 같은 건 하지 않는 모양이지.
생식기와 항문 부분의 파열이 제일 심각했는데 성기를 가지고 뭘 한 것인지 너덜너덜하게 찢어진 상처가 있었고 그 부분으로 균이 침투해있었다. 내버려두면 요즘 시대에 보기 드물게도 패혈증으로 죽을 것이기에 일단 항생제를 투여했다.
며칠간 열이 심해질 것이다. 진통제는 계속 투여해야 할 것이고. 이 어린 왕자 입장에서는 차라리 이대로 계속 자고 있는 게 나았다. 눈을 떠봐야 느껴지는 건 고통밖에 없을 것이다. 침대에 묶어둔 이유도 고통 때문에 난동부리지 못하게 한 것일 테고.
짐작해보건대 직업상의 이유로 몸이 이렇게 된 것은 아닐 거다. 이것은 목숨을 건 싸움의 흔적이 아니다. 그래……. 고문의 흔적이다.
잠든 어린 왕자는 숨을 쌕쌕거리며 쉬고 있었다. 조르주가 그에게 베풀어 줄 수 있는 자비라는 게 수면제 밖에 없다.
조르주는 자신의 고객들이 뭘 하는지 잘 알고 있다. 살인자를 치료하는 일로 돈을 버는 게 양심에 걸리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글쎄 사람 목숨에는 경중이 없다고 해둘까. 적어도 조르주는 죽이는 일로 돈을 버는 건 아니다.
자신이 살린 사람들이 누군가를 죽이는 건 그들의 문제일 뿐이다. 그들의 선택이고.
“자, 그럼.”
지금 단계에서는 조르주가 더 할 것이 없었다. 급한 상처는 전부 처치를 해놓았고 무슨 약물을 얼마만큼, 언제 투여할지도 짜놨으니까. 조르주는 어린 왕자가 깨지 않게 침대 시트를 토닥이며 인사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도록 할까요.”
“수고하셨습니다.”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 들어왔는지도 모르게 벤체슬라스가 그의 뒤에 서 있었던 것이다. 조르주가 화들짝 놀라자 벤체슬라스가 사과했다. 벤체슬라스에게 조르주는 적어도 사람 카테고리에 들어가는 인물이다. 일단 자신의 소유가 아니고, 돈과 돈이 오가는 비지니스 관계기도 하니까.
“많이 놀라셨으면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그는 괜찮은 겁니까?”
“죽지는 않을 겁니다.”
물론 죽지는 않을 것이다. 당신이 더 잘 알고 있겠지만. 당신이 이렇게 만들었으니.
“죽지는 않겠지만 4주 정도의 요양이 필요할 텐데요.”
“더 빨리 나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까?”
“내구도가 떨어질 겁니다.”
조르주는 의뢰인의 방식대로 대답을 해주었고, 의뢰인 벤체슬라스는 그의 대답에 만족했다.
조르주가 돈을 받고 떠나자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가 잠들어 있는 침대 한 귀퉁이에 앉았다. 그가 앉자 침대가 한쪽으로 기울어지면서 사파이어가 약기운으로 가득한 잠에서 살짝 깨어났다.
눈이 가려져 있어서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도 분간하지 못할 것이다.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의 신음소리에 대꾸하지 않았다. 내버려두면 다시 잠들 것이다. 3, 2, 1……. 잠에서 깨어났던 숨소리가 다시 쌔액쌔액 거리는 고요한 소리로 돌아갔다.
벤체슬라스는 잠든 사파이어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비록 그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