첩보원은 빗물에 잠들고
파리의 클럽에서 세공사 벤체슬라스는 반갑지 않은 얼굴을 만났다.
“톰! 토마스! 이쪽이에요!”
눈을 마주쳤을 때만 해도 생판 모르는 인물이, 아니 어쩌면 과거에 만났을 수도 있지만 “벤체슬라스”인 지금의 그로서는 기억할 수 없는 인물이 대뜸 얼간이처럼 손을 흔들며 반가워하자 벤체슬라스는 저도 모르게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기억하기에 대충 35번 정도 신원을 바꾸었지만 사실은 그 이상으로, 그가 하고 다닌 사소한 거짓말은 기억 못할 정도로 많다. 직업을 밝히지 않은 채 1회용 이름으로만 사용한 것은 수백 개 정도.
그 기억 못할 정도의 과거 속에서 그를 기억하는 인물이 있다는 건 유쾌하지 못한 일이다. 그것도 조작한 신분으로 자기를 기억하고 있다는 건.
짧은 갈색머리에 새끼 곰처럼 볼이 통통한 남자였다. 그 머저리가 클럽 음악을 뚫어버릴 정도로 크게 외쳤기 때문에 비트에 맞춰 춤을 추던 사람들 몇 몇이 그 남자와 벤체슬라스에게 몇 번 눈길을 던졌다.
이런 제기랄. 저 놈에게 다가가서 입을 틀어막을까 아니면 인파 속으로 사라져서 여기를 떠날까 고민하던 찰나에 그 새끼 곰 닮은 통통한 얼간이가 “실례합니다. 실례합니다.”하며 다른 사람들을 밀치고 한 손에는 마티니 잔을 들고 다가왔다. 잔 안에 동동 떠 있는 올리브가 위태롭게 요동쳤다. 저게 옷에 쏟아지기라도 한다면…….
벤체슬라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톰! 세상에, 여기서 보게 되다니!”
남자는 넉살 좋게 웃으면서 아는 척을 했다.
“나예요! 벤자민 로빈스! 기억 못하는 거 아니죠?”
기억할리가. 벤체슬라스는 모험을 하기로 했다. 그는 기억도 못하는 상대방이 오해였다고 멋대로 판단내리길 바라며 사교적이지 못하고 냉담한 시선을 던졌다. 하지만 이 남자는 파리 한복판에서 굳이 영어를 고래고래 외쳐대며 이목을 끌 정도로 멍청해서 그런 미묘한 불쾌함을 눈치 좋게 알아챌 리 없었다.
“이런 세상에, 기억 못해요?”
어떻게 할까. 프랑스어로 쐐기를 박을까? Je ne parle pas anglais?(나는 영어를 못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걸 당신의 착각이라고 몰아붙이기엔 그가 너무나도 확고하게 나는 당신을 알고 있다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어서 쉽사리 떨쳐낼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여기서 모른 척 하고 그를 외면한다고 해도 불쾌할 정도로 요란하게 구는 저 성격이라면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닐 것이 뻔하다. 벤체슬라스는 눈앞의 남자를 전혀 기억할 수 없었지만 일단은 아는 척을 했다.
“벤자민, 벤자민 로빈스 씨라고 하셨습니까?”
“그래요! 역시 톰 당신이 맞군요! 방금 전까지 내가 얼굴만 똑같은 다른 사람을 보고 있나 고민하고 있었어요, 하하!”
이런 제기랄.
“영어를 하지 않았으면 정말 내 착각이었다고 생각했겠는데요. 하지만 당신 목소리나 억양을 들어보니 역시 맞군요.”
“미안한데, 어디서 뵈었는지?”
“예? 하하, 농담이시죠?”
농담이 아니다, 이 얼간아. 빨리 네가 나의 몇 번째 거짓말이었는지 말해.
“진심이라면 좀 섭섭한데요! 런던에서 함께 일했잖아요. 멋진 작전들도 근사하게 해치웠고.”
런던에, 작전이라. 기억을 빠르게 더듬던 벤체슬라스는 드디어 눈앞의 남자가 누구인지 분간이 가기 시작했다. 벤체슬라스가 토마스 크로포드라는 이름으로 활동할 때 재수 없게 들러붙던 남자다.
그 때 벤체슬라스의 신분은 런던증권거래소의 직원이었고 이 남자는……. 세세한 직함까지는 기억 안 나지만 어딘가 커다란 금융사 소속이었다는 것만 기억난다. 워낙 날파리같이 사람을 귀찮게 한다는 인상이 강해서 나머지는 까먹고 말았다.
일보다는 파티를 좋아하는 성격으로, 원래도 어딘가의 귀족 후손이었든가 그 친척이었다. 딱히 일을 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는 있는 사람이었지만 집안의 체면으로 번듯한 일자리 하나 꿰차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 남자가 말하고 있는 “멋진 작전을 근사하게 해치웠다.”는 것은 순전히 벤체슬라스가 그를 이용해먹고 환상을 심어준 것에 불과하다. 이 남자의 직위가 필요했던 의뢰가 몇 개 있었기 때문에 장기말로 사용을 해줬다만 그걸 어디서 오해한 건지 이 남자는 “우린 한 팀이다. 그렇지?”로 받아들이고 있는 듯 했다.
“연락도 없이 갑자기 사라져서 난 또 무슨 일이 있나 했어요. 어떻게 지냈나요? 이런데서 다 보게 되다니.”
“아, 그게.”
뭐라고 둘러댄다. 벤체슬라스는 그의 말이 잘 들리지 않는 듯이 귀에 손을 대고 그에게 몸을 기울였다가 큰 소리로 말했다.
“음악소리 때문에 잘 안 들리니 자리를 옮기죠!”
“그럴까요? 그럽시다!”
안 들린다고 하는 것 치고는 조금 전까지 잘만 알아듣고 대답하고 있었다만 새끼 곰을 닮은 통통한 남자는 그런 사소한 것엔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에게는 대화내용의 사실보다 대화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 중요했으니까.
벤체슬라스는 클럽 화장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화장실이라기 보단 휴게실이라고 하는 편이 옳았다.
변기가 있고 본격적으로 볼 일을 보러 들어가는 곳은 칸이 따로 나뉘어져 있어서 문을 한 번 더 열고 들어가야 했고, 바깥부분은 유쾌하지 못한 냄새나 소리에 대화가 방해받지 않도록 조용하고도 차분한 분위기였다. 클럽음악과 술에 지쳐 잠시 쉬러 들어온 사람들이 여기서 잡담을 나누곤 했지만 지금은 아무도 없었다.
벤체슬라스가 바텐더 앞이 아니고 이런 곳으로 데리고 오는데도 통통한 남자는 여전히 한 손에 마티니 잔을 쥔 채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한두 번 보면 사람이 좋다고 할 성격이고 세 번째부터는 어리석다고 할 것이고 네 번째부터는 아둔함에 화를 낼 타입의 남자다.
“그거 아직까지 들고 있을 겁니까?”
“예? 앗, 아아.”
벤체슬라스의 지적에 남자는 마티니 잔을 대충 근처 탁자에 내려놓았다. 단 둘이만 있게 되자 벤체슬라스는 한층 여유로워져 눈앞의 남자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그래서, 어떻게 지냈습니까? 빅 벤.”
“하하, 그 별명 아직도 기억하는군요.”
“그럼요, 베니 벤 빅 벤.”
아무렴. 그런 별명은 이름보다 깊게 각인되는 법이다. 비록 조금 전까지 눈앞의 남자를 까마득히 잊고 있었을지라도.
“바쁜 와중에 프랑스까지 휴가차 온 것은 아닐 테구요?”
“금융사 말입니까? 그건 그만 뒀어요. 재미가 없어서.”
뚱뚱한 남자가 손사래를 쳤다.
“그것보다 당신을 찾고 있었습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듣자하니 원단 무역 쪽으로 직업을 바꾼 것 같던데요?”
“그건 어디서 들었습니까?”
“여기저기에 친구가 좀 있지요.”
벤체슬라스의 얼굴이 무섭게 날카로워졌다. 직업이 바뀐 걸 알았다면 이름이 바뀐 것도 알았을 테고 국적이 바뀐 것도 알았을 것이다. 눈앞의 단발성 장난감이 필수적인 사냥 목표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남자는 자신에게 목숨의 위기가 닥쳤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해맑게 웃었다.
“이름도 바뀐 거 같지만 분명히 또 무슨 특수 임무를 수행중이겠죠. 안 그래요?”
“……그래요.”
“혹시 저번처럼 여왕폐하와 관련된 일인가요?”
“그건 기밀입니다.”
“아, 그렇군요. 괜한 걸 물어서 미안해요. 비밀은 지켜야죠.”
이런 멍청이가 있나? 그 때 했던 말들을 아직까지 전부 믿고 있다니?
머릿속에 어떤 꽃밭을 간직하고 있는 건진 모르겠지만 이 남자의 상상대로라면 지금 당장은 벤체슬라스에게 불이익이 될 게 없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죽여 버리기보다는 앞으로 어떻게 나오나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불러줘요. 우린 팀이니까요.”
“조국을 위해서.”
이 우스꽝스러운 연극에 동참해주기 위해 벤체슬라스가 자못 엄숙한 얼굴로 말하자 해맑게 웃던 남자도 자세를 바로 하고는 결연하게 속삭였다.
“조국을 위해서!”
지금쯤 그의 머릿속에는 유니언 잭이 휘날리며 God Save the Queen 같은 노래가 울려 퍼지고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런 애국적인 진지함도 얼마 가지 못하고 남자는 다시 쾌활한 강아지 같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당분간은 파리에 있을 예정입니다. 당신이랑도 자주 만나고 싶구요.”
벤체슬라스는 고민에 빠졌다. 역시 죽일까? 죽여서 얻는 게 더 많을까, 잃는 게 더 많을까? 귀찮은 남자지만 이렇게 시끄러운 남자가 세상에서 사라지면 궁금해 할 사람들이 꽤 있다. 무능한 주제에 혈통은 있어서 가문이 조사를 하기 시작하면 입막음하기 골치 아파지고.
그렇지만 살려두면 언젠가 벤체슬라스의 정체를 여기저기 소문내고 다니지 않을까? 워낙 가벼운 인간이라.
이 남자의 행복한 머릿속에서는 벤체슬라스를 영국 여왕 직속의 첩보원, 그러니까 제임스 본드 비슷한 걸로 멋대로 상상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 딴에는 신의를 지킨다고 입을 굳게 다물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똑똑함만큼이나 위험한 것이 멍청함이다. 벤체슬라스는 “다시는 보지 말지요.”하고 딱 끊어서 얘기하는 대신에 화제를 돌렸다.
“일을 그만 뒀다면 지금은 무직입니까?”
“무직이라뇨. 격무에 지쳤던 삶이니 잠깐 휴식을 취하는 거죠. 잠깐.”
퍽이나.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당신을 찾는 게 주된 목적이었어요.”
“왜죠?”
“왜라니……. 친한 친구가 그렇게 사라졌는데 궁금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친한 친구라고 말할 때 그 어감이 어딘지 모르게 거슬렸다. 벤체슬라스는 자신이 잘못 알아들은 건가 싶어서 남자의 눈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다가 슬쩍 떠보기로 했다.
“당신과는 여러 가지 일을 해냈죠. 어쩌면 친한 친구 그 이상으로.”
의도가 다분히 보이는 묘한 뉘앙스지만 어쩐지 남자는 그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눈치가 없기 때문일까, 그 말에 반대하지 않기 때문일까? 그래서 벤체슬라스는 은유의 수위를 조금 더 노골적으로 높여보았다. 말이 아닌 몸짓으로.
벤체슬라스가 남자에게 가까이 밀착하자 남자가 “오, 이런.”하면서 어디다 눈을 둘지 몰라 했다. 하지만 그의 호흡과 공기 중으로 전해지는 미세한 떨림에는 벤체슬라스에 대한 혐오감은 없었다. 혐오감은 오히려 벤체슬라스가 느꼈다.
“내가 좋습니까?”
뚱뚱한 남자는 급작스럽게 눈을 끔벅끔벅하더니 그제야 두어 걸음 정도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즉답으로 “싫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찾고 있을 뿐.
“아니, 저, 그게, 이것 참 난감하군요.”
“난 대답을 원합니다. 내가 좋나요?”
“네.”
뚱뚱한 남자는 있는 용기를 다 끄집어내어 눈을 질끈 감으며 직설적으로 대답했다. 덕분에 벤체슬라스의 차가운 혐오로 물든 얼굴은 보지 못했다.
벤체슬라스는 마음을 굳혔다. 죽이기로.
“우리 사이에 서로 본심을 확인했으니까 툭 터놓고 이야기해보죠. 남자를 좋아합니까?”
“그, 남자를 좋아한다기보다는…….”
“좋아합니까?”
“네.”
“섹스 해 본 적 있나요?”
그 말에 뚱뚱한 남자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런 쪽에선 순진했던 모양이다.
“실제로 해본 적은…….”
벤체슬라스가 입 꼬리를 끌어올려 육감적인 미소를 지었다.
“경험 없이 날 상대할 수 있겠어요?”
“그, 그게. 그게. 그.”
“묵고 계신 거처를 알려주세요. 내가 좋은 도우미를 보내드리죠. 동양인입니다. 체구도 그렇게 크지 않고, 이런 일엔 아주 능숙해요.”
목숨에 대해 치명적으로 능숙하지. 그건 벤체슬라스가 보증한다.
“그가 당신을 도와줄 겁니다.”
뚱뚱한 남자는 벌게진 얼굴을 수습하지 못한 채 부끄러워하는 눈을 깜박깜박 거리고 있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의 주소를 말하기 시작했다.
벤자민 로빈스의 거처는 파리 12구에 위치해 있었다.
평생 일을 안 해도 되지만 그렇다고 펑펑 쓰고 다녀도 될 정도의 재산은 아니라서 파리 시내에 집을 사버린다던가 하는 거창한 짓은 하지 않았다. 파리에서 지낼 동안 머물 집을 임대한 것뿐으로, 그래도 집값이 살인적으로 치솟고 있는 와중에 혼자서 이 정도의 집을 구하는 건 역시 깨나 돈이 있다는 소리였다.
요란한 파티는 좋아하지만 어딘가 소심한 구석이 있는 남자라고 할까. 4인 가족이 살아도 되는 집에서 혼자 살고 있는 것이 겉모습은 유쾌하지만 속내는 쓸쓸한 그의 본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사파이어는 등에 밀착하는 슬링백을 메고 진한 남색 후드를 뒤집어 쓴 채 벤자민의 집 초인종을 눌렀다. 여기에 오는 동안 그에게 이따금씩 무례한 시선을 던지는 인종차별이 없지는 않았다.
체구가 작은 것은 아니지만 그의 키는 서양인 평균치보다 작은 편이었고, 인종이야 어쨌든 프랑스인이 아닌 것 같은데다 어딘가 약소국 출신인 외국인인 것 같기 때문에 사람들은 보기 드문 동물을 보듯이 그를 위 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러다 이따금씩 사파이어와 눈이 마주치는 사람들은 질겁하고는 시선을 피했다.
무언가를 죽여 본 사람은 눈빛이 변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죽이는 것을 업으로 삼은 사람은 단발성의 살육보다 더 많은 변화를 눈동자에 품는다. 그런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말 그대로 아무런 유감없이 상대방을 쳐다보기만 해도 상대방이 겁에 질려 벌벌 떨게 만들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은 눈빛 자체가 칼이다. 사파이어의 눈은 흉기로 치자면 겉보기에 깨끗하지만 분명히 여러 사람의 피를 묻혔을 것이 틀림없을 불길한 느낌의 칼날이었다. 딱히 이렇다 할 증거는 없지만 본능적으로 피하게 만드는 위험한 눈.
그래서 사파이어는 몇 몇 사람들의 불쾌한 시선을 받았지만 이렇다 할 시비는 걸리지 않은 채 벤자민의 집 앞까지 왔다. 잠시 기다리려니 문 안 쪽에서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이런!”하는 대꾸가 들려오고 무언가 우당탕하는 요란한 소리가 나더니 곧 문이 열렸다.
“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뚱뚱한 남자가 얼굴을 내밀었다. 그는 문을 누른 사람이 집배원이나 택배 배달원인가 가늠해보며 어리둥절해하더니 곧 누구인지 알아챘다.
“톰이 말한 분이군요. 맞나요?”
사파이어는 말없이 벤자민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벤자민은 침묵이 몇 초간이나 계속되자 슬슬 긴장되기 시작했다. 톰이 동양인을 보낼 거라고 미리 말은 했다지만 혹시 이 사람, 영어를 못하는 게 아닐까? 톰이 암시했고 벤자민이 상상한 바로 그런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이라면 영어를 전혀 못 알아듣는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다.
어느 나라 사람일까. 역시 중국인인가? 벤자민의 눈에 동아시아 사람은 다 그 얼굴이 그 얼굴이라서 어느 나라일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긴장이 불안으로 바뀌는 사이 눈앞의 동양인 남자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깔끔한 영어 발음이었다. 벤자민은 한시름 놓았다.
“그래서, 어, 톰이 말한 대로 그런 일을 하시는…….”
“들어가도 될까요?”
“오, 그럼요. 네. 그럼요. 들어오셔야죠. 들어오세요. 이거 실례했습니다.”
벤자민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동양인 남자의 목소리가 묘하게 나른하고 섹시한 느낌이 있게 허스키한데다가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을 냉큼 집 안으로 들이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다 보게끔 문 앞에 세워놓고 이야기하고 있었다니,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이 둘 모두에게 좋을 것이다.
처참하게 상냥한 성격 때문에 돈을 주고 매춘부의 서비스를 살 때도 벤자민은 자신의 무례에 대해 어쩔 줄 몰라 했다. 하물며 남자와의 첫 경험이라니.
태어나서 처음 경험해보는 것인데다가 자기가 모르는 미지의 세계를 친절하게 알려 줄 사람에게 벤자민은 고맙고도 쑥스러운 복합적인 감정이 들었다. 뭐라고 할까, 벤자민은 화장실에서 쓰는 휴지에게도 “실례합니다.”라는 말을 덧붙일 남자라고 할까.
사파이어는 조금 정신없어 보이는 뚱뚱한 남자를 제치고 집 안으로 먼저 들어가 방의 구조를 파악했다.
복도가 있고, 제일 첫 번째 방이 커다란 거실. 프랑스식 건물답게 창문이 크고 채광이 좋다. 창문에는 프라이버시를 위해 커튼을 치기는 했지만 거리에서 이따금씩 소리가 넘어온다. 비명소리 같은 게 밖으로 새어나갈 위험이 크다.
거실의 뒤편에는 식당과 부엌이 있었는데 남자가 스스로 요리하지는 않는지 상태는 매우 깨끗했다. 멋진 식칼세트가 보이지만 몇 번 사용하지 않은 것 같다. 거실을 나와 복도 옆은 작은 화장실. 화장실과 욕실은 창문이 작은데다 높이 달려 있어서 환기용도로 쓰이고 채광은 처참한 수준이다.
욕실에서 처리하면 핏자국 지우기가 수월할 것이다. 하지만 소리를 막을 수 있을까? 어중간하게 목격증언이 생기면 뒤처리하기가 귀찮아진다.
2층집이었고, 2층 계단은 복도 끝에 있었다. 사파이어가 1층을 둘러보고 2층 계단을 가만히 보고 있자 벤자민이 다가와 등 뒤에서 속삭였다.
“2층은 침실이에요. 그럼……. 바로 올라가시겠어요?”
사파이어는 등 뒤를 흘끗 돌아보더니 손을 내밀어 벤자민의 손을 덥썩 잡았다. 갑자기 손을 잡힌 벤자민이 흠칫 놀라며 반사적으로 손을 빼더니, 헛기침을 하며 다시 사파이어의 손을 조심스레 마주 잡았다.
뭘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이 뚱뚱한 얼간이의 얼굴이 못된 장난을 앞둔 흥분으로 얼룩지는 것을 보고 사파이어가 나직하게 말했다.
“올라가죠.”
“네. 네에…….”
벤자민은 그게 자기의 의무라도 되는 듯이 앞장서서 계단을 올라갔다. 생각해보면 자신이 집 주인이고 이 남자는 일단 손님이다. 손님에게 집 소개를 하는 건 집 주인의 의무가 맞다.
이 남자의 갑작스런 스킨십에는 약간 놀랐지만 앞으로 더 대단한 신체접촉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익숙해져야겠지. 벤자민은 기대감으로 커다란 콧김을 흘렸다.
2층에는 방이 세 개 있었다. 큰 방, 중간 방, 작은 방으로 나뉘어 있었고 원래는 세 개 다 침실로 쓰이는 모양이었지만 지금은 벤자민 혼자 살고 있기 때문에 두 방에서 침대를 빼고 작은 방은 창고로, 중간 방은 서재로 쓰고 있는 것 같았다.
서재라고 해봐야 모양으로만 책장을 넣어놓았을 뿐이고 온갖 잡다한 물건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뭘 하고 싶은 건지 짐작이 가지 않는 방이었다. 가장 큰 방이 침실로, 벤자민과는 인연이 없어 보이는 커다란 더블침대가 놓여 있었다.
자, 어디서 죽일까. 사파이어가 벤자민의 손을 놓고 잠시간 고민했다. 죽이려면 어디서든 죽일 수 있다. 문제는 자신의 증거를 남기지 않는 것.
벤자민은 방 안을 가만히 둘러보는 사파이어의 모습을 보고 두 손을 만지작거리며 긴장된 희열을 느꼈다. 이제 곧 저 사람이 나에게 여흥을 베풀어주겠지. 그동안 동영상이나 책으로는 많이 봤지만 실제로 하는 것은 처음이다.
준비는 이것저것 많이 해두었다. 나름대로 샤워도 꼼꼼하게 했고, 윤활유나 콘돔 같은 것은 필수로 준비해두었고, 혹시 몰라서 구슬이나 딜도같은 도구들도 종류별로 구비해뒀다.
이제서야 감상할 여유가 생겼지만 동양인 남자는 자신의 취향이 아닐 뿐이지 꽤 잘 생긴 편이었다. 이국적인 매력이라고 할까, 자신이 항상 보는 미남들과는 반대 방향의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어딘가 야성적이기도 하고, 그러면서 이상하게도 소년 같은 구석이 있는 얼굴이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정말 오해하지 말고 들어주세요. 성인이 맞나요?”
사파이어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방 안을 자세히 둘러보았다. 특히 창문 같은 곳을.
“미리 말해두는 건데 혹시라도 미성년자라면……. 그러니까 나는 그런 취향도 아니고 그런 것에 관심도 없고 복잡한 일에 얽히고 싶지 않아요. 당신들은 대체로 나이보다 젊게 보이니까요. 그냥 확실하게 해두고 싶어서 물어보는 거예요. 물론 톰이 보냈으니까 믿기는 하지만 그래도 혹시…….”
“쉿.”
조용히 하라는 신호에 벤자민은 입을 다물었다.
어디서 죽일지 결정한 사파이어는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벤자민에게 돌아섰다.
“잠시 준비하고 오겠습니다.”
“준비라고 하시면…….”
“준비하고 오겠습니다.”
동일한 말을 반복하며 사파이어가 벤자민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벤자민의 얼굴이 다시금 확 달아올랐다. 그는 웃는 수밖에 없었다.
“다녀와요.”
입이 귀 밑까지 걸린 얼간이를 두고 사파이어는 서재로 쓰이는 중간 방으로 들어갔다.
침실에서 죽일 것이다. 긴장이 풀린 순간 단번에. 그 편이 빨리 끝날 것이다. 핏자국은 내버려두고, 사파이어가 자신의 흔적을 지우고 자리를 뜨는데도 수월할 것이다. 나머지는 뒤처리반이 와서 잽싸게 치우겠지.
사파이어는 등에 매고 있던 슬링백에서 손도끼를 꺼냈다. 날 부분까지 검은색으로 처리된 다목적 손도끼로, 손잡이 부분은 특수 플라스틱으로 처리되어 있지만 단단해서 부러지거나 날이 빠지지 않고 무엇보다 손에 잡는 감각이 좋았다.
도끼를 몇 번 휘둘러보고 손목을 푼 사파이어는 등 뒤에 흉기를 숨기고 다시 침실로 들어갔다.
벤자민은 팬티만 남긴 채 옷을 벗은 상태였다.
벤자민은 사파이어의 손에 들린 도끼를 보고 잠시 동안 ‘도끼를 이용한 SM플레이가 있던가?’하고 의아해했다. 두툼한 살집에 도끼날이 한 번 박히고 나서야 벤자민은 정신을 차렸다.
“으아악! 우웁!”
벤자민이 비명을 지르자 반사적으로 사파이어가 벤자민을 와락 끌어안고 입을 틀어막았다. 도망가려는 벤자민을 끌어안은 터라 뒤에서 안은 모양이 되었다. 다른 손으로는 도끼를 다시 휘두를 채비를 하고 있었다.
피를 철철 흘리는 벤자민이 이제 선명한 통증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생존본능에 빨간불이 켜진 벤자민이 입을 틀어막고 있는 손가락을 물어뜯으려고 하자 사파이어가 재빨리 손을 내려 벤자민의 목뼈를 틀어쥐었다.
“컥! 커헉!”
이 상태로 도끼를 찍어 넣으려면 꽤 불편한 자세가 된다. 사파이어는 벤자민의 무릎을 쿡 찍어서 앞으로 걷게 했다. 벤자민이 비틀비틀 걸어 앞에 있는 침대로 향하자 사파이어가 뒤에서 몸으로 밀어 벤자민을 쓰러뜨렸다.
체구로 치면 사파이어보다도 크고 살집에서 나오는 힘을 절대 무시 못할 텐데 도끼를 한 번 맞은 충격 때문인가 제대로 힘을 못 내고 있는 것 같았다. 벤자민이 훌쩍훌쩍 울었다.
“죽이지 말아요, 제발.”
사파이어는 벤자민이 난리를 치느라 피가 이리저리 튀어서 미끌미끌해진 도끼 손잡이를 다시 쥐었다. 피 튀는 걸 감안하고 잘 미끄러지지 않게 처리를 하고 왔는데도 이 모양이다.
도끼보다는 역시 전기톱 같은 게 좋았을까? 작은 걸 고른다 해도 도끼보다 크기 때문에 보류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게 가장 깔끔한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
사파이어가 도끼를 콱 내리찍었다. 벤자민이 새된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옆으로 홱 트는 바람에 도끼는 푹신한 침대 시트를 찍고 말았다. 사파이어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가만히 있어.”
“싫어! 싫어! 싫어! 살려줘! 살려줘! 사람 살려! 아악! 사람 살려!”
사파이어가 다시 벤자민의 목뼈를 잡고 부러뜨릴 듯이 콱 누르자 벤자민의 눈동자가 희게 돌아갔다. 입은 금붕어처럼 뻐끔거릴 뿐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그르륵 그르륵 숨 막히는 소리가 위험하게 흘러나왔다.
사파이어는 그대로 벤자민의 머리에 도끼를 꽂아 넣을 생각이었다. 그 때, 죽음을 앞둔 벤자민이 초인적인 힘을 내서 사파이어를 확 밀쳐냈다.
어어, 이게 아닌데. 사파이어가 기우뚱하더니 뒤로 허리가 접혔다. 그대로 침대 밖으로 굴러 떨어졌다. 다행히 손에 쥔 도끼는 놓치지 않았다. 벤자민은 소리 지르기를 멈추고 침대에서 기어 내려와 침실 한 구석에 있는 서랍장으로 엉금엉금 기어갔다.
뒤에서 사파이어의 손목이 벤자민의 푸짐하게 살찐 발목을 잡았지만 벤자민은 발작적으로 다리를 흔들어 그것을 털어냈다. 태어나서 이만큼 필사적인 때가 있었을까. 겨우 서랍장에 닿은 벤자민은 사방에 피와 지문을 묻혀가며 서랍장의 문을 열고 무언가를 꺼냈다. 총이었다.
제대로 끝을 보려고 도끼를 크게 치켜들었던 사파이어가 자신에게 향하는 총구를 보고 모든 동작을 멈추었다. 벤자민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사파이어에게 겨눈 총을 양손으로 쥐며 외쳤다.
“쏘, 쏠 거야! 살인자!”
눈물, 콧물, 피로 범벅이 되어 엉망이었지만 그는 더 이상 친절한 신사가 아니었다. 결연한 의지를 다진 뚱보, 뭐 그 비슷한 생물이었다.
벤체슬라스의 말로는 무기 같은 건 없을 거라고 했는데 정보가 잘못된 모양이다. 임무를 끝마치고 나면 보고할 때 이 점도 알려야지. 세공사가 알려준 정보와 현장의 정보가 어긋나는 일은 종종 있는 것이다. 그것을 현장에서 암살자가 어떻게 잘 융통성 있게 넘기느냐가 실력의 차이였다.
사파이어는 총을 겨누고도 쏘지 않는 벤자민이 의아해서 고개를 갸웃했다. 왜 안 쏘지? 자신이라면 쏜다는 경고도 하지 않는다. 그냥 쏴버리지.
확실하게 하기 위해 두세 발 정도 더 쏠 것이다. 지문은 확실하게 지울 거고. 탄환에 남은 강선 때문에 어떤 총에서 총알이 발사되었는지 추적이 가능하겠지만 거기에 내 지문이 없으면 되는 것 아닌가.
왜일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사파이어는 벤자민의 눈에서 익숙한 것을 읽었다. 공포. 대체 무엇에 대한 공포란 말인가? 자기가 죽게 될 거라는 사실에 대한 공포는 충분히 이해한다. 아니 오히려 그것이 공포의 요체 아닌가.
하지만 벤자민의 눈이 말하는 공포는 두 가지 이상의 뜻을 내포하는 것 같았다. 그는 총 쏘기를 주저하고 있다. 사람을 쏴 본 적이 없는 것이다…….
상대방이 자기를 죽이려고 드는 살인자임에도 그는 사람 죽이는 것이 무서워 총을 쥐고도 벌벌 떨고 있는 것이다.
공포. 공포는 언제나 죽음과 맞닿아있다. 공포와 죽음은 친척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공포를 혐오한다.
“그거,”
사파이어가 도끼날 끝으로 총구를 가리켰다.
“총알이 들어있기는 하나?”
타당한 지적이다. 벤자민이 그 생각은 못 해봤는지 “헛!”하고는 재빨리 약실을 확인했다. 다행히 꽉 차 있었다. 머저리 같은 지능 수준이 이때는 크게 도움이 되었다. 세상천지 어떤 바보가 총알을 완전히 채워 넣고 장전한 상태로 보관하고 있단 말인가. 잘못해서 발사되기라도 하면 누가 죽으려고?
“그렇군.”
사파이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쏠 건가?”
“쏘, 쏠 거야! 다가오지 마! 이 살인자! 사, 사람을, 사람을 도끼로 찍다니!”
“왜 말만 하고 쏘지 않지?”
“그, 그, 그건, 그건, 묻지 마! 닥쳐!”
벤자민이 총을 굳건하게 쥔 그 상태로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3살짜리 어린아이처럼 얼굴이 일그러지는 모습이 사파이어에겐 퍽 흥미로웠다. 저렇게 큰 남자도 저런 얼굴로 울 수 있군. 벤자민은 2초 정도 통곡하다가 얼른 정신을 차렸다. 총구를 겨눈 손이 저리기 시작했지만 내릴 수가 없었다.
“왜, 왜 날 죽이려고 하는 거야?”
“임무니까.”
“임무? 무슨 임무! 누가 시켰어! 누가……. 혹시 톰이?”
“톰이 누구지. 몰라, 그런 이름.”
“톰이 보내서 왔다고 했잖아!”
“……넌 참 말이 많군?”
임무를 끝마치기도 전인데 사파이어는 깊은 피로를 느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빨리 죽어. 가만히 있으면 아프지 않게 금방 죽을 것을 자꾸 날뛰니까 점점 더 아프기만 하잖아. 아픈 게 좋은 건가? 난도질을 원해?”
“싫어! 죽기 싫어! 안 죽을 거야! 너나 죽어! 이, 이, 바보야!”
초등학생 혹은 그 이하의 어린이나 할 법한 욕이었다. 사파이어는 보통 의뢰 대상에 대해 판단하지 않지만 이번은 예외였다. 벤체슬라스에게 왜 이런 일거리를 주었냐고 따져 묻고 싶었지만 그럴 깜냥은 안 되고, 적어도 이유만이라도 물어볼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굳이 벤체슬라스에게 듣지 않아도 그 이유란 걸 대충 알 것 같기는 하지만.
“톰이, 톰이 날 죽이려고 살인자를 보냈어. 톰이. 나의 톰…….”
배신당한 사실에 부아도 치밀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서러움이 북받치는지 벤자민이 다시 그 3살짜리 어린아이 같은 얼굴로 돌아가 세상 슬프게 울었다.
“그렇게나 좋아했는데! 그렇게나 사랑했는데!”
솔직히 말하면 사파이어는 슬슬 눈앞에서 희극이나 개그 콩트 같은, 그런 연극 비슷한 것을 보는 느낌이 들었다. 사람이 빨리 죽지 않으면 이런 모습들을 보이기 시작하는구나. 새로 알게 된 사실이다.
여태까지 사파이어가 죽여 온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드라마를 가지고 있었을까? 자신만의 이야기, 자신만의 최후, 그 감정의 격렬함이란? 이제는 영영 알 수 없는 일들이다. 그들은 모두 죽어 진흙 속에 묻혔고 어둠 속에서 잊혀졌다.
그러나 그 이상의 깊은 통찰은 아무래도 사파이어에겐 무리였기 때문에 슬슬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할 듯싶었다.
사람이 흉기로 찔릴 때의 단말마는 어떻게 시기적절하게 틀어막아 크게 울려 퍼지진 않은 모양이지만 역신이 따로 없는 이 남자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 것들은 이미 침실 창문을 넘어 거리까지 울렸을 것이다.
특히 살인자라는 단어. 근방 이웃들은 그런 소리를 듣고 모른 척 하지는 않을 것이다. 파리 12구는 치안상태가 좋은 동네고 그 조용한 안전을 위해 사람들은 기꺼이 비싼 돈을 내고 여기서 사는 거니까.
그 평화가 깨지는 걸 누구도 원치 않을 것이다. 가만 내버려두지도 않을 것이고. 누군가는 이미 경찰에 신고했을지도 모르지.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사파이어의 행동이 빨라졌다.
도끼를 택한 것은 목표가 살집이 꽤 있다고 들어서다. 칼로 처리하자면 두터운 살집 어디에 급소가 숨어 있는지 찾아내지 못하고 실수할 확률이 높다. 그 실수로 인해 치명상을 입히지 못한 채 피부를 베기만 하거나 피만 튄다면 목표는 목 잘리다가 만 닭처럼 난리를 치며 사방을 뛰어다닐 것이다.
그나마 도끼가 나은 선택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소음이고 뭐고 처음부터 총을 써야하지 않았나 싶다. 소음은 이미 이놈이 다 만들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총알이 그득그득 들어 있다고 해도, 완벽하게 장전이 되어 있고 오발의 위험이 없다고 해도, 100미터 밖에서 쏴도 목표를 맞출 수 있는 총이라고 해도 이 남자는 절대 사람을 쏘지 못할 것이다.
계기가 있으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사람과 자신이 죽는다 해도 사람을 죽이지 못해서 결국에는 죽는 사람이 있는데 이 남자는 후자였다. 본인도 어렴풋이 그것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목소리만 시끄러울 뿐이었다. 작은 개가 지레 겁먹고 요란하게 짖어대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파이어가 번개같이 도끼를 휘둘러 총을 쳐냈다. 쇠가 캉하고 부딪치는 소리가 나며 벤자민이 총을 떨어뜨렸다. 엉엉 울면서 자신의 삶이 왜 이토록 불쌍한지 자책하고 있던 벤자민이 놀라 휘둥그레진 눈으로 곧 닥쳐오는 죽음을 마주보았다.
마지막으로 그의 눈동자에 비친 것은 씁쓸한 얼굴을 하고 있는 사파이어였다.
다음 순간, 벤자민의 척추에 도끼날이 틀어박혔다.
피칠갑을 한 동양인이 어떻게 사람 눈에 띄지 않고 파리 시내를 관통해 숙소로 돌아왔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사파이어는 유령 같은 존재니까.
이 일을 하면서 단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한 처리반이 지금쯤 벤자민의 집에 투입되어 시체와 증거들을 치우고 있을 것이다. 사파이어는 자신의 소지품 중에서 멀쩡한 건 등에 맨 슬링백 밖에 없는 것을 보고 헛웃음 비슷한 것이 나왔다.
이런, 내가 유머감각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일단 입고 있던 옷은 전부 벗었다. 태울 것이다. 재는 세느 강에 버린다. 도끼는 벤체슬라스가 수거해 갈 것이다. 피해자의 혈액이 덕지덕지 묻어있으니까.
나가기 전에 이미 바닥에 비닐을 깔아두었다. 그래서 피가 말라붙기 시작한 옷과 소지품을 바닥에 툭툭 떨어뜨려도 카펫에 남은 흔적이 묻지는 않았다. 지금 당장은 샤워가 필요하다. 이 핏물을 씻어내는 것 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탁자에는 벤체슬라스가 두고 갔을 물 한 병이 있었지만 갈증보다도 끈적한 불쾌감이 싫었다. 그래서 사파이어는 평소의 규칙을 깨고 물을 마시지 않은 채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GPS로 사파이어가 벤자민의 집까지 갔다가 다시 숙소로 돌아온 것을 확인한 벤체슬라스가 직접 사파이어의 숙소로 찾아왔다. 사파이어에게 파리는 아직 낯선 환경이다. 길을 잃기라도 한다면 찾아내는 게 고생이다.
알아듣는 언어는 많지만 할 수 있는 언어는 그리 많지 않고 프랑스어는 사파이어에게 있어 알아듣지만 말로는 못하는 언어에 속했다. 경찰, 아니 일반 시민이 “여기서 뭐하고 있나, 길을 잃었나, 도와줄까.” 따위의 질문을 해도 대충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알지만 자기가 이렇다 저렇다 사정설명은 못할 것이다.
행동으로 봐선 정상적인 관광객은 아니고 아마 불법체류자 비슷한 취급을 받겠지. 그러다가 경찰서에 끌려가서 취조라도 받으면 골치 아파진다. 그런 귀찮은 일들이 벌어지기 전에 벤체슬라스는 아예 개에게 목줄을 달아놓듯이 사파이어에게 GPS를 부착해놓았다.
물론 아무 말 없이 붙여놓은 건 아니다. 벤체슬라스는 그런 야만인이 아니니까. 사파이어에겐 충분히 설명을 해두었고 사파이어로서도 이게 자신의 목숨줄이라는 걸 감지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GPS가 망가지거나 떨어질 것 같으면 사파이어가 알아서 잘 보관할 것이다.
파리로 거처를 바꾼 다음 첫 임무를 이런 걸로 주게 되다니 벤체슬라스는 속으로 개탄했다. 돈이 되는 일은 아니다. 오히려 그 모든 비용을 자기 지갑에서 처리해야 하니까 훌륭한 마이너스라고 할 수 있다.
벤자민 로빈스를 처리한 일이 순전히 이성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은 인정한다. 상당한 분량의 감정적 이유가 들어가 있었고, 딱히 부정하고 싶지도 않다. 불쾌하단 말이다. 어리숙한 저능아가 유아기의 둔탁한 본능으로 섹스하자고 졸라대는 것 같다. 생각만 해도 역겹다.
그런 걸 감안하고서라도 벤자민을 남겨 둘 이유, 이를테면 돈이 벌린다든가 신변의 안전이 보장된다던지 하는 것들이 있다면 벤체슬라스는 얼마든지 그의 물건을 빨아줬을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벤자민은 그 정반대의 일들을 터무니없이 해낼 인물이었다.
내버려두면 벤체슬라스의 목숨이 위험해질 만큼.
섹스 이야기를 좀 하자면 벤체슬라스는 자신이 걸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섹스는 도구다. 흥정의 대상이고.
사파이어에게 몸으로 보상해주는 것은 키우는 개에게 먹이를 주는 것과 같은 일이다. 충성, 신의, 애정, 모두 좋은 말이다. 개가 쫄쫄 굶고 있을 때는 해당되지 않는 인간의 신화지만. 개와 인간의 관계가 만들어진 것은 인간이 개에게 먹을 것을 주면서부터였다. 보상 없이 짐승의 이빨과 힘을 바라다니 순진한 발상이다.
집에 들어선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의 이름을 불렀지만 대답은 없었다. 물소리가 나는 것을 보니 욕실에 있는 모양이었다. 저번처럼 자신의 목소리조차 듣지 못할 정도로 욕실에서 수음하고 있다고 해도 딱히 혼낼 일은 아니다.
저번에는 임무 전이었고 지금은 임무를 끝마친 후니까. 휴식시간을 어떻게 보내든 크게 나무랄 건 아니다. 몸이 망가질 정도로 자기관리를 놓아버린다면 그때는 제재해야겠지만.
옷을 벗고 같이 욕실 안으로 들어갈까 생각하던 벤체슬라스는 테이블 위에 그대로 놓인 물병을 보았다. 병뚜껑을 따지도 않은 상태였다. 위화감이 들었다. 사소한 변화이기 때문에 사파이어의 신변을 강박적으로 체크하는 벤체슬라스의 습관이 아니었다면 알아채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는 작은 것에 예민하다. 자신이 통제하고 있는 환경에서 일어나는 변수는 자신이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 바깥의 넓은 세상 따위 어떻게 되든 알 바 아니다. 하지만 자신이 왕으로 군림하는 이 세계, 자신과 자신의 작품만이 존재하는 이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그가 연주하는 대로 흘러가야 한다.
이를테면 사파이어가 가지고 있는, 여태 단 한 번도 틀어지지 않았던 습관, 살인을 끝마친 후에는 물을 마신다는 그런 작은 필연 같은 것들. 이것이 어째서인가 이번만은 틀어져버렸다. 이건 중대한 반역이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그 때, 욕실 문이 달칵 열리고 사파이어가 나왔다.
벌써 샤워를 끝마친 모양인지 하반신에 커다란 수건을 스커트처럼 두르고 있었다. 상반신은 아직 물기가 마르지 않은 채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사파이어는 갑자기 나타난 벤체슬라스를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그에겐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으니까. 임무를 끝마치고 보상을 받을 시에는 벤체슬라스가 나타난다. 하지만 그가 곧장 다가오지 않자 사파이어도 이변을 느꼈다. 사파이어가 의문스런 표정을 짓자 벤체슬라스가 물병을 들어 내밀었다.
뭐지? 물론 목이 몹시 마르긴 했다. 사파이어는 그 자리에서 물병 한 병을 다 비웠다. 쉬지 않고 꿀꺽꿀꺽 울리는 근사한 목울대를 보며 벤체슬라스는 자신이 뭔가 착각했나 했다. 거처를 옮기는 건 꽤 오랜만이기도 했고 사파이어에겐 시차가 바뀌는 것도 꽤 민감한 일이다. 아직 생활환경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해 패턴이 약간 틀어지는 건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내 감각이 너무 예민한가? 여태까지 내 감을 믿어서 일이 잘못된 적은 없다. 벤체슬라스는 왜 물을 마시지 않았냐고 추궁할까 하다가 사파이어의 눈을 보고 일단은 묻어두기로 했다. 그럴 가치도 없을 뿐더러 눈앞의 짐승이 욕정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기에.
사파이어는 무릎을 꿇은 채 귀한 보배라도 되듯이 두 손으로 벤체슬라스의 손을 감싸 쥐고 손가락을 빨았다.
처음 핥았을 때의 짠맛은 사라지고 이윽고 입 안에는 손가락의 형태와 질감만이 남았다. 기다란 손가락과 단단한 뼈대, 손톱의 감촉. 남자의 손뼈는 제아무리 우아하게 생겼다고 해도 폭력성이 나타난다. 그 단단한 뼈와 관절을 핥으면서 사파이어는 서서히 눈이 풀어졌다.
손가락만 빨아도 이렇게 황홀하다. 벤체슬라스의 손은 상을 주는 손이기도 하고 벌을 주는 손이기도 하니까. 무한한 권력의 손, 나의 주인님의 손, 신과도 같은 손이다.
사파이어가 가운데 손가락을 물고 뿌리 끝까지 집어삼키며 혀 전체로 손가락의 형태를 음미하고 있자 갑자기 그 손이 꿈틀하더니 사파이어의 혀를 꾸욱 눌렀다. 여태까지는 대리석을 핥고 있나 싶을 정도로 반응이 없었기에 입 안에서 갑자기 움직인 손가락은 굉장한 충격을 주었다.
손가락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혀를 기둥 전체로 만지며 음미하더니 방향을 뒤집어 입천장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지문의 돌기가 입천장의 요철을 하나하나 쓸고 내려가자 사파이어의 어깨가 들썩들썩 흔들렸다. 다물었던 입이 벌어지며 침과 함께 신음이 쏟아지고 쾌감이 오싹하게 등을 강타했다.
다리를 벌리고 무릎 꿇은 사파이어의 가랑이 사이에서는 벌써 성기 기둥이 단단하게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남자의 손가락을 빨면서 발기하는 변태, 이상성욕자. 거기다가 직업적 살인자이기까지 하다. 훌륭한 인간쓰레기다.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의 입 안을 손가락으로 차분히 범했다. 몸 안 쪽을 살살 간지럽히기 시작하는 쾌감에 사파이어의 눈이 나른하게 감겼다.
이 피로감. 이 안락함. 금방이라도 잠들어버릴 것 같은 포근함이다. 절대자의 손이 나를 애무해주다니.
요 근래 사파이어에게 섹스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벤체슬라스는 차근차근 보상을 줄 생각이었다. 때문에 지금 사파이어가 이까짓 것에 잠들어버리면 그것만큼 아까운 일도 없어서, 벤체슬라스는 구둣발을 사파이어의 다리 사이에 밀어 넣어 윤이 나는 구두 앞코로 그의 회음부를 지그시 눌러 올렸다.
차가운 가죽구두가 은밀한 곳에 닿자 사파이어가 흠칫 떨며 눈을 부릅떴지만 그 구두가 주는 압력이 상냥한 것이라는 걸 알고는 달콤한 콧소리를 흘렸다.
입 안에 들어가 있는 손가락을 빠는 혀 놀림이 조금 더 농염해졌다. 그것에 자극받아 벤체슬라스는 자기도 모르게 안 쪽으로, 안 쪽으로 기다란 손가락을 밀어 넣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목젖을 건드리자 사파이어가 발작적으로 놀라며 혀 전체로 손가락을 밀어내더니 기침을 토하기 시작했다.
극히 생리학적인 반응이라서 벤체슬라스도 급히 손을 빼냈다. 사파이어가 정신 못 차리고 한동안 거친 기침을 하는 동안 벤체슬라스는 거의 손바닥까지 침 범벅이 된 자신의 손을 내려다 보며 사파이어에게 말했다.
“딥쓰롯 하려면 더 잘 버텨야지?”
사파이어의 기침을 순간적으로 멈출 정도였다. 동시에 눈동자를 벌어지게 만들 정도였다.
사파이어는 벤체슬라스의 성기를 빨면서 한 손으로는 자신의 것을 부단히 주물러댔다. 벤체슬라스의 뒷모습만 보자면 근사한 수트 차림의 남자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자신의 무릎께에서 뭔가를 열심히 하고 있는 누군가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앞모습은 그렇게 점잖지 못했다.
벤체슬라스는 열심히 움직이는 사파이어의 머리통을 다른 한 손으로 칭찬하듯이 쓰다듬어주고 있었다.
그저 봉사만 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벤체슬라스는 한 쪽 발을 사파이어의 무릎 사이에 밀어 넣은 채 회음부를 계속 자극하고 있었다. 발은 세세하게 힘 조절하기가 어려운 부위다. 구두를 신고 있으면 감각이 더 둔해지고. 아주 살짝 충격을 준다고 해도 상대방에겐 망치 같은 것으로 때리는 느낌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벤체슬라스의 강약 조절은 절묘했다. 그의 것을 입에 물고 있는 사파이어가 끊임없이 신음을 흘렸다. 목젖에 닿을 때까지 스스로 입 안 가득 밀어 넣고 있는 벤체슬라스의 것을 제대로 핥지 못할 정도로 감미로운 자극이었다.
스스로 가하는 가학적인 자극에 흥분했다가 지금은 완전히 위치가 바뀌어버려서 목젖까지 갔던 것을 혀 중간까지 빼고는, 벤체슬라스의 바지춤에 뜨거운 김이 어리도록 숨을 몰아쉬면서 사파이어는 몽롱한 눈으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벤체슬라스는 애원하는 것 같은 그 눈빛을 무심히 내려다보면서 구두 앞코를 강하게 밀어 올렸다.
“웁! 우웁!”
놀란 사파이어가 벤체슬라스의 성기를 깨물 뻔 했지만 간신히 입술로 이빨을 감쌌다. 살덩이로 한 번 감쌌다지만 그래도 이빨이 닫히는 순간의 충격은 벤체슬라스에게도 아픔을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벤체슬라스는 발에서 힘을 빼지 않았다. 사파이어가 그의 발목을 양 손으로 붙잡고 밀어내려고 했지만 이미 힘이 많이 빠진 상태여서 발에 매달리는 꼴 밖에 되지 않았다. 가랑이가 절로 오므라졌다.
손으로 밀어내도, 다리를 오므려도 은밀한 부분을 잔인하다싶게 꾸욱 밀어 올리는 구두에 사파이어는 결국 사정하고 말았다. 자기 것을 쓰다듬지도 않았는데 안에서 하얀 액을 밀어내듯이 쭉 밀려나오는 사정이었다. 사파이어는 질식할 것 같아서 벤체슬라스의 물건을 입에서 빼고 거친 숨을 토해냈다.
“아아, 으, 그만, 그만해주세요. 아윽!”
사정을 했음에도 벤체슬라스는 발을 치우지 않았다. 잘근잘근 밟듯이, 구두를 슬쩍슬쩍 움직여 사파이어에게서 비명이 터져 나오도록 만들었다. 사파이어가 마지막 이성 한 조각까지 내던지고 고문당하는 사람처럼 단말마를 지르자 그제야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를 용서해주었다.
조금 무리시키는 것이 사파이어에게는 오히려 딱 적당한 자극이다. 벤체슬라스는 인체의 한계를 잘 아니까.
사파이어가 바닥에 쓰러져 헐떡거리려는 것을 벤체슬라스가 다시 일으켜 세워 꿇어 앉혔다. 그리곤 머리채를 잡은 채 입을 벌리게 해 자신의 것을 쑤셔 넣었다.
“나는 아직 안 쌌어.”
사정의 여운에 풀어져가는 눈으로 사파이어가 다시 벤체슬라스의 물건을 핥고 빨기 시작했지만 아까 같은 열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최고의 상태다. 벤체슬라스가 입꼬리를 끌어올려 냉혹하게 웃었다.
돌연, 예고도 없이 성기가 입 안으로 끝까지 밀고 들어가 목젖을 쿡 찔렀다. 졸음이 몰려왔던 사파이어의 눈이 부릅떠졌다. 몸 안에 이물질이 파고들려고 하는 불쾌한 자극에 대한 생리적인 반응.
사파이어가 발작적으로 고개를 빼려고 했지만 벤체슬라스의 손길은 일말의 자비가 없었다. 터져 나오는 기침도 입 안에 문 성기에 막혀 갈 곳을 잃었다.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의 질식을 즐기며 피스톤 질을 하기 시작했다.
사람이 목이 졸려 질식하면서 내는 소리는 가래 끓는 소리 같기도 하고 거친 기침소리 같기도 하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위험한 소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벤체슬라스의 가학성에 불을 붙였다.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의 목 안에 사정할 때까지 머리채를 놓아주지 않았다.
딱 식도에 대고 사정한 것 같다. 사파이어가 한 방울도 남김없이 자신의 정액을 삼킨 걸 확인한 벤체슬라스가 단번에 밀어 넣었을 때처럼 또 다시 단번에 자신을 빼냈다.
사파이어는 쿨럭쿨럭 기침을 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목구멍 너머까지 강제로 밀어 넣어졌던 정액 일부가 입을 타고 흘러나와 바닥에 고였다. 입가에는 거친 유린의 흔적으로 벤체슬라스의 음모가 한 가닥 붙어 있었다.
방금 자극은 조금 무서웠을지도 모르겠다.
벤체슬라스는 손가락 하나 까딱 못하는 사파이어를 일으켜 세워 침대로 데려가 눕혔다. 헐떡이던 사파이어가 이걸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걸 짐작했는지 등을 돌려 포복하듯이 기어서 도망치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벤체슬라스의 단단한 손에 몸의 가운데를 붙잡혀서 다리를 벌리기만 한 어색한 상태로 더 움직이지 못했다. 몸의 뿌리라고 할까, 근원, 아니 성기를 붙잡힌 상태였다.
엎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사파이어는 불안한 눈으로 고개를 돌려 자신의 하반신을 내려다보았다.
벤체슬라스가 사파이어의 물건을 막 입에 머금는 참이었다. 그가 해주는 펠라치오는 이따금씩 무서운 것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어서 겁이 날 때가 있었다. 벤체슬라스의 예측할 수 없는 잔악성을 놓고 생각해보자면 입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을 가차 없이 깨물어 버릴 수도 있다.
이빨자국 같이 애정 있는 것이 아니다. 싹둑 잘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려움은 흥분을 일깨는 최음제가 되어주기도 한다. 벤체슬라스는 아까의 잔인한 피스톤 질로 폭력성을 많이 해소했는지 이번에는 시간을 들여 천천히 사파이어를 핥아주었다. 단, 입으로 빨아들이고 핥아 올리는 것은 다정했지만 성기를 잡은 손에서 힘을 빼지는 않았다.
장난감을 손에 쥔 것 같은 모습, 아니 아직 좋고 나쁨을 구별하지 못하는 어린아이가 작은 동물을 손에 쥐고 예쁘다 예쁘다하며 괴롭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사파이어는 침대 시트에 얼굴을 묻고 간간히 억눌리는 신음을 흘리다가 끝내 벤체슬라스의 입에 토정했다. 헐떡이면서, 거기서 끝인 줄 알았더니 그 다음에 닥쳐오는 압도적인 자극에 사파이어는 새된 소리를 흘렸다.
벤체슬라스가 막 사정하고 난 귀두를 혀로 마구 유린했다. 사파이어가 허리를 뒤틀어댔지만 몸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잡혀있는지라 별 소득은 없었다. 벤체슬라스는 손에 쥔 물건을 귀두부터 뿌리까지 길게 한 번 쓰윽 핥고는 입술로 고환을 야금야금 먹는 시늉을 했다. 그 행동 하나하나가 사파이어를 미치게 했다.
지나친 자극에 허벅지부터 발끝까지가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부들부들 떨렸다. 사파이어가 허리를 젖히며 울부짖자 단단하게 닫혀 있던 구멍도 움찔움찔 벌어지기 시작했다. 유혹적인데다가 먹음직스러운 모양새였다.
벤체슬라스는 한껏 희롱하던 성기를 내버려두고 엉덩이를 끌어당겨 구멍을 핥았다. 성기 끝의 고문을 참아내던 사파이어는 고문의 대상이 옮겨가자 조금 전까지 침대 시트를 쥐고 안간힘을 쓰던 것은 어디 갔는지 절박하게 손을 뒤로 내저어 그를 밀어내려고 했다.
“그, 그만. 거긴 싫어요. 거긴 제발!”
벤체슬라스는 애원을 들어주지 않고 먹는데 열중했다. 말랐지만 탄력 있는 엉덩이다. 여자의 골반처럼 넓지는 않지만 근육의 힘이 있다. 구멍은 뜨겁고 쫄깃하다. 내벽으로 파고들면 구멍 안쪽은 여리다.
혀가 안으로 파고들자 사파이어의 저항이 점점 거세졌다. 혀는 여린 점막을 파고들고, 이윽고 내벽을 때리기 시작했다. 손가락이나 성기와는 다른 살아있는 무언가, 독자적인 무언가가 몸 안에서 꿈틀거리며 벽을 쳐대자 사파이어가 이제 쉬기 시작한 목소리로 그만하라며 소리 질렀다.
가장 여린, 숨기고 싶은 몸의 급소를 무방비하게 내주는 것이 무엇보다도 두려웠다. 벤체슬라스는 그런 비명을 즐겁게 들으며 자신이 만족할 때까지 엉덩이를 먹어치웠다.
인간의 수치심을 밑바닥부터 하나하나 부숴가는 쾌감은 마약보다 중독성이 높다. 벤체슬라스는 부르르 떨리고 있는 사파이어의 등과 뒤통수를 육식동물처럼 노려보면서 차근히 엉덩이를 정복했다.
네 몸 곳곳이 모두 내 것이고 내 맘대로 맛 볼 권리가 있다. 원석에 불과한 돌을 보석으로 만든 건 나다. 넌 내 손으로 만들어 낸 작품이니까.
절정과 끝이 존재하지 않은 채 집요하도록 탐닉만 하는 성애의 시간이 느리고 지루하게 흘러갔다.
“보고 드립니다.”
버버리 코트를 입은 짧은 갈색머리의 남자가 휴대폰에 대고 말했다. 파리의 하늘은 우중충하고 햇빛이 구름에 가려서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 남자는 한 손에 든 우산을 내려다보며 펼까 말까 잠시간 고민했다. 전화 너머에서 무슨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손에 쥔 우산에는 신경도 쓰지 않게 되었다.
“지금 확인한 결과 벤자민 로빈스의 사망은 확실합니다. 예. 집까지 왔습니다. 흔적을 많이 지웠더군요. 일반인은 아닙니다. 프로입니다.”
그가 큰 소리로 말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빠른 속도의 영어이기 때문에 지나가던 프랑스인들은 그저 외국인이 전화를 하고 있는가보다 하고 흘끗거리며 가던 길을 마저 갈 뿐이었다.
외국어라는 것이 원래 생경하기도 하지만 그것도 영국인이 영어를 프랑스의 수도에서 하고 있다니 그 말소리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시선들도 있었다. 설명하긴 복잡 미묘하지만.
남자는 그런 시선들은 신경도 쓸 수 없는 상태였다. 사안이 워낙 중대했기 때문이다. 길거리에서 누군가의 사망소식을 상부에 직접 보고하고 있을 정도로.
“서류는 확보했습니다. 누군지는 몰라도 서류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았더군요. 벤자민의 신원 자체가 목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시신 말입니까? 아직 완전하게 발견하지는 못했습니다. 아마 소각장이나 다른 곳에서 처리되고 있겠지요.”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그의 남부 잉글랜드 억양은 상당히 눈에 띈다. 한참 말을 쏟아내던 남자가 조금 전부터 어떤 아이가 자신을 빤히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그대로 등을 돌렸다.
7~8살 쯤 된 아이일까. 사리분간을 제대로 할 수 있는 나이라곤 생각지 않지만 누군가의 기억에 오래 남는다는 것은 그로선 경계해야 할 일이다. 어차피 아이는 자기가 뭘 봤는지도 기억하지 못할 거고 그게 무슨 의미였는지도 모를 테지만.
남자는 현관 앞에서 계속 서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서 문을 열고 벤자민 로빈스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어차피 근처 주민들은 이 집을 빌려서 살고 있는 뚱뚱한 영국인에겐 크게 관심이 없을 것이다. 그가 며칠 전부터 행방불명 상태라고 해도.
남자는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상부 지침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예. 예.”하고 짤막하게 대꾸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상부 측에서도 워낙 갑작스러운 일이라 전화로 보고를 받긴 했지만 앞으로 지령을 내리는 데 있어선 더 신중한 방법을 쓸 것이다. 지금 당장은 필요사항만 전하면 된다.
휴대폰을 코트 주머니에 넣은 남자는 심호흡을 하고 집을 한 번 더 둘러보았다.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아늑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걸 강조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파리 경찰이 신고를 받고 출동한 기록은 없다. 요 며칠 사이 이 동네에서 폭력 사건이 일어난 것도 아니고. 벤자민의 동선을 파악 해봐도 딱히 중간에 사라질만한 곳은 없었다. 그는 증거와 증인을 여기저기 흘리고 다니는 남자다. 정보원으로서는 꽝이지만 반대로 어디서든 그를 찾아낼 수 있다.
그런 그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자, 그럼 로빈스 씨.”
이 세계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건 높은 확률로 죽음을 뜻한다.
“누가 당신을 죽였는지 알아보도록 할까.”
더 이상 이 집에 볼 일이 없는 남자가 현관문을 열고 다시 밖으로 나오자 조금 아까까지 남자를 지켜보고 있던 어린아이가 계속 그 자리에 서서 동그란 눈으로 남자의 일거수일투족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는 아이에게 가볍게 윙크를 해주곤 검지를 입에 대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한 뒤,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천천히 그 골목을 떠났다. 별 다른 인상이 없고 평범한 모습이라서 그의 존재는 금방 사람들에게서 잊히고 말았다.
“오랜만이야.”
카페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던 벤체슬라스에게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벤체슬라스는 남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반쯤만 펴고 읽고 있던 신문을 완전히 접고 누가 말을 걸었나 보았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자연스럽게 굴곡진 검은 머리칼을 어깨까지 늘어뜨린 남자였다.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꽤 느끼하게 생겼지만 잘생긴 축에 속했고 세공사 벤체슬라스의 주관적인 입장으로 보자면 재수 없는 자식이었다.
상대방이 누구인지 알자 벤체슬라스는 낯선 사람에게 기본적으로 내보이는 가면조차 쓰지 않고 냉담한 불쾌함을 있는 대로 내보였다.
“장 바티스트.”
“벤체슬라스.”
웬일로 벤체슬라스가 성씨까지 붙이지 않고 친근하게 이름만 불러준다는 것에 놀랍다는 표정을 지으며 눈앞의 남자가 마주 대답해주었다.
“앉아도 되겠지?”
“싫은데.”
“고마워.”
남자는 벤체슬라스의 말을 무시하고 의자를 끌어당겨 맞은편에 앉았다.
“불쾌하기 짝이 없군, 장 바티스트.”
“벤체슬라스, 내가 몇 번이고 말하는데 그 엉터리 프랑스어 좀 고쳐. 누가 들어도 자네가 외국인인 게 티가 난다고.”
“당연하지. 난 벨기에인이니까.”
“정말 그럴까? 토마스 크로포드라는 이름은 어떻게 된 거야?”
순간적으로 주먹이 나갈 뻔 했다. 벤체슬라스는 얼음 같은 눈으로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남자가 무섭다는 듯이 두 손을 들며 과장되게 말했다.
“죽이지 말아줘. 이번 주엔 할 일이 많단 말이야.”
“남의 뒤를 캐고 다니는 변태 같은 습성이 있나본데.”
“애완견 뒷구멍이나 핥아주는 변태보다야 낫다고 생각해. 그 닌자랑 애인놀이는 잘 하고 있나?”
“같은 세공사끼리라도 남의 작품에 대해 이런 저런 소리를 늘어놓는다는 건 실례라는 걸 잘 알 텐데.”
“자네랑 나랑 실례고 자시고 따질 사이가 아니잖아. 우리 사이에.”
“꺼져.”
“꺼져야 할 건 그쪽이지. 지난번에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일 드 프랑스 근처에서 어슬렁거리지 말라고. 내 밥줄이니까. 국적을 벨기에로 바꿨으면 얌전하게 시골에 처박혀 있어야지. 베를린으로 가기엔 그 쪽 덩치들이 좀 무섭던가? 아니면 고향으로 돌아가기 싫어하는 뭐 그런 반항심 같은 게 있는 건가? 요 독일 촌놈아.”
이젠 아주 대놓고 시비질이다. 이렇게까지 판을 깔아주며 시비를 걸어오면 벤체슬라스는 오히려 싸늘하게 식어서 차분하게 머리가 돌아갔다. 사람이 너무 화가 나면 두들겨 패는 걸로는 끝나지 않는다. 진지하게 살인 계획을 짜기 시작하는 것이다.
“성질을 득득 긁는 걸 보니 뭔가 할 말이 있는 거 같은데.”
“정답이야. 완전 돌대가리는 아니네.”
“할 말 있으면 빨리 지껄이고 꺼지지. 피차 반가운 얼굴은 아니니까.”
“제법인데. 이제 이 정도 도발에는 안 넘어 간다 이건가?”
벤체슬라스는 그 말에는 대꾸해주지 않았다. 속으로는 확실히 답을 정해두고 있었지만 굳이 상대방에게 알려줄 필요가 없었다. 다음번에 선을 넘으면 한두 번 봐주는 일 없이 네 목은 내가 따버리겠다, 뭐 그런 것들을.
남자는 초반부에 무리하게 벤체슬라스의 속을 긁어놓길 잘했다며 태도를 바꾸었다. 그의 이름은 장 바티스트 고디에. 세공사 벤체슬라스와 마찬가지로 그 또한 보석 같은 암살자를 키워내는 세공사, 즉 동업자다.
“내 구역에 들어왔으면 먼저 찾아와서 인사를 했어야지. 반가운 얼굴이 아니라고는 해도. 듣자하니 자네 애완 닌자가 사고 쳤다며?”
“그 뚱뚱한 얼간이 이야긴가.”
“맞아. 이름이 뭐였더라. 하여튼 그 영국인 얘기야. 이 구역 시체처리반이 자네 일만 수임하는 건 아니니까. 업계에도 이런 저런 얘기가 돌지. 자네 물건은 자네 허락 없이 함부로 움직이진 않을 테고, 아마 자네가 시켰겠지?”
“내 개인적인 사정이라서 말이야.”
“자네의 그 개인사정이 꽤 큰 거에 걸려 있던 모양인데.”
“그게 무슨 소리지?”
“MI6가 돌아다니던데 뭐 짐작 가는 거 없나?”
영국 정보기관이 날 찾으러 다닌다고? 벤체슬라스로서는 금시초문이다.
“왜?”
“자네가 사고 쳤으니까 자네가 이유를 알 줄 알았지. 모르는 건가?”
“아니, 왜? 벤자민 로빈스가 MI6랑 무슨 상관이지?”
“그걸 모르니까 물어보러 온 거지.”
“별 영향력 없는 귀족의 먼 친척이라고 들었는데. 덕분에 재산은 좀 있지만 사회적인 명망이고 인지도고 아무것도 없는 그냥 얼간이야. 예전에 몇 번 같이 일한 것도 그 타이틀이 필요해서 잠깐 가지고 논거지 실제로 중요한 직책은 무엇 하나 맡지 않은 인물이야. 그따위 머저리가 정보기관에 연결되어 있으면 오히려 영국의 앞날이 걱정되는데?”
“흐음.”
장 바티스트는 벤체슬라스를 평가하듯이 지긋이 바라보았다. 조각상이나 회화작품을 거래하는 미술상으로서 예술품의 가치를 평가하는 그의 심미안은 종종 사람에게도 적용돼 그 사람의 됨됨이나 거짓말을 간파하고는 했지만, 세공사 벤체슬라스는 아무리 봐도 거짓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모른다면 됐어. 나도 깊게 알고 싶지는 않아. 나한테 불똥이 튈까 물어보러 온 거니까. 그렇다고는 해도 자네는 몸 사리는 게 좋을걸. 나 같으면 다시 짐 싸서 다른 곳으로 도망갈 것 같은데.”
“무슨 얘기가 오가고 있는 거지? 내가 모르는 사항이 더 있나? 벤자민 로빈스가 그렇게 중요 인물이야?”
“모른다니까. 나머지는 직접 알아보지 그래. 나는 그냥 내 주변이 소란스러워지는 게 싫을 뿐이야. 내 위치가 탄로 나는 것도 싫고. 난 자네처럼 철새가 아니니까.”
눈앞의 이 남자를 재수 없는 자식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일정부분 믿을 수 있는 것은 그가 같은 일을 하는 동업자이기 때문이다.
업계의 손해는 그 자신에게도 손해가 된다. 서로서로 암살해버리고 싶은 놈들일지라도 일단 같은 배에 타고 있으면 어쨌든 서로의 뒤를 봐주게 된다. 하나가 걸리면 줄줄 걸려나가는 건 일도 아니니까.
장 바티스트는 가장 신경 쓰이는 문제가 해결 되서 그런지 활짝 핀 얼굴로 돌아와 다시 벤체슬라스의 속을 득득 긁어놓았다.
“그건 그렇고 자네의 동양인 시종은 왜 안 보이지? 너무 혹사시켜서 지금도 호텔에 뻗어있나?”
“죽고 싶나, 장 바티스트.”
“왜, 자네의 기술에 대한 찬사인데.”
“사파이어라면 근방을 정찰하고 있어.”
“정찰이라니, 푸하핫! 군인이야?”
사파이어는 정말로 정찰을 하고 있었다. 그것 말고는 딱히 적절하게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파리는 관광객으로 붐비는 도시다. 관광객이 많다는 건 그만큼 사파이어가 숨어들 수 있게 극동아시아인의 얼굴도 많이 돌아다닌다는 거고, 여기저기서 사진을 찍어대도 남들이 희귀한 동물원 짐승 보듯이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파이어가 프랑스어를 하지 못하는 것도 크게 흠이 되지 않았다. 다들 자기 좋을 대로 중국인, 니하오, 칭챙총 하면서 지나갔을 뿐이니까.
사파이어는 한 무리의 일본인 관광객 틈에 섞여 거리의 구조와 대중교통망을 파악하고 있었다. 일본인들이 어디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자며 우르르 몰려가자 사파이어는 거기서 슬쩍 빠져나오더니 이번에는 미국인들 틈에 끼었다.
휴가 여행을 왔기 때문인지 한껏 들뜬 무리였는데 그들 덕분에 전혀 눈에 띄지 않고 큰 거리를 빠져나온 사파이어는 거미줄같이 뻗은 골목길로 들어갔다.
굵직굵직한 명소에 대해서는 대충 파악해두었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누군가의 목을 따게 될 거라든가, 에펠탑의 정상에서 누굴 밀어서 떨어뜨려 죽인다던지, 그런 암살방법이 쉽게 상상이 가지는 않았다.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다만 랜드마크가 어디에 무엇이 있고 거리가 어느 정도 되는지는 알아둬야 나중에 움직이기 수월해지니까.
프랑스도, 파리도, 사파이어에게는 숱하게 스쳐 지나온 나라 중 하나일 뿐이고 도시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 나라와 도시가 가진 역사나 문화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베르사유 궁전이 얼마나 사치와 향락으로 물들었는지, 프랑스 국민의 분노가 바스티유 감옥을 어떻게 흔들었는지 따위는 사람을 한 번 죽이고 나면 아무래도 상관없는 사항들이 되어버린다.
사파이어의 눈에는 자신과 목표, 사냥꾼과 사냥감, 죽이는 자와 죽는 자가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되면 세상은 꽤 단조로워지고 빛을 제대로 투과하지 못하는 유리처럼 서늘해진다.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가 파리 시내를 돌아다니는 것을 말리지 않았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권장했다. 사파이어는 이전에 임무 때문에 파리에 하루 이틀정도 짧은 체류를 하긴 했지만 장기간 머물러 본 적은 없다.
누군가를 죽이고 나면 결국에 숨는 것도 여기에 숨어야 하는데 그럴 땐 어디로 어떻게 도망쳐야하는지를 알아두는 게 중요하다. 벤체슬라스는 이전에 파리에서 꽤 지냈던 것 같지만 그가 사파이어의 손을 잡고 직접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거리의 구조를 알려주는 일은 없었다.
물건에게는 그렇게 큰 애정을 쏟는 것이 아니다. 벤체슬라스의 태도는 그랬다.
사파이어가 거미줄 같은 골목을 빠져나오자 또 다른 대로가 나왔다. 여기에는 관광객이 별로 없었다. 차들이 지나다니고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고. 한 구역을 끝마쳤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피로감이 몰려왔다.
어떻게 할까. 잠깐 쉰 다음 한 구역을 더 파악해두도록 할까, 아니면 숙소에 돌아갈까. 그렇게 잠시 고민하고 있는 사이 누군가가 뒤에서 사파이어의 어깨를 치며 지나갔다.
“My apology.(미안합니다.)”
단검같이 짧고 재빠른 영어였다. 부딪친 사람도 습관적으로 그 말이 튀어나왔는지 말을 뱉고 나서야 사파이어를 보았다. 버버리 코트를 입은 짧은 갈색머리의 남자였다. 사파이어가 별 반응이 없는 것을 보고 그는 상대방이 영어를 못한다고 판단해 그대로 갈 길을 갔다.
무례하다면 무례할 수 있는 태도였다. 그러나 오늘 하루 사파이어가 겪은 무례함은 이것 말고도 이미 충분히 있었기 때문에 굳이 이것을 가지고 시비 삼아서 피곤하게 일을 더 질질 끌고 싶지 않았다. 사파이어는 부딪친 어깨를 몇 번 툭툭 털고는 숙소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편, 앞서 걸어 나가던 갈색머리 남자는 갑자기 그 자리에 서더니 뒤를 돌아 사파이어를 의심스러운 눈길로 훑어보았다.
짧은 갈색머리의 남자가 이 일을 하면서 가장 많이 한 말은 “네이슨입니다.”고 두 번째로 많이 한 말은 “처리했습니다.”였다. 본부에서는 그의 지칠 줄 모르는 헌신에 경의를 담아 예스맨이라는 별칭을 붙여주었다. 비꼼과 순수한 경탄이 모두 담긴 의미심장한 별명이었다.
모든 첩보원이 언제나 임무를 잘 처리하는 건 아니었지만 남자는 일을 잘 처리하는 비율이 높았고, 상부에 “예.”라고 대답한 적이 “아니오.”보다 많았다.
그의 이름은 네이슨이고 이것은 그가 조직 내에서 두 번째로 바꾼 이름이다. 그의 본명은 입사 서류에나 적혀 있고 입사 서류는 암호화되어 다른 요원들의 신상정보와 함께 보관되어 있다. 그렇기에 그에게 따로 성씨는 필요 없었다.
네이슨, 네이슨 씨, N, 그런 호칭이면 충분했다.
사실 이번 사건은 그렇게 거창해질 일이 아니었다. 본부의 정보공작원을 오피서(Officer)라고 한다면 그 오피서의 휘하 직원들을 에이전트(Agent)라고 하는데 에이전트도 필요할 때마다 각각의 정보원을 두는 실정이었다.
벤자민 로빈스는 오피서까지는 올라가지 못하고 에이전트와 그 밑의 정보원, 하청과 하청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인물이었다. 그가 실제적으로 첩보활동을 할 수 없다는 건 명약관화이기 때문에 그는 주로 물건의 보관이라던가, 이 물건을 저리로 이동한다든지, 뭐 그런 경리부서 직원이나 할 법한 자잘한 일들을 했다.
그것도 공식적인 일은 아니었고 그의 거처를 반쯤 창고 비슷하게 사용하고 있었지만 본인은 나름대로 보람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것도 지금 와서는 전부 끝난 일이 되었지만.
벤자민은 자신이 다루는 게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고 중요한 건지 잘 몰랐던 게 틀림없다. 바로 그 허술한 점 때문에 이따금씩 국가기밀을 여기서 저기로 이동시키는데 그라는 이동수단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것도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연락이 두절되었을 때, 조직원들은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우선은 그가 어떤 정보에 접근 권한이 있었고 현재 무슨 임무에 착수해있는지 체크했다. 그 다음은 그가 머저리인척하며 정보를 빼돌리는 이중첩자가 아니길 바라며 주변 인물을 이 잡듯이 뒤졌고, 그 다음은 그를 직접 찾아내기 위해 발로 뛰었다.
지금이 세 번째 단계였고 정황상 그의 죽음이 거의 확실시되자 이제는 누가 그를 죽였는가에 대해 초점이 맞추어졌다.
기밀서류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누가 손댄 흔적도 없다. 사진을 찍어 가면 골치 아팠을 텐데 기밀서류를 보관할 때 봉인해두었던 장치가 그대로 남아있었기 때문에 일단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폭발흔적이 없고 누군가의 파편이라든가 살점이라든가 DNA가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이건 안전하다는 것이다.
기밀서류가 안전하다면 목표는 이것이 아닐 테고 벤자민만 죽었을 것이다. 그건 사고일까 타살일까? 타살이라면 누가 범인일까? 지금은 냉전시대가 아니다. 7~80년대라면 두 번 생각하지 않고 러시아가 제일 먼저 용의선상에 올라왔겠지만 지금은 딱히 그럴 이유가 없다.
프랑스 정보부가 손을 댔다고 하기엔 역시 또 동기가 걸린다. 벤자민은 정식 요원이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어느 쪽인고 하면 화이트 요원이다. 화이트는 이미 상대국 쪽에서도 대충 정체를 간파하고 있다.
이 녀석이 어느 나라 소속이고 대충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알고 있으니 여차하면 사법기관을 움직여 잡아 넣어버리면 된다. 암살해버리는 게 아니라.
블랙 요원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만 그건 동기를 넘어서서 장르가 달라져버린다. 벤자민 같은 인물에게 살인면허를 주면서 제임스 본드처럼 세계 파멸을 막으라고 할 순 없는 일이다.
벤자민이 허용 가능한 액션 정도라면 하루에 대중교통을 3~4번 정도 연달아 갈아타는 것, 100미터를 전력질주로 뛰는 것, 손을 떨지 않고 침착하게 에이전트에게 연락하는 것 정도다.
블랙 요원은 국가가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해버린다. 임무 중에 발각되어도 그 요원에 대해서 “우리나라와 상관없는 인물이니 어떻게 하든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태도를 견지한다. 그런 암묵적인 룰을 전 세계가 공유한다. 즉결 처형해도 할 말이 없는 입장들이다.
하지만 화이트는 이야기가 조금 복잡해진다. 함부로 죽이기엔 껄끄럽고, 죽일 수도 없다. 화이트는 보통 거래의 대상으로 쓰인다. 이를테면 상대 국가에 잡혀버린 우리 요원들과 교환하는데 쓰인다던가.
화이트가 화이트를 죽였을 것 같지는 않다. 블랙이 화이트를 죽였다면, 대체 왜 죽였단 말인가? 동기가 짐작이 가지 않는다. 기밀 서류에도 관심이 없었고? 벤자민 그 자체에게 어떤 흥미로운 점이라도 있었단 말인가? 약간의 모험과 영웅놀이를 좋아하는 그런 선량한 뚱보가 대체 무엇에 연관되어 있었길래?
여기부터가 네이슨이 제대로 발로 뛰어야 할 구간이었다.
벤자민 로빈스의 사생활을 굳이 캐고 싶진 않지만 지금만큼은 열렬히 사랑에 빠진 스토커처럼 그의 뒤를 캐야만 했다. 벤자민은 명사들과 어색한 친목을 다지기 위해 몇 차례 패션쇼에 참석했고, 인맥을 다지기 위해 클럽에도 갔고, 그 외에 잡다하고 자질구레한 행사들에도 참석했다.
그 모든 사람을 조사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영국 안이라면 가능할지 몰라도 글쎄, 일단 여기는 홈그라운드가 아니지 않은가.
길고 지난한 작업이었다. 네이슨은 정보를 모아다주는 부하들의 부하들에게까지 현찰을 먹여가며 단서를 추적했다. 벽에다 그라피티를 그리는 예술가 집단이 좀 쓸 만한 정보를 물어다주었다.
하룻밤은 벤자민이 클럽에서 어떤 남자와 함께 나오는데 처음에는 일행인 그 남자의 기다란 백금발이 특징적이라 기억에 남았고, 그 다음에는 마치 사랑에 빠진 10대 같이 얼굴을 붉힌 벤자민의 태도 때문에 기억에 남았다고.
세상에 끼치는 해악이라고 해봐야 누구 하나 해치지도 못하고 경찰도 훈방조치로 풀어줄 것만 같은 뚱뚱한 남자가 그토록 수줍어하는 모습은 퍽 인상적이기 때문에 그들은 보기 싫어도 그 모습을 기억하게 되었다고 한다.
둘은 무슨 대화를 하고 있었는데 자세한 내용은 잘 들리지도 않고 지금 와서는 기억도 나지 않지만 어떤 동양인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 것 같다. 벤자민이 더듬거리며 얼간이처럼 몇 번이고 묻는 통에 그 백금발의 남자가 나중에는 짜증을 내면서 뭐라고 확 쏘아붙이고 갔다는 것이다.
대충, 둘 사이에 무슨 약속이 있는데 동양인 남자가 대리인 자격으로 무언가를 해줄 것이다, 그런 내용이었다고 한다.
그들도 일단 네이슨에게 돈을 받고 정보를 파는 입장이라 파리에서 활동하는 정보원들은 대충 기억해두고 있었고 벤자민은 워낙 잊기가 어려운 인상이라서 마치 시트콤 한 편을 보는듯한 느낌으로 그 장면을 보고 있었다고 한다.
백색에 가까운 금발을 길게 기른 남자라니, 특이한 사항이지만 이렇게 많은 인구 속에선 또 그렇게 특이한 게 아니다.
막상 찾으려고 보면 백금발을 길게 기른 남자 따위는 한 트럭도 찾아낼 수 있다. 특징이 더 필요하다. 거기다가 동양인 남자라니 그게 한둘인가? 그렇지 않아도 관광객으로 넘쳐나는 도시다. 이것 역시 더 자세한 정보가 필요하다.
자 그래서, 어떤 백금발의 남자와 접촉한 후 벤자민에게 신원불명의 동양인 남자가 방문할 약속이 되어 있었다. 그 후로 벤자민은 행방불명이 되었고. 네이슨이 벤자민의 집으로 가서 둘러본 결과 정황상 살해흔적을 지운 것 같다…….
그 동양인 남자가 저지른 일인가? 그는 누구인가? 백금발의 남자는 누구고? 첩보원? 어느 기관 소속? 단순한 갱스터인가? 갱이 그렇게 깔끔하게 일처리를 한다고?
발상을 바꿔보자. 거꾸로 올라가보자. 벤자민이 죽었다면 그 살인자는 어쨌든 일종의 히트맨이나 암살자 같은 거라고 할 수 있다. 동기가 어떻든 간에.
사람을 죽인다음에 그 흔적을 깔끔하게 지울 정도라면 혼자서 처리했다기보다 팀 단위로 움직인다는 게 사리에 맞고, 그만큼의 덩치가 있는 조직이다.
유력한 살인 용의자인 그 동양인 남자에 대해 생각해보자. 벤자민이 지능수준 때문에 얼간이라고 놀림 받기는 하지만 작정하고 덤빈다면 왜소한 체구의 동양인 하나를 제압 못하는 것도 아니다.
동양인이 벤자민보다 컸을까? 벤자민이 아무런 위협도 느끼지 않고 그 남자를 집 안에 들였다고? 벤자민이 숨겨놓은 무기 중에 밖으로 나온 건 권총 한 자루밖에 없다. 나머지 무기는 비밀장소에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다.
그 남자가 어떤 목적으로 방문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벤자민 스스로가 그에게 위협을 느끼지 않고 문을 열어준 것은 확실하다.
그 남자는 누구일까? 마약 공급책? 아니다. 벤자민은 마약을 하지 않는다. 그건 확실하다. 정보원 중에도 마약에 손을 대서 결국 폐인이 되버리는 사람들이 있지만 벤자민은 그런 유형은 아니었다.
돈에 관련된 건가? 하지만 벤자민의 계좌는 딱히 이상한 점이 없다. 그런 것 말고 남자가 남자의 집을 방문할 이유가 뭐가 있을까?
혹시 남창인가? 언뜻 상상하기 힘든 방향이긴 한데 영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벤자민의 성적기호까지 확인한 건 아니니까.
그가 게이라고 치자. 그래서 남창을 샀다고 치자. 남창이 집에 방문한 것이고, 벤자민이 문을 열어줬다. 그렇게 가정해보자. 백금발의 남자가 속삭였다는 내용은 아마 남창을 벤자민의 집으로 보내주겠다는 뭐 그런 내용이었겠지. 그렇다면 별 다른 의심을 하지 않은 것도 말이 된다.
하지만 그 남자는 사실 남창이 아니었고, 뭐였을까, 벤자민을 죽일 사람이었다. 암살자였다. 어떤 방식으로 죽였는지는 상상하기 힘들다. 총이었을까. 체구에서 밀린다면 총이 가장 간편한 방법이지만 근방 주민들은 총 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칼 같이 소리가 나지 않는 흉기를 썼다는 건데. 벤자민이 방심하고 있을 때 죽였을까?
가령 이런 것이다. 남창이 서비스를 하러 와서는, 옷을 벗고 이런 저런 준비를 할 테니 시간을 달라고 하는 것이다. 벤자민은 그 일을 앞두고 어느 정도 흥분된 상태로 있었을 것이고. 긴장이 풀어진 상태겠지. 그 때 뒤에서 급습한다.
한 번에 급소를 찌르면 못 죽일 것도 없다. 물론 단번에 죽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벤자민이 숨겨놨던 권총을 꺼냈으니까. 벤자민의 시신과 함께 권총도 사라졌을 것이 분명하고.
결국에는 암살에 성공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벤자민이 지금쯤 헐떡이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본부의 모든 전화기를 울리고 있을 테니까.
그렇게 골똘히 생각에 잠겨 빠르게 걷던 네이슨은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누군가와 정면으로 부딪쳤다. 자신보다는 키가 작은 사람이었는데 네이슨은 어깨를 부딪친 정도지만 그 사람은 몸을 휘청거릴 정도였다.
네이슨은 반사적으로 “미안합니다.”하고 사과를 하곤 그제야 자기가 부딪친 사람을 돌아보았다. 왜소한 동양인이 그를 빤히 보고 있었다. 반응은 딱히 없었다. 영어를 못 알아듣는 건가? 네이슨은 지금 상황에서 딱히 더 사교적으로 대꾸해주고 싶지 않아서 계속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잠깐. 무언가 날카로운 착상이 네이슨의 머리를 스쳤다.
저 정도 체구라면 가능할 것 같다…….
네이슨은 가던 길을 멈추고 다시 고개를 돌려 그 동양인을 쳐다보았다. 동양인은 어깨를 몇 번 툭툭 털고 등을 돌려 다시 가던 길을 가고 있었다. 저 정도 체구라면 가능할 것 같은데…….
사파이어는 방 한편에 설치한 샌드백을 두들겨 패며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뉴스를 듣고 있었다. 프랑스어를 제대로 공부한 적은 없지만 여태까지 주워들은 것들이 있기 때문에 아나운서의 속사포 같이 쏟아지는 말 중에서도 대충 무슨 내용인지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사파이어가 제일 유창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영어다. 나머지는 의사소통에 크게 지장이 없게 알아들을 수는 있지만 사파이어가 직접 입 밖으로 내기에는 실력이 떨어지는 것들이었다.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러시아어, 스웨덴어…….
아시아권으로 넘어가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가 훨씬 더 많아진다. 중국어, 한국어, 일본어, 태국어, 베트남어, 타갈로그어, 말레이어, 몽골어…….
생김새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자신도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의 본래 신원이 그 중 어딘가에 속해있다고는 하지만 내가 그 나라 말을 알아들을 줄 안다고 해서 그 나라 사람이었는가 하고 흥미를 가지는 것까지는 별개의 사안이었다.
사파이어에게 과거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다.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있는 것은 눈앞의 현실이다.
말귀는 곧잘 알아듣는데 말로 대답하는 것은 손에 꼽을 정도여서 잘 모르는 사람들은 사파이어가 귀머거리인 줄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사파이어로서는 별로 대답할 이유를 못 느꼈을 뿐이다.
벤체슬라스와는 영어로 대화하고 있고, 다른 나라 말은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면 문장을 머릿속에서 일단 생각한 다음 내뱉어야 하니까. 두뇌 활동도 열량을 소모하는 일이라 사람을 지치게 한다. 굳이 필요 없는 일에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지 않다.
사람에게서 감정을 거세해버리면 필요한 것 외에는 그다지 바라지 않게 된다. 다른 사람과 예술에 대한 견해를 나눌 필요도 없고, 음식 취향에 대한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고, 요새는 어떤 노래가 좋다든가, 휴가는 어디로 가고 싶다든지, 이상형의 연인에 대해서조차 말할 필요가 없어지니까.
그렇게 되면 다국어라는 것은 오히려 손쉬운 퍼즐놀이 같은 것이 된다. 기계장치 같은 작전 수행 용어는 말소리의 모양이 다르다 뿐이지 이 언어에서 저 언어로 넘어간다고 해도 크게 차이가 나지는 않는다. 위장을 하듯이 말의 옷을 갈아입히는 것 뿐.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의 몸에 대해서는 끔찍이 배려를 하지만 정신적인 면에 대해서는 완전히 방치하는 수준이었다. 어떤 먹이도 주지 않았다.
사람이 무언가를 먹고 있으면 개는 호기심을 드러내며 그 음식을 조금만 나눠달라고 애원을 한다. 그것이 몇 번이고 무시되고 학습되다보면 개는 사람의 음식에 흥미를 잃게 된다. 가만히 있어도 사료는 나오고 저것을 탐하면 인간에게 호되게 혼이 나고 어쨌든 아픈 것은 싫은 것이고 피하고 싶은 것이니까.
인간의 음식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개도 인간도 행복하고 평화로운 상태를 유지한다. 감성이란 건 그런 것이었다.
샌드백이 터져버리지 않을 정도로 힘 조절을 해가며 치던 사파이어가 어느 순간 주먹질을 멈추고 샌드백을 붙잡았다. 층계를 올라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한낮이라고는 해도 소음에 짜증난 입주민이 항의하러 온 것일 수도 있다. 집주인일수도 있고. 굳이 충돌을 일으킬 필요는 없다. 사파이어는 텔레비전의 음량을 줄인 후 스포츠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현관 앞에 가서 섰다.
층계를 걸어 올라오던 발소리가 갑자기 층계 한 가운데서 우뚝 멈춰 섰다. 뭘 하는 거지? 발소리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용기를 내는 듯 계단을 마저 걸어 올라와서는 사파이어의 현관문 앞에 섰다.
금방 문을 두드릴 것 같았는데 몇 초가 지나도 두드릴 기색이 없다. 저렇게 부주의하게 발소리를 내며 올라올 정도라면 당장이라도 항의에 가득 찬 주먹으로 문을 두들기며 쾅쾅 소리를 낼 텐데.
사파이어는 몇 초 더 기다려주었다. 그래도 문을 두들기는 소리는 없었다. 초인종을 누르는 소리도 없고. 사파이어는 현관문에 설치된 외시경의 가리개를 슬쩍 걷어내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한 소년이 서 있었다. 문의 정면에 서 있지는 않고 옆으로 살짝 비껴서 서 있었다. 소년은 귀를 현관문 가까이에 대고 안의 소리를 듣고 있었다. 14~15살가량으로 보이는 소년이었다. 비슷한 패거리와 떼를 지어 몰려다니는 양아치 같은 인상이었고.
뭘 하는 거지? 사파이어는 현관문을 벌컥 열었다.
“아!”
“뭐야?”
고양이처럼 가만히 귀를 대고 소리를 듣고 있던 소년이 문이 벌컥 열려버리자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사파이어는 소년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나직하게 대꾸했다. 소년이 놀라고 겁먹은 눈으로 사파이어를 마주보았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점은 사파이어의 키가 소년에게 크게 위압이 될 정도로 그렇게까지 크진 않았다는 것이다. 몇 년 후면 소년이 사파이어의 키를 따라잡을 것이다. 운이 좋으면 사파이어를 내려다 볼 수 있을 정도로 자라게 될 것이고.
“뭐냐고 물었는데.”
“죄, 죄,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소년이 사과를 하며 허둥지둥 달아났다. 사파이어는 굳이 달려가서 소년을 낚아채 올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소년이 도망가도록 내버려두었다. ‘이해가 안 되는 사건이 하나 일어났군.’하고 생각하며.
세공사 벤체슬라스는 장 바티스트 고디에와 헤어지고 난 후 바로 정보원과 접선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장 바티스트는 귀중한 정보를 알려준 셈이다. 동업자의 정이라고 할까.
세공사같이 청부살인업을 하고 있는 업계 사람들이나 단독으로 행동하는 암살자, 마피아, 테러리스트나 기타 범죄조직을 대상으로 돈을 받고 정보를 팔아넘기는 정보상은 벤체슬라스를 보고 오랜만이라며 반색했다.
“코트디부아르 이후로 처음 뵙는군요. 마지막으로 뵌 게 아비장에서였든가요?”
“잘 지내셨습니까.”
정보상은 표면적으로는 시계공방을 운영하고 있는 늙수그레한 노인이다. 이 바닥이 다 그렇듯이 노인의 외모도 속임수일지 모른다. 사실은 생각보다 젊은 나이인데 일부러 나이를 속이려고 늙어 보이게끔 성형을 했다던가, 그런 걸 상상해 볼 수 있다.
어찌됐건 다른 사람은 일회용으로 쓰고 버려도 이런 사람들한테는 예의를 차려두는 것이 좋다. 직업적으로 자주 보게 될 사람들이고 이런 사람들을 섣불리 적으로 돌렸다가는 업계에서 매장당하거나 최악의 경우엔 표적으로 찍힌다.
“제가 이미 프랑스로 거처를 옮긴 건 알고 계셨을 텐데요.”
“하지만 직접 인사하는 건 이게 처음이지 않습니까.”
노인이 허허 웃었고 벤체슬라스는 껄끄러움을 느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노인은 번듯하고 정중한 자세로 물었다. 그 이면에 숨겨진 뜻은 시계를 보러 왔느냐 아니면 다른 것을 보러 왔느냐 하는 것이었다. 벤체슬라스는 코드를 말했다.
“두 번째 회중시계를 맞추러 왔습니다.”
“그러십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이 쪽으로 오시지요.”
노인은 특별한 개인손님을 대하듯이 벤체슬라스를 공방 뒤쪽으로 이끌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시계를 맞춤 제작하기 위해 손님을 뒤로 이끄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공방의 뒤편에는 젊은 시계공 두 명이 주문 들어온 특수 시계를 제작하고 있었고 그 공간 뒤쪽으로 문 하나가 더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크지도 작지도 않은 응접실이 나왔다. 벽도 바닥도 칠이 없는 아스팔트지만 가구만은 원목 커피테이블에 고급 가죽을 씌운 소파 등 호화로운 것이었다.
벤체슬라스가 안으로 들어서자 노인이 따라 들어오며 문을 닫았다. 벤체슬라스는 익숙하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MI6가 저에게 붙었다는 소릴 들었습니다.”
“어떤 분이 그런 말씀을 하셨지요?”
“장 바티스트 고디에. 세공사입니다.”
“아. 그 분이시군요.”
노인은 벤체슬라스의 맞은편에 앉더니 자세를 바로 했다. 조금 전까지 느릿느릿하고 부드러운 품위가 감돌던 노인의 눈빛이 송곳같이 날카로워졌다.
“벤체슬라스님께서 얼마 전에 영국측 정보부 요원을 암살했다는 소식은 이미 들어와 있습니다. 개인 사정으로 처리하셨다지요.”
정보상과 시체처리반, 청부업자들은 거미줄 같이 서로 얽혀 있기 때문에 어느 한 곳에서 작은 움직임이 일어나면 그것이 파도처럼 퍼지고 퍼지게 마련이다. 파리 내 정보상 중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노인에게 그 소식이 안 들어올 리 없다.
“벤자민 로빈스가 영국 정보부 소속이었습니까?”
“정식 요원은 아니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하청의 하청이라고 해둘까요.”
놀라운 일이다. 돈 많은 한량이 짝사랑을 잊지 못하고 단순히 프랑스까지 찾으러 온 건줄 알았더니. 어쩌면 정보부와 협력하고 있던 것도 벤체슬라스를 찾아내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미 죽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벤자민 로빈스에 대한 혐오감이 한층 더 심해졌다.
“그래서 벤자민 로빈스가 죽은……. 사라진 것 때문에 영국 정보부가 저를 타겟으로 노린 겁니까?”
“아직 그런 움직임은 없습니다. 로빈스 씨가 사라진 것 때문에 정보부가 수색작업을 하고 있기는 합니다. 벤체슬라스님과 연관되어 있는지는 저 쪽은 아직 모르는 것 같은 눈치인데요.”
“전 가만히 숨죽이고 있으면 되겠습니까?”
“이 일을 정리하기 위해 얼마를 내시겠습니까?”
노인이 드디어 싱긋 웃는 얼굴로 돌아왔다. 돈을 주고 받을만한 거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것이다.
정보부는 정보 때문에 움직인다. 사람이 죽은 것도 정보고. 정보상은 일정 금액을 받고 귀찮은 일들을 처리해준다. 정보를 흘리기도 하고 거두어들이기도 하고 흩뜨려놓기도 한다. 난이도에 따라 금액은 혹독해진다.
벤체슬라스는 이미 죽은 벤자민을 가능하다면 두 번 이상 죽이고 싶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노상카페에 앉아 있는 네이슨에게 흑인 혼혈 소년 하나가 다가왔다. 네이슨은 다리를 꼰 채 손가락으로 핸드폰의 표면을 따각따각 두드리다가 소년이 오자 기꺼이 맞은편에 앉으라고 권해주었다. 소년은 주변 환경과 자신이 너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지 머뭇머뭇 눈치를 보다가 앉았다.
“정보는?”
“그보다 저 배고파요.”
“정보부터.”
알제리계 프랑스인인 소년은 눈앞에 있는 영국인의 태도가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남자가 요구하고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소년이 빈민가에서 자라면서 얻은 교훈은 하나다. 공짜는 없다.
“아저씨가 말한 조건에 들어갈 만한 사람은 세 사람 있었어요. 여자들은 모두 뺐구요. 여자 아닌 거 확실하죠?”
“그래.”
“두 사람은 같은 건물 안에 있고 한 사람은 두 블럭 떨어진 아파트에 살아요. 그 중에 두 사람은 아는데 한 사람은 모르는 얼굴이에요. 아는 사람부터 얘기하자면 하나는 중국인이고…….”
“모르는 사람부터 얘기해봐.”
네이슨이 꼬았던 다리를 풀고 소년의 얘기를 경청하듯이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소년은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속으로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러니까 내가 물고 온 정보가 쓸 만하다 이거군? 소년은 협상을 시도했다.
“그보다 나 먹을 것 좀 우선 시켜주면 안 돼요?”
벤체슬라스가 저격 총을 들고 사파이어의 숙소로 왔다. 상반신을 벗은 채 윗몸 일으키기를 하고 있던 사파이어는 벤체슬라스가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오자 몸을 벌떡 일으켰다. 보통 사람이 윗몸 일으키기를 하다가 중간에 어중간하게 멈추면 복근이 경련을 일으킬 텐데 사파이어는 가쁜 숨을 몰아쉬느라 가슴 근육만 들썩였다.
벤체슬라스는 그 모습을 잠시 눈으로 훑었다. 살이 빠진 것 같은데.
“체중 조절해.”
“늘진 않았습니다.”
“빠졌잖아.”
안 그래도 사파이어는 날렵하고 가벼운 편이다. 자기와 비슷한 체급이면 몰라도 체격 좋은 상대와 마주하면 가끔 힘으로 밀린다.
사파이어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벤체슬라스는 자신의 인형이 말을 듣지 않으면 어딘가에 묶어놓고 강제로 입을 벌려 고정시킨 다음 음식물을 꾸역꾸역 밀어 넣을 사람이다. 푸아그라 따위를 만들 듯이.
사파이어는 벤체슬라스가 저격 총을 담은 케이스를 바닥에 내려놓는 것을 보고 물었다.
“임무입니까?”
“그래.”
벤체슬라스가 피곤한 한숨을 내쉬었다.
“MI6가 벤자민 로빈스 사건을 타겟으로 삼았다. 그 쪽 요원이 돌아다니면서 조사중이라더군. 정보원에게 돈을 내고 사후 처리를 맡겼다. 단, 처리는 우리가 하는 조건으로. 그 쪽은 거기까지 부담을 지긴 싫은 모양이지. 테러리스트 제압 부대가 개입하지 않는 선까지는 정보원측이 뒤처리를 해준다고 한다. 도심에서 저격 암살이 될 거야.”
사파이어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을 몇 번 쥐었다 폈다 하며 마지막으로 저격 총을 잡아본 게 언제인지 가늠해봤다.
“제가 마지막으로 저격 임무를 수행한 게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실력은 있잖아. 시간을 줄 테니 그때까지 몸을 만들어 둘 수 있겠지.”
“저격에 특화된 암살자를 쓰시는 게 합리적입니다.”
“보상 받기 싫은가?”
보상 얘기가 나오자 사파이어가 얌전해졌다. 웃음이 나올 정도로 솔직한 반응이었다.
“그리고 지금 당장 키우고 있는 건 너 말곤 없어. 난 질 떨어지게 이것저것 다작하는 성격이 아니라서.”
그 때문에 세공사 벤체슬라스의 보석 값은 비싸지만 확실하다.
“길리슈트를 입고 몇 주씩 그 자리에서 기다리는 게 아니니까 그렇게 부담 갖지 마. 도심을 전쟁터로 만들 생각인가?”
“아닙니다.”
“MI6 요원은 정보원측이 특정해주겠다는군. 평소 임무와 다를 것 없어. 목표가 정해지면 투입해서 사살하고 나온다. 그게 끝이야. 그런 다음엔 원하는 만큼 안아주지.”
사파이어는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지만 벤체슬라스는 그의 표정에서 희미한 설렘을 읽었다. 벤체슬라스는 땀이 식지 않은 사파이어의 얼굴을 쓸어내리고 쇄골을 짚었다. 그리고 키스했다. 섹스 같은 키스는 아니었다. 감질나고 의례적인 키스였지만 사파이어에게 동기를 부여하기엔 충분했다.
벤체슬라스는 엄중히 경고했다.
“자위하지 마.”
“네.”
사파이어는 순한 양처럼 대답했다.
네이슨은 짧은 시간 안에 많은 것을 알아냈다. 상부는 그의 유능함을 필요한 만큼만 알고 있었다. 네이슨이 필요 이상으로 보고하지는 않았으니까.
생각보다 많은 정보가 그에게 들어왔고 그는 자기 목숨을 위협하지 않을만한 것들을 선별해서 위에다 보고했다. 높은 자리에 앉은 분들은 그의 일처리 방식을 좋아했고 그래서 네이슨은 은밀하게 자신의 정보망을 구축하며 얌전하고 충성스러운 첩보원으로 남을 수 있었다.
알제리계 프랑스인 소년이 준 정보가 가장 값진 것이었다. 소년이 알고 있다던 사람들은 이 일과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하나는 이민자, 하나는 불법체류자. 소년이 모르는 얼굴이라고 했던 사람이 가장 수상하다.
그 지역의 부동산 업자를 하나 잡아서 약점을 잡고 흔드니 자판기에 돈 넣고 물건이 나오는 것처럼 정보가 나왔다. 방을 빌린 사람은 동양인이 아니고 백금발을 꽤 길게 기른 백인이라고 한다. 벨기에인이라고 하고.
정보를 수집하고 선별한다는 건 꽤 고생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생각만큼 복잡하거나 마법을 부려야만 가능한 일은 아니다. 성실하고, 부지런하고, 귀찮은 일을 꾸준히 할 수 있으면 첩보원의 자질이 있다.
백금발의 외국인이 얼마 전에 방을 빌렸고. 그렇지만 정작 그 방엔 동양인 남자가 살고 있고. 허무할 정도로 빨리 찾아내기는 했다. 빨리 찾아내는 운도 일종의 실력이다.
네이슨은 이대로 상부에 보고할까 하다가 연결고리가 미약하다는 것을 깨닫곤 고민했다. 벤자민을 죽인 용의자 중에 백금발의 남자와 동양인 남자가 연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용의자로 추정되는 사람들을 발견했습니다. 이렇게 보고하면 상부에선 뭐라고 할 것 같은가.
“그래서?”하고 일축하고 그 다음 사항은 뭐냐고 대꾸할 것이 뻔하지 않은가. 조금만 더 자세한 정보를 물어다 바치면 별다른 오점이 없는 그의 인사고과도 더욱 탄탄해질 것이다.
네이슨은 그들을 찾기로 했다. 그는 영웅이 아니다. 딱히 그들을 처벌한다거나 그럴 생각은 없었다. 아주 약간만 더 정보에 세부사항을 추가하고 싶을 뿐이다. 어디에 살고 있음. 무슨 일을 하고 있음. 신원은 이러함. 이 정도만.
물론 이것을 도움 안 되는 동료들에게 알려봤자 어떤 약삭빠른 놈이 선수를 쳐서 미리 보고를 할지도 모르니 단독으로 움직이기로 했다. 어차피 동료들도 네이슨 모르게 혼자서 해먹는 일이 많다. 이 바닥은 믿을 수 있는 놈이 없다. 서로가 서로의 등에 칼을 꽂으려고 벼르고 있을 뿐.
네이슨은 소년이 알려준 건물 근처를 서성였다. 자신이 직접 나서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그는 영어를 쓰지 않았다. 그렇다고 엉성한 억양의 프랑스어를 썼다간 외국인이라는 것이 바로 탄로 나기 때문에 완전히 다른 나라의 언어를 썼다. 그는 네덜란드 어를 썼고, 사업차 프랑스에 방문한 것처럼 행동했다.
눈에 띄는 버버리 코트도 벗었다. 셔츠와 청바지를 입었고 재킷은 연한 색으로 걸쳤다. 단정히 빗어 넘긴 머리는 일부러 살짝 헝클어뜨렸다. 노란 색 렌즈의 선글라스를 쓰자 크게 튀지는 않지만 조금 전과는 달라 보일 정도로 미묘하게 인상이 달라졌다.
그는 그 상태로 건물 근처를 서성이다가 그 건물이 잘 보이는 고층건물을 찾아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건물을 출입하는 모든 사람들을 사진 찍기 시작했다.
6시간이 지나고도 그의 활동에 소득은 없었다. 딱히 뭘 건질 수 있다고 바라진 않았다. 첩보 활동의 대부분이 이런 식이니까. 제임스 본드처럼 극적으로 일이 진행되지는 않는다. 첩보원도 사람인지라 6시간이나 지나면 당연히 지친다.
그러나 네이슨은 자신이 건물을 잘못 찾았다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이 정말 프로라면 자신들이 저지른 짓에 대해 무언가 경계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는 곳을 벌써 바꾸었을지도 모르고.
네이슨이 딱 30분만 뭔가를 먹으러 자리를 비울까 고민하는 사이에 목표 건물 앞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커다란 악기 케이스를 든 백금발의 남자였다. 화려한 머리 색깔이었다. 저런 머리색은 염색하지 않는 한 보기 힘든 것인데.
흐트러졌던 집중력이 다시 팽팽하게 줄을 당긴 것처럼 날카로워졌다. 악기 케이스를 든 남자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더니 한동안 나오지 않았다. 그러더니 시간이 지나고 난 후에 빈 손으로 나와 어디론가 사라졌다.
여기다. 악기 케이스에 뭐가 들어있었을까. 여기다 두고 간 것이다. 누구에게 주었을까? 역시 동양인 남자? 아니면 여긴 그냥 창고나 아지트 같은 개념인가?
네이슨은 당장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현재 상태로는 가지고 있는 무기가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방탄조끼도 입지 않았다. 파리 시내 한복판에서 섣불리 총을 썼다간 경찰의 주의를 끌게 되고 그의 정체도 탄로 나게 된다. 칼을 휘두른다고 해도 상대방의 전력을 다 알고 있는 상황이 아니고.
일단은 재정비가 필요하다. 네이슨은 옥상에서 내려왔다. 일단은 배를 채우고 자신의 은신처로 돌아가 계획을 정비한 다음 다시 파고들 생각이었다.
그런 네이슨의 뒤를 빤히 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사파이어는 손가락으로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벤체슬라스가 남겨주었던 키스를 되짚어보았다. 입술과 입술만 맞닿은 가벼운 키스였지만 도통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벤체슬라스는 웬만해선 키스해주지 않는다. 사파이어를 도구처럼 쓰고 때로는 자위기구가 된 듯한 느낌을 주면서 몸을 안아올 뿐.
그러니까 이 키스는, 이번 일을 잘 처리하면 근사한 것을 먹게 해주겠다는 예고와도 같은 것이었다. 사파이어는 상으로 가장 좋아하는 사탕을 받게 될 것이라는 걸 알게 된 어린아이처럼 설렜다.
사파이어는 악기 케이스에서 분해된 총기를 꺼내들었다. 관리가 잘 된 총이다. 먼지는 소제되어 있고, 필요한 부분에 기름칠이 되어 있고, 낡은 부분은 교체했다. 특별히 제작주문 된 소음기가 달려 있고. 도심에서 쏜다고 해봐야 비비탄을 쏘는 정도의 소리만 날 것이다.
마지막으로 저격 총을 잡아본 게 언제더라. 크로아티아였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순간 사파이어의 머릿속으로 과거의 파편 하나가 시베리아의 냉기를 품고 차갑게 비집고 들어왔다. 드넓은 침엽수림. 구더기 같이 들끓는 극성맞은 모기떼. 늑대의 우는 소리. 고독하고 적막한 기다림의 시간들…….
사파이어는 악몽에서 깨어나듯이 화들짝 놀라며 총기를 놓쳤다. 방금 자기가 뭘 기억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아마도 과거에 수행했던 임무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지만 그게 뭐였는지 표적은 누구였는지조차 기억할 수 없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자신에게 있어 굉장히 중요한 기억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더 이상 떠올릴 수 없다. 절박해야하나? 절박함을 느끼며 떠올리려고 노력해야하나? 알 수 없는 일이다. 사파이어는 몇 분 고민하다가 바닥에 떨어뜨린 총기 부품을 다시 주워들었다.
임무를 수행하라. 그게 그의 최우선 과제였다.
네이슨의 무장은 발터 PPK와 종아리에 고정되는 남성용 가터에 끼울 수 있는 작은 단검, 그리고 접을 수 있는 진압봉이다. 진압봉 안에는 쇳덩어리가 들어있어서 한 번 가격하는 것으로 뼈를 부러뜨릴 수 있다. 주력은 진압봉, 그 다음이 단검, 권총은 최후의 수단이 될 것이다.
요원들이 많이 쓰는 글록을 놔두고 굳이 발터로 가져온 것도 발포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상정해 그나마 익명성을 지켜줄 수 있는 총기를 택한 것이다. 본부에서는 굳이 남의 나라에서 총질을 해대서 귀찮은 일을 만드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을 테지만.
소음기까지 준비하자면 부피가 너무 커지고 번거로워진다. 그럴 바에는 숨기기 좋은 총을 가지고 있다가 위기 시에 재빨리 쏘고 그 자리에서 사라지는 게 훨씬 편한 방법이다.
옷 안에는 방탄조끼를 받쳐 입었다. 웃옷으로 품이 넉넉한 가죽재킷을 입어서 옷 안의 모양은 티가 나지 않는다. 이정도면 충분하다. 무겁지 않고 날렵하면서 적당한 전투능력. 무엇보다도 교전 상황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냥 일반 시민이다.
네이슨은 백금발의 남자가 악기 케이스를 두고 간 그 곳을 급습할 생각이었다. 무언가 쓸 만한 것이 있으면 싹 쓸어오면 그만이다. 사람이 있으면 잡아오고.
첩보원이 비교적 조용히 일을 처리해야 해서 실력을 잘 보이지 못할 뿐이지 그들 역시 웬만한 특전사 못지않게 혹독한 훈련을 받는다. 목표가 암살이 아니라 정보라서 차이가 생길 뿐.
거리로 나서니 공기가 습했다. 정확히 언제일진 모르지만 비가 내릴 것이 분명했다. 큰 비일지 잠깐 내리다 그칠 비일지 몰랐기 때문에 네이슨은 다시 돌아가서 우산을 가지고 나왔다.
지팡이 대용으로도 쓸 수 있을 것 같은 장우산이었다. 겉보기와 다르게 우산의 뼈대 역시 쇳덩어리로 되어 있어서 무게가 꽤 나가는 편이고 유사시에는 무기로 사용할 수 있었다. 런던에서는 오히려 우산을 잘 가지고 다니지 않고 가벼운 비는 그대로 맞는 편이지만 외국에서는 습관처럼 우산을 들고 다녔다. 눈에 안 띄는 것은 아니지만 아예 어색한 모습은 아니기 때문에.
두 번째로 거리에 나왔을 때 네이슨은 이상한 것을 보았다. 똑같은 얼굴을 두 번 마주친 것이다. 쥐 색깔의 털을 성기게 엮은 비니를 뒤집어쓰고 목에는 구멍이 듬성듬성 뚫린 낡은 카키색 목도리를 두른 사람이다. 끝 부분이 다 헤진 반 장갑도 동일한 카키색. 옷은 후줄근하고 신발은 걸레짝 같다.
거리를 배회하는 노숙자인가 싶었지만 노숙자들도 나름의 질서가 있다. 자신의 영역이 아닌 곳을 함부로 돌아다니면 좋은 꼴을 보지 못한다. 같은 얼굴을 두 번 이상 본다는 건 좋은 징조가 아니다.
네이슨은 그를 못 본 척 했다. 다행히 이 근처에는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가게들이 많았다. 그는 비교적 한산한 구간을 찾아서 관광객인 척 물건들을 구경하며 같은 거리를 두세 번 왕복했다. 두 번 이상 보인 노숙자의 얼굴을 세네 번이 되었다.
네이슨은 미행 받고 있다고 확신했다. 네이슨은 무명 예술가가 늘어놓고 파는 그림을 들여다보는 척 하다가 갑자기 몸을 틀어 달리기 시작했다. 그의 뒤를 쫓던 노숙자가 그를 쫓아왔다.
네이슨은 큰 길 사이에 있는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모퉁이 뒤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자신을 쫓아오는 노숙자를 덮쳐 벽으로 밀어붙인 후 들고 있던 장우산으로 그의 목을 옥죄었다. 노숙자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기침을 해댔다. 네이슨이 냉혹하게 물었다.
“목적이 뭐지? 어디 소속인가? 왜 날 미행하나?”
노숙자는 그저 놀란 눈을 끔벅거릴 뿐 네이슨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순진한 척 연기하는 모습이 영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네이슨은 바짓단을 끌어올려 종아리 가터에 부착해놓은 단검을 꺼냈다.
칼날을 보자 노숙자가 다급하게 프랑스어로 무어라 무어라 말하면서 겁에 질린 얼굴을 했다. 이빨이 몇 개 빠져 있어서 발음이 다 새는 통에 네이슨이 잘 알아듣지는 못했다. 발음 자체가 사투리인지 외국 억양인지 영 이상하기도 했고.
“연기하지 마.”
네이슨이 노숙자를 한 번 더 벽으로 쾅 밀어붙이자 노숙자는 이제 울 것 같이 애원했다. 끝끝내 영어를 못 알아듣는 척 하자 네이슨이 프랑스어로 대꾸했다.
“넌 누구고 왜 날 쫓아오는 거지? 목적이 뭐야?”
“아니요. 아니요. 목적이라뇨. 죽이지 마세요…….”
“왜 날 쫓아왔어?”
“돈을 준다고 했어요…….”
네이슨은 의심스런 눈으로 노숙자의 눈동자를 깊게 들여다보았다. 그리곤 상황파악을 했다.
“이런 젠장할.”
네이슨이 노숙자의 멱살을 잡고 있다가 옆으로 확 내팽개치자 노숙자가 힘없이 쓰러졌다. 노숙자는 바로 바닥을 기어 벽에 찰싹 달라붙더니 더듬더듬 벽을 짚고 일어섰다.
“제발요. 죽이지 마세요.”
“누가 시켰지?”
“아무것도 못 먹은 지 며칠 됐단 말이에요. 그 돈이면 병원도 갈 수 있고…….”
“누가 시켰냐고!”
네이슨이 고함치면서 노숙자를 걷어차려는 순간 총탄이 날아와 그의 견갑골에 박혔다.
사파이어는 짧게 혀를 차면서 자신의 손가락을 내려다보며 근육을 풀듯이 뚜둑 뚜둑 꺾었다. 실력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은 것도 있지만 저 첩보원이 예상 못한 행동을 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머리를 맞추진 못했지만 총알은 첩보원의 등에 명중했고 방금 전까지 그에게 목숨을 위협받고 있던 노숙자는 이제 소리를 질러대면서 도망가고 있었다. 저것도 죽여야 하나? 너무 시끄러운데.
정보원측이 표식이라고 알려준 남자가 저 남자긴 하지만 저 남자 역시 자기도 모르게 1회용으로 이용당하고 버려지는 장기말일 것이다. 죽여도 되나? 죽이지 않으면 증거가 너무 남을 것 같은데? 남자부터가 살인 사건에 대한 증인이고.
사파이어가 잠시 고민하는 사이 노숙자가 줄행랑을 쳐버려 시야에서 사라졌다. 뭐, 정보원측이 알아서 처리해줄 것이다. 그런 계약이었으니까.
그보다도 어색하게 빗맞힌 타겟이 문제다. 사파이어가 다시 스코프를 돌려 자신이 맞춘 첩보원을 찾아보았다. 그 자리에 분명히 쓰러지는 것까지 봤는데 다시 보니 없다. 중간에 하나 성가신 게 끼어서 제대로 확인사살을 못했더니 이 모양이다, 젠장.
멀리가진 못했다. 영화나 소설과는 다르다. 총알이란 건 한 발 스치기만 해도 충격이 굉장히 크다. 일반인 같으면 그대로 쓰러져버린다. 훈련받은 사람이라고 해도 제대로 맞으면 그대로 뻗는다.
사파이어는 스코프에서 눈을 떼고 신중하게 주변을 탐색했다. 스코프는 좁은 시야를 너무 자세하게 보여주기 때문에 주변 정황을 파악하기엔 좋지 못하다. 어디 있을까. 총구와 시선을 일치한 채 사라진 첩보원을 찾던 사파이어는 10미터가량 떨어진 곳 쓰레기통 뒤편에서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한 쌍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네이슨은 숨을 헐떡이며 바닥을 기었다. 뼈가 부러진 것 같다. 부러진 게 맞을 거다.
방탄조끼라는 건 말 그대로 탄환이 몸 안에 박히거나 관통하거나 하지 못하게 막아줄 뿐이지 충격까지 막아주는 것은 아니니까. 그대로 기절하는 줄 알았다. 노숙자가 소리 지르고 소란을 피우며 도망간 것이 다행이었다. 그가 시간을 벌어줘서 네이슨은 일단 몸을 피할 수 있었다.
저격이다. 어디서 날아왔을까. 쓰레기통 뒤에 몸을 숨긴 네이슨은 탄환이 날아온 방향과 각도를 가늠해보았다. 도시는 숨어서 저격할 수 있는 곳이 많다. 네이슨은 권총을 꺼내들고 장전했다. 약실을 확인하거나 탄알이 몇 발 남았는지 확인하는 건 불필요한 행동이었다. 자기 총은 자기가 제일 잘 안다.
지금 상황에서는, 상대방은 눈에 핏발이 서서 자신을 마저 죽이려고 들 것이다. 확실하게 머리를 쏜 게 아니니까. 쓰러져 있던 타겟이 제자리에 없는 것을 보면 한층 더 살의를 불태우겠지.
불행하게도 상대는 실력이 좋은 모양이다. 초짜 같으면 자신이 목표를 빗맞혔을 때, 그러니까 일을 그르쳤을 때 순간적으로 집중력이 깨질 것이고 얼른 일을 제대로 마무리 지으려고 다급하게 굴 텐데 지금 상대는 네이슨이 위치를 찾아내는데 한참 걸릴 정도로 차분했다.
그 역시 네이슨을 찾고 있었는지 총구를 슬쩍 돌리고 있어서 그 움직임으로 겨우 찾아냈다.
눈이 마주쳤다.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다. 몇 건물 너머. 옥상이었고. 생김새를 간신히 식별하자면 네이슨이 얼마 전에 길에서 마주친 그 동양인과 비슷하게 생겼다. 아무래도 인종이 다르다보면 얼굴 구분하기가 쉽지 않지만 사람의 인상이라는 것은 헷갈리기가 어려운 법이다. 눈에 칼을 품고 다니는 사람은 흔하지 않으니까.
위치를 특정했다. 상대방도 이것에는 당황했는지 바로 네이슨을 조준하는 것이 보였다. 네이슨은 쓰레기통 뒤로 재빨리 다시 머리를 숙이고 퇴로를 찾았다. 여기서는 교전이 불가능하다. 저격이면 몰라도 네이슨의 발터는 저기까지 닿지 못할 것이다. 쫓아가야한다.
네이슨이 자리를 이탈하는 순간 상대방 역시 임무를 포기하고 그 자리를 뜰 것이고 다시 만날 수는 없을 것이다. 오, 그래선 안 될 말이지. 뭐 때문에 이 고생을 했는데 여기서 물거품이 되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
그보다도 중요하고 본능적인 문제는, 저건 날 죽이려는 암살자다. 없던 일로 끝낼 수는 없다. 싸움판에서 칼이 한 번 뽑혀 나왔으면 그 다음부터는 좋든 싫든 간에 피를 볼 때까지 광기가 계속된다.
네이슨은 골목 밖으로 도망쳤다. 자신의 바로 뒤에 총탄이 박히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 이후로 세 번째 총탄이 박히는 소리는 없었다. 네이슨은 큰 길로 나가기 전에 권총을 옷 안에 숨겼다.
견갑골 쪽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아팠지만 다행히 숨은 쉴 수 있는 것을 보니 갈비뼈까지 부러진 모양은 아니다. 네이슨은 다급하게 암살자가 숨어 있는 건물로 달렸다. 거리의 행인들이 무례하게 자신을 치고 지나가는 남자를 노려보며 욕설을 내뱉었지만 네이슨은 다른 것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발각됐다. 사파이어는 제대로 조준하고 한 발 더 쐈지만 첩보원은 기회를 두 번 주지 않았다. 그는 쓰레기통 뒤로 머리를 숨기더니 골목을 빠져나갔다. 이대로 도망치는 건가? 벤체슬라스는 임무 실패 소식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일을 처리하려고 많은 돈을 지불했기 때문에 실패의 책임을 사파이어에게 물어볼 것이다.
사파이어는 지하실에 끌려가기 싫었다. 물론 여기는 프랑스고 파리니까 사파이어가 기억하는 바로 그 지하실은 아닐 테지만 벤체슬라스는 세계 곳곳에 자신만의 고문실을 마련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금액에 따라 사파이어가 이 세상에서 제거되는 수도 있다. 벤체슬라스가 날린 돈이 사파이어를 키워낸 금액보다 크고, 사파이어가 앞으로 제 값어치를 못할 것 같다고 판단된다면.
그럴 순 없지. 표적은 확실하게 죽여야 한다. 사파이어는 몸을 일으켰다. 신속하게 저격 총을 분해해서 케이스에 집어넣은 후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숨겨 놨다.
저건 지금 당장 회수하지 않는다. 정보원들과 시체처리반이 회수해줄 것이다. 그 사이에 사파이어는 엉성하게 처리된 일을 확실히 마무리 지어야한다.
사파이어의 무장은 SIG M11과 날 길이가 있는 와키자시, 손잡이 부분이 특수 플라스틱으로 처리된 다목적 손도끼였다. 벤자민 로빈스를 죽인 그 도끼다.
너클 같은 초근접무기는 사용하지 않는다. 상대방이 자신보다 체격이 좋을 거라는 걸 미리 알고 있었고, 벤체슬라스가 “몸무게를 유지하라.”고 말할 만큼 살이 빠진 상태인 것도 알기 때문에 교전 시에 상대방과 거리를 두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말 그대로 날아갈 것이다.
인파로 한가득인 파리 시내에서 과연 날 길이 4~50cm짜리인 일본도를 꺼내들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지만 사파이어는 일반인의 상식과 상당히 거리를 둔 채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이런 것을 꺼내들 때는 경찰이나, 사진을 찍힌다던가, 증거가 남는다던지 증인이 생겨버린다는 자잘한 걱정을 해선 안 된다. 이런 것을 꺼낼 때 가장 고려해야 하는 것은 정말로 사람을 베어 죽일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다.
사파이어는 옥상 문을 걷어차고 계단 아래로 뛰어 내려가려고 했다. 그런데 옥상 문 뒤에는 이미 누군가가 서 있었다. 사파이어가 예고도 없이 옥상 문을 가격한 바람에 뒤에 서 있던 사람은 대비도 하지 못한 채 얼굴을 얻어맞았다. 코가 부러진 것 같다.
불의의 일격을 받은 사람이 코를 움켜쥐며 뒤로 휘청이다가 사파이어를 보고는 번개 같이 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네이슨이 이미 와 있었다.
사파이어 역시 타겟이 도망가지 않고 자신이 있는 곳으로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해서 반응이 늦었다. 네이슨이 품 안에 손을 넣어 권총을 꺼내자 그제야 사파이어가 몸을 옆으로 굴려 피했다. 빈 공간에 총성이 탕탕 울렸다.
네이슨은 두 발을 허비했다. 사파이어 역시 권총을 꺼냈다. 사파이어는 상대방의 총을 아직 확인하지 못한 상태이지만, 발터 PPK는 장탄수가 그리 많지 않다. 7~8발정도 될까. 그에 반해 사파이어의 SIG M11은 탄알이 13발, 15발 들어간다.
총을 빼들고 서로를 죽이려고 할 때에는 총기가 어떤 회사의 것이고 어떤 역사가 있으며 어떤 성능이 있는지,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들이 된다. 한 발 쏴서 맞히면 되고, 서로가 긴장감 속에서 손을 떨며 빗맞힐 때는 한 발이라도 장탄수가 더 많은 쪽이 유리하다.
조금 아까 전부터 우르릉거리며 큰 비를 예고하고 있던 파리의 하늘이 빗방울을 툭 투툭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빗방울이 콘크리트를 적시고, 아스팔트 도로 바닥을 적시고, 가로수의 나뭇잎을 적시면서 비릿한 냄새 같기도 하고 먼지 냄새 같기도 한 비 냄새가 피어올랐다. 사파이어는 옥상 환기구 뒤에 몸을 숨겨놓고 재빨리 총을 장전했다. 상대방 역시 사파이어가 어떻게 나올지 몰라서 몸을 일단 감춘 모양이다.
빗방울이 머리칼을 적시더니 기어코 한 두 방울이 눈 안으로 들어갔다. 눈앞이 따끔거리며 시야가 번졌다. 사파이어는 신경질적으로 이마의 빗물을 닦으며 바깥을 내다보았다. 열린 옥상 문 뒤편으로 타겟인 첩보원 역시 고개를 빠끔히 내밀고 있었다. 사파이어가 총구를 당기자 다시 한 번 짧은 총격전이 시작됐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며 둘의 피부를 때렸다. 어서 시작하지 않고 뭘 하냐는 듯이 재촉하는 것 같았다. 사파이어는 호흡을 고른 다음 엄폐물 바깥으로 몸을 뺐다. 동시에 네이슨도 숨어있던 곳 뒤에서 나와 달렸다.
총성이 몇 발 울렸다. 네이슨이 두 발을 쏘며 도망치는 동안 사파이어는 다섯 발을 쐈다. 서로의 총알은 모두 비껴나갔다.
상황이 반대가 되었다. 사파이어가 옥상 문 뒤 쪽, 네이슨이 환기구를 엄폐물 삼아 숨었다. 딱히 몸을 가릴 곳이 없다고는 해도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실소가 나온다. 네이슨이 남은 탄알을 세며 사파이어 쪽에 대고 소리쳤다.
“어이없지 않나? 안 그래? 빨리 끝내지!”
사파이어는 대답하지 않았다. 네이슨은 “그래, 그럼 그렇지.”하고 중얼거리며 다시 몸을 일으켰다.
이번에는 네이슨이 빨랐다. 사파이어가 몸을 내미는 순간 총알이 작렬했다. 운 좋게 조준이 빗나갔지만 잘못했으면 오른쪽 귀가 날아갈 뻔 했다. 다시 몸을 숨기는 네이슨에게 사파이어는 3발을 쏘았다.
불리한 상황이다. 비가 시야를 가린다. 눈에 들어가서 눈을 제대로 뜨고 있기도 힘들고. 그건 상대방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비가 내린다고는 해도 소음기를 달지 않은 총성을 듣지 못할 정도로 파리 사람들이 귀머거리인 것은 아니다. 몇 발이고 총성이 울렸으니 금방 경찰이 올 것이다. 결판을 빨리 내야한다.
사파이어가 먼저 움직였다. 네이슨이 숨어 있는 곳으로 다가가며 신중하게 한 발 한 발 쏘았다. 고개를 들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네이슨 역시 암살자가 다가온다는 것을 알았지만 몸을 일으키려고 하면 자꾸 한 발씩 날아와서 스파크를 일으키며 환기구에 부딪쳤기 때문에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한정된 장탄수를 저렇게도 쓰는군. 죽음의 목전에서 새로운 것을 배웠다. 배짱이 대단한 놈이다.
저벅저벅 발소리가 충분히 가까워졌다 판단이 든 순간 네이슨이 몸을 일으켜 총을 갈겼다. 상대방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쏟아지는 빗물 때문에 서로 시야를 확보하기가 힘들었고 조준은 모두 빗나가서 총알은 전부 무용지물이 되었다.
둘은 비어버린 방아쇠를 달각달각거리고 있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보조 무기를 꺼내들었다.
네이슨은 접이식 진압봉을 꺼내 절제된 동작으로 휘둘러 일자로 된 쇠 봉을 만들었고 사파이어는 허리 뒤춤에 차고 있던 와키자시를 꺼냈다. 칼날이 칼집을 훑고 스릉하는 섬뜩한 소리를 내며 뽑혀 나왔다.
쇠와 쇠가 부딪치며 날카로운 굉음과 함께 작은 스파크가 튀었다. 정석적으로 진압봉을 잡은 네이슨과 달리 사파이어는 칼날이 팔꿈치 아래로 내려가도록 손잡이를 거꾸로 쥐었다. 스파크가 튄 일격은 네이슨의 진압봉이 칼날을 타고 허무하게 미끄러지면서 떨어졌고, 그 다음은 사파이어의 반격이 시작됐다.
사파이어는 손잡이를 다시 제대로 쥐고 빗물을 베어내듯이 신속하게 휘둘렀다. 칼날이 네이슨의 어깨를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횡으로 베고 내려갔다. 자칫했으면 오른손이 날아갈 뻔 했다.
네이슨은 재빨리 몸을 틀며 진압봉을 휘둘렀다. 사파이어는 빗나간 칼날을 틀어 다시 위로 쳐올리며 진압봉을 쳐냈다. 캉 하는 소리와 함께 두 무기가 허공으로 쭉 뻗었다.
네이슨이 사파이어의 배를 걷어찼다. 무기로 거리를 벌려놓는다는 발상은 좋았지만 역시 신장이나 체격에서 오는 차이는 좁히기가 힘들었다. 순식간에 배를 걷어차인 사파이어가 흡 하고 숨을 흘리며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방심하는 사이 네이슨이 달려와 몸으로 퍽 부딪쳤다.
뒤로 나동그라진 사파이어의 배 위로 네이슨이 올라탔다. 쇳덩이가 들어있는 진압봉이 사파이어의 머리통을 으깨기 전에 사파이어가 와키자시를 쥐고 네이슨의 목을 겨누었다. 서로의 머리와 목을 겨눈 상태에서 교전은 아주 잠깐 멈추었다.
서로에게서 가쁜 숨이 터져 나왔고 비가 얼굴과 손을 때리고 있었다.
“벤자민 로빈스를 죽인 게 너지?”
사파이어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상대를 죽이겠다는 살의를 담고 두 눈을 부릅뜬 채 네이슨의 행동을 주시하고만 있었다.
“서로 체크메이트인데 이유라도 들어보지. 왜 죽였나?”
“임무였다.”
“누구로부터의 임무?”
“말할 이유가 없지.”
“난 영국 정보부 소속이다. 알고 있나?”
당연히 알고 있겠지. 그렇지 않으면 굳이 암살을 계획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압박하려는 의도로 질문한 거였지만 역시나 상대에겐 먹히지 않았다. 얼마 안 남은 총알을 위협용으로 쓰면서 다가올 정도로 배짱이 보통이 아닌 놈이니까.
“나한테 손을 대면 영국을 적으로 돌리는 셈인데 괜찮은 건가? 목숨이 아깝지 않나?”
“영국인들은 말이 참 많군. 죽은 놈까지 합해서.”
순간 네이슨의 눈동자가 위험하게 번뜩였다. 남의 감정이나 상식이란 것에 도통 공감할 줄 모르는 사파이어였기 때문에 위험한 것인 줄도 모르고 건드려선 안 될 부분을 건드린 것이다.
네이슨의 목젖으로 칼날이 약간 파고들었다. 네이슨은 살갗을 내주면서 사파이어의 머리통을 진압봉으로 찍어 내렸다. 사파이어가 동물 같은 감각으로 고개를 옆으로 틀어 피하지 않았으면 지금쯤 얼굴 한 가운데에 진압봉이 박혀있었을 것이다.
고개를 다시 돌려 네이슨을 올려다보는 사파이어의 눈에도 비릿한 피 맛 같은 것이 배어 있었다.
사파이어가 슬쩍 칼날을 밀자 네이슨이 아예 죽을 생각은 아니었던지 순순히 뒤로 밀려나주었다. 네이슨은 피가 흐르는 목을 개의치 않고 진압봉을 빙그르 돌리며 다시 태세를 재정비했고 사파이어도 칼을 쥐고 몸을 일으켰다.
두 번째 교전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시작됐다.
동시에 서로에게 달려든 둘은 좁은 우리에 가둬놓은 투견 두 마리처럼 서로 물고 뜯으며 싸웠다. 어느 순간, 네이슨이 휘두른 진압봉에 사파이어의 칼날이 정통으로 맞았다. 이미 격렬한 싸움 중에 금속 피로도가 쌓여 있던 칼날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깔끔하게 부러져 버렸다.
휘두르던 와중에 칼날이 부러진 바람에 사파이어가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부러지다 만 칼날이 네이슨의 팔뚝을 깊게 파고 들어갔고 네이슨은 고함을 지르며 사파이어를 밀어붙여서 난간까지 끌고 갔다.
이대로 내던질 생각이다. 여기서 떨어지면 그대로 죽는다. 비 내리는 거리라지만 피가 꽃처럼 선명하게 퍼지겠지. 처참한 꼴이 될 것이다. 뒤로 주르륵 밀리던 사파이어 역시 고함을 내지르면서 네이슨의 목을 물고 늘어졌다. 목을 내어준 네이슨이 사파이어의 머리에 파운딩 펀치를 두 방이나 먹였지만 두개골이 흔들릴 정도의 충격임에도 사파이어는 입을 벌리지 않았다.
결국에 난간까지 가서 또 한 번 격렬한 몸싸움 끝에 둘은 떨어졌다. 만신창이였다. 네이슨은 숨을 몰아쉬면서 바짓단을 걷어 올려 가터에 차고 있던 단검을 꺼내들었다.
사파이어는 마지막 무기인 도끼를 꺼내들었다. 사파이어가 입 안에 고인 침과 피를 퉤 뱉고는 네이슨에게 말했다.
“그 남자는 이걸로 죽었다.”
네이슨이 멈칫했다.
“한 번에 죽이려고 했는데 너무 도망가는 바람에 몇 번 찍어서 죽였다.”
“왜 그런 걸 말하는 거지?”
“알고 싶어 할 것 같아서.”
사파이어에게는 나름의 사과법이었을지도 모른다. 담담하게 현실을 서술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고. 그러나 때와 장소가 너무나 부적절했기 때문에 네이슨에게는 분노에 불을 붙게 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사파이어는 그와 같은 고함을 들어본 적이 없다. 괴상하고 야릇한 소리였다. 분노를 주체할 길이 없는 소리였고 절제가 불가능한 소리였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화나게 만들었을까? 그 뚱뚱한 남자가 그의 뭐였기에?
연인이라고 부르는 관계인가? 아니면 혹시 우정이라는 관계인가? 동료애라는 것이 저런 격렬한 감정을 만들어낸다는데 진짜일까?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는 그냥 타인일 뿐인데. 어떻게 해야 타인의 죽음에 저렇게까지 분노할 수 있을까.
사파이어에게는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많다. 애국심이라는 것도 그렇고. 위에 서술한 동료애라는 것도 도무지 이해 못할 것이고. 정의라든가, 아군에 대한 신뢰라든지……. 제일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저 불처럼 타오르는 격렬한 감정의 폭발이었다. 정말이지 생경하고, 이상하게 끌리는 구석이 있었다.
자제력을 잃고 달려온 네이슨에게 사파이어는 도끼를 박아 넣었다.
격렬한 싸움이었고 허무한 죽음이었다. 네이슨은 한 번에 죽지 않았기 때문에 사파이어는 도끼를 비틀어 빼서 다시 한 번 강하게 후려쳤다. 그래도 여전히 죽지 않고 경련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파이어는 그가 죽을 때까지 몇 번이고 난도질을 해주었다.
나중에는 고통에 겨워 발작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도끼질의 충격에 시신이 들썩들썩 움직일 뿐이었다. 네이슨이 완전히 죽었다고 판단한 사파이어가 마지막으로 도끼를 비틀어 빼냈다.
옥상은 네이슨의 시신에서 흘러나온 피로 빨간 피 웅덩이를 이루어 그것이 빗물에 점점 번져나가 피로 만든 수영장처럼 되어 있었다. 사파이어는 그 자리에 잠시 가만히 서서 숨을 골랐다. 내리는 폭우가 사파이어의 머리와 얼굴, 몸에 튄 피를 씻겨 내려주었다.
사파이어는 온 몸이 욱신거리는 상태로 귀환했다. 목숨을 건 싸움이 끝나고 아드레날린이 떨어져가면서 무시되고 있던 통증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몇 번이고 걷어차인 곳은 분명히 피멍이 들었을 테지만 피멍 정도는 무시할 수 있을법한 고통들이 전신을 내달리고 있었다. 얻어맞은 머리도 윙윙 울려서 현실감이 없었다. 고막이 손상된 건 아닐까.
네이슨의 목을 물고 늘어졌던 입 안은 아직도 피 맛으로 가득하다. 혀로 치열을 가만히 쓸어보면 잇몸 사이에 박힌 살점 같은 게 느껴지지 않을까. 긴장한 상황 속에서 내가 내 입 안을 물기라도 했는지 입 안조차 쓰리다.
네이슨과 달리 이리저리 구멍 뚫린 곳은 없다.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자상이 없는 대신에 타박상 투성이다. 벤체슬라스가 경고했던 대로 체중을 조절해야했다. 체급차이를 이토록 뼈저리게 느끼다니.
빗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사파이어가 피로감에 젖은 한숨을 내쉬며 비척비척 방 안으로 들어오는데, 누군가가 이미 방 안의 어둠 속에 서 있었다. 딱히 숨죽이고 기척을 숨기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사파이어가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조용했기 때문에 누군가가 있다는 걸 인지한 사파이어는 흠칫 놀라 굳었다.
어둠 속의 목소리가 물었다.
“임무는?”
벤체슬라스였다.
“처리하고 돌아왔습니다.”
“확실하게 죽였나?”
“예.”
사파이어의 대답을 들은 벤체슬라스가 방 불을 켰다. 그는 몰골이 엉망인 사파이어를 위 아래로 훑어보더니 물병을 들고 다가왔다.
“마셔.”
“먼저 씻어야 할 것 같…….”
“마셔.”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가 물병을 잡을 때까지 그 자리에서 그대로 멈춰 서 있을 것 같았다. 그는 희미하게 웃고 있기까지 했다. 벤체슬라스의 부드러운 미소는 어떤 신성성마저 느껴지는 것이라서 그의 본 모습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의 내면에 선함이 있을 거라 지레 짐작하고는 멋대로 반하곤 했다.
그러나 그의 선한 아름다움은 껍데기를 뒤집어 쓴 악마와도 같은 것이어서,
“마셔, 이 새끼야. 죽여 버리기 전에.”
그 안에 희생자의 살점으로 점칠 된 송곳니가 빼곡히 박혀 있다…….
사파이어는 격렬한 두려움을 느꼈다. 건드려선 안 될 가장 내밀한 곳의 공포가 척추 끝에서부터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사파이어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물병을 받아들고는 겁먹은 눈으로 벤체슬라스를 바라보며 한 모금을 입에 머금었다.
다음 순간, 사파이어는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바닥에 게워냈다. 재채기도 기침도 아닌, 그보다 심한 거부반응이었다. 벤체슬라스는 토하고 있는 사파이어를 얼음장 같은 눈길로 경멸하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잠깐 관리를 안 했더니 그새 녹슬어버렸군. 이 쓸모없는 잡종이.”
정신 못 차리고 토하던 사파이어가 동공이 벌어질 정도로 놀랐다. 명백하게 경악, 경악의 감정이었다. 다음 순간 사파이어는 벤체슬라스에게 머리채를 잡혔다. 고개가 비틀리나 싶은 순간 손바닥이 날아왔다. 눈앞에 번갯불이 쳤다.
따귀를 맞아서 정신 못 차리는 사파이어에게 두 번째 손찌검이 날아왔다. 그렇지 않아도 머리를 얻어맞아서 멍한 상태인데 벤체슬라스에게까지 맞고 있어서 손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몸이 축 늘어졌다.
벤체슬라스는 저항하지 못하는 사파이어를 잔인하게 두들겨 팼다.
사람이 너무 맞다보면 어느 순간부터 자기 몸이 자기 자신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축 늘어진 고깃덩어리나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물 부대처럼 느껴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통증 같은 것은 잘 느껴지지 않게 되고 금방이라도 잠에 빠져들 것 같은 짙은 피로감만 남는다.
그 피로감을 넘어서도 폭력이 계속되면 몸이 살려고 발버둥을 치기 시작한다. 전기신호로 비명을 지르는 신경계가 충격을 완화하려고 하고 뇌는 호르몬을 내뿜는다. 몸을 퍽퍽 쳐대는 타격이 부드럽고 포근한 이불로 변하고 의식은 현실에서 벗어나 행복한 환상을 보기 시작한다…….
아니었다.
사파이어는 환상에서 깨어나 퍼뜩 정신을 차렸다.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얼마만큼 의식을 잃고 있었던 걸까. 몸이 부자유스럽다. 사파이어는 X자로 된 형틀에 팔다리를 묶여 고정되어 있었다.
한쪽 눈은 부어서 터졌는지 잘 떠지지 않는다. 나머지 눈으로 힘겹게 주위를 둘러보니 돌바닥에 벽돌 벽, 천장은 시멘트였다. 창문이 하나도 없는 것을 보니 지하인 것 같고 벽에는 생김새로 그 용도를 짐작해 볼 수 있는 섬뜩한 물건들이 걸려 있었다.
순수하게 고통을 안겨주는 고문도구와 성고문 도구들, 결박하는데 쓰이는 사슬과 가죽 끈들…….
잊고 있던 고문의 기억들이 뇌 주름 사이사이에서 진흙처럼 뭉글뭉글 차오르기 시작한다. 머릿속이 통째로 공포에 잠식된다. 가학과 열락의 시간들.
사파이어는 덜덜 떨면서 안 될 줄 알면서도 팔다리를 흔들어보았다. 혹시라도 아주 약간만이라도, 탈출의 가능성이 있다면 그는 팔다리를 끊고서라도 여기에서 나갔을 것이다. 물론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방 한 구석의 철문이 열리고 연한 푸른색 셔츠를 팔뚝까지 걷어 올리고 검은 슬랙스 바지를 입은 벤체슬라스가 들어왔다. 돌바닥에 또각 또각 울리는 구두 소리가 사파이어의 귓가를 날카롭고 선명하게 파고들었다.
사파이어는 애원하고 싶었다. 뭐든 좋았다. 말이 안 되는 애원도 좋고 하지 않은 짓에 대한 사과도 좋았다. 빌고 싶었다. 살려달라고. 그 고통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다고. 그러나 벤체슬라스는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사파이어의 입을 재갈로 막아놨기 때문이다.
“물만 제대로 마시면 평소처럼 상을 주려고 했어.”
벤체슬라스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번에도 물을 마시지 않았지. 실수였다고 쳐. 그런데 두 번째는 아냐. 그건 습관이거든. 어디서 그런 나쁜 물이 들었을까.”
뚜걱뚜걱. 벤체슬라스가 다가와서 사파이어의 벌거벗은 몸을 쓸어내리다가 지하의 차가운 공기에 딱딱하게 선 유두를 가볍게 꼬집었다. 유두를 손가락 사이에 끼고 빙글빙글 돌리면서 그는 사파이어의 표정을 음미했다.
사파이어는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고 있었다. 재갈에 틀어 막혀 읍읍 하는 소리 밖에 나지 않았지만 벤체슬라스는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죽이지 말아달라고.
이곳은 목격자도 증인도 없는 사냥꾼과 사냥감, 단 둘만의 성역.
이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져도 해가 비치는 저 바깥 세계에는 영원히 알려지지 못한다. 여기서 어떤 식으로 고문당하고 어떤 식으로 살해당해도 지하 밑바닥의 흙 속에 묻힐 뿐, 시신은 절대로 다시 밖으로 나갈 수 없다. 그의 뼛조각도, 훼손된 영혼까지도.
어떤 식의 고문일까. 신체의 가장 끝 부분부터 작게 토막 내어 잘라가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죽이지 않고 살갗을 천천히 벗겨내는 방법도 있고. 화학약품을 써서 몸의 일부분을 조금씩 녹이는 방법도 있다. 상처를 벌레가 파먹게 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벤체슬라스가 눈앞에서 희생자를 포식하기도 할 것이다. 그가 식인을 하는 모습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그는 그런 일을 하고도 남을 사람이다.
신경의 말단을 송곳으로 쑤시는 고문도 있을 것이다. 이빨을 다 뽑아버릴 수도 있고. 불에 천천히 그슬릴 수도 있다. 인체를 개조 당해서 살아있는 인간 가구 같은 것이 될 수도 있다. 지옥이 바로 여기에 있다.
지옥은 인간의 머릿속에 있다. 그 무엇도 인간의 상상만큼 인간을 두렵게 하는 것이 없다. 사파이어가 부들부들 떨며 눈물 흘리는 것을 벤체슬라스는 진귀한 미식이라도 되는 것처럼 혓바닥으로 천천히, 노골적으로 쓸어 올렸다. 그 눈물은 짜고 달콤한 맛이었다.
벤체슬라스가 잠시 유감스럽다는 듯이 사파이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표정은 동정을 품고 있어도 그의 눈 속에는 악마성이 담겨 있었다. 인간의 껍데기를 뒤집어 쓴 순수한 악 그 자체.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의 성기를 예고도 없이 움켜쥐었다. 사파이어의 허벅다리가 움찔 놀라서 파르르 떨렸다. 희고 고운 모양과는 다르게 벤체슬라스의 손은 돌을 쪼아 만든 조각상처럼 단단하고 용서가 없어서 사파이어는 인체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벽의 틈새나 공업용 바이스에 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대로 잡아 뜯어버리면 어떨까. 그 때는 말을 좀 들으려나?”
사파이어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벤체슬라스는 골반 가까이에 있는 성기 뿌리를 꽈악 쥔 채 엄지로 귀두만큼은 부드럽게 비벼주었다.
“이걸 잘라서 박제해버린 다음에 딜도로 만들어버리는 거야. 그리고 상을 줄 때마다 쓰는 거지. 구멍에 박아줄 때마다 즐거워서 울어댈걸. 너를 해체하고 재조립한다음 포장해서, 다시 너에게 선물하는 거야.”
벤체슬라스가 전혀 화나지 않은 목소리로 자신의 계획을 차분히 설명하자 사파이어의 알아들을 수 없는 헐떡임과 웅얼거림이 더욱 심해졌다. 벤체슬라스는 비탄과 고뇌에 찬 사파이어의 예쁜 얼굴을 혀로 핥아주면서 “쉬잇.”하고 달래는 소리를 냈다. 그 다음 순간,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의 가슴을 물어뜯었다.
X자 형틀과 사파이어를 구속한 사슬, 가죽 끈이 덜컹덜컹 흔들릴 정도로 격렬한 반응이 일어났다.
벤체슬라스는 피가 날 정도로 사파이어를 물어뜯었다. 고기를 물어뜯는 것 같이 야만적이고 집요했다. 사파이어의 탄탄한 가슴에 이빨자국이 나기 시작했다. 꽉 잡힌 성기는 이제 아무래도 좋은 듯이 사파이어는 유두를 물어뜯기고 씹히는 고통에 집중했다.
뜯긴다. 뜯긴다. 끊긴다! 절단된다!
사파이어가 묶인 형틀을 흔들어대며 짐승같이 울자 벤체슬라스가 입을 떼 주었다. 그리곤 조금 전의 폭력성은 다 사라진 듯이 자기가 낸 이빨 자국을 다정하게 핥아주었다.
벤체슬라스는 울고 있는 사파이어의 턱을 쥐고 자신을 바라보게 하며 근사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에게 죽고 싶은 게 아니었나? 넌 나에게 죽고 싶어 했잖아. 그게 너의 가장 큰 바람이고 욕망이지.”
사파이어는 눈물로 부옇게 흐려진 눈을 찌푸리며 벤체슬라스를 마주보았다. 그는 떨고 있는 초식동물을 한 입에 집어삼키기 전에 잠시 관찰하는 육식동물처럼 사파이어를 지그시 보고 있다가 그의 침고인 재갈에 딥키스하듯이 혀를 얽었다.
재갈을 사이에 두고 반쪽짜리 키스를 한 벤체슬라스가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그의 머리를 따라 사파이어의 시선도 아래로 내려갔다.
“봐.”
벤체슬라스는 몸이 고정되어 불편한 사파이어를 위해 손에 쥔 성기를 단단히 끌어당겨 보여주었다. 한 손으로 쥐기 버거울 정도로 발기해있었다.
“너도 뼛속까지 뒤틀린 변태야.”
사파이어가 후욱후욱 숨을 내쉬며 하지 말라고 소리쳤다. 그 소리는 성대를 울리고 목구멍까지 넘어왔다가 재갈에 막혀서 애처로운 씩씩거림으로 변했다. 벤체슬라스는 단번에 사파이어의 것을 집어삼키고 어금니로 귀두를 짓씹었다.
이빨로 물어 끊어서 뜯어버리지는 않은 채 고기만을 씹는 잔인한 식사가 계속됐다. 고문 끝에 사파이어는 고통스러운 사정을 하며 그대로 기절했다. 벤체슬라스는 더 이상 반응이 없는 사파이어에게, 재갈을 풀고, 혀를 얽으며 길게 키스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