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안식을 주세요
사파이어는 이어폰을 빼고 긴 한숨을 내쉬며 총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핏자국이 튄 얼굴은 바람에 식어 싸늘했다. 오늘은 별다른 상처를 입지 않았다. 운 좋게도 생채기조차 없는 날이었다.
임무를 완수한 횟수가 어느 정도를 넘어서면서부터 그의 실력은 이제 완성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완벽도가 높아졌지만 자잘한 생채기정도는 아직도 가끔씩 남기고 다녔다.
지금 당장 느끼는 것은 갈증이다. 탁자에는 세공사가 그를 위해 준비해놓은 물병 하나가 있었다. 언제나처럼 그다운 섬세한 배려였다.
사파이어는 물병 뚜껑을 열고 꿀꺽꿀꺽 삼키기 시작해 병 바닥이 보일 때까지 물을 들이켰다. 완전히 비우고 나서야 사파이어는 병을 다시 탁자에 내려놓았다. 물이 들어가니 정신이 좀 들었다. 그만의 습관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사람을 죽이고 난 후엔 언제나 진한 갈증이 났다.
목을 축이고 나니 땀과 피로 끈적한 몸의 불쾌함이 떠올랐다. 사파이어는 패용하고 있던 무기들을 꺼내 바닥에 툭툭 떨어뜨리고는 그 자리에서 옷을 벗었다. 자잘한 흉터들로 가득한 근육질의 몸이 나왔다.
속옷까지 완전히 벗어버린 후 사파이어는 욕실로 들어갔다. 그가 남기고 간 잔해들은 군용 나이프 한 자루, 사람 목을 감아 죽일 때 쓰는 쇠줄, 강철 너클 한 쌍과 손잡이 부분이 강화 플라스틱으로 되어 있는 손도끼, 그리고 군데군데 방탄 패치가 붙어있는 암살복이었다.
가면과도 같은 껍질들만이 뒤에 남아 욕실에서 쏴아아하고 쏟아져 나오는 물줄기 소리를 가만히 응시했다.
사파이어는 물줄기에 몸을 밀어 넣으며 피를 씻어냈다.
쇠 냄새에도 종류가 여러 가지 있다. 총구에서 나는 화약과 쇠 냄새, 칼과 도끼에서 나는 냄새, 갓 피를 머금기 시작한 냄새, 피 자체에서 나는 쇠 냄새, 죽은 지 오래된 쇠 냄새와 신선한 쇠 냄새, 이따금씩 환각처럼 코끝에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쇠 냄새.
물줄기를 맞고 있으면 그런 냄새와 생각들은 대부분 사라진다. 혈관 속을 타고 흐르던 아드레날린도 대부분 날아가게 된다. 그러고 나면 남는 것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든 피로감과 뭐라 말하기 힘든 차분함, 그리고 보상에 대한 어두운 열망 같은 것들이다.
보상. 사파이어에게 보상은 단순하고 직관적이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안식. 섬세한 세공사가 사파이어에게 주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안식이었다. 그의 품 안에 안겨있을 때면 사파이어는 깊은 잠에 빠져드는 것 같았다. 그의 팔에서 벗어나 일어날 때는 마치 숙면을 취하고 난 다음에 느낄법한 가뿐함과 개운함을 느꼈다.
피를 얼추 씻어내고 물줄기가 주는 마사지에 몸을 맡기며 멍하니 있을 때 욕실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선 자세 그대로 눈동자만 굴려 누구인지 확인하니 윤기 나는 백금발 머리칼을 빗어 넘긴 세공사가 서 있었다.
세공사의 뱀 같은 얇은 입술은 엷은 미소로 가늘게 휘어져 있었다. 보상의 시간이다. 세공사는 그대로 옷가지를 벗어 옷이 젖건 말건 신경 쓰지 않고 바닥에 툭툭 흘렸다.
사파이어는 기대감으로 침이 꿀꺽 넘어갔다. 그 근사한 목울대가 꿀꺽거리는 것을 보며 세공사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세공사는 전희라도 되는 듯이 일부러 천천히 옷을 벗었다. 성급한 보상은 큰 만족을 안겨주지 못한다. 그런 인스턴트식 사랑은 품위도 없을 뿐더러 무엇보다 저질이다. 그는 그의 보석에게 아낌없이 공을 들이는 장인이다.
사파이어는 세공사가 마지막 한 조각 옷가지까지 벗기를 가만히 기다렸다. 그는 기다리도록 학습된 동물이다. 인내심이 높고 고분고분하며, 인형같이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세공사는 애 태우기가 끝났다는 듯이 재빨리 다가와 사파이어의 등 뒤에 섰다. 쏟아지는 물줄기 너머로 세공사의 손길이 와 닿았다.
사파이어는 익숙한 듯이 벽에 양손을 짚고서 세공사에게 등을 내주었다. 세공사는 그런 사파이어를 천천히 진하게 애무했다. 탄탄한 근육질의 등을 쓰다듬고, 생긴 지 오래된 흉터들의 골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흉터가 안겨주는 섬뜩한 기억 하나하나마다 사파이어의 등이 흠칫 흠칫 떨렸다. 그 중에는 세공사가 만든 상처도 있다.
“빨리…….”
“쉬잇.”
세공사는 보채는 사파이어를 달래가며 천천히 몸을 열었다. 그가 키워낸 보석이지만 사파이어의 몸은 근사했다. 매끈하고, 균형이 잘 잡혀있고, 흉기 같은 근육은 한 자루의 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 탄탄한 근육들을 더듬어 가슴에 봉긋하게 솟은 유두를 건드렸을 때 사파이어의 목울대에서 낮은 탄식 같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
자신의 손 안에서만큼은 사파이어는 육체의 반응을 숨기지 않는다. 그렇게 하도록 교육했으니까. 쾌락에 약하고 몸 섞기로 보상을 바라는 미숙한 어린아이. 성인 남자이고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지만 그의 내면은 철저하게 어린아이, 학대받은 어린아이였다. 세공사는 자신의 작품이 만족스러웠다.
손가락으로 지분거리며 한 동안 유두를 희롱하다가 세공사의 손길이 아래로 내려갔다. 수풀 속에 숨어있는 사파이어의 성기를 잡자 반 밖에 서지 않은 채 아직 자고 있었다 싶을 정도로 늘어져있던 그 물건이 갑자기 단단하게 서기 시작했다.
기둥의 굵기도, 손 안에 잡히는 따뜻함도 모두 아찔할 정도의 현실감이 있다. 그 아래에서 덜렁거리는 적당한 크기의 음낭과 그 안에 들어있는 둥그렇고 물렁한 것까지도.
세공사는 한 손으로 사파이어의 것을 주무르며 다른 손으로는 그의 엉덩이를 열어갔다. 탄탄한 엉덩이였지만 살을 벌리고 예민한 점막을 쓰다듬으니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움찔거리면서 조여 댔다. 세공사는 물을 윤활유 삼아 구멍을 한동안 풀어주었다.
사파이어는 이제 고개를 뒤로 젖힌 채 헐떡거리고만 있었다. 더 재촉하지는 않았지만 눈동자만 물끄러미 굴려 애절하게 세공사를 바라보는 그 시선에는 절박함이 담겨 있었다.
세공사는 사파이어의 것을 주물럭거리던 손으로 자신의 것을 만져 단단하게 세웠다. 그가 준비하는 것을 느끼고 사파이어가 알아서 다리를 벌렸다. 세공사의 것이 사파이어의 입구에 닿자, 금방 몸 안에 저 굵고 흉칙한 것이 침범해 들어올 것이라는 걸 느낀 사파이어가 다시 낮은 탄식 같은 신음을 내며 미약하게 허리를 떨었다.
세공사는 벽을 짚고 선 사파이어의 겨드랑이 사이에 자신의 팔을 끼워 넣고 단단하게 고정한 다음 승모근이 듬직하게 솟은 그의 어깨를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육식동물이 먹잇감을 베어 무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빨자국이 날 정도로 강한 악력이었고 아마 정사가 끝나고 난 후에는 피가 나고 있을 것이다. 선명한 통증에 사파이어가 짧은 비명을 터뜨렸다. 그 순간, 세공사의 것이 한 번에 사파이어의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아! 윽! 아아!”
터지기 시작한 비명은 수컷을 미치도록 자극했고 움직임은 점점 더 격렬하고 빨라졌다. 맞닿은 뼈가 덜걱거릴 정도로 폭력적인 관계였다. 하지만 딱 이 정도의 난폭함이 좋았다. 사파이어는 언제나 깨지기를 원했다. 망가지고 부서지기를 원했다. 그는 세공사의 손에 살해당하고 싶었다.
죽는다. 내가 그의 손에. 이런 상상을 하자 앞의 것이 미친 듯이 흥분하더니 추삽질을 몇 번 하지 않았는데도 금방 하얀 액을 토해내고 말았다.
사파이어가 부르르 떨며 한 번 사정한 것을 느낀 세공사는 그에게 여운을 즐길 틈을 주지 않고 더 잔혹하게 밀어붙였다. 사파이어가 고개를 저으며 말초신경을 고문하는 자극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살인병기로 키워진 그 못지않게 세공사의 팔뚝은 단단하고 자비가 없었다.
그는 세공사와 벽 사이에 꼼짝없이 갇혀 몸을 내주고 내장을 유린당했다.
쉴 새 없이 비명 지르는 수밖에 없었다.
사파이어가 세 번 사정할 때까지 세공사는 한 번 사정했다. 그리고 그의 물건은 좀처럼 화를 풀지 않았다. 그의 모든 폭력성이 거기로 쏠린 것처럼. 세공사는 자비롭고 아픈 보상을 사파이어에게 듬뿍 쏟아주었다.
그가 완전히 기진맥진해 반쯤 시체가 된 것처럼 세공사의 품에 안겨 욕실에서 끌려 나갈 때까지, 이윽고 죽음 그 자체인 것처럼 잠을 잘 때까지. 세공사는 자신의 보석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렇게 안식의 밤이 어두워갔다.
시퍼렇고 우호적이지 못한 햇살이 얇은 커튼 너머로 슬며시 비쳐 들어왔다. 햇살이 조용히 눈가를 간지럽히는데도 사파이어의 닫힌 눈꺼풀은 떨리지도 않았다.
고요하고 규칙적인 숨소리가 어느 정도 반복되다가 사파이어는 예고 없이 눈을 떴다. 창문의 투광필름을 거쳐 한 꺼풀 정제되어 비치는 햇빛은 자다가 일어난 사람에게도 크게 부담을 주지 않았다.
이 방은 항상 어둑어둑한 느낌이 있었고 인테리어는 창백하게 하얗고 단조로웠다. 방에 따뜻한 느낌을 부여하자면 조명을 켜는 것 정도였다.
사파이어는 눈으로 천장을 훑고 아무런 장식이 없는 그 백색의 우주를 들여다보다가 눈동자를 스륵 굴려 옆을 쳐다보았다. 당연하게도 아무도 없었다. 세공사는 그가 잠든 사이에 떠난 모양이다.
사파이어는 엉망진창이 된 몸을 일으켰다. 말라붙은 땀과 체액으로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바로 일어나서 욕실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허리 쪽에서 찌르르한 통증이 느껴져 그는 잠시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중간부터 정신을 잃어서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는 충분히 보상을 받은 모양이다.
혹사시키고 있는 기계에 전원을 넣고 작동이 되기 시작하듯이 그의 몸에도 잊고 있던 통증이 하나 둘 씩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 자잘한 통증 속에서 그는 어젯밤의 상황을 대강 유추해볼 수 있었다.
손목에 쓸린 상처가 있는 것을 보면 손을 묶인 모양이고. 유두가 따끔거리는 걸 보니 물렸나보다. 허벅지 안쪽에 불쾌한 따끔거림이 들어 확인해보니 과시적인 이빨자국이 나있다. 내 것이라는 소유욕을 증거로 남기고 싶었나보지.
항문 쪽은 말할 것도 없다. 찢어진 느낌이 들지는 않지만 그의 내장은 그 자신보다도 더 초췌한 상태일 것이다. 목덜미에도 몇 번 물린 자국이 있다. 여기는 피가 조금 났던 모양이다.
오늘은 회초리질은 없었나. 등은 거울을 통해 보지 않으면 모르겠지만 딱히 이렇다 할 감각은 없는 걸 보니 매는 쓰지 않은 모양이다. 목이 막힌 느낌이 들어 헛기침을 하려던 사파이어는 목의 상태가 가장 좋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유리조각을 삼킨 듯이 쓰라린 느낌이 들었다. 학대당하는 짐승처럼 울부짖은 모양이다.
세공사는 섬세한 돔이다. 그는 철저히 계산된 가학을 베푼다. 피학자가 누구든 간에 상대가 세공사라면 만족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적어도 사파이어가 본 좁고 단순한 세계에서는 그랬다. 세공사는 물건을 잘 망가뜨리지 않으니까, 사파이어에게도 심각한 손상을 안기진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사파이어는 세공사의 좋은 도구니까.
‘도구가 아냐. 넌 작품이야.’
세공사는 그렇게 속삭였다. 사파이어로서는 그 차이점을 알 수가 없었다.
‘도구 따위와 비교하면 안 돼. 도구에게는 이렇게 공을 들이지 않아. 도구는 손에 쥐고 사용하는 거야. 하지만 작품은 가꾸고 다듬고 완성해내는 것이지.’
가끔씩 청부 의뢰의 일환으로 세계 각국의 비밀 정보문서를 읽거나 반쯤 첩보를 해야 하는 경우도 있지만 지성이 있다고 사파이어가 세공사의 모든 은유를 알아들을만한 감성까지 겸비한 것은 아니다.
그건 불필요한 것이다. 결함이 있는 보석은 깨지게 된다. 그리고 사파이어는 감정이라는 결함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사파이어는 세공사가 남긴 쓰라림의 여운과 자잘한 유리조각 같은 날카로움을 가만히 감내하고 있다가 몸을 일으켜 세워 욕실로 들어갔다. 냄새는 지워야한다고 배웠다. 일이 없는 날에도.
그래도 충분히 휴식을 취한지라 그의 욕구는 채워져 있었다. 이 다음 허기가 찾아올 때면 또 다시 어두운 안식을 갈망하리라.
샤워를 끝내면 일단 식사를 해야 한다. 그의 몸도 정비를 해두어야 하는 도구다. 식단은 정해져 있다. 맛은 중요하지 않다. 영양분. 그게 모든 것이다.
단백질과 비타민이 필요하고 정상적으로 사고하기 위해선 탄수화물도 높은 비중으로 섭취해야한다. 식이섬유도 빼놓을 수 없다. 청부 의뢰를 맡을 땐 나트륨 함량이 조금 높은 식사를 하는 편이지만 평소엔 무염식에 가깝게 소금 섭취를 줄이는 편이다. 수분. 수분도 중요하지.
사파이어의 몸은 군살 없이 탄탄하게 근육이 붙었지만 과시용으로 부풀린 듯이 커다란 근육이라기보다는 날렵한 흉기 같은 매끈한 근육이었다. 덩치가 너무 크면 가끔 임무에 지장을 준다.
원래부터 뼈대가 큰 보석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사파이어는 기본 골격이 남보다 크다고 할 수 없다. 동양인치고는 큰 편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에게 명령을 내리는 사람, 그가 제거해야하는 사람, 그와 협업해야 하는 사람, 그가 마주쳐야 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그보다 크다.
사파이어는 평균치보다 조금 왜소한 체구라고 할 수 있다. 호리호리한 세공사마저도 사파이어보다는 키가 크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사람을 죽일 만큼의 근력이 있는가, 그리고 정말로 사람을 죽이는 담력이 있는가다.
몸의 정비를 끝마치고 나면 도구들을 갈무리해야 한다. 총을 전부 분해해서 먼지를 소제하고 흔적을 지운다. 손상된 부분은 수리하고 다시 재조립한다.
칼 같은 날붙이는 임무에 한 번씩 사용되면 어딘가 날이 빠져있다. 이것도 다시 잘 갈아둬야 한다. 쇠줄은 목표를 조용히 처리해야할 때 쓰곤 하는데 내구성이 떨어지기 전에 새것으로 교체해주어야 한다. 손도끼 역시 날이 빠진 곳이 없나 확인해야하고 무엇보다도 자루가 멀쩡한가를 봐두어야 한다.
제일 중요한 것은 피를 잘 닦는 것이다. 피는 모든 것을 녹슬게 한다. 그리고 증거를 알아서 뿌리고 다닌다.
사실 일을 할 때 사파이어가 꼼꼼하게 뒷일까지 생각하며 깨끗하게만 처리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을 죽이다보면 어쩔 수 없이 난장판을 만들어야 할 때가 있고 사파이어 본인의 최우선 목표는 남의 눈에 띄지 않고 목표를 제거한 다음 그 자리에서 철수하는 것이니까.
사파이어가 남긴 증거들은 대부분 후속처리반이 숙련된 솜씨로 정리해준다. 시체를 처리하는 사람, 지문과 혈액을 지우는 사람, 알리바이를 만드는 사람, 깨진 유리를 치우고 탄흔을 지우고 쓰레기를 정리하는 사람, 뭐 그런 일들을 하는 사람들.
대충 흐름은 이렇다. 청부업자인 세공사에게 의뢰가 들어온다. 세공사는 그것을 실제 암살을 수행하는 휘하의 보석들에게 배분한다.
주인이 명령을 내리면 한 자루의 칼이라고 할 수 있는 사파이어가 암살자로서 그 임무를 수행한다. 임무를 성공적으로 끝마치고 귀환하면 남은 것을 후속처리반이 처리한다. 의뢰인은 돈을 지불하고 계약은 종료된다.
단순 도식화하면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일이지만 사파이어에게는 그것보다 더 단순한 일이다. 시키는 일만 하면 된다. 의식주는 그의 주인이 보장하고, 어린아이에게 사탕으로 보상해주는 것처럼 사파이어에게 몸으로 보상해주고, 별로 걱정할 것이 없게 만든다.
단순한 삶이다. 피비린내가 가시지 않는다는 것을 제하면.
암살자는 여가시간에 무엇을 할까. 필수적으로 해둬야 하는 무기 정비를 뺀다면. 먹는 것에 대해서도 극도로 제한되어 있고.
돈은 일반인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벌지만 그걸로 얼마만큼의 자유를 살 수 있을까? 소비도 원하는 만큼 할 수 있지만 그러고 싶은 욕구가 있을까? 다른 사람이면 어떨지 몰라도 사파이어에겐 돈 같이 물질적인 보상도 없다. 그저 육체관계뿐이다.
사람은 보는 것을 욕망하게 된다. 사람을 죽이는 것을 업으로 삼아 인간의 오욕칠정을 내다버리고 마치 기계부품과도 같이 살아온 사파이어에게 딱히 이렇게 하고 싶다, 저렇게 하고 싶다는 욕망이랄 게 있을까.
몸을 움직이고 싶다는 욕구는 있지만 그 욕구는 반쯤 의무이기도 하다. 몸을 단련하는 것 말고 또 뭐가 있을까. 마음껏 휴식할 수 있는 권리?
그는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만들지 못한다. 여자와 가정을 꾸릴 수도 없고. 매춘부와 동침하는 것도 허가를 받아야한다.
섹스가 문제가 아니다. 그가 누군가와 접촉한다는 것 자체가 통제받아야 하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친구는 없다. 밥 먹듯이 신원이 바뀌는 그를 아는 사람도 없고.
어느 날 그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개죽음을 당한다고 해도 그의 죽음을 기억해 줄 사람은 없다. 말 그대로 무에서 나왔다가 무로 돌아간다.
이런 상황에서 세공사가 한 번씩 던져주는 쾌감에 그가 미친 듯이 몰입하는 것도 딱히 이해하기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에게는 정말로 그것밖에 없다. 달콤한 맛이 나는 것은 그것 밖에.
단순한 생활은 사고도 단순하게 만든다. 사파이어는 자신이 몇 살쯤 먹었는지, 어렸을 때 기억은 무엇인지, 고향은 어디인지, 자신의 본명은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럴 욕구도 들지 않고, 그런 것을 떠올리려고 할 때 으레 느낄법한 아련한 슬픔 같은 것도 없다.
그가 자기 자신에 대해 진지하게 고려하는 것이라곤 예를 들어 혈관이 너무 깊게 베이지 않았는가, 치명적인 상처인가 아닌가,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몸 상태인가, 이 악력으로 저 목을 분질러 죽일 수 있는가, 그런 것 정도다.
해야 할 것을 다 하고 나니 정말로 아무것도 할 게 없어서 그는 망연자실하게 창가에 가 섰다. 이 방에는 TV가 없다. 외부와 소통할 수 있는 것은 창문 정도인데 그것도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필름으로 덮여있다. 책 같은 것도 없다.
감성이 없는 그는 굳이 감성을 키워야 할 이유를 모르겠고, 감성 없는 질 좋은 칼을 가진 세공사의 입장에서는 굳이 감성을 키워줄 위험을 무릅쓸 이유를 모르겠다. 같은 이유로 음악도, 그림도 없고, 그의 생활엔 예술이 없다.
사파이어가 한 송이 장미꽃을 본다면 줄기가 잘린 식물이라고 인지할 것이고 산에 만발한 꽃나무들을 본다면 유기적 메커니즘을 매년 반복하는 식물 군체라고 인지할 것이다.
물론 그는 평균 이상의 지능을 가지고 있긴 하다. 지능이라기 보단 지식이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암살에는 추리력이 필요하고 때로는 창의력도 필요하다. 좋아한다고 하긴 애매한데 다른 활동보다 그가 스트레스를 덜 느끼는 것이 있다면 수학 정도일 것이다.
수학의 세계는 단순하고 직선적이며 명쾌하다. 사파이어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요소가 없다. 그것은 몸의 쾌락이 주는 안락함과는 다른 종류의, 정신적인 안락함이었다. 모든 것을 잊게 만들고 머리를 하얗게 물들여 텅 비게 만드는 안락함과 무언가에 깊이 몰두해 그것만 제외하고 나머지를 이 세상에서 소거해버리는 안락함.
하지만 세공사를 비롯해서 그 어느 누구도 암살자가 필요 이상으로 똑똑해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아.”
창 밖에서 비가 내리고 있음을 깨달은 뒤에야 사파이어는 자신이 잠겨 있던 게 상념이라는 것을 알았다. 몰두하는 감각, 나쁘지 않다.
한 두 방울 빗줄기로 시작한 것이 점차 소리 없는 비로 번지더니 이윽고 빗줄기가 굵어지며 제법 거센 비가 되었다. 창문을 톡톡 두들기는 빗소리가 마음을 차분하게 눌러주며 더불어 몸의 근육도 나른하게 눌러주었다.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풍경은 사람들이 우산을 펴거나 건물로 대피하는 모습, 혹은 들고 있던 것으로 머리를 가리며 허둥지둥 어디론가 가는 모습, 쏟아지는 빗줄기에 번지기 시작한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같은 것들이었다.
자기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고 의미 없이 스쳐 지나갈 군중의 모습이었지만 사파이어는 개나 고양이처럼 창가에서 몇 시간이고 그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누가 그에게 그게 재밌냐고 물어본다면 재밌다고 대답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어째서일까, 질리지 않았다.
인간군상의 모습을 하나하나 눈으로 쫒던 사파이어는 30분이 지나고 나서야 창가에서 떨어졌다. 피로가 몰려왔기 때문이다. 비는 몇 시간동안 계속 내릴 것처럼 퍼부어댔다. 자기 좋은 날씨다. 이런 날씨엔 죽은 것처럼 잘 수 있다. 동경하고 바라 마지않는 영면과도 같이.
2시간 후에 사파이어는 잠에서 깼다. 전화기가 요란하게 울려대고 있었기 때문에. 창 밖 하늘은 아까보다 조금 더 어두워졌다 뿐이지 다른 점은 변한 것이 없었다. 사파이어는 물속에서 끄집어 올려내진 것처럼 가쁜 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자잘한 상처와 피로에서 회복되고 있던 몸이 비명을 질렀다.
사파이어는 수화기를 들었다.
“예.”
듣기 싫게 갈라진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방의 전화번호를 알고 전화하는 사람은 없다. 이제는 구세대의 유물이라고도 할 수 있는 전화기를 굳이 사용해서 연락을 취하는 건 딱 정해져 있다. 세공사였다.
“듣고 있나?”
“예.”
“많이 피곤한가보군.”
“지금 깼습니다.”
“의뢰다.”
의뢰라는 단어가 귓가에 닿자 나른한 피로가 확 달아나고 핏줄기에 각성 효과가 돌기 시작했다. 꿈속을 헤매다가 강제로 현실에 내팽개쳐진 것 같은 이 실제감, 지독한 현실감. 이것들은 사파이어가 살아있다고 느끼게 만들어주었다.
“의뢰. 예. 알겠습니다.”
사파이어는 세부사항을 전해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공사는 사파이어가 작은 정보 하나라도 놓치지 않게 그가 조금이라도 망설이는 기색이 있으면 천천히 몇 번이고 다시 설명을 해주었다.
언제나 이런 식으로 지령을 내리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종이 같이 흔적이 남기 쉬운 것은 사용하지 않았다. 읽고 태운다고 해도 어쨌든 재가 남는 것이고 실수로 처리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그게 훗날 자기 목 위로 떨어질 단두대의 칼날이 되니까.
“아직 회복이 덜 됐으면 이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맡겨도 돼.”
“아닙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상처는 어떤가?”
사파이어는 자신의 몸을 한 번 내려다보고 점검했다.
“이상 없습니다.”
“어젯밤에 내가 지나치게 혹사시켰나?”
“크지 않은 통증입니다. 금방 사라질 겁니다.”
“언제까지 준비할 수 있나?”
“2시간 이내로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데리러 가지.”
“저기.”
“뭐지?”
즉답을 하던 사파이어가 대답을 하지 않고 몇 초간 가만히 있자 세공사가 그 의중을 파악했다.
“섹스는 안 돼. 몸에 무리가 너무 가. 며칠 간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갑자기 일이 들어올 줄 몰랐어. 이번엔 안 돼.”
“그럼 하룻밤동안 같이 해주시는 겁니까?”
“그렇게 하지.”
그리고 전화는 끊겼다. 사파이어는 끊어진 신호음을 듣고 있다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의 얼굴은 미소 짓는 것을 까먹고 있었지만 마음속은 아주 엷어서 흰색에 가까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입 꼬리를 끌어올려 웃는다는 것을 해 본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어떻게 웃고 미소지어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고 실제로 하자면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세공사의 품에 안겨 있으면 꾸벅꾸벅 잠이 쏟아졌다. 안도감이라고 할까, 긴장이 풀렸다. 물론 세공사는 가차 없이 벌을 주기도 했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팔 안은 아늑해서 사람을 의존하게 만든다.
하룻밤. 하룻밤이라. 보통은 눈뜨기 전에 사라져있기 때문에 하룻밤동안 자신을 감싸 안아주고 한 침대에서 같이 잠든다는 것은 큰 보상이었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원하던 장난감을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된 어린아이처럼 사파이어는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감출 수는 없었지만 그걸 표현할 방법을 몰랐다.
사파이어는 들뜬 상태로 사람 죽일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세공사는 전화를 끊고 혀를 찼다. 최근 들어 사파이어의 지명도가 부쩍 높아졌다. 사파이어를 원하는 고객들이 많다는 것은 세공사의 보석 세공 실력이 뛰어나다는 방증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노출도가 높아진다는 소리기도 하다.
극비사항인 암살자의 신상정보를 어떻게 알겠는가? 소문이 퍼져나가고 있다는 소리다. 사파이어의 일처리에 만족한 고객들이 한 마디 두 마디 정보를 흘리면서 몸값이 점점 높아져간다. 그가 키우는 애완동물이 돈을 많이 벌어다주는 것은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사파이어는 세공사가 깎아낸 보석 중에서도 특별히 값어치가 높은 녀석이었다. 일회용으로 쓰고 버릴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는 사파이어에게 집을 따로 내주었다. 사파이어도 처음엔 지하실에서 시작했다. 세공사가 작업을 하기 위해 특별히 개조해놓은 고문실이었다. 그의 정신을 깎아내리는데 공을 좀 들였다.
본명을 잊게 하고, 과거를 잊게 하고, 어떤 사람이었는지 무엇을 했는지 어떤 기억을 가지고 있었는지 전부 내려놓게 하는 것은 꽤 수고가 드는 일이었다. 그럴만한 가치는 있었다.
사람에게 무력을 주입하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죽이게 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그것은 자질이 있어야한다. 사파이어는 그 자질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살인의 재능에 있어서라면 그는 다이아몬드급이다.
의뢰를 끝마치고 나면 안아달라고 칭얼거리는 것도 값이 싸게 드는 보상이었다. 돈이나 자유를 달라고 하는 것보다야 마음을 달라고 하는 것이 훨씬 이득이지. 그러는 척만 하면 되니까. 세뇌된 애완동물은 거기에 껌벅 속아 넘어간다. 정말이지 단순하고 효과적인 돈벌이 수단이다.
세공사는 드레스 룸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조금 전까지는 고객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이번 패션쇼에 출품될 이탈리안 수트를 입고 있었다. 디자이너가 이번 분기에 새로 만든 옷인데 원단의 재질이 아주 독특했다.
표면적으로 세공사는 프랑스와 벨기에를 오가며 원단 무역을 하는 사업가다. 지금 유지하고 있는 신분은 벨기에인으로, 그의 35번째 신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름은 벤체슬라스. 성씨는 알 수 없다. 그의 억양은 동유럽 어딘가와 섞인 것 같은데 보기만 해서는 그가 어디 출신인지 가늠할 수 없을 것이다. 어쨌든 간에 그는 원어민처럼 프랑스어를 하고 나무랄 데 없는 벨기에 억양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가 고객들과 면담하기 위해 이따금씩 오트쿠튀르를 입는다고 해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뿐더러 오히려 그의 외모와 맞물려 기묘하고 고상한 매력을 더해주었다. 비록 그 안에 몇 가지인가 사람을 죽일만한 도구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그걸 알아채는 사람은 없었고 알아챈다 해도 액세서리의 일환인가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무도 그의 본명을 모른다. 그가 진짜로 어떤 사람인지, 어디서 태어나고 자랐는지. 그의 국적과 신분은 1회용이기에 어떻게 보면 산 채로 무한히 환생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세공사라는 신분만이 그가 오래도록 유지하고 있는 것이었다. 세공사를 이름이라고 하기엔 적절치 못하다. 그 말고도 세공사는 많이 있으니까.
그 중에는 보석을 깎는다기보다 공장제 비즈를 다량 생산해 금방금방 갈아치우는 업자도 있었다. 그가 제일 상종하기 싫어하는 부류였다. 품위도, 역사도 없고 돈마저도 잘 벌지 못한다. 어장관리를 하려면 효율적으로라도 하던가. 동종업계 전체의 질적 하락을 야기한다. 내 몸값까지 같이 떨어진단 말이다.
전 세계의 돈 많은 권력자들은 항상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 한다. 죽이고 싶어 하든가, 혹은 죽이지 않으면 자기가 죽게 될 상황이다. 내키지 않더라도 반드시 죽여야만 하는 경우도 있다.
햇빛 아래에 드러내지 못할 일을 할 때 그들은 은밀히 보석상을 찾는다. 자신의 꿈을 이루어 줄 보석을 구입하기 위해. 이런 맥락으로 보자면 세공사 벤체슬라스가 하는 일은 옛날 귀족들을 상대로 서비스를 제공하던 부르주아 계급과 다를 바가 없었다. 서비스의 종류가 조금 특이할 뿐이지.
사파이어의 행동 범위는 특정 지역을 가리지 않지만 아무래도 조심하게 된다. 기억하기 쉽지 않은가. 사회 부적응자처럼 보이고 말이 없는 동양인 남자. 어딜 가도 눈에 띈다.
벤체슬라스는 살면서 피부색으로 이득 본 것이 많다. 출신을 가늠하기 힘든 백인으로, 특정 민족의 고유한 기질이 드러나지 않는 그의 외견과 더불어 현지인과 별로 구별이 안 되는 탁월한 언어능력은 그가 어느 나라에 가든지 그 사회에 물처럼 섞여들 수 있는 특성을 주었다. 그는 인파 속에서 그림자처럼 사라질 수 있다.
하지만 사파이어? 벤체슬라스가 그의 신분을 철저히 가려주지 않는다면 사파이어는 피칠갑을 한 채 백주대낮에 번화가를 돌아다니는 것처럼 눈에 띌 것이다.
어차피 그는 나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몸이다. 생존할 수도 없고. 자기 자신을 책임질 능력도 없다.
산산조각 부서져도 내 품 안에서 깨질 것이다. 내가 깎아낸 보석이니까.
벤체슬라스는 불편한 수트를 벗고 연한 푸른빛 셔츠에 검은 정장바지로 갈아입었다. 넥타이는 매지 앉고 짙푸른 렌즈가 어둡게 비치는 선글라스를 꼈다. 흰색에 가까운 백금발의 머리가 어깨까지 흘러내리는 것은 어딜 가도 눈에 띈다.
벤체슬라스는 머리칼을 한 데 모아 귀 밑에서 질끈 묶었다. 조금 전까지의 그가 잘생긴데다가 옷차림도 특이한 남자였다면 지금은 잘생겼지만 흘끗 보고 말 인상으로 바뀌었다. 그 기억도 몇 분 안가서 잊히고 말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여기서 차를 타고 가면 40분 정도가 걸린다. 사파이어는 준비하는데 2시간 걸린다고 했다. 그의 2시간은 빠듯하거나 넉넉하게 잡는 개념이 없이 그저 2시간이다. 부족하면 부족하다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파이어는 온전히 2시간 걸려 자신을 준비할지 몰라도 활주로에서 대기하고 있는 비행기는 그렇지 못하다. 조금 일찍 가서 그를 태운다음 비행기에 앉혀놔야 시간이 맞을 것이다.
벤체슬라스는 차고로 내려가 자동차들을 둘러보았다. 5대가 있었고, 주기적으로 번호판을 갈아치우는 것을 빼면 차를 그렇게 자주 바꿀 정도로 사치를 부리는 건 아니었다. 세 대가 스포츠카, 한 대가 세단, 한 대는 SUV였다.
새빨간 페라리는 너무 눈에 띈다. 벤체슬라스는 검은색 메르세데스 벤츠에 올라타고 시동을 걸었다. 벤츠를 감히 수수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람보르기니나 애스턴 마틴보다는 덜 요란하게 스쳐지나갈 수 있는 게 사실이다.
묵직한 세단에 시동이 걸리고 점잖은 엔진음이 울렸다. 차고를 나서기까지는 세단은 강철로 만들어진 신사였지만 도로에 진입하고 나서는 그렇지 못했다.
사파이어의 집에 도착하고 나서 벤체슬라스는 이변을 알았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났을 텐데도 사파이어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이름을 불러도 나오지 않는다. 가만히 귀 기울이니 욕실에서 물소리가 나고 있었다. 다른 것은 준비되었나? 침대에는 늘어놓은 무기들과 착용하려고 준비해놓은 레그 홀스터, 방탄패치를 붙여놓은 검은 암살복이 나와 있었다.
설마 딴 맘을 먹은 건 아니겠지. 인간이니만큼 변수는 언제든지 존재한다. 갑자기 미쳐서 총을 입에 물고 자살하는 놈, 자수하려고 하는 놈, 벤체슬라스를 포함해 눈앞에 있는 모든 사람을 죽이려고 드는 미치광이 등등 위험 요소는 얼마든지 있다. 벤체슬라스도 몇 번이고 그런 불량품의 처리를 해야 했던 적이 있다. 별로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보통 그런 이변은 징조를 보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도 사파이어는 변함없는 목소리로 전화하고 있었다.
원래부터 감정의 기복이 없는데다가 감정에 둔한 성격이지만 미세하게 이건 좋다든가 이건 싫다든가 하는 것을 슬쩍슬쩍 내비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기준으로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의 정신 상태를 대강 가늠하고 있었다.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평이했고 불길한 징조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하긴, 미친놈이 예고를 하고 발광을 하지는 않지만.
혹시라도 그를 제압해야 할지 모르고 재수가 없으면 이 자리에서 죽여야 할 수도 있기 때문에 벤체슬라스는 품에 지니고 온 권총을 꺼내 소음기를 달았다.
총구에서 터져 나오는 파열음은 깊고 널리 퍼지는 울림이 있다. 소음기는 그것을 짧게 끊어주는 역할을 할 뿐 화약이 폭발할 때의 큰 소리까지 막아주진 못한다. 하지만 이 근방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들었을 때 바로 총성이라는 것을 구분해내지 못할 것이고, 그들이 직접 신고를 하기까지 시간은 늦춰줄 수 있을 것이다. 경찰이 올 때쯤이면 벤체슬라스가 증거를 인멸하고 사라지기에 충분하다.
벤체슬라스가 여기까지 차를 몰고 오는데 40분이 걸렸다. 샤워하는데 40분씩이나 걸리지는 않는다. 설령 나머지 준비를 끝마치고 샤워를 마지막 수순으로 하고 있다고 해도 벤체슬라스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는 들었어야 한다. 그 소리를 놓쳤다고 해도 몇 번이고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는 반응을 했어야한다.
미쳐버린 것인가? 돌연 미쳐버려서 욕실 안에서 꼼짝도 않게 된 것인가? 벤체슬라스는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며 조심스럽게 욕실 문을 열었다.
욕실 안은 수증기로 뿌옇게 시야가 가려져있었다. 사파이어는 벤체슬라스에게서 등진 채 쏟아지는 물줄기를 마주보고 서 있었다.
“사파이어.”
벤체슬라스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사파이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주인을 돌아보았다. 등지고 선 채 고개만 돌린 모습이었다. 다행히 그 눈은 미치지 않았기에 벤체슬라스는 방아쇠까지 걸어두었던 손가락을 빼내 총신 옆에 일자로 붙였다.
사파이어는 눈동자만 스륵 굴려 벤체슬라스의 손에 들린 권총을 내려다보았다. 별로 놀랍지 않은 모양이었다. 현실감이 없는 걸지도.
“왜 대답을 하지 않았지?”
“죄송합니다.”
“뒤돌아 서.”
사파이어는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벤체슬라스는 두 번 말하지 않고 직접 다가가 사파이어를 뒤돌려 세웠다. 그가 돌아서지 않은 이유는 명백했다.
“가라앉지 않아서.”
사파이어의 성기는 잔뜩 발기한 채 빨갛게 충혈 되어 있었다. 비린내가 날 정도로 발정한 모습이었다. 벤체슬라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몇 번 했지?”
“세 번. 아니 네 번.”
그렇게 말하면서도 사파이어는 스스로에게 확신이 없는 것 같았다. 벤체슬라스의 얼굴이 무섭게 굳었다. 벤체슬라스가 사파이어의 따귀를 후려갈겼다. 사파이어의 눈이 놀람으로 벌어짐과 동시에 벤체슬라스가 그의 손목을 콱 붙잡고 욕실 밖으로 끌고 나왔다.
평소엔 섬세하고 가는 손가락이었지만 지금은 사신의 손아귀처럼 자비가 없었다.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를 침대에 내던지고 그가 정신 못 차리는 틈을 타 배 위에 올라탔다.
벤체슬라스는 저항하는 손을 한 손으로 찍어 누르고 다른 손으로 사파이어의 따귀를 두 대 더 때렸다. 그 용서 없는 손길에 얼이 빠져 있는 사파이어를, 벤체슬라스는 검지를 들이대며 경고했다.
“멍청한 게. 일을 나가기 전에 힘을 빼놔? 내가 허락하지 않은 사항이지. 도중에 개죽음 당하고 싶나? 탈진한 상태로? 어디, 뱃가죽에 구멍이라도 뚫리고 싶은 모양이지?”
벤체슬라스가 무릎으로 사파이어의 배를 찍어 누르자 사파이어가 헉 하는 소리를 내뱉었다.
“발기가 왜 가라앉지 않지?”
“하룻밤 동안 같이 있어준다고 해서.”
또 한 번 사파이어의 따귀가 날아갔다. 슬슬 얼굴이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벤체슬라스는 손을 아래로 내려 사파이어의 성기를 콱 쥐었다. 근육이 잘 잡힌 사파이어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벤체슬라스는 그대로 난폭하게 성기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나쁜 짓을 한 아이를 혼내는 것 같은 그 손길은 이제 다 말라붙어 몇 방울 나오지도 않는 즙을 짜낼 때까지 멈춤이 없었다.
사파이어가 고개를 뒤로 젖히고 숨도 쉬지 못한 채 입을 뻐끔거리며 절정에 도달하자 드디어 발기가 가라앉았다. 수음이라기보다는 살해현장 같은 모습이었다.
이걸로 몇 번째일까. 사실 사파이어는 몇 번을 뺐는지 잘 기억하지 못한다. 네 번 일수도, 다섯 번 일수도 있고, 그 이상일수도 있다. 그럼 이번에 간 건 몇 번째일까. 금방이라도 혼수상태에 빠질 것 같은 피로가 몰려와 눈이 스르르 감겼다.
벤체슬라스는 여운에 잠겨 움직이지 못하는 사파이어를 내버려두고 침대 옆 협탁을 뒤졌다. 사파이어에게 보상과 벌을 줄 때 쓰는 도구를 대부분 다 여기에 구비해놓았기 때문에 그것을 찾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았다.
뭔가가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사파이어가 멍한 눈을 떴다. 벤체슬라스의 손에 들린 것은 강화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작은 정조대였다. 나사로 조이는 것이었고 한 번 착용하면 누군가의 손에 풀릴 때까지 벗을 수도 없는 물건이었다. 그것을 보고 사파이어가 등으로 기어 도망치기 시작했다.
기어서 도망쳐봤자 침대 위.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의 발목을 잡고 강하게 아래로 끌어내렸다. 질질 끌려 내려온 사파이어의 허벅지를 찍어 누르고 저항하는 사파이어를 힘으로 제압한 뒤 벤체슬라스는 그의 시든 물건에 강제로 정조대를 채웠다.
발기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딱 맞물려 들어갈 만큼 여유가 없는 정조대였다. 발기를 하지 못할 뿐더러 강제로 하려고 하면 고통만 느낄 것이다.
“싫어요……. 제발…….”
“입 다물어.”
애원하는 사파이어의 목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벤체슬라스는 정조대의 나사를 조여 버렸다. 이제는 그가 풀어주지 않는 한 물건을 세울 수도 사정할 수도 없다. 벤체슬라스는 냉담한 눈으로 사파이어를 내려다보았다.
“임무가 끝날 때까지 자위는 금지다.”
사파이어는 팔뚝으로 눈을 가린 채 벤체슬라스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벤체슬라스는 그 이상의 폭력은 휘두르지 않고 사파이어의 위에서 내려왔다. 그리곤 물병을 가져와 아직도 침대에 널브러져 있는 사파이어의 하반신에 붓기 시작했다.
차가운 물줄기에 사파이어가 몸을 뒤틀었지만 벤체슬라스의 얼굴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사정하느라 여기저기 튄 정액을 씻어내야 한다. 재수 없어서 저게 어딘가에 묻거나 흔적이 남기라도 하면 그 때는 단지 “재수 없다.”로만은 끝나지 않는다.
침대 시트와 매트리스까지 물로 축축하게 젖어 들어가는 것도 상관없었다. 목숨 값보다는 침대를 교체하는 게 싼 편이다. 물병의 물이 다 비고 나자 벤체슬라스는 물병을 옆으로 집어던졌다. 그의 태도는 극히 사무적이고 차가웠다.
“비행기 시간에 맞추려면 지금 나가야한다. 옷 입어.”
가랑이를 벌린 채 바들바들 떨고 있던 사파이어는 더 이상 대들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혼난 것에 대해 약간 의기소침해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원래부터 크게 감정 기복은 없는 남자다. 힘이 빠져 보이는 것은 방금 전까지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사파이어가 옷을 입고 무기를 챙길 때까지 벤체슬라스는 팔짱을 낀 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준비가 다 되자 벤체슬라스는 그의 손을 잡아끌고 현관문을 나서서 주차해놓은 자신의 벤츠로 향했다.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를 비행기에 밀어 넣을 때까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사파이어는 가랑이 사이에서 느껴지는 이물감이 거슬렸지만 원래부터 모든 걸 빨리 받아들이고 무덤덤하게 적응하는 기질이 있어서 금방 잊게 되었다.
다행히 벤체슬라스가 크게 화를 낸 것은 아니다. 그가 정말 많이 화가 났다면 의뢰 자체를 거절한 채 사파이어를 고문실로 끌고 들어갔을 것이다. 벤체슬라스는 화가 난다고 자기가 애써 갈고 닦은 보석을 부숴버리는 일은 없지만 보석의 형태를 아예 바꿔버리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다.
신체의 일부가 사라진다던가, 그런 식으로.
임무에 집중하자. 목표의 이름은 이반 이바노비치 다닐로프. 러시아의 갑부지만 현재는 체코에서 살고 있다. 프라하에 큰 저택을 사들여 경호원을 두고 지내는데 의심이 워낙 많은 성격이라 낮에는 여자들을 끼고 살아도 밤이 되면 모두 돌려보내고 혼자 지낸다고 한다.
가족이나 친지 등의 피붙이는 러시아에 있다. 때로는 경호원도 믿지 못해서 스스로 무장을 하고 다닌다고 한다. 정원에는 도베르만이 두 마리, 로트와일러가 세 마리가 있다. 도베르만은 짖어서 경고하는 편일 테고, 그보다는 로트와일러를 조심해야한다.
누가 그의 죽음을 바라는 걸까. 후보는 많다. 러시아의 권력자부터 각국의 정보기관, 혹은 마피아, 혹은 그의 경쟁사들. 하지만 의뢰인의 신원은 사파이어가 알 바 아니다. 거기까지 들어가면 암살자가 아니라 소설가의 영역이다.
암살자는 좀 더 다른 것에 집중한다. 어떻게 죽일까. 어떻게 빠져나올까. 중간에 변수는 뭐가 있나. 여자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낸다고 하는데 마침 오늘따라 변덕이 생겨서 하나나 둘, 혹은 그 이상이 남아있다면 어떨까. 경호원의 동선은 어떤가. 개는 어떤 놈부터 처리를 할까. 어떤 식으로 처리할까.
의기소침하게 가라앉아 있던 사파이어의 눈이 시퍼런 칼날같이 매서워졌다. 그의 눈은 푸르고 시린 보석과도 같은 광채를 되찾아 살의로 번뜩이고 있었다.
의뢰인은 이번 사건을 면식범의 소행으로 보이길 원했다. 최대한 얼굴과 신체를 훼손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면식범은 자신의 신원이 탄로날까봐 필요 이상으로 시신을 뭉개놓는 경우가 있으니까.
사파이어는 이미 죽은 사람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주변에 쓸 만한 도구가 있나 찾아보았다. 꽃병은 너무 잘 깨지게 생겼다. 재떨이는 충분히 폭력적이지만 의심을 사게 만들 것이고.
죽은 남자는 여자관계가 복잡하다. 자신이 건드린 여자 중에 하나쯤 원한을 품고 살인을 저지를 정도라고 해도 어색하지는 않다.
나는 여자다. 내가 여자라고 할 때 이 남자를 죽이고 나서 어떻게 할까? 의뢰인은 자신과의 연결고리가 닿는 것을 원치 않는다. 가상의 여자가 이 남자를 살해했고 그 동기는 치정이라고 하자.
나는 이 남자를 정말로 증오한다. 이 남자를 죽이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을 정도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분노다. 일단 이 남자를 죽인 다음 여자는 현실감이 몰려올 것이다.
공포겠지. 두려움일까. 제일 큰 감정은 뭘까. 분노일지도 모르겠다. 사람이 이미 죽었는데도 분노를 감출 길이 없어서 여자는 손에 잡히는, 손에 잡히는…….
손에 잡힐만한 게 뭐가 있을까. 방 안에는 휘황찬란한 골동품과 값비싼 가구들로 장식되어 있었지만 사람의 머리를 으깨놓기에 적당한 것은 딱히 보이지 않았다. 너무 섬세하거나 너무 무겁거나 둘 중 하나였다.
사파이어의 손으로는 의자 같은 것으로 몇 번 후려쳐 안면을 짓눌러놓을 수 있지만 여자 손이라면 이게 가능할까? 죽은 남자의 취향에 딱 맞는, 육감적이지만 가녀린 손발을 가진 여자가? 경찰은 의심할 것이다.
방안을 둘러보던 사파이어는 고풍스러운 탁자를 한 개 통째로 차지하고 있는 으리으리한 분재를 보았다. 가지가 수평으로 멋지게 뻗은 금송 분재였다. 물건의 값어치를 보는 재주는 없지만 아마도 일본산으로 추정됐다.
부자들의 흔한 변덕으로, 밥 먹듯이 취미가 바뀌지만 그 스케일이 남다른 것 중에 하나였다. 달러로 하면 수 만 달러 정도 할 것이다. 다닐로프 같은 남자가 한가하게 나뭇가지나 잘라대면서 분재를 키웠을 리는 없고, 이미 만들어진 것을 사서 모양만 어느 정도 내며 분재 가위로 여기 조금, 저기 조금 다듬는 시늉을 했겠지.
분재 가위. 그거다.
가위는 화분 밑에 있었다. 부주의하게 놓인 잘못이다. 사파이어는 방 안의 물건을 집기 전에 장갑이 헐렁해지지 않도록 다시 한 번 단단히 낀 다음 가위를 잡았다. 가위 날이 아래쪽으로 향하도록 쥐고는 사파이어는 죽은 남자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시신은 금방이라도 눈을 부릅뜨고 되살아나서 사파이어에게 달려들 것 같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파이어는 몸싸움 후에 남자의 머리를 박살내서 죽였다. 지금은 천장을 보고 누워있어서 모르겠지만 돌아 눕히는 순간 깨진 머리에서 뇌수가 콸콸 흘러나올 것이다.
사파이어는 죽은 남자 머리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죽은 사람의 얼굴에 가위를 내리꽂는 데에 망설임은 없었다. 사파이어는 담담하게 죽은 사람을 망쳐놓았다. 그의 표정은 감정의 변화가 없었지만 손길은 점점 난폭하고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이 잊어버린 증오까지 끌어 모아 가위를 쥔 손에 몰아넣은 것처럼.
의뢰인이 일을 확실하게 처리해주길 바라니까 시신을 훼손하는 것뿐이다. 명분을 만들어주면 되는 것뿐이다. 나머지는 처리반이 와서 알아서 이런 저런 증거를 만들어 줄 것이고 미리 돈을 먹여놓은 체코 경찰도 원하는 방향으로 수사를 해 줄 것이다.
러시아는 자국민이, 그것도 거대한 재산을 가진 갑부가 죽었지만 큰 소리를 내면서 외교적 항의를 하지는 않을 것이고. 일은 물 밑에서 조용히 처리될 것이다. 사파이어가 하는 거라곤 그저 뒤에 와서 일 할 사람들을 위해 이런 저런 근거를 만들어 주는 것뿐.
어떤 여자가 경호원이 가득 찬 저택 안에서 그 저택의 소유자를 죽이고, 분재 가위로 얼굴을 득득 긁어놓아 망쳐놓는데다가 소리 소문 없이 조용히 빠져나간단 말인가. 그리고 저택을 지키고 있던 개들은 어디로 갔고?
의문점이 남을 것이다. 면식범이라서 자기에 대한 연결고리가 만들어지는 것을 원치 않아 피해자의 신원을 훼손했다지만 일단 범행을 저지르고 사체가 발견되는 곳이 그의 저택 아닌가.
그리고 평범한 사람이 자기가 막 죽인 사람을 손쉽게 훼손할 수 있을까? 토하거나 울거나 하지 않고, 팔다리를 떨다가 자기 손도 베지 않은 채, 냉정하게까지 보일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일을 처리할 수 있을까?
이 일에 연관되지 않은 몇 몇 경찰은 의심스러워 할 것이다. 몇 몇 기자들도 그럴 것이고. 이런 사건을 주의 깊게 지켜보는 일반인들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사파이어의 편은 힘이 더 세다.
담담하게 죽은 얼굴을 찍어 내리던 사파이어가 돌연 싸늘한 눈으로 자신의 아랫도리를 내려다보았다. 익숙한 열기가 척추 선을 타고 등골을 기어올랐다. 뒷골이 지끈거렸다.
설 것 같다. 발기할 것 같다. 피가 아래쪽으로 쏠린다. 하지만 그의 성기는 강화 플라스틱의 우리 안에 단단히 잡혀 있는 상태다. 나사를 풀어주기 전까지는 부풀어 오른 소시지에 억지로 줄을 칭칭 감아놓은 모양처럼 억압되어 있을 것이다. 해답이 없는 고통이다.
“망할…….”
빨리. 빨리 끝내야.
사파이어는 다른 의미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한 번 반응이 오기 시작한 물건은 얌전히 잠드는 법 없이 점차 채워지지 못할 욕구를 키워가면서 하반신을 뜨겁게 집어삼켰다.
앞쪽의 욕구가 채워지지 못함을 안 것일까, 몸 안 쪽의 돌기가 부풀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전립선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느낌이라고 할까. 사파이어는 입술을 콱 깨물고 사체의 얼굴을 확인했다. 이정도 훼손했으면 된 것 같다. 그보다는 어서 아래쪽의 다급함을 해결해야.
무릎 꿇은 상태에서 일어나려던 사파이어는 음낭 쪽이 아찔하게 당겨오는 느낌에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자기 신음에 자신이 발정하게 되는 건 결과가 영 좋지 못하다.
특히 지금같이 한시라도 빨리 자리를 피해야 하는 곳에서는. 경호원들은 고용주의 부재를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금방 확인하러 올 것이고. 그때쯤엔 사파이어는 유령같이 사라져 있어야만 한다. 사파이어는 아랫도리의 열망을 무시하고 걸으려 했다.
벤체슬라스의 판단은 정확했다. 정조대를 채워놓지 않았으면 지금쯤 사파이어는 살인에 취해서 스스로에게 발정해 피 묻은 손으로 수음을 해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방에 DNA를 뿌리면서. 몇 분이고 계속 욕망이 무시되고 있는 앞 쪽에서 축축하게 무언가가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팬티 안 쪽으로 그 감각이 느껴졌다. 아마 쿠퍼액일 것이다.
간지럽다. 지끈거리기 시작한 허리는 항문 안쪽의 간지러움으로 바뀌어 사파이어를 괴롭혔다. 범해지고 싶다. 거칠게 다뤄지고 싶다. 찍혀 눌려서 푹푹 파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돌아가야 한다.
벤체슬라스는 섹스는 안 된다고 했다. 어제 너무 무리했으니까. 당분간은 쉬어야한다고. 하지만 그에게 돌아가면 그는 적어도 이 상황을 해결해 줄 것이다. 그런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그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가 베푸는 안락함은 나를 완전하게 채운다.
고환이 팽팽하게 당긴다. 빠뜨린 물건은 없나. 놓친 흔적은 없나. 긴장한 허벅지가 저리기 시작한다. 오줌이 마렵지만 싸지 못한 채 틀어 막혀서 계속 버티고 있는 것처럼.
여기서 나갈 길을 생각해보자. 경호원의 순찰 루트는 기억하고 있다. 아니 잠깐, 그게 맞는 건가?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가 이해할 때까지 몇 번이고 설명해줬다. 사파이어는 들어서 기억하고 있다. 뇌 속에 분명히 있다. 잠시 혼란스러워서 그것을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있을 뿐.
실수하지 마라. 여기서 실수하지 마라. 돌아가는 거다. 길을 찾아라. 사파이어는 식은땀을 훔치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절뚝거리다시피 하며 살인의 현장을 떠났다.
벤체슬라스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사파이어의 거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창 밖에는 또 비가 내린다. 푸른 음영이 거리에 길게 늘어져 있었고 검은 우산을 쓴 사람들이 우산만 둥실둥실 떠다니는 것처럼 거리를 걸어 다녔다. 벤체슬라스는 와인을 한 병 딴채 창가에 앉아 있었다.
그는 단 맛이 강한 와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취향인 것은 탄닌의 맛이 강한 묵직한 와인으로, 적당한 가격의 카베르네 소비뇽이면 충분히 그를 만족시킨다.
그는 사파이어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래 걸릴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의뢰대상이 쉽다든가 그런 것보다는 거리적으로 가까웠기 때문에. 저 멀리 어딘가에서 수행하는 임무가 아니었다. 과장 좀 보태자면 옆 동네에 잠깐 다녀오는 느낌이었고, 그래서 벤체슬라스는 길어봐야 이틀일거라고 생각하며 여기서 사파이어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었다.
굵은 빗줄기와 어두운 하늘, 구름을 제대로 투과하지 못해 푸르스름하기만 한 창백한 햇살과 창밖의 풍경이 그를 상념에 잠기게 했다. 사파이어 같은 장기말과 달리 벤체슬라스는 예술을 음미해도 되는 위치에 있고 감정이라는 사치를 가져도 되기 때문에 자신의 특권을 거리낌 없이 누리고 있었다.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겨 있던 벤체슬라스가 돌연 무슨 소리를 들은 듯이 현관문 쪽을 돌아보았다. 물론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벤체슬라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문으로 다가갔다. 문을 연 그는 팔짱을 낀 채 한쪽 벽에 기대어 섰다.
문 밖에는 비에 흠뻑 젖은 사파이어가 울면서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는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이따금씩 가쁜 숨을 토해내면서 팔짱 낀 벤체슬라스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임무는.”
“끝났……습니다.”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의 바지춤을 내려다보았다. 팽팽하게 솟은 곳 없이 멀쩡했다. 그 자리에서 깨부수려고 노력해도 깨지지 않았을 것이다. 살을 잘라낸다면 모를까. 말을 잘 들은 모양이군.
벤체슬라스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 잔악한 미소를 보고 사파이어의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벤체슬라스는 팔짱을 풀고 몸을 굽혀 사파이어에게 어깨동무를 해 일으켜 세웠다. 한계까지 다다른 모양인지 사파이어는 제대로 일어서는 것조차 못했다. 여기까지 오는 과정이 모험이었을 것이다. 호되게 혼난 경험이겠지.
벤체슬라스는 잘했다든가, 고생했다든가 그런 격려의 말은 하지 않았다. 그 대신 비에 젖은 사파이어를 욕실로 끌고 가지 않고 그대로 침대로 데려가 눕혔다. 겉으로 보이는 핏물은 씻겼다지만 옷 안쪽은 아직도 피가 묻어있었고 긴장해서 흘린 땀으로 끈적하게 젖어 있었다. 벤체슬라스는 만류하는 사파이어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며 그의 피부를 핥았다.
숭배하듯이, 혀로 그를 어루만졌다.
따귀를 때리던 그 손이 이제는 비에 젖은 옷을 벗기고 있었다. 다급하게, 그러나 거칠지 않게. 상의를 완전히 벗긴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의 눈을 한 번 들여다보고는 거침없이 바지를 벗겨 내렸다.
팬티 앞 쪽이 빗물인지 무엇인지 모를 것으로 흥건하게 젖어버려 정조대의 윤곽선을 드러내고 있었다. 팬티를 허벅지 아래까지 벗겨 내리니 검붉게 충혈된 성기가 나타났다. 벤체슬라스는 나직하게 흐느끼는 사파이어를 “쉬잇.”하고 달래며 정조대를 풀어주었다.
그리고 그것을 귀한 포도송이라도 되는 듯이 어루만지고 자극시켜서, 좌절되었던 욕망을 다시 한 번 불러 일으켰다. 고환을 쥐고 만지는가 싶더니 그 아래의 회음부를 검지로 꾸욱 눌러주자 사파이어가 허리를 비틀며 헐떡였다. 억압에서 벗어난 성기는 핏줄이 터질듯이 흉악하게 솟아올라 허공에서 꿈틀꿈틀 떨리고 있었다.
벤체슬라스는 옆으로 흘러내린 기다란 백금발 머리칼을 쓸어올려 귀 뒤로 넘기고는 천천히, 물건을 입에 물었다. 뜨거운 숨결이 하반신에 쏟아지자 사파이어가 반사적으로 그 머리를 밀어내려고 했다. 하지만 두 손은 이미 벤체슬라스의 손에 붙잡혀 또 한 번 부드럽게 침대에 눌려져 고정되었다.
멈추지 않을 것 같은 경련이었다. 사파이어는 벤체슬라스의 입 안에서 두 번 절정에 도달했다.
어깨를 들썩이며 소리 죽여 울고 있던 것도 잠잠해졌다. 고개를 들어 확인해보니 사파이어는 기절한 것인지 잠든 것인지 눈을 감고 미동이 없었다. 긴장했다가,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가, 해소됐다가…….
벤체슬라스는 사파이어가 깨지 않도록 침대 위로 올라가 그를 품에 안아주었다. 하룻밤동안 같이 있어주겠다는 것이 보상의 내용이었다. 정신을 잃은 그는 알 턱이 없겠지만.
그러나 단순히 정신을 잃었다기엔 죽은 것이 아닌가 의심될 정도로 안쓰럽고 처참한 모습이어서, 그런 사파이어를 품에 안고 오묘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는 벤체슬라스의 모습은 마치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살인자들의 뒤틀린 밤이 점점 거세지는 빗물에 잠식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