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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3. 질투 (10/10)

외전 3. 질투

“이, 이, 이럴 줄 알았어. 내가, 내가 이럴까 봐…!”

시준은 소파에 앉아 거실 이곳저곳을 빠르게 오가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지하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그는 꽤나 화가 나 보였는데 그 와중에도 시준을 흘긋흘긋 훔쳐보며 손톱을 물었다 놨다 하고 있었다.

시준은 오늘 낮에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려보았다.

대학교는 고등학교와 다르게 단체 활동을 하는 일이 드물었다. 특히나 두 사람이 입학한 과는 정원이 100명 가까이 되었기 때문에 신입생들에게 행사에 참여하라며 강요하지도 않았다. 덕분에 수업만 듣는 개인 활동이 더 많았지만 조별과제가 있을 때만은 그렇지 못했다.

처음 시준이 가식적으로 웃는 것조차 못 견뎌하던 지하는 시준의 경고를 되새기며 나름 얌전히 지내는 것처럼 보였다. 예민해진 신경 때문에 약을 더 늘리고 과제 모임이 있을 때마다 커피 같은 것을 쏟아 시준의 관심을 그에게 돌리기도 했지만, 어쨌든 고등학교 때보다는 조용한 축에 속했다.

둘이 다닌 과는 생각보다 조별과제가 있는 수업이 많은 편이었다. 시준은 그래도 반복되는 모임을 통해 지하가 한 학기 동안 잘 적응했을 거라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 수업이 끝나고 강의실을 나서는 시준을 같은 조원이 붙잡았다.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는 여자 조원은 시준에게 혹시 잠깐 시간이 있냐고 물었다. 길을 가다 번호를 묻기 위해 다가오는 사람들은 있었어도 이번처럼 본격적인 사람은 처음이었다. 여자는 상기된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시준은 반사적으로 옆을 올려다보았다. 전보다 나아졌다고는 하나 시준은 지하가 참고 있다는 걸 잘 알았다. 그는 시준이 누군가와 이야기를 할 때면 보이지 않게 시준의 손을 쥔다던지, 혹은 옷깃을 잡으며 그만하라고 재촉하다가 도통 끝나지 않을 것 같을 때에 대화에 끼어들어 사람들의 관심을 그에게로 돌렸다. 시준의 번호를 묻는 낯선 사람들 역시 지하가 옆에서 딱딱하게 얼굴을 굳히고 시준을 가리면 더 이상 다가오지 못했다.

아니나 다를까, 지하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시준은 그대로 거절의 말을 꺼냈다.

“미안. 우리가 좀 바빠서 지금 가봐야 할 것 같아.”

“저기, 그럼….”

“나중에 보자.”

시준은 일부러 옆에 있는 지하의 손목을 잡은 뒤 곧바로 강의실 문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여자는 다급하게 시준을 따라서 나오며 시준을 향해 다시 한번 물었다.

‘혹시, 혹시 사귀는 사람…!’

쥐고 있던 손목이 손안에서 순식간에 빠져나가자 시준은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황당한 장면을 목격했다. 지하가 그대로 여자를 강의실에 밀어 넣은 뒤 문을 닫고 나온 것이다. 그리고 그는 거의 시준을 안는 것처럼 낚아채어 뛰듯이 걷기 시작했다.

시준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제대로 파악이 안 된 상태에서 집에 도착했다. 학교와 새로 이사한 집은 거리가 가까웠기에 따로 차를 몰고 다니지 않았다. 때문에 지하는 집까지 시준을 끌어안고 거의 뛰어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집에 오자마자 그는 저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거실을 서성거렸다.

시준은 집으로 오는 동안 그에게 내려달란 말도 하지 못했다. 내려서 얼굴이 보인다면 그 쪽팔림은 누가 감당할 것인가. 차라리 시준은 그의 덩치에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가리는 것을 선택했다.

그렇게 집에 와서 화를 낼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막상 저 꼴을 보자니 시준은 웃음도 나오질 않았다.

“뭐가 이럴 줄 알았는데?”

“준이를, 준이를 조, 조, 좋…그렇게 보는, 사, 사람이 나왔잖아!”

시준의 물음에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하면서도, 그는 좋아한다는 말을 꺼내기 싫은 건지 중간에 말을 바꾸며 오랜만에 말을 더듬기도 했다.

“내가, 내가 그래서, 내가…!”

“아, 그래.”

뒤에 무슨 말을 할지 대강 예상이 가서 시준은 일부러 그의 말을 끊었다.

솔직히 이해가 가진 않았다. 여자가 그렇게 물어온다면 들려줄 답은 하나밖에 없었고 그럼 더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좋아한다며 대놓고 말한 것도 아니고 겨우 사귀는 사람 있냐고 물었을 뿐인데 일을 복잡하게 만든 건 지하였다. 시준은 내일 여자에게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나중에 이상한 소문이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시큰둥한 시준의 반응을 눈치챘는지 지하가 자리에서 멈춘 채 눈을 크게 뜨며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목소리로 물어왔다.

“관, 관, 관심이, 이, 이, 있었던 거야?”

“뭐?”

“어, 어쩐지…예, 예뻐서 못, 못 보게 하려고… 했는데… 그랬는데….”

지하의 마지막 말을 듣자마자 시준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시준은 여자의 얼굴조차 기억이 나질 않았는데 저건 지금 예뻤다는 둥의 말이나 꺼내고 있었다.

시준이 인상을 잔뜩 쓰고 지하를 불렀다.

“야.”

“여, 역시…가, 가둬, 가둬서 나만… 나만….”

그러나 그는 어느새 혼자만의 세계로 빠져들어 시준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토록 물지 않으려던 손톱을 자근자근 깨물며 어딜 보는지 모르겠는 멍한 표정으로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가둬야 된다는 둥, 학교는 그만둬야 한다는 둥, 시준이 듣기에는 말 같지도 않은 말을 혼자 내뱉기도 했다.

시준은 기가 차서 그런 지하를 노려봐주었다. 그리고 명령처럼 말했다.

“방에 가서 가디건 가져와봐.”

그때까지도 지하는 시준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지 다시 거실 곳곳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지하야.”

“아…어?”

이름을 불러주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것처럼 그가 퍼뜩 놀라 시준을 쳐다보았다.

“방에 가서, 네가 입었던 가디건 가져와봐.”

“가, 가디건?”

“어제 네가 입으니까 병아리 같아서 귀엽다고 했던 거 있잖아. 노란색.”

“아…어, 어…자, 잠깐만.”

갑작스런 요청에 그는 의아해하면서도 귀엽다는 말에 살포시 얼굴을 붉히고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시준은 대놓고 커다랗게 한숨을 쉬었다.

화를 내야 할 사람은 누군데. 일부러 말도 안 꺼내고 있었더니.

지금 그의 반응을 보자니 그날 아예 터트려서 울게 만들어야 했다는 후회가 절로 나왔다. 시준은 본인이 질투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었으나 이럴 줄 알았으면 지하에게 대놓고 면박을 주었어야 했다고 속으로 한탄했다.

“…가져왔어. 이, 이건… 왜?”

“나 주지 말고. 앞에 주머니 있잖아. 거기 뒤져봐.”

“주머니?”

“빨리.”

시준의 말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미친 사람처럼 굴던 지하가 얌전히 들고 있던 가디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뭐가… 있는 것 같은데….”

“꺼내.”

“응…. 꺼냈어.”

주머니에서 나온 것은 작은 종이 조각이었다.

“그거 뭔지 모르겠어?”

“…종이?”

“그게 네가 입었던 주머니에서 왜 나왔는지 모르겠어?”

“어? 모르…겠어.”

지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시준을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너 나 몰래 바람피워?”

“무…뭐?”

시준의 폭탄 같은 말에 지하가 못 들을 걸 들은 사람처럼 깜짝 놀라 몸을 움찔거렸다.

“지금, 지금, 무, 무슨, 무슨 소릴….”

“말까지 더듬네. 진짜인가 봐?”

“마, 말은 내가….”

말은 집에 올 때부터 다시 더듬고 있었지만 시준은 일부러 무시하고 눈에 힘을 주어 그를 노려보았다.

“그거 너 좋다는 사람이 연락하라면서 네 주머니에 꽂아준 거잖아. 틀려?”

“어…어?”

어제 시준은 지하에게 대놓고 관심을 표하며 연락처까지 쥐여주는 사람을 바로 눈앞에서 목격했다.

그날따라 학교 화장실까지 같이 따라오려는 그가 귀찮아서 문밖에 세워두고 볼일을 보고 나오던 참이었다. 지하 앞에는 두세 명의 여자가 있었고 그녀들은 그를 향해 끊임없이 말을 걸고 있었다.

지하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조차 하지 않은 채 화장실 입구만 보고 있었는데 그녀들은 뭐가 그렇게 아쉬운 지 가방에서 다이어리와 펜까지 꺼내 작게 휘갈기곤 종이를 찢어 지하의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그랬는데도 그는 미동 없이 서 있기만 했다. 그녀들에게 가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시준은 그 과정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지하에게 다가갔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에 번지던 바보같이 해맑은 웃음을 그녀들도 봤어야 했다. 봤다면 그가 누굴 좋아하는지 빤히 보였을 텐데. 그런 아쉬운 마음이 들다가도 보지 못해서 다행이라는 모순된 생각에 시준은 어제 하루 기분이 꽤나 저조했었다. 그런 시준을 눈치챈 지하가 시준을 위해 갖은 노력을 했지만 기분이 나빠진 원인을 모르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속이 더 부글부글 끓기만 했었다.

집에서 몰래 확인한 주머니 속 종이 조각에 전화번호와 이름이 적혀 있는 걸 보고는 더 그랬다. 그래도 신경 쓰고 있다는 걸 들키기 싫어서 말을 하지 않았더니 오늘 이렇게 되레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것이다.

물론 타인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는 지하의 성격이라면 그녀들이 뭘 했는지 정말 몰랐을 수도 있었다. 그래도 그걸 지켜본 시준은 제대로 된 반응을 하지 않는 그에게 조금 섭섭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시준은 섭섭했다는 건 쏙 빼고 어제 있었던 일들을 지하에게 말해주었다.

“왜 이걸 아직도 갖고 있어?”

“어…나는, 나는 정말, 정말 모, 모, 몰랐어. 진짜야….”

“번호랑 이름까지 있는데?”

“기, 기억이 잘 안 나. 정말이야, 준아….”

어느새 지하는 따로 시키지도 않았는데 소파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시준의 다리에 달라붙었다.

“너 인기 많더라?”

“아냐, 아냐… 없어, 나 없어, 그런 거.”

“여자가 세 명이나 있었는데.”

“아니, 아니야.”

고개까지 붕붕 저어가며 지하는 자신이 인기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시준은 그를 무시해주었다.

“내가 오늘 하는 거 봤지?”

“어?”

“난 안 되겠다고 딱 잘라 거절했잖아.”

고백에 대한 거절은 아니었지만 고백할 틈도 주지 않은 건 사실이었기에 시준은 당당하게 말했다.

“애인 있다는 소리도 안 하던데.”

“내, 내가?”

“그래, 네가. 그러니까 사귀는 사람 없는 줄 알고 계속 말 거는 거잖아. 아니야?”

“아…마, 맞는데….”

“그런 걸 좀 즐기는 타입인가?”

“…어?”

“애인 있는데 없는 척하면서 어장관리….”

“아냐!”

지하는 그런 적 없다면서 횡설수설 변명하기 바빴다. 자기는 정말 앞에 누가 있는지도 몰랐고 그런 쪽지를 받았는지도 몰랐으며 기억도 안 난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끝에 가서는 숫제 울 것처럼 굴기도 했다.

“그럼 찢어.”

“다, 당장, 찌, 찢을게.”

시준의 말에 지하는 종이를 아주 잘게 찢었다. 더 이상 찢을 수 없을 때까지 종이를 조각 내놓고 칭찬을 바라며 올려다보는 눈빛에 시준이 실소를 흘렸다.

“누가 누굴 가둬?”

“아….”

“말해봐, 지하야. 누굴 가둔다고?”

지하는 싸한 시준의 얼굴에 잘못했다며 다시 매달리기 시작했다. 결국 훌쩍이며 눈물까지 보였다.

“이런 식이면 가둬도 내가 널 가둬야지. 웃기네, 진짜.”

“…준이가 …날?”

눈물을 방울방울 매단 채, 지하가 금방 설레는 표정을 지었다. 시준은 그 얼굴에 정색하던 것도 잊고 헛웃음을 내뱉었다.

“너 갇히고 싶어?”

“준이가… 그런다면, 난….”

괜찮아.

지하는 그렇게 말하고는 무릎을 꿇은 자세로 시준의 가슴에 폭 안겨왔다.

시준은 그런 그의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쓰다듬으면서 상대방이 감금의 의미를 모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냥 둘이 같이 있는 걸로 여기는 거 아냐?

“내가 가두면 적어도 하루 동안은 너 혼자 둘 건데?”

그 말에 지하가 믿기지 않는다는 것처럼 눈을 커다랗게 뜨고는 시준을 올려다봤다.

“원래 가둬두는 게 그런 거잖아. 혼자 있게 만드는 거. 난 뭐, 카메라 같은 거 설치해서 너 지켜보면 되니까.”

“아, 아닌데. 그런, 그런 거 아닌데.”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나가지 모, 못하게 하, 하는 건데.”

“아무튼 난 그럴 거야. 너 혼자 둘 거야.”

그렇게 한참을 혼자 둔 뒤 시준이 등장하면 지하는 아마 지금보다 더 간절히 매달려올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시준은 꽤나 만족스러웠다.

“세, 세상에…어, 어떻게, 그런…”

그래도 갇히고 싶은지 시준이 다시 한 번 물으니 지하는 고개를 세게 저으며 싫다고 대답했다.

“그럼 이제 그런 말 하지 마.”

“응…. 미안, 미안….”

“누가 번호 물어보면 이제 어떻게 하라고?”

“애인, 애인 있다고 말해야 해.”

“또?”

“싫다고, 가라고 해야 해.”

“그래.”

시준은 이제 소파 위로 올라오라며 지하를 끌어당겼다. 그는 시준의 옆자리에 앉아 시준을 품에 가득 안고서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준이도… 준이도 그럴 거지?”

“난 오늘 그러려고 했어.”

“응….”

그래도 누가 시준을 그런 식으로 바라보는 게 싫다면서 지하는 내내 칭얼거렸고 시준은 그가 칭얼거림을 멈출 때까지 입에 쪽 소리가 나도록 계속 키스해주었다.

-외전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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