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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1. 과거 (8/10)

외전 1. 과거

지하는 그렇게 예쁜 아이를 난생처음 보았다. 살짝 훔쳐보았을 뿐이었는데도 그랬다. 내심 속으로 여자애 아닌가 싶었지만 이내 고개를 붕붕 저었다. 여자같이 생겼단 이유로 놀림을 받았던 지하도 있었으니 그런 생각은 자신을 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눈을 가릴 정도로 긴 앞머리 사이사이로 그 애의 얼굴이 또렷하게 들어왔다. 보지 않으려 노력했으나 시선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다행히도 김시준이란 아이는 주위를 두리번대느라 자신이 훔쳐보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듯 했다.

“너네 집 되게 크다.”

“…….”

“이게 네 방이야?”

지하는 일부러 대답을 하지 않았다. 시준이 돌아다니거나 말거나 무시하며 책상 앞에 앉아 책을 보았다. 아니, 보는 척을 했다. 사실은 지하의 모든 신경은 자신의 방을 왔다 갔다 하며 구경하고 있는 그 애에게로 향했다.

시준은 만날 때마다 지하에게 말을 걸었지만 지하는 시종일관 무시로 대했다. 아무리 예뻐도 별로 친해지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이야기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

지하는 몇 번의 경험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이 입을 여는 순간 기대에 찬 상대방의 눈이 실망으로 바뀌리라는 것을. 시준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분명 저 애도 다른 아이들처럼 억지로 웃다가 곧 저를 무시할 것이다.

여태 아빠가 데리고 온 아이들은 모두 그랬다. 친절한 척, 지하가 말을 못해도 상관없는 척하다가 결국은 답답하다면서 등을 돌렸다.

“책 되게 많네.”

“…….”

“아, 나 이거 읽었는데.”

그 애는 그렇게 말하곤 책을 꺼내 쓱 훑어보았다. 짧은 시간 동안 책을 휘리릭 펼치며 보다가 다시 책장에 집어넣었다. 지하는 시준의 그런 행동을 몰래 지켜보았다. 이미 책상 위에 놓인 책은 한 장도 넘어가지 않고 있었다.

“방이 넓어도 별로네. 다리 아파.”

중얼거리는 말들이 자신에게 건네는 것인지, 아니면 혼잣말인 건지 자꾸 헷갈렸다. 어차피 대답도 하지 않을 거면서 지하는 속으로 무어라 대꾸하면 좋을지를 생각했다.

시준은 지하가 여태 만났던 다른 애들이랑은 달랐다. 아주 많이 달랐다.

얼굴 절반을 가릴 정도로 긴 앞머리를 보고도 이상하다며 놀리지 않았고, 왜 대답을 하지 않냐고 화를 내지도 않았다. 반대로 지하가 하는 일에 호기심을 보이며 다가오지도 않았다. 솔직히 시준은 지하에게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몰랐다. 지하와 친구를 하고 싶다던 애들은 모두 어느 순간 지하를 만나러 오지 않게 되었다.

저 애도 그럴 것이다. 계속 이렇게 무시해주면 결국은 화가 날 거고, 그러면 집에 오지도 않을 것이다. 지하는 애써 침착해지려 노력했다. 내가 책을 많이 읽으니까 아빠랑 누나가 이렇게 잔뜩 사다 줬다며 자랑하고 싶은 마음과, 또 네가 봤다는 그 책을 나도 봤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도 꾹 참았다.

사실 방까지 데리고 올 생각은 아니었다. 처음 만났을 때도 1층 거실에서만 있었고 계속 거실 소파에 앉아 있으려고 했는데, 누나가 둘이 방에 가서 놀라고 말을 해서 온 거였다. 싫다고 하고 싶었지만 그러려면 말을 해야 해서 지하는 어쩔 수 없이 시준을 데리고 방으로 올라왔다.

한참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방이 조용해졌다. 그 애가 혼자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사라져 있었다. 지하는 당황스러운 마음에 고개를 들어 뒤를 둘러보았다.

시준이 침대에 누워 자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놀란 지하가 의자에서 내려왔다. 남의 집에 와서 저렇게 함부로 침대에 눕고 그러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배웠다. 저 애는 예의가 없었다. 지하는 시준에게 허락도 없이 왜 내 침대에서 자느냐고 따지고 싶었다. 그러나 입을 열어 말을 하기는 싫으니 일어나라며 시준의 몸을 흔들 생각이었다.

근데 그래도 안 일어나면 어쩌지. 그런 걱정으로 조심스럽게 그 애의 팔에 손을 올리려던 지하는 갑자기 눈을 뜬 시준을 보고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졌다.

“뭐야? 왜 그래?”

“까, 까, 깜짝, 깜짝, 노, 노, 놀랐잖아!”

“왜 거기 있어?”

지하는 너무 놀라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자신을 놀래킨 상대에 대한 짜증이 사라지자, 곧이어 찾아오는 것은 수치심이었다.

결국 입을 열고야 말았다. 심지어 평소보다 더 심하게 더듬었다.

지하는 입술을 꾹 깨물며 입을 닫았다.

“너도 졸려?”

“…….”

“자고 싶으면 옆에서 자.”

“…….”

“너네 집은 다 좋은데 구경하고 나면 너무 피곤해.”

“…….”

“나 잔다.”

시준은 그렇게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잠이 든 것이다. 놀라서 두근거리는 심장을 손으로 눌러 진정시킨 지하는, 그런 시준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어쩐지 봐도 봐도 질리지가 않았다.

시준은 방학이어서 그런지 거의 매일같이 지하의 집을 방문했다. 지하는 처음 말을 더듬는 걸 들키고 난 후로 더욱더 시준을 멀리했다. 이젠 힐끔힐끔 쳐다보지도 않았다. 아예 그쪽으로 관심이 쏠리는 걸 막기 위해 꿋꿋하게 버텼다. 눈이 마주치면 왜 말을 더듬느냐고 물어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어른들 때문에 또다시 방에는 데리고 가야 했지만 그뿐이었다.

조용한 방을 가득 울리던 그 애의 목소리도 점차 작아졌다. 이제 곧이었다. 어쩌면 내일일지도 몰랐다. 시준은 이제 이곳을 오지 않을 것이다. 최악의 최악을 상상하는 건 지하에게 익숙한 일이었다. 누나도, 아빠도, 지하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일이 많았고, 지하는 실망해서 슬퍼하는 일이 없도록 언제나 최악을 생각해두었다. 그러면 어느 정도 위로가 되었다.

괜찮아, 난 이럴 줄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으니 아무렇지도 않아.

시준도 분명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애는 불쑥 지하에게 말을 걸어왔다.

“야, 이거 어떻게 해?”

“…….”

“이거 게임기.”

“…….”

“네 거 아냐?”

“…….”

“나 할머니가 폰으로 게임하지 말라 해서 다 지웠어.”

“…….”

“심심한데.”

넌 안 심심해?

지하는 시준이 가까이 다가오자마자 흠칫 놀라 굳어버렸고, 그렇게 물으며 뒤돌아서는 시준을 잡지 못했다. 시준은 바닥에 앉아 게임기를 만지작댔다. 켜지지도 않는데 얼른 하고 싶은지 게임 버튼을 마구 누르기도 했다.

지하는 제 방에 저런 게임기가 있는지도 몰랐다. 당연히 켜는 방법을 알 리도 없었다. 알았으면 그냥 살짝 가서 어떻게 하는지 보여줬을 텐데. 말하지 않아도 그런 것쯤은 할 수 있었다. 그저 잠깐 도와주는 것뿐이니까.

그러다 갑자기 시준이 일어났다. 게임기를 들고 그대로 문을 향하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입이 열렸다.

“어, 어, 어디, 어디 가?”

묻자마자 지하는 두 손을 들어 자신의 입을 막았다. 너무 놀라서 눈이 저절로 커다랗게 뜨였다.

그런 지하를 보고 시준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어떻게 하는지 물어보려고.”

“…….”

“어른들은 알겠지.”

“…….”

“같이 갈래?”

시준은 문고리에 손을 얹고 그 자리에 서서 지하를 기다렸다. 지하는 망설임 끝에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나, 나, 나도, 하, 할 수, 이, 있어.”

벌써 세 번이나 들켰다는 사실이 지하의 망설임을 끝내주었다. 시준은 지하의 말에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말을 뱉고 나면 상대방의 반응을 유심히 살펴보는 버릇이 있어 지하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시준은 지하가 말을 더듬는 것에 대해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둘의 투닥거림이 매일같이 이어졌다.

* * *

“내가 이겼네.”

“왜, 왜, 마, 마, 말을, 거, 걸어!”

“너한테 한 말 아닌데?”

“거, 거, 거짓말!”

“몰라, 내가 이겼어. 넌 졌고.”

“너, 너, 너, 때, 때문이야.”

지하가 씩씩대며 다시 하자고 게임을 켰다. 점프를 할 타이밍에 자꾸만 옆에서 이게 뭐냐며 말을 걸어대는 시준 때문에 3판 연속 지하가 내리 지고 말았다. 어제는 3판 모두 자신이 이겼었는데, 오늘은 반대가 됐다. 지하는 옆에서 얄밉게 웃고 있는 시준을 제법 매서운 눈초리로 노려봐주었다.

“책 읽어야 한다며?”

“…바, 밤에, 이, 이, 읽어도, 돼.”

“넌 왜 맨날 책만 읽어?”

갑작스러운 물음에 지하가 표정을 굳혔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건지 의심스러웠다. 시준은 지하에게 왜 그렇게 말을 더듬느냐고 한심하게 보지도 않았고 너무 느리게 말한다고 타박하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저 질문을 듣자 조금 섭섭했다. 모를 리가 없을 텐데도 저렇게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지하에겐 상처가 되었다.

김시준은 다를 줄 알았는데. 분명 왜 말을 더듬느냐고 또 묻겠지.

지하는 이미 체념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여, 여, 연습, 하, 하는 거야. 더, 더, 더듬, 더듬으니까.”

“책으로?”

“그, 그, 그래.”

“그럼 소리 내서 읽어야 하는 거 아냐?”

“…어, 어?”

“너 맨날 눈으로만 읽던데.”

지하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놀리는 건가? 아니면 진심으로 저러는 건가.

“읽어봐.”

“무, 뭐, 뭐를, 이, 읽어?”

“책. 소리 내서 읽어봐.”

시준은 그렇게 말하곤 앉은 자리 바로 옆 책꽂이에 있는 책을 꺼내 지하의 손에 들려주었다.

“게임 그만하고 책 읽자.”

그 모습에 지하가 울컥, 솟아오르는 울음을 힘겹게 참아냈다.

똑같았다.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김시준도 똑같았다.

지하의 집을 다녀갔던 많은 아이들은 지하에게 책을 읽기를 강요했다. 어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책을 많이 읽으면 말을 더듬는 것도 자연스럽게 고쳐질 거라고 했다. 그 아이들은 막상 지하가 소리 내서 책을 읽으면 그게 아니라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왜 이걸 한 번에 못 읽느냐고 답답해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지하는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무언가를 잘못한 사람처럼 미안하다는 말로 사과했다.

그런데 시준도 그 아이들과 똑같이 하고 있었다. 아마 자신이 말을 더듬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책을 읽어보라고 시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니 계속 눈물이 차올랐다. 지하는 울음을 감추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책을 펴들었다. 읽기 싫은데도 소리 내 읽은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준이 해달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지하는 시준과 만나는 시간을 기다리게 되었다.

지하는 훌쩍훌쩍 울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천천히 책을 읽어 내려갔다.

“이, 이, 이순, 이순신은…조, 조선시대, 자, 장군으로…이, 임진, 오, 왜, 란에서, 수, 수군과…하, 함께….”

아주 느린 속도였다. 지하가 한 페이지를 겨우 읽을 때까지 이상하게도 시준에게선 어떠한 반응도 없었다. 일부러 그쪽을 보고 있지 않던 지하가 결국 궁금함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앞에 바닥에 대자로 누워 작게 코까지 골며 자고 있는 시준이 보였다.

지하는 시준이 자고 있단 걸 확인하자마자 참고 있던 울음을 터트렸다. 너무 서러웠다. 여태 자신이 읽은 책 내용을 설마 다 듣고 있었던가 기대했는데, 그게 아니라 자고 있다는 게 또 너무 섭섭하고 미웠다.

결국 점점 커져가는 울음소리에 시준이 일어났고, 지하는 처음으로 쩔쩔대며 사과하는 시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또, 또, 자, 자면 안, 안 돼.”

“안 자, 안 자.”

“또, 또, 그, 그, 그러면….”

“알았다니까? 어서 읽기나 해.”

시준은 자연스럽게 지하의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지하는 뭐라고 말을 더 하려 했으나 다리에서 느껴지는 기분 좋은 무게감에 그냥 책을 읽기로 했다. 시준은 아마 오늘도 지하가 책을 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잠들 것이다. 지난 일주일 동안 그랬으니 틀림없었다. 그런데도 지하가 소리 내어 책을 읽는 이유는 시준이 미안하다며 덧붙인 변명 때문이었다.

“목소리가 좋아서 잠 잘 오더라.”

“모, 모, 목소리?”

“네 목소리. 듣기 좋아.”

처음 듣는 칭찬이었다. 목소리가 좋다는 말을 지하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시준은 그렇게 말하고 다시 잠들어버렸다. 이상하게도 지하의 심장은 그 말을 들은 후로 시준이 돌아갈 때까지 계속해서 두근거렸다.

지하는 그날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책을 읽는 것이 아닌, 다른 소리를 내보았다. 학교에서 배웠던 노래를 불러본 것이다.

“우, 우리는…치인, 친구….”

노래를 할 때도 말을 더듬는 것은 여전했지만 그래도 지하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불렀다. 그리고 자신이 부른 노래를 휴대폰으로 녹음해서 다시 들어보았다.

목소리가 좋다는 시준의 말이 머릿속에 계속 떠올랐다. 자신의 목소리는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달랐지만, 그래도 좋다고 하니 정말 좋게 들렸다. 지하는 그날 밤 녹음한 노래를 몇 번이나 반복해서 들었다.

얇은 책 한 권을 다 읽고 나자 거짓말처럼 시준이 눈을 떴다. 항상 이랬다. 시준은 지하가 책을 다 읽고 나면 일어났기에 지하는 그가 말한 목소리가 좋다는 말을 믿고 싶어졌다.

지하는 점점 방학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게 되었다.

“다, 다, 답답, 하, 하지 아, 않아?”

“뭐가?”

“나, 나….”

“네가 답답하냐고?”

“…내, 내가, 마, 마, 말, 하, 하, 하는 거….”

“별로?”

“…왜, 왜?”

“너 나한테 할 말은 다 하잖아.”

“그, 그, 그건, 네, 네가…!”

용기 내어 물어본 말에 얄미운 대답이 돌아왔다.

지하는 억울했다. 시준은 승부욕이 강했다. 게임을 해도 본인이 이길 때까지 멈추지 않았으며, 지하가 조금이라도 더 잘하는 것 같으면 갑자기 하기 싫어졌다고 변덕을 부렸다. 지하의 아빠가 마당에 새로 설치해준 농구대에서 놀았을 때도 시준은 공을 한 번도 넣지 못해서 씩씩대다가 골대가 이상하다는 말을 했었다.

네가 자꾸 멋대로 굴어서 그런 거 아니냐고 더듬더듬 말하는 지하에게, 시준은 이것 보라며 할 말 다 하는데 답답할 게 뭐가 있겠냐고 마치 따지듯 물었다.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지하는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입술을 꾹 깨물었다.

“우리 반에 나만 보면 얼굴 빨개지고 말 더듬는 애가 있는데.”

얼굴을 일그러트린 지하를 빤히 바라보던 시준이 불쑥 말을 꺼냈다.

“너 같아.”

“…….”

“귀엽다고.”

시준은 그렇게 말하곤 휙 몸을 돌려 방 안 책장을 향해 걸었다.

“나 오늘은 이거 읽어줘.”

지하는 시준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심장이 너무 쿵쾅거려서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열이 나는 건지 얼굴도 뜨거워졌다. 가만히 있는 지하를 보며 시준이 잔소리를 하고 나서야 겨우 움직일 수 있었다.

그날 밤, 지하는 잠들기 전에 시준이 말한 게 그 반 아이인지, 아니면 지하인지를 정확하게 물어봐야 했다고 생각했지만 곧이어 떠오르는 건 그저 귀엽다는 말뿐이었다.

방학이 계속되기를 간절히 바라던 지하는 개학을 하고도 계속 집에 놀러오는 시준에게 점점 적응해가고 있었다. 왜 자꾸 놀러 오는지는 뻔했지만 굳이 말하진 않았다. 지하는 억지로라도 둘을 만나게 해준 어른들이 고마웠다.

지하는 오랜만에 앞머리를 잘랐다. 시준은 지하의 눈을 가리는 긴 머리가 더 답답하다고 했다. 여자같이 생겼다고 놀림을 받는 게 싫어서 얼굴을 보이지 않기 위해 기르기 시작한 머리카락인데, 시준이 볼 때마다 답답하다고 하니 정말 그렇게 느껴졌다.

앞이 잘 보여서 시원했지만 지하는 시준의 반응이 더 궁금했다.

“예쁘네. 공주님 같아.”

“…나, 나, 난, 여, 여, 여자가, 아, 아, 아니야!”

그리고 돌아온 반응은 지하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공주 같다니, 여자 같다는 말과 다를 게 뭔가 싶었다.

“예뻐서 그렇게 말한 건데?”

“예, 예, 예쁘다는 거, 것도, 여, 여자, 하, 한테….”

“넌 나 안 예뻐?”

실망을 감추기 위해 되려 시준에게 쏘아붙이려던 지하는 그의 질문에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시준을 볼 때마다 예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 봐. 그러면서 여자한테나 하는 말이라니. 그럼 너도 똑같네.”

“그, 그, 그렇다고, 하, 한 적, 어, 어, 없거든!”

괜히 발끈했지만 지하는 그 후로 예쁘다는 말을 싫어하지 않게 되었다.

싸우고, 화해하고, 다시 투닥이고.

그렇게 둘은 1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 보냈다. 싸우는 이유는 다양했다.

이상한 초콜릿이 맛있다며 선물한 시준을 지하가 오해한 적도 있었고, 이름을 이상하게 부른다며 시준이 삐지는 일도 있었다. 다른 친구 생일파티에 가느라 오지 못했다는 시준의 말에 지하가 화를 내기도 했다.

“내, 내, 내, 새, 새, 생일은, 모, 모, 몰랐으면서!”

“네가 말을 안 하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 넌 내 생일 알아?”

“…읏.”

싸움은 지하가 질 수밖에 없었다. 지하도 시준의 생일을 몰랐기 때문이다.

둘은 싸우고, 그리고 화해하고 나서 서로의 생일을 알려주었다. 내년에는 커다랗게 생일파티를 하자는 말도 덧붙였다.

* * *

지하는 방학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방학에는 시준과 함께 바닷가나 산에 있는 별장에 놀러 갈 수도 있었고, 집에서 하루 종일 붙어 앉아 게임도 할 수 있었다. 학교는 재미없었다. 지금 다니는 학교는 처음에 다니던 학교처럼 아이들이 괴롭히진 않았어도, 지하와 친해지고 싶어 하는 아이들도 없었다. 지하도 말을 하지 않는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그 아이들과 친해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시준과 같은 학교를 다니고 싶어서 누나에게 또 전학 가면 안 되냐고 물어본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미 두 번이나 학교를 옮겨서 세 번은 힘들 것 같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같이 안 다녀도 거의 매일 만나니까. 그래서 괜찮다고 위로했었는데.

겨울방학이 시작된 지 한 달이 지났지만 시준은 딱 다섯 번만 지하의 집에 놀러 왔다. 같이 사는 할머니가 많이 아프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 시준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할머니가 어디가 아픈지, 어떻게 아픈지 지하에게 한숨처럼 털어놓기도 했다.

“우리 할머니가 원래는 건강했는데, 갑자기 넘어져서 입원했어.”

“…….”

“내가 그렇게 조심하라고 했는데….”

지하는 그냥 넘어진 거면 금방 낫는 거 아니냐고 물으려다 그의 얼굴을 보곤 그만두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그 표정에 지하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기 때문이다. 지하는 시준이 우는 걸 한 번도 보지 못했고, 보고 싶지도 않았다. 시준이 우는 건 왠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지하야, 오늘 시준이 못 와.”

“왜, 왜? 그, 그저께는 오, 오늘, 오, 온다고, 해, 했는데….”

실망을 감추지 못하는 지하를 보며 누나가 슬픈 목소리로 이유를 알려주었다.

“시준이 할머니가 돌아가셨대.”

“아…어, 어, 언제?”

“어제. 장례식 끝나고 시준이 괜찮아지면 오자고 하자.”

“괘, 괘, 괜찮아, 지, 지다니…?”

시준이 어디 아프기라도 한 듯한 누나의 말에 지하가 놀라서 물었다.

“지하도 시준이 할머니가 시준이 아기 때부터 키워주신 거 알지? 그래서 시준이가 너무 슬퍼서, 잠깐 아팠어.”

“아, 아, 아프다니…내, 내가, 내가 가, 가볼게, 내, 내가…!”

지하가 감기에 걸려 콜록대도 한 번도 아프지 않았던 시준이었다. 지하는 그런 그가 아프다는 말에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놀랐다. 원래 건강하던 사람이 갑자기 아프면 진짜 아픈 거라고 들었다. 지하는 계속 만나러 가겠다고 누나에게 졸랐지만 그녀는 지하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지하는 보름 후에 시준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시준은 안 그래도 별로 없던 살이 그사이 쪽 빠져 있었다. 정말 심각한 병에 걸린 것 같았다. 지하는 그런 그를 보고 너무 놀라서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괘, 괘, 괜찮아?”

“왜 보자마자 울어?”

“아, 아, 아파, 아파 보여.”

“…됐어.”

그는 게임이나 하자며 지하의 팔을 잡아당겼다. 시준의 말투는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지하가 계속 아프지 않냐고 물으니까 나중에는 그만하라며 짜증까지 냈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지하는 시준에게서 아픈 곳이 없다는 말을 들은 후에야 겨우 안심이 되었다.

시준은 살이 빠진 것 빼고는 이전과 달라진 곳이 없어 보였다. 지하는 들뜨는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둘이 만나는 걸 방해하던 할머니가 죽었다고 하니 이제 전처럼 매일 만날 수 있을 터였다. 지하는 투덜대는 시준을 보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나 같이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지하는 시준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일이 많아졌다. 게임을 하자고 해도 시큰둥했고, 지하가 게임에서 모른 척 일부러 져주어도 별로 기뻐하지 않았다. 밖에 나가서 농구를 하는 것도 싫어했다. 평소 본 적 없는 그 모습에 지하는 초조해져갔다. 그나마 책을 읽어주는 것은 좋아해서 지하는 전보다 더 많은 책을 읽게 되었다.

“우리 할머니도 그랬는데.”

“어…어?”

어느 날은 책을 읽어주는 중에 시준이 갑자기 말을 걸어왔다.

“맨날 내가 최고라고 그랬어.”

“하, 할머니가?”

“응. 먹고 싶은 거 말하면 다 만들어주고… 내가 화내도 막, 그냥 웃고.”

시험 백점 맞고 반에서 1등 하면 할머니가 되게 좋아했는데.

시준은 그의 할머니 이야기를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날 이후로 지하는 시준을 만날 때마다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시준은 잘 있다가도 갑자기 생각났다는 것처럼 이야기를 꺼냈다.

“집이 너무 허전해.”

“지, 집이?”

“엄마가 할머니 이불을 다 버렸어.”

“…….”

“내가 덮고 잘 거라고, 버리지 말라고 했는데….”

낮은 목소리에 우울함이 배어 나왔다.

지하는 시준이 점점 가라앉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물속 깊은 곳으로, 물 위에서 들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아주 깊은 곳으로. 지하는 그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속에서 귀를 막고 있던 자신을 꺼내 올린 건 시준이었으니, 지하 역시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무섭도록 밑바닥까지 침몰하는 그를 붙잡을 수 있을 거라고.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다.

지하는 이제 더는 책을 읽어달라 하지 않는 시준을 보며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가 입을 여는 순간은 할머니 이야기를 할 때뿐이었다. 오늘은 무얼 했는지, 그리고 만나서 어떤 걸 하고 싶은지. 예전에는 일상처럼 주고받았던 대화들은 더 이상 오가지 않았다.

시준은 지하의 집에 와도 조용히 소파에 앉아 있거나, 혹은 창밖으로 보이는 나무들을 가만히 보기만 했다. 가끔 지하가 옆에서 말을 걸어도 기계적인 대답만 했다.

지하는 시준이 더 이상 자신의 집에 오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그럼에도 그가 계속해서 지하의 방을 찾아오는 건 어른들 때문이라는 것도, 지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겨울에 죽은 시준의 할머니는 여름이 되어서도 손자의 곁을 떠나지 못했다.

지하가 참지 못하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지하를 향한 시준의 관심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지하는 그 사실에 참을 수없이 화가 났다.

“주, 주, 죽었잖아!”

“뭐?”

“주, 죽은 사, 사람 얘, 얘기를, 왜, 왜, 자, 자꾸, 자꾸 하지?”

“…….”

“너, 너, 너네 하, 할머니는, 나, 나쁜, 사, 사람이야!”

“…입, 닥쳐.”

지하는 닥치라고 하는 그의 거친 말에 충격을 받고 몸을 굳혔다. 둘은 아무리 싸워대도 서로를 향해 욕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충격도 잠시, 울컥하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지하는 팔을 뻗어 시준의 손목에 끼워져 있던 염주를 빼냈다. 시준이 당황하자, 지하는 그대로 염주를 양손으로 잡아 뜯었다.

시준의 할머니가 생전 차고 다녔다던 오래된 염주는 그 작은 힘에도 터무니없이 쉽게 끊어졌다. 톡, 톡. 끊어진 줄을 타고 염주알이 바닥을 굴러다니는 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

“매, 매, 맨날, 하, 할머니, 하, 할머니!”

“…….”

“너, 너도, 너도, 가, 같이, 주, 죽으려고?”

지하는 그저, 자신의 손을 잡고 다니던 저 손에 아무것도 쥐게 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시준이 손가락으로 저 염주를 쓰다듬을 때마다 짜증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낡아빠진 물건은 시준을 제자리에 돌려놓기는커녕 자꾸만 어딘가로 데려가려 하고 있었다.

그토록 없애고 싶었던 것이 모양을 잃고 바닥을 굴러다니는 걸 보자 속이 다 시원했다. 그래서 지하는 자신을 향해 시준이 주먹을 들어 올리는 것도, 그 순간 어른들이 문을 열고 방에 들어오는 것도 몰랐다.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김시준, 너 이 자식!”

커다란 고함 소리와 함께 짝,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깜짝 놀란 지하가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손으로 한쪽 뺨을 감싼 채 울고 있는 시준이 보였다. 그는 눈물만 흘리고 있는 게 아니었다. 코에서 빨간 것이 흐르고 있었다.

지하는 비명을 지르며 시준에게 달려갔다.

“피, 피! 피, 피가!”

허둥지둥 시준의 얼굴을 잡고 옷소매로 피를 닦았지만 시준은 도리질을 치며 지하의 손길을 벗어났다.

그는 많이 아파 보였다.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피가 계속 흘렀다. 작은 손에 다 가려지지 못한 뺨은 순식간에 빨갛게 부풀어 올랐다. 지하는 자신이 울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저 시준이 너무 아파 보여서, 빨간 피를 흘리는 그가 자신이 말한 대로 정말 곧이라도 죽어버릴 것 같아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너 쌈박질하러 여기 온 줄 알아?”

“이 새끼가 먼저…!”

지하는 다시 한번 들려온 목소리에 그제야 주위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아챘다. 바로 눈앞에 시준의 아버지가 야차와 같은 얼굴을 하고 시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 이 새끼?”

높이 들어 올려지는 무서운 팔에, 지하가 소리를 지르며 시준을 끌어안았다. 미친 사람처럼 악을 쓰는 지하에게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 뒤론 기억이 나질 않았다.

지하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침대 위였고 시간이 한참이나 지난 한밤중이었다.

* * *

시준은 다음 날이 되어도, 그 다음 날이 되어도 지하를 찾아오지 않았다. 연락을 해도 받지 않아서 지하는 누나에게 울면서 물어보았다. 누나는 곤란한 표정으로 시준이 많이 아프다는 말만 반복했다. 지하가 그에게 가보겠다고 해도 말리기만 했다. 괜찮아지면 놀러 올 거라는 말을 믿고 기다려봤지만 돌아온 건 믿을 수 없는 소식이었다.

“지하야, 혹시 시준이한테 연락 온 거 없니?”

“어, 어, 없어. 왜, 왜?”

“큰일이네….”

큰일이라는 중얼거림을 들은 지하가 그대로 뒤를 돌아 방을 나가려는 누나를 붙잡고 끈질기게 물어보았다. 잠깐 한숨을 내쉰 그녀는 지하에게 놀라지 말라면서, 시준이 실종되었다는 말을 들려주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집에 있었는데 갑자기 사라졌다며 혹시라도 연락이 오면 바로 어른들에게 알려달라는 말도 덧붙였다.

죽은 거야.

죽으러 간 거야.

지하는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당장이라도 밖으로 나가 시준을 찾아다니고 싶었지만 지하의 몸은 그날로 열이 펄펄 끓어올라 결국 병원에 입원하고 말았다. 열에 들떠 비몽사몽하는 중에도 옆에 있는 누나를 붙잡고 시준이 어떻게 됐는지를 물었지만 대답해주질 않았다.

누나는 지하가 열이 내린 아침이 되어서야 급하게 찾아와 시준을 찾았다는 말을 들려주었다. 지하는 곧바로 시준의 집으로 가려 했으나 가족들이 말렸다. 시준이 아직 아프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어디가 아픈지, 어떻게 찾았는지. 혹은 왜 사라졌는지. 그들은 지하가 묻는 말에 제대로 된 대답을 들려주지 않았다.

지하는 저도 모르게 엄지손톱을 물어뜯으며 방안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모든 게 저 때문이었다. 시준이 주먹을 쥐게 만든 것도, 그리고 시준의 아버지가 그의 뺨을 내려친 것도. 시준이 사라진 것 역시, 모두 자신이 염주를 끊고 같이 죽을 거냐며 따졌기 때문이었다.

시준은 정말로 죽어버리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어른들은 시준이 잠깐 가출 비슷한 걸 했다고 말했지만 지하는 알고 있었다. 김시준은 그대로 사라져버리려 했을 것이다.

지하의 머릿속이 할머니가 보고 싶다며 중얼거리던 작은 목소리로 가득 찼다.

지하는 한 달이 지나고 나서야 시준을 만날 수 있었다. 지하의 누나는 그때까지도 시준이 많이 아프다는 말만 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아픈 시준을 지하가 도와줘야 한다는 말이었다. 아무리 울며 매달려도 시준을 만나게 해주지 않던 그들이 먼저 자신을 그의 집으로 데려가는 것을 보고 지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초조함으로 가득 차 있던 마음은 표정 없이 굳어버린 얼굴을 마주하고 무너져 내렸다. 시준은 방에 누가 들어오는지 흘긋 눈으로 확인만 하고 다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지하는 차마 인사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방에 들어오기 전 누나가 했던 말을 떠올려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시준이가 말을 하지 않는대. 마음에 상처를 입어서 그런 거래. 지하는 시준이 친구니까, 도와줄 수 있지?”

지하는 친구라는 말을 붙여도 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저 지하가 해야 할 일이라곤, 사과를 하는 것뿐이었다.

지하는 조그만 선물 상자를 손에 쥐고 천천히 그 앞에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미, 미, 미안해….”

“…….”

“자, 잘못해, 했어….”

“…….”

“다, 다시 고, 고쳤어. 내, 내가….”

흐느껴 우느라 눈앞이 흐릿했다. 지하는 겨우 상자를 열어 시준에게 보여주었다.

시준을 막아서던 그날 밤, 지하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방안에 흩어져 있는 염주알을 하나하나 찾아 모았다. 다행히도 대부분은 뒷정리를 하던 어른들이 잘 모아두어서 쉽게 고칠 수가 있었다.

지하는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만약 그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지하는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할머니가 보고 싶다고 중얼거릴 때마다 못 들은 척 말을 돌리지 말고 안아주었어야 했는데. 지하는 죽은 사람 이야기만 한다고 화를 낼 게 아니라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었어야 했다며 후회했다.

시준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물끄러미 지하를 바라보던 그는 갑자기 몸을 일으켜 방문을 향해 걸어갔다. 지하가 놀랄 틈도 없이 문을 잠그고 다시 돌아온 시준은 지하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너 진짜 미안해?”

“어…?”

분명 말을 하지 않는다고 그랬었는데.

지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맞은편에 있는 상대방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미안하면, 내가 하라는 대로 다 할 거야?”

“어…? 으, 응. 하, 하, 할게. 다, 다, 하, 할게.”

지하는 다시 들려온 그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리곤 마구잡이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 할 수 있었다. 시준이 예전처럼 자신을 찾아준다면.

시준은 그럼 내일도 또 오라면서 지하를 밖으로 내보냈다. 지하는 우는 것도 잊은 채 어리바리하게 있다가 그대로 방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거실에 있던 누나가 조심스럽게 시준의 상태를 물었지만 지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왜인지 어른들한테 시준이 말을 한다는 사실을 알리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런 자신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누나는 지하를 토닥여주며 집에 가자고 했다.

다음 날, 지하는 시준의 집을 방문했다. 지하의 누나는 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며 말렸지만 고집을 부려 겨우 올 수 있었다. 또 오라는 말을 지키지 못할까 봐 지하는 그녀에게 떼를 쓰며 잔뜩 매달렸다.

살며시 들어간 방 안에는 시준이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는 어제처럼 흘깃 시선만 돌려 들어온 이를 확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하는 시준이 어제 방문을 잠근 것을 떠올리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문을 잠갔다.

“잘했어.”

시준은 그렇게 말하곤 지하의 팔을 잡아당겨 책상 의자에 앉게 했다.

“말했어?”

“마, 마, 말?”

“내가 말 하는 거. 어른들한테 알렸어? 거짓말하면 가만 안둘 거야.”

그가 묻는 말에 지하가 고개까지 붕붕 저어가며 아니라고 대답했다. 급하게 말을 해서인지 말을 평소보다 심하게 더듬었지만, 그런 지하를 내려다보던 시준은 아주 오랜만에 웃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내가 하라는 대로 다 한다고 했지?”

“으, 응. 다… 다…하, 하, 할 거야.”

“그래, 그럼.”

그렇게 시작된 둘만의 비밀은 꽤 오랜 시간 들키지 않고 유지되었다.

시준은 아버지에게 꼭 사과를 받고 말거라고 말했다.

“쓰러지기만 하고 제대로 된 사과는 하지도 않았어.”

“아, 아저씨가?”

“쓰러진 것도 과로 때문에 그런 걸 거야. 너도 그때 봤지? 나 코피 난 거.”

“봐, 봐, 봤어. 나, 나, 나는, 너, 너, 너무, 노, 놀라, 놀라서….”

시준은 코웃음까지 치며 아동학대라는 단어를 꺼냈다. 그리고 이어서 할머니한테도 맞아본 적이 없는데 아빠한테 맞았다며 화를 내었다.

지하는 그가 할머니 이야기를 꺼내도 더 이상 화를 내지 않았다. 그저 그랬냐며, 그가 좋아할 만한 말을 해준 뒤 집에서 가져온 간식들을 꺼내 건네주었다.

시준이 내 말대로 하라며 명령한 것은 사실 지하에게는 그저 부탁일 뿐이었다. 그는 지하의 집에서 먹었던 간식이 맛있었다며 가져오라고 하거나, 게임을 하고 싶으니 어른들 몰래 게임기를 가져오라는 것 같은, 사소하지만 지하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요구했다.

지하는 시준과 함께 그의 방에 있는 시간을 점점 늘려갔다. 시준은 그의 가족들과도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오로지 지하만 그와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시준이 말을 할 수 있다는 걸 아는 사람도 지하뿐이었다.

지하는 속으로 묘한 희열을 느꼈지만 겉으로 티 내지는 않았다.

* * *

시준은 개학을 해도 학교에 가지 않았다. 지하 역시 그의 방에서 계속 같이 있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학교에 가야 했다. 아프다는 꾀병을 부리면 그날은 시준을 보러 가지도 못했기에 학교가 빨리 끝나기만을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지하는 그의 방문을 여는 순간을 매일같이 기다렸다. 문을 열면, 안에 있던 시준은 왜 이제 오냐며 지하를 타박했어도 반가움을 숨기지 못했다. 지하는 그게 너무 좋았다. 시준에게는 미안하지만 그의 아버지가 계속 사과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계속 이렇게 둘만 있을 수 있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 시간은 영원하지 못했고, 시준이 다시 세상으로 나옴과 동시에 지하에게는 성장기가 찾아왔다.

귀엽다는 목소리가 점차 낮고 두껍게 변해 갔으며 예쁘다는 얼굴은 점점 선이 진해져 보기가 싫어졌다. 밤마다 지하를 괴롭히는 다리의 통증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아프고 나면 지하는 자신이 괴물처럼 자라 있을 거라는 걸 알았다.

불안함이 지하를 차례차례 좀먹어 갔다.

둘은 약속했던 것처럼 커다란 생일파티를 열었다. 그리고 지하는 아주 오랜만에 시준과 크게 싸웠다. 아빠의 친구들과, 그 친구들의 자식들이 잔뜩 모인 곳에서 시준은 지하가 아닌 그 아이들에게 말을 걸었다.

또래보다 훨씬 키가 커진 지하는 시준이 말을 건 아이들을 밀치거나 때리면서 다가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화를 내는 시준에게는 저 애들이 자신을 괴롭혔던 애들이라고 울면서 빌었다.

그러다 더는 우는 것조차 소용이 없어졌을 때. 지하는 자신의 모든 게 싫어졌다. 성격, 외모, 목소리 등등. 머리부터 발끝까지 마음에 드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거울을 보는 일이 점차 줄어들었고 지하는 다시 앞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키가 커서 싫고, 덩치가 커서 싫고, 둔해 보여서 싫다는 그 말들은 그런 지하를 더욱 움츠리게 만들었다. 옛날과는 다른 시준의 태도와 행동을 지하는 모두 자신이 변해서 그런 거라 여겼다.

먹는 것을 줄여가며 살을 빼보았지만 말라붙은 몸은 징그러웠고 키는 줄어들지 않았다. 예전에 그가 말했던 작고 귀여운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다리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새빨간 피를 보아도 멈춰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지하는 큰 키에 대한 혐오가 극에 달할 때마다 다리를 자를 것처럼 상처를 냈다. 실제로 자르진 못했지만 그러한 행위를 한 것만으로도 기분은 한결 편안해졌다.

그러나 중독처럼 이어지던 자해는 시준에게 들키면서 끝나고 말았다.

들키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지하는 병원에 입원해 있는 그 몇 달이 살아 있는 지옥 같았다. 시준을 이렇게 오랜 시간 보지 못한 것은 딱 한 번뿐이었다.

지하는 시준이 자신을 찾아오지 않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구역질이 나도록 피를 흘리고, 비쩍 마른 몸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는 지하는 더 이상 정상인이 아니었다. 누구라도 피하고 싶은 정신병자였다. 말을 더듬지 않으면 그나마 나아 보일까 싶어 필사적으로 노력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말을 더듬지 않을수록 귀엽다고 말했던 그 모습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만 같았다.

지하는 잊혀지고 있었다. 이대로 죽어버리면 아무도 자신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가족들도, 그리고 김시준도. 그래서 죽고 싶어도 죽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시준이 지하를 찾아왔다.

지하는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시준을 대하려 노력했지만 결국 그 앞에서 울음을 터트렸다. 제발 옆에 있게만 해달라고 매달렸다.

“너 때린 새끼 전학 갔어. 학교에 와서 확인해보든가.”

시준은 지하를 쳐다보지 않았다. 시선을 빗긴 채로, 그가 이어서 말했다.

“아, 그리고 너 싸움 더럽게 못하더라. 처맞기만 하고. 밥은 먹고 있는 거 맞아? 살이 하나도 안 쪘네. 퇴원하고 살찌면 나랑 복싱이나 같이 배우든지.”

대답을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의 말처럼 퇴원하고 나서 같이 복싱을 배우지는 않았지만 지하는 몸을 키우기 위해 운동을 배우기 시작했다. 호신술이란 호신술은 다 배우며 식습관도 고치기 위해 노력했다. 입으로 음식이 들어가는 것이 역하게 느껴질 때가 많았지만 보기 싫게 마른 자신의 몸을 떠올리며 참아냈다.

지하는 병원에서 내내 생각했다. 시준이 찾아오지 않는다면 자신이 찾아가면 되는 일이었다.

그때처럼. 우리 둘만 있을 때처럼.

시준이 혼자가 아니라면 지하가 그렇게 만들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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