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다시
“나 봤지? 내가 너 이렇게 확 밀쳤었잖아. 나 그거 오토바이 보자마자 움직인 거야, 알아?”
“봐, 봤어…. 다시는, 다시는, 그, 그러지 마, 말아줘.”
지하는 다시 한 번 애절한 말투로 제발이라는 말까지 붙여가며 부탁했다.
“야, 무슨 말을 그렇게 해? 감동받은 척이라도 하면 어디가 덧나?”
고맙다는 말도 대충 하고.
시준은 자신을 탓하는 것만 같은 지하의 대답이 은근히 섭섭했다. 사실 시준은 어제의 자신이 나름 대견스러웠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밀치는 것 대신 잡은 손을 끌어당겨 피했으면 괜찮지 않았을까 후회가 되기도 했지만 그래도 뿌듯했다. 한편으로는 놀라기도 했다. 저도 모르게 몸이 먼저 움직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아니, 아니야. 저, 정말, 정말 고, 고마….”
“고맙다면서 그런 말을 해? 내가 널 얼마나….”
거기까지 말한 시준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무심코 뒤에 나올 말이 상상조차 가질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도 쩔쩔매는 지하는 시준이 왜 말을 멈췄는지 생각도 못 하고 그저 미안하다며 사과를 되풀이했다.
지하가 자신의 머뭇거림을 눈치 채기전에 시준은 서둘러 말을 돌렸다.
“내가 넘어졌으면 빨리 와서 부축을 하던가, 어?”
“으, 응….”
“나 그렇게 만든 사람이랑 한판 붙던가.”
“응….”
“그런 거 하나도 못하고 쓰러지고.”
“미, 미안….”
“내일 당장 병원 가.”
지하는 날짜가 정해지면 바로 가겠다면서 더듬거리는 말투로 시준에게 대답했다.
둘은 좀 전까지만 해도 거실에 있다가 장소를 옮겨 침대에 나란히 누운 참이었다. 그치라고 정색을 해도 쉼 없이 흐르는 눈물을 보자니 시준까지 피곤해지는 기분이라 쉬고 싶었다.
소파는 불편했고 침대에 푹 파묻혀 한숨 자면 좋을 것 같았다. 시준은 괘씸함에 지하를 부려먹기로 했다. 어차피 그는 시준이 심술을 부리고 있는지도 모를 것이었다. 오히려 방까지 자신을 안아서 옮기는 걸 반기면 반겼지.
시준의 예상대로 지하는 군말 없이 아주 조심스럽게 시준을 안아 올린 후 침대 위에 내려주었다.
몇 달 사이 알몸으로 잠드는 것에 익숙해졌는지 옷을 입은 채 침대 위에서 있는 것이 불편했다. 옷이 답답하다고 시준이 말하니 그는 시준의 옷가지를 하나하나 벗겨주었다. 지하는 바지를 벗겨주다가 깁스한 시준의 다리를 한참 동안 쓰다듬어서 시준에게 잔소리를 듣기도 했다.
그리고 시준이 눕자마자 그 옆을 바로 차지하더니 지금 이 모양이었다.
둘은 누워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로 시준이 묻고 지하가 쩔쩔매며 변명하듯 대답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내가 많이 봐줬다.”
“으, 응…마, 맞아.”
“잘못했지?”
“응….”
“뭘 잘못했는지 이제 다 말해봐.”
그가 시준에게 잠깐 사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들을 다시 읊었다. 시준이 거의 세뇌하듯 반복해서 들려줬기에 내용을 이해한다기보다 그대로 따라 하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계속 되뇌면 언젠가 왜 잘못됐는지 알게 될 수도 있었다.
시준은 가슴에 달라붙어 있는 지하에게 위로 올라오라고 하곤 팔베개를 해주었다.
“나 팔 아프기 전에 알아서 일어나.”
“으, 응.”
지하는 커다란 덩치를 구겨가며 시준의 허리를 파고들었다. 팔베개를 해주며 품에 안은 건 분명 저인데 시준은 왠지 그에게 폭삭 끌어안긴 기분이 들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몸이 맞붙어 살끼리 비벼댔다. 그래도 뭔가를 하고 싶진 않았다. 그저 이렇게 부드러운 맨살의 촉감을 느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상대방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았지만.
“내 발 조심해! 아래도 찌르지 마.”
지하는 눈치를 보며 알겠다고 대답한 후, 시준에게 닿아 있던 하체를 슬쩍 뒤로 물렸다.
시준은 잘했다는 뜻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매만져주었다.
“내일부터 할 거 많겠네.”
“뭐, 뭐를….”
“…말하는 거 연습하라고 했잖아. 병원도 예약하고.”
“아.”
“자꾸 이렇게 나오지?”
그러나 지하는 알겠다는 말만 대답하고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
지하는 그 후로 말을 더듬는 것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시준은 황당함과 함께 그럼 그렇지, 라며 탄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긴장, 하면….”
“뭐, 나랑 둘이 있으면 맨날 긴장했나 봐?”
지하는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갑자기 수줍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시준을 어이없게 만들었다.
“사실, 사실 지금도….”
“아, 그래.”
긴장했다는 그는 중간중간 말하는 속도가 늦어지긴 했어도 더듬는 것 자체는 많이 사라져 있었다.
“너무 갑자기 그러니까 좀….”
“이상, 해? 이, 이상하면 다, 다시….”
“…뭘 다시야.”
시준이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든지 돌아가겠다는 듯 쳐다보는 눈빛이 아주 여우 같았다. 그러나 줄어들었다고는 해도 하루아침에 말하는 습관이 사라지진 못했다. 지하는 하고 싶은 말이 많거나 급하게 말을 할 때에는 그 횟수만 적어졌을 뿐 전처럼 말을 더듬었다.
시준은 그가 더듬지 않기 위해 느리게 말을 하면 말끝을 흐린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일부러 그러는 것 같지는 않았다. 본인도 모르는 것처럼 보여서, 시준은 지하가 말을 할 때면 중간에 끼어들지 않고 그가 하고 싶은 말을 끝마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나, 나, 내일, 병원… 가는데….”
“어.”
“낮에, 누나랑, 가기로 해, 했어.”
마지막에 말을 더듬었다는 사실이 신경 쓰였는지 그가 살짝 굳은 표정으로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시준은 그러지 말라는 뜻으로 손가락을 들어 입술을 한번 쓰다듬어준 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도 갈까.”
시준은 가끔 지유가 권해왔던 상담을 받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저 상담으로 고쳐질 상황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무언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자신들의 관계가 특이하다는 건 이미 일찍이 인지하고 있었으니 조언이라도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들어봤자 고작해야 중학생이 할 수 있었을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상담까지는 아니더라도 검사는 받아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성향을 객관적으로 파악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몇 년간 속 안에 축적되어온 부정적인 사고방식들이 지하와 사귀면서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하가 고개를 저으며 반대하는 걸 보고 같이 가는 건 포기하기로 했다. 그는 시준에게 병원에 있는 제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하는 것 같았다. 예전에 약도 숨어서 먹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시준이 그가 평범한 사람인 것처럼 여겨주길 바라는 것처럼 보였다. 어디까지나 추측이었을 뿐이었지만 꽤 그럴듯했다.
시준은 사고가 있던 날 이후로 지유와 연락을 자주 하게 되었다. 이제는 대놓고 시준의 앞에서 시준의 휴대폰을 살펴보던 지하는, 시준과 그의 누나가 주고받은 문자 내용을 보고서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시준은 그녀에게 지하가 그동안 설치했던 위치추적기와 카메라 이야기를 꺼내면서 혹시라도 이런 행동들이 더 있었는지 조사해주길 부탁했었다. 그녀는 연락을 받자마자 기겁을 하며 그날 바로 둘의 집으로 찾아왔다. 정말이냐고 사실을 묻는 그녀에게 시준은 운동화 안쪽 깔창 아래에 설치되어 있었던 위치추적기 몇 개를 보여주었다. 지유는 현관 밖에 고정되어 있던 카메라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그대로 지하를 데리고 본가로 돌아갔다.
지하는 그때까지 고개만 푹 숙인 채 시준의 옷 끝자락만 붙들고 있다가, 아버지에게 가자는 그녀의 말에 시준을 올려다보았다. 시준은 어서 다녀오라며 그의 등을 떠밀었다. 가기 싫다며 매달려도 억지로 보낼 생각이었는데 그는 의외로 고분고분 시준의 말을 따랐다. 미적거리는 발걸음과 울적한 얼굴이 억지로 간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지만 시준은 모른 척했다.
집에서 무슨 말이 오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날 이후로 얼마 지나지 않아 병원 날짜가 잡힌 걸 보면 상담 이야기가 나왔을 것이 분명했다.
* * *
지하는 병원에 다녀온 뒤 다시 약을 먹기 시작했다. 시준에게는 전보다 약의 개수가 줄어들었다며 이전만큼 심하진 않다는 말도 해주었다. 의사는 지하의 상태를 주기적으로 확인하며 약을 조절할 거라고 했다고 한다. 어쩌면 조만간 끊을 수도 있을 거라고, 약간 들뜬 모습으로 그가 설명했다.
“무슨 약이야?”
“그냥, 그냥….”
“나도 뭔지 알아놔야지.”
“발작, 발작하지 않는, 야, 약….”
“이거 먹으면 발작 안 해?”
“아마….”
그 대답을 끝으로 지하는 입을 다물었다. 시준은 구체적인 병명이나 약의 성분 등을 알고 싶었지만 더 묻는 걸 그만두었다. 당분간 지하를 놀라게 하거나 자극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지유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시준이 의심하던 위치추적기와 카메라는 빠르게 사라졌다. 지유는 시준에게 미안한 얼굴로 이외에 다른 것은 없다고 확인해주었다. 지하의 말대로 시준의 뒤를 따라다닌 사람은 약 1년 전쯤에 계약을 해지했으며, 휴대폰과 관련된 사항으로는 이제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라는 말을 했다. 따로 업체 이야기를 하지 않는 걸 보자니 지하가 직접 해킹을 시도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시준은 굳이 그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어 묻진 않았다.
다만 그녀는 현관 밖에 설치된 CCTV에 대해서는 시준과 생각을 달리했다. 학생 둘만 살고 있는 집인 만큼 보안 목적으로 다시 재설치를 하는 것이 어떠냐고 의견을 제시한 것이다. 시준은 아파트 공동 현관문에도 설치되어 있는 걸 개인적으로 다시 설치할 필요는 없다고 거절했고, 다행히 그녀는 반대하지 않고 알겠다며 물러났다.
시준은 최악의 상황으로 지하가 다시 본가로 들어가는 것을 염두에 두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단지 일주일에 한 번 그는 반강제로 가족과 식사를 하게 되었다. 병원에서 어떤 말을 들었는지는 몰랐다. 그저 그의 누나가 무슨 일이 있어도 매주 일요일 저녁마다 가족끼리 얼굴을 마주해야 한다며, 지하뿐만 아니라 그의 아버지에게도 엄포를 놓았다는 말만 전해 들었다.
잘된 건가.
그의 가족에게는 어쩔 수 없는 삭막함이 존재했다. 집에 있을 시간도 없을 만큼 바쁜 아버지, 마찬가지로 워커홀릭인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누나. 둘의 공통점은 아들, 혹은 동생에 대한 애정은 있어도 딱히 그를 위해 옆에 있어주지는 못한다는 것이었다.
잘된 걸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가기 싫다며 울던 지하도 이제는 갈 시간이 되면 저 혼자 알아서 다녀오겠다며 인사를 하고 떠났다. 아쉬워하는 얼굴이야 여전했어도 전처럼 아프다고 꾀병을 부리거나 우는 일은 없었다. 간혹 그는 저녁식사 동안 있었던 일들을 시준에게 전해주며 웃기도 했다.
사실 지하가 병원에 다시 다닌 후에도 그렇게 썩 눈에 띄는 변화는 없었다. 수능을 앞둔 둘은 여전히 수험생이었으며 수험생이 할 일은 공부밖에 없었다. 그저 시간 날 때마다 다녀왔던 산책이 이제는 필수로 해야만 하는 일과가 되었을 뿐이다.
공부 때문에 여행은 생각지도 못했지만 마트를 간다던가, 가까운 카페를 간다던가, 하는 식으로 범위를 점점 넓혀갔다. 방학에는 시준이 교통사고를 당했던 기억 때문에 지하가 겁을 먹고 나가질 못했으나 개학하고 난 뒤부터 시준은 그가 무서워하든 말든 혼자 여기저기를 먼저 돌아다니곤 했다. 그러면 지하가 억지로라도 따라왔기 때문에 어찌 됐든 외출은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수능이 끝나고도 지하는 여전히 약을 먹었으며, 시준을 좋아했고, 졸졸 따라다녔다. 달라진 거라고는 더 이상 공부를 하지 않는다는 것뿐이었다.
오히려 지하는 무기력해진 시준을 달래느라 바빠졌다.
시준은 대학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은 뒤 아무것도 하기 싫어졌다.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음에도 생각보다 기쁘지가 않았다. 약간은 허무한 것도 같았다. 매일 이 시간에는 공부를 했었는데 갑자기 뭐든 해도 된다고 하니 막상 할 게 없었다. 지하는 그런 시준의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며 걱정하느라 눈물을 보였다.
시준이 보기에 지하는 수능이 끝났어도 할 게 많아 보였다. 그는 매일같이 둘이 먹을 식사를 준비해야 했고, 시준의 몫까지 집안 청소를 했다. 아침마다 하는 운동도 잊지 않았다.
시준은 한 달이 넘는 시간을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냈다. 섹스조차 귀찮았다. 지하가 달라붙어오면 밀어내진 않았으나 예전처럼 먼저 하자고 덤비지도 않았다. 지하는 시준에게 전처럼 대놓고 자신이 질렸냐고 묻지 않았지만 떨리는 눈빛을 숨기진 못했다. 시준이 키스를 해주며 끌어안아줘도 불안한지 자꾸 매달려왔다. 결국에는 지하가 검사를 받아보자며 시준을 먼저 병원으로 이끌었다.
시준은 그동안 미뤄뒀던 검사를 뒤늦게 받게 됐지만 별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결과도 시준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번아웃 증후군이었다. 우울증 증상이 있을 정도로 심각하진 않다며 충분한 휴식을 취하라는 진단을 받았다. 휴식을 취한 후에도 지속적으로 피로함을 느끼면 다시 병원에 오는 것이 좋다는 말도 들었다.
병원에 다녀오고 나서도 한동안 귀찮음이 극에 달해 해가 바뀌어도 게으름이 이어졌다. 지하는 시준과 같이 간 병원에서 식사에도 신경 쓰라는 말을 듣고는 전보다 더 세심하게 식단을 짜기 시작했다. 마치 옛날로 돌아간 것처럼 그는 모든 요리를 그가 직접 만들었다.
그리고 시준은 식탁을 가득 메운 반찬들을 보며 그에게 부탁했다.
“나 먹여줘.”
“…어?”
“귀찮아.”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식사시간마다 시준에게 이것저것 먹어보라며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어 입에 넣어주기도 했으니, 아예 먹여달라고 하면 기뻐하지 않을까, 하면서. 그러나 지하는 시준의 말에 왈칵 울음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내가, 내가, 미, 미안해….”
“갑자기 왜 울어?”
“잘못, 잘못했어…. 준아, 미안….”
한동안 괜찮았던 말까지 더듬으며, 그는 식탁 앞에 앉아 한참을 울었다. 시준은 그런 그를 오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시준이 생각하기에 자신은 잠깐 쉬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몇 년 동안 달려온 목표를 이루고 나서 생기는 허무함과 피로감이 한꺼번에 몰려온 것인데, 지하는 마치 시준이 죽었다는 말을 들은 사람처럼 굴었다. 그는 시준의 가족조차 하지 않는 걱정 때문에 자신이 잘못했다며 빌었다.
시준은 뭘 잘못했는지 묻지 않았다. 어쩌면 시준이 기억하라며 그렇게 되풀이한 말의 뜻을 이제야 안 걸지도 몰랐다. 어디까지나 추측이었을 뿐이지만.
그날은 그래서 먹여주기 싫은 거냐는 시준의 말에, 지하가 당황하며 시준에게 밥을 먹여주는 걸로 끝났었다. 요즘도 종종 그는 시준이 요청하면 옆에서 식사 시중을 들곤 했다. 시준은 그럴 때마다 그의 얼굴을 유심히 관찰했다. 웃는 것처럼 보이지만 울 듯한 표정. 지하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그런 그가 다시 환하게 웃은 것은 영화관이나 가보자는, 시준이 지나가는 것처럼 내뱉은 말을 들은 후였다.
* * *
“너 괜찮아?”
“…응.”
“약 잘 먹었지?”
“응….”
지하는 마주 선 시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곤 힘없이 대답했다. 시준은 속으로 혀를 차며 앞에 있는 커다란 몸을 두 팔로 끌어안았다.
갑자기 작년 생각이 나서 건넨 영화관에 가자는 말에, 놀랍게도 긍정의 대답이 들려와서 괜찮겠거니 싶었는데 아직은 아닌 모양이었다. 병원에는 자신을 어떻게 데리고 간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시준은 널따란 등을 찬찬히 토닥여줬다.
휴일이라 그런지 영화관 안에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그 모습을 본 지하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지는 것을 시준은 놓치지 않았다. 굳어진 얼굴은 시준을 보며 다시 괜찮다는 듯 미소 지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초조함으로 바뀌었다. 그는 식은땀까지 흘리며 자리에 멈춰 섰다.
“너 도대체 학교는 어떻게 다닌 거야?”
“아….”
맞닿은 가슴에서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가 들렸다. 시준은 이제 그의 등을 위아래로 천천히 쓸어내리며 물었다. 그의 관심을 돌리기 위함이었지만 그동안 궁금했던 것이기도 했다.
“학교는….”
“응.”
“준이를….”
“응.”
“싫어해….”
“…뭐?”
어처구니없는 말을 들은 시준의 얼굴이 황당함에 일그러졌다. 시준이 그게 무슨 소리냐며 따지기도 전에 지하는 고개를 들어 시준을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슬쩍 눈으로 주위를 훑은 뒤 시준을 끌어안은 채 종종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
“뭐야? 왜 이래?”
“잠깐만….”
그가 시준을 안듯이 하며 이동한 곳은 영화관 제일 끝, 구석진 곳이었다. 사람이 줄 서 있는 곳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장소에 도착한 걸 확인한 후, 물으려던 것도 잊은 채 시준이 그의 얼굴을 살펴봤다.
“너 얼굴 하얘졌어. 괜찮은 거 맞아?”
“…준아.”
“어. 토하고 싶어?”
“…조금.”
“할래?”
지하는 도리도리 고개질을 치더니 다시 한번 시준의 어깨 위에 푹 고개를 숙였다. 아무것도 보지 않겠다는 것처럼 구는 그 행동이, 시준에게는 마치 제 눈에 보이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도 보이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작은 소형 동물 같았다.
내가 갈 데까지 갔구나.
시준은 자신이 떠올린 생각에 몸서리를 치며 할 수 없이 눈앞에 있는 상대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시준은 지하의 코트 안쪽으로 두 팔을 들이밀며 말했다.
“코트 둘러.”
“…어?”
“코트로 나 가리라고.”
“어어….”
그는 몸까지 움찔거릴 정도로 깜짝 놀라다가, 곧이어 시준이 말하는 걸 깨닫고 코트 안에 시준을 가두었다. 잠시 머뭇대던 그는 이어 벌려진 코트를 시준의 뒤로 두르며 시준의 머리카락 한 올 나오지 않게 꽁꽁 여미었다.
“숨 막히니까 작작 해.”
“으, 응.”
“…이제 좀 괜찮아?”
“…응.”
체격 차이가 커서 시준은 지하의 품 안에 폭삭 갇혀버렸다. 답답해도 참을 생각이었는데 의외로 아늑했다. 시준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러자 두근두근 세차게 뛰는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심장이 계속 뛰는데.”
“괜, 괜찮아.”
“말도 더듬고.”
“괜…찮아….”
괜찮다고 대답하는 그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좀 전에는 창백할 정도로 하얗더니만 이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을 만큼 달아올랐다.
시준은 피식 웃다가 아래로 손을 내려 딱딱해져 있을 물건을 오랜만에 손에 쥐었다. 베개에 머리가 닿기 무섭게 잠들던 지하는 시준이 점점 말을 잃자 잠들 때까지 옆에서 말을 걸기 바빴다. 시준은 그 때문에 말랑한 걸 쥐고 자지 못해 지하의 성기로 손을 뻗는 걸 한동안 그만두었었다.
바지 위로 부풀은 그것은 시준의 손이 닿고 나서 크기를 더 키웠다. 밖에서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이 순간 머리를 스쳤지만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으니 괜찮을 것 같았다. 시준은 흘긋 아래를 내려다보곤 다시 지하와 눈을 마주쳤다. 그는 더 이상 주변 사람들을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다.
토할 것 같다더니.
지하는 시준에게 눈을 고정한 채 목울대를 울리며 침을 크게 삼켰다.
시준은 괜스레 그를 당황하게 만들고 싶어졌다. 다른 생각은 못 하도록, 그래서 시준을 향한 타인의 시선에 예민해지지 못하도록.
“빨아줄까?”
“…어?”
“집에 가서 내가 빨아줄까?”
“무, 뭐?”
시준은 동그랗게 두 눈을 뜨고 있는 지하를 보다가 불쑥 웃음을 터트렸다. 놀란 표정이 익숙했다. 그렇게 믿기 힘든가 싶었다. 시준은 ‘싫으면 말고.’라는 말을 덧붙이고는 다시 그의 품에 기댔다.
권유는 충동적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성공적이었다. 지하는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두 팔을 올렸다 내렸다 했다.
“그, 그, 그게…아니, 아니….”
심하게 더듬는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웃음만 나왔다.
한 번도 그의 물건을 가지고 입으로 어떻게 해볼 생각을 하지 못했었는데, 자신도 모르게 말을 내뱉고 나서 꽤 괜찮지 않은가 싶었다. 어차피 뒤에도 넣는 거, 위에도 넣을 수 있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지하의 심장이 조금 전보다 두 배는 더 빠르게 뛰고 있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얼굴을 하얗게 굳히지도 않았다. 다른 의미로 초조한 것은 여전했지만.
“집에 갈까?”
“지, 집?”
“영화는 다음에 보고.”
“…응. 가, 갈래. 가자, 준아.”
이 상태로 얌전히 영화를 보기는 힘들 것 같아서 혹시나 하고 물어본 말에 냉큼 그러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보지 못한 영화가 아쉽지는 않았다. 시준 역시 계속 지하의 성기를 매만지는 동안 슬슬 몸이 달아올랐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찾아온 기분 좋은 흥분에 어서 둘만 있는 장소로 가고 싶은 마음이 강해졌다.
시준이 빠르게 이동하기 위해 코트 밖으로 나오려는 순간, 갑자기 발이 들렸다.
“…지금 뭐 해?”
시준을 끌어안은 그대로 들어 올리곤 거의 뛰듯이 걷고 있었다. 안겨 있는 몸이 위아래로 흔들려 코트 밖으로 머리가 삐죽 튀어나오기도 해서, 지하가 이동하는 와중에도 한 손으로 시준의 머리를 꾹 눌러 코트 안으로 집어넣었다.
“…야.”
“잠깐, 잠깐만. 금방, 금방 가.”
거친 숨소리가 섞인 대답에 시준이 헛웃음을 지었다.
순식간에 계단을 내려간 그가 성큼성큼 더 걸어가자 곧이어 찬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바깥으로 나온 것 같았다. 시준은 고개를 빼꼼 다시 내밀어 두 볼이 발갛게 상기된 그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택시, 택시 잡을게.”
“…그냥 어플을 켜지 그래?”
“앞에 정류장, 정류장 이, 있어.”
시준은 그럼 이제 내려놓으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몸이 고정된 채 발이 들려 이동하는 것도 썩 나쁘지 않았다. 조금만 더 이렇게 있으면 될 듯했다.
그러다 문득 지하에게 묻고 싶어졌다.
“너는… 내가 이러는 게 좋은 거 아냐?”
“어?”
시준을 안고 뛰기 시작한 그는 흔들림에 점점 아래로 내려가는 시준의 몸을 크게 한번 추켜올렸다.
“윽.”
“미, 미안.”
“말을 좀 하고…! …아니다.”
“이러는 거?”
“…내가 그냥 가만히 있는 거.”
이렇게 얌전히 안겨 있는 걸 좋아하면서 왜 밥을 먹여달라고 할 때는 그렇게 슬픈 표정을 지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시준의 말을 들은 지하가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나는, 나는….”
답을 고르는 그에게 시준이 이어서 물었다.
“아니면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싫어?”
“어?”
“내가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있고, 씻지도 않고, 의욕도 없으면, 넌 싫어?”
“아, 아, 아니, 아니…!”
지하는 그제야 시준을 땅에 내려놓았다. 허공을 둥둥 떠다니던 발이 지면을 딛자마자 시준은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똑같이 좋아할 거야?”
“다, 당연, 당연….”
“정말이야?”
시준은 대답을 재촉했다. 지하는 떨어져 나온 시준의 팔을 다시 끌어당기며 고개를 위아래로 마구 끄덕였다.
“밥도 먹여줄 거야?”
“어…어?”
시준은 지하에게 되묻지 말고 한 번에 좀 알아들으라고 속으로 투덜댔던 지난날을 떠올렸다. 꼭 말해줘야겠다고 결심했었는데, 결국 시준은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매일, 매일, 먹여줄게.”
갑작스러운 물음에 의아해하면서도 지하는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시준은 그런 그를 빤히 올려다보다가, 그의 팔을 끌어내리곤 일부러 왼손끼리 맞잡게 했다.
시준이 맞잡은 손에 시선을 고정시키며 말했다.
“면허나 딸까.”
“…면허?”
“택시 타기 귀찮아.”
꽤 괜찮은 생각이었다. 시준은 성인이었고 아직 시간도 많았다. 겨울방학에 운전면허를 준비하는 학생들이 많다고 하니 지하와 같이 학원에 배우러 다녀도 좋을 것 같았다.
여전히 반지를 끼고 있는 그의 손을 보고 있자 시준의 머릿속에 하나씩 하고 싶은 것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지하의 상태가 더 좋아지면 자신이 직접 차를 몰고 이곳저곳 여행을 갈 수도 있었다. 술을 마셔도 되고, 콘돔도 아무렇지 않게 사도 되고.
시준은 이제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성인이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잠시 쉬어가는 시간이 슬슬 끝나가고 있었다.
시준은 맞잡은 손을 앞뒤로 붕붕 흔들었다.
“내일은 서점에 가자.”
“서, 서점?”
“책 구경도 할 겸 필기시험 문제집 사러.”
“좋아…. 좋아.”
그는 시준의 말에 좋다며 웃었다. 바깥엔 영화관만큼이나 사람이 넘쳐났으나 그는 시준이 원한 것처럼 더 이상 그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시준은 마주 잡은 손에 나란히 끼워진 똑같은 모양의 반지를 바라보았다. 시준은 처음 반지를 낀 날 이후로 한 번도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건 지하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하.”
“응?”
“좋아해.”
사실 이 한마디면 되었을 텐데.
그의 집착도, 자신의 후회도.
시준은 미루고 미뤘던 말을 꺼내 보였다.
애써 숨겨왔던 마음을 그 앞에 들이밀었다.
가져가라며 내보였지만 시준은 상대가 가져가다 못해 아예 꿀꺽 삼켜 그 안에 가둬버리란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도 뭐, 상관없겠지.
시준은 멍하니 서 있는 그에게 다가가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툭 친 뒤 말했다.
“빨리 택시나 잡아. 나 추워.”
“어…다시, 다시….”
“다시는 무슨.”
“하, 한 번만 더….”
“아, 춥다고!”
가끔씩 쏟아져 내리는 비를 맞은 것처럼 무력해진다 해도, 그곳에 내가 있다면.
넌 그곳을 낙원이라 부를 테니.
비를 맞으며 함께 녹아내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