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부정
“흐으…. 문… 잠갔어?”
“잠, 잠갔어.”
지하는 시준의 물음에 대답하자마자 다시 입속으로 혀를 집어넣으며 입을 막았다. 아래는 이미 손가락 네 개가 푹푹 소리를 내며 드나들고 있었다.
시준의 머리가 다시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저녁에 나간다고 했던 지유가 언제 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공부할 거니 방해하지 말라고 지하가 말했지만 그녀가 들이닥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그런데도 지금 하는 짓을 멈출 수가 없었다.
시준은 지하의 어깨 위에 있던 손을 들어 그의 목에 감았다. 입 밖으로 나오려던 신음 소리는 상대방의 입속으로 넘어간 지 오래였다. 다리를 벌리고 누운 자세가 굴욕적이라고 느낄 틈도 없이 지하는 시준의 구멍을 적셨다. 혀로 핥고 쑤시고, 입술로 문대며 다른 윤활제 없이 입으로만 축축하게 하다가 손가락을 하나, 둘 늘려갔다. 뻑뻑해지는 것 같으면 다시 입을 구멍에 문질렀다.
그사이 시준은 또 한 번 사정감이 몰려오는 것을 간신히 막아냈다. 지금도 찌걱이는 소리를 내며 안을 헤집고 있는 손가락 때문에 정신이 없었지만 낯선 이물감 때문인지 사정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마침내 굵고 긴 손가락 네 개가 빠져나가고 뭉툭하면서도 부드러운 것이 구멍에 닿았다. 그러나 그건 입구 주변을 살짝씩만 문댈 뿐 본격적으로 진입할 기미는 느껴지지 않았다.
시준은 손가락이 빠져나간 후부터 뱃속이 자글자글 끓는 기분이었다. 다시 손가락을 넣든, 뭘 넣든 해서 어떻게 해주길 바랐으나 지하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뭐 해? 하기 싫어?”
“그, 그게….”
짜증이 난 시준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지하의 허벅지를 발로 툭 쳤다.
“아프, 아플 것, 같은데….”
“뭐?”
“자, 작아서, 여, 여기가 작아서…준이, 준이 아프….”
“야!”
그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아플 것 같다는 말을 하자마자 시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번엔 속이 다른 의미로 부글부글 끓었다.
“너 크다고 자랑해?”
“아, 아니, 그, 그게….”
“손가락 네 개까지 쑤셔 넣었으면서, 네 좆은 그거보다 더 크다 이거야?”
“준아, 준아, 아, 아냐.”
“하기 싫으면 싫다고 해! 나도 안 하면 그만이야.”
“저, 저, 절, 절, 대…!”
“그럼 넣으면 되잖아!”
시준은 사색이 되어 변명을 하는 지하를 보며 그의 성기를 휙, 소리가 나게 잡아챘다.
잡고 나니 좀 크긴 큰 것 같았다. 귀두 부분도 그렇고… 하지만 손가락이 네 개나 들어갔는데. 그때는 이물감은 느껴졌을지언정 아픈 건 별로 없었다.
시준은 이제 오기가 생겼다. 그래서였다. 앉은 자세로 다리를 벌리고 앉아 한 손을 뒤로 짚은 채, 다른 한 손에 쥔 지하의 성기를 그대로 박아 넣은 것은.
“아윽, 준아, 준…!”
푹, 소리를 내며 들어간 성기는 반 이상 구멍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넣자마자 아찔한 소리를 내뱉는 지하와 다르게 시준의 입에선 비명 소리조차 나오질 않았다.
아팠다. 너무 아파서 숨도 못 쉴 것 같았다.
시준의 몸에서 순식간에 힘이 빠져나갔고 그대로 뒤로 무너지려는 허리를 지하가 두 손으로 받쳤다.
“준아, 읏….”
“아…아, 흐… 가만, 가만히.”
저절로 아프다는 소리가 나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대신 시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뒤로 빠지려는 지하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힘겹게 내뱉었다. 나가려는 움직임조차 고통스러웠다. 뒤를 넓힐 만큼 넓혔다고 생각했는데도 지하의 것을 물고 있는 입구는 찢어질 것 같았고 안쪽은 터져나갈 것만 같았다. 반만 들어왔을 뿐인데도 그랬다.
시준은 그제야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이건 사람 안에 넣어서는 안 되는 물건이었다. 쾌감이 아닌 고통으로 흐릿해진 눈에는 지하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겨우 숨을 몰아쉬는 동안 느껴지는 건 허리를 붙잡고 있는 손의 떨림뿐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있던 것 같았다. 시준은 여전히 고통으로 쉬이 말을 하지 못했고, 그런 시준을 지하는 입술을 깨물며 지켜보았다. 얼굴이 잔뜩 구겨져서는 무언가를 참아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시준은 거기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고,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빼라고 말을 할 생각이었다.
지하의 몸 전체가 떨려왔다. 시준의 뒷구멍에 넣은 성기까지도. 그와 동시에 안쪽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주륵 흐르며 내벽을 간지럽히는 느낌에 시준은 설마설마하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지하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즈려 물고 있었지만 배 쪽 근육이 꿈틀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윽, 너… 너…!”
쌌어?
그 말은 갑작스러운 아픔에 끝까지 나오질 못했다. 지하가 사정으로 허리를 움찔거리자 성기가 안쪽으로 더 들어온 것이다.
시준은 두 눈을 크게 뜬 채, 순간적으로 입을 크게 벌리고 숨을 들이마셨다.
“으…. 준아, 준….”
지하가 거친 숨소리를 내며 눈을 뜸과 동시에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아읏!”
시준은 안에서 다시 커다래지고 있는 성기의 느낌에 신음 소리를 내뱉었다.
이, 개새끼가…!
속으로는 욕이 절로 나왔다. 누구는 아파 죽겠는데 저 좋다고 혼자서만 갔다는 게 시준을 열받게 했다.
화가 나서 이제 빼라고 말하려는 중에 지하가 시준의 몸을 침대 위에 내렸다. 그러곤 몸을 아래로 숙였다. 둘의 가슴과 가슴이 맞닿을 정도로 끌어안자 자연스럽게 아래쪽 연결이 더 깊어졌다. 그러면서 반밖에 들어가지 않았던 성기가 완전히 구멍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아래에서 느껴지는 충격에 결국 시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아, 아프… 아…!”
소리가 나오지 않을 것 같던 입에서는 이제 아프다는 말이 시준도 모르게 나오고 있었다. 지하는 울고 있는 시준의 얼굴 이곳저곳에 입을 맞추면서 조금씩 허리를 움직였다. 위에 있는 몸이 움직일수록 시준의 고통이 더 선명해졌다. 지하는 계속해서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배가 터질 것 같았다. 시준은 갑자기 든 생각에 덜컥 무서워져서 고개를 마구 저었다.
“흐으, 터져… 읏… 그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하는 꾸역꾸역 안으로 더 파고들며 두 팔로 시준의 머리를 감싼 채, 귓가에 입술을 붙이고는 시준의 이름만 불러댔다.
시준은 다시 눈을 감았다. 벌려진 다리가 힘없이 허공에서 덜렁이고 있었지만 거기까지 신경 쓰지 못했다. 안에 있던 성기가 천천히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하고 있는 동안 시준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뱃속이 화끈거리면서 동시에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지하가 안쪽에 싸대던 정액이 내벽과 성기 사이를 흐르면서 길을 미끄럽게 해주고 있었다. 그가 들락날락할 때마다 아래에 물이 고여 있는 것처럼 쿨쩍이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아프면서도 질척이는 이상한 느낌에 시준이 눈앞의 지하에게 매달렸다.
“나… 이, 이상…. 아으… 아파, 아파….”
“많이, 많이 아파?”
시준은 지하의 머리를 끌어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프고 배가 터질 것 같아서 무서웠다. 그의 머리를 끌어안기 전에 잠깐 내려다본 자신의 배 위에는 불룩한 것이 튀어나와 있었다. 그건 위에 있는 지하가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모양을 달리했다. 하지하의 성기임이 분명한 그것에 시준은 겁을 먹었다. 안에 있는 좆이 금방이라도 뱃가죽을 뚫고 나올 것만 같았다.
“아프… 힉!”
아프다고까지 했는데도 지하가 시준의 얼굴 옆에 있던 두 팔을 세웠다. 그리고 숙였던 지하의 몸이 곧게 펴지며, 나가나 싶었던 그의 성기가 단숨에 다시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정말 나가는 줄 알고 조금씩 힘이 풀려 있던 시준의 안쪽으로 처음과는 다르게 콱, 하며 뿌리 끝까지 박혔다.
그와 동시에 시준의 비명 소리가 달라졌다.
“흐아! 아!”
시준의 몸이 덜덜 떨려왔다. 구멍 안으로 푹푹 쑤셔오는 성기에 눈앞이 순식간에 새하얘지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문질러질 때와는 차원이 다른 감각이었다. 시준은 여태까지 느껴보지 못한 쾌감에 고개를 저으며 지하를 밀어냈으나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준의 신음 소리를 듣자 체중을 실어 박아오기 시작했다.
“아응, 아! 읏, 아!”
쿨쩍이는 소리는 어느새 찰박거리며 물이 넘치는 소리로 바뀌었다. 아픈데도 점점 좋아졌다. 힘없이 흔들리던 시준의 다리가 어느새 지하의 허리에 감겨 있었다. 그는 마치 팔굽혀펴기를 하듯 상체와 하체를 일직선으로 펴고는 허리만 움직여 시준의 구멍에 퍽 소리가 나도록 박았다. 그의 성기에서 나온 쿠퍼액과 안쪽에 싼 정액으로 이미 구멍 안은 매끄러웠다.
성기는 안쪽 깊숙이 들어왔다가 한 번에 빠져나갔다. 그리고 다시 그 짓을 반복했다. 점점 빨라지는 속도에 시준이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흐윽, 으, 흐응…!”
감당할 수 없는 쾌감이었다. 분명 기분이 좋은데, 너무 좋아서 죽을 것만 같았다. 시준은 울면서 두 팔로 지하의 어깨를 꼬집고 등을 할퀴었으나 그는 시준의 이름만 부르며 움직였다.
“아으, 좋…아, 응, 그만, 그… 아! 아!”
아픔은 이제 희미해져 있었다. 좋으면서도 그만둬줬으면 하는 상반된 감정이 느껴지면서 동시에 지하가 좀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속도로 박아오기 시작했다. 그의 움직임 때문에 신음 소리가 뚝뚝 끊겼지만 시준은 벌려진 입에서 나오는 비명 소리를 막지 못했다.
“아아! 아! 응!”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뱃속에서만 느껴지는 감각에 시준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자지러지듯 소리를 내질렀다.
정말 미칠 것만 같을 때,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니 지하가 입을 맞춰오고 있었다.
뱃속이 가득 찬 생소한 느낌에 시준은 눈을 감았다.
“응, 읏, 읏!”
시준은 품에 안은 베개를 물고 소리를 참아보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지하는 그런 시준을 뒤에서부터 끌어안고는 계속해서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한 번으로 끝날 것 같았던 섹스는 분위기를 타고 다시 시작되었다.
분명 지쳐서 침대 위로 나가떨어졌던 것 같은데. 그래서 몸 여기저기를 손으로 만지며 혀로 핥아대는 하지하를 밀쳐내지도 못했었는데.
끈질긴 애무에 결국 쉽게 아픔을 잊은 시준이 허락하자 지하는 서둘러 시준의 위로 올라탔다. 좀 전과 같은 자세로 시도하려던 삽입은 다리가 저리다는 시준의 말에 금세 바뀌었다. 천천히 돌려져 엎드린 몸 아래로 커다란 베개가 쥐어졌다. 뒤바뀐 자세에 불만을 품을 틈도 없었다. 지하의 것이 그대로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두 번의 사정으로 눅눅해진 안쪽 길을 따라 그의 성기가 쑥 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매끄럽게 삽입되었다. 너무 커다래서 찢어질 것처럼 벌어졌던 입구는 어느새 조였다 풀었다 하며 안에 들어온 걸 물었다. 시준은 지하의 성기가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도통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아으, 아! 좋아, 아!”
반복해서 맨 끝 쪽 느끼는 지점만을 문지르던 것이 천천히 빠져나가며 내벽을 쓸어내리면 그마저도 자극이 되어 소름이 돋았다. 모든 감각이 뒤로 가 있었다. 살과 살이 부딪치며 찰박이는 소리가 섞여들었다. 뒤가 자꾸 젖어 들어가는 느낌과 끊임없이 뱃속이 불타오르는 감각에 시준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세웠던 무릎은 퍽퍽 소리를 내며 점점 더 깊게 파고드는 몸짓에 자꾸만 구부려졌다. 나중에는 지하의 손에 붙잡혀 엉덩이만 들어 올린 자세가 되었다.
“지하, 읏, 거기, 나, 거기… 아!”
지하가 커다란 몸을 구부리자 시준의 몸이 그 안으로 사라졌다. 지하는 시준의 귓가에 입술을 문댔다. 거친 숨소리와 함께 자신의 이름을 불러대는 지하에게 시준은 계속 쑤시라며 그를 부추겼다. 시준은 입구만 얕게 드나들며 잘게 쳐올리는 것에 안달이 났다. 아까처럼 깊게 안쪽으로 박아줬으면 좋겠는데 그러질 않자 상대방의 이름까지 부르며 매달렸다.
그 순간 지하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그는 숨을 깊게 삼키며 몸을 세우곤 성기가 모습을 다 드러낼 때까지 빼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빠른 속도로 안쪽을 치고 올라갔다.
“아악! 아! 아!”
콱 하고 박힌 성기에 시준이 비명을 내질렀다. 목소리를 줄이려던 노력은 그새 머릿속에서 지워지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외쳐댔다. 눈앞이 번쩍이며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감당하기 어려운 쾌감이 또다시 몰아치려 하고 있었다.
시준의 성기는 바짝 서서 허리를 잡은 큰 손이 몸을 움직이게 할 때마다 같이 흔들렸다. 아래에서 찐득한 액체가 줄줄 흐르고 있는데도 시준은 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흐아…. 아응! 나, 쌀 거, 읏, 흑….”
쌀 것 같으니 이제 그만 멈추고 아래를 만져달라고 해야 하는데 말이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말을 했어도 탁, 탁 소리를 내며 박아오는 행위에 몸이 떨려와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을 터였다.
시준은 본능적으로 베개를 쥐고 있던 손을 아래로 내려 성기를 쥐려다가 갑자기 푹, 하고 안을 쑤시며 들어온 것에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몸 전체를 떨며 흐느끼듯 울기 시작했다.
“아으, 흐… 아!”
다물지 못한 입 사이로 침이 흘러내렸고 더 이상 좋다는 말도 나오질 않았다. 마치 백치가 된 것처럼 시준은 고개를 저으며 울기만 했다. 이미 성기는 탁한 액을 줄줄 흘리고 있었으나 그것도 모르고 있었다. 시준은 저도 모르게 뒤를 움찔거리며 파고드는 성기를 조였다. 그럴 때마다 잠시 멈칫하던 움직임은 배로 거칠어졌다.
시준은 여기가 어디인지도 잊은 채 큰 소리로 울었다. 눈물이 흘러내렸지만 고통과도 닮은 쾌감은 쉬이 끝나질 않았다. 더는 견디기 힘들어 이마를 베개에 비비고, 엎드린 팔을 앞으로 뻗어 빠져나가려고 해도 뒤에서 허리를 붙잡은 손의 힘이 너무나 셌다. 시준은 결국 또다시 안쪽으로 뜨거운 것이 퍼질 때까지 무거운 몸에 깔려 울기만 했다.
눈을 떴을 땐 이미 사방이 어두컴컴해진 후였다. 시준은 묘하게 답답한 느낌에 몸을 움직여보았으나 무언가가 몸을 옭매고 있어서 쉽지 않았다. 얼마 후 시준은 자신이 지하에게 폭삭 끌어안겨 있다는 걸 깨달았다. 두꺼운 팔이 시준의 가슴팍을 휘감고 있었고 허벅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로 누운 몸은 하지하의 품 속에서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머리 위에서는 쌕쌕대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릴 수도 없었기에 시간을 확인해보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밤인 것 같았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와서 잠깐 지유와 이야기한 뒤 내내 침대에만 있다가 잠들었으니 얼추 맞을 듯했다.
눈을 감기 전만 해도 땀과 침으로 끈적였던 몸은 보송보송했다. 잠든 사이에 지하가 물수건으로 닦았거나 아니면 욕실에서 씻긴 것 같았다. 안에 있던 것도 뺐는지 연이은 사정으로 물이 찬 것처럼 철퍽이던 뒤도 괜찮았다. 아직도 들어와 있는 느낌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정작 구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중간에 깨서 그런지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았다. 시준은 무거운 몸을 밀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볼까 하다가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포기했다.
두 번의 섹스는 날아갈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좋다 못해 제정신이 아닐 지경이었다. 손가락과 성기는 차원이 달랐다.
왜 그랬지. 내가 왜 그랬을까.
시준은 말똥말똥한 눈으로 계속 생각했다. 평소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정말 그럴까.
서로의 성기를 만져주던 손길이 결국은 섹스까지 이어졌다. 애초에 이것을 위한 행위였다는 것처럼. 왜, 라는 말을 반복하며 생각하던 시준은 아랫배에서 느껴지는 말캉한 감촉에 시선을 내렸다. 시준은 그제야 자신과 지하가 알몸이라는 걸 깨달았다.
어쩐지 이불을 덮고 있지 않는데도 덥더라니.
몇 번 살을 맞대며 뒹굴었다고 시준은 지하의 피부가 부드럽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근육으로 탄탄한 몸이었지만 의외로 말랑한 부분이 몇 군데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중 하나가 발기하기 전 하지하의 좆이라는 것도.
시준은 배에 닿는 그것에 손을 올려보았다. 꽉 끌어안겨 있어서 손을 갖다 대는 것이 쉽지 않았으나 어찌어찌 만질 수는 있었다. 발기하지 않았음에도 손에 잡히는 것은 꽤 컸다. 한 손에 다 안 잡힐 정도로. 그래도 시준은 그 감촉이 좋아서 아래 고환부터 위쪽으로 쓸어 올리듯 만지기도 하고 손에 꽉 쥐어보기도 했다.
그러자 잠결에도 끙, 하는 소리를 내며 지하가 허리를 움찔했다. 그랬는데도 일어나질 않는 걸 보면 어지간히 피곤한 모양이었다. 시준은 그 와중에 손안에 있는 물건이 점점 단단해지는 걸 느끼고 손을 떼어냈다. 잠시 후에 성기는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다시 말랑해졌다. 그렇게 말랑해지면 손에 쥐고, 단단해지면 놔버리는 장난 같은 움직임을 반복하던 시준의 눈이 점점 감겼다.
간지러운 느낌에 잠에서 깨었을 때는 손에 쥐고 있던 지하의 성기가 완전히 발기한 후였다. 잡기 편하게 굵어진 그것은 핏줄까지 튀어나와 찐덕한 액체를 흘려대고 있었다. 시준은 이마를 대고 잠든 가슴팍에서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잠결에도 흐릿하게 풀린 지하의 눈이 보였다.
아직 방은 어두웠다. 아침은 아닌 것 같았다. 시준이 손안에 쥔 성기를 살짝 쓸어내리자 그 작은 손짓에도 지하가 몸을 크게 떨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야릇한 감각이 시준의 머리를 지배했다. 시준은 눈앞의 지하에게 입을 맞추는 대신 모로 누운 그대로 한쪽 다리를 들었다. 그리고 잡고 있던 성기를 구멍에 문댔다.
“하아….”
떨리는 숨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푹, 소리를 내며 성기 앞쪽 부분이 구멍 안으로 들어왔다. 귀두를 적시며 흐르는 액체 때문인지, 아니면 몇 시간 전까지 열려 있었기 때문인지, 성기는 처음에만 조금 퍽퍽하게 들어왔을 뿐 얕게 삽입을 반복하자 점점 더 수월하게 안쪽으로 들어왔다.
“으응….”
뱃속이 간질간질한 느낌에 시준의 입에서 보채는 말이 흘러나왔다. 도망치고 싶은 그 감각을 다시 한번 느껴보고 싶어서 애가 탔다. 그리고 시준이 지하의 이름을 부르자 굵고 긴 성기가 단숨에 길을 열며 박혀왔다.
“음!”
삽입과 동시에 시준의 입이 막혔다. 지하는 시준의 입술을 벌리고 잡아먹을 듯이 키스했다. 시준은 아래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숨이 차는지도 몰랐다.
“읍, 응!”
퍽퍽 쑤시면서 강하게 박혀오는 성기에 곧바로 몸이 달아올랐다. 애무 없이 바로 삽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아픔이 옅어져 있는 것이 이상하지도 않았다.
시준은 감은 눈을 뜨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들고 있던 다리는 어느새 상대방이 받치고 있었고 아래로는 성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감추며 들락날락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시준의 배가 불룩 튀어오르고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어둠 속에서도 흐릿하게 보이는 그 모습에 시준이 결국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저어 하지하의 입술을 떨쳐냈다.
“아흑, 으아…!”
막혀 있던 입에서는 야한 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꾹꾹 누르며 성기가 잘게 안쪽을 찔러댈 때도, 한 번에 나왔다가 뿌리 끝까지 박힐 때에도 흐느끼며 자지러지는 소리를 내질렀다. 시준은 울면서 지하에게 매달렸다. 그렇게 시작된 섹스는 날이 밝아올 때까지 끝나지 않았다.
* * *
“아파….”
“마, 많이, 아, 아파?”
“잘 좀 주물러봐.”
“어, 어떡하지. 바, 박사님 부, 부를까?”
“불러서 뭐, 섹스했는데 거기도 허리도 너무 아파요, 이러게?”
“아, 아니…나, 나는….”
지하는 말을 잇지 못하면서도 시준의 허리를 열심히 주물렀다.
멀쩡해 보이는 지하와 다르게 시준에게는 섹스의 후유증이 예상보다 컸다. 분명 새벽녘에는 좋은 기분만 남았던 것 같았는데, 제정신으로 돌아온 아침에 일어나 보니 여기저기 쑤시고 안 아픈 곳이 없었다. 특히 허리와 구멍 쪽이 말도 못 하게 아팠다. 침대 위에 엎드려서 지하에게 마사지를 받고 있긴 했지만 이걸로는 몸이 풀릴 것 같지 않았다.
구멍도 분명 어제는 찢어진 것 같지 않았는데 화끈거리고 쓰라렸다. 제대로 확인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계속해서 욱신욱신거리는 허리까지 굽혀가며 볼 마음은 들지 않았고, 그래서 시준은 지하에게 살펴보라고 시켰다.
“내, 내, 내가?”
“그럼 누가 봐? 아픈 내가 일어나서 봐야겠어? 그래야겠어, 지하야?”
“아, 아, 아니….”
“나 지금 엎드려 있잖아. 빨리 좀 봐봐. 아까부터 계속 쓰라리단 말이야.”
“으, 응.”
“혹시라도 찢어졌으면 넌 뒤졌어.”
“미, 미, 미안해….”
“미안하면 어떤지 보기나 하라고.”
시준의 말에 지하가 눈앞의 엉덩이 위로 두 손을 조심스럽게 올렸다. 그리고 살며시 잡아 벌렸다. 그 손길에 시준은 속으로 같잖다는 듯이 웃어줬다. 핥을 때나 박을 때는 마구잡이로 벌려대더니 아프다는 말에 나름 신중해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그는 시준이 아플 때마다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걱정하곤 했다.
“부, 부었어. 마, 많이 부, 부었어. 어, 어떡하지. 아, 아프지, 준아?”
“뭐야, 찢어졌어?”
“그, 그건 아닌데…빠, 빨개. 그, 그리고 너무 자, 작아.”
“어제부터 자꾸 작다고 한다, 너?”
“아, 아, 아냐. 그, 그게 아니라, 지, 진짜로…부, 붓고, 쓰, 쓸린 것처럼….”
어쩐지 존나 아프더라니.
넣고 나서는 안에 있다는 압박감 때문에 몰랐고 그 후에는 계속 쳐올리는 감각 때문에 묻힌 것 같았다. 머릿속 쾌락이 사라진 후에 남은 고통으로 시준은 온몸이 불편해짐을 느꼈다.
“약 없어?”
“야, 약?”
“연고 같은 거. 그렇게 부었으면 뭐라도 발라야 할 거 아냐.”
“아, 아….”
“너 좀 변했다?”
“내, 내가?”
“이런 거 원래 네가 알아서 신경 써야 하는 거 아냐? 내가 이런 말까지 해야 해?”
“미, 미, 미안해. 나, 나는, 난….”
“됐어.”
뒤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지하가 눈에 보이는 듯했지만 시준은 무시하고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저 새끼, 저거. 한 번 넣어봤다고 사람 달라지는 거 아니겠지.
그런 마음이 순간적으로 들어서 되려 짜증 난 목소리가 튀어나갔다. 시준은 자신이 아플 때마다 알아서 약과 온갖 보양식을 갖다 바치던 지하를 떠올려봤다.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 지하의 반응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더 심술이 난 걸지도 몰랐다.
같이 즐겼는데 누구는 아프고 누구는 멀쩡하고. 새삼 불공평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지하가 연고를 찾아오겠다며 침대에서 내려갔다.
“그냥 사 와.”
“사, 사 와?”
“약국에서 물어보고 사 오라고.”
“지, 집에 이, 있을지도….”
“나보고 쓰던 거 쓰라고?”
시준이 발끈해서 고개를 돌리고 묻자 지하가 손을 내저으며 부정했다.
“아, 아냐. 그, 그럼 아, 아저씨한테 부, 부탁을….”
“미쳤어? 그걸 왜 다른 사람한테 시켜? 어디에 바를 건지 말하려고?”
“아, 아….”
“네가 사 와.”
당연한 것처럼 내뱉은 말에 들려오는 대답이 없었다. 시준은 망설이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지하가 의아해졌다. 그리고 이내 다른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너… 이제 귀찮다 이거야?”
“어, 어?”
“그런 거지. 한 번 하고 나니까 마음이 변….”
“아, 아냐!”
눈을 가늘게 하고 하지하를 떠보던 시준은 갑작스럽게 커진 목소리에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나, 나는, 준이, 준이가 호, 혼자 있으니까. 내가, 내가 나, 나가면. 여, 여기에 호, 혼자…그, 그게, 나, 나는….”
“…뭐야. 학교도 못 갔는데. 그럴 일 없으니까 안심하고 다녀와.”
어쩐지 필사적으로 설명하는 모습에 시준의 짜증이 조금씩 사라졌다. 혼자 남겨놓고 가는 게 싫어서라니. 무슨 첫날밤을 보내고 난 연인 사이처럼 말했다.
시준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느끼며 얌전히 누워 있을 테니 다녀오라고 그를 재촉했다. 허리 찜질하게 찜질팩도 사 오라고 덧붙이면서.
지하는 시준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느릿느릿 걸으며 방을 나갔다.
그가 나간 걸 확인한 시준은 한숨 잘 생각이었다. 새벽에 깨어서 다시 아침까지 섹스를 하니 잠이 부족했다. 학교는 결국 가지 못했다. 지하가 어련히 알아서 잘 설명했겠지만 출석이 조금 걱정되긴 했다.
작년에도 감기에 크게 걸려서 결석했었는데. 하루 이틀 정도는 괜찮겠지. 지금은 도저히 일어나서 걸을 몸 상태가 아니었다.
그러나 막상 잠을 청하려고 하니 잠이 오질 않았다. 어쩌면 아파서 잠이 안 오는 걸지도 몰랐다. 베개에 닿은 눈도 따가웠다. 어제 내내 울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잠을 자지 못해서 그런 건지는 몰랐으나 시준은 지하에게 눈 찜질용 아이스팩도 사 오라고 말할 걸 후회했다. 휴대폰으로 연락을 하면 될 테지만 시준의 휴대폰은 침대에서 먼 책상 위에 있었고 거기까지 가긴 귀찮았다.
이런 몸상태라면 두 번은 못하겠다. 시준은 어제 하기 전에 한 번이라고 강조하길 잘했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여태까지 느껴본 적이 없는 쾌감이었고, 아픔까지 잊을 정도였지만, 할 때마다 몸이 이렇게 된다면 고민해봐야 할 일이었다.
그래도 좋긴 좋았는데.
시준은 가만히 어제를 떠올려보았다. 초점이 사라진 눈으로 시준의 이름만 부르며 계속 파고들던 지하가 제일 먼저 생각났다. 땀방울이 이마에서부터 또르르 흘러 턱에 맺힌 모양도. 지하는 시준이 이름을 불러주면 못 참겠다는 듯이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며 거칠게 움직였었다. 그러면 시준은 소리만 지르며 울어댔다. 너무 좋아서. 좋긴 정말 좋았다. 아래를 만져주지 않아도 쌌으니까.
움찔.
갑자기 든 생각에 시준의 눈이 번쩍 띄었다. 그리고 급하게 어제 자신이 섹스를 하는 동안 아래를 만졌던가 생각해보았다. 없었던 것 같다. 지하가 쥐고 흔든 적도 없었던 것 같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 하지하가 만져오지 않았을까 고민해봤지만 어제 했던 자세들을 생각해보면 그럴 가능성이 적었다.
어제 뒷구멍에 하지하의 좆만 넣은 채로 쌌다.
그 사실을 깨달은 시준이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굳어버렸다.
그동안 아무리 지하가 혀로 핥고 쑤시고, 손가락으로 안을 찔러도 뒤로만 간 적은 없었다. 중간에 꼭 앞을 만져줘야지만 사정이 가능했었는데. 원래 뒤로 섹스를 하면 이런 건가 싶었지만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손 한 번을 안 대고 쌀 수가 있는지. 시준은 새삼 자존심이 상했다. 할 때는 몰랐다가 지나고 뒤늦게 깨달았다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이러다가 앞으로는 아예 못 가는 거 아니냐는 걱정이 드는 순간, 이게 뭐 하는 짓인가 하는 후회와도 비슷한 감정이 몰려왔다. 처음부터 제대로 된 관계가 아니었다. 얼떨결에 자위하는 모습을 구경하고, 서로의 것을 만져주고. 지하 혼자 입에 물다가 그게 뒤까지 옮겨갔다. 그러나 이 모든 행위는 시준의 동의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마지막 섹스는 시준이 먼저 원하기까지 했다.
이제 더 이상 방어막은 사라지고 없었다. 시준은 모든 걸 원래대로 돌려놔야 함을 느꼈다.
* * *
“따가워!”
“미, 미, 미안.”
“떨지 좀 마.”
“아, 아플, 아플까 봐….”
“손이 떨리니까 더 쓰라리잖아!”
지하는 또다시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침대 헤드에 기대 있는 시준의 다리 사이로 조심스럽게 손을 들이밀었다. 떨리는 것을 멈추기 위함인지 중간중간 주먹을 쥐었다 펴기도 했지만 큰 효과는 없어 보였다. 시준은 활짝 펼쳐진 다리 사이에 커다란 몸을 구기고 앉아 벌벌 떨며 뒤쪽에 연고를 바르고 있는 하지하를 노려보았다.
그는 조금 전에 연고를 사 왔다며 방으로 돌아왔다. 밖이 더운 건지, 아니면 급하게 다녀온 건지 얼굴에는 땀방울이 가득했다.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늦어서 미안하다는 그 말에 시준은 왜인지 생각해놓은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지하에게 할 말은 아주 간단했다. 그냥 그만하자는 한마디면 충분했다. 그러나 막상 입 밖으로 꺼내려니 말이 나오질 않았다.
아쉬운 건가. 그럴지도 몰랐다. 지하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시준은 지금 아래가 서려는 걸 겨우 참아내고 있는 중이었다. 연고를 바르기 위해 그곳으로 숙여진 얼굴에서 나오는 입김과, 그리고 살짝살짝 와 닿는 손가락 때문이었다. 그나마 사이사이로 느껴지는 아픔 덕분에 간신이 지하의 눈앞에서 발기하는 걸 막을 수 있었다.
다리를 벌리고 앉아 있음에도 창피함이나 불쾌함이 느껴지지 않는 건, 더는 이런 자세를 취할 일이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시준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다만 말을 꺼내는 것은 내일로 미뤘다. 오늘은 금요일이고, 지금 몸 상태로는 집에 가는 것도 힘들었다. 집에 가서도 불편할 게 뻔했다. 차라리 여기서 수발을 받는 게 나았다. 그리고 그동안은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해줄 생각이었다. 하지하는 유독 입맞춤을 좋아하는 편이었으니 하루 종일 입을 맞대고 있어줘도 괜찮을 것 같았다. 마지막이니까.
그러나 이어지던 생각은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고통에 뚝 끊기고 말았다.
“아…파!”
“미, 미안, 미안, 준아. 안에, 안에도, 발, 발라, 발라야 한대.”
조심조심 구멍을 쓰다듬던 손가락이 불시에 파고들어서 생긴 아픔이었다. 금방이라도 힘을 얻어 일어날 것 같던 시준의 성기가 순식간에 죽어버렸다. 시준은 어제와는 다르게 불로 지지는 듯한 고통에 얼굴을 찡그렸다. 연고로 끈적이는 손가락 한 개가 안으로 들어가 내벽 이곳저곳을 느리게 눌렀지만 시준은 입구가 쓰라려서 제대로 느끼지도 못했다. 천천히, 그러나 꼼꼼히 안쪽에 약을 바른 손가락은 구멍 밖으로 나올 때도 아팠다.
“읏!”
“끄, 끝났어.”
그렇게 말한 지하는 시준에게 팬티를 입혀줬다. 다리를 들어 올리는 것도 힘이 들었지만 어찌어찌 다 입을 수 있었다. 지하는 잠옷도 마저 입혀주려 했으나 시준이 거절했다. 침대 헤드에도 부축을 받아 겨우 기댔는데 다시 아픈 허리를 부여잡고 옷을 입는 것이 귀찮았다.
조심스럽게 시준을 침대에 눕혀준 지하는 침대에 걸터앉아 시준을 빤히 내려다봤다. 약간은 몽롱한 것 같기도 한 그 눈빛에 시준은 위기감을 느꼈다. 자꾸 저런 표정을 짓게 해선 안 된다. 마치 생존 본능과도 같은 생각에 나갔다 왔으니 씻고 오라며 지하를 욕실로 밀어 넣었다. 지하는 그 말에 바보같이 웃으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시준은 누워서 가만히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답답해서 이불을 덮지 않아 얼룩덜룩한 상체가 훤히 잘 보였다. 자고 일어난 새에 몸 여기저기에 이상한 얼룩들이 생겼다. 벌레에 물린 것 같기도 했으나 중간중간 잇자국이 남아 있는 걸 보아 필시 지하가 깨문 것이 틀림없었다. 관계 중에 깨물지는 않았으니 아마 시준이 지쳐 잠들었을 때 흔적을 남긴 것 같았다. 원래라면 목 근처까지 남은 자국에 짜증을 부리며 머리가 있는 거냐고 따져야 했을 텐데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봐주지, 뭐. 어차피 여기까지라고 내일 말할 거니까.
시준은 그런 생각으로 오늘은 지하가 하자는 것들, 하고 싶은 것들을 맘껏 하게 해주기로 했다.
그러나 오늘따라 그가 시준에게 바라는 것은 별로 없어 보였다. 씻고 나온 지하는 시준의 옆에 조심스레 누웠다. 그리고 몸을 옆으로 돌려 시준을 보기만 했다. 시선을 느낀 시준은 지하를 흘깃 쳐다보고는 모른 척 물었다.
“왜.”
“아, 아무, 아무것도 아, 아니야.”
그러자 지하가 맹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 웃음은 지난번 욕실에서 그가 지었던 것과 비슷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는 듯한.
시준은 저도 모르게 그 웃음을 빤히 쳐다보았다.
“어, 어제는…내, 내가, 미, 미안.”
“…뭐가?”
“저, 정신을 놔, 놨던 것 가, 같아. 내, 내가 미쳐, 미쳐서…”
너무 좋아서.
지하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힘, 힘들었지, 준아.”
“…….”
“아, 앞으로는 아, 안 그럴게. 안, 안 아프게, 해, 해줄게.”
너무 좋았다는 말에 할 말을 잃은 시준은 시선을 천장으로 돌렸다. 네가 말하는 앞으로는 이제 없을 거라고 말해야 했지만 어차피 내일로 미루기로 마음먹은 후였다. 시준은 바로 누웠던 몸을 힘겹게 옆으로 돌려 지하를 마주 보았다. 그러자 깜짝 놀란 그가 시준을 말렸다.
“왜, 왜. 아, 아픈데. 우, 움직이지 마, 준아. 히, 힘들어. 마, 마사지 해줄까?”
“키스할래?”
“…어?”
“이리 와봐.”
어리둥절한 표정을 한 채 고개를 숙인 지하에게 시준이 입술을 가져다 댔다. 부드럽고 말캉하고, 또 뜨겁고. 시준은 눈을 감으며 키스에 집중했다. 얼마 안 있어 굳어 있던 상대방이 시준을 품에 안고 입을 벌리며 더욱 깊게 들어왔다.
한참을 그렇게 입을 맞췄다. 시준은 말랑한 것에 자신의 입술을 비비기도 하고 혀로 살짝살짝 핥으며 간지럽히듯 움직였다. 그러면 지하는 덤비듯이 시준의 입속을 침범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혀가 얽히며 질척이던 소리가 뚝 끊겼다.
“옷 벗어.”
시준은 맞닿은 몸에서 느껴지는 거추장스러운 옷이 불편했다. 어제처럼 보드라운 살결을 끌어안고 문대고 싶은 마음에 명령하자, 지하가 대답도 않고 바로 상의와 하의를 벗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숙여 시준을 끌어안았다.
시준은 조금 전의 자신처럼 눈을 감고 키스에 집중하고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가슴끼리 닿을 정도로 딱 달라붙은 자세가 어제를 떠올리게 했다. 시준은 한 손을 들어 천천히 지하의 등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쓸어내렸다. 그러자 마주한 입에서 숨을 삼키며, 지하가 목젖에 닿을 것처럼 혀를 밀어 넣었다.
시준은 손끝으로 계속해서 등을 매만졌다. 근육이 움직이는 것까지 섬세하게 느껴질 정도로 탄탄한 몸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너무 부드러워서 찢어질 것처럼 연약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런 걸 좆같다고 해야 하나. 순간 든 생각에 시준의 입에서 웃음이 흘러나올 뻔했지만 금세 상대방에게 먹혀 사라지고 말았다.
넓은 몸에 꼼짝도 못 하고 안긴다는 것은, 불편함과 함께 약간의 안락함을 주기도 했다. 시준은 똑같이 자신의 등을 쓸어내리는 손길에 천천히 눈을 감았다.
얕은 잠에 들었던 것 같다. 몸은 아직 잠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인지 눈을 뜨기가 싫었다. 시준은 정신만 흐릿하게 깨어 있는 상태로 누군가에게 꽉 끌어안겨 있었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시준의 등을 토닥이며 낮은 목소리로 허밍하듯 콧노래를 불렀다. 마치 자장가 같다고 생각하던 중에 노랫소리가 뚝 끊겼다. 동시에 시준의 목덜미를 무언가가 간지럽혔다. 가냘프게 흐트러지는 느낌은 분명 머리카락이었다. 머리카락에 이어 따듯한 살결과 말캉한 감촉이 이어진 걸 보아 아마도 뺨과 입술도 같이 비벼진 것 같았다.
끊겼던 콧노래가 다시 이어졌다. 커다란 손이 계속해서 시준의 등을 토닥였다. 시준은 자신이 아기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시준은 하루 동안 아주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화장실을 갈 때를 제외하곤 침대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았다. 지하가 시준의 곁에 붙어서 내내 수발 아닌 수발을 들었다. 시준이 침대 위에서도 불편함 없이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옆에서 돕고, 화장실에 가고 싶을 때면 시준을 부축해 일으켰다. 심심하다고 하면 영화를 틀어주기도 했다.
그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런 지하를 시준은 대놓고 쳐다보았다. 침대에서 이거 해라, 저거 해라, 명령 같은 말을 해도 지하는 오히려 웃으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시준이 그의 침대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반기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지하는 시준이 일부러 말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이 만든 음식을 식사로 가져오기도 했다. 시준은 입에 넣자마자 그가 만든 요리가 아님을 알았지만 굳이 말로 꺼내 확인하지는 않았다. 요리할 시간도 아까울 만큼 곁에 있고 싶은 건가, 대충 추측할 뿐이었다.
미묘하고도 애매한 변화들. 그런 것들을 느낄 때마다 시준은 가슴께가 답답해져 왔다. 그리고 애써 무시했다. 오늘로 이러한 감정들도 모두 끝이었다. 오늘만큼은 하지하가 원하는 대로 해주리라고 마음먹었던 것처럼 시준은 그가 쑥스럽게 얼굴을 붉히며 웃어도 웃지 말란 소리를 하지 않았다.
별다를 것 없는 하루였다. 몸은 좀 불편했지만 평소처럼 스킨십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둘이 침대 위에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만 보낸 그런 하루였다. 그랬는데도 시준은 시간이 무척 빨리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에 잠시 지유가 시준을 찾았으나 지하가 핑계를 만들어 방에 들어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시준의 가족들 역시 딱히 연락이 없었다. 이곳에 있는 줄 다들 아는 것 같았다. 결국 방에는 오늘도 둘뿐이었다. 누구의 방해 없이 둘만 있을 수 있는 곳. 시준은 이상한 만족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다시 한번 널따란 품에 안겨 잠을 청하면서도 내일 할 일을 잊지 않았다.
* * *
다음 날이 되자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먼저 일어난 시준은 기지개를 켜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뒤를 흘긋 보니 지하가 모로 누운 채로 잠들어 있었다. 시준이 일어난 것도 모르고 깊은 잠에 빠진 것 같았다. 그에 괜히 기분이 나빠져 인상을 찌푸리던 시준은 휙 소리가 나게 몸을 돌려 욕실로 향했다. 어제 제대로 씻지 못했기에 샤워라도 할 생각이었다. 걸을 때마다 아래 꼬리뼈 쪽이 징, 하고 울렸지만 못 걸을 정도는 아니었다.
뜨거운 물과 찬물에 번갈아가며 몸을 씻던 시준은 샤워실 문이 갑자기 벌컥 하고 열리는 것에 깜짝 놀라 옆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시준보다 더 놀란 것 같은 얼굴을 한 지하가 서 있었다.
“뭐야, 놀랐잖아.”
“아, 미, 미, 미안.”
“알면 나가.”
시준은 일부러 퉁명스레 대꾸하며 다시 샤워기 물을 틀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싶었지만 욕조에 물을 받기가 귀찮았다. 시준은 위에서 떨어지는 물에 얼굴을 씻는 동안 그런 생각을 하며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을 무시했으나, 지하는 목소리를 냄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 일어나니까, 준이, 준이가 여, 옆에 없어서….”
“누가 늦잠 자래?”
“미, 미안….”
주말 아침 8시는 그리 늦은 시간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시준에게 사과했다. 그 사과에 시준은 울컥 짜증이 올라왔다. 미안하단 소리 좀 그만하라며 화를 내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시준이 생각하기에도 영 변덕스러웠기 때문이다.
“모, 몸은….”
“괜찮아.”
“내, 내가, 도, 도와, 주….”
“필요 없어. 너 안 나가?”
“아, 나, 나갈, 나갈게.”
차가워진 말투에 안절부절못하는 몸짓이 보지 않아도 느껴졌다. 시준은 고개를 돌려 샤워실 유리벽 너머를 쳐다보았다. 문밖으로 나간 지하가 수건을 든 채로 정신없이 욕실 이곳저곳을 오가고 있었다. 손가락을 깨물고 싶은지 다른 한 손이 움찔거리며 턱밑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갔다.
다 씻은 시준이 샤워실 밖으로 나가자 지하가 뛰듯이 걸어와 시준의 몸을 커다란 수건으로 감쌌다.
“추, 춥지.”
“됐어.”
“다, 닦아, 주, 줄게.”
“됐다니까!”
시준이 짜증 내는 목소리로 지하의 손을 쳐냈다. 그리고 몸에 둘러진 수건을 바닥으로 던지고 직접 가지고 온 수건으로 몸에 남은 물기를 닦으며 말했다.
“너 이제 그만해.”
“어…어?”
멍청하게 되묻는 말을 무시하고 욕실 밖으로 나오자 문가에 가지런히 개켜진 옷가지가 보였다. 시준은 잠시 멈칫하여 옷을 바라보았다. 이내 옷을 주울 생각으로 허리를 숙이자 윽, 하고 저도 모르게 아픈 소리가 나왔다. 그리고 그 소리를 들었는지 급하게 뒤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불쑥하고 튀어나온 손이 시준이 들려던 옷을 대신 주워들고는 말했다.
“이, 입, 입혀줄게, 준아. 저, 저기 앉으면, 내, 내가.”
시준의 눈이 옷을 쥐고 있는 지하의 손을 향했다. 눈앞의 두 손은 이미 덜덜 떨리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자식은 눈치가 빨랐다.
“그만하라고.”
“…….”
“나 벗기고 만지는 거 그만해. 나도 이제 안 할 거야.”
시준은 그렇게 말하고 굳어버린 지하의 손에서 옷을 빼앗아왔다. 그리고 일부러 뒤로 몸을 돌려 옷을 입었다.
“그냥 네가 말했던 것처럼 잠깐 미쳤었다고 생각해.”
“…….”
“손장난은 이걸로….”
생각해 두었던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다. 시준은 좀 더 심한 말을 해볼까 했으나 내키지 않아 그만두었다. 이 정도면 알아들었겠지. 그런 생각으로 옷을 다 입은 후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지하에게 쐐기를 박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단단히 일러두려 했다. 너와 내가 한 것은 그저 장난이었을 뿐이라고.
그러나 시준은 상대방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놀라서 그에게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 지하의 얼굴 전체가 눈물범벅이었다.
“왜 그래? 아파? 숨쉬기 힘들어?”
“아, 으….”
“발작 올 것 같아? 어지러워?”
이건 예상하지 못했다. 시준은 입술을 깨물며 허리를 숙이는 지하를 부축해 근처에 있는 소파로 향했다.
한동안 얌전해서 잠깐 잊었더니. 작년까지만 해도 하지하는 발작 때문에 약을 먹었었다.
겨우 소파에 지하를 앉히고 시준이 약을 찾기 위해 물었다.
“하지하, 비상약 어딨어?”
그러나 지하는 고개를 숙인 채 시준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토하고 싶어? 토할래?”
시준을 잡지 않은 다른 손으로 입가를 막고 있기에 토가 하고 싶은 건가 싶어서 시준은 고개를 돌려 봉지를 찾았다.
지하가 발작을 일으킬 때는 꼭 구토를 동반했다. 어지러움과 구토, 그리고 심한 몸의 떨림 같은 것들. 지하는 그럴 때마다 고통스러워했고 이내 정신을 잃었다. 이번에도 그런 수순일 거라 생각하고 입을 막고 있는 지하의 손을 떼려던 시준은 갑자기 움직이는 손에 멈칫했다.
잡아챌 것처럼 다가오던 두 손은 막상 시준의 허리 가까이 닿으려 하자 눈에 띄게 느려졌다. 아연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던 시준은 허리를 끌어안긴 채로 앞으로 이끌리듯 걸어갔다. 그러자 지하가 시준의 배에 머리카락을 비비며 울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잘, 잘못, 잘못해, 했어.”
“…….”
“준아, 준아. 내가, 내가 잘못, 잘못했어.”
다시는 안 그럴게.
아프게 하지 않을게.
그러지 말아줘.
나한테 그러지 말아줘.
울면서 속삭이는 말에 시준은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 * *
지하는 두 시간을 내리 울었다.
“아, 좀! 떨어져봐!”
“시, 싫어.”
“옷에 코 다 묻었잖아!”
처음에는 시준도 매달려오는 지하를 어쩌지 못하고 내버려두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서럽게 우는 걸 보고 안 되겠다 싶어서 떨어트리려 했다. 그러나 아무리 말을 해도 듣지 않는 지하 때문에 시준은 소파도 아닌 그의 허벅지 위에 걸터앉을 수밖에 없었다. 다리가 아프다는 말에 지하가 슬며시 끌어당겨 앉힌 것이다. 지하는 시준의 허리에서 가슴팍으로 얼굴을 옮기고 훌쩍훌쩍 울어댔다.
계속되는 울음으로 가슴께가 축축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시준이 가슴 쪽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얼굴을 떼어내기 위해 두 손으로 그의 머리통을 잡자 지하가 목에 힘을 주어 버텼다. 두 시간 동안 이런 식으로 똑같은 짓거리를 반복하니 절로 힘이 빠졌다. 진심으로 싫었다면 걷어차서라도 떼어냈을 테지만 그럴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결국 시준은 머리통을 잡고 있던 손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쥐어 흐트러뜨렸다. 그리고 그 아무것도 아닌 손길에 지하의 울음이 점점 사그라들었다.
“그렇게 싫어?”
지하는 대답 없이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
“나는 그냥….”
대딸, 혹은 자위, 아니면 섹스.
시준은 그런 것들을 하지 말자고 말하기 위해 단어를 고르다가 이내 말을 바꿨다.
“예전처럼 지내자는 건데.”
“…….”
“그게 왜 싫어?”
“…어, 없던 일로….”
“내가 없던 일로 하자고 할까 봐?”
지하의 고개가 다시 끄덕여졌다. 시준은 생각에 잠겼다. 그 비슷하게 말하려고 하긴 했었다.
“왜?”
“어…어?”
“없던 일로 하자는 게 왜…. 야, 너 지금 얼굴 존나 더러워.”
시준의 물음이 의외였는지 지하는 고개까지 들고서 시준을 올려다보았다. 계속해서 말을 이어가려던 시준은 눈물콧물 범벅인 그의 얼굴을 보고 인상을 확 찌푸렸다. 생각했던 것보다 심하게 울었는지 아직도 눈에는 눈물방울이 맺혀 있었고 계속해서 코를 훌쩍였다. 얼굴을 보기 전까지는 그래도 제법 애절해 보이기까지 한 태도에 가슴 한쪽 구석이 이상하게 술렁거렸는데 지금은 그런 것도 없었다. 시준은 지하의 손이 느슨해진 틈을 타 잽싸게 일어나며 말했다.
“빨리 세수하고 와.”
“시, 싫….”
“싫다고 하기만 해. 당장 집 나갈 거야.”
“아, 아, 알, 알았어.”
“내가 입을 옷도 좀 가져오고. 이거 봐. 너 때문에 다 젖었잖아.”
“미, 미안….”
“얼른 안 씻어?”
“으, 응.”
운 이유가 발작이 아닌 걸 알았으니 더는 조심히 대할 필요가 없었다. 시준은 누가 봐도 일어나기 싫은 태도로 꾸역꾸역 움직이는 지하에게 빨리 다녀오라며 재촉했다. 지하는 욕실에 들어가면서도 계속해서 고개를 돌려 시준이 있는 쪽을 쳐다보았다. 비 맞은 똥강아지처럼 풀이 죽은 모습에 코웃음조차 나오질 않았다. 불쌍한 척이란 척은 다 해놓고서 저런다.
거기에 넘어간 내가 제일 병신 같았지만.
시준은 다시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저렇게까지 힘들어하는데 굳이 예전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저러다 진짜 다시 발작이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지하는 간신히 약을 끊었고 그것을 굉장히 뿌듯해했다. 시준에게 약 먹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했던 그가 이제는 약을 먹지 않는다고 먼저 자랑할 정도였다.
시준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고민해봤지만 이미 마음속 추는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준아, 해, 했어.”
마저 생각을 이어가기도 전에 지하가 욕실에서 나왔다. 1분도 채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시준은 지하 얼굴에 남은 물기를 확인하고 눈썹을 찌푸리다가 곧 한숨을 폭 내쉬었다.
“내 옷은?”
“아, 잠, 잠깐만.”
뛰듯이 걸어오던 그는 시준의 말에 멈칫하더니 방향을 바꿔 방 안에 있는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그리고 잠시 후 한 손에 티셔츠를 들고 이번에는 시준의 앞으로 뛰어서 왔다.
“여, 여기.”
시준은 지하가 건네주는 티셔츠를 옆자리에 두었다. 그리고 바로 갈아입기 위해 옷을 벗으려다 움직임을 멈췄다. 흘긋 위를 올려다보니 충혈된 눈으로 시준의 몸짓 하나하나를 시선으로 좇고 있는 지하가 보였다. 분명 울어서 벌겋게 된 것임에도 시준에게는 그 눈이 다르게 느껴졌다.
“야.”
“으, 응?”
“뒤돌아.”
“아…. 으, 응.”
시준이 부르는 것에 화들짝 놀라던 지하는 뒤를 돌라는 말에는 머뭇거리며 힘겹게 몸을 돌렸다.
예전이라니. 정말 돌아갈 수 있을까.
시준은 천천히 옷을 갈아입으며 생각했다. 지금 이 상황부터가 전과는 달랐다. 굳이 몸을 돌려 저를 보지 못하게 만든 것은 저 잡아먹을 것처럼 느껴지는 눈동자에 아래를 세울까 걱정이 되어서였다.
“여기 와서 앉아봐.”
옷을 다 갈아입은 시준이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탁탁 치며 지하를 부르자 그가 쏜살같이 달려와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다시 시준의 허리를 끌어안고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커다란 몸뚱어리를 구겨서 기필코 안고 마는 그의 몸짓에, 시준은 덜 닦은 물이 다시 옷을 적셔오는 것도 모르고 헛웃음 터트렸다.
“내, 내가, 잘, 잘못했어.”
“네가 뭘 잘못했는데?”
시준은 지하가 자꾸만 힘을 주어 밀어붙이는 통에 아예 소파에 누워버렸다. 지하는 그런 시준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위에 올라타 있는 거대한 몸이 무거웠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 지하의 자해 사실을 안 이후로 시준은 그에게 무겁다거나, 키가 너무 크다는 식의 비하하는 말을 일절 꺼내지 않았다.
“너, 넣어서. 준이 아, 아프게 해서.”
“흠.”
“미, 미안해.”
넣은 게 잘못이긴 했다. 아프다기보다 너무 좋아서 문제였지. 굳이 따지자면 시준이 먼저 넣은 것이 되었지만 지하는 그런 걸 신경 쓰지 않았다.
“왜 싫어?”
“으, 응?”
“없었던 일로 하는 게 왜 싫어?”
“…그, 그건.”
시준은 아까부터 궁금했던 걸 이제 대놓고 물어보았다. 사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본다면 충분히 이해가 되는 말이었다. 하지하가 자신에게 그동안 했던 일들을 없던 걸로 하고 다시 이전처럼 지내자고 하면, 시준은 그에게 주먹을 날릴지도 몰랐다.
“우리가….”
“…….”
사귀는 것도 아닌데.
아무렇지 않게 튀어나가려는 말을 시준이 간신히 멈춰 세웠다. 이건 마치 사귀고 싶다고 상대방에게 투정 부리는 것 같았다. 시준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이게 아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자마자 아무 생각 없이 나온 말에 시준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눈치챘다. 그리고 그걸 하지하가 알게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씨발.
시준은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애초에 누군가와 살을 맞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친구라고 해도. 시준은 억지로 다른 사람을 하지하 자리에 대입해 상상해봤다. 다른 남자와 키스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미, 미안. 무, 무겁지, 준아.”
그리고 언제 고개를 들었는지, 시준의 구겨진 표정을 보고 오해한 지하가 지레 놀라 시준에게서 떨어져 앉았다. 시준은 그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그는 이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좀 전에 본 시준의 험악한 얼굴에 순식간에 자신감이 사라진 것 같았다.
양손을 초조하게 맞잡으며 지하가 말했다. 억지로 쥐어짜낸 듯한 목소리는 하기 싫은 말을 하는 사람의 그것이었다.
“기억, 기억만…해, 해준다면.”
“…….”
“이, 잊지 말고… 그리고….”
“…….”
“다, 다른 건 안, 안 해도…나, 나랑….”
“너랑 뭐?”
“나, 나를….”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에 시준이 지하 쪽으로 몸을 가까이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그는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이며 더듬더듬 말을 이어갔다.
“안, 안아, 주면….”
“…….”
“하, 하루에, 하, 한 번이라도. 아, 아니면 이, 일주일에 하, 한 번.”
“…….”
“안, 안아줘, 준아.”
“…….”
“부, 부탁이야.”
그렇게만 해주면 이제 준이 만지지 않을게.
그 말을 끝으로 지하는 입을 다물었다.
아.
시준은 잊고 있던 사실을 하나 깨달았다. 그가 자신에게 늘 구걸하던 그것. 하지하는 지금 사랑을 구걸하고 있었다.
* * *
시준은 지하가 무슨 대답을 원하는지 알았지만 들려주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시준이 원하는 말을 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 결과로 시준은 일주일이 넘는 시간을 고통과 인내 속에서 보내야 했다. 이미 알고 있는 감각을 참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준은 하루에 한 번이 아닌, 몇 번이라도 안아주겠다는 말을 지하에게 해주었고 둘은 더 이상 서로를 만지지 않기로 타협을 보았다.
시준은 혹시 몰라서 그에게 공부 핑계를 대었다. 사실 공부가 꼭 핑계인 것만은 아니었다. 지하와 그렇고 그런 관계가 된 후로 시준의 공부시간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지하에게는 정해진 과외시간이 있었지만 시준은 그렇지 않았고, 이런 식으로 매일같이 침대에서 뒹구는 생활을 보낸다면 기말고사 결과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학교에서는 크게 달라질 것이 없었다. 단지 지하가 수업시간 중에 조는 일이 늘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서로의 노트에 낙서하듯 메모를 주고받는 일도 줄어들었다. 장난스럽게 적었던 내용들의 대부분이 야한 말들이었기 때문에 하지 않는 편이 좋긴 했으나 뭔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시준은 애써 그런 자신의 기분을 무시했다.
다시 단조로운 일상들이 반복되었다. 시준은 학교와 집, 혹은 학교와 지하의 집을 매일같이 오갔다. 주말이라고 예외는 없었다. 예전부터 시준이 혼자 외출을 하면 발작할 것처럼 구는 지하 때문에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게 습관이 된 것도 있었지만, 딱히 친구들과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일상 속에서도 변화는 있었다.
“…꼭 거기여야만 해?”
“으, 응.”
“안 불편해?”
“펴, 편해. 너, 너무 좋아.”
“…….”
평소처럼 지하와 같이 공부를 하기 위해 그의 방을 찾은 시준은 책상 밑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며칠 전부터 지하는 시준에게 과외 내용을 설명해준 뒤, 시준이 복습을 하기 위해 혼자 공부할 때면 이런 식으로 책상 밑으로 들어가 앉아 시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옆으로 기다란 책상 밑은 저 큰 덩치도 충분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지하는 시준이 앉은 의자 앞에 익숙한 듯 자리를 잡은 후, 몸을 구부려 벌려진 시준의 다리 사이에 끼워 넣었다.
처음 하지하가 안아달라며 책상 밑으로 기어 들어갈 때 얼마나 황당했던지.
시준은 당연히 포옹의 의미로 안아주겠다고 말한 것이었다. 원할 때마다 안아주겠다는 건 그런 뜻이었다. 그러나 지하는 그 말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시도 때도 없이 안겨 있고 싶어 했다.
“무, 문제 다, 다 풀면, 마, 말해줘.”
“…….”
그렇게 말한 지하는 의자 위에 머리를 올리더니 옆으로 벌려진 시준의 허벅지에 코를 묻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몇 초 지나지 않아 쌕쌕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들었다.
“…….”
며칠째 반복되는 지하의 기이한 행동에 시준은 할 말을 잃었다. 밀폐된 방 안에서 둘만 있게 된 상황에 분위기라도 타면 어쩌나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 그는 시준을 안고 잠만 잤다.
그래서 시준은 겨우 참을 수 있었다. 지하가 잠결에 코끝으로 허벅지를 문질러도, 뜨거운 숨을 내쉬며 바지 아래 있는 살을 간지럽혀서 바지 한가운데가 부풀어 올라도, 막상 그걸 알아봐야 할 상대방이 잠들어 있으니 곧바로 가라앉힐 수 있었다.
복수하는 건가.
처음에는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으나 그는 너무 곤히 잠들어 있었다. 비단 시준이 공부를 할 때뿐만이 아니었다. 지하가 요리를 하고, 그리고 밥을 먹은 뒤에도 그는 소파에 앉아서 게임을 하는 시준의 다리 사이에 또다시 기어 들어와 매일같이 허벅지에 얼굴을 기대고 잠이 들었다. 이쯤 되니 시준은 모를 수가 없었다. 지하가 밤잠을 설친다는 것을.
알아달라고 시위하는 것도 아니고, 지하는 도통 숨기는 법을 몰랐다. 일부러 이러는 건가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준이 달라질 필요는 없었다. 시준은 더 이상 그의 집에서 잠들지 않았다.
벌어진 다리가 불편하긴 해도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기에 시준은 지하의 숨소리를 백색 소음 삼아 집중해서 문제를 풀었다. 약 30분 동안 문제를 푼 시준이 허벅지를 살짝 흔들어 지하를 깨웠다. 너무 살짝 흔들었는지 깰 기미가 안 보여서 이번에는 다리를 더 벌려 허벅지에 기대고 있던 지하의 얼굴이 의자 위로 떨어지게 했다.
“야! 일어나.”
“아…으, 응.”
그러자 졸음기 가득한 얼굴과 목소리로 지하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그 잠깐 사이에 깊이 잠들었던 모양인지 오늘따라 유독 일어나는 것이 힘들어 보였다. 시준은 지하가 느릿느릿 책상 밑에서 빠져나와 다시 그의 의자에 앉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지하의 눈 밑에는 어느새 짙은 다크서클이 내려앉아 있었다. 시준은 그를 무시하고 문제집을 가리켰다.
“나 이거 틀렸어.”
“아, 이, 이거는…자, 잠깐만.”
문제를 확인하는 건가 싶어서 기다리던 시준은 한참이 지나도 상대방으로부터 설명이 없자 고개를 들어 옆을 보았다. 그리고 거기엔 고개를 좌우로 헤드뱅잉하며 졸고 있는 지하가 있었다.
시준은 또다시 할 말을 잃고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가지가지 한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고, 그 뒤를 이어 아주 조금 안쓰러운 감정이 밀려왔다. 제대로 된 숙면을 취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그의 몸이 이제 슬슬 한계에 몰리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시준은 더는 안 되겠다 싶어서 지하를 흔들어 깨웠다. 잠을 자고 가진 않아도 잠들 때까지 옆에 있어주는 건 해줘도 될 것 같았다. 오늘치 공부는 포기해야 했지만 다음 날 지하에게 배로 받아내면 되었다.
“하지하!”
“어?”
이름을 크게 부르니 지하가 깜짝 놀라며 눈을 떴다. 그리고 곧장 미안하다는 말을 내뱉는 그를 막으며 시준이 먼저 말했다.
“너 그냥 자라.”
“아, 아냐! 내, 내가 서, 설명….”
“됐고, 빨리 침대에 가서 누워.”
“아, 아, 아니, 아니야. 미, 미안. 이, 이 무, 문제부터, 내, 내가….”
“됐다니까! 안아줄 테니까 잠이나 자라고.”
“…저, 정말?”
그냥 자라고 할 때는 안절부절못하며 미안하다고 사과하던 지하는 시준이 안아준다고 하는 말에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리고 시준이 대답하기도 전에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곧바로 침대로 달려가 누우며 시준을 재촉했다.
“빠, 빨리 와, 준아.”
“…….”
시준은 잠시 의심의 눈초리로 지하를 쳐다보다가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렇게 기대에 찬 목소리로 저를 부르니 뭐라고 할 마음도 사라졌다.
천천히 침대로 다가오는 시준을 지하가 올려다보았다.
“여, 옆에 누, 누울 거지? 나 안아, 안아준, 준다고 해, 했잖아.”
“…너 잠들 때까지만이야.”
“으, 응.”
바보처럼 헤실헤실 웃으며 대답한 그는 시준이 눕기 위해 침대에 앉자마자 덥석 허리부터 잡아왔다.
“가만히…! 가만히 좀 있어.”
시준은 갑작스러운 손길에 깜짝 놀라 성질대로 울컥 내지르려다가, 올라간 목소리에 다시 비굴한 표정을 지으려는 지하를 발견하고 다시 침착하게 그를 다독였다.
지하는 시준의 눈치를 보며 옆으로 따라 눕고는 슬쩍슬쩍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오, 옷 갈아 이, 입을 걸 그, 그랬다. 펴, 편한 옷 마, 많은데.”
“됐어. 난 너 자면 갈 거야.”
“으, 응.”
누우면 아까처럼 머리를 대자마자 잠들거라는 시준의 예상과 달리 지하는 조잘조잘 잘도 떠들어댔다.
“교, 교복 부, 불편할 텐데.”
“너도 교복이잖아.”
“나, 난 괜찮아.”
“나도 상관없어.”
“그, 그래도.”
“됐다니까.”
“으, 응. 준아…나, 나….”
“왜?”
“파, 팔베개 해, 해도, 돼?”
“…….”
그 말에 시준은 이제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되어 아래를 흘긋 쳐다보고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지하가 시준의 팔을 자신의 목 뒤로 두르며 모로 누워 품에 안겨왔다.
“자, 잘 자, 준아.”
안 잘 거라니까. 시준은 속으로만 대답했다.
그리고 그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다급한 목소리에 시준이 눈을 떴을 땐 이미 아침이었다.
“준아, 준아! 이, 일어나!”
“…뭐야?”
“느, 늦었어.”
시준은 눈꺼풀을 느리게 깜박거렸다. 아직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지하의 뻗친 뒷머리가 웃기다는 생각이 들 때쯤 창문으로 들어오는 환한 햇살이 느껴졌다.
“지금… 아침이야?”
“으, 응. 하, 학교 가, 가야지.”
그 말에 몸이 저절로 벌떡 일어나졌다. 분명 어제 잠들 때까지만 해도 창밖은 어두컴컴했고, 또 저녁도 먹기 전이었다. 지하에게 몇 시냐고 물어보니 8시가 넘었다는 대답이 들려왔다. 12시간이 넘도록 꼬박 잠만 잤다는 사실이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시준은 놀랄 틈도 없이 학교에 갈 준비를 하기 위해 급하게 준비해야 했다. 9시까지 학교에 도착하려면 시간이 빠듯했다. 그렇다고 씻는 걸 포기할 순 없었다. 어제 교복을 입은 채 그대로 잠들어서 이대로 씻지도 않고 학교에 가기에는 좀 많이 찝찝했다.
시준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지하에게 먼저 씻는다고 말하곤 서둘러 욕실로 향했다. 옷은 다시 입어야 할지도 몰라서 다 벗은 후에 욕실 선반에 잘 개켜두었다. 그리고 바로 샤워실로 들어가려는 찰나, 욕실 문이 열리며 지하가 안으로 들어왔다.
“나, 나도, 씨, 씻으려고.”
“…….”
“느, 늦어서… 다, 다른 방은 머, 멀어.”
그렇게 말하는 지하는 이미 알몸이었다.
그는 옆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는데 일부러 시준을 보지 않으려 하는 것 같았다. 쑥스러운 듯 뒷머리를 만지작거리는 손짓이 아니어도, 그의 빨개진 볼과 귓바퀴를 통해 대강 이유를 짐작한 시준은 그러라고 대답하며 샤워실로 들어갔다.
그러나 시준이 그의 알몸을 보자마자 시선을 아래로 내리지 않기 위해 노력한 것이 무색하게도, 곧바로 지하가 뒤이어 샤워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네가 여길 왜 와?”
이제 막 샤워기 물을 틀고 씻으려던 시준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맞은편에 있는 지하에게 물었다. 욕실 안은 샤워실 말고도 욕조가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나, 나도, 여, 여기서, 씨, 씻으려고….”
시준은 눈을 가늘게 뜨고 지하를 올려다보았다. 이것 역시 일부러 그러는 것임이 틀림없었다.
그가 들어오니 넓어 보였던 샤워실이 순식간에 작아진 느낌이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서로의 몸이 맞닿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내가 나가겠다고 말하려 했지만 시준은 그 좁은 틈바구니를 뚫고 나갈 자신이 없었다. 그에게 몸이 닿는 순간 바로 발기해버릴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시준은 다시 한번 그러라고 말하며 샤워기 물을 틀었다. 시준은 최대한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 애쓰며 몸을 씻었다.
시준이 양치를 하면 그도 따라서 이를 닦았고, 시준이 세수를 하면 그 역시 시준의 옆으로 끼어들어와 같이 세수를 했다. 머리를 감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번갈아 가면서 할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발기하더라도 밖으로 나갈 거라고 후회했을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시준은 샤워볼로 몸에 거품을 묻히며 샤워기 아래에 서서 몸을 씻어내리는 지하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가느다란 실선 같은 흉터가 촘촘히 박혀 있는 종아리와 허벅지를 지나, 넓은 어깨와 그에 비해 조금은 얇은 듯한 허리를 시선으로 훑었다. 완벽한 역삼각형 몸이었다. 그리고 어느 한곳에 눈이 향함과 동시에 시준이 움직임을 멈췄다. 엉덩이였다.
짜증 나.
시준은 갑자기 몰아치듯 자신을 휘감는 욕구보다도 그것을 참아야 한다는 사실이 더 불쾌했다. 만지고 싶고, 주무르고 싶었다. 이미 그 감촉을 알고 있는 시준은 눈앞에 있는 엉덩이를 노려보았다. 어쩌면 지하에게 같이 씻어도 된다고 허락했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일지도 몰랐다.
시준은 들고 있던 샤워볼을 바닥으로 집어던졌다. 그 소리에 깜짝 놀란 지하가 뒤를 돌아보았고 시준은 그대로 그의 목덜미를 잡아채어 아래로 끌어내렸다. 동그랗게 커진 눈동자가 바로 코앞에 있었다.
모르는 척은. 그렇게 말하며 비웃어주고 싶었으나 마음과 다르게 몸은 허겁지겁 상대방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시준은 입을 벌려 집어삼킬 듯 키스했다. 이번에도 상대방의 반응은 알기 쉬웠다. 지하는 곧바로 마주한 입술을 혀로 핥으며 시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 * *
키스에 뒤이은 행위를 마치고 욕실에서 나왔을 땐 이미 많은 시간이 흐른 후였다. 시준은 기진맥진한 상태로 지하에게 아기처럼 안겨서 침대로 옮겨졌다.
너무 오랜만에 한 것도 문제였고, 샤워볼에 있었던 거품도 문제였다. 몸 전체가 거품이 묻은 미끈미끈한 상태인 데다 지하가 익숙한 듯 야릇하게 쓸어내리니 시준의 성기가 꼿꼿하게 세워졌다. 그리고 그건 상대방 역시 마찬가지였다. 둘은 서로의 것을 만져주는 대신 하체를 맞대고 비벼댔다. 그것만으로도 두 번이나 싸버렸다.
시준은 침대에 눕혀지면서도 위에서 쏟아져 내리는 키스 세례에 얼굴을 피하며 말했다.
“학교는?”
“가, 가지 말자.”
“…그럼 빨리 말하고 와.”
그 말에 지하가 재빠르게 튀어 올라 침대 옆 테이블에 있는 휴대폰을 손에 쥐고 문으로 향하는 것을 시준이 기겁하며 말렸다.
“옷! 너 옷!”
너무 놀라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지하는 여전히 알몸이었던 것이다. 미안, 하고 작게 사과한 그는 드레스룸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와서는 바로 문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몇 분 지나지도 않아 다시 방 안으로 돌아와 시준이 있는 침대로 뛰듯이 걸어왔다.
“뭐라고 얘기… 읍!”
무슨 말로 결석할 거란 이야기를 했는지 물으려던 시준은 또다시 다가오는 입술에 결국 입을 벌려 혀를 내주고 말았다.
지하는 키스를 하는 동안 침대 위로 올라와 욕실에서처럼 몸을 붙여왔다. 그러다가 그새 답답해졌는지 잠시 입술을 떼고서는 입고 있던 옷도 급하게 벗어버리곤 시준에게 달라붙었다. 시준은 말릴 생각도 들지 않았다. 2주면 꽤 오래 참은 것도 같다는 생각을 하며 자신의 위를 차지한 상대방에게 여느 때처럼 다리 사이를 내주었다.
살과 살이 야한 소리를 내며 부딪치는 동안 시준은 계속해서 소리만 질렀다. 지하가 위에 올라타 허리를 움직여 뭉개듯 서로의 것을 맞대고 문질렀을 뿐인데 마치 안에 넣고 움직이는 삽입 섹스를 하는 것 같았다. 정신없이 키스를 하고, 몸을 만지고. 지하는 어떻게든 닿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처럼 굴었다. 온몸으로 느껴지는 감정에 시준은 저도 모르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누가 듣진 않았겠지?”
“으, 응. 누, 누나랑 아빠는 추, 출근했고, 아, 아저씨랑 아줌마는 1층부터 처, 청소하셔.”
“학교에는 뭐라고 했어?”
“아프, 아프다고….”
“네가?”
“으, 응. 나, 나 아, 아프다고. 저, 전화는 아, 아저씨가.”
“비서 아저씨?”
“으, 응.”
시준은 상대방의 팔을 베고 누워 그 품에 폭 안겨 궁금했던 걸 물었다. 어제는 내가 팔베개를 해줬으니 오늘은 네가 하라는 시준의 말에 지하는 기뻐하며 팔을 내밀었다. 모로 누운 지하는 시준에게 한쪽 팔은 팔베개를 해주고, 다른 한쪽 팔로는 시준의 등 뒤를 감싸 안아 두 사람의 몸이 더 잘 붙을 수 있도록 했다. 다리 역시 얽혀 있었다.
어제 잠을 푹 자서 그런지 연이은 사정으로 몸은 나른했어도 졸리진 않았다. 시준은 그냥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누워 있고 싶기도 하고, 동시에 미뤄뒀던 문제들을 꺼내어 확인하고 싶기도 했다. 누가 보아도 친구로 여길 수 없는 관계. 이전에도 그다지 친구라고 부를 만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지금은 더 그랬다.
시준은 이 관계에 이름을 붙이고 싶었다. 짧은 경험으로 비추어 보아 애매모호한 상태로 있어봤자 혼란만 더해질 뿐이었고, 그건 시준이 원하는 게 아니었다. 시준은 지하의 가슴팍에 붙이고 있던 이마를 떼어내고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거기엔 그대로 두면 하루 종일 한 사람만 보고 있을 것 같은 하지하가 있었다.
시준은 아무렇지 않게, 마치 밥은 먹었냐는 안부인사를 건네는 사람처럼 물었다.
“너 나 좋아해?”
“으, 응.”
시준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대답하는 지하의 얼굴에 왜 그런 당연한 걸 묻느냐는 표정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 나는 준이 매, 매일 조, 좋아해.”
“…….”
“계, 계속 조, 좋아했는데.”
그렇게 말한 지하는 고개를 숙여 저를 올려다보는 시준의 이마에 살포시 입을 맞췄다. 이마에 닿는 보드라운 감촉에 시준은 잠시 눈을 감았다.
“지, 지금도…마, 많이 좋아해.”
“…그걸 왜 이제 말해?”
입술이 떨어지고 이마에 다른 것이 와닿았다. 지하는 자신의 볼을 시준의 이마에 비비며 정말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굴고 있었다.
시준은 할 말이 없어져서 물었다. 좋아하냐고 묻는 말에 너무나 쉽게 그렇다는 대답이 나올 줄 몰랐기에, 시준이 할 수 있는 말이라곤 왜 이제서야 말하냐는, 자신이 듣기에도 조금 어이없는 물음뿐이었다.
“마, 말, 했는데.”
“네가 언제?”
그리고 들려온 대답은 시준이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예, 예전에.”
“예전에 언제?”
“며, 몇 년 전에….”
시준은 인상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겨봤으나 도통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마, 말했는데, 시, 싫어하는 것 같아서….”
“…….”
“그, 그 후로 마, 말 아, 안 한 거야.”
“…그냥 친구로 좋아한다고 한 거 아니야?”
아무리 기억을 뒤적여 봐도 그런 적은 없었다. 시준은 아무래도 자신이 흘려들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몇 년 전이라면 중학교 때였을 테고, 그때 시준은 지하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었다. 그걸 그도 모르지 않았을 테지만 시준은 일부러 떠보듯 다시 한번 물었다.
“…그, 그렇게 새, 생각했을 수도 이, 있겠다.”
“…….”
“나, 나는, 여, 옆에 있고, 시, 싶어. 준이, 준이 겨, 곁에.”
“말하는 거랑 행동하는 게 반대인데.”
“어, 어?”
가만히 듣고 있던 시준은 그저 곁에만 있고 싶다는 그의 말에 실소가 나오려는 걸 막고 대꾸했다.
“너 싫다면서 울었잖아.”
“아, 그, 그건….”
“없던 일로 하기 싫다면서 나한테 매달리고.”
“그, 그게….”
“그냥 예전으로 돌아가자는 건데도 잘못했다고 빌었잖아.”
“…으, 응.”
우물쭈물 맞다고 대답한 지하는 시준의 정수리에 얼굴을 묻고는 작은 목소리로 그래서 지금이 더 좋다고 덧붙였다. 시준은 조용히 지금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해보았다. 발단은 자신의 도발이었지만 과정이야 어찌 됐든 결말은 둘이서 붙어먹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의 대부분을 차지한 건, 시준이 생각하기에 지하였다.
“가만 보면 넌 몸부터 들이대더라.”
“내, 내가?”
“내 거 만지기도 전에 입으로 물었잖아.”
“그, 그….”
지하는 시준의 말에 부정하지 않았다. 대신 뭐가 부끄러운지 몸을 움츠렸다. 덕분에 그의 품에 있던 시준의 몸만 더 꽉 끌어안겨졌다. 시준은 절로 한숨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결국 자신이 먼저 이런 이야기까지 꺼내야 했다. 지금 말하는 걸로 보아 지하는 시준이 듣고 싶은 말은 생각도 못 하는 것 같았다.
시준은 손을 내려 아까부터 계속 배를 쿡쿡 찌르며 불편하게 만드는 딱딱한 것을 손으로 쥐어잡았다. 모른 척하고 있었음에도 지하의 것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에도 무럭무럭 커져서 어느새 질척한 액체를 흘리고 있었다.
시준이 성기를 잡아채자 헉, 하며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그를 올려다보며 기둥부터 고환까지 천천히 위아래로 쓸어내렸다.
“순서가 잘못됐어.”
“읏, 준아….”
“이런 거 하려면….”
“자, 잠깐… 아.”
“뭐부터 해야 하는지 알아?”
“으…모, 몰라.”
모른다는 말에 시준은 움직임을 멈추고 손안에 있는 성기를 콱 하고 힘을 주어 움켜쥐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이미 질척한 액을 흘리고 있는 성기의 매끈한 기둥을 따라 간지럽히듯 쓰다듬다가, 귀두 부분을 엄지로 파헤치듯 문질렀다. 그러자 지하의 허리가 들썩이며 앞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아!”
“아직도 모르겠어?”
“흐으, 모르, 모르겠….”
이미 커질 대로 커진 성기는 시준이 손에서 놔주자 둘의 배에 계속 부딪치며 꺼덕였다. 시준은 다시 기둥 부분을 손안에 쥐고 전체를 훑어 내리다가 피스톤질을 하는 것처럼 손을 빠르게 움직였다.
“사귀자고 먼저 말해야지, 멍청아.”
“읏!”
“말 안 해?”
“잠, 잠깐, 준아…아!”
“왜. 사귀는 건 싫어? 그런 거야?”
“아냐, 아냐. 싫…. 윽!”
시준의 손길에도 힘겹게 말을 이어가던 지하는 결국 중간에 몸을 떨며 사정했다. 시준이 정액이 나오는 귀두 쪽 구멍을 손가락으로 계속 쑤시자 지하가 힘을 주어 품에 있는 시준을 끌어안았다.
긴 사정이 끝나고 시준은 손바닥에 찐덕하게 묻은 정액을 지하의 것에 닦아내듯 문질렀다. 그 손짓에 성기가 다시 부풀어 올랐다.
“흐으….”
점점 더 커지는 걸 구경하던 시준은 흐느끼는 소리에 시선을 위로 올렸다. 지하는 한 팔로 눈을 가린 채 울고 있었다.
“뭐야? 왜 울어?”
울 정도로 기분이 좋았나?
시준은 팔 아래로 흐르는 눈물을 보고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나는, 나는… 준이가, 준이가 싫어 하, 할 것 같아서….”
“뭐?”
“마, 말하면, 도, 도망갈 것 같, 같아서….”
시준은 더듬거리며 이어지는 말에 잠시 멈칫하다가, 두 눈을 가리고 있는 지하의 팔을 한 손으로 잡고 밀어내며 아예 그의 위로 올라탔다.
“나, 나는…남, 남자고, 자, 작지도 않고….”
“…….”
“귀, 귀엽지도 않고…지, 징그럽고….”
“…….”
“그, 그래도 조, 좋아서….”
시준은 울면서 횡설수설하는 지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결국 좋아한다고 말은 했어도 사귀자고 할 용기는 없었다는 뜻이다. 이 멍청이는 사랑을 구걸하고 있었지만 그 사랑을 받을 거란 기대는 하고 있지 않았다.
시준 역시 그가 바라는 사랑을 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넌 내가 다른 사람 좋아해도 그렇게 말할 거야?”
아예 지하의 두 손목을 잡고 시준이 물었다. 저렇게 서러운 눈을 하고 울고 있어도 시준은 속지 않았다. 하지하는 본인이 원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가지게 놔두는 새끼가 아니었다.
“준이, 준이가 다, 다른 사람, 조, 좋아할 일은 어, 없어.”
“…왜?”
“그, 그럴 일은 어, 없어.”
그러나 들려온 대답은 또다시 시준의 예상을 벗어났다. 시준은 오묘한 눈빛으로 지하를 내려다보았다.
“…아닌데.”
“어, 없어.”
“나도 좋아하는 사람 정도는 있는데.”
“가, 가족이겠지.”
단호한 어투로 말하고 있지만 지하는 중간중간 울음 섞인 목소리로 끅끅거렸다.
“준이는, 준이밖에, 모르, 모르잖아.”
“…….”
“그, 그러니까, 괘, 괜찮아.”
욕하는 건가? 저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라고?
괜찮다고 하는 지하는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시선을 이리저리 피하며 시준과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중이기도 했다.
그러니 그 말에 괜한 심술이 돋은 건 순전히 상대방 탓이었다.
“맞아. 그랬었어. 그런데 이젠 아니거든.”
“…….”
“나만큼은 아니더라도, 그래도.”
누가 좀 좋아지려는 것 같아.
시준은 웃으며 말했다.
진심이 담겨 있는 말이었다. 사실이기도 했고. 다만 상대방이 누구인지 말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지하가 바로 알아채주길 원한 건 아니었다. 시준이 바란 건 잠시나마 오해를 해주어 그 속내를 드러내주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순식간에 표정을 지울 줄은 몰랐지.
눈치가 빠른 하지하는 시준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 그거 하나만 눈치챈 듯했다.
좌우로 굴러다니던 눈동자가 시준에게 고정되었다. 아무런 감정이 떠오르지 않은 인형 같은 저 얼굴은, 시준이 딱 한 번 봤던 그 얼굴이었다. 지하가 병원에 입원하고, 그 혼자 병실에 남겨졌을 때. 그는 저런 표정을 지었다. 유리알 같은 눈동자를 좀 더 자세히 관찰하고 싶었던 시준은 갑자기 휙 하고 돌려지는 몸에 놀라, 소리도 못 내고 눈만 크게 떴다.
어느새 둘의 자세가 바뀌었다. 시준의 위에 올라탄 지하가 두 손을 맞잡고 침대 위로 내리눌렀다. 시준은 손가락끼리 엮인 손을 힐끔 쳐다보았다.
“누, 누, 누구야?”
“…….”
“마, 마, 말해. 누, 누, 누구야?”
없애야 돼. 죽일 거야.
딱딱하게 굳은 얼굴에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짓씹으며 정신없이 중얼거리는 지하는 그냥 봐도 미친 사람이었다. 그러나 저런 살벌한 얼굴로, 그는 더듬더듬 말하고 있었다. 시준은 그 모습에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 내 웃어버렸다. 어눌한 말투가 그 내용과 어울리지 않게 귀여웠다. 지하는 평소보다 더 심하게 말을 더듬고 있었다. 마치 어렸을 때처럼.
“진짜로 죽일 거야?”
“어…어.”
시준이 눈까지 접으며 웃자 그제야 지하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 전까지 초점이 없던 눈동자는 어느 순간 시준에게 멈춰 있었다. 힘이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은 지하의 손은 풀기도 쉬웠다. 시준은 누운 채로 두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고개 숙여봐.”
지하가 머뭇거리며 고개를 숙이자 시준은 그의 머리를 두 팔로 끌어안았다. 그리고 귓가에 비밀스럽게 속삭였다.
“너 자살하게?”
1, 2, 3.
시준은 속으로 숫자를 셌다.
정확히 3초 후, 지하가 벌떡 고개를 들어 올렸다.
“죽을 거냐고.”
멍한 표정으로 시준을 내려다보는 지하는 아직도 무슨 말을 들었는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결국 시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그의 두 볼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먼저 말을 꺼냈다.
“나랑 사귀자.”
“…….”
“싫어?”
지하는 시간이 멈춘 것처럼 굳어버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싫냐는 물음에는 재깍 아니라는 대답을 할 줄 알았는데 그런 것조차 없었다. 생각했던 반응이 나오질 않으니 시준은 괜히 초조해졌다.
믿지 못하는 것 같아서 다시 한 번 말해주려는 찰나, 시준의 얼굴 위로 후드득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거짓, 거짓말.”
시준은 지하가 어쩌면 울 수도 있겠다고 어렴풋이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소리 없이 조용히 우는 걸 상상해본 적은 없었다. 그가 흘린 눈물방울이 시준의 뺨 위로 번져갔다.
“꾸, 꿈….”
“꿈 아닌데.”
시준은 지하의 얼굴을 잡고 있던 손으로 그의 눈에 고인 눈물을 훔쳐주었다. 그리고 손을 더 위로 올려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사귀자니까.”
“…….”
“남자라서 못 사귀겠어?”
“…….”
“좋아만 하겠다 이거야?”
이제 그만 울음을 그치라는 의미로 눈물을 닦아주며 물어도, 지하는 여전히 굳어버린 것처럼 아무 말도 없었다.
“대답 안 하면 없던… 윽!”
말이 끝나기도 전에 커다란 몸이 시준을 위에서 덮쳐왔다.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 와중에 시준이 느낀 건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맨살의 따뜻함과 보드라운 감촉보다도, 맞닿은 가슴에서 쿵쿵 울리는 커다란 심장 소리였다.
이런 식으로 깊게 끌어안긴 적이 그동안 수없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시준은 오늘 처음으로 그의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만 좀 울어.”
“으… 흐….”
“대답.”
시준의 손이 지하의 뒷머리를 파고들었다. 그러자 귓가에 아주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좋아.
그 한 마디에 시준은 다시 소리 내어 웃었다.
* * *
지하는 내리 세 시간을 울었다.
“…….”
“준아…. 흑…. 준아….”
“그래. 나 여기 있으니까 옷 좀 내놔봐.”
“흐윽….”
시준은 발가벗은 몸으로 방 안에 있는 드레스룸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런 시준의 등 뒤로 하지하가 한 치의 틈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붙어 있었다.
“내 옷 어딨어?”
절대 떨어지지 않을 것 같은 지하를 보며 시준이 물었다. 알아서 입을 옷을 가져다 바칠 거라는 생각은 이미 포기한 상태였다. 가만히 침대에 누워 지하를 안고서 그가 울음을 그치길 기다렸건만, 울음은 도통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등을 토닥이고 쓰다듬어주어도 서럽게 우는 소리만 점점 더 커졌기에 시준은 안 되겠다 싶어서 지하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지하가 기겁을 하며 시준에게 달라붙었다. 그를 두고 어딘가로 가려는 줄 알았는지 가지 말라고 울면서 매달렸다. 시준은 그게 아니라며 한참 동안 그를 다독였다. 예전이라면 시준 역시 울컥 소리를 내지르고 그만 좀 울라며 짜증을 부렸겠지만 이제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잘 알았다. 그보다도 이제는 시준에게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사과해오는 지하가 보기 싫었다.
지하가 격해진 감정을 진정시키길 기다리는 데 꼬박 3시간이 걸렸다. 시준은 지하를 안아주며 그가 이름을 부를 때마다 대답해줘야 했다. 몇 번이나 시준의 이름을 부르고, 몇 번이나 같은 대답을 듣고 나서야 지하는 지금 이 상황이 현실이라는 것을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울음을 그친 것은 아니었다.
시준은 몇 주 전처럼 엉망이 된 지하의 얼굴을 보며 한숨을 집어삼켰다. 방금 전에 겨우 그를 달래 욕실에 데리고 가서 세수를 시키고 옷을 입기 위해 이곳에 온 참이었다.
“지하야, 우리 밥은 먹어야지. 벌써 점심이야.”
“흑, 자, 잠깐만.”
밥이라는 소리에 지하가 움직였다. 그는 아직도 울먹이는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벽에 있는 옷장으로 가더니 시준이 입을 옷가지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나 팬티도.”
“으, 응.”
“너 입을 것도 가져와.”
“으, 응.”
실내에서 입을 바지와 셔츠를 가져온 지하를 보며 시준이 말했다.
“입혀줘.”
“…어?”
“옷. 입혀달라고.”
입혀달라는 말에 놀란 얼굴을 하던 지하는 곧바로 알겠다고 말하고 시준의 발치에 쭈그려 앉아 팬티부터 입히기 시작했다.
“준아, 바, 발 좀.”
시준은 그의 말대로 한쪽 발을 번갈아 들어 팬티에 끼워 넣은 뒤, 차례로 바지까지 모두 입었다. 만세 포즈를 취하며 상의까지 입자 어린애가 된 느낌에 기분이 싱숭생숭했지만, 하지하가 웃고 있었다. 시준에게 옷을 입혀주는 사이 드디어 울음을 멈춘 것이다. 시준은 저도 모르게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다가 흠칫 놀라 몸을 굳혔다.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어색함을 애써 미뤄두던 시준은, 지하가 옷을 입기 시작하는 걸 보고 그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내가 입혀줄게.”
“어, 어….”
“자, 머리.”
시준의 말에 지하가 곧바로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내밀었다. 생각보다 잘 입혀지지 않아서 어쩌다 보니 꾸역꾸역 상의 안에 몸을 쑤셔 넣은 꼴이 되었다. 시준의 거친 손길 때문에 지하의 뒷머리는 아침에 일어났을 때처럼 뻗쳐버렸다. 그래도 지하는 뭐가 좋은지 헤실헤실 웃기만 했다. 조금 전까지 소리 내 울었던 사람이라는 건 그의 부은 눈만이 알려주고 있었다.
시준은 그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발꿈치를 살짝 들어 부은 눈에 입을 맞췄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지하가 놀라기도 전에 시준은 바로 입술을 떼고 그의 한쪽 팔을 잡아당겼다.
“가자.”
앞서 걸어가며 슬쩍 뒤를 돌아보자, 빨개진 얼굴을 한 지하가 다른 손으로 입을 막는 것이 보였다.
키스한 것도 아닌데.
시준은 혼자 피식 웃으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지하 학생 많이 아픈가 보네. 얼굴이 반쪽이 됐어. 죽 만들어줄까?”
“아, 아니에요. 괘, 괜찮아요.”
“잘 먹겠습니다.”
“그래요. 뭐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고. 지하 학생 방은 찬바람 들어가면 안 되니까 다음에 청소할게.”
“네, 네.”
일해주시는 아주머니가 밥을 차려주고 자리를 떠나자마자 지하가 시준의 맞은편에서 옆자리로 자리를 옮겼다.
둘은 식탁에 나란히 붙어 앉았다. 그리고 지하는 시준이 밥을 먹는 동안 시준의 볼에 쉴 새 없이 키스하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준아, 준아.”
“그래. 뽀뽀 그만하고, 밥부터 먹어.”
“준아….”
“응.”
“너무, 너무 좋아.”
국을 한입 떠먹고 옆을 보니 지하가 앉은 몸을 일으킬 것처럼 들썩거리고 있었다.
“왜 그래?”
“키, 키, 키스하고 싶어.”
“…….”
“우, 우리는, 사, 사귀는 사, 사이니까.”
“…밥부터 먹어.”
“으, 응.”
시준의 말에 뭐라도 먹나 싶었던 지하는 곧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배 안 고파?”
“배, 배, 배불러.”
준이 많이 먹어. 이것도 먹어.
의아해하는 시준의 앞으로 지하는 반찬 그릇을 잔뜩 밀어주었다. 시준은 그 광경을 새삼스럽게 지켜보았다. 처음에는 그가 요리한 음식이 아니어서 저렇게 깨작거리는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 듯했다. 시준이 생각하기에 지금 하지하는 예전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짓을 하고 있었다.
“나는, 나는… 준이가, 준이가 머, 먹는 것만 봐도 배, 배부르다.”
“…….”
“우리, 우리가 사, 사귀는 사이라서 그, 그런가 봐.”
하지하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지만.
시준은 그 사실이 못내 만족스러웠다.
“사, 사귀는 사, 사이인데, 우리는.”
“…그렇지.”
“소, 손, 자, 잡으면 아, 안 돼?”
“…….”
“나, 나랑 준이는 사, 사귀고 이, 있는데.”
“…나 밥 다 안 먹었어.”
“그, 그럼 바, 밥 다, 다 먹으면?”
“…잡아.”
지하는 이제 막 말문이 트인 아기처럼 시준이 밥을 먹는 내내 옆에서 조잘거렸다. 주로 둘이 사귀는 사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기 위해 시준에게 허락을 받는 것들이었지만, 시준은 전처럼 그를 무시하지 않았다.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