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어쩔 수 없죠. 상용화 진행하겠습니다.”
그로부터 두 달, 약속했던 마지막 실험이 끝나고 서인은 문제가 되었던 성분을 검출 해내지 못했다는 최종보고를 받았다. 결과를 예상하였어도 직접 듣게 되자 기분이 더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형, 괜찮으세요?”
서인이 전화를 신경질적으로 끊고 휴대전화를 집어 던지자 무명이 눈치를 살폈다. 하필 식사 중에 받은 전화라 입맛이 뚝 떨어진 서인은 수저를 내려놓고 자리를 피했다. 괜히 죄 없는 무명에게 화를 낼 거 같아서 아예 서재에 틀어박혀 버렸다.
“씨발….”
그는 의자에 앉아 약물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상용화를 결정했으니 이제는 이 약물이 완제품인데도 불안해서 숨이 가빴다. 회장의 압박과 기대가 아니었다면 진작에 세상에 내놓았을 텐데, 마음에 걸리는 부분을 해결하지 못한 제품이니 손에 쥐어도 웃을 수 없었다.
이론상으론 완벽하지만, 언제 어떤 부작용이 찾아올지 모르는 독약. 서인의 손에서 탄생한 약물이 그러했다.
“하아….”
사실 더 보류하고 싶어도 이제는 불가능했다. 끝까지 포기하지 못해 무슨 방법이 없을까 생각해보던 서인은 우선 상용화를 진행하되 혼자서 움직일 계획을 차근차근 세웠다.
“가까이 두고 볼 실험체가 있으면 좋을 텐데….”
그 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건 건강한 실험체였다. 연구소에서 쓰고 남은 놈은 같은 약물을 지속해서 투여한 데다가 보살핌을 받지 못해 더는 버틸 수 없는 상태였고 홍주원이 주는 실험체는 더 받으나 마나였다.
“형, 저 들어가도 돼요?”
종이에 계획들을 끼적이던 서인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방해하지 말고 기다리려고 소리치려던 그는 잠시 무명을 실험체로 사용하면 어떨까 고민했다. 몸이 건강하고 옆에 두고 관찰 가능한 실험체가 어쩌면 현재로선 무명 하나뿐일지도 몰랐다.
“…그래, 들어와.”
실험하려거든 건강 검진도 해야 하고 여러모로 신경 써야 할 게 많으니 어디까지나 고민 중이지 결론 내린 건 아니었다. 그러면서 그는 문을 열고 들어온 무명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으며 하나의 실험체로 평가했다.
“괜찮으세요? 약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거예요?”
“응, 좀.”
무명은 걱정돼 죽겠다는 얼굴로 서서 서인을 바라보았다. 분위기가 좋지 않으니 최대한 거슬리지 않으려 움직임을 최소화한 모습에 서인이 그를 잡아당겨 제 무릎에 앉혔다.
“속상해.”
“어떡해요….”
서인은 본인이 양심 없고 못된 놈임을 자각하고 있지만, 무명을 상대로 쉽사리 악행을 저지르지 못하는 편이었다. 속상하다는 말 한마디에 제가 더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니 실험체가 되어달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형도 몰라. 콱 죽어버릴까?”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그러니 서인은 그 말이 무명의 입에서 나오게끔 천천히 밑밥을 깔았다. 목숨을 두고 협박하자 무명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서인을 껴안았다.
“하지만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인데 어떡해? 실험할 사람이 필요한데, 아무도 형을 안 도와준대.”
“그럼, 제가, 제가 하면 되잖아요! 제가 할게요! 네, 네?”
“아니야, 사랑하는 너한테 그럴 수는 없지. 형이 죽는 한이 있어도.”
“할 수 있어요! 할 수 있단 말이에요!”
서인은 이런 식으로 구는 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것보다 몇 배는 더 나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중에 무슨 문제가 생겨도 책임을 전가할 수 있고 옅은 죄책감도 덜 수 있으니 뻔뻔하게 연기했다.
“정말 명이가 해줄 수 있어?”
“네! 그럼요! 당장 해요, 뭘 하면 되는 건데요!?”
“우선 밥부터 다 먹자.”
서인은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숨기고 무명을 일으켰다. 최대한 다정하게 대해준 뒤 마음껏 실험하면 사랑도 주고 업무적으로 이득도 볼 수 있으니 일거양득이었다.
그는 식탁으로 가 무명에게 직접 음식까지 먹여주고 양치질까지 해준 뒤 아주 자연스레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이상하리만큼 특별 대우를 받은 무명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서인에게 달라붙었다. 병원 분위기가 무섭긴 했지만, 서인이 천사처럼 다정해서 모두 잊어버릴 정도였다.
“무섭지 않았어?”
“네! 형이 같이 있어 줘서 괜찮았어요.”
병원에는 아기를 안은 남자가 여럿 보였다. 무명은 저도 곧 서인의 아기를 가질 수 있다는 생각에 배를 쓰다듬으며 배시시 웃었다. 임신도 그렇고 그의 실험체가 된 것도 그렇고 여러모로 서인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는 사실에 날아갈 듯 기분이 좋았다.
“하….”
하지만, 서인은 의사를 만나고 온 이후로 줄곧 표정이 좋지 못했다. 무슨 실수를 했을까 봐 입을 다물고 있던 무명은 그가 검사지를 꼼꼼히 살피다가 저를 흘끔 보더니 혀를 차자 잔뜩 긴장했다.
“명아.”
“네….”
실험체가 될 수 없다거나 아기를 낳지 못하면 버려진다고 생각한 무명은 서인의 손을 아플 정도로 세게 움켜쥐고는 고개를 숙였다. 심장이 쿵쿵 뛰다 못해 튀어나올 기세였다.
“너, 음…. 영양이 좀 부족하대. 몸에.”
“…네? 제가요? 영양실조 맞죠?”
“…알고 있네?”
다른 건 다 몰라도 무명은 영양실조만큼은 모를 수 없었다. 고기가 될 재료에 먹이를 충분히 먹이지 않거나 제대로 관리가 이뤄지지 않았을 때 나타나는 현상임을 수십 번을 봐 왔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영양실조가 발생한 고기는 모두 치료 없이 폐기처분을 당했었으니 무명은 저도 그런 신세를 면치 못하리라 생각하고는 바들바들 떨며 병원 소파 밑에 기어들어 가려 했다.
“뭐 해? 기어 나와.”
“그렇지만, 그렇지만….”
“일단 들어가 보자.”
무명은 서인의 손에 이끌려 병실로 끌려들어 갔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몸이 굳어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강제로 의자에 앉게 된 그는 자신을 분쇄기에 갈아버릴지도 모르는 의사를 마주하고는 조용히 흐느꼈다.
무명을 구석에 앉혀두고 의사에게 대충 그의 상황을 설명한 서인은 최대한 빨리 회복해야 한다며 특별 관리를 부탁했다.
“명아, 누워볼래?”..
반강제로 침대에 누운 무명은 뾰족한 주사를 가지고 다가오는 의사를 보고는 자지러졌다. 독살당하거나 마취된 후 도축될 제 모습을 상상하니 서인이고 뭐고 아무것도 보이는 게 없었다.
“싫어! 싫어어! 놔! 죽여버릴 거야, 놔!”
“괜찮아, 명아. 너 요즘 피곤하고 무기력하고 의욕도 없지? 그런 거 해결하려고 맞는 거야.”
무명을 그저 쓸만한 실험체로 보기 시작한 서인은 살살 달래도 모자랄 것을 발악하며 밀어내는 팔을 억지로 붙잡고 주사를 놓았다. 당연히 거부 반응을 보이고 발악하던 그는 힘을 질질 흘리며 사지를 마구 흔들어댔다.
“끄윽, 흑, 흐….”
그 모습이 안타깝긴 해도 서인은 다 저를 위한 일이 되니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무명의 입가에 범벅 된 침을 티슈로 닦아주며 대충 껴안아 주었다.
그저 영양제일 뿐인데, 살아온 환경이 끔찍하니 무명은 저를 죽이려는 주사로 착각하고 벌벌 떨며 울어댔다. 서인의 달램도 지금은 큰 효과를 주지 못해서 그는 까무룩 정신을 잃고 말았다.
“괜찮습니다, 거부 반응으로 기절한 것뿐이에요.”
“영양실조도 금방 회복할 수 있겠죠?”
“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역시 건강한지 아닌지는 자세히 뜯어보지 않으면 모를 일이다. 균형 잡힌 식사는커녕 음식을 잘 먹지 않고 어쩌다 한 번 먹을 때는 폭식을 하니 영양소가 부족할 건 예상했지만, 무명은 이래저래 문제가 많았다.
겉으론 건강해 보여도 몸이 약해서 약물을 소량씩 천천히 투약해야 했으며 어릴 때 부러진 뼈가 이상하게 붙어서 자란 부분도 있다. 억지로 밥도 먹여주고 병원까지 데려갔건만 바로 실험할 수 없다는 결과에 서인은 급격히 피곤해졌다.
“으, 형….”
그사이 잠시 기절했던 무명이 벌떡 일어나 서인을 찾았다. 그는 폐기 처분되지 않은 데다가 서인까지 곁에 있으니 언제 울고 기절했느냐는 듯 배시시 웃었다.
서인은 그가 눈뜨기 무섭게 사과를 입에 욱여넣었다.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게 영양분이었으니 우선 미우나 고우나 먹이고 봤다. 콩, 우유, 유제품, 녹황색 채소, 과일 등 배가 볼록 올라올 때까지 먹여댔다.
“이제 집에 가요, 집에 가고 싶어요.”
“알았어.”
의사의 소견에 따라 무명의 식단에 신경을 기울이기로 한 서인은 돌아가는 차 안에서 이제부터 밥을 먹여주겠다고 말했다. 별로 내키지는 않았다만 실험을 위해선 꼭 필요한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정말요?!”
“그래.”
완벽한 실험체가 되기 위한 노력임을 모르는 무명은 사랑받는 게 나쁜 일이 아닌 걸 어렴풋이 알 것 같다며 행복해했다.
그는 서인을 힐끔힐끔 훔쳐보다가 뺨에 입을 맞추고는 목을 와락 껴안았다.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예쁜 짓을 모아 애정을 표현한 무명은 지금과 같은 행복이 지속하게 해달라고 간절히 빌었다.
♦ ♢ ♦
서인이 집중 관리에 들어간 지 3주, 무명은 제법 살이 붙고 튼튼해졌다. 밥을 잘 챙겨 먹인 점도 있지만, 심리적 안정을 되찾은 점이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상용화 건으로 바빠진 서인은 심심할 때 볼만한 영상을 다운 받아주기고 그나마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대욱을 통해 초등학교 수준의 학습지로 공부도 가르쳐주었다.
“형!”
이렇게 특별히 신경 써주니 무명의 분리 불안도 눈에 띄게 호전되었다.
오후 11시, 대욱과 함께 공부 중이던 그는 서인이 귀가하기 무섭게 달려가 공책을 내밀었다.
“그래, 실장님 말 잘 듣고 있었어?”
“네!”
서인은 무명의 토실토실한 엉덩이와 볼살을 만지며 그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약물을 투여할 시점이 되자 무명이 무슨 짓을 해도 미워 보이지 않았다. 복덩이가 어디서 굴러왔나 하는 생각만 가득했다.
“사과는 영어로 애플! 저 많이 배웠어요! 형 회사 이름은 SI 바이오!”
“응, 잘했어.”
서인은 대충 칭찬을 건넨 뒤 슬슬 본론을 내비쳤다.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흘리고 가방에서 주사기가 든 검은 케이스를 꺼내 들었다. 이제 몸도 좋아졌으니 슬슬 약물을 투여할 때였다.
일과를 보고하며 조잘조잘 대던 무명이 시선이 그제야 케이스로 향했다.
“이게 뭐예요?”
“아, 이거. 명이 선물이야.”
“제 선물이요!?”
옷이면 옷 음식이면 음식, 서인이 주는 거라면 거절하는 법 없이 넙죽넙죽 받는 무명은 선물이라는 말에 아주 좋아 죽으려 했다. 그 안에 든 게 주사임을 모르니 요즘은 하루가 행복하다며 서인에게 제 모든 걸 내줄 사람처럼 굴었다.
“명아.”
“네!”
서인이 무심하게 케이스를 여는 순간 헤실헤실 웃고 있던 무명이 굳어졌다. 좋았던 분위기가 냉각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는 다시 보게 된 주사기를 피해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그에게 주사기는 여전히 공포의 대상이었다. 무명은 서인을 소심하게 밀어내며 식탁 밑으로 기어들어 갔다.
“무서운 거 아니야. 병원에서도 주사 맞고 괜찮았잖아.”
잠시 들렀을 뿐 다시 회사에 가봐야 하는 서인은 마음이 급해서 무명을 억지로 잡아당겼다. 달랠 시간도 없고 달랜다고 주사 공포증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니 반항하든 말든 얼른 주입하고 경과를 봐야 했다. ,
“나와, 얼른. 형 화낸다.”
“무서워요, 흐, 무섭단 말이에요….”
“시간 없으니까 말 들어. 협조하겠다고 한 건 너였어. 내가 언제 강요한 적 있었나?”
마음은 서인을 도와야 한다고 소리치고 있었는데, 몸은 주사에 잔뜩 겁먹어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인상이 사납게 굳은 걸 본 무명은 딸꾹질까지 해댔다. 죽지 않는다는 건 알아도 사랑이나 음식집착처럼 하나의 트라우마와 공포였기 때문에 극복하기 쉽지 않았다.
“대표님,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대욱은 신경이 곤두선 서인에게서 약물이 든 주사기를 받아든 뒤 저 멀리에 치워두었다. 대욱은 어쩌면 저보다 무명을 더 잘 다루는 편이니 서인은 대충 고개를 끄덕인 뒤 몸을 일으켰다.
그 행동이 자신을 겁주기 위함이 아닐까 싶었던 무명은 서인이 정말로 가려고 하자 미친 듯이 기어 나와 다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아, 흐, 알겠어요, 형이 주사 놔주세요! 형이, 형이!”
“그래, 알겠는데. 어차피 앞으로 이 비서가 놔줄 거야.”
“왜, 왜요? 왜?”
“바쁘니까. 한 두세 달 정도 기다려야 해. 할 수 있지?”
서인이 매일매일 영상 통화도 해주고 공부도 가르침 받으니 예전처럼 방치되진 않았지만, 주사 만큼은 서인이 놔주길 바랐다. 서인이 해주는 것도 무서운데, 이 비서라니. 상상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끔찍했다.
“응? 할 수 있지? 해야 해. 못 하면 형이 힘들어.”
“네, 할게요….”
싫다, 못한다 등 거부 단어들이 맴돌았지만, 무명은 고개를 승낙했다. 제가 하지 않으면 서인이 힘들고 아프고 죽는다고 하니 승낙 외 선택지는 없었다. 서인은 대욱을 잠시 내보내고 무명을 품에 안은 채로 약물을 주입했다.
“괜찮지?”
“네…. 후, 흐….”
서인은 무명이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 기다릴 만큼 여유롭지 않아서, 무명이 벌벌 떨며 발작하기 직전까지 갔음을 알고도 모른 척했다. 처음에는 다정하게 대해줬지만, 서인도 시간이 없고 이쪽저쪽 압박받는 상황에 부닥쳐서 무명은커녕 자신도 돌보지 못했다.
결국, 실험체로 쓰되 인간적으로 대해주고 애정을 주겠다는 의도가 크게 변질하고 말았다.
“형 갈게. 아프면 바로 실장님께 알리고, 응? 금방 다녀올게.”
서인은 땀과 눈물을 흘리며 떠는 무명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등을 돌렸다. 차마 가지 말라고 붙잡지 못한 무명은 훌쩍이며 서인의 뒤통수만 바라보고 있었다. 서인 역시도 그 시선을 느꼈지만 애써 외면해야 했다.
“…하.”
무명을 두고 회사로 가는 내내 서인도 마음이 불편했다. 그도 사람인지라 제 애정을 갈구하는 무명을 실험체로만 사용하고 이 비서에게 미뤄두는 게 미안하긴 했다.
그러나 약 개발과 상용화, 최종적인 성공은 지금껏 살아온 이유이자 인생의 목표이니 정의도 내리지 못하는 감정에 눈이 멀어 일을 그르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약물은 예정된 날짜에 공개될 예정이니 서인은 불확실한 성분만 검출해내면 저뿐만 아니라 무명에게도 좋은 일이 되리라 확신했다.
“나 슬퍼….”
서인이 그렇게 쌩하고 가버린 후 대욱과 둘만 남게 된 무명은 급격한 우울을 호소했다. 분리 불안이 호전되었다고 한들 아예 사라진 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예전처럼 따라나서려고 하거나 엉엉 우는 건 아니었지만, 서운한 마음을 숨기진 못했다.
“나, 슬퍼.”
“이번 일만 끝나면 대표님께서도 자유로우실 겁니다.”
“자유? 형도 불행해? 형도 갇혀 있어?”
자유라는 말에 무명이 눈을 커다랗게 뜨고 물었다. 작은 방에 갇혔던 어린 시절의 제가 그토록 바라왔던 자유를 서인도 느끼고 있다는 게 충격적이었다. 서인은 먹고 싶은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고 밖에도 돌아다닐 수 있는데 왜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응? 왜? 왜?”
사실 기본적인 의식주를 보장받고 갇혀 살지 않았을 뿐이지 서인이 자유로운 삶을 산다고 말하기엔 어려움이 따랐다. 무명만큼은 아니라고 한들 듣는 사람이 경악할 만한 수준의 학대를 당하고 자랐으며 지금도 제 행복이 아닌 회장의 인정을 받기 위해 살고 있으니 말이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대욱은 제가 감히 서인의 과거를 이야기할 위치도 아니고 그럴 마음도 들지 않아서 무명을 안심시킬 수 있을 만한 대답을 내놓았다.
“아…. 아뇨. 휴일이 많아진다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아. 뭐야, 깜짝 놀랐잖아! 나는 또 형이 괴로운 줄 알았잖아. 아니라니 다행이다….”
대욱의 대답에 긴장이 풀린 무명이 소파에 털썩 드러누웠다. 그는 서인같이 멋있고 돈 많은 사람이 자유를 바란다는 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쉽게 진정을 못 했다. 어릴 적 그가 바라왔던 자유란 죽음이었으니 혹시 서인도 죽음을 원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상상하고 싶지 않은 서인의 죽음을 떠올린 무명이 벌떡 일어나 대욱의 손을 붙잡았다.
“후, 나 앞으로 말 잘 들을게…. 이 비서가 놔주는 주사도 잘 맞을게, 응? 그러니까 형한테 말해줘, 나 말 잘 듣는다고 착하다고. 그러니까 죽지 말라고….”
애써 괜찮은 척했던 무명이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다. 제 몸에 무서운 약이 주입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서인의 죽음 등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들로 인한 복합적인 불안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럴 일 없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괜한 소리로 그를 불안하게 한 대욱은 그가 다시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침대에 눕혀 준 뒤 물고기 따위가 둥둥 떠다니는 애니메이션을 틀어주었다. 우는 아기 달래기 위해 휴대전화를 쥐여준다는 말이 실감 나는 때였다.
“인터넷이나 TV 너무 많이 보면 대표님께서 화내시니 내일부턴 한 시간만 보세요.”
“한 시간이면 영화 한 편도 다 못 봐!”
“그럼 그 욕심으로 대표님을 힘들게 할 생각입니까?”
“아니, 아니야! 싫어! 한 시간만 볼게, 한 시간만!”
서인뿐만 아니라 대욱도 무명을 돌볼 땐 육아를 하는 부모처럼 보였다. 서인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무명을 아주 능숙하게 다룬다는 정도였다. 애니메이션을 틀어주고 입에 잘게 자른 과일도 넣어주며 애지중지 돌봐주었다.
♦ ♢ ♦
바쁜 서인이 집으로 돌아오지 않은 지 사흘째, 이 비서나 다른 수행원들의 말을 잘 듣던 무명은 점점 골이 나기 시작했다. 아직 이 비서가 올 시간도 아니고 대욱도 서과 같이 일을 하러 가버렸으니 그는 TV를 하루에 한 시간만 보기로 한 약속도 지키지 않았다.
“하아….”
신경질적으로 전원을 켠 무명은 뉴스를 보자마자 한숨을 쉬었다. 요즘 TV, 인터넷 할 거 없이 모두 서인과 그의 집안에 관해 떠들어대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무명은 그의 이름이 타인의 입에 오르내리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안 그래도 서인을 보지 못해 기분이 더러운데 제가 모르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널라고 널려 불쾌했다.
제 누나와 다투니 뭐니 제가 알 수 없는 말들로 가득한 내용 또한 마음에 들지 않았다.
“MS 그룹이 그렇게 대단한 건가?”
언론에서 MS 그룹의 회장 자리가 공석이기 때문임을 알게 된 무명은 마켓 내 서열을 더듬어보며 상황을 이해하려 했다.
“회장이라는 사람이 수장님이고… 서인이 형이 고위관계자인 건가?”
서인이 회장 자리에 거론된 이유는 신약 발표의 영향이 컸다. SI의 대표가 된 후에도 그랬지만, 되도록 매스컴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MS 그룹이 보호하는 금쪽같은 막내아들이라는 조롱식의 언급이 가득했지만,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서인을 찬양하는 분위기였다.
“우와아….”
생각 정리를 마친 무명은 제가 대단한 사람을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자부심을 느꼈다. 서인이 이렇게 멋있는 사람이니 저도 무언가 해야겠다는 생각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퇴사 아닌 퇴사를 하게 되었으니 무직이 된 무명은 뭘 해줘야 할지 몰라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았다. 별장에 가서 하는 업무라고는 돈이 되지 않는 명단정리였으니 직업이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요리를 해줘야겠다!”
가장 잘하는 게 고기를 자르고 음식을 만드는 일이니 무명은 서인이 돌아오면 요리를 해주기로 마음먹었다. 총관리자가 된 이후로는 노동자들이 먹을 만한 요리를 담당했어서 재료만 있으면 정말 자신 있었다.
부엌으로 달려가 냄비에 불을 올린 무명은 열심히 국을 끓이기 시작했다.
“아, 짜….”
요리를 잘하긴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간을 맞추지 못한다는 점이다. 마켓에도 소금과 설탕, 간장 등은 있었지만, 어차피 노동자들이 먹을 음식이니 최대한 양을 줄이고 재료를 아꼈으니 간을 맞춰본 경험이 많지 않았다.
“…우웩!”
우여곡절 끝에 만들어진 김치찌개는 소름 돋을 정도로 시고 말이 안 되게 간이 셌다. 한참을 고민하던 무명은 물을 추가해 대충대충 간을 맞춘 뒤 계속 끓어댔다. 국물이 줄어드니 비주얼 역시도 심각했다.
무명은 맛도 없고 모양도 엉망인 음식을 차마 버릴 수는 없어 허겁지겁 입에 쑤셔 넣고 채소볶음을 만들기 시작했다. 고기가 아니면 서인이 먹지 않을 걸 알고 있었지만, 무명은 그가 고기를 끊길 바랐기 때문에 거절당하더라도 만들고 또 만들기로 했다.
[고기 아니면 취급 안 해. 알면서 왜 만드는 거야?]
“계속 고기만 먹으면 건강에 안 좋은데….”
무명은 빈자리가 눈에 띄는 대형 냉동고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 이렇게 줄어들었는지 서인이 가장 좋아하는 부위는 벌써 한 팩밖에 남지 않았다.
마켓에서 만드는 고기는 열량이 높은 걸 넘어서 경악스러울 정도이니 한 달에 한 팩 정도 소비하는 게 적당한데 서인은 한 번 먹을 때마다 한 팩씩 먹어대니 건강이 우려되었다.
배우지 못해 천한 마켓 노동자들이나 그렇게 먹어대지, 대부분의 상류층 소비자들은 정해진 양으로 만족했기에 무명은 그의 식습관을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하…, 이대로 가다간 큰일이 날 거야. 형이 죽어버리면….”
거의 중독 증세를 보이는 모습이라 무명은 혼자 중얼거리며 서인의 서재로 걸음을 옮겼다. 서인이 공부하라고 사둔 공책을 찢은 그는 인터넷을 이용해 식단표를 짜기 시작했다.
“보리밥에 된장찌개에 메추리 알 장조림! 미역 줄기 볶음, 김치!”
일하고 온 남자에게는 따뜻한 밥상이 최고라는 인터넷에 떠돌아 다니는 옛날 글을 접한 무명은 서인을 위한 밥상을 한 트럭 만들 계획을 꾸렸다.
서재에서 뛰쳐나와 냉장고를 뒤적거리던 그는 미역과 메추리 알이 집에 없음을 깨닫고 서인이 준 카드와 휴대전화를 챙기고 옷을 입었다.
마트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카드를 긁을 줄도 모르는 주제에 무명은 먼저 움직이고 봤다. 밖으로 나온 그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서인에게 혼이 날 것을 예상하고 대욱에게 전화를 걸었다.
- 네, 경호팀….
“서인이 형 먹일 음식 만들어야 하는데 재료 사 와줘!”
무명은 서인이 오늘 올지도 안 올지도 모르면서 재료를 사 와달라고 부탁했다. 대욱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제 할 말만 하며 대답이 늦는 그에게 칭얼거리며 귀찮게 하기도 했다.
- 업무가 많아서 다른 장소에 방문할 시간이 없습니다. 다른 분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한 시간 뒤에 이 비서가 도착할 예정인데, 몸은 괜찮으십니까?
“응.”
- 대표님 식단은 어떻게 미리 짜두셨습니까?
“응!”
- 그럼 제게 식단표를 전송해주세요. 달마다 재료를 미리 보내두도록 하겠습니다. 신선도가 떨어지면 안 되는 재료는 그때그때 배송될 수 있도록 진행하려 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응!”
무명은 직접 나가지 않아도 재료를 알아서 배송해준다고 하니 기분이 좋았다. 저는 그냥 인터넷 조리법을 보고 만들기만 하면 되니 말이다.
다른 게시물을 보니 소금을 얼마 정도 넣어야 하는지도 자세히 나와 있었다. 이제 간도 문제없고 재료도 문제없으니 서인만 집으로 돌아오면 될 일일이었다.
그는 기대에 찬 목소리로 질문했다.
“형 오늘 와?”
- 아뇨, 오늘도 바쁘십니다. 그러니 재료만 준비해두시고 요리는 나중….
“됐어!”
오지 않는다는 말에 무명이 싹수없이 소리치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매일 해주던 영상 통화도 이제 1분도 채 해주지 않으니 점점 화가 났다. 이제 나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냐고 따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아, 하….”
다시 집으로 돌아와 저 혼자 씩씩대던 무명은 어찌 됐건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음식을 만드는 것뿐임을 자각하고 주문할 재료를 정리해 대욱에게 전송했다. 두 달만 더 참으면 이 지독한 외로움도 잊게 되는 날이 오리라고 믿고 동물 영상을 보기 시작했다.
“역시 귀엽다….”
이런저런 동물들이 담긴 영상을 보던 무명은 ‘외로운 밤을 달래줄 친구가 한가득!’ 이라는 불순한 광고를 발견하고 날아갈 듯 좋아했다.
“…어?”
더 귀여운 동물을 만날 생각에 소리를 켠 무명은 온통 살굿빛으로 가득 찬 화면과 스피커로 흘러나오는 음란한 소리에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무도 없지만, 괜히 죄를 짓는 것 같아 서재 책상 밑으로 숨어들어 영상을 마저 보기 시작했다. 무슨 영상인지는 자세히 몰랐지만, 본능적으로 숨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헉….”
무명이 접속한 사이트는 동물 친구들이 모인 곳이 아닌 남성끼리의 성관계를 다루는 음란 사이트였다. 무명은 자동으로 실행된 영상을 보고 눈을 감았다가 성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소리에 조금씩 관심을 보였다.
“…앙앙? 뭐야, 이상한 소리야.”
무명은 영상 속 남자의 신음에 서인이 가슴을 애무해줬던 일을 떠올렸다. 신기한 얼굴로 다음 영상을 재생하자 온갖 가학적인 장면들이 눈에 들어왔다.
“헉!”
일반적인 성관계 영상도 널리고 널렸는데, 하필 SM 플레이가 담긴 영상이었다. 무명은 팔다리가 묶인 채 머리채를 붙잡혀 성기를 빠는 남자를 보고 놀라 눈을 감았다.
- 아, 좋아요! 좋아요! 좋아, 주인님!
- 억지로 쑤셔 박아도 좋아 미치겠어? 이 발정 난 놈! 개 같은 걸레 놈!
무명은 좋다고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를 듣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영상 밑 설명을 발견한 그는 합의로 이루어진 관계라는 글을 읽고 혼란에 빠졌다. 처음 겪는 상황에 놀라 멍하니 시간을 보내자 어느새 관계를 끝마친 남자가 인터뷰하는 장면이 나왔다.
- 정말 좋았어요, 특히 구멍에 딜도를 처박고 휘저을 때는 눈앞이 아찔했다니까요?
- 아직은 본격적인 SM 플레이는 두렵지만, 이런 부드러운 플레이는 저와 잘 맞는 듯해요. 좀 더 거칠게 쑤셔 넣어주길 바라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니까요. 하하, 격하게 느껴서 싫다는 말이 절로 나왔는데, 좋다는 뜻인 거 다들 아시죠?
“…그런 게 좋은 건가? 그렇다면 형도?”
무명은 그저 영상 컨셉 인터뷰임을 인지하지 못하고 영상 속 배우의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리라 생각했다.
“묶인 채로 억지로 넣고… 싫다고 말하는 게 사실은 좋다는 뜻이라고?”
무명은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손뼉을 치고는 다음 영상을 재생했다. 그는 몇 번이고 반복해서 서인에게 똑같이 해주리라 다짐했다.
“주사 맞으셔야 해요. 아, 같은 시간에 해야 한다니까!”
동영상을 보고 열심히 공부한 무명은 서인이 돌아오지 않자 화가 났다. 주사를 놓으러 온 이 비서는 서인이 통화 해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잔뜩 토라진 그를 상대하느라 바빴다.
“싫어! 네가 뭔데 맞으라 마라야!”
“잘하시다가 도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이리 오세요!”
투약할 시간이 다가오자 이 비서는 마음이 급해졌다. 그는 무명의 팔을 억지로 잡아당겨 주삿바늘을 가져다 댔다.
익숙해졌다고 한들 이렇게 강압적으로 굴면 나아졌던 트라우마도 다시 생겨날 수밖에 없는데, 마음이 급하고 섬세하지 못한 그는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싫어! 이, 씨발!”
무명은 이 비서의 복부를 발로 걷어차며 격렬하게 반응했다. 난리 난리를 피우는 과정에서 서인이 입에 달고 사는 욕설도 툭 튀어나왔다.
저도 모르게 나온 욕설이라 무명도 조금은 당황했으나 지금은 이 비서에게 화내는 게 우선이니 신경 쓰지 않고 계속 소리쳤다.
“네가 뭔데! 네가 뭔데! 네가 뭔데!”
서인과 통화하지 못해 징징거렸을 뿐이지 무명도 주사를 맞지 않을 생각은 아니었는데, 이 비서가 자꾸 잡아당기고 소리를 지르며 강요하니 괜한 고집을 피웠다.
“후…. 버러지 같은 새끼가 진짜.”
“뭐?”
그러나 화가 난 건 무명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주사기를 들고 분을 삭이던 이 비서가 참지 못하고 상스러운 욕을 지껄였다. 그는 고작 무명 같은 이상한 놈 뒷구멍을 따라다니려고 죽어라 열심히 산 게 아니라며 억울함을 토해냈다.
“그럼 나야말로 왜 너 같은 폐급을 상대하고 있어야 하는데? 내가 이러려고 좆 같은 거 다 참아가면서 권서인 그 새끼 옆에 있었는줄 알아?”
“서인이 형 욕하지 마!”
“고기 처먹는 미친 잡스러운 짓까지 다 봐가면서 버텼는데, 왜 내가 이따위 취급을 받아야 하냐고!”
“고기는 나도 역겨워! 근데 네가, 네가!”
“입 닥쳐!”
얻는 것 없는 유치한 말싸움이 이어졌다. 이 비서는 제 노력을 강조하다가 급기야는 학력까지 들먹였다. 제가 이렇게 썩고 있을 놈이 아니라며 무명을 무시함과 동시에 자신을 치켜세웠다.
“하아, 하아…. 난, 난! 너보다 곽대욱 실장님이 더 나아! 너 같은 건 죽여버릴 거야!”
“그놈의 곽대욱, 곽대욱, 곽대욱! 지금이야 세상이 다 너희들 손에 있는 것 같지? 곧 전부 끝이야! 끝이라고!”
무명의 수준을 초등학생 저학년 정도라고 생각하는 이 비서는 머리를 거치지 않고 되는대로 막 내뱉었다. 무명의 시선에서는 갑자기 왜 저러나 싶어도 이 비서는 쌓인 게 많아서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하아, 하아…. 그 지랄 나면 너 같은 걸레는 아마 바로 버려질걸?”
“아니야!”
교활한 그는 무명이 가장 두려워하고 싫어하는 말을 꺼냈다. 서인이 저를 버리고 저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믿고 싶지 않은 말에 무명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이 비서를 노려보았다.
“아마 주사 안 맞으면 더 그러겠지.”
“다 이를 거야! 네가 서인이 형 욕 한 것도 전부 다 이르면 아마 형이 너를….”
“그러든지.”
이르겠다는 말도 먹히지 않자 무명은 제 분을 못 이겨 바들바들 떨다가 주사를 빼앗아 들었다. 어차피 매일 같은 부위에 맞는 거 굳이 이 비서가 아니라도 혼자 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듣기 싫은 말만 하는 이 비서를 무시하고 제 몸에 주사를 주입했다.
“이제 내일부터 오지 마. 나 혼자서도 할 수 있으니까.”
“참자, 참아, 씨발….”
무명은 서인이 돌아오면 이 비서가 제게 했던 모든 행동을 다 일러주기로 마음먹고 평소와 달리 두 개나 되는 주사기와 약을 받아 들었다. 평소였다면 서인에게 물어본 후 행동했겠지만, 저를 괴롭힌 이 비서를 당장 해고할 서인을 떠올리니 기분이 좋아서 의심 없이 받아들었다.
‘형, 이 비서가 막 나 때리고 방해했어요, 아프게 했어요.’
‘그래? 그렇다면 바로 잘라야지, 뭐.’
서인이 얼마나 제 일에 집착하는지 알 리 없는 무명은 서인이 저를 좋아하고 또 사랑한다고 했으니 그가 이 비서를 분명히 해고해주리라 믿었다. 보고 배운 대로 조심스레 약물을 투여하자 이 비서가 언제 화를 냈냐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뭐야? 더러워.”
무명은 저를 보고 웃는 이 비서를 향해 불쾌감을 드러내며 고개를 돌렸다. 저 역시도 화를 내다가 웃고, 웃다가 울었지만, 이 비서는 꿍꿍이가 있는 사람처럼 음흉하게 웃었다. 기분이 나빴던 사람이 갑자기 왜 저러나 무명이 당황할 정도였다.
이 비서가 쳐다볼 때마다 어쩐지 주사를 맞은 부위가 욱신거리는 착각이 들었다. 무명은 찝찝한 마음에 팔뚝을 문지르다가 괜히 그를 쏘아보며 시비를 걸었다.
“뭘 봐!”
“…….”
앞으로 세 달간은 계속 맞아야 하는 걸 알아도 오늘따라 이상하리만큼 불안해서 신경이 곤두섰다. 서인이 만든 약이니 안전성은 보장됐겠지만, 발정제나 독약 등 온갖 위험한 것들이 넘치는 환경 속에서 살아온 무명에게 약물이란 부정적인 의미가 강했으니 예민하게 구는 게 당연했다.
“괜찮아, 괜찮아.”
서인에게 전화로 불안하다고 말하면 날 못 믿겠느냐고 화낼 게 분명해서 무명은 쿠션을 껴안고 꾹 참았다. 그가 주기 시작한 사랑도 마켓의 방식과는 달랐으니 약물도 다르리라고 믿었다.
♦ ♢ ♦
“형!”
무명은 거의 두 달 만에 돌아온 서인을 껴안고 몸에 얼굴을 비비며 애교를 피웠다. 매일 나누는 영상 통화도 좋았지만, 역시 실제로 보는 것만큼 좋은 건 없었다. 서인은 방긋방긋 웃으며 행복해하는 무명의 배를 매만졌다.
“왜 이렇게 살이 쪘어? 배만.”
“아…. 요즘 딸기를 좀 많이 먹었더니 그런 가봐요.”
“웬 딸기?”
“모르겠어요, 그냥 먹고 싶더라고요. 그건 그렇고 형, 조금만 기다리세요, 제가 밥해올게요!”
“뭐?”
이대로 자연스럽게 침대로 가려 했던 서인은 부엌으로 달려가는 무명의 뒤통수를 황당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대표님 식단을 짜뒀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저를 위해 식단표까지 짜뒀다는 대욱의 말이 떠올랐다. 그제야 왜 무명이 키스하지 않고 식사를 강조했는지 이해한 서인은 묵묵히 앞치마를 맨 그의 뒤를 따랐다. 고기가 없는 일반식은 선호하지 않지만, 예쁜 짓을 하니 흔쾌히 먹어줄 의향이 있었다.
“채소볶음?”
서인이 팬에 열심히 채소를 볶는 무명의 허리를 껴안자 제 발 저린 그가 울상을 지으며 육류 소비를 줄여야 한다고 떠들어댔다. 한 입만 먹어보라며 채소볶음을 서인의 입에 들이밀기까지 했다.
“왜 이래. 채소라서 안 먹는다고 할까 봐?”
“네…. 언제나 말했지만, 그 고기는 열량이 높아서 위험해요. 제발 채소 좀 드셔보세요!”
“아니 누가 뭐래?”
“줄이겠다고 약속해주세요….”
“지키지도 않을 약속을 내가 왜 해?”
기분 좋게 먹어주려고 했건만 무명이 흥을 깨버리자 서인도 퉁명스레 대응했다. 걱정하는 마음을 둥글게 표현하지 못한 무명이 눈치를 살피다가 언제나 그랬듯 울상을 지으며 훌쩍댔다.
“아, 알았어. 약속할게.”
“감사합니다! 맛있게 볶아볼게요!”
그러니 징징거리는 걸 듣기 싫어하는 서인이 백기를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가 약속하자 무명은 언제 울먹였냐는 듯 실실 웃으며 고기를 구웠다.
“명아.”
어리바리하던 것도 잠시, 고기가 아닌 채소를 굽는 모습을 지켜보던 서인은 문득 마켓 이야기를 전혀 꺼내지 않는 무명의 심리가 궁금해졌다. TV나 휴대전화 기록에 잔인한 영화가 가득했으니 도축이나 의뢰 받은 일이 그리운 건 확실한데, 어찌 이리도 잘 버티는지 의문이었다.
“네?”
“너, 사람 안 죽인 지 좀 됐지?”
“…….”
게다가 서인은 무명이 그런 일을 할 때마다 흥분했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놈이 도축도 의뢰도 받지 않는다는 게 솔직히 믿기지 않았다. 제 눈을 속이고 누군가를 몰래몰래 죽인다든가 동물을 학대함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게 아닐까 의심될 정도였다.
“그렇긴 한데….”
“그럼 너 한 한 달 정도 마켓에서 도축 좀 하다 올래?”
자극적인 행위에는 중독이 따르기 마련이다. 갑자기 일을 관두고 몇 개월을 참았는데, 이 이상 억눌렀다간 사고를 칠지도 모르니 서인은 마켓에 방문하기를 허락했다.
“…왜요? 절 버리고 싶어졌어요? 왜요, 왜, 왜요?”
두 번 다신 마켓에 갈 생각도 하지 말라고 끌고 나오고 일도 관두게 했으면서 이제 다시 가란다. 무명은 도대체 제가 뭘 잘못했는지 몰라서 불안하기만 했다.
“안 버려. 솔직히 말해봐, 도축하고 싶지 않아?”
“하아, 하…. 잘 모르겠어요.”
무명은 살면서 선택권을 쥐어본 적이 많지 않아서 제 의사를 묻는 서인에게 대답할 수 없었다. 선택이란 여전히 어색하고 두려웠다. 또 도축은 꼭 해야만 하는 일이었는데 왜 하고 싶은지를 따지는 건지 아예 이해조차 하지 못했다.
“왜, 대답해봐.”
“…정말 몰라요, 왜 물으시는 거예요. 그렇게 고기가 드시고 싶으세요?”
“아니, 이야기가 왜 그렇게 돼? 난 한 번 먹을 때 많이 먹는 편이지 맨날 먹지는 않아. 그런데도 그렇게 걱정돼?”
“왜 거짓말하세요? 매일 드시잖아요.”
서인은 저를 위해 마켓에 가는 걸 허락했건만 고마운 줄은 모르고 식습관을 지적하는 무명의 태도에 기분이 상했다. 그는 묻는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는 미운 주둥이를 잡아당겨 버렸다.
“아아! 갑자기 왜요!?”
“이런 놈이 뭐가 예쁘다고.”
“언제는 예쁘다면서요! 형은 왜 이랬다저랬다 해요? 변덕 심한 거 아세요?”
“싸가지 없게 누구한테 변덕이 심하대? 인터넷에서 배웠지?”
책도 읽고 공부도 하며 인터넷도 즐기다 보니 무명은 어휘력이 좋아져 조잘조잘 잘도 떠들었다. 그 말인즉슨 예전처럼 말 한마디로 구워삶기가 조금은 어려워졌다는 뜻이다. 지능이 높아졌으면 했지만, 어찌 대드는 실력만 발전한 듯했다.
서인은 도대체 뭘 하는지 보겠다며 휴대전화를 마음대로 가져갔다.
“아, 주세요! 제 거잖아요!”
그러자 무명이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서인의 손목을 마구 잡아당겼다. 들켜서는 안 되는 기록이 있는 사람처럼 급한 손길이었다.
“왜 정색을 해. 너 이걸로 뭔 딴짓해?”
무명이 평소와는 다른 얼굴을 하고 달려들자 서인은 메시지 기록부터 확인했다. 주제넘게 다른 놈과 연락을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고개를 들었다. 다행히 확인한 메시지에는 저와 대욱, 이 비서뿐이었지만, 인터넷 기록은 달랐다.
“주세요! 하지 마세요! 제 거예요!”
제대로 화가 난 무명은 서인의 얼굴을 밀치고 휴대전화를 빼앗으려 안간힘을 썼다. 급기야 몸 위에 올라타 체중으로 짓누르기까지 했다. 서인 역시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제 얼굴을 누르는 손을 붙잡아 제압한 뒤 무명의 흔적을 읊기 시작했다.
“SM, 스팽킹?”
기록에는 섹스, 자위 같은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한 검색도 아니고 이런 건 어떻게 알았나 싶은 것들만 가득했다. 대부분 SM 플레이 영상이었으며 불과 이틀 전에 본 기록도 있었다.
“주세요!”
“이런 게 취향이었어? 대단하네?”
“아니에요! 그냥, 그냥 이런저런…. 흐, 흑….”
무명은 부끄러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결국 눈물을 터뜨렸다. 처음에는 동물 영상을 보다가 잘못 타고 들어갔지만, 나중엔 중독되었던 게 사실이니 변명도 못 했다.
“보다 보니 꼴렸어? 형한테 자지 박고 싶었어?”
“흐윽, 흐…. 그게, 그게 …. 처음에는 놀랐는데, 흑, 이것도 성관계라는 걸 알고, 흐…. 아래에 있는 사람이 기분 좋아 보여서, 흐…. 형한테 해, 끅, 흐…. 해주고 싶어서….”
“근데 네가 이걸 할 수 있다고 생각해? 대줘도 제대로 못 박았잖아. 우리 애기가 이제 SM까지 하…. 윽!”
“아가 아니에요!”
무명은 아이 취급하는 서인에게 화가 나 미친놈처럼 달라붙었다. 그를 밀어내려던 서인은 문득 이대로 무명과 SM 플레이를 해보는 게 어떨까 고민했다. 평생을 피학성애인 줄 알고 살았던 제가 무명에게만 다르게 적용하니 실험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럼 해 봐. 대사부터 따라 해볼까.”
게다가 이미 한 번 뚫린 뒷구멍 두 번 못 뚫리라는 법도 없었다. 이전의 경험으로 무슨 방법이든 좋기만 하면 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 서인은 보란 듯이 무명이 몰래 봤던 영상을 재생하고 따라 하기를 강요했다.
- 너 이런 거 좋아하잖아, 아니야? 이 걸레 새끼가!
“너는 이런 거 좋아하잖아, 아니야?! 이, 이 걸레, 거, 걸레 새끼야!”
서너 번은 봐서 대사는 대충 외워진 영상인데 서인의 얼굴을 마주 보자 엉망이 되었다. 무명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 말을 더듬었다.
서인은 그가 부끄러워하면서도 발기하고 있음을 알고 장단에 맞춰주기 시작했다. 평소 SM 플레이를 꽤 선호하니 분위기를 살릴 음담패설과 강압적인 행동도 여유롭게 웃으며 받아주었다.
“아, 싫어….”
무명은 그래도 여태까지 꽤 배웠다고 그럭저럭 애무는 할 줄 알았다. 서인이 영상 속 남자를 따라 하며 싫은 척 몸을 움츠리자 흥분한 무명의 행동이 대담해졌다.
“조, 좋으면서 뭘 그래? 평소에도 이렇게 당하기를 바랐잖아?”
“아니야, 아, 윽….”
그는 바르작대는 서인의 팔을 단단히 붙잡아 누르고 목에 입술을 지분댔다. 목에 제 흔적을 만들고 싶은데 이건 어떻게 하는지 영상에서 자세히 보여주지 않아 어색하게 깨물고 빨기만 했다.
애무와 달리 어설픈 모습에 웃음을 터뜨릴 뻔한 서인은 간신히 눌러 참고 아닌 척,애무하는 법을 알려주었다.
“아아, 세게 빨면 자국 남아, 안 돼. 아!”
무명이 목을 빨자 서인은 일부러 더 격하게 반응했다. 그런 서인의 몸은 영상으로 볼 때 느꼈던 흥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무명은 바지 지퍼가 터질 정도로 발기해 발정 난 짐승처럼 달려들었다. 서툰 손길로 바지를 벗기고 구멍에 성기를 정신없이 비벼댔다.
“으, 씹….”
“거, 걸레!”
흥분한 무명과는 달리 서인은 뒤에 비벼지는 성기의 감각에 불쾌감을 느꼈다. 박혔을 땐 좋았지만, 무명이 목덜미를 잡아 누르고 걸레니 뭐니 떠들어대는 것도 흥분은커녕 살인 충동이 들 정도로 열 받았다.
“아, 안 되겠다. 씨발….”
평소처럼 욕을 하며 몸을 일으킨 서인은 제 앞에 앉아 헐떡이는 무명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목덜미가 짓눌리는 게 상상 이상으로 기분이 나빠서 참을 수 없었다.
“너는 억지로 하는 거에 흥분하는 걸레….”
“그래, 걸레 할게.”
박혀줄 순 있는데, 이런 식의 플레이는 영 흥분이 되질 않았다. 서인이 조금 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어울려주지 않자 무명이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다. 영상을 보며 익힌 것들이 모두 물거품이 되었기 때문이다.
“형이 어떻게 하면 기분 좋은지 알려줄게. 옷 다 벗어.”
서인은 삽입하는 쪽이든 삽입 당하는 쪽이든 상관없다며 순식간에 나체가 된 무명을 쓰다듬었다. 오랜만에 서인의 앞에서 나체가 된 무명은 부끄러워하며 몸을 배배 꼬았다.
“명아, 지금부터 네가 정말 참기 힘들면 명이나물 먹고 싶다고 해. 알았지?”
“네? 그걸 왜 먹어요?”
무명은 이해할 수 없는 소리에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껏 서인이 해주는 성행위는 무섭지만 좋았는데, 갑자기 명이나물을 먹고 싶다고 말하라는 건 무슨 소리인지 알 길이 없었다.
“일단, 꾹 참아봐. 네 한계까지.”
서인은 억눌리고 괴롭힘당하는 건 기분 나빴으니 반대로 무명을 괴롭혀 보기로 했다. 제게 몸을 대줬던 사람들이 때려달라고 했을 때는 기분이 나빴는데, 이상하게 무명에게는 다르다는 것을 여러 번 느꼈으니 이번에야말로 정의를 내려야 했다.
“네….”
서인은 엉덩이가 보이게 엎드린 무명을 보며 신중하게 도구를 골랐다. 얼굴이나 배, 가슴 같은 곳은 많이 맞아봤겠지만, 엉덩이를 집중적으로 맞아본 적이 없을 것이 분명하니 새것을 더럽히는 기분에 가슴이 설렜다.
“으음….”
도구를 들고 고민하던 그는 무명이 거부감을 느낄 것을 고려하여 손바닥을 택했다. 살집 있는 엉덩이와 가슴은 살집이 제법 때릴 맛이 났다. 서인은 그가 놀라지 않게 손으로 엉덩이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천천히 애무했다.
“흐, 아아, 기분 좋아요…. 형도 제 엉덩이 좋아요? 만지면 기분이 좋은가요?”
“…….”
“저, 저는 좋아요. 형이 엉덩이를 만져줄 때마다 살이 움직여서 흔들리거든요. 그럼 기분이 좋아요. 제 엉덩이 살은 따뜻한데 형 손은 차가워서 더 그런 것 같아요. 엉덩이를, 앗!”
“…도대체 또 무슨 영상을 본 거야?”
서인은 손길이 닿을 때마다 조잘조잘 떠드는 무명의 입을 틀어막기 위해 부드럽게 쓰다듬던 엉덩이를 거칠게 내리쳤다. 살이 출렁이며 엉덩이가 퍼졌다가 다시 제 모양으로 돌아오기 무섭게 붉은 손자국이 자리 잡았다.
“아! 아파! 아파요! 악! 아!”
기분 좋다던 그는 고작 한 대로 몸을 심하게 뒤흔들며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리와 벌어진 다리 사이로 보이는 구멍에 흥분한 서인은 다리를 조금 벌리게 한 뒤 엉덩이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말랑한 살이 찰기 있게 손바닥을 감싸는 느낌이 황홀했다.
“하….”
서인은 후려칠 때마다 허벅지를 떨고 몸을 움츠리는 무명의 모습에 과하게 흥분했다. SM 플레이를 좋아하긴 했지만, 경험이라곤 때리기 싫은 상대를 죽도록 때려본 적밖에 없어서 강도 조절도 역시 서툴렀다.
“아! 아!”
그저 무명이 비에 젖은 강아지처럼 벌벌 떨어대는 모습을 더 보고 싶을 뿐이었다. 손으로 때리던 그는 더 괴롭히고 싶어서 깨끗하게 소독된 장난감 중 돌기가 돋아난 스팽킹 도구로 망설임 없이 엉덩이를 내리쳤다.
“아악! 며, 명이나물 먹고 싶어요! 명이나물, 하, 읏…. 명이나물!”
흥이 깨지는 외침이었지만, 서인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안전어를 내뱉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행위를 멈춰야 하는데, 형식적으로 정해둔 데다가 이성을 잃은 서인은 막무가내였다. 엉덩이가 퉁퉁 부어 상처가 생겨도 멈추지 않았다.
“으읏, 흐으으….”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보기 위해 다리를 넓게 벌린 무명은 서인이 엉덩이가 아닌 제 고환과 항문을 보고 있음을 깨닫고 테이블 모서리를 붙잡아 엉금엉금 기어 달아나려 했다.
서인은 그 꼴을 안쓰러워하긴커녕 더 흥분해 짓밟아 버리고 싶은 위험한 충동을 느꼈다.
“가만히 있어. 하…. 좋게 해준다고 했잖아. 응?”
사디즘을 단순 때리는 행위에만 흥분하는 성향이라고 단정할 순 없다. 그러니 고작 지금 흥분했다는 이유로 자신을 사디스트라고 확신할 순 없지만, 이전의 경험을 토대로 적어도 마조히즘과는 거리가 멀다는 정도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자신을 마조히스트라고 믿었을까 생각해보려던 서인은 무명이 엉덩이를 내밀자 모두 잊어버리고 정신없이 후려쳤다.
“아, 아! 아파요, 아! 흐, 아! 악!”
“그래?”
서인은 부어오른 무명의 엉덩이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다시금 도구를 들어 올렸다 내리치며 욕구를 채우려는 순간, 휴대전화가 시끄럽게 울렸다.
눈앞에 엉덩이를 까고 있는 무명을 위해서 처음으로 일을 뒤로하려 했던 그는 받지 않자 계속해서 걸려오는 탓에 어쩔 수 없이 도구를 내려두고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입니까. 급한 게 아니면 나중에 하죠.”
엉덩이를 까고 엎어진 무명은 서인이 왠지 다시 집을 나갈 것 같은 분위기라 그의 허리를 껴안고 얼굴을 비벼댔다. 업무와 관련된 전화를 받은 서인은 구겨진 얼굴로 무명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한숨을 쉬었다.
“뭐가 유출됐다고요?”
- 어떤 경로로 새어 나가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직원들이 사실이냐고 묻고 난리가 났습니다. 제가 수습은 해뒀는데, 대표님께서 직접 설명을 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일단 그쪽으로 가죠.”
서인에게 달라붙어 이 비서와의 전화 내용을 듣던 무명은 자세히는 모르지만, 일단 심각해 보이는 상황임을 인지하고 천천히 일어나 주변을 정리했다. 전화를 끊은 서인은 옷을 입고 도구들을 정리하는 무명의 뒤통수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명아.”
“…다녀오세요. 무슨 안 좋은 일 생기신 것 같은데 제가 잡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저는 공부하고 있을게요….”
“…미안.”
무명은 짧은 사과와 함께 사라지는 서인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집에 들어와 식사한 뒤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지도 못하고 사라진 그가 미울 만도 한데 무명은 투정을 부리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닌 제가 대단한 서인에게 폐를 끼칠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 주제에….”
무명은 서인과 함께한 이후로부터 순해지긴 했지만, 그만큼 자존감이 땅 밑으로 처박혔다.
마켓에서는 학대를 당하고 강제적인 노동을 해야 했지만, 적어도 저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조아리고 치켜세워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누구도 무명을 치켜세워주지 않았다. 대욱 역시 무명이 서인의 사람이기에 존중하는 것뿐이지 그를 진정으로 위하는 것은 아니었다.
무명도 그러한 상황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런 데다가 이 비서가 들쑤셔놓기까지 하자 무명은 점점 우울해졌다. 따뜻한 곳에서 먹여주고 재워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자꾸만 더 한 것을 원하게 되었다.
“흐….”
아직 서툴고 무지한 무명은 어지러운 아지랑이 같은 감정을 감당하지 못했다. 서인 역시 저밖에 모르고 일이 중요한 인간이었으니 혼란스러워하는 그를 단단히 붙잡아주지 못했다.
“별 좆 같은 게 신경 쓰이게 하고 있네.”
이 비서의 보고를 받고 회사로 간 서인이 차 키를 거칠게 내려놓으며 혀를 찼다. 상용화가 한 달도 남지 않은 시점에 회사로 불법실험을 자행한 사실을 알리겠다는 협박 서류가 도착했기 때문이다.
논란이 된다면 입막음하면 될 일이고 방해가 되면 죽여버리면 그만이니 크게 대응하지 않고 무시했지만, 그 뒤에 도착한 서류는 서인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딴 협박성 서류 때문에 무명을 따먹지 못하고 온 것도 화가 났다.
“대표님,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상용화에만 집중….”
“해결? 그렇게 자신 있으면 애초에 이딴 게 내 눈에 띄게 하지 않았겠지. 왜 미리 막지 못하고 터지고 나서야 움직이지? 네가 내 옆에서 붙어서 하는 게 뭐가 있는데.”
이 비서를 집으로 보낸 서인은 대욱에게 서류를 집어 던지며 모진 말로 그를 비난했다. 무릎을 꿇고 앉아 문제의 서류를 살펴본 대욱은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고개를 푹 숙이고 서 있었다.
서인이 지난 몇 년간 마켓의 고기를 사들인 내용을 압축한 서류가 그의 손에서 구겨졌다.
“쓸모없는 새끼. 됐으니까 나가, 꺼져.”
“죄송합니다.”
“내일부턴 네가 무명이한테 가. 이 비서랑 진행할 테….”
“대표님!”
저를 비난하는 말에도 불쾌한 기색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대욱은 업무에서 배제하겠다는 말에 목소리를 높였다. 구겨진 미간과 힘이 실린 아래턱이 그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전부 제 실수입니다. 다신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서인이 대답하지 않자 대욱은 무릎까지 꿇으려 했다. 보다 못한 서인이 알았으니까 그만하라며 그를 내쫓고 나서야 상황이 정리되었다. 어차피 모두 쉽게 덮을 수 있는 일이었다. 발각될까 봐 두려웠다면 애초에 하지 않았을 테였다.
“하….”
그러나 두 가지 서류를 동시에 보낼 수 있는 사람은 레드 마켓에 몸담은 사람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앞으로도 연을 맺어야 하는 곳에 배반자가 있다면 하는 일마다 골칫거리가 될 테니 말이다. 추려 내보려 해도 하도 여기저기 원한을 사고 다녀서 어떤 놈인지 짐작조차 어려웠다.
“대표님, 잠시….”
“네.”
서인은 평상시에도 바쁜 편이지만, 상용화가 가까워지자 좀처럼 생각을 할 시간도 없었다. 아주 잠깐 쉴 시간이 나서 무명을 만나러 갔던 건데 예상치 못한 일 때문에 한 달은 혼자 두게 생긴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미안해. 엉덩이에 약 바르고, 알았지?]
서인은 짧은 메시지를 보낸 후 답장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일에 몰두했다. 무명이 조금 징징거리긴 하겠지만, 잘 버텨주리라 믿었다. 그 믿음이 현재 불안정한 그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되는지 그때는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 ♢ ♦
[사랑해주세요, 사랑해주세요, 형.]
[저 아픈 거 같으니 집에 와주세요. 이 비서 말 잘 듣고 있어요. 네?]
[보고 싶어 죽을 거 같아요. (
♦ ♢ ♦
´∩`
♦ ♢ ♦
)]
그로부터 한 달이 다 되어가자 무명은 점점 서인에게 연락하는 횟수가 늘었다. 분리불안이 심했던 때보다 더해서 사랑을 갈구하는 메시지는 조난자의 구조요청처럼 간절했다.
“하아…. 서인이 형이 오늘도 문자 답장 안 해줬어.”
“해주는 건 없고 바라기만 하니까 귀찮아서 답 안 해주시죠.”
무명은 잘게 자른 딸기를 먹으며 이 비서에게 징징거렸다.
서로 죽어라 싸워대고 비난할 땐 언제고 둘은 그동안 꽤 가까워졌다. 무명은 주사를 두 번 맞고 약까지 먹은 날 이후로부터 이 비서가 말을 높이며 친절하게 변한 것을 수상하게 여기긴커녕 굉장히 좋아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
저도 서인처럼 아는 사람이 많아지고 친구라는 게 생겼으니 서인이 말하는 양지 사람에 가까워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엉덩이를 맞은 후로 자해하려던 무명을 말린 게 이 비서였다. 물론 그는 다른 목적이 있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무명은 의심 없이 친절한 그를 따랐다.
“제가 방법을 좀 알려드릴까요? 이래 봬도 저 대표님을 꽤 오래 보필해 왔거든요.”
배가 볼록할 정도로 과일을 주워 먹던 무명이 방법을 알려주겠다는 말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집중했다.
“응, 어떻게 하는 건데?”
“대표님께 도움이 돼야죠! 가끔은 선물도 드리고 일에 도움도 드리고요.”
“선물 드릴 돈도 없고…. 형 일은 어려워서 잘 모르는데.”
“제가 있잖아요, 제가!”
이 비서는 이상하리만큼 적극적이었지만, 무명은 서인을 기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하여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간단하게 대표님께 도움 되는 사진이나 영상 좀 찍고 저한테 돈 받아 가시는 거예요.”
“돈? 촬영만 하면 돈을 준단 말이야?”
“네, 대표님께 선물 하나는 드려야죠, 그렇죠?”
“응!”
그 후 무명은 이 비서가 시키는 대로 촬영할 준비를 하고 서재에서 서류 몇 장을 가져왔다. 이 비서가 시키는 대로 가져온 거라 무슨 내용을 담은 서류인지는 몰랐다. 그래도 서인의 서재에 있는 물건을 함부로 손대면 안 된다는 건 알아서 잠시 망설였다.
“이걸 왜 가져가는데?”
“대표님께 도움이 되는 일이에요. 따로 사람 써서 하는 일인데, 무명 님이 해주시면 얼마나 좋아하시겠어요? 쓸모있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쓸모 있는 사람….”
“그래요, 쓸모 있는 사람. 대표님께서는 이득을 위해서라면 뭐든 하시고 돈 좋아하시는 거 알죠?”
“…알아, 내가 더 잘 알아!”
“그래요, 그러니까 같이 일해 봐요. 한 건당 100만 원 어때요?”
“백, 백만 원이나?”
무명은 서인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과 백만 원이라는 큰돈에 넘어가 이 비서를 의심 없이 따라나섰다. 서재에서 나와 그의 차에 올라탄 무명은 수표를 받아들고 제가 할 일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우, 우와…. 정말 백, 백만 원이다!”
“잘하시면 더 많이 드릴 수 있어요.”
“저, 정말?”
“네, 간단해요, 서재에서 지금처럼 서류 몇 장 가져오고 서재 내부만 찍어오면 돼요. 아, 안절부절못하고 손 떨면서 웃기도 해보세요.”
“왜?”
“그게 일이에요. 그리고 가끔 다른 곳에 가야 할 일도 있을 테니까 여행용 가방 있죠? 그거 끌고 들어가서 서재에서 옷이나 속옷도 챙겨두시고요.”
“…응.”
말도 안 되게 의심스러운 상황에도 무명은 서인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착각에 휩싸여 홀라당 넘어갔다. 이 비서가 머리도 쓰다듬어주고 인사도 받아주자 기분이 좋아진 무명은 집으로 뛰쳐 들어가 서재에서 짐을 싸기 시작했다.
“나도 일을 하는 거야! 보통 사람들이 할 만한 일을 하는 거라고!”
무명은 서인의 서재를 마음대로 뒤적이며 웃었다. 그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닌지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서류를 들어 올린 무명은 마켓에서 주고받는 고기 주문서를 촬영했다. 이게 왜 필요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무명은 서인의 명령이라고 하니 크게 의심하지 않았다.
“전송했어!”
서인이 작성한 주문서와 고기를 부위별로 나눠 쌓아둔 냉동창고를 촬영한 무명은 이 비서가 알려준 개인 연락처에 사진을 전송하고 전화를 걸었다.
이 비서는 꽤 치밀했다. 무명이 지우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대화 내용이 사라지는 메신저를 사용했다. 앱도 투명 아이콘으로 처리해 자세히 보지 않고서는 누를 수도 없게 해둔 뒤 정보를 쏙쏙 빼내 갔다.
“잘하셨어요. 이렇게 하면 또 백만 원 받는 거예요, 아시겠죠?”
“응, 알았어!”
“제가 이따 집에 가서 대화방에 초대해드릴 건데요, 시키는 대로만 보내시면 돼요.”
“응!”
방긋방긋 웃는 이 비서의 입가가 경련하기 시작했다. 억지웃음을 눈치채지 못한 무명은 도와줘서 고맙다며 그에게 고개 숙여 꾸벅 인사했다. 배웅하고 방으로 들어온 무명은 사정없이 쿵쿵 뛰어대는 가슴을 문지르며 기대했다.
“형이 좋아하겠지!”
우울하고 슬프고 괴로워도 서인이 좋아한다면 그럭저럭 버틸 만했다. 무명은 그가 돌아오는 날까지 일을 열심히 해서 돈을 모으고 징징거리지 않는 남자가 돼보기로 했다.
“어!”
서인에게 비싼 선물을 사주고 좋아할 모습을 상상하던 무명은 이 비서에게 메시지가 도착한 것을 보고 방긋 웃었다.
[앞으로 메시지는 여기로 보내시면 됩니다. 다른 말은 절대 보내지 마시고 ‘입금 확인. 임무 완료’라고만 보내세요. 가끔 ‘입금 언제? 라는 말도 좀 섞으시고요.]
[응!]
[수장님께 받으라고 말씀하실 텐데, 답장 안 하셔도 됩니다.]
[응!]
이 비서는 Code Name:R-7이라는 제목의 채팅방을 연결해주고 사라졌다. 그는 업무 이외의 메시지는 받지 않으며 신뢰를 잃으면 바로 거래를 파기하겠다는 말을 공지로 올려놓았다.
[자료 확인했습니다. 이번 대가는 수장님을 통해서 받으십시오.]
“아!”
임무를 완료한 무명이 신이나 펄쩍펄쩍 뛰다가 배를 감싸 쥐고 주저앉았다. 그는 요즘 따라 이상하게 입맛이 돌고 배가 아프고 볼록 튀어나와서 불편함을 호소했다. 서인에게 말하니 작작 먹어야 배가 들어간다고 욕만 들어서 더는 말하기도 부끄러웠다.
“윽, 으….”
전신 거울로 달려가 제 배를 본 무명은 주먹으로 툭툭 내리치며 들어가라고 소리쳤다. 못생겨지면 서인이 저를 버릴 텐데 살이 쪄서 배가 나왔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만 먹고 살을 빼야 하는데, 딸기나 새콤달콤한 음식이 당기고 입맛이 돌았다.
“나는 왜 다 이렇게 못났지….”
뱃살뿐만 아니라 갓 구운 빵처럼 부푼 머리카락도 흉해 보였다. 언제나 이마를 시원하게 드러낸 채 깔끔히 정리된 서인의 머리를 떠올린 무명은 그를 따라 해보려 머리에 이것저것 바르기 시작했다.
“아니야, 서인이 형은 이렇지 않은데….”
머리에 온갖 스킨로션을 처바른 무명은 제 얼굴을 서인과 비교하며 홀로 속상해했다. 사납고 차가워 보이는 서인과 달리 눈꼬리가 축 처졌고 눈은 쓸데없이 큰 데다가 쌍꺼풀 짝짝이인 얼굴이 너무나도 싫었다. 입 바로 옆에 남은 큰 흉터와 창백한 피부색도 마찬가지였다.
“못생겼어….”
충분히 예쁜 얼굴을 달고 있으면서도 제 외모를 못났다고 생각하는 건 그의 미의 기준이 서인이었기 때문이다. 서인은 전형적인 사나운 인상의 미남이었고 무명은 새하얗고 화려한 상으로 서로 결이 다를 뿐인데 무명은 제가 못났다고 생각하며 자존감을 갉아먹었다.
쌍꺼풀이 없이 큰 서인의 눈과 부리부리한 제 눈을 비교한 무명은 입술을 삐쭉 내밀고 티셔츠를 벗어 던졌다.
“…아니야.”
배는 좀 나와도 어깨나 다른 곳은 꽤 예쁘지 않을까 기대했던 무명은 상처 가득한 흰 몸과 힘을 주지 않으면 말랑말랑한 제 가슴을 만지며 울먹였다. 서인의 몸은 상처하나 없이 단단하고 예쁜 근육들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제 몸은 그렇지 않으니 속상하기만 했다.
무명은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이라 잘생긴 것보단 저는 왜 서인과 다르냐며 어딜 보아도 못생긴 제 아버지를 욕했다.
♦ ♢ ♦
“흐으….”
며칠이 지나자 무명은 땀을 흘리며 배앓이를 했다. 이 비서는 무명이 아프든 말든, 대충 핫팩을 배에 대주고 영상 촬영을 강요했다. 대본을 받은 무명은 서인과의 첫 만남을 떠올리고 아픈 와중에도 헤실헤실 웃었다.
“뭐 하는 거예요. 빨리빨리 하자니까요?”
그 앞에 버티고 선 이 비서는 녹음기를 몇 번이나 껐다 켜며 화를 냈다. 무명은 그가 적어준 대본을 보고 읽으며 계속해서 길게 신음했다.
“연기 톤으로 읽지 말고요!”
“오늘 안 하고 내일 하면 안 돼?”
“미리 해두는 게 좋다니까요?”
무명은 몸이 불편하기도 했지만, 무슨 뜻인지 모르는 어려운 단어들이 가득한 대본을 읽고 싶지 않았다. 한 마디 내뱉을 때마다 제 무식함이 드러나는 것만 같아서 서러웠다.
“MS 그룹의 이사이자 SI 제약회사의 대표 권서인의 악행을 고발합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권서인 대표의….”
무명이 낮은 톤으로 대본을 읽기 시작하자 이 비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지었다. 칭찬과 미소에 약한 그는 찝찝함을 뒤로하고 열심히 연기했다.
“지난 8일 SI 제약회사 내부에서 불법 임상시험 의혹이 불거졌습니다. 그에 권서인 대표는 증거 없는 헛소문이라며 직원들을 단속하기 바빴습니다.”
무명은 뜻 모를 대본을 읽어내리며 30분간 녹음을 해야 했다. 이 비서는 만년필 모양의 녹음기를 품에 넣고 실성한 사람처럼 웃었다. 게다가 무명을 꽉 끌어안기도 했다. 무명은 이 비서에서 복덩어리라는 말을 듣자 얼굴을 붉히며 기뻐했다.
“서인이 형도 좋아하시겠지?”
“그럼? 좋아만 하시겠어? 아주 미치실 걸?”
이 비서가 서인을 배신하려는 것을 모르는 무명은 소파 위를 데굴데굴 구르며 좋아했다. 이 비서는 꽤 오랫동안 계획해왔던 일이 무명 덕분에 성공했다며 수없이 칭찬했다.
“다 무명 님 덕분이에요, 사랑합니다!”
“아, 싫어! 놔!”
기고만장한 서인의 콧대를 눌러줄 생각에 흥분한 그는 무명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헝클였다. 발악하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는 모습에 무명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런데 왜 그렇게까지 좋아해?”
“네?”
“서인이 형이 좋은 일인데, 왜 이 비서가 그렇게 좋아햐나고. 이상하잖아.”
무명은 이미 저지를 건 다 저질러놓고서 뒤늦게 의심했다. 당황한 이 비서는 제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무명의 시선을 피하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해댔다.
“대표님을 존경해서 입사했으니까요. 이제는 고생 그만하시고 행복하셨으면 해서요.”
“서인이 형 안 행복해?”
“안 행복한 건 아니지만, 이번 약물을 위해서 사셨다고 봐도 무방해요. 스트레스 많이 받으셨거든요.”
“…그래?”
아무리 의심을 해봐야 사회생활 경험이 없고 순수한 무명이 이 비서의 경험치를 이길 수 없었다. 우선 서인과 행복이 동시에 나온 상황에서 끝난 게임이었다. 무명은 결국 홀라당 속아 넘어가서 더는 이 비서를 의심하지 않는 단계까지 가버렸다.
“그럼 주사도 맞았으니 저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 잠깐만! 자꾸 배가 나오고 배가 아프고 속이 울렁거리는데…. 약이 잘못된 건 아니지?”
“대표님이 만드신 약물을 못 믿으시는 겁니까?”
“내가 언제 그랬어! 아니야! 됐어, 가!”
절대 못 믿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무명은 저를 의심하는 이 비서의 등을 떠밀고 문을 잠근 채 침대에 드러누웠다. 자꾸만 어지럽고 배가 나오는데, 원인도 모르고 말할 곳도 없어서 무서웠다.
“우욱!”
가만히 누워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자 갑자기 뱃살이 볼록한 자신이 더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역질하던 무명이 벌떡 일어나 화장실에서 구토하기 시작했다.
“흐, 하아, 하….”
입에 손을 집어넣고 먹은 속을 게워내고 나서야 몸이 가벼워졌다. 화장실 바닥에 주저앉아있던 그는 식욕을 억제할 수 없다면 차라리 이렇게 먹고 토하는 게 낫겠다며 계속 억지로 토해냈다.
서인이 곁을 지켜주지 않으니 무명의 정신건강과 신체 건강이 점점 쇠약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