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형! 왜 나만 놓고 가요!”
서인은 아침 댓바람부터 무명의 징징거리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가 일어나기 전에 출근하려 했지만, 드라이 소리를 듣고 잠이 달아난 무명은 준비하는 내내 뒤를 따라다니며 떠들어댔다.
“같이 가요!”
“안 돼, 형 일하러 가는 거야.”
“그래요, 같이 가서 일해요! 그때 했던 거 조금만 도와주시면 돼요! 아니, 그냥 지하실에서 주무셔도 돼요!”
무명은 제 아지트로 돌아갈 일은 없을 거라는 서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어제보다 더 절박하게 매달리며 같이 나가자고 졸라댔다.
“거긴 두 번 다시 안 간다고 했지.”
“왜요!
“내가 없으면 회사가 안 돌아가. 알아듣겠어?”
서인은 화내지 않고 상황을 정리하고자 무명이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주었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등을 토닥여주기까지 했는데도 잠잠해지긴커녕 그는 난동을 피우며 도자기를 던져버리겠다고 되지도 않는 협박을 해댔다.
“이거 던질 거예요!”
“마음대로 해.”
“진짜로 던질 수 있어요, 농담 아니에요!”
마음대로 하라는 말에 무명이 도자기를 번쩍 들어 올렸다. 이대로 집어 던진다면 서인도 그냥 봐주고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죽도록 패서라도 망할 손버릇을 고쳐놓으리라 다짐하고 먼저 나긋나긋하게 경고했다.
“어떻게 하든 그건 네 자유야.”
“…….”
“근데 형은 물건 던지는 사람 싫어해. 안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럼 가지 말아요. 안 가면 안 던져요, 같이 가도 안 던질게요.”
“명아, 형이 널 싫어했으면 좋겠어? 왜 자꾸 실망할 일을 만들지.”
지친 서인의 얼굴을 마주한 무명이 얌전히 도자기를 내려놓고 그의 허리를 껴안았다. 안 갔으면 좋겠는데, 바라는 건 오직 그것뿐인데 들어줄 생각을 않으니 눈물이 났다.
“기다리고 있어. 금방 올게.”
“아니에요, 가지 말아요. 그냥 가지 마세요….”
서인은 울먹이는 무명의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질질 짜는 건 싫어도 딱 달라붙어서 절박하게 매달리는 모습이 귀엽긴 했다. 당장 엎어놓고 어떻게 하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고 신발을 신자 무명이 목소리를 높였다.
“형, 나 버리지 말아요! 형!”
“안 버려. 여섯 시에 퇴근할 거야. 그때까지만 기다려.”
“오래 걸리잖아요, 데려가요! 같이 가요!”
서인은 계속 말을 받아주다가는 출근하지 못할 것 같아 무명을 너무 하다 싶을 정도로 밀어내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 후 나오지 못하게 밖에서 문을 단단히 잠갔다.
“형! 가지 말아요, 아!”
꽉 막힌 문 앞에 선 무명은 곧 죽기라도 할 것처럼 비명을 지르며 울기 시작했다. 문을 두드리고 바닥에 주저앉아 팔다리를 흔드는 등 장난감을 사주지 않아 토라진 아이처럼 굴었다.
“나오지 못하게 해. 손대지는 말고.”
“네, 대표님.”
서인은 나갈 수 없는 장치를 설치해둔 것도 모자라서 대욱에게 집 앞을 지키라고 명령했다. 다른 수행원들 여럿보다 대욱 하나가 더 믿음직스러워서 내린 결정이었다.
♦ ♢ ♦
“꺼내주세요!”
서인이 떠나고 나서도 한참 넋을 놓고 서 있던 대욱은 고함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서인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무명이 싫든 좋든, 명령이니 개인적인 감정을 드러내지 않아야 했다. 이미 여러 번 마음대로 행동하긴 했어도 그래선 안 된다는 자각 정도는 있었다.
그는 꺼내 달라고 발악을 하는 무명을 진정시키기 위해 집 안으로 발을 들였다.
“네가 왜 와! 왜!”
열리는 문을 보고 서인이 돌아온 것은 아닐까 기대했던 무명은 대욱을 보자마자 분노했다. 그는 머리끝까지 차오른 분을 이겨내지 못하고 진열된 도자기와 잔을 모두 깨부수고 벽에 머리를 찧었다.
“흐윽, 흑….”
깨끗했던 거실이 난장판 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무명은 엉망이 된 바닥을 내려다보며 주저앉았다. 그는 서인이 잘못했으니 이 정도 값은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실망했다며 한숨 쉬는 얼굴을 볼 생각을 하자 눈앞이 캄캄해졌다.
“하아, 하….”
서인이 화내는 모습을 상상한 무명이 가슴을 움켜쥐었다. 발끝에서부터 두려움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그도 서인이 하지 말라는 일은 되도록 하지 않으려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다만 지금처럼 제 일을 빼앗고 집에 가두는 것은 도무지 참을 수가 없다.
‘마음대로 해. 참고로 형은 물건 던지는 사람 싫어한다?’
서인과 자신의 잘못을 비교해보던 무명은 그의 경고를 떠올리며 도자기를 깬 것을 후회했다. 산산조각이 나서 다시 붙이기도 힘들 것 같았다.
“흐, 으윽….”
“괜찮으십니까?”
눈 깜짝할 새에 일어난 일이라 돌발행동을 막지 못했던 대욱이 무명의 상태를 살폈다. 서인의 명령에 안전도 포함되어 있음을 알기에 깨진 도자기를 한쪽으로 치워두고 다가가도 무명은 고개를 푹 숙이고 연신 중얼거리기 바빴다.
“접착제, 접착제…. 어떡하지, 어떡하지. 붙여야 해, 붙이면 용서받을 수 있어!”
이미 부숴버린 걸 되돌릴 순 없으니 다시 붙이기라도 하면 조금이나마 용서를 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런 생각으로 눈에 보이는 서랍이란 서랍은 전부 열어보고 이곳저곳 다 뒤져보았는데 접착제는 보이지 않았다.
“흐윽, 흐….”
접착제를 찾지 못한 무명은 대욱이 모아둔 도자기 파편 쪽으로 다가갔다. 대욱은 그가 깨진 조각에 손을 뻗자 단호하게 밀어내며 만지지 못하게 했다.
“뭐 하는 거야!”
“제가 치우겠습니다.”
“내가 할 거야! 내가 한다고!”
붙이지 못할 거라면 그대로 두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게 아예 버리는 편이 낫다. 무명은 대욱을 밀치고 비닐봉지를 찾아 헤맸지만, 그 역시도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그 흔한 접착제도 없고 반드시 있어야 할 쓰레기봉투도 없으니 무명은 서인이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이 맞는지 궁금해졌다. 커다란 봉투를 하루에도 몇 번씩 사용하는 그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역시 내가 꼭 옆에 붙어 있어야 해.”
슬피 울던 무명은 제가 서인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울다가 웃었다. 생활력 하나는 자신 있었기에 집안일을 해 서인을 기쁘게 해주고 싶었다. 그에게도 모자란 점이 있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설레는 마음을 애써 달래고 봉투를 찾아 이리저리 정신없이 돌아다니던 무명이 오랜 시간 고민하다가 대욱을 불렀다.
“야!”
“예.”
“비닐봉지 하나만 줘.”
“깨진 건 제가 치우겠….”
“시끄러워! 내놓으라고! 필요해! 필요하단 말이야!”
무명은 대욱이 미웠다. 서인의 명령을 수행하는 게 전부인 주제에 집에 들어와 주인인 것처럼 행동하니 좋게 보일 수가 없었다. 서인이 자신과 비교까지 하며 그를 신뢰하니 더더욱 그랬다.
“그럼 형한테 전화해!”
끝끝내 봉투를 받아내지 못한 무명이 선택한 것은 잘못을 솔직히 털어놓는 일이었다. 그는 대욱을 붙잡고 흔들며 서인에게 전화를 걸어 달라고 투정을 부렸다.
“얼른 전화해, 전화하라고!”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왜 기다려! 내, 내가 전화하면 형도 좋아할 거라고!”
요즈음 서인이 예민하고 피곤한 것은 열에 아홉이 무명 때문이었기에 대욱은 섣불리 전화를 걸지 않았다. 이미 줄줄이 꿰고 있는 일정을 확인하는 척하며 시간을 끌었다.
“일단 진정하세요. 대표님 일정 확인 후에 전화하겠습니다.”
“못 기다려, 싫어!”
전화를 해주지 않자 급기야 무명은 드러누워 허공에 발길질하며 몸을 흔들어댔다. 서인의 일을 방해하지 않고 상황을 해결해보려던 대욱은 그가 벽에 머리를 찧으려고 하는 탓에 어쩔 수 없이 휴대전화를 건넸다.
“일어나세요.”
이 역시도 서인을 위해 내린 결정이었다. 일을 방해받은 스트레스보다 무명이 다쳤을 때 받을 스트레스가 더 클 것 같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아, 하아….”
황급히 휴대전화를 받아든 무명의 손이 사정없이 떨렸다. 서인에게 도자기를 깼다고 솔직하게 말하기로 다짐한 그는 숨을 몰아쉬며 입술에 몇 번이나 침을 발랐다.
“혀, 형. 제가 도자기를 깼어요, 그게,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닌데, 화 나서…. 그리고 형도 잘못했으니까….”
서인이 아직 전화를 받지도 않았는데 잘못을 고백하며 횡설수설 댔다. 계속 말해도 대답 소리가 들려오지 않자 액정을 확인해 본 무명은 전화가 걸리지 않은 것을 보고 심호흡을 했다.
이번엔 버튼을 정확히 눌렀다. 신호가 몇 번 가지도 않았는데, 서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 어, 왜.
“형!”
무명은 서인의 목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벌떡 일어나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말을 이었다. 서인은 왜 네가 받느냐는 목소리로 대욱을 찾았고 무명은 그가 반가워하지 않자 풀이 죽었다.
- 너, 밖에 나온 거 아니지?
“아니에요. 그 남자가 휴대전화 빌려줬어요.”
- 곽대욱 실장이?
“네.”
- 그래, 그래서 왜.
“제가 도자기를 깼어요. 버렸는데, 접착제도 없고 봉투도 없어서….”
- 던졌다는 거야? 실망이네.
전화기 너머로 서인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무명은 실망했다는 말에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한동안 아무런 말도 못 했다. 커다란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실수라고 변명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게…. 그, 그게….”
당황하다 보니 무명은 예전처럼 말도 심하게 더듬었다. 설상가상으로 서인의 주변이 시끌시끌하고 다른 남자들의 목소리까지 들리자 제대로 말을 이어나가지 못했다.
- 이미 깬 건 되돌릴 수 없지. 도자기도 깨지고 형이랑 한 약속도 깨지고.
“형, 제가 잘못해….”
- 분명 싫다고 했었는데, 일부러 그런 거지?
“아니에요!”
- 너는 내가 싫어서 도자기를 막 집어 던진 거야. 어지럽힌 건 실장님한테 말해서 치워두라고 해.
“형…. 잘못했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 네가 충분히 반성할 때까지 집에 안 들어갈 거야. 잘됐네, 어차피 너 형이랑 그 집에서 살기 싫어했잖아. 그러면 되겠네.
“형, 형!”
서인이 기분 상한 티를 내며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무명은 혼이 날 건 예상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솔직히 말하면 용서해주지 않을까 기대도 하고 있었다. 집에 들어오지 않겠다는 말은 예상에 없었기에 몇 배는 더 충격적이고 겁이 났다.
“형 데려와, 형 데려와!”
서인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자 무명이 대욱을 향해 휴대전화를 집어 던졌다. 아무렇지 않게 받아든 대욱은 엉망이 된 거실을 치우며 말을 얹었다.
“얌전히 기다리고 계시는 게 좋을 겁니다. 대표님께서는 한 번 한 말은 꼭 지키시는 분이라.”
“무슨 소리야!”
“무명님께서 충분히 반성하면 돌아오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모든 건 무명을 집에 붙어 있게 만들려는 계획의 일종인데, 영문을 모르는 그는 도자기를 다시 붙여야 한다는 말만 반복했다. 대욱이 집을 치우고 나가버리고 나서부터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었다.
“아니야, 아니야!”
무명의 머릿속은 쓸데없는 생각으로 가득 차 터지기 직전이었다. 이 집에 적응하라는 서인의 뜻을 파악하지 못한 그는 구석에 처박혀서 엉엉 울기 바빴다.
무명은 온종일 울기만 했다. 밥을 먹으라고 상을 차려준 것도 모를 정도로 오열을 해댔다. 해가 지고 캄캄한 저녁이 되어도 불을 켜지 않자 보다 못한 대욱이 들어와 조명을 밝혔다.
“계속 이러고 계실 겁니까.”
“나가!”
지랄 맞은 건 여전했다. 그는 대욱에게 쿠션을 집어 던지며 나가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런 상황에서 대욱이 할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뿐이었다.
“식탁에 앉으세요. 대표님 명령입니다.”
“…….”
말을 듣지 않으면 영영 돌아오지 않겠다는 말을 남겼다고 으름장을 놓자 무명이 몸을 일으켰다. 대욱은 그가 식탁으로 오자마자 식은 음식을 데우고 수저를 쥐여주었다.
“무슨 명령인데….”
“간단합니다. 식사하세요. 말을 잘 들으면 돌아오실 거예요.”
간단한 명령이라 무명도 혹했다. 안 그래도 배가 고팠던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릇에 손을 뻗었다.
“아!”
그와 동시에 대욱에게 손등을 얻어맞았다. 어찌나 세게 때리는지 맞은 부위가 욱신거리고 뜨거웠다. 영문을 모르는 무명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눈을 부라렸다.
“왜 때려!”
“손으로 드시면 안 됩니다. 수저가 있지 않습니까.”
느릿느릿 수저로 먹는 건 무명에게 불가능 한 일이었다. 어떻게든 해보려고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으으, 으으…. 못 해! 사라질 거야, 음식이, 음식이!”
대욱이 손등을 때리며 말려도 무명은 여전히 불안해했다. 수저 사용하는 법이 머리에 아예 없는 것처럼 자꾸 손을 쓰려 했다. 안 된다고 몇 번을 교정해줘도 멈추지 못했다.
“수저 내려놓으세요.”
무명이 장식으로 들고 있던 수저를 건네받은 대욱은 이제는 그에게서 음식도 빼앗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밥이 사라지고 그 후에 반찬이 사라지자 무명이 머리를 감싸 쥐고 비명을 질렀다.
“안 돼, 내 거야! 내 거야! 안 돼! 흐, 아아아, 흑…. 뺏어가지 마, 안 돼, 배고파! 배고파!”
무명은 그릇을 사수하려 애썼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가져가지 말라고 비는 모습에 대욱이 한숨을 쉬었다.
수저를 사용하지 않으면 먹이지 말라는 서인의 명령을 지켜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빼앗긴 했지만, 정신이 아픈 사람을 학대하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우욱, 욱….”
무명은 면 요리를 손으로 덥석 쥐고 입에 마구 쑤셔 넣었다. 대욱의 손이 아무리 빠르다고 한들 목숨을 건 것처럼 달려드는 그를 막기엔 역부족했다.
괴로워하면서도 멈추지 못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대욱은 그릇을 다시 가져다 놓고 무명을 달랬다.
“안 뺏을 테니 천천히 드세요.”
서인의 명령을 어기는 일이긴 했지만, 여기서 뺏어버리면 더 큰 문제가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대욱은 무명의 앞에 앉아 음식을 천천히 먹는 방법과 수저를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흐으, 윽….”
무명은 침착하게 방법을 가르쳐줘도 들을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대욱은 반복해서 설명해주었다.
“배부르면 남겨도 됩니다. 사라지지 않고 원할 때면 언제든 드실 수 있어요.”
“아니야….”
무명은 믿을 수 없다는 것처럼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릇을 끌어왔다. 대욱이 자꾸 말을 걸어서 신경을 쓰느라 먹는 시간이 늘어났음에도 누군가 음식을 빼앗아가지 않자 그는 당황했다.
“보세요. 손을 씻고 돌아와도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아직 경계 가득한 눈빛이기는 했지만, 무명은 욕실에서 손을 씻고 돌아왔다. 물론 오는 길에 혹시라도 없어졌을까 봐 달려오다가 몇 번을 넘어지고 벽에 부딪히기도 했다.
“…….”
그렇게 시간을 끌었는데도 대욱의 말대로 음식은 사라지지 않았다. 무명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릇을 바라보았고 대욱은 그의 문제를 파악했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내일은 아침에도 식사하도록 하죠.”
대욱이 인사를 한 뒤 현관으로 향하자 무명은 그를 흘끔흘끔 쳐다보며 음식을 씹어 넘겼다.
꾸역꾸역 다 먹고 나서 몸을 벅벅 씻은 무명은 시무룩한 얼굴로 서인의 침대에 누웠다. 나갈 수도 없고 서인에게 전화도 못 거는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베개를 껴안는 것뿐이었다.
“흐윽….”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은 참으로도 힘든 일이었다. 방에서 서인의 냄새가 나는 게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잠이 안 와, 어제는 잘 잤는데….”
무명은 듣는 사람도 없는데 혼자 떠들어대며 흐느꼈다. 수면제 때문에 푹 잔 것을 알 리가 없는 그는 이게 다 서인이 곁에 없어서 일어난 일이라며 원망하고 그리워했다.
연구소에서 하염없이 기다렸던 날보다 몇 배는 더 괴로웠다. 무명은 눈을 질끈 감고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 ♢ ♦
“대표님, 지하실은 어떻게 할까요?”
“그냥 둬.”
“네, 알겠습니다.”
무명을 두고 나온 지 나흘째. 서인은 제 할 일을 모두 마무리해놓고 예전에 지어두었던 별장에 머물렀다.
무턱대고 지어놓기만 했지 가구는 들이지 않았던 곳인데, 나흘간 많은 물건이 들어왔다. 커다란 절단 기계, 전기톱, 알파벳이 각인 된 작업 도구 등으로 모두 서인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었다.
“이 비서, 이 정도면 쓸만한 거 같지?”
서인이 별장 내부를 둘러보며 물었다. 무명의 마음에 드는 게 가장 중요했지만, 객관적인 평가가 궁금했다.
무명과 어울리게 디자인에도 신경을 썼고 이전의 낡은 도구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값비싼 것들로 바꿔주었다. 바쁜 몸을 이끌고 별장으로 출퇴근하게 된 것도 이곳을 작업실로 개조하기 위함이었다.
“네, 인적도 드물고 지하실은 방음도 되어있으니 이 정도면 훌륭할 거 같습니다.”
물론 무명이 머물던 곳은 연구소 소유인지라 규모는 따라잡을 수 없지만, 그 밖의 것들은 비교하기 미안할 정도로 서인의 별장이 우세했다.
“그런데, 계속 그 일을 하게 두기엔 위험하지 않습니까?”
“한두 번 놀아주다가 못 하게 해야지, 뭐. 어쩌겠어.”
이 비서는 살인과 도축을 위한 장소가 완성되자 굳은 얼굴로 물어왔다. 서인도 영 내키지는 않았지만, 지금으로서는 별장을 개조해서 작업하게 만드는 것이 최선책이었다.
“연구소에 가 봐.”
“네, 알겠습니다.”
연구소에 가보라는 말에 이 비서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살인이 일어날 예정인 장소에 있는 게 어지간히도 싫은 모양이다.
서인은 이유도 묻지 않고 꾸벅 인사를 한 뒤 자리를 떠나는 그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는 이 비서의 반응에 사람을 죽이는 게 자리를 피할 정도로 무섭고 꺼려지는 일인가 하는 의문을 품었다.
살인이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인지하고 있지만, 직접 본 것도 아니면서 저렇게까지 무서워하는 건 이상했다. 죽어도 마땅한 사람을 죽이는 건 나쁜 일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서인의 살인 대상은 대부분 제 앞길을 막는 사람이다. 무명도 의뢰를 받거나 죄를 저지른 사람을 죽였다. 그러니 살인은 어쩌면 사회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물론 무명이 사람을 고문하는 모습을 직접 봤을 땐 그의 또 다른 피해자가 될까 봐 도망치려고는 했지만, 제가 피해자가 되지 않는다면 아무 상관이 없다.
서인은 이렇게 합리적인 이유가 있는 살인이라면 몇 번쯤 해 봐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호들갑은.”
괜히 난리를 떠는 이 비서의 행동에 불쾌해진 그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대욱에게서 온 보고 메시지들을 다시 한번 확인해 보았다.
[오늘도 수저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조심스럽지만, 제 생각엔 무명 님에게 음식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로 인해 느끼는 불안감도 커 보입니다.]
서인이 나흘간 집에 들어가지 않은 것은 무명이 제게 의지하게 만들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8할은 밥을 손으로 먹는다는 보고에 열이 받았기 때문이었다.
저는 별장으로 퇴근하고 힘들게 움직이는데 감히 손으로 밥을 처먹으니 화가 날 수밖에 없다. 수저를 쓰라고 입이 닳도록 말해도 학습능력이 퇴화한 건지 들을 생각을 안 했다.
“트라우마는 무슨.”
개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처먹으라고 있는 음식에 무슨 트라우마가 있단 말인가. 서인은 제가 붉은 음식을 피하는 것도 일종의 트라우마임을 인정하지 않고 무명을 비난했다.
그는 무명이 왜 불안에 떠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일을 안 하면 죽는다느니 뭐라느니, 일어나지도 않은 상황에 불안감이 높은 것을 답답하다고 느꼈다.
[또, 여전히 작업실로 돌아가고 싶어 합니다.]
서인은 여전히 고쳐지지 않은 고집에 한숨이 샜다. 존중하고 또 존중하려던 것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무명을 배려하여 그가 아끼는 작업장도 아직 철거하지 않았다. 추억도 담겨 있을 테고 다 쓸모없어 보여도 본인의 일 스타일이 있으니 직접 정리하도록 둘 생각이었는데, 이제는 더 배려해줄 필요가 없다는 결론이 났다.
스스로 그만둘 수 없다면 그와 관련된 요소들을 부숴버리고 돌아갈 수 없게 만드는 것이 최선이다.
[그 작업실 지금 당장 철거해.]
서인은 한 번 내린 결정을 번복하는 법이 없다. 그는 대욱에게 무명의 작업실을 철거하라는 메시지를 남기고 몸을 일으켰다. 별장이 아무리 좋아도 집만큼 편하지는 않았기에 이제는 돌아갈 시간이었다.
♦ ♢ ♦
“…오늘은 형 와?”
서인이 돌아오지 않은 지 닷새, 무명은 수분이 다 빠진 얼굴로 대욱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대욱에게 따져봤자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더는 패악질을 부리지 않았다.
“모르겠습니다.”
“네가 모르면 누가 아는데?”
화를 내긴 내도 잠을 잘 자지 못해 예전만큼의 힘은 아니었다. 서인이 작업장을 철거한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 무명은 그가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아침밥 다 먹었어, 먹었는데…. 말도 잘 들었는데, 왜 안 와!”
무명은 밥을 계속 손으로 먹었고 대욱에게 드문드문 반항도 한 주제에 잘못은 쏙 빼고 말했다. 전화로 말했던 것처럼 서인이 아예 돌아오지 않을까 봐 무서워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무명은 그렇게 싫어하는 대욱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엉엉 울며 애원했다.
“이제 말 잘 듣는다고 해줘, 잘하고 있다고 해줘! 흐으, 흐….”
“손으로 식사하지 마세요. 제 앞에선 괜찮지만, 대표님 앞에서는 수저를 좀 사용해보세요.”
무명을 극도로 혐오했던 대욱은 그와 시간을 보내고 나서부터는 생각이 다른 쪽으로 바뀌었다.
여전히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무명이 정신적으로 미숙하고 유아 퇴행적인 모습을 종종 보이다 보니 싫어할 기분이 들지 않았다. 겨뤄야 할 상대로 생각하는 것조차 죄책감이 들 정도였다.
정확히 따지고 보면 동정에 가까웠다.
“손으로?”
“네. 대표님께선 식사예절을 중요시하십니다.”
몰아세울 때보다 어르고 달랠 때가 더 효과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뭐든 서인의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다면 대욱은 무명의 앞에서 기꺼이 자신을 낮출 의향도 있었다.
“형은 싫어하는 게 왜 그렇게 많아? 그렇게 피곤하게 사니까 약을 먹지….”
지친 무명은 입술을 삐쭉 내밀고 성격이 예민한 서인을 탓했다. 수저를 사용하려고 노력해봐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기에 그는 울적했다. 사용하지 못하면 서인이 평생 돌아오지 않을까 봐 무서웠다.
“그래도 노력해보세요. 알아주실 겁니다.”
“…알았으니까, 형 보게 해줘.”
“열심히 하고 계시면 곧 오실 겁니다.”
작업장 철거까지 진행 중이니 대욱은 서인이 곧 돌아오리라는 걸 알았다. 식사예절을 지키고 있으면 곧 돌아온다는 말에 무명은 울음을 참는 얼굴로 수저를 들었다.
이번에도 여전히 얼마 못 가 손을 사용했지만 두세 번 정도는 음미를 해보려고 노력했다.
“…….”
서인이 떠난 무명의 하루는 없는 것과 다름없다. 그는 더러운 걸 싫어하는 서인을 위해 매일매일 몸을 씻고 새 가운으로 갈아입은 후 침대에서 시간을 보냈다. 몸은 뽀송뽀송했지만, 마음은 가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말랐다.
갑갑하고 막막했다. 일이라도 하면 좀 괜찮을 텐데, 갇혀 있으니 행동의 제약이 컸다. 휴대전화가 없어 연구소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확인하지도 못했다.
무명은 서인의 의도대로 그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대욱도 나가버리니 말할 사람도 없고 외로워서 자꾸만 눈물이 차올랐다. 어쩔 수 없이 대낮부터 이불과 베개를 껴안고 억지로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지금도 눈물을 참으며 이불을 뒤집어쓰려는 순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
대욱일 가능성이 크겠지만, 서인이 돌아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무명이 후들거리는 다리로 열심히 뛰쳐나갔다.
정신없이 현관으로 나오자 정말로 서인이 소파에 앉아 넥타이를 풀어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진짜…. 형이에요?”
무명은 직접 보고도 믿기지 않아 서인에게 다가가 손을 붙잡고 뺨을 만져보며 물었다. 서인이 그럼 가짜 형이겠냐고 시큰둥하게 대답해도 그는 감격하기 바빴다. 허리를 껴안고 온기를 느끼는 순간 마음을 괴롭히던 불안이 눈 녹듯 사라졌다.
“숨 막혀.”
“저도요! 저도 형 보니까 숨이 막히고 가슴이 쿵쿵 뛰어요.”
무명의 추억과 긴 역사가 담긴 작업장을 철거하고 돌아온 서인의 마음은 한결 후련했다. 그런 데다가 무명이 왜 이제 왔냐고 짜증을 내지 않고 곧 울 것처럼 감격에 젖어 있으니 기분이 좋기도 했다.
“저요, 그 남자 말 잘 듣고 있었어요. 이제 떠나지 마세요, 저를 혼자 두고 가지 마세요.”
무명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지만, 오랜만에 돌아온 서인에게 매달려 징징거리고 싶지 않아 간신히 참아냈다. 허리를 부러뜨릴 기세로 안고 있던 그는 서인의 반응이 시큰둥하자 식탁으로 달려가 수저를 들고 돌아왔다.
“수저 쓸 수 있어요! 제발 가지 마세요. 형이 있어야 한단 말이에요!”
무명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던 서인은 마음에 들게 말하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서인이 작업장 철거 소식을 알릴지 말지 고민하는 동안, 무명은 그동안 제가 어떻게 지냈는지 설명하며 열심히 떠들어댔다.
“그 사람한테 물어보세요. 제가 얼마나 형을 보고 싶어 했는지 알 거예요. 지금도 그래요. 보고 있는데도 보고 싶어요….”
“그래?”
애교 섞인 말투에 서인이 무명을 흘끔 바라보았다. 새카만 눈그늘에 푹 팬 두 볼이 속앓이의 증거였다. 참새처럼 조잘조잘 떠들던 무명은 서인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휙 돌리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왜 그래?”
무명이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자 서인이 턱을 우악스럽게 움켜쥐고 억지로 마주 보게 했다.
대욱에게 식사예절을 가르치라고 명령하고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빼앗으라고 한 게 마음에 걸렸다. 밥을 급하게 먹어서 어딘가 아픈 게 아닐까 싶어 조금은 강압적으로 다루자 무명이 급히 이유를 설명했다.
“좋아서요, 좋아서 그래요….”
턱을 강하게 붙잡힌 탓에 발음이 어눌했다. 무명은 서인이 손에 힘을 풀자마자 벌떡 일어나 그를 껴안고 절절하게 고백을 해댔다.
서인은 돌아가겠다고 지랄해대다가 갑자기 또 다른 건 아무 상관 없다는 듯 제게만 매달리는 모습에 기묘한 흥분이 들끓었다.
“형도 저 좋아하는 거 맞죠?”
“몰라. 시간이 몇 신데 아직도 잠옷을 입고 있어?”
시작은 무명의 얼굴에 홀렸고 지금은 귀여운 행동에 홀렸다. 서인은 무명과 함께하며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감정들을 느낀 건 사실이었다. 그래도 그 감정을 좋아한다, 사랑한다고는 할 수 없어서 괜히 꼬투리를 잡아 지적했다.
서인은 사랑을 허황한 감정이라고 생각해왔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으니, 당연히 원하는 대답을 건네지 않았다..
“지금 일어난 거 아니에요! 형이 없으니까! 자면, 잠들면 꿈에서라도 형을 볼 수 있을까 봐 자려고 갈아입은 거예요!”
무명은 나갈 수 없는 곳에 갇혀 어차피 온종일 집만 지켜야 하니 끙끙 앓는 것보다 자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꿈에서라도 서인을 만나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다.
잘 때는 잠옷을 입어야 한다는 규칙을 따랐을 뿐인데, 서인이 불만스러운 투로 말하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거짓말 아니고?”
“네!”
온종일 제 생각밖에 안 했다는 말과 다름없는 소리에 서인이 무명을 안아주며 미소지었다. 옜다 이거나 먹어라, 같은 의미였는데도 그는 아주 좋아 죽으려 했다.
“…형, 멋있어요. 잘생겼어요. 또 웃어주세요.”
서인의 짧은 미소에 무명의 얼굴이 새빨갛게 타들어 갔다. 무명은 더 웃어달라고 해놓고서는 막상 서인이 웃자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닷새 동안 여러 보고를 받으며 무명을 괘씸하다고 생각했던 서인도 솔직한 반응에 언제 그랬냐는 듯 분이 풀렸다.
“선물 줄까?”
“선물이요? 주세요! 뭐예요? 받을래요!”
선물을 주겠다는 말에 무명이 서인에게 찰싹 달라붙은 채로 눈을 빛냈다. 어린 애도 아니고 선물에 환장하니 서인은 웃지 않고 버틸 수가 없었다.
“선물이 뭔데요, 네? 네?”
“일단 옷 갈아입어.”
그는 지금 이 분위기라면 무명에게 새 작업장을 보여줘도 괜찮을 거 같다고 생각했다. 병 주고 약 주는 것과 다름없어도 그의 기분이 최상인 지금이 적기였다. 언젠가는 들통나게 될 거 매도 먼저 맞는 편이 낫다.
이미 철거해버린 걸 다시 되돌릴 수도 없으니 적응 못 하겠다고 하면 또 떠나버리면 될 일이었다.
“네!”
무명은 방으로 달려가 재빠르게 옷을 갈아입었다. 뽀뽀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데 함께 외출하겠다니 심장이 콩콩 뛰고 설렜다. 연구소에 같이 가거나 작업실로 다시 돌아가려는 게 아닐까 하는 기대가 컸다.
“다 입었어요!”
그는 서인이 만들어 준 드레스 룸에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잘 보이고 싶어 조금 더 화려하고 멋진 옷으로 입고 싶었는데, 익숙하지 않은 복장이라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가 선택한 것은 결국 무난한 회색빛의 후드티와 얇은 바지였다.
“어때요?”
“…….”
서인은 날씨개념이 없는지 얇게 입은 무명을 보고 인상을 썼다. 드레스 룸에는 분명 코트도 있는데 그는 겉옷을 걸치지 않은 차림새였다. 평생 좋은 옷을 입어본 적이 없고 편한 복장이 작업의 능률을 높여주겠지만, 적어도 계절감은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얇잖아. 다른 거 입어.”
“…괜찮은데.”
“내가 안 괜찮아.”
무명은 차가운 서인의 반응에 눈치를 살폈다. 집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서인은 평소와 같이 숨이 막힐 정도로 단정한 차림이었다. 소파에 놓인 코트를 확인하고 나서야 제 옷이 얇다는 것을 깨달은 무명이 다시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갔다.
“하나하나 다 가르쳐야 하니. 어휴.”
무명이 두꺼운 옷을 입고 나오고 나서야 서인도 코트를 걸쳤다. 어차피 차로 이동하고 별장도 따뜻한지라 그가 외기를 느낄 순간도 없는데, 꾸역꾸역 갖춰 입게 했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뭐 주시는 거예요?”
“가보면 알아.”
불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무명은 서인을 따라나섰다. 서인은 집에 오자마자 다시 나가려니 조금 피곤하긴 했지만, 미루면 더 힘들어질 거 같아 몸을 움직였다. 무명은 차려입은 제 모습이 낯설어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목덜미를 매만졌다.
“타.”
“네!”
그는 별다른 의심 없이 서인이 내민 손을 붙잡았다. 오랜만에 맡는 바깥 공기를 누릴 새도 없이 차에 태워진 무명은 기사를 흘끔흘끔 바라보았다.
“오늘은 그 남자 안 왔네요?”
당연히 대욱이 오리라 생각했던 무명은 나이가 지긋한 기사를 보고 어리둥절했다. 대욱의 말대로 했더니 서인이 돌아왔기에 고마움의 인사를 전하려 했건만 그 어디에도 보이지를 않았다.
“실장님이라고 불러. 왜 찾아? 정이라도 들었나.”
“그런 건 형이랑만 드는 건데….”
그냥 고마울 뿐이지 정이 들었다거나 같이 있고 싶은 건 아니다. 무명은 서인의 표정이 좋지 못한 것을 보고 말끝을 흐렸다. 왜 갑자기 짜증이 난 얼굴을 하고 있는지 몰라 당황스러웠다.
“제가 뭘 또 잘못했을까요?”
“아니?”
날이 선 목소리에 무명이 입을 닫았다. 분명히 화나 보이는 데 아니라고 하니 더 물을 수도 없다. 그는 애써 모르는 척 서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물었다.
“얼마 정도 걸릴까요?”
“한 시간 정도.”
서인의 집에서 제 작업실까지는 오래 걸리는데, 한 시간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에 내심 기대했던 무명이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서인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좋긴 좋았지만, 여전히 일을 그만둘 생각은 없으니 서운했다.
“음, 제 작업장에는 언제 가나요?”
무명은 서인에게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물어보았다. 나름 괜찮았던 분위기가 냉각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는 서인이 정색하고 노려보자 깜짝 놀라 딸꾹질을 했다.
“너, 아직도 형 집에서 살 생각이 없어?”
“일해야 하니까요. 평생 해야 하는 거라고 말씀드렸잖아요.”
무명은 억울했고 서인은 화가 났다. 발끝에서부터 올라오는 분노에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그는 심호흡한 뒤 무명의 손을 붙잡았다. 쉽게 가면 좋으련만 꼭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작업장에 가고 싶어?”
“네!”
“차 돌려요.”
좋은 것부터 먼저 보여줄 생각이었는데, 무명이 이런 식으로 나오면 방법은 하나였다. 서인은 작업장은 이미 철거되었으며 두 번 다시 되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려주기로 했다.
무명은 차를 돌리라는 무서운 말에 눈치 없이 작업장에 갈 수 있다며 기뻐했다.
“다 왔어, 일어나.”
긴장이 풀렸던 무명은 가는 내내 서인의 가슴에 기대어 잠을 잤다. 깊게 잠들어 흔들어 깨워도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5분 정도 더 기다려주던 서인이 억지로 일으켜 세우자 무명이 입술을 우물거리며 짜증을 냈다.
“다 왔다니까. 이게 어디서 성질이야?”
“아, 형이구나….”
무명은 머리통을 한 대 얻어맞고 나서야 눈을 떴다. 그토록 원하던 작업장에 도착했다는 소식에 문을 벌컥 열고 달려나간 그가 우뚝 멈춰 섰다.
“…어?”
커다란 작업실이 있어야 할 곳은 뼈대만 남아 팻말 하나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무명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달려가 주변을 마구 휘젓고 다녔지만, 새 욕조도 기록지와 서류들도 보이지 않았다.
“내 작업장은? 없어졌어! 없어졌어! 어디에 간 거야?”
무명은 애써 침착하려 노력했다. 제 눈이 잘못됐을까 싶어 거칠게 비벼보고 심호흡을 해봐도 이미 사라진 작업장이 돌아올 리 없다.
서인은 차에 기대서서 제 일터를 찾아 헤매는 무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불편하긴 했다.
“작업장! 내 거야! 어딨어! 어디에 갔어!”
그래도 스스로 집착을 끊어내지 못한다는데 어쩌겠는가. 서인은 생각보다 더 격한 반응을 보이는 무명을 말리지 않고 그가 진정될 때까지 충분한 시간을 주기로 했다.
“흐으, 윽…. 악! 싫어! 안 돼, 아!”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무명은 맨손으로 흙을 파내며 작업장을 발굴해내기 시작했다. 땅에 묻힌 게 아니라 철거된 것인데 그는 작업장이 땅 밑으로 꺼졌다고 소리치며 울부짖었다.
“흐, 형이 실컷 데려와 줬는데, 없어요! 어떡해, 어떡해요….”
땅을 파다가 달려온 무명은 서인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앉아 엉엉 울었다. 누가 봐도 상황이 서인의 짓임을 말해주고 있는데 무명은 그를 용의 선상에도 두지 않았다.
“일어나 봐. 더러운데 왜 무릎을 꿇고 있어.”
서인은 잔뜩 묻은 흙을 털어낼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무명을 일으켜 앉히고 눈물을 훔쳐주었다. 다정한 손길에 설움이 터진 그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눈물만 뚝뚝 흘렸다.
“내 작업장, 내 서류랑 사진, 으, 흐으, 윽….”
서인은 사진이나 서류를 따로 빼서 보관해두었지만, 무명이 저를 의심도 하지 않는 탓에 말하지 못했다. 그는 연구소에 전화해서 작업장이 철거된 이유를 확인해야겠다며 서인에게 휴대전화를 빌려달라고 졸랐다.
“나중에, 나중에 해.”
“작업장은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속했단 말이에요. 흐으, 그런데, 그런데…. 왜 약속을 바꿨는지 알아야겠어요. 흐….”
“너 진정하고 나서 해도 늦지 않아.”
속일 생각이 전혀 없었던 서인은 예상치 못한 반응에 자연스레 상황을 정리하려 했다. 눈치채지 못했는데 제가 그랬다고 이실직고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알아야 할 거 같아요…. 형, 왜 반대하는 거예요?”
그런데 웬걸, 전혀 의심하지 않았던 무명이 이상한 부분에서 걸고넘어지기 시작했다. 작업장이 사라졌는데 왜 그렇게 침착하냐, 우리의 추억이 담긴 공간인데 왜 놀라지도 않냐며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슬프지도 않아요?”
“물론 슬프지. 그런데, 일단은….”
“형, 아니죠?”
무명은 꽉 쥐고 있던 서인의 손을 놓아버렸다. 그는 불안한 얼굴로 서인에게서 두 발자국 떨어져 힘겹게 웃으며 물었다.
“형이 이런 거 아니죠? 형이 없앤 거 아니죠?”
서인은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처음엔 거짓을 말할 생각이 없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제가 그랬다고 말하면 무명이 더 날뛸 것 같아 그는 대충 비위를 맞춰주는 편이 좋을 것 같다고 판단했다.
“내가 왜 이런 미친 짓을 하겠어? 나였으면 애초에 널 여기에 데려오지도 않았겠지.”
“믿어도 되겠죠? 믿을게요….”
“그래.”
결론을 내린 서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짓말을 술술 뱉어냈다. 거짓말하는 사람을 세상에서 가장 싫어한다고 떠들어 댈 땐 언제고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그럼, 그럼 수장님께 전화 좀 해주세요…. 왜 이렇게 된 건지, 으, 흑….”
“알았어. 일단 타.”
엉엉 울며 다시 차에 오른 무명은 부은 눈을 비비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며칠간 일도 못 하고 서인의 집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철거된 게 아닐까 생각하고는 아예 무릎에 얼굴을 처박고 오열을 했다.
“다시 지으면 돼. 괜찮아.”
“그게 무슨, 흐, 으…. 무슨 의미가 있어요!”
“나도 네 작업장이 망가져서 기분이 별로야. 형이 좋은 곳에 데려가 줄 테니 일단 좀 진정해.”
무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인을 믿긴 믿지만, 그도 아예 바보는 아니니 걸리는 부분들이 꽤 있었기 때문이다. 서인이 제가 작업실로 돌아가는 것을 싫어했다는 것과 철거된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고 침착했다는 점 등등이 무명을 불안하게 했다.
“형이 다 해결해줄게.”
묘하게 기뻐 보이는 얼굴도 무명에게는 상처가 되었다. 같이 슬퍼해 주기라도 하면 좀 나은데 슬퍼하기는커녕 기뻐하니 마음이 더 아플 수밖에 없었다.
긴 시간을 달려 도착한 서인의 별장 앞에서 무명은 웃지 못했다.
“이건, 언제 어디서 지은 거예요…. 칼, 방수포, 작업 도구들이 있는데 형한테 이게 왜 필요해요?”
“내가 홍주원이랑 가까우니까. 쓰라고 받은 거야.”
“…그래요.”
기쁘지 않았다. 새 물건으로 가득 차 있어도 본래의 작업장이 아니며, 제 물건들이 사라져버렸으니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무명은 구경하라며 등을 떠미는 서인의 손을 밀어냈다.
“너 자꾸 이럴 거야? 형이 신경 써서 데려와 줬는데?”
“그 작업장이 아니면 안 된단 말이에요! 흐…. 내 공간인데, 약속의 장소인데!”
“무슨 약속.”
“형은 말해도 몰라요, 몰라! 흐아아, 흑, 으….”
다시 생각하니 더 서러웠다. 그 장소는 무명에게 단순 작업장 정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서인의 말에 제대로 대답도 하지 못하고 차에 올라타서 울기 바빴다.
♦ ♢ ♦
“명아, 좀 일어나 봐.”
무명의 우울은 작업장이 철거된 날부터 시작되었다. 돌아오자마자 앓아누운 그는 열이 올라 결국 의사를 봐야 했다. 며칠이 지난 지금도 상태가 호전되지는 않았다.
“작업장…. 으으, 으….”
서인은 약에 취해 잠들어서도 작업장을 찾는 무명의 뺨을 쓰다듬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짜증이 났다. 참는 것에도 슬슬 한계가 왔다. 무명은 약속장소니 뭐니 혼자 알 수 없는 말을 떠들어대면서 막상 물으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건데?”
서인은 오랜 시간 동안 머물던 보금자리가 한순간에 무너졌으니 충격받을 만도 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앓아누울 만 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으으, 아…. 손 잡아주….”
“그래, 명아. 나 여기 있….”
“공일이 형….”
“뭐?”
서인은 다른 놈을 찾아대는 무명의 뺨을 후려쳤다. 언제까지고 계속 누워만 있게 둘 순 없었다. 열이 많이 나서 그런지 사람도 못 알아보는 꼴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일하고 싶다면서.”
새로 일할 작업장은 이미 다 지어졌는데, 정작 주인이 저 모양이니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서인은 새 작업장까지 모두 철거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형, 제발, 물….”
뺨을 맞고 눈을 뜬 무명은 홀로 중얼거리는 서인의 손을 붙잡고 물을 달라고 애원했다. 그는 침대를 높여 무명이 일어나지 않고도 물을 마실 수 있게 도와주었다.
“명아.”
“우응…. 네?”
반쯤 눈을 감고 새끼 새처럼 물을 꼴깍꼴깍 받아먹는 모습에 서인은 그만 발기하고 말았다. 하루에 한 번씩은 꼭 성욕을 풀곤했는데 벌써 몇 달간 잠자리를 하지 않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픈 사람 앞에서 성기를 반쯤 세운 서인은 물을 빼앗으며 고개를 돌렸다.
“꼴리니까 그런 식으로 받아먹지 마.”
“꼬, 꼴리는 게 뭐예요?”
“흥분된다고. 대줄 거 아니면 그렇게 행동하지 마. 생긴 꼬락서니하고는.”
서인은 제가 이상한 상상을 한 주제에 괜히 무명을 탓했다. 아픈 사람에게 네가 음란하고 야하게 생긴 탓이라며 온갖 희롱을 하고는 놀란 눈을 한 무명의 시선을 피했다.
그는 작업장이 사라진 충격이 커 또박또박 대들지 못하고 음란하게 생겨서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렇게 태어난 걸 뭐 어쩌겠어. 그만 사과하고 밥 먹어.”
“안 먹고 싶어요….”
무명은 제대로 수저를 사용할 자신도 없었고 먹을 것을 보면 흥분해 괜히 서인을 화나게 할 것 같아 차라리 먹지 않는 쪽을 택했다.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나?”
무명은 더 울지 않았지만, 차라리 우는 게 나을 정도로 표정이 좋지 못했다. 평소에 환장하고 먹던 음식들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가끔 물을 마시거나 손톱을 잘근잘근 깨무는 게 입에 넣는 전부였다.
“열이 안 내리는 이유가 뭐겠어? 잘 챙겨 먹고 몸을 좀 움직여야 나을 거 아니야.”
“…….”
“대답 안 해?”
“안 먹는다고, 아까부터 안 먹는다고 했잖아요….”
무명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먹지 않겠다고 항의했다. 인내하고 또 인내하던 서인은 울적한 그의 모습에 분노가 치밀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하루 이틀 안에 회복해야 하는 게 사람인데, 며칠 내내 힘들어하고 있으니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너 그만 안 할래?”
“그냥 먹고 싶지 않다는 거잖아요!”
“먹어.”
“싫어요!”
계속되는 강요에 화가 난 무명이 쥐고 있던 물컵을 집어 던지며 거부했다.
튄 파편에 얼굴을 긁힌 서인은 잠시 참는 듯했으나 결국에는 무명의 머리채를 휘어잡아 바닥으로 끌어 내렸다.
“아!”
침대에서 굴러떨어져 바닥에 머리를 찧은 무명이 소리를 지르며 고통스러워했다. 한참 아파하던 그는 서인의 뺨에 난 상처를 보고 충격받아 정신 나간 사람처럼 잘못을 빌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제가, 하, 아…. 제가….”
“그만 좀 해.”
그런 모습이 좋게 보일 리 없었다. 반쯤 맛이 가서 사과하며 작업장을 찾아대기를 반복하는 모습에 서인이 더는 폭력을 행사하지도 못하고 방을 벗어났다. 더 보고 있다가는 무슨 짓을 할지 자신도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
그는 소파에 앉아 신경질적으로 냉수를 들이켜고는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무명을 데려온 목적은 제 성욕 풀이와 눈요기였는데, 성욕은커녕 스트레스와 불면만 늘었다.
그런데도 그를 버리지는 못하니 도대체 뭘 어떻게 하고 싶은 건지 몰라 혼란스러웠다.
“…….”
10분 정도 지나자 무명이 먼저 나와 서인의 옆에 앉았다. 함께 식사할 것도 아니고 문제점을 해결할 것도 아니면서 딱 달라붙어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서인은 괜히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며 무명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있잖아요, 제가….”
숨 막히는 침묵을 깬 것은 무명 쪽이었다. 그도 꽤 오래 고민했기에 조심스러운 말투였다. 사과도 하고 밥도 먹어보겠다고 말하려던 무명은 서인의 휴대전화가 울리자 의도치 않게 입을 다물었다.
“어, 왜.”
서인은 무명에게 전화 내용을 들려줄 생각이 없어 테라스로 자리를 옮겼다. 액정에 주원의 이름이 뜬 것을 의도치 않게 보았던 무명도 몰래 뒤를 따라가 통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 내가 데리고 있어.”
서인의 목소리는 들렸지만, 주원이 뭐라고 이야기하는지는 잘 들리지 않았다. 제 처분에 관한 이야기를 할까 봐서 걱정되었다. 등을 돌리고 있어서 서인의 표정도 읽을 수가 없었다.
데리고 있다, 알아서 한다 등등 서인의 목소리가 점점 격양되자 무명의 불안도 커졌다.
“돌려달라고?”
- 그래, 총괄이 없으니 아랫놈들이 작업을 못 친다고. 다른 놈 줄 테니까 골라 가든지 해.
사람을 토막 내고 고문하는 무식한 행위에 딱히 일머리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서인은 주원과 무명의 관계를 의심부터 하고 봤다. 그깟 잡일 따위, 그 많은 놈들 뒀다가 뭐하나 싶었다.
“못 주니까 그냥 다른 놈 시켜. 씨발, 왜 얘만 갖고 지랄인데?”
- 걔는 주요 인력이라 없으면 좀 불편하거든. 내 걸 되찾아가겠다는데 뭘 그렇게 뾰족해? 맘대로 가져가 놓고선 어디다 대고 씨발이야, 씨발은?
누구 하나 양보하는 법이 없었다. 서인은 무명이 부하를 거느리고 총관리자라는 비교적 높은 직에 있다는 건 알지만, 주원이 직접 나서 이런 반응을 보이니 잠시라도 돌려보낼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안 그래도 일에 집착하는 무명인데 그의 주인인 주원이 찾는다고 하면 얼마나 난리를 부릴지 안 봐도 뻔했다.
- 어쨌든 만나서 이야기해. 언제 시간 나는데.
“지금도 돼.”
- 올 때 연락 해.
주원도 서인 못지않게 무명의 소유권을 넘길 마음이 없었다. 그는 서인의 대답도 듣지 않고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이 새끼나 저 새끼나…. 씨발, 다 거슬리네.”
서인이 욕을 하며 등을 홱 돌리자 숨을 타이밍을 놓친 무명이 화들짝 놀랐다. 엿듣는 게 좋지 못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기에 그는 문 뒤에 얼굴을 처박았다. 머리만 숨기면 다 숨은 줄 아는 모습에 서인이 픽 웃었다.
“뭐 해.”
“그냥…. 형 구경했어요.”
우물쭈물하며 거짓말을 하는 꼴이 귀여웠다. 그는 무명을 주원에게로 데려갈 생각이 없어 다시 침대에 앉혀놓고 나갈 준비를 했다. 옷을 갈아입는 서인의 등을 뚫어지라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또, 또 가는 거예요? 안 돼요. 형 없으면 저 안 돼요. 잘못했어요!”
“아니, 진정해. 하루도 아니고 오후에 올 거야.”
“같이 가면 되잖아요. 왜 저를 자꾸 이 집에 놓고 가는 거예요? 충분히 반성했어요.”
무슨 말로 무명을 설득시켜야 할지 몰라 잠시 고민하던 서인은 사람을 죽이지 못해 손이 간질간질 한 그를 위해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그럼 형이 전에 보여준 새 작업실에서 일 하나 할래?”
“일이요? 어떤 거요?”
아니나 다를까, 서인의 제안에 무명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고기 손질, 의뢰 중에 어떤 일을 하게 될지 기대하는 게 뻔히 보였다.
방음도 잘 되어있고 방수포도 몇천 장은 준비해뒀으니 그 별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문제 될 게 없었다.
“네가 하고 싶은 거 아무거나. 고기 손질이든 뭐든 상관없어. 뭐 할래?”
“…술이요! 술! 주문량 다 못 채우면 혼나요, 기계랑 재료만 가져다주세요….”
“그래, 좋아.”
“…감사합니다! 그 문제 꼭 해결해야 하는 건데!”
서인의 부재에 반쯤 미쳤었던 무명은 그제야 제가 주문량을 다 채우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시 유예를 주겠다곤 했지만, 꼭 제작해야한다는 한다는 아버지의 말을 떠올린 그는 갑자기 찾아온 불안에 피가 날 정도로 손톱을 깨물었다.
“손으로 작업할 건데, 아프면 쓰겠어?”
“아….”
하지 말라고 하는 것보다 일을 들먹이는 게 훨씬 더 효과가 좋았다. 무명은 바로 손을 떼고 대신에 서인의 손을 붙잡았다. 별거 아닌 접촉에도 안정감이 들어 한결 불안이 가셨다.
“걱정하지 마. 형이 보고서랑 재료는 알아서 해결해주겠다고 했지? 너희 아버지랑 통화해봤는데, 기다려주신다고 하더라. 이미 들었으려나?”
“네, 그런데…. 저희 아버지랑은 어떻게 연락을 하셨어요?”
무명이 아리송한 얼굴로 제 아버지와 어떻게 연락을 했느냐고 물어왔다. 연락처도 저와 주원밖에 모르는데 마켓 내부 사정을 모르는 서인이 알아낼 길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홍주원 통하면 네 소식은 다 접할 수 있지.”
서인은 뭘 새삼스레 놀라냐는 듯이 아주 자연스레 거짓말을 했다. 일을 해결해주겠다고 말한 것도 잊고 있다가 조금 전에 기억해놓고서는 마치 신경 쓰고 있었다는 것처럼 굴었다.
“수장님과 가까우신 가봐요….”
무명은 주원을 동경하고 있으니 제 아버지의 연락처까지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주원과 가까운 서인을 부러워해야 맞는데, 이상하게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
“뭐 그런 사이는 아니고. 파트너야. 파트너가 뭔진 알지?”
“네….”
무언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차오르고 피가 차게 식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서인과 가까운 주원을 향한 질투인지, 평생을 노력해도 같은 자리에 오를 수 없는 우상인 주원과 가까운 서인을 향한 질투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왜 그래?”
무명이 기죽은 것을 눈치챈 서인이 푹 숙인 그의 얼굴을 마주하기 위해 무릎을 굽혔다. 눈을 보면 울 것 같아서 무명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겉옷을 걸쳤다.
“얼른 가요.”
“기분 안 좋아 보이는데.”
“아니에요, 좋아요.”
“알았어.”
말하기 싫다는데 붙잡고 털어놓게 할 필요는 없었다. 서인은 주원을 만나 무명과 연구소의 연을 깔끔하게 끊어내야 하는 임무가 있기에 괜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려 했다.
“그럼 연구소에 데려다 달라고 해.”
“저 혼자서요?”
“응, 방향이 달라서.”
“…그럼 그 실장님이랑 갈래요.”
무명은 그나마 많이 봐 온 대욱이 운전하는 차를 타길 원했다. 서인에 대한 것도 조르면 한두 가지씩 이야기해 주고 제 마음을 조금은 이해해주는 때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걸 서인은 제가 자리를 비운 닷새간 두 사람이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든지.”
서인은 이상하게 기분이 더러웠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흔쾌히 허락했다. 그는 무명을 먼저 태워 보내고 나서야 주원에게 지금 가겠다는 연락을 남겼다.
긴 시간을 달려 연구소에 도착한 서인은 응접실에 앉아 주원을 기다렸다.
온통 초록빛으로 도배된 지하실로 내려온 그는 눈두덩을 마사지하며 한숨을 쉬었다. 비교적 피를 많이 보는 곳이니 녹색으로 도배해둔 이유를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오래 머물기엔 눈이 피곤했다.
“일찍 왔네.”
인내심에 한계가 왔을 때쯤 업무를 보고 온 주원이 응접실로 들어왔다. 서인도 불만이 가득했고 주원 역시 그리 기분이 좋진 않았다.
“할 얘기가 뭔데. 계약서나 다시 쓰자는 건가.”
“계약서는 무슨. 도둑질해간 거 돌려받아야지.”
“제 발로 내가 좋아 죽겠다고 기어들어 온 놈인데 도둑질? 직원 교육을 잘못한 네 탓이겠지.”
서인은 연구소 사람을 실험체로 쓰다가 약물 중독으로 죽였을 때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면서 무명은 포기 못 하는 주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안 되는데.”
“중요한 인력이라고 몇 번을 말해? 한국에 제대로 자리 잡기 이전부터 일했던 놈이라고. 모자라는 것들이 걔를 또 잘 따라서 못 줘. 그렇게 안 보여도 하는 일이 많아.”
주원은 단순 무명이 없으면 여러모로 불편하므로 주지 않겠다는 거지 그에게 다른 감정은 없었다. 몇 번을 말했는데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서인이 무명을 불순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남들도 자신처럼 무명을 탐하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다.
“걔가 일을 잘하긴 해? 그냥 애 같던데.”
“정상인들한텐 그렇게 보이겠지만, 마켓 놈들은 신격화하느라 바빠.”
서인이 아는 무명과 주원이 평가하는 무명은 꽤 다른 면이 있었다. 어쨌든 자신은 무명을 절대 놓아주지 않을 것이니 오늘 확실히 결판을 내고 가려 했던 서인은 제가 모르는 그의 모습이 궁금해졌다.
“뭐, 일머리가 좋은 편이긴 해. 애들 사이에서는 어른스럽기도 하고.”
무명과 어른스럽다는 말은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서인은 그간 무명이 보였던 모습들을 떠올리며 코웃음을 쳤다. 수저도 사용할 줄 모르고 매번 질질 짜기나 하는 놈에게 어른스러운 모습이 있다니, 그야말로 코미디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걔 만큼 하는 놈이 하나쯤은 더 있을 거 아니야. 없다고 해도 네 식대로 가르치면 되지. 잘하잖아, 그런 거.”
“신입들 가르치는 게 쉬운 줄 알아? 안 그래도 요즘 단속 떠서 사리고 있는 마당에 무슨.”
서인은 주원이 안 된다고 하거나 말거나 더 신경 쓰지 않았다. 갖고 싶은 건 무슨 수를 써서든 가져야 하는 성격이었기에 무명을 빼앗기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슬슬 실험도 다시 시작해야 하니 파트너인 주원을 형식적으로 만나러 온 것뿐이었다.
“걔 이야기나 더 해 봐.”
“딱히 할 건 없는데. 첫 살인 나이? 아마 열 살쯤이었고….”
“생각보다 이르네?”
“어, 이공일이라고 걔가 마음에 들었는지 여섯 살 때 조수로 데려갔거든,”
생각보다 빠르구나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던 서인은 어딘가에서 들어본 듯한 단어에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공일?”
“왜? 아는 사람일 리는 없는데.”
[그래, 명아. 나 여기 있어.]
[공일이, 형….]
“이런 씨발….”
“걔가 형, 형하면서 잘 따랐었던 놈인데, 왜.”
무명도 결코 잘 지은 이름은 아니었지만, 공일은 그보다 더했다. 서인은 이름이라고 생각지도 않았던 것이 무명에게 중요한 사람인 데다가 그 역시도 무명을 마음에 들어 했다는 것을 듣고는 속이 뒤집혔다.
“아는 대로 말해봐.”
또 여섯 살 때부터 마음에 들어 했다니 불순하고 썩어 빠진 놈이 아닌가. 서인은 자존심이 상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주원에게 공일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것을 강요했다.
“무명이 걔가 처음 온 게 겨울이었지?”
그 질문 속에서 서인의 불타는 질투를 읽은 주원은 깔깔 웃으며 무명이 처음 들어왔을 때를 회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