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서인의 신경이 곤두서 있다는 것은 죄 없는 사람에게 불똥이 튄다는 것과 같다. 그는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대욱을 못살게 굴었다.
“약에서 그런 성분이 검출될 때까지 넌 뭐 하고 있었는데?”
“…죄송합니다.”
평소 분노한 서인은 임상시험 결과가 나빴을 때처럼 멱살을 쥐고 뺨을 치면 쳤지 이렇게 정신적으로 사람을 들들 볶지는 않았다.
“운전을 왜 이따위로 해? 불만 있어?”
“아닙니다. 주의하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죄송하다고 해도 닥치라고 하고, 그렇다고 해서 대답하지 않으면 짜증을 냈다. 어찌나 까칠한지 그를 하루 이틀 모신 게 아닌 대욱도 진땀 흘릴 정도였다.
“후, 감히 날? 감히? 어디서 구르다 온 지도 모를 새끼가 ….”
서인의 분노는 집으로 돌아와서도 계속되었다. 그는 마치 화를 내지 않으면 죽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의자를 발로 차고 컵을 던지는 등 폭력적인 방법으로 분을 풀었다.
묵묵히 서 있던 대욱은 서인이 파편을 밟고 다치기라도 할까 봐 조심스레 주변을 정리했다.
“곽대욱 실장.”
“네, 대표님.”
대욱은 최대한 기척을 내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신경이 예민한 서인에게는 모든 게 거슬렸다.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심호흡을 하던 그가 뒤를 홱 돌아보며 쏘아붙였다.
“보고할 거라도 있어요?”
대욱은 서인에게 직함으로 불리는 것과 그의 존댓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하지 않는 걸 넘어서 피하고 싶은 수준이었다.
“대표님께서 따로 신경 쓰실 일은 없습니다. 검토하실 서류는 서재에 정리해두었습니다.”
서인이 말을 높이거나 직함으로 부를 때면 열에 아홉은 굉장히 언짢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그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나고 있으니, 그의 안위를 중요시하는 대욱으로서는 자존심 상하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럼 왜 버티고 서 있는데.”
“…….”
서인도 대욱이 보고할 게 있어서 이 시간까지 남아 있을 리가 없다는 것을 알지만, 성질이 나 괜히 모질게 굴었다. 지금은 그 누구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뭐가 됐든 어떠한 자극도 받고 싶지 않았다. 설령 긍정적인 자극이라 하여도 마찬가지였다.
“가서 네 일이나 하세요.”
대욱은 서인의 공격적인 말을 듣고도 떠날 수 없었다. 그 모습을 서인이 도전 또는 반항으로 여길까 봐 시선을 내리까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안 들려? 꺼지라고.”
좋은 소리 못 들을 건 알지만, 그냥 가버리기엔 서인의 상태가 너무도 좋지 않아 보였기에 쉬이 발을 떼지 못했다.
“대표님, 아무래도 치료받으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제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마구 표출하는 것이 불안정했던 어릴 적과 비슷했기에 더더욱 마음에 걸렸다. 솔직한 심정으로 대욱은 서인이 이럴 때마다 겁이 났다.
“지금 시간 안 보여? 미친 소릴 하고 앉았어.”
평소에도 그리 좋은 성격은 아니었지만, 대욱에게까지 함부로 대할 정도로 감정 제어가 불가할 때는 꼭 피를 보거나 병원 신세를 졌기 때문이다.
“걱정됩니다. 이미 많이 다치셨고….”
대욱의 시선이 아직 멍이 가시지 않은 얼굴과 상처 가득한 손등, 보이지 않는 허벅지로 향했다. 그는 명색이 경호실장인데 제 고용주가 납치당한 것을 미리 알지 못했던 자신의 한심함에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대표님께서 더 다치실 것 같아 갈 수가 없습니다. 차라리 저한테 푸세요.”
주먹을 쥔 대욱의 손이 사정없이 떨리는 것을 본 서인이 혀를 찼다. 차라리 자신을 치라는 말에 찬물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정신이 확 들었다.
서인이 대욱에게 손찌검하고 악을 지른 적은 꽤 됐지만, 어디까지나 약물 실험의 실패, 과한 보호 등 그가 조금이라도 연관되어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대표님….”
그러나 오늘 일은 대욱과는 전혀 관련 없는, 온전히 개인적인 문제였다. 그것도 어디에서 굴렀을지 모르는 걸레 같은 무명이 제 뜻을 거역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분이 가라앉자 이성이 돌아왔다. 서인은 문제없는 대욱의 운전 실력까지 트집 잡아 괴롭힌 것을 자각하고는 혀를 찼다.
“하. 내 주먹으로 친다고 네가 아프기나 할까.”
답지 않은 모습을 보인 게 부끄러웠고 별것도 아닌 무명에게 휘둘린 거 같아 자존심이 상했다. 서인이 킬킬 웃자 대욱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대표님께서 원하신다면 그렇게 해드릴 수 있습니다.”
“…뭘?”
기분이 풀렸음을 나타낸 농담에도 그는 홀로 심각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대답에 서인이 삐딱하게 서서 고개를 갸웃했다. 한참 고민하던 대욱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고통에 신음하거나, 주저앉아 살려달라고 빌거나. 그런 것도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대표님을 위해 할 수 없는 일은 없….”
“됐어. 뭐라는 거야?”
서인은 헝클어진 대욱의 넥타이를 고쳐주며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미친놈이구나 싶었다. 말도 안 되는 대답에 전의를 잃었다.
“죄송합니다.”
아무리 충성심이 강하다고 해도 그렇지 신음하거나 살려달라고 빈다니. 징그러울 정도라 자꾸만 웃음만 났다. 어차피 특수부대 출신인 데다가 온몸이 무기인 것처럼 단단해서 때려봐야 그리 아프지도 않을 테다.
그걸 알고 분위기를 풀어보고자 한 농담인데, 심란한 대욱은 농담을 진담으로 받아들였다.
“가 봐. 병원은 날 밝으면 갈 테니까.”
서인은 넥타이를 정리해주고 웃어줘도 굳은 표정을 풀지 않는 대욱을 보고는 어지간히도 자존심이 상했나보다 생각했다.
제게 폭행을 당해도 단 한 번도 기분 나쁜 티를 낸 적이 없는 사람인지라 서인은 그의 마음을 이해했다. 물론 사과는 하지 않았지만, 의도적인 미소를 보여 그를 달랬다.
“…예, 아침에 모시러 오겠습니다.”
“그래.”
서인은 대욱이 꾸벅 인사를 하고 집을 떠나자마자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하루빨리 몸에서 나는 싸구려 비누 향을 씻어내고 싶었다. 이 냄새가 좋다고 무명을 껴안았던 몇 시간 전의 자신이 미친 인간처럼 느껴졌다.
“하….”
따뜻한 물, 커다란 욕조, 지적할 것 없는 위생. 모든 게 제 자리로 돌아왔다. 서인은 평소 사용하는 바디워시향을 맡으며 눈을 감았다. 익숙한 향에 기분이 좋아지려던 찰나 허벅지에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분명히 아물기 시작했던 상처인데, 이상하게 집으로 오니 더 쓰라렸다. 그는 건방진 무명을 떠올리며 주먹으로 욕조를 마구 내리쳤다.
“하아, 씨발….”
살면서 이토록 모욕적인 취급을 받은 건 처음이었다. 제 잘못도 모르고 기어오르는 무명이 괘씸해서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서인은 그와 동거 아닌 동거를 하는 동안 자존심을 죽이고 또 죽인 편이었다. 그곳이 제 영역이 아니라는 점도 있었고 착한 척하며 무명을 꾀어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넘어오긴커녕 무지하고 멍청해서 제 복을 발로 차 버렸다. 다 버리고 따라오면 돈, 집, 차 등 평생 누려보지 못한 것들을 누릴 수 있는데, 무슨 똥고집으로 일에 집착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괜히 음식 핑계를 대며 억지를 부린 것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차피 다시 데려오긴 할 테니 무명을 버리고 나온 것이 딱히 걱정된다거나 후회스럽지는 않았다. 그가 숨겨 둔 쪽지를 찾아내지 못해도 대욱이나 수행원들을 시켜 발견하게끔 만들면 될 일이었다.
“후우….”
서인은 급할 것 없다며 자신을 달랬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 분노가 쉬이 가시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있어야 할 자리에 돌아온 것뿐이라고 되뇌고 또 되뇌며 무명을 무릎 꿇릴 그 날만을 기다렸다.
♦ ♢ ♦
무명이 지하실로 돌아온 것은 서인이 떠난 시점으로부터 4시간 후였다. 그는 온몸이 땀에 흠뻑 젖은 채로 쇼핑백을 한가득 안고 들어왔다. 그 안에는 샴푸와 린스, 여분의 옷이 들어있었다.
“돈 많은 사람이 쓴다는 거로 사 왔어요!”
무명은 깨끗한 옷과 물건을 내려놓으며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서인이 사라진 것을 알 리가 없는 그는 새 옷과 화이트 와인을 챙겨들고 지하실로 향했다. 기분을 풀어주기 위한 나름의 사과였다.
“이번에는 형아가 좋아할 만한 것들로….”
준비한 것을 가져와 이것저것 내려놓은 무명은 텅텅 비어있는 지하실을 보고는 그대로 말을 멈췄다. 당연히 있어야 할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의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지하실 구석과 담요 속을 샅샅이 살펴보고 나서야 상황을 파악하고 날뛰었다. 어떻게 나간 건지, 어떤 방법을 사용한 건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누군가의 도움이 있었음은 확신할 수 있었다.
무명은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화해할 겸 선물을 사러 간 사이 홀라당 사라지다니. 끊임없는 두통과 메스꺼움이 그를 괴롭히고 마음을 찢어놓았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잠시 외출한 게 아닐까, 나를 찾으러 간 게 아닐까 등등 무명은 모든 경우를 따져보며 서인이 달아난 사실을 부정하려 애썼다.
“어떻게 나한테, 어떻게 나한테!”
금방 돌아오리라 믿고 10분 정도 꾹 참고 기다렸지만, 서인은 돌아오지 않았다.
참을성이 바닥 난 무명이 소리를 지르며 벽에 머리를 찧었다. 평생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에 심장이 쿵쿵 뛰고 눈앞이 울렁였다. 그는 극심한 불안에 시달리며 손가락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고기도 먹여주고 허벅지에 예쁜 글씨도 새겨줬는데, 좋아한다면서 자신을 배신한 서인이 미웠다.
“형아, 형아, 형아….”
흔적을 찾기 위해 시트 밑을 뒤적이고 소파를 들춰봐도 나오는 건 없었다. 무명은 어떻게 나를 버릴 수 있냐는 말을 반복하다가 또 자신의 몸을 괴롭혔다.
“하아, 하….”
안 그래도 흉터 가득한 손목에 붉은 줄이 보기 싫게 그어졌다. 피가 뚝뚝 떨어지고 손목이 따끔했다. 평소에는 딱히 고통을 느끼지 못했는데, 지금은 이상하게 손목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아팠다.
“흐으, 흑….”
무명은 저도 모르게 서인이 치료해줬던 반대편 손목을 매만졌다. 아직도 서인이 왜 그렇게까지 걱정했는지 이해는 하지 못했지만, 다정한 손길이 그리웠다.
“치, 치료도 해줬는데, 그랬는데 나를 버릴 리가, 없어….”
피를 살살 닦아주고 약을 발라주던 그를 잊을 수가 없었다. 무명은 함께 있는 동안 서인이 했던 행동들을 종합해보며 스스로 사라진 것이 말이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감정싸움이 있기는 했지만, 서인은 착실히 지하실로 내려가기도 했고 말이다.
“아, 아! 아! 이 나쁜 놈들!”
가만히 앉아 생각 정리를 해보던 무명이 어디론가 급히 전화를 걸었다. 서인이 스스로 나갈 리가 없으니 누군가 그를 훔쳤을 가능성이 크다고 결론 지었다.
“감히, 감히, 흑….”
수화음이 길어질수록 무명의 시름도 깊어져만 갔다. 그가 전화를 건 상대는 며칠 전 서인의 곁을 지켰던 사내였다. 한 놈은 패 죽여버렸고 다른 한 놈은 살려뒀는데, 놈이 전화를 받지 않자 무명이 벽에 머리를 처박으며 악을 질렀다.
“그때 죽였어야 했는데!”
당시 서인의 족쇄를 자르던 전기톱으로 그의 목을 자르지 못한 것이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서인을 도대체 어떻게 했을지 몰라 겁이 나기도 했다.
“으, 으으으….”
무명은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며 옷을 대충 주워입고 차 키를 꺼내 들었다. 죽지 않는 한 연구소에 평생 묶여있을 사내들을 찾으러 가기 위함이었다. 고문을 해서라도 서인의 위치를 알아내야 했으니 죽이는 건 다음 일이었다.
연구소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무명은 중간중간 두통과 환청에 시달려 몇 번이고 운전을 멈춰야 했다. 핸들에 얼굴을 처박고 아기처럼 목놓아 울기도 했다.
♦ ♢ ♦
“그 자식 어, 어딨어! 어디에 있냐고!”
무명은 부하를 찾기 위해 상품을 전달하는 1구역과 안정성을 검사하는 2구역 등 둘러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찾고 또 찾아도 보이지 않자 그는 죄 없는 관리자를 채근했다.
“칠십일은 출근 안 했어? 어디에 숨겼어!”
그의 위치가 서인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실마리였는데, 그것마저 확보할 수 없게 되자 무명은 극도로 예민해졌다. 마음 같아서는 다 때려 부수고 싶었지만, 그럴 때가 아니었기에 참고 또 참았다.
“아, 안녕하십니까, 총관리자님! 칠, 칠십일은 유, 유통업무로 꽤 바쁘다고 들었습니다. 지, 지금은 배달 일을 하러 간 거 같아요.”
“평소보다 주문량이 적었을 텐데 뭐가 바빠? 장난해!?”
무명은 죄 없는 사람을 쥐 잡듯 잡았다. 전자 명단을 훑던 관리자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벌벌 떨었다. 그는 이 사건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사람인지라 억울할 텐데도 반박 한 번 하지를 않았다.
“죄, 죄송합니다….”
“출근하면 나한테 바로 말해.”
“네, 네! 알겠습니다.”
무명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상품을 유통하는 가게가 전국에 퍼져 있었기에 칠십일이 어느 가게에 배달하고 있는지 찾을 길이 없었다.
그러나 무명은 당장에라도 서인을 만나지 않으면 정말 죽어버릴 것만 같아서 배달 갔던 날 만났던 가게에라도 가보기로 했다.
“초, 총관리자님! 이것 좀 확인해주세요!”
그러나 그는 연구소를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 서인에게 미쳐있는 동안 방문이 뜸했다고 곳곳에서 그를 찾아댔다. 서류에 사인을 해달라, 검인 도장이 잘못된 것 같다 등 노동자 대부분이 무명을 의지했다.
“컨, 컨베이어 벨트가 잘 안 움직입니다.”
“밑에 비닐이 끼었잖아! 이런 것까지 내가 알려줘야 해!?”
무명은 그런 노동자들의 행동이 답답했다. 조금만 확인해 봐도 알 수 있는 것을 해보지도 않고서 도와달라고 징징대니 모진 말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컨베이어를 살피던 그는 벨트 위를 지나가는 포장된 고기를 보며 서인을 떠올렸다. 서인이 가장 잘 먹던 부위였기 때문이다.
[지방이 적당해서 풍미가 좋은 부위예요. 형아가 원한다면 더 드릴 수 있어요.]
[그럼 더 구워와 봐.]
남이 보기엔 고기 굽는 노예였지만, 무명은 행복했다. 그는 서인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다가 그만 울컥했다. 차에서 그랬던 것처럼 당장 울음을 터뜨리고 싶었지만, 총관리자 체면이 있기에 그럴 수 없었다.
“하아….”
눈두덩을 문지르던 무명은 고기를 맛있게 먹어줄 서인이 없다는 것을 필사적으로 외면하며 종이 가방에 고기를 챙기기 시작했다.
“어어, 그거 손님한테 나갈 고긴데….”
무명에게 한 번 혼이 난 뒤 흐름이 끊기지 않게 컨베이어를 점검하던 노동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신들의 우상인 무명의 이상행동에 그는 어찌할 바를 몰라 발을 동동 굴렀다.
“총관리자님?”
손님에게 나갈 상품에 손을 대는 일은 금기사항이었음에도 무명의 위치가 있었기에 함부로 저지할 수 없었다. 제 곁으로 노동자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하자 기뻐하는 서인의 얼굴을 떠올리며 고기를 챙기던 무명의 손이 우뚝 멈추었다.
“…그냥, 그냥 상태가 어떤지 확인한 거야.”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다. 그는 가방에 든 고기를 다시 꺼내지 않고 무심하게 툭 내려놓고는 도망치듯 컨베이어를 벗어났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경매가 아닙니다! 우리 마켓 내에서 진행하는 가장 큰 행사예요!”
로비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무명은 마이크를 입에 댄 채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직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
서인에게 미쳐있던 그는 그제야 오늘이 마켓의 큰 행사가 열리는 날이었음을 떠올렸다. 머릿속이 온통 서인으로 가득 차 있어서 다른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마켓의 총관리자로서 이런 큰 행사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옳지 못한 행동이라는 걸 알아도 그냥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온통 초록빛으로 물든 구조물 탓에 정신이 아득했다. 레드 마켓이라는 이름과 정말 어울리지 않는 색이었다.
“어, 이게 누구야. 우리 총괄 아니야?”
“안녕하세요….”
불청객은 예고 없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무명은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VIP 손님을 향해 꾸벅 인사했다.
“그래, 그래. 이번 행사도 끝내주는데?”
“네, 이번에도 위생을 최대한으로 신경 썼습니다. 좋은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그래, 이따가 술 한잔하지. 응?”
“네….”
서인을 찾기도 바쁜데, 술 한잔이라니. 무명이 티 나지 않게 인상을 구겼다. 그에게 짧게 인사한 VIP는 깨끗하게 고기 경매에 혈안이 되어 달려나갔다.
“역겨워….”
무명은 고기를 직접 도축해서 공급하는 주제에 소비자들을 역겹다고 비난했다. 서인에게 고기를 긍정적으로 소개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이놈은 제가 일주일 전에 잡은 파릇파릇한 놈입니다! 목숨줄이 얼마나 질긴지, 죽이는데 꽤 애먹었다니까요!?”
“그래서 그런지 맛이 좋구먼!”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궁금하지도 않은 VIP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평가는 서인에게서 듣고 싶었지 이렇게 역겨운 사람들에게 듣고 싶진 않았다.
“이번에는 고기 질이 참 좋군요.”
“이게 다 우리 총관리자님 손을 타서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무명은 자신을 두고 하는 말임을 알았지만, 웃으며 반응하지 못했다. 고기 구워지는 냄새와 시끄러운 소리에 속이 울렁이고 머리가 아팠기 때문이다.
“으음, 맛있군.”
구운 고기를 질겅질겅 씹으며 맛과 질을 칭찬하는 꼴은 보기 불편할 정도였다. 무명은 음식을 씹는 쩝쩝 소리와 입술을 핥는 혀를 보며 구역질을 삼켰다.
“자, 자. 받아.”
그가 멍하니 서 있자 검은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VIP가 먼저 다가와. 손에 수표 몇 장을 쥐여주었다. 서인과 달리 살집 있고 뜨거운 손에 무명이 화들짝 놀랐다.
“뭐야, 별로 기쁘지 않은가 봐?”
“아, 아닙니다. 너, 너무 놀라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만세, 만세!”
무명은 전혀 그럴 기분이 아니었지만, 곳곳에 고위관계자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기에 애써 기쁜 척했다.
평소 이런 행사에서 재벌가의 자제, 고위층을 상대하는 무명에게 표정 관리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가면을 쓴 사람의 상대로 가면을 쓰는 것뿐이었는데, 오늘은 힘들고 지겨웠다.
무명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자 노동자들에게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가끔 상체를 세우고 만세, 만세 하며 기꺼운 것처럼 웃는 것도 빼먹지 않았다. 이제 됐다는 말에 몸을 일으키자 욕망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나저나…, 좀 더 어린 고기는 취급하지 않는지요?”
“요즈음은 갓 태어난 놈도 날 것으로 먹는다고 하던데, 더 좋지요. 고기 질은 항상 좋지만, 어릴수록 더 맛있는 법이니까요. 허허.”
그들은 고기를 씹어 넘기는 와중에도 더한 것을 욕망하고 있었다. 무명이 말을 고르느라 입을 다물고 있자 골반 부위를 주물럭거리며 추행하기도 했다.
“하하, 고기가 총관리자님 몸을 닮아서 탱탱한 모양이네요!”
무명이 일하며 만나온 돈 많은 인간은 하나같이 교양 없고 천박했다. 겉보기에만 번지르르했지 속은 온갖 더러운 욕망으로 가득 찬 것들이었다. 삶에 부족함이 없으니 사람을 학대하며 즐거움을 느끼기도 했고 남에게 모멸감을 주며 쾌락을 느끼기도 했다.
지금도 그랬다. 무명이 반항할 수 없음을 알기에 몸을 마음대로 주무르며 희롱했다.
“아시다시피 저희는 갓 태어난 가축은 취급하지 않습니다. 더 나은 품질….”
무명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고개가 반대편으로 홱 돌아갔다. 목덜미가 뻐근할 정도로 아팠지만, 감히 티를 낼 수 없다.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가져오라면 가져올 것이지! 천것이 어디서 눈알을 부라려?”
괜한 트집이다. 무명은 교육받은 대로 예쁘게 웃고만 있었다. 뺨을 맞아 주저앉은 이 순간마저도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씹던 고기를 그의 앞에 뱉은 사내는 고개 숙여 핥아먹으라는 비인간적인 명령을 내렸다.
“…준비하겠습니다.”
무명은 씹다 뱉은 음식물을 먹고 싶지도 않았고 한가운데 주저앉아 울고 싶지도 않았기에 어린 고기를 구해오겠다며 잘못을 빌었다.
살아온 환경이, 주변에 널린 인간들이 그를 사지로 몰아넣었다. 만일 떨어진 음식물을 주워 먹으며 잘못을 빌었다고 하여도 그들은 무명을 용서치 않을 게 뻔했다.
“그래, 진작에 그랬어야지. 기다리고 있겠네.”
사내가 만족스럽다는 얼굴로 무명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리를 떴다. 하늘을 찌르는 자존심 덕에 더는 부탁하기 싫으니 무력을 행사해 상대의 입에서 원하는 대답을 끌어내는 비열한 태도였다.
그런데도 무명은 순응한다. 평생 그렇게 살아왔으며 그 누구도 제 손을 잡아주지 않았으니 말이다.
“휴….”
서인을 찾을 의지가 꺾인 그는 브로커에게 말을 전하고 끔찍하고 시끄러운 장소에서 벗어났다.
“윽….”
황급히 밖으로 나온 무명은 차에 올라타자마자 날카로운 물건으로 손목을 그어 내렸다. 서인의 예상대로 그의 자해는 습관성이었다. 화가 나고 긋고 슬퍼도 그었다.
무명은 울적한 얼굴로 흐르는 피를 제대로 닦아내지도 않은 채 운전을 시작했다.
♦ ♢ ♦
“없어! 없어, 없잖아!”
집에 돌아온 무명은 서인이 장난이었다며 저를 끌어안을 것을 기대했지만, 집은 여전히 텅 비어있었다.
“너무해, 너무해, 너무해!”
머리를 감싸 쥐고 소리 지르던 그는 서인의 체취가 밴 베개를 끌어안고 허벅다리를 꾹꾹 눌렀다. 이렇게 하면 서인이 어딘가에서 나타나 자신의 자위를 도와줄지도 모른다는 헛된 기대였다.
하지만, 역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라 잃은 사람처럼 넋을 놓고 앉아있던 그가 무언가를 떠올리고 벌떡 일어나 홀린 사람처럼 집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내가, 내가 어디에 뒀었지!”
서인을 납치한 직후, 숨겨두었던 그의 휴대전화가 또 다른 단서였다.
“어디에 뒀었지, 어딨지, 어딨지!”
마음이 급해지자 혼잣말 빈도가 급격히 높아졌다. 머리가 아프고 손발이 덜덜 떨렸다. 차로 도망칠 때 흘렸을 가능성도 있었기에 무명은 집을 박차고 나와 거리의 수풀을 기어 다녔다.
“흐, 윽….”
풀밭을 뒹굴고 개처럼 훑고 다녔음에도 휴대전화는 보이지 않았다. 별 다른 수 없이 다시 안으로 들어온 무명은 지하실로 내려가 매트에 드러누웠다.
[너, 나랑 한 번 해보겠다고 줄 선 놈이 몇이나 되는지 알기는 해?]
그는 그제야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곁에 서인이 없으면 손해 보는 건 어디까지나 자신이었고 서인을 원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도 뼈저리게 느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면 잘할 수 있는데, 영영 기회가 오지 않을 것 같아서 불안했다. 누군가가 서인을 훔쳐 간 게 아니라 서인이 스스로 도망갔다는 불길한 느낌도 들었다.
무명은 서인의 몸을 감쌌던 부드러운 매트리스를 매만지며 입술을 깨물었다. 매트리스가 그의 몸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곳저곳 더듬던 중 손에 무언가 딱딱한 물건이 잡혔다.
“어?”
놀라 확인해 본 무명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 물건이 본체에 ‘R’ 마크가 각인된 익숙한 휴대전화였기 때문이다.
“이게, 왜….”
그는 떨리는 손으로 휴대전화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부재중 전화에는 제 번호가 남아 있었고, 그로 인해 휴대전화의 주인이 칠십일임을 알 수 있었다. 무명은 벌벌 떨리는 손으로 메시지 함을 확인했다.
[오늘 새벽 4시에 나갈 거니까 시간 맞춰서 와.]
[네, 알겠습니다, 대표님.]
제 부하가 서인의 조력자 역할을 했다니. 그는 배신감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도망친 서인을 향한 분노가 휴대전화를 빌려주고 그를 도운 제 부하에게로 향했다.
“하아….”
증거를 찾긴 찾았어도, 둘 다 어디에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분노와 그리움에 끙끙 앓던 무명은 서인과 메시지를 나눈 대욱과 통화해 위치를 묻는 게 어떨까 고민해보았다.
그러나 연구소에서 얼굴을 보고도 딱딱하게 굴었던 사람이었기에 서인의 위치를 쉽게 알려줄 것 같지는 않았다.
돌아올 반응이 무서워서 망설이던 그는 한 번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서인을 평생 만날 수 없는 것보다 무서운 일은 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네. 경호실장 곽대욱입니다.
대욱은 전화를 걸기 무섭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무명은 숨이 막힐 정도로 긴장해서 손까지 벌벌 떨어댔다.
- 누구십니까.
“무, 무명이에요…. 그, 그 연구소에….”
대욱이 제 이름을 알지도 못하는데 무명은 열심히 소개했다. 대욱은 그의 자기소개에도 무어라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형아, 아니. 대표님이 혹시 같이 있나 해서….”
- 무슨 용건으로 대표님을 찾으십니까.
“그, 그냥….”
무슨 용건으로 서인을 찾냐, 대표님의 일정 중 누군가를 만난다는 약속은 없었다, 등등 대욱은 무명이 말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
- 그럼 끊겠습니다.
그렇게 그는 제 할 말만 한 채로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안 그래도 서인의 곁에 무명을 두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날카로운 반응을 보이는 게 당연했다.
“어떡해….”
무명은 다시 걸고 또 걸었지만, 대욱은 받지 않았다. 그는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며 힘없이 드러누워 연신 눈물만 흘려댔다.
무명이 길거리를 데굴데굴 구르고 줄줄 울며 힘든 시간을 보내는 동안 서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섬세하게 관리를 받은 뒤 제 소유의 병원에서 허벅지를 치료받았다.
무명이 열심히 작업해서 실컷 영역표시를 했으니 아예 지워버리지는 않았다.
“열심히 찾고 있대?”
“예. 그런 거 같습니다.”
“그러길래 있을 때 잘해야지.”
서인은 곧 무명을 완전히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생각에 즐거워했다. 건방지게 저를 놓고 가버린 그가 지금은 찾지 못해 안달이 나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흥분되기도 했다.
“수고했어, 가 봐.”
“…예, 감사합니다.”
서인은 내일 모시러 오겠다는 대욱의 인사도 받는 둥 마는 둥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잘 정돈된 손톱을 매만지던 그는 집에 처박혀 온종일 밥을 하고 예쁜 짓을 할 무명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셨다.
♦ ♢ ♦
무명이 서인을 찾아온 것은 그 후로부터 일주일 후였다. 메모지를 찾지 못하는 불쌍한 그를 위해 서인이 수행원들을 시켜 힌트를 주었다.
무명은 배우지 못해 멍청하긴 해도 아예 눈치가 없는 건 아니었기에 메모지에 적힌 주소가 서인의 집을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형아, 형아 나와요! 문 열어요! 나와요! 흐, 아아아! 나와요!”
그는 메모지를 발견하자마자 낡아빠진 차를 끌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래 봐야 서인이 미리 배치해 둔 경호팀에게 붙잡혀 들어가지도 못하는 신세를 면치 못했지만 말이다.
“물러나세요!”
“형아! 대표님! 형! 형아! 무명이가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무명은 팔을 잡고 끌어내는 경호원을 거칠게 밀어내며 발악했다. 흥분하면 서인이 말해도 들을까 말까인데, 한낱 경호원 따위의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그는 결국 눈에 뵈는 것 없이 패악질을 부렸고, 급기야는 경찰까지 동원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지금 가면 평생 만날 수 없음을 직감한 무명은 경찰을 물어뜯고 드러누워 끌려가지 않으려 안간힘 썼다. 땅에 등이 갈리고 몸에 상처가 나도 서인을 만날 없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의 부재는 무명에게 지옥이었기 때문이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싸우고 두고 갔던 날이 후회되고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돌리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다. 그러니 다시 만나려거든 지금처럼 필사적으로 반항해야 했다.
“이거 놔! 놓으란 말…. 어! 혀, 형아! 형아!”
구조물을 붙잡고 죽어라 버티던 무명은 저 멀리서 들어오는 검은 차를 보자마자 서인임을 확신하고 애절하게 불러댔다.
그의 서인 감지 레이더는 확실했다. 검은 차 안,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경악한 서인이 창문을 올리고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씨발…. 쪽팔리게.”
이런 상황을 예측하고 먼저 도착하려 했건만, 회사에 문제가 생겨 그만 늦어지고 말았다. 서인은 여전히 징징거리는 무명의 모습을 지켜보며 혀를 찼다.
“우선 주변 정리하고 데리고 들어와.”
“…네, 알겠습니다.”
이걸 어쩌나 고민하던 서인은 대욱에게 상황을 정리하고 무명을 데리고 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는 사회적 체면이 무엇보다 중요해서 깡마른 무명을 보고도 내리지 않았다.
“대표님.”
무명을 기다리다 지쳐 술을 마셨던 서인은 저를 부르는 대욱의 목소리에 천천히 눈을 떴다. 피곤했던 데다가 술까지 마시니 까무룩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뭐야. 꼬라지가 왜 저래.”
두통에 잠시 이마를 짚던 서인은 죽은 것처럼 바닥에 축 늘어진 무명을 발견하고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대욱을 바라보았다.
무명이 이성을 잃고 날뛰면 저 역시 제압하기 어려우니 대욱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짜증이 솟구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 되는 일이 없네.”
“죄송합니다. 경찰차에 머리를 들이받으면서 발악을 하기에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그래, 알았으니까 가 봐.”
서인도 머리로는 그게 최선이었음을 알기에 손짓으로 대욱을 쫓아냈다. 혹시 달려들지도 모르니 현관에서 대기하겠다는 말은 가볍게 무시했다.
다시 거실로 돌아온 그는 무명의 뺨을 툭툭 치며 반응을 기다리다가 성질을 못 죽이고 발로 걷어찼다.
“그만 일어나지 그래.”
일주일 만에 보는 무명은 엉망이었다. 바닥을 굴러 옷이 꼬질꼬질했고 안 그래도 상처 난 몸에 또 생채기가 가득했다.
서인은 제 공간에 그런 더러운 요소가 있다는 것 자체가 불쾌했다. 손이야 벅벅 씻을 수 있지만, 집이 더러워지는 건 용납할 수 없다. 그는 축 늘어진 무명의 팔을 잡아당겼다.
“으, 응….”
그러자 무명이 꿈틀대며 앓았다. 잠시 의식이 돌아온 그는 고개를 들고 눈을 끔벅이다가 다시 축 늘어졌다.
“아, 씨발.”
서인은 기대했던 것과 달리 엉망인 재회에 열이 받았다. 그는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내고 무명의 머리채를 붙잡은 채로 뺨을 세게 내리쳤다.
무명이 경찰차에 머리를 들이받는 것 이상으로 무식한 행동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서인은 그를 속 편히 자게 두고 싶지 않았다.
“윽, 악!”
두어 번 맞고 나서야 무명이 눈을 번쩍 떴다. 그는 더러운 손으로 눈을 마구 비비다가 눈물을 터뜨렸다.
“형아아, 흐으, 윽….”
무명은 더럽혀진 채로 서인에게 달려들었다. 울먹이는 모습에 약간 흥분했던 서인은 실랑이 탓에 뒷덜미에 남은 손자국과 흙투성이가 된 몸을 보고는 그를 밀어냈다.
“형아, 왜, 왜에….”
“씨발, 씻어. 당장 씻어!”
다른 곳이라면 당장 집에 가서 씻고 말겠지만, 이곳은 엄연히 서인의 공간이었다. 제 공간이 더럽혀지는 것을 병적인 수준으로 견디지 못하는 서인은 무명의 옷을 다 벗겨 쓰레기통에 처박고는 욕실에 집어 던졌다.
“흐윽, 흐….”
눈물을 줄줄 흘리며 멍하니 앉아있는 게 답답했다. 얼른 씻어야 뭘 하든 말든 할 텐데, 아무것도 안 하고 질질 짜고만 있으니 두들겨 패고 싶은 충동이 자꾸만 차올랐다.
“씻으라는 말 안 들려!?”
“네…. 씨, 씻을게요! 보, 보지 마세요!”
무명은 이미 다 벗고 한바탕 구른 주제에 서인과 내외했다. 서인은 언제든지 벗으라면 벗고 벌리라면 벌려야 하는 무명이 우물쭈물하자 기분이 상했다.
“벗어.”
“하지만, 부끄러워요….”
무명에게도 벗지 않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동안 살도 많이 빠지고 제대로 씻지 않아 몸이 볼품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자꾸만 구석에 처박혔다.
“…하.”
서인은 평소 제 시선이 닿는 족족 붉어지는 무명을 귀여워했지만, 기분이 좋지 않은 지금은 거슬리기만 한 행동이었다. 인내심을 갖고 참아주던 서인은 벗으라는 말을 두 번 하지 않았다. 대신 무명을 욕조에 걸터앉히고 어깨를 발로 차 고꾸라지게 했다.
“아야!”
멍하니 있다가 뒤로 발라당 넘어간 무명이 뒷머리를 문지르며 신음했다. 그는 제 잘못을 몰랐기에 갑자기 때리는 서인을 노려보며 탓했다.
“아프잖아요, 형아 너무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내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는 아느냐 등등 시끄럽게 떠들던 그의 시선이 커다란 욕조로 향했다. 무명은 욕조와 욕실 전체를 훑어보며 뒤늦게 감탄했다.
“우와!”
그는 반질반질한 대리석을 매만지다가 위에서 폭포처럼 쏟아지는 물을 구경했다. 심기가 불편했던 서인도 눈을 반짝이며 욕실을 구경하는 무명을 보고는 못 말린다는 듯 웃었다.
“신기해?”
“네, 와아….”
무명은 특히 해태의 입에서 쏟아져 내리는 물에 눈을 떼지 못했다. 서인에게는 그저 물이 쏟아져 나오는 돌일 뿐인데 무명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감탄했다.
“만져봐도 돼요?!”
“어. 이제 다 네 거야.”
“왜 제 거예요?”
서인은 당연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무명이 제 것이 되었으니 제 것도 무명의 것이 되는 게 옳았다. 거의 고백에 가까운 말이었지만, 무명은 알아듣지 못했다.
“네가 내 거니까. 내 것도 네 거지.”
“…….”
서인이 계획했던 재회와는 달랐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그리 나쁘지 않게 흘러갔다. 무명은 그제야 서인의 말을 이해하고 부끄럼을 타며 몸을 배배 꼬았다. 사랑스러운 반응에 서인이 고개 숙여 키스하려는데, 그가 헛소리를 해대며 고개를 돌렸다.
“형아도 해태 좋아해요?”
“무슨 해태.”
의도적으로 피한 게 아님을 알아서 그런지 더 민망했다. 서인은 동상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질문하는 그에게 퉁명스레 대답했다.
“이 물 나오는 거, 해태잖아요. 해태는요, 사람이 싸우는 것을 보면 바르지 못한 사람을 뿔로 받는대요.”
“그래? 우리 둘이 싸우면 널 들이받겠네.”
서인은 자연스럽게 무명을 들이받겠다고 말했다. 그는 사람을 고문하고 죽이는 무명이 나쁘면 나빴지 손찌검하는 제가 나쁘다고는 죽어도 생각하지 않았다.
무명은 반박하지 못하고 안 들리는 척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말을 이었다.
“화재나 재앙을 물리치는 신수로 여겨 궁궐 등에 장식되기도 했어요.”
“네가 그런 걸 어떻게 아는데?”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서인은 무명이 대본을 읽는 것처럼 어색하게 해태를 설명하자 콕 짚어 물어보았다. 불이익, 표본도 제대로 읽지 못하던 놈이 비교적 난도가 있는 말을 하는 게 수상했다.
“우, 우리 연구소의 대표 시, 시벌마크예요.”
서인이 되물을 줄은 몰라 놀란 무명은 눈에 띄게 당황한 얼굴로 말을 더듬으며 눈을 쉴 새 없이 깜빡였다.
“심벌마크.”
서인은 심벌마크를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는 해태의 의미 역시도 세뇌당한 것으로 확신했다. 연구소 직원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도 해태에 관한 것을 술술 읊을 것이다. 그러니 더 들을 것도 없었다.
“그러니까 해태가 얼마나 대단하냐면….”
“아, 그래 됐어. 알겠어.”
간혹 이상한 단체가 심벌마크를 숭배하고 몸에 새기는 등 이해할 수 없는 세뇌를 하곤 했기에 서인은 해태 찬양을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네에….”
서인은 시무룩해진 무명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손에 샴푸를 짜주었다. 우선은 꼬질꼬질 때 탄 길고양이 같은 그를 씻기는 게 우선이었다.
“와아…. 형아, 이거 엄청 냄새 좋아요!”
무명은 냄새가 어떻게 이렇게 좋을 수 있냐며 코를 박고 냄새를 맡아댔다. 그가 사용하는 빳빳한 비누와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럽고 고급스러운 샴푸였다.
“부럽다….”
서인은 제 이름으로 브랜드까지 내줄 수 있는 사람인데, 무명은 부러워할 필요가 없는 일을 부러워했다. 그깟 샴푸가 뭐라고 속으로 제 처지까지 비관하며 우울해했다.
“이런 거 쓰려면 돈이 많이 들겠어요. 술을 한 500병은 팔아야겠네요.”
“뭐?”
“어떻게 이런 걸 써요? 약 만들어서 돈 정말 많이 버나 봐요?! 부자인 건 알았는데, 이렇게 좋은 걸 쓸 줄은 몰랐어요!”
서인은 무명이 제 앞에서 돈 이야기를 할 때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S급이니 뭐니 떠들며 350만 원짜리 술 이야기를 했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제 재력이 샴푸값밖에 안 된다는 평가를 받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입 다물고 씻기나 해.”
그러니 말이 곱게 나갈 리 없다. 무명은 차가운 서인의 말투에 입을 꾹 다물고 샴푸를 짰다. 신기한 듯 한참 문지르던 그는 거품을 만지작거리고 입바람을 불어 날리는 놀이를 했다.
“어휴….”
실실대는 모습을 보던 서인은 무명의 머리카락에 샴푸를 묻히고 감겨 주기 시작했다. 기분 좋아지라고 귀밑을 마사지해주며 몸을 만져주기도 했다.
“형이 이렇게 해주니까 기분 좋아요. 아버지 같아요!”
무명은 은근한 성적 긴장감을 노린 그의 손길을 아버지 같다고 표현했다. 연인 같은 것도 아니고 형 같은 것도 아니고 아버지 같다는 말에 서인이 비아냥거렸다.
“그래? 참 고맙네. 눈물이 다 나려고 한다.”
“아버지가 전에 한 번 이렇게 씻겨주신 적이 있거든요! 명이 아가 때요!”
무명은 피투성이가 된 제 몸을 씻겨주었던 아버지를 떠올리며 웃었다. 맞을 땐 싫었어도 피를 닦여주고 머리를 감겨 주었던 기억은 평생을 가도 잊을 수가 없다며 주절주절 떠들어댔다.
폭력에 익숙해져 자그마한 호의에도 큰 애정을 느끼는 전형적인 학대에 세뇌된 모습이었다.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으니 그것이 잘못된 애정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
서인은 트라우마가 생길 정도로 두들겨 패는 인간에게 좋은 기억을 가져다 붙이는 무명을 비웃었다. 잘못된 줄도 모르고 좋아하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꼴 보기 싫어서 조롱하려던 서인은 행복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선 묵묵히 머리를 감겼다.
“좋아….”
샴푸에 취한 건지 뭔지 무명은 눈을 게슴츠레 뜨고 서인을 올려다봤다. 그 얼굴이 어찌나 야한지 서인은 그를 집에 가둬놓고 아무도 보여주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런 서인의 시커먼 속을 알 리 없는 무명은 따뜻한 물과 부드러운 손길을 만끽하며 꾸벅꾸벅 졸았다.
“다 됐어, 일어나.”
“네에…”
그는 조는 무명을 일으켜 세워 몸을 박박 문질러 닦인 뒤 가운을 입혀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무명은 옷이 부드럽다며 문지르고 깨무는 등 온갖 이상한 짓은 다 했다.
서인은 이렇게 넓고 좋은 집은 처음이라며 빨빨 돌아다니는 그를 억지로 앉힌 뒤 진한 커피를 건네주었다.
“진정 좀 해.”
서인은 써도 너무 쓰다며 괴로운 얼굴로 커피를 홀짝이는 무명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모든 통로를 틀어막았다. 곧 분위기가 험악해질 테고 그가 돌아가겠다며 난동 피울 것을 알았기에 미리 대비해야 했다.
“명아, 너 형한테 고맙지?”
“네! 샴푸도 좋고 이 옷도 정말 좋아요!”
“그럼, 너도 형한테 뭘 줘야 하지 않겠어?”
서인을 슬슬 본론을 꺼내기 시작했다. 무명은 큰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무슨 소리인지 전혀 이해 못 했다는 몸짓이었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어야 할 거 아니야.”
“아, 뭘 해드릴까요? 술이랑 고기를 드릴까요?”
“아니.”
“그럼요?”
줄 수 있는 게 고기와 술뿐인 무명은 서인이 뭘 원하는지 몰라 입술만 달싹였다. 서인이 은근슬쩍 허벅지를 만지자 무명이 화들짝 놀라 물었다.
“허, 허벅지를 만지는 게 원하시는 건가요?”
“그렇기도 하고.”
순진한 얼굴로 서인을 바라보던 무명이 다리를 활짝 벌렸다. 부끄럽기는 했지만, 서인이 준 것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기에 참을 수 있었다.
서인은 당장 그의 탄탄한 허벅지 사이에 박아 넣고 싶은 것을 참고 다리를 오므려주며 가운을 정리해주었다.
“안, 안 만지세요?”
“이건 나중에 하면 되고.”
“그럼 제가 뭘 해드려야 할까요?”.
“쉬워. 하던 일 그만두고 여기서 살아. 물론 집 밖으로는 혼자서 못 나가. 나랑 같이 가야 해. 돈은 뭐, 마음대로 써도 돼.”
“네?”
무명은 서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처럼 되물었다. 그의 표정이 어두워진 것을 본 서인의 표정도 덩달아 굳었다.
“뭘 꼬라봐?”
“…….”
“어쨌든 그렇게 실컷 먹고 자고 누리다가 내 애를 낳아주면 돼.”
서인은 남성 임신이 가능하다는 것을 모르는 무명에게 충격적인 말들을 쏟아냈다. 섹스니 사정이니 뭐니 어려운 단어투성이였다.
“물론 필요한 건 내가 다 제공해, 그게 당연한 일이니까. 네가 편한 쪽으로 할 거야. 육아는 신경 쓸 것도 없고. 이해를 못 했나? 왜 대답이 없어.”
“…….”
좀 놀랍긴 해도 조건은 나쁘지 않았다. 돈도 마음껏 써도 되고 원한다면 청부살인을 이어나갈 장소를 만들어주기도 할 테니 말이다. 그러나 무명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대답하지 않았다.
“쉽게 말해서 우리 둘 다 아빠가 되자는 거지.”
“아, 아빠요?”
서인은 혹시 이해를 못 했나 싶어 무명의 눈높이에 맞는 표현을 사용하며 보여주기식 미소를 지었다.
“그래, 아기 아빠.”
그는 사실 제 아이를 낳는 데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무명이 이보다 더 거부감을 느끼는 조건은 없을 것 같았기에 일부러 아이를 낳아달라고 말했다. 임신이 싫다고 하면 여기서 평생 살자는 대책안도 있다고 말하려는 계획이었다.
또 어찌어찌 임신하게 된다면 그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아이를 가진 그를 상대로 약을 실험해보고 태어난 아이의 건강도 차후 실험의 대상이 될테니 말이다.
“뭐, 그게 싫으면 형이랑 여기서 평생 같이 살면 돼.”
이곳에서 평생 살겠다는 대답을 듣는 게 목적인 서인은 아이를 낳기 싫으면 그렇게 해도 된다며 선심 쓰는 척했다.
“임신이라니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저는 남자라고요!”
그러거나 말거나 무명은 서인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 일어나 소리쳤다. 그는 같이 살자는 말은 뒷전이고 아기를 낳아달라는 말에 꽂혀 눈이 뒤집혔다.
“제가, 제가 어떻게 아기를 낳아요?! 형아 이상해요, 뒤에 자꾸 뭘 넣는다고 하고. 남자가 아기를 갖는다고 하고! 어디 아파요!?”
“말버릇이 그게 뭐야? 건방지게.”
열심히 대들던 무명은 서인의 말 한 번에 울음을 터뜨리기 일보 직전의 얼굴로 죄 없는 소파만 노려보았다.
서인이 자꾸만 제 머릿속에 든 지식에 반하는 이야기들을 늘어놓아서 혼란스럽고 무서웠다.
“왜, 뭐가 싫은데?”
서인은 다정한 척 울먹이는 그의 등을 쓸어주며 물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제 말은…. 남자가 어떻게 아기를 낳느냔 말이에요. 이건 말이 안 되는 소리잖아요!”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건 무명 쪽이었다. 서인은 옛날에나 있을 법한 논쟁을 시작한 무명에게로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굳이 말로 떠들어 댈 필요가 없었다.
“…남성 임신?”
“그래.”
서인은 휴대전화 액정을 뚫어지라 보며 말도 안 된다고 소리치기 시작한 그의 어깨를 짓눌러 앉혔다. 남성 임신 약물이 첫 상용화 되었던 때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이, 이게 가능은 한 거예요? 남자가 어떻게 임신해요?”
“나는 네가 모르고 있었다는 게 더 놀랍다. 세상이 얼마나 바뀌었는데?”
휴대전화가 있지만, 업무 처리를 위해 전화나 메시지를 주고받았을 뿐 검색을 한다거나 외부정보를 접하지 않았기에 무명은 남성 임신에 관해 전혀 알지 못했다. 그는 서인에게 좀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말 그대로 남자도 임신한다는 거야. 요즘 대부분은 남자가 해.”
“대부분 남자가요? 저, 정말이요? 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걸요?”
“나중에 되면 보겠지.”
물론 부작용이 따르고 있지만, 서인은 혹시 모를 나중을 위해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무명이 괜히 겁을 먹으면 상황이 복잡해질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아! 그런데요, 형아. 왜 저보고 낳아달라고 그래요?”
“뭐가.”
“이제 아가는 남자가 더 많이 낳는다면서요, 형아도 남자인데 왜 저보고 낳으라고 하는 거예요?”
“…….”
“형아도 낳을 수 있어요! 같이 낳으면 돼요!”
서인은 그에게 악의가 전혀 없음을 알아서 화낼 기운도 없었다. 게다가 무명은 틈도 주지 않고 질문 공세를 하며 제 궁금증을 해소하려 했다.
“나는 너보다 몸이 약하니까.”
변명으로 느낀다면 별 수 없지만, 서인은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출산은 몸이 더 튼튼한 사람이 낳는 게 좋다는 결과도 그의 의견을 충분히 뒷받침해 주고 있었다.
“원래 튼튼한 사람이 낳는 게 맞거든.”
무명에게 낳아주면 된다고 말하긴 했지만, 서인은 제가 임신하는 것에도 거부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임신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이 임신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기도 했고 말이다.
“그리고 담배에 술에 약까지 해서 아마 몸뚱이가 정상은 아닐 거다.”
“그럼 제가 낳을게요!”
“아니, 이야기가 왜 그렇게 되는데?”
서인은 같이 살자는 질문의 답을 들으려 했는데, 무명은 평소 저를 닮은 아이에 로망이 있나 싶을 정도로 출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형아는 연약하니까! 무명이가 낳을래요, 아가 낳을래요!”
서인의 몸이 약하다는 말에 무명은 커다란 것을 깨달은 사람처럼 손뼉을 쳤다. 평소 서인이 연약하다는 착각에 빠져있었기에 빠른 납득이 가능했다.
“형아, 그런데 남자끼리는 어떻게 아기를 낳아요? 저희도 서, 성관계해야 하는 건가요?”
무명은 한 번 관심이 생긴 것은 끝을 보는 성격이었다. 성관계 이야기를 하는 표정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았지만, 꼭 알고 싶다는 의지는 강했다.
“알 거 없어. 나중에 알게 돼.”
서인은 그가 항문성교에 얼마만큼 거부감을 느끼고 있는지 알기에 대화 화제를 돌리며 최대한 말하지 않으려 했다.
물론, 임신하는 남성이 모두 동성애자인 건 아니었지만, 약과 서인의 정액이 필요한 건 사실인지라 성관계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구조였다.
“말해주세요….”
무명은 서인의 손을 붙잡고 입술을 쭉 내민 채 졸랐다.
“음, 아니. 약 먹고 병원 가고 건강하기만 하면 돼.”
“아…. 알겠어요, 아이 낳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해볼게요!”
서인은 뭐가 뭔지도 모르는 주제에 열심히 해보겠다고 자신만만하게 소리치는 무명을 보며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애초에 둘 사이에 아이가 생긴다고 해도 서인은 키울 마음이 없다. 연구소로 보내서 더 조사하고 표본으로 쓸 계획만 가득했다.
“그럼 이제 얼른 가요.”
아이를 낳는다는 것에 조금 흥분해 있던 무명이 시계를 확인하더니 벌떡 일어났다. 서인은 올 것이 왔다는 것을 느끼고 시치미를 뗐다.
“어딜 가.”
“집에요. 저 일 해야 해요! 그리고 우리 당분간은 고기 줄이고 건강식만 먹어요, 아가를 낳아야 하니까요.”
서인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느냐며 무명의 손목을 붙잡아 당겼다. 아이를 낳지 않아도 된다고 몇 번을 이야기했는데, 그는 서인의 의도를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애는 나중 이야기고. 앞으로 여기가 네 집이라는 말엔 관심 없어? 그래, 애 좋지. 그럼 여기서 낳고 여기서 살아.”
“네? 싫어요! 제, 제 일은요!”
“여기서 해. 형이 공간 만들어 줄 테니까, 별장도 있어. 거기 애초에 마음에 안 들었어.”
앞으로 여기서 살게 된다는 말에 얼굴이 백지장이 된 무명이 현관으로 달려나가 신발을 주워 신었다. 서인은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혼자 분주한 무명을 여유롭게 지켜보았다.
“혀, 형아….”
무명은 제가 신발을 신고 나가는 척을 해도 서인이 꿈쩍도 하지 않자 안절부절못했다. 그와 함께 하고 싶긴 한데, 일을 관두고 이 집에서 살고 싶지는 않았다. 서로 반대되는 마음이 충돌하자 무명은 손등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왜 안 가고?”
“어, 어?”
고집부리며 현관으로 다가간 무명이 굳게 닫힌 문을 더듬으며 눈을 커다랗게 떴다. 서인은 뒤통수에서부터 놀란 티가 나는 그를 구경하며 실실 웃었다.
“내가 너처럼 대책이 없을까 봐서?”
쉽게 데려올 수 있다고 한들 다시 도망가게 둘 이유는 없다. 서인은 일차적으로 문에 셔터를 달아 퇴로를 차단했다. 미관을 해치는 디자인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이게 뭐야!”
어찌어찌 셔터를 부순다고 해도 문은 하나 더 있다. 비밀번호를 모르면 안에서 열 수 없게끔 미리 철저하게 대비해두었다.
또 밖에는 서인의 경호원들이 24시간 내내 자리를 지키고 있을 예정이니 사실상 무명은 평생 돌아갈 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혀, 형아 장난하지 마세요! 같이 가요, 빨리 옷 입어요!’
무명은 열리지 않는 문을 보더니 서인에게 달려가 얼른 옷을 갈아입으라며 생떼를 부렸다. 나갈 수 없음을 직감하곤 덜컥 겁을 먹은 모습이었다.
“피곤해, 형은 늙어서 못 가.”
“안 늙었는데….”
“그럼 아직 젊나?”
“늙은 건 아닌데 젊은 것도 아닌데…. 명이랑 나이 차이 되게 많이 나는데….”
무명은 사뭇 진지한 얼굴로 고민했다. 아직 서른인 서인을 두고 늙은 건지 젊은 건지 제대로 대답을 못 했다.
저처럼 앞자리가 2인 것도 아니고 늙은 VIP처럼 6도 아니라서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 서인은 고뇌하는 무명의 모습에 기가 찬다는 듯 웃었다. 물론 10살 차이가 나긴 하지만, 늙은이 취급을 받을 나이는 아니었다.
“형, 가요! 가요!”
“늙어서 못 간다니까, 젊은 너나 가.”
서인은 토라진 척 장난치며 무명이 제풀에 지치길 기다렸다. 마음이 급한 무명은 신을 신은 채로 소파로 달려와 그의 손을 주물럭거렸다. 제발 가자고 안 가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애처롭게 빌었다.
“야, 신발 안 벗어? 안 벗을 거면 다시 현관으로 나가.”
“앗, 네….”
“내 공간에서 더러운 짓 하는 거 용서 못 해. 알아들어?”
“네….”
“그리고 돌아갈 곳 없어. 여기가 네 집이야.”
울먹이는 예쁘장한 얼굴에 마음이 약해진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탁을 들어줄 순 없었다. 서인은 그가 적응을 못 한다면 억지로 적응하게 하면 된다며 애원을 못 들은 척 눈을 감아버렸다.
♦ ♢ ♦
“…….”
그렇게 한 시간 가까이 문 앞에서 서성이던 무명은 풀 죽은 얼굴로 돌아와 신발을 벗고 무릎을 꿇었다.
“그렇게 빌어도 안 되는 건….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무릎을 꿇은 무명은 싹싹 빌기는커녕 가운을 벗더니 바닥을 마구 문질러 닦았다. 서인은 무명이 왜 저러는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조신하게 앉아 바닥을 닦는 모습이 보기 좋아 말리지는 않았다.
“무슨 상처가 이렇게 많아?”
가만히 앉아 무명이 하는 짓을 보던 서인은 그의 손목에 새로운 흉터가 생긴 것을 보고 인상을 썼다. 무명의 몸은 성한 곳이 없었다. 날카로운 것으로 도려낸 자국과 꿰맨 흉터, 허벅지에는 담배를 비벼끈 것처럼 보이는 화상 자국도 남아 있었다.
“…하.”
몸과 손에 상처가 많은 걸 모르진 않았지만, 집에서 보니 기분이 또 달랐다. 걱정된다기보다는 제 소유인 무명이 더럽힌 사람이 많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상처를 내도 내가 내고 만지는 것도 내가 한다는 식의 이상한 질투였다. 그 중 가장 거슬리는 건 안쪽 허벅지의 흉터였다.
“안쪽 허벅지에 담배로 지진 건 누가 그런 거야.”
“기억 안 나요.”
“이 아픈 걸 어떻게 기억 못 해?”
“저한테 이렇게 한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니까요. 저는 괜찮아요.”
무명의 대답은 안 그래도 좋지 못한 서인의 심기를 거스르기에 충분했다. 한두 명이 아니라는 말에 꽂힌 그는 무명에게서 가운을 빼앗아 들었다.
“그만 닦아. 왜 닦고 앉아있어.”
“제가 더럽혔으니까요…. 저 원래 청소는 잘해요.”
“하지 마.”
서인은 조금 전만 해도 얌전해서 좋다고 했으면서 이제는 하지 말라며 무명을 억지로 일으켰다. 무슨 고집인지 무명도 다 닦기 전까지는 주지 않겠다며 힘겨루기를 했다.
“닦을 거예요. 형아 집이잖아요, 깨끗하게 정리해놓고 돌아갈 거예요!”
걸레질에 왜 이렇게 집착하나 했더니 목적은 따로 있었다. 서인은 뒷정리를 깨끗하게 해놓고 다시 돌아가겠다고 말하는 무명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못 알아들어? 앞으로 여기가 네 집이라고!”
“시, 싫어요!”
그는 말을 듣지 않는 무명의 맨 가슴을 발로 걷어찼다. 욕조에서처럼 나자빠지지는 않았지만, 세게 찬 탓에 가슴에 붉은 슬리퍼 자국이 찍혔다.
“아야!”
무명이 제 가슴을 문지르며 고통을 호소하자 서인의 눈이 마구 요동쳤다. 왜인지 이유는 잘 모르겠다만, 아랫도리가 당기고 몸에 열이 올랐다. 서인은 넘어진 채로 다리를 벌리고 앉은 무명의 몸을 위아래로 훑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자, 잘못했어요, 하지만, 하지만, 저는 가고 싶어요. 집에 가고 싶어요, 흑…. 일 안 하면, 안 하면 안 돼요….”
무명은 또 맞을까 봐 두려워 무릎을 꿇고 빌었다. 비굴하고 우스운 그 모습에 지나치게 흥분한 서인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하….”
그는 자기 객관화가 잘 되어있는 편이었기에 제가 이상하다는 것쯤은 느끼고 있었다. 당장 무명을 억지로 취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 서인의 눈꺼풀 경련했다.
“형아?”
평소의 서인이었다면 억지로 박아넣었겠지만, 무명이 이 집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는 상황에서 그런 짓을 했다간 앞으로가 고달플 거 같아 간신히 참아냈다. 대신에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제게 다가와 눈을 마주하려는 무명을 일으켜 방 안에 가둬버렸다.
“하아, 씨발….”
“싫어요, 싫어! 형, 형!”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정말로 박아 넣을 것 같아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무명은 방 안에서 문을 두드리며 서럽게 울었다. 서인이야 억지로 안는 것을 참으려는 의도였지만, 당하는 그에겐 고통스럽고 두려운 학대였다.
“읏…. 하….”
서인은 안에 갇힌 무명의 심정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문 너머에서 울음소리를 듣던 그는 바지 지퍼를 내려 성기를 쥔 뒤 손목이 시큰할 정도로 급하게 움직였다.
“꺼내주세요! 흐, 윽….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꼿꼿이 서 있던 서인의 것은 몇 번 문지르지도 않았는데, 액을 줄줄 흘리며 꺼떡였다. 무명은 있는 힘을 다해 문을 두드렸고 서인은 그가 발악하면 할수록 흥분해 허리를 흔들었다.
“살려주세요! 흐으, 살려줘, 살려주세요, 형, 형….”
“아, 윽!”
어찌나 흥분했는지 서인은 제 성기를 터뜨릴 기세로 세게 쥐고 자위했다. 불거진 핏줄이 손바닥에 느껴질 정도로 발기한 것은 당장에라도 사정할 것만 같은 모양새였다.
“하아, 아…”
무명의 목소리가 멎자 잠시 손을 멈춘 서인이 울음을 재촉했다. 거의 갈 뻔했는데 누군가 틀어막고 사정하지 못하게 하는 기분 나쁜 감각이었다.
“명아, 울어봐, 응? 그럼 꺼내줄게. 윽….”
서인은 급기야 쿠션을 둥글게 말아 틈으로 성기를 욱여넣고 허리를 흔들었다. 그 역시 이토록 천박한 행위를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부드러운 쿠션이 예민한 성기를 감싸는 느낌이 미치도록 좋았다.
서인은 목이 쉴 정도로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목소리를 듣기 무섭게 사정하고 숨을 골랐다.
“하아, 씨발….”
그는 제 흔적으로 범벅된 쿠션과 거실 바닥을 쏘아보다가 손을 대충 닦아내고 무명을 끄집어냈다. 끌려 나온 무명은 정액이 흩뿌려진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을 뚝뚝 흘렸다.
“흐, 윽, 흐….”
“그만 울어봐.”
더 울어보라고 할 땐 언제고 서인은 제 성욕을 감당하기 힘들어지자 무명의 입을 틀어막았다. 한참 동안 흐느끼던 무명은 눈을 감은 채로 손을 뻗어 서인을 붙잡고 일어났다.
“읏!”
“죄, 죄송해요! 단단해서 팔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하필 잡은 것이 아직도 성이 나 있는 서인의 성기였다. 무명은 미안하다고 하면서도 단단해서 팔인 줄 알았다고 변명했다. 유혹의 의도가 전혀 없는 말이었다.
“…….”
그는 자꾸만 서인의 성기를 곁눈질했다. 왜 서 있는지 궁금한 눈치였다.
서인은 무명에게 말했다가는 전처럼 구강성교로는 끝도 안 날 것 같아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따라오지 않으면 좋으련만 그는 눈치도 없이 서인에게 껌딱지처럼 들러붙었다.
“혀, 형아….”
“형아 말고 형이라고 해.”
“네….”
서인은 지금껏 형아라는 호칭을 써도 아무 말 안 했지만, 이제 무명은 제집에 들어왔으며 양지로 나가야 했기에 고치라고 지적했다.
“우리 집에 언제 가요?”
“양치하고.”
문을 저렇게 막아뒀으면 평생 돌아갈 수 없다는 것쯤은 알아야 할 텐데, 무명은 여전히 미련을 놓지 못했다. 서인은 이렇게 된 거 강압적으로 굴기보다는 천천히 달래며 이곳에 적응시키려 했다.
“정말이죠?”
“그래, 자.”
서인에게 칫솔을 받아 든 무명은 제가 사용하던 것과는 다른 전동 칫솔을 만지작거리다가 서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 이게 뭐예요?”
“전동 칫솔. 싫으면 다른 거 줄게.”
“아, 아니 해볼래요! 어떻게 하는 거예요!?”
사용법을 알려주자 무명이 격한 반응을 보이며 신기해했다. 서인은 고작 진동 칫솔을 보고 뒤로 넘어가려 하는 그를 보고 힘없이 웃었다. 반응이 신선해서 재미있기도 하고 아직 갈 길이 멀구나 싶기도 했다.
“이렇게 하는 거야.”
가르쳐줘도 무명이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자 서인이 그의 입을 벌려놓고 치아 구석구석을 닦여주었다.
씻고 나온 무명은 소파에 앉아 서인만을 바라보았다. 빨리 집에 가자고 말하고 싶은 것이 얼굴에 다 드러났다.
“술 한잔할래?”
“양치하고 집에 간다고 했잖아요….”
“한잔하고 집에 가지, 뭐. 양주는, 마실 줄 알아?”
“네.”
무명은 제가 만든 제품만 먹지 않을 뿐 VIP를 접대해야 하는 처지였기에 술은 빼지 않고 마셨다. 그는 서인이 건넨 잔을 들고 술을 급하게 받아마셨다.
“천천히 마셔.”
접대 습관이 그대로 나왔다. 서인은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며 긴장을 풀어주려 했는데, 무명이 벌컥벌컥 마시자 바로 제지했다.
“네, 네….”
“그렇게 마시면 안 돼. 누구한테 배웠어.”
“소, 손님들이요….”
“손님? 너 술자리도 해?”
어쩐지 뾰족한 서인의 목소리에 무명이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왜 싫어하는지 몰라서 마음이 불편했다. 술도 빨리 마시고 빨리 취하면 좋아하길래 그렇게 했을 뿐인데, 서인은 전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제가 또 뭘 잘못했나요?”
“아니. 네 잘못은 아니지.”
굳이 따지자면 예쁜 게 문제지 무명의 잘못은 아니었다. 서인은 술을 빨리 마시는 습관과 접대한다는 무명의 말을 듣고는 남자를 혐오하는 홍주원이 왜 그를 특별대우하는지를 깨달았다.
“상품성이라 이건가.”
“네?”
“아니야.”
상품성, 확실히 무명은 상품성이 있다. 그의 얼굴을 처음 봤을 때 서인 역시 술집에 던져놔도 꽤 잘 팔릴 것 같다고 생각했고 말이다.
“앞으로 내 앞에서 빨리 마시지 마.”
“네, 네….”
“밖에서는 아예 마시지 말고.”
“그, 그건 안….”
“토 달지 마.”
“네….”
서인은 대답을 듣자마자 술을 급히 넘겼다. 천천히 마시라고 잔소리를 한 주제에 본인은 전혀 지키지 않았다.
“혀, 형아.”
“내가 뭐라고 하랬지?”
“아, 아. 형….”
“그래, 왜.”
술을 한 모금, 한 모금 홀짝홀짝 들이켜던 무명이 서인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그는 무언가를 바라는 얼굴로 우물대며 애꿎은 잔만 만지작거렸다.
“말해.”
“저, 저…. 배고파요….”
“…….”
“죄, 죄송해요. 못 참을 거 같아서….”
무명이 입을 엶과 동시에 그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배고프면 진작 말을 하면 될 것을 여태까지 꾹 참았다니. 미련하기 짝이 없다.
“오늘 뭐 안 먹었어?”
“오늘뿐만이 아니라, 형이 그렇게 없어지고 나서 쭉 제대로 안 먹었어요!”
먹지 않았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서인이 된장찌개를 버려서 남은 재료가 없기도 했고 비싼 쌀밥을 퍼먹고 있자니 눈물이 뚝뚝 떨어져서 먹을 수가 없었다. 업무를 보는 동안 남의 것을 몰래 훔쳐먹은 게 전부였다.
“왜.”
“형이 없으니까 밥이 안 들어갔어요.”
마음에 드는 대답이었다. 시종일관 뚱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서인이 방긋 웃자 무명도 덩달아 웃었다. 그는 서인의 손을 붙잡고는 많이 보고 싶었다며 솔직한 심정을 고백했다.
“…형은요?”
“나 뭐.”
서인은 무명이 무슨 대답을 원하는지 알면서 모르는 척했다. 그와 키스하고 싶을 때나 제멋대로 휘두를 때 쉽게 나왔던 말들이 지금은 꽉 막힌 것처럼 입안에서 맴돌았다.
“저는, 형 많이 보고 싶었는데 형은 안 보고 싶었어요?”
“그래, 나도.”
“얼마만큼이요? 많이요? 형도 밥 안 먹었어요?”
“배고프다 그랬지? 밥 먹자.”
서인은 끝끝내 대답해주지 않았다. 낯간지럽고 속이 울렁여서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소파에서 일어난 그는 무명을 방 침대에 앉혀놓고 어디론가 전화해 음식을 부탁했다. 무명은 시무룩하게 앉아있다가 전화 소리에 집중했다.
“다 되면 노크만 하고 돌아가세요. 큰소리 내지 말고.”
- 네, 알겠습니다.
서인은 전화에 관심을 두는 무명을 떼어놓았다. 그는 누가 오냐, 뭐 하러 오냐 등등 재잘재잘 떠드는 무명을 힐끔 바라보며 전화를 끊었다.
“나도 나가볼래요, 내가 요리할래요.”
“됐어. 사람 불렀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밥은 제가 할 수 있는데….”
“해주는 사람 따로 있어. 네가 요리사보다 더 잘할 자신 있어?”
“그건 아니지만, 형이 좋아하는 고기는 자신 있어요. 그거 한 번 맛 들이면 절대 못 끊잖아요. 병이 나도.”
“병은 무슨. 난 알아서 조절해.”
“…특별한 고기니까 병 날 수도 있어요.”
“어쨌든 이 집에 있는 한 너는 요리 못해.”
서인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하는 모습이 예쁘긴 하겠다만, 끔찍했던 된장찌개를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어떤 음식을 만들어주시는 걸까요?”
“글쎄, 네가 못 먹어본 음식임은 확실하지.”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떼쓰던 모습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무명은 기대가 가득 찬 얼굴로 웃었다. 정말 배가 고프긴 한 모양인지 제가 아는 음식 이름을 줄줄이 읊으며 입맛을 다시기도 했다.
“형, 구경하고 싶은데 나가면 안 돼요?”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들어오기 시작하자 무명이 코를 킁킁대며 문 앞에 찰싹 달라붙었다.
“나가면 안 돼요? 네?”
“안 돼.”
서인은 문을 열고 나가려는 무명을 잡아당겨 제 허벅지 위에 앉혔다. 그는 어색한 몸짓으로 움직이더니 서인의 어깨에 뒤통수를 기댔다. 널찍하니 머리를 받쳐주는 어깨에 머리를 비비던 무명이 다시 조르기 시작했다.
“왜 나가면 안 돼요? 고기는 제가 더 잘 구울 것 같지만, 다른 요리는 저분이 더 잘하실 테니까 미리 배워두면 좋잖아요?”
“안 돼.”
“왜요?”
“그러는 넌 왜 이렇게 요리를 못 해서 안달이야?”
서인에게 고기를 구워주고 맛있다는 말을 듣고 싶은 무명은 쉽게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굳이 요리사를 집에 부르지 않아도 내가 있는데 왜 그러냐고 묻기도 했다.
“저 요리 잘해요. 제가 연구소에서 형네 회사 사람들 밥도 해줬어요. 그리고 제가 형을 먹여 살려야 하니까 배우려고 하는….”
“꿈도 크네. 먹여 살려?”
서인은 저를 먹여 살리겠다고 당차게 이야기하는 무명을 비웃었다. 그를 먹여 살리는 것은 서인의 몫이었는데 무명은 전혀 알지 못했다.
서인은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라며 말을 자르고 허리와 몸을 은근히 더듬었다. 흥분하게 해 입을 다물게 할 심산이었는데, 예상외로 무명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얼른 요리 배워 올 테니까 먹고 돌아가요.”
“그러니까 네가 꿈이 크다는 거야. 돌아가기는 어디를 돌아가?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야.”
서인은 그 더러운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에 관해서는 단 한 번도 의견을 굽혀주지 않았다. 무명은 나갈 수 없다고 재차 못 박는 그는 말에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왜, 또.”
무명은 이불을 움켜쥐고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서인은 입을 꾹 다물고 떠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몸을 억지로 돌려 눈을 맞췄다.
“왜 그러는데.”
무명은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로 참고 있었다. 물건을 집어 던지거나 소리치기 직전의 얼굴이었다.
“형이랑 같이 살기 싫어?”
“아니에요!”
“그럼 왜 돌아가고 싶어? 의뢰 못 받아서 싫어?”
“…….”
“말 해줘야 알 수 있어. 네가 이곳이 싫은 이유를 말해봐. 해결해줄게.”
무명은 입을 열지 않고 바들바들 떨면서 침묵만을 고수했다. 그 모습에 서인도 숨이 턱 막혔다. 말을 안 하면 알 수 없는데, 꾹 다물고만 있으니 속이 터져 나갈 지경이었다.
“말을 해.”
주변에서 공감 능력이 없다고 할 정도로 냉정하고 성격이 더러운 서인이 이 정도로 참는 것도 대단한 일이었지만, 그 사실을 무명이 알 리 없었다. 그는 애꿎은 베개만 때려가면서 온몸으로 서인에게 불만을 드러냈다.
“씨발! 답답해 죽겠네, 그래. 너 사람 못 죽여서 여기 있는 거 싫은 거지?”
“…….”
“죽일 만한 거 가져다줄 테니까 살아. 알았어?”
서인은 그런 좁고 더러운 곳에서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다며 무명이 이곳을 꺼리는 이유를 마음대로 판단했다.
사람을 구해다 주겠다고 당당하게 말하기는 했지만, 이건 서인에게도 어려운 일이었다. 한두 번이면 몰라도 그 이상은 무리였다.
그렇다고 해서 살인을 멈추게 할 수도 없다. 거의 평생을 해 온 업무일 텐데, 한순간에 그만두는 건 불가능했다. 또 정신과 치료를 받게 하는 건 아무리 제 병원이래도 범죄가 들통날 가능성이 커서 시도도 해보지 못할 일이다.
“못 믿겠니?”
애초에 타협점이 없는 이야기이니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게 된다. 싸움이 되기 전, 방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밥 먹고 이야기하자.”
“네….”
서인은 좋은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무명을 일으켰다.
밖으로 나온 무명은 맛있는 냄새에 홀려 급히 자리에 앉았다.
“이, 이, 이거 먹어본 적 있어요!”
“그래? 의외네. 이걸 어디서 먹었어.”
“수, 수장님께서….”
서인은 무명에게 좋은 것만 먹여주고 싶은 마음에 값비싸고 몸에 좋은 음식들로 식탁을 구성했다. 찌개류를 좋아하는 것 같아 종류별로 조금씩 부탁하기도 했다.
“하아, 하….”
음식을 본 무명은 성적으로 흥분한 사람처럼 헐떡였다. 그 모습에 서인은 당황했지만, 모르는 척 무명과 마주 보고 앉았다.
“먹어봐. 네가 좋아하는 거 말하면 다음에도 해줄게.”
“자, 잘 먹겠습니다.”
무명은 포크와 수저가 앞에 있음에도 맨손으로 음식을 먹으려 했다. 서인이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예의 없는 행동이었다.
“안 돼.”
서인은 그가 접시에 손을 가져다 대는 순간 손등을 아프게 때리며 쳐냈다. 게걸스럽게 먹는 것도 쩝쩝 소리를 내며 먹는 것도 싫어하는데, 손으로 먹게 둘 수는 없었다. 무명이 아무리 예뻐도 눈감아 줄 수 없는 문제다.
“왜요!”
무명이 눈을 세모나게 뜨고 서인을 노려보았다. 서인은 반항적인 눈빛에 기가 막혀 코웃음 쳤다.
“누가 음식을 손으로 처먹어? 나랑 장난해? 이딴 식으로 시위를 하나?”
“…….”
“젓가락질 힘들면 포크 써, 자.”
시위하려던 게 아니었던 무명은 서인이 건넨 포크를 쥐고 자그마한 접시에 놓인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마저도 쩝쩝 소리를 내며 뚝뚝 흘리는 게 반이었다. 그 바닥에 떨어진 음식을 손으로 주워 먹자 서인은 젓가락을 세게 내려놓았다.
“똑바로 안 해?!”
“또, 똑바로 하고 있는데….”
자그마한 접시에 나오는 손바닥만 한 음식은 무명을 괴롭게 했다. 그는 음식이 없어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꾸역꾸역 처넣는 것도 모자라 삼키기도 전에 다른 접시를 찾았다.
“포크 들어.”
“맛있어, 맛있다, 맛있다, 하아, 아….”
무명은 눈물까지 뚝뚝 흘리며 미친 사람처럼 행동했다. 걸신들렸다는 표현도 약할 정도로 병적인 모습이었다. 버거운지 중간중간 기침을 하며 구역질도 했다.
“…윽.”
서인은 그가 먹지 못하게 다 치우고 싶었지만, 더러워진 그릇을 만질 자신이 없었다. 대신에 무명을 끌어내려다가 손에 음식물이 묻자 그도 함께 구역질했다. 서인은 입을 틀어막고 황급히 달려가 몸을 씻어냈다.
“하아…. 씨발, 씨발!”
그는 샤워를 다시 한 것도 모자라 손이 쓰라릴 정도로 씻으며 소독제를 퍼부었다. 숨을 헐떡이며 괴로워하는 것이 무명과 다를 것 없었다. 서인은 기계에서 비누 거품이 나오는 그 짧은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물건을 마구 때려 부쉈다.
“도대체 왜 이 지랄인데!”
다시 부엌으로 온 그는 씻고 오기 전보다 더 더러워진 식탁과 바닥, 무명의 몸을 보고는 악을 질렀다. 당장 치워버리고 싶은데 손을 댈 수가 없었다. 깨끗하게 광이 나던 식기를 모두 불 질러버리고 싶었다.
“우, 욱….”
미련한 무명은 그 많은 양을 다 먹고 입을 틀어막은 채 토기를 참아내고 있었다. 참혹한 광경에 눈이 돈 서인이 식탁에 도자기를 집어 던졌다. 소스라치게 놀란 무명이 음식물을 꿀꺽 삼키고 서인을 올려다보았다.
“혀, 형….”
“꺼져, 꺼져, 꺼져! 다가오면 죽여버릴 거야. 가만히 있어.”
무명이 천천히 다가오자 서인이 이마를 짚고 비틀거렸다. 그는 무명에게 수건을 던져주고 음식물이 바닥에 떨어지지 않게 닦으라고 말했다.
“다 닦았어요….”
무명도 혼날 짓을 한 건 알고 있어서 고분고분 말을 따랐다. 떨어질 만한 음식물을 모두 닦은 그는 서인의 명령대로 욕실로 가 몸을 구석구석 깨끗이 닦아냈다.
“흐, 흑….”
무명은 새 가운을 입으면서 조용히 흐느꼈다. 집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과는 별개로, 서인에게 잘하고 싶고 귀여움받고 싶었다. 그러나 모두 망쳐버린 게 서러웠다.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고 밖으로 나온 그는 서인이 방으로 들어가 버리자 방문을 두드리며 빌었다.
“형…. 제가, 제가 다 치울게요. 깨끗이 닦아둘게요.”
“놔둬! 들어오지 마. 꺼져!”
잘못한 게 있으니 차마 따라 들어가진 못했다. 서인이 평소에도 다혈질이기는 했다만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더 무서웠기에 살갑게 굴 자신이 없었다. 무명은 그렇게 가운만 걸친 채로 바닥에 앉아 하염없이 서인만을 기다렸다.
30분쯤 지났을까, 문이 열리고 대욱과 이상한 사람들이 집으로 들어왔다. 새하얀 옷을 입은 청소 업체 직원을 연구소에서 나온 사람으로 착각한 무명은 냉장고 뒤에 숨어 상황을 지켜보며 벌벌 떨었다.
“…뭐 하시는 겁니까.”
대욱은 그런 그를 강제로 끌어냈다. 퇴근하고 이제 좀 쉬려고 하자마자 서인의 불같은 부름을 받고 찾아온 그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물론, 서인을 향한 불만은 아니었다.
“그게, 그게….”
“뭘 하셨길래 대표님께서 저리 불안해하십니까?”
“…불안?”
무명은 서인의 행동을 불안이라고 인지하지 못했다. 화를 내고 물건을 때려 부수는 모습이 그저 공포로만 다가왔다. 그는 대욱의 말에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울먹였다.
“소독해야 하니까 저기 앉아 계세요.”
서인이 청소업체를 부르라고 할 때면 강박감이 극에 달한 상태라는 것을 알기에 대욱은 전화를 받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속이 문드러진 채였다. 게다가 원인이 무명에게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으니 그가 곱게 보이지 않았다.
“대표님과 함께 계시려거든, 이런 행동은 하지 않으시는 게 좋습니다. 제 공간이 더러워지는 것을 참지 못하시는 분이십니다.”
애초에 서인의 집은 사용인과 대욱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발을 들일 수 없는 장소였다. 서인이 그러기를 바랐고 그건 몇 년 내내 쭉 이어져 오던 일이었다. 그런데 무명은 그 규칙을 어긴 것도 모자라 집안을 온통 더럽혔으니 대역죄인 수준이었다.
“대표님께서 힘들어하시는 모습, 저는 못 봅니다. 당신 아니라도 충분히 힘드신 분이니까. 잘할 자신 없거든 나가세요.”
무명이 대답하지 못하고 뜸을 들이자 대욱이 그를 번쩍 들어 현관에 내팽개쳤다. 서인이 알면 가만히 두지 않을 짓을 하고도 대욱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맞고 폭언을 들으면 들었지 해로운 사람을 곁에 두고 싶지 않다는 의지였다.
“나가세요.”
대욱은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 무명을 협박했다. 서인이 소리를 듣고 밖에서 나올 것을 우려한 행동이었다. 그는 원래 점잖은 남자였지만 서인에게 좋지 못한 영향을 끼치는 존재는 사람으로도 취급하지 않았다.
서인은 타인에게 보이는 자신의 모습과 온전히 제 공간인 집에서 극심한 강박을 보였기에 집은 무슨 일이 있어도 청결해야 했다. 대욱은 가장 금기시하는 것을 망가뜨린 무명을 굳은 얼굴로 내려다봤다.
“싫어! 네가 뭔데!”
무명은 나가지 않겠다며 문을 꽉 잡고 버텼다. 서인이 안 된다고 할 때는 그렇게 나가고 싶어 했으면서 지금은 필사적으로 집에 붙어 있으려 했다.
“차로 모셔.”
모시라는 것도 최소한의 예의였다. 대욱은 문을 연 사이에 도망쳤다고 말하겠다며 무명을 밖으로 끌어냈다. 그러자 울먹이던 무명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형이 여기 있으라고 했는데, 왜 네가 그러는데?”
그도 연구소의 유일한 남성 고위관계자인 데다가 자존심이 센 편이다. 무명은 서인도 아닌 그의 심복에게까지 기죽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덩치도 비슷비슷해서 싸워도 막 밀릴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대욱을 단순 업무를 돕는 사람 정도로 생각한 무명은 벌떡 일어나 자세를 잡았다.
청소업체는 집을 소독하고 서인의 수행원들과 대욱은 주먹을 앞으로 내민 무명을 지켜보는 이상한 모양새였다.
“윽!”
대욱이 성큼성큼 다가가 그의 멱살을 붙잡았고 무명도 대욱의 팔을 힘주어 붙잡았다. 밀어내려는 힘과 들어가려는 힘이 충돌했다. 잠시 힘을 빼고 있던 무명이 대욱을 거칠게 밀어내고 바닥에 눌어붙었다.
“난 네 말은 안 들어!”
대욱은 억지로 끌어내는 수행원들을 만류하고 무명을 가만히 내버려 뒀다. 쫓아내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서인이 나와볼 것 같아 이 이상의 소란을 일으킬 수 없었다.
“안 가!”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무명은 혼자 소리를 질렀다. 대욱은 그런 그의 입을 틀어막아 구석에 처박아두고는 서인의 방을 노크했다.
“대표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허락이 떨어지지 않자 대욱은 실례하겠다는 말과 함께 조심스레 방 안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서인은 침대에 누워 괴로운 얼굴로 눈을 감고 있었다.
어느 정도 진정한 상태라 물건을 던지거나 폭력적으로 행동하진 않았지만,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다 치웠으면 가. 씻을 거야.”
“약 드셔야하는 거 아닙니….”
“형, 조금 전에 씻었잖아요?”
무명은 기척 없이 들어와 말을 얹었다. 그는 가운 차림의 서인을 의문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제가 원인을 제공한 것은 꿈에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대욱은 서인이 기분 나쁘지 않게끔 살펴보다가 미리 챙겨 온 약과 물을 건넸다.
“드세요, 대표님.”
“됐어, 괜찮아.”
무명은 서인을 일으키고 약을 건네는 등 챙기는 것에 익숙해 보이는 대욱을 노려보았다. 그가 서인의 몸을 만지는 것도 짜증이 났지만, 서인이 아무렇지도 않게 곁을 내주는 것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내놔!”
무명은 다짜고짜 달려들어 대욱에게서 약과 물을 빼앗았다. 서인을 챙기는 것은 제 몫이었기 때문이다. 서인은 몸에 힘이 쭉 빠진 것처럼 기운이 없어 그의 행동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형 왜 아파요? 왜 약 먹어요?”
“…안 아파.”
무명은 서인의 옆자리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 이마에 열을 재고 뺨을 비벼보는 등 관심을 끌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퇴근했는데 불러서 미안하네.”
“괜찮습니다, 약 드시고 주무세요.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대욱이 꾸벅 인사하고 나가자 무명이 약을 매만지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의 서인은 누군가를 신경 써줄 정신이 없어 그의 표정을 봐 놓고도 모른 척했다.
“이런 곳에 있으니까 약 먹는 거예요.”
“하….”
무명이 다시금 시동을 걸었다. 대욱이 나가라고 할 때는 죽어도 나가지 않겠다고 문을 붙들고 버틴 주제에 지금은 또 서인에게 은근슬쩍 말을 꺼냈다.
“집에 가요, 집에 가요, 네? 네?”
돌려 말하던 그는 서인이 괜히 일정을 살피며 다른 짓을 하자 본격적으로 조르기 시작했다.
“가요, 가요, 가요!”
급기야는 몸 위에 올라타서 쿵쿵 내리찧기까지 했다. 서인은 계속 조르기만 하는 무명을 바라보며 물었다.
“왜 가야 하는데, 이유도 없다면서.”
“이, 있어요! 술이랑 고기 만들어서 돈 벌어야 해요. 일해야 만날 수 있단 말이에요!”
“뭘 만나.”
“만나야 하는 사람이 있어요! 제게 소중한 사람이에요!”
서인을 좋아한다고 노래를 불러댈 땐 언제고 이제 다른 사람을 만난다니. 참으로도 뻔뻔스러웠다.
“그럼 더더욱 못 보내주지. 다른 새끼 만나겠다는 건데.”
“일해야 해서 가야 해요! 가야 한단 말이에요! 형도 잘 알잖아요.”
“너 일 안 해도 된다니까? 홍주원이 너한테 지랄도 안 할걸.”
“그걸 형이 어떻게 알아요!”
“혹시 몰라, 내가 네 사장일지?”
“아니에요!”
서인은 무명의 투정을 더 들어주지 않았다. 그는 대욱이 정리해놓고 간 서랍 위에 놓인 수면제를 무명의 입안에 쑤셔 넣었다.
“뭐, 뭐예요?”
“먹어. 몸에 좋은 약. 형이 너한테 설마 해로운 걸 줄까.”
“…뱉을래요.”
“먹으면 집에 갈게.”
무명은 이미 여러 번 속아놓고서도 마지막 희망을 걸어보았다. 약을 삼킨 그는 서인의 품에 안겨 가슴팍에 이마를 비볐다.
“좋아해요….”
“…….”
“형이 쓸만한 샴푸도 사뒀고 담요도 새것으로 바꿔뒀어요. 전보다 더 잘할 수 있어요….”
서인은 무명이 빨리 잠들기를 바랐다. 지금은 괜히 데리고 왔나 후회가 들 정도로 모든 게 귀찮았다.
20분쯤 지나자 종알종알 떠들던 무명이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곤히 잠들었다. 고집이 어찌나 센지 그는 약에 취해서도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반복하며 칭얼거렸다.
“고생시켜놓고 잘도 자네.”
서인은 제 허리를 감싸 안고 자는 그의 옆에 누워 눈을 감아보았다. 일에 치이고 시달리기까지 했으니 바로 잠들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안타깝게도 잠은 오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목까지 뻐근하고 머리도 지끈지끈했다.
“하….”
수면제를 먹고 억지로 잠들어봐야 깊이 잘 수 없음을 아는 서인은 그나마 안정을 취할 수 있는 서재로 걸음을 옮겼다.
할 일도 없으면서 괜히 서랍을 뒤적이고 책을 폈다 덮었다 반복하던 그는 다시금 무명의 더러운 버릇들을 어떻게 뜯어고쳐야 할지 고민했다.
“갖다 버릴 수도 없고.”
무명은 귀엽고 예쁜 걸 빼면 부정적인 요소가 압도적인 남자였다. 형편없는 식사예절과 다혈질, 분노조절장애에 말만 하면 질질 짜는 버릇 등 고쳐야 할 것들이 산더미였다.
폭력으로 다스리기엔 딱 그때뿐이었고 아이 달래듯 다뤄봐도 통하지를 않았다. 매일 밤 수면제를 먹여 재울 수도 없는 노릇이니 강수를 두어야 하는데 밤을 새워 고민해봐도 뾰족한 수는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