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14)

03

“대표님, 일어나세요.”

“응….”

남자의 아지트로 돌아온 서인은 씻는 내내 그에게 감시를 당했다. 다 씻고 나온 후에는 지하실로 데려가 발목을 묶어놓았다. 숨 막히는 상황에 서인은 최대한 남자를 자극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저도 씻고 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고기도 금방 구워올게요!”

“어어.”

남자가 욕실로 들어간 것을 확인한 서인은 매트리스 안에 숨겨두었던 휴대전화로 대욱에게 위치를 전송했다. 경찰에 신고할 수도 있었지만, 주원의 사람을 신고하면 일이 복잡해지니 그를 통하는 게 최선이었다.

[갈아입을 옷이랑 마취제도 가져와.]

옷을 따질 상황이 아닌데, 서인은 남자의 싸구려 옷을 입으니 피부가 거칠어지는 것 같다며 새 옷을 부탁했다.

“대표님! 대표님! 대표니임!”

“…….”

대욱이 올 것을 기다리며 멍하니 앉아있던 서인은 위에서 들려오는 애절한 남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남자가 대표님, 대표님 하며 소리를 꽥꽥 지르고 있었다.

“대표님, 불렀는데 왜 안 와주세요!”

남자는 두 달 전에 비해 말도 늘었고 꽤 쓸 만해졌지만, 바보 같은 건 여전했다. 그는 묶여있는 서인을 탓하며 지하실 문틈으로 눈만 빼꼼 내밀었다.

“묶여있는데 어떻게 갈까, 응?”

“아, 맞다….”

소리를 지르기에 또 칼을 들고 휘두를까 봐 긴장했던 서인은 남자가 난데없이 길쭉하고 예쁜 다리를 뻗자 눈을 커다랗게 떴다. 다리와 눈만 내민 모습은 누가 봐도 유혹이었다.

“만져달라는 거야?”

“…….”

남자는 서인이 아무렇지도 않게 저를 희롱하자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저었다. 뭘 해달라는지 말을 해야 알 텐데 입을 꾹 다물고 맨다리만 내밀고 있으니 서인은 어쩌라는 건가 싶었다. 답답함에 윽박지르려던 걸 참고 기다리자 남자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누, 눈감아주세요. 제가 말할 때까지 뜨지 마세요….”

그는 별것도 아닌 부탁을 하며 수건으로 몸을 가리고 후다닥 내려왔다. 몸을 씻은 후 아무것도 입지 않은 탓에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고환이 달랑였다. 아무도 안 보는데 괜히 부끄러워진 남자는 성기를 조심스레 붙잡고 지하실을 뒤적였다.

“저, 옷 좀 입을게요…. 작업실에서 못 가져와서.”

“여기 없어. 내가 다른 곳에 치워뒀어.”

“아닌데…. 저기 회색 옷 있잖아요?”

남자가 매트 쪽으로 다가오자 서인이 담요로 그의 머리를 덮고 몸 위로 올라탔다.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남자에게 휴대전화를 들키면 살해당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아, 아아, 싫어! 싫어! 하지 마! 놔!”

졸지에 머리를 담요에 뒤집어쓰고 포박당한 남자가 몸을 뒤틀며 비명을 질렀다. 서인은 발악하는 그를 짓누르고 휴대전화를 베갯잇 안으로 집어넣었다.

“흐….”

반항하던 남자는 어느새 잠잠해졌다. 서인은 그가 말없이 발발 떠는 것을 보고 억지로 잡아당겨 일으켰다. 전신에 힘이 풀린 사람처럼 흐느적대며 벽에 기댄 남자는 담요로 얼굴을 가리며 구석으로 기어들어 갔다.

“싫어요… 무서워요….”

서인은 울먹이는 남자에게서 담요를 빼앗았다. 고개를 푹 숙인 탓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왜 그러는데.”

서인은 별것도 아닌 일에 질질 짜고 약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을 가장 싫어한다. 그는 몸을 둥글게 말고 울고 있는 남자의 등을 세게 내리치며 턱을 붙잡았다.

“야, 도대체 왜 그렇게 우는 건데?”

“흐….”

서인에게 턱이 붙잡혀 억지로 고개를 들게 된 남자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서인의 이성도 뚝 끊어졌다.

“싫어요…. 얼굴 보지 마세요… 흑, 흐….”

남자가 얼굴을 보이는 게 싫다며 삐친 사람처럼 입술을 내밀고 도리질 치자 서인이 그의 양 뺨을 붙잡고 강제로 입술을 들이밀었다.

“으으…. 읍!”

남자는 제 입술을 핥고 몸을 쓰다듬는 손길을 피해 달아났다. 갑자기 흥분한 서인은 그를 배려하지 않았다. 정신없이 입술을 빨다가 남자가 도망치자 짜증 섞인 말투로 강요했다.

“하…. 입 벌려.”

“시, 싫어요.”

계속해서 뒤로 물러나던 남자는 결국 벽에 가로막혔다. 그는 새카만 서인의 눈동자를 마주 보고는 몸을 떨었다. 눈이 술에 취한 것처럼 풀려있었기 때문이다. 먹잇감이 된 것만 같은 기분에 흥분은커녕 무섭기만 했다.

“싫어요! 대표님은 나빠요!”

“뭐가 나쁜데.”

“담요를 뒤집어씌우셨잖아요.”

서인을 좋아하는 감정과는 별개로 남자는 뽀뽀할 기분이 아니었다. 다정함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었고 서인이 머리에 담요를 뒤집어씌우고 겁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앙칼지게 소리를 지르며 따지고 들었다.

“담요가 뭐.”

“저는 앞이 안 보이면 무섭다고요! 그리고 대표님은 제가 누군지도 모, 모르시… 으, 으!”

서인의 시선은 열심히 불만을 토해내는 남자의 입술로 향해 있었다. 그는 남자가 설명하거나 말거나 억지로 짓누르고 다시 입을 맞췄다.

“하아, 제발….”

“시, 싫어요!”

서인은 언제나 강압적인 사람이었지만, 지금처럼 먼저 안달 나서 달려드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남자는 계속해서 거부하며 울먹였다.

“착하지? 입 벌려.”

“…….”

“아니면 아프게 할 수도 있어.”

서인은 버둥거리는 남자의 팔을 결박하고 무릎으로 성기를 문질렀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남자는 서인의 바지 무릎이 축축이 젖을 정도로 예민하게 반응했다.

“아, 안 돼요. 하지 마세요!”

남자는 핏대가 설 정도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거부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신체접촉을 거절당한 서인은 자존심이 상하고 화가 났다.

“주둥이 한 번 빤다고 죽기라도 해?”

“싫어요, 대표님은 제가 누군지 알고 싶지도 않으면서 우, 웨엑!”

서인은 남자가 구역질까지 하면서 싫어하는 것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삽입은커녕 혀도 못 섞고 있는 것에 치욕을 느낀 그는 남자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건네며 뺨을 쓰다듬어 주었다.

“누군지 알아. 연구소에서 대본 읽었던 놈이잖아.”

“아, 알아요!? 기억났어요?”

그게 사실이냐고 묻는 얼굴은 혼을 쏙 빼놓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기억한다는 말에 긴장이 풀린 남자는 오므리고 있던 다리를 조금씩 벌리고 서인의 목을 껴안았다.

“그래, 네 말대로 부끄러워서 모르는 척했어.”

“그럼 대표님은 저, 저를, 좋아하시는 거죠?”

“당연하지. 키스는 좋아하는 사람끼리 하는 거야.”

서인은 남자를 탐하기 위해 양심을 팔았다. 곧이곧대로 믿는 그의 순진함 탓에 죄책감이 들긴 했지만, 남자에게도 이득이었다. 좋아하는 사람과의 성관계가 나쁠 리 없기 때문이었다.

“너, 좋아하는 사람이랑 잘 확률이 얼마나 희박한지 알기는 해?”

“잔다니요? 그건 쉬운데…. 밤에 같이 잘 거잖아요?”

“장난하지 말고.”

“…네?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어요.”

농담인 줄 알았던 서인은 남자의 순수한 눈빛에 눈을 질끈 감고 탄식했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상대로 범죄를 저지르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단순 잠을 자는 게 아니라!”

“그러면요?”

“성관계한다는 뜻이야. 너 성관계가 뭔지는 알지?”

성관계라고 칭한 것도 배려였다. 남자가 섹스라는 말을 모를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남자는 한참 생각하더니 별문제도 안 되는 말을 걱정스레 내뱉었다.

“나, 남자끼리 성관계를 어떻게 해요? 대표님과 저는 이, 이게 달렸는데?”

남자는 제 성기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성관계의 의미는 알지만, 동성끼리 가능하다는 건 꿈에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할 수 있지. 구멍이 있는데 왜 못 해?”

“구, 구멍이요? 여기 뒤, 뒤요?”

“그래.”

남자는 충격 받은 얼굴로 제 구멍을 더듬었다. 성기는 커다랗고 징그러운데, 항문은 좁고 앙증맞았기 때문에 그런 곳에 들어간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건 조그맣잖아요? 안 벌어진단 말이에요. 그리고 애초에 여기엔 뭘 넣는 게 아니에요. 대표님, 바보예요?”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사실이었다. 남자는 부끄러운 것도 모르고 서인의 손을 잡아끌어 제 구멍에 가져다 댔다.

“이거 보세요. 이렇게 오므라들어 있는걸요?”

“…….”

손에 닿은 남자의 항문은 말랑하고 따뜻했다. 서인이 은근슬쩍 만지작거려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남자에게 있어 항문은 성적 쾌감을 주는 기관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서인은 구멍 안으로 손가락을 욱여넣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아니면 대표님 성기가 작은가요?”

“하, 참….”

남자는 씻길 때 이미 몇 번이나 봐놓고서 서인에게 성기가 작은 게 아니냐는 막말을 했다. 일부러 도발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헛소리였다. 남자의 말이 사실이 아니었기에 서인은 기막히다는 듯이 웃기만 했다.

“여기에는 뭐 넣는 거 아니에요, 이제 아시겠죠?”

“응, 그래, 그래. 네 말이 맞아.”

남자의 예쁜 얼굴에 흥분해 삽입까지 할 생각을 했던 서인은 다음 기회를 노리기로 했다. 막무가내로 몰아붙였다가는 그가 평생 하지 않겠다고 거부할 게 뻔했다.

“천천히 하면 괜찮을 거 같기도 해요. 방금 그거….”

“응?”

남자는 작은 목소리로 종알종알 떠들었다. 서인이 용기를 내서 한 말을 듣지 못하자 그가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며 눈치를 살폈다.

“대표님, 바, 방금 그거 하고 싶으세요?”

“키스?”

“네, 그거요….”

“당연하지, 좋아하는 사람이랑 하고 싶은 건 당연한 거야.”

“조, 좋아해요? 무명이를요?”

남자는 서인과 제 마음이 같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은근슬쩍 이름을 흘렸다. 키스에 이래저래 요구사항도 많았다.

“무명이?”

“대표님께서 무명이를 좋아한다고 해주시면 키, 키스 될 거 같기도….”

서인은 귀찮긴 했지만, 한 번 하는데 분위기 잡는 것도 못 해줄 만큼 쓰레기는 아니었다. 그는 남자가 원하는 대로 뺨을 부드럽게 감싸 쥐고 눈을 마주 보며 속삭였다.

“무명아, 좋아해.”

“저도 좋, 좋아해요! 앞으로 무명이라고 불러주시면….”

“명이라고 부를게. 그게 더 가까워 보이거든.”

“대표님, 저 정말 행복해요!”

오로지 키스를 하기 위한 고백임에도 무명은 발그레한 얼굴로 기뻐했다. 서인이 이제 됐나 싶어서 입술을 들이밀자 그가 또 몸을 빼고 거부했다.

“장난해? 좋아한다고 했잖아.”

무명에게 짐승처럼 발정이 났다고 조롱하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서인은 몸이 달아 어찌할 바를 몰랐다. 강제로 쑤셔 넣고 흔들고 싶을 정도로 급했다.

“며, 명이 얼굴에 상처 안 징그러워요?”

“안 징그러워. 예뻐.”

“…….”

무명은 두 달 전, 서인이 상처를 지적하며 흉하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까 봐 마스크를 벗지 않았던 것도 있지만, 흉터를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다.

“거짓말, 흉하다고 했잖아요.”

“아니야, 예쁘기만 한데, 뭘.”

입가의 상처가 콤플렉스인 데다가 서인이 큰 충격을 주었기 때문에 무명은 쉽게 믿지 못했다. 급기야는 눈물을 글썽이며 투덜거렸다.

“거짓말이잖아요, 안 믿을 거예요.”

서인은 눈물로 젖은 무명의 속눈썹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키스하지 못해 짜증이 났었는데 얼굴을 보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누그러들었다.

그는 무명의 목선을 훑으며 얼굴을 천천히 뜯어보았다. 창백하리만큼 흰 피부, 옅은 갈색의 머리와 마찬가지인 눈썹, 붉고 얇은 입술, 발그스름한 눈가에 여려 보이는 얼굴과는 반대되는 울적한 느낌까지.

모든 게 서인의 취향이었다.

“대표님, 왜 아무 말도 안 하세요?”

갈색빛의 커다란 눈동자가 서인을 바라보았다. 서인은 무명의 굵은 쌍꺼풀 라인을 매만졌다. 잠이 부족해서 그런지 눈 그늘이 져 있었고 눈 밑은 촉촉하고 붉었다.

“대표님?”

서인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무명이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불안해했다. 부푼 머리카락은 그가 움직일 때마다 함께 흔들렸다. 눈두덩을 문지르던 서인은 무명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야…. 너도 네가 예쁜 거 알지?”

“읏…. 모, 몰라요….”

입술의 기다란 상처는 보기 흉하게 느껴졌지만, 얼굴이 하도 예뻐서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단순 예쁘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턱이 각지고 덩치가 큰 탓에 남성적인 매력도 함께였다.

“모르긴 뭘 몰라. 면상 하나 믿고 나 납치한 거 아니야, 응?”

“아니에요, 무명이 안 예뻐요. 원래는 예쁘다는 말 많이 들었는데! 상처 때문에, 상처 때문에….”

서인이 압박하자 무명이 말을 더듬으며 부정했다. 입가에 상처가 나기 전에는 예뻤다느니 뭐니 떠드는 모습을 보던 서인은 더는 참지 못하고 그의 얼굴을 감싸 쥐고 입술을 깨물었다.

“으응, 싫어요….”

이쯤 되면 허락해줄 만도 한데 무명은 여전히 거부했다.

“하아, 밀어내면 상처받을 거야. 무명이 너, 내가 상처받는 거 보고 싶어?”

서인은 무력도 구슬리는 것도 통하지 않자 무명을 협박했다. 상처받는 것을 보고 싶냐는 말에 그의 눈동자가 요동쳤다. 그러자 서인이 일부러 고개를 푹 숙이고 극단적인 예를 들었다.

“슬퍼하다가 확 죽어버리면 어떡해?”

“대표님!”

“죽어도 돼? 너 때문에?”

무명은 억지 협박에 결국 눈물을 터뜨렸다. 그냥 우는 것도 아니고 어린아이처럼 주저앉아 입을 벌리고 엉엉 울었다.

“너무해, 너무해, 죽지 마, 죽지 마….”

“그래, 네 대표님이 죽지 않으려거든 어떻게 해야겠어?”

무서운 협박에 무릎을 꿇고 앉아 울던 무명이 서인을 향해 기어갔다. 서인은 자연스레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그에게로 팔을 뻗었다.

“잘했어.”

무명은 서인의 다리 위에 앉아 열심히 입술을 비볐다. 제 딴엔 노력하고 있었지만, 새가 모이를 받아먹는 모습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서인은 아랫도리를 잔뜩 세운 그를 매만지며 혀로 고른 치열을 훑었다. 그러자 무명은 키스가 처음인 것을 광고하기라도 하듯 파르르 떨며 신음했다.

“으, 으응…. 앗!”

서인은 끙끙 앓는 무명의 귓불을 문지르며 아랫입술을 아프게 물었다. 무명이 눈빛으로 불만을 드러내자 깨문 부위를 사과하는 것처럼 부드럽게 핥아주었다.

“하아, 하…. 후, 대표님, 죽지 마세요….”

그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면서 행여나 서인이 죽을까 봐 열심히 들이댔다. 호흡할 시간이 없어 머리가 띵했다. 무명의 얼굴이 터질 듯이 붉어지자 서인이 잠시 쉴 시간을 주었다.

“흐아, 하아, 하. 저, 저, 괜찮게 했나요? 하…. 대표님 마음에, 하아. 들었어요?”

무명은 부끄러워하면서도 제 키스 실력을 궁금해했다. 아닌 척해도 은근히 우위에 서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서인은 키스는커녕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간신히 받아낸 주제에 마음에 들었냐고 묻는 그가 우스워서 한참 웃어댔다.

“으, 대혀님….”

서인에게 혀를 붙잡힌 무명은 어눌한 발음으로 열심히 떠들었다. 혀끝이 손가락을 핥을 때마다 서인의 턱에 힘이 실렸다. 그는 키스하는 법을 가르쳐주기 위하여 무명의 입안에 손가락을 넣고 입천장을 긁기 시작했다.

“읏, 잠깐….”

“잘 받으면 예뻐해 줄게.”

서인의 말에 무명은 황급히 손목을 붙잡고 손가락을 핥았다. 침을 흘리지 않기 위해 꼴깍꼴깍 삼키는 모습이 꽤 야했다.

“다음에는 네가 해야 해.”

“다, 하아…. 다음도 있어요?”

“당연하지.”

서인은 잠시 빼낸 손가락을 다시 깊게 쑤셔 넣었다. 무명이 고이기 시작한 침을 삼킬 때 입천장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그 덕에 온몸에 힘이 풀린 그는 서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고 숨을 몰아쉬었다.

“흐으, 흐….”

무명은 사정한 것처럼 맥을 못 추렸다. 서인이 늘어져 있는 무명의 입에 다시 손가락을 삽입하려 하자 그가 반항하며 고개를 저었다.

“죽어도 돼?”

“으, 응…. 너무해.”

무명은 힘이 들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서인이 죽는다는 말에 다시 입을 벌렸다. 불만스러운 얼굴로 손가락을 쪽쪽 빨던 그가 벌떡 일어나 짜증을 냈다.

“사실은 안 죽을 거잖아요! 이거 하려고 거짓말하는 거잖아요!”

“아닌데?”

“고작 뽀, 키스 안 한다고 사람이 왜 죽어요? 대표님은 나를 안 좋아하는 거예요! 이런 것들을 좋아하는 거지!”

멍청하기는 했지만, 아예 눈치가 없는 건 아니었다. 서인이 저를 속인다는 것을 눈치챈 무명은 눈을 부라리며 바락바락 대들기 시작했다.

“나는 멍청한 거 싫어해.”

“…멍청한 거요?”

“그래, 딱 너 같은 거, 성인인데 키스할 줄 모르는 건 아마 너밖에 없을걸? 남들 다 하는 걸 못 하냐? 하여간 멍청해서는.”

서인은 키스 좀 해보려고 또 다른 방법을 생각해냈다. 무명이 자존심이 센 편인 걸 알았으니 하지 않고 배기지 못하게 슬슬 긁어댔다.

“제, 제가 부족한 거예요?”

“말이라고 해? 한참은 부족하지. 그러니까 성기에 털이 안 나는 거야.”

“털? 대표님도 별로 없잖아요? 다 없는 거 아니에요?”

“난 관리를 하는 건데, 넌 아예 없잖아?”

원래 성기에는 털이 나지 않는다고 알고 살았던 무명은 크게 충격받았다. 서인은 관리까지 한다는데, 무명은 관리할 것도 없이 깨끗했다.

“지금 없는 건 그리 중요하지 않아. 앞으로도 안 나는 게 문제지.”

“저, 저는….”

“풍성한 음모, 갖고 싶지 않아? 멋진 사내의 상징이지.”

서인은 무명의 자존심을 건드리려고 10년 전에나 통하던 소리를 했다. 무명은 제 성기를 내려다보고 거칠게 만지작거리며 음모를 찾으려 했다.

“여기 있어요! 봐요. 나도 멋진 사내예요!”

열심히 찾아보던 그는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긴 솜털 한 가닥을 드러내며 한물간 제 남성성을 강조했다. 서인은 그런 무명의 솜털을 잡아 뽑으며 엉덩이를 후려쳤다.

“하하, 이것도 털이라고?”

“왜, 왜, 왜 그랬어요! 왜!”

무명은 평소에 관심도 없었으면서 고작 서인의 한 마디에 음모가 소중해졌다. 그는 가까이서 확인하지 않으면 잘 보이지도 않는 솜털을 찾아 헤맸다.

“형이 좋은 거 알려주려는데….”

“왜, 내 털! 내 털!”

“이게, 고마워할 줄은 모르고 어딜 대들어 대들긴!”

서인이 검지로 이마를 세게 밀어내며 소리치자 강한 척하던 무명이 당황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 객기를 부리긴 했지만, 여전히 서인이 무서웠다.

“형아가 알려줄게.”

“형아?”

겁먹은 얼굴로 기죽어있던 무명은 ‘형아’라는 호칭에 눈을 빛냈다. 마음에 들었지만, 아직은 어색한 호칭이었다.

“그래, 형아가. 털 나는 법 알려줄게.”

“어떻게요?”

“키스 잘하면 털 나.”

그리 풍부한 지식을 갖지 못한 무명은 서인의 말에 조금씩 속아 넘어가기 시작했다.

“정말, 정말요?”

“그래, 어른이 되는 일이니까.”

“거짓말이죠? 그럴 리가…. 전 지금도 어른인데, 아직 성인식은 안 했지만….”

무명은 고개를 숙여 털 한 가닥 없이 매끈한 제 성기를 내려다보며 입을 틀어막았다. 이때다 싶어 서인이 좀 더 몰아세우자 그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뭐, 그럼 평생 그렇게 살든지.”

무명은 서러웠다. 성기는 씻을 때가 아니면 제대로 보지도 않았고 털은 머리에만 나는 줄 알고 살아왔다. 그런데, 고작 서인의 말에 음모가 나지 않은 성기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키스도 못 하는 게 말이 되나. 어휴.”

“…아니야!”

서인이 비아냥거리자 무명이 발끈했다. 그가 열심히 부정해도 코웃음을 치며 비웃기 바빴다. 성관계 경험이 많고 사회적 상호작용을 하고 살아온 서인은 타인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데에 익숙했다.

“나도 키스할 줄 알아요!”

“아, 그래? 뭐…. 그러시겠지.”

서인에게 있어 남성이란 성별은 성적인 주제로 도발하면 눈이 뒤집혀 달려드는 단순한 존재였다. 역시 무명도 별다를 것 없이 반응했다.

“할 줄 알아요!”

그래도 아직은 달려들지 않고 참는 모습을 구경하던 서인이 얄밉게 웃으며 결정타를 날렸다.

“10년이 지나도 못할걸? 손가락 하나 제대로 못 빨면서 혀는 빨겠어? 막대사탕은 빨아봤니?”

서인은 급기야 혀를 내밀고 막대사탕 핥는 시늉을 했다. 그런데도 무명은 달려들지 않고 꾹 참았다. 화가 나기는 하는지 커다란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있었다.

“혀, 형아….”

“왜.”

무명이 호칭을 변경했다. 그마저도 아직 힘들어서 말을 더듬으며 힘겹게 불렀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는 결심한 듯 주먹을 불끈 쥐고 소리쳤다.

“나도 키스할 수 있다고요! 해도 돼요? 네?”

“언제는 물어보고 했어?”

“네?”

“네가 언제 물어보고 했냐고. 납치도 하나하나 물어보고 했어?”

“그건 아니지만….”

그러니 마음대로 하라는 뜻이었는데, 무명은 여전히 우물쭈물했다. 이렇게 질질 끌다가는 평생 가도 키스를 못 할 거 같았다. 참다못한 서인이 무명을 제 몸 위로 끌어당겼다.

“헉!”

서인의 배 위에 앉아 얼굴을 내려다보게 된 무명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가 달아나려고 하자 서인이 허리를 단단히 붙잡아 도망치지 못하게 만들었다.

“해 봐. 키스.”

“그, 그게, 그….”

해도 되냐고 묻던 무명은 막상 판을 깔아주자 목덜미까지 새빨갛게 물들이고 바보처럼 말을 더듬었다. 이러다가 날 새겠다 싶어 서인이 먼저 상체를 일으켜 입술을 핥아주었다.

“으, 읍….”

그것이 신호탄이 된 모양인지 무명은 서인의 입술에 박치기를 시도했다. 정면을 보고 누워있던 코가 완전히 짓눌렸다. 뭐 하나 제대로 된 게 없는 키스였다.

“하아, 하….”

입속으로 들어온 혀가 얇은 점막을 훑었다. 서인은 눈을 감은 채 열심히 움직이는 무명을 위해 입을 벌리고 고개를 조심스레 틀어주었다. 서인이 자세를 잡아주자 어색하기만 했던 그도 슬슬 감을 찾기 시작했다.

“으읍, 흐….”

두툼하고 뜨거운 혀가 서인의 혀를 휘감고 천천히 움직였다. 무명의 입속을 정성껏 애무해주던 서인은 그의 엉덩이를 주무르며 구멍을 더듬었다.

“하아, 으…. 안 돼, 싫어.”

“하, 그래, 그래.”

아직 삽입은 무리였다. 서인은 무명이 거부하자 허리를 쓸어주었다. 잠시 입을 떼자 무명은 길게 늘어지는 타액을 멍하니 응시했다.

“흐, 아!”

서인이 엉덩이를 매만지고 가슴을 주무르자 그는 한 것도 없으면서 몸을 떨며 배 위에 사정했다. 그러더니 소스라치게 놀라 배 위에 싸지른 정액을 열심히 닦아내며 물었다.

“저, 잘했나요? 혀, 형아?”

“뭐, 봐줄 만은 했어.”

키스를 잘하는 건 당연히 아니다. 하지만, 잘 느끼고 열심히 노력하는 게 귀여워서 서인은 긍정적인 평가를 내놓았다.

“잘하는 건 아니에요?”

“응.”

서인은 주기적으로 키스를 요구할 구실을 만들어두어야 했기에 잘하는 건 아니라고 못을 박으며 무명의 의지를 불타오르게 했다.

그는 상처받은 듯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갑자기 튀어 올라 서인의 입술에 여러 번 도장을 찍었다.

“뭐 하는 거야?”

돌발 행동에 놀란 서인이 인상을 쓰자 무명이 당황했다. 그가 당연히 좋아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키스 연습….”

“뭐?”

“형아가 키스 좋아하니까….”

무명은 입술에 여러 번 쿵쿵 도장을 찍은 게 키스 연습이라고 우겼다. 서인은 얌전히 대답을 기다리는 그의 귓불을 깨물며 말했다.

“그래서?”

“마음에 들게 하면 형아가 명이를 더 좋아해 줄 것 같아서요….”

지독한 삼인칭 화법이었다.

서인은 나이에 맞지 않게 아이처럼 말하는 무명을 멍하니 바라보며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남자가 귀엽긴 해도 귀여운 것과 유아 퇴행적인 건 엄연히 다른 문제였다.

“…….”

지금 당장 고쳐줄까 고민하던 서인은 나중에 천천히 가르쳐줘도 될 문제라고 판단하고 무명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명아, 우리 이사 안 갈래?”

“이사요?”

당연히 오늘 새벽에 혼자 탈출할 생각이었던 서인은 무명의 예쁜 얼굴을 보고 그를 집으로 데려가기로 했다. 저를 납치한 납치범을 역으로 납치하겠다는 비정상적인 계획이었다.

“그래, 여기 말고 더 넓고 좋은 형네 집에 가자.”

서인은 최대한 무명에게 맞춰 부드럽게 말했다. 뭐라고 해야 넘어올지 고민해보던 그는 집에 초콜릿이 있다는 말로 무명을 유혹했다. 무명의 지능이 순진한 어린아이와 비슷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좋아해? 형네 집에 가면 초콜릿 먹을 수 있어.”

“초콜릿?”

“그래. 초콜릿.”

무명이 서인을 무력으로 납치했다면 서인은 전형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다 큰 성인에게 초콜릿을 주겠다는 말로 끌어들이는 것은 어린아이 수준의 지능을 가진 무명이 아니었다면 불가능 한 일이었다.

“싫어요.”

“왜?”

당연히 좋다고 할 줄 알았던 서인은 단호하게 거절하는 무명의 어깨를 붙잡고 자신의 재력을 강조하며 끌어들이려 했다.

“으음, 안 돼요.”

“왜? 너, 나랑 한 번 해보겠다고 줄 선 놈이 몇이나 되는지 알기는 해? 네 부하 놈들도 눈독 들이던 거 기억 안 나?”

둘의 처지가 바뀌었다. 서인이 무명에게 열심히 어필하며 저와 함께 갈 것을 강요했지만, 무명은 거부했다.

“안 돼요. 형아가 계속 여기 있으면 되잖아요.”

“너 내가 누군지 알아? 내가 왜 이런 쓰레기 같은 곳에 있어야 하는데?”

“쓰레기 아니에요!”

무명은 서인에게 미움을 살까 봐 벌벌 기곤 했지만, 제가 하는 일이 무시 당할 때는 뵈는 것 없이 화를 냈다.

“그래, 그럼 가지 말든가. 나 혼자 가게.”

“가긴 어디를 가요? 형아는 못 가요.”

애교스러운 호칭으로 서인을 부르던 무명은 순식간에 얼굴을 굳혔다. 같이 나가기도 싫고 서인이 나가는 것도 싫었기 때문이다. 서인은 감히 네가 나갈 수 있겠냐고 묻는 듯한 무명을 바라보며 코웃음을 쳤다.

“형아는 저랑 평생 살아야 해요!”

“평생? 좋지.”

무명은 나중에 후회할 만한 말을 하며 혼자 기뻐했다. 서인은 평생 함께하겠다고 말하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데리고 나갈 궁리를 했다.

“난 쉽게 싫증 내지만, 너처럼 희소성 있는 놈한텐 또 다르거든.”

“희, 희소성이요?”

“알 거 없어. 그나저나 안 자? 나 피곤한데? 씻자.”

씻자는 말에 무명이 서인을 안아 들었다. 그러자 서인이 자연스레 그의 목을 빨며 가슴을 만졌다.

“하지 마세요….”

“억울하면 너도 만지든가.”

서인은 지하실에서 욕실로 가는 그 짧은 시간에 무명을 또 흥분시켰다.

추행은 욕조에 앉고 나서도 계속되었다.

“흑….”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추행은 무명이 울음을 터뜨리고 나서야 간신히 마무리되었다. 그는 제 정액이 잔뜩 묻은 서인의 배를 씻기며 복근을 매만졌다.

“대표님은….”

“형.”

서인은 그가 형이라고 부르지 않을 때마다 호칭을 정정해주었다. 대표님이라는 호칭은 질리도록 많이 들어보기도 했고 거리감이 느껴져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혀, 형아는 몸이 되게 예쁘네요.”

“뭐, 운동하니까. 너도 예쁜데?”

“아니에요….”

무명은 서인의 손이 제 배에 닿자마자 몸을 가리며 부정했다. 몸에 상처도 많고 근육이 서인처럼 골고루 발달하지도 않아서 부끄러웠다.

서인의 눈에도 무명의 몸은 물론 균형적이지 못한 부분이 있었지만, 살덩이가 늘어진 것도 아니고 빼빼 마른 것도 아니었기에 못난 편은 아니었다.

“예뻐.”

“아니에요….”

“예쁘다니까. 내가 예쁘다고 하면 좀 그런 줄 알아.”

서인은 믿지 못하는 무명에게 짜증을 내며 강압적으로 주입했다. 내가 그렇다면 그런 줄 알라는 말에 거울에 제 몸을 비춰본 무명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다시 보니까 조금 예쁜 거 같아요.”

“그래.”

제 몸을 혐오하던 그는 서인이 예쁘다고 말해주자 솔깃한 얼굴로 배를 쓰다듬고 팔뚝을 매만졌다. 별 의미 없는 칭찬이 무명에게는 꽤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감사합니다. 형아는 잘생겼고 다정하고 살이 탄탄하고 겁도 없어서 멋있어요. 또 명이한테 예쁘다고 해주시고 음, 어…. 그냥 형아가 좋아요!”

“응, 나도.”

무명은 부끄럼을 타며 서인을 향한 제 마음을 정성껏 표현했다. 그에 비해 서인의 대답은 성의 없었지만, 무명은 서로의 마음이 같음을 확인하고 행복해했다.

♦ ♢ ♦

씻고 들어와 무명과 껴안고 있던 서인은 깜빡 잠이 들었다. 무명을 따먹는 꿈을 꾸다가 추위에 눈을 뜬 그는 손을 더듬으며 무명을 찾았다.

“으음…. 명아?”

아무것도 잡히는 게 없자 벌떡 일어난 서인이 조명을 켰다. 역시, 옆자리는 비어있었다. 무명이 없음을 확인한 그는 매트 속에 숨겨둔 휴대전화부터 꺼내 들었다.

[30분 후에 도착 예정입니다. 괜찮으십니까?]

대욱에게서 메시지였다. 메시지가 도착한 시점으로부터 시간이 30분이 훌쩍 넘었음을 확인한 서인은 숨겨둔 열쇠로 족쇄를 풀고 운동복을 걸쳤다. 혹시나 무명이 숨어있을까 봐 욕실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조심스레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차가 없네? 또 일하러 갔나.”

아직 새벽 네 시밖에 되지 않았는데, 바깥에는 무명의 차량이 보이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던 서인은 어차피 곧 있으면 대욱이 도착할 테니 잘 됐다고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메시지를 보낸 시간을 보면 대욱이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이었으나, 그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제 남자가 하던 일을 봤기 때문에 대욱이 도착하지 않자 불안했다. 쉽게 당할 사람은 아니지만, 예상치 못한 기습은 누구에게나 위험했다.

“언제 오는 거야?”

10분 정도 더 기다려봤지만, 대욱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다시 한번 위치를 알리는 메시지를 남긴 서인은 안으로 들어와 소파에 앉았다.

“정리도 안 해놓고 이게 뭐야.”

서인은 테이블에 널브러진 서류를 대신 정리하다가 사진들이 가득 담긴 흰 봉투를 발견했다. 봉투 속에서 사진을 꺼내든 그는 뒷면에 적힌 이상한 문구를 보고는 어리둥절했다.

“뭐야.”

사진을 앞으로 돌려본 서인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무언가가 욕조 속에 늘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고기의 수량을 파악하기 위해 찍은 사진은 아닌 거 같았다. 그 사진을 제쳐두고 또 다른 사진을 꺼낸 서인은 끔찍한 광경에 눈을 몇 번이나 비볐다.

“진짜 미친놈이었네.”

사진을 모두 확인한 서인은 그 밑에 삐뚤빼뚤한 글씨와 엉망인 맞춤법으로 쓰인 무명의 평가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고문할 때마다 시끄러워. 이를 다 뽑아버리면 조용해질까?]

[이를 뽑아 버렸더니 조용해졌다. 좋은 방법인 것 같다.]

[오늘은 절단면이 아름다웠다. 매일 이랬으면 좋겠다.]

무명이 의뢰를 받아 사람을 고문하고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보고한다는 것은 어제 직접 보았기 때문에 놀랍지 않았다. 그러나 청부살인은 단순 의뢰를 받고 행하는 일인데, 무명은 무슨 일인지 그 밑에 자신만의 감상평을 늘어놓았다. 마치 살인과 고문을 즐기는 사람 같았다.

“쉽게 데려가진 못하겠는데.”

기록지까지 살핀 서인은 무명을 쉽게 데려가지는 못하리라 예상했다. 그가 제 일을 사랑하는 데다가 지하실 욕조 속에서 본 일도 있으니 데리고 가서 가둬놨다간 피곤해질 게 뻔했다. 어떻게든 직접 데려가 달라고 말하게 해야 했다.

그 방법을 고민하며 사진을 정리해둔 서인은 문밖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대표님!”

“쉿.”

서인은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취하며 대욱의 팔을 잡아끌었다. 주변에 무명의 차가 없긴 했지만, 또 소름 끼치게 어디서 지켜보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기에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대표님,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서인은 마취제와 옷이 든 가방을 받아들고 다시 소파에 앉았다. 대욱은 미묘한 표정으로 그의 손이 닿은 팔을 문질렀다.

“설명하자면 길어. 나중에.”

“다치셨습니까.”

서인의 부어오른 뺨과 이마에 붙은 반창고를 본 대욱의 표정이 굳었다.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자해임을 알 리 없는 그의 가슴이 분노로 부글부글 끓었다.

“아, 이거? 별거 아니야.”

“야위셨습니다. 우선 건강이 우선이니 병원부터 가야겠습니다. 범인은 경찰에….”

“경찰은 무슨. 신고하지 마. 내가 원해서 있는 거니까.”

“예?”

대욱은 제대로 된 상황 설명도 없이 떠나지 않겠다고 하는 서인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심각한 얼굴로 겉옷을 벗어 서인의 어깨를 감쌌다.

“아직 볼 일 남았으니까 대기해. 들키지 말고.”

“대표님, 대표님께서는 지금 납치당한 겁니다.”

대욱은 납치된 지 고작 이틀밖에 되지 않은 상황에서 서인을 스톡홀름 증후군으로 의심했다. 그는 서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납치당했다는 것을 강조했다.

“다 계획이 있으니까 하라는 대로 해.”

“죄송합니다만, 혼자서는 못 갑니다. 대표님 지금 많이….”

“나가.”

서인은 딱 그 정도만 하라는 것처럼 대욱의 말을 끊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담긴 그의 눈을 마주하는 것이 불쾌했다. 어렸을 때부터 봐왔으니 과보호하는 것은 이해가 된다만, 대욱은 점점 선을 넘었다.

“대표님.”

“얼른 가 봐. 곤란하게 하지 말고. 아직은 때가 아니야.”

서인은 전날 무명의 모습에 위기를 느껴 급히 연락했지만, 그의 얼굴을 본 지금은 홀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다루는 방법도 대충 알았으니 우려하는 일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쯤은 확신할 수 있었다.

“대표님, 제가 지금 제대로 이해한 게 맞습니까?”

“그래, 몇 번을 말해?”

아직은 무명을 합법적으로 데리고 갈 명분이 없었기 때문에 그에게 대욱을 보이는 것은 좋지 못한 방법이다. 게다가 배신감에 날뛸 모습을 생각하니 벌써 피로가 밀려왔다.

머릿속에 무명밖에 없는 서인은 이틀간 걱정하고 마음고생 했던 대욱은 안중에도 없었다.

“가보라고. 한 이틀이면 될 거야.”

“…….”

“약도 연구 다시 시작해.”

서인은 무명이 준 것과 흡사한 옷으로 갈아입고 주머니 속에 든 마취제를 다시 돌려놓았다. 이제는 쓸모없어졌기 때문이다.

바지를 갈아입기 위해 상처 부위에 덕지덕지 발린 연고를 닦아내자 대욱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는 서인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채고 흥분한 채로 소리를 질렀다.

“누가 이런 겁니까!”

“허.”

서인은 선을 넘지 말라고 그토록 경고했건만 이제는 아예 뵈는 게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대욱의 손을 쳐냈다.

“미쳤나?”

“혹시 그놈입니까? 연구소에 있던 모자란 놈이 그런 겁니까?

“그놈이면 네가 뭐 어쩔 건데!”

서인은 명령을 듣지 않는 대욱의 뺨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혀를 깨문 대욱이 입가로 번진 피를 닦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의 한 눈빛과 행동이 거슬리다 못해 역겹기까지 했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대욱은 한 대 얻어맞고 나서야 제가 무례한 짓을 했음을 자각했다. 그는 떨어진 마취제와 물건을 주워들고 부를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

대욱이 나간 후 무명의 서랍을 뒤적이던 서인의 발 위로 자그마한 상자 하나가 떨어졌다. 혹시 마약이라도 보관해둔 상자가 아닐까 싶어 확인해 보니 그 안에도 사진이 한 장 들어있었다.

이번에는 긴 머리 남성의 사진이었다. 사진 뒤에 ‘소중한 사람’이라고 적힌 것을 발견한 서인은 더더욱 불쾌해졌다.

“쯧, 보는 눈도 없지.”

그는 무명이 호감을 느끼는 사진 속 남성의 얼굴을 뜯어보며 평가했다. 남성은 서인과 달리 선이 얇고 예쁘장하며 선한 인상이었다.

“이 새끼랑 뒹굴어 놓고 어디서 순진한 척이야.”

사진을 신경질적으로 내려놓은 서인은 고작 문구 한 줄에 무명을 싸구려 남창 취급했다. 꼬시고 뭐고 할 거 없이 흠씬 두들겨 패주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났다.

참지 못하고 사진을 갈기갈기 찢어버리려는 순간, 창문으로 무명의 차가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차에서 내린 그가 엉엉 우는 것을 발견한 서인은 사진을 정리해두고 황급히 지하실로 내려갔다.

“으아악!”

재빠르게 족쇄를 착용하고 자는 척을 하며 담요를 뒤집어쓰자 저 멀리에서 무명의 절규가 들려왔다.

서인은 혹시나 사진이나 서랍을 건드린 게 발각되었을까 봐 눈을 질끈 감고 못 들은 척했다. 평상시의 무명은 귀여웠지만, 화난 모습은 딱히 그렇지 않았다.

“형아! 형아아! 형아! 형아! 으, 아아악!”

저걸 또 무슨 수로 달래고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숨이 턱 막혔다. 머리를 굴리며 곰곰이 생각해보던 서인은 그냥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일단 무명이 제게 열쇠가 있으리라 생각지도 못할 테니 끝까지 발뺌하는 쪽이 현명했다.

“형아, 형아아!”

서인은 휴대전화와 열쇠를 서랍 밑에 밀어 넣고 자는 척을 했다. 눈을 감자마자 무명이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하실로 내려온 그는 피가 묻은 손을 옷에 문질러 닦고 서인을 마구 흔들어 깨웠다.

“형아!”

“으음…. 왜.”

무명은 잠에서 덜 깬 척하는 그를 억지로 일으켜 앉혔다. 무슨 문제인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울먹울먹했다. 다행히도 화가 난 건 아닌 것 같았다.

서인은 눈이 퉁퉁 부은 무명을 마주하며 느릿느릿 움직였다.

“도, 도, 도와주세요…. 제, 제발요….”

서인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피투성이가 된 채로 벌벌 떠는 무명을 보고는 놀란 척했다. 일단 좋아한다고 하긴 했으니 걱정하는 시늉은 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친 거야? 왜 이래.”

“흐으, 흐….”

가식적인 걱정에 긴장이 풀린 무명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그를 와락 껴안았다.

“울지 말고 말을 해.”

무명은 나라를 잃은 것 같은 표정으로 말하지 못하고 울기만 했다. 징징대는 걸 계속 듣고만 있자니 짜증이 났다. 징그럽게 살덩이를 토막 내며 흥분하는 것을 다 알고 있으니 더더욱 그랬다.

“로드킬이라도 한 거야?”

“로드킬이 뭐예요, 몰라요, 아니요오…. 흑…. 죽을 거예요, 맞을 거예요….”

무명은 정신없이 흐느끼며 불안에 떨었다. 죽을 수도 있다며 서인의 어깨를 껴안고 엉엉 울던 무명은 급기야 제 손등을 잘근잘근 깨물기 시작했다.

“왜 그러는데, 실수로 사람이라도 죽였어?”

“네에, 흐으윽…. 그때, 그때 형한테 손댄 부하들 때렸는데, 한 명이 죽었어요, 흑 ….”

“…뭐, 사고였으니까. 그럴 수도 있지.”

서인은 토막 낸 고깃덩이를 모아놓고 흥분하는 주제에 고작 실수로 사람 좀 패 죽였다고 왜 이렇게 겁을 내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엉엉 울던 무명은 그럴 수도 있다는 말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제가 이틀 뒤에 유통업자가 온다고 했었잖아요….”

“그래, 너희 아버지. 아버지가 왜, 계속 말해봐.”

아버지라는 단어에 무명이 서인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는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눈알을 굴리며 조금씩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노느라 일을 안 했다?”

“논 게 아니에요!”

“그럼 뭘 했는….”

서인은 피비린내가 나는 입으로 뽀뽀하는 무명을 밀어냈다. 아무리 예쁘다고 해도 그렇지 빨간색이 입으로 들어오는 건 참아줄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형아가….”

“그래, 도와줄게.”

서인이 도와주겠다고 하자 무명이 언제 울었냐는 듯 방긋 웃으며 달려들었다. 큰 덩치로 정신없이 뛰어대자 지하실이 쿵쿵 울렸다. 서인은 그를 대충 도와주고 대가로 집에 데려가려 했다.

“정말요? 정말이죠? 그럼, 저 안 맞아도 흐윽, 되는 거죠? 흐….”

“일 못 하면 아버지가 너를 때려?”

“네, 때려요, 아파요. 무서워요…. 죽을 거예요, 죽게 될 거예요.”

방긋방긋 웃던 무명은 아버지에게 학대당하고 있음을 고백하더니 이내 울음을 터뜨렸다. 어린아이보다 더 심한 감정변화에 서인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한숨을 쉬었다.

“울지 좀 마. 머리 아파.”

서인 역시 가정폭력 피해자였지만, 아버지를 두려움의 존재로 생각해본 적이 없기에 무명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애초에 딱히 이해할 생각이 없기도 했다.

“괜찮아, 안 맞게 도와줄게.”

그래도 울고 있는 얼굴이 예뻐서 공감하는 척 등을 토닥여주며 달래주기는 했다. 서럽게 울던 무명은 도와주겠다는 말에 옷장 속에서 서류 뭉치를 주섬주섬 꺼내왔다.

“가장 먼저 해야 할 게 이거야?”

“네, 이게요…. 시간마다 작성해야 하는데 이번에는 못 했어요….”

“왜.”

무명의 말대로 기록지는 서인을 납치한 시점부터 끊겨 있었다. 대충 짜깁기해서 쓰면 안 되냐고 묻자 무명이 그런 건 할 줄 모른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작성은 왜 못 했냐고.”

“혀, 형아, 돌보느라 바빠서 못 썼어요.”

무명은 그냥 해달라고 하기엔 양심에 찔렸는지 서인의 탓도 있다며 은근슬쩍 책임을 미루려 했다. 져 주는 법이 없는 서인은 제 탓을 하는 그의 손을 쳐냈다.

“네가 못한 걸 왜 내 핑계를 대? 게을러서 못한 거잖아.”

“네에, 잘못했어요.”

다정하게 어루만져 주기를 바랐던 무명은 입술을 삐쭉 내밀고 사과했다. 서인에게 정신이 팔려 기록지 작성을 까맣게 잊어버린 게 사실이었기에 혼이 나고 있는 상황이 억울했다.

“우선 내가 서류는 해결해줄게.”

혹시나 서인이 화가 나서 도와주지 않겠다고 할까 봐 그를 걱정스레 살펴보던 무명은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그는 서인에게 서류를 채울 내용이 담긴 종이와 펜을 건네고 지하실 계단을 성큼성큼 올랐다.

“어휴.”

서인은 무명을 올려보내고 난 후 삐뚤빼뚤한 글씨로 작성된 기록지를 살폈다. 기록지 안에는 구불구불 늘어진 이상한 그림들이 가득했으며 하단에는 붉은 메모지가 붙어있었다.

기록지를 살펴보던 서인은 자연스레 메모지로 눈길을 돌렸다. 메모지에는 일반인이 알 수 없는 기호와 그림이 담겨있었다.

서인 역시 전혀 해석할 수 없었지만, 정황상 대충 도축방식이나 청부살인 방법 정도라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체계적으로 기록하고 증거로 남길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간단한걸.”

서류를 살핀 서인은 무명이 주고 간 예전 기록지의 내용을 토대로 빠르게 써 내려갔다. 그는 조금만 훑어봐도 쉽게 지어낼 수 있는 것을 시끄럽게 소리를 지르고 울어대는 무명이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 ♢ ♦

“다, 다 하셨나요?”

서인이 기록지를 거의 다 완성해갈 때쯤 무명이 물에 젖은 채로 달려왔다. 느긋하게 씻고 있으면 어련히 알아서 해둘 것을 뭐가 그리 급한지 목덜미에 거품까지 묻히고 왔다.

“거품 안 닦아?”

“너무 급해서….”

“급하긴. 나 못 믿어?”

서인은 검지로 무명의 목덜미에 묻은 거품을 쓸며 픽 웃었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기, 기록지 봐도 돼요?”

“그래, 한 번 확인 해 봐.”

얼굴이 화끈화끈함을 느낀 무명은 괜히 말을 돌리며 서인에게서 급히 시선을 거두었다. 서인은 제 손이 닿았던 목덜미를 문지르며 기록지를 확인하는 그의 모습을 여유롭게 구경하며 눈썹을 까딱였다.

“어때.”

“정말, 정말, 좋아요!”

불안한 얼굴로 서류를 받아들었던 무명은 내용을 확인하고는 방긋 웃으며 감탄했다. 직접 해본 것처럼 자세하고 깔끔했다. 군더더기 없는 기록지를 다시 옷장 깊숙이 집어넣은 그는 서인을 와락 껴안았다.

“형아 덕분에 걱정 안 해도 될 거 같아요! 감사합니다!”

“기록지 말이야. 의뢰인한테 보고해야 하는 거 맞지? 뭐 고문 방법도 있던데.”

“네!”

아버지에게 폭행당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에 마음이 놓인 무명은 서인이 떠보는 것도 모르고 냅다 대답부터 하고 봤다. 이번이야 실수로 죽였을지 모르지만, 어쨌건 도축은 물론 청부살인까지 하고 있음을 인정한 꼴이었다.

“네 필체가 엉망이라 차마 못 따라 하겠더라. 진한 볼펜으로 덮어.”

“필체?”

“글씨 모양.”

“아, 네네! 형아 정말 감사합니다!”

무명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살아왔던 필체를 지적받고는 급격히 풀이 죽었다. 사소한 것까지 열등하다는 생각에 속이 상하고 눈물이 고였다.

“다 했어요!”

10분 후, 서류를 완성한 무명이 서인의 족쇄를 풀어주고 함께 욕실로 향했다. 덜 씻긴 거품을 씻어내고 피가 묻은 서인을 씻겨야 했기 때문이다. 애써 우울한 마음을 감춘 그는 서인을 씻기며 애교를 피웠다.

“형아가 도와주지 않았으면 정말 큰일 났을 거예요.”

“고맙지?”

“네!”

“그런데, 내가 이유도 없이 도왔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네?”

좋은 분위기를 지속하리라 믿었던 무명은 뜻을 알 수 없는 서인의 말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급히 목소리를 내리깔고 분위기를 잡는 서인에게서 멀어지려 해봤지만, 손목을 붙잡힌 탓에 도망칠 수 없었다.

“좋아하니까 해주는 거라면서요….”

무명이 눈치를 살피며 작은 목소리로 투정했다. 애초에 조건을 걸겠다는 말은 하지도 않았으면서 뒤늦게 말을 얹는 서인이 아주 조금은 미웠다.

“그래도 대가는 있어야지.”

“그럼, 키, 키스해드릴게요.”

“싫어.”

대가를 곰곰이 생각해보던 무명은 서인도 좋고 저도 좋은 키스를 보상으로 꺼냈지만, 곧바로 거절당했다. 당연히 승낙할 줄 알았던 무명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고민하다 항문을 만지게 해주겠다며 바지를 내리려 했다.

“아니, 됐어. 이미 생각해둔 게 있거든.”

서인은 솔직히 혹하기는 했지만, 무명을 집으로 데려가면 구멍은 몇 번이나 만질 수 있기에 간신히 참아냈다. 바지춤을 잡고 멀뚱히 서 있던 무명은 결국 다시 앉아 서인의 요구를 기다렸다.

“너, 실수로 사람 죽인 거 아니지? 평소에 하는 일이잖아.”

“헉, 아니에요!”

무명은 거짓말을 하면 얼굴에 다 드러나는 타입이었다. 당황한 그가 열심히 변명을 해봤지만, 서인은 속아 주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아니면 기록지 다 찢어서 불태울 거야.”

“마, 맞아요. 일이에요…. 근데, 근데 이번에는 정말 실수였어요.”

들켰든 어쨌든 아니라고 바락바락 우기려던 무명은 소중한 서류를 다 태워버리겠다는 말에 이실직고했다.

“화가 나서 죽였단 말이에요…. 형아를 더럽혀서, 그래서!”

“왜 거짓말했어?”

“형아가 연약하니까요….”

“지랄하네.”

서인에게는 말도 안 되는 변명으로 들리겠지만, 무명은 정말로 그를 연약하다고 생각했다. 고통에 약하고 조금만 불결한 걸 봐도 구역질을 하며 쉽게 불평했기 때문이다.

손찌검할 때나 소리를 지를 땐 무서웠지만, 그것과는 별개였다.

“저, 정말이에요. 이 일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에요. 저처럼 멋지고 당당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죠. 형아가 무서워서 무명이를 싫어할까 봐 숨긴 거란 말이에요.”

실수라고 하면 한 번쯤은 면죄부가 있겠지만, 의뢰를 받고 사람을 죽인다는 사실을 들키면 서인이 저를 평생 꺼릴 것 같아 두려웠다.

“솔직히 무섭긴 해.”

서인은 동요하고 있는 무명을 곁눈질하며 입을 열었다. 물론 무명이라는 사람 자체는 만만했지만, 행동에 거부감이 드는 건 사실이었다.

“네? 정말요?”

“그렇지. 다짜고짜 납치해서 살을 파질 않나, 죽여버리겠다고 하질 않나. 누가 안 무서워하겠어?”

그렇기에 서인은 저를 해치지 않겠다는 확답을 들어야만 했다. 충격받은 무명이 아무 말도 못 하자 서인이 결정타를 날렸다.

“나도 기록지에 있는 사람들처럼 고문하고 죽여버릴지 어떻게 알아.”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형아한테는 안 할 거예요!”

서인의 말에 무명은 아버지 이야기를 꺼냈을 때와 같이 불안에 떨었다. 서인에게 미움을 사는 것이 학대와 맞먹는 공포였다.

“아니야! 안 할 거야!”

확실한 것을 선호하는 서인은 무명이 눈을 까뒤집고 소리를 지르거나 말거나 더 몰아붙이기 바빴다.

“내가 그걸 어떻게 믿어? 이미 이렇게 만들지 않았나?”

서인이 푹 팬 제 허벅지를 보여주자 무명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상처는 무명이 정성껏 치료해준 덕에 빠른 속도로 아물고 있어 더는 고통스럽지 않았다. 그러나 서인은 아픈 척 인상을 쓰며 무명에게 죄책감을 심어주었다.

“자, 잘못했어요. 앞으로는 절대 그러지 않을게요.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흐으, 흐….”

그러자 그가 눈물을 터뜨렸다. 서인을 향한 강한 집착이 드러난 허벅지 각인이 발목을 붙잡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이제 다 끝났다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진 무명은 무릎을 꿇은 채로 고개를 처박았다.

“잠깐만, 그러고 보니…. 무명?”

“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무명과의 시간을 보내느라 딱히 관심을 두지 않았던 허벅지가 그제야 눈에 띄었다. 서인이 비누 거품을 걷어내고 얇은 붕대를 풀어냈다.

“예쁘게 아물고 있어요, 제가 아프게 하려고 그런 게 아니라. 저는, 저는….”

서인은 이 한자가 무명의 이름을 뜻하고 있음을 깨닫고 실소했다. 그는 잡아 오자마자 제 것이라고 도장을 찍어놓은 무명이 생각보다 더 발라당 까진 놈이라고 생각했다.

“정신 빠진 놈 아니야 이거.”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는 사실 화나지 않았다. 화는커녕 저와 비슷한 면을 보이는 무명이 발칙하니 귀엽게만 느껴졌다.

“제가, 제가 나빴어요….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요.”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무명은 서인의 거친 말에 불안해하며 정신없이 한 자리를 빙글빙글 돌았다.

“약속해.”

서인이 그런 아이 같은 무명의 수준에 맞춰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무명은 어쩌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며 냉큼 손가락을 붙잡고 흔들었다.

“네, 네. 약속할게요. 그,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제가 형아를 지킬 거예요!”

“날 지켜? 네가? 왜.”

“좋아하니까요!”

그는 서인을 향한 마음을 숨기는 법이 없었다. 물론 연애는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고 타인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도 처음이었지만, 좋아하면 적극적으로 표현해야 한다고 믿었다.

“너, 좋아한다는 게 무슨 의민지는 알아?”

서인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무명이 자신을 좋아할 계기가 없었기에 그가 호의를 애정으로 착각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좋아한다는 말의 의미도 당연히 모르리라고 확신했다.

“그럼요! 가슴이 쿵쿵거리고 손발이 간지럽고…. 몸이 뜨겁고! 엉덩이를 만져도 되는, 굉장히 부끄러운 거요….”

그러나 무명은 의미를 파악하고 있었다. 서인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제 마음을 받아들이고 공부해왔던지라 누구보다 더 잘 알았다.

“무명이 부끄러워요.”

“너한테 이런 걸 알려준 사람이 누군데?”

서인은 자연스레 사진 속의 그 남성을 떠올렸다. 그가 아니라면 무명에게 이런 깜찍한 말들을 알려줄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서인은 무명의 엉덩이를 만지고 탐했을 이름 모를 남성을 질투했다. 물론 연애 감정의 질투라기보다는 무명의 순결을 갖지 못한 분함이었다.

“소중한 사람이 가르쳐줬어요.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몸을 만지게 두면 안 된다는 것도요!”

무명은 서인을 향한 마음을 강조하고 있었지만, 서인은 들으면 들을수록 불쾌했다. 사진 뒤에 쓰여있던 소중한 사람이라는 문장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래, 뭐. 어쨌든 알았어.”

“그래서 대가는 뭔가요? 제, 제가 뭘 해드리면 되죠?”

본론으로 돌아온 무명은 서인이 뭘 시킬지 몰라 잔뜩 긴장했다. 그러면서 약간의 기대도 하고 있었다. 그를 좋아하니 아픈 게 아니라면 무엇을 하든 즐거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랑 같이 집에….”

“아, 맞다! 우선 밥 먹으면서 이야기해요! 연약하면 연약할수록 더 굶으면 안 돼요!”

무명은 서류가 완성되었다는 기쁨에 젖었다가 고기를 구워오겠다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의도치 않게 같이 집에 가자는 서인의 말을 뚝 잘라버렸다.

“아니, 나는 괜찮은….”

“형은 몸이 좋아도 연약해서 안 돼요!”

“그럼 형 밥 먹고 대화하자. 들을 거지?”

“네!”

서인은 무슨 일이 있어도 듣겠다고 자신하는 무명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 지었다. 서인에게 예쁨받은 그는 고기를 잔뜩 구워와 대접했다. 계획대로만 진행된다면 무명을 억지로 끌고 가지 않아도 되고 집으로 데려가 마음껏 탐할 수 있다.

“후….”

서인이 머리의 물기를 닦기 시작하자 무명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뭘 하나 싶어 흘긋 바라보니 그는 매트리스와 이불을 새것으로 갈아놓고 다소곳이 앉았다.

“이제 형아랑 잘래요, 깨워서 죄송해요.”

귀여운 행동에 서인이 매트리스 위에 자리를 잡고 눕자 그가 베개를 건네주고 바닥으로 내려갔다. 자리가 좁으니 서인이라도 편히 잤으면 하는 배려였다.

“죄송하면 이리 와.”

“좁으면 불편하잖아요.”

“이렇게 하면 안 좁지.”

서인은 망설이는 무명을 잡아끌어 품에 가뒀다. 꽉 끌어안자 그의 큰 가슴이 몸에 닿았다. 무명도 그를 느끼고는 몸을 뒤로 무르며 자꾸만 움찔댔다.

“왜 자꾸 비벼.”

“아, 아니에요…. 이건, 형아가!”

“네 가슴이 무식하게 큰 것도 내 탓이야?”

서인은 새하얀 피부가 붉게 물들고 무명이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좋아했다. 그래서 일부러 다그치고 사납게 말하며 반응을 즐겼다.

“노력할게요. 읏, 으….”

“무슨 노력.”

무명도 가슴 크기와 노력이 관계없다는 것쯤은 알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열심히 짓뭉개보았다. 물론 그 노력이 서인에게는 유혹으로 보인다는 것은 꿈에도 몰랐다.

“내 앞에서 자위하는 거, 그리 좋은 선택은 아닐 텐데.”

비교적 말랑한 무명의 가슴은 누를 때마다 깊은 골이 생겼다. 옆으로 누워 턱을 괸 서인은 그의 가슴골에 손가락을 넣으며 희롱했다.

“그냥…. 이러면 가슴이 작아질 수도 있으니까….”

무명은 은근슬쩍 가슴을 만지는 서인을 밀어내고 얼굴을 붉혔다. 서인은 유혹이든 아니든 할 건 다 하면서 쑥스러워하는 그가 귀여워서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다 큰 성인이 순진한 척 구는 것을 가장 싫어했는데, 이상하게 무명은 밉지가 않았다.

“가슴, 정말 크고 싶어서 큰 게 아니란 말이에요. 이것도 징그러워서 싫어요.”

큰 가슴이 싫다던 그는 이제는 성기 크기까지 불평했다. 남들과는 달리 큰 신체 부위는 무명이 꽤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불만이었다. 서인은 종알종알 떠들어대는 그의 입을 틀어막고 가슴을 주물럭거렸다.

“뭐 그리 불만이 많아. 커서 좋기만 한데.”

“가, 가슴은 큰 게 좋아요?”

“그래.”

남자에게 큰 성기와 가슴은 축복받은 것과 다름없는 요소인데 무명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럼 성기는요? 성기가 큰 건 이상한 걸까요?”

순진한 그는 큰 성기도 이상한 게 아니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 흉한 상처가 남은 얼굴과 큰 가슴도 예쁘다고 해주었으니 성기도 조금은 기대해볼 만했다.

“제가 봐온 성기는 거의 다 엄지손가락 같았거든요! 그런데 제 거랑 형 거는 이상하게 커다란 거 같아서요.”

무명은 의뢰받은 일을 처리하며 본 남성들의 성기를 떠올리며 말했다. 다들 앙증맞은 크기였기에 제 성기가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기대감에 잔뜩 부푼 그는 서인의 손을 붙잡고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역시 이상한 게 아니죠?!”

“입 안 닥쳐?”

“…네?”

그러나 기대했던 것과 달리 험한 욕설이 날아들었다. 무명의 기대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이유 모를 분노에 당황한 그가 눈알을 굴리며 시선을 피했다.

“아, 악! 아파요….”

고개 숙인 무명을 매섭게 노려보던 서인이 머리채를 끌어당겼다. 강제로 그와 눈을 마주하게 된 무명이 고통스럽게 신음했다.

“이게 어디서 비교질이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 악!”

서인이 손을 놓고 무명을 패대기쳤다. 바닥에 엎어진 그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얼굴로 올려다보며 변명했다.

“저, 저는 그게 아, 아무것도 안 했….”

“다물어, 뒷구멍 찢어버리기 전에.”

천박한 욕설에 놀란 무명이 멀쩡한 항문을 더듬었다. 잠시 입 다물고 있던 그는 서인이 등을 돌리자 그가 떠나갈까 봐 두려워 허리를 와락 껴안고 사과했다.

“죄송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성기가 큰 건 역시 이상한 거군요. 화내실 줄 몰랐어요!”

“…하.”

서인은 성기 크기를 비교하는 것에 익숙해 보이는 무명의 모습에 화가 났다. 지금 누구 앞에서 닳은 티를 내느냐고 나무라고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순간 눈이 뒤집혔던 서인은 성기가 커서 죄송하다고 비는 무명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성관계는커녕 자위하는 법도 모르는 놈을 상대로 화를 낸 꼴이 우스웠다.

“죄송해요….”

“우리 명이. 네 뒤에 누가 넣은 적 있어? 성기든 뭐든.”

그렇다고 사과하는 건 또 자존심이 상했기에 서인은 대놓고 무명의 성 경험을 물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궁금증을 전부 해소할 생각이었다.

“네? 당연히 없죠!”

“그럼 네가 삽입한 적은.”

“네? 제가 여기에는 뭘 넣는 게 아니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애초에 성기를 왜….”

“왜 확실하게 대답 안 해?”

“넣어본 적도 없어요!”

무명은 서인에게 짜증 내듯 투덜댔다. 저와 비교 못 할 정도로 똑똑한 서인이 왜 자꾸 항문에 집착하는지 몰라 답답했다.

“그래, 걸레 짓 안 했으면 됐어.”

서인은 본인부터도 깨끗한 사생활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무명의 경험을 걸레 짓으로 치부했다. 뻔뻔하다 못해 얼굴에 철판을 깐 수준이다.

무명은 이해하기 어려운 소리만 해대는 서인을 울먹울먹한 얼굴로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걸레가 뭐예요?”

“알 거 없어. 그리고 좆 큰 건 좋은 거야. 됐어?”

“네, 네….”

이유도 모른 채 혼이 난 무명은 큰 성기가 정상이라는 말을 듣고도 기뻐하지 못했다. 말을 끝마친 서인이 매트에 드러눕자 그는 뭐 마려운 개처럼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형아, 근데 왜 화나신 거예요?”

“입 다물고 자.”

이유를 알려주면 다음부터 조심할 수 있는데, 서인은 더 묻지도 못하게 조용히 하라고 못을 박았다.

“잘못했어요, 앞으로는 안 그럴게요….”

“알았다고.”

이런 상황에서 무명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사과뿐이다. 투정을 들어주느라 지친 서인이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그를 껴안았다.

“이리 와.”

“네….”

무명이 덩치가 큰 탓에 한 품에 들어오지 않자 서인이 인상을 썼다. 빼빼 마르고 덩치가 작은 놈을 선호하는 건 아니었지만, 무명은 지나치게 컸다.

“나보다 조금만 작지 그랬어.”

“…죄송해요.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가 봐요.”

서인은 홍주원에 밑에서 착취당하는 그가 풍족하게 먹고 자랐을 리 없다는 것을 알기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형아, 잠시만요.”

그냥 반응하지 않은 것뿐인데 무명은 서인이 화가 났다고 생각하고는 눈치를 살피며 아래로 기어 내려갔다. 제 몸뚱이를 줄일 수는 없으니 서인이 안기 편한 자세를 찾기 위함이었다.

그는 서인의 가슴팍에 머리가 닿게 자리를 잡고는 얼굴을 묻으며 물었다.

“이렇게 할까요?”

“그래…. 잘했어.”

서인은 그제야 무명을 편히 안을 수 있었다. 서인에게는 편한 자세였지만, 무명에게는 답답했다.

“형아, 있잖아요….”

“자라.”

무명이 이렇게 노력해도 피곤한 서인은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차가운 그의 태도에 무명은 서운했다. 잠을 방해해서 미안하다고는 했지만,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취향도 공유하고 좋아하는 고기의 부위도 물어보고 싶었는데, 서인은 더 깨어있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으, 읍….”

가슴팍에 얌전히 얼굴을 파묻고 있던 무명이 조심스레 뒤척였다. 어깨가 결리고 가슴에 얼굴이 짓눌려 숨이 막혔다. 어떻게든 잠들어보려 노력해도 원래 일할 시간인지라 쉽게 잠도 오지 않았다.

“불편해….”

사지가 결박된 채로 작은 방에 갇힌 적이 있는 무명에게는 고문에 가까운 일이었다. 힘으로 밀어내고 일어나는 방법도 있지만, 서인의 잠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아…. 씨발. 가만히 있어.”

인내심에 한계가 온 무명이 끙끙대자 서인에게서 곧바로 험한 말이 튀어나왔다. 물론 잠결이긴 했지만, 자신을 향한 욕설에 놀란 무명은 결국 다시 숨죽였다.

“하아, 헉!”

억지로 잠든 그는 1시간 뒤, 땀 범벅이 되어 눈을 떴다. 일을 끝내지 못해 아버지에게 두들겨 맞는 악몽을 꾸었기 때문이다.

가쁜 숨을 몰아쉬던 무명은 서인이 곁에 있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정을 되찾았다.

“좋은 아침이에요….”

잠든 서인에게 힘없는 아침 인사를 건네고 부엌으로 온 그는 냉장고에서 고기와 달걀, 토마토를 꺼냈다. 일하러 가기 전 서인의 아침 식사를 미리 준비해두기 위함이었다.

“많이 드시겠지?”

맛있게 먹던 서인의 모습을 떠올린 무명은 고기 한 팩을 모조리 구웠다.

붉고 신선한 고기가 익어가면 갈수록 무명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도축하는 일은 재미있지만, 무명은 고기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기에 붉은 살코기가 역겹게 보였다.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면 못 드시겠지.”

도축방식은 생각보다 잔인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야 맛있게 먹지만, 막상 도축장에 가면 비인도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도축자들이 많았기에 만들어지는 장면을 보면 대부분 먹지 못한다.

평소보다 숙성이 더 잘 된 고기에서는 강한 향이 났다. 서인을 배려한 무명은 고기 위에 후추와 파슬리를 뿌렸다. 또, 건강을 생각해서 토마토와 당근을 함께 섞어 갈아 주스를 만들었다.

“맛있게 드셨으면 좋겠다….”

무명은 서인이 식사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아버지가 곧 오신다고 했기에 그동안 못한 작업량을 채우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의뢰받은 일을 처리하느라 더러워진 욕조와 바닥도 닦아야 했다.

시무룩한 얼굴로 지하 계단으로 내려온 그는 보온 그릇에 음식을 담아 서인의 머리맡에 놓아두었다.

“다녀올게요.”

발걸음이 무거웠다. 서인은 혼자서 잘 있겠지만, 무명은 그럴 자신이 없었다. 갑자기 막막하고 서글퍼졌다. 평생 해 온 일을 서인에게 숨겨야 하는 것도 비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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