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14)

02

그 후로부터 두 달 뒤, 서인은 끔찍한 상황에 부닥쳤다. Phase 3 임상시험 대상자를 모집하던 도중 약물에서 구토와 경련, 유산 증상 성분이 검출되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진행하는 동안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개인마다 편차가 있는 것이 당연했지만, 약물 자체에서 부정적인 성분이 검출되었기에 아예 진행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데다가 유산이라니. 있어선 안 되는 일이었다.

- 내 그럴 줄 알았지.

실패작, 기생충, 버러지, 기업 이미지의 먹칠. 끊이지 않는 폭언에 서인의 손이 떨렸다. 모두 맞는 말인지라 변명의 여지도 없다. 그는 손등을 물어뜯으며 평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회장님, 제가….”

서인이 할 수 있는 말은 언제나처럼 단 한 가지밖에 없다. 이른 시일 안에 완성 시키겠다는 계획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것뿐이었다.

“최대한 빨리….”

서인은 대답 없는 전화가 끊기자마자 물건을 집어 던지며 악을 질렀다. 임상시험을 진행하는 동안 모든 것이 완벽했기에 더더욱 믿을 수가 없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한순간에 바닥 나버렸다.

‘실패’

그것도 유산을 일으키는 성분의 검출. 올해가 가기 전에 완벽한 약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서인의 모든 계획은 물거품이 된다.

“씨발!”

회장을 비롯한 모든 이들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야망이 있는 그는 모든 것이 끝이 났다는 생각에 술을 퍼마셔 댔다. 두통은커녕 그 어떠한 문제도 나타나지 않았던 안트로덱신 역시 같은 성분이 검출되었기에 더더욱 혼란스러웠다.

서인은 해결할 수 없는 막막함에 사로잡혀 재떨이를 집어 던지고 테이블을 주먹으로 마구 내리쳤다. 큰소리에 급히 달려온 대욱의 멱살을 부여잡고 뺨을 후려치기까지 했다.

“대표님! 진정하세요!”

“닥쳐!”

술에 절어 눈앞이 정신없이 일렁였다. 대욱 역시 이번에는 성공하리라 믿었기에 예상치 못한 결과에 의문을 품었다.

“…유산을 초래할 수 있는 반응?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누군가 의도적으로 저지른 짓 아니냐고! 아, 혹시 너야? 네가 그랬어?”

그럴 리가 없다는 것 정도는 서인도 알고 있다. 서인은 화가 나 되는대로 내뱉어놓고는 도가 지나쳤다고 생각해 입을 다물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화내봐야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지만,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라 막막했다.

“못 들은 셈 쳐. 나가 봐.”

“대표님, 두 약물에서 유산을 초래할 수 있는 성분이 검출된 시점과 이유를 파악….”

“됐으니까 나가보라고.”

대욱은 재실험한 뒤 임신 중인 실험자의 반응을 집중적으로 살피자고 제안하려 했지만, 서인은 들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조금만 쉬고 다시 돌아갈 테니 가봐.”

“대표님….”

“먼저 연락할 때까지 기다려.”

지친 서인은 대욱을 떠밀 듯 내보내고 멍하니 술만 들이켰다. 이젠 화를 낼 힘조차 없다.

항상 강한 척하고 당당한 모습만 보였던 그는 한순간에 무너져내렸다. 서인은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자존심이 상하기보다는 그 누구의 탓도 아닌 온전히 제 잘못이었기에 힘들어할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 하하.”

술병을 든 채로 힘없이 벽에 기대어 앉은 그는 허탈하게 웃다가 목을 거칠게 매만졌다. 술을 마셨기 때문인지 아니면 불안감 때문인지 이상하게 목구멍이 뜨거웠다. 불덩이가 목에 걸린 것만 같아 괴롭고 불쾌했다.

서인은 결국 입안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깊숙이 쑤시며 마신 술을 모두 술을 게워냈다.

“하아, 하….”

단순 부정적인 성분 검출로 인한 실패라고 해도 괴로울 텐데, 유산을 초래하는 성분이라니. 움직일 힘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절망적인 소식이었다. 타사의 약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겠다고 큰소리쳐놓고서 무엇하나 이뤄낸 것이 현실이 무거웠다.

술에 취한 채로도 검사 결과지를 몇 번이나 살펴보았지만,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 ♢ ♦

“아….”

이틀 동안 대책 없이 술만 들이붓던 서인은 깨질듯한 두통에 시달렸다. 그토록 끊으려고 노력했던 담배도 벌써 몇 갑을 피웠는지 몰랐다.

그도 지금 제 모습에서 책임감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음을 인지하고 다시 시작하려 했지만, 도무지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약 개발도 실패하고 주류를 유통하는 일까지 마음대로 되지 않자 자기혐오가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윽….”

마켓의 주류를 유통하는 가게에서 술을 퍼마시던 서인은 마스크와 모자로 얼굴을 가린 남자가 커다란 상자들을 옮기는 모습을 보며 눈을 느릿느릿 깜빡였다.

상자에 새겨진 익숙한 문양을 본 그는 남자가 홍주원 측 사람임을 알고 가게 밖 골목길로 향했다. 괜히 알아보면 껄끄러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벽에 등을 기댄 그는 몰려오는 술기운 탓에 선 채로 꾸벅꾸벅 졸았다.

“아, 씨발….”

아무리 술에 취하고 정신적으로 힘들다고 한들 길거리에서 퍼질러 잘 생각은 없었다. 그는 어떻게든 시야를 바로잡으려 눈을 끔벅이며 손부채질을 해봤지만, 속이 울렁이고 머리가 지끈거릴 뿐 조금도 개지 않았다.

눈앞의 술집이 여러 개로 나뉘어 보이고 시야가 바늘구멍처럼 점점 좁아졌다. 팔을 뻗어 벽을 붙잡으려던 서인은 결국 중심을 잡지 못하고 벽에 머리를 처박은 채 주저앉았다.

“우, 욱…윽….”

머리를 부딪친 충격 탓에 먹은 술을 그대로 게워낸 그는 가슴께를 부여잡고 신음했다. 아무리 술에 취해도 이렇게까지 어지러운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손이 덜덜 떨리고 숨이 턱턱 막혔다.

“끅, 윽….”

몸에 힘이 실리지 않았다. 주저앉아 헐떡이던 서인은 가게 앞에 있던 남자가 저를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젖 먹던 힘을 다해 손을 뻗었다.

좀 도와주면 좋으련만 그는 서인을 놀리기라도 하듯 가게 뒤에 숨었다가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다가오고, 이제 다 왔다 싶으면 전봇대에 숨어 발을 굴렀다.

“어어….”

남자는 결국 서인이 정신을 잃은 후에 코앞까지 다가왔다. 바로 도움을 청해도 모자랄 판국에 그는 길쭉한 나뭇가지를 주워 서인을 쿡쿡 찔러보았다. 반응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목덜미와 머리칼을 조심스레 매만졌다.

“우와…. 진짜, 대표님이다!”

서인의 얼굴을 확인한 그는 벅찬 얼굴로 감탄하며 손뼉 쳤다. 남자는 술을 토해내 엉망이 된 얼굴을 옷 소매로 닦아준 뒤 뺨을 꼬집고 손을 매만지며 제 욕구를 채웠다.

“연구소에서! 연구소에서 대표님이 오, 오시기만을 기다렸어요. 오늘은 할 일이 있어서 왔는데! 대표님이 계실 줄 몰랐어요!”

그는 의식이 없는 서인을 앞에 두고 병으로 죽게 된 직원을 대신하여 제가 상품을 납품하러 왔다며 열심히 떠들어댔다.

“아, 이럴 때가 아니지!”

남자는 급히 달려가 가게 뒤에 주차해둔 제 차를 끌고 와 골목길 입구를 틀어막았다. 아직 술을 마시고 남자들을 끼고 놀기에는 이른 시간이라 오는 사람이 없는데도 그는 자꾸만 눈치를 보았다.

“읏차….”

남자는 축 늘어진 서인을 번쩍 들어 올려 차 안에 쑤셔 넣었다. 누구보다 신속한 행동으로 그의 머리에 숨구멍을 뚫은 쌀 포대를 씌우고 팔을 등 뒤로 돌려 노끈으로 단단히 결박했다.

바보같이 굴며 느릿느릿 행동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남자는 혹시나 서인이 의식을 되찾고 달아나기라도 할까 봐 피비린내가 나는 청테이프로 몸을 꽁꽁 묶어두었다.

“우와, 예쁘다….”

그는 그 와중에 근육 탓에 터져 나갈 듯한 서인의 가슴을 매만졌다. 주무르는 건 나쁜 행위인 것 같아 고기를 다루듯 찰싹 내리치자 서인이 몸을 뒤척이며 신음했다.

“으…….”

“죄송해요!”

남자는 신음에 화들짝 놀라 손자국이 남은 가슴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입김을 불었다. 그는 좀 더 만지고 싶은 마음을 뒤로하고 운전대를 쥐었다.

♦ ♢ ♦

오랜 시간 달려 도착한 곳은 인적이 드문 으스스한 장소였다. 남자는 교도소에나 있을 법한 전기 철조망을 열고 서인을 조심스레 옮겼다. 안으로 들어온 그는 서인이 나갈 수 없게 철조망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소형 리모컨으로 전기를 작동했다.

“이러면 못 도망가시겠지?”

남자는 철조망을 향해 물건을 던져 타들어 가는 것을 확인하고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으….”

서인은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도 듣기 싫은 쇳소리와 시큼한 쇳내에 인상을 쓰며 신음했다. 안 그래도 집 전체에서 쇳내가 나는데, 남자는 녹이 슬어 끊어지기 직전인 사슬을 가져와 문손잡이를 칭칭 감았다.

내부에는 이곳저곳 그의 생활 흔적이 남아있었다. 꿉꿉한 냄새가 나는 겉모습과는 달리 가구는 꽤 깨끗했다. 냉장고는 새것처럼 반질반질 광이 났고 침구에서도 섬유유연제 향이 풍겼다. 꽤 큰 욕실과 방, 지하 감옥도 있었다.

남자는 술 냄새를 풍기는 서인의 옷을 갈가리 찢어 벗겨낸 뒤 따뜻한 물이 가득 찬 욕조에 조심스레 앉혔다. 씻기는 동안 모자와 마스크가 다 젖어도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부드러워….”

싸구려 비누로 서인의 머리카락을 감기며 거품을 묻히던 남자는 그의 몸을 부위별로 나눠 등급을 매기며 뿌듯해했다. 서인의 몸을 깨끗이 씻기고 나서는 제 옷을 입혀 팔다리를 다시 묶어두었다.

“대표님, 대표님…. 제가 치카치카도 해줬는데, 언제 일어나세요?”

남자는 슬슬 서인이 일어나기를 바랐다. 오랜만에 보는 서인이 그 좋은 목소리를 들려주길 바랐으며 두 달 전에 했던 고백이 진심이었는지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남자가 대표님, 대표님하며 쫑알거리자 서인이 불편하게 결박되어있는 팔다리를 뒤틀며 끙끙댔다.

“으, 윽….”

“어, 일어났다!”

그는 눈을 뜨려고 몇 번이고 끔벅였지만, 밝은 조명과 피로감 탓에 시간이 필요했다. 남자는 그런 서인을 흥미로운 얼굴로 구경하다가 참지 못하고 질문을 쏟아냈다.

“대표님, 아직도 저를 좋아하시나요?”

그는 두 달 전의 일을 떠올리며 서인의 얼굴에 제 엉덩이를 들이밀었다. 좋아하는 사람끼리만 할 수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하고 마음을 확인하려는 과정이었다. 좋아하면 엉덩이를 만져도 된다고 말하자 서인이 구역질을 해댔다.

“윽, 뭐야, 씨발…. 네가 누군데?”

힘겹게 눈을 뜬 그는 얼굴을 가린 남자를 노려보았다. 요 며칠간 상대 안 가리고 잠자리를 했지만, 적어도 오늘만큼은 기억이 없었기에 불쾌하고 당황스러웠다.

“씨발, 미쳤어? 이거 풀어! 너 뭐 하는 새끼야!”

두 손목과 발이 노끈으로 묶인 탓에 움직일 때마다 피부가 쓸렸다. 아파도 풀어내는 게 우선이니 고통을 참으며 몸을 뒤틀었다.

“안 돼, 안 돼.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었잖아요. 그동안 말까지 배우고 더듬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그랬는데, 그랬는데, 저, 저를 어떻게 거부할 수가 있어요? 저를 따라온 거면서 일부러 거기에 쓰려졌으면서.”

남자는 높낮이 없이 일정한 음정으로 이상한 말을 줄줄 내뱉으며 주먹을 쥔 손을 떨었다. 온갖 나쁜 말을 듣고 심지어 서인이 제 목소리를 알아듣지도 못하자 그는 눈이 돈 사람처럼 침대를 마구 내리쳤다.

“너무해!”

남자는 묶인 다리로 저를 걷어차려고 발악하는 서인의 옷깃을 붙잡아 질질 끌어당겼다. 서인은 어떻게든 버티려 했지만, 몸이 자유롭지 못한 데다가 남자의 힘이 말도 안 되게 세서 힘없이 끌려갔다.

“윽! 아, 악!”

화가 난 남자는 눈에 뵈는 것이 없이 서인을 지하 감옥 계단 밑으로 던져버렸다. 턱이 높은 계단이 아니라 목숨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결박된 채로 무방비하게 구른 탓에 숨이 막힐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윽, 저 미친 새끼가….”

“다쳐도 어쩔 수 없어요! 나를 모르면 어떡해! 미워!”

서인은 힘겹게 숨을 고르자마자 저를 집어 던진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려 고개를 쳐들었다. 화가 난 남자는 계단을 재빠르게 뛰어 내려와 신코로 서인의 턱을 받치고 구경이라도 하듯 이쪽저쪽 돌려보며 훑었다.

서인은 그의 태도에 치욕을 느끼고 이를 악물었다.

“아, 그래…. 윤정식 사람이겠군. 얼마나 처 받았길래 이래? 윽….”

그는 제게 이런 짓을 할 사람은 아버지인 정식뿐이라며 코웃음을 쳤다. 회장에게 버려져서 이제 돈도 없을 텐데, 어떻게 사람을 매수했나 궁금할 지경이었다.

“응? 말을 해봐. 얼마나 받았어. 아니면 뭐, 그 자식이랑 떡 치는 사인가?”

그는 모난 성격 탓에 누구 할 것 없이 원한을 사고 다닌 주제에 죽어도 정식이 아닌 다른 사람의 짓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남자는 알 수 없는 소리를 해대는 서인을 눈이 충혈될 때까지 노려보다가 어깨를 들썩이며 씩씩댔다.

“입이 있으면 말을 해, 새끼야.”

맞으면 맞다, 아니면 아니다, 말하면 될 것을 서인은 입을 꾹 닫고 망부석처럼 서 있는 그가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말.”

“뭐?”

“대, 대표님께서 아무 말이나 해보라면서요.”

서인은 말을 해보랬더니 조롱하기라도 하듯 헛소리를 하는 남자를 짜증스러운 얼굴로 훑어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는 화를 내고 울먹이다가 서인에게 난데없이 하얗고 딱딱한 사탕을 건넸다.

서인은 저를 대표님이라고 부르며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 남자를 무시하고 건물 내부를 살폈다. 가장 먼저 묶인 노끈을 비벼 끊어낼 만한 날카로운 물건을 찾아야 했다.

그는 건물 자체가 낡았으니 벽이나 바닥 등을 집중적으로 살폈다. 모난 부분이 반드시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뭐 하는….”

“사탕이에요, 먹어요!”

남자는 서인이 제게 집중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의 턱을 붙잡아 누르고 사탕을 강제로 먹이려 했다. 반항해봐도 소용없었다.

“우, 윽…. 씹!”

서인은 사탕이 입으로 들어가는 순간에도 눈을 내려 그의 손 모양을 살피고 체취를 맡으려 했다. 납치범이 누군지 추려야 했기 때문이다. 제게 원한이 있는 놈임은 확실했다.

“우욱, 욱….”

그러나 주어진 정보가 한정적이라 상대를 파악하기엔 어려움이 따랐다.

서인이 입안을 굴러다니는 사탕을 뱉어내려 하자 남자가 재빠르게 입을 틀어막고 청테이프로 칭칭 감았다. 뱉을 수도 없고 삼킬 수도 없는 상황에 부닥친 서인은 인상을 찌푸리고 꿈틀대는 수밖에 없었다.

“엉덩이.”

남자는 사탕을 씹어 삼킨 서인의 얼굴에 다시금 엉덩이를 들이밀었다. 손도 묶어놓고서 만지라고 강요해댔다. 서인은 그의 오른쪽 허벅지가 눈에 띄게 불룩한 것을 보고 역겨움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무슨 사탕인지 알려줄 거예요.”

서인은 어차피 먹어버린 거 정체를 알아도 달라지는 건 없기에 끝끝내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서서히 술이 깨고 상황 파악이 되자 그는 남자가 윤정식의 사람이 아님을 어렴풋이 눈치챘다. 죽이거나 협박하지 않고 계속 애정만 갈구했기 때문이다.

“말을 못 하는 거예요, 아니면 안 하는 거예요? 테이프 그렇게 세게 감지도 않았어요. 말하려거든 충분히 할 수 있잖아요.”

아무리 떠올려보려 노력해봐도 남자는 기억에 없었다. 대충 몸만 탐하고 버렸던 하룻밤 잠자리 상대가 아닐까 생각한 서인은 남자가 제게 가까이 다가올 때마다 발길질해댔다.

“읏, 아파요! 아파! 아파! 아파!”

무릎을 얻어맞던 남자는 서인의 입에 붙은 청테이프를 신경질적으로 떼어주고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얼굴을 가린 탓에 서인에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어찌나 서럽게 우는지 마음이 아플 정도였다.

“내가 네 뒷구멍 따먹을 때 말했지 않나? 마음 달라는 개 같은 소리는 하지 말라고.”

“그게 무슨 소리인지 몰라요!”

서인은 애정을 갈구하는 것을 보고 그가 수많은 하룻밤 상대 중 하나임을 확신했다. 남자는 이해하기 어려운 소리를 하는 서인을 보며 서러운 듯 인상을 썼다.

“도망가면 바로 죽여버릴 거예요.”

“네가, 날? 좋아한다면서 어떻게 죽여? 이렇게 큰 좆 달고 있는 새끼를 또 어떻게 찾게?”

서인은 대충 제 좆 맛을 못 잊어 납치까지 한 남자가 무섭기는커녕 우스웠다. 원한을 품은 것도 아니고 어떻게든 한 번 더 박혀보려고 납치했다는 소리가 되니 말이다.

“하하, 별. 좆 박히고 싶어서 납치하는 놈은 처음 보네. 너 감당할 수나 있겠….”

서인은 무서울 것 없이 비웃으며 그를 조롱했다. 그러자 남자가 목에 칼을 들이대며 격하게 숨을 내쉬었다.

“죽여버릴 거야, 죽여버릴 거예요. 죽여버릴 거야.”

“한 번 박아주면 돼?”

그를 조롱하던 서인은 목에 칼이 들어오자 어쩔 수 없이 혀를 차며 제안했다. 어차피 남자가 바라는 건 성관계라고 단순하게 생각했기에 입만 열면 박아주겠다는 말이 나왔다.

“미안하지만, 내가 너랑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거든.”

남자는 서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 그동안 말도 연습하고 몸도 제때 씻으며 청결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자신이 지금까지 한 행동들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노력이었음을 깨닫고 주저앉아 엉엉 울기 시작했다.

제 딴에는 여러 힌트를 줬는데, 서인이 전혀 눈치채지를 못하니 서운할 수밖에 없다.

“이거 풀어, 박아줄 테니까.”

서인은 그러거나 말거나 뒤로 묶인 손목을 흔들며 남자에게 명령했다. 그는 서인을 기다리던 두 달간 만반의 준비를 했지만, 풀라는 명령에 두 눈이 마구 흔들렸다.

“싫어요.”

순간 말을 더듬을 뻔한 남자는 서인의 휴대전화를 코앞에 던져놓고 실실 웃었다. 서인은 액정을 보고는 이곳이 전파가 닿지 않는 위치임을 확인했다. 지하실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만큼 멀고 외진 곳이기 때문인지 확인해 봐야 했다.

“무섭죠? 무섭죠! 저에게 안아 달라고 하고 싶죠?”

서인은 남자의 말에서 그가 뭘 원하는지는 대충 눈치챘지만, 딱히 들어줄 마음은 없었다. 칼을 들이미는 건 살짝 위협적이긴 했지만, 안기고 싶을 정도로 무섭지도 않았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야….”

그래도 그가 방심한 틈을 타 빠져나가기 위해 조금은 겁먹은 척 연기했다.

“괜찮아요, 여기가 어디든 저는 대표님이랑 같이 있을 거니까요. 장소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요.”

“…….”

“저, 다녀올 테니까 얌전히 있어야 해요, 알았죠!”

“…….”

“믿을게요! 사실 대표님께서는 절 좋아하고 있는 거예요. 쑥스러워서 모르는 척하는 거죠! 제가 돌아올 때까지 얌전히 있으면 우리는 서로 좋아하는 사, 사이인 거예요. 헉!”

습관적으로 말을 더듬은 남자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제 입을 틀어막았다. 정작 서인 제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괜히 제 발 저린 남자는 잠시 나갔다가 오겠다며 헐레벌떡 사라졌다.

아무리 노력했다고 한들 사람의 본질이 바뀌는 건 아니었기에 그는 지하실 문을 활짝 열어두고 도망쳤다.

서인은 벌써 남자가 치밀한 놈이 아니라는 것을 파악하고 천천히 몸을 움직여보았다. 팔다리만 자유롭다면 충분히 도망칠 수 있는 환경이었다.

“으윽, 윽….”

그는 등을 바닥에 붙인 채로 벽에 기대어 앉았다. 다행히도 지하실 벽이 군데군데 나무로 되어있었다. 미리 봐둔 뾰족 튀어나온 나무에 노끈을 비비며 끊어냈다.

“윽! 무식하긴….”

살다 살다 노끈으로 묶여본 건 처음이었다. 서인은 붉게 긁힌 상처가 난 손목을 쓸며 인상을 썼다. 다리까지 마저 풀어내고 지하실 계단을 오르자 녹슨 사슬이 눈에 띄었다. 절단기가 없나 주변을 뒤돌아보다가 그냥 발로 한 번 차자 문이 쉽게 열렸다. 정말 허술하기 짝이 없는 공간이었다.

서인은 문을 열고 혹시나 밖에서 남자가 대기하고 있을 것을 대비해 한 번 벽으로 피했다.

“…….”

사람을 납치해놓고 문도 제대로 닫지 않고 심지어 밖에서 기다리지도 않는다는 것이 꽤 놀라웠다. 이 정도면 납치가 아니라 길거리에 쓰러진 사람을 주운 수준이었다. 서인을 데려올 때만 해도 작동해두었던 전기 철조망도 휑하니 열려있었다.

서인은 빠른 걸음으로 걸으며 건물을 찾으려 했지만, 밖은 건물은커녕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야.”

걷고 또 걸어도 잔디밭뿐이었다. 한참을 걷고 나서야 낡은 트럭을 발견한 그는 왠지 모를 찝찝함을 느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잠들어있는 운전자를 흔들어 깨웠다.

“뭐여?”

얼굴에 상처가 있고 배가 불룩 나온 사내는 잠을 방해받은 것이 불쾌한지 퉁명스레 말했다. 서인은 충분히 사례할 테니 경찰서나 번화가로 데려다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래, 근데 젊은 형씨가 무슨 일로 여기에 있대?”

“설명은 나중에 하죠. 좀 급해서.”

차에 올라탄 서인은 아무리 허술해도 그렇지 사람을 납치해놓고서 사라진 남자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잠시 이 모든 게 그의 계략이 아닐까 생각해본 서인은 차 안에 무기가 될 만한 물건이 없나 살폈다.

“아니, 보다시피 여기가 사람 살 만한 곳이 못 되거든. 젊은 사람이라면 더더욱 찾을 일이 없는 곳이야.”

사내는 서인을 흘깃 쳐다보며 자꾸만 무언가를 알아내려 했다. 서인은 차 시트 옆에 떨어져 있는 면도용 스프레이를 숨겨놓고 대충 대답했다.

“…뭐, 눈 떠보니 이곳이라 나도 잘 모르겠네요. 혹시 섬입니까?”

“섬? 섬은 아니고 그….”

사내는 그의 말에 대답해주는 척 은근슬쩍 차를 돌렸다.

서인은 번화가 쪽으로 나가지 않고 자꾸만 같은 자리를 맴도는 것을 눈치채고 스프레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는 무언가 수상하다는 건 느꼈지만, 지리를 모르기도 하고 섣불리 나설 상황이 아닌 것 같아 잠자코 기다렸다.

“…….”

한동안 말없이 앞을 보고 있던 서인은 차량이 탈출했던 건물로 가까워지기 시작하자 사내를 바라보며 물었다.

“왜 다시 제가 온 쪽으로 돌아가는 건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사내는 서인의 질문에 놀라 말을 더듬으며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그는 거짓말을 들킨 사람처럼 불안하게 시선 처리를 하더니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어? 아, 그게 아니라. 이쪽으로 도망 오면 안 됐어. 나온 곳에서 반대쪽으로 갔어야지. 내가 여기 길은 또 잘 알거든.”

“그렇군요.”

서인은 그를 전혀 신뢰하지 않았지만, 차에서 내리지는 않았다. 여차하면 제압해 차를 빼앗을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길은 몰라도 내비게이션이 있으니 직접 운전하는 것이 효율적이기도 했다.

창밖을 살피며 공격 타이밍을 재던 그는 사내의 말을 되짚어보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그렇지 명색에 납치범이 이렇게 쉽게 탈출하게 해줄 리가 없었다.

“그런데….”

“응?”

“내가 도망쳐 나왔다고 말했던가?”

“…에이, 씨팔!”

사내는 그제야 아차 싶었는지 차를 세우더니 주머니를 뒤져 급히 작은 칼을 꺼내 들었다. 서인은 그가 먼저 공격하기 전에 스프레이를 눈을 향해 뿌리고 목을 졸랐다.

“멍청한 놈…!”

서인은 하는 짓이 어설픈 게 딱 봐도 남자와 한패임을 알 수 있었다. 난데없이 정차하고 대놓고 칼을 꺼내는데 반격하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며 남자의 손에 들린 칼을 빼앗아 그를 찌르려 했다.

“윽!”

그 순간, 서인은 뒤통수에서 강한 통증을 느꼈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칼을 놓친 그가 목덜미를 붙잡고 비틀거렸다. 뿌예지는 눈을 비비며 뒤를 돌아본 서인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 윽….”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죠? 그런 거죠? 너무해, 너무해….”

그는 뒷좌석 바닥에서부터 천천히 기어 올라오는 남자를 보며 정신을 붙잡고 차 밖으로 나가려고 했지만, 문은 단단히 잠겨 열리지 않았다.

“윽, 씨발…. 뒤질 뻔했네! 내가 언제까지 네 일을 도와야 하는데!”

“그, 그, 그…. 이, 이번 한 번만 부탁해요. 돈 받았잖아요….”

머리를 얻어맞은 서인은 점점 힘이 빠져 움직이지 못했다. 운전하던 사내는 남자의 뺨을 거칠게 내리치며 짜증을 냈다. 두 달간 연습하며 말을 더듬지 않으려 노력했던 남자가 잔뜩 겁먹은 얼굴로 움츠러들었다.

“아….”

서인은 덜덜 떠는 남자와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그가 연구소에서 이상행동을 하던 남자임을 떠올렸다. 남자는 겁에 질린 모습으로 사내에게 돈을 건네고 운전석을 차지했다.

“앞으로 이런 일 안 해! 알았어?”

“네, 네….”

그는 서인에게 목을 졸리고 공격당한 게 불쾌했는지 안 그래도 정신을 잃기 일보 직전인 그의 머리를 거칠게 내리치고 나가버렸다. 간신히 버티고 있던 서인은 글로브 박스에 이마를 처박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그러게 왜 도망갔어, 왜! 왜!”

남자는 늘어진 서인의 멱살을 쥐고 사내의 손이 닿았던 몸을 거칠게 닦아냈다. 서인이 다친 것도 걱정스러웠지만, 그것보단 그가 저를 버리고 떠났다는 것이 더 서럽고 실망스러워 눈물이 흘렀다.

♦ ♢ ♦

“흐윽, 흐…. 너무해, 너무해.”

남자는 서인을 다시금 제 별장으로 데려왔다. 한 번 도망쳤으니 신뢰가 떨어져 더 단단히 묶어놓을 만도 한데, 그는 묶지도 않고 지하실에 가둬두지도 않았다. 되려 깨끗이 정돈된 침대에 조심스레 뉘어놓았다.

“으으….”

같은 곳을, 그것도 두 번씩이나 타격을 입은 서인은 끙끙 앓기만 할 뿐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 남자는 힘 없이 늘어진 몸에 마취제를 주입하고 작업대로 걸음을 옮겼다.

“…어떤 거로 하지?”

그는 작업대에 진열된 수많은 흉기와 공구 용품을 살피며 천천히 고르기 시작했다.

남자는 한참 고민하다가 포 뜨는 용도로 제작된 길쭉하고 날이 유독 날카로운 칼을 골라 소독했다. 덜렁대고 조금은 지저분해 보이는 그와 달리 물건들은 흠집 하나 없이 깨끗했다.

소독을 마친 남자는 서인의 바지를 느릿느릿 벗겨내고 측정하는 것처럼 이곳저곳 더듬었다.

“여기가 좋겠다. 제일 탄탄하니까!”

그는 보기 좋게 근육이 잡힌 허벅지 위로 칼을 가져다 대고는 완벽하다며 칭찬했다. 위치를 정한 남자는 펜으로 도안까지 그려가며 꽤 세밀하게 작업했다. 끝으로 서인의 피부까지 소독한 뒤 넓적다리에 주사를 놓았다.

“으읏….”

따끔한 바늘의 끝이 피부에 닿자 서인이 놀라 눈을 떴다. 그가 놀라자 덩달아 놀란 남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심호흡을 했다.

“뭐 하는 거야, 너. 읏….”

칼을 든 남자는 집중하느냐 서인의 말에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그에게는 매우 중요한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미쳤어? 왜 이러는데!”

서인은 포 뜨는 칼을 보자마자 도망치려고 했다. 그러나 이상하게 제 몸이 아닌 것처럼 전혀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제 곧 입술도 움직이기 힘들어질 거예요.”

“너, 당장 그만해. 감당 못하…. 으, 윽….”

남자의 말대로 서인은 점점 말하기가 버거워졌다. 묶이지도 않았는데,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죽는 건 아니에요. 내가 의사 선생님은 아니지만, 대표님을 위해 대충 설명하자면….”

아무리 냉정한 성격이라고 해도 서인도 사람이기에 두려웠다. 남자는 그런 서인을 달랠 목적으로 주사기를 조심스레 흔들었다. 마취된 탓에 시선을 내리깔 수 없을 정도로 늘어진 그를 내려다보던 남자가 지하실에서 커다란 거울을 가지고 올라왔다.

“…으, 읍….”

정신은 멀쩡히 깨어있는데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두려운 일이었다. 남자는 커다란 거울을 비스듬히 세워 서인의 앞에 고정해두었다. 움직일 수 없는 몸과 날카로운 주사기는 사람을 공포에 빠지게 하는 데에는 충분한 조건이었다.

“그냥 마취예요! 그, 그…. 혹시 많이 아플까 봐 허벅지에도 발랐는데, 괜찮아요, 괜찮아요!”

남자는 천천히 심호흡하며 칼을 들어 올렸다. 서인은 단단히 고정된 거울에 비친 제 허벅지와 그의 손에 들린 칼을 강제로 응시해야 했다. 마취제 덕에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정신적인 충격이 꽤 컸다. 예쁘게 뻗은 손가락이 탄탄한 허벅지 위에 닿기 무섭게 칼날이 움직였다.

“나, 나 사람한테는 처음 써보는데, 역시 별다를 게 없, 없네요!”

흥분한 남자는 예전처럼 다시 말을 더듬으며 몸을 떨었다. 거울 속에 비친 서인의 허벅지 위로 피가 흘러내렸다. 거즈로 조심스레 닦아내자 ‘명’이라는 글씨가 새겨졌다. 그 옆으로는 잘려나간 잔해가 고스란히 놓였다.

“이거 읽을 수 있, 있어요? 대표님은 똑똑하니까…!”

남자는 문구를 새겨넣은 허벅지를 소독하며 서인을 향해 물었다. 제 살이 뜯겨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던 서인은 숨을 거칠게 몰아쉴 뿐 그 무엇도 하지 못했다.

“조금 있으면 정상으로 돌아올 거예요. 그다음에 설, 설명해드릴게요!”

그는 첫 시도인데도 예쁘게 잘 되었다며 신이 났다. 서인은 신체를 훼손하는 잔인한 짓을 한 주제에 좋다고 방방 뛰는 모습에 이질감을 느꼈다. 그는 반응도 못 하고 숨만 간신히 쉬는데, 남자는 해맑게 웃으며 조잘조잘 떠들었다.

“저, 저 그런데, 배가 고파요….”

그는 방방 뛰다가 갑자기 일했더니 배가 고프다며 부엌에서 흰 쌀밥을 퍼왔다. 손가락을 꿈틀댈 수 있을 정도로 힘이 돌아온 서인은 남자가 제 허벅지를 바라보며 맨밥을 퍼먹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인상을 구겼다.

“앞, 앞으로 한 시간 후에는 원래대로 돌아올 거예요!”

서인은 단지 미친놈이라서 그런지 비위도 좋다고 생각하고 말았는데, 벗겨진 살갗에 시선이 닿는 순간 빨라지는 숟가락질 속도를 보고는 그가 제 허벅지 살을 반찬 삼아 식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 ♢ ♦

마취가 풀리자 허벅지에 감각이 돌아오고 몸을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남자는 서인을 안아 들어 지하실로 옮겨두었다. 혹시나 도망갈까 봐 걱정되어 발목에 족쇄를 달아놓기도 했다.

“어, 어때요? 이거 읽을 수 있어요? 예쁘게 썼는데!”

“내가 이걸 왜 알아야 하는데. 이런 개 좆 같은 걸 해놓고 뭐, 예뻐?”

“대표님이 잘못해서 한 건데, 왜. 왜 화를 내요….”

남자는 정말 서운하고 속상하다며 입술을 삐죽였다. 서인은 잘못한 것도 없고 시간도 없는데, 모자란 놈에게 붙잡혀 이런 수모를 겪어야 하는 상황이 답답했다. 불쌍한 사람에게 베푼 호의가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러니까 이게 뭐냐면요….”

남자가 서인의 허벅지를 조심스레 짚으며 각인을 설명하려는 동시에 서인이 그의 얼굴을 향해 침을 뱉었다. 울상을 짓고 있던 남자의 얼굴로 침이 느린 속도로 흘러내렸다. 그는 눈물 한 방울을 뚝 떨어뜨리더니 말없이 나가버렸다.

“뭐야?”

불같이 화를 내리라 예상했던 서인은 별말 없이 걸음을 옮기는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침을 맞은 것에 분노해 저를 죽이려 들지 않을까 생각한 서인은 한참이 지나도 남자가 돌아오지 않자 다시금 탈출할 기회를 노렸다. 족쇄를 절단할 물건이 없을까 살펴보던 그는 어딘가에서 고기 굽는 냄새가 퍼지자 입맛을 다셨다.

“아…. 뭘 하는 거야.”

서인은 그제야 제가 며칠간 빈속에 술을 마셨고 먹은 거라곤 남자가 억지로 쑤셔 넣은 흰 사탕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기 굽는 소리와 달그락거리는 생활 소음이 멎자 남자가 지하실로 내려왔다.

“드세요, 대, 대표님….”

“내가 이걸 왜 처먹어?”

“배, 배고프면 안 되니까….”

배가 고프긴 했다. 그렇지만, 생살을 도려내고 그 앞에서 밥을 퍼먹던 남자를 믿을 수 없었다. 그러다 서인은 문뜩 의심이 들었다.

”너, 내가 고기 먹는 거 어떻게 알았어?“

아무리 남자가 불법으로 고기를 유통하는 주원의 사람이라고 해도, 아무에게나 고기를 내어 준다는 건 말이 안 됐다.

그런데 그는 마치 서인이 육류 소비자임을 알기라도 하듯 자연스레 노릇노릇 잘 구워진 진짜 고기를 내왔다. 주원이 그를 특별하게 여기니 혹시 귀띔이라도 해뒀나 싶어 물으니 남자가 당황하며 대답했다.

”대, 대표님은 수장님이랑 친구 사이니까…. 당연히 드실 줄 알았어요. 혹시 고, 고기 싫어하세요? 한 번 드셔보세요! 제가 직접 도축해서 맛있어요….“

서인은 육류 소비자를 혐오하지 않고 맛있으니 먹어보라며 내미는 그의 모습에 흥분한 마음을 애써 감췄다. 항상 야만인 취급만 받다가 제 의견에 공감하며 고기를 좋아하는 상대를 만났으니 신이 날 만도 했다.

“지금 별로 안 먹고 싶으면 나중에 먹어요. 여기 두고 갈게요!”

“…….”

남자는 음식을 거부하는 서인에게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

서인은 무언가 꿍꿍이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코를 찌르는 음식 냄새와 알맞게 익은 고기의 유혹에 정신없이 흔들렸다. 아까까지는 허기를 느끼지 못했는데, 음식 냄새를 맡고 나서부터는 먹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을 정도로 괴로웠다.

그러나 사탕을 억지로 먹였을 때와는 달리 강요하지 않으니 더 의심스러웠다. 위를 올려다본 서인은 냉장고에 무언가를 열심히 집어넣고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저, 저를 보고 계시는 건가요?”

그는 서인과 시선이 맞닿자마자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내려와 말을 걸었다. 흰 장갑에 묻은 피가 눈에 띄었다.

“아, 이거! 미안해요. 고기 정리하다가 묻었어요, 대표님 피 아니에요!”

“…….”

“이, 이 고기 질 좋은 거예요. 배고플까 봐 정성껏 구워온 건데 먹지 않으니 속상해요….”

남자는 알파벳 ‘R’ 이 각인된 식기와 수저를 매만지며 한숨을 쉬었다. 기름이 뒤엉겨 냄새가 날 수도 있으니 음식을 내가야겠다고 말하는 그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너 말이야.”

“네!?”

남자는 서인이 먼저 말을 걸어주자 언제 울먹였느냐는 듯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서인이 드디어 저를 알아봤다고 생각하고 모자를 벗으려 했다.

“내가 뭐 하는 사람인지는 알아? 감당되겠느냐고.”

“…….”

‘오랜만이다, 보고 싶었어’ 등등의 말을 기대했던 남자는 모자를 벗으려던 손을 힘없이 떨어뜨렸다.

서인은 일부러 못 알아보는 척하며 그의 반응을 살폈다. 기억한다고 하면 왜 좋아해 주지 않느냐는 이상한 소리를 할 것 같아서 되는 한 무시하려 했다.

“아, 아젝신인가 그 약 만드는 회사 대표님이시잖아요…. 알아요!”

“그다음엔.”

“네? 그것밖에 모르는데…. 아, 우리 수, 수장님이랑 친구예요!”

서인은 정말 모르는 건지 모르는 척하는 건지 구분하기 위해 남자의 눈을 지그시 응시했다. 그와 만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유통하는 가게 및 육류의 도축방식 등 주원과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아무것도 모른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엉덩이 만지셔도 되는데….”

서인의 시선에 몸을 배배 꼬며 부끄러워하던 남자는 다시 애정을 확인하려 들었다. 그 모습에서 연기가 아닌 정말로 모른다고 판단한 서인은 코웃음을 치며 고기가 담긴 그릇을 매만졌다.

“아, 마켓에서 직접 받아온 건데, 사람들이 도통 먹지를 않더라고요…. 여기에 뭘 탄 것도 아닌데…. S급이라 비싼 거예요!”

서인은 S급이라 비싸다는 말에 남자를 올려다보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겁이 많고 부끄럼을 타면서도 은근히 할 말을 다 하는 모습이 맹랑하니 꽤 귀여웠다.

“그래, 고기, 고기 좋지.”

“정말요? 그럼 얼른 드….”

“야, 기름 엉긴 거 안 보여?”

“아, 네….”

“그리고 양이 너무 적어. 더 구워와.”

“네! 흐흐흐….”

남자는 더 구워오라는 말에 음흉하게 웃으며 다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서인은 탈출하려거든 체력을 비축해두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 고기를 먹기로 했다. 괜히 억지를 부려 쫄쫄 굶었다가는 나중에 힘이 빠져 탈출할 기회를 놓칠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서인은 고기를 구우러 간 남자를 두고 접시에 담긴 식은 고기를 조심스레 주워 먹었다.

“으, 왜 이렇게 질겨?”

구웠을 때 바로 먹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고려해도 턱이 빠져나갈 정도로 질겼다.

결국, 고기를 뱉어내고 신경질적으로 수저를 내려놓은 서인은 뒤이어 새 고기를 구워 지하실로 내려온 남자를 노려보았다.

남자는 굳은 표정의 서인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왜요?”

“질이 좋은 고기라면서? 이건 뭐 거의 쓰레기 부위잖아.”

“그럴 리가 없어요. 제가 직접 도축…. 아니, 아니 받아온 고기인걸요?”

“어디서 이런 걸 받아와? 사기당한 거 아니냐?”

남자는 크게 충격받은 얼굴로 고기를 살펴보다가 그대로 음식물 쓰레기통에 쑤셔 넣었다. 그는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새로운 고기를 가져다주며 서인을 관찰했다.

“어제 받아온 싱싱한 고기예요.”

싱싱한 고기라는 말이 사실인지 이번에는 서인도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했다. 남자는 입에 고기가 들어갈 때마다 엉덩이를 들썩이며 좋아했다. 서인 역시 그를 바라보며 이따금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밥 좀 더 줘.”

“고기는요?”

“고기도 더 주면 좋지.”

“알겠어요.”

대화만 봐서는 평범한 형, 동생 사이처럼 보였다. 적어도 납치범과 피해자의 관계에서 오갈 만한 대화는 아니었다.

남자가 밥을 더 가지러 간 사이 족쇄를 만지작거리던 서인은 발목을 절단하지 않는 이상 풀어낼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고민하던 그는 반항하지 않고 남자를 구슬리는 쪽을 택했다.

서인이 식사를 마치자마자 남자는 차를 가지고 내려왔다. 이곳에 적응하기로 다짐한 서인은 찻잔을 받아들려 했지만, 남자는 그에게 칼을 쥐여주었다.

“칼은 왜 또.”

서인은 허벅지 살을 파낸 지 아직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또 같은 일을 겪을까 봐 굉장히 예민하게 반응했다.

“말을 해! 답답하게 굴지 말고.”

남자는 버럭 소리치는 서인을 보고 갑작스레 손을 배배 꼬며 귀를 붉혔다. 서인은 난데없이 쑥스러워하는 그를 경멸스럽게 바라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새, 새겨놓은 것 좀 보게 바지 찢고 다리 좀 벌려주세요!”

서인이 추울까 봐 거즈와 붕대로 대충 처리를 해둔 뒤 바지를 입혀뒀던 남자는 문구가 어떻게 남았는지 다시 보고 싶다며 바지를 칼로 찢어달라고 부탁했다. 서인은 짜증이 났지만, 그를 잘 구슬리기로 했으니 순종적인 모습을 의도했다.

“역시 너무 예뻐요. 어떡해, 너무너무 예뻐요! 대표님 허벅지가 타, 탄탄하고 좋은 살이라서 그런지 S 등급을 매겨도 모, 모자랄 것 같아요!”

남자는 살이 패어 붉게 피가 맺혀있는 허벅지에 입을 맞추고 헐떡였다. 서인은 그의 행동이 역겹고 불쾌했지만, 손을 올리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

“하아, 죄, 죄송해요! 그런데 이거 읽을 줄 알아요?!”

남자는 글자를 조심스레 가리키며 턱짓했다. 서인은 새겨지는 과정을 직접 목격했기에 평생 잊을 수 없는 글자를 바라보며 억지로 대답했다.

“없을 무, 이름 명.”

그는 억울한 마음과 분노를 억누르고 이유 모를 단어를 읊었다. 도대체 이런 단어를 왜 새겼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배신자의 낙인인가 싶을 정도로 아무 의미 없는 단어였다.

“무명, 무명이네.”

“우와아….”

남자는 서인이 단어의 뜻을 말하자 방방 뛰며 기뻐했다. 끝까지 이유를 알려주지 않은 그는 허벅지에 연고를 발라주며 덧나지 않게 열심히 관리했다.

“그나저나 너 얼굴 좀 보자.”

“싫어요!”

“왜.”

서인은 이곳을 벗어나고 나면 남자를 죽여버릴 생각이었다. 만일 그가 도망쳐 잡지 못할 것을 대비하여 얼굴을 외워둘 속셈이었는데, 남자는 모자와 마스크를 벗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싫어요, 그냥 싫어….”

서인은 몰랐지만, 그는 토라져 있었다. 힌트를 주고 목소리를 들려줘도 서인이 저를 기억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서인이 모르는 척하고 있음을 꿈에도 모르는 남자는 모자와 마스크를 벗어도 자신을 못 알아볼까 봐 겁이 나서 벗지 않았다.

“아, 그럼 처 벗지 마.”

서인은 아이처럼 울먹이는 그의 등을 거칠게 밀어냈다. 연구소에서는 비닐을 이곳에서는 마스크와 모자를 뒤집어쓴 걸 보니 어지간히도 못생겼겠구나 싶었다.

“…아파요.”

몸도 좋고 피부도 하얗고 얼핏 보이는 눈도 꽤 예뻤지만, 하관이 중요하기에 서인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못생긴 것을 혐오하는 그는 절구에 빻아놓은 것처럼 생긴 놈이 저를 만졌다고 생각하자 급격히 기분 상했다.

♦ ♢ ♦

“박아준다고 해도 싫다, 내보내 달라고 해도 싫다. 그럼 도대체 나랑 뭘 하고 싶은 건데? 아무것도 안 하고 가둬놓기만 할 거야?”

기분이 상한 서인은 남자에게 짜증을 냈다. 약간의 결벽증이 있는지라 남의 옷을 입은 채로 낡은 건물에 갇힌 것이 싫었다. 하루빨리 요구사항을 들어주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이미 해, 했는데! 여기에 제 흔적 남겼잖아요!”

남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말에 충격을 받은 듯 서인의 허벅지를 가리키며 난리를 쳐댔다. 예쁘게 새겨줬는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며 따지고 들기도 했다.

“다음엔 뭘 할 건데. 잡아 와서 고작 허벅지 파는 게 다야?”

“마, 마음에 안 들어도 어쩔 수 없어요! 대표님이 제 말 안 듣고 도망갔으니까! 약속을 어겼으니까!”

“내가 언제 너랑 약속했는데?”

서인의 공격적인 태도에 손톱을 깨물며 제 자리를 빙글빙글 돌던 남자가 우뚝 멈춰 섰다. 약속한 적이 없다는 것은 그에게 참으로도 야속한 말이었다.

“기억이 안 나세요?”

서인은 그가 귀찮기만 했기에 그날의 대화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남자는 좋아한다고 고백도 해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던 것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두 달간 서인만을 기다렸던 그는 모든 행동이 아무 의미 없는 것이었음을 알게 되자 손을 떨며 주저앉았다.

“내가 뭘 기억해야 하는데.”

“좋아한다고 했잖아요! 좋아한다고! 두 달 전에!”

“두 달 전? 아, 그랬나 보네…. 어어, 그랬다.”

서인은 제정신이 아닌 사람과 대화하는 이 상황 자체에 권태를 느꼈다. 대충 기억하는 척 원하는 대로 대답하자 남자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대표님이 어디에서 뭐라고 했는지 정확히 말하세요!”

서인이 대충 그랬던 것 같다고 얼버무리자 남자는 자세한 상황을 묘사해보라고 압박했다.

“이럴 줄 알았어! 다 거짓말이었어! 대표님은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잖아!”

서인이 대답하지 못하자 남자가 그를 표독스럽게 노려보며 소리쳤다. 아예 모르는 척하면 마음을 접지 않을까 생각한 서인은 그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마음에도 없는 사과를 했다.

“기억 못 해서 미안해. 그런데, 널 모르는 사람한테 이러는 거 너무 비참하다고 생각 안 해?”

“…….”

“그만하자. 이야기 끝난 거지? 이제 풀어…. 아, 윽!”

분노로 온몸을 덜덜 떨던 남자가 서인의 허벅지를 걷어차며 발악했다. 소리를 지르며 엉엉 울던 그는 발을 쿵쾅대며 이내 지하실을 나가버렸다.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연구소에서는 순진한 모습만 보였던 남자인데, 지금은 굉장히 폭력적이고 날카로웠다. 꽤 다른 모습에 말을 더듬지 않았으면 정말 누구인지 모를 정도로 달랐다.

“하아, 미친놈…. 윽….”

좋아한다는 말을 기억할 리 없는 서인은 저 혼자 마음을 품고 범죄를 저지른 남자의 행동에 치를 떨었다. 그는 피가 흐르는 허벅지를 내려다보며 신음했다.

“하아, 으….”

고통에 식은땀이 줄줄 흘러 등이 축축이 젖었다. 서인이 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조금만 움직여도 살이 당겨 피부가 쓰라렸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고 쉬는 것을 택했다.

“…….”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여전히 화가 잔뜩 난 상태였다. 서인은 다시 돌아온 남자를 바라보며 코웃음을 쳤다. 화를 내봤자 어차피 제게 돌아오는 것이 말 잘 듣는 강아지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어딜 갔다 오는 거야? 빨리 약이나 발라.”

혹시나 또 폭력적으로 굴지 않을까 긴장했던 서인은 그의 손에 들린 커다란 통을 보고는 삐딱하게 등을 기대고 앉아 건방지게 손짓했다.

“정말, 몰라요?”

“어, 몰라. 줘.”

남자의 손에 들린 소금통을 소독약으로 착각한 서인은 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한 것도 모르고 강제로 빼앗아 들려 했다. 그 행동을 가만히 보고 있던 남자는 난데없이 제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서인의 어깨를 강하게 밀어 짓눌렀다.

“이, 이건 다 대표님 잘못이야! 나한테 그러면 안 됐어!”

남자의 손에 들린 것을 가까이에서 본 서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눈이 새빨갛게 충혈된 남자가 몸 위에 올라타 뚜껑을 열기 시작했다.

“이거 소금이에요! 당장 기억해내요! 대표님이 잘못했어! 죽여버릴 거야, 죽여버릴 거야!”

“연구실, 연구실 안에서 말했어, 좋아한다고, 아! 아악!”

“틀렸어요!”

남자는 서인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한 그는 안 그래도 성이 난 상처 부위에 굵은 소금을 퍼부었다.

“으, 으윽! 아악!”

칼로 정교하게 파낸 상처 사이로 녹아든 굵은 소금은 피에 녹아 뚝뚝 떨어졌다. 서인은 반항도 하지 못할 정도의 통증에 고개를 뒤로 젖히고 벌벌 떨기 바빴다.

“으윽…. 윽! 놔! 제발, 제….”

“나한테 그러면 안 돼! 나빠, 나쁘다고!”

남자는 딸꾹질까지 해가며 잔혹 행위를 반복했다. 그는 소금을 거의 쏟아붓듯 뿌리며 울다가 서인이 움직이지 않음을 확인하고 눈물을 닦으며 행동을 멈췄다.

“대, 대표님?! 대표님! 어떡해!”

분노에 사로잡혀 서인을 고문한 남자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오두방정을 떨었다. 작렬하는 고통에 정신을 잃은 서인을 일으켜 세우고 이리저리 끌고 다니던 그는 부어오른 허벅지를 소독하고 붕대를 칭칭 감았다.

“흐윽, 어떡해, 어떡해….”

감정 조절을 할 줄 모르는 남자는 축 늘어진 몸뚱이를 껴안고 한참을 후회했다. 잘못했다고 빌었다가 탓하기를 반복하며 손등을 깨물고 머리를 내리치며 불안에 떨었다.

뭐든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그는 제 마음을 일방적으로 강요하기만 했다.

♦ ♢ ♦

“아….”

한참 뒤 정신을 차린 서인은 허벅지에 감긴 붕대를 발견했다. 남자는 내내 울어 퉁퉁 부은 얼굴로 잔상처가 난 서인의 손등에 밴드를 붙여주었다. 서인은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저를 정성스레 치료해주는 꼴을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표님…. 나 좋다고 하면 이제 아플 일 없을 거예요….”

몽롱함에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던 서인은 남자의 말에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제는 그가 정말로 자신을 죽이고도 남으리라 판단한 서인은 상체를 힘겹게 일으켜 벽에 기대어 앉았다.

느긋하게 누워 치료나 받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문제가 생긴 약도 재연구를 해야 했고 그 밖에 회사 업무도 처리해야 했다.

“대표님?”

“…….”

남자는 서인이 말없이 멍하니 앉아만 있자 눈썹을 늘어뜨리고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그는 잠시 뒤로 물러나더니 서인이 편히 잘 수 있게끔 바닥에 커다란 매트를 깔았다.

“누워서 주무세요!”

남자는 모자를 벗은 채로 손에 베개를 들고 있었다. 방금 세탁한 커버를 씌워 좋은 냄새가 난다며 어떻게든 서인에게 잘 보이려 애를 썼다. 서인이 받아들지 않자 품에 억지로 베개를 안겨주고 무언가를 기대하며 몸을 들썩였다.

“모자 벗었는데!”

어떻게 탈출할지 계획을 세우던 서인은 제 눈앞에 머리카락을 들이대며 눈을 깜빡이는 남자를 마주했다. 마스크는 벗지 않은 터라 얼굴을 전부 볼 수는 없었지만, 모자를 벗자 눈과 이마가 드러났다.

“…….”

서인은 제가 잘못 본 게 아닐까 싶어 거칠게 눈을 비비고 다시금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러자 쌍꺼풀이 진하고 커다란 눈이 빠르게 깜빡이며 정신없이 굴러다녔다. 저를 봐달라고 그토록 애원하던 남자는 막상 서인과 시선이 마주치자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돌렸다.

“연구소에서 급히 가져온 거라서 조금 더러운데, 다음 주에는 예쁜 거로 바꿔줄게요!”

남자가 분홍빛 담요를 탈탈 털며 예쁜 디자인으로 바꿔주겠다고 열심히 떠들어댔다. 그러나 서인은 그의 외적인 모습에 정신이 팔려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남자의 머리카락은 복슬복슬해 보일 정도로 곱슬머리였다. 그림자 탓에 어두워 보였던 눈동자도 연한 갈색으로 빛나 전체적으로 순해 보였다.

“허….”

서인은 예상치 못한 귀여운 머리 스타일과 쌍꺼풀이 진하고 아래로 쳐진 남자의 눈을 보며 목덜미를 문질렀다. 영문을 모르는 남자는 서인이 사용할 세면도구와 옷가지들을 늘어놓으며 신나게 설명했다.

“같이 지내려면 옷이랑 치카치카 할 것도 필요하니까요!”

“…….”

“대표님, 아직 아파요? 약 많이 발랐는데, 붕대도 감았는데….”

남자는 혹시 열이라도 오른 거 아니냐며 제 뺨을 서인의 뺨에 비비며 특이한 방식으로 열을 쟀다. 얼굴을 구경하던 서인은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이런 미친….”

납치범의 얼굴에 홀리는 건 정상이 아니다. 게다가 아직 마스크도 벗지도 않았는데, 고작 눈과 머리카락을 보고 호감이 생기는 건 더더욱 말이 안 됐다.

“대표님!”

서인이 실성한 듯 웃으며 고개를 숙이자 그가 아프다고 생각한 남자는 다짜고짜 바지를 붙잡고 늘어졌다.

“뭐 하는 짓이야?”

“봐야 할 거 아니에요! 벗어요, 벗어요!”

“네가 내 걸 왜 보는데? 놔!”

서인은 난데없이 헐렁한 고무줄 바지를 벗겨내려는 남자의 손을 거칠게 떼어냈다. 박아주겠다고 말하긴 했지만, 아직 얼굴을 다 본 것도 아니고 주원의 사람이니 고위관계자들에게 이리저리 굴려졌을 가능성도 있어 영 찝찝했다.

“좀!”

그러나 남자는 서인의 예상과는 다르게 행동했다. 바지를 내려 상처 부위를 확인한 그는 반항하는 서인을 뒤로 돌려 짓누르고 허벅지 뒤를 살폈다.

“가만히 있어요! 앞에는 괜찮은데…!”

소금을 퍼부은 곳의 부기가 가라앉았음을 확인한 남자는 소금에 피부가 쓸렸거나 마취 실수를 염두에 두고 확인했을 뿐인데, 서인은 저 혼자서 이상한 오해를 했다.

“나는 씨발! 받는 쪽 아니라고!”

갑자기 바지를 벗기고 몸을 뒤에서 짓누르니 충분히 오해할 만한 상황이긴 했지만, 순수한 남자가 이해할 리 없는 말이었다. 뒤를 써본 적 없고 앞으로도 그럴 일이 없는 서인은 뒤를 뚫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수치에 자존심을 내려놓고 부탁했다.

“부탁할게, 하지 마.”

“네, 네? 아, 아픈 거 아니에요? 그럼 됐는데…. 뭐를 부탁해요?”

남자가 제 몸 이곳저곳을 검사하듯 훑고 다시금 바지를 입히고 나서야 서인은 제가 오해했음을 깨닫고 입술을 깨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대표님, 정말 안 아픈 거 맞아요?”

남자는 아픈 곳이 없는데도 서인이 고개를 들지 않자 안절부절못했다. 수치심 탓에 열이 오른 것을 아프다고 착각한 그는 잔뜩 풀이 죽어 입을 다물었다.

“안 아파.”

남자는 아프지 않다는 걸 확인받고 나서야 방긋 웃었다. 그는 온갖 나쁜 짓을 해놓고서 조금 잘해주면 환심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분홍빛의 차를 건네며 점수를 따보려 했다.

“드세요! 아마도 맛있을 거예요!”

남자는 설레는 얼굴로 그가 마시기만을 기다렸다. 고기도 먹은 판국에 차라고 가릴 이유는 없다. 서인은 무슨 종류의 차인지도 모르면서 잔에 입을 가져다 댔다.

“뭔지 안 물어보시고 그냥 드셔요?”

서인이 뭔지 물어보지도 않고 맛을 평가하지도 않자 남자가 눈에 띄게 풀이 죽었다. 안절부절못하던 남자는 은근슬쩍 고기 이야기를 꺼내며 칭찬받으려 했다.

“차 직접 내린 건데, 맛이 어때요?”

“맛있네.”

“아까 고기는요? 비, 비싼 건데….”

“그것도 맛있었어.”

힘겹게 얻어낸 서인의 평가는 단조로웠다. 어떻게 보면 마지못해 대답하는 것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남자는 뭔가 잘못됐다는 표정으로 남은 고기를 가져와 젓가락을 쥐여주고 먹으라고 강요했다.

“배부르니까 너 먹어.”

“난 안 먹어요! 고기 싫어한다고요!”

남자는 제가 직접 구웠다고 그렇게 강조해놓고선 먹으라고 하니 소리를 지르며 그릇을 집어 던졌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고깃덩이를 발로 밀며 역겨운 것을 본 것처럼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저었다.

“맛있어요, 없어요!”

“맛있어. 맛있다고. 네가 구워 줬는데, 맛없을 수가 있겠어?”

서인이 대충 맞장구치며 바닥에 떨어진 고기를 치우라고 고개를 까딱이자 소리 지르며 화내던 남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바닥을 깨끗이 치우고 계단을 올랐다.

“어디가?”

“고기 받아왔거든요, 손질하러요.”

“그런 것도 네가 직접 해?”

“네.”

서인이 먼저 질문하자 남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는 혹시 혼자 있는 게 싫다거나 제가 곁에 있어 줬으면 하냐고 물으며 서인의 손을 붙잡았다.

“아니, 그냥 어딜 가나 해서. 혹시 언제 와?”

“근처 공장이라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그래, 수고해.”

그러나 돌아온 반응은 당연히 거절이었다. 남자는 저를 붙잡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따라가겠다고 말하지도 않는 서인에게 또 한 번 실망했다. 더 물어봐도 원하는 반응이 돌아오지 않자 외롭고 쓸쓸한 걸음으로 지하실을 벗어났다.

“아, 피곤하다….”

서인은 남자가 떠나자 사슬의 길이를 가늠해보기 위해 지하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밖으로 나가기엔 턱없이 짧았다.

탈출하기 위해선 우선 자물쇠를 풀 열쇠를 찾아야 했다. 서인은 치밀하지 못한 남자의 성격상 열쇠는 분명히 단순한 장소에 있으리라 생각하고 자그마한 서랍과 베갯잇을 살폈다.

남자의 물건들을 허락도 없이 뒤지던 그는 큰 서랍에서 남자의 속옷과 제 손수건을 발견했다. 연구소에서 훔친 것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니 정말이지 역겨워서 속이 다 울렁였다.

“하, 씨발. 없네.”

지하실을 전부 살펴보아도 열쇠는 보이지 않았다. 족쇄를 절단할 만한 도구도 없으니 사실상 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남자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지하에 숨겨두지 않았다면 부엌이나 그의 몸을 뒤져야 한다는 이야긴데, 그러려거든 몸을 경계 없이 만질 수 있을 만큼 가까워져야 했다. 비위를 맞출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머리만큼은 남자의 말을 잘 듣고 순응해야 함을 알지만, 남자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며 신경을 긁는 탓에 화를 참기가 쉽지 않았다.

“후….”

서인은 열쇠를 찾느라 엉망이 된 서랍과 매트를 정리해두고 그나마 가장 깨끗해 보이는 담요 위에 앉아 남자를 기다렸다.

작은 지하실에 갇힌 것도 물론 답답했지만,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시간을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작은 지하실에는 시계는커녕 창문도 없어 지금이 아침인지 저녁인지 전혀 알 길이 없었다.

“…하, 답답해.”

그는 남자의 서랍 안에 있던 담배를 허락도 없이 피우며 시간을 보냈다. 다 피운 담배의 개수가 점점 늘자 입안이 썼다. 창문이 없는 작은 지하실에 연기가 가득 찬 것을 본 서인은 한숨을 쉬었다. 오래된 담배인지 맛도 쓰레기 같았다.

기다림이 길어지자 그는 담배꽁초를 정리해두고 담요를 뒤집어썼다.

♦ ♢ ♦

“…왔나?”

시간을 보내기 위해 숫자를 세던 서인은 인기척을 느끼자 눈을 뜨고 벌떡 일어났다. 귀를 기울이자 몹시 화가 난 듯한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남자가 또 소금을 부으며 고문할까 봐 잔뜩 긴장해 방에서 무기가 될 만한 물건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젠장! 내가 보초만 서면 됐지. 처먹을 것도 챙겨줘야 해!?”

남자가 아니었다.

낯선 목소리에 서인이 베개를 들어 올렸다. 전혀 무기 노릇을 못 하겠지만, 없는 것보단 나았다. 지하실로 모습을 드러낸 발걸음의 주인은 남자가 아닌, 서인이 달아날 것을 대비하여 그가 심어둔 감시자들이었다.

“에이, 우, 우리한테 돌아오는 이, 이득이 많으니까 좀 참아.”

“평소에는 하, 하루 만에 처, 처리하시더니, 이번엔 뭔데 도대체!”

“총관리자님이 어, 어련히 알아서 하시겠지, 앞에선 한마디도 못 하면서 왜, 왜 그래?”

서인은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남자가 총관리자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부하까지 부리는 것은 미처 몰랐다. 수준들이 얼마나 처참하면 그런 바보 같은 남자를 믿고 따르나 싶어 절로 웃음이 났다.

“우, 웃어?”

안 그래도 심부름꾼 역할을 하는 게 불만이었던 사내는 서인이 웃음을 터뜨리자 빵과 우유를 신경질적으로 집어 던졌다.

“윽!”

우유갑에 머리를 얻어맞은 서인이 불같은 성질을 죽이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베개를 집어 던졌다. 솜으로 된 베개라 닿지 못하고 힘없이 떨어졌지만 말이다.

“저, 저 자식이…. 야, 총, 총관리자님 오시기 저, 전에 우리가 소, 손 좀 볼까?”

“어, 어? 허락 없이 그래도 되나?”

맞지 않았음에도 공격하려는 의도 자체에 화가 난 사내가 서인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는 납치당해 믿는 구석도 없는 주제에 고개를 쳐들고 실실댔다.

“어차피 죽일 거 하, 하루 이틀 빨리 죽는다고 뭐 달라지겠어? 거들면 보, 보상 좀 더 받을 수 있, 있을 거야.”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닌 거 같, 같은데, 잠시만…. 어, 어?”

아무래도 내키지 않는다고 몇 걸음 물러나 있던 사내는 서인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더니 경악하며 뒷걸음질 쳤다.

“어, 어?”

“왜? 갑자기.”

영문을 모르는 사내는 서인을 빨리 죽여버리겠다며 방수포를 찾기 시작했다. 반면 그를 말리던 또 다른 사내는 서인을 보며 벌벌 떨기 바빴다.

“도, 도대체 뭐야? 너 왜 그…”

“자, 잘못했습니다!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에요, 몰랐어요!”

겁에 질린 사내는 급기야 울먹이기까지 했다. 이쯤 되니 서인을 위협했던 사내도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자물쇠, 열쇠 위치.”

“모, 모르겠습니다. 저희는 여기 보초 서라고….”

“너, 내 지갑이랑 휴대전화 찾아와.”

자신을 알아보고 벌벌 떠는 사내들과 달리 서인은 그들이 어느 부서에서 일하는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연구소를 오가며 몇 번 마주했으리라 예상하고는 탈출 수단으로 이용했다.

“여, 여기 어차피 허가된 휴대전화 아니면 저, 전파가 안 통할 겁니다. 지, 지갑은 잘 모르겠….”

“그럼 네 거 내놔.”

“네, 네!”

사내의 휴대전화를 받아 든 서인은 시간을 먼저 확인했다. 오전 11시 38분, 남자가 언제 올지는 모르겠지만 시간이 부족하게 느껴졌다.

그는 휴대전화를 무음으로 바꾼 뒤 매트 깊숙이 숨겨두었다. 그리고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사내들의 등을 떠밀어 절단기를 가져오라고 말했다.

“절, 절단기 말입니까?”

“그래, 얼른!”

“악!”

서인은 남자가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느릿느릿 뜸을 들이는 사내들의 머리통을 내리치며 소리를 질렀다.

“야, 너희들. 총관리자 언제 오는지 알아?”

“모, 모르겠습니다. 지금 고, 고기 손질하러 가신 거 같은데….”

남자의 솜씨를 잘 모르긴 하지만, 고기 손질은 꽤 시간이 소요되는 작업이다. 서인은 어쩌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사내들을 들들 볶았다.

등 떠밀려 작업실에서 절단기를 찾아온 사내가 급히 움직였다.

“이, 이게 잘, 잘릴지 모르겠습니다.”

사내는 서인에게 절단기를 내밀고 멀찍이 떨어져 섰다. 그들은 죽은 고기의 살만 발라봤지 토막 내는 건 해본 적이 없다며 절단기를 작동시키지도 못했다.

“이딴 걸 나보고 하라고? 제정신인가? 뒤지고 싶지 않으면 얼른 해!”

서인은 스스로 칼질도 잘 하지 않는 제게 절단기를 떠넘기는 사내들의 뺨을 마구 후려치며 협박했다. 서로 눈치만 보고 있던 사내들은 어쩔 수 없이 절단기를 쥐고 족쇄를 매만졌다.

“가, 가만히 계셔야 합니다. 아니면 다칠….”

“알았으니까 입 다물고 해!”

사용법을 모르는 셋이 아무리 노력해봤자 굉음만 울릴 뿐 족쇄는 잘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고속절단기도 녹이 슬어있는 데다가 꽤 오래된 제품인 듯싶었다.

“오! 됩니다, 되고 있습니다!”

희망찬 사내의 말에 족쇄를 내려다본 서인은 이마를 짚고 한숨만 내쉬었다. 되고 있기는커녕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며 쇳가루만 이리저리 튀었다.

“쓱싹쓱싹….”

입으로 소리를 낸다고 해서 잘리는 것도 아닌데 사내는 팔을 움직이며 열심히 중얼거렸다. 서인은 짜증이 났지만, 빨리 이곳을 벗어나기 위해 꾹 참았다.

“쓱싹쓱싹….”

“거참, 조, 조용히 좀 해 봐!”

“나 아니야! 하, 한 번밖에 안 했어!”

족쇄만 바라보고 있던 서인은 사내 둘이 난데없이 싸우는 모습을 보고 천천히 심호흡했다. 뒷좌석 바닥에서 남자가 기어 올라왔을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짐을 느낀 서인은 사내들을 밀어내고 바닥에 이마를 처박고 제 뺨을 내리쳤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 피가 나는데!”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사내들은 영문 모를 서인의 자해에 당황했다. 서인도 이런 식으로 이용할 생각은 없었지만, 탈출하려던 것을 들키지 않으려거든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잔뜩 화가 난 채 지하실 문 앞에 서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런 남자를 향해 서인은 장난스레 웃으며 말했다.

“이야, 경쟁자가 벌써 둘이나 생겼네. 너 괜찮겠어?”

그는 남자가 오해할 수밖에 없는 말과 행동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서인은 이마에 흐르는 피를 닦아내며 남자의 반응을 살폈다. 우비에 무언가의 피를 묻히고 돌아온 그는 어느새 사내들의 뒤로 다가와 무서운 표정으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초, 총관리자님…. 그, 그게….”

“쓰, 쓱싹쓱싹 힘을 줘서 열심히 썰어야 썰리지. 그렇게 해서 썰리겠어?”

화가 난 남자는 쓱싹쓱싹 이라는 단어를 반복해서 중얼거리며 사내들의 머리채를 붙잡고 내던졌다. 부은 서인의 뺨과 피 흐르는 이마를 보고 나서는 아예 정신이 나간 것처럼 소리를 지르며 발악했다.

“내가 빵만 주고 나가라고 했잖아! 뭐한 거야, 대표님께 무슨 짓을 한 거야, 어딜 만졌어! 어떻게 했어! 왜 했어! 왜!”

다행히 손에 무기를 들고 있진 않았지만, 피를 뒤집어쓴 채로 소리를 지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죽여버릴 거야! 죽일 거야!”

남자가 벌벌 떨고 있는 사내의 손에서 절단기를 빼앗아 들었다. 서인은 탈출하려거든 아직 그들의 도움이 필요했기에 이마를 짚고 낮게 신음했다.

“윽….”

당장 절단기로 사내들을 죽일 것처럼 날뛰던 남자는 서인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라 급히 다가왔다. 서인은 최대한 고통스러운 척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대표님을 다치게 했어, 다치게 했어!”

그런데도 흥분한 남자의 분이 가라앉지 않자 서인은 어쩔 수 없이 그의 목덜미를 잡아끌고 신경질을 냈다.

“정말 나를 좋아한다면 치료해주는 게 우선인 거 아냐?”

“대, 대표님….”

“네가 날 두고 간 게 잘못이지. 일부러 놓고 갔지, 너?”

“아, 아니에요! 꺼져, 나가, 나가라고!”

서인이 탓하며 몰아붙이자 남자가 사내들을 내쫓고 그를 와락 껴안았다. 남자의 몸은 어디서 사람 하나 죽이고 온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피투성이였다. 피 묻은 손을 닦지도 않고 바로 껴안은 탓에 서인의 뺨과 머리카락에 피가 묻어났다.

서인은 남자를 밀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나 좀 씻고 싶어. 찝찝해.”

“…찝찝하다고요?!”

몸과 얼굴에 묻은 피가 찝찝하다는 소리였는데, 남자는 그들이 서인의 몸을 만지고 나쁜 짓을 했다고 착각했다. 때리기까지 했는데,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는 없는 것도 당연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남자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족쇄를 풀어주고 소리를 꽥꽥 지르며 물건을 때려 부쉈다.

“나 때문이야! 나 때문에 대표님이 더러워졌어!”

서인은 그가 자책에 정신이 팔린 사이 발치에 떨어진 열쇠를 발견했다. 씻고 나오면 다시 묶일 가능성이 크니 무슨 일이 있어도 챙겨둬야 했다.

조심스레 손을 뻗어 열쇠를 머리맡으로 밀어 넣었다. 남자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대표님, 도대체 무슨 일을 당한 거예요? 네? 흐윽, 으….”

서인은 혹시나 들킬까 봐 알고 다시금 그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남자가 다른 곳으로 시선을 두지 못하게 화제를 돌렸다.

“일단 좀 씻으면 안 돼?”

“돼, 돼요….”

남자는 가슴을 주무르는 손길을 피해 거추장스러운 쇠사슬을 구석에 밀어두고 서인을 안아 들었다. 남자에게 안긴 서인은 그의 옷자락에 튄 검은 물을 보며 인상을 썼다.

“아, 이건…. 별거 아니에요.”

서인의 시선을 느낀 남자는 검은 물이 튄 부분을 마구 문질렀다. 조금 부끄럽긴 해도 서인을 안은 게 너무나도 좋아서 목덜미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 ♢ ♦

“옷 벗길게요….”

욕실로 들어온 남자는 욕조에 물을 채우며 눈물을 글썽였다. 서인을 혼자 남겨두고 간 죄책감 탓에 마음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침울한 얼굴로 그를 욕조 안에 앉힌 남자는 발목에 남은 손자국을 보고는 비명을 질렀다.

“어? 이게, 이게 뭐야! 뭐야, 악! 아무 일도 없었다면서요!”

“없었어, 왜 그래?”

“대표님, 사랑 당했죠! 사랑 당한 거 맞죠!?”

남자는 문법에도 맞지 않는 이상한 말을 하더니 갑자기 서인의 머리를 물속으로 쑤셔 넣었다. 돌발 행동에 놀란 서인이 욕조를 부여잡고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쓰자 남자가 움직이지 못하게 무릎으로 허리를 짓누르며 흐느꼈다.

“더러워요, 더러워, 더러워! 오염됐을 거예요! 오염됐어! 씻어야 해요!”

정신놓고 그를 고문하던 남자는 바짝 힘이 들어간 목덜미와 손톱에 긁혀 피가 맺힌 손등, 보글보글 올라오는 물거품을 멍하니 바라보더니 얼굴을 붉히고 숨을 헐떡였다.

“하아, 하아…. 어, 어어?”

아랫도리가 당기고 몸이 간헐적으로 들썩였다. 불룩하게 튀어나온 제 허벅지 부근을 내려다본 남자가 소스라치게 놀라 자지러졌다. 그는 제 아랫도리를 가리기 위해 서인의 머리채를 손에 힘을 풀었다.

“컥, 켁! 하아, 하….”

숨통이 트인 서인이 괴롭게 기침하며 물을 토해냈다. 온몸에 힘이 빠진 그는 이리저리 휘청이다가 남자의 품에 쓰러지듯 기댔다.

“하…. 하아, 하아…. 욱, 우욱….”

물을 여러 번 토해내고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낸 서인은 제가 남자에게 안겨있음을 자각하고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의도치 않게 그의 허벅지를 짓누르고 일어나다가 손에 딱딱하고 뜨거운 것이 닿자 순간적으로 놀라 손을 뗐다.

“그게, 이게, 그….”

서인이 나쁜 일을 당했으리라 확신하고 화가 나 있었던 남자는 의도치 않은 발기에 다시 순해졌다. 숨을 고른 서인은 그가 발기했음을 알고 혐오스럽게 쳐다봤다.

“아니야, 아니야….”

성기가 터져 나갈 정도로 발기한 남자는 마치 죄를 지은 사람처럼 서럽게 흐느꼈다.

“너, 도대체 뭐가 문제야?”

서인은 엉엉 울고 있는 남자의 뺨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혀를 씹어 피를 흘려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남자는 맞은 얼굴을 몇 번 문지르더니 갑작스레 바지를 벗었다.

“대표님, 이거, 이거….”

남자의 속옷은 이미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였다. 트렁크 속옷 밑으로 성기가 반쯤 삐져나온 채로 발기해있었기 때문이다.

서인은 남자가 제 앞으로 다가오기 시작하자 치를 떨었다. 잠자리는 해줄 순 있지만, 삽입을 넘겨줄 생각은 없었다. 남자는 저를 혐오하는 서인의 눈빛을 외면하며 아랫도리를 내려다보았다.

“어쨌든 아무 일도 없었어. 나 씻을 테니까 나가.”

서인은 남자의 힘에 짓눌려 끔찍한 일이 벌어지기 전에 그를 내쫓으려 했다. 그러나 남자는 나갈 생각 없이 손바닥으로 제 성기를 꾹꾹 누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아니야, 아니야….”

그는 믿을 수 없는 듯 부정하다가 흥분한 몸을 진정하기 위해 샤워기를 들어 서인의 얼굴에 물을 뿌리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허공에 허리도 흔들었다.

“윽, 뭐 하는 거야!”

서인이 팔로 막고 물을 피하려 하면 할수록 남자는 더 흥분했다. 불쾌하게만 느끼던 서인은 평소와 달리 묘한 성적 흥분이 깔린 남자의 눈을 마주하고는 저도 모르게 흥분했다.

“하아, 하…. 씨발….”

욕조에 머리가 처박혔을 때는 정말로 죽을 것 같았지만, 지금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좋은 것도 같았다.

“대표님, 으, 흐으, 저, 저 이상해요….”

어리숙한 남자가 흥분해 허리를 흔드는 모습은 꽤 음란해 보였다. 서인은 순진한 그가 저로 인해 흥분했다는 사실에 조금씩 달아올랐다. 몸에 닿는 물줄기도 자극적으로 다가왔다.

“내가 정말 미친 것 같은데….”

서인은 빳빳하게 발기한 제 성기를 내려다보며 픽 웃었다. 가학적인 분위기에 흥분하는 성향이기는 했지만, 그는 납치당한 처지였고 남자는 피투성이였다.

서인은 이런 이상한 상황에서 흥분한 것을 믿고 싶지 않았다. 생리적인 반응이 아닐까 생각도 해봤지만, 앙앙거리는 남자의 모습에 달아오르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하아, 흐으, 죄, 죄송해요….”

남자는 서인이 미쳤다는 말을 끝으로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옷을 주섬주섬 주워입었다. 젖은 흰 티셔츠를 아래로 잡아당겨 성기를 가려보았지만, 불룩 튀어나와 더 도드라질 뿐이었다.

“흐, 앗!”

이상한 취급을 받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가리던 남자는 윗옷에 귀두가 스치자 손을 놓아버리고 신음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서인이 남자의 팬티 고무줄에 손가락을 걸고 끌어내렸다.

“대, 대표님, 흐으…. 뭐 하시는….”

“가만히 좀, 있어 봐.”

이유는 달랐지만, 둘은 흥분했다. 서인은 발정 난 짐승 같은 눈빛과는 달리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낑낑 앓는 모습에 흥분해 입술을 깨물었다. 물에 젖어 부푼 곱슬머리도 한몫했다,

“이거.”

“흣! 마, 만지지 마세요!”

서인이 검지로 성기를 툭툭 건드리며 귀두 끝을 문지르자 남자가 덜덜 떨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손가락으로 스치듯 만졌을 뿐인데 그는 침까지 흘렸다.

“내가 좀 도와줘?”

서인은 실실 웃으며 온 신경을 남자에게 집중했다. 아직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해 눈물을 글썽이며 허리를 움찔대던 남자는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몰라 커다란 눈만 끔뻑였다.

“무슨 소리 하는 건지 모르겠어?”

아무것도 모르는 남자에게도 서인의 모습은 자극적이었다. 물에 젖은 머리카락과 탄탄한 몸, 큰 가슴에 자꾸만 시선이 갔다.

서인은 전혀 이해하지 못한 남자를 바라보며 성기를 흔드는 손짓을 했다. 남자는 그런데도 허벅지를 꾹꾹 짓누르기만 할 뿐 승낙도 거절도 하지 않았다.

“쌀 수 있게 해준다고.”

“뭐, 뭐를 싸요? 저 안 마려워요!”

남자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일어나 무릎에 걸린 속옷을 다시 끌어 올리려 하자 서인이 성기를 움켜쥐고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남자의 성기는 크고 길었다. 찾아보기 힘든 연한 분홍색에 털이 하나도 나지 않은 것이 정성껏 빚어놓은 것처럼 예뻤다.

“흐…. 아, 아! 놔주세요, 흐으, 으, 응….”

“자, 네 손으로 잡아봐. 그럼 놔줄게.”

서인이 힘도 주지 않았는데 자지러지는 남자에게 자위 방법을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남자가 떨리는 손으로 성기를 감싸 쥐자 서인이 약속한 대로 손을 놔주었다.

“자, 부드럽게 감싸 쥐고 위아래로 쓸어봐.”

“흐으, 응, 아아….”

서인은 고분고분 주저앉아 다리를 벌리고 저를 올려다보는 남자를 쓰다듬었다. 그는 입을 벌리고 어설프게 손을 움직였다. 서인이 하라는 대로 열심히 따라 하던 남자의 입에서 신음이 샜다. 그는 계속해서 소리를 내질렀다.

“흐, 으응, 응, 이상해, 흐…. 이, 하아, 아….”

서인은 어설픈 손길에도 좋아 죽으려고 하는 모습을 두 눈에 담으며 남자에게 손짓했다. 아프고 이상하다고 울던 그는 서인을 따라 욕조 안으로 발을 들였다.

“왜, 왜 부르셨…. 아, 아!”

서인은 남자가 욕조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그의 빳빳한 성기를 붙잡고 거칠게 문질렀다. 번들번들한 성기가 서인에 손에 갇혀 움직이자 남자가 다시금 허리를 흔들었다.

“자, 봐. 이렇게 자지를 위아래로 쓸고 흔들 듯이.”

“흐…. 우, 응….”

서인이 반대편에 앉은 그의 성기를 부여잡고 기둥을 한 번 쓸어올렸다. 흥분한 남자의 것은 뜨거웠고 맥이 쿵쿵 뛰었다. 그는 서인의 손에 꽉 차다 못해 삐져나온 제 성기를 보며 얼굴을 붉혔다.

“이거, 이, 이상해요, 이상한…. 아! 흐….”

“이상할 거 없어.”

서인이 본격적으로 손에 힘을 주고 만지는 순간 남자의 몸이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정신없이 튀어 올랐다. 물이 사방팔방 튀고 샴푸 통이 나뒹굴었다.

“아, 안 돼, 싫어! 싫어, 아, 아아! 앙!”

서인이 들은 척도 안 하고 엄지로 귀두를 문지르자 남자가 덩치에도 안 맞는 교성을 지르며 사정했다.

“안 돼, 안 돼, 이상해, 이상한 거 나와, 아, 아아!”

당황한 그는 서인을 있는 힘껏 밀어내고 제 성기를 움켜쥐었다. 자위라곤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기에 남자의 정액은 양이 많고 진했다.

“흐윽, 싫어, 싫어….”

성기에 손톱도 세워보고 손가락으로 구멍을 틀어막아도 사정은 멈추지 않았다. 몽정만 해봤지 자위는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더 그랬다. 남자는 멈추지 않고 줄줄 새는 정액을 보고는 벌벌 떨며 서인을 껴안았다.

“안 할래, 안 쌀래, 흐으, 대표님, 대표님….”

막아보겠다고 난리를 피우는 탓에 서인의 얼굴에도 정액이 튀고 욕실이 엉망이 되었다.

“와, 정액 진한 거 봐. 이렇게 진한 건 또 처음 보네.”

“으읏….”

“너, 내 생각하면서 딸 안 쳤어?”

서인은 안 그래도 몸이 예민한 남자의 귀두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물었다. 남자는 처음 느껴보는 강렬한 자극에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서인은 눈을 까뒤집고 벌벌 떠는 그를 뒤로하고 혼자 몸을 씻어냈다.

♦ ♢ ♦

“좋아하지 않으면 만지지 말라더니 질질 싸고 난리가 났다.”

남자는 서인이 머리를 감고 물기를 닦고 나서야 어느 정도 정신을 차렸다.

서인의 성희롱을 듣고도 반박할 힘없이 늘어져 있던 그는 제 흔적으로 더럽힌 욕조를 박박 닦으며 침묵했다. 성적으로 지식이 없긴 해도 부끄러운 행동이라는 자각은 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발정 난 채로 어떻게 참았냐?”

조용히 성희롱을 듣고만 있던 남자가 발정이 났다는 말에 고개를 번쩍 들고 서인을 흘겼다. 아무리 제가 실수를 했어도 그렇지 발정이라는 말은 지나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발, 발정은 짐승만 하는 거예요!”

“조금 전에 질질 싸는 거 보니까 딱히 그런 것 같지만은 않던데?”

남자는 앙칼지게 따지고 들었다가 본전도 못 찾고 떨어져 나갔다. 오줌 누듯 멈추지 못하고 줄줄 싼 게 사실이었기에 할 말이 없었다. 분명 타인이 몸을 만지면 불쾌했는데, 서인이 만질 때는 거부감은커녕 기분이 좋기만 했다.

“…왜 그랬지?”

남자는 그런 낯선 감정에 혼란을 겪었다. 남이 제 성기를 만졌는데 기분이 좋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이상해. 징그러워….”

그는 욕조를 청소하다가 축 늘어진 제 성기를 내려다보고 인상을 썼다. 커다랗고 징그러운 뱀 같아서 씻을 때도 눈을 감고 씻었는데, 자연스레 잘도 만지는 서인이 신기했다.

“나도 잘해야 해. 대표님이 만족할 수 있게. 그런데 나는 해본 적이 없는데….”

남자는 서인이 이런 부끄러운 행위에 익숙한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그가 만졌을 또 다른 사람들은 질투했다. 짜증이 난 그는 옆에 놓인 샴푸 통을 성기 흔들듯 어설프게 흔들다가 서인이 밖으로 나갔음을 알고 황급히 따라나섰다.

“대표님!”

“왜.”

부름에 돌아본 서인을 멍하니 바라보던 남자는 귀찮다는 듯이 제 손을 뿌리치는 모습에 입술만 달싹였다. 성기를 만지는 것도 잘하고 싶고 잘 보이고 싶은데 내세울 게 없어 속상했다.

“저, 잘할 수 있어요! 대표님이 만족하실 수 있게 노력할게요!”

남자는 서인의 이마에 약을 바르고 밴드를 붙여주며 말했다. 서인보다 한참은 부족하고 가진 게 없지만, 그에게만큼은 멋있는 사람으로 인식되고 싶었다.

멋있는 모습을 보여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남자는 가장 잘하는 칼질을 보여주기로 했다. 고기를 자주 써니 칼질만큼은 자신 있었다.

“저 일 하러 갈 건데요, 대표님!”

남자는 능숙하게 칼질하고 뼈나 잔해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처리하면 아주 멋있어 보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너 일하러 가는데 나는 왜 끌고 가.”

“보여드릴 게 있어요!”

그러나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 서인은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당장 이곳을 탈출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그의 쓸데없는 행동에 일정이 밀리자 짜증이 났다. 서인은 신이 난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상처가 될 만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

“도대체 이런 놈이 총관리자 자리는 도대체 어떻게 꿰찬 거야? 홍주원한테 몸이라도 대줬나.”

“…네?”

서인은 남자의 굳어진 표정을 봐놓고서도 뭐가 문제냐는 듯 눈썹을 까딱이며 사과하지 않았다. 남자는 몸을 대줬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말의 뉘앙스로 좋은 뜻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

“…저, 저도 노력해서 얻은 자리예요.”

“암, 그렇겠지.”

남자가 기분 상한 티를 내도 서인은 되려 비꼬며 비웃었다. 억울한 표정을 짓고 서 있던 남자는 아무래도 안 되겠는지 결심한 얼굴로 서인에게 작업복을 내밀었다.

“이걸로 갈아입으세요. 일해야 하니까.”

“내가 일을 왜 해?”

서인은 뭣도 아닌 남자가 감히 제게 일을 열이 받아 시키자 작업복을 내던졌다. 대신 자위도 해주고 오냐오냐해줬더니 주제도 모르고 기어오르는 그가 괘씸했다.

“따라와 주세요.”

남자는 서인이 화를 내거나 말거나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자존심이 꽤 상한 모양이었다. 그는 서인에게 마스크와 장갑을 건네주고 팔을 잡아끌었다.

♦ ♢ ♦

차에서 끌려 나온 서인은 남자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화를 냈다. 그가 일하러 간 사이 탈출하려던 계획이 무산됐기 때문이다. 차를 타고 왔기에 어떻게 돌아가야 하는지 몰라 더더욱 짜증이 났다.

“도대체 뭐 하는 거야!”

차가 멈춰 선 곳은 커다랗고 깔끔한 공장이었다. 연구소만큼은 아니었지만, 꽤 큰 규모였다. 남자는 기대에 찬 얼굴로 카드키로 잠금을 풀고 몇 가지 경고했다.

“마스크 벗지 마세요, 소리 지르지도 마시고요. 아, 토하시면 절대 안 돼요!”

“하….”

서인은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하기에 이렇게 난린가 싶었다. 끽해야 고기를 손질하고 사체들을 폐기하는 것이 전부인 주제에 총관리자 직에 엄청난 자부심이 있는 것처럼 구는 그가 우스웠다.

못 볼 거 다 보고 살아온 서인은 고작 사체 따위에 당부까지 하는 남자를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아니, 정말! 제가 하는 일은 쉬운 게 아니라고요! 어, 어려워요! 알았죠?!”

서인은 제가 인정하기 전까지는 들어갈 생각이 없어 보이는 남자의 등을 밀며 건물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건물 내부는 온통 정육점에 온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붉은 조명이 깔려있었다.

“되게 넓네.”

“그럼요! 여기서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요!”

서인은 홍주원이 멍청한 남자에게 왜 이렇게 큰 건물을 준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심지어 기계도 신식이고 청결했다. 꽤 값이 나가 보이는 물건들도 많이 보였다.

“그래서 무슨 일 하는데? 마스크 좀 벗는다.”

연구소에서 직접 제작한 방독면 형식의 작업용 마스크는 생각보다 무겁고 숨이 찼다. 얼마나 더럽고 냄새나는 곳을 가길래 이런 마스크를 주나 걱정했는데, 내부는 굳이 쓸 필요가 없을 정도로 청결했다.

“벗으면 안 된다니까요! 대표님, 정말 후회하실 거예요! 옷에도 냄새 배니까 갈아입으라고 한 건데.”

“됐어.”

서인이 마스크를 벗어 아무렇게나 던져놓자 남자가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냄새라고는 미미한 소독약 냄새뿐이었다. 서인은 그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마음대로 물건을 건드리며 돌아다녔다.

마스크를 쓰라고 난리 치던 남자는 서인이 말을 듣지 않자 어쩔 수 없이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그의 뒤를 따랐다.

“마스크 써야 해요. 여기는 괜찮지만, 작업실로 들어가면 냄새가 장난 아닐 거예요. 물론 저는 강하니까 괜찮지만….”

작업실 문 앞에 선 남자는 다시 한번 마스크를 쓰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의 말대로 문 너머에서 비릿한 냄새가 풍기긴 했지만, 못 버틸 정도는 아니었다.

“정말 쓰시는 게 좋을 거예요. 이거 방독면? 이랑 비슷해서 냄새를….”

“그래, 계속 지랄해.”

서인은 고작 고기 손질에 온갖 폼을 다 잡는 남자를 비웃어주기 위해 비린내가 나는 곳으로 발을 들였다. 남자는 함께 따라 들어가 문을 잠그고 기계 전원을 켜며 분주히 움직였다.

“윽….”

서인은 점점 강해지는 악취에 인상을 찌푸린 채로 작업실 안을 둘러보았다.

작업실은 건물 로비와 달리 짙은 녹색의 조명이 안을 밝혔고 몸집이 큰 커다란 기계 안에는 붉은색의 액체가 가득 차 있었다. 남자가 기계를 작동시키자 거름망이 내려오고 그 밑으로 불순물이 빠져나갔다.

“보이세요? 저렇게 걸러내고 난 뒤에 알코올을 넣어요.”

“이게 뭔데?”

“수, 술, 포도주요….”

남자는 서인이 질문할 줄은 몰랐는지 말을 더듬었다. 혹시나 더 물어볼까 봐 겁이 난 그는 황급히 다른 기계를 작동시키고 알코올과 붉은 액체를 섞었다. 서인은 붉은색에 인상을 살짝 찌푸리고는 그의 행동을 관찰했다.

“이 기계는 아무나 못 다루는 거예요!”

남자는 말을 더듬고 불안해하면서도 열심히 어필은 했다.

서인은 그가 포도주라고 주장하는 술을 가까이에서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냄새를 맡아보았다. 톡 쏘는 자극적인 향이 났다.

남자는 냄새를 맡고도 인상을 쓰지 않는 서인을 흥미롭게 바라보다가 한 번 마셔보지 않겠냐며 술병을 내밀었다.

“드셔보실래요?”

“대낮부터 무슨 술.”

“색이 정말 예쁘죠?”

대욱이 봤다면 기절하고도 남았을 장면이었다. 남자는 서인에게 새빨간 술을 내미는 것도 모자라 색이 예쁘지 않냐며 공감을 바랐다.

“이게 제일 잘 만들어졌는데, 드셔보세요. 네?”

“싫다니까. 아침에 술 안 마셔.”

“제가 아는 사람들은 그런 거 상관없이 잘 마시던데요? 뭐…. 알았어요.”

서인은 차마 붉은색 음식을 싫어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편식하는 어린아이처럼 보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서인이 티 나지 않게 헛구역질하며 등을 돌리자 남자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요…. 일반인이 마시기엔 향이 좀 강하긴 하죠.”

“일반인?”

서인은 은근히 저를 무시하는 듯한 태도에 기분이 상했다. 가게에 유통 명령을 내린 장본인인 그가 이 술을 마시지 못할 리가 없는데 남자는 일반인을 운운하며 술을 다른 곳에 가져다 두었다.

“아까 네가 준 차도 이거 아니야?”

“아, 그거요? 잠시만요.”

붉진 않았지만, 연한 분홍빛의 차를 떠올린 서인은 남자에게 먼저 다가가 차 이야기를 꺼냈다.

“이거죠? 비슷한 술이기는 한데, 같은 수준은 아니에요. 색도 거의 없어서 안 예쁘잖아요. 입문자용으로 좋기는 해요.”

“네가 매력을 모르는 거겠지.”

“그러는 대표님도 붉은 포도주의 매력을 모르시잖아요.”

남자는 한 마디도 지지 않았다. 제 일이니 술에 대해선 서인보다는 몇 배는 더 잘 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럼 대신 이거 마실게. 줘.”

“아침이라서 안 드신다면서요?”

“토 달지 말라고 달라면 줘.”

서인은 슬슬 짜증이 났다. 입문자니, 일반인이니 계속 무시하는 말로 들렸기 때문이다. 혼자 자존심이 상한 그가 새빨간 빛의 술을 곁눈질했다. 피처럼 붉어 차마 마셔보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남자는 입문자가 마신다는 술에 희석액을 타고 열심히 흔들었다. 그러자 얼마 안 가 술의 물처럼 보일 정도로 연해졌다.

“드세요.”

“뭐?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장난해?”

“네에? 이, 이것도 좀 진한 편이라서 희석한 건데요? 잘 못 드시니까….”

남자는 서인이 마시기 편하게 배려했을 뿐인데, 그가 화를 내자 당황했다. 마실 자신이 없어 꾹 참고 있던 서인은 남자에게서 붉은 술을 빼앗아 들었다.

“왜 그러세요? 못 마신다면서요?”

“못 마시는 게 아니라 안 마신 거라고 했지? 그건 버려. 이거 마실 거니까.”

“아침이니까 그냥 희석한 거 드세요.”

서인이 먼저 마시겠다고 나서자 남자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술을 빼앗으려 했다. 걱정하는 것뿐인데, 자존심 강한 서인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기세 좋게 빼앗아 든 그는 막상 먹으려니 손이 벌벌 떨려서 입에 가져다 대지도 못했다.

“억지로 먹는 건 별로 보고 싶지 않아요.”

심혈을 기울여 만든 술인데, 서인이 먹기 싫은 티를 내자 남자 역시도 기분이 상했다. 억지로 마시라고 강요한 적도 없는데, 나쁜 사람이 된 것 같기도 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됐어요.”

남자는 제대로 토라졌다. 애도 아니고 잘 삐치는 그의 뒤를 따라간 서인은 다 네 잘못이라며 남자를 나무라기 시작했다.

“냄새가 고약하잖아. 저런 술을 어떻게 팔아먹을 생각을 해?”

“대표님께서 잘 모르시는 거겠죠!”

“누가 봐도 네가 잘못 만든 건데, 왜 삐치고 지랄이야.”

“아, 안 삐쳤는데요?”

둘은 의미 없는 기 싸움을 해댔다. 남자는 뒤통수만 봐도 토라진 티가 나는데, 아니라고 자존심을 끝까지 자존심을 세웠다. 일에 집중하는 척 서인을 보지 않고 있던 그는 어떻게 해야 이 술이 대단한 것을 알릴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가격을 강조하며 떵떵댔다.

“정말 삐친 거 아니에요. 그리고 제가 잘못 만든 것도 아니에요! 1ℓ에 350만 원에 팔리는걸요?”

“껌값이네.”

서인은 얼마 하지도 않는 술이 비싸다고 으스대는 남자를 비웃었다. 돈 같지도 않은 돈이었다. 남자에게는 세상을 바꿀 수 있을 만큼 큰돈으로 느껴지겠지만 서인에게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네?”

“껌값이라고.”

서인은 기분 나쁘게 하려던 의도가 아니었는데 남자는 자신을 바보 취급한다고 생각했다. 화가 난 그는 대답도 하지 않고 반대쪽 작업대로 가버렸다.

“뭐야.”

남자가 삐치든 말든 서인은 제작 연도별로 정리된 술을 구경하기 바빴다. 그중 색이 가장 진한 술을 꺼내어 남자 몰래 냄새를 맡았다. 강한 비린내가 풍겼다.

“그건 더더욱 못 마실 거예요! 어, 어… 숙성이 덜 된 술일수록 향이 강해요!”

“그래?”

“그래요! 괜히 잘못 먹고 아프시면 어떡해요! 대표님은 연약하니까 안 돼요.”

굳이 옮기지 않아도 될 무거운 물건을 번쩍 들고 서인의 주위를 서성이던 남자는 숙성이 덜 된 술을 들고 있는 그에게서 병을 빼앗아 들었다. 판매해야 할 귀중한 상품이었기 때문이다.

“드시라고 할 때는 안 드셨으면서, 왜 지금 와서 마시지도 못하는 걸 들고 계세요? 어차피 맛도 없다고 생각하실 거 아니에요! 나빠요!”

“…뭐?”

서인의 막말과 제게 관심을 주지 않는 것에 토라진 남자는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다. 이쯤에서 멈춰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았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서러워 입이 마음대로 떠들어댔다.

“리터 당 350만 원이라고요! 저한테 이게 얼마나 크, 큰돈인지 아세요? 대, 대표님이 음미하지 못하는 걸 왜 제 타, 탓을 하세요!”

“그러는 넌.”

“네, 네?”

“너는 음미할 줄 알아?”

서인은 남자를 때리고 사과하라고 할 수 있었지만, 보란 듯이 자존심을 건드리고 무시하는 그에게 수치를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남자는 얻어맞으리라 생각했는데, 질문이 돌아오자 어리둥절했다.

“저, 저는 안 먹어봤어요. 수, 술 안 좋아해요.”

“에이, 안 좋아하는 게 아니라 마실 줄 모르는 거겠지. 성인이 되어서는 술도 못 해? 아가네, 아가.”

궁지에 몰려 말을 더듬던 남자는 저를 아가라고 말하는 서인을 보며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비밀로 해야 하는 장소에 서인을 데리고 온 이유는 그에게 멋져 보이기 위함이었는데, 아가라는 말을 듣자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났다.

“제작하는 놈이 맛을 모르니 술이 이따위지.”

“마, 마실 수 있거든요!”

서인은 술이 맛없다고 거짓말하며 남자를 공격했다. 마셔본 적도 없는 애새끼가 만드는 술은 기대도 안 했다는 말에 그가 발끈하며 술잔을 찾기 시작했다.

“그래? 그럼 어디 한 번 마셔봐. 몇 년 산으로 줄까, 응?”

남자는 확실히 도발에 잘 넘어가고 순진하긴 했다. 그는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잔을 찾았다. 하지만, 평소에 제가 손질한 고기나 술은 입에도 대지 않았기에 술잔이 있을 리 없었다.

“여기에 부어주세요!”

술잔은 없지만, 자존심은 챙기고 싶었던 남자는 장갑을 벗어 던지고 두 손을 모아 서인에게 내밀었다. 손바닥에다 술을 따라 달라는 소리였다.

“이게 진짜 미쳤나.”

“네?”

“너, 지금 나한테 술 따르라고 한 거야?”

무시하는 것도 모자라 손바닥에 따라보라니 서인은 숨이 거칠어질 정도로 격분했다. 남자는 그가 저를 죽일 듯 노려보자 자존심이고 뭐고 무릎부터 꿇고 봤다.

“자, 잘못했어요….”

“뭘 잘못했는데?”

“…대, 대표님 무시해서….”

무섭기도 했지만, 서인이 저를 미워하는 게 걱정돼서 비는 게 더 컸다. 그는 울먹이며 두 손을 싹싹 문질렀다.

“야, 가만히 있어.”

화가 났던 서인은 제 발치에 무릎을 꿇고 앉아 울먹이는 남자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생각이 바뀌었다. 두들겨 패기보다는 어쩐지 괴롭혀서 엉엉 울리고 싶었다.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이유는 모르겠다만, 무릎을 꿇고 비굴하게 비는 모습에 몸이 달았다. 분명 울며 비는 사람을 다루는 건 귀찮기만 했는데 지금은 뭔가 달랐다.

“흐윽, 흐….”

이상한 생각에 잠겨 있던 서인은 여전히 손을 내밀고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남자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는 납치범씩이나 돼서 서인에게 정신없이 휘둘렸다.

서럽게 흐느끼며 울던 그는 서인이 저를 때리지 않고 쓰다듬자 아리송한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움직이지 마.”

서인은 그릇처럼 둥글게 모인 남자의 손으로 병을 기울였다. 남자는 손바닥에 차가운 술이 담기기 시작하자 흘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피부가 워낙 하얘서 그런지 손바닥에 담긴 술이 더 붉어 보였다.

“마셔.”

남자는 꽤 오래 고민했다. 제 손으로 만든 상품은 입에 대지 않는 고집이 있었기 때문이다. 손 틈새로 술이 조금씩 흐르기 시작하자 서인이 그의 턱을 세게 움켜쥐었다.

“으읏, 아파요!”

어찌나 힘을 주는지 턱이 다 얼얼했다. 고통에 몸부림을 치자 서인이 발로 무릎을 짓누르며 움직임을 차단했다.

“못 써. 술잔이 움직이면 안 되지.”

서인은 남자를 제대로 꿇어 앉히고 자그마한 의자를 끌고 와 다리를 꼬고 앉았다. 남자는 차라리 꾹 참고 한 대 맞을까 고민할 정도로 술을 마시고 싶지 않았다.

“마시라니까? 허풍만 떨 줄 아는 애새끼라서 못하나?”

멋있어 보이기 위해 허세를 부리고 강한 척했던 남자는 손바닥에 고인 술 냄새를 한번 맡아보더니 눈물을 글썽였다.

“못 하겠으면 형이 좀 도와줘?”

“혀, 형이요?”

서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올려다보는 얼굴에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며 그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읏!”

그러자 남자가 고통에 신음하며 낑낑댔다. 꿇어앉은 그의 모습에 흥분한 서인은 이를 악물었다.

“왜, 못 마시겠어?”

“…모, 모르겠어요.”

“모르긴 뭘 몰라.”

남자가 머리채를 붙잡은 손을 떼어내려 하자 술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붉은색을 단 한 번도 긍정적으로 생각해 본 적 없는 서인인데, 이상하게 남자의 손에 담긴 술이 먹음직스럽게 느껴졌다. 그래도 거부감이 아예 사라진 건 아니었다.

“흘리면 안 돼. 벌써 반밖에 안 남았잖아, 응?”

“….”

반쯤 고인 술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서인은 눈을 질끈 감고 남자의 손바닥에 고인 술을 한 번 핥아 올렸다. 향이 고약하다고 거짓말한 것이 미안할 정도로 맛이 좋았다.

“어, 어어어…. 대, 대표님?”

“술잔이면 술잔답게 가만히 있어야지.”

조심스레 눈을 뜬 서인이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혀를 움직였다. 남자는 혀가 손에 닿을 때마다 엉덩이를 들썩이며 눈꺼풀을 경련했다. 손금을 익히기라도 하듯 얼굴을 처박고 깊게 빨아올리자 그가 야릇한 신음을 흘렸다.

“으응….”

두부처럼 말캉하며 따뜻한 혀가 손바닥을 훑고 손가락 마디마디를 핥아 올렸을 때는 하반신을 들썩이며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씨근덕거리는 숨소리와 들썩이는 가슴도 꽤 볼만했다.

“잠시만요, 하, 아, 으….”

처음인 게 많은 남자는 사소한 자극에도 허리를 떨어가며 크게 반응했다. 이러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반응이 생각보다 더 신선해서 서인은 그의 손가락을 입속에 집어넣고 구강성교를 하듯 움직였다.

“흐으, 으….”

일부러 소리를 내며 받아마시자 남자가 즐길 건 다 즐긴 주제에 서인의 가슴을 있는 힘껏 밀어냈다.

“이제, 이제 됐어요, 됐어요! 하지 마세요! 못 마셔요! 수, 술 못 마신다고요!”

서인은 만지면 만지는 대로 반응하고 제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남자에게 흥미를 느꼈다. 그는 여전히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남자에게 난데없이 가슴을 모아보라고 명령했다.

“가, 가슴은 왜….”

“하라는 대로 해.”

남자는 서인의 타액으로 범벅된 손으로 가슴을 모았다. 어찌나 큰지 사이에 뭘 집어넣고 흔들어도 될 만큼 깊었다. 서인은 진열된 술을 마음대로 꺼내 들고 성큼성큼 다가갔다.

“뭐, 뭐 하시는 거예요?”

풍만한 가슴을 짓눌러 모은 남자는 서인이 골 사이로 술을 흘려 넣기 시작하자 입을 크게 벌리고 경악했다. 서인이 일어나지 못하게 무릎을 짓밟고 있는 터라 제 가슴골 사이로 술이 뚝뚝 흐르는 모습을 보고만 있어야 했다.

“어디서 술을 따르라 말라야?”

서인은 가슴 사이로 술을 부어버린 것도 모자라 손가락에 튄 것을 남자의 볼에 쿡 찍어 그어 내리기도 했다. 놀란 남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한동안 멍하니 앉아있었다.

“너야 그런 취급 많이 당해봤을지 몰라도 나는 아니야. 나를 깔볼 사람이 있을 것 같아?”

남자는 억울했다. 무슨 취급을 말하는지도 모르겠고 술을 마실 잔이 없어 손을 내밀었을 뿐인데 왜 이런 일을 당한 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런 취급이라뇨?”

“싸구려 창부 취급.”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남자는 싸구려 취급이라는 말에 고함을 내지르며 술병을 집어 던졌다.

서인은 제 옆을 지나 바닥으로 나뒹군 술병을 바라보며 남자의 뺨을 후려쳤다. 싸구려 취급당한 것은 제 쪽인데 왜 본인이 화를 내고 자빠졌는지 몰랐다. 서인은 1ℓ에 350이나 받는다는 술을 집어 던진 남자를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350, 너한텐 큰돈 아닌가?”

“내가 언제 대표님을 싸, 싸구려 취급했어요? 대표님이 사는 세상에서는 S급이 싸구려예요? 그럼 도대체 뭐라고 불러줘야 해요? 창부는 또 뭔데요! 왜 어려운 말만 해요 왜, 왜, 왜!”

남자는 이마에 핏대까지 세워가며 화를 냈다. 서인은 제 가슴에 술을 부었다는 사실은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싸구려라는 말에 꽂힌 남자를 벌레 보듯 바라보며 혀를 찼다.

“이해할 수가 없어요. 내, 내가 대표님을 얼마나 조, 좋아하는데! 먹여주고 재워줬는데 어떻게 그래요? 왜 나, 나를 배신하죠?”

제정신이 아닌 놈인 건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더했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희롱당한 것에 대해 분노해야 하는데, 남자는 등급을 거론하며 열을 냈다.

“됐고, 저거 깬 건 네 짓이야. 나한테 물어달라고 하지 마라?”

서인에게 350은 껌값이다. 하지만 남자가 좌절하는 얼굴을 보고 싶어 일부러 갚아줄 생각이 없다고 못을 박았다.

그러나 남자는 그런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얼굴로 깨진 유리 조각을 집어 들었다. 곧 울며 매달리겠거니 생각한 서인은 그가 유리 조각을 들고 다가오자 픽 웃었다.

“난 350보다 비싼데, 감당되겠어?”

서인은 그가 날뛰어 제게 공격을 할까 봐 걱정했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도발했다. 제정신 아닌 상대의 비위를 맞춰 탈출하는 게 가장 현명한 방법임을 알지만,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어, 어? 야! 뭐 하는 거야!”

저를 공격할 줄 알았던 서인은 유리 조각으로 손목을 거칠게 그어 내리는 남자를 막아섰다.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자해를 하는 모습이 죽여버리겠다고 날뛰는 것보다 더 소름 끼쳤다.

서인은 강제로 유리 조각을 빼앗고 그의 어깨를 쥐고 흔들었다.

“네? 왜요?”

“왜냐니, 너 제정신이야? 이리 나와!”

서인은 남자가 다치거나 말거나 신경 쓸 처지가 아니었는데, 제 일처럼 화내며 그의 손목을 치료하려 했다. 난도질당한 상처를 보자 심장이 쿵쿵 뛰고 온몸에 피가 식었다.

남자는 바삐 움직이는 서인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구급상자 없어?”

“저기 있는데, 왜요?”

“왜긴 왜야, 말이라고 해?!”

서인은 마치 동생을 혼내듯이 남자를 다그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남자는 피가 줄줄 흐르는 손목을 내밀고 상처를 치료받는 동안 눈만 깜빡였다.

“이게 무슨 미친 짓이야. 왜 이따위로 지랄해?”

“대표님께서 왜, 왜 이러는지 몰라서 당황스러워요….”

“뭐?”

“이렇게 하는 건 당연한 거잖아요.”

남자는 반대쪽 손목을 걷어 보여주며 어깨를 으쓱댔다. 서인은 꽤 오래전에 생긴 상처와 화상 자국을 발견하고는 남자의 자해가 습관성임을 눈치챘다.

“당연하다고.”

“네.”

“넌 지금 네 손목이 예쁘다고 생각해? 이게 정상적이야?”

“네.”

서인은 결코 남자가 걱정되는 것은 아니었다. 저를 납치해서 붙잡아 둔 놈이 뭐가 예쁘다고 걱정을 하겠는가. 그렇지만 이상하게 가득한 상처를 보니 가슴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렇게 하는 건 당연한 거예요. 적어도 난 그렇게 해야 한다고 배워왔어요.”

“누가 그랬는데?”

“살아온 화, 환경이 다른 거겠죠. 저는 이런 거 어려워요! 왜 자꾸 그래요!”

남자는 걱정스레 손목을 내려다보는 서인의 손길을 뿌리쳤다. 피 묻은 손을 신경질적으로 닦아낸 서인은 왜 이렇게 화가 나는지 몰라 당혹스러웠다.

“일할게요.”

남자는 서인을 뒤로하고 또 다른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에 잠시 넋을 놓고 서 있던 서인은 그가 또 자해하는 미친 짓을 할까 봐 하는 수 없이 뒤따랐다.

♦ ♢ ♦

“우, 욱…!”

남자를 따라 들어온 서인은 문을 열자마자 풍기는 악취에 고개를 숙이고 주저앉았다. 마스크를 쓰라는 게 무슨 말이었는지 충분히 이해할 만한 악취였다. 간장을 달이는 장소에 된장을 퍼부은 듯한 끔찍한 냄새였다.

“그러니까 마스크 쓰라고 했잖아요….”

어찌나 심한지 절로 눈물이 고였다. 남자는 한숨을 쉬며 서인에게 마스크를 씌워주고 은근슬쩍 손을 만지작거렸다.

“이제 좀 덜 나죠?”

“이게 무슨 개 씨발 쓰레기 같은 냄새야?”

“그러니까 아무나 못 하는 일이라고 했잖아요.”

남자는 이때다 싶어 떵떵대며 깔끔하게 손질된 고깃덩이에 도장을 찍고 열심히 포장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인은 마스크를 써도 쉽게 가시지 않는 악취의 원인을 찾아 나섰다. 도대체 뭐가 잘못됐기에 이런 냄새가 나는지 궁금해서 어떻게든 찾아내고 싶었다.

“고기에서 나는 냄새 아니에요.”

“알아, 그럼 어딘데.”

“저기 보세요.”

남자는 작업대와 멀리 떨어진 구석에 놓인 분쇄기를 가리켰다. 마스크를 한 겹 더 뒤집어쓰고 분쇄기로 다가간 서인은 고기였던 것들의 잔해가 갈려 나가는 모습을 보며 구역질했다. 사체를 보는 것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지만, 직접 보니 생각보다 더 역겨웠다.

“거봐요. 더럽죠, 무섭죠, 역겹죠?”

남자는 일부러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고 냄새를 맡으며 자신은 아무렇지 않다는 것을 강조했다.

서인 또한 육류 사업을 하는 사람이라 공장에 자주 드나들었지만, 이렇게 자세히 본 것은 처음이었다. 칸막이가 있어 상품에는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아도 냄새는 너무나도 끔찍했다.

“분쇄기를 다른 곳에 옮기면 안 되나? 악취가 심하잖아.”

“저, 저는 하라는 대로 해야 해요. 그런 걸 어떻게 말해요?”

서인은 그를 갈아 돈 버는 주제에 온갖 불만을 표했다. 남자는 하라는 대로 해야 한다며 따지라는 말에 기겁했다.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일을 해? 다른 곳으로 바꾼다고 해. 내가 말 해줘?”

“싫어요, 하지 마세요! 그러다가 사, 사랑 당하면 어떡해요!?”

“무슨 소리인지 원….”

서인은 아까부터 사랑 당한다는 이상한 소리를 해대는 남자를 뒤로하고 최대한 냄새가 나지 않는 쪽에 섰다.

“이 고기가 내가 먹었던 거야?”

“네.”

그는 규모가 큰 냉동실에 가득 찬 고기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냉동된 것을 보니 더더욱 흉흉하고 특이해 보였다.

“이거 짐승 맞아?”

“짐승이죠, 그럼. 사람이겠어요?”

살벌한 농담이었다. 서인은 어차피 맛있게 먹었으니 캐묻지 않고 작업장 구석에 놓인 소파에 드러누웠다.

“언제까지 해야 해.”

“조금만 더요. 이틀 뒤에 유통업자가 상품을 가지러 오거든요.”

“유통업자가 누군데.”

“저희 아버지요.”

기분이 좋을 정도의 취기에 눈을 지그시 감고 있던 서인은 아버지라는 말에 눈을 번쩍 떴다. 남자를 당연히 고아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계시는데 이런 일을 왜 해?”

“아버지가 계시니까 당연히 일해야죠? 안, 안 하면 큰일 나요.”

서인은 남자의 아버지가 대충 어떤 사람인지 예상하고 혀를 찼다. 유통도 시간에 맞춰서 해야 한다고 집착하는 걸 보니 제대로 하지 않으면 얻어맞는 모양이었다.

세상에 제 아버지보다 더 한심하고 못돼먹은 놈이 있다니. 이건 꽤 놀라웠다.

“그래, 열심히 해라.”

그렇긴 해도 그가 얻어맞고 힘이 빠지면 서인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었다. 서인은 제때 끝내지 못해 남자가 얻어맞기를 바라며 그의 옷으로 소파를 문질러 닦고 드러누웠다.

“주무실 거예요?”

“어. 다하면 깨워.”

“네…. 알겠어요.”

남자는 제 멋진 모습을 조금만 더 봐주고 칭찬해줬으면 했는데, 서인이 졸기 시작하자 풀이 죽었다. 그래도 잔다고 하니 어딘가에서 두꺼운 천을 가져와 덮어주었다. 그 후 그는 아무도 주목해주지 않는 외로움 속에서 열심히 고기를 손질했다.

♦ ♢ ♦

“…대표님, 아직도 주무세요?”

많지 않은 양이었지만, 도수가 높은 술인지라 서인은 까무룩 잠이 들었다. 도장을 찍는 작업을 마친 남자는 그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 조용히 지하실로 걸음을 옮겼다.

“읏차….”

온갖 연장들이 가득한 지하실에는 일반적인 제품과는 달리 안이 깊고 개조된 욕조가 놓여있었다. 청결함을 유지하던 작업장과는 정반대의 분위기였다. 또 다른 개인적인 작업을 하기 위해 방수복을 걸친 남자는 장갑을 착용하고 장화까지 갈아 신었다.

“늦어서 미안해요. 빨리 오기로 했는데, 대표님을 혼자 두면 안 돼서….”

남자는 검은 물이 가득 찬 욕조에 손을 넣고 휘저으며 사과했다. 팽팽하게 당겨진 사슬을 잡아당기자 축 늘어져 있던 깡마른 사내가 물을 뱉어내며 눈을 떴다.

“켁! 컥, 하아….”

사내가 정신을 차린 것을 확인한 남자는 연장으로 욕조를 쳐댔다. 사내는 시체라고 착각해도 무방할 정도로 깡말라 있었으며 군데군데 살점이 떨어져 나가 신체가 훼손되어있었다.

“사, 살려, 주세요,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지금은 안 죽일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남자는 지하실 테이블에 놓인 서류 뭉치를 뒤적였다. 그의 신상정보가 담긴 의뢰서를 찾기 위함이었다. 다른 서류에는 붉은 도장이 찍혀있었고 사내의 서류는 아직 깨끗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흐윽, 흐….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흐으….”

명단을 살피던 남자는 겁에 질린 사내를 바라보았다. 억울하다고 중얼중얼하는 그를 한 번 쳐다보고 서류에 붙은 메모를 읽은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여기 죽어야 하는 이유가 적혀있어요.”

남자의 말대로 메모에는 사내가 죽어야 하는 이유가 적혀있었다. 의뢰서를 뒤적이며 사내의 앞에 가져다 댄 남자는 의뢰인이 누구였는지 말해주며 칼을 소독했다.

“시, 실수였어! 그러려고 한 건 아니었다고!”

의뢰서와 의뢰인을 확인한 사내는 격하게 발악했다. 남자는 지겹도록 들어왔던 말에 인상을 쓰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저한테 별로 중요한 이야기가 아닌걸요?”

서인에게 멋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거든 지금이 제일 좋았지만, 남자는 사람을 죽이는 것을 숨기고 싶어 했다. 성격이 더럽긴 하지만, 연약한 서인에게 그런 모습을 보였다가는 미움을 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제가 말이랑 글을 배우기는 했는데요, 아직 어려운 말을 잘 몰라요. 가, 가끔 이렇게 더듬기도 하고요.”

“…제발,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 도, 돈 필요해? 돈 줄게. 돈 줄게!”

남자는 의뢰받고 일하는 것치고는 굉장히 즐거워 보였다. 소독된 칼의 물기를 깨끗이 닦고 조곤조곤 설명하며 실없이 웃었다.

“여기에 오는 사람들은 다 나쁜 사람들이라고 했어요. 그리고 저는 돈이 필요하긴 하지만….”

남자는 말을 아꼈다. 어차피 곧 죽게 될 사람에게 이런저런 일을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메모지에는 사내의 죄가 빼곡히 적혀있었다.

“제가 읽기는 조, 좀 어려우니까 직접 읽어보세요.”

남자는 물이 젖지 않은 테이블에 서류를 올려두고 사내가 읽기 쉽게 기울여주었다. 횡령 및 폭행, 살인미수 등 그의 죄는 꽤 컸다.

“그러게 왜 잘못을 하고 사세요?”

남자는 명단 사이에 꽂혀있던 사내의 주민등록증을 그의 이마에 붙이고 사진을 찍었다. 기록하기 위함임을 친절히 설명해주기까지 했다.

“아, 안 돼, 안 돼, 살려줘,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아직 죽이지 않을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피를 뽑을 거예요. 빨리 죽이면 안 되거든요…. 천천히, 천천히 고문할 거예요….”

남자가 칼을 들고 다가오자 사내가 고함을 지르며 발버둥을 쳤다. 어찌나 시끄럽게 소리를 질러대는지 서인에게 들킬까 봐 놀란 남자가 그의 입을 틀어막고 주먹으로 얼굴을 내리쳤다.

“으, 읍! 읍!”

“조용히 안 하면 더 아프게 할 거예요. 시끄러워, 조용히 해, 조용히, 조용히 하란 말….”

사내가 계속 발버둥 치며 시끄럽게 하자 남자가 재갈로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작업을 이어나가려는 순간, 지하실 계단 위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행여나 들켰을까 봐 긴장한 남자는 급히 방수복을 벗고 피가 튄 얼굴을 씻어냈다.

“후우….”

심장이 정신없이 요동치고 입이 말랐다. 칼을 휘두르는 무서운 모습을 들켰다가는 모든 것이 끝이 나게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억지웃음을 지으며 돌아온 남자는 잠든 서인에게 다가갔다.

“대표님? 아직도 주무세요?”

분명히 인기척을 느꼈는데, 서인은 여전히 소파에 기대어 잠을 자고 있다. 조용히 주위를 둘러본 남자는 난데없이 그의 신발을 벗겨 들고 지하실 쪽으로 다가갔다.

“…하.”

남자는 어느새 웃음기를 지우고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지하실 쪽에 남은 발자국의 크기와 서인의 신발이 딱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술을 밟고 온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잠을 자는 자세도 어색했다.

남자는 서인이 지하실에 내려왔음을 확신했다.

“대표님, 정말 주무시나요?”

그는 아무런 내색 없이 서인을 흔들어 깨우며 그의 앞에 쭈그려 앉아 얼굴을 들이밀었다. 정말로 자는 건지, 자는 척을 하는 건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나를 버리고 도망가려 했던 건 아니겠죠? 그렇죠? 그렇죠? 그렇죠? 그렇죠? 그렇죠? 그렇죠? 어떻게 해야 나를 좋아하게 할 수 있지? 어떻게, 어떻게!”

그는 같은 말을 반복하며 미친 사람처럼 굴다가 숨소리를 죽이고 주저앉았다. 남자는 서인의 얼굴에 있는 점의 개수를 세며 어떻게 해야 서인을 평생 묶어둘 수 있을지 고민했다.

“…….”

발소리도 남자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자 의심 없이 눈을 뜬 서인은 소리도 내지 못할 정도로 놀라 잠시 숨을 멈췄다.

“일어나셨네요.”

“하…. 씨발, 뭐야!?”

“아야야…. 아파요! 대표님께서 주무시는지 아닌지 확인한 거예요….”

“…잤지, 그럼. 뭘 했겠어? 그걸 또 왜 확인하고 지랄이야, 지랄은.”

애써 침착한 척 해봐도 불안함을 담은 눈이 흔들렸다. 당당하지 못할 게 없으니 항상 눈을 보고 이야기하던 서인은 묘하게 생기가 도는 남자의 시선을 외면했다. 주머니에 찔러넣은 손에 땀이 스미고 뒷목이 뻐근했다.

“믿어보도록 할게요! 아, 그리고…. 곧 끝나가니까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돌아가서 고기 좀 먹고 자면 되겠네요!”

“어, 그래, 그래라….”

서인은 방긋 웃으며 다시 지하실로 내려가는 남자의 뒤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가 사람을 죽이거나 말거나 제 알 바 아니었지만, 피해자가 될 생각은 없었다.

지하실 계단 쪽에 찍힌 발자국을 대조해보기 위해 신발을 벗기고 칼을 든 채로 자는 사람의 얼굴을 빤히 보며 눈 뜨기만을 기다리는 건 정상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

또 혼자 집착하는 꼬락서니를 보니 나중에는 마음을 받아주지 않았다고 저를 죽이고도 남을 놈이다. 어쩌면 남자가 좋아했던 모든 사람이 욕조에서 고문을 당하다가 살해당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서인은 욕조 속에 묶여 고문당하던 사내에게 모습을 대입해보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대표님?”

“…어, 그래….”

서인이 생각하느라 느릿느릿 대답하자 남자가 성큼성큼 다가와 이마에 손을 올리고 열을 쟀다.

“아, 아픈 거 아니죠?”

“어…. 음, 좀 아픈 거 같아. 쉬어야겠어.”

서인은 무슨 말을 하든 동요하고 있는 것이 드러날 것 같아 차라리 아픈 척을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억지로 차에 오른 그는 곧바로 눈을 감고 최대한 남자를 바라보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러세요. 도착하면 깨울게요.”

“그래.”

평소와 다른 모습에 소름이 끼쳤다. 어디가 아프냐고 달라붙어 징징거려야 할 남자가 제 쪽을 보지도 않고 운전대를 잡았기 때문이다. 서인은 어딘가 눈이 맛이 간 남자의 모습에 날이 밝는 대로 바로 이곳을 벗어나리라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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