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퇴근길로 분주한 저녁, 술에 취한 서인은 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소파에 늘어져 있었다.
바이오 회사 대표에 걸맞지 않은 행동이라는 것은 그도 알지만, 아무 능력 없는 아버지의 압박과 상용화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기대감이 무거워 술기운을 빌리지 않고서는 버틸 수가 없었다.
“권서인, 너 정신 안 차려?”
“…….”
“네가 처신 바로 하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지는 않을 테고. 사춘기 어린 애처럼 굴지 말고 원하는 게 있으면 말을 해라!”
형제인 권서진의 설교 같지 않은 설교도 한몫했다. 안 그래도 어지러운데 잔소리를 듣자 머리가 울리고 속이 메스꺼웠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던 서인은 그가 비흡연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보란 듯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연구소에 자주 드나드는 처지이니 금연해야 하지만, 방해꾼이 찾아와 들쑤시니 참기가 힘들었다.
“내가 여기까지 왜 왔는지 알기는 해? 아버지께서 널 얼마나 한심하게 생각하시는데!”
서진이 집까지 찾아온 이유는 제 동생의 잘못된 행실을 지적하기 위함이었다. 그의 말마따나 서인은 성인이 된 이후로 이런저런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리곤 했다. 그 모든 사건이 불같은 성격 탓이었다.
“그리고 너, 담배 끊어야 하는 거 아니야? 직업의식이 있기는 해?”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따로 수습해달라고 부탁한 적도 없는데, 왜 참견질이야?”
짜증을 억누르고 가만히 듣고만 있던 서인은 오랜 기간 공을 들인 제 일에 말을 얹는 서진을 뒤로하고 테라스로 걸음을 옮겼다.
“네 자존심을 짓밟는 게 아니라 형으로서 걱정돼서 하는 말이다.”
“그래?”
서인은 마음에도 없는 걱정을 듣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학대당했던 어린 시절, 저를 비웃었던 서진의 얼굴을 평생 잊을 수가 없는데 그는 기억에도 없는지 뻔뻔한 얼굴로 찾아와 형 노릇을 하려 들었다.
“남 걱정할 만큼 여유 있나 봐?”
“뭐?!”
“알아들었으면서 뭘 되물어. 분수에도 안 맞는 부회장 자리 탐내면서 여유 부릴 시간이 있냐고.”
서진은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는 이야기로 저를 자극하는 서인을 노려보며 씩씩댔다.
그의 말대로 첫째 누나인 권수연과 서진은 현재 경영권 다툼을 이어가고 있었다. 서진은 아버지를 닮아 경영 머리가 없었기에 능숙한 수연과는 견줄 수도 없는 위치였는데도 그는 제가 부회장 자리에 오르리라는 근거 없는 확신에 차 있었다.
“어차피 그 자리는 내 거야. 네가 뭘 안다고 떠들어? 어머니 눈 밖에 난 놈이!”
“이미 권수연으로 기정사실 됐다는 걸 모르는 건 오히려 너 아닌가?”
“웃기지 마! 그건 애초에 나를 위한 자리야! 권수연은 안 돼.”
“왜.”
“뭐?”
“왜 권수연은 안 된다고 자신하는데?”
머리도 경영 능력도 바닥인 놈이 부회장 자리를 차지할 가능성은 희박한데, 서인은 그가 뭘 믿고 이토록 자신하는지 궁금했다. 혹시 회장에게 따로 들은 이야기라도 있나 싶을 정도였다.
“권수연은 여자니까.”
“허….”
왜 그리 자신하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은 서인은 예상치 못한 대답에 놀라 입에 물고 있던 담배가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서진은 잘못 짚어도 한참을 잘못 짚었다. 90세는 먹은 노인이나 할 법한 고리타분한 발언을 해버린 그는 이때다 싶어 계속해서 망언을 쏟아냈다.
“여자한테 무슨 경영을 맡겨?”
“하하! 이런, 미친.”
서인은 차라리 서진이 수연을 죽여서 억지로 자리를 차지하는 쪽이 좀 더 가능성 있다고 생각했다. 여성이라서 불가능하다는 말은 현대 사회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는 헛소리였으니 말이다.
서인은 바닥에 떨어진 담배를 주워 대충 비벼끄고는 너무 웃어서 흘러나온 생리적인 눈물을 훔치며 물었다.
“그 논리로 따지자면 회장님은.”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놀란 마음을 어렵게 감췄다. 악감정이 있든 뭐든 저와 핏줄로 이어진 서진이 여성 혐오적인 인간임을 알게 된 충격은 꽤 컸다.
“회장님은 대단한 분이시고. 권수연은 그냥 널리고 널린 애고!”
그는 제 동생인 서인이 남성 임신 분야의 약을 연구하고 있는 것을 모르지 않으면서 혐오로 똘똘 뭉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댔다. 서인은 더 듣고 싶지 않다며 인상을 찌푸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저지르고 다니는 일 보다 네 말 한마디가 더 파장이 클 것 같은데? 집안 망신시키는 건 내가 아니라 너야. 요즘 누가 그런 말을 해?”
“너? 너? 형한테 너? 안 되겠다. 말하는 본새가 아주 엉망이네! 다시 본가로 들어와야 정신을 차릴래?”
서인은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분노하는 서진을 훑으며 혀를 찼다. 별거 아닌 공격에 치부를 내보인 사람처럼 날뛰는 모습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아버지께 교육을 좀 다시 받아야겠어, 너.”
“그런 무능력한 기생충한테 무슨 교육.”
서인은 아버지의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학대를 교육이라 칭하는 의도가 뻔해서 웃음이 났다. 무능한 기생충이라는 말에 서진이 화를 내도 무능력한 건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는 그런 아버지의 멍청함을 빼닮은 서진과 더 이야기해 봐야 기분만 나빠질 것 같아 기지개를 켜고 몸을 일으켰다.
“아버지께 말버릇이 그게 뭐야! 기생충? 아버지가 그런 건 다 널 위해서였어! 네가 이사 자리 박아두고 나와서 이룬 게 뭐가 있는데? 임신 부작용 완화 약? 이미 실패했잖아, 안 그래?”
서진은 그러거나 말거나 계속해서 서인을 깔보며 비웃었다. 서인 역시도 머리끝까지 화가 났지만, 상대해봐야 아무 의미 없다는 것을 알기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재에 있는 침실로 향했다.
“후….”
서재는 그가 유일하게 안정을 취할 수 있는 장소였다. 비밀번호를 모르면 들어올 수 없었고 방음벽을 설치해 소음도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인은 그렇게 형이 제풀에 지쳐 돌아갈 때까지 몸을 뉘었다.
♦ ♢ ♦
“윽….”
이른 새벽에 눈을 뜬 서인은 서재에 앉아 서류를 살폈다. 딱히 처리할 일도 없는데 습관적으로 이것저것 살피던 그는 얼마 안 가 머리를 짚고 인상을 썼다. 오늘도 어김없이 찾아온 두통 탓이었다.
평소에는 마음이 복잡하고 머리가 아플 땐 없는 일을 만들어서라도 시간을 보냈는데, 오늘은 그마저도 버거울 정도로 힘이 들었다.
서류를 들고 넋이 나간 사람처럼 엎드려 있던 서인은 결국, 서류를 정리해두고 책장 뒤에 손을 넣어 버튼을 눌렀다. 미세한 기계음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계단 밑으로 내려간 그는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큰 냉동고를 열었다.
“음….”
냉동고 안에는 스테이크용, 구이용, 찌개용 등 각양각색의 고기가 가득했다. 심지어 고기 전용 냉장고에 반쯤 손질된 고깃덩이가 통째로 매달려있기도 했다. 한참을 들여다보던 서인은 제일 최근 배송받은 앞다릿살을 꺼내 들었다.
“앞다릿살이 볶음용이라고 했었나?”
서인은 부엌으로 와서 고기를 어떻게 조리할지 고민하다가 볶음으로 결정했다. 그러나 요리에는 재능이 없었기에 두 팩을 태우고 나서야 정상적인 볶음을 만들어냈다.
“…아, 다 태웠네.”
그는 다 태워버린 고기를 음식물 쓰레기 분쇄기에 갈아 넣고 식사를 시작했다. 직접 만든 음식은 겉보기엔 그럴싸했지만, 맛은 없었다.
“음….”
만족스럽지 못한 식사로 대충 끼니를 때운 서인은 서재에 틀어박혀 매달 사들이는 고기의 양을 점검했다. 매달 부위별로 10kg씩 쌓아두면서도 만족하지 못해서 또 추가 주문서를 작성했다.
다른 건 몰라도 고기만큼은 최상급 품질을 원하는 그는 직접 생산지를 찾아가 고기의 상태를 확인하고 맛을 본 뒤 주문을 할 정도로 육식을 즐겼다.
당장 오늘 오후에도 새로운 고기를 받아야 하는지라 서인은 앞다릿살의 품질이 떨어진 것 같다는 피드백을 가장한 지적을 하기 위해 담당 판매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세 살짜리 아이가 봐도 조리 방법에 이상이 있었는데, 제 잘못은 생각도 않고 고기의 품질만 탓했다.
“…….”
그런 데다가 통화연결이 길어지자 혀를 차며 짜증 내기도 했다. 새벽 서너 시에 전화하면 받을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을 텐데, 서인은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었다.
- 이, 씨팔! 시간이 몇 신데 전화질이여!
전화가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가기 직전, 잠에 취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은 판매자는 귀가 아플 정도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혹시 지금 시간 괜찮나? 전달받은 제품에 문제가 있어서 연락했는데.”
못 배워 먹은 놈이냐, 제정신이냐 등 온갖 상스러운 말을 내뱉던 판매자는 서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입을 꾹 다물었다. 수화기 너머로도 당황한 티가 났다. 짧게 침묵하던 그는 이내 목을 가다듬고 친절히 응대를 시작했다.
- 아이고, 아이고. 당연하죠, 대표님! 제가 먼저 연락드렸어야 했는데, 애들 관리한다고 깜빡 잊어버렸네요! 죄송합니다.
“네가 지금 편히 자고 있던 걸 보면 애들 말 잘 들은 거 같은데?”
- 아, 하하하….
판매자는 서인이 지금처럼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아도 들어주는 수밖에 없다. 그의 주문량이 전체 매출의 반절을 차지했으며, 사실상 재산으로만 본다면 실소유자와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 지난달 고기에 무슨 문제라도 있으셨는지요? 물론 대표님께 갈 상품은 몇 배로 더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만, 그런데도 손질이 덜 된 부분이 있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이고 나발이고…. 나 좀 서운하네. 앞다릿살, 그거 사람 먹으라고 만든 거 맞아?”
그의 조리방식을 알 리가 없는 판매자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였다. 성격이 좋지 않긴 하지만 오랫동안 이어온 인연인지라 항상 돌려 말하던 서인이 직설적으로 불만을 드러내자 어찌할 바를 몰라 말을 더듬었다.
- 아, 앞다릿살 말씀입니까?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당장 환불처리 해드리겠습….
“환불? 돈 몇 푼 받자고 이러는 거 같나? 날 아주 개무시하는군.”
- 아닙니다! 그게….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유통과정에서 신선도가 떨어진 거 같습니다. 맹세코 제작과정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자신에게 절대 대응하지 못하는 상대에게 스트레스를 푼 서인은 이야기를 끝맺지도 않고 말을 돌렸다. 트집은 잡으려고 마음먹으면 한도 끝도 없다. 그는 제가 관여할 일이 아닌 직원 관리까지 따지고 들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추가 주문도 좀 하려 하는데.”
- 아, 평소처럼 해주시면 됩니다! 추가 주문서 작성하셔서 이진혁 비서님께 전달해주세요. 바로 다음 날 신선한 고기로 배달해드리겠습니다.
“이번에는 이 비서 없이 진행했으면 해서. 차 실장이 도울 수 있겠지?”
- 아, 그렇습니까? 네네, 당연하고 말고요! 바로 진행하겠습니다.
주문서는 언제나 서인의 비서인 이진혁에게 전달되어 검토 과정을 거치게 된다. 굳이 제가 잡일을 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 넘긴 일인데 이번 주문만큼은 그가 개입되지 않길 바랐다.
이 비서는 일 처리가 빠르고 유능했지만, 서인의 일정을 관리하다 보니 사생활을 간섭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끔 집에 도착하는 상품을 보고 인상을 구기며 혐오하는 티를 내기도 했다.
- 예, 그러면 제 보호 코드를 대표님 휴대전화로 전송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쪽으로 따로 주문서를 보내주십시오.
“그래, 그리고 저번에 따로 부탁한 제품은? 소식이 없네.”
- 아…. 워낙에 손이 많이 가는 품목이라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습니다. 준비되는 대로 바로 대표님께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이번 연말 파티에는 어떻게 좀…. 참여가 가능하실까요? 올해로 포트폴리오가 1만 개가 된 거로 아는데….
“알아들을 때 안 됐나. 매번 안 간다고 말해야 해?”
검증된 품질을 자랑하는 거래소인지라 VIP 회원에게는 도축 전 고기의 사진과 코드네임, 도축 방법을 정리한 포트폴리오가 함께 따라왔다.
1만 개 이상을 보유한 VIP를 대상으로 개최하는 파티에도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는데, 대외적인 자리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서인은 단 한 번도 참여한 적이 없었다.
“하….”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린 그는 몸을 씻으며 한숨을 쉬었다. 매일 오늘과 같은 하루가 무의미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주말에는 서재에 처박혀 새벽까지 일하고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아무 남자나 만나 성관계를 맺는 그런 지루한 삶이었다.
평일에도 그리 다른 건 없다. 그저 장소가 서재에서 회사로 바뀔 뿐이다.
회장에게 인정받기 위해 아등바등 살아가다 보니 제 나이대 사람들의 취미도 잘 몰랐고 마음 편히 노는 법 역시 알지 못했다. 유일하게 할 줄 아는 건 필요도 없는 물건을 종류별로 사들이며 사치를 부리는 것뿐이었다.
욕조에 등을 기대고 앉은 그는 사치의 증거인 물이 쏟아져 내리는 해태 모양의 구조물을 매만졌다.
“…….”
업무로 인해 생기는 스트레스를 성관계나 필요 없는 물건을 사들이는 것으로 해소하는 서인은 멀쩡한 구조물을 또다시 바꾸는 게 어떨까 생각했다. 쾌감과 만족감은 찰나임을 잘 알고 있었는데도 매번 반복하게 되었다.
샤워 후 멍하니 누워있던 그는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넘기며 침대 맡 서랍에 놓인 수면제를 삼키고 일정을 확인했다.
“아….”
노트에 메모한 일정을 하나둘씩 살피던 서인은 오늘 오후 본가에 가야 한다는 것을 보고 눈을 질끈 감았다. 어머니와의 만남은 막연한 부담감 탓에 숨이 막혔고 아버지와의 만남은 구더기 더미로 기어들어 가는 것처럼 끔찍했다.
약 기운이 돌 때까지 멍하니 앉아 시간을 보내자 분노와 쌓여갔다. 차라리 얼른 잠이라도 들면 좋을 텐데 오늘 같은 날에는 약도 서인을 돕지 못했다.
그는 가진 게 많고 배경이 좋지만 살면서 한 번도 만족해본 적이 없었다. 성관계를 맺을 때도 매일같이 목적이 있는 상대만 들러붙지 정작 원하는 상대는 단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연애를 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마음에도 없는 사랑을 말하고 이것저것 신경 써야 할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때리면 엉엉 울고 원할 때마다 다리를 벌려주는 예쁜 사람을 필요로 했다.
‘피부는 하얗고 부드러워야 했으며 나이는 저보다 어려야 한다. 예쁜 외모는 기본이고 때릴 맛이 있게 맷집이 좋아야 한다.’ 등 꽤 구체적인 조건도 있었다.
“…….”
쓸데없는 생각으로 시간을 보내던 서인은 조금이라도 잠을 자야 오후에 일할 수 있기에 억지로 눈을 감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 ♢ ♦
“…씨발.”
결국, 오래 자지 못한 서인은 10분가량 눈을 붙이고 퀭한 얼굴로 앉아 담배를 피웠다.
스트레스의 원인인 본가로 가는 길이니 미리 약을 먹고 나왔음에도 손발이 차가워졌고 심장이 요동쳤다. 안정을 되찾기 위해 눈을 지그시 감고 마음속으로 수를 세도 크게 효과는 없었다.
“대표님, 혹시 못 주무셨습니까?”
서인은 가만히 있어도 경련하는 눈두덩과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느릿느릿 행동하는 제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운전대를 쥔 경호실장 곽대욱 역시 그의 상태를 보고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대표님, 담배는 끊으시는 게 좋습니다. 곧 못 피우게 되실 텐데 나중에는 더 힘듭니다.”
그는 인상을 펼 생각을 하지 않는 서인에게 샐러드와 티슈를 내밀었다.
전혀 배가 고프지 않지만, 서인은 제 건강을 집착 수준으로 챙기는 대욱의 고집을 꺾을 기운도 없고 컨디션을 회복해야 하는 것도 사실이었기에 군말 없이 포크질을 했다.
“달걀 샐러드로 주문했습니다.”
“그래, 참 고맙네.”
느릿느릿 샐러드를 먹던 서인은 자그마한 방울토마토를 발견하고는 신경질적으로 뚜껑을 닫았다. 안 그래도 입맛이 없는데 붉은 토마토를 보자 짜증이 확 올라왔다.
“토마토 있는 거 못 봤어? 두 개나 있잖아!”
“죄송합니다, 대표님. 제가 미처 확인하지 못한 모양입니다. 다시 사 오겠습니다.”
“됐어.”
어릴 적 아버지에게 폭행뿐만 아닌, 매운 소스를 강제로 먹는 학대까지 당한 서인은 맵지 않아도 붉은빛이 도는 음식이라면 입에도 대지 못했다. 먹지만 못할 뿐 보는 데엔 아무런 문제도 없으면서 그는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대욱에게 분풀이를 했다.
“죄송합니다.”
“하아, 하…. 씨발! 닥치고 운전이나 해!”
대욱은 샐러드 통을 집어 던지며 소리치는 서인에게 고개 숙여 사과했다. 그는 단순 경호원이 아닌 서인의 모든 일을 도맡으며 보필한 지 10년이 넘어가는 사람이었다.
서인을 위해 살고 서인이 죽으라고 하면 죽을 수도 있는 그런 충성심 강한 사람이 큰 실수를 했으니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그는 본가 앞에 차를 세우고 나서도 서인의 눈치를 살폈다.
“내려.”
“…예.”
대욱은 서인을 걱정스레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가 본가에 다녀오면 꼭 하루 정도는 앓았기에 되도록 가지 않았으면 했다. 대욱 역시 동행하기는 했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든 참견할 수가 없는 처지였다.
“대표님, 아무래도 하루 정도 쉬는 게 좋을 거 좋습니다.”
“괜찮다고. 입 다물어.”
가끔 아버지를 만날 때면 그가 서인에게 손찌검하는 일도 생기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대욱은 도울 수 없는 무력감과 방관자가 된 듯한 기분에 매일 밤 괴로움에 사로잡혀 잠을 자지도 못했다.
“후….”
굳게 닫힌 문 앞에 선 서인은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넥타이를 고쳐맸다. 등이 축축이 젖을 정도로 긴장되었다. 대욱은 어쩔 수 없이 제 손으로 직접 문을 열어 먼저 발을 들였다.
“어, 왔어요. 대욱 씨.”
“예. 회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서인은 제게 눈길조차 두지 않고 대욱에게 집중하는 회장을 멀리서나마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다. 인사도 받아주지 않고 안부도 묻지 않았지만, 그런 취급에도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상용화는 언제쯤이야. 마지막 기회인 건 말 안 해도 잘 알 테고.”
드디어 서인에게도 말할 기회가 찾아왔다. 딱딱하고 단호한 말투, 한숨 섞인 목소리가 자존심을 짓밟았지만, 그는 무너질 것만 같은 마음을 바로잡고 또박또박 천천히 보고했다. 가족이 아닌 상사를 대하는 듯한 태도였다.
“예, 회장님. 현재 임상시험 단계에 있습니다. 최종 완성은 올해 말이며 상용화는 내년 초로 예정 중입니다.”
“뭐…. 얼마나 잘 되겠냐만.”
서인은 수연을 대할 때와 정반대인 그의 태도에 할 말을 잃고 고개를 숙였다. 실패만 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까지 하대 받을 일은 없었을 텐데, 모든 게 제 부족함 탓이기 때문임을 알기에 더 화가 났다.
“요즘은 남자라고 다 되는 세상 아니야.”
“알고 있습니다.”
물론, 서인이 이미 한 번 실패했지만, 지금은 성공 확률이 높고 임신을 계획 중인 남성들이 모두 기대하는 상황이었다.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회장에게서는 죽어도 그를 믿겠다는 지지의 말은 돌아오지 않았다.
서인은 어머니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눈치채고 시선을 내리깐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제 성별이 일을 해결해 주리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되려 그간의 무지를 돌려받기라도 하는 듯 남자가 신경 써야 할 것이 더 많은 세상이었기 때문이다.
“예전에야 무슨 일이 있어도 아들이 후계 받았겠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회장은 사람을 능력으로만 평가했다. 핏줄이라 하여도 예외는 없었다. 현명하고 좋은 선택이었으나 서인에게는 불공평하고 고통스러운 신념이었다. 애초에 수연과 저의 출발선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인이 너는 뭐니. 실패가 말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니?”
수연이 능력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쯤은 서인도 알고 있다. 하지만 저 역시 그와 동일한 환경에서 자랐다면 비슷하면 비슷했지 못하지는 않으리라 확신이 있었다.
억울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수연은 태어나서부터 줄곧 회장의 곁에서 자라왔고 서인은 뭣도 없는 아버지와 살며 교육은커녕 학대만 받고 살아왔다. 그런 둘을 비교하는 건 공평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잘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성공할 겁니다.”
“내 이름에 먹칠하지나 말렴. 서진이는.”
버러지만도 못한 서진의 소식을 묻는 것도 불쾌했다. 저와 서진을 동일시한다는 것 자체가 혐오스러웠다. 서인은 칭찬을 바라고 온 건 아니었지만 해도 해도 너무한 취급에 그저 허탈하게 웃기만 했다.
“이번에도 실패하면 너도 그냥 얼굴 팔아먹고 살렴, 서인아. 네 아버지 닮아서 그거 하난 봐줄 만하잖아.”
서인은 억울하기는 했지만, 어머니를 탓하기보단 사업에 실패한 과거의 자신을 채찍질했다. 한 번에 성공해냈더라면 이런 일을 겪을 일이 없었을 테니 그렇게 생각할 만도 했다.
“성공할 겁니다.”
“샘플은 있니?”
“없습니다.”
있다. 대욱에게 명령하면 당장에라도 가져올 수 있는 샘플이 있지만, 서인은 그에게 가져다줄 생각이 없었다. 회장이 그를 믿지 않는 것처럼 서인 역시 그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정은 받고는 싶지만, 쌓아온 모든 것을 빼앗기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래, 네 아버지가 널 보고 싶어 하던데.”
“안 그래도 조만간 찾아뵈려 했습니다.”
압박감에 짓눌려있던 서인은 그제야 제 아버지가 이곳에 없음을 확인하고는 찾아뵐 생각도 없으면서 듣기 좋은 말이나 지껄였다.
서인의 어머니 역시 그가 학대받고 있음을 알았지만 묵인한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런 주제에 서인에게 아버지 이야기를 꺼내며 그를 괴롭게 했다.
“어딨는지는 알고?”
“…모릅니다. 연락드리려 했습니다.”
아버지가 당연히 본가에 있을 줄 알았던 서인은 회장도 모르는 눈치이자 그에게 붙어있지 않은 것을 의외라고 생각했다. 거머리같이 돈만 쭉쭉 빨아먹는 놈이 무슨 바람이 불었나 싶었다.
“뭐 하러.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모르겠네.”
“예?”
“서인이, 너. 별 볼 일 없는 놈이랑 연락하고 그러는 거 아니야.”
“…예, 알겠습니다.”
서인은 별 볼 일 없는 놈이라는 말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학대를 묵인할 만큼 서로를 믿고 사랑한 사람이었으면서 한순간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샘플 나오는 대로 보고하고.”
“예.”
집을 나선 서인은 ‘별 볼 일 없는 놈’이라는 말을 계속해서 되뇌었다.
사랑을 허황한 감정이라고 생각해왔던 그는 제 부모의 사랑만은 진실한 것으로 생각해왔었다. 얼굴만 반반하지, 멍청한 아버지 같은 사람을 데리고 살아주는 것을 사랑이 아닌 그 어떠한 단어로도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차에 올라타서 역시 사랑 따윈 멍청한 짓이라며 속으로 제 부모를 열심히 비꼬던 서인은 대욱이 건네주는 음료나 영양제를 하나도 받아먹지 못하고 정신을 놓고 있었다.
“대표님!”
“…어?”
그는 한참이 지나서야 대욱이 제 옆에 서서 어깨를 흔들고 있는 것을 깨닫고 정신을 차렸다. 예상 밖의 결과가 너무나도 충격적이라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괜찮으십니까?”
“어, 그나저나 윤정식 소식 뭐 들은 거 없어? 이혼한 건 아닌 거 같은데.”
아버지에게 회장이 없다면 그는 아무런 이용 가치가 없는 쓰레기에 불과했다. 돈도 없고 경력도 단절된 그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예, 이혼 소식은 저 역시 듣지 못했고…. 아마도 별거하신 것 같습니다.”
“…그렇군.”
서인은 내쳐진 정식의 이야기를 들으며 더 큰 부담을 느꼈다. 또 한 번 실패하면 저 역시 어떻게 될지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얼굴 팔아먹고 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지 않는 그는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도 약 개발과 관련된 서류를 살피며 눈에 불을 켰다.
“아, 3시 즈음에 마켓에서 물건이 온다고 합니다. 제가 옮겨둘 테니 대표님은 쉬고 계세요. 지하 냉동창고에 두면 됩니까?”
“어어, 그래.”
스트레스에 시달린 나머지 새벽에 주문해두었던 것을 잊어버린 서인은 일 처리를 대욱에게 떠맡겼다. 확인이야 그가 알아서 할 테고 회사 업무도 없으니 푹 쉬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쉬십시오.”
“그래요, 수고했어.”
대욱은 서인이 씻는 곳까지 따라와 밖에 가운을 걸어두고 서재 지하 냉장고에서 고기를 꺼냈다.
가정부가 경조사 탓에 집을 비운 터라 서인이 끼니를 제때 챙기지 않으리라는 것을 아는 그는 직접 고기를 굽고 서인이 마실 만한 건강 음료를 만들기 시작했다.
경호원이 할 만한 일이 아님에도 그는 싫은 티 하나 내지 않고 심혈을 기울여 재료를 손질했다.
“이렇게까지 극진히 모실 필요 없다니까.”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대표님, 술 또 주문하셨습니까. 붉은 술은 못 드시면서 도대체 왜 이렇게 많이 사두는 겁니까?”
“참견은.”
서인은 이때다 싶어 잔소리해대는 대욱을 무시하고 욕조에 몸을 뉘었다.
♦ ♢ ♦
샤워를 끝내고 거실로 나온 그는 노릇노릇 구워져 톡 쏘는 향이 나는 고기와 건강한 초록빛으로 빛나는 주스를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혼자서 먹는 것 치고는 너무 과했다. 파슬리 가루를 뿌리고 예쁘게 플레이팅까지 한 접시를 내려보던 서인은 저도 모르게 웃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내가 승낙했다고 해도 이건 좀 과한 거 알지? 경호 일은 까먹겠어, 아주.”
“가짓수를 줄이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본인이 경호 실장인 거 알지? 애들 교육은 언제 할 거야.”
“매번 시간을 정해두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마 서인이 이길 수 없는 유일한 사람은 대욱일지도 모른다. 그는 서인의 건강과 직결된 문제로는 단 한 마디도 지지를 않았다. 다른 문제였다면 수긍했겠지만 이런 식의 언쟁에서는 양보하지 않았다.
“어휴, 앉아. 먹어.”
그래서 그런지 서인도 대욱에게만큼은 꽤 인간적인 모습을 보였다. 연구원과 직원들 사이에서는 웃을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소문이 나 있지만, 대욱의 앞에서는 꽤 자주 웃었다.
서인을 마주 보고 앉은 대욱은 노릇노릇 구워진 고기를 멍하니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뭐야, 고기 먹게? 비위 상한다고 안 먹는다더니.”
“어떤 맛이 나기에 대표님께서 그리 좋아하시는지가 궁금합니다.”
“웃긴다. 살면서 고기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사람처럼 구네. 그래, 그럼 먹어봐.”
서인은 남의 수저가 닿은 음식은 먹지 않기에 접시에 따로 덜어주며 내심 기대했다.
채소와 평범한 고기를 좋아하는 대욱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고기 한 점을 들어 올렸다. 마치 역겨운 것을 보는 듯한 눈빛에 서인이 어깨를 들썩이며 깔깔 웃었다.
“이거 고문하는 기분이라 별론데.”
“아, 아닙니다. 마음의 준비가 필요해서….”
답지 않게 말끝을 흐리는 모습에 서인은 시선을 거뒀다. 누가 먹으라고 등을 떠민 것도 아닌데 그는 먹기 싫어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선 고기를 노려보고만 있었다. 아무리 아니라고 한들 강요하는 것만 같아 기분 좋지는 않았다.
“안 먹을 거면 다른 거 해 먹어.”
“아, 죄송합니다.”
한참을 고민하던 대욱은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고기를 입에 집어넣었다. 먹든 안 먹든 상관없다는 태도를 보이던 서인도 그를 곁눈질로 살펴보며 고기를 얌전히 씹어 넘겼다. 얼굴을 보고 짐작할 수 있었기에 맛이 어떤지 물을 필요가 없었다.
“신기한 맛입니다. 코끝이 약간 아릿하네요. 향신료를 첨가해서 그런 겁니까?”
“그럴 수 있지.”
“먹어봤으니 더 맛있게 구울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고맙네, 그래.”
먹어봤으니 앞으로 더 잘 구울 수 있겠다는 말에 서인이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웃었다. 보통 맛을 평가하고 더 먹든 그만 먹든 해야 하는데 맛있게 구울 생각을 하는 대욱이 그냥 웃겼다. 정신이 나간 건지 뭔지 너무 우스워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대표님, 물건이 온 것 같은데, 잠시 다녀와도 괜찮겠습니까?”
“아, 어어.”
대욱은 물건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자리를 비웠다. 물건을 옮기고 정리를 하고 나서도 그는 마저 식사하지 않았다. 기분이 상한 서인도 음식을 다 남기고 대욱을 내보내려 했다.
“피곤하니 좀 가줬으면 좋겠는데.”
서인의 기분이 상한 이유를 모르는 대욱은 떠나고 싶지 않았지만, 더 남아있다가는 그가 화를 낼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저녁 영양제를 준비해두고 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일 아침 일찍 모시러 오겠습니다. 되도록 수면제 드시지 마시고 편히 주무십시오.”
“그래, 가봐.”
서인은 차게 식은 얼굴로 대욱을 배웅하고 또다시 샤워한 뒤 곧바로 침실로 향했다.
기분 상할 일이 아닌데 이상하게 어린아이처럼 감정 조절이 어려웠다. 보필이 싫다던 다 큰 성인이 가장 가까운 사람과 입맛이 맞지 않는다고 화가 나다니 말도 안 되는 억지였다.
그는 제 기분이 나쁜 것을 본가에 다녀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테라스에서 담배를 피웠다. 두 번이나 샤워했는데, 몸에 밴 담배 냄새 때문에 또 씻을 생각에 머리가 아프고 신경질이 났다.
불안한 것처럼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서인이 고기를 담았던 그릇을 집어 던지고 씩씩댔다. 굳어 있던 대욱의 표정이 자꾸만 눈앞을 휘젓고 다녔다. 그가 싫어하는 모습을 보니 마치 제가 이상한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인간 목숨을 파리 목숨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이 육식에 죄책감을 느낄 리도 없는데 서인은 이상하리만큼 제 감정을 통제하지 못했다.
깨진 그릇을 치울 생각이 없는 그는 서재에 앉아 책을 꺼내 들었다. 머리를 비우고 이렇게라도 생각을 정리하지 않으면 정말 큰일을 낼지도 몰랐다.
“…하아.”
서인은 책이 가득한 책장을 보며 천천히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평소 성격을 죽이지 못하고 사람을 두들겨 패고 왔을 때도 독서를 하면 흥분이 가라앉아서 그는 독서를 꽤 좋아하는 편이었다.
서재에 책이 가득 차게 된 시점도 스트레스가 과도하게 쌓인 사업 초기부터였다.
물론 남성 임신의 고질적인 부작용을 없애기 위해서 정보를 얻고 의과대학에 진학하다 보니 쌓이긴 했지만, 그와 별개로 독서가 마음에 안정을 주는 건 사실이었다.
“모든 존재는 죽고 나면 하나의 고깃덩이일 뿐이다. 육식이 어째서 죄가 되는가.”
대욱 때문에 화나 간 마음을 달래기 위해 푸른 빛의 책을 꺼내든 서인은 첫 장을 넘기며 소리 내 읽기 시작했다. 육식에 죄책감을 느낄 리 없는 서인이 선택한 것치고는 꽤 합리화를 바라는 문장이었다.
“그래, 이게 맞는 말이지.”
서인은 인권 면에서는 깨어있는 사람이었지만, 제 의견이 80% 정도는 옳다고 보는 고집쟁이다. 물론 아이처럼 귀여운 고집이 아닌, 앞길을 막고 제게 반항하는 사람을 해치는 부류였다.
그런 성격이니 무슨 책을 보듯 항상 현실감을 지적하고 저자의 주장을 비난하며 비웃기 바빴는데, 지금은 격하게 공감하며 펜으로 문장을 표시해두기도 했다.
서인은 인간이 동물을 길들이고 식량으로 소비하는 것을 세상의 이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기에 대욱처럼 고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을 위선자라고 여겼다.
또 그 당연한 규칙을 망가뜨린 망할 정부의 법안을 증오했다.
육류 소비를 줄이고자 도축을 규제하고 동물권을 위해 쓰던 정부는 1990년, 육식 완전 타파를 선언했다. 이러한 결정에 반발하는 의견도 없진 않았지만, 모두를 만족시키는 방안은 존재하지 않으며 사회 변혁에는 적절한 강제성이 필요하다는 판단으로 대한민국은 육류 소비 금지 국가가 되었다.
그리고 서인은 그러한 결정에 불만을 품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는 혼자서 야만인이 된 기분을 느끼고는 괜히 대욱을 탓하며 혀를 차고 한쪽으로 치우친 문장에 공감했다. 급기야는 육식하지 않는 사람들을 바보 취급하기도 했다.
“이 맛있는 걸 왜 안 먹는 거야.”
서인은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선 고기가 필요하다는 말을 홀로 중얼거리며 가운 밑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하….”
정상적인 사람이 할 만한 행동은 아니다. 그는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을 비난하다가 난데없이 아래를 세우고 자위했다.
고기를 씹을 때 느꼈던 톡 쏘는 강인한 맛과 먹기 좋게 도축되는 과정을 상상하고 흥분한 그는 입술을 깨물고 몸을 숙인 채 손을 움직였다.
그는 마조히즘적 성향뿐만 아니라 고기에 흥분하는 이상성애도 앓고 있었다.
♦ ♢ ♦
어딘가 이상한 성 욕구를 해결하고 잠이 든 서인은 새벽녘에 눈을 떴다. 평소에도 약과 술이 없이는 길게 자지 못하지만, 오늘은 더 했다. 사정의 나른함을 빌려 잠자리에 들어도 깊이 자지는 못했다.
“후….”
목덜미가 뻐근하고 머리가 아팠다. 해야 할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있지, 컨디션은 나쁘지. 아무나 잡고 두들겨 패고 싶은 날이었다.
하지만 휴식 욕구가 사회적 지위를 이기지는 못했기에 그는 곧바로 일어나 몸을 씻고 식탁에 앉았다. 여느 때처럼 식욕이 돌지 않았지만, 대욱에게 잔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 서인은 샐러드와 토스트를 욱여넣으며 일정을 확인했다.
“이런 시계가 있었나?”
출근하기 직전, 서류 따위를 챙기기 위해 서재 금고를 연 그는 상자에 담긴 낡은 시계가 바닥에 곤두박질치자 인상을 쓰며 물건을 살폈다.
결벽 수준으로 깔끔한 서인의 것이라고 하기엔 가죽은 닳아있었다. 어지간히 중요한 물건이니 버리지 않고 금고에 보관해뒀을 터인데 어디에서 가져온 물건인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ZERO, ONE?”
뜻을 알 수 없는 하찮은 각인 탓에 서인은 더더욱 기억이 흐릿해졌다. 디자인적으로도 세련되지 않고 별다른 의미 없는 숫자만 늘어놓은 각인이었다.
더러운 시계를 가만히 응시하던 그는 술에 취했을 때 누군가에게 받은 게 아닐까 생각했다. 정신을 놓고 마시면 아무 데서나 잠들거나 기억이 통째로 날아가는 경우가 많았기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형편없네.”
서인은 굳이 제가 처리하고 싶지도 않고 그리 급한 일도 아니니 시계를 던져두고 대욱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 대표님, 좋은 아침입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대충. 어디야.”
- 대표님 자택 근처입니다.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까, 약 드시고 눈 좀 붙이고 계세요. 목소리가 안 좋습니다.
컨디션이 그리 좋지 않긴 했지만, 목소리에서 티가 날 정도는 아니었다. 대욱과 통화할 때는 특히 더 신경을 쓰는 편인데 가만 보면 그는 매일 서인을 환자 취급했다.
“됐어. 나갈 테니까 준비해.”
물론 그럴 의도가 아님을 알지만 안 그래도 회장에게 인정받지 못해 자격지심이 있어 예민한 서인에게는 그리 좋지 않게 다가왔다. 그는 보란 듯이 평소보다 더 일찍 출근하겠다는 말을 전했다.
- 알겠습니다. 5분 뒤 도착 예정입니다.
“그래.”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코트를 입은 서인은 상용화 발표날을 떠올려보며 저 혼자 실실댔다. 그날에는 분명히 인정도 받을 수 있고 그 누구에게도 무시 받지 않으며 살아갈 수 있다.
아직 멀었지만, 벌써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이상한 흥분이 차오를 정도로 설레어 몸이 떨렸다.
“대표님, 괜찮으시겠습니까?”
어느새 서인의 앞에 차를 세운 대욱은 그가 눈을 지그시 감고 주먹을 쥐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사색이 되어 다가왔다.
“어, 가자.”
“연구소까지 세 시간은 걸리는데, 목 아프시지 않겠습니까.”
서인은 괜찮다는 말을 하루에도 몇 번씩 했다. 몸이 아프고 괜찮지 않다고 해서 일정을 미룰 수도 없는 노릇인데 계속해서 묻는 대욱 덕에 더 피곤했다.
대충 대답하고 차에 올라탄 그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대욱의 시선에 못 이겨 침대에 드러누웠다.
“됐지.”
“예.”
대욱은 서인이 차 안에 탑재된 침대에 몸을 뉘자 그제야 만족하며 운전대를 쥐었다. 세 시간 거리를 운전해야 하는 제가 더 힘들 텐데 대욱은 서인에게 껌, 사탕, 피로해소제를 건네며 그를 살피기 바빴다.
“100명 정도 된다고 했었나?”
“예, 정확히는 117명이라고 합니다. 최상의 컨디션이라고 하긴 했으나….”
“그중 반만 정상이겠군.”
금일 서인의 일정은 숨 돌릴 틈 없이 빡빡했다. 왕복 여섯 시간 거리의 연구소에 가 임상시험 대상자들을 만나야 했고 약물 반응을 본 뒤 시간별로 기록지도 작성해야 했다.
“대표님 계획에 말을 얹고 싶지는 않지만, 홍주원을 믿으십니까?”
“속내는 모르겠다만…. 비즈니스 파트너로는 손색없지. 벌써 10년은 더 됐는데.”
서인은 오랜 시간 연을 맺어온 제 사업 파트너 홍주원을 떠올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이코 기질이 있고 사람을 가지고 놀기 좋아하는 타입이지만, 이득을 취할 수 있어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렇습니까.”
“그래, 어느 누가 마음대로 약물을 투여해도 괜찮은 사람을 구해다 주겠어.”
무엇보다 서인이 마음대로 약물을 투여할 수 있는 실험체를 제공해준다는 점이 컸다. 연고도 없고 귀찮게 직접 시체처리를 하지 않아도 되었기에 스트레스를 받을 이유가 없었다. 연구소를 먼 거리에 세운 점만 빼면 완벽한 파트너 조건이었다.
“사실 저는 홍주원이 대표님에게 협조하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저희 측이야 실험대상자를 얻을 수 있고 사업을 이어나갈 수 있지만, 홍주원 측은 딱히 이득이 없지 않습니까. 고기 문제야 다른 사람과 계약해도 되는 일이고….”
대욱은 눈치를 보며 은근슬쩍 홍주원과의 이야기를 캐내려 했다.
서인은 장부, 회사 기밀 등 대욱에게는 모든 것을 알려주었는데, 이상하게 비즈니스 파트너에 관해서는 좀처럼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도 아니고 거리를 두는 데에 서운함을 느끼는 건 아니지만, 왜 그것만큼은 숨기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 말하자면 길어. 잘 테니까 도착하면 깨워.”
“예.”
결국, 알아내는 데에 실패한 대욱은 말없이 운전대를 고쳐 쥐었다.
차량용 침대에 누운 서인은 풀 죽은 얼굴로 운전하는 대욱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유년 시절부터 수발을 들어왔다고 해도 경호원과 대표 그 이상인 관계로 가려 하는 대욱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곽대욱 실장.”
“예?”
대욱은 보통 호칭을 붙이지 않고 이야기하거나 손짓을 했던 서인의 입에서 직함이 따라 나오자 저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 했다.
“전에도 말했지만 너는 경호원이지 애새끼 수발드는 사람 아니야.”
“알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서인은 매번 알고 있다면서 달라질 생각을 하지 않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람을 바꾸기엔 비밀 유지도 불가능할 듯싶었고 대욱만큼 저를 잘 아는 사람도 없기에 함부로 내칠 수가 없었다. 그러니 매번 혼을 내고 사과를 받는 게 전부였다.
전부 짜증이 나고 귀찮아진 서인은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 ♢ ♦
“장난해? 제대로 된 놈이 없잖아!”
연구소에 도착한 그는 물건을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 던져가며 화를 냈다.
세 시간이다. 무려 세 시간을 달려왔건만, 임상시험 대상자들의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누가 봐도 학대로 인해 정신이 피폐해지고 어딘가 맛이 간 사람의 모습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반 정도는 정상으로 예상했는데, 생각보다 더 처참했다.
“정신적으로는 문제 있지만, 신체적으로는 정상이니까 약물 투여해도 상관없어. 반응 제대로 나올 텐데 뭐가 문제야?”
“뭐 하자는 거야. 내가 지금 시간이 남아돌아서 이러는 거로 보여? 이번 일 실패하면 너도 끝이야. 몰라서 이래?”
연구소장이자 서인의 파트너인 주원은 어깨를 으쓱대며 껌을 잘근잘근 씹었다. 의자를 빙글빙글 돌려가며 킬킬 웃는 낯짝을 노려보던 서인은 대상자 중 가장 덩치가 좋은 놈을 끌고 와 다짜고짜 이름을 물었다.
“너 이름, 나이.”
“어, 없다…. 없는….”
동의서를 받고 영상까지 촬영해야 하는데 그들은 제 이름도 나이도 모를 만큼 정상이 아니었다. 개중에는 아예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고 침을 줄줄 흘리며 웃기만 하는 사람도 있었다.
“홍주원, 이러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대표님이 왜 이러실까. 약물 투약할 수 있는 놈들로만 준비하면 된다고 했으면서.”
“장난해? 동의 영상 촬영은 잊었어?”
서인은 아찔한 듯 이마를 짚고 눈을 질끈 감았다. 한시가 급한 상황인데, 이런 문제가 생길 줄은 꿈에도 몰랐다.
현재 모든 국민은 안전을 보장받아야 할 권리가 있다는 남성 보수 단체의 의견과 임신은 개인의 선택이며 부작용을 감내하는 것 역시 개인의 몫이니 권리를 빼앗지 말라는 일반 남성 단체들의 갈등이 심화한 시점이었다.
부작용 사례가 늘자 남성 임신을 돕는 약물을 개발한 ‘L’ 사는 급기야 유통 중지를 고려해보겠다는 공식 의견문을 발표했고 그 전부터 기회를 노리고 있던 서인이 타이밍에 맞춰 부작용을 완화할 수 있는 약의 개발 소식을 알렸다.
상용화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이 이상 지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정상적인 인간이 있을 거로 생각한 대표님 잘못이지.”
서인은 당연히 소통되는 사람을 준비하라는 뜻으로 건넨 말이었는데 주원은 약물을 투약할 대상만 준비하라고 받아들이고는 제 잘못이 없다고 주장했다.
더 말싸움해 봐야 시간만 아깝다고 판단한 서인은 실험체들에 대본을 나눠주며 읽을 수 있는 사람을 추리기 시작했다.
“하…. 미치겠군. 제대로 말하는 새끼가 있어야 할 거 아니야. 대표로 쓰게. 면상도 담겨야 하는데, 이런 제기랄….”
“그냥 음성 녹음으로 진행해. 서류는 다 준비되어 있잖아.”
“서류가 조작이니 영상 증거라도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고 몇 번 말해, 내가?”
임상시험 대상자들의 신상정보를 나열한 서류 역시 모두 거짓투성이였다. 열 명 정도는 자발적 참여자였지만, 나머지는 모두 홍주원의 사람으로 정상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증거를 제시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서인은 빼도 박도 못하고 매장당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자신이 없어?”
“뭐?”
서인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주원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툭 내뱉었다. 자존심을 짓밟는 말에 발끈한 서인은, 계약은 오늘로써 끝이라고 통보하며 등을 돌렸다.
“성공하면 되는 거야. 약이 성공해서 부작용 없이 남자가 임신한 사례가 두세 번 정도 나온다면 성과에 관해서 떠드는 비율이 더 높겠지. 한눈판 사이에 증거는 만들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런 거 한두 번 해본 것도 아니면서 왜 그래? 겁도 많다. 그 고기는 어떻게 처먹나 모르겠네.”
맞는 말이다. 성공한다면 걱정할 필요 없는 일이다.
임상시험 대상자야 돈을 주고 매수한 뒤 입단속을 시키면 될 일이고 영상 역시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다. 만에 하나가 틀어질까 봐 예민하게 굴던 서인은 어느 정도 수긍은 했지만, 그래도 영 불안했다.
단 한 명이라도 좋으니 미리 영상을 촬영해두고 증거를 확보해두고 싶었다. 한 번 실패한 경험이 있기에 더 치밀해야 했다.
“아무리 그래도 연구소에서 머물렀던 사람 중 한 명 정도는 증거로 두고 싶은데.”
“저, 저기 안녕하세요?”
저 멀리서 둘의 이야기를 엿들으며 차를 내오던 한 남자가 쭈뼛쭈뼛 다가와 서인에게 인사를 건넸다.
서인은 정상적으로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 기대감에 찬 얼굴로 고개를 돌렸으나 머리에 새카만 비닐을 뒤집어쓰고 눈과 입만 내놓은 모습을 보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저, 저기…. 그, 그거 제, 제가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기, 긴장하면 말 더듬는데…. 호, 혼자 있으면 괜찮거든요….”
“여기엔 다 정신 나간 놈들밖에 없나?”
“고위 간부 빼고는 다 그렇지. 그나마 얘는 정상인데? 얘로 하는 게 어때?”
정신 나간 놈들이라는 말에 검은 비닐을 쓴 남자가 움츠러들었다. 제 험담을 하는 건 알아듣는 모양이다.
서인은 남자의 손에서 찻잔을 빼앗아 그대로 집어 던져버렸다. 괜한 화풀이에 놀란 그가 눈물을 글썽이며 몸을 떨었다.
“말더듬이 데리고 뭘 하겠냐고. 내가.”
서인은 일이 생각대로 진행되지 않으니 점점 폭력적으로 변했다. 어차피 이미 제정신이 아닌 놈들이니 죽여도 상관없지 않으냐며 비닐을 쓴 남자의 머리채를 붙잡고 벗겨내려 했다.
“흐, 윽…. 아파요, 아파요! 아, 아파! 잘못했어요! 저, 저는 아직, 윽, 나이는 아마도 스무 살이고, 흑…. 다 잘할 수 있어요!”
“…….”
죽일 생각으로 짓밟던 서인은 갑자기 말을 잘하는 남자를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조금만 교정하면 시키는 대로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훌쩍훌쩍 울던 남자는 발길질이 멎자 곧바로 무릎을 꿇고 바닥에 머리를 처박았다.
“너, 글자 읽을 줄 알아?”
“많이, 많이 어려운 말 아니면 읽는데요….”
상처가 가득한 새하얀 손등이 파르르 떨렸다. 가려지지 않은 그의 몸을 살핀 서인은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며 남자의 목을 움켜쥐었다.
“말 제대로 해 봐.”
“말 제대로 하고 있어요….”
바짝 긴장한 그는 제 목을 붙잡은 서인의 손을 감싸 쥐며 바들바들 떨었다. 얇은 옷을 입고 있어 속살이 다 비쳤는데 조금만 힘을 주어도 몸이 붉어질 정도로 피부가 약하고 부드러웠다.
“옷 벗어봐.”
“네, 네!?”
서인은 그럴 상황이 아님을 알지만, 왠지 모르게 남자의 벗은 몸이 궁금해졌다. 목소리도 나쁘지 않고 덜덜 떠는 모습이 꽤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비닐을 벗기려고 하자 주원이 다가와 그를 막아섰다.
“왜.”
“얜 그런 애 아니야.”
서인은 정색하며 저를 막아선 주원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연구원들과 대상자들은 함부로 대해도 된다던 그가 타인을 싸고도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분명히 무언가 있다고 생각한 서인은 남자에게 비닐을 벗으라고 강요하며 곤란하게 만들었다.
“마음대로 해도 된다며.”
“얜 간부야. 총관리자.”
“거짓말하지 마. 사내놈이잖아?”
서인은 그가 높은 직의 관계자들을 모두 여성으로 구성해놓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숨기려고 하면 할수록 더 알고 싶은 법. 서인은 계속해서 얼굴을 드러내라고 말하며 남자를 몰아붙였다.
“시, 싫어요! 저는 수장님 말만 들을 거예요!”
“수장이랑 소장도 구분 못 하는 놈을 왜 감싸고 돌까?”
서인은 온 힘을 다해 저를 밀어내는 주원의 행동에 어깨를 으쓱댔다. 남자라면 학을 떼는 그가 색다른 반응을 보이자 괜히 더 관심이 갔다. 비닐이 부스럭댈 정도로 떨던 그는 서인이 강하게 노려보자 금방 기가 죽었다.
“대본은 대욱이가 써줄 거니까. 그거 보고 읽으라고 해. 그런데, 얼굴에 비닐 쓰고 녹화는 못 한다?”
“네, 네!”
주원에게 한 말인데 남자는 제게 한 말로 알았는지 몸을 벌떡 일으키고 대답했다. 서인은 그간 묵었던 스트레스가 한 번에 해소되는 해방감에 고개를 뒤로 젖히고 긴 숨을 내뱉었다.
❀❀❀
“괜찮으십니까?”
“괜찮고말고. 기분이 너무 좋네.”
약물 투여를 위해 옷을 갈아입고 몸을 소독한 서인은 녹화 준비를 하는 남자를 보며 킬킬댔다. 손에 딱 달라붙는 불편한 장갑을 착용한 서인은 남자가 대본을 다 외울 때까지 팔짱을 끼고 기다렸다.
“저, 저, 는…. 김, 김….”
기분이 좋았던 그는 남자가 그리 어렵지도 않고 긴 글도 아닌데 도무지 집중하지 못하는 탓에 서서히 지쳐갔다.
“자꾸 카메라를 보고 지랄이야, 환장할 노릇이네.”
단순 카메라를 보는 거라면 크게 상관없었지만, 남자는 눈치를 보는 데다가 손톱까지 뜯으며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다. 누가 봐도 억지로 시키는 것처럼 의기소침한 얼굴로 말을 더듬기도 했다.
“비, 비닐 다시 쓸래요….”
“입 다물어 버러지 같은 새끼야.”
계속해서 머리에 비닐을 쓰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탓에 마스크와 모자로 타협을 본 서인은 울먹이는 그의 머리통을 내리쳤다. 덩치는 산만 하면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았다고 의자에서 떨어져 나가 훌쩍대는 꼴이 우습기 짝이 없었다.
“이딴 쓰레기한테 총괄 자리를 줬다니, 너도 감 많이 죽었나 봐? 아니면 저 자식한테 다른 마음이 있다거나.”
“되지도 않는 거 떠보지 마. 내가 사내놈이라면 혐오부터 하고 보는 거, 대표님이 제일 잘 알지 않나.”
“그럼 대본이나 똑바로 외우라고 해. 머리에 비닐은 도대체 왜 쓰고 있는 건데?”
서인과 주원이 대화를 나누는 짧은 시간 밖으로 기어 나와 비닐을 머리에 쓴 그는 바보같이 웃으며 서인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그는 비닐을 뒤집어쓰고 나서야 자신감이 생겼는지 제 자리에서 폴짝폴짝 뛰며 해맑은 아이처럼 행동했다.
“이제 잘할 수 있어요!”
제 자리에서 방방 뛰자 얇은 바지를 입은 탓에 성기의 윤곽이 그대로 드러났다. 큰 덩치와 성기와는 전혀 딴판인 행동에 이질감을 느낀 서인은 그의 손을 쳐내고 장갑을 벗어 던졌다.
“만지지 마. 소독 다시 해야 하잖아. 정말 도움이 안 되네…. 하.”
더러운 손으로 제 몸을 만지고 유아 퇴행적인 행동을 보이는 남자에게 질려버린 서인은 더는 화낼 힘도 없을 정도로 지쳐 머리를 쓸어넘기며 신경질을 냈다.
“담배.”
“예? 내부에 직접 들어가셔야 하지 않습니까? 이제 금연하셔야 합니다.”
머리끝까지 화가 차올랐는데 담배도 피울 수 없게 되자 서인은 헤실헤실 웃는 남자의 허벅지를 발로 걷어차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흐, 앙!”
“…….”
성행위를 하는 것도 아닌데 남자는 이상야릇한 신음을 내며 뒤집혔다. 목석처럼 반응 없는 사람을 걷어차는 것보다는 훨씬 재밌었지만,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머리에 비닐을 뒤집어쓴 남자와 흰 가운을 입은 서인의 모습이 싸구려 포르노를 연상했다.
“모자이크 처리를 하든 뭘 하든 상관없으니까 대본 외우게 해. 나 오래 있을 시간 없어.”
“예, 알겠습니다.”
주원은 남자의 능력치가 거기까지라는 무책임한 말을 남기고 상황을 구경만 하고 있었기에 서인은 대욱에게 일을 맡기고 실험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임상시험을 하는 순간은 그 역시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정상이 아닐 건 알았지만, 생각보다 더하네요.”
“이거 되겠습니까, 대표님?”
주원의 연구소에서 근무하는 직원들과 의료진도 실험체의 상태가 그리 좋지 못한 것을 확인하고 난감해했다. 대부분 정신적으로도 건강하지 못했고 신체적 상태도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영양소 결핍인 개체들도 몇 개 있는 거 같은데요.”
“…일단 정상적인 놈들로만 진행하죠.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그래도 결과는 도출해낼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직원들은 서인의 표정이 굳자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신체적 상태가 양호한 사람들만 모아 따로 추리기 시작했다. 영상은 비닐을 쓴 남자가 해결하기로 했으니 정신건강이 어떻든 상관없었지만, 신체적으로 컨디션이 나쁜 것은 위험이 컸다.
“그 전에 동의서에 지장 날인부터 시키세요.”
“지장으로 진행합니까?”
“제 이름도 모르는 것들이 사인을 알기나 하겠습니까?”
“아…. 예, 알겠습니다.”
서인은 어느 정도 말이 통하리라 생각하고 사전에 준비해온 동의서와 중요 사항이 기재된 서류를 직원에게 건넸다. 연구원들이 직접 엄지에 인주를 묻혀 지장을 찍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시험에 위약 또는 이미 시판 중인 치료가 관련되는가, 치료가 어떠한 방법으로 나에게 투여될 것인가, 시험 치료에 대해 이미 알려진 것은 무엇이며 어떠한 시험 결과가 도출된 적이 있는가, 치료가 나에게 효과가 있다면, 시험이 끝난 후에도 계속해서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가.”
“그만하고 진행해요. 어차피 알아듣지도 못합니다.”
동의서류의 내용을 줄줄이 읽던 의료진은 서인의 말에 입을 다물고 그나마 정상적인 사람들을 데리고 실험실로 걸음을 옮겼다.
뭣도 모르고 강제로 지장 날인 하게 된 실험자들은 소독을 마친 뒤 옷을 갈아입고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겉보기에 비위생적이라 그렇지 검사 결과상 상태가 좋은 실험체들이 꽤 있었습니다. 총 60명으로 추려졌으며 약물의 반응을 보기엔 충분합니다. 진행해도 되겠습니까, 대표님?”
“예, 진행하세요.”
부작용으로 실패했을 때, 이미 영장류에 대한 시험과 임상 0까지 마친 상태였다. 곧바로 Phase 1을 진행하면 되었는데, 의료진들은 이상하게 전 단계부터 진행하려 했다. 사전에 통보했던 것도 딴판인 진행 상황에 서인은 미쳐 돌아갈 지경이었다.
“선택적으로 진행하는 시험을 지금 왜 하는 겁니까. 사전시험이잖습니까.”
“아, 절차를….”
“지금이 절차 따질 땝니까? 세세한 절차를 따질 거였다면 애초에 홍주원이 준비한 실험체를 사용하지 않았겠죠.”
Phase 0은 실패 가능성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 애초에 이미 결과가 도출된 것인데 소수의 실험체에 소량의 약을 투여하고 있는 모습을 보자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죄송합니다.”
“지금 추린 놈들한테 최대 투여량부터 확인하세요. 조금씩 증량해야 하는 건 모르지 않죠?”
“예, 알고 있습니다. 대표님.”
서인은 제가 기본적인 사항까지 알려줘야 하는 이 상황이 답답했다. 전에 진행했던 연구 의료진과는 다른 팀이었기 때문에 신뢰가 떨어져 영 마음이 가지 않았다.
멱살을 부여잡고 싶은 충동을 애써 억누른 그는 실험실 밖으로 나와 열심히 대본을 외우는 남자를 훑어보며 한숨을 쉬었다.
“대표님,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대본은. 다 외웠대?”
“한글이 서툴다고 합니다.”
대욱의 말을 따르면 남자는 말을 배워 일상적인 대화는 할 줄 알지만, 글을 읽고 쓰는 것은 영 부족하며 조금이라도 어려운 단어를 보면 사시나무 떨듯 벌벌 떤다고 한다.
서인은 아무리 가르쳐봐도 달라지는 게 없다는 보고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남자의 앞으로 향했다.
“야.”
“네!”
그는 서인의 부름에 군기가 빠짝 든 사람처럼 자세를 바로 하고 웃으며 대답했다. 어찌나 해맑게 웃는지 비닐에 가려진 볼이 둥그렇게 올라왔다.
줄글을 읽게 하는 것보다 말을 따라 하게 하는 게 더 쉽지 않을까 싶어 남자의 앞에 놓인 의자에 앉은 서인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대본을 읽었다.
“내가 하는 말 그대로 따라 해. 임상시험에 참여하게 된 계….”
“내가 하, 하는 말 그대로 따라, 악!”
초등학생이 자기소개하는 톤으로 열심히 따라 하던 남자의 고개가 반대쪽으로 돌아갔다. 그는 뻐근한 목덜미를 두어 번 문지르다가 다시금 제 얼굴을 내리치는 서인의 손을 피하며 흐느꼈다.
“아직 말 안 끝났고.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어. 더듬은 적 없지?”
“네, 네….”
“똑바로 말해야지. 세 번 기회 줄게. 그래도 안 되면 또 맞는 거야.”
얼굴을 가렸음에도 남자가 겁에 질려있는 것이 느껴졌다. 서인은 대본을 가지고 와 그의 앞에 내려놓고 감정 없이 천천히 읽었다. 무릎을 꿇고 앉은 남자는 영어 단어나 어려운 말이 나올 때마다 몸을 덜덜 떨며 울먹였다.
“따라 해.”
“저는 스물다섯 김태영이입니다….”
“김태영!”
서인은 수준에 맞춰 느리게 읽어주었는데도 아이처럼 말하는 남자를 구석에 몰아넣고 고함쳤다. 때리는 것보다 더 두려워하는 그의 반응을 보며 서인은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말해, 얼른.”
“저는 스물다섯 김태영입니다. 흐…. 임상시험에 차, 참여하게 된 이유는….”
“제대로 앉아.”
“네, 네?”
“벽에 등 기대고 손 뒤로 모아. 허리 똑바로 펴고.”
남자는 애초에 말을 잘하지 못했고 기본적인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이었기에 몇 시간 만에 완벽해지기엔 어려움이 따랐다. 그러나 서인은 그러거나 말거나 제 방식을 그대로 적용하며 강요했다.
“큭! 악! 흐, 윽…. 하아, 하….”
구둣발로 명치를 짓밟힌 남자는 가슴께를 부여잡고 상체를 숙였다. 그럴 때마다 서인이 억지로 고개를 들게 하고 지속해서 제 말을 따라 하게끔 교육했다.
“틀리면 또 맞아. 할 수 있어. 지금 네가 틀리는 이유가 뭔 줄 알아?”
“으, 흐…. 아파, 아파….”
서인 역시 아버지에게 맞으면서 자라왔고 그가 원망스러웠지만, 우습게도 확실히 신체적인 위협을 가하면 힘을 발휘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기에 남자를 폭력으로 다스렸다.
“노력을 안 해서 그래. 앞으로 일어나는 나쁘고 아픈 일들은 다 네가 잘못해서 그런 거야.”
모든 것을 남 탓으로 돌리는 못돼먹은 말버릇도 함께였다.
서인은 남자의 턱을 움켜쥐고 그를 따라 하듯 방긋 웃으며 다시금 글을 읽기 시작했다. 그저 도움이 되고 싶다는 순수한 마음으로 돕겠다고 나섰던 남자는 이제 못하겠다며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세상에 못 하는 건 없어. 남자도 임신하는 시댄데 네가 못 할 건 뭐야? 할 수 있어. 응?”
말만 듣자면 위로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협박이었다. 칭얼거리며 징징 짜던 남자는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받아들고 서인의 입술을 보며 열심히 입을 움직였다.
“저는 스물다섯 김태영이고 임상시험에 참여하게 된 이유는….”
“계기.”
“계기! 계기는, 계!”
또 한 번 틀리게 되자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커다랗게 뜨고 말을 고쳤다. 때리고 힐난하자 남자는 처음 도전할 때보다 더 말을 더듬고 힘들어했다.
“저는 스물다섯 김태영이고 임상시험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간단히 아뤠베으터.”
“아르바이트.”
“아르붸이터….”
“후….”
때릴 것처럼 손을 들어 올렸던 서인이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자 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 봐야 비닐 위를 쓰다듬는 거라 바스락거리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지만, 남자는 칭찬을 받아 신이 난 개처럼 꼬리를 흔들었다.
“네가 잘하면 예뻐해 줄 거야.”
과도한 폭력과 협박 속에 적절한 칭찬이 섞였다. 좋아할 만한 일도 아니고 옳은 행동도 아닌데 그는 칭찬을 처음 받아보는 것처럼 신이나 몸을 가만히 두지 못했다.
“여, 열심히 할게요!”
남자는 자그마한 보상을 얻기 위해 입술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긴장을 풀었다. 눈과 코만 뚫려있는 탓에 시선이 아래쪽으로 향했다.
통통하고 옅은 입술에 피가 맺힌 모습이 서인에게는 꽤 매혹적으로 다가왔다. SM 플레이를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니 얼굴에 비닐을 쓴 정도로 흥분이 식는다거나 하지 않았다.
“입술이 원래 그래?”
“입술…? 사, 상처가 옆에 있긴 해요….”
“상처?”
서인은 비닐을 가로로 길게 찢어 남자의 입가를 확인하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흉하네.”
“아, 죄송해요….”
입가에 길게 남은 상처가 흉하다는 말에 남자가 정신없이 움직이다가 마땅히 가릴만한 도구가 없자 고개를 푹 숙이고 입술을 깨물었다. 상처받은 걸 알아도 서인은 사과할 이유가 없었기에 계속 대본을 읽게 했다.
♦ ♢ ♦
“안녕하십니까, 저는 스물다섯 김태영이라고 합니다. 예, 제가 임상… 시험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저 역시도 임신을 계획하고 있으므로 하루빨리 약이 상용화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대본을 읽는 티가 나긴 했지만, 처음에 비해선 말도 안 되게 발전한 편이다. 대본도 남자의 수준에 최대한 단순하게 맞춰 다시 쓰였다.
일반인에게 카메라를 들이대면 열에 아홉은 긴장하기 마련이니 조금 더듬는 것 정도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주변인들은 몸에 이상이라도 생기면 어쩌냐고 만류했지만, 어디까지나 제 서, 선택이니 후회하지 않습니다. 또 평소 SI 바이오에 신뢰도 있었으니 개의치 않습니다.”
움직일 때마다 비닐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최대한 움직이지 말라고 했건만 남자는 대사에 집중하다 보니 온몸으로 제 불안을 드러냈다. 정신 사나울 정도로 움직일 때마다 서인이 눈치를 줘도 그는 멈추지를 못했다.
“하….”
서인이 한숨을 쉬며 등을 돌리자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우왕좌왕하는 몸짓이나 떨리는 목소리 때문에 강제로 촬영하고 있음이 숨겨지지 않았다.
“끊고 다시. 방금 부분만 자르고 앞에건 붙여 쓰죠.”
“예.”
서인이 촬영을 중단하고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자 남자가 책상에 머리를 내리찧으며 소리쳤다. 잘못했다고 비는 목소리가 얼마나 처절한지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그는 서인이 제게 다가오기 전, 마구 대사를 읊으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 이, 임신을 원하는 남성들이 많은데 임상시험 표본이 부족해서 진행이 안 된다고 하니 저라도 나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부상이 발생하는 경우 의학적 치료의 이용 가능 여부에 대한 설명도 충분히 받았으며 중도 포기해도 어떠한 불이이도….”
“다시 해야 하니까 그만.”
서인은 자연스러운 척 손동작까지 해가며 열심히 말하는 그에게 다가가 입을 틀어막았다.
제 잘못은 아는지 그는 의자에서 내려오는 과정을 생략하고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무언가 아작나는 소리에 놀란 서인이 무릎을 살피자 그는 아픈 것도 모르고 엉엉 울며 매달렸다.
“잘못했어요! 그게, 그게…. 그, 그쪽을 안 보면 긴장이 돼서!”
“내가 볼 때 더 긴장해야지. 안 보는데 왜 긴장해? 그래, 알았으니까 다시 해봐. 그리고 불이이가 아니라 불이익.”
“불이익….”
남자가 제대로 발음하자 서인은 개를 칭찬하듯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바들바들 떨던 남자는 눈물 한 방울을 툭 떨어뜨리며 눈을 커다랗게 떴다.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가녀린 모습에 서인은 순간 웃음을 터뜨렸다.
“저, 저를 왜 쓰다듬어 주셨어요?! 좋아하시는 거예요!?”
놀란 남자는 문장에 맞지 않는 말을 하며 서인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저 효과적으로 세뇌하기 위한 행동일 뿐인데 그는 고백받은 소년처럼 부끄러워하며 몸을 배배 꼬았다.
“내가 너를 좋아하냐고?”
“네!”
“어느 부분에서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서인은 좋아한다는 말은 많이 들어봤어도 이런 상황은 처음인지라 남자에게 묘한 흥미를 느꼈다. 얻어맞고 벗으라는 희롱까지 당한 주제에 도대체 어디에서 애정을 느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잖아요!”
“허.”
그는 다시금 제게 머리를 들이밀며 쓰다듬어달라고 요구하는 남자를 두고 코웃음 쳤다. 머리 좀 쓰다듬어줬다고 그런 발칙한 생각을 한다니, 밥이라도 사주면 몸까지 대줄 인간이었다.
“그래, 귀엽네. 그래도 한 번만 더 틀리면 또 맞는 거야.”
“앞에 건 잘했어요!?”
“그래.”
폭행 예고에 몸을 움츠리던 그는 서인의 말을 여러 번 곱씹어보더니 빙그레 웃으며 신이 났다.
별거 아닌 칭찬에 기뻐하는 모습을 보던 서인은 어깨를 들썩였다. 과한 채찍질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칭찬에도 기뻐하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찝찝했다.
“불이익, 표본. 다시 발음해봐.”
“불이익, 표본!”
“잘하네.”
반응을 살피기 위해 다시금 칭찬한 서인은 그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방방 뛰는 모습을 보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불쌍하다기보다는 웃음이 절로 나올 정도로 한심해서 때릴 가치도 없게 느껴졌다.
“뭐 사탕 같은 거 있나?”
서인은 어린아이 같은 남자에게 적당한 보상을 주기 위해 대욱에게서 사탕을 받아냈다. 박하 향 사탕을 과연 먹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는 아이처럼 행동했다.
“자, 너 먹어라.”
“앗!”
사탕으로 이마 중앙을 얻어맞은 남자는 아파하면서도 서인의 호의에 설레어 몸 둘 바를 몰랐다. 먹으라고 준 걸 바지 주머니 속에 넣어두고 카메라에 손짓하며 자신 있다고 소리친 그는 대신 서인에게 저를 끝까지 지켜봐달라고 부탁했다.
서인은 짜증스러운 얼굴로 손을 닦아내며 한숨을 쉬었다.
“피곤한데….”
약물 투여가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지도 확인해야 했고 기록지도 살펴야 하는데, 남자는 계속 같이 있어 달라 정신없이 조르며 매달렸다. 하도 애원하는 나머지 어쩔 수 없이 그의 촬영 장면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예, 어떠한 불이익도 따르지 않음을 명시 받았고 참여자들에 대한 예측 가능한 위험성 및 불편함에 대한 설명도 충분히 들었습니다.”
남자는 여태까지 일부러 심술을 부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안정적이었다. 자꾸만 서인을 바라보며 얼굴을 붉히는 점만 빼면 전혀 부족할 게 없었다. 미소까지 지으며 성공적으로 촬영을 마친 그는 문을 벌컥 열고 나와 다짜고짜 서인의 허리를 껴안았다.
“잘했죠!”
“치워.”
서인은 장갑을 착용하고 있었기에 손을 잡는 것 정도야 눈 감아 줄 수 있었지만, 허리를 껴안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남자가 어디에서 구르다 온 놈인지도 모르고 손에 상처도 가득한 데다가 전체적으로 때 타 있었기 때문이다.
“어딜 더러운 몸뚱이를 들이대?”
“씻었는데! 저를 좋아하시는 거 아, 아니었….”
서인은 억울한 표정을 짓고 열심히 호소하는 남자의 말을 무시하고 자리를 떴다. 촬영도 했고 얻을 건 다 얻었으니 이 이상의 호의를 베풀어줄 필요는 없었다.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서인이 떠나버리자 남자는 충격에 빠진 얼굴로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좋아한다고 했, 했으면서 너, 너무해….”
남자는 머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는 이유로 서인이 저를 좋아한다고 착각했다. 이별 통보라도 받은 것처럼 괴로워하던 그는 문 쪽으로 슬금슬금 다가가 서인을 따라가려 했다.
“아악!”
“어디 가십니까.”
그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던 대욱은 남자를 가로막으며 어깨를 세게 움켜쥐었다. 혼자 중얼거리며 울다 웃었다 반복하는 꼴이 서인에게 위험을 주기에 충분하다고 판단했기에 그냥 둘 수 없었다.
“왜, 왜 이래! 우리는 운명이야!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고!”
서인의 앞에서는 순진한 모습을 보이던 남자가 순식간에 얼굴을 굳히고 눈을 부라렸다. 오늘 처음 만난 사이면서 운명일지도 모른다는 소름 끼치는 말을 내뱉은 그는 정신없이 헐떡이며 발을 동동 굴렀다.
“대표님께서 당신 같은 싸구려에 마음을 둘 리가 없습니다. 냄새나고 모자란 것을 가장 싫어하시는 분이니까요.”
경고해도 알아듣지를 못하니 대욱은 일부러 모진 말을 하며 그를 몰아붙였다. 잠시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불안해하던 남자는 금세 감정을 갈무리하고 대욱에게 얼굴을 들이밀며 마구 고함을 쳤다.
“나, 나는 남자 안 무섭거든? 그리고 다, 당신 대표가 나 좋아한다고 했는데! 뭔데 방해해!? 죽여버리고 싶게!”
그는 서인의 말에 껌뻑 죽고 얻어맞으면서 엉엉 울었던 주제에 남자가 무섭지 않다는 헛소리를 하며 고집부렸다. 목에 손톱을 세워 벅벅 긁으며 어찌할 바를 몰라 벌벌 떨기도 했다.
“으으…. 짜증 나, 짜, 짜증 나!”
대욱은 제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남자를 던지듯 밀어버리고는 서인이 있을 연구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안 그래도 일에 지쳐 힘든 그의 곁을 지키며 남자가 아예 다가오지도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어, 촬영은.”
연구실 앞 의자에 앉아 보고서를 살피던 서인은 대욱을 보자마자 서류를 내려놓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가 과보호하고 자꾸만 선을 넘는 것이 싫다고는 했지만, 함께 지낸 세월이 있었기에 대욱에게는 풀린 모습을 종종 보이곤 했다.
대욱은 서인에게 캠과 음료를 건네주며 자연스레 옆자리에 앉았다.
“예, 대표님, 자료는 편집 단계에 있고 홍주원 소장과 계약서도 작성했습니다.”
“수고했어. 이쪽도 뭐…. 나쁘지 않아. 결과야 3차까지 진행해봐야 아는 거고.”
“그럼 내일도 여기 오셔야 합니까?”
“아니, 직원들한테 부탁했어. 겉보기엔 꽤 연구소 모양을 갖췄으니…. 홍주원이 알아서 해주겠지.”
서인도 실시간으로 피드백을 주며 직접 확인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지만, 회사 일도 바쁘고 고기 사업 건도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기에 매일 같이 들르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또 대표가 옆에서 이래라저래라 간섭하면 연구원들의 능률이 떨어진다는 것을 알기에 가끔 일정이 빌 때만 경과를 보기로 했다.
“저도 가끔 와서 거들겠습니다.”
“뭐, 그러든지. 이제 가야겠는데. 황 사장이랑 저녁 약속이 있어서.”
“아, 대기하도록 하겠습니다.”
♦ ♢ ♦
대욱이 출발 준비를 할 동안 연구원들에게 당부하고 돌아온 서인은 반짝이는 눈으로 저를 응시하는 남자를 곁눈질했다. 그는 서인의 시선에 소변이 마려운 개처럼 이리저리 정신없이 돌아다니며 불안해했다.
“가?”
“어.”
서인은 주원에게 대충 손짓하고 남자를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그는 연구실 문 뒤에 숨어 눈만 빼꼼 내민 채로 서인을 훔쳐보다가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울상으로 궁둥이를 문지르고 있는 남자에게 다가간 서인은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귓속말을 했다.
“네, 네?”
“너, 밥 잘하냐고.”
서인의 의도를 알 수 없는 질문에 남자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느라 바빴다. 눈을 정신없이 굴리며 입술을 우물대고 발을 동동 구르기도 했다. 서인의 인내심이 바닥이 날 때쯤에야 대답이 돌아왔다.
“자, 잘해요! 드시고 가세요! 저 잘해요! 만족시켜드릴 수 있어요! 저 잘해요! 잘해요!”
상황을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오해하기 딱 좋은 말이다. 서인은 잘한다며 폴짝폴짝 뛰는 남자에게 거짓으로 웃어 보였다.
“그래, 그러니까 맛있게, 깨끗하게 만들어. 알았지.”
“네! 금방 해 올 테니까 저, 저기서 쉬고 계세요!”
남자는 밥을 해오라는 말이 뭐가 그리 좋은지 비닐이 당길 정도로 기쁘게 웃었다. 빠른 걸음으로 사라진 남자의 모습을 본체만체하고 등을 돌린 서인은 그대로 연구소를 떠났다.
“소독제 여기 있습니다.”
차에 올라탄 그는 대욱이 말을 하기도 전에 물티슈와 소독약으로 손을 닦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대욱은 자연스레 서인의 업무용 휴대전화를 건네며 황 사장과의 만남 장소와 일의 진행 단계를 보고했다.
“황구혁 사장 측에서 먼저 연락이 왔습니다. 대표님 자택과 가까운 위치의 룸입니다.”
“…anns가 아니고?”
남성 임신 약물을 제외하고도 서인이 계획해 둔 사업은 많았다.
그중 약과 비슷한 비중을 차지하는 주류와 육류 사업이 진행 중인데, 화류계를 대상으로 천천히 입지를 넓혀가고 있었다. 목표 관할 구역의 룸과 가게들은 모두 계약서를 작성하였는데 ‘anns’라는 이름의 가게가 서인의 발목을 붙잡았다.
“예, 아무래도 아직 그쪽은 설득하지 못한 모양입니다.”
서인이 황 사장과 협력하는 것도 그에게 anns를 제외한 국내 화류계를 관리하는 권한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쁜 일정을 뒤로하고 만나는 것도 모두 일의 과정을 보고 받기 위함이었다.
“아직도? 돈 받아 처먹으면서 뭘 하는 건지 모르겠군…. 우선은 만나보지.”
“예.”
최근 황구혁이 사장님 소리를 들으며 이곳저곳 들쑤시고 다닌다는 것을 아는 서인은 침대에 드러누워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이 건은 시간이 걸리리라고 예상은 했지만, 척척 진행되지 않자 짜증이 났다. 정말 말이 안 되는 사업인가 하는 부정적인 생각이 들기도 했다.
“…….”
어둡고 긴 생각은 마음을 좀먹을 뿐이다. 서인은 고개를 가로젓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 ♢ ♦
황 사장이 정한 장소에 도착한 서인은 멀리서부터 풍기는 역한 향수 냄새에 인상을 찌푸리고 술만 들이켰다. 몇 달 만에 마주한 그는 어울리지도 않는 금덩이로 몸을 치장하고 살이 뒤룩뒤룩 쪄 보기 싫을 정도였다.
“하하하! 대표님께서도 한 번 안아 보시지 그래요? 확실히, 읏! 조임이 좋구먼.”
“…….”
평소 남성과의 유흥을 즐기는 황 사장이 정한 장소인지라 깨끗하지 않을 것은 미리 알고 있었지만, 그는 생각보다 더했다. 룸에 들어 온 남자들을 모두 벗기고 서인의 앞에서 성관계를 맺으며 이야기를 나누었기 때문이다.
“하아, 후…. 그래서. 약 개발은 잘 되어 가나 모르겠습니다?”
“재개발 구역에 있는 술집은 어떻게 됐습니까.”
평생 그리 살아온 놈인데 지적해봐야 뭣 하나 싶어 서인은 그의 행동에 딱히 말을 얹지 않았다. 일의 경과를 듣고 가능한 한 빨리 이 더러운 공간을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만 굴뚝같았다.
업무 질문에 황 사장은 이상한 신음을 내며 성기를 빼내고는 옆에 놓인 티슈로 대충 닦으며 실실댔다.
“아 anns? 그거야 뭐…. 오늘 내로도 가능하지요.”
노인의 쪼그라든 성기를 눈앞에서 보게 된 서인은 치미는 구역감에 인상을 썼다. 조금 전까지 황 사장의 성기를 사탕처럼 빨던 남자가 이제는 서인의 옆구리에 달라붙어 되지도 않는 애교를 피워가며 몸을 흔들었다.
“어머머,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나는 전혀 모르겠다! 뭐, 이제 자주 못 온다는 거예요?”
“허허허! 우리 연이 보러 와야지. 왜 안 오겠어! 똑똑한 건 매력 없어, 알지?”
서인은 짜증이 그득한 얼굴로 옆구리에 붙은 남자를 떼어냈다.
다 큰 놈이 콧소리를 내며 교태를 부리는 게 싫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연기하는 게 역겨웠다. 그는 가게에서 가장 지목이 많은 선수였다. 변호사, 기업 총수 등을 상대하니 들어온 정보만 해도 장난이 아닐 터인데 순수함을 위해 연기하는 꼴이 서인에게는 우스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빨리 진행해주시죠.”
황 사장과의 거래는 재개발 구역 B-04에 놓인 대규모의 룸 술집만 포섭하면 끝이었기에 길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는 서인이 원하는 대답을 피하고 능글맞게 웃으며 자꾸만 말을 흐렸다.
“아이, 권 대표님. 젊은 사람이 왜 그렇게 급해요? 천천히 느긋느긋하게 물 흐르듯 지나가면 되는 거 아니겠어요, 네?”
술병을 지분거리는 엄지손가락, 차오른 유흥 살, 여러 갈래로 나뉜 눈가의 주름 등 모두 개인의 특성이었지만, 이미 황 사장을 부정적인 시선으로 보는 서인에게는 불쾌하게만 다가왔다.
용건만 해결하면 될 것을 이런 말도 안 되는 헛짓거리에 낭비하는 시간이 아까웠다.
“내가 황 사장에게 투자하는 이유 잊으신 건 아니겠죠.”
“그럴 리가 없지요.”
“그럼…. 배때기에 기름칠 좀 했더니 정신이 없는 건가?”
음흉하게 웃으며 농담 따먹기를 하던 황 사장은 서인이 사납게 인상 쓰자 바지 지퍼를 올리며 그의 잔을 채웠다.
제 회사가 서인의 투자로 돌아가고 있음을 모를 리가 없는데 그의 말마따나 배에 기름칠을 많이 해서 그런지 잠시 정신이 나갔던 모양이다.
“그, 그게 아니라. 어차피 다 잘 될 거 급히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그랬죠. 여기에서는 제가 탑이잖습니까.”
“anns를 중심으로 각 구역 룸에 유통을 보증하기로 하셨지 않습니까. 다른 건은 다 따냈으면서 anns만 부재인 것은 시도도 안 해본 것 아닙니까?”
서인에게만 유리한 계약도 아니었다. 계획대로만 해주면 황 사장은 평생 유흥을 즐기다 죽어도 될 만큼의 재산을 받을 수 있었고 부도난 회사도 충분히 일으켜 세울 수 있다.
그런 막대한 보상에도 움직이지 않으니 서인은 슬슬 화가 났다.
“그건 아니고….”
“황 사장은 굉장히 건방지네요. 역시 출신은 못 속이는 건가.”
서인은 더 들을 가치도 없다며 대욱에게서 자그마한 칼을 받아들었다. 황 사장이 조직 출신이니 그에게 걸맞은 방식으로 대화해 줄 생각이었다.
그때까지도 두 팔을 소파 등받이에 걸치고 다리를 꼬고 있던 황 사장은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됐는지 자세를 고쳐 앉고 서인을 바라보았다.
“자.”
“예, 예?”
서인은 그런 그의 앞에 칼을 던져두고는 대욱에게 손짓했다. 도저히 저 더러운 손을 만질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욱은 실례하겠다는 말과 함께 황 사장의 몸을 단단히 결박했다.
“뭐, 뭐 하는 거야! 놔! 놔!”
“왜. 그쪽 생활하면서 손가락 자르는 것 정도는 많이 봐왔을 거 아니에요. 새삼스럽게.”
서인은 아무래도 제 손에 피 묻히는 것은 싫다며 옆에 앉아 벌벌 떨고 있는 연에게 칼을 쥐여주었다. 고전적이고 세련되지 못했지만, 효과가 확실하고 자존심을 짓누르기엔 딱 좋은 방법이었다.
“네, 네? 대, 대표님…. 저는 이런 거 못, 못해요….”
“해. 네 거 자르는 것보단 낫잖아.”
손에 칼을 쥔 연은 몸을 덜덜 떨며 서럽게 흐느꼈다. 몸뚱이에 그의 손가락은 물론 성기까지 처박았던 주제에 절단하는 게 뭐라고 저리 떠는지 서인은 이 상황이 귀찮았다.
대욱은 돼지처럼 앓는 황 사장의 입을 틀어막고 연에게 손가락 자르는 방법을 차근차근 가르쳐주었다.
“한 번에 하시는 게 더 편할 겁니다. 아무 생각 없이 자르시면 됩니다.”
“모, 못해…. 못해요.”
“하세요.”
서인은 울고불고 벌벌 떠는 그들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바라보았다. 시간이 흘러도 연이 움직이지 않자 짜증이 난 그는 칼을 빼앗아 들고 보란 듯이 높이 들어 올렸다.
“아, 하, 하겠습니다! 지금 당장, 다, 당장 하겠습니다. 하겠습니다, 하겠습니다, 아악! 악!”
황 사장은 그러거나 말거나 칼을 그대로 내리찍는 서인의 모습에 놀라 눈을 질끈 감고 발을 구르며 정신없이 소리를 질렀다. 거구가 이리저리 정신없이 움직이자 음식과 술들이 나뒹굴었다.
“허, 허억…. 헉….”
“그러니까 한번 말할 때 잘하면 좀 좋습니까?”
대욱이 힘을 풀고 서인의 옆에 서자 황 사장은 그대로 축 늘어져 제 손가락 사이에 꽂혀 든 칼을 보며 흐느꼈다. 절단되지 않았다는 안도감과 언제든 다시 이런 상황에 부닥칠 수 있다는 두려움 탓에 그는 움직이지도 못했다.
“좋은 소식 기다리겠습니다.”
서인은 사람 좋은 척 방긋 웃으며 황 사장의 어깨를 두어 번 토닥였다. 쓸모없는 감정 소모에 원치 않는 신체접촉. 속이 울렁일 정도로 기분이 좋지 못했다.
룸을 나서자마자 골목길 벽을 잡고 주저앉은 그는 헛구역질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대표님.”
대욱은 서인을 부축해 일으켜 세우고 물을 건넸다. 신경질적으로 뚜껑을 따 손을 씻어낸 서인은 차에 타자마자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의미 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했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무엇보다 몸에 밴 황 사장의 향수 냄새가 거슬렸다.
눈치를 보던 대욱은 임상시험 중간 단계를 보고하며 내일 일정을 살폈다.
“내일은 여유 있는 편입니다. 오전에 서류만 체크만 해주시면…. 딱히 해야 할 업무는 없습니다.”
“그래.”
모처럼 만에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날이 돌아왔다. 그래 봐야 서인은 시간이 남으니 연구소에 가겠다고 하겠지만 대욱은 하루라도 그가 쉬기를 바랐기에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쉬라고?”
“예, 연구소 일은 제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컨디션이 좋지 않을수록 능률이 더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단칼에 거절하리라 예상한 대욱은 꽤 오랫동안 생각에 잠긴 서인을 곁눈질했다. 술기운이 오른 그는 평소보다 유한 편이었지만, 화가 나면 말리기 힘들 정도로 폭력적인 행동을 일삼았기에 대욱은 긴장하는 수밖에 없었다.
“음…. 그래, 그러지 뭐.”
“예?”
“쉬겠다고 하루.”
그는 예상 밖의 대답에 놀라 답지 않게 되물었다. 임상시험도 진행되고 있고 황 사장에게 경고도 했으며 서류는 서재에서 처리하면 되니 쉬어도 괜찮다는 결론이 나왔다. 서인은 온종일 저를 따라다니며 일만 한 대욱에게도 휴가를 제안했다.
“너도 좀 쉬지, 그래. 올해 휴가 안 썼잖아.”
“전 괜찮습니다. 다녀왔지 않습니까.”
“작년 여름에 다녀온 게 마지막이었잖아. 어느 정도 나이도 찼으니 애인이랑 여행도 가봐야 하지 않겠어?”
서인은 아무렇지 않게 무례한 말을 하며 대욱을 바라보았다. 꼰대 같은 질문에 대욱은 멋쩍게 웃으며 얼버무렸다.
“짝부터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하.”
“이성애자지? 여자들, 늙은 남자 안 좋아해. 실장님 정도면 뭐…. 준수하잖아. 임신 계획은? 없나?”
그는 여기서 더 나이가 차면 임신하기 힘들 거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며 대욱을 곤란하게 했다. 그는 서인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어렴풋이 알고 있기에 호감이 가는 여자가 있다는 거짓말로 대화를 끝마쳤다.
“그래? 잘 되길 바랄게.”
“감사합니다.”
서인은 말없이 운전하는 대욱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는 이상한 쪽으로 흘러가는 자신의 감이 들어맞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내게 다른 마음을 품지 말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이렇게 선을 긋는 것이 최선이었다.
♦ ♢ ♦
서인을 대신하여 연구소를 찾은 대욱은 약물 반응을 시간별로 기록하여 보고했다. 항상 신경이 곤두서있는 서인이 없자 연구원들도 한결 편한 분위기에서 일을 진행할 수 있었다.
“조금 쉬다가 해도 될 거 같습니다. 약물 반응이 최대치라.”
“아, 예.”
각자 식사를 하거나 잠시 눈을 붙이러 간 연구원들의 뒤로 여전히 비닐을 쓰고 다니는 남자가 쪼르르 달려왔다. 그는 대욱을 곁눈질하더니 고개를 갸우뚱하며 연구소 밖과 차량을 살폈다.
“대, 대표님은 어딨어?”
용기 내 질문을 해봐도 대욱이 눈길조차 주지 않자 그는 아닌 척 뒤를 따라다니며 낑낑댔다. 대욱은 남자가 서인을 찾는 것을 알았기에 더더욱 관심을 주지 않으려 했다. 무관심에 눈에 띄게 시무룩해진 그는 어디론가 뛰어 들어가 한동안 나오지 않았다.
“저, 저기….”
“…….”
“대표님은…. 안 오셨어요?”
대욱은 이대로 흥미를 잃었으면 했지만, 집념이 강한 남자는 커다란 상을 들고 와 대욱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에게 잘 보여야 서인을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한 남자는 말을 높이며 슬금슬금 눈치를 살폈다.
“이건 뭡니까.”
“그, 그…. 전에 밥, 밥 드시고 싶다고 하셔서….”
남자는 겉보기엔 먹음직스러운 반찬들로 가득 찬 상을 한 번 더 가까이 들이밀었다. 대욱은 그러거나 말거나 전혀 모르는 이야기를 하는 그를 무시하고는 자리를 피했다.
많은 것을 바란 게 아니었던 남자는 아예 무시당하자 어찌할 바를 몰라 울먹이기만 했다. 안절부절못하며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그는 제 머리를 쓰다듬으며 밥을 해오라고 말했던 서인의 모습을 떠올리며 구석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서인은 일하는 연구원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라는 소리였는데, 혼자 오해한 남자는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많은 양의 반찬을 만들어 아침, 저녁으로 서인만을 기다렸다.
“미워….”
그는 한 시간 내내 밉다는 말을 반복하다가 벌떡 일어나 대욱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예, 대표님. 현재 임상 2까지 완료되었으며 문제점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남자는 문 뒤에 숨어 얼굴만 빼꼼 내민 채 통화를 엿들었다. 들어봐야 이해할 수 없는 말뿐인데, 그는 서인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좋아서 발을 동동 구르며 웃었다.
혹시라도 대욱이 제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 싶어 기대했지만, 당연히 언급조차 없었다.
“칫.”
이렇게까지 노력했는데, 서인에게 제 이야기를 전해주지 않는 대욱 때문에 토라진 남자는 까치발을 들고나와 그의 차량에 점성이 강한 액체를 들이붓고 타이어를 마구 발로 걷어찼다.
물론 남자도 복수까지 할 일이 아님을 알고는 있었지만, 서운하고 속이 상해서 그만 화풀이를 하고 말았다.
“임상시험, 대상자, 표본….”
만행을 저지른 그는 비밀 통로를 이용해야 들어올 수 있는 방에 틀어박혀 문을 걸어 잠그고 어려운 단어들을 연습하며 서인의 방문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다시 만났을 때 말을 더듬지 않고 대본을 외우면 그가 좋아해 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려워….”
아무리 열심히 읽어도 발음이 어려워 자꾸만 헷갈렸다. 방 서랍에 모아둔 몽당연필로 단어를 여러 번 쓰며 읽던 남자는 세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공책을 덮고 드러누웠다.
한참을 멍하니 누워있던 그는 새카만 차가 연구소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창문을 살짝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어!”
차에서 내린 사람을 살피던 남자는 그가 서인임을 확인하고 황급히 비닐을 뒤집어쓰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임상시험, 대상자, 표본!”
“…….”
쉬기로 했건만, 임상 2가 완료되었다는 말에 달려온 서인은 제 앞에서 이상한 소리를 하는 남자를 본체만체 연구실로 향했다.
그의 냉담한 반응에 남자는 울음을 터뜨리기 일보 직전까지 갔으나 서인이 바쁜 사람임을 알기에 허벅지를 꼬집어가며 참아냈다.
“대표님, 무슨 일로….”
“불안해서 말이지. 역시 내가 직접 확인해야겠어.”
아닌 척해도 서인은 굉장히 불안한 상태였다.
그 역시도 하루 정도는 마음 놓고 쉬고 싶었지만, 이런저런 걱정과 불안 탓에 결국 연구소를 찾고 말았다. 약물실험 실패 결과가 꽤 큰 상처로 남았기 때문이다.
그때도 온전히 표본 부족 문제만은 아니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자연적으로 발생한 건지 뭔지 전혀 사용한 적 없는 성분이 검출된 바도 있었기에 쉬이 안심할 수 없었다.
“제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제가 확인했으며 연구실 내에는 CCTV도 작동 중입니다.”
“쉬기로 했는데, 미안.”
“아, 안녕하세요!”
5분 정도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남자는 엉덩이를 들썩이며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조심스레 존재감을 드러냈다. 서인은 그의 머리를 대충 쓰다듬으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다음 단계로 바로 진행하면 되겠네. 실험체들 상태는 어때?”
“전체적으로 양호합니다. 시간별 보고서입니다.”
대욱은 서인에게 보고서를 내밀고 남자를 저 멀리에 떨어뜨려 놓았다.
서인은 그를 때리기도 귀찮고 말로 설명할 시간도 아까워서 이거나 먹고 떨어지란 식으로 쓰다듬었을 뿐인데 남자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몸을 배배 꼬았다.
“주변에 어디 임신한 놈 없나. 미혼이면 좋겠는데.”
서인은 연고가 없는 미혼부들이 필요했다. 가장 확실한 것이 임신한 채로 약을 먹여 경과를 살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무슨 문제가 생겨도 조용히 처리 가능한 그런 사람이었으면 했다.
서인은 그러면서 은근슬쩍 부끄럼을 타고 있는 남자를 훑어보았다.
“저, 저는 남자인데요….”
그래도 눈치가 아예 없는 건 아닌지 그는 겁먹은 얼굴로 제 배를 감싸 안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서인 또한 이런 멍청한 남자를 데리고 시험하기엔 어려울 거 같아 딱히 반응하지 않았다.
“아, 그래. anns 유통 건은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어.”
전날 황 사장의 손가락을 자를 기세로 협박했던 서인은 하루 만에 계획을 변경하고 주원에게 통보했다. 까다로운 anns를 제외한 나머지 가게에 집중적으로 유통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나름의 이유를 가진 계획이었다.
“황구혁인지 뭔지 하는 놈 때문에?”
“뭐, 그것만은 아니고. 뭐든 차근차근하는 게 좋을 거 같아서.”
서인은 실패의 불안감 탓에 답지 않게 위축된 모습을 보였다. 눈치 없고 분위기를 잘 파악하지 못하는 남자마저도 서인을 흘깃대며 속상할 정도였다.
주원은 제대로 된 임상시험 대상자를 준비해두지 못했기 때문인지 눈썹을 까딱일 뿐 별다른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말썽을 안 부려야 할 텐데.”
“괜찮을 겁니다. 새로 지어진 곳이라 위생적으로도 매우 깨끗하고 시험을 하지 않아도 매번 살균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새벽에는 이진혁 비서가 자리를 지킨다고 합니다.”
서인은 소파에 기대어 앉아 대욱이 건넨 보고서를 살폈다. 한참을 보고 있자니 그의 옆으로 자그마한 머리통이 끼어들었다.
“…저도 자, 잘 읽을 수 있어요!”
남자는 서인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조금씩 울먹였다. 그는 제게 관심을 주지 않은 것이 서운해서 어떻게든 시선을 끌어보려 안간힘을 썼다.
“나한테 몸 팔게?”
서인은 울먹이는 남자의 엉덩이를 주물럭거리며 대놓고 희롱했다. 얼굴을 가리고 기교를 부리지 않는다뿐이지 엉덩이를 뒤로 뺀 모습이 술집 놈들이 유혹하는 자세와 비슷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 그게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엉덩이를 왜? 그, 흐으….”
남자는 성기를 만진 것도 아니고 고작 엉덩이 좀 주물렀다고 정신 못 차리고 끙끙 앓으며 흐느꼈다. 그는 어찌할 바를 몰라 몸을 들썩이다가 앙앙대며 느껴댔다.
“이, 이런 거는! 흐으, 응…. 좋아하는 사, 사람끼리만 하는 거라고 했어요!”
남자는 서인을 좋아한다. 정확히는 애정에 익숙하지 않아 눈곱만한 호의를 호감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그러나 서인과 제 마음이 같은지 아닌지 모르는 상황에서 제 엉덩이를 주무르는 것을 허락하고 싶지 않았다. 서로 마음을 확인하지 않은 상태에서 타인이 함부로 몸을 만지게 해서는 안 된다는 교육을 확실히 받았기 때문이다.
“…뭐?”
“저, 저를 좋아하시나요?”
남자는 손까지 덜덜 떨어가며 서인의 마음을 확인하려 했다. 서인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좋아한다고 떠들어대긴 했어도 이런 반응이 돌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무슨 미친 소리를 하는 거야?”
고작 엉덩이 좀 만졌다고 그를 평생 책임져야 할 의무가 없는 서인은 황급히 선을 그었다.
“…그러면 왜 만지셨어요?”
빠르고 단호한 거절에 남자는 눈을 표독스럽게 뜨고 서인을 노려보았다. 그는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왜 남의 엉덩이를 만지느냐는 식으로 따지고 싶었지만, 어휘력이 좋지 못해 구슬 같은 눈물만 뚝뚝 떨어뜨렸다.
“넌 그럼 왜 만지는데? 뭐, 날 사랑하기라도 하나 보지?”
서인은 남자의 수준에 맞게 똑같이 유치하게 행동했다. 네가 내 팔을 만졌으니 저 역시 엉덩이를 만졌을 뿐이라는 말에 남자는 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갑자기 구역질해댔다.
“그, 그런 나쁜 말을, 왜! 왜! 왜!”
서인은 좋아한다는 말은 아무렇지도 않게 해놓고서는 사랑한다는 말에 격한 반응을 보이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코웃음을 쳤다.
소리치며 구역질하던 남자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울먹이다가 테이블 밑에 떨어진 서인의 손수건을 훔쳐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손수건으로 뭘 하든 그건 남자의 몫이었기에 서인은 신경 쓰지 않고 일에 집중했다.
♦ ♢ ♦
“흑, 흐윽…. 윽….”
연구실을 뛰쳐나온 남자는 문 앞에 기대어 보란 듯이 큰 소리로 울었다.
이별이라도 한 사람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서럽게 울어대던 그는 화장실에 달려가 속을 게워내고 서인의 손수건으로 입을 닦았다.
“하아….”
남자는 정신없이 뛰어대는 가슴을 꾹꾹 짓누르다가 몸을 소독하고 다시금 연구실로 걸음을 옮겼다. 욕 얻어먹고 무시당해도 서인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저, 저기이….”
“그래, 알았으니까 조용히 하자.”
서인은 남자가 입술을 달싹거리며 자꾸만 말을 붙이자 그의 뺨과 머리를 세차게 쓰다듬으며 입을 다물게 했다. 서인 딴에는 더는 귀찮게 하지 말라는 뜻이었지만, 남자에게는 여지를 주는 것과 같았다.
“네에….”
남자는 얌전히 앉아있다가 서인과 대욱이 일에 집중하면 물건을 한둘씩 훔쳐 제 방에 가져다 놓기를 반복했다. 겉옷이나 귀중품이 아닌 먹다 남은 음료나 펜 따위를 훔쳐댔다.
“다음 주에 임신 중인 실험체를 한 명 보급한다고 합니다.”
“마침 잘됐네.”
다음 목표는 서인의 겉옷에 달린 끈이었다. 남자는 둘의 시선이 분산된 순간 걸이에 걸린 옷에 손을 뻗었다.
“뭐 하니?”
“시, 식사 안 하세요?”
조심스레 훔치려던 그는 서인이 고개를 홱 돌리고 저를 바라보자마자 바보 같은 소리를 하며 놀라 뒤집혔다.
제 딴에는 완벽하게 눈을 속였다고 믿었겠지만, 정작 서인은 일부러 필요 없는 것들이나 쓰레기를 가져다 놓으며 남자가 하는 짓을 지켜보고 있었다.
“저, 전에 밥 잘한다고 했는데!”
남자는 어떻게든 자연스럽게 보이려 노력했으나 딱 걸려버린 상태인지라 뭘 해도 어색해 보였다. 훔치지 않았다고 거짓말하려던 그는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면 덜 얻어맞지 않을까 싶어 무릎을 꿇고 빌었다.
“그, 그게 너무 예뻐서, 예뻐서 그랬어요!”
옷의 끈은 예뻐서 그랬다고 할 수 있겠지만, 남은 음료와 펜, 휴지 등은 설명할 길이 없다. 단순한 남자는 거기까지는 생각도 못 하고 변명하기 바빴다.
“음, 그래?”
“켁!”
서인은 울먹이는 얼굴로 주저앉은 그의 목에 옷 끈을 칭칭 감고 개 목줄처럼 만들어 단단히 고정했다. 졸지에 목줄이 생긴 남자는 주인을 기다리는 개처럼 얌전히 이어질 행동을 기다렸다.
“개는 말 못 해. 그 정도는 알지?”
“…….”
그는 서인이 자신을 귀찮아하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개 취급하며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을 즐기며 방긋 웃었다.
♦ ♢ ♦
“오늘은 이만하면 되겠네요. 수면 관리 철저히 해주시고요.”
실험체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혈액채취까지 마친 서인은 반나절이 지나고 나서야 정리하자는 말을 꺼냈다. 검사 결과 특별히 이상 반응을 보이는 실험체도 없고 가벼운 두통을 제외하면 문제 될만한 것이 없어 한결 마음이 가벼웠다.
“네, 대표님. 이번에는 정말 성공할 거 같아서 기쁘네요. 수치가 매우 낮아졌어요.”
“의도했던 작용도 원활하게 이뤄지고 있습니다. 이전 약물인 아젝신의 부정적 요소도 상쇄되었습니다.”
구토를 유발했던 아젝신 역시 좋은 반응을 보였다는 말에 서인도 옅게 미소 지었다. 임상 2단계는 대부분 약물 효능이 없어 성공률이 18%로 희박한 경우가 많다. 그 과정을 성공적으로 넘겼으니 서인은 곧바로 3단계를 계획했다.
“Phase 3 같은 경우에는 직접 지원을 받아야 하니 지금 공고하고 석 달 뒤에 진행하죠. 안트로덱신이 가장 높은 안정성을 보이네요.”
3단계까지 간다면 실패율이 현저히 낮기에 서인은 어느 정도 완성된 약물을 가지고 정식적인 과정으로 거쳐 투약하기로 했다.
펜데믹 같은 경우에는 수만 명의 대상자가 필요하지만, 서인의 약물은 그렇지 않기에 상용화까지 멀지 않다고 자부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추,축하드려요! 멍멍!”
남자는 무슨 소리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서인이 웃자 덩달아 웃었다. 그러다 개는 말을 못 한다는 말을 뒤늦게 떠올리고 짖는 소리를 내며 헉헉거렸다. 서인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움츠러들었지만 말이다.
남자의 존재를 까맣게 잊었던 서인은 여섯 시간은 훌쩍 지났는데 아직도 그 자세인 것을 보고 적잖이 놀랐다.
“멍멍!”
“…아, 씨.”
그는 비닐을 뒤집어쓰고 목에 줄을 매단 채로 개 흉내를 내는 남자를 보고 흥분했다. 하루에 한 번씩은 꼭 성욕을 풀었는데, 요즘은 그럴 시간 없어서 꽤 쌓인 상태였다. SM 플레이나 상황극도 좋아하니 더더욱 자극되었다.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순진한 말투와 모습을 할 땐 언제고 이제는 또 야릇한 행동을 한다. 정말 모르는 건지 아니면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건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멍?”
“하…. 됐다. 이만 정리하고 쉬죠. 새벽에는 이 비서가 온다고 했나?”
“예.”
서인은 뻐근한 뒷덜미를 문지르며 자리를 피했다. 영문을 모르는 남자는 목줄을 풀어주고 그대로 가버리는 서인을 뒤쫓았다.
“또 언제…. 오세요? 그, 2가 끝났으니까 또 오시는 거 마, 맞죠?”
실험이 끝났는데 또 오냐니. 서인은 제가 한 말이 얼마나 앞뒤가 안 맞는 말인지도 모르는 멍청한 남자에게 흥분했다는 사실이 자존심 상하고 불쾌해 그를 무시하고 연구소를 나섰다.
“다, 다음에는 밥 드시러 오세요….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소심하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남자치고는 꽤 저돌적인 발언이었다. 그는 서인을 졸졸 따라오다가 화들짝 놀랐다. 그의 시선을 따라 대욱의 차를 바라본 서인은 차에 끈적한 액체가 범벅된 것을 보고 인상을 구겼다.
“이게 뭐야….”
생각 없이 서인을 따라 나오던 남자가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화풀이한 것이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서인은 더 알아볼 것도 없이 남자의 짓임을 눈치채고 아찔함에 눈을 질끈 감았다.
“…저, 저는 모르는 일이에요! 기다릴게요!”
피로와 불결함에 순간적으로 열이 머리끝까지 오른 서인은 남자의 뺨을 후려치려다가 한숨을 쉬며 손을 거두었다. 돌아갈 시간이 지체되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서인은 저를 쫄래쫄래 따라다니는 남자를 무시하고 제가 몰고 온 차에 올라탔다.
“기다릴게요!”
남자는 안이 보이지도 않는데 창문에 얼굴을 들이밀고 계속 기다리고 있겠다는 것을 열심히 강조했다.
“기다릴 거예요!”
서인의 대답이 간절한 그는 출발하기 시작한 차를 뒤따라가며 소리쳤다. 살짝 뒤를 돌아본 서인은 남자가 숨을 헐떡이며 힘겹게 달려오는 모습을 보고 혀를 찼다.
“아마도 영원히 못 만나지 싶은데, 기다리긴 뭘 기다려.”
실험이 2단계까지 진행되었으며 반쯤 완성된 약물도 가지고 있으니 앞으로 연구소를 들를 일이 그리 많지 않았다. 서인은 홍주원에게 붙잡혀 앞으로도 계속 바보같이 이용만 당할 남자가 어쩐지 측은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지막 인사 정도는 해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차 속도를 줄이고 창문을 열자 남자가 다급하게 달려왔다.
“하아, 하…. 좋아해요, 좋아해요! 조, 좋아해요!”
“그래, 나도 좋아한다. 됐냐?”
서인은 평생 만날 일 없는 불쌍한 그에게 선심 쓰듯 좋아한다고 말해주고는 손을 흔들어주었다. 남자는 꼭 다시 와달라고 애원하며 떠나는 차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