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375화
제375화
2년 후.
무더운 햇살 속에서 매미의 화음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눈부신 햇살이 만발하는 뜨거운 뙤약볕 아래.
새하얀 꽃을 무덤 앞에 놓은 여인이 있었다.
"…할아버지. 저 왔어요."
그녀는 최춘택의 손녀 최미도였다. 그런 그녀의 바로 옆엔 백무열과 백성찬이 나란히 서 있었다.
세 사람의 앞엔 최춘택과 유선영의 묘가 함께 있었다.
그 옆에 있는 커다란 검은 비석엔 많은 사람들이 각종 포스트잇으로 최춘택에게 보내는 편지와 감사의 말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모두가 최춘택을 추모하는 글들이었고, 한국을 구하고 죽은 최춘택을 현충원에 안장하지 않는 대신 정부에서 사례라며 만들어준 것이었다.
"춘택이 이 자식. 그렇게 이름 알려지는 건 싫다더니, 죽고 나서 이름 한번 아주 거창하게 알렸구나. 어째 작년보다 편지가 더 많아졌어."
백무열이 검은 비석을 보며 무표정하게 투덜거렸다.
미도는 그저 싱긋 웃었다.
"이 정도에서 끝난 것도 다행이죠. 뭐. 정부에서 국가 유공자로 만들어주고 현충원으로 이장해주겠다고 했는데, 우리가 그것도 거절하고 추모식도 거절하니까 국민들이 들고 일어나서 청와대 국민청원을 한 거잖아요. 숫자가 천만이 넘어갔는데, 이런 거라도 해야죠. 안 그랬으면 사람들이 벌떼처럼 일어나서 무슨 짓을 했을지 모를 거예요. 지금도 기자들이 문 앞을 서성이는데 오죽하겠어요. 이거라도 안 했으면 우리 할아버지 시끄러워서 잠도 못 잘걸요?"
똑 부러지는 미도의 말에 백무열이 작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때, 아래쪽에서 산소를 향해 올라오는 인영이 드문드문 보였다.
"엄마, 아빠!"
그들은 모두 최춘택의 가족들이었다.
첫째 최강현을 비롯해 최정현과 막내딸 최서현.
손주들과 사위까지 모두 올라오고 있었다.
미도는 냉큼 달려가 어머니인 김미경의 품에 안겼다.
"얘도 참. 할아버지 보면 뭐라 하시겠다."
"흐으응."
그 모습을 보던 최강현이 빙긋 웃었다.
"아직 애긴 애잖아."
"무슨 소리예요. 이제 다 컸죠. 정도도 이제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생이 되었잖아요? 처음엔 얘가 재수한다고 해서 불안했는데, 미도랑 같은 국민대에 붙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엄마, 그거 내 흉보는 거예요?"
"어머, 들었니? 호호호. 그래도 난 네가 자랑스럽다. 아들. 지금은 누구나 알아주는 프로게이머잖니."
"네네~ 어련하시겠어요."
"요 녀석이. 엄마한테 말본새가 그게 뭐야."
최강현이 정도의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악! 아빠, 점점 할아버지 닮아가시는 것 아세요?"
"뭐? 하하하."
최강현이 다시 웃음을 터트렸고, 백무열이 다가왔다.
"조금 늦었구나."
"죄송해요. 차가 막혀서요. 다 같이 움직이려니까 준비도 오래 걸리더라구요."
"뭐 별 수 없는 일이지. 됐다. 춘택이가 그런 거 신경 쓰는 사람도 아니니까."
백무열이 손을 내저었다.
그 뒤 다른 가족들이 도착하고 인사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백무열의 손에는 어느새 부쩍 커버린 서희의 손이 덥석 잡혀 있었다.
서희는 이제 초등학교에 들어갈 예정이라고 한다.
그는 웃는 얼굴로 산소가 있는 언덕으로 천천히 올랐고, 문득 생각이 났는지 최강현이 물었다.
"참, 삼촌. 검도 도장은 잘 되어 가세요?"
"말도 마라. 뉴스 한번 나가고 갑자기 사람이 얼마나 몰려들던지, 특히 말 안 듣는 꼬맹이 한 녀석이 있는데 말이야…."
어느 무더운 여름.
매미가 우는 날이었다.
* * *
세상엔 많은 변화들이 있었다.
유니온의 몰락은 예정된 수순이었고, 이건명의 악행은 어찌 된 일인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번 사태의 책임을 지게 된 이석준은 주주총회를 통해 공식적으로 회장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더 이상 한국에 발을 붙일 수가 없게 된 그와 가족들은 조용히 하와이로 이민을 가 조용하게 살고 있다는 소식이 간간이 뉴스로 들려왔다.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자랑하던 유니온의 몰락은 안타까웠지만, 사람들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치부하며 그저 시간만 흐르고 흘렀다.
의외로 아크스타는 여전히 서비스를 닫지 않고 무료로 배포되어 풀려버렸는데, 그 이유는 그곳에서 가족을 이뤘던 이들이 아크스타의 폐기를 반대한다는 국민청원을 넣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국민청원을 넣은 사람의 이름은 최불룡이었다.
* * *
시간은 유수와 같이 흘러 다시 5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이렇게 인연이 닿아 함께 일하게 되었군요. 반갑습니다."
"제가 영광이지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잘 빼입은 정장을 입은 두 남자가 서로 악수를 나누었다.
"아, 이쪽은 서로 알지요? 제 매제입니다."
"당연히 알지요. 절 추천해주신 분인데요. 반갑습니다. 조셉 씨. 이렇게 또 뵙게 되네요."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잘 지내셨죠?"
"그럼요."
그들은 각각 강재성, 유민석, 조셉이었다.
세 사람은 함께 소파로 향했다.
비서가 들어와 차를 내어주었고, 믹스 커피를 한 모금 마신 강재성이 흡족한 얼굴로 웃었다.
"제가 식물인간 상태에서 일어나서 제일 좋았던 게 뭔지 아십니까? 이 믹스 커피를 먹을 수 있다는 거예요. 하하! 이게 얼마나 그러웠던지. 그땐 정말 죽는 줄 알았습니다."
강재성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제 완전히 건강을 회복한 그는 활기가 도는 모습이었다.
강재성은 이번에 새로 만들어낸 가상현실 게임이 있었는데, 유니온을 나온 그는 끝없는 연구에 끝에 마침내 완성을 앞두었다.
때마침 그것을 맡아 관리해줄 책임자가 필요했고, 때마침 조셉의 전화번호에 있던 유민석이 그 적임자라는 생각에 초대를 하게 된 참이었다.
"이번 오픈 베타는 조금 특별하게 시작할까 합니다. 아시다시피 이 게임은 가상현실이지만 예전에 썼던 슈퍼컴퓨터 가이아의 메모리칩으로 핵심 기술을 응용해 만든 RTS 장르니까요. 그래서 말인데 다음 달에 열릴 시연회는 '그분'들을 똑같이 구현한…."
강재성의 말이 한참이나 이어졌다.
세 사람의 말은 한참이나 이어졌고, 나중에는 서로의 안부를 묻더니, 대뜸 유민석이 강재성에게 처남인 차진철을 추천해도 되냐고 물었다.
차진철의 재능을 들은 강재성은 당연히 승낙했다.
"그런 인재라면 당연히 제가 반겨야지요."
"감사합니다. 처남에게 연락 넣어놓겠습니다. 그래도 면접은 보셔야지요. 찾아오라고 하겠습니다."
"하하, 저도 궁금하던 참인데 잘 됐습니다. 함께 밥이나 먹으면서 얘기나 나눠보겠습니다. 저도 유니온에서 천재라고 불렸던 그 친구가 궁금하군요."
그렇게 잠시 백수로 지내던 차진철이 취업을 했다.
그때, 갑자기 벨소리가 울리더니 조셉이 조용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분위기가 끊기자 갑자기 미안한 기색을 보이며 서둘러 문을 나섰다.
그리고 전화를 받는데, 화면이 어른거리는 것을 보니 영상통화였던 모양이었다.
- 얘들아~ 아빠한테 인사해야지?
- 아빠아아아!
허둥지둥 나가는 조셉을 보며 강재성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여간. 쟤도 대단하단 말이야."
"무슨 말씀이십니까?"
"방금 전 여동생에게 들었는데 셋째를 가졌답니다. 우연히 제가 먼저 알게 됐는데, 오늘 말할 거라고 했거든요. 아마 그거 얘기하려고 영상통화 했을 겁니다."
"아! 그랬군요. 축하드립니다. 하하."
"세뱃돈 줘야 할 녀석이 하나 늘어난 건데요. 뭘. 하하하."
강재성이 기쁨을 터트리며 웃었고, 잠시 뒤, 문밖에서 기쁨에 차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조셉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 *
1달 뒤, 서울 코엑스.
- 다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지금부터 새로운 가상현실 게임의 오픈베타 겸 시연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오신 내빈 여러분께서는 자리에 앉아주시기 바랍니다. 우선 먼저 강재성 박사님의 말씀이….
서울 코엑스에 어마어마한 인파가 몰려들었다.
한국인은 물론이고, 전 세계인들의 이목이 지금 새로운 가상현실 게임에 집중되어 있었다.
강재성 박사의 기술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기에, 많은 이들의 시선이 집중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년 전, 익명의 제보로 이건명이 당시 사태를 저지른 범인이라는 것이 밝혀지자, 많은 이들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당시 강재성 박사는 모두가 식물인간이었다고 알고 있었기에, 당연히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잠시 후. 강재성 박사가 연단에 올라섰고 곧장 짧은 인사가 이어졌다.
- 반갑습니다. 여러분.
와아아아!
끝없는 함성이 잦아들고 강재성은 천천히 하고 싶은 말들을 했다.
얼마지 않아 다시 박수와 환호성이 쏟아지며 무대가 어두워지더니, 긴장감 어린 드럼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막 시연회가 시작되려는 것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환한 빛이 모아지며 누군가를 비추었고, 그 무대엔 미도가 있었다.
와아아아!
얼굴을 알아본 관객들이 환호했다.
한국을 대표해 시연회에 참가한 그녀와 일행들은 무척이나 결의에 찬 표정이었다.
"누나답지 않게 왜 떨고 그래?"
백성찬이 팔꿈치로 그녀를 밀었다.
미도는 입이 뾰로통하게 튀어나왔다.
"나 떤 거 아니거든?"
"야, 정도야. 누나 얼굴 좀 봐라. 완전 사색이다. 사색."
그런 백성찬의 옆에는 놀랍게도 정도가 있었다.
정도는 이번 시연회에서 참가자격을 얻었는데, 그것은 그가 미도가 졸업한 가상현실 학과를 나왔기도 했지만, 아주 유명한 프로게이머였기 때문이다.
정도는 최고의 프로게이머가 되는 꿈을 위해 착실하게 활동을 이어나가는 중이었는데, 그는 백성찬의 강력한 라이벌로 한국에서 꽤 알아주는 유명인이었다.
"니들 나한테 죽을래?"
미도의 주먹이 부들거리며 올라오는 그때.
갑자기 다른 쪽에서 빛이 밝아지며 중국 대표로 견소룡과 선수들이 올라왔다.
그들은 견소룡과도 친근하게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어서 마이클과 제임스가 올라왔는데, 특히 정도의 눈빛이 제임스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야, 네 매형 될지도 모르는 사람인데 눈을 꼭 그렇게 떠야 해?"
"시끄러. 매형이고 나발이고. 나한테 지면 이 결혼 무효야. 그치 성찬아?"
"그럼 당연하지. 우리 두 사람도 못 이기면 내가 안심하고 누나를 맡길 수가 없지. 암, 그렇고말고."
백성찬이 이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미도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모든 선수들이 입장을 마치자 캡슐 안으로 들어섰고, 새로운 가상현실 게임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에 많은 이들의 함성이 퍼져나갔다.
게임이 시작되고,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 것은 한국과 미국이었다.
그들은 마치 서로 물어뜯지 못해 안달이 난 것처럼 공격과 수비를 연달아 펼치며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이렇게 해서 우리 누나 데려갈 수 있겠어요?"
"처남이 좀 봐주면 안 될까?"
"그건 싫은데요. 그리고 처남이라니요? 말이 심하시네."
"하하, 결혼 한 번 하기 엄청 까다롭네."
제임스와 정도의 칼이 맞부딪히며 금속음이 터졌다.
그런 정도의 등을 밟고 뛰어오른 백성찬이 위에서 제임스를 향해 거세게 칼을 내리쳤다.
한국에선 라이벌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서로 한마음 한뜻이 된 동지였다.
두 사람의 호흡은 그야말로 환상이었다.
챙! 챙챙! 챙!
백성찬과 정도. 그리고 제임스와 갑자기 끼어든 마이클의 난전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오직 제임스만을 노리며 달려들었다.
"끙, 나만 노리는 건 너무 한 거 아니야?"
"전 모르겠고. 누나한테 따지세요!"
"하하, 우리 처남한테 아주 잘해야겠어."
"처남은 개뿔…!"
정도와 제임스의 싸움은 오래도록 이어졌다.
마이클을 백성찬이 맡아서 이제는 두 사람의 싸움이었다.
그런데 그곳에 돌연 미도가 참전했다.
"야! 최정도 죽을래?!"
"엇, 누나!"
채앵!
미도의 검이 최정도를 향했고, 당황한 최정도가 두어 걸음 물러섰다.
제임스는 빙긋 미소 짓더니, 미도를 향해 걸어왔다.
그런데 돌연 미도가 씩 웃으며 제임스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왜, 왜 이래?!"
"잊었어? 우리 적이야."
"이거야 원."
"결혼하기 전에 미리 부부싸움 실컷 한다고 생각해."
"부부싸움 두 번 했다간 집이 남아나지 않겠는걸. 하하하."
챙! 챙챙! 챙!
다시 싸움은 미도와 제임스가 이어갔다.
정도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런 두 사람을 보았다.
그런 그의 곁에 백성찬이 나타나 어깨를 짚었다.
"쯧쯧, 내가 볼 땐 저 두 사람 결혼 막을 길은 없어 보인다. 친구야."
"아니야. 그래도 몰라. 난 저 녀석 마음에 안 든다고. 바람둥이 같이 생겼지 않아?"
"글쎄. 난 잘 모르겠는데."
"그래도 난 계속 저 녀석 막을 거야."
최정도가 이를 갈았고, 그런 정도를 보며 킥킥거리는 백성찬의 모습은 예전의 최춘택과 백무열의 어린 시절을 보는 듯했다.
그러던 바로 그때였다.
챙강!
갑자기 미도와 제임스의 옆에 공간이 깨어지더니 자그마한 틈이 벌어졌다.
다시 챙강! 하며 공간이 완전히 깨어졌고, 그 너머로 보이는 것은 드넓은 우주였다.
"……!"
모든 사람들이 싸움을 중단하고 멍한 얼굴로 그곳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천천히 두 인영이 걸어 나왔다.
"미도? 그리고 넌 정도냐? 다들 많이 컸구나!"
"할…아버지? 그럼 옆에는 분은…."
미도가 떨리는 목소리로 최춘택의 옆에 있는 사람을 보았다.
그녀는 바로 최춘택의 아내인 유선영이었다.
그녀의 모습은 죽기 전 바로 그때처럼 인자하고 주름진 인상의 중년이 되어 있었다.
유선영은 온화하게 웃으며 미도와 정도를 향해 팔을 활짝 벌렸다.
"내 새끼들. 이리 온."
칼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대뜸 미도가 유선영의 품에 와락 안겨들었다.
이어서 정도가 뛰어갔고, 백성찬은 그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멍하게 바라보았다.
그렇게 네 사람은 펑펑 울었고, 시연회는 자연히 중단되고 말았다.
몇몇 익숙한 얼굴을 발견한 최춘택이 화색을 띠며 마이클과 견소룡과 반가운 인사를 나누었다.
그런데 그때, 정도가 대뜸 최춘택의 귀에 작게 소곤거렸다.
모든 얘기를 들은 최춘택이 갑자기 노발대발했다.
"뭐라고! 미도가 저 파렴치한 놈에게 시집을 간단 말이냐! 내 저놈을 당장!"
최춘택이 대뜸 정도의 허리춤에 있는 칼을 빼들더니 제임스를 향해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날렵한 움직임은 여전히 노익장을 과시하는 실력이었다.
"잠, 잠시만요. 할아버님! 이러시면 안…!"
"시끄럽다. 이놈아! 내 오늘 네 녀석과 못다 한 담판을 짓고 말 것이야!"
"살, 살려줘. 미도야!"
"난 모르는 일이야."
"으아아악!"
미도가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리자, 모두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이날도 역시 어느 무더운 여름이었다.
그리고 더 없이 행복하고 세상에서 가장 기쁜 날이었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