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372화
제372화
유니온, 지하 통제실.
이석준이 아연한 표정으로 화면에 비친 얼굴을 보며 휘청거렸다.
그런 그를 부축한 것은 바로 옆에 있던 유민석이었다.
유민석은 그런 이석준을 보며 예상했다는 듯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가 어떻게… 살아 계셨다고?"
이석준이 살짝 눈을 비볐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정도로 얼떨떨했다.
죽은 줄 알았던 아버지가 살아있다는 것도 놀라운데, 버젓이 유피테르라면서 나타나다니.
"대체 왜…?"
이석준은 믿을 수가 없다는 얼굴로 화면을 보았다.
아버지의 얼굴을 한 유피테르는 아크스타를 즐기던 전 세계인들을 인질로 삼아 천인공노할 짓을 벌였다.
만약 이 사실이 외부로 알려진다면 당장 유니온의 차기 회장이 된 자신은 이 일에 대한 책임을 물어 사형을 당해도 할 말이 없었다.
당장에 폭동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
이석준의 얼굴이 창백해지며 다른 연구원들에게로 향했다.
그들은 난감한 기색으로 그런 이석준의 눈을 피했다.
강재성은 눈앞의 슈퍼컴퓨터를 연신 조작하기 바빴고, 유일하게 눈을 피하지 않은 것은 유민석 뿐이었다.
이석준이 입을 열려는 찰나.
유민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숨겼지? 이런 중차대한 사안을…."
"몇 달 전에야 이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당시 부장이셨던 회장님께 어떻게 이 일을 설명드려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드려도 절 믿어 줄 것이란 확신도 없었구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유 부장…!"
"원래 팔은 안으로 굽는다지 않습니까. 당시 회장님께서 제 말을 들었다면 곧장 믿으셨겠습니까? 진실을 알게 된 회장님은 그것을 감당할 수 없으셨을 겁니다. 당장에 여기 계신 강재성 박사님 또한 전대 회장님의 추악한 진실의 희생양이셨으니까요."
이석준의 얼굴이 부들부들 떨리며 붉어졌다.
그의 시선이 강재성의 뒤통수로 향했다.
"박사님, 저 말이 사실입니까?"
강재성은 말없이 컴퓨터를 조작하던 손을 잠시 멈추고는 천천히 이석준을 향해 의자를 돌렸다.
"사실입니다."
"……!"
이석준은 멍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하더니, 주변의 의자 하나를 갖고 와서는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떨구었던 고개를 들었다.
"진실을 말해주겠나? 그게 어떤 것이든 다 듣고 결정을 내리고 싶네. 이건 회장으로서의 명령이 아니라, 그저 아버지의 진실을 알고 싶은 아들로서의 부탁이네."
차분히 눈을 감았다 뜬 유민석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물론입니다."
눈부신 화면 너머에서는 연신 파공성이 끊이지 않았다.
이건명과 최춘택의 치열한 혈전이 절정으로 치닫는 중이었다.
강재성은 말없이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옮기고는 손을 아까보다 더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 * *
푸확!
처량한 먼지가 바람에 흩날리며 백색 뇌전의 검이 검은 사자의 단단한 심장에 깊게 박혀 들어갔다.
그런 루시퍼의 몸은 어느 곳 하나 성한 곳이 없었다.
자잘한 상처 위에는 둔중한 공격을 받아 움푹 들어간 곳도 보였고, 이미 한쪽 팔이 잘려나간 루시퍼는 입에서 검은 피를 울컥 쏟아 내고 있었다.
[컥.]
루시퍼의 무거운 두 무릎이 땅에 닿으며 작은 진동이 일었다.
그는 심장에 꽂혀 있는 천둥 검을 보며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설마 자신의 최후가 이런 보잘것없는 인간의 손에 끝맺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게… 끝이 아니다.]
루시퍼의 형형한 눈빛이 아래에 있는 한 보잘것없는 인간에게로 향했다.
그는 바로 헤라클레스와 힘을 동화시켜 믿을 수 없는 힘을 발휘해 치열한 싸움을 벌였던 백무열이었다.
백무열은 일행들과 함께 힘을 합쳐 마침내 루시퍼의 심장에 검을 꽂아 넣을 수 있었는데, 헤라클레스는 막대한 신력과 영성이 소모되어 그의 몸 안에서 요양을 위해 잠에 빠져든 참이었다.
하지만 백무열 또한 과한 힘을 끌어다 쓴 탓에 힘의 반사 작용으로 온몸의 기혈이 뒤틀리고, 간신히 한쪽 무릎을 굽히며 숨을 고르는 중이었다.
"…끝이 아니면 어쩔 테냐. 또 덤비려고? 어디 해볼 테면 해봐라. 우린 또다시 살아나 네놈의 심장에 검을 꽂아 줄 테니까."
주변에 있던 마족들 대부분이 천천히 재가 되어 흩어졌다.
대부분이 언데드화되었던 마족들이었고, 그들이 이렇게 된 것은 루시퍼의 몸에 이상이 생겨 더 이상 형태를 유지할 수 없게 된 탓이었다.
불길한 예감을 느낀 몇몇 장군급 마족들이 남아있는 소수의 마족들을 이끌고 퇴각 신호를 보냈다.
그런 그들을 뒤쫓는 것은 아틀란티스와 폭풍의 개람. 무시무시한 기운을 뿜어대는 죽음의 군단들이었다.
마족들은 속수무책으로 뒤를 쫓기며 연신 도륙당했다.
사기가 충천한 아틀란 왕국의 고위급 간부들 몇몇이 마족의 뒤를 쫓아갔다.
레슬리가 이끄는 저항군들의 총성이 승리를 알리는 축포처럼 들려왔다.
북극의 수인들과 그들을 이끄는 늑대 성좌 로믈라나와 레무스가 하늘을 향해 연신 포효하며 울부짖었다.
승리에 도취한 산타클로스는 하얀 수염을 휘날리며 연신 근육을 불끈거리기 바빴다.
[…나의 최후가 이리도 쓸쓸하다니. 대업을 이루지 못하고 허망하게 죽으니 덧없고 덧없구나.]
루시퍼의 안색이 한결 창백해졌다.
그는 자신을 버리고 도망가는 마족들을 보며 쓴웃음을 머금었다.
"원래 사람이 태어나고 죽을 때는 아무것도 갖고 가지 않는 법이지."
[…그건 잘 모르겠군. 난 인간이 아니니까 말이야. 하지만 그대에게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뭐냐."
백무열이 간신히 숨을 고르며 주저앉은 무릎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천천히 손등을 입가로 가져가, 흐르는 한줄기 핏물을 훔쳤다.
[시간을 돌리기 전, 그대는 분명 아슈타르와의 싸움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때 왜 나섰던 거지? 가만히 있었으면 살았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그건 내가 그들보다 좀 더 오래 살았기 때문이다."
[궤변이군. 고작 좀 더 오래 살았기 때문에 목숨을 걸었단 건가? 그것이 저 보잘것없는 인간들과 다른 녀석들을 대신해 죽을 이유로 충분했던 건가? 그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라는 그런 허망한 소릴 하는 건 아니겠지?]
"…뭔가 큰 착각을 하고 있구나. 운명 따윈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지. 받아들이는 게 아니다."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루시퍼의 심장에서 아른거리는 황금빛과 함께 그의 몸이 천천히 재처럼 흩어져 휘날리기 시작했다.
[과연, 그런 것인가….]
루시퍼가 비릿한 웃음과 함께 천천히 사라졌다.
마침내 전 세계인들을 공포로 물들였던 마왕이 세상에서 사라진 것이다.
백무열은 흩어진 루시퍼의 잔해가 떠오르기 시작하는 태양 너머로 날아가는 것을 보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때. 전장의 한구석에서 오크들을 이끌고 마족들과 혈전을 벌이던 고르바가 나타났다.
[취익! 루시퍼는 어딨느냐! 오직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다!]
하지만 이미 루시퍼는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난 뒤였다.
백무열은 하필이면 이때 나타난 고르바를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바로 그때.
[※긴급공지※ 로그아웃이 되지 않던 오류 현상이 해결되었습니다. 곧 긴급 점검이 있을 예정이오니, 모든 유저들은 1시간 내로 로그아웃을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와 동시에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대부분 유저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들은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다는 것처럼 빛으로 흩어지며 하나둘 자취를 감추었다.
대부분 레벨이 낮은 이들이었고, 몇몇 랭커들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현실로 돌아갔다.
하지만 백무열은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저 멀리 있는 부유성으로 향했다.
때마침 하늘 위에서 잉크 드래곤이 거센 날갯짓과 바람을 동반하며 옆에 내려앉았고, 재빨리 머리에서 뛰어내린 미도가 기쁨에 찬 얼굴로 뛰어왔다.
"우리가 이겼어요! 이겼다구요!"
백무열이 뒤편에 있는 젊은이들에게 작은 고갯짓을 했다. 별말은 없었지만 다들 고생했다는 의미였다.
그런 미도의 뒤엔 손자 백성찬이 있었고, 그런 손자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할아버지…."
"울지 마라. 기뻐하긴 일러. 아직 다 끝난 게 아니니까."
백무열의 손가락이 허공에 뜬 부유성을 가리켰다.
그곳의 하늘은 여전히 먹구름이 낀 채 어마어마한 파공성과 포효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오메, 허리야."
때마침 마법사와 마녀들을 이끌던 박막순이 하늘에서 천천히 떨어졌다.
그런 그녀의 뒤편으로는 마족들을 뒤쫓는 빗자루 무리가 쏜살같이 지나갔다.
이어서 백색의 뇌전에 휘감긴 견소룡과 분홍빛 꽃잎을 휘감으며 나타난 마이클이 함께 나타났고, 백무열은 곧장 그들과 눈을 마주치며 인사를 건넸다.
다들 살아서 보니 이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역시 살아있는 게 최고구나."
"그걸 아시는 분이 그렇게 목숨 걸고 박 터지게 싸우셨습니까? 하하."
견소룡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백무열과 포옹을 나눴다.
마이클도 그 말에 동의하는지 피식 웃으며 백무열과 가볍게 포옹했다.
"일단 지나간 얘기는 됐고, 막순아. 공간이동으로 우리 좀 저기로 데려다줘야겠다."
"엥? 어딜 또 간단 말이여."
"저기."
백무열의 손가락이 저 멀리 있는 부유성으로 향하자, 몇몇 이들의 얼굴이 잠깐이지만 굳었다.
그들 또한 아직 다 끝난 것이 아님을 직감한 것이다.
"춘택이가 아직 저기 있을 거다. 우리가 도울 게 있으면 도와야 해."
모두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 * *
같은 시각.
쓸 수 있는 모든 비각술을 차례대로 퍼부으며 이건명에게 회심의 일격을 가한 나는 허공에 뜬 메시지를 보며 희색을 띠었다.
"로그아웃이 되는 모양이구나! 드디어 한시름 덜었어."
현재 이건명은 안개 속에서 무려 여덟 개의 날씨의 공격을 동시에 받는 중이었다.
해와 달이 동시에 하늘에 떠 있었고, 구름이 눈, 비, 벼락, 바람을 동반한 천재지변을 일으키며 이건명을 향해 끊임없는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오색찬란한 별똥별이 우주 속에서 튀어나와 끊임없이 이건명을 향해 날아들며 폭음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쿠쿵! 쿠쿠쿵!
공중에 떠 있음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진동이 살이 떨릴 정도였다.
"알렉서스가 새롭게 만든 비천원옥이 과연 남다른 위력을 지녔구나. 이것도 이 정도인데 최후의 비각술은 과연 어떤 폭발적인 힘을 지녔을지 감히 상상도 안 되는군…."
나는 놀라움과 걱정이 뒤섞인 표정으로 턱수염을 매만지며 쓸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이건명이 노호성을 터트리며 안개 속에서 기합 소리가 들려왔다.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서 눈부신 빛이 터져 나왔다.
콰콰콰쾅!
안개가 걷히고 나타난 것은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새파랗게 질린 이건명의 모습이었다.
그는 창백한 얼굴이었지만 눈빛만큼은 무시무시한 기세를 뿜어냈다.
이건명이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감히… 감히…!!]
이건명이 또 한 번 눈부신 빛에 휩싸이더니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순간 당황한 나는 폭발에 휘말릴 뻔했지만, 갑작스레 나타난 불새와 구름 원숭이가 내 앞을 가로 막았다.
찰나의 순간에 커다란 폭음이 터졌고, 빛이 번쩍이며 내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프로메테우스와 아틀라스는 사라진 뒤였다.
나는 이를 으득 갈며 그들의 죽음에 분노하려는데 순간 메시지가 떠올랐다.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자신과 아틀라스는 괜찮다고 말합니다.]
"휴우. 죽은 줄 알았잖냐."
이때 천천히 폭발의 잔재가 걷히더니 이건명이 기괴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두 개의 머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하나는 당연히 이건명이었고, 다른 하나는 언젠가 시간의 바다에서 보았던 한혜연의 얼굴이었다.
의식이 있는 것은 아닌지 한혜연은 눈을 감고 있었고, 그런 이건명의 몸은 마치 두 개의 영혼이 담긴 것처럼 불완전해 보였다.
그의 허리 뒤로 두 개의 팔이 자라났다.
그것은 마치 아슈타르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크으, 아슈타르 녀석의 피를 벌써 쓰게 되다니. 이렇게 끝낼 수는 없다! 반드시 네놈을 씹어 먹어 이 치욕을 씻어낼 것이야!]
나는 서늘한 눈빛으로 이건명을 위아래로 훑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