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365화
제365화
헤스페리데스의 언덕엔 돌풍이 불어 닥치며 차가운 긴장감이 전후좌우 할 것 없이 깔려있었다.
언덕의 끝에서부터 불어오는 바람엔 짙은 마기가 가득 실려 있었다.
그것은 백만에 이르는 숫자의 마족들이 동시에 뿜어대는 마기가 뒤섞여 있는 까닭이었다.
그런 헤스페리데스의 상공엔 작은 섬이 하나 떠올라 있었는데, 그곳은 가이아가 잠들어 있다고 알려진 황금 사과나무가 있는 정원이었다.
섬은 통째로 허공에 띄워져 있었고, 이건명은 그곳의 부유성을 거처 삼은 채 머무는 중이었다.
"성안에 거주하고 있던 인간들이 모두 이곳으로 진군하며 달려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건명이 조용히 루시퍼의 보고를 들으며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지금 그의 이마는 한껏 찌푸려지며 깊은 근심에 사로잡힌 얼굴이었다.
[분명 죽었어야 할 이들이 어찌 다시 살아났단 말인가….]
이건명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금의 상황은 그의 상상에도 없던 일이었다.
게다가 한껏 몸을 사리고 있던 인간들이 갑자기 성 밖으로 진군하며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이곳을 향해 달려오고 있다는 것이 큰 충격이었다.
그것은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되지 않는 일이었다.
[최춘택! 그때 그놈을 내 손으로 죽였어야 했거늘! 이렇게 훼방을 놓으며 내 앞길을 막을 줄이야!]
그때쯤 이건명도 아크스타그램을 통해 최춘택이 지금과 같은 시간 회귀를 일으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최춘택은 다시 한번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것일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지금 저 많은 인간들이 죽음조차도 망각하고 달려드는 것 아니겠나.
더 이상 최춘택이 시간 회귀를 일으킬 수 없다는 건 알게 되었지만, 저들이 이렇게 당당하게 나오는 것은 숨겨진 한 수가 있다는 뜻이었다.
[이렇게 되면 전면전뿐이구나. 루시퍼, 너는 마족들을 총동원해 최대한 저들과 싸우며 시간을 끌어라. 나는 시간 회귀를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으니 다시 가이아의 힘을 천천히 흡수해야겠다. 반드시 그 최춘택 이라는 자를 생포해야 할 것이야.]
"그렇게 준비하겠습니다."
[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약간의 힘을 내가 보태준다면 너희가 시간을 끌기가 좀 더 유리해지겠지. 이걸 아슈타르에게 전해주거라. 그리고 녀석에게 얻은 피는 내가 요긴하게 쓰겠다고 전해라.]
이건명이 허공에 손을 흔들며 새하얀 벼락을 끌어모아 만든 검을 루시퍼에게 주었다.
잘 벼려진 벼락의 검은 끝에서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루시퍼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받아들었고, 과연 거머쥔 천둥 검에선 약간의 신력이 깃들어 있어서 어마무시한 위력을 내포하고 있었다.
[명심하거라. 이 천둥 검은 신력이 깃들어 있기에 정말 위험한 순간에만 써야 한다. 너희가 가진 마기와는 상극의 기운을 가졌으니 아슈타르도 직접 써보면 아마 알 것이다. 이만 가보거라.]
이건명이 루시퍼에게 천둥검을 내리고는 다시 축객령을 내렸다.
루시퍼는 그저 고개를 조아린 채 검은 연기로 화해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졌다.
* * *
마왕군과 연합군은 가장 큰 분지 하나를 사이에 두고 대치가 이루어졌다.
양 진영은 각자 전투에 앞서서 사기를 북돋는 행위를 하며 이어질 전쟁의 승리를 다짐했다.
마족들은 기괴하게 생긴 뿔피리를 불었고, 피가 묻어있는 북을 두드리며 마족들 특유의 괴성을 질러댔다.
연합군 진영에서는 각 종족들마다 특색있게 사기를 고조시켰는데, 기사들은 각자 칼을 치켜세우고, 대장 격으로 보이는 기사가 말을 타고 지나가며 한명 한명씩 검을 부딪혔다.
사제들은 자신이 모시는 신의 이름으로 성호를 그으며 그들에게 이번 전쟁에서 이기고 살아남을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
마법사와 마녀들은 빗자루에서 각기 명상에 잠겨서는 집중력을 끌어올리기 바빴다.
그중 가장 튀는 것은 단연 오크들을 이끄는 고르바였다.
고르바의 뒤로 다른 세 명의 오크 족장이 무시무시한 살기를 뿜어대며 전방의 마족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취익. 형제의 복수를 할 때가 왔군."
"서리 오크의 용맹함을 보여주겠다."
"무두르 님을 위하여!"
"호우! 호우!"
오래된 분열 이후 처음으로 제대로 단합을 하게 된 각 부족의 오크들은 이번 전쟁에서 그들의 용맹함을 과시하며 가슴 근육을 연신 불끈거렸다.
태초의 오크인 무두르 때부터 이어져 온 인사법인 일명 심장 두드리기는 무척이나 인상이 깊었다.
고르바가 오른손으로 왼쪽 가슴을 강하게 두드리며 다른 오크 족장들에게 주먹을 내밀었다.
그러자 다른 오크 족장들이 머리에 물음표를 띄웠다.
"인간 친구가 알려준 것이다! 이렇게 주먹을 부딪치면 친구가 되는 것이다!"
오크 족장들은 각자 마음에 든다는 표정으로 주먹을 모아 부딪혔다.
차가운 검은 돌풍이 그들을 휘감고 옆으로 사라졌다.
* * *
'에일린….'
연합군의 최전방엔 의외의 인물도 한 명 있었다.
그는 바로 월드 대항전 이후로 자취를 감추었던 최불룡이었다.
최불룡은 그날 이후로 개과천선하며 살았는데, 그는 몰래 에일린을 뒤에서 도우며 그녀를 향한 마음을 졸여왔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불룡파의 동생들이 아예 화끈하게 큰형님인 최불룡의 연애를 돕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에일린의 가게를 도왔다.
결국 두 사람은 다시 재회해 서로 사랑에 빠졌고, 마침내 둘은 사랑의 결실을 이루었다.
최불룡과 에일린은 결혼을 하여 이곳 세계에서 일가를 이루었다.
평생 모태솔로로 살 줄 알았던 최불룡은 그렇게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지금 에일린의 뱃속엔 최불룡과 에일린의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는 중이었다.
아들인지 딸인지는 아직 모르지겠만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큰형님. 동생들은 이미 만반의 준비를 마쳤습니다. 이번 싸움을 위해 각자 가진 재산을 제법 털었답니다. 우선 살아남아야 하니깐요."
최불룡의 뒤편에서 한불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최불룡은 그런 한불이를 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적을 완전히 다 쓰러 트리 못한다면 이번 전쟁은 무의미한 것이겠지. 잘했다."
"이렇게 큰형님과 보람된 일을 하면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렇고, 동생들도 그렇게 생각하구요."
"너희들에겐 힘든 결정이었을 텐데 따라줘서 고맙다."
최불룡이 한결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의 얼굴엔 예전의 험악한 최불룡의 모습은 없었다.
그저 한 아이의 아버지와 한 여인의 남편이 있을 뿐이었다.
"실은 저도 최근 만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뭐? 누군데?"
"…실비아입니다."
"하아?"
최불룡이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레하게 치켜떴다.
참고로 실비아는 최불룡과 에일린이 함께 운영하는 꽃집에서 일하는 알바생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설마하니 한불이와 실비아가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러다 자신처럼 결혼까지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어쨌든 축하할 일이다.
"짜식. 축하한다. 결혼하면 청첩장 보내는 거 알지?"
"하하. 당연하죠."
"부케는 나와 에일린이 손수 만들어주마."
"감사합니다."
휘이잉!
오크들을 지나쳐왔던 검은 바람이 최불룡과 일행들에게로 향했다.
그들은 맞바람을 맞으면서 저 너머 지평선에 깔린 수십의 마족들을 보았다.
"형님."
그때. 한불이가 공손하게 최불룡에게 거대한 양손검을 바쳤다.
그것은 과거 한불이가 최불룡에게서 받았던 그의 애검이었다.
스스로 과거의 삶을 청산하고 에일린과 더불어 살겠다고 다짐했던 약속의 상징이 다시금 그에게로 돌아온 것이다.
최불룡은 잠시 양손검을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그것을 들어 올렸다.
핏빛 검신이 저물어가는 노을에 반짝이며 붉은빛을 머금었다.
"잘 갈았구나. 넷째와 여섯째의 수리 실력이 쓸 만해."
"그 녀석들이 그렇게 출중한 대장장이가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하하. 정말 사람 일 모르는 것 같아요."
네불이와 육불이는 오래전 대장장이로의 새 삶을 시작했다.
이제 두 사람은 아틀란 왕국에서도 손꼽히는 솜씨 좋은 대장장이가 되었다.
불룡파의 일원들은 각자 개과천선해서 새로운 삶을 살다가 이렇게 모인 참이었다.
"다들 잘 사는 것 같아 보기가 좋구나. 하지만 이런 우리의 삶을 지키기 위해선 살아남는 게 우선이겠지."
"지당한 말씀입니다."
최불룡이 뒤편의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동생들을 슥 훑었다.
마치 과거의 한 장면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
그러나 이번 싸움은 과거 불룡파의 보스로 돌아가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최불룡은 그들을 향해 우렁차게 소리쳤다.
"야 이 자식들아! 절대로 죽지 마라!"
불룡파를 시작으로 다른 이들마저도 그 소리를 듣고는 벅찬 감정이 되어 소릴 질렀다.
검은 바람은 다시 허공으로 솟구쳐 다른 곳으로 움직였다.
* * *
"최불룡…? 저 녀석도 여기 있었구만."
한편, 나는 최불룡이 소리 지르며 사기를 끌어올리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와 눈을 마주쳤다.
최불룡은 무안했는지, 헛기침을 몇 번하고는 다시 전방을 주시했다.
괜히 아는 척하면 서로 민망할 것 같아서 나도 모른 척 했다.
그때. 옆에서 백무열이 팔짱을 낀 채 한마디 했다.
"저 녀석 에일린이랑 결혼했더라. 뱃속에 애도 있고."
"그래?"
나는 의외라는 얼굴을 하며 다시 최불룡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의 얼굴에선 예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당시엔 세상의 온갖 불만과 불평을 가진 그런 인상이었는데, 지금은 그저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에일린한테 잘한다냐?"
"잘 사는 거 같더라. 몇 달 전에 우연히 꽃집에 들렀다가 만났는데, 이젠 과거도 청산하고 좋은 일도 하고 살고 있다더라고. 아, 그중 두 명은 아틀란에서 꽤 유명한 대장장이가 되었다던데?"
"잘됐네."
나는 만면에 웃음을 띤 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참에 이번 일이 모두 끝나면 녀석과 다시 사이좋게 지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결혼식도 못 갔는데 요리라도 해서 임산부한테 좋다는 보양식을 푹 끓여서 갖다 주면 좋을 테지.
"으하하! 다들 춤을 춰라!"
그때 오른편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는 도깨비 무리들이 보였다.
가장 중앙에는 태초의 도깨비라 불리는 쇠꼬비가 있었다. 그리고 좀 더 가서는 다크문의 뱀파이어들까지 있었다.
그런 그들을 이끄는 것은 미도의 성좌 다빈치였다.
모두 전투를 앞두고 비장한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할아버지."
한창 감상에 젖어있을 때 미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든 준비가 끝났어요."
미도가 결의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그녀의 뒤로 많은 이들의 얼굴이 보였다.
레슬리가 이끄는 저항군과 견소룡과 마이클을 비롯한 월드 대항전에서 보았던 랭커들.
각기 다른 길드를 결성해 이번 전쟁을 위해 싸우기로 다짐한 그들의 눈엔 한편의 열의가 엿보였다.
휘우우웅!
허공으로 치솟았던 검은 바람이 다시 내려앉아 사뿐히 나를 휘감았다.
어둠을 찢어 입은 듯한 흑색 망토가 나풀거리며 그 사이로 백색 머리카락을 휘날렸다.
나는 천천히 머리끈으로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질끈 묶고는 등에 메고 있던 커다란 검은 식독검을 땅으로 푹 찍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무시무시한 속도로 언덕이 검게 물들었고, 짙은 그림자는 모든 유저와 NPC들을 향해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어둠과 죽음의 신, '플루토'의 축복이 펼쳐졌습니다.]
[시전자가 죽지 않는 한, 해당 범위 내에 존재하는 아군은 죽지 않고 멀쩡한 모습으로 되살아날 수 있습니다.]
모든 유저와 NPC들을 검은 기운이 휘감았다.
나는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그 순간 내 뒤편에서 죽음의 군단이 서서히 일어서기 시작했다.
1군단장 리퍼, 2군단장 발라크, 3군단장 케르베로스, 마지막으로 4군단장 아쥬커스가 무시무시한 기세를 발산하며 나타나자, 앞에 있던 이들의 눈이 커지며 무척이나 놀란 기색을 보였다.
죽음의 군단은 마왕군과 연합군의 중간에 자리해 있었다.
"공격하라!"
나는 전방의 마족들을 향해 검을 뻗으며 우렁차게 소리쳤다.
새로운 라그나로크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진격의 외침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