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361화
제361화
그때쯤 나는 명계의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명계의 하늘은 회백색 구름과 까만 하늘이 전부였는데, 그 흔한 밤하늘의 별조차도 명계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발밑에 구름이 아른거리며 만들어지더니 허공을 날 수 있는 발판이 되어주었고, 나는 그렇게 생성된 구름을 발판삼아 움직이며 빠른 속도로 북쪽을 향해 날아가는 중이었다.
그런 내 손에 들려져 있는 것은 아내가 자신의 권능을 담아 건네준 검은 식독검이었다.
"……."
검에선 귀기 어린 음성과 강력한 사기가 짙게 배어 나와 연기로 화해 넘실거렸는데, 지금 이 안엔 명계의 전력이라 할 수 있는 죽음의 군단들이 모조리 들어가 있었다.
나는 식독검의 반짝이는 검신을 바라보며 아까 전 그녀가 했었던 말을 곱씹으며 떠올리고 있었다.
"…늦지 않아야 할 텐데."
얼떨결에 명계의 후계자가 되어버린 나는 잠깐이지만, 그들을 이끄는 수장이 되었다.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요청을 승낙할 수밖에 없었지만, 사실 그런 걸 떠나서 당장 미도를 구하고 싶은 마음도 컸다.
그래서 지금 나는 명계의 북쪽에 있다는 전송진을 이용하기 위해 바쁘게 떠나는 중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간계로 향하는 전송진을 관리하는 자를 만날 수 있었고, 그는 오래전부터 이곳에서 다양한 차원을 이동하는 전송진을 맡아 관리하고 있었다.
카론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는 내게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사기가 만만치 않은 것을 보며 급히 공손해지더니, 인간계로 향하는 전송진으로 안내해주었다.
"인간계로 향하는 전송진은 무척 오랜만에 가동하는 것이라 손볼 곳이 조금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면 곧장 전송진을 가동하겠습니다. 그런데…."
나는 손을 비비며 말을 줄이는 카론을 보며 빙긋 웃으며 동전 하나를 튕기며 던져주었다.
띵!
이 동전은 아내가 전송진을 이용할 때 필요할 것이라며 내게 건네준 것이었는데, 동전에 그려진 플루토의 문양을 확인한 카론의 안색이 창백해지며 말을 더듬었다.
"프, 플루토 님의 명령으로 가시는 거군요. 자,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빨리 준비해드리겠습니다!"
말을 더듬으며 황급히 자리를 떠나는 카론을 보며 나는 이곳에서 그녀의 명성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아내는 거의 왕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전송진 앞에 있는 바위에서 가부좌를 튼 채 앉아서 카론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괜히 시간을 때우는 것이 아까워서 아까 전 알렉서스가 주었던 최후의 비각술이 적힌 두루마리를 펼쳐 읽었다.
"……."
잠시 뒤, 나는 근심 어린 표정을 지으며 이마의 주름을 한껏 만들어냈다.
"이건 모든 비각술을 다 익히기 전엔 꿈도 못 꾸겠는데."
최후의 비각술이라 불리는 알렉서스의 비기는 비천기상무의 모든 묘리들을 한곳에 집약한 결정체나 다름없었다.
그곳에 언급된 비기는 이미 내가 읽은 적 있었던 알렉서스의 일기장에 적혀있던 마지막 구절과도 연관이 되어있었다.
사실 알렉서스는 이미 그때 최후의 비각술에 대한 힌트를 약간이나마 숨겨둔 것이었다.
그때 읽은 구절이 무척이나 인상 깊어서 나는 아직까지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의 비각술을 모두 얻어 날아오르는 날. 그대의 앞에 하늘이 도래할 것이다."
말 그대로 이것은 하늘을 움켜쥘 수 있는 비각술이었다.
이것을 펼치게 되면 알렉서스는 유피테르에 버금갈 정도로 하늘을 자유자재로 운용할 수 있게 될 것이라 서술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한계가 있겠지만, 지금의 내겐 아내가 넘겨준 권능의 일부가 있으니 그 한계마저도 잘하면 뛰어넘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여기 적힌 일곱 날씨의 힘을 하나로 합쳐 만드는 비천원옥(飛天圓玉)은 꽤 강력하겠어."
비천원옥은 최후의 비각술의 바로 옆에 적힌 또 다른 응용법 중 하나였다.
나는 천천히 두루마리를 갈무리해 인벤토리에 넣고는 천천히 오색빛깔이 가득한 구슬을 꺼냈다.
그것을 보면서도 나는 약간의 꺼림칙함을 숨길 수가 없었는데, 사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오색찬란한 구슬의 정체가 바로 창천의 용이었기 때문이다.
"……."
듣자 하니 창천의 용은 오래전부터 인간의 몸과 동화하는 방법을 통해 착실하게 힘을 쌓아왔다고 한다.
본체가 아닌 인간의 몸에 들어가 기생하듯 살았던 이유는 바로 지금처럼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것 또한 가이아의 안배였는데, 설마하니 정말 이런 상황이 생길 줄 몰랐던 그는 다행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그 자리에서 곧장 오색 구슬로 변했고, 그는 자신을 삼키면 비와 벼락의 힘을 신들 못지않게 다룰 수 있게 될 것이라 하였다.
창천의 용은 바로 그 자리에서 구슬로 변해 내 손에 안착했고, 나는 어쩔 수 없이 그것 또한 받아들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하아."
굳은 결심을 마친 나는 곧장 구슬을 입에 넣고 눈을 감은 채 집중하기 시작했다.
전신을 감싸는 오색 빛이 천천히 휘돌며 형용할 수 없는 힘이 느껴졌다.
이어서 따스한 봄의 기운과 아른거리는 분홍빛이 내 몸을 감싸 안았다.
쿠르릉!
그때 머리 위로 작은 먹구름이 생성되더니, 비가 쏟아지고 벼락이 내리쳐졌다.
벼락이 몇 번이나 정수리 부분에 내리꽂혔고, 나는 움찔거리며 간신히 그 고통을 참아내는 중이었다.
잠시 후, 내가 천천히 눈을 떴을 땐 전신에는 충만한 느낌이 가득했다.
의식을 집중하니 뱃속에서 비와 벼락의 힘이 충돌하며 좀 더 환한 빛을 내는 것이 느껴졌다.
비와 벼락을 좀 더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되었음을 직감하게 된 나는 작게 미소 지었다.
이어서 바로 고개를 들었는데, 앞에는 멍청한 표정으로 날 지켜보고 있던 카론이 눈을 마주치며 움찔하고 있었다.
"저, 저기 인간계로 가는 전송진이 준비가 되었습니다만."
"음, 시간을 지체했군. 고맙네."
"아닙니다. 하하…."
나는 곧장 자리를 털고 일어서다 문득 목에 걸려 있는 크로노스의 회중시계에 시선이 갔다.
곧장 회중시계의 표면을 만지작 거리며 아내가 해주었던 말을 떠올렸다.
"…제발 늦지 않아야 할 텐데."
나는 천천히 카론의 안내를 받아 전송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잠시 뒤, 눈부신 빛이 내 몸을 휘감았다.
* * *
백무열과 아슈타르의 싸움은 절정으로 치달았다.
백중세를 이루던 힘의 균형이 처음으로 무너지며 처절한 비명이 메아리쳤다.
"아악!"
백무열이 잘려나간 왼쪽 팔을 붙들며 고통스럽게 울부짖었다.
뒤편에선 놀란 음성이 연이어 들려왔다.
"할아버지!"
"무열이 할아버지!"
다들 각기 화들짝 놀란 얼굴을 하며 곧장 튀어나갈 태세였다.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 다들 어떠한 대처도 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견소룡이 이를 악물며 후회막급한 표정을 짓더니 전신에 백색의 뇌전을 끌어올리며 허공으로 튀어나갔다.
그때. 마족들 진영에서 장군급 마족들이 각기 날아오르더니 어마어마한 기세를 뿜어내며 견소룡의 앞을 막았다.
그들은 차가운 눈으로 성벽을 내려다보더니, 그중 한 명의 눈이 견소룡을 응시했다.
대표로 나선 마족은 대장군 급이었다.
"허튼짓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지금 이곳을 둘러싸고 있는 게 전부 다 마족이라는 걸 잊지 마라. 움직이는 순간 가장 약한 인간들부터 쓸어버릴 것이다."
그것은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였다.
로그아웃도 하지 못하는 유저들은 이곳에서의 죽음이 진짜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걸 알고 있기에 그것은 엄청난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순식간에 웅성거리는 군중들 사이로 조금씩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는 인영들이 보였다.
견소룡은 이를 악물며 아래쪽에 자리한 백무열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미도를 비롯한 다른 일행들도 속수무책이었다.
"…할아버지."
하지만 가장 꾹 참고 있는 것은 백무열의 손자인 백성찬이었다.
미도는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백성찬의 손을 천천히 감싸 쥐었다.
지금 그녀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고작 이것뿐이었다.
[크하하! 이제야 끝이 보이는구나! 너의 목을 베어 친히 내 허리춤에 전리품으로 달아주겠다!]
백무열이 아슈타르의 허리춤에 있는 해골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전리품이란 것은 자신의 머리를 저렇게 대롱대롱 허리춤에 매달고 다니겠다는 뜻이 분명했다.
"…끙."
그러나 백무열은 그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떨어져 나간 왼쪽 팔에서 피가 솟구쳤기 때문이다.
다행히 오른팔은 아직 괜찮아서 검을 휘두르는 데는 문제가 없겠지만, 출혈이 너무 심해서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몽둥이성, '헤라클레스'가 괜찮냐고 묻습니다.]
"…당연히 안 괜찮지. 그걸 말이라고 하냐."
분주하게 떠오르던 헤라클레스의 메시지가 동시에 잠잠해졌다.
아마도 할 말을 잃어버린 모양이었다.
[몽둥이성, '헤라클레스'가 잠시만 기다리면 곧 가겠다고 말합니다.]
"기다리긴 개뿔. 지금 뒤편에서 거창하게 싸우고 있는 거 너 아니냐? 신경 쓰지 말고 하던 싸움에 집중이나 해라. 나처럼 팔 하나 잘리지 말고."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다시 헤라클레스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몽둥이성, '헤라클레스'가 알겠다고 말하며 몸조심하라고 말합니다.]
살짝 입꼬리를 말아 올린 백무열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정작 말은 이렇게 했지만, 상황이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이미 헤라클레스는 저 뒤편에서 어마어마한 폭풍을 일으키며 치열한 싸움을 하는 중이었다.
정작 성안에 있던 이들은 마족들에게 둘러싸여서 나오지도 못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더군다나 저기 허공에 떠올라 있는 녀석들은 특히나 강한 마기를 뿜어댔는데, 아마도 간부급에 속하는 마족들인 듯했다.
하나하나가 성좌에 준하는 기운들이었으니, 아리에스를 비롯한 성좌들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라 할 수 있었다.
'…상황이 너무 안 좋은데.'
이러다간 꼼짝없이 저들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 것이었다.
죽음을 담보로 사로잡힌 대부분의 유저들은 어쩔 수 없이 저들에게 굴복할 것이 분명했고, 그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선택이었다.
어느 누구도 목숨을 걸고 저들에게 맞서 싸울 생각은 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이곳은 가상현실 게임 속이었고, 저들은 전부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들이었다.
백무열은 적어도 저들만큼은 꼭 살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자네, 이름이 아슈타르라고 했나?"
[그렇다! 내 이름은 마계의 투신이라 불리는 아슈타르. 나의 위대함을 알겠느냐! 크하하하!]
"너에게 부탁이 있다."
[부탁? 무슨 부탁이냐.]
[잠시만 들어보지.]
그때. 잠자코 있던 아슈타르의 두 번째 얼굴이 입을 열었다.
두 번째 얼굴은 예상외로 과묵하고 신중한 성격인 듯했다.
그와는 말이 통할 것 같자, 백무열이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내 목을 주겠다. 대신 저들은 건드리지 마라."
[호오.]
[하아?]
아슈타르의 두 얼굴이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안 돼!"
그 순간. 뒤쪽에서 처절한 외침이 들려왔다.
백무열은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그것이 누가 지른 외침인지 알 것 같았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백성찬이었다.
"할아버지, 안 돼요!"
동시에 몇몇 이들이 자신을 만류하기 위해 고함을 질러댔다.
그 속엔 미도 또한 있었다.
하지만 백무열은 이미 결심을 굳힌 다음이었고,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멀리서 몸부림치는 백성찬을 살폈다.
백성찬은 양옆에 자리한 사람들에 의해 튀어나가지도 못하고 붙들린 채였다.
"……."
자신과 닮은 손자는 아직 성인이 되지 않아 앳되었지만, 조금만 더 크면 여자들을 꽤 후리고 다닐 만큼 출중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문득 백무열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감상에 젖었다.
손자가 성인이 되는 것만큼은 꼭 보고 죽고 싶었는데, 그것만큼은 한이 될 것 같았다.
먼저 간 아들과 며느리에게도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
잠시 눈을 감고 생각의 정리를 마친 백무열이 다시 아슈타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슈타르 또한 백무열이 죽음을 각오하고 있음을 직감했기에, 아무 말 없이 기다려주었다.
백무열은 그런 아슈타르에게 쓴웃음을 지었다.
"베라."
[…좋다. 저들의 목숨은 지켜주도록 노력하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아슈타르의 두 번째 얼굴이 굳은 약속을 했고, 백무열은 만족스러운 듯 여한이 없는 듯한 표정으로 천천히 눈을 감았다.
뒤쪽에선 여전히 시끄러운 외침이 연신 이어졌다.
백무열의 귓가엔 오로지 손자인 백성찬의 목소리만이 아른하게 들려왔다.
'미안하다. 성찬아.'
스걱-!
아슈타르의 검이 백무열의 목 주변을 빠르게 스치며 지나갔고, 백무열의 몸은 천천히 앞으로 고꾸라지더니 털썩 주저앉았다.
옆으로 무언가가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