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360화
제360화
그 시각. 나는 장장 한 시간 가까이 그녀가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얼굴에서 근심을 지우지 못했다.
그것은 무척이나 충격적이었고,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수련에 매진하고 있었던 내겐 받아들이기 힘든 진실이었다.
"일주일 안에 항복하라고… 했었다고? 그렇지 않으면 마왕 군을 보내서…."
나는 차마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건명이 아크스타그램의 버그를 악용해서 모든 유저들의 로그아웃을 막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일주일 안에 항복을 권유하며 백만에 달하는 마왕군을 보내겠다는 협박을 했던 것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그 사실도 모른 채 한가하게 수련을 하고 있었으니 나는 통탄할 노릇이었다.
유선영이 손을 휘저어 검은 거울을 만들어내더니, 인간계의 모습을 비췄다.
"이건…."
그것은 아틀란 왕국의 전경이었다.
유선영은 조금 더 자세하게 볼 수 있도록 화면을 확대해주었고, 그러자 성벽에 올라 위풍당당하게 지평선을 굽어보는 미도의 모습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평소 입던 드레스가 아닌 왕족을 상징하는 갑옷을 입은 채 들고 있는 검을 바닥에 지팡이처럼 지탱하며 불어오는 맞바람과 함께 붉은 망토를 펄럭거리고 있었다.
"미도…."
나는 멍한 표정으로 그런 미도의 얼굴을 보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지만, 두려움이 가득한 눈이었다.
그리고 그런 미도가 보고 있는 것은 저 멀리 벌떼처럼 몰려오는 마족들이었다.
다시금 화면이 확대되더니, 마족들을 이끌고 내려오는 루시퍼와 아슈타르의 모습이 보였다.
정말 이건명이 경고한 대로 마족들이 메테우스로 진군을 하는 것이 분명했다.
순간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보, 미도는…!"
[진정해요.]
"진정이 아니라 지금 우리 미도랑 다른 애들이 죽게 생겼…!"
[괜찮으니까 흥분을 가라앉혀요.]
그때. 유선영이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순간 서늘한 한기가 머리를 차갑게 만들었고, 다행히 나는 다시 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마음속에서 꿈틀대는 이 불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저 지금은 이를 악물며 냉철하게 생각해야 할 때였다.
"괜찮다는 게 무슨…?"
[말 그대로예요. 난 당신에게 일부러 늦게 말한 거예요. 그건 저에게도 당연히 생각이 있다는 뜻이겠죠?]
"으음, 하지만…."
[식독검을 가지고 있죠?]
"식독검…?"
전혀 예상치 못한 그녀의 말에 나는 눈을 휘둥그레하게 떴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즉시 식독검을 꺼냈다.
유선영은 빙그레 웃더니 식독검을 가로채 허공에 띄우곤 말했다.
[시간이 없으니 핵심만 간단히 말할게요. 당신에게 제 힘의 일부를 빌려줄 생각이에요.]
"……!"
[난 지금 인간계로 올라갈 수 없어요. 그랬다간 저와 연결되어 있는 판도라가 폭주해 다시 그곳을 지옥으로 만들고 말 테니깐요. 이건명이 다른 사람들을 인질로 잡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예요. 저를 인간계로 올라오지 못하게 하려는 속셈인 거죠.]
"그런…."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건명이 거기까지 생각하고 유저들을 로그아웃을 하지 못 하게 만들었다는 건 정말 상상치도 못 한 일이었다.
그게 다 플루토인 아내를 인간계로 올라오지 못하게 할 심산이었다니.
이건명의 심계가 그토록 깊었다는 사실에 나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당신이 죽음의 군단을 이끈다면 얘기가 다르죠.]
"…뭐라고?"
그 순간. 유선영이 들고 있는 식독검에서 검은 돌풍이 불어닥치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나는 두 손을 들어 앞을 가로 막았고, 간신히 눈을 떠 앞의 상황을 관찰할 수 있었다.
식독검의 크기가 점점 커지고 있었고, 식독검은 독이 아닌 짙은 사기(死氣)마저도 독으로 인식하고 빨아들이는 중인 듯 끝도 없이 자라나고 있었다.
식독검은 점점 자라나 마침내 내 키를 넘어 자동차 정도의 크기가 되었다.
그럼에도 거검의 성장은 멈출 줄을 몰랐다.
성장을 멈춘 것은 약 1분이 지났을 즈음이었다.
[흡.]
유선영은 이마를 찌푸리며 검을 향해 양손을 뻗어 어마어마한 기운을 방출해내 다시 거검을 압축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이마에서 땀이 송골송골 맺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분명 무리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유선영이 살짝 비틀거렸다.
"여보!"
[…괜찮아요.]
유선영은 간신히 중심을 잡았고, 잠시 뒤 거검을 등에 멜 수 있을 만한 크기로 압축하는데 성공했다.
회색의 보호막에 휩싸인 식독검은 마치 거대한 검은 식칼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마침내 식독검이 내 앞에 천천히 떠올랐고, 동시에 유선영이 다리를 비틀거리며 쓰러질 뻔한 것을 다행히 바로 옆에 있던 알렉서스가 부축해 간신히 쓰러지지 않을 수 있었다.
유선영은 창백한 얼굴로 숨을 헐떡이며 내게 말했다.
[그걸 들고 밖으로 나가면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이들이 있을 거예요.]
그런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검은 식독검을 붙잡았다.
그 순간 짙은 어둠이 검에서 뿜어져 나와 내 몸을 감싸 안더니, 검은 망토를 두른 것처럼 어깨에 휘둘러졌다.
나는 찢어진 어둠을 입고 천천히 베란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창문을 열었고, 마침내 내가 등장했을 때 아래쪽에서 어마어마한 함성이 터져 나오며 커다란 진동이 일었다.
크오오오-!
그것은 말로만 전해 듣던 죽음의 군단들이었다.
그때, 뒤편에 자리해 있던 네 명의 죽음의 군단장들이 차례로 부복하였다.
대표로 앞에 나선 4군단장 아쥬커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명계의 후계자를 뵙습니다.]
* * *
백무열과 아슈타르의 싸움은 오랜 시간 동안 이어졌다.
장장 한 시간 가까이 이어진 격전은 주변 땅을 격렬하게 파헤쳤고, 어느 누구의 승리도 장담할 수 없을 만큼 치열한 혈전의 연속이었다.
몇몇은 입을 쩍 벌리며 가공할 힘을 가진 백무열을 우러러보기도 했다.
감히 단신의 힘으로 마왕 아슈타르와 접전을 벌일 수 있는 그에게 경외감을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백무열이 무리하게 헤라클레스의 힘을 끌어쓴 탓이었다.
"커흑."
[흐흐. 대단하구나. 대단해! 그 작은 몸으로 이 아슈타르의 공격을 한 시간이나 받아내다니 놀라워! 하지만 무리하게 힘을 끌어다 쓴 탓에 네 몸이 무너지는 것은 느끼지 못한 게냐!]
"시끄럽다!"
백무열의 일갈이 터져 나오며 그의 몽둥이가 커다랗게 변해 무시무시한 속도로 휘둘러졌다.
아슈타르가 가진 팔 중 두 개의 팔이 검을 교차해 그것을 막아냈다.
쿠웅!
그러나 엄청난 거력의 힘 탓에 손쉽게 튕겨 나가는 아슈타르였다.
그의 나머지 한 손에 들린 지팡이에 마력이 감돌며 그를 공중에서 멈추게 하였다.
아슈타르는 튕겨 나가긴 했으나 전혀 데미지를 입지 않은 상황이었다.
[후후. 아까보다 힘이 많이 빠진 것 같은데.]
"큭."
다시금 백무열의 목검과 아슈타르의 검이 맞부딪히며 파공음이 생겨났다.
그 모습을 성벽 위에서 지켜보던 견소룡은 주먹을 꽉 쥔 채 속으로 응원만 하고 있었다.
솔직히 끼어들고 싶었지만, 백무열이 진작 그에게 귓속말을 해 나서지 말아 달라는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다른 이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이었고, 백무열은 견소룡에게 즉시 다른 사람이 나서려 한다면 막아달라는 부탁을 하였었다.
'하지만….'
이렇게 두고만 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지금 그의 손엔 차원 가위가 들려져 있었고, 이것이라면 저번처럼 아슈타르의 팔을 하나쯤 베어내는 것도 가능할 것이었다.
견소룡은 속으로 백무열이 이대로 죽을 위기에 처한다면 약속을 깨서라도 자신이 나서 구해야겠다는 생각했다. 바로 그때.
"우오오오!"
백무열에게서 노호성 같은 기합이 터져나왔다.
그런 그의 몸 뒤로 어마어마한 투기가 뿜어져 나왔다.
투기 하나하나에서 대단한 살기가 담겨 있었고, 백무열은 곧장 전방의 아슈타르에게 달려들었다.
등 뒤로 뿜어진 무형의 투기가 반월 모양의 검기처럼 변하더니 아슈타르를 향해 날아갔다.
당황한 아슈타르는 수십 개의 투기의 칼날을 베기 위해 검을 휘둘렀고, 아슈타르의 칼날이 투기의 칼날에 닿는 순간.
스르륵 통과해버렸다.
[……!]
화들짝 놀란 아슈타르는 수십 개의 투기들이 모두 실체가 없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그 사이로 아슈타르의 복부에 백무열의 목검이 순식간에 커져서는 그의 복부를 그대로 강타해 휘둘러쳤다.
콰앙!
[크헉…!]
방심한 아슈타르의 복부에 거대한 힘이 짓눌려졌고, 아슈타르의 두 머리가 동시에 피를 울컥 토해내더니 순식간에 땅으로 추락했다.
콰아앙!
그것은 어마어마한 진동을 수반하였다.
잠시 뒤 먼지 속에서 아슈타르의 신형이 드러났다.
아슈타르는 당했다는 듯한 표정으로 입가에 흐르는 피를 손등으로 훔치고 있었다.
[크흐, 과연 아직 남은 한 수가 있었구나. 좋다. 그렇다면 나도 제대로 응수해주도록 하지. 다시 한번 자웅을 겨뤄보자!]
아슈타르의 전신에서 검은 투기가 피어올랐다.
백무열은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마계에서 투신이라 불린 녀석이었으니 당연히 투기를 가지고 있는 것은 당연했다.
방금 자신은 그저 투기를 눈속임용으로 썼을 뿐이지만, 아슈타르는 좀 더 숙련된 투기를 사용할 수 있을 게 틀림없었다.
"끙. 아직 도착하려면 멀었느냐."
[몽둥이성, '헤라클레스'가 10분이면 간다고 말합니다.]
"…10분이라.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군."
쿠오오!
아슈타르가 발산하는 투기가 백무열의 상상을 가뿐히 초월했다.
* * *
한편, 루시퍼는 여전히 무심한 눈으로 아슈타르와 인간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금방 끝날 것 같았던 싸움이 장기전으로 흐르자 그것은 의외의 박진감을 선사하고 있었다.
곁에 있던 마족들은 흥미진진한 눈으로 둘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고, 루시퍼도 마족들이 들쳐 맨 가마에 올라서 턱을 괸 채 눈을 빛내며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음?]
바로 그때. 갑자기 루시퍼의 의식에 무언가 빠른 속도로 접근하는 것이 느껴졌다.
천천히 허공으로 떠오른 루시퍼는 작은 점이 빠른 속도로 쇄도해 오는 곳을 향해 마기가 집약된 손가락만한 빛을 여럿 쏘아 보냈다.
퓨퓨퓻!
쏘아진 다섯 갈래의 마기가 여러 방향으로 비산하다가 마침내 한곳으로 뭉쳐져 떨어져 내렸다.
정해진 목표를 사각지대에서 공격한 것이었다.
콰콰쾅!
옅은 폭음과 함께 먼지를 뚫고 나온 인물을 보며 루시퍼의 입이 길게 찢어지며 날카로운 이를 드러냈다.
마침 심심했던 루시퍼는 도착한 이를 웃음기 어린 눈으로 맞이했다.
[…과연 우리는 또 만날 것 같았다. 이렇게 보니 꽤 반갑군.]
[동감이다.]
구름을 타고 날아온 헤라클레스가 품에서 올리브나무 몽둥이를 꺼내 다짜고짜 아래로 휘둘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