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359화
제359화
"이 녀석들은…."
내가 눈앞에 있는 이들을 훑어보며 놀란 기색을 보이자, 유선영이 빙긋 웃었다.
[다들 누군지 기억하죠?]
"기억은 하는데, 이 녀석들은 죽은 거 아니었나?"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명계에서는 그 어떤 것이라도 제 허락 없이 죽을 수 없어요.]
그런 그녀의 말과 동시에 네 명의 군단장들이 모두 서늘한 눈빛으로 나를 보기만 했다.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사기가 만만치 않았다.
왼쪽부터 차례대로 1군단장 리퍼, 2군단장 발라크, 3군단장 켈베로스, 4군단장 아쥬커스였다.
특히 3군단장 켈베로스는 유일하게 동물 외형을 한 녀석으로, 언젠가 아틀라스를 만나기 위해 찾아갔던 영혼의 미궁 뒤편에 자리한 명계의 입구를 지키는 수문장이기도 했다.
나는 다시금 서늘한 감각을 느끼며 4군단장 아쥬커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를 보자마자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고, 특히 가장 고참이라고 알려진 그와 붙었을 땐 정말로 죽을 뻔했었다.
놀라운 사실은 아쥬커스가 언젠가 그 프랑스 코쟁이 녀석이 소환했었던 임모탈 나이트의 진체(眞體)였다는 사실이었다.
당시는 전력의 10분의 1밖에 되지 않았고, 지금은 그의 힘을 모두 끌어쓸 수 있었기에, 아쥬커스는 당연히 강할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그를 이긴 것은 순전히 운이었다고 나는 생각하는 중이었다.
수련이라는 사실을 상기한 아쥬커스가 봐주지 않았다면, 나는 당장에 몸이 썰렸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만.]
그때. 서늘한 한기와 목을 옥죄는 듯한 죽음이 내 옆에서 뿜어져 나왔다.
그 힘의 주인은 바로 아내인 유선영이었다.
순간 나는 쫄아서 어깨를 움츠러트렸다.
생전에 살아있었을 때도 화나면 엄청 무서웠는데, 어째 지금은 더 무서워진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부디 자비를!"
"깨갱!"
"……."
네 명의 군단장이 모두 아내의 발아래 무릎 꿇었다.
나는 새삼 아내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과연 어둠과 죽음의 신인 플루토의 위엄은 어디 가는 것이 아니구나.
나는 참 무서운 사람을 아내로 두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희는 분명 내게 이 사람을 인정하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진심을 담아 따르겠다고도 약조하였지. 내 말이 말 같지 않은 것이더냐.]
유선영의 등 뒤로 무시무시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순간 나도 덜컥 놀라 숨도 쉬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어마어마한 죽음의 기운이 발목을 잡고 달아나지 못하게 하는 것 같았다.
그것은 무척이나 서늘한 감각이었다.
[용서를….]
[따르겠습니다! 살려주십시오!]
[깽! 깨갱!]
[…….]
그제야 고분고분해진 군단장들의 기색에 유선영은 서늘한 시선으로 그들을 훑고는 기운을 거두었다.
나는 그제야 천천히 심호흡을 할 수 있었다.
깜짝 놀란 유선영이 재빨리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 미안해요. 당신이 옆에 있다는 걸 깜빡했네요.]
유선영은 재빨리 나를 감싸던 기운들을 수거해 무안한지 머쓱하게 웃었다.
나는 그저 허허 웃을 뿐이었다.
그때. 알렉서스가 바깥쪽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우리 앞으로 걸어와서는 내게 눈인사를 하며 말을 건넸다.
"어떻게 수련에 진전은 좀 있었나?"
"다른 비각술들은 모두 숙련을 마쳤지만, 아직 별과 달의 비각술을 익히진 못했습니다."
"음,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사람 일이란 혹시 모르는 거니 익히고 있으면 도움이 될 날이 있을 지도 모르지."
"그렇겠지요."
"참, 이거 받게. 내가 남기는 최후의 비각술이라네. 인간계로 돌아가는 길에 읽어보도록 하게나."
"인간계로 돌아가요…?"
알렉서스가 건네주는 최후의 비각술이라는 것도 물론 궁금했지만, 그가 말한 인간계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에 나는 더 놀란 참이었다.
나는 곧장 고개를 돌려 유선영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당신에게 말하지 못한 게 있어요.]
* * *
아틀란 왕국, 외성.
각국의 랭커들은 성벽 너머로 끝 없이 몰려오는 마족들을 보며 긴장감 속에서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 그들을 이끄는 것은 아틀란 왕국의 왕손녀 미도를 중심으로 한 세계 연합군들이었다.
랭커들은 가장 앞 열에 자리해 있었고, 그 속엔 백무열을 비롯해 레슬리와 각종 유니크 NPC들.
제우스 길드를 이끌고 온 마이클과 간부들.
견소룡을 위시한 무협 길드의 모습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그런 그들의 바로 뒤로 수없이 많은 아틀란의 연합군들이 있었다.
그 사이엔 유저들도 있고, 또 NPC도 있었다.
월드 대항전에서 활약했던 각국 대표들 또한 함께 있었다.
그런 그들의 마음속엔 공통점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오직 살고 싶다는 일념이었다.
모두 이곳에서 개죽음 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끝이 보이지도 않는군."
서늘한 바람을 맞던 백무열이 저 멀리 끝도 없이 몰려오는 마족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러게요. 많긴 하네요."
그런 그의 옆엔 놀랍게도 손자인 백성찬도 함께 있었다.
백성찬은 할아버지를 혼자 보낼 수 없다면서, 막무가내로 캡슐에 접속해 찾아온 상황이었다.
처음엔 백무열도 화를 내고는 왜 접속했냐며 역정을 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었기에 그도 결국 어쩔 수가 없었다.
"…후우. 난 정말 네가 들어오지 않기만을 바랐다. 네가 죽어버린다면 저승에서 네 아비와 어미의 얼굴을 어떻게 보란 말이냐."
백무열은 체념한 듯 한숨을 푹 내쉬며 말을 이었다.
백성찬은 아무 말 없이 몰려오는 대군을 응시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도 제 가족이에요. 엄마 아빠도 그렇게 허망하게 보냈는데, 할아버지도 그렇게 보내라고요? 제겐 할아버지가 엄마이자, 아빠나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할아버지를 사지로 보내놓고 저 혼자만 편하게 있으라고요? 전 그렇겐 못 해요."
"성찬아…."
백무열이 가슴속에서 올라오는 울컥함을 억지로 참다가 쓸어내렸다.
눈에 살짝 눈물이 고였지만, 그는 일부러 티 내지 않으려고 헛기침을 했다.
백성찬은 빙긋 미소지으며 시선을 적색 망토를 휘날리는 여인에게로 향했다.
"……."
미도는 그런 백성찬의 시선도 모른 채, 떨리는 심장을 억지로 부여잡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었다.
아크스타그램을 통해 직접 마족들의 규모를 파악했음에도 직접 보는 것은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마치 개미 떼들이 질서정연하게 포식을 하기 위해 다가오는 것 같았다.
'수가 이렇게 많았다니.'
미도가 낭패 어린 기색으로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그녀의 바로 옆에는 욕망의 마왕이라 불리는 릴리스가 고소하다는 눈빛으로 미도를 흘겨보고 있었다.
하지만 대놓고 티 내지는 않았다.
자신은 이미 영혼이 저당 잡힌 상태라 미도를 공격할 수도 없을뿐더러.
만약 그랬다가는 당장에 죽음을 면키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런 릴리스의 옆엔 마왕 아스모데우스가 함께 서 있었다.
[…루시퍼는 보이지 않는 걸 보면 후방에 있는 건가.]
[저기 오는 건 아슈타르 같은데요? 후후. 저 못생긴 얼굴은 여전하네요.]
릴리스의 말에 아스모데우스도 동의한다는 듯 피식 웃었다.
바로 그때. 지평선 너머로 다가오던 마족 떼들 사이에서 독보적인 기세를 뿜어대며 흑색 표범 마수를 타고 달려오는 인영이 있었다.
엄청난 속도로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온 그의 정체는 바로 탐욕의 마왕 아슈타르였다.
[크하하하! 감히 누가 마계의 투신이라 불리는 나와 자웅을 겨뤄보겠느냐!]
순식간에 성벽 부근에 멈춰선 아슈타르가 특유의 거대한 몸체를 위시하며 허공에 대고 소리쳤다.
* * *
[아무도 없느냐! 네놈들은 모두 겁쟁이들인 모양이구나. 크하하하!]
아슈타르의 시선이 성좌들이 있는 성벽으로 향했다.
그곳엔 아리에스를 비롯한 궁좌들과 성좌들이 함께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네놈들은 어떠냐! 내 친히 너희들의 목을 베어주겠다!]
아슈타르가 광소를 하며 목을 뒤로 젖히자, 아리에스를 비롯한 성좌들 몇몇이 얼굴을 붉히며 부들부들 떨었다.
그들은 당장에라도 튀어나가고 싶어 안달이 나 보였다.
인간들 중에도 몇몇이 얼굴을 붉혔는데, 아슈타르는 그 모습에 속으로 냉소를 하고 있었다.
설마하니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을 줄이야.
'…하긴 유피테르가 천벌을 내리겠다고 경고했으니 당연한 건가. 그래도 그렇지. 순 겁쟁이들뿐이로구나. 이대로 쉽게 항복을 해버린다면 무척이나 아쉽겠어. 이번 일이 끝나면 난 다시 마계로 돌아가야겠군.'
아슈타르가 아쉬운 기색을 내 비치며 혀를 쩝쩝댔다.
루시퍼에게 허락을 받아서 잠깐의 여흥을 즐기기 위해 이렇게 달려나왔는데 재미가 없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슈타르는 다시 한번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
[정말 아무도 없느냐! 유피테르 님의 천벌이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분께서는 오늘 있을 결전에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겠다고 하셨느니라!]
이 말은 사실이었다.
실제로 유피테르의 의식을 차지한 이건명은 가이아가 가진 힘을 흡수하기 위해 사전 준비를 해야 한다며 다짜고짜 축객령을 내리고는 아무도 근처로 오지 못하게 하였다.
그는 인간들을 굴복시켜 항복을 받아내는 건 무척이나 쉬울 것이니, 우리에게 알아서 하라는 명령만을 내리고 두문불출을 한 지 오래였다.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인간들을 항복시키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란 말이지.'
바로 그때.
"내가 나가겠다."
[……!]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 * *
[크하하! 좋다! 빨리 내려와라!]
"잠깐, 그 전에 5분만 기다려 주겠나?"
[흐흐. 좋다. 그 정도야 기다려 줄 수 있지! 하지만 오래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약속하지."
성벽 위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백무열에게로 모여들었다.
방금 전 백무열은 밑에 있는 아슈타르에게 자신이 나가겠다고 말한 참이었다.
모두가 경악 어린 얼굴이었고, 가장 먼저 놀라서 만류한 것은 손자인 백성찬이었다.
"할아버지. 왜…!"
"쉿. 더는 말하지 말거라."
"아니, 그게 아니라. 지금 상황이…!"
그때. 살짝 앞쪽에 있던 미도가 놀란 기색으로 헐레벌떡 뛰어왔다.
"무열이 할아버지. 저 녀석은 마왕이에요! 그리고 정말 녀석이 1대1로 붙을 거라고 믿으세요? 거기다가 유피테르가 천벌을 안 내린다는 확증도 아직 없잖아요!"
백무열이 미도와 백성찬을 번갈아 보며 너털웃음을 흘렸다.
그의 투박하고 거친 손이 두 아이들의 머리로 향했다.
백무열은 그런 그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굳이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는 나서야 했을 거다. 어쩌면 그게 미도 네가 되었을 수도 있겠지."
"그건…."
"난 이미 오래 살았다. 젊은 친구들이 꽃도 피지 못하고 희생될 바엔 나 같은 늙은 퇴물이 먼저 나서는 것이 맞지 않겠느냐. 장강의 앞물이 뒷물에 쓸려 밀려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백무열은 두 사람 사이를 지나쳤다.
마이클과 견소룡을 비롯해 많은 이들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았고, 그런 그들에게 백무열은 두 사람을 부탁한다는 말을 남겼다.
"걱정마십시오.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살아남으셔야 합니다."
믿음직스러운 두 젊은이들을 보며 백무열은 고개만 끄덕였다.
그는 다시 손자인 백성찬에게 시선을 옮겼다.
백성찬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억지로 참는 듯 우물거리고 있었다.
"다녀오마."
"조심…하세요."
"그래. 이 할애비를 잘 지켜보도록 해라."
백무열은 곧장 성벽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 신형이 무척이나 재빠르고 날렵해서 얼마지 않아 백무열이 떨어져 내렸다.
그런 그의 뒤로 끝없는 함성이 터져나왔다.
백무열은 천천히 아슈타르에게로 걸어갔다.
거대한 몸체의 아슈타르는 인간인 백무열을 가뿐히 압도하고 있었다.
[재밌는 인간이로구나. 천벌이 무섭지 않은가 보지?]
"흥, 이 나이에 천벌이 두려울 성 싶더냐. 어차피 얼마 남지 않은 목숨이다. 그리고, 이곳이 내 죽을 자리라면 운명을 따라야겠지."
[호오, 이미 죽을 생각을 하고 있었군. 각오가 남달라. 피할 수도 있었을 텐데 기특하군. 과연 넌 나와 붙을 자격이 있다. 싸우다가 중간에 어쩔 수 없이 나온 거라고 도망치진 않겠지?]
"그럴 걱정은 하지 마라. 난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은 아니니까. 피할 수 있어도 가는 것. 그것이 그동안 내가 걸어온 운명이다."
아슈타르가 특유의 두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웃었다.
두 얼굴은 히죽 웃으며 만족스러운 기색을 드러냈다.
그런 그를 지켜보던 백무열이 돌연 가지고 있던 목검을 세게 거머쥐었다.
백무열의 목검이 전방으로 강하게 휘둘러졌다.
쿠우웅!
아슈타르와 백무열 사이에 커다란 백색 충격파가 크게 퍼져나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