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358화
제358화
송화산, 영혼의 미궁.
헤라클레스는 다친 세 자매를 이끌고 아틀라스가 있다는 송화산으로 돌아왔다.
그가 아틀라스를 만나게 된 건 미궁으로 들어간 지 사흘이 되었을 즈음이었다.
[아이글레, 에리테리아, 라레투사….]
하늘을 짊어진 커다란 원숭이의 외형을 한 아틀라스가 눈을 글썽이며 상처 입은 자신의 딸들을 훑어보았다.
거의 수십 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된 딸들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만나자마자 상처 입은 모습으로 만나게 되니, 아틀라스는 가슴이 쓰려오는 것 같았다.
헤라클레스에게 전후 사정을 전해들은 아틀라스는 딸들을 구해주어서 고맙다고 하였고, 헤라클레스는 당연한 일을 한 것뿐이라고 답했다.
아틀라스는 곧장 딸들의 치료를 시작했고, 그렇게 다시 하루가 지나 나흘째가 되었다.
"…구해줘서 고맙다."
영혼의 미궁의 구석에 있는 바위에 걸터앉아, 멍하니 명계로 향하는 영혼들을 하나하나 살피고 있던 헤라클레스는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좀 괜찮아?]
"…덕분에."
라레투사가 아프지 않은 척 대답했지만, 그녀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통을 참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라레투사는 헤라클레스의 바로 옆에 있는 바위에 걸터앉았다.
바위와 바위 사이가 꽤 거리가 있었기에, 두 사람은 살짝 떨어져 앉은 상황이었다.
헤라클레스는 이것이 그녀가 자신에게 가진 마음의 거리라는 생각이 들자 문득 웃음이 터졌다.
"왜 웃어?"
[아니, 그냥. 너랑 이렇게 나란히 앉은 게 꽤 오랜만이구나 싶어서 말이지. 다신 이런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말이야.]
"흥. 아버지가 널 용서하라고 하신 것만 아니었다면 당장에라도 면상에 주먹을 날렸을 거다. 그동안 네가 했던 잘못은 지금 날 구한 것으로 덮겠다고 아버지가 그러셨지. 아버지의 말이 아니었다면 난 여전히 널 싫어했을 거다."
[…….]
헤라클레스가 멍하니 라레투사의 옆 모습을 바라보다가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라레투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어디가?"
[네가 무사한 것을 확인했으니, 나도 내 할 일을 하러 가야겠지.]
"무슨 할 일?"
[복수.]
"복수…?"
라레투사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웠다.
하지만 헤라클레스는 무심하게 라레투사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는 세 자매를 저렇게 만든 루시퍼에게로 갈 생각이었다.
헤라클레스는 절대로 그를 살려두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결심했다.
저벅저벅.
라레투사는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무엇을 하려는지 대충 깨닫고 있었다.
가지 말라고 잡고 싶었지만, 막을 수 없었다.
헤라클레스는 한 번 정한 것은 이룰 때까지 포기하지 않는 고집이 있는 남자였다.
그래서 좋았고, 그래서 사랑했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잠깐 기다리거라.]
바로 그때.
아이글레와 에리테리아의 치료를 마친 아틀라스가 멀어지는 헤라클레스를 불러 세웠다.
헤라클레스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 그의 앞으로 작은 구름 하나가 날아들었다.
[이건….]
[타고 가거라. 난 이곳에 매여 벗어날 수가 없는 몸. 루시퍼라는 놈은 지금 메테우스로 가고 있으니, 이걸 타면 빠르게 그곳으로 갈 수 있을 거다.]
헤라클레스가 눈앞의 구름을 힐끗 보고 고개를 들어 아틀라스에게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장인어른.]
[흥. 누가 네 장인이더냐. 볼 일 없다. 썩 꺼져라.]
아틀라스가 퉁명스러운 말투로 헤라클레스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헤라클레스가 빙긋 미소 짓고는 안개 너머의 미궁 속으로 사라졌다.
라레투사와 아틀라스가 함께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때. 아틀라스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뒤돌았다.
[괴이한 녀석을 사위로 맞게 생겼구나.]
멀어지던 헤라클레스가 잠깐 멈칫하더니, 씩 미소 짓고는 다시 영혼의 미궁 깊은 곳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라레투사는 옅은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헤라클레스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 * *
아틀란 왕국, 왕성.
백무열은 손톱 달처럼 가는 초승달을 왕성의 베란다에서 올려다보며 깊은 시름에 잠겨 있었다.
그런 왕국의 밤하늘은 검게 물든 것이 아니라, 옅은 보랏빛이 감돌아서 흑진주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것은 달과 마법의 여신 헤카티아나가 펼쳐놓은 결계 마법의 영향 때문이었다.
헤카티아나는 그날 있었던 유피테르의 경고 이후로 신전에서 결계에 대한 집중을 잃지 않기 위해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인간들을 지키기 위한 그녀의 과감한 결단에 백무열은 깊은 감동을 받은 참이었다.
"……."
이마의 주름을 한껏 만들어내던 백무열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려 아틀란 왕국의 야경을 바라보았다.
전과 비교하면 한없이 아름다워진 이곳은 백무열에게 새로 정착한 고향과도 같은 곳이었다.
아틀란 왕국은 지금 폭풍 전야와 같은 고요함을 띠고 있었다.
죽음을 앞둔 비장함 마저 감도는 왕국의 정경은 백무열에게 또 다른 감흥을 주기에 충분했다.
"…3일 남았나."
유피테르가 말한 일주일까지는 앞으로 3일이 남았다.
이미 유니온이 커뮤니티에 올린 사진과 자료에 의하면 마왕군이 출발한 자세한 경로와 군대의 규모까지 자세히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무려 백만에 가까운 대군이었고, 모두 마족이었으니, 아마 치열한 싸움이 될 것이라 예상되었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각국의 정부에서 아크스타그램을 통해 아틀란 왕국에 있다고 알려진 각 분야의 랭커들에게 이번 마왕군과의 결전에 참전해 살아온다면 막대한 부를 약속하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정부의 입장에서도 대규모의 무고한 인질들을 구할 방법이 그것뿐이었으니, 그들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백무열은 터무니없는 걱정이 먼저 앞섰다.
그들이 참전을 한다고는 했지만, 정말 목숨을 걸고 치열하게 싸워 줄 것인지는 막상 닥쳐봐야 알 일이었다.
어느 누구도 이런 곳에서 개죽음당하고 싶지는 않을 테 말이다.
아틀란에서 정말 진심으로 목숨을 걸고 싸울 수 있는 건 좋게 생각해야 NPC들이 다 일 것이다.
이미 레슬리를 포함한 저항군이 모두 결사 항전의 의지를 보여 왔고, 오르카 왕국의 기사 출신이었던 떠돌이 용병들이 아틀란의 힘이 되고 싶다고 찾아왔다.
놀라운 건 얼마 전 습격을 받았다고 알려진 건너편에 살던 오크 부족장 고르바가 친히 대륙을 돌아다니며, 흩어져 있던 오크들을 몽땅 모아왔다는 것이었다.
그런 고르바를 이끌고 함께 다녀온 건 박막순이었다.
그녀는 공간이동 마법과 각종 은신 마법을 고르바에게 걸고 함께 오크들을 찾아가 설득한 끝에 이곳으로 데려왔다.
그 수가 자그마치 3만에 이르렀으니, 박막순은 이번 결전에 앞서 지대한 공로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었다.
"잠이 오지 않는군."
백무열은 곧장 뒤뜰에 마련된 수련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곳엔 의외의 인물이 정권 찌르기 같은 것을 하고 있었다.
한번 내지를 때마다 뿜어지는 권풍이 예사롭지 않았다.
"고르바?"
"음? 아, 잭슨의 친구인가. 취익."
"뭐하는 중이지? 달밤의 체조라도 하는 건가?"
"체조? 그게 뭐냐."
"…아니다.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백무열은 피식 웃고는 고개를 저으며 고르바에게 걸어갔다.
그의 몸은 땀투성이였다.
"수련을 하고 있었나?"
"그렇다! 고르바는 반드시 그 루시퍼라는 놈에게 본때를 보여줄 것이다! 취이익!"
"열심히 하는 모습이 보기 좋군."
백무열이 흐뭇하게 웃었다.
고르바가 비록 마족만큼 강한지는 의문이었지만, 그것도 직접 부딪혀봐야 알 일이었다.
그래도 적어도 부족장이라는 자리에 오른 놈이니 쉽게 당하지는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이런 원군이라도 있는 게 어디인가.
"내가 좀 도와줘도 되겠나?"
"좋다! 취익. 덤벼라!"
정말이지 뜬금없는 이 성격은 도무지 적응이 안 된다.
그래도 뭐, 가끔은 이렇게 아무 생각이 없는 녀석과 노는 게 더 좋을 때도 있는 법이니까.
"허허. 조심해야 할 게야. 내 회초리는 조금 매섭거든."
"설마 나한테 질까 봐 무서운 건가? 췩."
"두고 보면 알 테지."
고오오오!
백무열의 등 뒤에서 형용할 수 없는 무형의 거력이 솟구치며 파문을 일으켰다.
쩌적. 쩌저적.
땅이 갈라지고, 끝없이 용솟음치는 무형의 기가 전신에서 퍼져 나오며 크게 번져갔다.
쿠와아아-!
결전의 날까지 3일을 남겨둔 시점이었다.
* * *
명계의 검은 사막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차가웠다.
어느새 내가 이곳에 와서 수련을 한 지도 4일이나 지났다.
그동안 나는 툰드라 드래곤과 창천의 용에게 눈, 비, 벼락을 다루는 법을 전수받으며 혹독한 시간을 보냈다.
그나마 눈의 비각술은 한 번 써본 것이었기에, 이틀 만에 금방 힘을 되찾았지만, 문제는 비와 벼락이었다.
그것은 내가 한 번도 다뤄 본 적이 없는 것들이었고, 아무리 기억을 가지고 있어도 몸이 따라주지 않으니 고생의 연속이었다.
5일째. 마침내 비와 비각술 '여우비'를 완전히 습득하는데 성공했다.
'여우비'라 명명된 이 비각술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공격이었는데, 이름 그대로 하늘에서 물로 이루어진 여우의 형상이 비처럼 떨어져 넓은 범위를 공격하는 스킬이었다.
이 비각술은 내게 한층 큰 도움이 되어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6일째. 벼락의 비각술 '벼락치기'를 습득하였다.
아직 미숙했지만, 이 비각술은 구름의 정령인 지니와 연계해서 써야 했기에 무지막지한 파괴력을 자랑하는 비각술이었다.
내 발이 닿는 곳마다 하늘에서 번쩍이는 벼락이 내리치는 이 비각술은 마치 내 발이 피뢰침이 된 것마냥 무시무시한 벼락을 하늘에서 무차별적으로 떨어트렸다.
그리고 내 움직임도 벼락을 닮아 있었으니, 무척이나 빠른 가속력을 가지게 되었다.
대망의 7일째. 나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팔짱을 낀 채 깊은 고심에 빠져 있었다.
"…결국 이 두 가지는 습득하지 못 하는 건가."
지금 내 앞에는 알렉서스가 준 별의 비각술과 달의 비각술의 족자가 놓여 있었다.
그곳엔 두 비각술을 운용하는 방법과 효능에 대해 자세히 적혀 있었는데, 문제는 이 두 비각술을 쓰기 위해선 조건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별의 정령을 여기서 구할 수 있을 리가 없고, 충만한 달의 정기를 흡수할 수도 없으니 난감한 노릇이구나."
알렉서스의 말에 따르면 별의 비각술을 쓰기 위해선 별의 정령 스텔라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문제는 그것이 이제는 별과 자비의 신인 루페온에게 있었는데, 현재는 루페온이 죽었으니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달의 비각술은 충만한 달의 정기를 몸에 쌓아야 쓸 수 있었다.
쌓기도 어렵거니와 보름달이 충만한 밤이 아니라면 쓸 수 없다는 단점도 존재했다.
그러나 알렉서스는 그 단점을 상쇄할 만큼 두 비각술의 강력함이 남다르다고 적어놓았으니, 충분히 기대해 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우선 혹시 모르는 일에 대비해 두 비각술을 운용하는 법에 대해 충분한 숙지를 하는 중이었다.
바로 그때.
[잠시 저 좀 볼래요?]
머릿속으로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곧장 자리를 털고 일어나 계단을 올라간 뒤 그녀가 기다리고 있을 거처로 향했다.
이틀 전 그녀와 알렉서스는 내 수련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이미 거처로 돌아가 있겠다고 말한 상황이었다.
[어서 와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음?"
순간 나는 흠칫하고 말았다.
그런 그녀의 옆엔 지난 시간 동안 내가 때려눕혔던 죽음의 군단장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서늘한 그들의 시선이 내 전신을 위 아래로 훑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