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357화
제357화
같은 시각.
가족들의 우려와는 달리 나는 무척이나 정정한 모습으로 바람을 자유자재로 부리며 눈앞의 발라크와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크흐흐. 화염으로 붙자니까 바람으로 덤비다니. 네놈의 기개가 제법 나쁘지 않구나!"
아니, 난 바람으로 붙겠다고 한 적 없는데.
난 그냥 네 녀석이 죽자고 달려드니까 반사적으로 공격한 것뿐이라고.
"그래. 어디 그 잘난 바람으로 내 불꽃들을 끌 수 있을지 두고 보자꾸나!"
다음 순간. 발라크의 반격이 무차별적으로 이어졌다.
발라크 또한 최근이지만 군단장으로 올라온 실력자.
그의 날카로운 발톱에 푸른 불꽃을 실어 찔러오는 공격은 정말이지 아찔하기 그지없었다.
"정말이지. 까다로운 녀석이로구나!"
나는 다시 한번 손을 뻗어 허공을 움켜쥐고는 바람의 벽을 붙잡고 뜯는 것처럼 비틀었다.
그러자 눈앞의 작은 공간의 균열이 일그러지는 듯하더니,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무언가가 쏘아져 나갔다.
그것은 언젠가 케레노스가 쓰던 폭풍창의 묘리 중 선풍의 열화판과 같은 것이었다.
나는 지금 창도 없이 그 폭풍창을 손으로만 부려낸 것이었다.
그런 나를 보며 흥미롭다는 듯 아이올로스가 눈썹을 살짝 뜨며 웃었다.
[호오.]
쒸아아악!
공기를 찢을 듯한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작은 회오리가 발라크의 전방을 쉼 없이 때리며 솟구쳤다.
아래에 있던 검은 사막의 모래가 빨려 올라가며 마치 검은 태풍이 휘몰아치는 광경이 이어졌다.
"으하하하! 좋아. 이 정도는 돼야 나도 할 맛이 나지!"
그러나 발라크는 호쾌하게 웃으며 갑자기 거대한 양손 도끼를 소환해내더니, 거센 노호성을 터트리며 있는 힘껏 아래로 내리찍었다.
쿠웅!
솟구치던 검은 회오리가 반으로 쩍 갈라졌고, 양쪽으로 갈라지며 폭발하더니 검은 먼지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흐하하. 더 공격해보라고!"
그 사이로 비치는 건 발라크의 잔혹한 웃음이었다.
순간 서늘한 기운과 함께 발라크가 눈을 빛내더니, 놀라운 속도로 돌격해왔다.
나 또한 거리를 벌리기 위해 바람의 길을 타고 빠르게 움직였다. 구름의 비각술을 이용해 허공을 날아다니며 요리조리 피해냈다.
쾅! 쾅! 콰쾅!
그렇게 발라크와 나의 술래잡기가 계속해서 이어지는 그때.
아이올로스가 혀를 쯧쯧 차며 내게 다가왔다.
그는 팔짱을 낀 채 거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어느 세월에 저 녀석을 이기려고 그러나.]
"젠장. 뭐 어쩌란 게야!"
발라크의 푸른 화염이 머리 위를 덮쳐왔고, 나는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
순식간에 내가 있던 자리엔 검은 모래가 푸른 용암이 되어 녹아내리고 있었다.
[…하아, 무슨 사정인진 모르겠지만, 내 딸이 500년 산 아이올리아를 먹는 바람에 그대가 지금 이렇게 약해진 탓도 있겠지. 그 아이의 친 아비로서 그래도 내가 약간의 도움을 좀 주는 것이 인지상정.]
아이올로스가 따라붙으며 하는 말에 나는 재빨리 소리쳤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지만, 도움을 줄 거면 빨리 좀 달라고!"
[간단한 조언이다. 그대는 심장에 자리한 바람의 마력을 이용해서만 공격하더군. 그렇게 하면 모을 수 있는 바람에는 당연히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쩌라고!"
[그대는 바람이 어디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나?]
"……?"
갑자기 이게 뭔 뜬구름 잡는 소리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군. 말 그대로네. 그대가 생각하는 바람이란 어디에 있는 것이지? 그리고 바람의 정의는 무엇인가.]
그런 그의 말을 나는 진지하게 곱씹어 보았다.
"…바람이 어딨는가. 바람이란 무엇인가."
나는 다시금 푸른 실로 변해 발라크와의 거리를 벌렸다.
아이올로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바람이라는 게 있고 불어대는 것인가, 불어대는 것이 있고 그 뒤에 우리가 그것을 바람이라 한 것인가. 그대는 어느 쪽이 더 바람에 가깝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다시금 발라크의 공세에서 간신히 벗어나며 곰곰이 생각한 뒤 대답했다.
"후자다!"
[어째서지?]
"불어대는 것을 우리가 바람이라 부르기 때문이다! 애초에 바람이란 정의가 존재하고 불어대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옳다. 그럼 그대가 품고 있는 바람의 마력은 불어대는가? 아니면 불어대지 않는가?]
"…불어대지 않는군. 아!"
그제야 나는 한줄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은 무척이나 심오한 깨달음이었다.
[당신은 진정한 바람의 정수를 엿보았습니다.]
[이제부터 바람을 더욱 민감하게 느낄 수 있게 됩니다.]
[당신은 생각하는 대로 바람을 일으키는 경지에 올랐습니다.]
나는 도망치다 말고 천천히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며 바람의 잔재들을 느꼈다.
그리고 심장에 고여 있던 바람의 마력을 아예 몸 밖으로 흩어내 버리고 천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
이제 내 몸에 남은 바람의 마력은 단 하나도 없었다.
"크하하! 아예 포기한 것이 더냐! 오냐. 내가 너의 영혼을 산산조각 내어주겠다!"
발라크의 도끼가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고, 그 간격이 찰나와 같아지는 바로 그 순간.
쿠화아아-!
"이, 이건…!"
발라크가 예상외로 당황하는 기색을 드러내더니, 그가 내려치려던 도끼가 솟구치는 바람에 튕겨져 나가 놓쳐버리고 말았다.
그 힘이 얼마나 강력하던지 발라크가 도끼를 쥐고 있던 손목이 얼얼하게 아려오는 듯했다.
그의 도끼가 저 멀리 떨어져 내리며 쿵! 하는 소리를 냈다.
"…바람의 비각술."
나는 천천히 발을 놀렸다.
현묘한 발길질과 보법에 맞춰 바람의 춤을 추던 내가 멈춰 섰을 때,
공간을 왜곡시키는 송곳 바람 수십 개가 나선형으로 모여들며, 눈앞의 발라크를 향해 귀기 어린 소리를 내며 울부짖었다.
"칼바람, 개(開)."
쒸아아악!
곧장 수십 개의 송곳 태풍이 날아올랐다.
귀를 찢는 파공성이 수차례 이어지며, 모든 것을 찢어발길 듯한 질풍노도가 발라크를 향해 쏘아져 나가 하나로 모여들었다.
그런 바람의 옆엔 내가 함께 날아오르고 있었다.
* * *
"허어, 내가 말년에 완성하지 못한 바람의 비각술을 저자가 완성을 시키는군요."
알렉서스가 팔짱을 낀 채 감탄어린 기색으로 최춘택을 지켜보았다.
유선영은 빙긋 미소를 지으며 그저 묵묵히 최춘택의 뒷모습을 볼 뿐이었다.
그런 두 사람 앞에 작은 바람이 휘돌며, 아이올로스가 나타났다.
지금 그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이었다.
[나중에 딸을 만나면 알려줄 바람의 구결을 저자에게 잠깐 알려주었을 뿐인데 설마 저렇게 바로 깨달음을 얻어버릴 줄은 몰랐다.]
아이올로스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헛웃음을 지으며 최춘택을 보았다.
마침 최춘택은 발라크를 향해 달려들더니, 무차별적인 공세를 퍼부으며 밀어붙이는 중이었다.
그 기세가 인간치고는 놀라울 정도라 세 사람은 살짝 눈을 빛냈다.
상대가 무려 죽음의 2군단장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대단한 일이었다.
그것도 그가 태어나고 자란 명계에서 더욱 강력해지는 특성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 지금의 상황은 그야말로 놀랄 '노'자였다.
[춘택 씨는 언제나 바람 같은 사람이었죠. 지금 모습을 보니 젊은 시절의 저이가 생각나네요. 그땐 참 늠름하고 멋졌었는데….]
유선영이 갑자기 얼굴을 발그레하게 물들이면서 호호하고 웃었다.
알렉서스와 아이올로스가 동시에 유선영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서로 눈을 마주치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나저나 바람의 비각술은 이 정도면 된 것 같습니다. 구름의 비각술은 공격과 관련된 비각술이 아니라서 그리 큰 어려움도 없을 거구요. 문제는 남아있는 눈, 비, 벼락, 별, 달인데…. 그가 최근 잃었던 힘이 눈이라고 했으니 바로 눈의 비각술에 대한 수련을 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모르겠군요. 이건 따로 어떻게 전문가가 없지 않는 이상은…."
바로 그때. 아이올로스가 대뜸 그의 말을 끊었다.
[전문가? 별과 달은 몰라도 눈, 비, 벼락의 전문가라면 이곳에도 있잖아?]
"있다고? 아니, 그런 사람이 명계에 있었단 말이야?"
[아, 넌 몇 달간 계속 시간의 바다에 나가 있어서 몰랐겠구나. 기다려봐. 내가 데려올게.]
아이올로스가 손을 휘적거리더니, 바람처럼 사라졌다.
알렉서스와 유선영은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어깨를 으쓱이며 다시 최춘택과 발라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싸움은 마침내 절정에 이르러 결착을 맺고 있었다.
* * *
한편, 나는 발라크와 기나긴 싸움 끝에 드디어 그를 쓰러트릴 수 있었다.
발라크의 얼굴은 의외로 후회가 없다는 황홀한 기색이 엿보였는데, 이놈도 은근히 싸움을 즐기는 부류의 성격이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었다.
"흐흐, 좋은 승부였다. 나, 2군단장 발라크가 널 인정하겠다…."
쓰러진 발라크가 마침내 검은 연기로 화해 사라졌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충만한 바람을 향기로운 냄새를 맡는 것처럼 느꼈다.
그것은 제법 황홀한 감각이었다.
[당신은 명계를 이끄는 죽음의 2군단장 '발라크'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여신 퀘스트 – 죽음의 군단장의 인정(2)가 완료되었습니다.]
[바로 이어지는 연계 퀘스트를 준비하십시오.]
빌어먹을.
도대체 얼마나 연계되는 퀘스트야?
아니, 그것보다는 대체 언제까지 날 이렇게 혹사시킬 생각인 거지.
"……."
슬슬 불안감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여보?"
[네~ 듣고 있어요~]
"연계 퀘스트는 몇 개까지 있는 거야?"
[죽음의 군단장은 총 4명까지 있어요. 당신이 2명을 쓰러트렸으니, 앞으로 두 번의 연계 퀘스트가 남은 셈이네요.]
"…그, 그래?"
아직도 죽을 뻔한 위기를 두 번이나 더 넘겨야 한다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알렉서스가 다음은 눈의 비각술에 관련된 수련을 할 거라고 했어요. 아이올로스가 당신을 가르칠 선생님을 데려오겠다며 사라졌는데, 조금만 기다리면 도착할 거예요.]
"……."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들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얼마지 않아 그 전문가란 이들이 저 멀리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아이올로스와 함께 있었는데, 내 옆에 고고히 떠올라 있는 솔라 피닉스를 보고는 의외라는 듯 눈을 반짝였다.
[이그누르…?]
[살아 있었나 보군.]
[쟨 이그누르가 아니야. 잘 좀 봐.]
아이올로스의 핀잔과 함께 나타난 다른 두 사람이 호기심 어린 눈동자로 나를 위 아래로 훑었다.
[호오, 정말 그렇군.]
[하지만 이그누르의 기운이 희미하게나마 느껴져. 그가 새로운 존재로 탈바꿈 한 것인가? 흥미롭구만.]
아이올로스의 옆에 있는 이들의 정체는 바로 인간으로 변신한 툰드라 드래곤과 창천의 용이었다.
툰드라 드래곤은 푸른 장발의 잘생긴 청년의 모습이었고, 창천의 용은 온통 하얀 백발과 수염을 기른 것이 신선과도 비슷한 모양새였다.
창천의 용이 죽었다는 사실은 이미 들었기에 놀랍지는 않았다.
금제가 깨졌으니, 자연히 나도 추측할 수 있는 내용이었으니까.
그런데 설마 아이올로스가 저 두 사람을 선생님이랍시고 데려올 줄은 몰랐다.
[자, 바로 수업을 시작하겠다. 일단 얼어 죽고 시작하지.]
[난 비와 벼락을 가르쳐 주러 왔다네. 우선 비에 홀딱 젖은 다음 벼락부터 맞아보겠나? 어깨가 결릴 땐 그게 아주 딱인데 말이지. 홀홀홀!]
제길.
이게 어딜 봐서 선생님이란 거야.
협박하는 거만 보면 거의 장수한 마피아 조직의 늙은 보스들이 하는 말 같은데.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