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355화
제355화
"에이, 망할 뼈다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찰진 욕이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지금 내 앞에는 웬 걸레짝 같은 검은 후드를 뒤집어 쓴 해골 뼈다귀가 통탄한 표정으로 쓰러져 있었다.
주변은 온통 검은 얼음송곳들과 한기가 가득했다.
리퍼라는 이름을 가진 이 몬스터는 무척이나 강했는데, 나는 지금 강제적으로 수련을 시작했기 때문에 해오름을 이용한 컨트롤로 때려잡은 것이라 봐도 무방했다.
어쨌든 태양의 힘마저 빼앗겼다면 아마 난 여기서 죽은 목숨이었을 거다.
리퍼가 가진 특유의 은신 스킬은 무척이나 까다롭기 그지없었으니까.
[명계의 죽음의 군단을 이끄는 1군단장 '리퍼'가 당신을 인정합니다.]
"웃기고 있네. 인정은 개뿔. 인정사정도 없이 덤볐던 놈들이. 허허…. 잠깐만 근데 이 녀석이 죽음의 군단을 이끄는 군단장이라고?"
순간 화들짝 놀란 나는 리퍼를 다시 살폈다.
리퍼는 "생각보다 강하군. 좀 더 지켜보겠다. 인간…."이라는 어이없는 답변을 내놓으며 사라졌다.
나는 천천히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검은 모래 먼지들이 사방을 휘날리며 나부끼고 있었다.
아까 전 있었던 치열한 싸움은 생각할 수도 없을 정도로 고요했다.
알렉서스가 해오름만 써서 싸우라고 했기에 그렇게 하긴 했는데, 이걸로 정말 수련이 되긴 하는 걸까 하는 의문이 살짝 들었다.
그때. 뒤편에서 누군가 걸어왔다.
[어떻게, 좀 할 만한가?]
"……?"
나는 순간 놀라서 헛바람을 들이키고 말았다.
"아이올로스…?"
[알아보는 모양이군. 내 딸은 잘 지내고 있나?]
설마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볼을 꼬집어 보니 아픈 걸 보면 꿈은 아니었다.
하긴 알렉서스를 봤는데 아이올로스라고 못 만날까.
그러고 보니 이곳이 죽은 자들이 모여드는 명계라는 사실을 다시금 떠올리자 이제야 조금 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아마 눈앞의 아이올로스는 진짜일 게 틀림없었다.
"아주 잘 지냅니다."
[하하. 말 편하게 하라고. 그래도 내 딸을 대신해서 길러주고 있는 사람인데 말이야. 그리고 플루토 님하고 가까웠다면서? 말 편하게 해. 편하게.]
허례허식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은 그의 소탈한 모습에 나도 모르게 빙그레 미소 지었다.
나는 곧장 그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다.
"그나저나 갑자기 여긴 어떻게?"
[뭐긴 뭐겠어. 수련 때문에 왔지.]
"예?"
[여신 퀘스트 – 죽음의 군단의 인정(2) 가 시작됩니다.]
아이올로스가 히죽 웃으며 물었다.
[어떻게, 바람은 좀 다룰 줄 아나?]
* * *
바람의 탑, 개람의 동굴.
케레노스와 풍희는 좀 더 높은 경지의 바람을 다루기 위해 수련에 들어선지 오래였다.
이곳의 시간은 바깥과 달리 무척이나 느리게 흘렀기에, 두 사람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서로의 부족한 점을 보완해 가며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
그리하여 결국 풍희는 마침내 대부분의 개람의 병사들을 이길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고, 이제 4대 장군들과의 싸움만을 남겨 놓고 있었다.
그리고 케레노스는 이미 그들과 비견될만한 강함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저 한 꺼풀의 깨달음만을 남겨 놓은 상황이었다.
그 하나만 충족한다면 케레노스는 충분히 5대 장군의 반열에 오를 수 있을 강함을 손에 넣을 수 있을 터였다.
현재 두 사람은 함께 가부좌를 틀고 명상에 빠져 있었다.
"으음, 준비는 잘 되어 가시는가!"
갑작스레 다가온 목소리에 두 사람의 눈이 번쩍 떠졌다.
풍희는 재빨리 눈앞의 남자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호쾌하게 퍼져있는 하얀 수염이 눈앞에 있는 남자의 성격을 짐작케 했다.
그는 바로 개람의 4대 장군. 북풍의 보레아스였다.
"안녕하세요. 보레아스 님! 내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허허. 부탁은 무슨. 이게 다 그대가 노력해서 얻어낸 결과인 것을! 아무튼 나도 잘 부탁하네! 그리고 꼭 우리들을 모두 넘어설 수 있기를 바라지. 으하하! 아주 기대가 크다고!"
"최선을 다할게요."
"암, 그래야지! 껄껄!"
풍희와 보레아스가 그렇게 몇 마디 안부를 주고받다 헤어졌다.
풍희는 다시 가부좌를 틀고 앉았고, 케레노스는 그런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척도 않으며 명상에만 집중했다.
내일이면 그녀는 개람의 4대 장군 중 하나인 북풍의 보레아스와 대련을 벌이게 된다.
지더라도 얼마든지 다시 재도전은 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처음으로 4대 장군의 강함을 피부로 느끼며 맞붙는 것이었기에, 그녀의 입장에서도 충분히 긴장될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티를 내지 않으려 밝은 척 애쓰는 것을 보며, 케레노스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마치 어린 시절의 자신을 떠올리게 하는 행동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안 떨려?"
"떨려요. 왜 안 떨리겠어요. 그래도 이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니까요."
풍희의 말에 케레노스가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떠 그녀를 바라보았다.
풍희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집중을 하고 있었다.
케레노스는 찬찬히 그녀의 모습을 살폈다.
'많이 컸군.'
처음 풍희를 이곳에서 보았을 때의 앳됨은 이제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녀는 누가 보더라도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정신적으로도 많이 성숙해져 있었다.
"영감님의 기운이 여전히 안 느껴져?"
얼마 전 풍희는 영감님과 연결된 의식이 점차 얇아지는 것을 느꼈다.
다행히 완전히 끊긴 것은 아니었고, 어딘가에 살아있는 것은 알았지만, 도대체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렇다고 당장 여길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 우선은 여기 남아서 수련을 이어가기로 한 것이었다.
"네. 사라진 건 아니지만 무척 기운이 옅게 느껴져요. 아마 또 어딘가 위험한 곳에 가셨겠죠. 꽤 자주 있는 일이니까. 별일은 없을 거예요."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하지만 두 사람은 NPC였기에, 지금 바깥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하게 돌아가는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유저들이 로그아웃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그들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우선 저희는 강해지는 것에만 집중해요. 그래야 나중에 도움이 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래. 네 말이 맞다."
풍희와 케레노스는 다시금 수련에 빠져들었다.
그런 두 사람을 잔잔한 산들바람이 포근하게 감쌌다.
* * *
마법 도시 오즈.
그 무렵 춘자는 마탑의 꼭대기에 자리한 도서관에서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크레센트는 춘자에게 더는 가르칠 기본은 없으니, 이젠 스스로 응용하는 일만 남았다는 조언을 해주었다.
춘자는 그 길로 오즈에 있는 마탑의 최상층으로 향했고, 그곳의 도서관에서 각종 마법에 대한 서적들을 뒤져가며 마법의 경지를 높이기 위한 수련을 이어가던 중이었다.
얼마 전, 헤카티아나가 엄청난 마력을 소모해 공간이동 대마법으로 대륙의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을 불러들이는 것을 느낀 춘자는, 놀랍게도 공간이동 술식을 그대로 역산해 파훼해 버렸고, 그렇기에 지금 그녀는 이곳에 남을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무척이나 단순했다.
그냥 가기 싫었을 뿐.
이곳은 춘자에겐 보물창고나 마찬가지였고, 갑자기 누군가 불러서 사라져버릴 생각을 하니 무척이나 짜증이 났었다.
아직 어렸던 그녀는 감히 신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 어느 정도의 죄를 짓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현재 크레센트는 아틀란 왕국에서 헤카티아나를 도와 할 일이 무척 많아서인지, 춘자는 깜빡 잊어버린 채 생각도 못 하고 있는 중이었다.
"와, 이건 고대 마법에 대한 서책이네?"
그리고 바로 지금.
검은 머리의 춘자는 특유의 초승달 눈동자를 빛내며 독서 삼매경에 빠져들고 있었다.
이미 그녀의 경지는 대마법사를 뛰어넘어 있었기에, 순식간에 읽고 응용을 하는 것쯤은 물을 마시는 것보다 간단했다.
오르카 왕국과 파르타 공국이 멸망하며, 두 곳에 있던 고대 마법서들이 몽땅 이곳에 몰려든 탓에, 이곳은 아까 말했듯이 그녀에게 보물창고나 다름없었다.
"저쪽도 한 번 가볼까."
춘자가 가장 안쪽에 자리한 무척이나 오래되고 음울한 벽장 앞으로 날아갔다.
대마법사의 경지에 오른 그녀에게 부유 마법쯤은 걷는 것보다 쉬웠다.
"우와."
그런데 그곳엔 무척이나 강력한 고위급 결계 마법이 걸려 있었는데, 당연하게도 춘자는 이것을 풀 수가 있었다.
춘자가 곧장 결계를 역산하기 시작했다.
파칭!
하지만 놀랍게도 튕겨 나간 것은 춘자였다.
"어라, 꽤 강한 마법이네? 누가 건 마법이지?"
그녀는 몰랐겠지만, 그 책장은 크레센트가 일부러 강력한 결계를 걸어 봉인한 금서들이 놓여있는 곳이었다.
크레센트는 이 봉인된 금서들을 인간 마법사들이 배우길 원치 않았고, 크레센트 스스로에게도 금제를 걸어, 이 마법으로 인간계에 피해를 줄 수 없도록 하였다.
금서들이 너무나 파괴적이었던 탓이다.
"뭐야, 오기 생기게."
문제는 이 강력한 결계가 초승달 눈동자를 가진 이들만 풀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헤카티아나 조차도 이 책장을 열 수가 없었지만, 춘자는 초승달 눈동자를 가진 레추자라는 점이 더욱 큰 문제였다.
"흥! 어디 누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춘자는 곧장 그 자리에 주저앉더니, 무언 마법이 아닌 결계를 파훼하는 마법진을 빠른 속도로 허공에 그려내었다.
그리고는 간단히 손가락으로 인을 맺어서는 집중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주변으로 고고한 달의 마력이 결계 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놀랍게도 잠시 뒤 결계가 역산되어 파훼되더니 무척이나 손쉽게 결계 마법을 풀어버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찰랑!
벽장을 둘러싼 쇠사슬이 허망하게 끊어지며 떨어졌다.
"헤헷, 이 정도쯤은 간단하지. 역시 이곳에 남길 잘했다니까."
춘자는 싱글벙글 웃으며 그 중 마음에 드는 책 하나를 골라서 읽기 시작했다.
"금지된 마법? 헷, 재밌어 보이는데? 뭔지 제대로 살펴볼까나."
지금 춘자는 오즈의 고위급 대장로들이 들으면 뒷목을 잡고 쓰러질 만한 무시무시한 마법 서책들을 콧노래를 부르며 읽는 중이었다.
"오, 흥미로운 걸~? 우주랑 관련된 마법인가보다! 신기하네. 이건 크레센트 아빠한테서도 못 들은 건데. 나중에 써먹으면 신나겠다!"
더 큰 문제는 크레센트가 이 서책들을 봉인할 당시, 아무런 경고문조차도 써놓지 않았다는 데에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