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빼고 다 젊은이-354화 (354/375)

나 빼고 다 젊은이 354화

제354화

같은 시각.

나는 아까 로브를 벗어 얼굴을 드러낸 남자의 뒤를 졸졸 따라가 다시 올라왔던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런 내 옆엔 아내 유선영이 싱긋 웃으며 함께 따라오고 있었는데, 그녀는 오랜만의 재회에 무척이나 살갑게 굴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당연히 내가 거슬러 건너왔던 검은 사막.

눈앞의 남자는 여전히 태연한 얼굴로 뒤돌더니 나와 문득 눈을 마주치며 씩 웃었다.

"음…."

그리고 그만 나도 모르게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짙은 검은 머리와 높게 솟은 눈썹.

부리부리한 눈매와 오뚝한 콧날과 큰 눈동자.

눈앞의 남자는 영락없는 내 젊은 시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라그나로크 전쟁에서 죽었다고 알려진 아틀란의 왕이자, 날씨 요리사인 알렉서스를 설마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것이라곤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많이 놀란 모양이군. 하긴 나도 놀라운 건 마찬가지네. 그대가 늙은 모습을 하고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거든. 아마 내가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면 그대와 같은 모습이었겠지? 하하하!"

"……."

알렉서스가 호탕하게 웃었지만,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 했다.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내가 이런 식으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될 것이라고는 감히 어느 누구라도 생각하지 못했을 거다.

"너무 그렇게 쳐다보지 말라고. 기분이 이상한 건 나도 마찬가지니까 말이야."

그 얘기를 듣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크흠! 미안하네. 나도 이런 식으로 그대를 보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으니 이해해주게."

"뭐 그 정도쯤이야."

솔직히 말하면 조금 놀란 게 아니라 많이 놀랐다.

너무 놀라서 지금 존대를 해야 하는 건지 반말을 해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일단은 처음 보는 거니까 존대를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유선영은 그런 나와 알렉서스의 만남이 재미있는지 뒤에서 조용히 쿡쿡 웃었다.

"뭐가 그렇게 좋아?"

[아니, 그냥 이 상황이 너무 웃겨서요.]

"끙."

나는 연거푸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때. 알렉서스가 입을 열었다.

"플루토 님 이제 그들을 깨워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세요. 어차피 그들에게도 미리 귀띔을 해주었어요.]

"예, 그럼."

발걸음을 옮긴 알렉서스는 입구 부근에 있던 석상을 천천히 만지작거렸다.

그러고 보니, 분명 내게는 아무것도 만지지 말라고 했으면서 자기는 왜 만지는 거지?

"……!"

바로 그때. 검은 사막에서 엄청난 귀기의 돌풍이 몰아치더니, 차가운 한기가 어스름하게 사막 전체에 깔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검은 고드름이 생겨나며 일어난 지형의 변화에 나는 눈을 깜빡거리기 바빴다.

그때 갑자기 "그워어어어-!"하는 처절한 절규가 땅속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고개를 돌렸고, 내심 속으로 기함하고 말았다.

"저건…."

아까 내가 건너왔던 검은 사막 아래에서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귀신들이 일어서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한기가 제법 만만치 않았다.

내가 저런 곳을 넘어왔다니, 온몸에 소름이 다 끼칠 지경이었다.

[사실 이곳은 명계에서도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는 금역으로 지정된 곳이에요. 커다란 죄를 지은 죄인들의 영혼을 이 검은 사막 안에 가두어 두었거든요. 일종의 감옥 같은 거라고 보면 될 거예요.]

"…그걸 왜 이런 곳에 놔둔 거야. 당신한테 위험한 거 아니야?"

[괜찮아요. 죄인들을 관리하기 위해 간수장들을 보낸 지 오래거든요.]

"간수장…?"

[어쨌든 수련하기엔 안성맞춤일 거예요. 그리고 참고로 말하는데 저들은 지금 생전의 강함을 거의 그대로 가지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거예요. 아마 좋은 상대가 되지 않을까 싶네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그런 내 말과 동시에 개미 떼처럼 몰려오는 귀신들의 손에 생전에 썼던 것인지 흉흉한 갖가지 무기들이 여러 개 들려진 것이 보였다.

모두 평범치 않은 무기들이었기에, 순간이지만 엄청난 살기가 전방에서 포효하듯 뿜어져 나왔다.

알렉서스는 그런 내 옆에 나란히 서더니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첫 번째 수업은 해오름으로 저들을 모두 처리하는 거라네."

무시무시한 시체 떼들이 지축을 뒤흔들며 괴성과 함께 달려들었다.

그제야 나는 새삼 지옥에 왔음을 실감하기 시작했다.

"…시부럴."

* * *

마왕의 성, 아슈타르와 루시퍼의 거처.

창문에 걸터앉은 아슈타르는 붉게 물든 달을 보며 한가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루시퍼가 떠돌아다니며 이런저런 일을 벌이는 동안 계속해서 이곳을 지키고 있었고, 가끔 누군가 쳐들어 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부리나케 달려나가 싸움을 벌였다.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혹시나 모를 습격에 대비해 마왕의 성을 지키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아슈타르에게 고문과도 같은 것이었다.

탐욕의 투신이라 불리는 그는 언제나 싸움을 탐해왔고, 그것은 언제나 삶을 한층 더 즐겁게 만들고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피가 있는 곳은 언제나 즐거웠고, 살아있다는 감정이 벅차올랐다.

그럴수록 그는 더욱 싸움을 갈망했다.

[이거야 원, 언제까지 이러고 죽치고 있어야 하는 거야.]

[조금만 참으면 연락이 올 거다. 아까 전 지진을 느끼지 못했나? 그건 평범한 징조가 아니었다. 루시퍼의 말대로 가이아 님이 깨어나실 것이란 뜻이지.]

[아니, 그건 아는데 도대체 언제 오냐고! 루시퍼 그 자식은 맨날 혼자만 재밌는 거 하러 돌아다니잖아! 안 그래?]

아슈타르의 상반된 두 얼굴이 대화를 주고받는 그때였다.

[혼자만 해서 미안하군. 그래.]

슈우욱!

갑자기 나타난 루시퍼 때문에 화들짝 놀란 아슈타르가 하마터면 창문에 걸터앉았다가 바깥으로 떨어지는 수모를 겪을 뻔했다.

물론, 떨어진다고 생채기 하나 나진 않을 테지만, 그래도 다른 마족들이 보기에 웃음거리가 될 건 뻔했다.

그래도 만약 웃는 놈이 있었다면 당장에 목을 쳐서 기강을 바로 잡았을 테지만, 뭐 어쨌든.

[크흠. 루시퍼, 드디어 왔군.]

루시퍼가 아슈타르의 두 얼굴을 무심하게 쳐다보다가 그냥 모른 척 넘어가기로 하고, 뒷짐을 지며 성 내에 자리해 있던 옥좌로 천천히 앉았다.

그의 음성은 낮고 묵직했다.

[마계의 투신이라 불리는 네가 무척이나 심심했을 텐데 미안하게 됐다. 그래서 좋은 소식을 들고 왔지.]

좋은 소식이라는 말에 아슈타르의 두 얼굴의 얼굴에 희색이 떠올랐다.

[좋은 소식?]

[그게 뭐지?]

옥좌에 앉은 루시퍼가 어둠 속에서 눈을 반달로 그리며 웃었다.

형형하게 빛나는 그의 눈빛은 마침내 때가 되었다 말하고 있었다.

아슈타르는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고, 루시퍼 또한 그런 아슈타르를 이곳에 가두어둘 필요성이 없다고 느끼고 있었다.

[네가 그토록 좋아하는 싸움이다. 앞으로 일주일 뒤, 우리는 마족들을 이끌고 대대적인 정복 전쟁을 시작한다. 반항하는 자는 모두 죽여도 좋다는 그분의 지시다.]

아슈타르의 두 얼굴이 기괴한 표정을 지으며 웃기 시작했다.

* * *

한편, 알렉서스와 유선영은 건너편의 시체들과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 최춘택을 멀찍이 떨어진 채 무심한 듯 바라보고 있었다.

최춘택이 일으킨 해오름이 검은 한기를 날려버리며 땅을 딛고 선 죽은 자들을 모조리 쓸어버렸다.

"솔라가 저렇게 진화했을 줄은…."

알렉서스가 눈을 좁히며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최춘택의 옆을 날아다니는 솔라 피닉스를 보았다.

이미 최춘택의 해오름은 생전의 알렉서스를 월등하게 뛰어넘어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부족한 점을 가르치려고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져 버렸다.

이미 최춘택은 태양을 두 발에 감고 있었고, 그의 두 발에 솔라 피닉스와 같은 멸마의 힘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무척이나 파괴적인 위력을 선보이며 위용을 뽐냈다.

콰콰쾅!

그가 발차기를 한 번 할 때마다 수백의 시체들이 다시 검은 땅으로 돌아갔다.

아마 오래지 않아 저 많은 수의 대군을 모두 물리칠 것이 틀림없었다.

알렉서스는 곧장 바로 옆에 있는 유선영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의 눈빛은 지금 한없이 진지해져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알렉서스가 물었다.

"정말 그가 죽음의 군단을 이끌 자격이 있을 거라 보시는 겁니까?"

[저 이는 한 번도 날 실망시킨 적이 없었어요. 아마 이번에도 그럴 테죠.]

"……."

무척이나 굳은 의지와 신뢰가 담긴 말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남자이길래 그녀가 이렇게 단단히 믿고 있는 것일까.

알렉서스는 그런 최춘택이 조금은 부러우면서도 질투가 났다.

그때.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파공성이 크게 들려왔다.

아까보다 훨씬 큰 폭발이었다.

"아, 벌써 1군단장 리퍼와 싸우고 있군요. 저 녀석 꽤 까다롭긴 하지만, 뭐 지금의 그라면 그리 어렵지 않게 제압할 겁니다. 흐흐, 저 죄수들이 사실 죽음의 군단이라는 걸 알면 무슨 표정을 지을까요."

알렉서스의 말에 유선영이 빙긋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알렉서스가 다시 그녀를 힐끔 보며 물었다.

"근데 왜 그에게 사실을 말하지 않은 겁니까? 지금 이게 평범한 수련은 아니지 않습니까. 당신의 권능을 양도하기 위한 절차라는 사실을 알면 꽤 놀랄 텐데요. 그냥 당신이 함께 인간계로 가 그를 막아도 될 일 아닙니까?"

그런 알렉서스의 물음에 유선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인간계로 올라갈 수 없어요. 내가 다시 그곳으로 올라간다면 판도라가 나와 공명하며 폭주하게 될 테니깐요. 난 다시 한번 라그나로크 때의 일을 반복하고 싶지 않아요.]

유선영의 얼굴이 굳으며 그때의 일을 회상하는지 미간이 찌푸려졌다.

사실 그녀는 지난 라그나로크에서 판도라의 힘을 너무 과하게 끌어다 쓴 탓에 세상을 혼란에 빠트렸던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물론 이건명을 막았으니 그것으로 위안을 삼았지만, 그때 당시에 그녀는 이곳이 게임 속이라는 걸 알았기에, NPC들의 목숨을 거두는 것에 큰 죄책감 같은 것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젠 유저들도 함께 있었고, 그 유저들 사이엔 그녀의 가족들도 있었다.

지금 그녀가 올라갔다간 그야말로 파멸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 뻔했다.

"그렇군요. 그럼 이해 못 할 것도 아닙니다. 판도라와의 공명이라…."

알렉서스는 그런 그녀의 뜻을 깨닫고는 그제야 의문을 풀 수 있었다.

마침 최춘택과 리퍼의 싸움도 절정에 이르고 있었다.

쿠콰콰쾅!

또 한 번 폭음과 함께 눈부신 빛이 번쩍였다.

알렉서스는 만족스러운 기색으로 턱을 매만졌다.

그리고 바로 그때.

[꽤 재밌어 보이는군. 알렉서스.]

"오, 왔어? 일찍 왔네? 이제 몸은 좀 괜찮은가?"

그는 바로 가까스로 성유계에서 탈출해 살아남은 아이올로스였다.

아이올로스는 인간계로 성좌들을 보낸 직후.

레무스와 함께 마족들에게 쫓기던 중 우연히 명계로 향하는 포탈을 발견하였다.

둘은 어쩔 수 없이 그곳으로 몸을 내던졌고, 우려와는 달리 그곳에서 알렉서스와 유선영을 만나 치료를 받으며 꽤 괜찮은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물론, 조금 칙칙한 게 흠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쁘진 않았다.

아이올로스가 빙긋 웃었다.

[덕분에 혼이 사라지는 건 면했다. 플로라의 치료도 잘 된 거 같고, 이제 좀 움직일 만해. 하지만 레무스가 좀 문제야.]

"흠, 그래도 자네라도 괜찮아져서 다행이군. 어쨌든 잘 왔어. 아, 온 김에 사람 하나 가르쳐볼 생각 없나?"

[갑자기?]

알렉서스가 턱짓으로 건너편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최춘택을 가리켰다.

아이올로스의 시선이 곧장 그곳에 있는 최춘택에게 닿았다.

[호오.]

아이올로스의 얼굴에 희미한 호기심이 떠올랐다.

(다음 편에서 계속)

0